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별인사
김영하 지음 / 복복서가 / 202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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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진법은 명쾌하면서도 단순하다. 01로만 숫자 표현이 가능하다. 짤막한 아라비아 숫자라도 엿가락처럼 쭉 늘어난다. 걱정 없다. 컴퓨터에게 길이는 문제가 되지 않으니. 이진법을 사용하는 로봇. 기계에게는 망설임이 없다. 잘못된 결론일지라도 오류 앞에서 당당하다. 참 또는 거짓을 바로 외친다. 로봇의 삶은 ONOFF로 이루어진다. 삶이 1이라면 죽음은 0. 중간이 없다.

반면 인간은 복잡하다. 애매모호하다. 결론을 내리기까지 수많은 망설임을 거친다. 어정쩡한 세모가 삶의 전 과정에 장맛비처럼 쏟아진다. 인간의 삶은 01사이를 무수히 오가는 순간들의 집합이다.

만일 당신에게 삶과 죽음의 명쾌한 선택지가 주어진다면 어떻게 하겠는가. 불로장생 GO? 이제 그만 STOP? 워워, 머릿속에 떠오르는 아름다운 동양화는 잠시 접어두자. 사느냐 죽느냐 그것이 문제란 말이다. 당연히 사는 게 좋지 않겠느냐고? 과연 그럴까? 진지하게 다시 물으니까 불로장생을 외치려다 불초소생 모드가 된다고? 여기 판단을 돕기 위한 소설이 있다.

작별인사는 로봇과 인간이 공존하는 미래를 그린 이야기이다. 작가의 말처럼 이야기는 한 번밖에 살 수 없는 삶을 수백 배, 수천 배로 증폭시켜주는 놀라운 장치이며, 살 수도 있었던 삶을 상상 속에서 살아보게 해주니까. 이 책의 주제는 한마디로 선택이니 얼떨결에 햄릿이 된 당신의 선택지는 윤곽을 드러내리라.

 

선택을 중심으로 소설을 바라본다면 주인공은 철이, 선이, 민이 등 세 명이다. 이들은 각각 인간형 로봇, 인간, 로봇을 대변하는 캐릭터이다. 이야기는 휴머노이드의 시점에서 전개된다. 주연급 조연인 최 박사의 연구 주제로 언급되는 <인공지능의 윤리적 선택>은 작품의 주제를 관통한다. 인간에 가깝게 구현된 로봇은 인간 삶의 궤도를 선택할 것인가, 로봇의 삶을 따를 것인가. 인간의 삶과 로봇의 삶으로부터 각 존재의 죽음을 목도한 휴머노이드는 결국 그가 생각하는 최선의 끝을 선택한다.

모바일 캡슐, 생분해되는 그릇, 휴머노이드, 하이퍼 리얼 휴머노이드, 인간다운 휴머노이드, 재생 휴머노이드, 휴머노이드 재활용 업체, 폐휴머노이드, 폐로봇, 플라잉캡슐, 사용감이 없는 아이, 유전자 배양육, 아파트형 농장, 무선통신모듈, 디지털 구름, 기계지능. 상상만 해도 빠른 속도감을 안겨주는 미래의 용어들이 보물 상자의 금화인 듯 쏟아져 나왔다. 아직은 현실감 없는 이야기이면서도 언젠가는 이런 풍경이 펼쳐질 수도 있을 것 같은 생각에 묘했다.

도무지 상상이 가지 않는 이야기에 처음부터 빠져들었다. 이런 모습이 아닐 수도 있지만 이런 모습일 수도 있겠다 싶어서. 01사이를 롤러코스터처럼 오가며 미래를 상상하는 시간을 보냈다. 하늘에서 땅까지 아찔한 진자운동을 한 공유님의 심장처럼 내 마음은 책 한 권을 통과하는 동안 우주에서 인간까지 진자운동을 하였다. 작가는 순간순간 인간의 삶에 대한 질문을 두고 갔다. 그 안에서 인간 존재의 의미를 찾아보라고, 가장 적절한 마침표를 선택해보라고.

 

제목을 볼 때만 해도 상상하지 못했다. 사랑이야기인가. 겉표지만 보고 헤어진 연인을 그리워하며 멍하니 바다를 응시하는 내용이라 지레짐작했다. 왜 책 제목을 보고 연인과의 관계를 떠올렸을까. <뇌의 착각>을 제목으로 하는 내셔널지오그래픽채널의 짧은 영상이 생각난다. 뇌는 주변의 상황을 조합한 다음, 이미 있는 데이터와의 싱크로율을 비교분석하여 짧은 시간에 상황을 판단한다는 거다. 이런 이유로 종종 오류를 일으킬 수 있다나.

착각이 깨지는 것이 성장이라는 문장이 나온다. 유튜브 영상에서 어느 뇌 과학자는 말한다. 인간의 뇌는 실패를 하면서 점점 그것을 보완하는 방향으로 나아간다고. 좌절만 하지 않으면 실패가 데이터화되어 보다 나은 결과가 도출된다고 한다. 더 많이 느끼고 타인과 교감할수록 훨씬 풍부해진다는 작가의 문장처럼. 감정의 데이터도 뇌에 축적되면서 영역을 확장하는 것이리라.

아마도 인간에게는 모든 것이 담겨있을 거다. 기쁨, 슬픔, 노여움, 아픔, 행복 같은 감정의 영역에서부터 논리, 비교, 분석 같은 이성적인 영역, 삶과 죽음에 이르기까지. 살아가면서 경험하고 행동하고 생각하는 모든 정보들이 보편적이고 특별한 장소에 새겨져있으리라. 다만 전원 버튼을 누르지 않아 눌리지 않은 스위치처럼 비활성상태로 잠들어있을 지도 모른다.

 

책은 질문이 담긴 스위치이다. 작별인사는 삶과 죽음과 우주와 인간과 미래의 스위치를 누른다. 인간답다는 건 무엇인가. 무엇이 인간을 인간이게 하는가. 육체와 영혼이 결합된 생명체에서 하나만이 존재한대도 인간이라 칭할 수 있는가. 기계와 인간이 결합된다면 어디까지를 인간이라 말할 수 있는가. AI 발달의 한계는 어디까지인가. 감정도 01의 코드로 입력이 가능한가.

인간과 기계의 가장 큰 차이는 감정을 포함하는 마음의 영역이리라. 작가는 묻는다. 마음은 기억일까, 어떤 데이터 뭉치일까, 외부 자극에 대응하는 감정의 집합일까 하고.

내 생각에 마음은 감정의 감각이다. 시각, 청각, 후각, 미각, 피부감각 등 몸은 다섯 가지 감각의 형태로 외부 자극을 수용한다. 몸과 마음은 연결이 되어있다고 본다. 몸으로 느끼는 감각이 뇌로 전달되는 과정에서 감정의 문을 두드리며 지나가는 거라고. 다양한 몸의 감각은 반드시 감정의 영역을 통과하고 그 과정에서 다양한 감정의 스위치가 켜져 마음으로 나타나는 거라고 생각한다.

간단한 감정이라도 뇌와 몸의 모든 부분이 함께 작용하여 느껴야 한다는 문장이 인상 깊다. 뺨을 간질이는 햇살처럼 결이 섬세하다. 문장 하나도 허투루 쓰이지 않았다는 느낌이랄까. 챕터의 연결이 자연스러워 다음 이야기가 궁금해진다. 흡인력 있는 전개로 가독성이 좋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천천히 읽기를 권한다. 각각의 챕터에서도 완성된 퍼즐만큼의 의미를 찾을 수 있기 때문이다.

 

아메바와 세균 등 단세포 생물의 번식력은 엄청나다. 세상을 뒤덮어버릴 듯 증가한다. 하지만 치명적인 단점이 하나 있다. 미세한 변수에도 전멸할 수 있다는 점이다. 결국 생태계의 주도권은 다양한 변수로 재현 가능한 존재가 쥐는 듯하다.

인공지능에서 단세포 생물을 떠올린다. 01로 존재하는 대상으로 말이다. 그렇다면 인간이 다양성을 지닌 한 약해보이더라도 희망은 있다. 만일 로봇이 인간만큼의 다양성을 지닌 존재로 거듭난다면? 환경에 따라 유성생식과 무성생식을 하는 히드라와 같은 성향을 보이게 된다면? 여기까지. 나머지 상상은 당신의 몫이다.

MBTI 붐이다. 무료간이검사를 해보니 ISFJ 였다 최근엔 INFJ 로 나온다. 언젠가는 E가 나온 적도 있다. 불과 몇 년 새에도 조금씩 뒤집히는 게 인간의 성격이다. 16가지 유형이지만 두 가지로 나뉜 성향의 %까지 고려하면 무수히 많은 채도의 스펙트럼으로 표현되리라.

