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주의 책'은 아닐지 몰라도 '오늘의 책'은 단연 클레이 서키의 <끌리고 쏠리고 들끓다>(갤리온, 2008)이다. '새로운 사회와 대중의 탄생'이라는 책의 주제와 책이 나온 타이밍이 절묘하게 맞아떨어지고 있다(오늘은 국민행동의 날이다). 소개기사를 옮겨놓는다(http://www.hani.co.kr/arti/culture/book/297131.html). 혹 저자가 속편을 쓸 거리를 찾는다면 지금 한국에 와 있어야 할 것이다...

한겨레(08. 07. 05) 모여라! 인터넷과 사랑의 힘으로

“촛불을 누구 돈으로 샀는지 보고하라.” 지난 5월31일, 청와대 대책회의에서 이명박 대통령이 했다는 이 말의 속뜻은 간단하다. ‘나는 촛불집회에 대해 아무것도 이해하지 못하겠어.’ 온라인 글을 삭제하고 관련 누리꾼들을 수사하며 시청 앞 광장을 봉쇄하고 시민단체 간부들을 배후로 몰아 구속하는 따위의 대책도 같은 맥락이다. 최초 촛불집회 이후 두 달이 지나도록 그들은 전혀 감을 못 잡고 있다.

2년 전인 2006년 5월, 유럽 변방의 신생국 벨로루시의 알렉산드르 루카셴코 대통령이 똑같은 일을 벌였다. 독재자인 그가 3선에 성공한 직후, 한 누리꾼(‘by_mob’)이 ‘플래시 몹’(잠깐 동안의 집단 행동을 보여주고 사라지는 행위)을 제안하는 글을 올렸다. 수도 민스크의 광장에 나와 그냥 아이스크림이나 먹자는 것이었다. 경찰은 광장에서 아이스크림을 먹는 시민 몇 사람을 잡아갔다. 그러나 일은 더 커졌다. 아이스크림을 먹었다는 이유로(!) 잡혀가는 시민들의 사진을 누리꾼들이 인터넷에 올렸다. 이때부터 무수히 많은 시민과 집단들이 다양한 형태의 플래시 몹을 광장에서 벌였다. 서로 보고 웃으며 그저 광장 주변을 걸어다니는 플래시 몹도 있었다. 이 일은 그해 가을까지 계속됐다.

<끌리고 쏠리고 들끓다>의 지은이 클레이 서키는 “비밀 경찰은 무용지물이 됐다”며 루카셴코 같은 권위주의적 통치자들을 비꼰다. “개인의 삶을 틀어쥐고 있던 독점적 힘이나 사회를 장악하던 권력의 힘은 점차 약해지고 있다. 대중은 이곳저곳에서 동시에 서로 연결되어 끌리고 쏠리고 들끓는다.” 그는 사회학·경제학·경영학·언론학 등을 넘나들며 “완전히 새로운 대중과 완전히 새로운 세상이 탄생”한 배경을 분석한다. 그의 탐색을 이끄는 질문은 이런 것이다. 과거에는 상상도 못했던 거대하고 강력하며 지속적인 ‘행동’을 어떻게 평범한 시민들이 그리도 쉽게 조직할 수 있는가?

여기서 그는 조직 관리의 방식에 주목한다. 근대 자본주의 이후 지난 100년 어떤 일을 조직할 때 제기된 화두는 두 가지였다. ‘국가가 지휘하는 게 최선인가, 아니면 시장의 기업들이 맡는 게 최선인가.’ 그 답을 판가름 짓는 것은 조직 관리의 비용이었다. 사람을 모으고 하나의 방향으로 매진하게 하려면 여러 형태의 비용이 반드시 발생한다. 그 비용을 감당할 수 없다면 조직 자체가 성립할 수 없다. 따라서 “(국가 또는 기업이 관리하는) 조직 활동의 대안이라고 해 봐야 (조직) 활동을 안 하는 게 고작이었다.”

그러나 디지털과 인터넷이 모든 것을 바꾸었다. “관리자의 지휘 없이, (경제적) 이익이라는 동기를 초월해 활동하는, 구조가 느슨한 그룹이 탄생하여 적은 비용으로도 대규모 조율이 가능해지면서 과거 어떤 조직도 손대지 못했던 진지하고 복잡한 작업을 해낼 수 있게 됐다.” 지은이는 조직의 구성 및 관리에 들어가는 비용의 감소가 “혁명의 원동력”이라고 지적한다. 휴대폰, 인터넷 카페, 블로그 등은 개인과 개인 사이의 정보 공유, 협력, 집단행동의 능력을 크게 향상시켰다. 전통적 조직에서는 층층으로 쌓인 위계구조의 어느 층위까지만 정보를 전달한다. 그래야 조직을 관리할 수 있었다. 그러나 디지털과 인터넷에 기초한 새로운 조직은 오히려 ‘정보의 공유’를 통해 조직을 확장시킨다. 이 때문에 “어느 때보다 더 거대하고 더 널리 흩어져 있는 공동 작업 그룹이 탄생하고, 완전히 새로운 형태의 집단 행동이 가능”해졌다.

흥미롭게도 지은이는 이 대목에서 공동체적 선을 지향하는 인간의 본성을 끌어들인다. ‘인터넷이 모든 것을 가능하게 했다’는 식의 기술결정론으로 치우치지 않는다. 현대 자본주의 사회가 형성시킨 기존의 조직들이 무엇을 놓치고 있었는지에 주목한다. 그것은 서로 아끼고 배려하는 가운데 형성되는 ‘사회적 자본’의 힘이다. 특별한 대가를 바라지 않고 아픈 이웃을 대신해 그 집 개를 산책시키는 일 따위가 그가 말하는 사회적 자본이다. “협력하는 습관이 더 강한 그룹의 개인은 그렇지 않은 개인에 비해 건강·행복·잠재수입 등에서 더 넉넉한 삶을 산다”는 실증적 연구결과도 소개한다.

지은이가 명시적으로 지칭하진 않았지만, 그가 말하는 사회적 자본은 ‘공동체’ 또는 ‘코뮌’으로 번역해도 큰 무리는 없을 것이다. 디지털 혁명이라는 사회적 도구가 중요한 수단이 되긴 했지만, 이런 도구를 사용하는 ‘전혀 새로운 대중’이 탄생하게 된 것은, 바로 현대 자본주의가 놓치고 있는 인간의 어떤 본성과 관련이 있다는 게 지은이의 생각이다. 그 대표적인 예가 ‘위키피디아’다. 세상 모든 것에 대한 누리꾼들의 백과사전인 위키피디아는 수많은 대중의 검토를 거쳐 끊임없이 자기 오류를 수정하는 방식으로 운영된다. “이런 위키피디아가 존재하는 이유는 많은 사람들이 위키피디아를 ‘배경 삼아’ 서로를 사랑하기 때문이다.”

