거꾸로 읽는 세계사 - 전면개정
유시민 지음 / 돌베개 / 202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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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적 거리 두기를 재치 있게 표현한 영상을 본 적 있는가. 촘촘히 줄지어 있는 성냥개비들을 따라 불이 번지는 중. 줄에서 빠져나와 거리를 둔 성냥개비 하나 출현. 덕분에 불길이 멈춘다. 코로나 시작 무렵인 20203, 스페인 출신 비주얼 아티스트 후안 델컨이 인스타그램에 올린 안전성냥이라는 작품이다. 음성도 자막도 없이 한 사람이 미치는 영향의 중요성을 12초 만에 전달한다. 삶의 다른 분야에 확대 적용해도 억지스럽지 않다. 볼 때마다 여전히 감탄스러운 아이디어이다.

봄을 바라보는 달이어도 2월은 여전히 겨울에 머문다. 전국 각지에서 산불 관련 뉴스가 빈번하다. 원인은 제각각일지라도 거대한 불길은 하나같이 사소한 불씨에서 시작된다. 발화는 점에서 출발하지만 움직이는 순간 자취를 남긴다. 점으로 끝나지 않는다.

멀리서 보면 점으로 인식되는 개개의 사건들도 마찬가지인 듯하다. 번지는 불길인 듯 흐름을 만든다. 큰 사건은 작은 사건들이 사슬처럼 연결된 결과물이다. 역사에 담긴 제목의 외피를 벗겨내면 툭 터진 베개 속 좁쌀인양 사건들이 쏟아진다. 묵직한 뭉텅이도 거슬러 올라가면 무심코 넘어가기 쉬운 하나의 파편에서 시작되었으리라. 문제는 지나고 나서야 변화의 시작점을 그나마 가늠할 수 있다는 점이다. 사소함에는 결코 사소하지 않은 무게감이 있다.

 

거꾸로 읽는 세계사20세기 세계사에서 발생한 열한 가지 큰 사건을 다룬 보고서이다. 드레퓌스 사건, 사라예보 사건, 러시아 혁명, 대공황, 대장정, 히틀러, 팔레스타인, 베트남, 맬컴 엑스, 핵무기, 독일 통일과 소련 해체 등 역사적 사실과 그보다 작은 사건들을 연결 짓는 정보로 구성된다. 낱낱이 파헤치니 결정적인 성냥 한 개비로 작용한 인물들이 드러난다.

한 세기를 아우른 저자는 물질적 생활의 생산양식이 사회적정치적정신적 생활과정 전반을 제약한다는 마르크스의 주장을 언급한다. 자본주의와 공산주의 체제, 이와 관련된 사건들과 여러 국가를 살펴보면 어느 정도 타당성이 보이는 주장이다. 생산양식을 지배하는 건 사상이다. 생각이 우리 삶에서 커다란 비중을 차지한다는 방증이리라.

에필로그에 의하면 20세기의 가장 큰 정치적 사건은 볼셰비키 혁명이다. 기술적 사건은 핵폭탄 개발이며 혁명적 사건은 범용 디지털 컴퓨터의 발명이다. 책 안에 저자의 해석은 거의 들어가 있지 않다. 덤덤히 사건을 재구성하여 세계의 역사를 되돌아보게끔 한다. 이 책을 통해 오래된 미래를 그려본다. 생각을 강요받지 않아서일까 내용에 대한 거부감이 들지 않는다. 해석은 오롯이 독자의 몫으로 남는다. 해석은 사실이 아니라 신념의 변수라고 생각하기에 역사에 대한 해석이 달라질 수밖에 없는 이유를 여기에서 찾는다.

 

드레퓌스 사건에는 각기 다른 한 사람이 영향을 미치면서 전환의 변곡점이 된다. 위대한 신념은 다른 이의 삶을 바꿀 수도 있다. ‘사실자체보다 자신이 믿고 싶은 것을 믿는 게 인간의 본성일까. 그 아래로 영문도 모른 채 스러지는 존재가 안타깝다.

네가 왜 거기서 나와? 헉헉 대는 습기 찬 문장으로 나를 졸라 숨 막힘을 시전하시던 졸라님을 여기서 보게 될 줄이야! 의외의 장소에서 만난 친구인 듯 반가웠다. 인간 짐승목로주점안에서 거침없이 뿜어대던 포스를 좋은 데 쓰셨다. 포탄비가 쏟아지는 전쟁터 같은 상황에 떠밀리던 드레퓌스 앞에 당당하게 방어막을 만들어주셨다. 펜은 칼보다 강하다는 문장의 수행평가 버전이다.

드레퓌스의 결백은 단번에 밝혀지지 않았다. 각자의 위치에서 결정적인 역할을 한 사람들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남편을 믿었던 아내, 자신과 무관한 이의 일임에도 불구하고 우연히 발견한 진실을 외면하지 않았던 중령, 동생의 이름을 세상에 드러내려 고군분투한 형, 대통령에게 고발이 담긴 공개서한을 발표한 에밀 졸라, 그 글을 게재한 신문의 운영자 등이다. 개별적인 한 사람으로 존재한 그들은 사소함의 힘을 믿었던 걸까. 사소함이 모여 이루어진 거대한 파도는 결국 비열한 권력 뒤에 숨었던 자들을 무너뜨린다. 어느 한 사람이라도 나 하나쯤이야, 나 하나로 어떻게라는 생각을 지녔더라면 불가능했을 터이다.

 

100년의 역사 한 가운데 굵직하게 자리 잡은 사건은 두 차례의 세계대전이다. 인터넷 자료를 조금 더 찾아본다. 원인과 결과를 둘러싼 인간의 탐욕을 바라본다. 깨진 유리창 이론을 떠올린다. 사소한 것들을 방치해두면 커다란 범죄로 이어질 가능성이 높다는 범죄 심리학 이론이다. 유리창을 깨뜨린 자동차를 거리에 방치했을 때 대조군과는 달리 엉망이 되었다는 실험 결과는 시사점이 크다. 1차 세계대전의 시작도 사라예보 사건이라는 작은 불꽃이었다. 이 사건이 도화선이 되어 제국주의 국가들이 앞 다투어 이해관계를 따져보며 뛰어든 결과물이 아닌가.

개개인의 삶은 제각기 다르다. 나의 삶은 이를 운용하는 나에게 달려있다. 외부로부터 불어오는 바람이 나의 발걸음을 달라지게 만드는 순간, 그 바람은 더 이상 나와 무관하지 않게 된다. 이해관계로 얽힌 소수 인간들의 이기심이 바람으로 작용하는 거라면 동일한 유형의 사건이 반복되어서는 안 될 일이다.

세계대전에서 돈과 권력을 향한 소수 제국주의 국가들이 탐욕을 감추고 과학기술을 향해 손을 뻗었던 모습을 보며 씁쓸해진다. 전쟁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스스로 불러낸 에너지의 역습, 핵무기를 생각하면 일순 두려워진다. 과학기술은 발전하지만 인간정신은 진보하지 않는다는 레오폴트 폰 랑케의 말이 의미심장하다.

 

예전의 나는 민주주의의 반대말이 공산주의인줄 알았다. 정치체제인 민주와 독재, 경제체제인 자본주의와 사회주의 및 공산주의를 구분하지 못한 무지의 소치이다. 공산주의는 과격한 넘사벽에 담긴 무서운 말이었다.

잘못된 선입견을 장착한 채 사회과학서적 안에서 공산주의나 사회주의 이념을 언급한 문장들을 가끔 만났다. 제일 먼저 받은 느낌은 당혹감이었다. 공산주의의 사전적 의미가 유토피아에 가까웠기 때문이다. 동일 낱말에 대한 의미인가. 기존에 가졌던 개념과 전혀 달랐다.

제대로 바라보면서 다른 시선이 생겼다. 동시에 이상과 현실은 얼마든지 다를 수 있음을 깨달았다. 이상적인 개념이라도 추악한 본성이 개입되면 부패된 단백질인양 변질된다는 사실을 알았다. 페르소나가 셀프와 다른 것처럼.

일련의 사건들을 바라보면서 정치의 중요성을 절감한다. 전쟁도 정치의 연장이며 과학도 정치와 연결되면 흑화 될 수 있다. 경제도 정치와 무관하지 않다. 히틀러는 이름만으로 많은 것이 설명되는 인물이다. 이 책을 읽다보니 그의 정치와 주변 사람들이 보인다. 저마다의 이유로 악의 구현에 동참한 사람들 역시 수많은 죽음에 대한 책임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모든 악의 연대라는 부제가 설명하듯 색깔만 다른 욕망의 릴레이가 그와 같은 인물을 완성한 거라고 감히 말하고 싶다.

 

팔레스타인은 지금까지도 이어지는 분쟁의 중심지이다. 그 옛날 히틀러에게서 유대인을 향하던 화살촉이 유대인에게서 팔레스타인을 향하고 있다. 학교 폭력이나 가정 폭력에서도 그런 사례를 종종 본다. 학대를 받았던 아이들이 어른으로 자라서 또 다른 이들을 학대하는 경우이다. 베트남 전쟁에 참전한 한국 군인들이 현지 민간인을 대상으로 저질렀다는 만행도 결국 마찬가지 아닌가. 피해자가 가해자가 되는 아이러니라니!

많은 행위 안에 이런 속성이 드러난다. 사랑을 받아본 사람이 사랑을 줄 수 있다는 말이 있는 것처럼 말이다. 아프리카에서 시작된 인류의 DNA가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고 들었다. 인간의 행위 역시 생물학적 연결성을 갖는 걸까. 불교에서 말하는 업보처럼 투 비 컨티뉴드를 구현하는지도 모른다. 잔인한 싱크로율이다.

어느 누구에게도 다른 인간을 학대할 권리는 없다. 맬컴 엑스를 언급한 사건에서 흑인노예를 정의한 짧은 문장을 보는 순간 소름이 돋는다. 노예는 말하는 가축이었다나. 하아~ 생물학적 근거가 전혀 없음에도 불구하고 인종을 구분하여 짓밟는 집단을 경멸한다. 절망스러운 건 이 책의 앞 부분에 종합적으로 그려진 11개 사건의 연대 구분이다. 그림에 나타난 그래프의 길이이다. 짧은 실선 좌우로 날개처럼 뻗어있는 점선은 차별적인 학대가 여전히 끝나지 않았음을 나타낸다. 인간 기저에 깔린 본성일까. 끈질긴 이어짐이 징하다.

 

삶은 학문이 아니다. 대공황은 경제학경제를 살리는 일이 별개임을 보여준다. 이론과 실제는 다른 방향을 가리킬 수 있다. 벤젠 고리인 듯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불행들. 몇 몇 문장으로 표현된 당시 상황을 가늠하니 갑갑해진다. 시장이 인간의 필요가 아니라 지불능력이 있는 소비자의 수요에 응답한다는 내용에 공감한다. 전쟁에서 가장 큰 피해를 보는 쪽은 매번 힘없는 백성이다. 경제적 붕괴 상황에서 가장 큰 피해를 보는 쪽 역시 힘없는 노동자이다. 더욱 답답해진다.

러시아 혁명부터 중화인민공화국의 탄생, 베트남에서 일어난 혁명들과 독일 통일, 소련 해체 과정에서 발생한 혁명들을 돌아보며 바뀜을 생각한다. ‘예전과는 다른 사람들이 예전과는 다른 명분을 내세워 예전과는 다른 방식으로 인간을 억압하고 착취했다는 문장은 많은 시사점을 준다.

이상적인 이론을 토대로 시작되었어도 시간은 종종 본질을 흐리게 만드는가. 결정적인 한 사람에 의해 바뀔 수도 있지만 이상적인 한 사람의 힘만으로 바뀌지 않는 것도 세상이다. 여러 명이 참가한 계주처럼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지던 이상은 어느 순간 배턴을 떨구기도 한다. 다른 빛깔로 반복적으로 구현되는 억압과 착취의 현장을 바라본다. 다시 가슴이 답답해진다. 혁명으로도 바꿀 수 없는 생물학적 본성이 존재하는 걸까봐 문득 겁이 난다.

 

돈바스 기사들이 속속들이 올라온다. 나무위키에 수록된 돈바스 전쟁관련 내용의 최근 수정 시각이 실시간에 가깝게 업데이트된다. 거꾸로 읽는 세계사가 아니었더라면 눈길조차 주지 않았을 기사들이다. 제목을 읽는 것을 넘어 클릭하고 몇몇 지역들을 지도에서 검색하는 나. 불과 몇 달 전만 해도 상상할 수 없던 변화이다.