소설 속 박사가 AI 고양이를 만들면서 성격을 설정하는 데 고민하는 장면에 놀란다. 로봇의 성격이라니! 한 번도 생각해보지 않은 발상이다. 표준화된 AI의 성격은 어떻게 설정할 것인가. 설정 권한이 주어진 이에게 달려있으리라. 인종이나 민족을 구분해온 인류의 역사를 돌아본다. 미래에는 AI의 성격 결정권을 쟁탈하는 전쟁이 일어나지 않을까.

 

책 속에 등장하는 천자문 속 문장들은 우주의 속성을 자연스레 끌어온다. 가끔 우주를 상상하면 몸이 붕 뜨는 것 같다. 검고 검은 고요의 세계. 소리조차 전달되지 않는 광막한 공간. 독자의 시야는 순식간에 우주로 확장되다 그 안의 인간 존재로 시선이 머문다.

우주 사이에서 밀고 당기는 천체들의 힘을 상상한다. 색에도 넓이가 있다면 가장 넓은 색은 검은색이 아닐까. 블랙홀인양 모든 존재들을 흡수하니까. 이미 우주 자체가 거대한 블랙홀인지도 모른다.

밤의 하늘이 본질에 가깝다는 옛 중국인들의 생각에 공감한다. 낮에는 태양의 강렬한 빛 때문에 우주의 본모습이 가려진 거라는 문장을 읽으며 태양빛으로 이루어진 거대한 안대를 상상한다. 습관적으로 하늘 천, 따 지를 외칠 때만해도 천지현황의 의미는 눈에 들어오지도 않았건만.

우주의 대부분은 그냥 텅 비어있다. 원자도 마찬가지이다. 세상은 프랙털의 중첩인걸까. 우주 안에서 별들을 중심으로 공전하는 크고 작은 천체들이 얼핏 원자핵 주위를 도는 전자들과 흡사해 보인다. 전자구름으로 모호하게 표현하더라도 거시적으로 바라보면 비슷한 느낌이다.

무해하고 장엄한 카오스라는 작가의 문장이 마음에 들어온다. 열역학 제2법칙이 지배하는 거대한 우주. 헝클어진 채 아무 일도 없던 듯 수많은 삶과 죽음을 품는다. 질서를 세워도 무너뜨리는 거대한 힘이 담긴 대상이다. 지구의 시간과 우주의 시간을 언급하는 작가를 따라가며 그 안에 존재하는 인간의 시간을 생각한다.

 

전체 블록을 설정하고 Ctrl+C 키를 누를 때마다 숨을 멈춘다. 손가락 하나 잘못 놀리다가는 1초 만에 망하기 때문이다. 삭제가 간단해지는 세상이다. 지우개가 왕복하는 시간만큼 느리게 삭제되던 시절을 건너 Backspace 키나 Del키 하나로 순식간에 삭제되는 시대에 서있다. 글을 쓰는 동안 나만 아는 이야기는 우주에서 태어나고 죽는 존재들처럼 탄생과 소멸을 반복한다. 보고 싶지 않은 것들을 간단하게 보내버릴 수 있는 미래, 선택받은 소수가 원자핵인양 세상을 조종하고 나머지 존재들이 전자처럼 떠도는 세상이 펼쳐질까.

삶은 평생 나를 바라보는 여정이다. 매순간 나를 바라보기 위해 초점을 맞추는 과정으로 채워진다. 지금 이순간도 나의 마음은 다양한 환경의 자극에 반응하며 01사이를 오간다. 운전석 앞 유리에 그려진다는 내비게이션처럼 마음이 색깔 있는 홀로그램으로 펼쳐진다면 어떨까.

영원하지 않은 것을 보고 덧없음을 느끼던 때도 있었다. 진시황이 불로초를 구하는 데 성공했다면 삶이 행복했을까. 육체를 옷처럼 바꿔 입고 데이터로 지속되는 삶에서 의미를 찾을 수 있을까. 영원한 삶과 영원하지 않은 삶 중 어느 쪽이 더 의미가 있을까. 몇 년이 지나도 그대로인 조화보다 며칠 만에 져버리는 생화가 지금의 내게는 더 매력적으로 다가온다. 한계는 절실함을 동반하기 때문이다.

마지막이 예정되어 있다면 지금 이 순간 내 앞에 있는 사람과 나의 감정이 유일한 의미로 절실해지리라. 절실한 순간을 촘촘하게 건너온 마침표는 또 다른 시작의 스위치로 작용할 테니 인간만이 할 수 있는 작별인사의 의미를 여기서 찾아도 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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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 - 상실, 사랑 그리고 숨어 있는 삶의 질서에 관한 이야기
룰루 밀러 지음, 정지인 옮김 / 곰출판 / 202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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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스 아메리카노에 가득 담긴 얼음 같은 의미였을까. 주인공 커피에 꿀리지 않고 사이사이를 메우며 무심히 마수의 냉기를 뿜는 대상 말이다. 아에서 아아로의 정체성으로 탈바꿈시키는 장본인은 시간의 손을 잡고는 스르르 자취를 감춘다. 여백의 존재감 이상이다. 뒤늦게 컵 속을 들여다보면 인지할 수 없다. 신비주의다. 아의 우주, 그 안에서 얼음은 당당하게 시크하다.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추리소설과 시사고발 다큐멘터리와 내셔널 지오그래픽적인 요소가 적절하게 어우러진 논픽션이다. 커피 속 얼음처럼 조용히 강하다. 담담하게 걸어가는 서술은 냉철하면서 차갑다. 무모하게 억지스런 주장을 펼치지 않는다. 과학적으로 다양한 자료를 수집하고 이를 근거로 제시한다.

이 책의 매력은 크레센도를 연상시키는 전개에 있다. 일상의 경험에서 출발한 저자의 문장은 소박한 결론을 향하는 듯하다. 독자는 담백한 문장에 자연스럽게 동화된다. 인간 삶을 아우르는 영역 한가운데 서게 되는 마지막 페이지에 도달할 때까지. 서서히 벌어지는 지퍼 사이로 놀라운 사실을 목도한다. 언제 사라졌을까. 소스를 제공한 저자의 흔적은 이미 남아있지 않다. 실체를 드러낸 이야기는 맨손으로 만지는 얼음인 양 뜨겁다. 이 얼음을 던져버릴 것이냐, 자신의 온기로 서서히 녹여낼 것이냐. 각자의 결론만이 몫으로 남는다.

 

혼돈이 가득한 세상에서 존재의 의미와 삶의 질서를 찾기 위한 여정을 담은 책이다. 이야기의 발단은 어릴 적 저자와 그녀의 아버지 사이에서 오고 간 철학적 대화이다. 인생의 의미를 알고 싶었던 저자 룰루 밀러는 해답을 알려줄만한 인물을 찾는다. 그녀가 목적지로 선택한 이가 데이비드 스타 조던이다.

조던은 스탠퍼드대 초대 학장으로 물고기 연구의 시조로 일컬을만한 인물이다. 그의 업적은 독보적이다. 그가 이끄는 연구팀은 방대한 어류를 발견하고 이를 분류한다. 물고기에 필이 꽂힌 조던은 물고기의, 물고기에 의한, 물고기를 위한 탐구에 몰두한다. 충격적인 자연 재해가 일어나 연구 결과가 물거품이 된 인어공주로 탈바꿈해도 전혀 굴하지 않는다. 다시 일어선다. 영혼을 끌어 모으는 집념은 신계에 속할만하다. 소위 어나더 레벨이다.

이 사람이라면 명쾌한 답을 보여주지 않을까. 단지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던 물고기의 이름을 불러준 이. 빛깔과 향기에 맞는 네이밍으로 잊혀 지지 않는 하나의 눈짓을 만들어준 인물. 미지의 영역에 흩뿌려진 별들이었던 어류에 질서를 부여한 사람이니. 그의 끈질긴 의지를 추동하는 요인은 무엇이일까. 작가는 그의 삶을 집중 탐구한다. 이 책의 첫 장은 조던의 소년 시절로부터 시작된다. 여행을 떠나기 직전인양 설렘을 품은 저자는 그의 삶을 덮고 있던 외피를 하나씩 벗겨낸다.

 

조던의 삶에서 변곡점이라 할 만한 사건들을 추적하는 전개 과정은 추리 소설의 색채가 짙다. 작가의 전개 방식이 다분히 의도적이었음을 깨닫는다. 영리한 저자는 섣불리 일반화된 결론을 내리지 않는다. 조사한 자료를 근거로 자신만의 결론을 내보일 뿐이다.

