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말 북리뷰 기사에서 눈에 띈 것 중 하나는 미국 '뉴요커'의 필진이자 영화평론가라는 데이비드 덴비의 <위대한 책들과의 만남> 완역본에 대한 평이었다(책도 저자도 꽤 유명하다고). 나는 표지가 그닥 맘에 들지 않아서(조잡하다) 서점에서 자세히 들춰보지 않았는데, 예전에 나온 <호메로스와 테레비>(한국경제신문사, 1998)와 같은 책을 옮긴 것이라고 한다(표지만 기억이 나는데, 알게 모르게 입소문을 탔던 책이고 출판평론가 최성일씨는 '올해의 책'으로 꼽기도 했다). 아니 정확하게는 10년만에 2판의 완역본이 나왔다. 리뷰기사와 함께 10년전 리뷰도 같이 옮겨놓는다.    

한겨레(08. 07. 12) '완역’을 부루퉁하게 여기는 이유

십년은 강산이 변하는 세월이다. 짧지 않음을 새삼 실감한다. 9년 전, 어느 매체에다 이 책의 첫 번역인 ‘미디어시대의 고전읽기’ <호메로스와 테레비>(1998)를 거론하며 이런 말을 했다. “이 책은 500쪽이 넘는다. 그나마 번역자가 일부 편집을 한 게 그렇다.” 앗! ‘초역’에는 이것의 근거였을 ‘옮긴이의 말’ 같은 게 따로 없다. 본문에 있나, 아니면 나의 착각인가.

‘초역’을 통해 이미 이뤄졌을 수도 있지만, 이런 책도 ‘잘리지’ 않고 우리말로 옮겨졌으면 한 내 바람이 실현되었다. 이와 별개로 ‘초역’에 짐을 지우는 ‘완역’의 성립 근거는 온당치 못하다. “(이 번역의 질과 수준이 신뢰할 만한 수준에 한참 못 미친다는 판단에서 새로운 번역이 시도되었다고 하겠다).”(역자 서문) 뚜렷한 물증 없이 이런 말은 함부로 하는 게 아니다. 나는 ‘완역’에 의미를 부여했다.

‘완역’ 첫쨋권 초반에서 보이는 “데이비드/데이빗”과 “유대/유태”의 뒤섞인 표기는 꽤 큰 흠이다. 또한 원문을 그대로 싣는 ‘참고문헌 목록’은 전문적인 비평서 중심이라 수록하지 않았고, 학구파는 원서를 참고하라는 ‘일러두기’는 지나친 배려다. 월권으로 볼 수도 있다. ‘완역’에도 없는 게 있는 셈이다. 번역자와 편집자가 번역서의 ‘문지기’라면, 그들의 재량권은 어느 선까지 허용되는지 한번 생각해볼 문제다.


‘완역’ 읽기는 달뜨지 않았다. (달뜬 느낌을 눅인 ‘초역’ 독후감은 <인물과 사상> 1999년 3월호 ‘최성일의 출판동네 이야기’ 참조) 나는 데이비드 덴비가 지칭하는 “우리”와 “누구나”에 들지 않아서다. 그가 말하는 “우리”는 “서양”이다. ‘초역’에선 “서방”이라고 옮겼다. 우리가 동구권에 대응하는 서방세계의 잠정적인 일원이긴 했다. 그러나 우린 서양이 아니다. “누구에게나 금방 분명히 이해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내게 플라톤의 <국가>는 여전히 흐릿하기만 하다. 나는 번역서를 주로 읽지만 번역시집은 거의 안 읽는다. 시구가 퍼뜩 와 닿지 않는 탓이다. 테일러 교수가 인용한 “모든 진실을 말하되 비스듬히 말하라”라는 에밀리 디킨슨의 시구에서 “비스듬히 말하라”의 뜻을 도통 모르겠다. 감을 못 잡겠다.

사실 나는 고전에 약간의 가중치만 부여한다. 미국 컬럼비아대 교양필수 강좌의 독서목록이 지닌 권위와 상징성에도 회의적이다. “옛 작품을 현재 상황을 그려내는 데 미흡했다는 식으로 평가한다면 고전은 살 수 없다”는 시각이 옳다면, 우리가 아무리 미국식 삶의 방식을 추종한다 해도 우리 나름으로 살아온 장구한 세월에 비하면 그것은 일천하기에, 우리는 서양 고전 없이 살 수 있다는 관점 역시 맞다.

내가 ‘완역’을 부루퉁하게 여기는 결정적 이유는 ‘완역’에 추가된 ‘제2판 머리말’(2005)에 있다. 데이비드 덴비는 9·11 이후 미국이 직면한 상황에 대해 당혹해하면서도 건전한 애국심을 견지하려 든다. 미국이 세계 평화를 크게 해치는 ‘악의 제국’이라는 세계인의 여론을 곱씹기는커녕 이에 억울한 감정이 있는 듯싶다. 그에겐 ‘신이여, 미국을 굽어 살피소서’가 더 다급해 보인다.(최성일 출판칼럼니스트)

물과사상(1999년 3월호)'올해의 책'과 에머슨의 세 가지 독서 법칙

내가 뽑은 올해의 책    
<출판저널>에서 '올해의 책' 추천을 내게 청했다면, 나는 국내 저자의 책과 외국 필자의 책을 하나씩 꼽았을 것이다. 조병준씨의 <제 친구들하고 인사하실래요>와 데이비드 덴비의 <호메로스와 테레비>를 말이다. 이 책들은 앞서 살펴본 7개의 지면에서 각기 1번씩 소개된 바 있다. 조씨의 책은 언론노련의 30권 안에 들었고, 덴비의 책은 <출판저널>의 68권에   속했다. '그린비'와 '박가서장' 두 곳의 출판사를 통해 나온 조씨의 책은 '분산 출판' 자체만으로도 의미가 깊지만, 책의 성격이 이 글의 주제와 딱 맞아떨어지는 <호메로스와 테레비>를 자세히 좀더 살펴보기로 하겠다.



