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픈 사람과 사랑하며 꾸리는 삶
― 미우라 아야코, 《부부 이야기, 결혼을 앞둔 여성에게》



- 책이름 : 부부 이야기, 결혼을 앞둔 여성에게
- 글 : 미우라 아야코
- 옮긴이 : 조순복
- 펴낸곳 : 부림출판사 (1984.9.20.)



 “결혼이라는 것은 경제적으로 자립하고, 정신적으로도 독립하는 것이라구요(160쪽).” 하고 말하는 미우라 아야코 님은 “사람의 일생의 중요함을 알고 있다면, 우리들 자신은 내 스스로가 어떤 노인에 대해서도 적어도 ‘고생이 많으십니다.’ 하고 머리를 숙일 정도의 겸허함이 있어야 되지 않을까(165쪽)?” 하고도 말합니다. 어떤 ‘늙은 사람’한테도 고개를 숙일 줄 알아야 한다는 대목에서 오래도록 곰곰이 생각에 잠깁니다. 그렇다면 전두환 같은 사람한테마저 고개를 숙일 줄 알아야 한다는 소리인가?

 도무지 말이 안 되는 말이 아닌가 하고 되뇌어 보지만, 틀린 말이 되지는 않는다고 느껴 이 말마디를 거스를 수 없습니다. 선뜻 받아들이기 어렵지만, 섣불리 도리질하기는 어렵다고 느낍니다.

 다만, “전두환 할아버지, 이제부터라도 좋으니 착하며 아름답게 할아버지 삶을 마무리해 보셔요. 그동안 했던 일을 돌이킬 수야 없으나, 오늘부터라도 착한 넋으로 착한 일을 하나둘 쌓아 보셔요.” 하고 말하면서 불쌍하고 슬픈 이녁 삶을 토닥일 때에 비로소 사람을 사랑하는 길이 아닌가 하고 생각합니다. 이 땅 이 나라 이 겨레에서는 힘들는지 모르나, 전두환 같은 사람이 이녁을 하나도 모르는 멧골마을이나 시골마을에서 홀로 길을 헤매며 굶주렸다고 떠올린다면, 멧골마을 사람들이나 시골마을 사람들은 아주 스스럼없이 밥을 차려 주고 옷을 입혀 주며 잠을 재워 주리라 봅니다. 우리 집에서 스물아홉 달째 함께 살아가는 딸아이는 전두환 같은 사람을 보면서도 “아야버지(할아버지)!” 하고 외치며 달려들 듯합니다.


.. 분명히 병은 고통스럽다. 그 기분도 우리들은 이해할 수 있다. 또 대학시험에 실패하여 자살하는 사건은 매해 봄이면, 흔히 신문지상에서 보는 바다. 그러나, 우리들의 일생에 그러한 고통이나 슬픔은 정말 전혀 없는 편이 좋을까? 특히 결혼한 이래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만일, 미우라(남편)만이 가난과 병고를 경험하고, 나에게는 아무런 고통이 없었다면, 우리 부부의 나날의 생활은 전혀 다른 모습으로 바뀌어 있을 게 아니겠는가? ..  (32쪽)


 아픈 몸으로 아프게 살아온 미우라 아야코 님이 쓴 《부부 이야기》를 읽으며 우리 집 부부살이를 곱씹습니다. 틀림없이 괴롭고 힘들게 몸앓이와 마음앓이를 하는 옆지기와 살아가는데, 나와 내 옆지기가 서로 바뀐 삶이었으면 어떠했을까 궁금합니다. 나는 몸과 마음이 몽땅 아파서 아무것도 못할 뿐더러 그냥 퍼질러 있는다든지 꼼짝을 못한다면, 설거지이고 빨래이고 하지 못하는 몸이라면, 이러면서 병돌봄까지 받아야 한다면, 이때에 내 옆지기는 어떠한 삶 어떠한 넋일까 궁금하고, 모든 돌봄을 받기만 해야 할 내 삶은 어떠할까 궁금합니다.

 으레 ‘주는 사랑’을 이야기하곤 하는데, 주는 사랑이 제아무리 크다 한들 ‘받는 사랑’만 할 수 없습니다. 받는 가슴이 있기에 주는 가슴이 있습니다. 받아들이는 삶이 있기에 나누는 삶이 있어요.

