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교는 너무 끔찍한 죽음터입니다
― 《민중교육론, 제3세계의 시각》


- 책이름 : 민중교육론, 제3세계의 시각
- 글 : 파울로 프레이리, 이반 일리치, 에브리트 라이머, 브리안 워렌
- 옮긴이 : 채광석, 양한수, 권태선, 김쾌상
- 펴낸곳 : 한길사 (1979.8.20.)


 나는 내 아버지를 미워하지 않습니다. 나로서는 내 아버지이기 때문에 미워할 수 없습니다. 내 아버지가 당신 삶에 걸맞게 아름다우면서 해맑은 삶을 깨달으면서 하루하루 즐겁고 신나는 나날을 맞이할 수 있기를 꿈꿉니다. 먼 뒷날일는지 곧 다가올 날일는지 알 수 없으나, 당신이 숨을 거두어 흙으로 돌아가고 나서야 둘레 사람들한테 사랑을 나누어 주지 말고, 바로 오늘 이곳에서 둘레 사람들한테 사랑을 나누어 주기를 바랍니다.

 곰곰이 생각하고 또 생각해 보면, 아버지로서는 퍽 젊은(?) 나이에 교감이 되고 교장이 되기를 바랄밖에 없다고 느낍니다. 당신 또래 사람들 삶이 그러했으니까요. 일제강점기가 어떠한 삶자락인지 알 길이 없을지라도 일제강점기에 태어나 해방과 한국전쟁을 치르며 어린 나날을 보내고 나서 집안 사내 맏이로 살아내야 한 어른들이 걸을밖에 없는 길에서 흔들리거나 머뭇거릴 수 없는 노릇입니다.

 아버지가 읽으셨는지 모르나, 아버지가 경기도 성남 쪽 초등학교 교장으로서 한창 힘과 이름을 날리실 때에 《할아버지의 부엌》이라는 일본책(한글로 번역된 책)을 선물한 적 있습니다. 나는 우리 아버지가 집 바깥에서 그토록 힘과 이름을 날리는 삶을 보내느라 애먼 나날을 흘리기보다, 밥하고 반찬하며 빨래하고 청소하는 ‘날마다 되풀이해도 끝나지 않고 그지없이 쌓이기만 하는’ 집살림을 돌아보면서 사랑할 줄 아는 어른으로 지낼 수 있기를 비손했습니다. 왜냐하면, 교장 선생님이라는 자리에 선 분부터 ‘집에서 일하는 삶’을 몸으로 받아들일 때에 비로소 당신이 교장으로서 꾸리는 학교에 다니는 아이들부터 ‘수많은 학원에 얽매이는 고리’를 조금이나마 풀 수 있기 때문입니다. 아버지가 경기도 부천에 있는 초등학교에서 교감 선생님으로 계실 때에, 그 학교조차 ‘다니는 학원이 10군데 넘는 아이가 10%가 넘는다’는 소리를 당신 입으로 들었습니다. 아버지는 아이들이 학원을 그토록 많이 다니는 일이 어떠한 삶인지를 얼마나 살갗으로 받아들이셨는지 궁금합니다. 아이들이 학교와 학원에 붙들리며, 정작 집에서조차 느긋하게 드러누우며 쉬거나 놀 겨를이 없는 줄을 얼마나 헤아리며 걱정했는지 궁금합니다.


.. 많은 학생들 특히 빈곤한 집안의 학생들은 학교가 자신들에게 무엇을 해 주는가를 직관적으로 알고 있다. 학교는 과정과 실체를 혼돈하도록 가르치고 있는 것이다 … 졸업증서와 사회적 능력·말의 유창함과 무언가 새로운 것을 말할 수 있는 능력과를 혼동하게 된다 … 학생의 상상력은 학교화되어서 가치 대신에 서비스를 받아들이도록 길들여진다. 의사의 진료행위는 곧 건강보호로 착각하고 사회활동은 시민생활의 개선이며 경찰보호는 안전이며 무력균형은 국가안보이며 맹목적으로 열심히 일만 하는 것이 생산적인 활동인 것으로 오해하게 된다 … 학습이나 정의는 학교에 의해서 증진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교육자들은 교육과정 이수와 자격획득을 결부시키도록 강요하고 있기 때문이다 … 학교교육이 의무화되면서 학교교육은 학교교육 그 자체를 위한 것이 돼 버렸기 때문이다. 즉 의무교육이란 특권을 누리는 교사집단 속에 학생을 강제수용시키는 것이 되며, 결과적으로 그러한 집단을 더 많이 만들어 내게 된다 ..  (77, 88, 94쪽)


 학교가 학교로 되려면, 학교는 졸업장이 없어야 합니다. 학교가 학교다우려면, 학교는 상장이 없어야 합니다.

 저는 한때 ‘대안 상장’ 같은 상장이 있으면 좋겠거니 생각한 적이 있는데, 대안 상장도 똑같은 상장입니다.

 그러니까, 대안학교라는 곳도 똑같이 학교입니다. 대안학교도 똑같이 학교이기 때문에, 이 대안학교를 다니는 아이나 이 대안학교에 아이들을 보내는 어버이나 똑같은 굴레에서 허덕입니다. 아이들은 학교에 보내면 안 되고, 아이들은 아이들을 사랑할 어버이가 함께 어울릴 수 있는 곳에서 자라야 합니다.

 아이는 자라야 하지, 아이는 배워야 하지 않습니다. 아이는 무럭무럭 커야 하지, 아이는 길들어야 하지 않습니다.

 아이는 책을 읽어야 합니다. 아이는 책 줄거리를 외워야 하지 않습니다. 책을 쓴 사람이나 책을 펴낸 곳 이름을 외워야 하지 않습니다. 책을 읽고 나서 가슴에 북받치는 아름다움이 꽃피어야 합니다.

 아이는 일을 해야 합니다. 돈을 벌어들이는 일이 아니라, 스스로 땀을 흘리며 즐겁고 기쁘며 보람찬 일을 해야 합니다. 일이란, 제가 우리 멧골집에서 아이한테 “벼리야, 이 접시 좀 밥상에 갖다 주렴.” 하고 시키는 일 따위입니다. 일이란, 제가 우리 시골집에서 아이보고 “벼리야, 아빠 빨래하러 가는데 같이 가자(겨울날 집에 물이 얼어붙어 웃마을로 가서 빨래를 하고 물을 걷습니다).” 하고 부르며 손을 잡고 멧길을 오르내리는 일 따위입니다.


