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말 북리뷰를 훑어보다가 놓친 '대작'이 있다. 토니 주트의 <포스트워 1945-2005>(플래닛, 2008)이 그 '대작'인데, 1,2권을 합한 분량이 1500쪽에 이른다. 해마다 이맘때 등장하던 한국전쟁 관련서가 뜸하다 싶었는데, 이 전쟁 '이후사'는 그런 기대를 단숨에 뛰어넘는다. 서점에서도 보고 무심코 지나쳤던 책이지만 리뷰를 읽어보니 '문제작'이다. 장서용으로라도 꽂아둘 만하다.  

경향신문(08. 06. 28) 그들의 60년속에 ‘미래의 대안’이 숨어있다

최근 유럽에는 좋은 소식과 나쁜 뉴스가 겹쳤다. 좋은 뉴스는 유럽 경제가 20년 만에 미국과의 격차를 최소화하고 일자리를 더 많이 만들어냈다는 발표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가 유럽의 만성적 저성장·고실업이 민주제도를 위협할 수 있다는 자신들의 경고를 받아들여 구조개혁을 한 덕분에 되살아난 것이라고 생색을 내고 있지만 말이다. 나쁜 소식은 유럽연합(EU)의 마지막 통합 작업인 리스본 조약을 아일랜드가 국민투표로 거부한 일이다.

통합 유럽은 이처럼 곡절을 헤쳐가며 자신들의 역사는 물론 세계사를 바꿔 나간다. ‘유럽 통합의 아버지’ 장 모네가 없었다면 전쟁 이후 유럽 이념은 정말 어떻게 되었을지 모른다고 했던 장-바티스트 뒤로젤의 지적처럼 고비마다 좌절을 뛰어넘는 지혜가 등장하는 게 유럽의 힘인 듯하다. 논쟁적인 저작 ‘문명의 충돌’의 지은이 새뮤얼 헌팅턴 하버드대 교수가 갈파했듯이 하나로 통합된 유럽연합의 등장은 미국 패권에 반대하는 전 세계적 반작용 가운데 단일 움직임으로서는 가장 중대한 의미를 지니는 것이며 진정한 의미의 다극화한 21세기를 만들어낼 중요변수임에 틀림없다.



유럽 역사의 최고 권위자 가운데 한 사람인 토니 주트는 온갖 광석을 용광로에 녹여 새로운 조형물을 만들어내는 것처럼 전후 유럽을 한 눈에 조망할 수 있는 거대한 조감도를 탄생시켰다. 수많은 세계적 언론이 주트의 대작 ‘포스트워 1945-2005’(원제 POSTWAR: A History of Europe Since 1945)를 2005년 ‘올해의 책’으로 선정하기에 이른 것은 망원경으로 보는 거시적 통찰과 현미경으로 관찰하는 듯한 미세 분석이 동시에 담긴 유럽현대사 오디세이로 평가하기 때문인 것 같다.

지은이는 전후 60년의 유럽 역사가 위대한 점을 ‘미국식 생활양식’에 맞서 ‘유럽식 사회모델’을 창조한 것에서 찾는다. 그는 연이은 세계대전의 폐허 속에서 주저앉고 말 것 같던 유럽이 특유의 사회모델로 우뚝 선 과정을 정밀하게 추적해 파노라마처럼 보여준다. 복지국가 모델이 거저 생겨난 게 아니라는 사실을 하나씩 거증해 나간다.



핍진한 전후의 일상생활 속에서 복지제도는 최소한의 정의나 공정함에 대한 보증서였다는 게 첫 번째 원인이다. 복지제도가 전시의 레지스탕스가 꿈꾸던 정신적·사회적 혁명에는 못 미치지만 전쟁 이전 시기의 절망과 냉소에서 벗어날 수 있는 첫걸음이었다는 데 밑줄을 먼저 긋게 한다. 서유럽의 복지국가가 정치적인 분열을 초래하지 않았다는 사실은 두 번째 이유로 꼽힌다. 복지국가의 전반적인 취지가 사회적 재분배였지만 전혀 혁명적이지 않아 사회갈등 요소가 끼어들 여지가 거의 없었다. 가난한 사람들에게 당장 가장 큰 혜택이 돌아갔지만 장기적으로는 전문직과 사무직, 상인을 비롯한 중간계급의 복지가 몰라보게 향상된 덕분이다.

유럽의 과도한 복지제도가 경제의 효율성과 성장에 심각한 결함을 낳았다는 비판이 한국 땅에서는 여전히 유효한 주장이지만 저자는 이를 일축한다. 해마다 실시되는 유로바로미터의 여론조사 결과 절대 다수의 유럽인들이 빈곤의 원인을 개인의 능력이 아니라 사회적 환경 탓이라는 인식을 버리지 않고 있는 점을 든다. 대부분의 유럽인들에게 직업의 안정과 누진세, 대규모 사회적 이전지출에 대한 약속이 시민 상호간의 약속인 동시에 정부와 시민 사이의 약속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미국인들보다 더 나은 교육을 받았고, 더 안전한 생활을 누렸으며, 더 오래 더 건강하게 살았다는 통계도 이를 입증한다는 것이다.

전후 과거사를 5~6년이라는 이른 시일 안에 깔끔하게 정리한 것도 유럽 각국들이 개혁과 발전의 발걸음을 가볍게 한 요인 가운데 하나라고 비교적 자세하게 기술하고 있다. 지은이는 유럽적 가치 창조와 더불어 유럽의 위축과 지리적 축소, 이데올로기와 지식인의 영향력 쇠퇴도 주요한 역사적 흐름의 하나로 제시한다.

책은 2차 세계대전 후 유럽의 거의 모든 것을 아우른다. 전쟁의 유산과 과거 청산, 유럽 제국주의의 종말과 식민지 해방, 냉전의 도래, 유럽경제공동체의 탄생과 확대 발전, 서유럽의 경제적 번영과 불만, 소련의 동유럽 지배와 소비에트 블록의 몰락, 발칸 반도 전쟁, 최근의 난민과 불법 이민 노동자, 유럽인들의 일상적 삶에 이르기까지.

요슈카 피셔 전 독일 외무장관이 유럽의 새로운 변신이 가능했던 두 가지 역사적 결정으로 손꼽았던 것에 대해서도 주트는 대부분 동의한다. 미국이 유럽에 잔류하기로 한 일, 프랑스와 독일이 우선 경제적 유대부터 시작하는 통합의 원칙을 충실히 따르기로 한 결정이 그것이다.



책의 특징 가운데 하나는 지은이의 주장이 강하게 배어 있다는 점이다. “한국전쟁이 발발하지 않았다면 최근 유럽사의 윤곽은 매우 달라 보였을 것”이라는 대목이 그중의 하나다. 역사에서 가정은 의미가 없지만 그는 이 경우를 ‘합리적인 반사실적 가정’이라고 주장한다. 북한의 남침을 지원한 스탈린의 결정이 가장 중대한 오산이었으며 이로 말미암아 유럽의 역사가 바뀌었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유럽 정치 질서가 ‘배제의 정치’가 아닌 ‘포함의 정치’라는 게 우리에게 주는 또 다른 시사점이기도 하다.