추리 소설 소개의 불문율은 결말에 대한 스포일러 금지이다. 이를테면, 비 내리는 밤에 공동묘지를 지나다가 줄기차게 스토킹 하는 흰 옷 입은 여자 귀신을 봤는데 알고 보니 삿갓에서 풀린 실오라기에 맺힌 빗방울이 귀신처럼 보인 거라는 결말 같은 거 말이다. 알고 나면 맥 빠지지만 추적추적 으스스한 날에는 나름 괴기스러운 효과를 볼 수 있으니까.

두 가지 주제가 보인다. 첫째, 책 제목의 의미에 관한 것, 둘째, 세상과 삶을 바라보는 방식에 관한 것이다. 리뷰 작성에 고민이 많았다. 제목의 의미는 스포일러로 향하기 때문이다. 며칠 동안 등장했다 사라진 글자들이 A4용지 한 장을 넘어가지 못한다.

오늘은 무슨 일이 있어도 마무리 지으리라. 결국 달리기의 출발과 결승선의 풍경만을 언급하기로 한다. 이제부터는 왜 이런 내용이 여기서 나와버전이 전개될 것임을 예고한다. 확실하게 말할 수 있는 건 나에게는 이 책이 참 좋았다는 것과 책을 읽고 나면 리뷰의 후반부에 적는 문장을 이해할 수 있으리라는 점이다.

 

엔트로피가 증가하는 세상에서 인위적으로 삶의 질서를 만들려는 시도는 무모해 보인다. 인간의 의지는 강을 거슬러 올라가는 연어처럼 끊임없이 세상과 삶을 관통하며 의미 있는 질서를 찾으려한다. 세상에 질서를 부여하는 방법 중 하나가 공통된 특성을 찾아 하나의 범주를 만드는 일이다. 저자는 이 과정에서 범주를 규정하는 행위에 경고메시지를 보낸다. 모든 자(ruler) 뒤에는 지배자(Ruler)가 있으니 범주란 하나의 대용물이지만 동시에 족쇄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고 말한다.

운동장에서 질서를 지켜 한 줄로 선 사람들을 상상해보라. 그들은 한 방향을 가리킨다. 무질서는 줄서기 전, 제각기 흩어져있던 상황이다. 개개의 사람들이 향하는 방향을 화살표로 표시한다면 사람 수만큼 다양한 방향이 만들어질 터이다. 100명의 사람이 존재한다면 100가지의 방향이 나오리라. 세계로 영역을 확장하면 80억 가지의 방향이 존재한다. 수용하기 벅찬 숫자는 인간에게 두려움을 안겨준다. 품지 못하는 영역을 알지 못한다는 불안감 때문이다. 질서란 두려움에서 만들어진 울타리인지도 모른다.

세상과 인간의 삶은 어떤 모습에 가까운가. 완벽한 무질서이다. 유전적으로 DNA가 일치하는 일란성 쌍둥이조차 완벽하게 똑같은 삶을 사는 건 아니니. 무질서를 이루는 각각의 화살표는 동등한 정체성을 갖는다. 더불어 살아가는 세상이지만 프랙털의 구성 요소처럼 각각은 독립적이다.

 

혼돈이 가득한 세상에서 삶의 의미를 어떻게 찾을까. 저자는 자연을 정확하게 바라보는 방식으로 민들레 법칙을 제안한다. 어떤 사람에게 잡초처럼 보이는 그것이 다른 사람들에게는 훨씬 다양한 무엇일 수 있다는 것이다. 약초 채집가에게는 약재로, 화가에게는 염료로, 히피에게는 화관으로, 아이에게는 소원을 비는 존재로, 나비에게는 생명 유지의 수단으로, 벌에게는 짝짓기를 하는 침대의 의미일 수 있다고. 어떤 대상을 바라보는 나의 관점은 N분의 1일 뿐이다.

삶에서도 같은 맥락의 관점으로 바라본다면 의미를 발견할 수 있으리라. 다른 이에게 무의미하게 비춰지는 어떤 일이 나에게는 인생 전체를 던질만한 의미일 수 있다. 중요한 건 관점 하나하나가 같은 무게를 갖는다는 점이다. 희곡 베니스의 상인에서 사람과 새 한 마리의 가치를 동일하다고 말한 것처럼 말이다. 고구마와 감자와 땅콩이 땅속에 있다고 같은 부류에 속하는 건 아니지만 이들은 각각 담당하는 역할에서 당당하다.

별들을 포기하면 우주를 얻게 된다는 멋진 문장을 바라보며 연극 무대를 떠올린다. 주인공만을 비추는 핀 조명이 질서와 범주라면, 환하게 무대가 밝혀지는 순간은 무질서와 혼돈일 터이다. 세상은 어디에 가까운가. 주인공뿐 아니라 엑스트라, 무대 소품, 조명, 음향, 무대 장치 등 전체를 담은 게 세상이고 우주 아닌가.

 

물고기 이야기 못지않게 시선을 끌어당긴 건 섬세한 삽화와 에필로그에 스치듯 언급된 세 글자 사이질이다. 인상적이고 멋진 삽화이다. 바늘을 이용했다는 스크래치보드 기법은 세밀한 집중력과 의지를 요구하는 작업으로 보인다. 본문과 잘 어울린다. ‘사이질은 인체의 장기라고 한다. 생소한 이름에 필이 꽂힌다. 교과서에 버젓이 등장하지도 않기에 몇 시간 동안 인터넷을 뒤적인다.

사이질사이에 있는 물질을 의미한다. 2018, 우연히 실체가 드러나기 전까지 세포 사이를 메우는 물질 정도로 사소한 정체성을 지녀온 장기이다. 피부 아래 구석구석 물로 채워진 고속도로처럼 존재한다고 한다. 어쩌면 암 세포의 이동 통로인지 모르는, 인체에서 가장 큰 장기라나. 이제껏 발견하지 못했던 이유는 조직 샘플을 만드는 과정에서 우르르 무너져 수분이 빠져나와 납작해진 건물의 잔해만 보았기 때문이란다. 검색하다보니 또 다른 침샘의 발견과 장간막이 기관임을 밝히는 뉴스도 눈에 띈다. ‘이 세계 안에 있는 또 다른 세계’. 저자의 문장이 떠오른다.

습관적인 풍경인 듯 생물을 바라보던 시선이 자연스레 바뀐다. 한 권의 책이 상식의 범주를 무너뜨린다. 모르지만 분명 존재하는 세상을 상상한다. 세상은 넓고 상상의 범주를 벗어난 대상은 넘쳐나리라. 모른다고 존재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범주는 일시적인 편의를 위해 규정한 틀이다. 이전에도 이후에도 존재는 여전히 우주의 일부이니 경계를 지을 게 아니라 인정하고 전체를 품으면 그만이다.



p218, 밑에서 4째줄: 내가 자기를 필요할 때면 ~ 필요로 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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햄릿 (무선)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40
윌리엄 셰익스피어 지음, 이경식 옮김 / 문학동네 / 201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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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계의 아이돌 급 스팸 왕자님을 영접할 시간이 왔다! 읽기도 전에 내용이 드라마 속 장면처럼 그려지지만 결코 읽어보지는 못한 작품이다. 드루 와, 드루 와~ 나는 만반의 준비가 되었었단 말이다.

거대한 쓰나미급 감동을 받을 준비를 마쳤던 나는 일주일 후, 마지막 껍데기를 덮으며 거대하게 휑한 갯벌을 바라본다. 진공의 본문을 지나 책 두께의 3분의 1을 차지하는 해설의 망망대해를 건너 18쪽에 달하는 작가 연보를 기어 나온다. 결국 갯벌이 품고 있을 수많은 생명체를 발견하지 못한다. 어디서부터 어긋난 걸까.

대부분의 리뷰를 작성할 때면 나는 주된 느낌을 중심으로 하나의 물줄기를 만들어간다. 그다지 감동받지 못한 책의 리뷰를 쓸 때, 나의 뇌는 분석 모드를 가동한다. 이 책은 후자이다. 다각도로 석고상을 관찰하듯 작품을 돌아본다. 이런 이유로 일관된 글의 줄기는 없으며 지극히 주관적인 관점이라는 사실을 밝힌다. 세상은 넓고 별의별 인간은 드넓게 포진해있으니.

굳이 원서를 찾아 읽고 싶은 마음이 불끈 솟지만 생각을 고이 접는다. 원어민 선생님 앞에서는 매번 과묵한 인간의 탈을 쓰게 되는 나는 원문을 읽어도 당연히 모를 것이기 때문이다.

 

햄릿은 아버지를 죽이고 어머니와 결혼한 숙부 왕의 비리를 알게 된 덴마크 왕자 햄릿의 복수를 그린 5막의 희곡이다. 복수가 성공했다는 점에서는 희극이나 본인을 포함한 8명이 몽땅 죽으니 결론적으로 비극이다. 양날의 검으로 상대를 찌른 상황이다.