.. 가난한 학생들이 학습이나 자기발전을 학교에만 의존하는 한 일반적으로 부유한 학생에게 뒤떨어지기 마련이다. 빈민에게 요구되는 것은 학습을 가능케 하는 자금이지 그들에게 부족되고 있다고 인식되는 제도적 혜택을 증명받는 일은 아니다 … 의무교육은 사회를 필연적으로 분극화시킬 뿐만 아니라 국제적인 카스트(신분) 제도로 국가를 등급화시킨다 … 대부분의 사람들은 학교 밖에서 거의 모든 지식을 얻는다. 학교 안에서 지식을 얻는다는 것은 몇몇 부국에 있어서 사람들의 일생 동안 학교 안에 갇혀 사는 기간이 점점 길어지게 되었다는 점에서 그렇게 말할 수 있다 ..  (83, 86, 89쪽)


 우리 살붙이 살아가는 조그마한 살림집 물이 얼어붙은 지 달포가 넘고 두 달이 가깝습니다. 이동안 물을 길어 쓰고, 집에서는 차디찬 물로 설거지를 하면서, 어느새 내 손가락 마디마디 언손이 되고 맙니다. 왜 이렇게 손가락이 시리고 쑤시는가 했더니, 내 젊은 날 강원도 양구 가장 깊은 멧골짝 군대에서 스물여섯 달을 보내던 때에 겪던 일과 똑같은 일이 새삼스레 찾아왔습니다. 얼음생채기입니다.

 오늘 아침 비로소 내 손가락이 어떠한 줄을 깨닫습니다. 둘째를 밴 옆지기가 몸이 몹시 힘들어 밤새 잠을 못 자고 뒤척이다가 새벽 다섯 시 삼십오 분에 비로소 잠들었는데, 새근새근 자는 옆지기가 깨어날 낮나절 지아비 손가락이 어떠한가를 얘기해 주어야 말아야 하나 망설입니다. 옆지기가 새벽 다섯 시 삼십오 분에 잠들었으니, 지아비는 그동안 잠을 거의 못 잔 채 누웠기만 했습니다. 그렇다고 이제서야 비로소 두 발 뻗고 잘 수 없습니다. 아픈 손가락으로 찬물을 받아 쌀을 씻어 놓습니다. 오늘 아침에 아이가 일어나서 먹을 밥을 마련해야 합니다. 밥을 먹이고 나서 설거지를 하고, 밤새 나온 오줌기저귀 빨래를 해야 합니다.

 제가 돈없이 살아가니 겨울날 집안 물이 얼어붙는다 할 수 있으나, 돈이 있고 없고를 떠나 집살림을 옳게 건사할 줄을 아직 제대로 모르는 서른일곱 나이인 탓에 이렇게 되고 맙니다.

 군대라는 곳은 사람이 사람을 죽이는 끔찍한 재주를 배우는 무시무시한 곳입니다. 이 무시무시한 곳에 아이들을 보내는 일은 너무 슬픕니다. 저는 우리 둘째가 사내가 아니기를 빌고 또 빕니다. 제아무리 착하고 참다운 아이일지라도, 군대에 끌려가 사람 죽이는 재주를 익히며 길들어야 한다면, 그 착하며 여린 마음에 얼마나 깊은 슬픔을 아로새겨야 할까요.

 그러나, 깊으며 괴로운 슬픔을 아로새기기 때문에 더욱 착하며 힘차게 살아갈 수 있는 기운을 얻기도 하겠지요. 밟혀도 다시 일어서는 뭇 들풀처럼.

 그래, 저는 군대라는 데에서 사람 죽이는 숱한 재주를 몸에 사무치도록 배우는 한편, 군대에 가기까지 고등학생이던 때에는 겪지 못했던 온갖 일을 했습니다. 군대에서 비로소 시멘트와 자갈과 모래와 물을 섞어 비빔질을 하는 일을 배웠고, 천 삽 뜨고 허리 한 번 펴는 일을 익혔으며, 곡괭이질은 어떻게 해야 하고, 짐은 어떻게 날라야 하며, 멧길과 눈길은 어떻게 오르내려야 하는가를 배웠습니다. 학교에서는 안 가르치는 숱한 삶을 외려 군대에서 배웠습니다. 어쩔 수 없겠으나, 군대는 사람을 죽이는 모진 곳이면서도 이곳 또한 ‘사람이 살아가는 곳’이라서, 모진 죽음과 죽임이 판치는 가운데에도 ‘사람답게 살고 싶은’ 몸부림이 꼬물꼬물 꼬리를 치면서 이런저런 ‘사람이 사람다이 살 길’을 서로 나누면서 보여주었습니다.


.. 교육이 국민문화에 기여하기 위해서는 특수한 제도에 강제 수용할 것이 아니라, 전 인구를 이에 동원해야 할 것이다. 학습 및 교육에 자기의 능력을 행사하기 위한 개개인의 평등한 권리는 현재 자격증을 소지한 교사들에게 점유당하고 있다. 반대로 능력 발휘는 학교 내로 제한되고 있다. 그 결과 일과 여가는 서로 괴리되고 있다 … 의무교육의 존재가 바로 사회를 두 개의 영역으로 구분하고 있다. 즉 특정한 시간대·특정한 과정·특정한 처지나 전문직업은 학술적이고 교육적인 것이고, 기타는 그렇지 않은 것으로 구분된다. 이와 같이 사회 현실을 구분하는 학교의 권력엔 한계가 없어서 교육은 비세속적인 것으로 되고, 비교육적인 것이 되고 말았다 ..  (99∼100쪽, 102쪽)


 저는 우리 옆지기를 좋아하고 우러릅니다. 좋아하면서 우러릅니다. 우리 옆지기를 비롯해서 제가 좋아하며 우러르는 사람들은 우리 옆지기처럼 학교를 덜 다닌 사람이거나 일찍부터 뛰쳐나온 사람입니다. 또는, 학교를 이냥저냥 다니면서도 학교와 사귀지 않던 사람입니다.

 학교와 사귄 사람들은 어쩐지 말을 섞기 버겁습니다. 학교와 살가운 사람들은 어쩐지 동떨어진 별나라 사람 같습니다.

 사람들이 저하고 처음 만나서 이름을 나누고 할 때에 “학번이 어떻게 되셔요?” 하고 물을 때면, 그저 빙긋 웃으며 “저는 고등학교만 나와서 그런 건 잘 모르겠네요.” 하고 대꾸합니다(고등학교만 마쳤으니 학번을 알 턱이 없어요). 저는 학교가 참 싫습니다. 아이들 앞에서 삶을 가르치거나 나누거나 물려주는 어른은 되고 싶지만, 교원자격증을 따고 무슨무슨 대학졸업증을 거머쥔 교사가 되고 싶은 마음은 없습니다. 선생님도 싫고 교사도 싫습니다. 그저, 우리 아이한테 ‘아버지’라는 이름이듯, 뭇 아이들 앞에서는 ‘아저씨’라거나 ‘어른’이고픕니다. 저는 우리 아버지가, 저를 비롯해 뭇 아이들 앞에서 똑같이 ‘할아버지’이면서 ‘어른’인 삶으로 마지막 고운 나날을 맞이하고 누리신 다음 아주 흐뭇하게 웃으면서 흙으로 돌아가실 수 있기를 비손합니다. (4344.1.30.해.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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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하는 삶과 공부하는 아이
― 현진건, 《B舍監과 러브레터》



- 책이름 : B舍監과 러브레터
- 글 : 현진건
- 펴낸곳 : 동서문화사 (1977.9.1.)