클레어 서키가 말하는 사랑이란 상대에 대한 배려가 언젠가 나에 대한 배려로 돌아올 것이라는 기대이기도 하다. 국가 또는 기업에서는 이런 배려와 기여가 불가능하다. 나의 이익을 포기하는 만큼 타자 또는 조직이 나를 배려할 것이라고 기대할 수 없다. 흔히 ‘공유지의 비극’이라 일컬어지는 딜레마다. 그러나 디지털 혁명을 통해 만들어진 새로운 조직에서는 ‘이기주의의 딜레마’가 붕괴한다. “(인터넷과 같은 사회적 도구 덕분에) 서로를 충분히 아끼고 사랑하는 사람들은 모두가 한마음이 되어 범위로 보나 지속성으로 보나 과거에는 불가능했던 일들을 이룩해낼 수 있다. 사랑으로 큰 일을 할 수 있게 됐다.”



<끌리고 쏠리고 들끓다>는 자본주의 경제체제를 비판하는 데 큰 관심을 두지 않는다. 그저 상호작용 방식의 변동을 디지털 혁명과 연관시켜 상세히 분석할 뿐이다. 그럼에도 어느 대목에 이르면 이 책의 메시지가 ‘디지털 코뮌’과 잇닿아 있음을 알게 된다. “혁명은 사회가 새로운 기술을 채택할 때 일어나는 게 아니다. 사회가 새로운 행동을 채택할 때 일어나는 것이다. 대중은 이미 새로운 행동을 채택하고 있다.” 지난 2월 출간된 이 책의 원제는 다. ‘여기 모든 이가 달려간다’ 정도로 직역할 수 있다. 그들은 공안정국 따위에 밀려 ‘새로운 행동’을 멈추지는 않을 것이다.(안수찬 기자)

08. 07. 05.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최초의 흑인 후보가 등장함으로써 올 미국 대선은 다른 때보다 '흥행'할 여지가 많지만 과연 오바마의 리더십이 '미국의 변화'를 가져올 수 있을지에 대해서는 장담하기 어려운 게 현실이다. 노골적인 미국식 '로비 정치'와 '국가적 경매'로 비유되는 미 대선판 자체가 '희망'의 걸림돌이다(차라리 '경매 민주주의'란 말을 붙이고 싶어진다). 이를 짚어주고 있는 칼럼을 옮겨놓는다(http://h21.hani.co.kr/section-021165000/2008/07/021165000200807020717068.html). '남의 나라' 일만은 아니어서다.

한겨레21(08. 07. 02) 미 대통령 선거는 경매다

미국의 대통령 선거철인 요즘, 필자는 민주당 후보로 확정된 버락 오바마 쪽으로부터 일주일에 한 번꼴로 편지를 받고 있다. 나이만 동갑일 뿐 일면식도 없는 그가 미국식으로 다정하게 이름을 부르면서 시작하는 전자우편을 보내온 지 벌써 석 달째다. 하지만 필자는 한 번도 그에게 답장을 하지 않았다. 선거 진행 상황에 관한 간략한 소식 뒤에 이어지는 편지의 요점인즉, ‘오늘 중으로 25달러를 기부해달라’는 것이다. 필자 역시 다른 후보들에 비해 그에게 상대적으로 호감을 가지고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미국 시민도 아닐 뿐더러 적은 액수일망정 그의 선거운동 비용에 보태려고 기꺼이 주머니를 털고 싶은 생각이 들지 않는다. 우리 같은 외국인들까지 가세하지 않더라도 민주당과 오바마 진영에는 돈이 넘쳐나기 때문이다.

다정하게 이름을 부르고 25달러 타령
오늘 오바마 선거운동 관리자인 데이비드 플러프로부터 받은 편지에는 상대방인 존 매케인 공화당 후보 쪽이 지난 5월에만 무려 4500만달러(약 450억원)를 주로 워싱턴의 로비스트들과 특수 이익집단들로부터 모금했다는 폭로성 비난이 실려 있다. 매케인보다 당 차원의 후보 지명이 몇 달이나 늦어진 오바마로서는 빨리 따라잡아야 하니, ‘이번달 중 새로운 개인 기부자 2만 명 확보’라는 목표 달성에 협조해달라는 부탁이 이어진다. “오늘의 25달러 기부가 당신의 영향력을 2배로 만들 것”이라면서, 자기들의 ‘운동’에 동참할 것을 믿고 “미리 감사를 전한다”는 것이다. 그러고는 오는 11월 본선까지는 150만 명의 개인 기부자들이 동참할 것을 기대하고 있다고 덧붙였다.

아프리카계 미국인으로서 민주당 대통령 후보가 되었다는 사실만으로도 오바마는 미국의 정치 지형에 급진적인 변화를 초래하고 있다. 그리고 그가 지금까지 벌여온 선거운동이 전통적인 방식과 달리 각 지역의 자발적인 풀뿌리 운동을 광범위하게 동원하고 있다는 점에서 참신하다는 평가를 받을 만하다. 선거비용도 대부분 전국의 소액기부자들로부터 모금한 것이다. 민주당도 당 차원에서 오바마의 선거자금 모금 정책을 지지한다고 선언했다.

과연 오바마는 워싱턴의 악명 높은 ‘로비 정치’를 ‘풀뿌리 정치’로 바꾸는 데 성공할 것인가? 더 지켜봐야겠지만, 아직까지 그 대답은 회의적이다. 왜냐하면 오바마는 공화당과 민주당이라는 미국의 양당제 틀 속에서 나온 정치인이지, 기존 정치구조로부터 독립적인 ‘제3의 후보’가 아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그는 미국 정치를 둘러싸고 있는 거대한 자본과 특수 이익단체, 기득권 집단들의 끈질기고도 효율적인 회유와 저항의 견고한 벽을 넘어야 한다. 그가 대통령에 당선되더라도 그런 벽을 무너뜨리기 위해서는 1968년과 같은 폭발적인 대중운동이 뒷받침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1960년대 초반의 존 F. 케네디, 그리고 1990년대 빌 클린턴의 경험을 보라. 새로운 정치세대의 등장이라는 축복을 받으며 대통령직을 시작한 그들이었지만, 워싱턴 정치는 변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들이 부여해준 온건한 이미지 탓에 민주당의 타락이 은폐되는 역설적인 결과를 가져오기까지 했다.

금융자본이 오바마에게 접근하는 이유는
회의적인 시각을 뒷받침해주는 기사들이 벌써 나오고 있다. 오바마가 민주당 후보로 선출되는 데 필요한 대의원을 확보한 직후, <로이터통신>은 미국 자본주의의 심장부인 월스트리트에서 민주당과 오바마 진영으로 선거자금이 몰리고 있다고 보도했다. 오바마가 지금까지 발표한 경제·통상 정책이 매케인 쪽보다 자신들에게 불리함에도, 미국과 세계 경제를 좌지우지하는 금융자본이 오바마를 ‘주요 투자처’로 간주해 접근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자유무역, 각종 규제, 법인세, 배당세 등 자신들의 이익과 직결되는 문제에 대한 오바마의 정책을 ‘수정’하고자 하는 그들의 목적을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다.