처음으로 줄거리를 접했을 때 어떤 느낌이었더라. 워낙 오래전이라 기억나지 않는다. 책을 읽어도 무덤덤한 건 감정이 무뎌진 탓일까. 어쨌든 내용으로 인한 감동은 일지 않았다.

선왕인 형을 죽인 현왕의 비리를 폭로하는 수단으로 연극을 택하는 장면을 보니 영화 <왕의 남자>가 떠오른다. 그 영화에서도 풍자 수단으로 마당극을 이용한다. 연산군과 장녹수를, 탐관오리의 비리를, 연산의 생모 폐비 윤씨의 죽음에 가담한 선왕의 여자들이 차례로 대상이 된다. 심리치료에서도 역할극을 활용하니 동양이나 서양이나 간접적인 상황 재현은 오랜 역사를 지닌 듯하다.

연극 공연 시 현왕의 반응 여부로 선왕의 죽음에 대한 진실을 파악한다는 설정에는 인간의 양심이 살아있다는 전제가 있다. 만일 현왕이 소시오패스였다면 어땠을까. 본인이 감행한 살인이 연극으로 재현되어도 아무 동요 없이 포커페이스를 유지하지 않았을까. 셰익스피어는 인간 존재의 근본을 그리 포악하다 보지 않았던 거다.

 

연극 대본이니 대략적인 줄거리를 파악하기는 쉽다. 다만 희곡의 특성상 전후사정을 구구절절 설명할 수 없으니 디지털적인 대사를 연결하여 꿰는 건 독자의 몫이다.

등장인물의 성격은 그가 하는 말과 행동, 다른 이의 평가를 종합하여 짐작해야 한다. 오필리어의 아버지의 대사처럼 간접적인 것들을 통해 직접적인 것들을 찾아내는 것(21)이다.

희극인지 비극인지 판단이 모호한 건 작가의 가치관이 반영된 결과로 보인다. 햄릿은 말한다. 원래 좋고 그른 것은 존재하지 않으며 오직 우리 생각이 그렇게 만들 뿐(22)이라고.

배우 겸 작가로 활동했던 셰익스피어는 마트료시카처럼 연극 안에 연극을 삽입한다. 연기를 대사에, 대사를 연기에 맞추라거나 연극의 목표는 거울을 들이대서 자연을 비추는 것(32)이라는 문장을 통해 연기와 연극에 대한 신념을 드러낸다.

말과 관련된 대사에는 심오한 삶의 철학이 내포된다. 말이란 말하기 전까지만 자신의 것(32)이라고, 내 말은 하늘로 날아오르나 생각은 지상에 남으니 생각 없는 말이 결코 하늘로 올라갈 수는 없다(33)고 말한다.

 

등장인물의 대사 곳곳에서 삶을 통찰하는 문장이 눈에 띈다. 날카로운 통찰력이 드러난 부분 중 세 군데를 인상적으로 보았다.

첫째, 햄릿은 자신이 건네준 피리를 불지 못하는 동창생에게 말한다. 이 작은 악기 속에는 음악도 많고 훌륭한 음도 들어 있지만 자네는 그것을 소리 나게 못하고 있다(32). 악기는 상징적인 대상이다. 이용하는 사람에 따라 독이 되고 약이 되는 모든 요소에 적용할 수 있겠다.

둘째, 쓰지 않는 손이 감각은 더 예민한 법(51)이라는 문장이다. 소설가 무라카미 하루키와 관련된 일화를 들은 기억이 있다. 작성한 원고를 한 달 정도 서랍에 넣어두고 잊어버리다 시간이 지나 다시 펼쳐보면 이전에 보이지 않았던 것들이 또렷하게 눈에 띈다는 이야기이다. 평소 접해보지 않았던 분야의 작품을 만나는 사람이 그 장르에 익숙한 이와는 다른 각도로 작품을 바라보는 경우나 여행 후 집으로 돌아오면 자신이나 일상의 풍경이 낯설게 느껴지는 기분도 비슷한 맥락이리라.

셋째, 햄릿의 대사 중 죽음을 해탈한 듯 보이는 대사이다. 어느 누구도 자신이 무얼 두고 떠나는지 알 수 없으니 일찍 떠나는 걸 아쉬워할 필요가 뭐 있겠느냐(52)는 말이다.

 

교과서를 선정할 때 쓰는 방법이 있다. 출판사는 달라도 성취기준은 동일하니 같은 내용의 소단원을 동시에 펼쳐놓고 비교하는 것이다. 단원별 정체성은 존재하지만 짧은 시간에 장단점을 분석할 수 있다. 알라딘 국내 도서 검색어로 햄릿을 입력하여 첫 페이지에 나오는 4개의 출판사를 임의로 선정한다. 책 소개에도 등장하는 문장들이니 굳이 스포일러는 아닐 듯하다. 두 가지 요소를 비교하기로 한다.

 

첫째, 같은 문장, 다른 표현이다홍보 문구로 겉표지에 종종 등장하는 31장의 문구 ‘To be or not to be, that is the question’과 이후의 문장에 대한 번역본을 비교해본다.

 

(문학동네)

살 것이냐 아니면 죽을 것이냐, 그것이 문제로다. / 어느 것이 더 숭고한 정신인가, / 변덕스러운 운명의 돌팔매와 화살을 허용하는 것일까, / 아니면 파도처럼 몰려오는 많은 고난에 대항하여 / 물리치는 것일까. 죽는 것은 잠자는 것, / 그뿐이다.

 

(민음사)

있음이냐 없음이냐, 그것이 문제로다. / 어느 게 더 고귀한가. 난폭한 운명의 / 돌팔매와 화살을 맞는 건가, 아니면 / 무기 들고 고해와 대항하여 싸우다가 / 끝장을 내는 건가. 죽는 건? 자는 것뿐일지니,

 

(창비)

이대로냐, 아니냐, 그것이 문제다. / 어느 쪽이 더 장한가, 포학한 운명의 / 돌팔매와 화살을 마음으로 받아내는 것,? / 아니면 환난의 바다에 맞서 무기 들고 / 대적해서 끝장내는 것? 죽는 것-잠드는 것, / 그뿐.

 

(열린책들)

사느냐, 마느냐, 그것이 문제로구나. / 성난 운명의 돌팔매와 화살을 / 마음속으로 견디는 것이 더 고귀한 일이냐, / 아니면 고해의 바다에 맞서 끝까지 대적하여 / 끝장을 내는 것이 더 고귀한 일이냐. / 죽어서 잠을 잔다. 이게 전부란 말인가? 그래 전부야.

 

알파벳 다음으로 기본 단어에 속하는 ‘be’가 이토록 심오할 일인가. 번역자마다 해석이 분분하니. 문외한으로서는 어떤 해석을 수용할지 몹시 난감하다. 원문은 저리도 단순하며 심지어 운율이 느껴지는 데 말이다.

삶과 죽음으로 볼 것이냐, 존재론적으로 볼 것이냐, 상황의 수용 여부로 볼 것이냐. 전후의 내용을 살펴보면 햄릿이 자살을 고민한 흔적은 보이지 않는다. 그렇다고 숙부를 죽이느냐 살리느냐 살인 여부를 말하는 것 같지도 않다. 있음이나 없음으로 보는 시각은 뒷문장과 괴리감이 느껴진다. 아버지유령으로부터 들은 죽음과 치정 상황을 운명으로 받아들이느냐 맞서서 복수를 감행하느냐의 갈등 상황으로 해석된다.

따라서 위의 4가지 중 나의 취향에 가까운 건 창비의 번역이다. 내용상 자연스러울 뿐 아니라 간결한 문체가 마음에 든다. 아쉽게도 내가 읽은 번역본은 취향과 가장 거리가 있는 산문체였던 듯하다.

 

둘째, 분량 비교이다.

본문은 창비(202) < 민음사(208) < 열린책들(212) < 문학동네(224),

해설은 민음사(12) < 열린책들(24) < 창비(27) < 문학동네(98),

작가 연보는 민음사(6쪽 이내) < 창비(7) < 열린책들(12쪽 이내) < 문학동네(18) 순이다.

 

고전문학은 시리즈로 출간되는 경우가 많으므로 도서 뒷부분은 출판사의 발간 도서를 소개하는 페이지로 할애되곤 한다. 이런 이유로 작가 연보의 마지막 페이지가 도서의 마지막 페이지와 일치하지는 않는다. 직접 읽은 문학동네의 것을 제외한 나머지 출판사의 작품은 추정치를 적었다.

