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풍기와 에어컨


 더운 여름날, 무척 덥게 지내야 하는 일산집에 온다. 옆지기 어버이와 식구들은 이곳 찜통 같은 곳에서 더위는 더위대로 고스란히 맞아들이면서 살아간다. 아직 다 옮기지 못해 남아 있는 인천 배다리 도서관 자리에서 잠을 잘 때에도 참 덥다고 느끼지만 일산집만 하지는 않다. 충주 산골마을 시골집에서 보내는 하루란 얼마나 시원한가. 생각해 보면, 우리 식구는 인천에서 지낼 때에 선풍기를 써 본 일이 없다. 나는 혼자 살던 때에도 선풍기를 쓰지 않았다. 마땅한 소리인데 충주 산골마을 살림집에도 선풍기는 없다. 정 더우면 부채질을 한다. 가만히 있어도 땀이 줄줄 흐르는 날씨일 때라 할지라도 땀을 쪽 빼고 찬물로 멱을 감으며 여름을 보내고 있다. 이렇게 지내는 가운데 볼일 때문에 새삼스레 도시로 나오며 전철을 타거나 버스를 탈 때면 잔뜩 틀어놓은 에어컨 바람을 쐰다. 가게마다 내내 틀어대는 에어컨 바람을 맞는다. 식구들이 함께 움직이다 보면, 아이와 아이 어머니가 몹시 고단하다. 아이 아버지 또한 고단하지만 아이만큼 고단할 수 없다. 아이 아버지도 코피를 쏟을랑 말랑인데 아이가 으레 코피를 쏟는다. 아이가 먼저 코피를 쏟으면 식구들이 좀더 빨리 쉬고 더욱 오래 쉬곤 한다. 아이는 틀림없이 고단하기 때문에 코피가 터지는데, 아이 어머니 이야기를 들으면서 ‘도시에 나오면 어디로 어떻게 움직이든 에어컨 바람이 너무 세니까’ 이 때문에 아이한테 좋을 일이 없다고 느낀다. 게다가 도시 바람은 시골 바람하고 견주면 얼마나 안 좋은가.

 그렇지만 도시에서는 선풍기나 에어컨을 안 쓸 수 없다. 도시가 되니까. 상큼하거나 맑은 바람이란 없으니까. 시원하거나 깨끗한 물이란 없으니까. 도시에서 흐르는 수도물은 시원하지 않고 땀을 씻어 주지 못하니까. 도시에서 부는 바람은 한동안은 땀을 식히는 듯하지만 가게와 집과 일터마다 틀어놓는 에어컨이 내뿜는 뜨거움 때문에 다시금 흐르는 땀을 어찌하지 못하니까.

 이런 도시에서만 지내고 있으면 아무래도 물질과 기계와 자동차를 안 쓸 수 없다. 이런 도시에서 돈을 벌며 살아가고 있다면 참말 돈이랑 주식이랑 투자랑 스포츠에 눈을 안 둘 수 없겠다. 스스로 기쁘게 받아들이며 고이 나눌 수 있는 길하고 자꾸자꾸 동떨어지고야 마는 도시 살림살이임을 거듭 깨닫는다. 마음을 살찌우거나 넋을 북돋우거나 얼을 일군다는 고운 책 하나 곁에 둘 수 없는 도시 터전임을 또렷하게 되뇐다. 갖가지 즐길거리 누릴거리 볼거리 먹을거리 넘치는 도시인데, 이도 저도 다 넘친다지만, 따순 사랑과 너른 믿음을 나눌 수 있는 맑고 밝은 숨결과 손길이란 어디에 있을까. (4343.8.16.달.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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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계집, 살림꾼


 사내들이 식구를 벌어 먹여야 한다며 밖에 나와 돈을 번다고 이야기하는데, 모두 말짱 거짓말입니다. 식구를 먹여살리는 사람은 집에서 살림하는 일꾼입니다. 사내들이 밖에 나가서 돈을 많이 벌든 적게 벌든 못 벌든 안 벌든, 집살림꾼인 계집들은 늘 식구를 모두 다 먹여살립니다. 돈을 번다는 사내한테까지든, 돈을 못 번다는 사내한테까지든, 집살림을 하는 계집은 누구나 먹여살립니다. 가난하여 배고픈 집에 찾아온 손님마저 먹여살리는 살림꾼 계집입니다. (4343.7.27.불.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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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발씻김