<호메로스와 테레비>(한국경제신문사)는 아직 책의 품질에 상응하는 대접을 받지 못하고 있다. 이 책은 출간 직후 언론의 이렇다 할 조명을 받지 못했다. 신문사 출판부에서 펴낸 책이기 때문이다. 국내 출판 저널리즘에는 묘한 관행이 하나 있는데 다른 언론사 기자가 쓴 책을 홀대하는 것이다. 홀대하는 방식은 아예 다루지 않거나 '두 줄'로 처리하는 것이다. 신문사 출판부가 만든 책에 대한 대접도 이와 크게 다를 바 없다.

이러한 악조건에도 불구하고 이 책은 <출판저널> '올해의책'에 포함되는 영예를 누렸다. 이중한 출판평론가는 추천의 변을 이렇게 밝혔다. "마흔 여덟의 언론인이 하버드대학에 다시 복학해 들은 교양교육을 듣고 소감을 적었다. 생동감 넘치는 묘사로 인문학의 역사와 문명론을 살핀다."

잡지에 실린 그대로 옮겼는데 여기에는 큰 오자(?)가 있다. 처음에는 사소한 실수로 여겼지만 책을 확인해 보니 그렇지가 않다. 덴비의 모교는 하버드가 아니라 뉴욕에 있는 콜럼비아대학이다. 배경의 측면으로는 콜롬비아나 하버드나 그게 그거다. 하지만 이 책의 주제가 되는 교양강좌는 콜럼비아대학과 불가분의 관계가 있다. 콜럼비아대학에서 시작돼 미국  전역으로 확산되었다가 지금은 콜럼비아와 시카고대학만이 명맥을 유지하고  있어서다.

<호메로스와 테레비>는 대학 강좌 수강기이다. 덴비는 졸업 30년만에 두 개의 교양강좌를 재수강한다. 유럽의 표준적인 문학선집을 강의하는 '인문학'이 그 하나고, 철학 및 사회 이론 분야의 걸작선집을 다루는 '문명론'이 다른 하나다. 이 둘은 나뉘어 있지만 '서양문명개론'에 해당하는 하나의 강좌로 봐도 무방하다. 실제로 책에는 두 강좌가 뒤섞여 있지만 전혀 어색하지 않다. 강좌의 중심에는 서양의 고전이 자리한다. 이 책에 언급된 고전들만 읽으면 에머슨의 두 번째 독서 법칙은 쉽사리 지켜진다. "유명한 책만 읽는다."
    
백인·남성 중심의 서양사상사
호메로스와 플라톤에서 조셉 콘라드에 이르는 고전 목록은 백인·남성 편향적이라는 비판을 받는다. 흑인 여학생의 비판에 직면한 대학 당국자의 해명은 지극히 현실적이다. "우리 교수들은 서방의 고전들을 가르치기에도 벅찹니다. 그 분들에게 동양 문헌에까지 정통하라고 요구하는 것은 지나쳐요." 강좌의 교수진은 관련 학과에서 차출된 여러 명으로 구성된다.

이 중 한 명을 국내 TV뉴스를 통해 볼 기회가 있었다. 제임스 샤피로 교수는 지난해 9월 23일 문화방송의 <9시 뉴스>에 등장했다. 이우호 특파원의 방문을 받고, 클린턴의 지퍼게이트를 보는 미국민의 상반된 견해에 대해 코멘트하는 샤피로 교수는 책에 묘사된 그대로였다. "금발의 젊은 영어 교수인 그는 큰 키에 스포츠팀 코치 같은 모습이었다."

나 역시 흑인 여학생의 기세등등한 목소리에 잠시 흔들리지 않은 건 아니지만, 콘라드에 대한 덴비의 평가를 읽고 오히려 에드워드 사이드에 대한 균형된 시각을 갖게 되었다. 사이드의 <오리엔탈리즘>과 <문화와 제국주의>에는 제인 오스틴과 콘라드를 제국주의자로 몰아붙이는 대목이 있다. 덴비는 그것을 가혹한 처사라고 주장한다. 그의 주장은 "(치누아) 아체베와 사이드의 고뇌에 찬 거부는 콘라드의 확고한 위치, 서방 문학의 핵심 커리큘럼에 대한 가능한 결론으로서 그의 위치를 확인시켜 줄 뿐이다."라는 진술을 통해 강한 설득력을 갖는다.

이런 류의 책에서 항시 느끼는 것이지만, 서양 사상사에서 마르크스가 차지하는 지위는 대단하다. 그리고 이 책은 마르크스에 앞서 다양한 사상을 탐구하라던 1980년대 '웃어른들'의 가르침이 갖는 일면적 진실을 깨우쳐 준다. "마르크스만 읽으면 된다"는 이야기는 에른스트 블로흐 같은 대가에게나 해당되는 것이지, 우리 같은 중생이 마르크스를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서양 사상사에 대한 기초지식의 습득이 필수적이다.

이 책은 5백 쪽이 훨씬 넘는다. 그나마 번역자가 일부 편집을 한 게 그렇다. 이런 책도 '커트' 없이 우리말로 옮겨지고, 많은 사람에게 읽히는 세월이 왔으면 하는 것이 솔직한 바램이다. 그리고 개인적으로 다시 한 번 아주 천천히 이 책을 음미해 가며 읽고 싶다. 그것은 한편으로 에머슨의 세 번째 독서 법칙을 준수하는 일이다. "좋아하는 책만 읽는다."

08. 07. 14.