사건 발생 시기를 간략한 멘트와 함께 연대표처럼 정리한 그림을 각각의 장 앞에 배치한 구성이 좋았다. 역사에 무지한 나에게 좋은 지도가 되었다. 각주가 해당 페이지 하단에 위치한 점에서는 편집자의 친절함이 엿보였다. 깊은 밤 뒤척이는 불면증 인간인양 일일이 책을 들썩일 필요가 없었다. 세심한 배려가 고마웠다.

애니메이션 <명탐정 코난>은 사건을 바라보는 현명한 시각을 알려준다. ‘이 살인 사건에서 가장 많은 이득을 보는 사람이 누구일까요. 그를 주목하면 동기를 유추할 수 있습니다.’라고. 러시아-우크라이나의 대치 상황에서 내가 주목하는 점은 주변국들의 반응이다. 왜 그런 반응을 보일 수밖에 없는가. 이득을 보는 쪽은 어디인가. 일련의 사태들을 어떤 관점에서 바라볼지 어렴풋한 기준이 세워진다.

전쟁 상황에는 인간의 욕망이 결합된다. 얼마나 교묘하게 폭력의 당위성을 확보하느냐. 위장술의 차이만 있을 뿐이다. 새삼 놀랍지도 않다. 20세기 이전의 전쟁에서도, 다가오지 않았으면 하는 미래의 어느 시기라도 별반 다르지는 않으리라. 한결같은 탐욕이 예측된다는 점을 다행이라 해야 하나. 우스운 한편 씁쓸하다.

 

모든 시작은 단순하다. 하나의 점에서 시작되었으리라. 실체를 지닌 것이든 인간의 감정처럼 무형의 것이든. 그토록 찬란하고 창대해질 줄 짐작조차 하기 어려웠으리라. 드라마 <기상청 사람들>에서는 삶과 자연이 보이는 시그널을 언급한다. 주인공의 내레이션이 인상적이다. ‘신호는 단순하다. 때로는 소리로, 때로는 색깔과 진동으로 이 세상에 안전한 것은 없다고 계속해서 내게 신호를 보낸다.’

드라마 설정과 연관되지만 인간의 역사에 동일 문장을 적용해도 전혀 이질감이 느껴지지 않는다. 세계사의 결정적인 장면들을 보며 삶을 돌아보는 시간을 갖는다. 내 삶의 결정적인 장면들은 무엇이었을까. 몇몇 선명한 점들이 되감기한 필름 위에 찍힌다.

기록되는 하나의 문장은 많은 동기를 딛고 피어난다. 한 인간의 역사에서든 세계로 확장하든 일련의 사건들을 따라가면 공통점이 보인다. 시작은 사소했다는 점이다. 에필로그에 언급된 문장처럼 어떤 중대한 사건도 독립해서 일어나지 않는다. 세계적인 전쟁에서조차 시간을 거슬러 가면 작은 불씨가 존재한다. 거대한 나무도 하나의 씨앗에서 시작되지 않는가. 줄기가 자라고 잎이 달리고 꽃이 피고 열매가 매달리기까지. 사건과 그 결과는 별개의 것이 아니다. 하나의 사건은 점이 아니라 선으로 놓이기 때문이다.

하늘에서 뚝? 그 어떤 것에도 갑자기는 없다. 하나의 빗방울은 도깨비방망이로 뚝딱 만들어져 나의 얼굴에 떨어지는 것이 아니다. 수많은 증발과 응결, 충돌이 반복된 결정체이다. 한 송이 꽃을 피우기 위해 봄부터 소쩍새는 그렇게 울어야 하는 것이다.

 

 

p70, 피의 일요일 설명: 페테르부르트 페테르부르크

p277 그림: 1964년과 1963년의 사건 배치 순서가 연도순으로 바뀌면 좋겠음

p337, 마지막 줄: 38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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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레바퀴 아래서 (무선)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02
헤르만 헤세 지음, 한미희 옮김 / 문학동네 / 201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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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한 방황은 없었다. 학창 시절을 돌아본다면 나는 순하고 착한 아이였다. 공부를 뛰어나게 잘하지도 않았지만 딱히 못하지도 않았다. 어른이 정해준 길을 따라 비교적 순응하며 성장했다. 가지 말라는 길은 가지 않았고 하지 말라는 일은 하지 않았다. 노선이 정해진 수레바퀴를 따라 한 치의 어긋남도 없이 그저 걸었다. 십대를 이런 모습으로 지나왔다. 방황은 오히려 이십대 후반 이후에 겪었으니 십대가 당면한 혼란을 완벽하게 이해하지는 못한다.

교사 집단의 정체성도 나와 별반 다르지 않은 듯하다. 공부로 말하면 잘하는 축에 속했겠지만 특출 나지는 않았을 애매함, 수레바퀴 아래보다는 위에서 수레와 함께 굴러가는 축에 속했을 집단이다. 개별성을 차치하고라도 다소 어정쩡한 이들이 영혼을 돕고 가르치는 교사가 된다. 교사로서 한계를 느끼게 만드는 요인이다.

물론 직접 겪어야 공감이 가능한 건 아니다. 책이나 뉴스를 접하면서도 얼마든지 공명할 수 있다. 설령 비슷한 경험을 직접 했다하더라도 개개의 상황은 다를 테니 학생에 대하여 완벽한 감정이입은 불가능하리라.

다만 아이들의 영혼을 향해 얼마나 가까이 다가가느냐, 그들을 바라보는 거리의 문제라고 본다. 이런 이유로 나는 교사에게 필요한 주요 덕목으로 용기기다림을 꼽는다. 영혼과의 거리를 좁히는 데는 다가가는 용기가 필요하며 아이들의 영혼이 꽃피기 위해서는 저마다의 시간이 필요하니까.

 

소설수레바퀴 아래서는 주변의 기대를 한 몸에 받으며 어른들이 정해준 길로 삶의 수레바퀴를 굴리던 주인공 한스가 신학교에서 정반대의 성향을 가진 친구 하일너를 만나면서 자신의 정체성을 인지하고 방황하는 과정을 그린 이야기이다.

주변인들은 신학교 입학시험을 준비하는 아이에게 상반된 반응을 보인다. 데미안을 연상시키는 구둣방 주인은 시험에 떨어진다 해도 부끄러울 것이 없으며 하느님은 모든 영혼에 특별한 의도를 갖고 계신다고 격려한다. 나머지 인물들에게 한스가 시험에 떨어진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학교의 선생님들, 목사님, 아버지에 이르기까지 그에게 갖는 기대감은 아이의 영혼을 무겁게 조인다.

주인공 한스는 끝내 수레바퀴 아래에’ 깔린다. 차라리 바퀴가 굴러가는 길을 벗어나 다른 길로 뛰쳐나갔더라면, 혹은 스스로의 의지로 굴러갔더라면 달라질 수도 있었으리라. 그가 수레바퀴에 깔린 이유는 주변에 떠밀려 바퀴가 지나는 길에 힘없이 서 있었기 때문이다.

다니던 학교의 교장 선생님은 아이의 죽음을 바라보며 갑..기 불행이 연이어 닥쳤다고 말한다. 삶의 마침표가 과연 갑자기 찍힌 걸까. 바퀴가 지나는 길에 길들여진 주인공은 길에서 벗어날 방법을 알지 못한다. 그저 바퀴만을 바라본 채 오랜 시간 구르다 서서히 힘을 잃는다. 뒤늦게 주변을 둘러보나 궤도를 벗어날 용기조차 내지 못한다. 바퀴와 함께 굴러가지 못했음에도 불구하고 바퀴를 놓지 못했으니 끼어들어가 짓눌리게 되었으리라.

 

정답이 되는 삶의 궤도가 과연 존재하는가. 방학 중에도 미리 공부해둘 것을 제안하는 어른들은 말한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궤도를 벗어나기 쉽다고. 어쩌다 좋아하는 낚시나 산책을 할 때조차 양심의 가책을 느끼게끔 만드는 궤도가 아이의 삶에 어떤 의미를 갖는 걸까. 그에게 수학 공부와 수업은 평탄한 국도를 걷는 것이다. 탁 트인 전망을 볼 수 있는 산을 갑자기 만나는 일은 일어나지 않는 삶이다. 어른들이 정해놓은 노선을 따라 가는 아이는 자신의 삶이 어디를 향해 흘러가는지 인지하지 못한다. 그저 앞으로, 앞으로만 나아갈 뿐이다. 어엿한 남자가 되는 친구 하일너처럼 자신의 길을 찾기 위해 사회적 편견에 당당하게 맞서지 못한다.

시험 전후에는 그리도 불안해하더니 막상 2등으로 입학시험에 합격했다는 결과가 나오니 1등을 못해서 분하다고 말하는 주인공. 인간의 마음이란 참, 이리도 간사한 것을. 아이는 동급생들을 앞지르고 싶어 하는 데도 왜 그래야 하는지 스스로 알지 못한다. 그가 품고 있는 바람이 자신에게서 우러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소설 제목이기도 한 스프링벅은 아프리카에 사는 양의 이름이다. 무리가 커지면 풀을 뜯기 위해 앞서거니 뒤서거니 마구 뛰다가 나중에는 원래의 목적을 잊는다고 한다. 오로지 앞서겠다는 일념으로 그저 뛴다나. 해안 절벽이 나타나도 가속도에 의해 앞만 쫓다 끝내 바다에 빠지고 만다는 동물이다. 한스의 모습에서 스프링벅이 겹쳐진다.

 

목적이 없었다. 한스 친구 하일너의 말처럼 나 역시 공부가 좋아서 한 건 아니었다. 내게 공부란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그저 하는 거였다. 물음표가 존재하지 않는 영역이었다. 배우는 내용이 과연 타당한가, 이게 왜 이래야 하냐며 의문을 제기하는 친구들을 종종 한심한 시선으로 보았다. 왜 시간 낭비를 하지? 그냥 무조건 외우면 되잖아. 질문은 나에게 시간 낭비와 동등한 행위였다.

공부가 기쁨이던 순간이 있었던가. 자발적인 공부는 테두리 밖의 일이었다. 공부의 신남은 교사가 되어서도 한참이 지나서야 알게 된다. 디지털카메라로 접사를 찍으며 야생화의 이름을 검색할 때 가슴이 뛰었다. 교과서에 등장한 성도가 새벽녘 아파트 옥상 위에서 실물로 펼쳐졌을 때, 무서움과 추위 따위는 한순간에 증발했다. 이 모든 순간에게는 공통점이 존재했다. 자발적이었다.

신학에 대한 관점을 서술한 내용에서 글쓰기의 자발성을 떠올린다. 헤세는 예술이라고 할 수 있는 신학학문이라고 할 수 있는 신학을 비교한다. 비평과 창작, 학문과 예술을 언급하면서 전자는 항상 옳지만 어떤 이에게 도움을 주지는 못하며 후자는 영원에 대한 예감, 믿음, 사랑, 위로, 아름다움의 씨앗을 뿌린다고 말한다. 문학이야말로 글을 도구로 하는 자발적인 창작 예술 행위 아닌가.

새로운 시도는 크고 작은 고통을 수반한다. 소설 데미안에 등장하는 것처럼 알을 깨고 나오려면 고통을 감내하는 용기가 필요하다. 글을 쓸 때마다 고통과 환희의 순간을 선물로 맞이하는 것처럼. 자발성은 진통제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라는 접속사를 건네주며 영혼의 성장 통을 감내하게 만들어준다.

 

여름에 피는 다양한 꽃들의 이미지를 검색하면서 읽었다. 천천히 여름을 호흡하는 느낌이 좋았다. 헤세의 문장은 서두르지 않는 속도감을 갖는다. 차분해지는 마음으로 이야기를 따라간다. 시간에 천천히 색깔이 입혀진다. 간간이 흔들리는 꽃들, 물고기의 움직임, 주변 풍경들에 대한 담담한 묘사가 고요히 흡수된다.