총 1446쪽에 이르는 방대한 이 책은 현대유럽사에서 미래의 선택지를 찾도록 세계인들에게 권한다. 초강대국 미국과 미래의 잠재적 초강대국 중국도 보편적으로 모방하고 싶은 유용한 모델을 갖지 못했으며, 유럽 모델이 가장 근접한 대안이 될 수 있다는 이유에서다.(김학순 선임기자)

08. 06.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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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매 2008-06-29 23:02   좋아요 0 | URL
32천원짜리 책 두권이라는 가격의 압박도 장난이 아니군요.
방금 mbc2580에서 방송된 고교서열화의 문제 지적을 보니, 강북의 방과후 공부방 초등생과 강남의 영어학원수강 초등생들로 나누어 인터뷰를 하니 그 어린아이들이 꾸는 미래의 꿈에서부터 서열이 확연히 드러나네요.
책 가격을 보니 이런 책은 사서 보지 못할 사람도 있겠구나 싶은 생각이 들었습니다.
책값이 그나마 다른 것보다는 싼 편이겠지만 이런 식으로 정보에 대한 접근도 점점 양극화되겠구나라는 생각까지 말입니다. 저 역시 동네도서관에 주문을 넣을 수 밖에 없으니.
영어책은 페이퍼백으로 3만원도 안되는데 불과한데 말이죠.

로쟈 2008-06-29 23:21   좋아요 0 | URL
원서의 알라딘 판매가는 21,000원 정도니까 거의 3배 차이네요. 약간의 악순환인데, 인문서의 독자가 줄어들다 보니 책의 단가는 점점 더 올라가는 식입니다. 그럼, 독자는 더 줄어들고...

aisms 2008-10-29 20:23   좋아요 0 | URL
플래닛 출판사입니다.... 가격이 좀 높지요.... 고민 많이 했습니다. 로쟈님의 의견도 일부 맞는 말씀이지만, 원서 가격과 비교하는 것은 별로 의미가 없습니다. 기본적으로 그 분량을 번역하는 데 드는 비용과 편집비 등을 고려하면 그 정도 가격을 매길 수밖에 없었습니다. 제가 알기로는 영어 양장본도 처음 나왔을 때는 45달러 정도였고, 이 책이 영미권 독자들을 대상으로 초판 4만부를 찍었다는 점을 고려해야 합니다. 고작 2,000부를 찍고 경향신문과 한겨레21 등에 전면 광고 등을 하고도 4개월이 지난 지금도 초판의 3분의 2 정도밖에 소화하지 못한 게 현실입니다. 제작비에 대비해서도 그렇게 비싼 가격은 아닙니다. 대충 계산해 보시면 아시겠지만 (소설책을 제외하면) 그렇게 비싸게 매긴 것도 아닙니다. 아무튼 이 책은 아직 제가 낸 책 중에서 최고라고 생각합니다. 저자가 최근 포린 폴리시 선정 세계 100대 지성에 들기도 했고, 아마도 제가 내지 않았으면 오랫 동안 국내에 출간되지 않았을 거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영미권에서 올해의 책을 석권할 정도로 화제가 되었는데도 불구하고 오랜 기간 동안 책을 계약하겠다고 나선 출판사가 전혀 없었다는 점을 생각해 보면 가격에 대해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으실 거라고 믿습니다. 화제가 되는 대부분의 책들이 미국에서도 아직 책으로 나오기 전에 원고 상태에서 계약이 이루어지고 있는데도 말이지요. 쓰고 보니 쑥스럽군요. 일부 메이저 출판사들을 제외하고는 최근 대부분의 출판사들은 아주 어렵습니다. 언제 무너지질 모르겠다는 공포감에 짓눌려 있다고나 할까요? 뭐, 그렇다는 말씀이고요. 관심을 가져주신 데 열매 님과 로쟈 님께 감사드립니다.

로쟈 2008-10-29 22:32   좋아요 0 | URL
책값에 대해서는 저도 이해하는 편입니다. 물론 전체적으론 지난 몇년간 급상승한 것도 맞고요. 문제는 수요 같습니다. 아시겠지만, 같은 분량이라면 소설이 인문서보다 단가가 낮은 건 독자층이 더 넓은 탓이죠. 인문서 독자층을 어떻게 확보할 것인가는 인문 출판계 전체의 숙제 같습니다...
 

'대중유토피아의 꿈'(http://blog.aladin.co.kr/mramor/2160004)에 이어지는 페이퍼로서 수잔 벅 모스의 <꿈의 세계와 파국>(경성대학교출판부, 2008)의 한 문단을 읽는 것이 목적이다. 따로 자리를 마련한 것은 국역본의 번역이 어이없어서이다(안심하고 읽을 수 있는 인문 번역서는 그토록 드문 것인지?). 최근의 '촛불문화제'와도 관련되는 내용이어서 교정해놓는다. 번역본의 22쪽, 원서로는 6-7쪽이다.

"국가의 계급적 특징은 폭력성을 설명할 수 있지만, 정당성을 설명하는 것은 아니다. 국가의 민주주의적 특징은 폭력성이 아니라 정당성으로 설명할 수 있다. 만약 누군가 맑스주의적인 비판과 민중 주권의 합법성에 대해 호소하는 자유-민주주의적인 이론을 통해 폭력적인 국가를 회복하기 위한 시도를 거부한다면, 대중 민주주의인 민중의 의지에 저항한 민중 주권에 의해 폭력을 사용하는 경우에, 주권이 지지하는 법이 그 자체로 정당한지를 의심하게 되는 문제에 직면하게 된다. 민주적인 주권은 인민에 대해 정당한 구체화로 독점하는 모든 폭력을 가진 인민과 직면할 때, 그것은 인민의 비정체성을 사실상 증명하는 것이다. 그래서 법의 개념에 대한 의지로 민중 주권과 국가 폭력 사이의 모순을 풀기 위한 시도는 불합리한 순환논법에 빠지게 된다. 그리고 이러한 순환의 효과는 전적으로 합법적/비합법적 구별의 가능성을 약화시키기 위한 것이다."

전체적으로 알아먹기 힘들다(특히 강조 표시한 대목). 자신이 이해한 것을 번역하는 게 아니라 억지로 단어들만을 (그것도 문법에 맞지 않게 엉터리로) 직역해놓을 경우에 이런 일이 벌어진다. 잘게 쪼개서 원문과 대조해가며 읽어보기로 한다.  

"국가의 계급적 특징은 폭력성을 설명할 수 있지만, 정당성을 설명하는 것은 아니다. 국가의 민주주의적 특징은 폭력성이 아니라 정당성으로 설명할 수 있다."(The class nature of the state may explain its violence, but not its legitimacy; the democratic nature of the state may explain its legitimacy but not its violence.)

오역할 만한 대목이 없는 문장인데, 대구법으로 이루어진 원문을 번역본은 굳이 비틀었다. 다시 옮기면, "국가의 계급적 특징은 국가의 폭력성을 설명해주지만 그 정통성은 설명해주지 못한다. 반면에 국가의 민주주의적 특징은 국가의 정통성은 설명해주지만 그 폭력성은 설명해주지 못한다."('정통성'이라고 옮긴 'legitimacy'는 보통 '정통성' '합법성' '정당성' 등의 뜻을 갖는다.) 

이어서 두번째 문장: "만약 누군가 맑스주의적인 비판과 민중 주권의 합법성에 대해 호소하는 자유-민주주의적인 이론을 통해 폭력적인 국가를 회복하기 위한 시도를 거부한다면, 대중 민주주의인 민중의 의지에 저항한 민중 주권에 의해 폭력을 사용하는 경우에, 주권이 지지하는 법이 그 자체로 정당한지를 의심하게 되는 문제에 직면하게 된다."(If one rejects the Marxist critique and attempts to redeem the viloent state through liberal-democratic theory, appealing to the legality of popular sovereignty, one faces the problem that, in the case of the use of violence by popular sovereignty against a mass demonstration of popular will, it becomes questionable whether the law that the sovereign is upholding is itself legitimate.)

