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지를 파는 아빠


 아이 코에 소금물을 먼저 두어 방울씩 넣는다. 아빠가 코를 킁킁거리며 아이도 코를 킁킁거리라고 이른다. 아이 가슴에 천손수건을 올려놓고 솜막대기를 아이 콧구멍에 살살 넣고 돌린다. 소금물로 콧속이 젖으면서 아이 콧속에 붙던 코딱지가 살며시 떨어지고, 솜막대기에 크거나 작은 코딱지가 콧물하고 엉겨붙는다. 때때로 아이한테 콧물 어린 코딱지를 보여준다. “이렇게 큼지막한 녀석이 콧속에 들어갔으니 숨쉬기가 힘들지.” 코를 말끔히 판 다음, 모처럼 귀도 파기로 한다. 아이는 아빠 허벅지에 풀썩 드러눕는다. 귓구멍에 찰싹 붙어 안 떨어지려 하는 귀지를 살살살 판다. 옆에서 뜨개질을 하던 애 엄마는 ‘무슨 귀지 파는데 그렇게 무거운 얼굴’이느냐며 사진기를 든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아이하고 붙어 지내지만, 정작 애 아빠는 아이하고 나란히 찍히는 사진이 거의 없다. 아니, 한두 장 있을까 말까. 누군가 다른 사람이 찍어 주어야 애 아빠가 아이하고 복닥이는 나날을 사진으로 담는다만, 이렇게 해 주는 사람이란 없다.

 드디어 굵직하거나 길다란 귀지를 파낸다. 아이한테 귀지를 보여준다. “오, 나왔져?” “응, 나왔어. 이제 귀지도 나왔으니까 아버지가 하는 말 좀 잘 들어 줘.” 아이는 뒷말에는 대꾸를 하지 않는다.

 아이 이를 닦이고 손발을 닦아 주며, 낯을 닦는다. 수건으로 손·발·낯을 훔친다. 아이는 폴짝폴짝 뛰면서 “벼리 이 닦았어요. 손 닦았어요. 발 닦았어요.” 하고 제 엄마한테 가서 외친다. 그러나 저녁 열 시가 넘고 열한 시가 되도록 잠들려 하지 않으니까 아주아주 괴롭다.

 지난날 우리 어머니는 두 아들 코며 귀며 어떻게 다 파 주고, 손톱과 발톱 어떻게 다 깎아 주며, 손발이랑 낯을 어찌 다 씻겨 주었을까. 한 아이 귀지를 파는 데에도 등허리가 쑤시고 눈이 따끔따끔하다. 뒷덜미가 저리고 손가락이 떨린다. (4344.2.27.해.ㅎㄲㅅㄱ)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반듯하게 누워서 잔다


 반듯하게 누워서 잔다. 몸을 옆으로 돌리지 못한다. 그대로 쭉 뻗어서 잔다. 누운 동안 내 몸은 방바닥에 찰싹 달라붙는다. 옆으로 살짝 돌려 모로 눕고도 싶으나, 이렇게 누우면 하나도 개운하지 않다. 그저 등바닥과 발과 손 모두 방바닥에 척 대고 누울 뿐이다. 몸이 무거울 뿐더러 찌뿌둥해서 조금도 움직이지 못한다. 그렇지만 잠결에 아이가 끄응 소리를 내면 ‘아하, 오줌을 누었나 보구나.’ 하고 생각하면서 부시시 일어난다. 아이 기저귀에 손을 댄다. 폭삭 젖었다. 바지까지 젖었다. 기저귀를 풀고 바지를 벗긴다. 새 기저귀로 잠지 둘레를 톡톡 치며 오줌 기운을 닦는다. 새 기저귀를 댈 때에는 한 번 뒤집어서 댄다. 바지를 입힌다. 이불을 씌운다. 그러고 다시 눕는다. 언제나처럼 새벽 일찍 깬다. 새벽이라기보다 깊은 밤에 깬다. 두어 시나 서너 시를 새벽이라 할 수는 없을 테니까. 일어날 때에는 또 벌떡 일어난다. 잠자리에 드러누울 때에는 어쩜 이리도 죽은 듯이 자더니, 일어날 때에는 말짱하게 일어난다. 그러나 해가 기울어 깜깜한 시골자락 밤이 다시 찾아들면, 나는 마치 흙으로 돌아갈 사람처럼 꼼짝없이 뻗고야 만다.

 내가 반듯하게 살아가서 반듯하게 누워서 잠들지는 않는다. 하루하루 이 일 저 일에 치이면서 그저 모두를 잊고 잠들 뿐이다. 어쩌면, 아이를 돌보다가, 옆지기를 건사하다가, 나 스스로 나 하고픈 일을 한다고 하다가, 이렇게 어느 날 소리 없이 말끔하게 흙으로 돌아갈 수 있을까. 내 마지막 꿈은 집에서 조용히 숨을 거두어, 내 주검을 나한테 밥을 내어준 흙으로 돌아갈 수 있는 일이다. 꼭 무덤을 쓴다기보다 집 둘레 오래된 감나무 곁에 묻어 감나무가 더 싱그럽게 기운을 받아 새 감알을 소담스레 낼 수 있도록 거름이 되고 싶다. 내가 우리 시골집 감나무 곁에서 거름이 된다면, 내 아이는 감알을 더 맛나게 즐길 수 있겠지. (4344.2.16.물.ㅎㄲㅅㄱ)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살림은 가난하지만 마음은 따뜻한 노래벗
― 폴 란돌미, 《슈베르트》



- 책이름 : 슈베르트
- 글 : 폴 란돌미
- 옮긴이 : 김자경
- 펴낸곳 : 신구문화사 (1977.5.10.)
- 판 끊어짐. 헌책방에서만 찾아볼 수 있음.



 (1) 우리가 모르는 ‘가난뱅이’ 슈베르트


 일본 만화쟁이 ‘니노미야 토모코’ 님이 그린 만화 《노다메 칸타빌레》를 보기 앞서까지는 ‘노래를 짓는 사람’이 어떠하고, ‘지어진 노래를 부르거나 들려주거나 이끄는 사람’이 어떠한 줄을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아주 동떨어진 곳에서 살아가는 사람으로 여겼고, 나와는 아주 멀리 떨어진 사람들이겠거니 여겼습니다. 모르는 노릇이지만, 여느 사람들 또한 글을 쓰거나 그림을 그리거나 사진을 찍는 사람을 놓고도 ‘나와는 동떨어졌겠지’ 하고 생각하지 않으랴 싶습니다. 연극을 하거나 영화를 하는 사람들을, 공연을 하는 사람들을, 춤을 하는 사람들을 ‘세상과 동떨어진 채 사는’ 사람으로 여기지 않으랴 싶습니다.