작가의 문장을 감각적으로 비유한다면 단연 시각적이다. 그에 의하면 노란 햇빛이 이끼 위에 내려앉아 반짝이는 모습은 따뜻한 얼룩이 된다. 금빛 띠와 얼룩 몇 개가 방에 흘러들어와 잠든 소년들의 꿈 옆에 가만히 눕는다. 새로운 행복이 갓 담근 포도주처럼 발효하여 피와 생각 속을 돌아다닌다고 표현하는 감성이라니! 단순한 풍경 묘사에 그치지 않고 주인공의 심리와 더불어 중의적으로 이미지를 그린다.

헤세는 시험 전후의 불안함을 한스가 바라보는 풍경의 변화로 표현한다. 주변의 환경조차 심리를 투사하는 매개체로 활용한다. 시적인 묘사는 주인공의 상황과 어우러지면서 심리를 고스란히 반영한다. 그토록 아름다운 풍경이 펼쳐지는데 아이의 삶은 나무도막이 하나씩 빠져나가는 젠가의 본체처럼 위태롭다. 작가의 묘사를 따라가며 생각한다. 세상에 절대적으로 아름다운 풍경은 존재하지 않는지도 모른다고. 풍경의 아름다움은 상대적인 건 아닐까. 풍경이 아름다워 보이는 건 이를 아름답다고 여기는 시선 혹은 심리가 투영되어서일 테니까.

 

사회에서 필요로 하는 사람을 기르는 것은 학교가 추구하는 주요한 목적이다. 한데 우리는 이보다 앞서야 할 전제를 종종 망각한다. 인간의 존재 이유는 무엇인가. 근본적인 질문에 대한 답변은 바다 아래 잠겨있는 90%의 빙산처럼 묵직하다. 사람들은 눈에 보이는 10%만 바라보며 종종 그 답을 잊는다. 인간은 존재 자체로 의미를 갖는다는 사실을 말이다.

교사를 향한 작가의 문장이 짐짓 날카롭다. 교사의 직무란 소년들의 거친 힘과 자연의 욕망을 제어해 뿌리부터 송두리째 뽑아버리고 국가가 인정하는 차분하고 절도 있는 이상을 심어주는 거라는 것. 소년의 내면에 존재하는 것을 깨뜨리고 위험한 불꽃은 끄고 밟아버려야 한다는 것. 맡은 반에 천재 한 명이 있는 것보다 차라리 멍청한 바보 몇 명이 있는 것이 낫다고 생각한다는 것. 교사들은 항상 살아 있는 학생을 볼 때와는 전혀 다른 눈으로 죽은 학생을 바라본다는 것. 평소 별생각 없이 학생들에게 상처를 주면서도, 죽은 학생을 보면 모든 생명과 젊음이 다시 돌아오지 않으며 소중한 가치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잠시나마 뼈저리게 느낀다는 것이다.

한스의 수학교사는 비례식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인생에 아무 도움도 안 될 것 같지만 비례식이 논리적인 능력을 키워주고 명확하고 냉철하고 효과적인 사고력의 토대를 만들어준다는 이유를 그럴 듯하게 포장한다. 예전의 나 역시 과학 공부의 중요성을 비슷하게 어필하곤 했다. 당연한 듯 내뱉던 말들이 품었던 폭력성을 발견하고 흠칫한다. 학창 시절에 읽었더라면 주인공의 시점만을 좇았으리라. 교사의 관점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기에 소설 속 교사들의 모습에서 나를 돌아본다.

 

116년 전에 출간된 책이 우리의 현실과 괴리감 없이 읽힌다. 뽑히지 않을 뿌리처럼 사회 깊숙이 박혀 아이들을 옭아매는 덩굴로 자라나는 상황을 생각하니 소름이 돋는다. 작가의 문장력에 감탄하면서도 한 세기가 지나도 여전히 이어지는 모습에 마음이 복잡해진다.

주인공의 걸음을 따라가며 김 필의 노래 <그 때 그 아인>을 떠올린다. ‘가슴에 박힌 선명한 기억/ 나를 비웃듯 스쳐 가는 얼굴들/ 잡힐 듯 멀리 손을 뻗으면/ 달아나듯 조각난 나의 꿈들만/ (중략) / 지나온 모든 순간은 어린/ 슬픔만 간직한 채 커버렸구나/ (중략) / 아직 허기진 소망이/ 가득 메워질 때까지/ 시간은 벌써 나를 키우고/ 세상 앞으로 이젠 나가 보라고/ 어제의 나는 내게 묻겠지/ 웃을 만큼 행복해진 것 같냐고/ 아주 먼 훗날 그때 그 아인/ 꿈꿔왔던 모든 걸 가진 거냐고.’ 자신의 상황을 서서히 인지해가던 한스를 생각한다. 느릿느릿 아이를 잠식했을 무게감을 가늠해본다. 책 제목에도 나오는 것처럼 <지금 알고 있는 걸 그때도 알았더라면> 달라졌을까. 한스도, 한스를 바라보는 내 자신도. 마음 한 켠이 뜨끈해진다.

단 하나의 좁은 길밖에 없던 소년의 모습에서 외바퀴 수레를 떠올린다. 외바퀴 수레는 혼자서 적은 힘을 들이면서도 좁은 길을 효율적으로 나아간다. 안정성이 떨어진다는 단점만 극복한다면 말이다. 사회와 학교의 요구에 흔들리며 균형을 잡지 못한 영혼은 끝내 앞으로 나아가지 못한다. 어른들이 조금 더 기다려줄 수는 없었을까. 아이 스스로 균형을 잡고 걸어갈 길을 선택할 때까지. 그랬더라면 좁은 길임에도 불구하고 몇 번을 넘어졌대도 아이는 결국 수레를 굴리지 않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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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파엘 2022-02-12 21:16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정말 공감이 되는 말씀입니다. 학생들을 위해 교사의 다양성도 중요하다고 생각하는데, 최근에는 교사양성과정 마저도 다양성과는 반대되는 방향으로 결정이 되어서 씁쓸한 마음이 있습니다. 교사교육에 대해서 고민이 정말 많이 되네요. 좋은 글 감사합니다 ^^

나비종 2022-02-12 23:16   좋아요 2 | URL
공감해주시니 반가우면서도 ‘나만 그렇게 생각하는 건 아니구나‘싶어서 씁쓸하기도 합니다.

신규 교사 때에는 교과 내용을 가르치는 게 가장 중요하다고 여겼습니다. 경력이 쌓일수록 다른 게 마음에 들어오더군요. 저를 바라보는 아이들이 배우는 것이 제게서 흘러나오는 말뿐은 아니라는 사실이요. 행동과 말투, 소소한 사건들에 대한 저의 반응이 강하게 흡수되는 경우를 자주 만나게 되었거든요. 어쩌면 비언어적인 영향력이 보다 중요할지 모르겠습니다.
대상과 마주보는 자리에 서야하는 직업은 장르를 불문하고 어렵다는 생각이 듭니다. 지.켜.보.고.있.다! 잖아요~^^; 저의 어떤 점을 바라볼지 예측하기 어렵거든요. 사람은 자신이 보고 싶은 것만 보게 되니까요.

간혹 제 관점대로 바뀌어가는 학생들을 보면 교사의 시선이 정말 중요하다는 생각을 하거든요. 교사의 다양성이 중요하다는 말씀에 공감합니다. 다양한 교사들에 둘러싸여 성장해야 학생들이 건강한 영혼의 소유자가 된다고 생각하거든요. 햇빛이 되는 교사가 있는가 하면, 바람이, 비가, 흙이 되어 영향을 미친다면 아이들은 무럭무럭 자랄 수가 있겠죠~ㅎㅎ

교사양성이나 임용과정에서도 교사로서의 자질을 명확하게 판별하기 어려우니 갑갑합니다. 교육의 대상이 ‘사람‘이다보니 과연 이 교사의 자질이 교육에 적합할지 판단하기가 상당히 애매하단 말이죠. 정량적인 능력을 넘어서는 정성적인 분야이니까요. 중요성은 인지하지만 측정이 거의 불가능하달까요. 쩜쩜쩜.

어쨌든 비슷한 고민을 하시는 분의 말씀을 들으니 힘이 납니다. 좋은 글이라는 기분 좋은 댓글을 달아주셔서 감사합니다~^^*

물감 2022-02-21 18:32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저도 되게 겁많고 순진해서 참 말 잘듣는 아이였어요. 지금도 부모님은 저보고 사춘기가 없었다고 그러시거든요. 근데 이런 애들이 정말 늦바람 드는게 무섭더라고요. 딱히 탈선하지는 않았지만 마음속에서 화산이 폭발하고 태풍이 불고 쓰나미가 일고... 그동안 눌려있던 열등감이 터지면서 분노와 증오가 쏟아졌어요. 성적이 좋았던 한스와는 케이스가 다르지만, 나 자신을 드러내지 못한 데에서 오는 회의의 크기는 같다고 느꼈어요. 그래서 이 책은 내 어린 시절의 관점으로 읽든, 성인된 현재의 관점으로 읽든 공감할 수 밖에 없는 아름다운 작품이었습니다.ㅎㅎ

말씀하신대로 수레바퀴의 길 밖에 있었더라면 깔리지 않았을텐데, 한스에게는 그 길만이 전부였으니 옆 길을 생각지 못한 게 당연했겠네요. 갑자기 그게 생각나요. 다리 한쪽을 묶어둔 새끼 코끼리가 다 커서도 도망칠 생각을 못하게 되는. 고정관념과 갇힌 사고로 인해 성장이 멈춘 사람들이 얼마나 많을까요. 아이들의 무한한 가능성을 막아버린 어른들과 우리 사회에 얼마나 책임을 돌려야 하는 걸까요. 어렵네요^^;

저는 주인공 주변에 어른다운 어른이 없어서 안타까웠어요. 비록 어른들이 정해놓은 노선을 따라 목적없이 걷더라도, 아이들에게 인간적으로 다가와주었다면 그렇게까지 이탈하진 않았을거라 생각해요. 이래서 인적성 검사를 필히 해야됩니다... ㅎㅎ 공부의 신남을 늦게라도 알게 되신 나비종님은 알을 깨고 나오는 데 성공하셨군요. 기존의 틀을 깨기란 참 대단한 용기가 필요함을 나비종님의 이야기를 보며 또한번 실감했습니다^^ 저는 아직 깨야할 알들이 많이 남았거든요 ㅋㅋㅋ

다섯째 문단의 글이 너무 좋아요. 헤세의 시작적 문장을 따라 나비종님의 글도 시각적으로 바뀌었네요 ㅎㅎㅎ 한스의 눈에 들어오는 아름다운 자연과, 한스의 위태로운 영혼이 참 대조적이군요. 제가 생각 못하고 넘어간 부분이에요. 물론 아름다움은 상대적입니다. 저도 방황하던 시절에는 그 화창한 봄날조차 썩어 있다고 생각했거든요. 한 영화의 유명 대사처럼, 거 죽기 딱 좋은 날씨네~ 하면서요 ㅋㅋㅋㅋㅋ

아무래도 나비종님은 교사시니 또 다른 시각과 관점으로 읽으셨겠어요. 아이들의 안정된 장래가 우선일까, 건강한 정서가 먼저일까 하는 고민도 있을거 같고요. 행복은 성적순이 아닌건 맞는데, 한국사회는 점점 고학력/고스펙을 원하고 있으니 말이에요. 그래서 어쩔수 없이 학생들의 불꽃을 꺼뜨려야 할 때도 있을 것 같습니다. 생각해보니 교사입장에서도 수레바퀴에 깔릴 수 밖에 없는 상황이 있겠는데요? 아이고.