 중·고등학교를 다니며 입시공부를 해야 하기 때문에 현대소설을 읽습니다. 학교에서는 아이들이 대학입시를 잘 치러 이름난 대학교에 더 많이 들어가도록 채찍질을 하고자 현대소설을 가르칩니다.

 국민학교를 마치고 중학교에 들어서던 1988년 3월, 학교에서는 갱지에 등사한 종이를 나누어 줍니다. 1991년 3월에 고등학교에 들어갈 때에도 갱지에 등사한 종이를 나누어 줍니다. 이 갱지에는 ‘중학생이 읽을 권장도서’라든지 ‘고등학생이 읽을 필독도서’가 깨알같이 적힙니다.

 중학교에 들어서거나 고등학교에 들어서며 받는 ‘꼭 읽으라 하는 책’을 살피면, 그즈음에 나온 새로운 책은 하나도 없습니다. 그즈음뿐 아니라 ‘오늘날 두루 읽히거나 읽을 만한 책’ 또한 하나도 없습니다. 문학이라 하면 모두 현대소설로 쏠리고, 김동인이니 이광수이니 현진건이니 김유정이니 이효석이니 황순원이니 하는 분들 작품 가운데에서도 일제강점기에 쓴 작품에 쏠립니다. 해방 뒤에 문학을 한 사람들 작품은 학교에서 가르치지 않을 뿐더러 입시에서도 다루지 않습니다. 더러 한두 작품 한두 대목이 나오기는 하지만 일제강점기 작품에 견주면 아무것 아닙니다. 문학이란 철지난 문학이고, 문학하는 사람은 숨을 거두어 흙으로 돌아가고 나서야 빛을 보는 셈입니다.


.. “그래 음악회에 가기 싫단 말인가?” “자네 혼자서 다녀오게.” “여보게 음악은 모른다 하더래도, 여학생 구경이라도 가세그려. 주최가 여학교 측이고 보니, 그 학교 학생은 물론이겠고, 서울 안의 하이칼라 여학생은 다 끌어올 것일쎄.” 하고 매우 초조한 듯이, “입장권은 내가 삼세. 음악이 싫거든 여학생 구경이라도 가세.” “왜?” “왜라니, 여학생 구경이라도 가자는밖에.” “여학생은 보아 쓸데가 무엇이란 말인가?” ..  (216쪽/까막잡기)


 학교에서 나누어 주는 갱지를 훑으며 ‘들어 본’ 이름과 ‘처음 듣는’ 이름을 헤아립니다. 들어 본 사람 작품이건 처음 듣는 사람 작품이건 하나하나 찾아서 읽기로 합니다. 어찌 되었든, 이 갱지에 적힌 사람들 작품을 ‘학교에 책을 가져가서 쉬는 시간이나 점심 시간에 읽는다’면 무어라 따지지는 않을 테니까요. 학교에서 읽으라 한 책인 만큼 이러한 책을 읽는다 할 때에 책을 빼앗는다든지 무어라 꾸중할 핑계거리가 없습니다.

 학교에서는 현진건 님 작품 〈빈처〉와 〈운수 좋은 날〉을 읽으라 했지, 〈불〉이나 〈그립은 흘긴 눈〉은 읽으라 하지 않습니다. 〈술 권하는 사회〉나 〈피아노〉 같은 작품이 ㅅㄱㅇ 같은 대학교 논술시험에 나오기도 하니, 학교 모의시험에 이들 작품 지문이 나오기는 하지만, ㅅㄱㅇ 논술시험 지문하고 똑같이 나올 뿐입니다. 〈우편국에서〉나 〈할머니의 죽음〉이라든지 〈사립정신병원장〉이라든지 〈고향〉이라든지 다루거나 이야기하는 국어 교사는 없습니다. 중·고등학교 국어 교사 가운데 이들 작품을 읽은 분이 있을는지 모르나, 어쩌면 이들 작품은 안 읽거나 못 읽은 분이 더 많을는지 모릅니다. 교대나 사범대에 다닐 때뿐 아니라, 막상 학교에서 국어 교사로 일하면서도 ‘당신들이 학생 적에 못 읽은 한국 현대문학’을 뒤늦게 읽는다든지, 이때부터 바지런히 읽는다든지 할 겨를을 못 내는지 모릅니다.

 헌책방을 다니며 책을 하나둘 그러모읍니다. 현진건 문학을 읽으려고 생각한 때에는 현진건 님 문학책을 펴낸 갖가지 판본을 모두 살펴서, 겹치지 않은 작품이 하나라도 실렸으면 냉큼 사들여서 읽습니다. 이무영 소설이든 안수길 소설이든 박태원 소설이건 마음껏 읽습니다. 장용학 소설이건 이청준 소설이건 즐거이 읽습니다.

 현대소설을 읽으면서, 또 현대를 지난 오늘날 소설을 읽으면서, 오늘날과 가까울수록 문학하는 사람들 말이 재미없다고 느낍니다.

 일제강점기에 한글을 마음껏 펼치지 못하면서 적어 내려간 작품에는 ‘깰락졸락’이라느니 ‘큰심부름 잔심부름’이라느니 ‘꾸중받이’라느니 ‘맞방망이’라느니 ‘염통이 파득파득’이라느니 ‘신트림’이라느니 ‘여기 오는 맡’이라느니 ‘퉁을 주었다’라느니 ‘까막잡기’라느니 ‘멋질린’이라느니 ‘뭇주룩하게’라느니 ‘겅성드뭇’이라느니 ‘무안새김’이라느니 ‘치훑고 내리훑고’라느니 ‘샐닢’이라느니 하는 말마디를 마주합니다. 따로 살려쓴다는 토박이말이 아니라, 여느 자리에서 수수하게 주고받는 말마디입니다. 그런데, 이런 말마디 가운데에도 “만족의 미소” 같은 일본 말투가 끼어들곤 합니다.


.. “저를 모르시겠읍니까. 제가 ××이 아닙니까.” “응, 네가 ××이냐…….” 우는 듯이 이런 말을 하고 그윽하나마 내가 잡은 손에 힘을 주는 듯하였다. 그 개개 풀린 눈동자 가운데도 반기는 빛이 역력히 움직였다. 할머니의 병환이 어젯밤에는 매우 위증해서 모두 밤새움을 한 일, 누구누구 자손을 찾던 일, 그 중에 내 이름도 부르던 일, 지금은 한결 돌린 일 …… 온갖 일을 중모는 나에게 아르켜 주었다. 나는 그날 밤을 누울락앉을락, 깰락졸락 할머니 곁에서 밝혔다. 모였던 자손들이 제각기 돌아간 뒤에도 중모만은 할머니 곁을 떠나지 않았다. 불교의 독신자인 그는 잠오는 눈을 비비기도 하고 기침으로 목청을 가다듬기도 하면서 밤새도록 염불을 그치지 않았다 ..  (130∼131쪽/할머니의 죽음)


 오늘날 중학교와 고등학교에서도 아이들한테 ‘권장도서목록’이나 ‘필독도서목록’을 내어주며 이러한 책을 안 읽으면 두들겨 팬다든지 몽둥이찜질을 한다든지 할까 궁금합니다. 문학이란 대학입시를 치르며 살필 시험문제로만 여기면 그만이라고 다루는지 궁금합니다. 삶을 다루는 문학을 학교에서 배울 수 있는지 궁금합니다. 아니, 학교에는 아이들 삶이 있는지 궁금하고, 집에서는 아이들이 스스로 삶을 사랑하며 일굴 수 있도록 이끌어 주는지 궁금합니다. (4344.1.27.나무.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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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이한테 아름다운 삶을 보여줄 수 없을까
― 오사다 아라타(長田 新), 《페스탈로찌》


- 책이름 : 페스탈로찌
- 글 : 오사다 아라타(長田 新)
- 옮긴이 : 이원수
- 펴낸곳 : 신구문화사 (1974.5.1.)