분량이 작품의 질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다만 판본의 차이는 있겠으나 동일 작품에 대한 번역이 산문적인가, 운문적인가 정도는 유추가 가능하다. 창비는 운문적인 본문에 자세한 해설을 더한 듯 보인다. 문학동네는 단연코 산문적이다. 영어능통자라면 단어와 문장이 세세하게 곁들여진 친절한 해설이 보다 깊숙하게 흡수되었으리라. 내게는 본문보다 통과하기 어려운 허들이었지만.

작가 연보는 읽어도 읽어도 끝이 보이지 않았다. 꾸역꾸역 읽느라 토 나올 뻔했다. 갑갑한 심정에 (1589: 헨리 61),(1600~1601: 햄릿)과 같은 형식으로 출간 연도와 작품명만을 발췌하여 짝을 지어 정리하니 어느 정도 흐름이 파악된다. 25년 간 37편의 희곡이라니! 최소 1년에 한두 작품씩 창작한 셈이다. 셰익스피어의 위대한 점 중 하나는 다작인가. 작가 연보를 구성할 때 작품의 출간 연도와 작가의 삶을 구분하였더라면 그나마 읽기가 수월하지 않았을까. 우리 역사와 세계사를 대비하여 수록하듯 세 칸의 표로 나누어 연도-작품-개인사를 기재하는 식으로 말이다.

 

그래서 무엇이 문제라는 거냐. 셰익스피어의 작품이 희곡인데다 시적이라는 데서 원인을 찾는다. 연극 대본은 배우에 따라 다른 뉘앙스로 재현이 가능하며 라는 문학 장르는 해석의 폭이 크다는 데 있다.

‘To be or not to be’라는 문장에서는 매력적인 대구의 리듬이 보인다. 과학으로 말하면 작용과 반작용의 원리가 적용된 문장이다. 간간이 언급되는 원문으로 판단컨대 그의 문장은 시적인 요소가 짙다. 라임을 맞춘 랩의 가사를 보는 느낌이다. 번역자의 주석으로 짐작하면 시적인 대사와 동음이의어의 풍자들이 많이 포함되어 있으리라. 외국어 번역으로 원문의 라임을 살리는 데는 한계가 있으니 시적인 생명력의 숨이 죽은 듯하다.

극작가에게서 출발한 의도가 극본을 해석한 배우의 의도를 거친다. 구전된 내용을 받아들여 옮긴이의 의도, 영문을 해석한 번역자의 의도, 번역본을 해석하여 리뷰를 작성하는 독자의 의도를 향해 흘러간다. 수많은 해석과 의도를 거치는 동안 최초의 창작자의 의도가 얼마나 변질되었을까. 아프리카에서 시작된 인류 조상의 DNA 릴레이처럼 본질이 고스란히 전달된다면 좋았을 텐데. 작가냐 배우냐 번역자냐 독자냐 그것이 문제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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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감 2022-06-29 13:4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해설이 좀 지나치게 길어서 무슨 논문이라 해도 되겠던데요 ㅋㅋㅋ 여튼 도움은 되었습니다. 전 연보는 원래 안읽습니다 ㅋㅋㅋ 저는 이번에 처음이라 그런지 잼나게 읽었어요~

‘왕의 남자‘ 내용이 전혀 기억이 나질 않네요... 저 또한 감정이 무뎌진 탓일까요 ^^ 풍자수단으로 마당극을 이용했다는 점이 닮았다는 말씀이시군요. 저는 작품속 극단의 무대를 보면서, 숙부가 생각보다 미동이 없어가지고 좀 의외였어요. 숙부가 강하게 흔들렸어야 좀더 극단적인 흐름이 되었을텐데 하는 아쉬움이 있었습니다. 뭔가 흐지부지하게 지나가버린 기분이랄까요.

인물들의 성격이 뚜렷하지만서도 어딘가 애매하게 느껴질 때가 종종 있긴 했어요. 그게 정말 작가의 가치관이나 어떤 철학 때문일지도 모르겠네요. 근데 그런 애매함들이 작품의 매력을 더해준다는 생각을 해봐요. 여러 갈래의 해석을 낳는단 건 그만큼 매력적인 작품이라고 생각됩니다!

출산사 별로 비교글까지 써주시다니, 대단하십니다 ㅎㅎ
전 뭐가 더 와닿고 안와닿고 보다는 간결하냐 마냐를 더 따지게 되네요. 아무래도 극 대본이라서 그런가봐요. 그래서 네 군데 다 별로에요 ㅋㅋㅋㅋㅋㅋㅋㅋㅋ ‘to be or not to be‘를 ‘존재냐, 부존재냐‘의 존재론으로 봐야한다는 모 글을 봤는데 저도 여기에 좀 동의했어요. 그래서 굳이 고르자면 민음사의 ‘있음이냐, 없음이냐‘가 그럴싸해 보이는데, 솔직히 ‘사느냐 죽느냐‘ 말고는 영 깊이가 없단 말입죠? ㅋㅋㅋㅋㅋ 거참 어렵습니다.

저자가 극배우로 활동해와서 작품이 더 생동감 있는 듯 해요. 물론 번역과 문체가 각자의 취향을 탄다는 게 문제지만요. 셰익스피어 작품이 문학동네에는 세 권 밖에 없더라고요? 좀 더 읽어보고 싶었는데 아쉽지만 각자 다른 출판사의 것으로 읽기로 해요 ㅎㅎㅎ 창작자의 의도와 전달의 아쉬움은 뒤로 하시고요^^; 6월도 다 갔네요. 마무리 잘하시고, 7월에 또 같이 읽어요ㅎㅎ

나비종 2022-06-29 20:00   좋아요 1 | URL
맞아요. 지.나.치.게 길어서 ㅠㅠ
연보 ㅋㅋㅋㅋ 그렇군요. 성격상 뒷껍데기까지 구석구석 읽는 편이라 헉헉 대며 겨우 읽었습니다.
물감님은 재미있으셨군요. 같은 책을 읽고 다른 느낌을 갖고 감상을 공유하는 과정에서 공통점과 차이점을 발견하는 작업, 참 매력적입니다. 이게 독서모임을 하는 목적이겠죠? 서로 다른 이의 우주만큼 나의 우주가 확장되는 경험이요~^^

<왕의 남자>OST가 이선희의 ‘인연‘이었거든요. 제가 그 노래를 한때 좋아했던지라 영화도 얼떨결에 봤죠.ㅎㅎ
공개 장소라 강하게 부르르 하지 못했을까요? 숙부는 포커페이스 뒤에서 엄청 쫄았겠죠. 그러니까 후딱 보내버리려고 동창생들까지 동원하고 영국왕에게 협박 편지쓰고 초조한 액션을 취했다고 봅니다.ㅋㅋ 반응이 뜨뜨미지근하긴 했어요.^^

한정된 시간 안에 상연이 되어야하는 연극이라 완성도있는 캐릭터의 입체적인 표현을 구현하기에는 한계가 있지 않았을까요? 아니면 작가 고유의 스타일일수도 있구요. 나는 이렇게 떡밥을 투척하니 나머지는 독자님이 알아서 채우셔~ 하구요.ㅎㅎ
물감님 생각에 공감합니다. 여러 갈래의 해석은 미술이나 음악 분야의 예술작품에 대해서도 매력적인 신비로움으로 작용하니까요.^^

번역이 제 스타일이 아니라 다른 출판사 것은 어떤지 뒤적뒤적 해봤거든요. 생각보다 다양한 번역들이 존재해서 놀랐어요. 아 다르고 어 다른 이 세계에서ㅋㅋ
예. 저는 그나마 간결한 창비 쪽에 한 표를^^;
맞아요. 삶과 죽음이 가장 무게감이 있죠. 컬러로 말하면 이건 완전한 블랙 앤 화이트니까요. 임팩트 쩔죠~ㅎㅎ

직접 연극을 시연하는 입장에서 쓰는 희곡은 아무래도 다르겠죠. 영화감독이 시나리오를 쓰는 것도 비슷한 맥락이라고 봅니다. 장면의 큰 그림이 무의식적으로 그려질테니 치고 빠져야 할 타이밍의 완급을 보다 잘 조절할 듯해요.
어떤 책을 선정하셔도 무조건 따를 테니 원하시는 대로 하시옵소서~^^
약속이 있으니 업무가 쏟아져도 팽개치고 싶은 작품도 어떻게든 읽어내고 글을 쓰게 되네요. 다음 달에 봬요~ㅎㅎ
 
세종의 허리 가우디의 뼈 - 탐정이 된 의사, 역사 속 천재들을 진찰하다
이지환 지음 / 부키 / 202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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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 멍들었을까. 왼쪽 팔뚝에 1cm 가량 푸르스름한 흔적이 보인다. 모르는 새 어딘가에 부딪혔던가. 마음이 인지하지 못하더라도 몸에는 고스란히 흔적이 남는다. 몸의 시그널에는 일상의 촘촘한 이야기, 분명 일어났던 이야기가 있다. 그건 아주 섬세해서 자세히 살펴보지 않으면 존재감을 드러내지 않는다. 수증기로 증발해버리지 않고 우리 몸의 어딘가에 물의 얼룩으로 쌓인다.