 남녘땅 사람들은 북녘에 퍼주기를 한다고들 투덜대는데, 남녘땅 사람들은 북녘에 돈을 보낼 수 있는 대목을 고마워 할 줄 알아야 합니다. 가난하거나 굶주리는 북녘을 불쌍히 여겨 돈이나 곡식을 보내지 않습니다. 북녘에서 받아들여 주니 비로소 나눔을 즐길 수 있습니다. 몸져누운 어버이한테 사랑을 퍼주지 않을 딸아들이 있으려나요. 길 잃고 헤매는 딸아들을 내팽개칠 어버이가 있으려나요. 바보스레 나뒹구는 벗님을 모른 척하거나 등돌릴 수 있나요.

 하루하루 지쳐 쓰러지듯 자리에 눕고, 새벽에 가까스로 깨어나 일손을 잡으며, 아침 일찍부터 밥하고 빨래하며 아이 돌보는 나날로 눈코 뜰 사이 없을 뿐더러, 다 마른 빨래를 갤 겨를을 제대로 내지도 못하는 삶을 하루하루 꾸리면서 《부부 이야기》를 새삼스레 읽습니다. 아파 보지 않고서는 읽기 어려운 책인데, 아파 보았거나 아프면서도 이 책을 읽어내지 못하는 사람이 많고, 아프지 않으면서 읽어내는 사람 드물게 있는데, 아프지 않은 사람들은 미우라 아야코 님 《부부 이야기》를 눈여겨보지 않으리라 봅니다. 슬프지만, 아프지 않으니까 돈을 더 많이 벌어들여 신나게 놀아나는 데에 눈길을 쏟는 오늘날 도시사람들이 아니랴 싶어요. (4343.12.23.나무.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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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들을 사랑할 어른들 삶을 생각해
― 이오덕, 《이 땅에 살아갈 아이들 위해》



- 책이름 : 이 땅에 살아갈 아이들 위해
- 글 : 이오덕
- 펴낸곳 : 지식산업사 (1986.2.25.)


 얼마 앞서 흙으로 돌아간 리영희 님을 비롯해, 앞서 흙으로 돌아간 권정생 님, 전우익 님, 이오덕 님, 성래운 님 같은 어르신들은 입으로 떠들던 사람이 아닙니다. 하나같이 몸으로 살아간 사람입니다. 이분들이 우리한테 선물처럼 남기고 간 책이란 이분들이 몸부림치며 살아온 발자국이 담긴 땀방울입니다. 머리로 떠올리거나 헤아리며 엮은 앎조각이 아닙니다.


.. 이른 봄 시장에 가면 냉이와 씀바귀를 살 수 있다. 그러나 될 수 있으면 아이들과 함께 들에 나가 그것들을 캐면서, 또 죽을 끓여 먹으면서 봄날의 산과 들에 피어나는 풀이름 몇 가지라도 알리도록 하자. 이것이 이 땅에 태어나서 이 땅에 살아갈 아이를 둔 부모의 할 일이다. 그리고 도시에서 아무리 바쁘더라도 봄날에 한 번쯤은 (관광놀이 가는 것이 아니라) 진달래가 만발한 산을 찾아가, 이것이 조국의 강산이란 것을 몸으로 느끼게 하자. 절대로 꽃을 꺾어다 꽃병에 꽂는 따위 철없는 짓을 하게 해서는 안 된다 ..  (115∼116쪽)


 사람들이 책을 잘 읽어 주면 얼마나 좋으랴 하고 생각합니다만, 책을 잘 읽자면 삶을 먼저 잘 읽어야 합니다. 삶을 먼저 잘 읽는 사람이라면 당신 삶을 알뜰히 꾸리기 마련입니다. 곧, 내 삶을 알뜰히 꾸리는 사람이라면 으레 내 삶을 잘 읽기 마련이요, 내 삶을 잘 읽는 사람이라면 책을 잘 헤아려 주기 마련입니다.

 주머니에 돈이 많아 ‘참 좋다고 하는 책’을 잔뜩 사들인달지라도, 스스로 삶을 알뜰히 꾸리지 못한다면, 애써 사들인 ‘참 좋다고 하는 책’마다 무엇을 말하거나 밝히며 보이는가를 깨닫지 못합니다. 더러 알아챈다고는 하나 머리속에 가두는 앎조각으로 그칠 뿐, 막상 이 이야기들을 내 삶으로 받아들이거나 삭이지 못합니다.