.. 얼마나 기뻤을까! 이제 대기를 가슴이 벅차도록 마셔들일 수 있다. 믿을 수 없을 정도다! 자유! 드디어 자유로 와졌다. 언제든지 마음이 내키면 작곡할 수 있는 자유! 그리고 먹고살아야 한다. 슈베르트는 개인 교수의 일자리를 찾은 끝에 몇 군데 일자리를 얻었으나 거의 무수입에 가까웠다 ..  (62쪽)


 곰곰이 돌아보면, 제 또래 동무를 비롯하여 선배나 후배가 저를 바라보는 눈길이 남다릅니다. 동네사람이 바라보는 눈길이나 구멍가게 할매 할배가 바라보는 눈길도 남다릅니다. 전철길에서 스치는 사람이나 자전거길에 엇갈리는 사람 또한 저를 남달리 바라봅니다.

 차림새며 생김새며 ‘여느 사람 모습’이 아니니까요. 또한, 제가 하는 일이란 여느 사람이 하듯 ‘돈을 버는 일’하고는 멀리 떨어져 보이니까요. 더구나 제가 글을 쓰는 사람이라고 할 때면 으레 ‘문학을 하나요?’ 하고 물으며, ‘우리 말 이야기를 쓴다’고 하면 ‘우리 나라에 그런 글을 쓰는 사람이 있는지’ 궁금하게 여깁니다. 무엇보다도 이런 글을 써서 밥벌이가 되겠느냐고, 애도 있는데 ‘돈 되는 글을 써야’ 하지 않느냐며 따끔하거나 따스하게(?) 도움말을 건네줍니다.


.. 1818년 11월 슈베르트는 비인으로 돌아갔다. 친구들과 다시 만나고, 그들에게 작곡한 작품 전부를 보여줄 수 있다는 생각만으로도 기쁨에 가슴이 벅찼다 … 그는 방과 피아노를 빌 돈이 없었다. 그것은 친구들이 마련해 주었다. 처음에는 슈파운의 집에 가서 그의 방의 침대를 우선 이용했다. 다음은 쇼버가 자기 어머니의 집에 하숙을 마련해 주었다. 슈베르트는 반 년이란 세월을 폰 쇼버 부인네 집에서 더부살이를 했다. 그 다음부터는 마일호퍼, 외고집이고 우울한 마일호퍼의 가난하고 쓸쓸한 방에서 동거했다. 두 친구는 모든 것을 공동으로 하고, 가난 속에서도 대단히 행복했다 … 그는 아침 여섯 시부터 걸상에 마주앉아 끈이 보이는 낡은 옷을 입고, 그대로 오후 한 시까지 작곡했다. 이따금 파이프 담배를 태우거나 찾아온 친구들과 잡담하기 위해 일손을 쉴 뿐이었다. 방은 작았으나 겨울에는 덥지 않았다. 화기가 없는 것이다. 슈베르트는 꽁꽁 얼었으나 창작욕에 불타 추위를 몰랐다. 사람이 와도 때로는 “재미 어때?” 하고 물을 뿐, 붓을 놓지 않을 때도 있었다 ..  (65∼67쪽)


 제가 하는 일 이야기가 ‘사진찍기’로 넘어오면 골치가 더 아픕니다. 돈 되는 글을 안 쓰는 주제에, 사진 또한 돈 안 되는 사진만을, 더구나 누가 알아주지 않는 사진만을 찍기 때문입니다. 그래도 때때로 ‘뜻있는 사진을 찍는다’며 힘을 북돋워 주는 분이 있습니다만, 말로는 힘을 북돋워 주어도 말로만 그치기 때문에 저로서는 손 벌릴 자리가 모자랍니다(그렇지만 꼭 한 분이 고맙게 제 사진을 꾸준하게 사 주시고 있어서, 이분 힘으로 즐겁게 버팁니다).

 제 사진찍기를 옆에서 지켜보는 분들이 으레 이야기합니다. ‘이제 그 사진감은 그만 찍어도 되지 않느냐’고. 이제 그 사진감은 그쯤으로 끝내고 ‘돈 될 만한 새 사진감을 찾으라’고.

 당신이 걸어온 지난 발자국을 돌이켜보면서 들려주는 말씀이요, 젊은내기가 집식구 애먹이지 말라는 말씀인 줄을 느끼며 고맙다고 인사를 합니다. 그렇지만 제가 골라잡은 사진감은 몇 번 찍고 그칠 사진감이 아닙니다. 이것저것 찍는 가운데 내 온삶을 바칠 만한 사진감이 무엇인가를 헤아리면서 깨달은 사진감입니다. 첫발을 디딘 날부터 마지막발을 디딜 날까지 고이 이을 사진입니다.

 돈이 안 되어도 찍는 사진이며, 돈이 되어도 찍는 사진입니다. 이름이 팔리지 않아도 찍는 사진이며, 이름이 팔려도 찍는 사진입니다. 아무도 안 찍어도 찍는 사진이며, 누구나 다 찍어도 찍는 사진입니다. 왜냐하면 저는 제 사진감인 책과 헌책방과 골목길과 우리 아이한테 쏙 빠져들었으니까요.


.. 슈베르트는 여전히 우울했다. 건강은 다시금 좋지 않았다. 게다가 돈도 없었다. 친구 집에 더부살이할 때와는 달리 방세도 물어야 했다. 그것을 메워 나가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고난을 겪을 때는 언제나 그렇듯 그는 일기를 꺼내어 생각되는 환멸을 기록하였다. “아무도 남의 괴로움이며, 기쁨을 의아해하지 않는다. 언제나 사람은 서로 마주보며 걸어간다고 믿으면서, 사실은 서로의 옆을 걷고 있다. 오, 그것을 깨닫는 자의 괴로움! 내 고통만으로써 창조된 작품이 사람들을 가장 즐겁게 하는 작품이다.” … 그의 작품은 팔리지 않았다. 〈아름다운 물방앗간의 아가씨〉는 전혀 성공하지 않았다. 화려한 로시니 앞에서는 너무나 단순하고 내적이고, 너무나 도이치적인 것으로 간주되었다. 점잔뺀 멜로디가 더 좋았던 것이다 ..  (118∼119쪽)


 어린이문학을 제 나이보다 더 긴 나날에 걸쳐 하신 어르신이, 언젠가 저한테 ‘최종규 씨가 쓴 글을 보니까 괜찮던데, 이제는 잡문보다는 본격문학을 해 보지 그래?’ 하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제 글을 애써 읽어 주시면서 괜찮다고 받들어 주시니 고맙기 그지없으며, 더욱이 본격문학을 할 만큼 밑바탕이 다져졌다고 하시니 더없이 즐겁습니다. 그런데, 저로서는 본격문학을 할 마음이 아직 없습니다. 어쩌면 앞으로도 없을는지 모르나, 조금 더 두고볼 노릇이라고 느낍니다. ‘자, 이제부터 문학을 써 볼까’ 하며 마음을 먹는다고 해서 나오는 문학은 아니라고 느끼거든요. 문학으로 느끼며 쓰든 문학으로 느끼지 않으며 쓰든, 내 마음과 몸이 오롯이 문학이 되어야 문학이라는 글 하나가 솟구쳐나오지 않느냐 싶습니다. 내세우는 문학이 아니라 스스로 즐기는 문학이며, 팔아먹으려는 문학이 아니라 이웃과 기꺼이 나누려는 문학이기 때문입니다.