어른들은 아이들의 방황이 끝나고 돌아올 때까지 기다려줘야 한다고 생각해요. 목적지를 잃고 해메는 이들에겐 어딘가 머물만한 곳이 있어야 하잖아요. 저는 침대의 편안함보단, 공원에 정자처럼 가볍게 쉴 만한 곳이 필요했거든요. 여튼 좋은 어른 되기도 어렵고, 어려서 정신건강 챙기기도 쉽지 않네요 ㅋㅋㅋㅋ 이번에도 너무 좋은 독서였습니다. 지금 밖에 눈이 날리네요. 바람도 엄청 불고요. 몸조심하시고 남은 2월, 즐거운 시간 되세요^^

나비종 2022-02-21 18:57   좋아요 3 | URL
저는 소심하고 겁 많고 어디 가서 말 한 마디 못하는 아이였습니다. 학교에 가서 한 마디도 안했던 어린 시절을 기억하는 친구는 교사가 되었다고하니 네가?! 이런 반응을 보이더라구요. 부모님께 반항해본 적이 없는 사춘기였죠, 저 역시. 가난해서 주눅들어있던 마음이 열등감으로 변화된 시기도 있었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그 정도면 비교적 잘났던 아이였는데 말이죠.ㅋㅋ
글을 쓰면서 그동안 담아만 두었던 자아가 조금씩 흘러나오고 있습니다. 글을 쓰면 자신을 직시하는 시간이 힘들 때도 있는데 동시에 카타르시스도 느껴지거든요. 조금씩 과거의 앙금이 풀리는 느낌이 있습니다. 물감님의 심정을 조금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느낌 아니까~~ㅋㅋ^^;

코끼리 말씀들으니까 벼룩의 높이 제한 실험도 생각나네요. 높이가 제한된 수조 안에서 뛰게 하면 나중에 뚜껑을 오픈해도 밖으로 튀어나가지 못한다는 실험이요.
아이들의 가능성을 막지 않으려면 어른이 먼저 제대로 된 어른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폭넓은 시선으로 아이들을 포용할 수 있어야 한다구요. 시간이 어른의 절대적인 척도는 아닌 것 같거든요. 나이가 들어도 여전히 유아기적 사고를 벗어나지 못하는 어른이들이 많으니까요.

공부가 정말 신이 나는 행위더라구요. 공부든 뭐든 ‘자발성‘이 가장 이상적인 추진력이라고 생각해요. 교사를 대상으로 하는 강연이 많이 어렵다는 말이 있거든요. 의무적인 연수가 많아서 자발성이 제로인 상황이라.ㅎㅎ
물감님의 알까기를 응원합니다~^^

그러게요. 헤세의 문장들이 시적인데다 시각적인 요소가 짙어 덩달아 그래보고 싶었나봐요^^
아름다움이 상대적인게 문학작품을 읽을 때에도 그대로 적용이 되어서 간혹 작가에게 미안할 때가 있어요. 기분좋을 때 읽었을 때와 기분 드러울 때 읽었을 때가 별점이 다르고 리뷰를 쓰면서도 마지막 문장의 마침표가 찍힐 때까지 작품에 대한 평가가 오르락내리락해서요. 헤세의 작품처럼 저에게 퍼펙트한 5점을 제외하고 제가 리뷰를 쓴 작품들도 다시 읽어보면 그렇게까지 5점이 아닌 것도 많거든요. 그래도 수정은 하지 않습니다. 그 당시의 진실을 그대로 보존하고 싶은 마음에.^^;

저는 건강한 정서를 우선으로 생각합니다. 그건 코어와 같은 거거든요. 그 어떤 상황의 허들이든 넘을 수 있는 근육의 힘 같은 거죠.ㅎㅎ 그래서 제가 맡은 반의 성적이 그닥인 걸까요. 아이들이 제 시간을 편하게 생각하고 좋아하기는 하는데 성적으로 이어지지 않는다는^^;;; 수레바퀴에 깔릴 수 밖에 없는 상황에 종종 갈등을 합니다, 그래서ㅎㅎ

맞습니다. 아이들에게 방황의 기회를 줘야한다고 생각해요. 내가 방황해보니까 이렇더라...는 바보같은 조언이거든요. 바탕이 다르고 재료가 다른데 무조건 불이 붙는 건 아니니까요. 나는 종이라 금방 불이 붙었는데 그 아이는 알고 보니 유리면 어떻해요?ㅋㅋ
공원의 정자처럼 가볍게 쉴 만한 곳... 상상만 해도 편안해지네요.^^
모처럼 물감님과 별점이 일치하는 작품을 공유해서 기분좋은 독서였습니다.
밖이 캄캄해져서 눈발이 날리는 지는 모르겠습니다. 얼른 마무리하고 귀가해야겠네요~ 물감님도 짧은 2월, 굵고 의미있게 마무리하세요~^^*

mini74 2022-03-08 17:5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우와 댓글도 리뷰같아요. 나비종님 당선 축하드립니다. 글을 읽으니 당연한 결과인듯 합니다 ~~

나비종 2022-03-08 18:50   좋아요 1 | URL
감사합니다~ 자연스럽게 읽히는 좋은 작품을 만난 덕택입니다. 학생에 관한 소설이다보니 제 입장에서는 더욱 가까이 와닿은 것 같습니다~^^*
 
소마
채사장 지음 / 웨일북 / 2021년 12월
평점 :
품절


열한 계단을 올라 우리가 언젠가 만나기를 희망했다. 지대넓얕안에서 그토록 방대한 우주적 스케일의 지식을 일목요연하게 요약하는 세심함이라니! 그의 소설도 전작들과 결이 비슷하리라. 어두운 공간을 걸어가는 발밑에 야광 이정표라도 깔아주면서 나를 이끌어줄지도 모르지. 채사장의 글에 홀딱 빠져버렸던 나는 그의 첫 소설에 은근한 기대감을 품은 채 겉표지를 넘긴다.

하아~ 무엇을 기대했던 걸까. 소설은 이런 방향으로 전개되어야 한다며 무의식적으로 틀을 만들어 억지로 집어넣으려했나. 주인공의 아버지가 신의 개념까지 떨쳐내라며 신을 조각한 나무 형상을 태울 때부터 진즉 알아봤어야 했다. 마지막 책장을 덮는 순간 멍했다. 소설에 대한 고정관념이 소실된 듯했다. 이질적인 느낌이 나를 둘러쌌다. 소설을 건네주는 그는 결코 친절하지 않았다.

원자의 크기를 언급할 때면 흔한 비유로 축구장이 등장한다. 원자가 축구장이라면 중심에 있는 원자핵은 축구장 중앙에 놓인 구슬이며 전자는 축구공 근처에 떠도는 먼지 정도라고 말이다. 상상하기 어렵지만 과학자들이 내린 현재까지의 결론은 원자가 텅 비어있다는 것이다. 소설소마를 읽어가면서 많은 시간동안 나는 원자를 떠올렸다. ‘전자에 의식을 실은 내가 원자핵까지 도달하면서 원자의 스케일을 감당하기에는 어려웠다. 작가가 주제로 심어놓은 고갱이까지의 거리가 내게는 너무 멀었다.

매끄러운 연결성이 동반되었더라면 조금은 나았을까. 채사장님! 이번에는 쫌 시크하셨습니다! 소설 속에 뿌려놓은 요소들에 비하여 다소 산만하게 서사의 얼개가 겉돈다는 느낌이 들었다. 뚝뚝 끊어지는 이야기를 접하는 것처럼 말이다. 작가의 운동장을 질주하여 중앙에 도달하려면 엄청난 내공의 근육질 다리가 필요하다. 한 번의 독서로 전체적인 서사를 아우르기에는 어려움이 컸다.

 

이 책은 소마라는 이름으로 불리던 전쟁 영웅 남자의 일대기를 그린 이야기이다. 영화로 제작된다면 19금 등급을 받으리라 짐작될 내용들이 지뢰처럼 포진해있다. , ~ 오해는 하지 마시길. ‘어멋!’이 아니라 으악!’이니까. 손으로 눈을 가리는 액션을 취하는 척하면서 실눈 뜨고 보고 싶을 내용이라서가 아니라 절로 눈이 감길만한 잔혹성 때문이다. 중세의 마녀 사냥이나 종교 탄압, 전쟁 중 자행되는 폭력에 고스란히 노출된 장면들이 가감 없이 등장한다. 여기에서 함정에 빠지면 안 된다. 이야기 전개 상 필요한 경우도 있지만 그런 표현들이 커다란 틀에서는 은유적인 표현이기 때문이다. ‘동굴이 그냥 동굴이 아니었던, 은유가 사막의 모래알인양 쫙 깔려있는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처럼 말이다.

소마의 사전적 의미는 다중적이다. 고대 그리스어로는 을 의미한다. 인도 신화에 나오는 신이다. 환각 작용이 있는 고대 음료 겸 제례 도구 겸 힌두교의 신 이름이기도 하다. ‘힌두는 산스크리트어로 거대한 물을 의미하는 신두에서 유래한 말이라고 한다. 여러 의미를 종합적으로 고려하여 탄생한 이름이리라 짐작한다. ‘물과 같고 바람과 같고 허공과도 같다며 주인공 이름의 의미를 언급한 책 속의 내용이 사전적 의미와 자연스럽게 연결된다.

소설 속에서 주인공의 이름은 세 번 바뀐다. 소마였다 사무엘이였다 아틸라였다 소마로 돌아온다. 매트 헤이그의 휴먼에서도 이름 관련 내용이 등장한다. 살아 있는 소는 카우(Cow)’라고 부르면서, 입으로 들어가는 소는 비프(Beef)’라 부른다며 인간의 이중성을 꼬집는다. 한때 생명체였던 소를 먹을 때는 이름을 바꿔 부르며 살아있는 소를 생각하지 않으려 한다는 것. 소의 정체성이 사라지기라도 하듯이 말이다. 이름이 근본적으로 중요한 요소는 아니라는 거다. 채사장이 주인공의 이름에 변주를 준 이유도 마찬가지 아닐까. 결국 소마의 이름으로 돌아온 것처럼 이름이 바뀌어도 그의 본질은 변하지 않는다는 점을 말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분위기나 스케일로 보면 드라마 <아스달 연대기>가 떠오른다. 드라마에서 서사가 펼쳐지는 초반에는 워낙 방대하게 전개되는 내용에 갈피를 잡지 못했더랬다. 주인공들이 그 상황에서 왜 그런 대사를 했는지, 그 장면이 무슨 의미를 내포하고 있는지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다. 후반부에 가서야 대략적인 얼개를 파악할 수 있었다. 다시보기를 하면서 하나하나 의미를 짚어보니 짐작하지 못했던 거대 스케일의 서사가 쓰나미로 몰려왔던 기억이 난다. 소설소마에서도 비슷한 면이 보인다. 다만 겉표지의 홍보문구처럼 매혹적인 캐릭터나 압도적인 스케일은 아닌 듯하다. 물론 지극히 개인적인 관점에서 주인공이나 이야기가 내 취향이 아닌 이유가 크다.

6부로 구성된 이 소설은 출입문에 해당하는 1부가 가장 견고하다. 1부는 내면을 묘사한 문장을 중심으로 전개된다. 가장 넘기 어려운 관문이다. 여기에서 헤매면 전체적인 구조를 파악하는 데 난항을 겪는다. 입장료를 제대로 지불하면 2부부터는 점차 주인공의 발걸음에 맞춰 주변을 돌아볼 수 있다. 1부는 다음과 같이 열일을 한다.

첫째, 과연 주인공은 화살을 찾을까 궁금증을 유발한다. 소마의 아버지가 화살을 쏜 다음 그걸 찾아오라고 한다. 이 내용을 접했을 때, 나는 작년 가을에 읽은 파울로 코엘료의 아처를 떠올린다. 비슷한 전개가 이루어질까 예상한다. 소설 초반에 화살의 행방에 집중했던 이유다. 화살을 찾아 여행을 떠나는 파란만장한 여정이 등장하겠구나. 숲을 보지 못하고 나무 한 그루만 노려본 나의 잘못이 크다. 화살은 상징적인 도구였던 것을.

둘째, 신비스러움을 북돋는 깨알 같은 요소들이 기대감을 불러온다. 이를테면 오감을 상징하며 산스크리트어를 연상케 하는 신들, 방황하는 들개, 신비한 저수지, 퀴즈를 내며 세 가지를 갖다 바치라는 요상한 신 비스므레한 거대한 존재 같은 것들이다. 개별적인 요소에 과도한 의미를 부여한 나는 의미심장한 복선을 예상한다. 소설 중반을 건너는 과정에서 연결고리를 찾으려다 망한다. 함정에 제대로 빠진다. 작가는 융단인양 깔린 서 말의 구슬을 마지막 6부에서 꿰기 때문이다.

 

구체적인 이야기가 전개되는 2부에 들어서면 서사는 점차 모습을 드러낸다. 재독을 할 때에는 두 가지로 나누어서 이야기에 집중한다.

첫째, 주인공 소마의 시선에서 내면과 외면을 중심으로 이루어지는 서사이다.