5월 말까지 오바마 쪽이 월가로부터 받은 선거자금은 모두 790만달러(약 80억원)에 이르는 것으로 알려졌다. 매케인 쪽보다 거의 2배가 많은 액수다. 그런가 하면, 미국의 대기업들은 후보 개인에게 기부하는 것 말고도 양당의 전당대회 행사비용을 충당해주는 방식으로 정치자금을 제공하고 있다. AT&T, 엑셀에너지 등 대기업들이 오는 8월과 9월에 치러질 공화당과 민주당 전당대회 비용 1억1200만달러(약 1120억원)의 80%를 지원하기로 한 것으로 알려졌다. 민주당은 록히드마틴 같은 방위산업체와 라스베이거스의 카지노 업체들로부터도 지원금을 끌어들이고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

미국의 정치자금 문제를 전문적으로 다루고 있는 책임정치센터(www.opensecrets.org)에 따르면, 지난해에 대통령 후보 경선에 나서기로 선언한 이후 오바마는 지난 5월 말까지 총 2억6500만달러(약 2700억원)를 거둬들였다. 힐러리 클린턴은 2억1400만달러(약 2150억원), 그리고 매케인은 9600만달러(약 970억원)를 선거자금으로 모금했다. 이미 중도에서 탈락한 후보들은 제쳐두고라도 3명이 모금한 액수만 벌써 5억7500만달러(약 5800억원)가 넘었다. 이게 미다스의 손이 아니고 무엇인가? 누가 최종 승자인가를 가리는 대통령 선거 날짜가 11월에 있으니, 그때까지 버티기 위해서는 양당 후보가 각각 5천억원씩 필요한 것으로 추산되고 있다. 2명이 합쳐 1조원에 이르는 천문학적 액수다.

이처럼 엄청난 돈을 들이며 치러지는 미국의 대통령 선거를 일러 혹자는 ‘국가적 경매’(national auction)라고 조롱한다. 지금 공화당 후보로 나서고 있는 매케인 상원의원도 공화당의 ‘이단아’ 노릇을 하며 개혁 성향을 보일 때는 미국의 선거자금 모금 체계를 가리켜 “가장 높은 가격을 제시하는 응찰자에게 국가를 팔아넘김으로써 공직을 유지하려는 양당 공모하의 정교한 직권남용 체제”라고 비난한 바 있다.



업자들에 사로잡힌 정치인들
19세기 후반 미국의 경제력이 한창 번성하고 제국주의 정책을 감행할 때 작가 마크 트웨인은, 겉은 번쩍거리나 속은 부패한 당대 미국 사회를 ‘도금시대’(The Gilded Age)라고 풍자했다. 1970년대 중반 이래 미국 정치는 돈잔치로 전락해 ‘제2의 도금시대’가 도래했다. 대통령과 의회는 거대기업과 이익단체의 매수 대상 일순위에 올랐다. 정부와 의회는 물론, 심지어 사법부까지 그들의 이익을 반영하고 있다. 미국 정치는, 그리고 아메리카제국은 거대기업과 군수산업체, 에너지업계에서부터 광우병 발생의 위험을 기꺼이 무릅쓰고 쇠고기 수출을 감행하는 축산업계에 이르기까지 거의 모든 방면에서 막대한 정치자금을 매개로 정치인들을 포섭하는 ‘업자들’에 사로잡혀 있다. 그 사이에 미국의 ‘국익’도, 전 국민을 위한 의료보험도, 공립학교의 재정도 질식돼가고 있는 것이다.(김창진 성공회대 교수·사회과학부)

08. 07. 05.


댓글(2)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김상호 2008-07-14 21:36   좋아요 0 | URL
퍼오신 글은 흥미롭긴 하지만 저는 약간 다른 생각이 있어요. 원래 민주당 자체가 월가의 이해를 대변해오지 않았나..하는거죠. 그니깐 노골적인 석유와 무기 깡패냐 아니면 금융깡패냐..이런 차이인거 같아요. 캘리니코스가 제3의 길을 까는 걸 보면(얼마전에 인간사랑에서 캘리니코스의 책을 보내줬는데..역시 초 보수주의자인 저에게는 좀 당황스러운 내용이 많더군요, 흠...) 복지를 강화하면서 동시에 자본주의의 노예로 만드는 클린턴과 블레어의 입장을 비판하더군요. 그런 면에서는 월 스트리트가 오바마를 지지하는게 하등 놀라울게 없다는 거죠.

로쟈 2008-07-19 11:01   좋아요 0 | URL
그렇다고 공화당은 월가와 반목해왔다고 볼 수 있을까요? 당선가능성을 고려할 수밖에 없는 것 아닌가 싶은데요...
 

'한국 사회의 인문사회학적 대안을 찾아서'란 부제를 가진 <현대사회학과 한국 사회학의 위기>(길, 2008)에 대한 서평기사를 옮겨놓는다(http://www.kyosu.net/news/articleView.html?idxno=16457). '중도우파'를 자임하는 저자 민문홍 교수는 뒤르켐(뒤르케임) 전공자로 예전에 <사회학과 도덕과학>(민영사, 1994) 같은 책을 낸 적이 있다. 뒤르켐 전공자가 많지 않았던 때라 눈길이 갔던 책이다(내가 떠올릴 수 있는 이름은 <연대와 열광>(창비, 1998)의 저자 김종엽 교수 정도다. 중도좌파쯤 될까. 두 사람의 뒤르켐 표기가 각각이다. 게다가 보통의 사회학 책에서는 '뒤르켕' 혹은 '뒤르껭'이라고까지 표기하는 탓에 어지럽다). 돌이켜보니 꽤 오래전 일이다. 서평은 저자가 진단하는 한국 사회학의 '위기'와 제시하는 '대안'에 대해 다소 비판적인 견해를 밝히고 있다.  

교수신문(08. 06. 30) 서구이론에 기댄 과장된 기술 … 저자 자신에게도 같은 잣대를

이 책은 프랑스의 현대 사회학자 부동, 고전 사회학자 토크빌과 뒤르케임의 학문적 세계를 소개하고 한국의 사회학 연구 동향을 비판적으로 검토하는 내용으로 구성돼 있다. 특히 저자는 프랑스의 중도 우파 사회학을 소개함으로써 지나치게 진보 일색으로 좌편향된 국내 학계의 균형을 바로잡아야 한다는 목적의식을 강력하게 피력하고 있다. 즉, 아직도 한국 사회과학자의 발목을 잡는 최대의 걸림돌인 이데올로기 문제를 보수파의 시각에서 다루고 있는 이 책은 진보 논객들에게 고차원의 이념 논쟁을 제기하고 있다.