 잡스러운 제 글은 한낱 잡스러운 글에 지나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누리에는 잡스러운 글을 쓰는 사람도 하나쯤은 있어야 하지 않느냐 생각합니다. 이 몫을 아무도 안 하려 한다면 제가 해도 괜찮다고 느낍니다. 잡스러운 글이라 하지만 홀가분한 글이며, 잡스러운 글이란 소리를 들어도 스스로 울타리를 치지 않는 글입니다.

 우쭐거리지 않는 글, 아니 우쭐거릴 수 없는 글이 잡스러운 글입니다. 누군가 깎아내리거나 깔아뭉개도 얼마든지 깎이거나 깔리는 글이 잡스러운 글입니다. 그렇지만 스스로 좋아하거나 즐기지 않으면 쓸 수 없는 잡스러운 글입니다. 돈을 망태기에 그득 담아 떠밀어도 쓸 수 없는 잡스러운 글입니다.


.. 그러나 놀고만 있을 순 없었다. 어떻게든 돈을 벌어야 했다 … 그러나 슈베르트는 그것을 거절하여 부친을 낙담케 했다. 그는 독립을 사랑하는 나머지 거절했다. 자유로이 작곡을 계속하기 위해서, 그리고 내성적이어서. 하긴 지위에 앉기 위해서는 약간 시험 비슷한 것이 있어서 슈베르트는 그것을 두려워한 것이다 … 어지간히 쪼들리지 않는 한 그다지 싸구려로 팔지 않았다. 그러나 어차피 그 방면으로부터의 수입이란 미미한 것이었다 … “누구십니까?” “작곡가인 프란쯔 슈베르트입니다.” “모르겠는데요.” “악장님도 제 곡을 들이신 적이 있다고 생각합니다만. 무슨 리이드 같은 걸.” “전혀 없습니다.” 아무래도 이야기가 잘 안 된다. 슈베르트는 아이프러에게 〈미사곡〉을 맡겨 두었다. 몇 주일 지난 후 아이프러는 말했다. “당신의 미사곡은 꽤 좋습니다. 하지만 황제 폐하가 좋아하실 스타일이 아니군요. 폐하께서는 줄거리를 재미있게 짠 푸가를 좋아하십니다.” 슈베르트는 인사를 하고 돌아가면서 생각했다. “황제 식의 스타일로 쓸 수 없는 사람은 손해군!” ..  (134∼136쪽)


 만화책 《노다메 칸타빌레》를 펼치면, 꼭 저 같지는 않지만 저와 닮았다고 느낄 만한 젊은내기들이 그득그득 나옵니다. 마땅한 소리이지만, 저보다 훨씬 훌륭하면서 아주 뛰어난 솜씨를 선보이는 젊은내기입니다. 이네들과 저 따위를 견줄 순 없습니다. 다만, 만화를 넘기는 내내 ‘만화에 나오는 이들이 다루는 악기’를 ‘제가 다루는 볼펜과 사진기와 자전거’로 바꾸면서 생각합니다. 가난하면서 하나도 가난해 보이지 않고, 부자이면서 하나도 부자로 보이지 않는 수많은 ‘만화책에 나오는 노래벗’님들 삶에 흠뻑 젖어듭니다.


 (2) 우리가 아는 ‘가곡왕’ 슈베르트


 헌책방에서 손바닥책 《슈베르트》를 처음 만난 때는 2000년을 조금 넘긴 어느 날입니다. 그러나 이때 만난 ‘신구문화사 손바닥책’ 《슈베르트》는 파본이었습니다. 겉은 슈베르트 이야기라고 찍혔지만, 몸글은 베토벤 이야기가 찍혔더군요.

 1974년부터 나온 신구문화사 손바닥책 목록을 살피면, 슈베르트를 비롯해 링컨, 로베스피에르, 톨스토이, 도스토예프스키, 페스탈로찌, 고호, 퀴리 부인, 쇼팽, 밀레, 세잔, 베토벤 같은 사람들 이야기가 있습니다. 모두 150쪽 살짝 넘는 조그마한 판으로 묶였습니다. 하나같이 판이 끊어져서 다시는 찾아볼 수 없는 책입니다. 프랑스에서 손꼽히는 로맹 롤랑이 쓴 《톨스토이》마저 나라안에서 만나기란 아주 힘듭니다.

 이리하여, 파본 아닌 《슈베르트》를 만나기까지 여러 해가 더 있어야 했고, 2006년 9월에 드디어 말끔한 녀석으로 만났습니다.

 헌책방 책시렁에서 《슈베르트》를 알아보고 끄집어낼 때 이 기쁨이란! 가슴벅참이란! 떨림이란! 짠함이란!


.. 슈베르트가 서먹서먹해 한 곳은 에티켓이 까다롭고 격식만 따지는 상류 사회였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서, 묵묵히 사람들이 주목하지 않을 구석에 숨어 있었다 … 가고 없는 벗 대신 새로 온 사람은 프란쯔의 소문에 끌려 그와 접촉하는 것을 자랑으로 삼는 학생이며 관리였다. 유감스럽게도! 평범하고 용렬한 친구들뿐이어서 그들의 회화에 슈베르트는 우울해졌다. “그들은 경마, 격검, 말이나 개에 대해서밖에 이야기하지 않는다.” 아아! 지난날의 아름다운 얘기들이여! 예술, 시의 낭독, 문학과 음악의 신작에 대한 피가 끓게 하는 논의 등. 그런 것은 이제 끝나 버린 것이다 ..  (71, 105쪽)


 그러나 2006년 9월 무렵은 시골살림을 접고 어디론가 새 살림자리를 찾아야 하던 때라 책을 제대로 펼칠 만큼 느긋하지 않았고, 한 해 남짓 책꽂이 잘 보이는 자리에 꽂아 두기만 하며 보냈습니다. 그러고 2007년 4월, 비로소 고향 인천으로 돌아와 자리를 잡으면서 즐겁게 책장을 넘깁니다.

 처음 안 지 예닐곱 해 만에 겨우 찾아내어 읽는 《슈베르트》는 줄거리도 줄거리이지만, 책에 바친 다리품과 땀방울이 곁들였으니, 한 줄 두 줄 차곡차곡 온몸에 배어듭니다. 한참 책알맹이가 온몸으로 빨려들 무렵 화들짝 놀라 책을 덮습니다. 한꺼번에 너무 많이 빨려들면 아쉽기 때문입니다.