 다음달에 두 돌을 맞이할 딸아이가 제 아빠 발에 물을 묻힌 다음 비누를 바르고 다시 물을 뿌려 씻어 준다. 아빠랑 엄마가 갈마들며 아이를 씻기곤 하지만, 으레 아빠가 아이를 훨씬 자주 씻어 주고 있는데, 아빠 발을 아이가 씻어 주기는 오늘이 처음. 이야기를 들어 보니 엄마 발이라든지 할머니 발은 일찌감치 씻어 주었다고. 이런 우리 아이를 바라보면서, 아이 앞에서 어른들이 무엇을 하고 무슨 일을 하며 무슨 말을 늘어놓는데다가 어떤 사람을 사귀고 어떤 물건을 쓰는 가운데 어떤 매무새로 어느 곳에서 살아가는가를 제대로 따지거나 살피거나 다스리거나 곧추세우지 않는다면, 우리들 누구나 ‘어른’이 될 수 없을 뿐더러, 이 나라를 쉬 망가뜨리고 말겠다고 느낀다. 책은 한 권조차 없어도 되고, 책은 한 줄이든 열 줄이든 안 읽어도 된다. 학교는 꼭 하루뿐이어도 안 다녀도 그만이고, 학교란 곳은 아예 만들지 않아도 된다. 아이한테는 어버이와 이웃과 동무 모두 스승이다. 아이한테는 제 살림집과 마을과 골목이 바로 배움터이다. (4343.7.20.불.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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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imssim 2010-07-20 15:00   좋아요 0 | URL
뒤집어 말하면 아이도 우리 어른들의 스승이지요.
저의 그 시절을 다시 한 번 되돌아봅니다.

숲노래 2010-07-20 15:38   좋아요 0 | URL
서로서로 가르치고 배운다고 할 수 있는데,
아이랑 함께 살아가면서
그예 서로 좋은 동무로 지내며
즐겁구나 싶답니다...
 


 생협과 아줌마


 우리 나라에서 스스로 진보라 하는 분들하고 보수라 외치는 분들을 곰곰이 살펴보면, 생협에 다니지 않을 뿐더러 생협을 알고자 힘쓰지 않는데다가 생협 같은 모임을 느끼지조차 않기 일쑤입니다. 그렇다고 진보인 분들 스스로 농사를 짓는다든지, 보수인 분들 스스로 시골에 터를 마련해 조용히 농사짓기를 즐긴다든지 하지 않습니다. 오로지 아줌마들만이 왼날개나 오른날개 아닌 여느 수수한 살림꾼으로서 생협에 다니고 있습니다. (4343.7.20.불.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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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삶을 보는 눈과 사진을 담는 손
 [잘 읽히기 기다리는 사진책 6]  
Erika Stone(사진)+Merle Good(글),  《Nicole visits an Amish farm》(Walker & com,1982)


 고추밭에서 고추를 딸 때에는 긴소매에 긴바지를 입어야 합니다. 한여름이라고 반바지나 끌신 차림으로 고추를 딸 수 없습니다. 담배밭에서 담배잎을 딸 때에도 매한가지입니다. 그렇지만 이러한 이야기를 글로 적어 놓은 책은 없습니다. 이러한 이야기를 글로 쓰고자 하는 사람 또한 없습니다. 이러한 이야기를 사진과 그림으로 옳게 담는 사람은 더더욱 없습니다. 농사를 짓는 이름난 그림쟁이 한 분이 곡괭이질하는 모습을 그린 그림을 보고 씁쓸하게 웃은 적이 있습니다. 이분은 틀림없이 삽질과 곡괭이질을 알지만 ‘곡괭이자루를 쥐고 내리찍는 모습’을 엉터리로 그렸습니다. 곡괭이질을 하는 느낌, 영어로 말하자면 ‘이미지 보여주기’에만 마음을 쏟았을 뿐, 곡괭이질을 할 때에 두 손으로 자루 어디를 잡고 어떻게 내리찍는가를 옳게 보여주지 못했습니다. 오늘날 자전거 타는 글쟁이와 그림쟁이와 사진쟁이는 꽤 늘었습니다. 그러나 자전거 그림이 옳은지 그른지를 제대로 알아차리는 글쟁이나 그림쟁이나 사진쟁이는 대단히 드뭅니다. 아주 쉬운 보기로, 자전거 체인이 어느 쪽에 달려 있는가라든지 페달이 붙는 자리라든지 손잡이와 앞바퀴가 어떻게 이어져 있으며 안장과 뒷바퀴는 어떻게 맞닿아 있는가를 올바로 그릴 줄 아는 그림쟁이란 드물고, 올바르지 않은 그림을 깨닫는 지식인은 몇 안 됩니다.

 콩을 좋아하든 싫어하든, 콩을 먹는 사람 가운데 콩을 심어 김을 매거나 콩꽃 어여쁜 하얀 꽃잎을 쓰다듬어 본 사람은 몹시 드뭅니다. 감자를 즐겨먹든 안 먹든, 감자를 먹는 사람 가운데 감자꽃이 무슨 빛이요 꽃잎이 몇 장인지를 아는 사람은 매우 드뭅니다. 배를 먹으면서 배꽃이 하얀지 노란지 헤아리거나, 능금을 즐기면서 능금꽃이 붉은지 불그스름한지 아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귤나무에 귤꽃이 피는지 생각하거나 대추나무에 대추꽃이 피는지 돌아보는 사람은 아예 없다고 해도 틀리지 않습니다. 지식은 넘치고 대학교 다닌 사람은 넘실거리지만, 정작 우리 삶자락 밑바탕을 둘러싼 지식을 보듬으며 껴안는 사람은 나날이 줄어듭니다.

