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온이 더 떨어지면 좋겠다고 적은 게 불과 하루 전인데 어제 비가 온 덕분인지 실내온도가 감쪽같이 24도로 내려갔다. 말 그대로 선선한 날씨, 밤에 선풍기를 틀고 자기엔 심지어 추운 날씨가 되었다. 독서하기에는 아주 좋은 쾌적한 날씨라고 해야겠다(독서의 계절을 예고하는 날씨다!).
해서 이젠 독서 삼매경에 빠지면 되겠구나 싶은데, 피로가 복병처럼 숨어 있었다. 눈도 피로하고 머리도 무겁고, 당장 잠자리에 드는 게 낫겠다 싶으니 책은 언제 보는가. 당장 내일 강의준비도 해야 하건만. 준비란 건 다른 게 아니라 <페테르부르크에서 모스크바로의 여행>(1790)의 저자 알렉산드르 라디셰프와 그의 시대에 대한 자료를 읽는 것이다. 라디셰프는 18세기 후반의 대표적인 계몽주의 지식인이자 작가. 그리고 그의 <여행>은 ‘감상적 계몽주의‘의 대표작이다.
18세기 러시아 문화와 사회에 대해서도 읽어 둘 책들이 있는데 유리 로트만의 <러시아 문화에 관한 담론>이 대표적이다. ‘러시아 귀족사회의 일상과 전통‘이 부제. 다루는 시기가 18세기부터 19세기 초까지다. 라디셰프의 <여행>에서 시작해서 푸슈킨과 고골의 역사소설을 읽어나갈 예정이라 이 참에 근대 러시아 문화사로 올랜도 파이지스의 <나타샤 댄스>와 함께 다시 훑어보려고 한다.
문제는 피곤하다는 것. 흠, 이광수의 <무정>에 대해서도 내일 저녁에 강의가 있어서 자료를 더 보려고 하지만(올해만 하더라도 수차례 강의한 작품이긴 하다), 그보다 다급한 일들에 덧붙여 피로감이 전의를 상실케 한다. 비유컨대 러시아 원정길에서 패퇴하는 나폴레옹 군대의 신세랄까(스탕달은 그런 와중에도 매일 면도를 했다지). 그들에겐 발걸음이 무거웠다면 나는 눈꺼풀이 무겁다.
여건상 독서 대신에 계몽적 지식인으로서 18세기 러시아의 전제정 시대를 살아야 했던 라디셰프는 얼마나 마음이 무거웠을까를 상상하는 걸로 오늘의 일과를 마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