P.S. 최성일씨의 <책으로 만나는 사상가들>(한국출판마케팅연구소, 2008)도 사실 지난주에 선을 보인 책이다. 같은 타이틀의 첫권이 2002년에 나온 이후 네번째 책이다. 분량이 넉넉하지는 않지만 주로 국내에 소개된 '사상가들'의 저작과 사상을 간명하게 정리해주는 장점이 있다. 출판칼럼니스트답게 서지사항을 꼼꼼하게 챙겨주고 있어서 관심있는 독자들에겐 유익하다. 참고문헌에 대한 평도 포함됐다면 더 좋았을 듯하다(나는 1, 2권만 오래전에 훑어본 기억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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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쉰P 2008-07-15 00: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여전히 좋은 책들을 알려 주시네요^^ 전 백수로 또 돌아왔습니다. 비평고원은 이제 잘 안 오시나봐요. 저도 알라딘에 와서 로쟈님의 추천 책들을 보고 갑니다.



로쟈 2008-07-15 11:12   좋아요 0 | URL
비평고원도 가끔 들르는데 예전만큼의 활력은 없네요.^^;

노이에자이트 2008-07-15 23: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다룬 책들이 지나치게 고대 전근대 쪽에 치우쳐 있더군요.저 같으면 19세기 이후 것을 더 많이 취급했을 거예요.

로쟈 2008-07-15 23:33   좋아요 0 | URL
강의 자체가 '고전 읽기'여서 그런 듯합니다. 말 그대로 '클래식'...
 

방에 창문이 없다보니 시계를 보지 않으면 시간을 알 수 없다. 꼭두새벽부터 햇빛이 들어 더 잘 수도 없었던 모스크바의 여름 기숙사와는 사정이 정반대다. 일어나서 선풍기를 틀고 아침 끼니를 때우고 정신도 차릴 겸 일간지들을 잠시 훑어보다가 그나마 '나쁘지 않은' 소식으로 출판동향 기사를 옮겨놓는다. 하반기에 한국문학이 쏟아져나올 거라는. 일본소설 바람이 의외로 일찍 수그러들면서 한국소설의 판매량이 부쩍 늘었다고 한다. 영화가 죽쓰고 있는 것과든 달리 한국소설은 시장 점유율 1위다. 중진 작가들의 기대작들이 대기중이라고 하니 기대해봄 직하다.

한국일보(08. 07. 14) 황석영·김훈·신경숙 기대작 밀려온다

이달초 교보문고 통계에 따르면 올해 상반기 소설 시장에서 한국소설이 판매량 상위 100위권에 34종을 올리고 판매권수 점유율 34.5%를 기록하면서 영미소설(23종ㆍ24.3%)과 일본소설(27종ㆍ17.1%)의 아성을 무너뜨렸다. 한국문학의 선전은 하반기에도 이어질까. 한국문학 주요 출판사 중 8곳(문학과지성사, 문학동네, 민음사, 실천문학사, 열림원, 이룸, 창비, 현대문학)의 작품 출간 계획을 토대로 하반기 한국문학 동향을 정리한다.

■ 소설
인기 중진 작가들의 장편 출간이 이어진다. 작년 <바리데기> <남한산성> <리진>으로 각각 장편 붐을 선도했던 황석영(65) 김훈(60) 신경숙(45)씨가 나란히 차기 장편을 낸다. 황씨는 이달말까지를 예정으로 네이버 블로그에 연재 중인 자전소설 <개밥바라기별>을 내달 문학동네에서 묶어 낸다. 김씨 역시 문학동네를 통해 해방 이후 한국 현대사를 배경으로 한 전작 장편을 발표할 계획이다. “기자를 비롯한 주인공급 인물이 여럿 등장하는 3인칭 소설”이란 것이 그의 귀띔이다. 신씨는 계간 <창작과비평>에 연재 중인 <엄마를 부탁해>를 연말쯤 창비에서 출간한다.

젊은 작가 장편 중에선 먼저 김선우(38) 시인의 첫 소설이 눈에 띈다. 이달말 실천문학사에서 나올 김씨의 장편은 월북 무용가 최승희를 모델로 한 역사소설이다. 한국 팩션의 기수인 김탁환(40)씨는 이달 20일께 통일신라 고승 혜초의 천축국(인도) 기행을 모티프 삼은 <혜초>를 민음사에서 출간한다.

지난해 장편 <네가 누구든 얼마나 외롭든>으로 좋은 반응을 얻은 김연수(38)씨는 만주 독립군을 소재로 2004년 잡지 연재했던 장편 <밤은 노래한다>를 문학과지성사를 통해 내놓는다. <미실> <논개>의 작가 김별아(39)씨는 내달초 백범 김구의 생애를 그린 장편을 이룸에서 발표한다. 이평재(49) 한동림(40)씨의 첫 장편, 방현희(44) 김숨(34) 이홍(30)씨의 두 번째 장편도 주목된다. 하반기엔 현길언(68) 복거일(62)씨 등 60대부터 김유진(27) 염승숙(26)씨 등 20대까지 다양한 연령층에서 20종의 소설집이 쏟아진다.

중견작가 중에선 정도상(48)씨가 이달 탈북ㆍ이주노동 소재의 연작소설집을 내는 것을 시작으로, 박상우(50) 이현수(49) 성석제(48) 서하진(48) 한창훈(45) 함정임(44)씨 등이 작품집을 낸다. 강영숙(42) 민경현(42) 박현욱(41) 최대환(38) 김경욱(37) 김윤영(37) 오현종(35) 조헌용(35)씨 등 젊은 작가들도 그간 써온 중단편을 묶는다.

특별한 작품집도 예정돼 있다. 민음사는 이달 소설가 이문열씨 회갑 기념으로 구효서 박상우 심상대 박석근씨 등 후배 작가들의 단편을 묶은 헌정소설집을 출간한다. 현대문학에선 이기호 해이수씨 등 월간 <현대문학>을 통해 등단한 젊은 작가 10명이 ‘피크(peak)’, 즉 ‘인생 절정의 순간’을 테마로 쓴 단편을 묶어 8월 중 책을 낸다.