일단 "만약 누군가 맑스주의적인 비판과 민중 주권의 합법성에 대해 호소하는 자유-민주주의적인 이론을 통해 폭력적인 국가를 회복하기 위한 시도거부한다면"에서 '시도'는 "If one rejects the Marxist critique and attempts to redeem the viloent state..."에서의 동사 'attempts'를 명사로 잘못 읽은 것이고, '거부한다면'이란 동사가 받는 건 '맑스주의적 비판'(the Marxist critique)까지만이다. 다시 옮기면, "만약에 국가에 대한 마르크스주의적 비판을 거부하고 국민지배의 합법성에 호소하는 자유-민주주의 이론을 통해서 국가 폭력을 구제(해명)하고자 시도한다면"쯤이 된다.

국가에 대한 마르크스주의적 비판이란 국가를 계급론적인 관점에서 이해하는 것을 말한다(이 경우 '국민의 지배'는 '부르주아의 지배'에 대한 허울이 된다). 그럴 경우 지배계급의 이해를 관철시키기 위한 수단으로서의 국가의 폭력은 자연스레 이해된다. 이미 "국가의 계급적 특징은 국가의 폭력성을 설명해주지만 그 정통성은 설명해주지 못한다."고 해놓지 않았나. 문제는 그 국가의 폭력성을 '자유-민주주의 이론'을 통해서 해명하고자 하는 경우이다. 자유-민주주의 이론이란 국가를 국민지배의 구현체로 보는 관점이다('국민지배'란 '국민의, 국민에 의한 지배'를 가리킨다).   

그럴 경우 어떤 문제에 봉착하게 되는가? "대중 민주주의인 민중의 의지에 저항한 민중주권에 의해 폭력을 사용하는 경우에, 주권이 지지하는 법이 그 자체로 정당한지를 의심하게 되는 문제에 직면하게 된다." 'people'은 '민중' '인민' 등 다양하게 번역될 수 있지만, 여기서는 '국민'이라고 옮기겠다(국역본에서는 '민중'과 '인민'이 두서없이 혼용되고 있다). '국민'이 갖는 부정적인 뉘앙스 때문에 보통은 기피되지만, 일상적인 용어로 가장 친숙하기 때문이다.  

역자는 "one faces the problem that, in the case of the use of violence by popular sovereignty against a mass demonstration of popular will"에서 'mass demonstration of popular will'을 '대중 민주주의인 민중의 의지'라고 옮겼는데, 'demonstration'을 '민주주의'로 옮기는 것은 '시위성' 번역이다. 이 대목만 다시 옮기면, "국민주권에 의한 국가폭력을 국민의지의 대중적 표현(시위)에 대항하여 사용할 경우에" 정도가 된다. 그리고 그렇게 되면,"it becomes questionable whether the law that the sovereign is upholding is itself legitimate", 곧 "그 주권이 지탱하고 있는 법 자체의 정당성 여부가 문제시된다."

전체를 다시 옮기면, "만약에 국가에 대한 마르크스주의적 비판을 거부하고 국민 지배의 합법성에 호소하는 자유-민주주의 이론을 통해서 국가 폭력을 구제(해명)하고자 시도한다면, 우리가 직면하게 되는 문제는 국민주권에 의한 국가 폭력을 국민의지의 대중적 표현(시위)에 대항하여 사용할 경우에 그 주권이 지탱하고 있는 법의 정당성 자체가 의문시된다는 점이다." 요컨대, '국민주권'(국가폭력)을 '국민의 의지'에 대항하여 사용해도 되는가 하는 것이다. 헌법에 명기된 대로, 국민주권이란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는 것을 뜻하는 것인데 말이다.

가령 이명박 정부를 탄생시킨 것은 다수 국민의 뜻이었다(실제적으로는 1/3의 대표성만을 갖는다 하더라도). 그런 의미에서 현 정부는 '국민주권'의 대행자이다. 그런데, 미국산 쇠고기 수입협상 등 현 정부의 정책에 반대하는 다수 국민의 의사 역시 '국민의지'이며 촛불시위는 그 '대중적 표현'이다. 때문에 경찰(국민주권)이 시위대(국민의지)를 향해 물리적인 수단을 동원하여 강제로 진압하는 것은 자유-민주주의 이론에 따를 때 '국민주권'과 '국민의지'가 충돌하는 모순적인 상황을 연출하는 것이 된다. 그것은 어떤 의미를 갖는가?   

"민주적인 주권은 인민에 대해 정당한 구체화로 독점하는 모든 폭력을 가진 인민과 직면할 때, 그것은 인민의 비정체성을 사실상 증명하는 것이다."(When democratic sovereignty confronts the people with all the violence that it monopolizes as the legitimate embodiment of  the people, it is in fact attesting to its nonidentity with the people.) 

내가 제일 어이없다고 생각한 대목이다(결국 이런 페이퍼까지 쓰게 만든!). 역자는 "When democratic sovereignty confronts the people with all the violence"를 "민주적인 주권은 모든 폭력을 가진 인민과 직면할 때"라는 식으로 옮긴 것인데, 여기서 with가 이끄는 전치사구는 people을 수식하는 것이 아니라 동사인 confronts에 걸리는 것이다(confront A with B). 즉, '모든 폭력'은 인민/국민이 갖고 있는 것이 아니라(그들이 '폭도'란 말인가?) '민주적인 주권'을 자임하는 국가가 갖고 있는 것이다. 어떤 수단들인가? 가령 극우논객 조갑제가 '청와대에 숨어 있는' 이명박에게 충고한 바에 따르면, "법, 경찰, 검찰, 국정원, 기무사, 국군 등 대통령이 가진 법질서 수호 수단은 엄청나다." 'all the violence'란 시민들이 들고 있는 피켓과 물병이 아니라 경찰이 갖고 있는 방패와 물대포이며 주권의 대행자로서 대통령이 갖고 있는 '법질서 수호 수단'들이다.  

그리고 'of  the people'은 '인민에 대해'란 뜻이 아니라  'the legitimate embodiment of the people' 전체에 걸리는 것이다. '국민의, 국민에 위한, 국민을 위한'이라고 할 때의 그 '국민의'이다. '국민의사의 합법적 구현' 정도로 보고 싶다. 그리고 마지막에 'nonidentity with the people'를 '인민의 비정체성'으로 옮긴 것도 나는 '국민과의 비동일성'이란 뜻이라고 본다. 그래서 다시 옮기면, "민주적 주권이 국민의사의 합법적 구현으로서 독점하고 있는 모든 폭력을 동원하여 국민과 맞선다면, 그것은 사실상 주권과 국민과의 '비동일성'을 증명해주는 것과 마찬가지다."  

이제 마지막 두 문장이다. "그래서 법의 개념에 대한 의지로 민중 주권과 국가 폭력 사이의 모순을 풀기 위한 시도는 불합리한 순환논법에 빠지게 된다. 그리고 이러한 순환의 효과는 전적으로 합법적/비합법적 구별의 가능성을 약화시키기 위한 것이다."(Thus the attempt to resolve the contradiction of the popular sovereignty and state violence by recourse to the conception of the law becomes caught in a vicious circle. And the effect of this circularity is to undermine the very possibility of the legal/illegal distinction.)