 우리들은 밥을 잘 할 줄 모르거나 밥을 아예 할 줄 모르면서도 밥을 얻어 먹을 수 있습니다. 돈을 치러서 밥을 사다 먹을 수 있습니다. 농사를 짓고 물레를 잣고 길쌈을 한 다음 베틀을 밟고 나서 바느질을 거쳐 옷 한 벌 지을 줄 모를 뿐 아니라, 이렇게 하는 흐름을 하나조차 모르면서 옷 한 벌 예쁘장하게 사서 입을 줄은 압니다. 어쩌면, 이제는 옷 한 벌 사서 입는 값이 훨씬 싸며 품이 거의 안 들기 때문에 옷이란 돈 주고 사서 입으면 그만인 삶자락이라 할 만합니다.

 보도사진이든 다큐사진이든 상업사진이든 초상사진이든 풍경사진이든 만듦사진이든 사진은 사진입니다. 갈래가 다를 뿐 사진은 사진입니다. 사진은 사람이 찍어서 이루는 문화요, 사진은 사람과 사람이 어우러지며 즐기는 예술입니다. 사람 사이에서 태어나 사람 사이에서 부대끼는 삶이 사진입니다.

 일본사람 야나기 무네요시 님이 《조선을 생각한다》 같은 책을 쓸 수 있던 까닭은 당신 스스로 ‘조선 삶’을 ‘당신 삶’으로 맞아들이며 어깨동무했기 때문입니다. 당신이 잘나거나 똑똑해서가 아닙니다. 당신 뜻이 거룩하거나 훌륭해서가 아닙니다.

 미국사람 허먼 멜빌 님이 《모비딕》 같은 책을 쓸 수 있던 까닭은 당신 스스로 ‘고래잡이 삶’을 ‘당신 삶’으로 받아들이며 껴안았기 때문입니다. 당신이 용케 살아남았거나 굳센 고기잡이라서가 아닙니다. 당신 눈이 남다르거나 그윽해서가 아닙니다.

 이오덕 님이 《일하는 아이들》 같은 책을 엮을 수 있던 까닭은 당신 스스로 ‘어린이 삶’을 ‘당신 삶’으로 안아들이며 웃고 울었기 때문입니다. 당신이 뛰어나거나 교육자 얼이 단단해서가 아닙니다. 당신 마음이 더 따뜻하거나 훨씬 너그러워서가 아닙니다.

 사진책 《Nicole visits an Amish farm》을 펼치면서 생각합니다. 까망둥이 니콜(Nicole)이라는 계집아이가 하양둥이 채리티(Charity)라는 계집아이를 만나서 보낸 보름에 걸친 나날을 담은 이 작은 사진책에는 그리 넉넉하지 않은 살림으로 살아가는 니콜이라는 ‘까망둥이 아이’가 1970∼80년대에 오로지 하양둥이만 살아가고 있는 ‘아미쉬 마을’에 들어가서 부대낀 삶을 보여주는데, 이토록 따뜻하고 살가운 이야기로 엮을 수 있나 싶어 놀랍니다. 그러나 이 사진책을 들여다볼 사람들 가운데 《단순하고 소박한 삶》이나 《아미쉬》 같은 책이나마 읽었을 사람은 거의 없을 테며, 《Nicole visits an Amish farm》 같은 사진책을 알아볼 한국사람부터 거의 없습니다. ‘아미쉬’가 무엇인지를 생각할 사람조차 드물고, 이 사진책에 나오는 아이들이 왜 거의 언제나 맨발인 모습일는지를 알아챌 사람이란 없을 테며, 우리로 치면 초등학교 낮은학년일 아이들이 밥하기이며 빨래이며 농사일이며 숱한 집일을 함께하는 삶에 어떤 뜻이 깃들어 있는가를 읽을 사람이란 없으리라 봅니다. 더욱이, 아미쉬 사람들은 무늬없는 투박한 긴소매와 긴치마를 입으나 니콜이라는 계집아이는 목덜미 드러나는 온갖 빛깔 밝은 민소매 웃도리에 무릎 위로 올라가는 치마를 입는데, 아미쉬 사람들은 아무렇지 않게 생각합니다.

 볼 줄 모르면 찍을 줄 모른다지만, 살 줄 모르니 볼 줄 모릅니다. 살 줄을 모르니 무엇을 어떻게 왜 언제 누구하고 찍어야 하는 줄 모릅니다. 보도사진이든 다큐사진이든 상업사진이든 초상사진이든 풍경사진이든 만듦사진이든 사진을 하는 사람이라면 볼 줄 알아야 하는데, 볼 줄 알자면 살 줄 알아야 하고, 살 줄 알자면 스스로 뿌리내리어 녹아든 매무새이자 마음밭이어야 합니다. (4343.6.7.달.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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