 삶으로 삭일 때에 책이고 앎입니다. 삶으로 녹일 때에 책이며 앎입니다. 삶으로 태어나는 책이자 삶입니다. 이 땅에 살아갈 아이들 생각하여 내놓은 책 하나는 이 땅에 살아갈 어른들 헤아리며 내놓은 책입니다. 이 땅에 살아갈 아이들하고 이 땅에 살아갈 어른들은 살가운 벗이 되어야 하고, 서로를 아끼는 고운 동무가 되어야 합니다. (4343.12.14.불.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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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버이 성을 둘 다 쓴다고 평등이 아니지만
― 오숙희, 《내가 만난 여자 그리고 남자》


- 책이름 : 내가 만난 여자 그리고 남자
- 글 : 오숙희
- 펴낸곳 : 그린비 (1991.4.30.)



 오숙희 님은 이제 오한숙희 님입니다. 아직 오숙희 님이던 1991년에 내놓은 《내가 만난 여자 그리고 남자》는 당신이 대학교에서 한창 여성학을 강의하던 서른 안팎 나이 이야기를 소록소록 담습니다. 스물을 갓 넘은 풋풋한 젊은이하고 마주한 첫 자리에서 오숙희 님은 큰 벽이 부딪혔다고 말합니다. “강의 처음부터 나는 뜻밖의 벽에 부딪혔다. 학생들의 상당수가 여성이 차별당하고 있는 현실에 동의하지 않는 것이었다(12쪽).”

 어느덧 2011년을 바라보는 2010년 12월 한겨울 복판에서 생각합니다. 다음해면 이 책이 나온 지 스무 해인데, 2011년에 새롭게 대학교에 들어가는 젊은 넋들은 ‘2011년을 잣대로 놓고 볼 때에 이 나라 여성은 푸대접을 안 받는다’고 여길는지 ‘2011년을 잣대로 놓든 2021년을 잣대로 놓든 이 나라 여성은 푸대접을 받는다’고 여길는지 궁금합니다.

 가만히 생각하면, 오숙희 님이 오한숙희 님으로 바뀐 일은 아주 조그마한 몸부림입니다. 찻잔 안쪽에서 비바람이 치는 셈입니다만, 이나마라도 보여주며 살고픈 일입니다. 왜냐하면 ‘오’씨는 숙희 님을 낳은 아버님이요, ‘한’씨는 숙희 님을 낳은 어머님인데, 한씨 어머님이란 당신 아버님, 곧 숙희 님 할아버님입니다. 이래 보나 저래 보나 하나같이 아버님들한테서 물려받은 씨입니다. 그나마 당신 코앞에 있는 어머님을 헤아리며 이렇게나마 몸부림을 칠밖에 없는 오늘날입니다. 우리 나라는 혼인을 해도 ‘여자 성이 안 바뀐다’고 하지만, 우리 나라 여자는 처음에 태어날 때부터 ‘제 성을 못 받으며, 그러니까 제 성이 없는 채’ 살아갑니다.


.. 우리가 배운 여성학은 실천학문입니다. 알고도 행하지 않으면 모르는 것보다 더 나쁘다고 했어요. 그래서 내가 여러분에게 실천의 기회를 드리겠어요. 여성들이 느끼는 최대의 공포가 뭐라고 했죠? ..  (337쪽)


 어느 책을 읽다가 김홍도 님이 그린 그림 가운데 ‘자상한 남편’이 ‘아내는 소에 태워 앉아서 가도록’ 하고 큰 아이를 등에 업고 짐도 등에 짊어진 채 걷는 모습이 있다는 풀이말을 보고는 흠칫 놀랐습니다. ‘자상한 남편이라고? 그러면 자상한 아내란 무엇이지?’