 학교에서 교과서 한 권을 한 해에 걸쳐서 떼듯, 조그마한 책 《슈베르트》를 며칠 걸러 몇 쪽씩 야금야금 읽습니다. 이렇게 하여 2008년 3월에 한 번 다 읽어냅니다. 이 뿌듯함을 가슴으로 꼭 껴안으면서 셈틀이 놓인 책상맡에 그대로 두고, 몇 달 뒤 다시 집어들어 한 번 더 차근차근 새겨 읽습니다. 두 번째 읽을 때에는 처음 읽을 때에 놓친 대목이 보이는 한편, 《슈베르트》와 겹쳐서 보는 만화 《노다메 칸타빌레》 스물한 권이 새삼스럽게 다가옵니다.

 만화책을 보면, 주인공 노다메가 신이치하고 ‘피아노 함께 치기(연탄)’를 하고 싶어 그토록 조르고 바라는데, 왜 ‘함께 치기’를 하려고 했는가 하는 대목을 《슈베르트》를 읽으며 눈물 한 방울과 함께 깨닫습니다. 슈베르트는 무엇보다도 ‘당신을 알아주고 함께 가난을 짊어지며 살아가는 노래벗하고 함께 악기를 치거나 켜거나 두들기는 일’을 몹시 좋아했습니다. 이 보람으로 살았다고 해도 틀리지 않습니다.


.. 슈베르트는 쉬지 않고 썼다. 언제나 돈에 쪼들리면서 큰 보수도 없는 일을 몸을 걱정하면서 이럭저럭 해냈는데, 그는 또한 작곡하는 데에 행복을 느끼고 좋은 친구들과 같이 비인에서 생활하면서 그들 중의 몇 사람에게 이해받는 데에 행복을 느꼈던 것이다 ..  (137쪽)


 만화와 글로 만나는 슈베르트는 가락으로 만나는 슈베르트와 사뭇 다릅니다. 만화와 글로는 만나도 가락으로 만나지 못한다면 헛물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그런데, 가락으로만 만나고 만화와 글로는 못 만나는 슈베르트라면, 이 또한 헛물이 아니랴 싶어요. 아니, 슈베르트 온 모습을 못 보는 셈이 아니랴 싶습니다. 제도권 학교 음악 교과서에 적힌 ‘가곡왕’이라는 이름으로만 읊는 슈베르트로 그치지 않을까 싶습니다.


.. 그 800굴덴을 슈베르트는 다 써 버린다. 피아노를 산 것이다. 그때까지 그는 자기의 것을 가지지 못했었다. 빌 돈도 없을 정도였다. 조그만 방에 새 악기가 들어왔을 때의 기쁨! 하긴 그래서 음악회를 연 것은 아니었다. 하나 그런 것은 아무래도 좋다. 우선 무엇보다 음악이다. 할 수 없지 않은가! 또 가난하게 살지 뭐. 내년에도 또 해서 이번에야말로 똑바로, 그야말로 아주 타산적으로 쓰자. 그때의 수입은 그날그날 꼭 필요한 데에만 쓰자 ..  (153쪽)


 옆지기와 함께 성당 나들이를 할 때에도, 미사를 기다리면서 《슈베르트》를 넘기곤 했습니다. 조그마한 책에 담긴 이야기는, 거룩한 책에 담긴 이야기 못지않게 가슴을 쿵쾅쿵쾅 뛰도록 이끌었습니다.

 이를테면, 제가 여러 해에 걸쳐 적금을 부은 돈으로 렌즈를 장만하거나 사진기를 마련하거나 필름스캐너를 들여놓던 짜릿함은, 슈베르트가 애써 얻은 돈으로 피아노를 처음 마련하던 짜릿함하고 같은 자리에 있었구나 하고 느끼면서 펄떡펄떡 뜁니다. 오늘 저녁 끼니가 걱정되어도 ‘이 책을 안 사고 뒤돌아서면 몇날 며칠이 아니라 죽는 날까지 땅을 치며 안타까워할는지 몰라’ 하는 마음으로 책값을 쓴다고 주머니를 탈탈 털던 눈물겨운 보람은, 슈베르트가 몇 푼 벌지 못하는 살림에도 오선지를 겨우 장만하고 새 노래 짓기에 바쳤던 눈물겨운 삶하고 비슷한 자리에 있었구나 하고 느끼면서 두근두근 떨립니다.


.. 11월 3일에는 형 페르디난트의 〈레퀴엠〉의 연주를 위해서 헤르나루스 성당에 간신히 갔으나 돌아올 때는 몹시 피로감을 느꼈다 … 그래도 그는 계획을 품고 있다. 지몬 제히터라는 이론가에게 새 작곡법을 배우려고 그 문하생으로 들어갔다. 그는 이미 대가이면서 자기의 지식 부족을 느끼고 학교로 돌아가려고 하는 순진성을 잃지 않았던 것이다 … 슈베르트는 무엇보다 리이드 속에서 찾아야 한다. 베에토벤의 일생은 자기 자신을 갱신하기 위한 끊임없는 노력의 일생이었다. 한 작품을 다 쓰고 나면 그는 올가미를 쓴 듯한 일종의 속박에서 벗어나려고 한 듯하다. 그는 굴레를 벗으려 한다. 한 번 획득한 수법에 틀어박히거나 같은 일을 되풀이하거나 하지 않고 그는 습관의 지배에서 벗어나서는 안 된다. 그는 새 길을 찾고, 새 기법을 연마하고, 새 이상의 실현에 힘쓴다. 슈베르트에게는 어떠한 갱신도 발전도 없다. 최초의 날부터 그는 그 자신이며 최후의 날에 이르기까지 17세 때의 그대로이다 … 슈베르트는 보다 세밀히 감응한다. 바다, 강, 산 등도 그의 작품 속에서 따로따로 가려서 그리고 있다 … 베에토벤은 대자연을 초월하지 않는다. 그 웅대한 세계를 그는 감수하고 있다. 슈베르트에게는 그 대자연도 좁은 듯이 생각된다. 그는 환상적인 세계로 도피한다 … 슈베르트에게 있어서의 지성은 모두가 상상력이다 ..  (134, 160∼163쪽)


 돈이 없어도 책을 사야 합니다. 돈이 없어도 사진을 찍어야 합니다. 그림쟁이는 돈이 없어도 붓과 물감과 종이를 사서 그림을 그려야 합니다. 노래쟁이는 돈이 없어도 악기를 장만하고 오선지를 장만하며 노래를 켜야 합니다. 농사꾼은 돈이 없어도 씨앗을 마련하여 심고 가꾸며 거두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글쟁이이든 그림쟁이이든 노래쟁이이든 농사꾼이든, 저마다 제 글과 그림과 노래와 흙을 사랑하니까요. 사랑이 담긴 눈물로 살고, 믿음이 서린 웃음으로 살아가니까요.