저자는 부동의 방법론적 개인주의에 입각해 역사적 관성이나 구조가 개인의 행위를 규정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이 책은 인간의 의지와 가치관을 기반으로 한 행위가 구조를 창출한다는 시각에서 고전 사회학을 재음미하고 있으며 심지어 한국 민주화 운동권이 표방하는 사상적 입장도 비판하고 있다. 반면에 유교자본주의론이나 아시아적 가치론, 기독교적 가치는 긍정적으로 평가되고 있다. 서구 사상사에 등장하는 각종 이데올로기 개념에 대한 면밀한 검토는 국내 학계에 실용적인 도움을 주고 있다.

이 책의 백미는 저자가 한국의 지적 풍토를 비판하며 제기한 폭발성 쟁점에서 찾을 수 있다. 저자는 민주화 운동권을 지지하는 지식인들이 반독재 투쟁이라는 정당성을 주장하며 무비판적으로 서구의 각종 신좌파 이론을 받아들여 사회 혼란을 조장하고 있으며 특히 김대중 정권 시절부터 하버마스가 지배적 권위를 행사하고 있다고 진단한다. 한국의 지적 현실에 대한 이러한 진단은 물론 과장된 것이다. 한 가지 예를 들면 하버마스의 이론을 가장 부지런하게 국내에 소개한 연구자 집단이 계급투쟁을 선도하거나 주체사상을 전파하는 행동을 하지 않았으며 오히려 신중간계급을 주체로 한 건전한 시민운동의 육성과 제도적 민주주의 확립을 중시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저자는 간과하고 있다.

저자가 우려하는 사상적 혼란은 1980년대 후반의 한국 대학가를 휩쓸었던 사회구성체 논쟁, 국가론 논쟁, 엔엘(NL)과 피디(PD)로 알려진 변혁운동 노선 논쟁 등을 말한다. 냉정하게 말하면 지식인 사이에 운동 노선을 둘러 싼 논쟁이 있었다는 것과 실제로 민중이 지식인들의 담론을 신봉했느냐는 것은 별개의 사안이다. 저자가 우려하는 프랑스 좌파 국가론의 영향은 거칠게 말해 남한이 식민지인가, 아니면 제한된 자율성을 가진 국가인가를 둘러 싼 논쟁이었으며 여기에는 풀란차스, 알튀세르의 국가론 연구자들이 실제로 한 몫 했다.

신좌파이론 수용, 역사적 맥락에서 봐야
물론 저자가 지적한 바와 같이 사회적, 역사적, 사상사적 맥락의 차이를 고려하지 않고 선진국에서 유행하는 최신 사상을 무작정 도입하는 통폐가 신좌파 이론의 수용 과정에서도 나타나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이는 지적 자유 공간이 존재하지 않았던 군사독재 정권에 대한 항거 과정에서 발생한 현상이라는 점이 오히려 사회과학적으로는 중요한 사실이다. 기존의 주류 사회학 이론이 격동하는 현실을 제대로 설명하지 못하고 보수파 학자들이 학문과 사상의 자유를 유린하는 군사정권의 횡포를 방관하고 있는 무력한 모습을 보이고 있었기 때문에 대안적 사회이론 체계에 대한 수요가 급증했다는 사실을 이 책은 간과하고 있다. 즉, 여기에는 한국 진보운동권의 사상투쟁에 대한 평가를 제대로 진행하기 위해 필요한 계급운동과 민족운동이 동시에 진행될 수밖에 없었던 사회적 한계상황에 대한 인식이 결여돼 있다.

저자는 계몽적 차원에서 현대 프랑스 좌파 이론의 배경과 내용을 앙리 르페브르, 피에르 부르디외, 알렝 투렌의 학문 세계를 중심으로 소개했다. 이 내용은 한국의 지적 균형을 바로잡는 데 기여한 것으로 평가할 만하다. 반면에 논리적 단절을 무릅쓰고 프랑스의 지적 논쟁과 한국 학계의 생경한 논의 구조에 대한 비판을 병기하고 있다는 인상을 남기고 있다. 여기에서 저자는 1968년에 선진 자본주의 사회를 휩쓴 청년의 반란과 지성사적 맥락을 연결시켜 인식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이러한 분석은 현재 한국에서 기존 보수와 진보를 동시에 무력화시키고 있는 평범한 청소년과 시민의 촛불 집회를 이해하는 실마리를 찾는데 기여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반면에 외래 이론의 현실 적합성을 지식사회학적으로 고찰해야 된다는 기준은 저자 자신에게도 적용돼야 한다. 무엇보다도 유교적 가치, 아시아적 가치에 대한 관심의 고조를 한국의 지적 정상화의 지표로 파악하는 저자의 시각은 치열한 논쟁을 유발할 가능성이 있다. 이러한 가치의 효용성에 대한 논의는 일본과 아시아 신흥공업국의 경제적 성공과 무관치 않으며 특히 일본 보수파의 캠페인과 결합돼 있다는 정치적 현실을 놓치고 있다. 기독교에 대한 평가에서도 동일한 사고 구조가 보인다. 그러나 이러한 저자의 시각은 일상에서 볼 수 있는 사회현상에 대한 사회과학자의 관심을 촉구하는 긍정적 효과도 가지고 있다. 또한 여기에서는 연구자와 연구 대상 사이에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는 일의 중요성이 역설적으로 입증되고 있다.

중도 우파의 사회과학적 문제제기 신선
총체적으로 보아 이 책의 가치는 생소한 프랑스의 사회학 이론을 체계적으로 소개하고 한국에 대한 적용 가능성을 모색하고 있다는 사실에서 찾을 수 있다. 또한 저자가 프랑스의 68년 5월 혁명에 비추어 한국의 민주화 운동을 비판적으로 검토하려 시도했다는 점도 중요하다. 이는 지식인 사회에서 사회학과 사회운동의 관계라는 고전적 논제의 중요성을 일깨우는 계기가 될 수 있다고 보인다. 저자가 중도 우파의 사회과학자라는 자신의 정치적 입장을 명백하게 천명하며 논의를 전개하고 있다는 사실도 독자에게 신선한 지적 충격을 주고 있다. 보수 논객의 내실화는 진보파에게도 경각심을 줄 것이고, 결과적으로 한국의 지적 풍토를 질적으로 개선하는 데 기여할 것이다.(이종구/ 성공회대·사회학)

08. 07. 05.

P.S. 기억을 더듬어 보자면, 저자가 제시하는 중도우파 사회학의 계보는 에밀 뒤르켐에서 레이몽 부동으로 이어지는 계보다. 부동은 '방법론적 개인주의'로 잘 알려진 사회학자이며, 국내에 제일 처음 소개된 책은 <무질서의 사회학적 위치>(교보문고, 1990)이다. 그리고 이후에 소개된 책이 <지식인은 왜 자유주의를 싫어하는가>(기파랑, 2007)이다. 피에르 부르디외, 알랭 투렌 등의 좌파 사회학자들과 분할하고 있는 사회학의 이론적 지형은 피에르 앙사르의 <현대 프랑스 사회학>(문학과지성사, 1992)에 소개돼 있다. 서지사항만을 확인해둔다...    