 저로서는 헌책방이었기에 만난 책이 몹시 많습니다. 저는 1975년에 태어났으니 1975년 무렵에 나온 책은 새책으로 만날 길이 없습니다. 고등학교 2∼3학년이던 1992∼93년에는 최인훈 소설과 황순원 소설을 ‘문학과지성사’에서 세로쓰기로 된 판을 찾으려고 인천에 있는 모든 새책방을 샅샅이 훑으며 하나하나 그러모으곤 했지만, 1970년대 끝무렵부터 1980년대 첫무렵에 나온 책을 1990년대에 새책으로 만나기란 아주 힘들었습니다. 나중에 가서야 이러한 책은 헌책방에서 찾아야 하는 줄 깨닫습니다.

 도서관에서 갖추어 주는 책이 있습니다. 그러나 도서관에서 갖추어 주지 못하는 책이 있습니다. 도서관이라 해서 모든 책을 골고루 갖추지는 않습니다. 또한, 서울에 있는 큰 도서관 한 곳에는 있을는지 모르나, 인천에 있는 도서관에는 없는 책이 많습니다. 게다가, 문을 연 지 얼마 안 되는 도서관에서 철지난 책을 갖출 수 없는 노릇입니다. 1970∼80년대에 ‘신구문화사’에서 펴낸 ‘신구문고’라 하는 작은 책을 어느 도서관에서 몇 권이나 만날 수 있으려나요. 이 신구문고를 알아본 때는 1990년대가 저물 때요, 1990년대가 저물 때에 비로소 1970년대 책을 찾으려 했으니, 헌책방 아니고서는 만날 길이 없습니다.

 1998년 1월 첫머리에 권정생 님 이야기책 《몽실 언니》를 읽고는 어린이책을 차근차근 장만하여 읽습니다. 이원수 님 《해와 같이 달과 같이》도 이무렵에 비로소 읽습니다. 이토록 아름다운 이야기책을 어린이일 때에 못 읽었으니 참 슬프다고 여겼지만, 어린이일 때에 못 읽은 책을 어른이 되어 읽는 맛은 남달랐습니다. 어린이일 때에 한 번 읽고 어른이 되어 다시금 읽어도 훌륭한 책이지만, 어린이문학이란 어린이부터 어른 누구한테나 아름다울 책인 줄을 비로소 깨닫도록 도왔다고 할까요.

 이원수 님 어린이책을 하나하나 사서 읽던 어느 날, 헌책방 책시렁을 살피다가 신구문고 가운데 하나인 《페스탈로찌》를 만납니다. 1974년에 옮긴 얇은 책 《페스탈로찌》는 바로 ‘이원수 옮김’으로 되었습니다. 헌책방에서 살핀 책 때문에 알았는데, 이원수 님은 공상과학동화라든지 ‘플루타르크 영웅전’이라든지 ‘미운 새끼오리’라든지 ‘장발장’을 우리 말로 옮기곤 했습니다. ‘미운 새끼오리’는 계몽사 판으로 나왔고, ‘장발장’은 학원사 판으로 나왔어요. 아마 일본책을 살펴 우리 말로 옮기셨을 텐데, 서양말에서 바로 옮긴 책은 아닐 테지만, 번역글이 몹시 정갈하며 아름답다고 느꼈습니다. 《페스탈로찌》는 어른이 읽는 책이라 퍽 딱딱한 말로 옮겼는데, ‘이원수 님 해적이’에는 나오지 않는 이 번역책을 뜻밖에 보면서, 어쩌면 이원수 님 어린이문학을 이루는 밑바탕 가운데 하나로 ‘페스탈로치가 어린이를 사랑하거나 아끼는 넋’도 있겠구나 느꼈습니다.


.. 그러나 그(페스탈로치)는 일반적으로 자선 사업이란 빈민의 불행을 조장할망정 절대로 불행을 제거하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다시 말하면 그러한 방법은 그에게는 다만 거지를 양성하고 위선자를 배가하는 일체의 빈민 구제와 다를 바 없으며, 그것은 “구토를 일으킬 만큼 시대를 식상케 하는 고식적인 수단”에 지나지 않는다고 생각되었다. 빈민을 구조하는 단 하나의 수단은 생활상의 용무, 의무 및 어떤 상태에 충분히 적합하여, 또 모든 인간에게 근원적으로 내재하는 힘이 자극되고 발달되는 점에 있다고 하는 것이 그의 굳은 신념이었다. 이러한 신념으로써 나라 안의 가장 가난한 사람들에게도 그 신체적·정신적 및 도덕적 손질을 개인적이요 가정적인 또는 시민적인 형편을 통하여 확실하게 도야하고 그 도야에 의해서 안식과 평화의 생활에 확고한 기초를 줄 수 있다고 생각하여, 빈민 학교의 상세한 계획을 발표했다 ..  (46쪽)


 작은 책 《페스탈로찌》를 알아보는 사람은 매우 적습니다. 교사들도 이런 책을 찾아 읽지 않고, 교사가 되려는 이들 또한 이와 같은 책을 찾아 읽지 않습니다. 페스탈로치 님이 쓴 《숨은 이의 저녁놀》(또는 “은자의 황혼”) 같은 책을 찾아 읽는 교육자 또한 몹시 드뭅니다. ‘국민 기초 교육’ 발판을 닦아 퍼뜨린 페스탈로치 님인 만큼, 초등교사들이라면 누구나 대학교에서 학문으로 페스탈로치 이야기를 듣기는 들었을 텐데, 막상 페스탈로치라는 사람이 어떤 마음으로 초등학교를 세워 아이들을 사랑하려 했는지를 살피지는 않아요.

 신구문고 가운데 23번으로 나온 《페스탈로찌》를 살피면, 앞머리에 민병산 님이 소개글을 적습니다. 민병산 님은 “페스탈로찌는 수도원의 승방이나 황야의 암굴에 들어박힌 성자가 아니라, 사회에 뛰어든 성자, 가난한 사람들·배우지 못한 사람들·버림받은 사람들·어둠에 갇힌 어린이들과 더불어 ‘인간의 희망’을 증명하기 위해서 투쟁한 성자라는 사실(4쪽)”이라고 적바림하면서 거룩한 뜻을 섬깁니다. 그런데, 소개글 끝자락을 보면 《페스탈로찌》를 쓴 일본사람 이름을 ‘나가다(長田)’로 적습니다. 게다가 책 뒤쪽 간기를 살피면, 정작 글쓴이 ‘長田 新’이 어떠한 사람인지 한 줄로조차 적지 않습니다. 옮긴이 이원수 님 소개만 이원수 님 동화책 이름 하나를 적고는 끝입니다.