'불합리한 순환논법'이라고 옮긴 'vicious circle'은 그냥 '악순환'이라고 옮기는 것으로 충분해보인다. 다시 옮기면, "그래서 법 개념에 의지하여 국민주권과 국가폭력 사이의 모순을 해소하려는 시도는 악순환에 빠지게 된다. 그리고 그 악순환은 결과적으로 합법과 불법 사이의 구별가능성 자체에 의문을 제기한다."('undermine'은 '침식하다'란 뜻이지만 여기서는 그냥 '의문을 제기한다' 정도로 의역한다.) 말하자면, 공권력이라고 해도 그것이 국민의 의지를 대표하고 있지 않다면 그 정당성/합법성 자체를 의문시하게 된다는 것.

이 대목의 미주에서 수잔 벅 모스는 이렇게 적어놓았다. "여기서의 논의는 1988-1989년 파리에서 자크 데리다가 주최한 세미나에 빚을 지고 있다. 그곳에서 나는 이번 논문을 발표했기 때문이다. 비록 발터 벤야민과 칼 슈미트의 텍스트에 대한 그의 독해가 나의 견해와 달랐지만, 나는 그의 의견에 도움을 받았다."(324-5쪽) 벤야민과 슈미트에 대한 데리다의 의견은 그의 책 <법의 힘>(문학과지성사, 2004)에서 읽어볼 수 있다. 그리고 덧붙여 ''벤야민의 이름'을 읽기 위하여'(http://blog.aladin.co.kr/mramor/810363) 등의 페이퍼를 참조할 수 있다...

08. 06. 28.

P.S. 유감스럽게도 29일 새벽 촛불문화제가 열린 이후 경찰의 최대 ‘강경진압’이 펼쳐졌다 한다. 다시 확인하게 되는 것은 현 정부와 국민의지 사이의 모순과 비동일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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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토벤 2008-06-29 02: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with 하나로 시민과 폭도가 한 순간 갈리는군요. 살짝 무서워지려고 합니다. ^^;

로쟈 2008-06-29 10:30   좋아요 0 | URL
네, 무섭기도 하고 어이없기도 합니다.--;

누런마음황구 2008-06-29 08: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좋은글 잘 보고 갑니다.~ ^^

로쟈 2008-06-29 10:36   좋아요 0 | URL
서재에도 촛불 하나 켜놓았을 뿐입니다.^^;

김상호 2008-06-29 21: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랜만에 뵙는 로쟈님의 오역 비판이군요! 오랜 시간동안 기다려 왔읍니다!

로쟈 2008-06-29 22:25   좋아요 0 | URL
'벌이'도 아닌데다가 별로 '좋은 일'도 아니어서 자주 다루지는 못합니다.^^;

노이에자이트 2008-07-02 00: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합법성과 정당성은 다른 개념인데요...합법성은 legality이고 정당성은 legitimacy입니다.예를 들어서 악법을 만들어 인민을 법테두리 안에서 억압하면 합법성은 있지만 정당성은 없게 되지요.이런 짓은 법을 자기 뜻대로 만들 수 있는 힘을 가진 이들이 합법적인 수단을 통해서 부당한 목적을 달성할 때 쓰는 수법입니다.
identity를 동일성이라고 옮기신 것은 정확합니다.치자와 피치자의 동일성이라는 개념이 있으니까요.합법성,정당성,동일성은 독일어로도 거의 똑같은 철자네요.
로자 님 덕분에 칼 슈미트에 대한 책을 다시 보게 되었습니다.

로쟈 2008-07-02 00:49   좋아요 0 | URL
그게 엄밀하게 구별해서 쓸 수는 있지만, 사전적 정의상으로는 legitimacy도 '합법성' '적법성'이란 뜻을 갖습니다. 법률용어로는 구분이 되는지 모르겠지만...

노이에자이트 2008-07-02 01: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예...여기선 정치학이나 법학용어로 해석해야겠습니다.칼 슈미트에겐 <합법성과 정당성>이라는 저서가 있습니다.수잔 벅모스도 슈미트를 언급했고 기타 주요용어들로 보았을 때 여기선 그 둘을 구분하는 게 좋겠습니다.

로쟈 2008-07-02 01:25   좋아요 0 | URL
본문 중에 the legitimate 같은 경우는 '합법적'이라고 옮겼는데, '정당한'으로 옮겨야 한다고 보시나요?..

노이에자이트 2008-07-02 23: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예 그래야겠습니다.로자 님이 언급한 페이퍼를 보니 의회주의를 비판한 벤야민에게 슈미트가 공감했다는 내용이 나오는데 실제로 슈미트는 이렇게 이야기한 적이 있습니다.

...다원주의가 지배하는 의회의 다수결 원리에 의한 합법성은 동일성이 결여된 것이다.결코 민주주의적 정당성을 주장할 수는 없다...

물론 슈미트의 이 논리는 바이마르 의회주의로는 안되니 인민주권의 구현인 지도자(히틀러)가 필요하다는 결론이 되지요.

로쟈 2008-07-02 23:26   좋아요 0 | URL
그런데, 해당 문장에서는 주어가 '민주적 주권'이고 이걸 합법적 선거의 의해서 획득된 주권으로 볼 경우에, '국민의사의 정당한 구현'이라고 옮기는 건 어색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이명박 정부가 합법적인 '민주적 주권'이지만, 최근에 사태에서 정당성을 의심받을 수 있는 것처럼요. 제가 이해하는 합법성/정당성은 법/정의와 비슷한데, 좀 다른가요?..

노이에자이트 2008-07-03 22: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합법성,정당성의 구분에 대한 이해는 저와 로자 님이 같습니다.사실은 그 문장은 문맥으로 볼때 <합법적인>이라고 해석하는 게 더 낫습니다.물론 저자의 입장을 존중한다면 정당한...으로 해석해야겠지만 저자가 legal로 썼다면 깨끗이 해결되었을텐데...하는 생각도 듭니다.저자가 단어선택에 실수를 하지 않았나 생각합니다.그 위 문장의 leitimate는 논란의 여지없이 <정당한>인데 말이죠.

로쟈 2008-07-03 23:23   좋아요 0 | URL
저는 단어 자체로 엄밀하게 구분된다기보다는 문맥에 따르는 듯싶습니다. droit가 권리와 법의 의미를 갖는 것처럼...
 

'6월의 읽을 만한 책'(http://blog.aladin.co.kr/mramor/2117762)에서 수잔 벅 모스의 <꿈의 세계와 파국>(경성대출판부, 2008)을 언급한 바 있다. 독서 계획을 계속 미뤄둘 수만은 없어서 손에 들었는데, 책은 생각만큼 진도가 나가지 않는다(물론 책에 실린 이미지들만 훑어보아도 공부가 되긴 한다). 찾아보니 부산일보에만 리뷰기사가 실린 듯하데, 참고삼아 미리 읽어보는 게 좋겠다(http://www.busanilbo.com/news2000/html/2008/0517/060020080517.1016090128.html). 지나가는 김에 지적하자면 국역본의 표지는 제목과 달리 너무 밋밋하다.