 (3) 우리 나라에는 누가 슈베르트처럼


 두 번째로 《슈베르트》를 덮으며 세 번째로 되읽을 날을 손꼽습니다. 몇 달 뒤에 한 번 더 읽을는지, 다른 못 읽은 책을 먼저 읽고 나중에 좀 느긋해지면 되읽을는지 헤아립니다. 헌책방 나들이를 하며 다시금 《슈베르트》를 만날 수 있다면, 기꺼이 한 권 더 장만하여 내 가장 아끼는 마음벗한테 선물해 볼까 하고 생각합니다. 아니면, 이 작은 책을 어떤 헌책방 책손이 알아보고 사들일까 하고 지켜보아도 괜찮으리라 생각합니다.


.. 슈베르트는 전혀 반대로 혼자서는 살 수도 없었고, 대자연만을 관조하면서 소일할 수도 없었다. 자아 속에 잠겨 버릴 수도, 사람을 초월하여 ‘커다란 전체’에 직접적으로 맺어질 수도 없었다. 그는 유쾌한 친구들에게 둘러싸이는 활달하고 떠들썩한 환경이 필요했다. 그는 속인들과의 교제가 필요했다. 그것도 그가 너무 내성적이어서 가까이 할 수 없었던 왕후 귀족과의 고제가 아니라, 그렇게 점잔빼지 않는 평민들과의 교제이다. 그는 그러한 곳에서 인간과 그 풍속ㆍ감정ㆍ정열 등을 넓게 갖가지로 알고, 그 예술을 베에토벤이 몰랐을 천차만별한 성격과 감동의 뉘앙스로 채색하고 있다 … 그는 차차 다른 학과에는 게을러지고 가장 좋아하는 음악을 위해서만 살려고 하게 되었다. 단 한 가지 곤란한 것은 5선지가 수중에 없고, 그것을 살 돈도 없는 것이었다. 그래서 백지에 선을 그었다. 그러나 그 종이도 없을 때가 가끔 있었다. 슈파운이 귀중한 5선지를 조심스레 대어 주면 슈베르트는 순식간에 그것을 다 써 버렸다 ..  (19, 21쪽)


 그나저나, 우리 나라에서는 슈베르트와 같은 노래쟁이로 누구를 꼽을 수 있을까 궁금합니다. 가곡을 써야지만 슈베르트와 같은 노래쟁이이지 않습니다. 삶이며 매무새이며 넋이며 몸짓이며 생각이며가 슈베르트와 같은가 다른가에 따라 달린 일입니다. 저한테 주어진 모두를 슈베르트가 제 깜냥껏 받아들이고 삭이며 살았듯, 이 땅 우리 나라에서 우리 모두한테 주어진 길을 스스로 삭이고 가다듬으며 걸러내어 노래 한길을 걷는 어떤 노래님이 있을는지 궁금합니다. 스스로 고운 노래를 즐기면서 우리 모두한테 살가운 노래벗이 되어 줄 사람으로 누가 어디에서 어떻게 땀을 흘리며 애쓸는지 궁금합니다.


.. 슈베르트는 연탄의 이점을 교묘히 끄집어냈다. 게다가 슈베르트는 절대로 고독한 사람이 아니다. 피아노를 친구들과 함께 친다는 것은 유쾌한 일이었다 … 그는 청중에게 “그의 손가락에 의하여 건반은 노래하는 소리가 된다”는 말을 듣는 것을 무엇보다도 기뻐했다 ..  (47쪽)


 어릴 적부터 장만하여 틈틈이 듣는 ‘흘러간 대중노래’인 장덕 테이프, 우순실 테이프, 신정숙 테이프, 이지연 테이프, 동물원 1집 테이프, 김현식 테이프, 한대수 테이프 들을 들으면서 생각에 잠깁니다. 슈베르트가 제 땅에서 제 이웃과 나눈 노래란 누구한테 즐거웁자고 빚은 노래이며, 그무렵 슈베르트가 지은 노래는 오늘날 우리들이 짓는 어떤 노래와 같을까를 곱씹습니다. ‘가곡왕’이라는 이름이 붙었으나, 이 이름보다는 ‘노래를 사랑한’ 사람이요, ‘노래를 삶으로 받아들인’ 사람이라는 이름이 한결 어울리지 않을까 싶은 슈베르트인데, 오늘 우리한테 슈베르트 노래는 어떻게 다시 태어날 수 있을까 하고 생각해 봅니다. (2009.4.17.쇠.)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2008년에 쓴 글입니다. 

‘가난’이라는 고마운 축복을 내버린 우리들
― 김영교 신부 쓴, 《가난한 마음》


- 책이름 : 가난한 마음
- 글쓴이 : 김영교
- 펴낸곳 : 성바오로출판사 (1979.11.15.)


 (1) 겨울나기


 오늘은 어제보다 따뜻합니다. 그러나 우리 식구가 지내는 방 온도는 그예 1도. 마루이자 부엌은 영 밑으로 육 도. 엊저녁에는 영 밑으로 팔 도였으니 조금 올라갔습니다. 옆지기는 두꺼운 겉옷을 입고 이불을 덮고 앉아서 책을 읽습니다. 저는 시린 손을 서로 부여잡고 비비거나 엉덩이 밑에 깔거나 바지주머니에 넣으면서 녹여야 비로소 책을 읽고 글을 씁니다.


.. 넘치는 물질문명 속에 스스로를 세계의 중심으로 자처하는 유럽인들이다. 국민의 대부분이 사랑의 계명을 안고 있는 가톨릭인들이기도 하다 … 교회는 세상의 빛이라고 하지만, 그 빛은 여전히 됫박 밑에 숨겨져 있다 … 진리와 정의를 구현하기 위한 교회는 시달려 보지도 않은 채 적응하는 현명을 배워 불의와 평온하게 공존하고 있다. 몇몇 항거의 의지는 그냥 우스운 사람으로 변해버리는 가운데 정의에의 외침마저 멀어져 가고 있는 게 아닐까 ..  (117∼118쪽)


 어릴 적, 국민학교 이학년이나 삼학년쯤으로 떠오릅니다. 그때 우리가 살던 집은 연탄으로 불을 때는 5층짜리 나즈막한 아파트였습니다. 한겨울인 12월 겨울방학이었습니다. 연탄값도 만만치 않아서 형과 내가 지내던 방에 불을 넣을 수 없었는지, 아버지가 우리를 불러서 안방에 모여 앉습니다. 바닥에는 늘 이불이 깔렸는데, 그 이불에 아버지 어머니 형 나, 이렇게 네 식구가 쪼르르 기어듭니다. 마루에 온도계가 있었는데 영 밑으로 십 도쯤 되었습니다. 오들오들 떨면서도 눈이 와 주면 밖에 나가서 동무들하고 눈싸움을 하며 놀 텐데 하고 생각했습니다.