쌓이는 게 무서운 거다. 그리움, , 추억, 하루, 몸에 나타나는 사소한 징후나 질병이 그렇다. 커다란 한 방이면 부러지거나 무너지거나 단 한 번의 충격으로 결론이 난다. 쌓이는 건 다르다. 무시하거나 말거나 물러서지 않는 시간처럼 계속 한 방향으로 다가온다. 가뿐한 듯 날리는 나뭇잎 한 장으로 와서 고요히 쌓인다.

쌓임의 시그널은 소리가 없다. 신경 써서 들여다보지 않으면 눈치 채지 못할 정도의 변화가 서서히 스며든다. 소리 없이 내리는 눈이다. 어느 아침 온통 하얀 물감으로 채색된 세상을 맞이할 수 있다. 사람과의 이별이 힘든 것도 쌓임의 결정체이기 때문이다. 세심하게 살펴보지 않았던 순간들이 우주를 지울 듯 압도적인 존재감을 드러낸다.

 

세종의 허리 가우디의 뼈는 몸에 쌓인 질병으로 삶의 방향이 바뀐 역사적 인물들에 관한 이야기이다. 정형외과 의사인 저자의 시각은 신선하다. 질병전문가로서 인물에게 나타난 변화의 징후를 탐색한 다음 정확한 질병을 진단한다. 주어진 상황을 면밀하게 관찰하고 다각도로 파헤치며 분석하는 접근방법이 탐정 못지않게 예리하다.

똑같은 자료와 현상이라도 다루는 이의 관점에 따라 활용도가 다를 수 있다. 감자 요리가 햄버거 옆 감자튀김처럼 사이드로서의 역할만을 하느냐 메인으로 주축을 이루느냐는 요리사의 선택이다. 의사 관점에서의 외모 변화는 질병의 징후를 알려주는 시그널로 작용한다. 당시 착용했던 의복과 초상화를 통해 체형을 짐작하는 통찰력도 놀랍다.

질병은 몸이 보내는 시그널이다. 몸의 신호는 쌓임의 결과물로 드러난다. 몸이 주는 영향력을 절감한다. 우리 몸은 긴밀한 협조 체계로 상호보완적으로 움직여 결국 삶의 방향까지 바꿔놓는다. 자폐증에 대한 보상으로 놀라운 기억력을 소유하거나 예술 분야에 뛰어난 재능을 보이기도 한다. 모든 삶의 방향에는 이유가 있는 걸까.

 

자연사했거나 삶의 방향이 바뀔만한 질병에 걸리지 않았다면 이 책에 실리지는 않았으리라. 세종이 운동을 싫어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에는 척추염이, 해골과 뼈의 형상이 반영된 가우디의 건축물에는 관절염이, 도스토옙스키가 도박꾼이 된 이유에는 간질 발작이, 모차르트의 죽음에는 균에 의한 감염이, 로트레크의 키에는 유전적 증후군이, 니체의 두통과 정신 이상에는 뇌종양이, 모네 작품의 색채변화에는 백내장이, 프리다의 작품에는 그녀의 고통이, 퀴리의 죽음에는 X선과 라듐이 뿜어내는 방사선으로 인한 백혈병이, 말리의 죽음에는 피부암이 연결된다.

육체의 기형이 종종 비난의 대상이 되는 모습을 본다. 유전적 증후군도 그의 잘못이 아닌 것을. 저마다의 방식으로 통증을 포용하는 모습에 가슴이 찡하다. 통증을 승화하여 박제해버린 당당한 예술성이라니! 아픔이 담긴 작품은 촉촉하고 탄력적이다. 감상하는 이들의 심장이 몰랑해지는 이유다.

요리사의 칼자국이 도마에 남듯 캔버스에는 화가의 흔적이 남는다는 문장을 읽는다. 글도 마찬가지겠지. 나의 글 곳곳에도 내 흔적이 묻어나리라. 통증을 외면하고 싶지 않다. 그들의 의지가 스스로의 어둠을 빛으로 승화한 것처럼. 빛의 부재나 여집합이 아닌, 어둠 자체로 존재를 인정하고 싶다.

 

들어가는 말과 나가는 말의 제목에서도 직업의 특이성이 드러난다. 책의 피부를 가르며 들어가서 책의 피부를 봉합하며 나온다. 의사의 시각에서 책은 이렇게 보일 수도 있겠구나! 종류별 통증 그래프, 나이대별 통증 그래프에 대한 분석력이 탁월하다. 역시 이과 전공이야 싶다가도 책을 읽으면서 생각이 추가된다. 자연스런 전개, 뛰어난 가독성은 이과 계통 직업 종사자들이 취약한 문장력을 보인다는 통념을 깨뜨린다. 저자는 문이과 통합형의 적절한 예로 제시할만한 사람이다.

세종, 가우디, 도스토옙스키, 모차르트, 로트레크, 니체, 모네, 프리다, 퀴리, 말리. 책에서 다룬 10명의 인물들은 각기 다른 분야에서 유명한 역사적 인물들이다. 이들의 대표적인 정체성을 나열하면, , 건축가, 작가, 음악가, 화가, 철학자, 과학자이다.

저자가 선택한 이들을 분석하니 그의 관심 분야가 짐작된다. 음악가가 두 명, 화가가 세 명이다. 음악과 미술에 관심이 많은 걸까. 특히 화가가 등장인물 수의 30% 정도를 차지한다. 효과적인 상황 전달을 위해서겠지만 책 속의 유일한 컬러페이지가 화가의 색채감을 위해 특별히 삽입된 점도 미술에 대한 저자의 애정을 보여준다.

 

세상은 떨림의 집합체이다. 물질을 이루는 원자, 그 안의 소립자들도 매순간 진동한다. 실체로 존재하는 모든 대상은 진동하면서 서서히 변화한다. 공기를 울리지 못한다고 시그널이 없는 것은 아니다. 우리의 몸도, 한때 시공간의 좌표축을 공유했던 이와의 어긋남도 각기 다른 방식의 시그널을 보낸다. 세심한 시그널은 당신과 당신 주변에 소리 없이 쌓인다.

태어나고 늙고 죽는 건 어찌할 수 없다. 질병에 대해서는 인간의 의지가 개입할 수 있는 여지가 있다. 질병은 몸에 반드시 흔적을 남긴다. 고통으로 혹은 미세한 변화로 메시지를 보낸다. 인지하든 인지하지 못하든 삶은 질병으로 인해 서서히 궤적을 달리한다. 다만 몸이 보내는 시그널을 일찍 알아챈다면 조금이나마 원하는 방향으로 삶을 이끌 수 있지 않을까.

우리의 몸은 맑은 유리와 같다. 외부 환경의 변화나 외부로부터 다가오는 자극에도 분명 흔적이 남는다. 흔적을 세세히 들여다보는 건 우리의 몫이다. 눈은 마음의 지배를 받는다. 마음이 향하는 대상만이 시선 끝에 존재한다. 당신의 몸을, 당신의 주변을 가만히 들여다보라. 눈길이 머무는 곳에 쌓임의 시그널은 반드시 있다. 자세히 보고 오래 보아야 예쁘고 사랑스러운 풀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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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르미날 1 (무선)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21
에밀 졸라 지음, 박명숙 옮김 / 문학동네 / 201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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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로 표현하지 않아도 감각으로 전해지는 아픔이 있다. 지친 표정으로, 노곤함이 눅진하게 들러붙은 냄새로, 촘촘하면서도 거친 소리의 질감으로 고여 있던 아픔은 실체를 드러낸다. 감각을 자극하는 아픔은 깊다. 공기를 타고 흘러와 온몸으로 스며든다.

제르미날에 빠져있던 어느 날, 라디오에서 이 책의 BGM으로 어울릴만한 음악을 듣는다. 니나 시몬의 ‘Don´t let me be misunderstood’이다. ‘baby’라는 첫 소절이 심장에 느낌표를 찍는다. 가수든 가사든 아무런 정보도 없지만 아픔이 묻어난다.

현재형이든 과거의 흔적에서 온 것이든 라디오 속 목소리가 아픔의 파도처럼 흘러나온다. 삶에서 아픔은 내면에 켜켜이 쌓이는 걸까. 바람이 불면 먼지가 일어나 듯 목소리로, 냄새로, 빛깔로 고개를 내미나. 혹은 내게 담긴 아픔이 무의식적으로 공명을 일으키는 건지도 모른다.