부산일보(08. 05. 17) 대중 유토피아의 꿈은 여전히 유효해야 한다

책 머리에 쥘 미슐레의 금언이 새겨져 있다. "모든 시대는 다음 시대를 꿈꾼다." 책을 다 훑고 나면 이 금언이 다시 떠오른다. 꿈은 으레 희망의 다른 표현일테다. '꿈의 세계와 파국'(수잔 벅-모스/윤일성·김주영 옮김/경성대출판부/3만원)은 냉전 이후를 어떻게 바라볼까에 대한 대중 통찰서다. 하지만 '사회주의의 패배와 자본주의의 승리'로 쉽게 단정짓고 싶어하는 태도에 대해서는 철저히 거부한다. "20세기에 대한 평가는 승자의 손에 남겨져서는 안된다는 경고에 주목하라.(16쪽 '서문' 중에서)"

그 이유가 이렇다. "대중을 회유하는 '꿈의 세계'에 의해 초래된 위험들이 아니라, 지구적 권력의 현재 시스템에서 대중을 회유할 필요가 있다는 이념조차 유행에 뒤쳐진 것으로 던져버리는 사실에 의해 야기되는 '새로운' 위험들에 대한 성찰을 담았다.(320쪽 '삶의 시간, 역사적 시간' 중에서)"



책은 제목처럼 꿈을 다룬다. 하지만 일상의 꿈이 아니라 '대중'이라는 집단이 환각적으로 빠져든 공상에 대한 논의다. 물론 대중은 정치적 성향이 결여된 과거의 군중(mob)과 구분된다. 새로운 세상을 거침없이 지향하는 '강력한(?)' 집단이다. 그리고 그 대중의 꿈과 함께 20세기가 시작됐다고 책은 전제한다. 그 꿈의 실현이 대중 유토피아다.

하지만 정치 지형에 따라 선택된 도구는 달랐다. 대중 유토피아의 실천 도구로써 동구는 사회주의를, 서구는 자본주의를 채택했다. 100년의 실험(냉전)이 이뤄졌고, 그 실험이 끝날 무렵 사람들은 "사회주의의 실패, 자본주의의 승리"라고 성급히 결정했다.



그렇다면 '승자'로 분류된 자본주의 사회는 대중 유토피아를 실현시켰을까. 책은 이에대해 자본주의 사회에 유령처럼 떠도는 몇 개의 단어를 불쑥 들이댄다. '세계 전쟁… 대량 테러… 노동 착취…등…'. 누가 이런 단어에서 유토피아를 떠올릴 수 있을까. 자본주의 사회도 결국 예정된 목표 지점에 도달하지 못했다는 반증일테다. "대중 유토피아의 꿈은 제2세계(사회주의)에서 실패한 것으로 선언됐고, 제1세계(자본주의)에서도 의도적으로 포기됐다.(321쪽)"

책은 이 같은 주장을 반증하기 위해 사회주의와 자본주의의 상징처럼 굳어진 모스크바와 뉴욕을 부지런히 오가며 교차 분석한다. 그런 분석 틀의 상당수가 이미지다. 저자는 "그림과 사진, 영화 포스트 등이 20세기를 통찰하는 도구로 충분하다"고 말한다. 사물이 실제로 어떠했는가보다 그 사물들이 과거와 현재 시점에서 어떻게 보이는지를 분석하는 것이 더 유효하다는 것이다.

저자는 또 이 같은 이미지 분석을 통해 소비에트 모더니즘이 서구 모더니즘과 꾸준히 연결돼 있었다는 '예견된' 사실을 증명한다. 소련 중앙노동연구소의 핵심 연구 주제가 자본주의 상징이자 노동을 철저히 기계화한 미국 테일러 작업방식이었다(138쪽)는 것. 할리우드의 상징인 '영화 킹콩' 포스트와 거대한 레닌 동상이 올려진 모스크바 소비에트 궁전 설계안이 경악스러울만큼 닮았다(213쪽)는 것.

이쯤되면 그의 주장을 거부할 명분 찾기가 꽤 힘들어 진다. 저자는 결국 "20세기 사회주의의 붕괴는 자본주의를 너무 충실히 모방했기 때문(16쪽 '서문' 중에서)"이라고 결론내린다. 사회주의를 망친 것은 사회주의 그 자체가 아니라 그것을 운용한 주체들의 자본주의화된 계산법 때문이었다는 것이다.

책은 사회주의에 대한 '최소한의' 애정을, 자본주의에 대한 '최대한의' 경계를 전제로 했다. 그렇다면 마지막 질문 하나! 우리의 미래는? 20세기 내내 견지해온 대중 유토피아의 꿈은 이제 포기해야 하나? "우리는 기존의 집단 정체성 대신 새로운 정체성을 창조할 필요가 있다.(322쪽)" 꿈은 여전히 유효해야 한다.

저자는 20세기 유럽 지성을 대표하는 발터 벤야민(마르크스 문학평론가 겸 철학자) 연구자로 최근 명성을 얻고 있는 미국의 프랑크푸르트학파 여성학자다. 지난 2004년에는 '발터 벤야민과 아케이드 프로젝트'(2004년/문학동네)가 국내 소개된 바 있다.(백현충 기자)

08. 06. 28.

P.S. 책이 더디게 읽히는 건 부자연스러운데다가 약간씩 핀트가 안 맞는 번역 때문이다. 가령 1장의 첫문장은 이렇다. "20세기 말이라는 전망에서 제기되는 하나의 역설은 명백한 것처럼 보인다. 대중의 이름으로 통치하기를 요구하는 - 즉, 급진적 민주주의를 요구하는 - 정치체제는 대중의 통치를 넘어서는 권력의 행사가 이루어지는 지대를 합법적으로 구성하는데, 그곳에서 공중의 응시와 독단적이고 절대적인 것은 베일에 가려지게 되었다."(20쪽)

이것은 다음 문장을 옮긴 것이다. "From the perspective of the end of the twentieth century, the paradox seems irrefutable that political regimes claiming to rule in the name of the masses - claiming, that is, to be radically democratic - construct, legimately, a terrain in which the exercise of power is out of control of the masses, veiled from public scrutiny, arbitrary and absolute."(2쪽)

요점을 간추리면, 대중에 의한 지배를 명분으로 내건 급진 민주주의적 정치제체가 정작 대중에 의해 제어되지 않는 독단적이고 절대적인 권력을 낳았다는 것이고, 돌이켜보건대 이 점이 20세기의 역설이라는 것이다. 한데, "a terrain in which the exercise of power is out of control of the masses, veiled from public scrutiny, arbitrary and absolute."라는 문장 뒷부분에서 국역본은 'arbitrary and absolute'라는 보어가 모두 'veiled from'에 걸리는 것으로 잘못 보았다. 그래서 "그곳에서 공중의 응시와 독단적이고 절대적인 것은 베일에 가려지게 되었다"는 어색한 번역이 나오게 된 것('독단적이고 절대적인 것'은 원문에서 찾을 수 없다). 'veiled from public scrutiny'는 삽입구이므로 "a terrain in which the exercise of power is out of control of the masses, arbitrary and absolute." 라고 보는 게 편하겠다. 무소불위의 권력지대에서의 권력 행사는 대중의 통제를 벗어나서 자의적이고 절대적이었다는 것. 이 '권럭지대'를 저자는 'wild zone of power'라고 부른다(국역본은 '권력의 야만지역'이라고 옮겼다). 

저자는 그러한 경향이 자유민주주의에서건 사회주의에서건 별 차이가 없다고 말한다. "결국 최고 주권의 권력 체제로서 그것들은 반드시 민주주의보다 벌써 훨씬 더 - 그리고 결과적으로 상당히 나쁘게 된다." 이 또한 내가 이해하기 어려운 문장이다. 원문은 "Either way, as regimes of supreme, sovereign power, they are always, already more than a democracy - and consequently a good deal less."(3쪽) 내가 이해하는 바로는 "어느 쪽이건 간에, 최고 주권의 권력체제로서 두 체제는 모두 이미, 언제나 민주주의를 뛰어넘었고, 결과적으론 민주주의에 훨씬 못 미쳤다." 정도로 옮겨질 수 있다. 둘다 민주주의 그 이상이었고 동시에 그 이하였다는 것이다.   

