붉은잎 단풍꽃



  봄에 푸른잎인 단풍나무하고 붉은잎은 단풍나무가 나란히 있다. 푸른잎 단풍꽃을 하염없이 바라보다가 문득 붉은잎 단풍꽃을 바라보는데, 아 하는 소리가 절로 터져나온다. 붉은 물결을 이루는 잎사귀 사이에 살그마니 고개를 내민 단풍꽃이 이토록 고우면서 예쁠 줄이야. 갓 돋은 잎사귀와 앙증맞게 한들거리는 꽃송이는 더할 나위 없이 살뜰히 어울린다. 붉은잎이 붉은 내음을 퍼뜨린다. 붉은 노래를 부른다. 붉은 이야기를 속삭인다. 두 팔을 벌려 붉은 사랑을 흠뻑 얻는다. 4347.4.23.물.ㅎㄲㅅㄱ


(최종규 . 2014 - 꽃과 책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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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른잎 단풍꽃



  단풍나무라서 처음부터 붉은잎이지 않다. 갓 돋는 잎이 붉은잎인 단풍나무가 있고, 갓 돋을 적에는 푸른잎인 단풍나무가 있다. 단풍나무는 사월에 꽃이 핀다. 사월에 꽃이 피고 오월에 열매를 맺는다. 단풍열매는 팔랑개비처럼 빙글빙글 돌며 떨어진다. 단풍열매는 아이들이 즐겁게 갖고 노는 장난감 노릇도 한다.


  푸르게 우거진 단풍잎 사이사이 조그맣게 피어난 단풍꽃을 올려다본다. 높이 자란 단풍나무에 피어나는 꽃은 얼마나 많을까. 얼마나 많은 열매가 떨어지거나 바람에 날리면서 둘레에 단풍씨를 퍼뜨릴까.


  바람이 이리 불며 쏴아 하고, 바람이 저리 불며 싸라락 한다. 조그마한 단풍꽃마다 벌이 모여든다. 대단히 많이 모인다. 나뭇잎과 꽃송이 흔들리는 소리와 벌이 날갯짓하는 소리가 섞인다. 무르익는 사월빛이 사월노래가 되어 흐른다. 4347.4.23.물.ㅎㄲㅅㄱ


(최종규 . 2014 - 꽃과 책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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뺨에 서쪽을 빛내다 창비시선 317
장석남 지음 / 창비 / 201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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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를 말하는 시 54



시와 무게

― 뺨에 서쪽을 빛내다

 장석남 글

 창비 펴냄, 2010.8.20.



  이 나라는 재미있습니다. 저마다 재미있게 살아가니 재미있습니다. 재미없구나 싶어 쓸쓸한 사람이 있으면, 어김없이 이런 사람들한테 재미보따리를 안기는 이들이 있습니다. 이를테면, 2000년대에 버스삯이 50원쯤 하는가 하고 읊는 분이 있습니다. 이를테면, 달세로 이천만 원을 내면서 가난한 살림이라고 읊는 분이 있습니다. 이를테면, 옥탑방도 반지하도 어떻게 생긴 줄 모르고 이런 이름은 처음 들었다는 분이 있습니다. 이를테면, 배고파서 북녘을 떠난 이들을 두고 밥이 없으면 라면을 끓여먹으면 되지 않느냐고 말하는 분이 있습니다.



.. 말린 고사리 두어 뭉치 더 담아서 / 이름난 백화점 봉지에 넣어서 / 사랑스런 분에게 주었다 치자 / 또 받았다 치자 ..  (말린 고사리)



  나도 잘 모르는 일이 많습니다. 나도 잘 몰라서 잘못하는 일이 많습니다. 나는 자동차를 몰 줄 모르고, 자동차 이름을 볼 줄 모릅니다. 손전화 기계를 쓰지만 손전화로 무엇을 할 수 있는지 모르며, 비밀번호 단추를 눌러 들어가는 아파트에 놀러갈 적에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모릅니다.


  그래도 이것저것 겪으며 재미있다고 느낍니다. 이를테면, 2004년이었는데 국립국어원에서 한글문화학교 강사를 맡은 적이 있습니다. 첫날에는 양복을 입고 강의를 갔다가 아무래도 내 삶하고 도무지 안 맞는다 싶어 이튿날부터는 내 여느 차림새대로 반바지에 민소매옷을 입고 자전거를 몰고 갔습니다. 양복을 입고 국립국어원 건물을 들어가니 척 거수경례를 합니다. 왜 왔느냐고 묻지도 않습니다. 반바지에 민소매에 자전거를 끌고 들어가니 문간에서 붙잡고 밖으로 잡아끕니다. 왜 왔느냐고 묻지 않기는 똑같으나, 사람을 ‘미친놈’으로 다룹니다. 이윽고 내가 그곳에 ‘우리 말 강의’를 하는 사람인 줄 깨닫고는 미안하다며 굽신굽신합니다.