 여자 집식구가 남자 집식구한테 물을 갖다 주거나 술을 따라 주거나 밥상을 차려 줄 때에 ‘자상하다’거나 ‘고맙다’거나 ‘따스하다’고 말하는 일은 거의 못 봅니다. 남자 집식구가 여자 집식구한테 물을 갖다 주거나 술을 따라 주거나 밥상을 차려 줄 때에 ‘저 남자 미쳤군’ 하는 소리를 으레 듣습니다. ‘아내한테 꽉 잡혀 사는군’ 하는 소리를 덩달아 듣습니다. 그래도, 앞으로는 하나둘 바뀔 수 있겠지요. 여자들은 여성학을 하니까요. 아직 남자들이 남성학을 안 하니 걱정입니다만, 무엇보다 남자들이 ‘참 남자다움이란 무엇이고, 남자로서 사람다이 사는 길이란 어떠한가’를 깨닫고 살피며 받아들여야 온누리가 달라지겠지만. (4343.12.14.불.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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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이·엄마·글쟁이


 애 아빠인 나는 늘 생각한다. 내가 남자이기 때문에 집에서 아이랑 어머니랑 둘이 어울려 놀라 한 다음 혼자서 볼일을 보러 다닐 수 있다고. 그러나, 나는 남자이기 때문에 더더욱 어머니가 집에서 조용히 쉬면서 둘째가 무럭무럭 제자리를 잡으며 차분히 설 수 있게끔 돕고, 아버지 되는 사람이 아이랑 마실을 다니며 볼일을 볼 수 있어야 한다고.

 내가 애 엄마이면서 글쓰는 사람이라면, 내가 시골집을 떠나 서울로 볼일을 보러 다닌다 할 때에 마땅히 아이를 데리고 다니지 않겠느냐 하고 생각한다. 언제나 아이를 곁에 두어야 하고, 늘 아이를 보살펴야 하며, 노상 아이가 외롭거나 심심하지 않도록 마음을 쏟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글을 쓰는 거의 모든 남자들과 아빠들은 아이가 갓난쟁이일 때부터 도맡아 돌본다거나 아이를 데리고 다닌다거나 살림을 꾸린다거나 하지를 못하거나 않는다고 느낀다. 아이랑 함께 살아가는 고단함과 즐거움에다가 힘겨움과 아름다움을 마음으로도 살피지 못할 뿐 아니라, 몸으로도 느끼지 못하는구나 싶다.

 모든 애 아빠는 애 엄마와 같은 마음이요 삶이며 이야기여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모든 애 엄마는 애 아빠와 같은 마음이나 삶이나 이야기일 까닭은 없다고 본다. 서울마실을 마치고 시골집으로 돌아오는 날, 새벽에 조용히 먼저 일어난다. 아이는 고요히 잠잔다. 아버지는 텔레비전을 켜 본다. 영화 〈푸른 산호초〉가 흐른다. 꽤 여러 번 흘깃 보았으나 처음부터 끝까지 제대로 본 적은 없다. 언제였나, 옆지기랑 이 영화를 보다가, ‘바닷물 속에서 벌거벗고 헤엄치는 두 젊은이’가 나오는 대목에서 자지랑 보지를 뿌옇게 해 놓은 모습을 보며 짜증스럽다고 말했던 일이 떠오른다. 왜 가려야 하지? 왜 부끄럽다 여기지? 열아홉 살부터 볼 수 있다는 영화라고 한다면, 자지랑 보지를 가릴 까닭이 있나? 이 영화 〈푸른 산호초〉는 너그러우며 너른 자연 품에 안긴 채 사랑스레 살아가는 사람들 삶을 보여주는데, 왜 자지랑 보지를 가리나? 이네들한테는 젖꼭지이든 자지이든 보지이든 머리털이든 복숭아뼈이든 똑같다. 이처럼 억지스레 뿌옇게 가리면서 외려 아름다운 삶과 사람과 삶터와 자연을 놓친다.‘뿌연 자리’에 엉뚱하게 더 눈길이 가고야 만다. 자지털이나 보지털이나 겨드랑이털이나 콧털이나 머리털이나 다를 구석이 없다.

 한창 글쓰기를 할 생각이었으나, 그만 영화 〈푸른 산호초〉에 빠져들고 만다. 영화 〈푸른 산호초〉에 나오는 젊은 남자는 섬에서 떠나고 싶어 안달을 한다. 젊은 여자는 애써 섬에서 떠날 마음이 없다. 젊은 남자는 여자한테 골을 부릴 뿐 아니라 뺨을 때리기까지 한다. 여자는 뺨을 맞았는데에도 손찌검을 하지 않는다. 가만히 기다리고 지켜본다. 이윽고 둘은 사랑놀이 열매로 아이를 낳는다. 아이를 배어 낳는 줄 하나도 모르던 두 사람, 아이한테 젖을 물려야 하는 줄조차 모르던 두 사람, 차츰차츰 아이하고 살아가는 나날이 길어지면서 비로소 젊은 여자가 왜 섬을 떠나려 하지 않는가를 젊은 남자도 깨닫는다. 큰 배가 섬 둘레로 다가오며 이 둘을 밖으로 나가도록 도와주려 하지만, 일부러 섬 안쪽 깊이 들어가며 숨는다.