한편, 미국과 소련의 '대중유토피아'를 비교해서 다루고 있는 만큼 러시아의 철학자들의 이름도 책에도 곧잘 등장하여 반갑다. '마마르다쉬빌리'(국역본은 '마마다쉬빌리'라고 표기했다)나 '발레리 포도로가' 같은 이름들이 그렇다. 그리스계 프랑스철학자 '카스토리아디스'의 이름도 오랜만에 볼 수 있는데, 책에는 '카스토리아스(Castoriades)'라고 오기돼 있다(23쪽). 찾아보니 벅 모스의 원서 자체에 그렇게 잘못 표기돼 있다. 카스토리아디스의 주저인 <사회의 상상적 제도1>(문예출판사, 1994)는 국내에 일부만 번역된 적이 있는데, 마저 다 번역될 수는 없는 것일까, 문득 유감스럽다. 아래는 러시아어본이다.

Корнелиус Касториадис Воображаемое установление общества L'institution imaginaire de la socie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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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이에자이트 2008-07-02 00: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arbitrary snd absolute가 문법책에 나오는 유사보어(다른 용어도 있는 것 같은데)여서 권력행사에 연결되고 veiled from public scrutiny는 분사구문 삽입으로 보면 되겠죠?

로쟈 2008-07-02 00:11   좋아요 0 | URL
제가 보기엔 그렇습니다...

노이에자이트 2008-07-02 23: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덕분에 영어공부를 옹골차게 하게 됩니다.

로쟈 2008-07-02 23:27   좋아요 0 | URL
^^
 

이번주 한겨레21을 어제서야 손에 들었다. 배송 시간이 평소보다 좀 더 걸린 셈인데, 덕분에 경제학자 우석훈의 신간 리뷰도 좀 뒤늦게 읽었다(<촌놈들의 대한민국>은 그 전에 이미 읽은 것이니 나로선 책을 리뷰보다도 먼저 읽은 드문 사례다). "진중권이 경제학을 전공했다면 우석훈이 되지 않았을까?"라고 시작하는 리뷰다(http://h21.hani.co.kr/section-021015000/2008/06/021015000200806260716040.html). 어느새 두 사람은 우리시대 젊은 지식인의 확실한 아이콘이 되어가고 있다(진중권은 물론 진작부터 베스트셀러 저자였지만, 촛불집회에서의 '활약'은 그의 상징성을 더욱 확고하게 해주었다). 신간소개라고 하기엔 너무 뒤늦은 기사이지만 '뒷북'으로 챙겨놓는다...

한겨레21(08. 06. 26) 불도저의 묵시록

진중권이 경제학을 전공했다면 우석훈이 되지 않았을까? 우리는 지금 교양과 재치로 무장하고 엄청나게 많은 글을 쏟아내는 경제학자를 보고 있다. 그의 펜끝은 늘 대중을 향해 있다. 주장에 동의하든, 동의하지 않든 그를 보는 건 확실히 즐거운 일이다. ‘글 잘 쓰는 경제학자’는 멸종 위기의 희귀종에 가까우니까.

대중적 설득력을 갖춘 경제학자를 꼽아본다면(잘 안 꼽아지겠지만), 엄지손가락은 장하준 교수 차지일 것이다. 장하준의 글은 매우 우아하면서도 교양과 풍부한 논거들로 무장돼 있다. 장하준과 우석훈의 차이는 밀도와 면적에 있다. 장하준은 대중의 상상력을 자극하지만, 성장과 국가의 역할에 대해 경제학 밖으로는 나가지 않는다. 그의 글은 매우 밀도가 높다. 우석훈은 틈만 나면 경제학을 벗어나서 세상만사에 끼어든다. 그의 글은 면적이 넓다.



청계천, 거대한 어항
우석훈, 이 놀라운 에너지를 가진 경제학자가 거의 동시에 두 권의 책을 냈다. 일종의 시평집인 <직선들의 대한민국>(웅진지식하우스 펴냄, 1만2천원)과 ‘한국 경제 대안 시리즈’의 세 번째 책인 <촌놈들의 제국주의>(개마고원 펴냄, 1만2천원)다. <직선들의 대한민국>에서 ‘직선’은 불도저로 상징되는 건설공화국이다. 이는 청계천을 거대한 어항으로 만들어놓고 생태 복원이라 부르는 우리 마음의 구조와 맞닿아 있다. 전기로 모터를 돌려 끌어온 물을 다시 한강으로 흘려보내는 청계천은 비만 오면 오염물질이 한꺼번에 청계천으로 흐르기 때문에 물고기들이 떼죽음을 당한다. 그러면 죽은 물고기들을 걷어내고 또다시 물고기들을 방류한다. 청계천이 제대로 복원될 때까지 끝없이 반복될 숨바꼭질이다. 그러나 우리는 그 외형적 아름다움을 찬양한다.

‘직선’의 단면을 더 살펴보자. 집 없는 사람들이 집값이 오르면 환호한다. 뉴타운은 현재까지의 경향으로 보면 그 동네에 살던 사람들의 10% 정도만 다시 입주하고 나머지 사람들은 도심에서 더 먼 곳이나 주거환경이 더 나쁜 곳으로 이동한다. 그러나 뉴타운 계획이 알려지면 모두들 기뻐 날뛴다. 신도시의 경우도 마찬가지고, ‘토호들의 놀이터’가 돼버린 지방을 보면 더 심각하다. 이장한테 도장을 맡겨놓고 사는 순박한 주민들은 토호들의 이익을 위해 토지를 팔아치우는 데 동의한다. 한국의 도시화율은 이미 선진국을 뛰어넘었고, 세계에서 유일무이하게 수도권에 모든 재화를 집중시키고 있다. 이런 ‘직선’적인 힘은 이명박 대통령의 대운하 발상에서 정점을 이룬다.

왜 이런 부조리한 일들이 벌어지는 걸까? 이 땅에 살고 있는 개인들의 선택은 경제적 합리성으로 설명될 수 없다. 자신의 경제적 이익을 극대화하려는 노력이 아니다. 이 지점에서 우석훈은 경제학자의 영토를 뛰쳐나간다. 그는 건설공화국이 유지·강화되는 원인을 시대 정신의 차원으로 끌어올린다. 즉, ‘건설 미학’이 한국인들의 의식을 지배하고 있다고 말한다. 청계천을 찬양하거나 집 없는 사람들이 뉴타운 건설을 환영하는 이유는 경제적 합리성이 아니라 직관적으로 아름답게 느껴지기 때문이다. 이 미학이 투기와 결합되면 누구도 막을 수 없는 ‘파천황’이 된다. 그러므로 ‘건설 미학’을 ‘생태 미학’으로 대체하는 것이 가장 근본적인 대안이다. 그는 건설 미학이 한반도 대운하 발상에서 정점에 이르렀지만, 그 때문에 새로운 사유를 할 공간이 열릴 것이라고 믿는다. 생태도시로의 전환, 생협 네트워크 등은 진행 중인 움직임이다. 그는 “주제넘은 이야기를 하는 김에” 건축·문학·음악·영화의 ‘생태 미학’까지 참견한다.