댓글(4)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노이에자이트 2008-07-07 23:55   좋아요 0 | URL
뒤르켐의 출생지가 알사스의 독어 불어 공용지역이었어요.랍비인 아버지는 독어로 아들을 불러서 뒤르카임이나 뒤르켐이 맞답니다.하지만 프랑스에서 공부했고 에콜 노르말 출신이네요.저는 고교 사회교과서에서 기계적 연대 유기적 연대 외우면서 처음 접한 인물.


그런데 뒤르켐은 마르크스나 베버와는 달리 사회사상사에도 잘 안 나오고 사회학사나 사회학이론서에만 나오는 게 특이해요.아마 그 자신이 대학에서 분과학문으로서 사회학을 정착시키려 했기때문에 넓은 의미의 지성사적인 의미에서 사회사상가로 취급되진 않기 때문인 것 같아요.

토크빌은 제가 좋아하는 인물이예요.<구체제와 프랑스 혁명>을 읽었습니다.프랑스 혁명사의 고전이지요.을유문고의 토크빌 평전도 재밌게 읽었습니다.

로쟈 2008-07-08 00:21   좋아요 0 | URL
학부 2학년때 사회학강의를 들으면서 친숙해진 이름이고요, 저는 기든스의 <뒤르켐>을 읽었던 거 같습니다. 제 분야에서는 소쉬르하고 뒤르켐이 주로 같이 언급이 됩니다. 코저의 <사회사상사>도 뒤르켐을 포함하고는 있습니다. 개인적으론 김종엽 교수의 <자살론> 해설을 읽으면서 조금 더 관심을 갖게 됐습니다. 토크빌은 아직 손을 못대고 있는 인물입니다.^^

노이에자이트 2008-07-08 00:41   좋아요 0 | URL
그 무렵 인물들은 다들 1848년에 대한 반응들이 볼만한데 토크빌,마르크스,엥겔스,게르첸을 비교해보면 재미있을 것 같아요.

로쟈 2008-07-08 01:00   좋아요 0 | URL
노이에자이트님을 추천합니다!^^
 

저녁을 먹고 잠시 바람을 쐬러 나갔다가 편의점에서 오늘자 신문을 펴들었다. 마침 어제 도서관에서 일부를 복사한 계간 <문화과학>(2008 여름호) 소개기사가 실려있기에 옮겨놓는다. 시국이 시국인지라 새삼스레 '국가란 무엇인가'를 질문하지 않을 수 없고, 오전에도 잠시 그와 관련한 글을 쓰기도 했다. '국가와 정치'를 특집으로 한 잡지의 글들과 좌담도 생각을 꾸리는 데 도움이 될 듯싶다.

경향신문(08. 07. 04) 2008년 대한민국, 국가란 무엇인가

'국가란 무엇인가.’ 플라톤 이래 이어져온 철학적인 화두이지만 촛불집회가 두 달 가까이 진행 중인 요즘 부쩍 많은 한국인들이 던지는 물음이다. 촛불집회에 참여해본 사람들은 ‘미국산 쇠고기가 수입되더라도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은 사먹지 않으면 된다’는 대통령의 태도를 보면서, 또는 자신이 낸 세금으로 마련된 경찰 물대포에 맞아 온 몸이 흠뻑 젖는 경험을 하면서 그런 질문을 던진다고 했다. 반면 한 언론사의 기자는 자신의 신문 사옥 앞이 촛불집회 시위대가 버리고 간 쓰레기로 넘쳐나거나 자사 현판이 떨어져 나가는 장면을 지켜보면서 ‘정부는 청와대만 지키는가. 도대체 국가란 무엇인가’라고 묻기도 했다. 2008년 한국의 국가는 어쩌다 ‘샌드위치’가 된 것일까.

두 가지 사례에서 보듯 국가는 지식인을 포함한 상당수 대중에 의해 강하게 ‘욕망’되고 있다. 촛불 대중의 미국산 쇠고기 수입에 대한 재협상 요구 시위는 국가를 부정하기는커녕, ‘나쁜 국가’가 아니라 ‘좋은 국가’이기를 바라는 저항에 가깝다. ‘청와대만 지키는’ 국가를 꾸짖었던 그 기자도 나름대로 ‘좋은 국가’의 상을 그리면서 그런 말을 했을 것이다. 다만 양측이 바라는 ‘좋은 국가’의 내용이 달랐을 뿐.

그러나 현실의 국가는 두 가지 다른 요구 사이에 후자를 택했다. 지난달 27일 경찰 저지선을 조선·동아일보 사옥을 보호하는 선까지 확장하며 촛불집회에 대해 한층 강경하게 진압하고,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이 해당 기자가 있는 언론사를 찾아가 위문했다. 그렇게 하는 데 큰 고민의 흔적은 보이지 않았다. 사회적 약자들을 위한 최소한의 공적 책임으로부터 자유로워지겠다는 국가의 모습이 있을 뿐이다.

도대체 국가란 무엇인가. 문화이론 전문계간지 ‘문화과학’ 2008년 여름호(제54호)가 마련한 특집 ‘국가와 정치’가 그 의문을 조금이나마 풀어줄지도 모르겠다. ‘문화과학’ 편집위원 고길섶씨는 여는 글에서 “지금 국가가 문제인 것은 유독 이명박 정권의 국가여서가 아니라, 이전 민주화된 정권 때도 마찬가지였다”고 했다. 그것은 “항상적으로 삶의 위기를 구조화하는 자본주의 국가이고, 더 광범하게 비극적 삶을 체제화하는 신자유주의 국가이기 때문”이다.

국가의 역할은 ‘시장’이 원활하게 작동하도록 하는 선에서 그쳐야 한다는 것이 자유주의에서부터 이어져온 신자유주의 국가론의 요체다. 시장의 효율, 기업의 이윤 추구를 용이하게 하기 위해서라면 국가는 규제를 최소화하며 작아질 수 있는 대로 작아져야 하지만, 그것을 해치는 무언가가 등장할라치면 단호하게 ‘치안’을 강조하며 개입한다.

이러한 국가의 상은 장·단기적으로 계속 이어왔다. 이 책에서 임동근 공간연구집단 연구원은 자유주의 통치성을 분석하는 푸코의 논의를 빌려와 자유주의-케인스주의-신자유주의로의 전환 과정에서 꾸준히 유지되는 통치기제가 존재한다고 밝혔다. 이광일 성공회대 교수는 이러한 국가 상은 1987년 민주화 이후 들어선 모든 민주 정부에서 한 번도 부정된 적이 없다고 했다. 이 연속성은 “국가가 이른바 ‘공공선을 상징하든, 특정 계급의 이해를 대변하는 도구이든, 그것의 개입 없이 자본주의 사회는 한 순간도 재생산될 수 없다는 사실 때문”이다.