디제이와 게스트가 탄광 목소리라는 멘트를 주고받는다. 같은 노래를 부른 다른 가수를 일컫는 말이지만 이 목소리도 못지않게 탄광스럽다. ‘귀로 오는 게 아니라 가슴을 치는 목소리라는 게스트의 표현에 수긍한다. 남성의 것인지 여성의 것인지조차 헷갈리는 음성이 차 안을 가득 메운다. 인간 본성에 근접한 목소리가 있다면 비슷한 느낌일까.

 

에밀 졸라가 묘사하는 인간은 원초적이다. 육체마저 벗어던진 듯 내밀한 심리가 까발려진다. 심리학계의 능숙한 집도의 랄까. 인간이 두른 몇 꺼풀의 가식도 그를 만나면 적나라하게 파헤쳐진다. 당황은 독자의 몫이다.

졸라의 문체에 적응이 되어가는 중이다. 주변의 지형지물을 이용해 인물의 심리와 상황 묘사를 극대화한다. 환경과 상황과 등장인물의 삼위일체, 사물들의 짐승화가 다시 등장한다. 돌아온 석탄과 증기! 역시 그는 석탄 묘사의 달인인가. 탄가루가 묻어나는 문장에 매번 감탄한다. 뜨겁고 축축한 장마철의 공기를 분사한다. 인물의 배경은 뜨겁고 그들의 삶은 한겨울 내던져진 알몸인 듯 매섭다. 이번에는 어둠에다 깊이까지 더해진다. 온 세상 어둠을 몽땅 끌어 모아 갱도의 좁은 구멍에 우르르 쏟아 붓는다.

제르미날은 노동자계급을 주인공으로 내세운 최초의 소설이다. 작품의 배경은 1860년대 프랑스 북부 광산 지대이다. 광부들과 부르주아 사이의 계급투쟁과 산업화 시대의 불온을 그린다. ‘제르미날은 프랑스 혁명력의 7번째 달을 의미한다. 싹이 튼다는 ‘germer’와 탄광의 ‘mine’과 공화력의 ‘al’의 복합어이다. 파종의 달, 싹트는 달을 의미한다. 대중 봉기, 폭동, 폭력, 가난, 기아 등을 내포한다. 작가는 소설을 통해 사회 변화의 진정한 잠재력은 무엇인지 세상을 향해 질문한다.

 

목로주점의 여주인공 제르베즈와 랑티에의 아들이 이 책의 주인공 에티엔 랑티에이다. 중심인물은 랑티에와 마외 씨의 딸 카트린이다. 그가 탄광촌에 들어오면서 이야기는 시작된다. 제일 먼저 마주치는 인물은 8세 때부터 50년을 탄광에서 일한 노인이다. 한 가지 직업을 50년 하면 이를 바라보는 마음은 어떨까. 대화 중간 중간 추임새인 듯 계속되는 기침이 그곳이 탄광촌임을 자각시킨다. 뱉어내는 침과 함께 피처럼 섞여 나오는 탄가루는 지나온 삶의 흔적이자 부스러지는 생명력이다.

랑티에는 거대한 어둠이 깔린 지역을 가리키며 노인에게 묻는다. 저게 다 누구 거냐고. 노인은 탄광의 주인을 알지 못한다. 한 번도 본적 없는 존재, 포식하는 신적인 존재들을 위해 세대를 거듭하며 대대로 석탄만을 캐낼 뿐이다.

소설의 주요 배경인 몽수돈으로 이루어진 산을 의미하는 가상의 도시이다. 돈을 있게 한 노동자들은 결코 그 돈을 소유하지 못한다. 현실을 역설적으로 표현한 도시명이다. 탄광촌 사람들의 목적은 오로지 하나다. 빵을 먹기 위해, 오롯이 살아남기 위해서다. 매일 새벽에 일어나서 시곗바늘처럼 일터와 집을 오간다. 만 명이 넘는 굶주린 사람들은 정체도 모르는 신을 위해 목숨을 내놓으며 일을 한다. 불행하게도 먹지 않고 살 수 있는 방법을 발명해내지 못했기 때문이다.

 

1부와 2부에서는 탄광촌 노동자와 부르주아의 삶이 묘사된다. 그들의 삶은 하루의 시작 시간부터 다르다. 새벽 4시에 깨어나서 탄광으로 향할 준비를 하는 사람들 주변에는 여유로운 아침 9시의 햇살을 맞는 이들이 존재한다. 졸라는 두 종류의 삶을 번갈아 등장시키며 보색 효과의 선명함을 전한다.

본격적인 서사는 갱도를 받치던 갱목이 무너지는 3부부터 전개된다. 노동자의 죽음은 4부에서 파업으로 이어진다. 랑티에는 이를 주도하는 지도자가 된다. 5부에서 노동자 무리는 거대한 행렬을 이룬다. 최소한의 생존을 위한 임금 인상이 그들의 유일한 요구이다. 치열한 군중의 흐름에도 회사 측의 양보는 없다. 6부에서는 교착 상태에 빠진 광부들의 궁핍한 삶이 그려진다. 가재도구를 하나씩 팔면서 근근이 하루를 버틴다. 동전 한 닢 쳐주려 하지 않을 살가죽만 남는다. 군대가 개입되면서 더 이상 물러설 곳이 없는 민중의 물결은 폭력화로 치닫는다. 탄광회사가 있는 몽수에서 무차별한 발포가 일어난다. 광부들의 패배이다.

일부 광부들의 삶은 도돌이표를 찍는다. 여전히 먹을 것은 없고 죽을 수 있는 행운도 찾아오지 않는다. 하지만 아직 끝난 건 아니다. 마지막 7부에서 무정부주의자인 기계공에 의해 갱도가 붕괴된다. 살기 위해 갱도로 내려갔다 갇힌 사람들이 하나 둘 죽음을 맞는다. 두 주인공 역시 갱도에 갇힌다. 열흘 만에 주인공만 산 채로 구조되어 탄광촌을 떠난다.

 

깊이 554m, 하강 시간 단 1. 적치장 4군데, 첫 번째 작업장은 지하 320m 지점. 탄광에서 수직으로 파내려간 갱도인 수갱이다. 원시의 탄광은 고대인들이 언급했던 4원소가 구현된 공간이다. 탄광의 주변을 관통하는 강인 ’, 지하에서 뿜어져 나오는 뜨거운 열기 ’, 음습하면서도 열기를 훅훅 전하는가 하면 어느 순간 냉기를 뿜어내는공기’, 시커먼 석탄 덩이로 이루어진 ’. 4가지 기본 원소로 둘러싸인 세계에서 인간은 한없이 쪼그라든다.

지하의 광부들이 본능을 드러내는 일은 헐벗은 아담과 이브의 모습처럼 자연스럽다. 고된 노동 끝에 찾아오는 밤은 어린 여자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고통에 시달릴 생명을 잉태하는 시간이다. 원시의 공간에 포획된 노동자들은 생명의 가느다란 끈을 놓지 않기 위해 안간힘을 쓴다. 자아실현의 고차원적인 욕구 따위는 없다. 빵이라도 배부르게 먹을 수만 있다면. 굶주림의 경계에서 아슬아슬 줄타기를 하는 탄광촌 사람들에게 고단함보다 두려운 건 실업이다.

탄광촌 아이들은 10대에 다다르기도 전에 본능을 인지한다. 바닥부터 쌓이는 삶의 바탕을 너무 이른 나이에 체득한다. 탄광촌 노동자들에게 아이들은 생계 수단에 다름 아니다. 새로 태어나는 아이들은 대대로 이어지는 노동자의 대열에 합류해야 존재의 의미를 갖는다. 결혼 역시 생계 수단의 이동과 연결 지어 결정된다.

 

240번 탄광촌에 거주하는 그들의 일터인 르 보뢰탄광은 집어삼키다, 탐욕스럽게 먹다라는 의미의 불어에서 유래한다. 탄광은 탐욕스러운 짐승이다. 짐승의 구불구불한 창자로 매일 새벽 사람들이 먹이처럼 빨려 들어간다.

작가는 탄광 속에 들어간 인간들을 개미로 묘사한다. 개미굴에서 본능적으로 움직이는 곤충들에게 여유 있는 햇살은 꿈에서조차 등장하기 어렵다. 땅속에 끌려들어간 말 역시 죽어서야 밖으로 나올 수 있다. 말이 태양을 기억해내기 위해 헛되이 애를 쓴다는 문장이 마음을 찌른다. 거대한 개미집에서 노동자들은 고목을 갉아먹는 벌레처럼 대지 곳곳에 구멍을 낸다.