.. 자기의 양심을 찾기 위한 괴로움이라면 그건 참으로 가치있는, 그리고 꼭 겪어야만 하는 괴로움이다 ..  (21쪽)


 제가 사오학년쯤 될 무렵이었던가, 연탄 때는 나즈막한 아파트마을에 ‘기름 보일러’ 바람이 불었습니다. 그나마 ‘있는’ 집 몇 군데에서 기름 보일러를 놓는데, 그 집에 놀러갈 때면 그렇게 따뜻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기름값이면 연탄값과 견주어 엄청 비싼 값. 보일러 값도 장난이 아니었어요. 더구나 보일러를 놓자면 방바닥이며 마루장이며 온통 뜯어낸 다음 구리파이프를 새로 깔고 시멘트로 바닥마감까지 다시 해야 했으니 돈이 꽤 많이 들어가는 일이었습니다.

 그래도 연탄 한 장 쓱 밀어넣어서 겨울나기를 하기에는 몹시 추웠으니, 기름 보일러 집이 차츰 늘어납니다. 보일러 놓는다며 옷장이며 책꽂이며 갖은 짐바리를 아파트 앞 너른마당에 죄 내다 놓고 비닐을 덮어씌운 뒤 이웃집에 가서 며칠 묵는 집이 늘어납니다. 우리 이웃집들도 우리 집으로 많이들 ‘피난’을 와서 지냅니다.

 그러고 육학년쯤 될 무렵, 드디어 우리 집에도 기름 보일러를 들여놓습니다. 이리하여 우리도 일찌감치 기름 보일러 놓고 따땃하게 지내는 이웃집으로 피난을 갑니다.


.. 어린아이들의 웃음은 조금도 꾸밈이 없다. 남을 조소할 줄도 모른다. 더구나 의미를 생각해 보고 말을 가려서 하는 것도 아니다. 어른이라면 하라고 하여도 안 할 소리지만, 유치원생이니까 아무런 생각 없이 느끼는 대로 이야기할 뿐이다. 자기 마음을 그대로 이야기하는 그 마음이 정말 귀여웠지만, 무슨 말인지도 모르면서 그냥 재미있게 웃는 모습들 역시 아름답기만 했다 ..  (25쪽)


 어제 아침에 동네 성당으로 교리공부를 하러 가는 길에, 또 엊그제 저녁에 동네 마실을 하며 골목길을 걸을 때에, 조그마한 기름집 짐차가 기름통을 잔뜩 싣고 다니더군요. 요즈음은 전화 한 통이면 집까지 기름을 날라다 줍니다. 아파트나 웬만한 도심지에는 다 도시가스가 들어와 적은 돈으로도 겨울나기를 할 텐데, 우리 식구가 사는 인천 중·동구 오래된 도심지에는 도시가스 들어오는 집이 그리 많지 않습니다. 거의 연탄을 때거나 기름을 땝니다.

 문득, 어릴 적 옛집에 보일러 돌리려고 형하고 나하고 늘 기름 심부름을 다니던 일이 생각납니다. 세 살 위 형은 덩치가 크고 힘이 좋았기에 저보다 덜 힘들었을 텐데, 눈이 소복히 덮이고 얼어붙은 길을 걸으며 기름집으로 찾아가, 두 통씩 이십 리터를 채우고 돌아올 때면 온몸은 땀으로 흠뻑 젖습니다. 형도 이마며 얼굴이며 땀이 줄줄 흘러내립니다.

 생각해 보면, 그나마 우리 집은 형과 제가 기름 심부름이라도 하지, 계집아이들만 있는 집에서는 그 집 아주머니가 작은 통을 들고 여러 번 날라야 하거나, 그 집 아저씨 혼자 날라야 했습니다.


.. 한번은 비스켓을 하나 주니까 조금 떼어서 나에게 도로 준다. 혼자 먹으라니까, “아녀, 수녀님이 뭐 먹을 거 있으면 남하구 나누어 먹으라고 했어” 하면서 내민 손을 거두지 않았다 ..  (49쪽)


 고등학생이 된 1992년 여름날이었던가, 우리 집은 연탄 때던 나즈막한 아파트를 떠나, 이제 막 인천에 새도시로 꾸민다며 북적이던 연수동으로 옮깁니다. 논밭과 산만 있던 연수동인데, 인천을 ‘서울로 일 나가는 사람들 잠집’으로 꾸미는 계획과 함께 어마어마하게 아파트마을을 이곳에 세웠어요. 사는 사람 숫자가 1000도 안 되던 연수동은 하루아침에 3만이 되고 5만이 되었다가 30만을 훌쩍 뛰어넘으며 ‘동’에서 ‘구’로 탈바꿈합니다.

 제 어렴풋한 머리로 돌아보면, 1979년 즈음부터 살던 집에서 떠난다는 일이 믿기지 않는 한편으로 달갑지 않았습니다. 비록 이곳은 집도 허름하고 기름 심부름 하느라 고단하기도 하며 크기도 작다고 하지만, 어릴 적 동무들이며 이웃들이 모두 살아가는 동네인데.

 이즈음 인하대부속병원이 이 작은 아파트 큰길 건너에서 공사를 합니다. 그때는 요즘과 달리 ‘소음방지’나 뭐 그런 규제가 적었는지 몰라도, 터닦기를 한다며 쿵쿵 찧을 때마다 우리가 살던 조그마한 아파트가 웅웅 울리며 떨리기까지 했습니다. 그러나 다른 이웃들은 꿋꿋이 버티는데 우리만 달랑 옮겨 가면 어쩌라고.


.. 아이들 차림이 너무 초라하여 모두가 걸인이냐고 물으니 그 수녀님은 갑자기 아주 못마땅한 표정이 되어 왜 꼭 그렇게 표현해야만 하느냐는 거다. 마치 자기 어린애나 되듯이 그들 편이 되어 화를 내고 있었다. 크게 혼난 셈이다. 수녀님들의 집은 바로 그 우물 옆에 있었다. 집시들의 집보다 크지도 작지도 않은 초라한 집이었다 … 전교는 언제 하느냐니까 자기들은 전교는 하지 않고 그냥 가난한 사람들과 함께 살고 있을 뿐이라고 한다. 남자 손처럼 거칠어진 그들의 손은 그대로 그 생활을 증명해 주는 것이었다 ..  (65∼66쪽)


 일곱 살 밑이었을 때 일은 하나도 생각이 안 납니다. 일곱 살부터만 생각이 납니다. 그때까지 집옮김이 참 많았다고 하지만 하나도 모릅니다. 저로서는 이때, 1992년, 오랜 살붙이 동네를 떠나는 일이 처음으로 겪은 집옮김입니다.