주인공이 겪는 사건은 파란만장하다. 고난의 정도를 높낮이로 비유한다면 갭이 매우 크다. 1층에서 63층까지 올라갔다가 지하로 뚝 떨어진다. 다이내믹하다. 집도 부모도 모두 잃은 천애고아로부터 세상을 지배하는 왕으로 우뚝 섰다 모든 것을 잃어버린다. 출발할 때는 육신이라도 멀쩡했건만. 작가는 작정이라도 한 듯 소마의 감각 기관을 하나씩 떼어낸다. 눈깔을 후벼 파고 혀를 뽑고 귀를 자르고 코와 손가락을 베어낸다. 외면을 상상하면 소름 돋지만 이 과정은 상징성이 짙다. 소설 초반에 등장한 오감과의 연결고리로 작용한다.

작품의 후반부에서는 다시 소마 아버지가 등장하여 매듭을 짓는다. 아버지와의 대화는 정신세계에서 이루어지는 사유이다. 모든 걸 다 잃었다고 생각했는데 걸음을 멈추고 나서야 걸을 수는 있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외형적인 요소를 전부 상실한 주인공은 그제야 내면세계로 걸어 들어간다.

둘째, 소마 주변에서 환경으로 등장하는 인간들을 중심으로 이루어지는 서사이다.

이야기의 흐름을 중심으로 언급되는 문장들은 인간의 적나라한 속성을 날카롭게 조명한다. 다른 사람들도 하나를 말하니 자신이 하나에 하나를 더해서 말하는 것은 아무 문제도 되지 않는다고 믿어버린다든지, 진짜 고통에 이르기 전까지는 삶으로 돌아오고자 하지만 진짜 고통에 이른 후에는 어서 빨리 죽음에 이르기를 소망한다든지, 겁쟁이의 뱃속을 지난 말은 겁쟁이가 된다든지, 습관이 되어버린 삶이 나태한 일상으로 변모하는 과정이라든지. 진실과 거짓, 배반과 신뢰, 야망과 이기심, 진정한 사랑,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루어지는 복수, 복수가 복수를 낳듯 누군가에게 구원되었던 소마가 다시 누군가를 구원하는 과정들은 인간 존재와 삶의 진정한 의미를 생각하게 만든다.

 

혹시 당신이 이 책을 읽으려는 마음이 동한다면 두 번 읽기를 권한다. 아무 생각 없이 내용을 받아들이는 일독은 직역이다. 겉표지에 그려진 멋들어진 바다에서 하얗게 부스러지는 파도의 물방울을 보는 과정이다. 재독에서는 의역하듯 내용의 상징성을 생각해보면서 심해로 들어가 거대한 바다가 품고 있는 무언가를 들여다본다. 당신의 눈앞에 다가올 장면은 내가 본 그것과는 분명 다르리라. 바다는 넓이와 깊이와 온도의 스펙트럼이 커다란 폭으로 펼쳐지는 대상이기 때문이다.

작가는 삶을 살아가는 과정을 여행자로서의 여정에 비유하며 독자에게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진다. 여행자를 멈춰 세우거나 계속 걷게 하는 동인은 무엇인가. 멈춰 세우는 건 지나온 여정에 있다고 한다. 충분했는가, 만족했는가, 이만하면 되었는가, 지쳤는가 하고. 더 걷게 하는 건 내일에 대한 기대에 있다고 한다. 볼 것이 남았는가, 해야 할 것이 남았는가, 닿아야 할 곳이 있는가 하고. 4부에 등장하는 이 문장들에 작가가 말하고자 하는 사유의 핵심이 있다고 해석한다.

두 번째 읽고 나서 표지를 다시 바라보니 바다라고 생각했던 이미지가 우주와 닮아있다. 파도로 부서지는 물방울 위로 우주 공간에 흐드러진 별들이 겹쳐진다. 바닷물을 머금은 채 깊어지는 짙푸름이 원자의 대부분을 이루고 있다는 텅 빈 우주 공간으로 보인다.

우주를 불러오는 책이 있다. 꼬깃꼬깃 접힌 형상기억합금마냥 내 안에 존재하는 지도 모를 우주가 밖으로 화들짝 펼쳐진다. 혹은 서늘하고도 몽글몽글한 우주만한 크기의 풍선이 내 안으로 빨려 들어와 마음이 확 넓어진다. ‘를 경계로 안과 밖으로 펼쳐지는 우주에 압도당한다. 우주에 흡수되듯 몽환적이다. 선택지는 두 가지. 받아들이든지 단지 나를 스쳐가도록 지켜보든지. 당신은 어떤 선택을 할 것인가.

 

과거를 돌아볼 필요가 있는 것은 지나간 일은 하나의 이야기가 되기 때문이다. 과거는 변한다. 변치 않는 사실을 뼈대로 한 채 우리는 해석의 살을 붙인다. 그때 내가 이랬어야 했나. 그러길 잘했지. 지점토를 이용하거나 찰흙을 붙이거나 혹은 커다란 틀을 제작하여 석고 물을 들이붓는다. 나의 서사는 현재의 나를 기준으로 재창조된다. 과거가 매번 다르게 다가오는 이유이다. 정확히 표현하면 과거에 대한 해석이 과거를 달라지게 한다는 것. 그 해석을 위안으로 삼아 미래를 향해 한 발씩 나아갈 수 있는 지도 모른다. 나만의 이정표를 가지고 조금은 덜 불안한 마음으로 내딛는지도.

소설에서도 마찬가지의 의미를 찾는다. 모든 종류의 문학 작품은 이런 속성을 내포하는 건 아닐까. 판타지적 요소가 담겨있든 다큐의 형태이든 인간을 통해 언급되는 모든 종류의 이야기는 바로 인간의 의식을 통과해서 나오므로. 100% 현실적인 이야기는 세상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다. 사건을 보도하는 뉴스도 보도하는 이의 관점에 따라 전혀 상반된 이야기로 탈바꿈하는 경우를 무수히 목도하지 않았는가. 모든 이야기 속에는 나의 삶으로 끌어들여 여행의 지도에 추가할만한 요소가 분명 존재하리라.

어떤 요소를 흡수할 지는 이야기 속으로 걸어 들어가 여행을 하는 독자의 몫이다. 채사장이 언급한 것처럼 이야기는 삶과는 다르고 삶은 지리하게 이어지지만, 우리는 여행을 계속 해야 하니까. 작가는 소마의 여행을 다음과 같이 묘사한다. 그에게 허락된 하나의 좁은 길로 걸어갈 수만 있을 뿐, 멈출 수도 돌아갈 수도 없다고. 소마의 아버지는 말한다. 화살이 아니라 화살을 찾아가는 과정에 의미를 두어야 한다는 것을. 이런 맥락이라면 주인공의 상황처럼 감각기관을 포함한 상실들에 대하여 절망할 필요가 없다. 결과는 순간일 뿐 마침표가 찍히기까지 걸어온 과정 자체로 그 의미는 충분하므로.

 

 

p210, 마지막 줄: 주신다며 주신다면

p235, 밑에서 9째줄: 옮기 때마다 옮길 때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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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로주점 2 (무선) -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84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84
에밀 졸라 지음, 박명숙 옮김 / 문학동네 / 201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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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러니한 건 삶의 대한 관조를 불러일으키는 동기가 죽음일 수도 있다는 점이다. 인간의 삶을 허물어뜨리는 마지막은 무엇일까. 무엇이 인간을 죽음에 이르게 할까. 보드 게임 젠가를 할 때, 삶과 죽음을 생각할 때가 있다. 하나씩 하나씩 나무도막을 빼는 게임 방식에서 겹쳐지는 속성이 있기 때문이다. 굳이 하나를 택한다면 죽음에 가깝다. 예정된 무너짐을 향해 서서히 다가가는 전체는 죽음을 향해 흘러가는 삶과 닮아있다. 게임이 끝나기 직전, 결정적인 나무도막의 역할을 하는 삶의 요소는 무엇일까.

톨스토이의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는 삶에서 진정으로 중요한 요소를 생각하게 하는 작품이다. 작품의 과녁은 분명하다. 삶이다. 작가는 판타지적 요소로 둘러싸인 사랑이라는 아름다운 화살을 의미심장하게 날린다. 짧지만 숭고한 감동을 안겨주는 이야기이다. 톨스토이가 천사를 보여준다면 졸라가 보여주는 대상은 악마에 가깝다. 졸라의 작품은 그림자를 연상케 한다. 톨스토이의 빛과 정반대편에 서있다. 이보다 더 칙칙할 수 없는 죽음을 작정한 듯 보여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졸라의 작품에서 보이는 과녁 역시 삶이라는 점이 묘하다. 다만 이 경우, 과녁을 향해 날아가는 화살은 인간 자체이다. 날렵한 우아미를 뿜어내며 날아가는 화살을 좇아 직접 달려가는 사람은 일견 무모해 보인다. 허나 그에게는 선택의 여지가 없다. 아무 도구도 없는 그는 자신의 몸뚱어리를 화살로 삼아 있는 힘껏 과녁을 향한다. 온몸이 시퍼렇게 멍들어도 단지 나아갈 수밖에 없다.

 

목로주점은 파리 하층민들의 삶을 보여주는 이야기이다. 졸라가 기획한 스무 권의 연작소설 루공마카르 총서중 일곱 번째 작품이다. 세탁소 주인으로서의 소박하고 평화로운 일상을 꿈꾸던 여주인공의 삶이 차츰 몰락하다 파국에 이르는 과정이 그려진다. 삶의 몰락에는 여러 계기들이 있으리라. 이 작품에 등장하는 결정적인 요인은 술이다. 소설의 제목목로주점은 노동자들을 대상으로 싸구려 독주를 파는 주점을 의미한다. 치명적인 타격을 입히는 돌발 사건을 상징한다는 점에서 복합성을 띠는 제목이다. 주점을 들락거리면서 등장인물들의 삶으로 스며드는 알코올의 농도는 점점 짙어진다. 기분을 살짝 들뜨게 하는 가뿐함에서 출발해서 중독에 이른다. 그러데이션으로 변화하는 과정이 초 단위를 묘사한 듯 디테일하다.

주관적으로 판단한 이 작품의 주제는 죽음이다. 한 사람을 죽음으로 몰고 가는 계기는 여러 가지가 있을 터이다. 자아실현이 불가능한 상황이나 사랑의 실패 혹은 무기력, 불가항력적인 사건, 추위, 배고픔 등 다양하리라. 졸라는 여주인공에게 다양한 시련을 투척한다. 불륜, 알코올 중독, 구타, 가정폭력, 추위, 배신, 절망, 야유, 기아 등이 번갈아가며 그녀를 덮친다. 여주인공은 심지가 굳은 인물이었다. 적어도 소설 초반에는. 어떤 시련이 와도 긍정 마인드로 소화하는 강인한 정신력의 소유자였다. 그녀의 삶이 잠식되는 과정은 서서히 이루어진다. 돈이 곤궁해지면서 살림살이를 하나 둘씩 떼어 전당포에 맡기는 과정처럼 그녀를 둘러싼 보호막은 점점 앙상한 뼈대를 드러낸다. 작가는 시련이 묻은 나무도막을 주도면밀하게 하나씩 빼나간다. 결코 서두르지 않는다. 어디까지 버티나 보자. 작정한 졸라는 주인공의 삶을 서서히 졸라간다.

 

이보다 더 운이 없을까 싶을 정도로 파란만장한 삶이다. 세간을 몽땅 들고 날랐다가 뻔뻔한 아일비백으로 컴백하여 기생충 모드로 승승장구하는 교활 끝판왕이 남편 1. 더없이 건실했건만 초심을 잃고 끝내 알코올 중독으로 구타를 일삼다 삶을 마감하니 남편 1과 우열을 가리기 어려운 인간이 남편 2이다. 두 명의 인간이 그녀 삶을 쌍으로 둘러싼 양대 산맥이다. 주인공의 불운을 조롱과 희열의 대상으로 삼는 주변인들의 말빨은 어지간해서는 상처조차 입히지 못한다. 창녀로 전락한 딸은 인과관계의 결과물로 생각될 정도이다.

멀쩡한 등장인물은 손에 꼽을 정도이다. 순결한 사랑의 결정체인 최후의 보루 대장장이, 알코올 중독자인 아비에게 구타를 당하면서도 죽는 순간까지 맑은 영혼을 고수하는 모습이 성당의 촛불 같던 여덟 살 엄마 아이, 출연 비중이 그다지 크지 않았던 아들, 드라마 <도깨비>에 등장한 나비 신을 연상케 하면서 그녀의 시신을 거둔 장의사 영감 정도랄까.