.. 페스탈로찌는 드디어 50인의 빈민 아동을 목표로 하여 빈민 학교를 세우고 스스로 거기에 나서서 아동을 모아 왔다. 그는 이 아이들과 같이 여름에는 땅을 갈고 겨울에는 면화를 실이나 베로 가공하여 경영을 유지하려 했다. 특히 그렇게 함으로써 아이들의 마음에는 다만 빈곤을 극복하여 자신을 자립으로 끌어올리는 노동의 쾌감이 생길 뿐 아니라 자활하면서 그들이 내적인 여러 가지 힘을 키울 수 있다는 것이 페스탈로찌의 신념이었다. 그로 하여금 말하게 한다면 노동을 하는 사이에 지적 도덕적 및 종교적 여러 힘은 말하기·읽기·쓰기·외기 등에 의하여 연습되고 강화되지 않으면 안 된다. 물론 이 큰 세대에서는 사랑이 그 수호신이 아니어서는 안 된다. 더우기 아이들의 마음속에 모든 인간적인 고상함과 위대함을 자각케 하고, 그리고 그것을 공고히 하는 가정의 힘은 그 수호신으로서의 사랑 가운데 들어 있어서 거기서부터 흘러나온다. 이러한 수호신이 페스탈로찌의 빈민 학교를 강력히 지배했다. 그러나 페스탈로찌가 그들의 식탁에서 같이 먹어도, 아니 그들에게는 맛난 감자를 먹이고 자기는 험한 음식을 먹어도 이 훌륭한 사람은 그들에게서 비난을 받았다. 관청도 그를 원조해 주지 않았다. 물론 그에게는 이런 사업에 대한 세세한 지식이 없었다. 그래서 채무는 점점 불어 가서 1780년에는 학교를 해산하는 비운에 빠지게 되고 말았다 ..  (47쪽)


 ‘長田 新’이라는 분은 온누리에 손꼽히는 ‘페스탈로치 연구 권위자’입니다. 이름은 ‘오사다 아라타(おさだ あらた)’로 읽고, 1887년 2월 1일에 태어나 1961년 4월 18일에 숨을 거둡니다. 이분이 엮은 다른 책으로 《原爆の子》가 있는데, 이 책은 일본에서 1951년에 처음 나왔고, 한국에서는 1996년에 학문사에서 《원폭의 어린이》라는 이름으로 옮겼습니다.

 생각해 보면, ‘오사다 아라타’라는 이름을 ‘나가다’라 잘못 읽든, 이 작은 책 《페스탈로찌》를 알아보지 않든, 우리들은 우리 터전에서 우리 아이들을 얼마든지 사랑하거나 아낄 수 있습니다. 일본에는 원자폭탄에 애꿎게 쓰러진 어린이가 있다면, 한국에는 입시지옥에 슬프게 쓰러지는 어린이가 있습니다. 우리들은 우리 스스로 이 나라에서 아름다운 삶과 꿈을 헤아리며 어린이한테 맑거나 밝은 길을 가르치거나 이끌지 못하기에, 《페스탈로찌》이든 다른 어떤 아름다운 책이든 스스로 즐겁고 기쁘게 쥐어들려고 마음을 기울이지 못하리라 봅니다. (4344.1.25.불.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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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헌책방에서 애 엄마가 알아본 시집
 [헌책방에서 만난 책 8] 문두근, 《아, 우리 비행기는 무사하다》



- 책이름 : 아, 우리 비행기는 무사하다
- 글 : 문두근
- 펴낸곳 : 혜화당 (1993.5.12.)



 (1) 함께 보는 눈으로


 아이를 옆지기가 돌보고 아빠 혼자 책방마실을 할 수 있으면 퍽 여러 시간 느긋하게 이 골마루 저 골마루 누비면서 책을 읽고 사진을 찍을 만합니다. 그야말로 이토록 호젓할 수 없습니다. 그렇지만, 집에서 홀로 아이하고 복닥일 옆지기가 걱정스러우며, 아픈 옆지기 곁에서 투정을 잔뜩 부릴 아이가 근심스럽습니다. 몸은 느긋하지만 마음은 바쁩니다.

 아이와 함께 책방마실을 하면 아이를 보랴 책을 보랴 사진기를 들랴 눈코 뜰 사이 없이 바빠맞습니다. 이리 보고 저리 살피면서 코로 책을 보는지 배꼽으로 사진을 찍는지 모릅니다. 그래도 책방마실을 하고 책을 고르며 사진을 찍습니다.

 옆지기랑 아이랑 함께 책방마실을 하면, 이는 책방마실이랄 수 없습니다. 그야말로 골치요 힘겨운 나날입니다. 그런데 온식구 나란히 책방마실을 한 까닭에, 세 사람 눈썰미로 책을 바라봅니다. 아주 살짝 들러 아주 살짝 책시렁을 둘러보지만, 사람마다 바라보거나 느끼는 책이 다르니까, 내가 못 알아챈 책을 옆지기가 알아채 주고, 옆지기가 못 알아보는 책을 내가 알아보아 줍니다.


.. 이른 아침 / 침대에 누운 채 본다 / 제쳐진 커튼 / 살없는 큰 유리창 밖은 / 한 폭의 수채화였다 / 잔잔히 빛나는 강과 / 흔들리는 숲과 / 제각각의 고풍한 집과 / 둘러 서 있는 건강한 나무들 / 그것은 복사본이 아니었다 ..  (스웨덴은 Doly의 그림을 낳고)


 새해맞이 인사를 하려고 경기도 일산에 자리한 옆지기네 어버이 댁에 찾아가는 길에, 서울 홍제동에서 살짝 쉽니다. 길이 고단하기도 하고, 어렵게 서울마실을 하는 마당이니, 다문 삼십 분이라도 헌책방에 들르고 싶습니다. 아이랑 애 엄마 모두 힘들기에 택시를 타고 가야겠다고 생각합니다. 전철 3호선을 타고 구비구비 돌다가는, 또 버스로 갈아타서 한참을 들어가야 하는데, 어둑어둑한 저녁나절, 먼길을 오느라 코피를 쏟으며 힘든 아이하고 전철과 버스로 두 시간쯤 가기란 까마득합니다. 둘째를 밴 애 엄마가 전철과 버스에서 시달리는 모습을 차마 볼 수 없습니다. 택시삯 이만오천 원을 아깝다 여길 수 없습니다. 이리하여, 어차피 택시 타고 가니까, 다리쉼도 하고 아이 쉬도 누이며, 아빠도 마음쉼을 하자고 생각합니다.