 아버지는 이것도 버리고 저것도 이웃집 주고 합니다. 형과 내가 열 몇 해 함께 써 온 2층침대도 이웃집 누구를 줘 버리고(새 집에는 방이 따로 있다고 하며), 책상도 걸상도 버리고, 흑백텔레비전도 버리고, 부엌 밥상과 걸상도 버리고, 또 뭐도 버리고 ……. 2층침대는 제가 가져가서 죽는 날까지 집에 두고 싶다며 매달리지만, 제 매달림이란 헛짓입니다. 우리 집 낡은 자전거도 버려지고, 새 집, 더욱이 막 지은 ‘깨끗’한 집에 들어가는 우리들은 헌 물건을 들고 가서는 안 될 듯이 여겼습니다.

 무엇이든 버려지고 무엇이든 새로 들여놓은 15층짜리 아파트는, 5층짜리 연탄불 아파트보다 거의 네 곱 넓습니다. 방이며 집이며 적은 돈으로도 훨씬 따뜻하고, 형하고 나는 방을 처음으로 따로 얻습니다. 그러나 동네에서 함께 어울릴 동무가 없습니다. 학교 오가는 길에 마주치는 동네 어르신들도 없고, 우리 집 숟가락 개수까지 알 듯한 동네 구멍가게와 빵집과 문방구와 책방과 푸주간과 수위실, 여기에 한 주에 두 차례씩 오던 책차(짐차에 책 싣고 다니며 빌려주던)하고도 모두 마지막입니다.

 집은 넓고 깨끗하며 따뜻합니다. 그렇지만 시설 좋은 시멘트 울타리에 갇혔다고 느끼니, 몸이 무겁고 마음은 가라앉습니다. 고등학교 한 해를 겨우 새 집에서 다니며 마무리지은 1994년, 인천 부모님 집에는 거의 발을 들여놓지 않고 서울에 있는 대학교 둘레에서 지냅니다. 이듬해인 1995년부터는 부모님 집하고는 ‘이제 떠나요’ 하고는 박차고 나옵니다.


 (2) 가난


 아버지한테는 ‘없이’ 사는 일이 반갑지 않았을는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남 보란 듯이 살고픈 마음이 깊었으리라는 생각도 듭니다. 명절 때면, 돈 잘 버는 작은아버지가 ‘그해에 나온 가장 비싼 차’로 차갈이를 하며 찾아와서는 ‘차 없는’ 아버지 자존심을 건드렸는지 모를 일입니다. 이제 세배돈을 안 받아도 되는 나이라고 생각해도, 아버지와 작은아버지는 끝끝내 세배돈을 안깁니다. 아버지는 평교사로 일하는 당신 주머니가 가벼울밖에 없는 데에도 동생(작은아버지) 앞에서 자존심을 잃고 싶지 않은 마음에 덥석덥석 작지 않은 돈을 내미는데, 작은아버지는 아무렇지 않게 아버지가 내놓는 세배돈 × 2, 또는 × 3을 내놓습니다.


.. 그렇지만 아나운서의 말을 많이 알아들으리라 생각했던 내 기대는 완전히 어긋나고 말았다. 그렇게 쉽게 알아들을 수 있는 ‘아웃’, ‘코너’, ‘업사이드’ 등의 말마디는 하나도 나오지 않는 것을 보아, 모두 독특한 이태리말로만 방송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골인이 되어 사람들이 환호에 뒤범벅이 되었을 때도 아나운서의 입에서는 영 ‘골인’이란 말이 나올 않았다. 물론 이태리말로는 수없이 되풀이했을 테지만 … 거의 세계 공통어로 되어버린 스포츠 용어이기에, 외국어라고 배타적인 생각을 갖는 것은 오히려 옹졸한 마음일는지 모른다. 그러나 그런 단어들을 한 번도 우리 말로 옮겨 보지 못한 우리의 언어현실이 안타까울 뿐이다 그 초라한 언어의 생태가 꼭 지나온 우리 민족의 슬펐던 역사를 되돌아보게 하는 것이었다면, 옹졸한 열등의식의 표현일까 ..  (72쪽)


 제가 중학생이었던 어느 해, 아버지가 자가용을 처음으로 뽑습니다. 그때까지는 장롱면허증이었는데, “나이 마흔을 넘어 이제 나도 자가용을 몬다!”면서, 첫 차를 뽑은 그날 온 식구를 태워서 달리고 또 달리셨습니다. 어디로 가는 줄도 모르시면서 그냥 앞으로만, 또 앞으로만. “나도 이만하면 베스트 드라이버 아니냐?” 하면서 웃던 아버지. 참 딱하다고, 아버지 나이가 몇 갠데, 이런 철딱서니없는 짓(없는 살림에 자동차를 지르셨으니)을 하셨나 싶어, 아버지를 뺀 세 식구는 잔뜩 이맛살을 찌푸렸습니다. 그래도 아버지는 내내 싱글벙글. 처음 가 보는 낯선 곳 밥집에 들어가서 바깥밥도 사 주고 아주 좋아하십니다.

 기름값이 아까워 자주 타지도 못하는 차이건만, 먼지 않을세라 늘 덮개를 씌웁니다. 틈틈이 4층집에서 내려와 덮개를 벗겨 들여다보시다가는 집으로 돌아옵니다. 날마다 형과 나와 어머니는 차 닦는 심부름을 도맡습니다. 아버지는 4층 툇마루에서 내려다보며 여기를 안 닦았다느니 저기를 더 닦으라느니 시킵니다.

 이제 와 돌이키면, 아버지로서는 당신이 안 닦고 온식구한테 시키면서 4층집 툇마루에서 내려다보며 차닦이를 시키는 일이 동네자랑으로 보여지는 일이었구나 싶습니다.


.. 내게 무슨 정서적인 마음이 깃들어서가 아니다. 그냥 푸른 나무와 맑은 공기, 그리고 옛날 로마인들의 문화를 읽을 수 있는 그 폐허가 좋을 뿐이다 … 복잡한 시가지만 벗어나면 신호등도 없고 배기가스도 없는 한적한 길에 이른다. 평평한 아스팔트 위에 이따금 옛 로마의 길이었다는 돌길에 바퀴가 닿으면서 오토바이는 털털거린다 ..  (97∼98쪽)


 열세 평짜리 작은 집에서 살 때에는, 중풍 든 할아버지까지 다섯 식구가 지내는 집이 좁기는 해도 좁다고 느낀 적은 따로 없습니다. 집에 붙어 있는 때보다 밖에 나가 뛰논 때가 더 많아서 그럴는지 모릅니다만, 큰방에 아버지 어머니 계시고, 작은방에 할아버지와 형과 내가 지내는 일이 아무렇지 않았습니다. 설이나 한가위 때면, 작은집 세 식구 열두 사람에다가 고모댁 두어 집 열 사람 즈음 찾아오면, 그야말로 발디딜 틈이 없이 빼곡합니다. 스물∼서른쯤 되는 사람들이 오글오글 바글바글했는데, 이렇게 빼곡할 때면 빼곡한 대로 같이 놀고 같이 일하고 같이 어울리고 같이 살 부비며 잠자고 이야기하며 지냅니다. 그런데 마흔여덟 평 큰 집으로 옮기고 나서는, 얄궂게도 설이나 한가위 때 찾아오는 작은집 숫자가 줄고, 고모댁에서도 찾아오는 일이 줄었습니다.