■ 시
‘미래파’로 불리며 한국 모더니즘의 새 영역을 열고 있는 장석원(39) 진은영(38) 이승원(36) 김근(35) 김경주(32) 김민정(32)씨가 나란히 두 번째 시집을 낸다. 이들에 앞서 탐미주의의 낯선 미학을 선보였던 강정(37) 시인은 세 번째 시집을 선보인다. 한국 서정시의 적자(適子)라는 평을 듣는 문태준(38)씨는 <가재미>(2006) 이후 2년만에 네 번째 시집을 묶는다. 손꼽히는 중견시인 송찬호(49) 김경미(49) 박주택(49) 정끝별(44)씨가 네 번째 혹은 다섯 번째 시집을 낸다.

원로ㆍ중진들의 시집 소식도 있다. 고은(75) 시인은 9월4~12일 서울 중구 한국국제교류재단 문화센터에서 등단 50주년 기념 서화전을 여는 것과 맞춰 신작시집을 출간한다. 올해 상반기로 예정됐던 <만인보> 완간은 시인의 사정 때문에 내년으로 미뤄졌다. 정현종(69) 시인은 5년 만에 아홉 번째 시집을 내고, 정희성(63) 시인도 7년 만에 새 시집을 낸다.(이훈성기자)

08. 07.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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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쉰P 2008-07-15 00: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개인적으로 김훈의 소설이 되게 읽고 싶네요^^ 한국 문학가 중 유일하게 읽는 작가라서 이 편집증적인 골라 읽기는 언제쯤 고치게 될지...

로쟈 2008-07-15 11:09   좋아요 0 | URL
저도 기대하고 있습니다...

릴케 현상 2008-07-15 01: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김선우씨가 당분간 청탁에 의한 시를 쓰지 않을 거라고 했던 말뜻을 이제 알겠네요^^ 나 소설 쓰느라 바쁘거등요

로쟈 2008-07-15 11:10   좋아요 0 | URL
끼와도 무관하지 않겠지만, 시로는 '전업'이 안된다는 사정도 있을 듯하네요...
 

며칠간 준-이사를 하느라고 바빴다. 이런저런 사정으로 한동안 '원룸텔' 생활도 하게 됐고. 한 평 조금 넘을 듯싶은 공간은 모스크바 체류시절의 기숙사 방보다는 약간 작지만 시설은 '호텔급'이다. 다만 창문이 없어 '전망'도 없다는 게 약간 흠인데(대신에 더 조용하다고 한다. 그럴 거 같지 않지만), '고급 감옥'으로 생각하면 아쉬울 것도 없다. 사실 도서관 시설이 잘 갖춰진 감옥은 내가 꿈꾸던 공간이기도 했다(이 '감옥'은 이름도 '노블스 레지던스'다!). 엊저녁 입방해서 하루를 묵었는데 무선 인터넷의 강도가 좀 약한 탓에 바로 글을 올리거나 하진 못했다(자주 끊기기까지 한다). 오늘은 시범삼아 칼럼기사 하나를 옮겨놓는다(http://www.sisain.co.kr/news/articleView.html?idxno=2264#). 금강산 관광객의 피살 사건도 어제 있었지만 '바깥' 세상은 여전히 어수선해 보인다. '이거 뭥미?'의 세상이다. 어제도 '촛불'은 계속되었으므로 칼럼에서 말하는 '이중 권력', 혹은 '이중 국가' 상황은 여전히 유효하겠다. 우리는 과연 어떤 국가를 원하는가? 

시사인(08. 06. 21) 우리는 어떤 국가를 원하는가

2008년 6월 중순 현재, 많은 사람이 대의민주제의 핵심인 정당정치가 실종된 상황을 걱정한다. 어떤 사람은 지금 대한민국이 ‘이중 권력(dual power)’ 상태라고 말한다. 정부 권력과 시민 권력이 날카롭게 대치한다는 거다.

내가 알기로 이중 권력이라는 말의 용례는 크게 두 가지다. 하나는 일본 쇼군-천왕 체제의 기묘한 권력 분점을 묘사하는 경우다. 다른 하나는 약 90년 전에 블라디미르 일리치 레닌이 최초로 이 말을 사용했다. 우리의 맥락은 전자와 무관하므로 후자라는 이야기인데, 그렇다면 지금이 바로 혁명 전야? 에이, 설마! 오늘날 OECD 가입국에서 ‘혁명’이라는 단어는 광고 문구 또는 비유적 과장일 뿐이다. 체 게바라의 여전한 인기는 혁명의 절박한 요구 때문이 아니라 티셔츠로 소비될 수 있어서이다.

‘민족’‘통일’은 강한 국가의 수단으로서만 존재 의미 가져
한편 뉴욕 타임스는 이번 사태를 두고 “한국 민족주의 정서의 표출이다”라고 주장한다. 일부 운동권 역시 그렇게 생각할지 모른다. 물론 대한민국은 동북아시아의 마지막 분단국이고, 오랜 세월 외세에 시달려온 나라다. 그러나 북조선의 쇠락과 더불어 단일민족국가에 대한 한국인의 판타지는 상당 부분 사라졌다. 월드컵, 한류, 황우석 사태, <디워> 논란 따위에서 공통으로 드러난 것은 ‘강한 국가’에 대한 열망이지 과거와 같은 민족주의가 아니었다. 한국인에게 민족 혹은 통일은 여전히 중요한 가치이지만 더 이상 그 자체가 목적이 되기 어려워졌다. 이제 그것은 어디까지나 강한 국가를 위한 수단으로서만 존재 가치를 지닌다.