 홍제동 헌책방 〈대양서점〉에 들러 아이는 두 번 쉬를 누게 하고 사진 몇 장 겨우 찍으니, 어느덧 책방 문을 닫을 때입니다. 눈물이 핑 돕니다. 그러나 이렇게라도 책방마실 맛을 살짝 보니까 어디이냐 싶습니다. 옆지기는 눈이 아프고 머리가 어질어질해서 책을 볼 수 없다 하지만, 헌책방 아저씨하고 이야기꽃을 피웁니다. 이야기꽃을 피우다가 문득 책 하나 보여서 끄집어 내어 애 아빠한테 건넵니다. “이 책 어떤지 한번 보세요.”

 낯선 글쓴이가 쓴 시집 《아, 우리 비행기는 무사하다》입니다. 시집을 낸 곳 이름을 보니, 어쩌면 이 시집은 출판사에서 돈을 들여 내주었다기보다, 글쓴이가 돈을 내어 책을 펴내지 않았나 싶습니다. ‘자비출판’이라는 틀인데, 흔히들 ‘자비출판’ 책은 책이 될 만하지 않은 글을 묶는 책이라고 손가락질하곤 합니다. 그러나, 자비출판하는 책들 가운데에는 ‘장사하기 어려운 책’이 꽤 됩니다. 곧, 줄거리는 알차며 훌륭하거나 사랑스럽지만, ‘사람들이 기꺼이 돈을 내어 사서 읽기 어려운 책’이란 소리입니다. 이름값 없는 사람들 이름값 없는 글이라, 참으로 아름다우면서 살가운 이야기라 할지라도, 여느 사람들은 이런 책을 사서 읽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 낡은 의자 / 바닷가 돌멩이와 조개껍질 / 질그릇 조각 / 썩은 나무등걸 / 나뭇가지 휘어 만든 고기 뜰망 / 갈대와 지푸라기 / 그것들이 옷이나 보석이나 그림들과 / 그럴듯이 어룰렸다 // 스톡홀름 사람들은 / 손때 묻은 것들 / 크리스탈처럼 빛을 냈다 ..  (스톡홀름 사람들)


 우리는 책을 읽어야 합니다. ‘글쟁이 이름’이나 ‘펴낸곳 이름’이 아니라 책을 읽어야 합니다.

 누구나 책을 읽어야 합니다. ‘새로 나온 책’이나 ‘잘 팔리는 책’이나 ‘꾸준히 팔리는 책’이 아니라 책을 읽어야 합니다.

 사람들은 책을 읽어야 합니다. ‘추천도서’나 ‘명작도서’나 ‘권장도서’나 ‘고전’이 아닌 책을 읽어야 합니다.

 책은 그저 책입니다. 종이에 담은 삶이야기가 책입니다. 사람이 살아오며 겪고 부대끼며 헤아린 이야기를 담은 책입니다.

 연예인 김수미 님이 쓴 글이란, ‘김수미’ 이름 석 자 아닌 ‘할머니 나이까지 살아오며 겪고 치른 삶’을 담은 글일 때에 비로소 책입니다.

 대학교수라는 이름을 내걸어야 책이 되지 않습니다. 소장학자나 전문가라는 이름을 걸쳐야 책이 되지 않습니다. 그저, 나 스스로 아름답고 즐겁게 살아가며 사랑으로 나눌 이야기를 담으면 책이 됩니다.

 꾸민다고 책이 되지 않습니다. 덧바른다 해서 책이 되지 않아요. 수수하며 투박한 삶무늬 그대로 책이 됩니다.


.. 유람선으로 / 운하를 따라 / 암스테르담 둘러 본다 // 앞으로 쓰러질 듯 / 뒤로 넘어질 듯 / 옆으로 누울 듯 / 300년도 더 된 집들이 / 400년도 더 된 건물이 / 서로 몸을 기대고 / 서로 손을 잡고 / 다정하다 // 오래된 것은 / 낡은 것으로 여기었으나 / 늙은 것이 아름답다 / 늙은 것이 평화롭다 ..  (암스테르담에서)


 시집을 펼칩니다. 먼저, 옆지기가 한번 슥 펼쳐서 읽었다는 시부터 읽습니다. 다음으로 책장을 죽 넘겨 가운데 짬부터 하나하나 읽어 봅니다. 다시 처음으로 와서 읽습니다. 책장을 덮고 곰곰이 생각합니다.

 이 시집은 이렇게 시집 하나로 엮였으니 참 고맙구나 싶은 한편, 이 시집은 얼마나 사랑받았거나 ‘문학평론’을 받아 본 적 있는지 궁금합니다. 이 시집을 ‘한국 시문학’ 가운데 하나로 다룰 일이 있을까 없을까 궁금합니다. 교과서에 이 시집에 실린 시 가운데 하나라도 실을 일이 있을까 모르겠으나, 이 시들이 교과서에 안 실린다면, 이 시는 읽을 값이 없다고 여겨도 좋을까 궁금합니다.

 이름있거나 이름없는 모든 문학평론가 가운데 ‘문두근’이라는 시쟁이 한 사람 이름을 아는 분이 있을까 궁금합니다. ‘문두근 시문학 비평’을 어느 누구라도 한 적이 있는지 궁금합니다.

 이름 안 팔린 사람 시문학을 이야기해 본들 논문거리나 기사거리가 되지 않겠지요. 이름 안 판 사람 시집을 다루어 본들 논문집이나 문학평론책 같은 데에 실어 주지 않겠지요. 김용택이나 신경림이나 안도현 같은 이름 석 자쯤 되어야 사람들이 눈여겨볼 테지요. 《아, 우리 비행기는 무사하다》라는 조그마한 시집 하나하고 《그 풍경을 나는 이제 사랑하려 하네》라는 도톰한 시집 하나하고 나란히 꽂혔을 때, 여느 사람들은 어느 시집에 손을 뻗고 어느 시집을 돈을 치러 장만하거나 어느 시집을 즐거이 읽어 주려나요.


.. 우리 대한민국 / 외국의 누가 다녀갈 때 / 빌딩이 서고 / 고층 아파트촌이 생긴다 / 그곳에 살던 철거민들 / 생활을 잃고 / 투사가 된다 // 오늘도 / 타일랜드 사람들은 / 세계의 모든 사람들 보든 말든 / 세계의 모든 사람들 웃든 말든 / 메남강에 붙어 / 판잣집 난간에 / 오키드꽃 피운다 ..  (판잣집에서 오키드꽃 피운다)


 아주 짧게 책방마실을 마친 다음 밖으로 나옵니다. 옆지기네 아버님하고 어머님한테 무얼 선물해야 좋을까 이야기하다가 이 늦은 저녁에 무얼 살 수도 없으니 봉투에 맞돈을 담아 드리기로 하자면서 은행에서 돈을 찾습니다. 살림돈이 거의 바닥인데, 어찌저찌 우리들은 우리들대로 살 수 있겠거니 생각합니다. 옆지기네 식구들은 숫자가 많으니, 고기집에 들러 고기를 꽤 묵직하게 삽니다. 시골집 우리들은 고기 한 점 사먹을 일이 없으나, 옆지기네 어버이 댁을 찾아갈 때면 가금 고기를 장만합니다.