  방송국에서도 이런 일을 치른 적이 있습니다. 어느 방송국에 일이 있어 그때에도 늘 내 차림새대로 반바지에 민소매에 자전거에 고무신을 꿰고 갔더니 건물 지킴이가 붙잡습니다. 방송국 일꾼이 승강기를 타고 문간으로 마중을 나오고서야 비로소 건물로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 아버지의 사진틀을 갈았다 / 수염을 깎은 듯 미소도 조금 바뀌었다 / 이발소를 데리고 가던 아버지의 손가락 마디가 두엇 없던 손을 생각한다 / 언 몸을 금세 녹여주던 이발소의 연탄난로도 생각한다 ..  (입춘)



  우리 식구는 시골에서 살아갑니다. 도시를 떠나 시골에서 지냅니다. 그런데 시골에서도 고무신 차림새는 눈길을 받습니다. 마을에서 흙일을 하는 할매와 할배가 아니라면 아무도 고무신을 발에 꿰지 않습니다. 마을 할매와 할배도 면소재지나 읍내로 볼일 보러 갈 적에는 아주 말끔하게 차려입습니다. 할배는 까만 구두를 신습니다. 할매도 고운 차림새로 꾸밉니다. 마을에서 여느 때에 마주치던 모습이 아니기에, 군내버스나 읍내에서 마주쳐도 한동안 누구인지 못 알아보곤 합니다. 시골 읍내 저잣마실을 가면, 외려 나더러 ‘그 고무신 어디서 샀느냐?’고 묻기까지 합니다.


  그러고 보니, 고흥 읍내에 지난주에 새 옷집이 커다랗게 문을 열었습니다. 달포쯤 앞서도 커다란 옷집이 문을 열었어요. 지난해에도 커다란 옷집이 자그마치 3층 건물로 새로 열었습니다. 옷집들이 이 두멧시골에 어떻게 새로 문을 열까 아리송하지만, 시골 어르신이든 시골 젊은이이든 시골 어린이이든, 상표가 붙은 비싼 옷을 아무렇지 않게 척척 장만해서 입는구나 싶어요.



.. 마른 빨래는 방안으로 던지고 / 덜 마른 빨래들을 처마 아래 건다 ..  (처서)



  장석남 님 시집 《뺨에 서쪽을 빛내다》(창비,2010)를 읽습니다. 뺨에 서녘을 빛낸다니 무슨 말인가 궁금합니다. 동녘이나 남녘은 안 빛낼는지 궁금합니다. 무언가 깊은 뜻을 담고 쓴 말이지 싶지만, 나는 잘 모르겠습니다. 무게 있게 들려주는 시요 노래일 텐데, 나는 잘 모르겠습니다.


  빨래를 마당에 널어 말리면 잘 마릅니다. 빨래는 햇볕과 바람을 먹으며 곧 마릅니다. 한여름에는 십 분이나 이십 분만에 보송보송 마르기까지 합니다. 한여름에 빨래가 다 말랐어도 부러 한참 그대로 두며 뒤집습니다. 구석구석 오래오래 햇볕을 머금으면서 좋은 냄새가 감돌기를 바랍니다. 그래, 나는 빨래는 좀 압니다. 두 손으로 복복 비비고 헹구어 탁탁 털어 눈부신 햇볕을 쬐며 빨랫줄에 너는 빨래는 좀 압니다. 큰아이를 낳고서 세이레를 치를 적까지 날마다 기저귀를 쉰넉 장씩 빨았고, 백일이 될 무렵에는 마흔두 장씩 빨았으며, 돌이 될 무렵에는 스물넉 장씩 빨았습니다. 기저귀 빨래는 눈을 감고도 할 수 있습니다. 똥이 묻은 기저귀이든 오줌만 묻은 기저귀이든 똑같습니다. 졸려서 두 눈이 감기더라도 밤똥을 눈 아기를 품에 살며시 안고 잠을 안 깨우면서 밑을 씻겨 다시 기저귀를 채워서 눕힐 수 있습니다. 아이들을 재우느라 두어 시간쯤 자장노래를 부를 수 있고, 아이를 업거나 안으며 너덧 시간을 걸을 수 있습니다. 깜깜한 밤에도 쌀을 씻어 불릴 수 있고 밥물을 맞춰 밥을 지을 수 있습니다. 불을 안 켜도 기저귀를 갈거나 아이들 옷을 갈아입힐 수 있습니다. 눈을 감고도 옷을 갤 수 있고, 아이들 이불깃을 여밀 수 있습니다.