차라리 날 죽여랏! 제발 깨작깨작 괴롭히지 말고! 사극에서 형틀에 묶인 죄수는 부르짖는다. 가장 견디기 어려운 고문은 죽음의 경계선 근처에서 알짱거리는 치사한 고문이라 했던가. 고통은 실제로 느리게 지나간다고 한다. 인간의 뇌가 고통이 또 다시 올 경우를 대비하여 초단위로 이를 새기기 때문이라나. 주인공의 배고픈 하루가 유난히 더디게 흘렀던 데에는 과학적인 이유도 있었던 거다. 물의 온도를 서서히 높여갈 때, 냄비에 넣은 개구리는 스스로 죽는 것도 모르고 죽임을 당한다지. 주인공의 삶 역시 조금씩 이어지는 상실로 인해 서서히 식어갔던 걸까. 상실이 지속되면 무기력으로 변모하는가. 주인공의 박탈을 좇아가며 생각한다. 무엇이 인간을 살아가게 하는가. 무엇이 인간을 죽음으로 몰아가는가. 무엇이 인간을 무너뜨리는가.

 

졸라의 작품이 인상적인 이유는 그의 문체에 있다. 디테일한 묘사와 속도감 있는 전개는 다큐멘터리 카메라가 추적하는 영상을 보는 듯하다. 어설프거나 어정쩡하거나 어수선하지 않으면서 거침없이 대담하다. 글로 그려진 흑백의 애니메이션을 접하는 기분이다.

한 때 여주인공의 자아실현의 정수였던 세탁장을 묘사한 장면은 영상 뿐 아니라 음성 지원이 되나 착각을 불러일으킬 정도로 생생하다. 시끌벅적한 장소에서 책장을 펼쳐도 금세 몰입하게 된다. 흡인력이 크다.인간 짐승에서는 거대한 짐승처럼 헐떡이는 기차가 그토록 나를 숨차게 하더니. 졸라는 활유법의 연금술사인가 지존인가. 기계들을 커다란 짐승으로 묘사하면서 피부에 닿을 정도로 상황을 적절하게 묘사하는 능력이 탁월하다. 그의 작품을 고작 두 번째로 접하지만 장마철스러운 묘사는 이제껏 읽어보았던 타작가의 도서들을 통틀어 원탑이다. 후텁지근한 표현들이 예술이다. 숨을 제대로 쉬지 못할 정도로 코앞에서 증기가 훅훅 뿜어지는 듯하다. 한겨울의 매서운 냉기를 묘사할 때도 여전히 증기가 등장하니 대비 효과로 더욱 에이는 온도가 된다.

이미지 효과는 특히 소설 초반에서 등장인물들이 열을 지어 루브르 박물관의 작품들을 둘러보는 장면에서 인상적으로 등장한다. 작가가 소설에서 소개해주는 미술작품들을 검색하면서 읽었는데 하나의 작품이 시선을 붙든다. 프랑스 낭만파 화가 제리코의 <메두사 호의 뗏목>이라는 그림이다. 소설을 다 읽은 다음, 그림을 한 번 더 찾아본다. 전율이 인다. 졸라가 소설 목로주점을 통해 묘사하고 싶었을 메시지를 시각화한다면 이 작품이 아닐까. 그림이 주는 느낌과 소설의 그것이 높은 싱크로율을 보인다. 전체적인 색감과 인물들에 대한 디테일한 묘사라든지 그림의 탄생 배경이 된 실화라든지 그림이 전하고자 한 메시지라든지. <메두사 호의 뗏목>의 문학 버전이 이 소설이라 말하고 싶을 정도이다.

 

등장인물의 대화 속에는 정치적 인물과 사건과 시대적 상황이 등장한다. 은근히 촌철살인이다. 이를테면 하루에 5프랑씩 벌어서 지금처럼 먹고 자게만 해준다면, 누가 왕이나 황제가 되는지 아무 상관없지 않느냐는 말이다. 사극에서 표현되는 우리의 경우도 별반 다르지 않다. 왕의 이름도 비밀인 마당에 용안을 쳐다보는 행위는 언감생심이다. 대부분의 백성들은 왕의 얼굴조차 모르고 살았다지. 누군가 역모를 꾀하여 왕이 바뀐다 해도 그들만의 리그였으리라. 하층민의 삶에는 동서양 구분이 별 의미가 없는 걸까. 언젠가는 기계가 노동자들을 모두 죽이고 말거라는 내용도 등장한다. 팍팍해지는 그들의 삶은 조금씩 줄어들어가는 임금의 액수나 고용인들의 감소로 대변된다.

화려한 파리의 모습도 대조적으로 하층민들을 그림자 속으로 몰아넣으며 극대화시킨다. 주인공을 우울하게 만드는 사실은 절망으로 빠져드는 중에도 동네는 점점 아름다워지고 있다는 점이다. 진창 속에 빠져있을 때는 머리 위를 환하게 비추는 햇살이 달갑지 않다며 작가는 독백처럼 담담하게 그들의 상황을 표현한다. 삶의 온도차가 극명하게 묘사되는 문장이다.

부자의 삶에서 지폐가 오간다면 서민의 그것에는 동전이 대부분을 차지한다. 중간 중간 등장하는 화폐는 지폐가 아니라 동전이다. 이거 사는 데 얼마, 저거 사는 데 얼마, 숫자가 붙은 장면들은 인물들의 손가락을 따라 동전을 세며 계산을 맞춰보고 싶은 마음이 들 정도이다. 동전의 수치는 하층민의 삶을 보다 선명하게 묘사하는 장치로 작용한다. 부자는 지갑 속 돈이 정확하게 얼마인지 모른다는 말이 있다. 소설 속 등장인물들은 집요하리만치 동전 몇 개에 집중한다. 치사하다는 생각에 차라리 대신 던져버려 주고 싶을 정도로 동전을 사이에 둔 실랑이가 벌어진다. 인간이란 이토록 원초적인 존재인가. 자본주의의 밑바닥에서는 인간 존재 대신 동전을 중심으로 세상이 돌아가나. 인간이 우선이어야 하지 않느냐며 거세게 항변해야할 존재들이 동전을 중심으로 삶을 움직인다. 각자에게 할당된 빈곤의 몫을 감당해야만 한다는 문장이 유난히 아프다.

 

어떤 이에게는 당연한 것이 다른 이에게는 꿈이 될 수 있다. 지하에 사는 이에게 1층에서 사는 것이 꿈인 것처럼. 별 탈 없이 일하면서 언제나 배불리 빵을 먹고 지친 몸을 누일 깨끗한 방 한 칸을 갖는 것, 침대, 식탁과 의자 두 개면 충분한, 아이들을 제대로 키우고 좋은 시민으로 만드는 것, 맞지 않고 사는 것. 주인공이 말하는 문장 속에서의 삶이 지금의 나에게는 당연한 모습이다. 소설 초반에 서술되는 꿈은 얼핏 소박하고 평범해 보인다.

지금보다 훨씬 어렸을 때는 평범한 일상이 무난하게 이루어지는 대상이라 여겼다. 하지만 점점 깨달아간다. 평범한 삶이란 인간의 염원이 만들어낸 허상이 아닐까. BGM처럼 늘 곁에 맴돌기를 원하지만 중심에 있는 우리는 결코 포함될 수 없는 여집합 같은 대상 말이다. 주인공이 말한 대로 꿈이 이루어진 순간이 잠깐 있기는 했다. 몰락을 상상조차 못하던 삶이 무너지는 과정을 보면서 깨닫는다. 삶에서는 한순간도 긴장을 늦추지 않아야 함을. 현실 세계에서도 전혀 불가능한 장면이 아니므로.

어떻게 하면 인간의 삶이 무너지는가.목로주점을 읽다 보면 인간을 대상으로 하는 탐구 장면이 연상된다. 꿈을 실현하거나 사랑을 하는 것도 삶에서 중요한 요소일 터이다. 이 책을 읽고 나니 결국 이런 것들은 인간이 걸치고 다니는 옷에 불과한 게 아닌가 싶다. 사회적 관계에서는 중요하지만 엄밀히 말하자면 생존의 필수요소는 아닌 것 말이다. 거칠게 표현하자면 홀딱 벗고 다녀도 살아지기는 하니까.

어디까지 내려가 봤니. 엑스트라와 조연 사이의 비중으로 등장하는 노인은 다음과 같은 말을 내뱉는다. 아무짝에도 쓸모없다고 인지한 자신을 가장 괴롭게 하는 건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 살아 있다는 것이라고. 마지막 한 방울까지 쥐어짜이는 주인공. 몸뚱어리만 남게 된 존재는 생명 활동을 유지하는 데 필요한 최소의 요건을 갈구한다. ‘먹을 것이다. 삶의 외피를 한 꺼풀씩 벗겨낸 작가를 따라 인간 존재의 민낯을 물끄러미 응시한다.

 

인간 말종들은 멀쩡히 활개치고 다니는데 죽는 이들은 상대적으로 저항하기 어려운 처지에 놓인 대상이다. 졸라가 묘사한 죽음의 유형은 각기 상징하는 바가 다르다. 면밀히 분석하면 죽음의 이유가 근본적으로 조금씩 차이가 있다.

첫째, 남편2 어머니의 죽음이다. 달관의 경지에 도달하신 어르신들이 우스갯소리로 밤새 안녕이라 하시던가. 건강하게 살다 죽음을 맞이하는 건 인간이라면 대부분 바라는 순간이리라. 소설 속 노인은 병이 들기는 했지만 생로병사의 수순을 따랐다고 보면 넓은 의미에서 자연사에 가깝다. 인력으로 어쩌지 못하는 영역이다.

둘째, 아비에게 맞아죽는 아이의 죽음이다. 주변인에 의한 사건과도 같은 죽음이다. 이 또한 아이의 입장에서는 저항이 거의 불가능한 상황이다. 이 경우 확실히 나쁜 인간이 존재한다. 설령 의도치 않았대도 결코 용서할 수 없는 죽음. 잘못의 비율을 따진다면 100% 아비의 탓이다.

셋째, 공동주택 계단 밑 방에 거주하던 노인의 죽음이다. 굶어죽는 삶은 일종의 복선이다. 구석으로 쫓기듯 삶의 무대에서 내몰린 여주인공이 마지막에 존재했던 장소가 이 노인의 방이다. 현실이라 해도 거지의 삶으로 설정되었을 때부터 그의 죽음은 예정되었는지도 모른다. 삶은 이변이 일어나는 소설이 아니니까.

넷째, 여주인공의 죽음이다. 이게 좀 애매하다. 음습한 환경 속에서 그녀의 주변에는 나쁜 인간들이 득시글댄다. 파멸의 구덩이로 유혹하는 놈들, 흡혈귀처럼 등쳐먹는 놈들, 불행을 관람하며 희열을 느끼는 주변인들이 파리 꼬이듯 번갈아 왔다간다. 한데 그녀가 걸어간 길이 과연 그들만의 잘못일까. 냉정하게 판단하면 최후의 선택은 주인공이 한 거 아닌가. 다른 선택으로 방향이 달라질 수도 있지 않았나. 3자의 관점에서 보면 삶의 변곡점들은 분명 존재했으니까.

 

나름 행복한 삶을 맛보았던 인물이 소설 속 거지 노인과 같은 장소에서 비슷해 보이는 이유로 죽음을 맞이한다는 결말은 충격적이다. 그녀의 삶이 먹먹한 이유는 처음에 보였던 태도와 종말을 향해 치달으면서 변화해가는 모습에서 비쳐지는 온도차가 상대적으로 크게 다가오기 때문이다. 소박한 꿈을 꾸며 자아성취를 하고 주변인들을 넓게 포용하던 인물, 불의를 보면 참지 못하고 한때 이슬을 머금은 싱그러운 꽃과 같던 그녀. 점점 수분을 잃어가면서 마른 꽃이 되기까지의 과정을 관찰카메라로 따라가듯 그리는 작가. 서술이 담담해서 더욱 묵직하다. 생명이지만 과연 생명일까 싶은 단계. 훅 자그마한 바람임에도 한순간에 우수수 부스러진 꽃잎의 잔해를 보는 것 같은 마음에 먹먹한 여운으로 맴돈다.