문화과학의 논의는 이진경, 정성진, 조정환, 곽노완 등 한국사회 대표적 좌파 이론가들의 좌담을 통해 자본주의 국가를 넘어서자는 맥락애서 ‘국가, 자본주의, 코뮌주의’ 문제에 접근하는 데까지 나아간다. 이어 가라타니 고진의 ‘세계공화국’론과 베네수엘라 혁명 사례를 통해 국가에 대한 변혁 작업의 예들이 제시된다.(손제민기자)

08. 07. 04.

P.S. 보다 구체적으로 '대체 지금 대한민국이란 어떤 나라일까?'를 질문하게 하는 기사도 옮겨놓는다. 촛불집회에 평화주의자로 참가했다가 경찰로부터 무차별 폭행을 당한 함민복 시인에 관한 것이다.

한겨레(08. 07. 05) 비폭력 외친 시인을 짓밟다니

전경1이 진압봉으로 그의 팔을 쳐서 쓰러뜨린다. 꿈틀거리며 일어서려는 그를 뒤따라 오던 전경2가 방패로 어깨와 등을 찍어 다시 쓰러뜨린다. 앉은 채로 뒷걸음질쳐 도망가는 그에게 이번에는 전경3이 다가와 수평으로 눕힌 방패로 가슴과 관자놀이를 힘껏 가격한다. 가슴을 움켜쥔 채 쓰러져 신음하는 그에게 전경4와 전경5가 욕을 퍼붓고 손가락질을 하며 지나간다….

인터넷 한겨레(hani.co.kr)의 동영상 뉴스 ‘경찰 ‘무차별 폭력’ <한겨레> 생방송 요약’의 한 장면이다. 6월 29일 시청앞에서 벌어진 일이다. 공권력의 이름으로 행사되는 야만적인 폭력에 소름이 끼치고 치가 떨린다.

피해자는 당시 과격시위를 벌이던 중이 아니었다. 상황이 발생하기 전에 그는 시민들에게 고립되어 있던 전투경찰 한 명을 구출해 주었다고 했다. 자신이 평화주의자이며 시인이라고 안심시키자 전투경찰은 자기도 대학에 다니다가 입대했노라면서 울먹이더라고 했다. 그가 떠나고 난 뒤 길 한복판에서 열 명 정도의 전경이 진압대원들에게 쫓기던 시민들에게 포위된 것을 보고 비폭력을 외치며 다가서다가 전경이 벗어던진 철모에 얼굴을 맞고 코에서 피를 흘리며 잠시 정신이 혼미해졌다. 다시 정신을 가다듬고 지하철 출구 쪽으로 비틀거리며 도망치던 그가 시위대를 쫓던 전경들의 먹이가 된 것이다.

이 불운한 피해자가 다름 아니라 시인 함민복이라는 사실을 알았을 때 퍼뜩 든 생각은 ‘왜 하필이면 함민복인가?’라는 것이었다. 함민복이 누구인가. ‘한국판 <우동 한그릇>’이라고나 할 시 <눈물은 왜 짠가>의 시인이 아니겠는가. 설렁탕 한 그릇을 두고 가난한 모자와 배려심 깊은 식당 주인이 펼치는 감동의 무언극에 코끝이 찡해졌던 이들이 많을 것이다(혹시 그에게 진압봉과 방패를 휘두른 전경들 중에도 있지 않을까). 사십대도 중반을 넘어선 나이에 결혼도 하지 않고 강화의 버려진 집에서 시만 쓰고 사는 ‘천상 시인’이 바로 함민복이다.


“시집 한 권에 삼천 원이면/ 든 공에 비해 헐하다 싶다가도/ 국밥이 한 그릇인데/ 내 시집이 국밥 한 그릇만큼/ 사람들 가슴을 따뜻하게 덥혀줄 수 있을까/ 생각하면 아직 멀기만 하네”(<긍정적인 밥>)라며 끊임없이 자신을 낮추고 경계하는 사람, “말랑말랑한 흙이 말랑말랑 발을 잡아준다/ 말랑말랑한 흙이 말랑말랑 가는 길을 잡아준다”(<뻘>)며 “말랑말랑한 힘”을 예찬한 이 평화주의자에게 야수적인 폭력이 웬말이란 말인가.

현재 그는 왼쪽 관자놀이 부분이 심하게 부은데다 정신도 혼미한 상태이고, 오른쪽 어깨가 결리고 허리 통증도 심해 거동이 불편한 처지라고 한다. 그는 자신에게 폭력을 행사한 전경들을 고발하고자 피 묻은 셔츠와 시청 응급진료막사에서 찍은 사진, 인터넷 한겨레 동영상 등을 피해자 진술서와 함께 제출해 놓았다. 시인으로 하여금 시 대신 피해자 진술서를 쓰게 만드는 사회란 도대체 어떤 사회일까.

‘꽃의 시위’(flower movement)란 말이 있다. 무력한 시인을 짐승처럼 짓밟은 저들에게 그가 쓴 시 한 편을 시위 삼아 들려 주고 싶다. “꽃에게로 다가가면/ 부드러움에/ 찔려// 삐거나 부은 마음/ 금세// 환해지고/ 선해지니// 봄엔/ 아무/ 꽃침이라도 맞고 볼 일”(<봄꽃> 전문)


댓글(4)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2008-07-05 16:22   URL
비밀 댓글입니다.

로쟈 2008-07-07 08:56   좋아요 0 | URL
네, 동감입니다...

수유 2008-07-06 12:38   좋아요 0 | URL
기사일부 가져가요.. 시인의 쾌유를 빈다고 막상쓰려니 가슴 아프네요.

로쟈 2008-07-07 08:57   좋아요 0 | URL
그래도 큰 부상이 아니기를 바래야겠죠...
 

최근에 출간됐지만 알게 모르게 지나간 책 중의 하나는 저우하이힝의 <나의 아버지 루쉰>(강, 2008)이다. 제목 그대로 저자는 루쉰의 유일한 피붙이라고 한다. 비록 고작 일곱 살 때 아버지 루쉰을 여의긴 했지만. '루쉰의 아들로 살아온 격변의 중국'이란 부제처럼 중국 현대사를 한 인물의 시점에서 조감하는 책도 되겠다. 짐작에 중국 현대사의 인물들 가운데 국내에 루쉰보다 평전/전기류가 많이 소개된 경우도 없지 않나 싶다(마오쩌둥이 그 뒤를 이을까?). 겸사겸사 몇 권의 책을 꼽아둔다. 나도 두세 권 갖고 있는 듯하다... 