 전철역 옆에 선 택시를 불러 일산까지 들어가느냐고 여쭙니다. 택시를 탑니다. 택시를 타니 아이가 또 쉬 마렵다 합니다. 참말 쉬가 마려울까? 아이는 힘들고 졸린 나머지 쉬 마렵다고 얘기했다고 느낍니다. “그냥 바지에 싸도 돼.” 하고 말합니다. 아이는 얼마 뒤 눈을 껌뻑껌뻑하다가 픽 스러집니다. 아주 깊이 잠듭니다.

 택시는 자유로를 달리고 컴컴한 일산 맨 바깥쪽 논밭 가득한 마을로 접어듭니다. 드디어 옆지기네 어버이 댁에 닿고, 택시 일꾼한테 삼천 원을 더 드립니다. 이 깊은 곳까지 달려 주어서 고맙습니다.


.. ‘우리 나라도 양공주 산업시대가 있었지요.’ / ‘그렇죠. 그때는 양공주들이 외화를 벌어들였죠.’ ..  (나는 지금 발기할 달러가 없습니다)


 아이를 살살 안아 집으로 들어갑니다. 아이 신을 벗기고 자리에 눕힙니다. 아이는 잠들었다가 깨어납니다. 이모랑 삼촌이랑 할머니랑 할아버지랑 있으니, 졸린 몸이면서 억지로 일어납니다. 아빠는 힘들어 죽겠으니, 아이 곁에서 한동안 지키고 섰다가 먼저 자리에 드러눕습니다. 아까 헌책방에서 장만한 시집이며 몇 가지 책을 꺼내어 몇 쪽이나마 펼칩니다. 아무리 힘들어 곧 쓰러질 판이랄지라도 이마저 안 읽으면 난 바보가 된다고 생각하며 눈꺼풀에 힘을 줍니다.


 (2) 함께 사는 몸으로


 아이랑 함께 살아가며 책을 읽기란 퍽 힘듭니다. 아이한테 눈높이를 맞추어 책을 읽지 않고서는 아이하고 책을 읽을 수 없습니다.

 애 아빠이기 앞서 책쟁이로서, 저는 일찍부터 어린이책이랑 그림책을 즐겨 읽었습니다. 따지고 보면, 1997년 12월 31일에 군대를 마치고 사회로 돌아온 다음부터 어린이책이랑 그림책을 읽었습니다. 1998년 1월 4일인가 5일에 《몽실 언니》라는 동화책을 읽은 뒤부터 비로소 어린이책에 눈을 떴습니다. 어린이였을 때에는 어린이책다운 어린이책을 거의 한 가지조차 못 보고 컸는데, 뒤늦게 어린이책 참맛을 깨달아 ‘어른으로서 어린이책’을 참 많이 읽고 그러모았습니다. 애 아빠가 아니었을 때부터 그림책을 꽤 많이 사서 보고 모았습니다.


.. 지은 지 10년 안 되어 / 못살겠다 / 새 아파트로 이사가야겠다 / 투기를 하고 / 지은 지 20년 지나면 / 재개발이다 / 딱지를 팔고 사고 하는 / 우리 대한민국 / 달러가 많아서인지 / 자유주의 국가여서인지 / 그까짓 수리하는 일쯤 / 1년이면 OK / 아니 6개월이면 OK / 어느 아파트처럼 / 어느 다리처럼 / 무너지면 고치면 된다 / 대한민국, 만세 ..  (대한민국, 만세)


 옆지기와 함께 살아가기로 하던 무렵, 옆지기는 퍽 어린 동생을 집에서 돌보고 가르치면서 그림책을 많이 보아 왔음을 느낍니다. 옆지기가 어린 동생한테 읽히며 즐긴 그림책 가운데에는 제가 혼자서 좋아하며 즐기던 그림책하고 겹치기도 했지만, 안 겹치는 책도 많습니다. 두 사람 그림책이 하나로 모이니 꽤나 푸짐합니다.

 생각해 보면, 한 사람 눈썰미로 바라보는 그림책 깊이하고 두 사람 눈길로 살피는 그림책 깊이는 다를밖에 없겠지요. 나중에 아이가 조금 더 자라 책방마실을 할 때에 셋이서 책을 고른다면 ……, 아, 아무래도 주머니가 털털 털릴 뿐 아니라 이듬달 살림돈까지 앞당겨 쓰는 꼴이 될까 싶은데, 어찌 되었든, 세 사람 눈높이로 들여다보는 그림책 깊이라면 오늘 눈높이보다 한결 그윽하리라 생각합니다.


.. 우리 중 누군가는 저렇게 작은 왜놈들이니까 자동차도 작을 수밖에 없지 그렇게 말하였다. 나는 잠시 거리에 서서 경적 소리도 하나 없이 잘도 흘러가고 있는 꼬마장난감 자동차를 보면서 아니야 아니야 그런 이유에서는 아니야 속으로 연신 뇌까리었다 ..  (日本·日本人 1 - 자동차)


 시집 《아, 우리 비행기는 무사하다》를 생각합니다. 애 엄마가 알아보았기에 고른 이 시집 《아, 우리 비행기는 무사하다》는 애 아빠랑 애 엄마가 먼저 즐겁게 읽으며 우리 집 책꽂이에 건사할 수 있습니다.

 널리 사랑받았다든지 꽤 팔렸다든지 이렁저렁 여느 책방 책꽂이나 도서관 책꽂이에 꽂혔다면, 나중에 우리 아이도 어렵잖이 이런 시집 하나쯤 얼마든지 찾아 읽을 만합니다. 그러나, 이렇게 조용히 나와서 아주 조용히 잊히거나 묻힌 시집 하나란, 되찾기 몹시 어렵습니다. 앞으로 우리 아이가 스무 살 나이가 될 2027년에는 이런 시집 하나는 한 권조차 안 남을 수 있어요. 한두 권 남는다면 ‘옛책’ 대접을 받아 퍽 비싼값에 사고팔릴는지 모릅니다. 그런데, 잘 알려지거나 널리 팔린 시집이 아닌, 이냥저냥 조용히 스쳐 지나가며 묻힌 시집 하나를 옛책으로 다룰 헌책방이 있을는지요. 그저 ‘좀 묵은 책’이니 비싸게 사고팔 책으로 여기지 않을는지요.