그러므로 민족주의니 민족 정서를 언급하는 것은 최근 10년간 대한민국에 일어난 급격한 변화를 잘 모르고 하는 소리다. 그 변화를 한마디로 표현하자면 ‘이중 국가(dual state)’다. 이것은 위기에 처한 중산층과 ‘막장’에 몰린 빈곤층이 90%를 이루고, 금융위기 이후 압도적 부를 축적한 10%로 구성된 사회다. 그리고 매일 1000원짜리 김밥을 먹는 사람과 1만5000원 하는 브런치를 먹는 사람이 같은 사무실에서 일하는, 그런 사회다. 이중 권력이 아니라 실은, 이중 국가가 문제다.

단순히 ‘10대90의 사회’를 고발하려는 것이 아니다. 세계화라는 미명 아래 벌어진 급격한 사회·경제적 충격이, 국가의 역할에 대한 한국 사회의 합의를 걷잡을 수 없이 붕괴시켰다는 점이 중요하다. 사적 욕망만이 소용돌이치던 혼란의 와중에서 사회가 지켜내야 할 공공성은 무참히 찢겨 나갔다. 그 빈자리에 자리 잡은 게 바로 강한 국가, 일류 국가에 대한 달뜬 기대였다. ‘국가의 후퇴’가 ‘강한 국가의 열망’으로 나타나는 것은 초국적 자본이 판치는 오늘날의 세계에서 그리 드문 일이 아니다. 동북아 중심국가를 내걸고 출범한 참여정부는 이런 국민의 열망을 잘 감지했지만, 시장주의와 국가주의 사이에서 분열병적으로 오락가락하다 ‘좌파 신자유주의’라는 해괴한 농담을 만들어냈고, 급기야 한·미 FTA까지 밀어붙였다. 5년 내내 혼란스러워하던 중산층은 정권이 바뀌고서야 자기가 사는 나라의 실체를 깨달은 듯 이렇게 외친다. “이게 뭥미?(‘이게 뭐야’라는 뜻의 인터넷 은어)”

거리집회에서 사람들이 외치는 구호는 쇠고기 재협상에 국한되지 않는다. 수도 민영화, 의료보험 민영화 반대 등 수십 가지에 이른다. 거칠게 묶으면 모두 국가가 해야 할 일을 포기하지 말고 제대로 하라는 얘기다. 가히 ‘국가의 귀환’이라 할 만하다. 그러나 여기엔 중요한 질문이 빠졌다. 대체 우리는 어떤 국가를 원하는가?(박권일/ <88만원 세대> 저자) 

08. 07. 13.

P.S. '국가의 후퇴'와 관련하여 참조할 만한 책은 수잔 스트레인지의 <국가의 퇴각>(푸른길, 2001)이다. 저자의 <매드 머니>(푸른길, 2000), <국가와 시장>(푸른길, 2005) 등이 모두 국가권력과 시장권력의 관계를 다루고 있다(교재형 책들이라 재미있지는 않다). 최근에 나온 책으로는 '세계 경제발전의 정치적인 논리'를 다룬 <자본과 공모>(휴먼&북스, 2008)가 눈길을 끈다. "개발도상국이 선진국으로 나아가기 위한 지름길을 제시하는 책. 저자는 성장을 강화하거나 혹은 반대로 국가의 성장 전망을 송두리째 날려버리는 정치적 동기들을 탐구한다. 리스크와 불확실성 사이의 경계선을 살피고 선진국과 개발도상국을 가르는 경제 성장 추진 동력을 분석한다."고 소개돼 있는데, 이 경우 성장을 위해서 국가와 자본의 긴밀한 연루와 공모는 권장되기까지 한다.

국가의 귀환에 대한 논리는 곧 '정치적인 것의 귀환'과 맞닿은 것이 아닐까 싶다. 샹탈 무페의 <정치적인 것의 귀환>(후마니타스, 2007) 등이 떠오르는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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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7-13 17:5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8-07-13 18:02   URL
비밀 댓글입니다.

주니다 2008-07-13 20:02   좋아요 0 | URL
책들을 이사보내시더니 그들과 고통을 함께 하시는건가요?^^

로쟈 2008-07-13 20:39   좋아요 0 | URL
아니요, 책들도 호강하고 있고 저도 나름 호사를 누리고 있습니다. '호텔급'이라니까요!^^

노이에자이트 2008-07-14 00:15   좋아요 0 | URL
무슨 일이든지 시작하긴 쉽지만 마무리가 어려워요.촛불집회도 마찬가지죠.촛불 이후에 나아갈 방향에 대해서는 촛불 시위를 긍정적으로 보는 사람들 사이에도 견해가 엇갈리는데 그 원인은 이 나라가 어떤 나라가 되기를 원하는지 합의가 안 되었거나 생각을 안 했거나 했기 때문입니다.정말 어려운 문제죠.
그리고 저도 서재에 글을 쓰기 시작했답니다.

로쟈 2008-07-14 00:17   좋아요 0 | URL
바로 즐찾을 해놓았습니다.^^
 

이번주 한겨레21의 '로쟈의 인문학서재'를 옮겨놓는다(http://h21.hani.co.kr/section-021162000/2008/07/021162000200807090718049.html). 아리스토텔레스의 <정치학>에서 통치형태에 관한 일부 내용을 읽고 그 '교훈'을 생각해본 것이다. 발단은 핀레이의 <고대 세계의 정치>(동문선, 2003)를 읽으려고 손에 든 것이었다. <정치학>의 번역은 아직 정본이 없는지라 영역본도 부분적으로 참고했고, 원고 자체를 급하게 쓰느라 꽤 애를 먹었다. 덕분에 오타도 그대로 남았다. 지면에서 ''국민의, 국민에 의한' 정부로 들었지만'이라고 돼 있는 부분은 ''국민의, 국민에 의한' 정부로 들어섰지만'으로 교정되어야 한다. 