  참말, 누구나 살아가는 대로 시를 씁니다. 참으로, 누구나 살아가는 대로 시를 읽습니다. 즐겁게 살아가며 즐겁게 노래합니다. 기쁘게 살아가며 기쁘게 춤춥니다. 슬프게 살아가며 슬프게 이야기합니다. 아프게 살아가며 아프게 글을 씁니다.


  무게란 무엇일까요. 삶은 어떤 무게일까요. 시 한 줄 무게는 얼마나 될까요. 시집 한 권은 어떤 무게를 담을까요. 장석남 님은 장석남 님대로 아름다운 삶빛과 삶노래를 고운 가락에 실어 즐겁게 불렀으리라 생각합니다. 4347.4.22.불.ㅎㄲㅅㄱ


(최종규 . 2014 - 시골에서 시집 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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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방 앞에는 나무가 있다



  나무가 한 그루 천천히 자라 이윽고 우람하게 선 곳에 있는 책방에 마실을 가면 즐겁다. 나무를 보면서 즐겁고, 이렇게 굵는 나무를 베어 종이책을 묶는구나 하고 느끼니 고마우면서 즐겁다. 책을 어루만지는 손으로 나무를 어루만진다. 나무를 쓰다듬는 손으로 책을 쓰다듬는다.


  은행나무로 책을 만들 수 있을까. 잣나무나 소나무로 책을 빚을 수 있을까. 감나무도 탱자나무나 복숭아나무로 책을 엮을 수 있을까. 모를 노릇이다. 아무튼, 나무가 있기에 우리들이 숨을 쉰다. 나무가 있기에 집을 짓는다. 나무가 있기에 책걸상과 옷장을 짠다. 나무가 있기에 불을 때어 밥을 짓는다. 나무가 있기에 연필을 깎고 글을 쓰며 그림을 그린다.


  그런데, 나무가 제 대접을 못 받는다. 나무가 자랄 숲을 함부로 밀거나 없앤다. 나무가 드리울 숲에 골프장이나 발전소나 고속도로나 관광단지를 자꾸 때려짓는 사람들이다. 책을 안 읽으니 나무를 아낄 줄 모를까. 책을 읽으면서도 나무를 사랑할 줄 모를까. 대학생이 늘어나지만 숲은 늘어나지 못한다. 배운 이는 늘지만 숲내음을 맡는 이는 늘지 않는다. 책은 새로 태어나지만 숲은 새로 빛나지 못한다.


  책방 앞에는 나무가 있어 밝고 환하다. 살림집 앞에는 나무가 있어 시원하고 싱그럽다. 마을 앞에는 나무가 있어 푸르고 아름답다. 나무가 있으면서 따사로운 빛이 흐른다. 나무가 자랄 때에 두레와 품앗이와 울력으로 어깨동무를 한다. 나무를 바라보는 눈빛으로 책을 읽는다. 나무를 가꾸는 손길로 글을 쓴다. 4347.4.22.불.ㅎㄲㅅㄱ


(최종규 . 2014 - 책 언저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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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방에 있는 컴퓨터



  책을 읽는 사람은 책이 그득한 곳에 셈틀을 놓는다. 책방에서도 책이 가득 쌓인 한켠에 셈틀을 둔다. 책방에서 책은 받침대 구실을 한다. 우리 집에서도 모니터를 책을 두 권 놓아 받친다. 때때로 책은 다람쥐 받침판 노릇을 하고, 마실을 다닐 적에는 작은 노트북을 작은 책 두 권을 엇갈려서 받침대로 삼는다.


  인터넷은 얼마나 많은 지식이나 정보를 들려줄 수 있을까. 인터넷을 켜는 셈틀은 얼마나 너른 곳까지 골골샅샅 돌아다니도록 길을 열어 줄까. 책에는 어떤 지식이나 정보가 있을까. 책을 펼치는 사람은 책에서 어떤 길을 느끼거나 배우거나 깨달을까.


  셈틀을 켜는 만큼 책을 덜 읽거나 못 읽는다. 셈틀을 끄는 만큼 책을 더 읽거나 잘 읽는다. 책을 덮는 만큼 삶을 더 읽거나 잘 누린다. 책을 읽는 만큼 밭을 못 일구고 마실을 못 다닌다. 셈틀과 책과 삶은 서로 얼마나 이어졌을까. 셈틀과 책과 삶은 서로 어떻게 어깨동무를 할까. 4347.4.22.불.ㅎㄲㅅㄱ


(최종규 . 2014 - 헌책방 언저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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