삶이 무겁고도 무서운 이유는 서서히 진행되는 속도에 있다. 사소한 사건들로 서서히 물들어가고 변해가는 과정에는 스스로도 변화를 인지하지 못하는 순간이 담긴다. 차갑게 느껴지던 물체도 오래 잡고 있으면 열적 평형이 이루어진다. 그 속도는 의외로 느리다. 이게 아니다 싶어 움찔하던 대상도 인간에게 녹아들면 자연스럽게 융화된다. 소설 속에서 내내 많은 인물들을 천천히 허물어뜨리던 알코올 중독처럼 말이다. 그들의 첫 잔도 포도주 한 잔처럼 가뿐했으리라. 졸라는 사소한 시작이 습관이 되다 일상으로 흡수되기까지의 과정을 촘촘한 시각으로 조명한다. 삶을 좀먹고 파멸시키는 요소도 출발은 사소했음을 보여주며 경각심을 불러일으킨다.

조금이나마 위안이 되는 건 삶의 극한으로 내몰린 여주인공이 최후에 했던 선택이다. 여전히 그녀를 사랑하는 대장장이가 내미는 손을 끝내 잡지 않은 것. 꺼져가는 삶을 인지하면서도 마지막까지 지키고 싶었던 건 무엇이었을까. 인간의 깊은 내면에 존재하는 고갱이와 같은 자존감 혹은 존엄성이라 불러도 될까.


 

(1) p254, 밑에서 3째줄: 그네그녀

(덧붙임) 소설에 몰입하는 데 잠시 방해를 받은 부분이 있다. 남편 2의 엄마로 언급된 작품 속 노인은 1252쪽에서 시력을 완전히 상실하고 말았다.’고 묘사된다. 이 문장을 눈이 멀었다는 의미로 해석한 나는 이후의 문장들에서 노인이 멀쩡하게 주변 사람들을 관찰하는 장면을 읽고 혼란에 빠진다. 살짝 헷갈린다. 한쪽 눈인가. 되돌아가서 해당 페이지를 확인한다. 문장 어디에도 한쪽이라는 말은 보이지 않는다. 2102쪽에서 한 눈이 이미 죽어 있었다는 문장이 나올 때까지 전혀 중요하지 않지만 옥의 티처럼 끼어있는 한 문장이 몹시 껄끄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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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ustmee@daum.net 2022-01-20 13:10   좋아요 2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안녕하세요 나비종 님!

<목로주점>을 번역한 박명숙입니다.
에밀 졸라의 <목로주점>을 잘 읽으시고 정성스럽고 멋진 리뷰 남겨주셔서 감사합니다!^^
리뷰가 너무 문학적이고 몇 번을 다시 읽게 만드는 힘이 있는 것 같아요.

다시 한 번 감사드리며 말씀하신 텍스트의 오타와 오류에 관해 설명드립니다.

먼저 1권 254쪽에서 지적하신 ‘그네‘는 ‘그녀‘의 오류가 아니라 ‘그네‘가 맞습니다.
‘그네‘는 ‘앞에서 이미 이야기한 사람들을 가리키는 삼인칭 대명사‘로 254쪽의 문장에서는 ˝무위도식하는 사람˝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또한 252쪽의 쿠포 엄마의 눈에 관한 문장은 이런 원문을 우리말로 옮긴 것이랍니다.
˝Les yeux de maman Coupeau etaient completement perdus.˝ 이 문장을 우리말로 직역하면 ‘쿠포 엄마의 두 눈이 모두 망가졌다‘ 혹은 ‘쿠포 엄마의 두 눈이 완전히 시력을 상실했다‘가 맞으나 나비종 님께서 지적하신 대로 앞뒤 내용이 맞지 않는 문제가 생기므로 약간의 수정이 필요할 듯합니다. 한편으로는, 쿠포의 누나 부부인 로리외 부부가 자기 엄마의 문제를 다소 과장해서(허풍) 말하는 식으로 해석될 수도 있고요(사실 여기서는 맥락상 이런 해석이 더 맞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독자로서는 헷갈릴 수도 있는 부분이니 조금 수정하는 편이 나을 듯합니다. 좋은 지적 감사드리며 다음 쇄에서 수정된 내용을 반영할 것을 말씀드립니다^^ 참고로, 아주 가끔씩 작품의 인물 묘사 등에서 이처럼 앞뒤 내용이 살짝 어긋난 것이 있어 역자가 임의로 수정하여 옮기고 각주를 달기도 합니다. 실제로 그렇게 한 적이 있고요. 하지만 이 부분에서는 미처 그 점을 세심하게 살피지 못한 점 사과드립니다. 많은 분들이 에밀 졸라의 <목로주점>을 사랑해주셔서 너무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고요, 이 자리를 빌려 <목로주점>의 번역이 무척 어려웠음을 말씀드리고 발생한 오류에 대해 너그러운 이해를 바라겠습니다. 앞으로도 에밀 졸라의 작품을 많이 사랑해주시기를 바라며 다시 한 번 깊은 감사를 전합니다!

박명숙 드림

나비종 2022-01-20 11:25   좋아요 1 | URL
긴 분량의 작품을 흡인력 읽게 접할 수 있도록 하는 데는 일차적으로 작가의 원문이 좋아야 하지만 번역자의 역할도 만만치 않은 비중을 차지함을 알고 있습니다. 원문으로 접하신 졸라의 문장은 얼마나 숨막혔을까요. 콘서트 직관하신 거잖아요.ㅋㅋ흘리신 땀방울을 짐작할 수 있을 정도로 정성스런 번역이어서 독자로서는 술술 읽혀서 많이 감사했습니다. 이토록 인상깊은 작품을 어렵지 않게 접할 수 있어서 행운이었구요. 세심한 설명으로 이해의 폭이 더욱 넓어졌음에 다시 한 번 감사드립니다^^

1. 그네에 대하여
사실 3인칭의 그건가 잠시 생각하기는 했습니다. 그러다 ‘그네‘란 표현을 ‘그네들‘처럼 복수형으로 활용되는 경우를 보다 많이 본 터라 단순한 오타인가 생각했더랬죠. 다시 읽어보니 맥락상 ‘그녀‘보다는 ‘그네‘가 더욱 자연스럽게 어울리네요~ㅎㅎ

2. 눈깔에 대하여
제가 불어를 전혀 모르지만 원문을 활용해서 설명해주시니 더욱 확실히 이해가 됩니다. 번역문 ‘그사이 쿠포의 엄마는 시력을 완전히 상실하고 말았다.‘를 보면 로리외 부부의 말이라기보다 맥락상 제르베즈의 시선이나 작가의 전지적 관점에 가까운 설명으로 해석되거든요.
유명한 작품에서도 인물 묘사가 어긋난 경우를 간혹 보았습니다. 이번 작품에서는 졸라의 표현상 오류라는 생각이 드네요. 이 부분은 번역자님의 말씀대로 추가 설명이 조금 필요한 듯 보입니다.^^

물감 2022-01-20 22:31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와 리뷰 진짜 길게 쓰셨네요 ㅎㅎㅎ 그나저나 제목 진짜 잘 뽑았습니다. ‘사람은 무엇으로 죽는가.‘ 비유하신 젠가를 생각해본다면 졸라가 얘기하는 삶이란, 1에서 100으로 가는 게 아니라 100에서 1로 내려가는 건가 싶어지네요. 사실 저도 좀 현실주의에 비관론적인 편이어서 인생은 아름답다니 하는 소리를 좋아하지 않는데요, 그런 점에서 졸라의 글은 좋더라고요. 막 철학스럽지도 않고요 ㅎㅎ

읽는 내내 술냄새에 절어있는 듯한 기분이었어요. 워낙 술판이어서요. 남편이 술먹고 개가 되는데도 기 세워줘야 한다는 사고방식은 어떻게 만들어진건지 참. 온갖 시련에도 나름 잘버틴 걸 보면 분명 바보는 아닌데 말이죠. 읽는동안은 자연스럽게 넘어갔지만 독서를 멈추고나면 정말 이해가 안되는 캐릭터였어요.

인과응보도 그렇지만 참 더럽게 운없는 인생이에요. 자식복도 없고, 가족도 이웃도 어쩜 그렇게 협조를 안해주나요. 어휴. 워낙 시련의 연속을 겪다보니 그게 시련인 줄도 모르고, 스스로가 파멸하고 있다는 것도 못 느꼈겠죠. 사람은 무엇으로 죽는가. 심오하게 생각해보게 되네요!

저도 작가의 문체를 유심히 봤어요. 미국의 장르소설가들이 자주 쓰는 하드보일드 기법도 들어간 거 같아요. 그래서 안쓰럽고 딱한 상황에서도 침착함을 유지할 수 있었달까요 ㅎㅎ<인간 짐승>보다 이 책이 훨씬 더 자연주의에 가깝던데요. 날것의 이야기, 날것의 문장! 몇 권 더 읽어보고 즐겨보시죠 ^^

물론 제르베즈의 이야기가 주내용이지만 그보다도 하층민들의 삶을 노래한 작품이었다고 보여져요. 확실히 먹고살기 바쁜 백성들은 왕에게 관심이 없죠. 기계는 점점 발전해서 일자리를 빼앗아가고, 돈이 없으니 사람들의 교류도 점점 죽어버리는, 그러면서도 동네는 나날이 화려해져가는 내용도 잘 집어주셨어요. <인간 짐승>에서도 후반부에 마구마구 몰아치더니, 이 책에서도 그것을 보여주네요. 아 진짜 감탄의 연속입니다. 그러면서도 작가의 자연주의를 벗어나지도 않으니까요. 졸라 천재에요 ㅎㅎㅎ

정녕 죽음으로 삶은 완성되는가. 나비종님의 글을 읽으며 드는 생각입니다. 누군가는 살았을 때보다 죽어서, 죽고 나서야 삶을 인정 받기도 하니까. 삶이란 참 복잡다단한 거에요ㅎㅎㅎ 2년 넘게 코시국을 보내보니 더욱 실감하거든요. 잘 버티고 버텨서 삶이란 이런 것이다!를 저도 쉽게쉽게 말할 날이 오길 바라며...^^ 1월도 수고하셨습니다. 2월 모임때 만나요 ㅎㅎ

나비종 2022-01-21 01:22   좋아요 2 | URL
나물 모임을 하다 보면 리뷰를 세 번 쓰는 느낌이 드는 건 기분 탓이겠죠?ㅋㅋㅋ 단편 소설을 영접하는 자세로 물감님의 댓글을 읽고 있습니다. 가끔 곰국도 연상되요.
어떤 고전이든 해체하여 발골해드린다음 깔끔하게 우려드릴게요~! 뭐 이런?ㅎㅎ
100에서 1로 내려간다는 말씀을 하시니까 언젠가 주워들은 영화 속 내용이 생각나네요. 제목도 줄거리도 모르지만 거꾸로 가는 시계마냥 등장인물들의 시간이 점점 줄어드는 거예요. 카운트다운 하듯이. 죽음의 시간이 예정되어있는 거죠. 현실에서도 앞으로 남아있는 날들을 알게 된다면 인간은 어떤 자세로 삶을 대하게 될까요? 내일 지구가 멸망할 지라도 한 그루의 사과나무를 심을 수 있을까요?ㅎㅎ
음, 저는 현실주의에 낙관적인 편입니다. 인생은 바라보는 거리에 따라 잠시 아름다워 보.일.때.도 있다는 생각ㅋㅋ 칙칙한 거 딱 질색인데 졸라 오빠는 좋습니다. 츤데레 할 말 다하면서 메시지 팍팍 심어주시니 말이죠. 멋지면 다 옵빠~ㅋ

맞아요, 술냄새ㅎㅎ 오감을 자극하는 묘사는 크~ 소설 초반 내내 공중목욕탕 속에 들어앉아있는 것처럼 숨이 턱턱 증기 뿜뿜하더라구요.
그러게요. 온갖 시련에도 긍정 마인드를 장착한 그녀가 분명 바보는 아닌 것 같은데 어찌 그리 잘 휩쓸리는지...속터지는 캐릭터였죠.

자식이 그렇게 된 건 환경의 영향이 더 큰 것 같으니 나나의 입장에서 부모복 참 없다는 생각이 들어요.
하도 이리저리 부딪히다보니 나중에는 아픈 줄도 모르고 상처받는 캐릭터ㅠㅠ 익어가는 줄 모르고 냄비 속에서 헤엄치는 개구리가 생각나더라니까요.