갱은 날마다 왕성한 식욕으로 인간 가축의 고깃덩이를 삼키고 뱉는다. 갱의 하루치 식량은 700명에 가까운 광부들이다. 땀 냄새 훅훅 끼얹어지는 현실감에 숨이 막힌다. 한 사람이 거의 통과할만한 비좁은 공간, 깊은 어둠, 뜨겁다 차갑다 도무지 중간이 없는 온도 차, 갱내 가스로 인해 턱턱 막히는 숨, 운하의 흐름과 인접해있어 중간 중간 고여 있는 물웅덩이, 모래성의 아래 부분을 파내는 것처럼 언제 무너질지 모르는 공간이다.

땅 속 깊이 갇힌 광부의 삶은 상상 그이상이다. 소설 집필을 위한 경험이 묻어난 글이라지만 사진을 보듯 생생하다. 끝까지 긴장감을 놓지 못하게 만든다. 서사를 끌어가는 작가의 필력에 엄지척이다.

 

삶이 아픔일 때 꿈틀대는 건 인간의 본능이다. 소설 속 인물들을 움직인 동기는 오로지 배고픔이었다. 한 번도 다른 삶을 꿈꿔보지 못한 채 대대로 내려앉은 체념의 외피를 걷어내려는 몸부림이다. 변화를 이끄는 지도자들의 모습은 다양하다. 과격하거나 온건하거나 두 가지가 복합적으로 혼재해있다. 각기 나름의 입장으로 타당성을 어필한다. 어떤 방식이 옳은가는 2차적인 문제이다. 중요한 건 움직임 자체일 테니까. 작가는 마지막까지 희망을 놓지 않는다. 그들의 혁명은 끝난 것이 아니다. 소설 제목이 의미하듯 변화는 끊임없이 싹을 틔운다.

탄광촌 사람들의 삶에서 석탄의 화학적 구조가 연상된다. 석탄은 나름 규칙적인 면이 보이나 납작하게 눌린 구조를 지닌다. 같은 탄소 성분이라도 다이아몬드와 다르다. 석탄과 다이아몬드. 두 물질은 오로지 구조적인 차이로 인해 전혀 다른 결과물로 존재한다. 이집트의 파라오인 듯 오만하게 군림하는 다이아몬드는 정사면체 구조를 지닌다. 이들의 결정 구조는 상반된 인간의 삶을 닮았다.

900~1300도의 고열과 3만 기압을 견뎌야만 석탄은 다이아몬드로 변한다. 탄광촌 노동자들에게 삶은 그렇게 견디는 시간의 집합체였을까. 내내 석탄으로 살다 끝내 불태워져 사그라지는 삶에 담긴 아픔은 어떤 물리량으로 존재할까. 삶 자체가 아픔이 될 때 그것은 어떤 형태로 전해질까. 석탄 빛깔을 닮은 어둠이 유난히 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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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감 2022-06-01 14:07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환경과 상황과 등장인물의 삼위일체, 사물들의 짐승화‘ 맞는 말씀입니다. 원초적이면서 문학적이기도 한 글을 이리도 잘 쓰는 작가라니, 참 대단합니다. 어찌보면 탄광 배경 때문에 스토리가 제한적일듯한데도 참 잘 풀어나가더라고요. 아니면 노동계층의 작품을 쓰기 위해 탄광을 택한 것일까요? 여튼 이번에도 클라쓰에 박수를... ㅎㅎ

심리뿐만 아니라 독자의 생각과 가치관과 윤리관 등등 모조리 까발려지는 듯해요. 저역시 하나의 노동자다 보니까 여러가지로 공감하면서도 괜시리 민망함이 드는거 있죠 ㅋㅋ

4가지 원소라니, 역시 과학인의 접근다워요. 기본 원소가 존재하는 원시 공간에서 인간의 날것이 드러나고 있다는 게 신기하기도 하고 당연한건가 싶기도 하고요. 끊임없이 굶주림과 싸우는 노동자들과, 사람들을 집어삼키는 탐욕가득한 탄광 짐승의 대립/공존을 그려낸 졸라의 뇌구조가 너무 궁금합니다. 파종의 달이라는 제목도 센스있어요^^ 졸라가 비평가로도 활동했던데, 그의 비평글은 얼마나 신랄했을지 ㅋㅋㅋ

본능 앞에서 어떤 방식이 옳은가는 2차적인 문제. 그렇죠. 일단 내가 살기 위해서 저절로 나오는 행동 자체인데, 여기서 누군가는 이성적일테고 누군가는 본능대로 움직일테죠. 졸라의 작품에는 온갖 반응을 보이는 인물들이 참 많이도 나와요. 저는 무대 사이즈가 큰 걸 싫어하는데도 졸라의 책은 잘 읽혀져요. 그래서 숨이 턱턱 막히는데도 자꾸 손이 가네요 ㅎㅎ

다이아몬드로 변하기 위해 고통의 시간을 보내는 석탄같은 노동자들의 삶. 멋진 표현입니다! <데미안>으로 바꿔말하면, 알을 깨고 나오기까지의 시간일려나요 ^^ 이 과정을 과격하게 지날지 온건하게 지날지는 각자의 판단이겠어요. 여러가지로 좋은 시각을 열어주셔서 감사드립니다! 5월 너무 고생하셨어요. 아픈곳 빨리 나으시고, 6월에 또 만나요 ^^

나비종 2022-06-02 19:05   좋아요 2 | URL
그의 책을 읽을 때마다 활유법의 달인임을 절감하게 됩니다. 열받은 기차가 그토록 스팀을 뿜어대며 뱀처럼 꿈틀거리더니, 졸라의 손을 거치니 갱도가 금세 짐승의 창자 내지는 개미굴이 되어버리는 걸 보면 말이죠. 원초적이면서도 문학성에다 스토리까지 탄탄한 작품을 보면서 넘사벽의 작가 포스를 느꼈습니다. 폐소공포증이었다던데 탄광을 답습하다못해 직접 들어가보았다니 리얼리티를 구현하기 위한 집념이 존경스럽더군요.

맞아요! 생각과 가치관과 윤리관을 고스란히 드러내는 냉철한 통찰력이 대단합니다. 졸라의 작품에는 100%의 선인도 100%의 악인도 존재하지 않잖아요. 인간 내면에 존재하는 모순적인 양면성이 작품에서 온전히 까발려지는 모습을 보며, 당시 사람들은 졸라를 적으로 두었더라면 빠져나갈 구멍이 없었겠다 싶었어요. 막무가내의 비판이 아니라 근거를 두고 점점 파고드는 방식에 피가 말랐을테죠?ㅎㅎ


나비종 2022-06-02 19:23   좋아요 2 | URL
댓글을 쓰다 잠시 아아를 마시려는데 팔꿈치로 엔터키가 눌려지는 바람에...^^;;;

물,불,공기에 대한 졸라의 표현이 워낙 리얼한 바람에 4원소가 절로 떠오르더라는..ㅋㅋ 원시적인 공간에서라면 인간의 본질적인 원시성이 자연스럽게 드러나지 않을까요? 졸라의 뇌구조라...ㅎㅎ 천재의 뇌구조, 정말 궁금해지는데요?
제목도 깔끔한 게 작명 센스도 탁월하구요.
비평 대상은 아마 죽을 맛이지 않았을까요? 졸라 정도라면 펜이 칼이라는 표현이 적절하게 어울리지 싶어요.^^

살기 위해 본능에 따르는 건 전류가 흐르는 방식과 비슷하다는 생각을 해요. 전류는 갈래길을 만났을 때 저항이 큰 길로는 가려고 하지 않거든요. 쉬운 길로, 빠른 길로 흐르고자 하는 건 물질이나 인간이나 마찬가지인가 봅니다. 여기에 인간에게는 융통성이 있다는 점이 다르겠죠. ‘그럼에도 불구하고‘라는 용기가 변수로 작용하니 어디로 튈 지 모르는 인간 존재는 참 흥미로운 대상입니다.
저 역시 물감님처럼 방대한 대서사시는 체질에 안맞는데 졸라는 그런 면에서 졸라 묘한 작가예요. 완전 팬되었어요~~ㅎㅎ

극한의 배고픔에 도달해본 적이 없는 노동자인지라 감히 고통을 논하기에는 역부족이지만 이런 작품을 계기로 그들의 삶을 조금이나마 제대로 바라볼 수 있게 되어서 좋았어요. 맞아요. <데미안>의 알까기요. 얼마 전에 읽었던 <바람이 분다, 살아야겠다>에 이런 말이 나오거든요. 누구도 자신 앞의 똥을 대신 치워주지 않는다구요. 가만히 곱씹어보면 맥락이 통하더라구요. 혁명도 누군가 대신 해주는 게 아니라 스스로의 삶을 위해서는 자신이 꿈틀거리고 움직여야 한다는 거죠.

6월부터 다시 화이팅하려구요. 물감님도 건강 조심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