.. 손님은 단 한 명도 없었다. 스탠드 바의 둥그런 높은 의자가 적당한 조명을 받고 있다. 그녀의 자세는 저 의자에 앉을 손님을 정중히 기다리고 있는 듯하였다. 새벽 2시였다 … 어디 한마디 거침새도 없었다. 그러나 앵무새 같지도 않고 그러나 녹음테이프를 재생하는 것 같지도 않았다. 때로는 버스 속에서 스스로 노래하여 박수를 받기도 하였다. 그녀 오늘도 5시간 20분 동안 자기의 손님에게 쉬지않고 무어라 말하고 있지 않을까 ..  (日本·日本人 3 - 세 명의 직장여성)


 시집에 실린 시를 거듭 읽어 봅니다. 문두근 님이 스웨덴이나 태국이나 러시아나 일본이나 중국을 다녀오며 느낀 이야기를 적바림한 시집 《아, 우리 비행기는 무사하다》에 담긴 이야기들은, 1993년과 2011년 사이에 얼마나 달라졌을까 헤아립니다. 열여덟 해 동안, 한국 삶터는 한결 아름다운 길로 접어들었을는지, 예나 이제나 마찬가지로 슬픈 길에서 허덕이는지 되뇝니다.

 우리들은 어떻게 살아가며, 글을 쓴다는 분들은 어떤 글을 쓰고, 시를 읽는다는 분들은 어떤 시를 읽을까 곱씹습니다.

 우리가 아낄 삶이란, 우리가 사랑할 이웃이란, 우리가 부둥켜안을 터전이란 어떤 얼굴이나 낯빛인지 생각합니다.


.. 그도 일본인처럼 키가 작았으나, 그도 일본인처럼 ‘하이’ 소리를 내었지만 캔맥주를 따서 건네주며 권하는 것은 우리 할아버지들과 도상하였다. 그런데 그의 손은 손톱이 뭉그러져 있었다. 그리고 손가락은 지문도 채취할 수 없을 듯 굳은살이었다. 그리고 작은 키에 비해 손은 거인의 것이었다. 그리고 손마디는 매듭진 새끼줄 모양이었다. 캔맥주를 건네주는 그의 손을 나는 두 손으로 어루만지었다 ..  (日本·日本人 4 - 재일교포의 손)


 헌책방에서 시집 하나 알아본 애 엄마는 그냥 시집 하나를 알아보았습니다. 잘난 시집도 아닌 못난 시집도 아닌, 그냥 시집을 알아보았습니다.

 아이를 낳아 키우는 우리들은 우리 아이가 잘난 아이라거나 못난 아이라고 여기지 않습니다. 그냥 아이입니다. 똑똑하다거나 어리숙한 아이가 아니라, 그냥 우리 아이입니다.

 우리는 이 아이를 여느 눈길로 바라보면서 사랑하고 껴안습니다. 엄마랑 아빠는 아이를 바라보며 함께 살아가듯, 책방마실을 하는 자리에서도 더 빼어나거나 남다르다 싶은 책이 아닌, 우리 식구들 조촐히 사랑하는 삶을 밝히거나 북돋울 예쁜 책을 살핍니다.

 책은 마음밥이지 돈이 아닙니다. 책은 마음동무이지 이름값이 아닙니다. 책은 마음뿌리이지 허울이 아닙니다. 좋은 책을 좋은 넋으로 받아들이자면, 우리 식구들부터 멧골자락에서 좋은 멧골사람으로 살아가야 한다고 느낍니다.


..九州의 거리는 유독 낯설지 않았다. 플라타너스 가로수, R형 보도 블록, 도로가의 배추꽃이 마치 내가 처음 가 보는 우리 나라의 어느 도시와 같은 인상을 주었다. 따라서 우리 나라의 가로수와 보도 블록과 도로가의 배추꽃이 모두 일본에서 고스란히 본떠진 것이 아닌가 싶은 의문이 생기었다 … 안내원이 굳이 서양식이라는 설명이 있었음에도 거기에는 한국 것이 있음을 체감하였다. 아, 그런데 지금 우리는 어느 한 부분도 틀림없이 일본 것을 고스란히 가져다 쓰고 있는가 이쯤 생각이 머물렀다 ..  (日本·日本人 9 - 가로수, 보도, 배추꽃)


 아, 지난밤부터 퍼붓던 눈이 이제서야 그칩니다. 날이 개고 해가 납니다. 눈이 그쳤으니, 눈삽과 빗자루 들고 눈을 밀고 쓸어야겠습니다. 오늘은 애 엄마가 몸을 씻도록 읍내 마실을 할까 싶은데, 새벽 네 시부터 잠에서 깨어 놀자며 복닥이던 아이가 여덟 시가 되어서야 다시 잠들었기 때문에, 읍내 마실을 나갈 수 있을까 모르겠습니다. 뭐, 오늘 못 나가면 이듬날 나가면 되지요. 오늘은 멧골집에서 눈이랑 신나게 어우러지고, 이듬날 천천히 오붓하게 눈길을 보독보독 밟으며 읍내 나들이를 하면 되지요.


.. 오슬로는 / 산책을 좋아한다 ..  (오슬로는)


 엄마랑 아이랑 아빠는 두 다리를 좋아하는 시골사람입니다. (4344.1.24.달.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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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이야 미안해


 아이가 저녁 일곱 시에 잠들었다. 아이는 저녁 아홉 시 이십 분쯤 깼다. 아빠가 아이 옆에서 함께 잠들었다면, 아이는 저녁 아홉 시 이십 분 즈음에 이래저래 칭얼대다가 옆에서 함께 잠든 아빠를 보면서 걱정없이 즐거이 잠을 이었겠지. 그러나, 아빠는 아이가 잠들었다면서 ‘그래, 이제부터 아빠도 글 좀 쓰고 책 좀 읽자고!’ 하는 생각으로 큰방에서 글을 쓰거나 책을 읽었기 때문에, 아이는 그만 잘 자다가 깨고 만다. 잘 자다가 깼기 때문에 여느 때하고 견줄 수 없이 짜증이 더한 몸짓으로 아빠를 힘들게 한다.

 아빠는 참 힘들다. 그러나, 아빠가 힘들다고 느끼는 만큼, 또는 아빠가 힘들다고 느끼는 만큼보다 더욱, 아이 네가 힘들겠지. 미안하구나. 네가 새근새근 잠들기는 했으나, 네 곁에 엄마가 함께 잠들었다면 네가 살짝 깼다 하더라도 다시 고이 잠들 수 있었겠지. 네 곁에 엄마랑 아빠 둘 다 없으니, 살짝 깼을 때 이렇게 자리를 털고 일어나서 울면서 칭얼댈밖에 없겠지.

 그깟 글조각이 얼마나 대수롭거나 대단하다고, 아빠가 이 글조각 붙잡는다며 너를 제대로 재우지 않으면서 이렇게 살아가는구나. 너 먹이고 아빠랑 엄마 먹자면서 글을 쓰는데, 아빠야말로 얼마나 벌어먹으려고 이렇게 글조각을 붙잡는지 모르겠구나. 아빠는 이렇게 글조각을 붙잡을지라도 우리 세 식구, 곧 네 식구가 될 우리 살림살이를 보듬기에도 꽤나 빠듯한데.

 그래도, 이렇게 네가 깨 주었으니, 아까 네 코를 솜막대로 살살 파면서 코딱지를 떼어낼 때 잠드는 바람에 네 이를 닦아 주지 못했는데, 이참에 네 이를 닦아 주면 되겠구나. (4344.1.21.쇠.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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