 텔레비전도 예방접종도 라면도 자가용도 비행기도 여행도 연속극도 책도 사진기도 일기장도 볼펜도 침대도 옷가지도 옷장도 신발도 모자도 돈도 은행계좌도 …… 아무것 하나 없다 할 만한 외로운 섬인데, 둘을 넘어 셋은 섬에서 즐겁다. 섬에서 아름답다. 섬에는 바로 바다가 있고 나무와 풀이 있으며 먹을거리가 있는데다가 파란하늘과 맞닿은 파란바다에 물고기랑 뭇목숨이 살아가기 때문이다. 서로서로 아름다운 삶과 사랑과 사람이 무엇인가를 깊이 깨달으며 ‘살결이 누렇게 익은 흰둥이’로서 예쁘게 웃을 수 있기 때문이다.

 난 애 아빠로서 생각한다. 여느 남자들은 글을 쓰고 싶다면 애 엄마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아이를 낳아 기르는 남자들은 글을 쓰거나 사진을 찍거나 그림을 그리고프다면, 집살림을 도맡거나 거의 다 하면서 아이를 보살피거나 가르치면서 글을 쓰든 사진을 찍든 그림을 그리든 해야 한다고. 남자들은 젊거나 늙거나 어리거나 하나같이 어리석고 어리숙하며 어리벙벙하다. 아이를 낳고 뼈와 살을 바쳐 아이를 사랑하지 않는 남자는 그예 바보일 뿐이다. (4343.12.10.쇠.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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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이가 엄마 배속에 설 때


 저녁나절 세 식구 일찍 잠자리에 든다. 여덟 시가 채 안 되었으나 잠자리에 든다. 서울과 인천으로 볼일 보러 다녀온 애 아빠는 애 아빠대로 허리와 다리가 쑤신다. 시골집에서 아이랑 복닥이던 애 엄마는 애 엄마대로 온몸이 쑤신다. 아이는 아이대로 혼자 놀다 힘들었을 테니 일찌감치 잠들었다.

 막 자리에 누워 잠들 무렵 전화기가 울린다. 일산 옆지기네 어머님이 전화를 거셨다. 둘째를 밴 딸아이를 걱정하신다. 이야기결에 한 마디가 마음에 녹아든다. 당신이 젊을 적 아이를 밸 무렵, ‘배속에 아이가 설 때’ 몸이 참 힘들고 무거웠다는 생각이 비로소 든다고 말씀한다. 그때에는 왜 몸이 힘들거나 무거웠는지 모르셨단다.

 할머니가 곁에 있으면 애 엄마나 애 아빠는 얼마나 많으며 깊고 너른 삶을 받아들이거나 바라보며 배울 수 있을까. 할머니하고 함께 살아가지 못하거나 같이 안 사는 사람들이 딱하다. 그렇지만 막상 할머니랑 함께 살아가면서 할머니한테서 고운 삶을 웃음과 눈물로 맞아들이거나 껴안는 사람은 얼마나 될까. 아이키우기랑 살림하기만 배우거나 익히지 않는다. 아이키우기랑 살림하기란 곁다리이다. 할머니한테서 삶을 배우고 삶을 나누며 삶을 함께하니 즐겁다. 할머니 한 분 걸어온 길은 고스란히 ‘사람책’이다. 애 엄마 외할머님이 배속에서 자라는 둘째 아이를 생각하며 비손해 주신단다. (4343.11.11.나무.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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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인 2010-11-12 08:30   좋아요 0 | URL
아, 작은아이가 생겼다는 걸 제가 이제 처음 아는 걸까요? 요새 제 속의 시끌거림으로 님의 글을 찬찬히 못 읽었던 듯. 정말 어설프게 축하 드립니다. ^^

숲노래 2010-11-12 22:55   좋아요 0 | URL
고맙습니다. 아이는 무럭무럭 잘 자라 이듬해 오월 무렵에 곱게 태어나리라 생각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