<촌놈들의 제국주의>는 수출 지향, 에너지 소비 지향, 건설 지향의 한국 경제가 내적 불균형 때문에 막다른 골목에 이르렀다고 말한다. ‘국익’을 앞세운 이라크 파병에서 보듯, 이제 한국 경제는 해외 영토를 갈망하고 있다. 즉, 제국주의의 길로 나서고 있다. 이게 ‘촌놈들의 제국주의’인 이유는 식민지도 없고 식민지를 거느릴 능력도 없으면서 끊임없는 정복욕과 증오를 표출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책은 징후들의 집합이다. 우석훈은 우리 사회·경제 내부에서 제국주의의 징후들을 계속 끄집어낸다. 제국주의의 문화적 형태는 ‘수출주의’인데 한류 열풍을 지나 황우석 사건에서 절정을 맞는다. 그는 한-미 자유무역협정(FTA)을 통해 미 제국주의의 등에 올라타 영토를 확장하려는 사람들의 욕망도 읽는다. 또 촌스런 제국주의는 북한을 내부 식민화하려 한다. 한국 자본주의는 북한을 값싼 노동력의 공급처나 부동산 개발의 요람으로 인식하고 있으며, 경제 통합 과정에서 북방 진출을 향한 야심을 드러내기도 한다.

한·중·일의 증오는 더 커져가고 있다. 이들 국가의 소득 분포도는 중산층이 두터운 마름모꼴에서 중산층이 붕괴되는 8자형으로 바뀌고 있다. 에너지와 자원을 둘러싼 각축은 계속 치열해진다. 3국의 산업구조는 전쟁에서 이득을 볼 에너지산업과 건설산업의 비중이 크다. “결론적으로 한·중·일 세 나라가 30년이라는 시간 지평에서 전쟁을 피할 가능성은 거의 없어 보인다.” 우석훈은 이 끔찍한 미래를 막기 위해 평화라는 ‘공공재’의 가치를 되새기고 한·중·일 경제 통합의 밑그림을 그려본다. 무엇보다, 미래의 전쟁을 막는 일은 10대의 손에 있기 때문에 이들의 감성을 죽이는 ‘교육 파시즘’을 반드시 철폐해야 한다.

동아시아 3국의 전쟁이라고?
한국의 제국주의에서 시작해 3국의 전쟁 가능성까지 짚어보는 작업은 좀더 섬세하게 토론될 필요가 있다. 이것은 매우 대담한 가설이다. 기본적으로 한국 자본주의가 성장 동력을 잃고 있으며 새로운 계기가 필요하다는 점만은 분명하다. 그러나 제국주의로의 전화에 대해 논의하려면 현재의 제국주의 개념에 대한 규정부터 시작해서 그것이 19세기 제국주의와 어떻게 다른지, 또 제국을 움직이는 메커니즘은 무엇인지 설명돼야 한다. 어쨌든 우석훈의 목표는 세밀한 개념 규정이 아니라 레모니 스니켓의 ‘불행 시리즈’ 같은 묵시록을 던져놓고 대중의 각성을 촉구하는 것이다. 인간의 의지로 미래를 바꿔야 한다고 주장하는 점에서 그는 또 경제학자의 영토를 벗어난다.

두 권의 책은 계속 어떤 이름 하나를 호출하고 있다. 이미 용서받은, 잊혀진, 심지어 그리움의 대상이 되는 이름, 노무현이다. <직선들의 대한민국>은 김대중 시대를 완화된 신자유주의로, 노무현 시대를 강화된 신자유주의로 규정한다. 두 시대를 거쳐오면서 건설 미학이 강화됐다. 거시적 차원에서 보면, 노무현과 이명박 정권은 정책적으로 거의 비슷하다. 진보세력으로 분류됐던 강금실은 서울시장 선거 때 한강 하구 개발을 얘기했고, 정동영은 새만금 개발을 떠들었으며, 손학규는 경기도의 전면적 개발 붐을 주도했다. 우석훈은 노무현 지지세력 중 최악의 인물로 미학적 고민을 해야 할 임무를 방기해버린 유홍준 전 문화재청장을 들었다. <촌놈들의 제국주의>는 아예 한국의 제국주의적 욕망을 정점으로 끌어올린 인물로 노무현을 꼽고, 노무현 정권의 기반이 극우민족주의와 맞닿아 있었다고 주장한다.

지금 우리가 맞고 있는 정치·경제의 새로운 국면들을 이명박 대통령의 개성 때문이라고 생각하면 마음은 편할 것이다. 그러나 이건 이명박 정권에 대한 과소평가다. 우석훈의 두 책은 한국의 불도저 정신과 제국주의가 일련의 과정을 통해 현재의 정점에 도달했다고 말한다. 김대중·노무현 정권은 우리 사회를 묵시록으로 이끄는 힘의 봉인을 푸는 과정이었다. 이 힘의 해체를 위해선 이명박 개인의 독특한 인성만을 얘기해서는 안 된다. 깊은 반성이 필요하다.(유현산기자)

08. 06. 28.

P.S. <직선들의 대한민국>은 아직 읽어보지 못했지만, 두 권 모두 문제제기적이면서 시의성이 돋보이는 책이다. 단, 약간의 아쉬움을 적자면, 먼저 "장하준은 대중의 상상력을 자극하지만, 성장과 국가의 역할에 대해 경제학 밖으로는 나가지 않는다. 그의 글은 매우 밀도가 높다. 우석훈은 틈만 나면 경제학을 벗어나서 세상만사에 끼어든다. 그의 글은 면적이 넓다."란 지적이 거꾸로 짚어주는 대로 우석훈의 글은 넓지만 밀도가 좀 약하다. '한중일을 위한 평화경제학'이란 부제를 달고 있는 <촌놈들의 제국주의>에서도 '평화경제학'이 필요하다는 제안에서 많이 나가지 않는다('전쟁산업'과 '평화산업'이란 그의 이분법이 얼마나 확실하게 유지될 수 있는 것인지도 의문이다. 평화에만 쓰이고 전쟁에는 쓰일 수 없는 물자들이 과연 얼마나 될는지?).

역시나 기자의 지적대로 "우석훈의 목표는 세밀한 개념 규정이 아니라 레모니 스니켓의 ‘불행 시리즈’ 같은 묵시록을 던져놓고 대중의 각성을 촉구하는 것이다. 인간의 의지로 미래를 바꿔야 한다고 주장하는 점에서 그는 또 경제학자의 영토를 벗어난다." 어쩌면 그는 새로운 경제학을 발명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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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늘빵 2008-06-28 14:51   좋아요 0 | URL
<직선들의 대한민국>만 먼저 샀는데 기대됩니다. 카피가... ^^ 불도저 어쩌구.

로쟈 2008-06-29 10:37   좋아요 0 | URL
단숨에 읽히는 책들입니다.^^

biosculp 2008-06-28 18:02   좋아요 0 | URL
저자가 고딩까지 읽을수 있게 대상을 잡고 쓰던데요.
고진의 책도 고딩이 읽어주길 바란다고 번역본에서본것같으데,
촛불에서도 고딩여학생들의 힘이 컸고, 이명박 자율화된 교육체계에서
더 건강한 학생들이 나올지도 모르겠네요. 한겨레 21에서는 촛불에 참여한
학생들 인터뷰도 뜨던데요.

로쟈 2008-06-29 10:38   좋아요 0 | URL
네, 저자가 희망을 다음 세대에(나) 거는 것 같습니다...
 