<인간 짐승>보다 더 현실감이 극대화된 게 세탁소에서도 그리 후끈하게 만들더니 후반부에 춥고 배고픈 장면들은 아주 정점을 찍더군요. 정신없이 몰입했어요. 덩달아 허기지더라구요.
전체적으로 커다란 주제를 따라가다보니 불륜이나 쿠포 미쳐 날뛰는 건 눈에 들어오지도 않았습니다.
날 것, 몇 권 더? 콜~ 좋습니다.ㅎㅎ

시대상이 곁들여지니 당시 독자들은 거의 다큐 수준으로 피부에 확 다가왔겠구나 싶었습니다. 졸라 천재ㅋㅋㅋㅋㅋ

흠~ 그러게요. 죽음이 반드시 마침표로 작용한다고 보기도 어렵군요. 투비컨티뉴드도 있으니...으아~ 삶이란 가장 풀기 어려운 문제인가 봅니다. 존버가 답일까요?ㅋㅋ
의미있는 1월을 보내게 해주셔서 감사드려요~ 2월에도 열심히 달려볼까요?ㅎㅎ^^
 
휴먼 - 어느 외계인의 기록 매트 헤이그 걸작선
매트 헤이그 지음, 정현선 옮김 / 미래엔아이세움 / 2014년 4월
평점 :
품절


하나의 영역에만 머무르기에 그 의미하는 바가 큰 개념들이 있다. 관성도 그 중 하나. 어원은 게으름으로 변화를 싫어하는 개념이다. 관성을 맨 처음 언급한 과학자 케플러도 이토록 광범위한 의미로 적용되리라는 것을 상상하지 못했으리라. 가시적으로 표현할 수 없는 분야에 사용된다면 보다 적절한 의미로 다가갈 수 있겠다. 이를테면 삶과 인간의 성향 같은 인문학적 영역 말이다.

정지의 반대 개념은 움직임이다. 일반적으로는 그렇지만 100% 옳은 문장은 아니다. 관성의 영역에 들어서면 움직이는 상황이 정지해있는 것과 동일한 경우도 있기 때문이다. 정반대의 개념이 하나로 묶인다. 모순처럼 여겨지지만 몇 번을 음미하면 깨닫게 된다. ‘움직임이 제로에서 무한대까지 폭넓은 범주를 지닌다는 사실을. 움직임은 조금 더 디테일하게 묘사되어야 한다. 또 다른 부사어가 추가되어야 제대로 설명된다. ‘어떻게움직이느냐가 그 정체성을 결정한다.

관성에 포함되는 움직임은 제로 상태의 개념이다. 속력이든 방향이든 아무런 변화 없이 단지 움직일 뿐이다. 영원히 직진만을 지속하는 상황이다. 생물이라면, 살아있지만 살아있다고 보기 어려운 존재랄까. 정반대의 개념이 결합된 식물인간에 비견된다. 동물이지만 움직일 수 없다는 점에서 식물의 정체성을 지닌 사람. 식물을 규정짓는 광합성도 하지 못하니 이도저도 아닌 서글픈 대상 말이다.

 

소설휴먼은 지적으로 뛰어난 외계인이 리만 가설을 증명한 수학자로 변신하여 그의 아내와 아들을 죽이라는 지령을 수행하려다 그들을 사랑하게 되어 인간으로 눌러앉는다는 이야기이다. 키워드는 인간의 관계사랑이다. 저자 매트 헤이그는 주제를 표현하기 위해 낯설게 하기기법을 도입한다. 문학의 본성이야 근본적으로 낯섦을 전제하지만 그는 모든 개념을 새로 정의하고자 한다. 인간이라면 당연하게 여기는 개념 하나하나에 낯섦을 불어넣으려 한다면 인간의 여집합은 필수적이다. 외계인 능력자 등장하신다.

많은 이들이 당연함의 의자에 편하게 앉아 세상에 당연한 것은 없다고 당연하게 말한다. 저자는 최소한의 의자조차 걷어차고 벌떡 일어난다. 천을 떠다 옷을 만드는 게 아니라 씨실과 날실을 엮어 천을 직조하는 과정에서부터 출발한다. 이런 시도를 하는 저자를 따라가는 독자는 당연하게 여기던 개념들을 새로운 시각으로 바라보게 된다.

당연함의 함정에 가장 먼저 빠져들기 쉬운 관계는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 저자가 바라본 관계의 출발점은 가족이다. 그는 이 가족의 구성원을 해체한다. 아내와 자식과 남편을 민낯으로 바라보게 한다. 독자는 주인공을 바라보며 덩달아 주변을 돌아보게 된다. 편견 없이 바라보는 가족의 구성원들이 새삼 낯설다. 완전한 객관성이란 존재하기 어렵다지만 약간의 거리 두기만으로도 상당히 효과적이다.

 

마르셀 뒤샹의 변기<>이 되는 순간, 마음에는 낯선 바람이 분다. 예술에도 적용되는 낯설게 하기는 러시아의 형식주의자 빅토르 쉬클로프스키가 제안했다는 개념이다. ‘형식이라 하면 얼핏 실속 없는 껍질, 물건을 잠시 둘러쌌다 버리는 포장재가 연상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형식은 내용을 효과적으로 전달하는 수단이 된다. 형식보다는 내용이 알차야함은 물론이다.

문학에서는 형식도 어느 부분 중요하다. 내용과 형식의 범주를 어디까지 보느냐에 따라 해석이 달라지겠지만 형식은 독자의 시선을 효과적으로 끌어당기는 최전선에 있다. 묵직한 산문보다 몇 줄의 시가 효과적으로 메시지를 전달할 수도 있다. 시는 블랙홀처럼 많은 것들을 압축해서 넣어야 한다. 엄청난 내공이 필요한 장르이다. 산문보다 시가 어렵다는 이유도 여기에 있으리라.

많은 작가들이 관계사랑을 나름의 방식으로 표현한다. 외계인을 도입하여 인간을 둘러싼 모든 것들을 다시 정의한 매트 헤이그의 선택은 결과적으로 상당히 효과적이었다. 무엇을 재현할 것인가도 중요하지만 어떻게 표현할 것인가도 못지않게 중요하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작품이다.

관성의 옷을 입은 대상 중 가장 경계해야 할 것은 관계라고 생각한다. 이 책에서 시선이 가장 많이 간 부분은 아내와의 관계, 아들과의 관계였다. 분명 사랑에서 출발했을 관계성은 관성의 법칙이 적용되면서 점점 퇴색된다. 사랑이 메말라버린 채 관계만이 남은 삶. 그들의 연결은 문서 위의 화석인 듯 굳어진다. 그들에게 사랑은 과거형이다. 외계인은 관성을 깨뜨리는 외부의 자극과 같다. 저자는 이를 통해 관계사랑을 새로운 시선으로 바라보라 속삭인다.

 

관성은 사람을 무감하게 만드는가. 당연하다 여겼던 것들을 돌아본다. 마음의 집에 당연하게 놓여있던 가구들이 들썩인다. 신선한 바람이 불어 들어온다. 바람은 가구와 만난 최초의 순간으로 나를 데려다놓는다. 나만의 정의로 이름 붙여져 내 주변에 놓인 대상, 어느 순간부터 서서히 존재감이 흐려지던 무엇을.

태양이 하나인 것은 당연한가. 달이 지구 주위를 맴도는 건 또 어떠한가. 구름, , , 바람, 안개에 이르기까지. 날씨에 익숙하지 않은 공간이 어딘가에는 존재할 텐데. 순간 이동, 물질 변환, 생체 설정 등 컴퓨터 프로그램을 재설정하듯 버튼 몇 개로 가능한 세상. 여행기 캡슐, 문자 캡슐, 알약 먹듯 책을 삼키며 소화하는 존재를 상상하며 즐거웠다. 일주일을 보내는 방식에 대한 제안이 새삼스러웠다. 일주일을 힘들게 허덕이고 주말과 휴일 이틀만을 즐기려할 게 아니라 닷새를 신나게 보내는 방식으로 관점을 바꿔보라는 것.

주인공이 지니고 다니는 기프트에도 감탄한다. 저자의 네이밍 중 베스트라 꼽는다. ‘gift’선물또는 재능을 의미한다. 의미를 곱씹으면 정반대의 개념을 내포한다. 대개의 경우, 선물은 밖으로부터 온다. 반면 재능은 가지고 태어난 능력이니 안으로부터 발휘되기 마련이다. 주인공의 기프트를 보며 나의 기프트를 생각한다. 레벨 차이가 엄청 나겠지만 나에게도 분명 기프트가 있으리라. 그게 어떤 재능이든 선물로 여기며 늘 감사하는 마음으로 살아가고 싶다.

 

내용면에서 굳이 아쉬운 점을 찾자면, 아들을 사랑하기까지의 동기가 살짝 억지스럽다는 점이다. 아내에게 사랑을 느끼는 과정은 첫눈처럼 너에게 갔다 쳐도 그 짧은 교류로 부성애가 느껴질까 싶은 거다. 외계인 주인공님! 보나도리아에도 금사빠가 있을 테죠?

작가의 또 다른 소설 미드나잇 라이브러리에서도 느꼈지만 매트 헤이그의 강점은 후반부의 휘몰아침에 있다고 본다. 소설의 전개에서 음악이 느껴진 달까. 크레센도인 듯 점점 세지면서 아첼레란도처럼 점점 빨라진다. 이런 이유로 마지막 책장을 덮고 나면 개운하다. 뒷맛이 깔끔한 소설이다.

휴먼 2가 등장한다면 다른 버전의 외계인은 어떨까. 외계인이라고 전부 우리 지구인보다 뛰어나리라는 법은 없지 않은가. 이 광활한 우주에 우리보다 덜 뛰어난, 보살펴주어야 하는 외계인도 있지 않을까. 그런 존재가 억 년에 한 번씩 부는 차원 이동 폭풍에 휘말려 어쩌다 지구로 떨어지는 거다. 지구인으로 귀화되는 결말은 똑같다. 과정은 거울처럼 이루어진다. 소설의 핵심은 이 외계인에게 휴먼을 알려줘야 한다는 거다. 매트 헤이그의휴먼뛰어난 외계인이 인간의 본성을 외부에서 깨닫고 습득하는 이야기라면, 휴먼 2는 지구인의 내부에서 스스로 나온다는 점이 다르다. 어떤 점을 발췌하여 어떻게 가르쳐줄 것인가가 핵심이다. 가르치려면 근본적으로 제대로 알아야 하니까. 당신이라면 하얀 도화지에 인간의 무엇을 어떻게 언급하겠는가.

 

같은 작가의 글을 두 번씩이나 찾는 데에는 이유가 있다. 처음의 선택은 우연의 요소가 개입할 수 있다. 두 번째는 순전히 자발적인 의지의 소산이다. 그의 작품을 펼치면서 무심코 기대했던 것은 무엇일까. 이 책을 보고나니까 알겠다. 삶을 바라보는 그의 시선이 좋았던 거다.

매트 헤이그의 글에는 따스함과 희망이 담겨있다. ‘비극은 아직 익지 않은 코미디이며 실패는 빛의 속임수이다. 깊은 삶을 중요하다 하면서도 태양을 볼 수 있을 정도의 깊은 굴만을 파도록 권한다. 할 수 있다고 해서 꼭 해야 하는 건 아니라고 다독인다. 차가운 건 우주만으로도 족하다며 따스함의 중요성을 말한다. 우주의 평균 온도를 떠올리면 세상은 이토록 추울 수 없다. 그의 글은 영하 270도의 우주 안에도 뜨겁게 타오르는 별이 있음을 일깨워준다. 별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시린 마음은 데워진다. 희망은 심장으로부터 피어나는 불씨이기 때문이다.

사소해 보이는 방향의 변화로 달라지는 결과가 얼마나 많이 존재하는가. 관성으로 흘러가던 삶에서 낯선 글을 만난다는 건 결코 평범한 사건이 아니다. 삶이 느닷없는 힘을 받는 것과 같다. 3부의 제목처럼 상처 입은 사슴은 가장 높이 뛴다. 힘은 나를 변화로 이끈다. 삶의 관성을 깨뜨리고 얼마나 방향을 바꿀 것인지는 우주 안에서 오롯이 존재하는 스스로의 몫이다. 그 힘이 나를 아프게 하든 보듬어 주든 어느 쪽으로든 의미가 깊지 않을까. 우리는 살아있는 존재로서의 휴먼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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