한겨레21(08. 07. 15) 아리스토텔레스와 '고소영'

“참주정은 통치자 한 사람의 이익을 위한 통치형태이고, 과두정은 부자의 이익을 위한 통치형태이며, 민주정은 빈자의 이익을 위한 통치형태이다.” 시국이 시국인지라 눈길이 갈 수밖에 없는 구절인데, 아리스토텔레스의 <정치학>에 나오는 말이다. 여기서 ‘빈자’ 곧 ‘가난한 사람들’로 번역된 말은 ‘데모스(demos)’다. 때문에 ‘민주정’이라고 옮겨진 ‘데모크라티아’는 ‘빈민정’이라고 번역되기도 했다. 고대 그리스에서 이 데모스의 의미는 이중적이었다고 한다. 그것은 한편으로는 전체로서의 시민집단을 뜻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보통사람, 다수, 빈자를 가리켰다. 피플(people)의 어원인 라틴어 ‘포플루스(populus)’도 마찬가지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정의에서 특히 흥미를 끄는 건 과두정과 민주정의 차이이다. 그에 따르면, 이 둘의 차이를 낳는 것은 부와 빈곤이다. “과두정은 소수의 부자들이 국가의 관직을 맡는 정치질서이며, 마찬가지로 민주정은 다수인 가난한 사람들이 국가를 지배하는 정치질서”이다. 하지만, 특정한 사회적 계급에 봉사하는 정치체제를 중용의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는 옹호하지 않는다. 그가 보기에 올바른 정치질서의 세 가지 형태는 왕정, 귀족정, 혼합정이다. 그리고 참주정은 왕정의 왜곡이고 과두정은 귀족정의 왜곡이며 민주정은 혼합정의 왜곡이다. ‘혼합정’은  ‘입헌정’ ‘공화정’으로도 번역되는 ‘폴리테이아’를 옮긴 것이다. 한데, 왜 혼합정인가? 과두정과 민주정을 절충한 것이기 때문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전제는 단순하다. 모든 국가의 시민들은 넉넉한 계급, 가난한 계급, 그리고 그 중간을 형성하는 중산계급으로 구분될 수 있다. 그리고 일반원칙으로서 절제와 중용은 언제나 바람직한 것으로 인정되기 때문에, 재산의 소유에 있어서도 가장 좋은 것은 중간상태이다. 그가 보기에는 이런 상태에 있는 사람들이 이성에 잘 따른다. 때문에 중간계급의 시민으로 구성된 국가가 가장 잘 조직된 국가이다. 지나치게 아름답고 튼튼하고 가문이 좋고 부유해도, 또 반대로 지나치게 나약하고 가난하고 비천해도 이성에 따르기가 어렵다. 첫 번째 부류는 거만하여 중대 범죄를 저지르는 경향이 있고 두 번째 부류는 불량배나 잡범이 될 소지가 다분하다. 거만한 자들이나 불량한 자들이나 모두 정치에는 부적격하다는 것이 아리스토텔레스의 판단이다.

따라서 정치적 공동체의 가장 좋은 형태를 이룩하기 위해서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국가의 구성원들이 알맞은 재산을 갖는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재산이 많고 다른 사람들은 재산이 전혀 없는 경우, 우리가 얻게 되는 결과는 극단적인 민주정(빈민정)이거나 극단적인 과두정, 혹은 이 두 극단에 대한 반발로서의 참주정이다. 참주정은 가장 무분별한 형태의 민주정이나 과두정에서 생겨나며 중간 정도의 정치질서에서는 나올 가능성이 적다. 중산계급이 클 경우에 시민들 사이의 분열이나 파벌이 생길 가능성이 적어지기 때문이다.

어떤 통치형태를 규정하고자 할 때 가장 기본적인 기준이 통치자의 재산이라는 점은 지금도 시사적이다. 물론 인간이 이성적으로 판단하고 공동체의 이익을 고려하는 데 재산의 유무가 정말로 중요한가에 대해서는 의문을 던질 수 있다. 하지만 우리의 정치적 현실은 아리스토텔레스의 통찰이 여전히 유효함을 말해준다. ‘강부자’, ‘고소영’ 인선 파문이 그렇지 않은가. ‘국민의, 국민에 의한’ 정부로 들어섰지만 이명박정부는 여러 정책을 통해 자신이 ‘넉넉한 계급’을 위한 ‘과두정부’임을 분명히 하고 있다. 진통 끝에 비고려대, 비영남권, 재산 10억 미만을 새로운 인선기준으로 고려할 것이라고도 하는데, 아직 촛불 민심을 반영한 내각 개편은 이루어지고 있지 않다. 과연 더 기대할 수 있을까?

‘정치적 동물’로서 인간에게는 정치적 공동체를 이루려는 자연적인 충동이 있다고 지적하면서 아리스토텔레스는 이렇게 말했다. “인간은 완성되었을 때 동물 중에서 가장 뛰어난 존재이지만, 법과 정의로부터 배제된다면 가장 나쁜 동물로 전락하고 만다.” 국민을 법과 정의로부터 소외시키는 것은 ‘가장 나쁜 동물’로 전락시키는 것과 마찬가지다. 그건 가장 나쁜 정부가 하는 일이다.

08. 07. 09.

P.S. '고소영' '강부자' 인선 파문을 들먹인 것은 '뒷북'이긴 하나, 지난주에 글을 쓸 때는 내각 개편이 이루어지지 않은 시점이었다. 알다시피 이대통령은 엊그제 장관 3명을 교체하는 선에서 개편을 마무리지었다. 예상대로 더 기대할 수 있는 게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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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매 2008-07-10 00: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핀레이의 책의 번역 상태는 어떠한지요? 구매자평에는 벌써 다시나와야 한다는 악평이 뜨네요. 알라딘 책 소개 창에도 원제목으로 'POFITICS IN THE ANCIENT WORLD'라고 되어 있네요.Polifics가 아니라 Politics겠지요.