어젯밤에 약간 과음(?)을 한 탓에 오늘이 주말이란 걸 좀 뒤늦게 깨달았다. 그래봐야 '열심히 일한 당신, 주말엔 더 열심히!'족에 속하는지라(나름 천민이군!) 별로 득이 될 만한 깨달음은 아니지만, 덕분에 주말 북리뷰들을 다소 뒤늦게 둘러보았다. 정신이 확 깨게 하는 책은, 이번주에도 없었다. 나올 만한 책들이 계속 나오고 있을 뿐이고, 덕분에 안 읽은 책들만 기하급수적으로 늘어갈 따름. 책마다 사정은 다 달라서 별로 읽을 일이 없어보이는 책이지만 그래도 리뷰는 챙겨두고 싶은 책도 있다. 이번주에는 김석수 교수의 <한국 현대 실천철학>(돌베개, 2008) 같은 책이 그렇다. 한겨레에서 리뷰기사를 옮겨놓는다(http://www.hani.co.kr/arti/culture/book/295808.html). 

한겨레(08. 06. 28) 우리들의 일그러진 실천철학

“우리의 철학은 우리의 현실 속에도 없었고, 우리의 현실은 우리의 철학 속에도 없었다.” 조선의 신문학사는 이식문화의 역사라는 임화의 주장이 숱한 문학연구가들을 번민케 한 것처럼, 한국 현대철학사도 그렇다. 서양철학이 한반도에 들어온 지 100여년이 지났거니와, 그 시발점이 되는 기간이 일제 강점기였다는 것은 문학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전통의 단절이라는 ‘사상의 크레바스’를 피할 수 없게 만들었다. 폭압적 제국주의에 맞서야 한다는 당위는 “혁명하는 심장과 개혁하는 두뇌”를 필요로 했으므로 현실-이론의 거리를 좁혀 치열한 성찰을 하도록 사유의 형식을 빚어냈으나, 민족주의에 과도한 부하를 얹게 됨으로써 수입된 서구 이론에다 작위적으로 당대 현실을 끼워 맞추게 되는 부작용을 낳았다. 그것은 철학의 근본 정신인 자유가 훼손될 수밖에 없도록 만들었으며 “현실의 한을 푸는 일에 철학이 동원되어 버리게 되면, 철학은 그 본래의 고유한 비판적 기능을 상실하기가 십상이다.” 자유와 비판 정신을 잃은 실천철학이 철학적 실천에 나설 때 어떤 결과를 불러들이는가. 지은이가 꼽은 문제적 인물은 열암 박종홍(1903~76)이다.

박종홍은 한국 실존주의의 효시라고 평가받는바 “어중간한 철학은 현실을 떠나버리지만 완전한 철학은 현실을 인도한다”라는 카를 야스퍼스의 문장을 인용하며 현실 참여를 부르짖었다. 6·25라는 참혹한 전쟁을 겪은 한국인에게 용기를 불어넣어 주는 것으로 그는 실존주의를 끌어왔다. 그는 무엇보다 현실을 부정함으로써 다시 현실로 돌아와야 한다고 주장했다. 박종홍이 내세운 ‘힘 있는 철학’은 현실의 모순을 관념적·주관적으로 극복해선 안 되며 ‘신체적 노작(勞作)’을 통해 구체적인 실천방안을 마련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때문에 그는 실존철학의 주관성을 비판하는 데까지 나아간다. 이를 개념화한 것이 향내·향외(내향·외향)이며 “향내적인 자각을 통하여 무(無)에 부딪쳐 다시 향외적으로 돌아오는 창조의 길”을 제시한다. 이와 같은 관점에서 그는 변증법적 유물론, 실용주의, 실존주의의 한계를 긋고 이것들을 포용해야 한다는 입장에 섰다.

원전 분석을 통한 문헌학적 전문연구가 미흡했고, 학문의 본질에 대한 반성적 탐구에다 인접 학문과의 유대도 부족했다는 등의 한계가 있음에도 당대의 철학자들은 빈곤한 현실에 맞서 고군분투한 게 사실이다. 그리고 그 정점에 박종홍이 서 있는 셈이다. 하지만 박종홍의 철학적 행보는 자율이 아니라 억압, 활력이 아니라 권력, 개인이 아니라 국가를 앞세우는 데 다다랐다. “눈물 바가지를 부숴버리고 열등감을 벗어나, 새날을 위해 싸워야 하며, 전진해야 한다”면서 ‘유신은 민족 중흥을 실현하려는 과제’라고 서슴없이 말했던 것이다. 이와 같은 철학적 파탄은 그가 제출한 ‘힘 있는 철학’에서 도출된 것으로 건설·창조의 논리가 민족주의·반공주의·국가주의와 궤도를 같이한 점에 원인이 있다.

극도로 가난하고 불안에 처한 조국을 근대화하려면 힘이 필요하며 그것은 국민의 의식을 ‘개조’해야 한다는 정열은 그 자체 현실 부정의 논리이지만, 이를 추동했던 박정희 정권의 정책과 부신(符信)처럼 들어맞으면서 역설적으로 유신의 정신적 토양에 밑거름이 돼 버린 것이다. 그 극단에 국민교육헌장이 있는바, 현실의 모순을 혁파해야 한다는 부정과 창조의 정신이 “새로운 사회적 인간 형성, 새로운 민족의 창조”로 굴절되고 만다. 이를 이어받은 것이 전두환 정권 아래서 “우리에게는 저항해야 할 체제가 없고 다 함께 옹립해나가야 할 국가가 있을 뿐”이라며 국민윤리 교육론을 부르짖은 이규호와, 북한이라는 미친개를 때려잡기 위해 몽둥이(무력)를 준비해야 한다며 새마을 운동을 공산주의에 맞서는 상응혁명으로 일컬은 김형효다.

1·2부 가운데 앞부분이 이와 같은 한국 현대철학자들의 서구 실천철학 수용 양상을 비판적으로 분석한 글들이다. 개인이 국가에 포섭돼 ‘자기 보존’(conatus essendi)을 위협받는 상황의 극명한 사례로 박종홍을 지목한 지은이는 그 대안으로 자율·인정·연대·자치의 개념을 제시한다. 칸트 전공자답게 그는 자신의 의지가 세운 주관적 원칙이 보편적 법칙이 되도록 하고 그 법칙을 존경하며 지키는 ‘자율’(autonomy)의 원리를 거듭 강조한다. “스스로 법칙을 세워 그 법칙을 스스로 수행하는 자율의 세계야말로 인간의 자유와 평등 및 자립이 확보되는 사회”라는 믿음 때문이다. 박종홍이 멸사봉공을 말했다면 칸트는 개인의 사적 영역이 살아나 공론장을 만들어내는 활사개공(活私開公)을 지지한 셈이다. 지은이는 이 밖에 포스트모더니즘, 포스트마르크스주의, 스피노자의 재해석, 신합리주의 등 20세기 후반에 일어난 철학 사조들을 줄줄이 불러들여 80년대 이후 한국의 현실에 대입해 보는 글들을 2부에 모았다.(전진식 기자)

08. 06. 28.

P.S. 서점에서 잠깐 책의 목차를 볼 때도 든 생각인데, '한국의 실천철학'이라는 게 어떤 의미인지 잘 감이 오지 않는다. 리뷰를 읽고나도 마찬가지다. 한국의 대표적인 '실천철학자'들에 대한 소개/비판과 "포스트모더니즘, 포스트마르크스주의, 스피노자의 재해석, 신합리주의 등 20세기 후반에 일어난 철학 사조들을 줄줄이 불러들여 80년대 이후 한국의 현실에 대입해 보는" 것이 어떻게 병치될 수 있을까?(그런 대입도 '실천철학'인가?) 교재형 제목과는 어울리지 않아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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