11개의 상품이 있습니다.

나의 아버지 루쉰- 루쉰의 아들로 살아온 격변의 중국
저우하이잉 지음, 서광덕.박자영 옮김 / 강 / 2008년 6월
22,000원 → 19,800원(10%할인) / 마일리지 1,100원(5% 적립)
양탄자배송
밤 11시 잠들기전 배송
2008년 07월 02일에 저장

인간 루쉰 上
린시엔즈 지음, 김진공 옮김 / 사회평론 / 2007년 1월
28,000원 → 25,200원(10%할인) / 마일리지 1,400원(5% 적립)
2008년 07월 02일에 저장
절판
인간 루쉰 下
린시엔즈 지음, 김진공 옮김 / 사회평론 / 2007년 1월
28,000원 → 25,200원(10%할인) / 마일리지 1,400원(5% 적립)
2008년 07월 02일에 저장
절판
루쉰전- 기꺼이 아이들의 소가 되리라, 개정판
왕스징 지음, 신영복.유세종 옮김 / 다섯수레 / 2007년 9월
12,000원 → 10,800원(10%할인) / 마일리지 600원(5% 적립)
양탄자배송
밤 11시 잠들기전 배송
2008년 07월 02일에 저장



11개의 상품이 있습니다.

댓글(19)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노이에자이트 2008-07-03 23:23   좋아요 0 | URL
이 아들이 그 말썽 많은 염문의 주인공인 루쉰의 제자와의 사이에서 낳은 이라고 하던데 이 책은 루쉰에 대한 이러저러한 안 좋은 소문을 방어하는 내용이 많다고 하더군요.

로쟈 2008-07-03 23:22   좋아요 0 | URL
네, 부인과의 사이에서는 아이가 없었다는군요...

노이에자이트 2008-07-03 23:25   좋아요 0 | URL
그 제자와 결혼이었는지 그냥 동거였는지 가물가물하네요.

로쟈 2008-07-03 23:32   좋아요 0 | URL
기사에 결혼 얘기는 없던데요...

노이에자이트 2008-07-04 17:03   좋아요 0 | URL
오늘 이 책을 대충 훑어봤는데 이 아들은 피임을 잘 못해서 태어났다네요.콘돔 틈 사이에서 생긴아들인가 봐요.굉장히 솔직한 고백이네요.돈 좀 더 주고 좋은 걸 쓰지...

로쟈 2008-07-04 23:26   좋아요 0 | URL
그때 이미 콘돔이 있었나요??..

노이에자이트 2008-07-05 00:00   좋아요 0 | URL
.중일전쟁 무렵에 일본군에 콘돔을 지급했다하니 이미 있지 않았을까요? 더 민망한 피임법도 있지만...

루쉰P 2008-07-18 02:36   좋아요 0 | URL
'나의 아버지 루쉰'이란 책은 저도 사서 읽었습니다. 루쉰 선생에 대한 새로운 내용들이 많이 들어있어요. 루쉰 선생은 주안이란 부인이 있지만 이 부인은 루쉰 선생이 일본 유학 시절에 집에서 어머니가 병환에 있다고 거짓말을 해서 중국으로 부른 후 억지로 결혼을 하게 된 여인입니다. 봉건제도의 희생양이었죠. 루쉰 선생은 주안 부인과 성적인 관계는 전혀 맺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러다 보니 어떤 아이도 있을 수가 없었죠. 다만 루쉰 선생은 일본 유학을 돌아와서도 결코 이 여인을 무시하지 않고 같이 살면서 자신의 어머니를 모실 수 있도록 했습니다. 왜냐하면 그 때 당시 중국 전통에 의하면 시집왔다가 거절당한 여인은 자신의 친정도 가지 못하고 죽어야하는 운명을 가졌기 때문에 또 어머니의 소원인 결혼이라는 이유 때문에 루쉰 선생은 어쩌지 못하고 결혼을 승낙해야 했습니다. 평생을 루쉰 선생은 자상하지는 않지만 생활할 수 있도록 생활비를 보태주었습니다. 주안 부인에 대해서는 나중에 허광평 여사와 결혼을 하여 같이 살게 되었을 때도 그 어떤 불이익을 주지 않았습니다.

루쉰P 2008-07-18 02:40   좋아요 0 | URL
허광평 여사와 맺어진 것은 루쉰 선생이 북경여자대학 교수 시절 정부의 탄압에 맞서서 싸우는 허광평 여사를 격려하다가 사랑의 감정이 싹터서 그때 당시에는 모든 사람과 논적들이 비난을 퍼 부었는데도 불구하고 서로를 격려하며 같이 살게 되었습니다. 허광평 여사는 루쉰 선생 서거 직후 루쉰 선생 문집을 발간하고 일본군의 고문에도 불구하고 루쉰 선생의 모든 집필 서적을 금고에 옮겨 보관하다가 신중국의 수립 후 자신들이 생활하던 모든 옷이며 가구 등을 루쉰 선생 박물관에 기증해서 결국에 자신의 아들도 잠재울 침대조차 기증하여 박스에서 재워야 했습니다. 루쉰 선생이 반려자 만큼은 잘 골랐던거죠^^ 루쉰 선생은 56세에 돌아가셨는데 그 아들의 추측에 의하면 일본 군부의 사주를 받은 일본 의사에 의해 돌아가시지 않을 수도 있었는데 안타깝게도 돌아가셨다라는 증언도 이 책에는 실려 있습니다.

루쉰P 2008-07-18 02:42   좋아요 0 | URL
피임을 잘 못해서 태어나고 안 태어난 것이 아니라 루쉰 선생의 작품집을 보고 거기에 대해 논하는 것이 좋지 않을까요? 개인적으로 상당히 존경하고 좋아하는 작가라서 루쉰 선생의 잡문집을 보신다면 피임을 하고 못하고 보다 더 중요한 것을 얻으실 수 있을거라 생각합니다.
조금 설명을 드리고 싶어서 이렇게 길게 썼습니다.