로쟈 2008-07-10 00:22   좋아요 0 | URL
말씀대로 별로 좋진 않습니다. 저도 원저와 대조해서 좀 읽다가 머리가 아파서 덮어둔 상태입니다...

노이에자이트 2008-07-10 00: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쁜 고소영 누나를 말썽 많은 내각의 별명으로 만들게 해버린 정부는 나쁜 정부입니다.

로쟈 2008-07-10 21:46   좋아요 0 | URL
개인적으로 별로 떠오르는 게 없는 배우라...

람혼 2008-07-10 03: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국민의, 국민에 의한 정부로 들었지만(I've heard/people say)"이라는 오타가 사뭇 뼈가 있고 징후적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로쟈 2008-07-10 21:47   좋아요 0 | URL
그런 건가요?^^

노이에자이트 2008-07-14 00: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앙...저는 고소영 누나가 무조건 좋아요.우리 옆집에 살면 좋겠네요....
 

거짓말에 관한 책 두 권에 대한 리뷰기사를 옮겨놓는다. 앨리엇 애런슨 등이 지은 <거짓말의 진화>(추수밭, 2007)은 사실 작년말에 나온 책이어서 신간은 아니다. 그때 한창 BBK 사건이 사회적 관심사였는지라 나름대로 시의성 있는 책이란 생각이 했었다. 이번에 나온 <거짓말의 딜레마>란 책 때문에 다시 불려나온 듯하다. 물론 그때나 지금이나 여전한 건 '거짓말하는 권력'이다. 아마도 필자 또한 그 점을 의식했을 듯싶고, 기사를 옮겨놓는 나 또한 의식할 수밖에 없는 사실이다. 당장 오늘만 하더라도 현정부는 '경제위기=촛불책임론’을 거론하며 프레임화하고 있다(김종인 전 청와대 경제수석의 말대로 "경제활동이 중단된 것도 아닌데, 촛불집회 때문에 경기가 안 좋다는 것은 문제해결 능력이 없다는 것을 자인하는 것밖에 안"되는데도 불구하고. 김 전수석과의 인터뷰기사는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0807071801375&code=210000 참조). 앞으로도 5년내내 그런 거짓말에 시달려야 한단 말인가?..

교수신문(08. 07. 07) 속임수와 변명, 자기정당화가 번성하는 이유

오늘의 날씨처럼 다들 ‘오늘의 거짓말’을 갖고 산다. 약속 시간에 늦으면, 전철 바퀴도 기꺼이 펑크 나고, 미처 답장 못한 메일은 스팸 편지함에 들어갈 준비가 돼 있다. 연인 앞에서 남자들은 모두 개과천선한 왕년의 ‘짱’들이고, 여자들은 모기만큼 먹어도 언제나 배가 부르다. 취업 준비생들은 ‘뽀샵질’로 위장한 사진을 갖다 붙이고, 자기 소개서를 메워 줄 장점으로도 읽힐만한 단점을 자신에게서 찾아낸다. 자국에서마저 리콜당한 미국산 쇠고기는 싸고 맛 좋고 안전할 수밖에 없으며, 그걸 모르는 국민 대다수는 배후 세력에게 ‘속고 있어야 한다.’

우리는 모두 피노키오의 코를 가졌다, 온갖 거짓말에도 결단코 길어질 리 없는. 하루 거짓말의 횟수는 200번. 10분 대화에서 대략 2번. 이 ‘거짓말 같은’ 거짓말에 대한 진실로 『거짓말의 딜레마』는 시작한다. 물론 정확한 수치에 대해선 의견이 분분하다. 분명한 것은 우리는 날마다 거짓말을 하며 생각보다 훨씬 자주 한다는 것.



일상적인 거짓말의 상당수는 암묵적인 사회적 합의의 일종이다. 예컨대 ‘어떻게 지내요?’같은 질문에 ‘고마워요, 잘 지내요’라는 대답은 가장 의례적인 거짓말 중 하나다. 이것은 옷가게 점원의 미소마냥 사회적 상호작용의 서막 노릇을 한다. 또한 인생극장에서 우리들은 관계 양상에 따라 번갈아 다른 가면을 쓴다. ‘페르소나(persona)’는 인간됨의 조건이다.

저자가 인용한 알데르트 브리지에 따르면, 거짓말 뒤에는 복합적인 이기적 동기가 도사리고 있다. 그의 심리 실험에서 거짓말의 50퍼센트는 자신을 더 돋보이게 하고 조롱당하지 않으려는 이기적 이유를 깔고 있다. 그리고 25퍼센트는 이타적 이유였는데, 가령 친구가 과음으로 결석했는데도 강사한테 친구가 아프다고 거짓말하는 경우다. 나머지 25퍼센트는 ‘친사회적’ 이유에서다. 머리 모양이나 옷에 대한 칭찬은 흔히 작은 선물과 같은 효과를 발휘한다. 누군가를 속이는 것 자체가 쾌감과 더불어 우월감을 주기도 한다. 이것이 만우절 거짓말이나 몰래 카메라의 인기 비결이다.

‘여자는 기만적인 종족’이라는 악의적인 고정관념에도 불구하고, 이 책에 따르면, 남자와 여자의 거짓말 횟수는 별반 차이가 없다. 다만 남녀 간에는 거짓말의 종류가 다를 뿐이다. 여러 심리학자들은 ‘여자들은 남들을 위해, 남자들은 자기 자신을 위해서 거짓말하는 편이다’는 결론을 내렸다. 진화생물학자들은 이러한 여성의 거짓말이 집단 내에서 공격적 태도와 갈등을 방지하고 안정과 결속을 강화하는 역할을 해 왔다고 주장한다.

인간종의 장구한 역사에서 뿐만 아니라 한 사람의 성장 과정을 통해서도 거짓말은 학습된다. 아이들은 만 네 살 전까지는 거짓말하는 능력을 갖고 있지 않다. 남을 속이려면 타인이 무엇을 알고 기대하는지 알아야 하는데, 어린 아이들은 그러한 전제 조건을 결여하고 있는 탓이다. 저자가 소개한 정신의학자 찰스 포드는 고유의 정체성을 키우고 부모로부터 자신을 구분하기 위해서 거짓말이 아동의 발달과 사춘기 성장에 매우 중요하다고 주장한다. 이 외에도 『거짓말의 딜레마』는 자기기만, 거짓말쟁이들의 술수, 거짓말 탐지기 체험담 등 거짓말에 대해 궁금할 법한 내용들로 채워져 있다. ‘거짓말의 백과사전’같은 이 책의 저자 클라우디아 마이어는 “거짓말은 삶과 인간 존재의 일부이다. 거짓말은 진화의 원동력이고 생존 전략이며 일종의 사회적 윤활제이다”고 말한다.

‘자기정당화의 심리학’이라는 부제가 말해주듯 『거짓말의 진화』는 ‘자기정당화’라는 심리적 갑옷의 형성과 해체에 충실히 초점을 맞추고 있다. 자기 정당화는 흔히 타인을 대상으로 하는 거짓말과 달리 자기 자신을 속이는 것이다. 이를테면, 호텔 기물 파손 사실을 숨기는 짓은 이미 숙박비에 부주의한 고객들로 인한 비용이 포함돼 있으므로대수롭지 않은 일이다. 세금 신고 시 소득 누락 역시 정부의 세금 낭비 형태를 감안할 때 정당한 나의 권리에 속한다.

이러한 자기정당화를 추동하는 엔진, 즉 행위와 결정을 정당화할 필요성을 만드는 에너지는 1957년 미국의 심리학자 레온 페스팅거가 창안한 ‘인지 부조화’라는 불유쾌한 감정이다. “인지 부조화는 ‘나를 죽일 수도 있기 때문에 흡연은 어리석은 짓이다’와 ‘나는 하루 두 갑을 피운다’처럼 상반하는 두 가지 인지 요소(사상, 태도, 신념, 견해)를 가지고 있을 때 발생하는 긴장 상태다 … 사람은 부조화를 해소하기 전에는 자유롭지 못하다. 앞의 예에서, 흡연자가 부조화를 해소하는 가장 직접적인 방법은 흡연이 해롭지 않다, 긴장 이완이나 비만 예방에 도움이 된다 등의 여러 구실을 들어 흡연에 대한 부작용을 감수할 가치가 있다고 자신을 설득하는 것이다.”

이 책에 의하면, 신경 과학자들은 이러한 편향된 사고가 뇌의 정보처리 방식 그 자체에 내장돼 있다고 말한다. 뇌를 핵자기 공명 장치(MRI)로 관찰한 결과, 부조화 정보에 접했을 때는 피험자들 뇌의 추론 영역이 거의 정지돼 있고, 조화가 회복됐을 때에는 뇌의 정서 회로가 환하게 밝혀졌다. 인지 부조화를 해소하려는 자기 정당화는 시간이든 돈이든 노력이든 불편이든 선택에 동반된 비용이 클수록 그리고 결과를 되돌릴 수 있을 가능성이 낮을수록 강력해진다. 큰 거래나 중요한 결정을 앞두고 있을 때, 바로 전에 그와 관련된 선택을 한 사람에게는 조언을 구하지 말라고 저자들은 충고한다. 그는 자신의 결정을 정당화하기 위해 자신의 선택대로 하는 것이 옳다고 당신을 설득할 것이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자기정당화는 ‘확증 편향(confirmation bias)’으로 오만과 편견을 키울 뿐만 아니라 과거의 기억마저 왜곡하고 재구성한다. “기억은 우리 내부에 웅크리고 있는 자기정당화에 종사하는 역사가 노릇을 한다 … 듣고 싶지 않은 정보는 가차 없이 지우고, 여느 파시스트 지도자들처럼 승자의 관점에서 역사를 다시 쓴다.”

추억은 그래서 늘 과도하게 달콤하거나 쓰라린 법이다. 기억은 과거의 자신을 지금의 긍정적 자아상을 위해 미화하기도 하지만 폄하하기도 한다. “그들이 진정 원하는 것은 현재의 모질거나 별 볼일 없는 삶을 역경에 대한 빛나는 승리로 바꾸어 놓는 것이기” 때문이다. 의료·사법 전문가, 정치인, 결혼생활 등 다양한 영역에서의 자기정당화의 분석에 비해 저자들의 대안은 다소 소박한 편이다. 실수를 인정하는 사회적 풍토를 조성하고, 자기정당화에 따른 미래의 폐해를 깨닫고, 인지 부조화와 더불어 사는 법을 배워야 한다는 것이다. 저마다 ‘오늘의 거짓말’을 갖고 산다 해도, 오늘의 날씨와 달리 ‘화창한 거짓말’들을 만들어갈 책임은 여전히 인간의 몫이다.

역사에서 ‘큰 거짓말’들이 영웅을 탄생시키기도 했지만, 독재자들의 공통분모라는 것 또한 증언해 준다. 거짓말이 모듬살이의 조건이자 사회의 윤활유가 되려면 특히 공적 영역에서의 악의적인 기만이나 자기정당화를 정당화해선 안 된다. 이것은 거짓말이 아니다.(김창한 객원기자)

08. 07. 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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