로쟈 2008-07-19 10:58   좋아요 0 | URL
자세한 설명 감사합니다.^^

루쉰P 2008-07-19 19:58   좋아요 0 | URL
별 말씀을요^^; 저렇게 써 놓고 생각을 해보니 그냥 농담삼아 하신 말들에 제가 너무 진지하게 주석을 달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들더군요. 전 어찌보면 루쉰교의 열렬한 신자인 듯 해요.ㅋㅋㅋ 루쉰 선생의 평전은 저기 있는 책들을 모두 읽어 봤는데요. 박홍규 교수의 루쉰은 한국인이 느끼는 루쉰에 대해, 린시엔즈의 인간 루쉰은 다른 평전들 중 가장 루쉰 선생에 대한 자료가 많아요. 책이 두꺼운 만큼요.^^그리고 조금 작가의 사적인 생각이 강한 평전인 듯 하더군요, 내용이 다 괜찮은데 막판에 루쉰 선생이 허광평 여사와 결혼 후에도 자신을 찾아오던 여제자에게 사랑을 느꼈다는 내용이 있어서 놀랐어요. 임현치의 루쉰은 시대 상황을 많이 분석하며 루쉰 선생을 쓴 평전, 신영복 선생의 평전은 중국공산당 입장에서의 약간 신격화된 루쉰전, 주정의 루쉰전은 사진 자료와 루쉰 선생 친구분들이 느끼는 루쉰에 대해 쓴 루쉰전,다케우치 요시미의 루쉰전은 다른 루쉰전들 중에서 문학적인 색채가 상당히 강해서 뭐랄까 문장이 아름다운 루쉰전이라고 할까요. 저 중에 왕샤오밍 것 만 못 읽었어요.^^ 근데 위에 노이에자이트님의 말씀처럼 루쉰 아들이 쓴 루쉰전은 좀 변명하는 뉘앙스를 풍기는 글이 많이 있어요. 하지만 다른 루쉰 평전에는 없는 자료들이 두,세 가지 있더군요. 루쉰 선생을 파고 들어 공부하지 않는다면 그다지 쓸모는 없는 것 같아요. 엄영욱이 쓴 루쉰전은 별로 볼만한 가치는 없더군요. 사실 중국학자들이 연구한 것에 숟가락하나 얻은 느낌을 주더라구요. 어이가 없는 것은 이광수랑 루쉰 선생을 비교해 놓은 부분이 좀....암튼 로쟈님의 루쉰 컬렉션에 제 정보가 도움이 됐으면 하네요^^ 전 항상 신세만 지잖아요.^^

로쟈 2008-07-20 11:59   좋아요 0 | URL
루쉰 전문가가 따로 없군요.^^ '루쉰S'라고 닉을 바꾸셔도 되겠습니다...

노이에자이트 2008-07-19 22:45   좋아요 0 | URL
제가 본 것은 아그네스 스메들리 <중국혁명의 노래>인데 스메들리가 루쉰의 친구라서 1차자료의 성격이 강하죠.사랑 이야기는 없어요.국민당 남의사의 사상탄압이 무시무시하다는 생각이 절로 드는 장면이 많죠.또 하나는 조나선 스펜스의 <천안문>.여기엔 상해 5,30사건 무렵에 허광평과 가까워졌다는 이야기가 나오더군요.스펜스는 루쉰이 중국 공산당과 어느 정도 거리를 두려고 했다는 점을 강조하죠.다케우치 요시미는 아시아주의자라서 관심이 많습니다.이 사람이 고른 루쉰 선집이 있었죠?

루쉰P 2008-07-20 20:56   좋아요 0 | URL
<천안문>은 저도 재미있게 읽었어요. 중심인물을 3명으로 두고 썼는데 그 중 한 명이 루쉰 선생이었죠. 이덕일의 정약용과 그의 형제들 같은 느낌을 주는 책이라고 할까요. 이야기식으로 풀어 쓴 것이 상당히 재미있습니다. 다케우치 요시미의 루쉰 선집이 우리니라에 번역돼 소개돼 루쉰 선생에 대한 잡문 소개를 국내에 처음 소개한 번역물로 알고 있습니다. 지금은 노신 선집이 노신문학회에서 출판돼 더욱 알찬 내용을 담고 있죠. 근데 이 책은 제본이 잘 돼 있지가 않아서 벌써 책 들사이가 벌어져서 갈라졌어요. 게다가 너무 두꺼워서 가지고 다니며 읽기에는 조금 불편합니다. 그런거에 대한 보안을 했는지 국내 학자 중 홍석표 교수가 루쉰 선생의 전집을 조금씩 내고 있습니다. '무덤' 등 총 3개의 작품집을 번역했는데 아직까지 후속작은 나오고 있지 않아요. 다케우치 요시미의 경우는 루쉰을 통해 아무런 저항없는 일본 문단을 비판한 비평가로 유명하죠. 나중에는 중.일 친선을 위해서 노력한 사람으로도 유명하구요^^ '동양적 근대의 창출'이란 히야마 하사오의 책이 있는데 일본의 나쓰메 소세키와 루쉰을 비교한 책으로 상당히 재미있어요. 시간있을 때 한 번 보세요.^^
스메들리는 루쉰의 소중한 친구로서 국민당의 감시 속에서 루쉰 선생 50세 생일 잔치도 벌여준 사람이죠.

루쉰P 2008-07-20 21:05   좋아요 0 | URL
전 로쟈님을 보면 루쉰 선생께서 쓰신 <무덤>의 서문에 이런 구절이 떠올라요.

'세상에는 마음이 편하지 않은 사람들이 많지만, 오로지 스스로 마음 편한 세계를 만들어 내고 있는 사람들도 있다. 이는 그저 편한 대로 놓아둘 수 없는 일이어서, 그들에게 약간은 가증스러운 것을 보여 주어 그들에게 때때로 조금은 불편하게 느끼게 하고, 원래 자신의 세계도 아주 원만하기는 쉽지 않다는 것을 알려 주려 한다. 파리는 날며 소리내지만 사람들이 그를 증오하고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한다. 이 점을 나는 잘 알고 있지만, 날며 소리낼 수만 있다면 기어코 날며 소리내려 한다.'

로쟈님이 한국의 한심의 번역물에 대한 잡문을 써 주실 때 전 노신 선생의 저 글이 떠오르더라구요. ^^ 하여튼 괜히 로쟈님의 서재에서 쓸데없는 글만 주룩주룩 써 놓은 건 아닌지 모르겠네요.

로쟈 2008-07-21 10:30   좋아요 0 | URL
재밌습니다. 앞으로 자주 '주룩주룩' 써주시길.^^

노이에자이트 2008-07-20 22:13   좋아요 0 | URL
나쓰메 소세키와 루쉰의 비교라...재밌겠군요.좋은 정보 감사합니다.

루쉰P 2008-07-22 20:03   좋아요 0 | URL
네^^ 도움이 된다고 하시니 백수로 지내는 여름이 뿌듯하네요. 그리고 노이에자이트님 제가 추천해드린 동양적 근대의 창출은 상당히 정보면에서나 재미면에서나 뛰어난 책입니다. 나쓰메 소세키와 루쉰 선생이 처한 중, 일 지식인의 처지에 대한 비교도 재미있고, 서로 왜 다른 글쓰기가 가능했는지에 대한 분석도 있어요.
루쉰 선생이 일본 유학 시절 나쓰메 소세키의 집에서 자취도 했었고, 루쉰 선생의 동생의 증언에 따르면 루쉰 선생은 자연주의파의 일본 소설은 싫어했는데 그 중 모리 오가이와 나쓰메 소세키의 작품은 탐독했다고 하더군요. 암튼 노이에자이트님도 만나서 반갑네요^^ 즐거운 여름 보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