.. 미사는 발음의 정확성으로 이루어지는 기술이 아니고, 마음의 표현으로 이루어지는 제사일 뿐이라는 생각 때문이었다 ..  (110∼111쪽)


 마흔여덟 평짜리 큰 집에서 지낼 때, 주말에 가끔 동네 놀이터 그네에 앉아서 생각에 잠기곤 했습니다. 아무 생각 없이 연수동 끄트머리까지 걸어갔다가 집으로 돌아오기도 합니다. 걸어서 송도유원지까지 갔다가 돌아오기도 했고, 관교동까지도 걸어 보고, 주안까지도 걸어 보았습니다. 동무들이 없으니, 이웃들이 없으니. 이야기를 나눌 사람이 없고, 걱정거리나 즐거움을 함께할 사람이 없으니.


.. 세상에는 조용히 남을 도우려는 이들이 있다. 그러나 그들은 반드시 남을 도울 만큼 여유가 있는 사람들이 아니다. 오히려 그 할머니처럼 가난한 사람일는지도 모른다 ..  (112쪽)


 ‘집만 넓으면 뭐 해?’ 하는 생각, ‘우리 집만 따뜻하면 뭐 해?’ 하는 생각을 지울 길 없는 나날이었습니다. 아버지라는 사람은 참 책임이 없다는 생각을 지울 길 없는 하루하루였습니다. 그냥 있는 대로 살지, 있는 만큼 살지, 왜 더 가지려고 하는지, 왜 더 높아지려고 하는지, 왜 더 쟁이거나 쌓으려고 하는지 알 길이 없는 나날이었습니다.

 동생(작은아버지)들이 자존심 좀 깎으면 어때? 일터(아버지 학교. 인천부터 광명으로 버스 출퇴근을 스무 해쯤 하셨습니다)로 버스를 타고다니면 어때? 우리들 입성이 좀 후줄근하면 어때? 다른 사람이 보기에 좀 가난한 동네에 살면 어때? (형이나 내가) 남들보다 성적이 좀 떨어지면 어때? 우리 집이 작으면 어때? 연탄을 때고 살면 어때? 바깥밥 한 번 못 사먹고, 뷔페라는 곳 구경을 못하고 살면 어때?

 아버지가 살아온 지난날이 있고, 큰아들이라는 무게가 있을 테지요. 아버지 어깨에 지워진 짐이 있으며, 아버지가 어리거나 젊은 날 짓눌리며 흐느껴야 했던 아픔이 있을 테지요. 그러면 그때 아버지한테 주어진 그 괴로움과 어려움과 고달픔과 힘겨움 들은 아버지를 못살게 굴거나 들볶으려던 일들이었을까요. 아버지를 더 큰 사람으로 추슬러 내거나 다스려 내는 깨우침 들은 아니었을까요.

 한 사람이 가진 앎과 슬기를 혼자만 꿍치듯 머리속에 가두어 놓는 사람은 교사라는 자리에 설 수 없습니다. 저마다 가진 한 조각 앎과 슬기라 해도 스스럼없이 내놓고 나눌 수 있는 사람이 서는 자리가 교사입니다. 하나가 있으니 하나를 나누고, 하나가 없으니 고개숙여 배우는 자리, 그런 자리에서 일하는 사람이 교사라고 느낍니다.

 그러나 모르지요. 아버지는 학교 울타리 안쪽에서는 훌륭한 분이었는지도. 다만 학교 바깥과 집안에서는 껍데기와 겉치레에 너무 매인 채, 또 바깥 눈길에 너무 마음을 쓰느라 속살과 속치레에는 안타까이 손을 놓아 버린 분이었다고 느낍니다.


 (3) 《가난한 마음》이라는 작은 책


 《가난한 마음》이라고 하는 책을 읽고 나서, 동네 성당 신부님한테 요즈음 퍽 훌륭하다고 느낀 책을 하나 읽었는데, 이 책을 쓰신 김영교라고 하는 신부님을 아느냐고 여쭈어 봅니다. 잘 모르겠다고 말씀합니다. 인터넷 찾아보기를 해 보면, 요즈음은 어느 신학대학교에서 교수 노릇을 하시는 듯한데, 이 책을 쓴 분이 맞는지 아닌지는 알 길이 없습니다.

 인천 답동성당 앞에 있는 가톨릭 책방에 가서 수녀님한테 여쭈어 봅니다. 《가난한 마음》은 남은 책이 없어서 다시 살 수 없다고 이야기합니다. 저도 이 책을 헌책방에서 찾아내어 읽기는 했습니다만, 글쎄요, 또다시 이 책을 만나서 기쁘게 가슴으로 안아들고서 동네 성당 신부님한테 선물로 드릴 수 있을는지는 모르겠습니다.


.. 그리스도 역시 가난 자체를 축복하지는 않았다. 그는 가난을 견디는 마음과 그 안에서 하느님을 바라볼 수 있는 자세를 축복한다 … 그(그리스도)의 땅은 가난했고 주위에는 유난히도 나약하고 병든 사람이 많이 들끓었다. 그는 늘 가난하고 버림받은 이들의 친구로 자처했다 ..  (178∼179쪽)


 옆지기와 책 이야기를 가끔가끔 하면서 느끼고, 가톨릭 책방에 가 보면서도 느끼는데, 우리 나라 신부님과 수녀님들이 고이고이 당신 믿음을 지켜 오면서 살아온 이야기를 적어내려간 책이란 거의 없습니다. 지난날에도 그러했지만 요즈음은 더더욱 없습니다.

 좋은 믿음이고 반가운 믿음이며 훌륭한 믿음이라 한다면, 마음속으로만 모시고 지키거나 가꾸는 일도 나쁘지 않지만, 콩알 하나만큼 작은 믿음이라 하더라도 이렇게 자그마한 책으로 묶어서 이웃들과 나누어도 괜찮을 텐데 하고 느낍니다.

 신부님들이 세상사람들과 부대끼며 헤아린 이야기나 수녀님들이 마을사람들과 믿음을 나누면서 돌아본 이야기를 생활글 하나로 짤막하게 쓰고 그러모아서 자그마한 책을 묶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신부님이나 수녀님이 아닌 동네 아주머니와 아저씨들도, 당신들이 한삶을 부대끼고 겪어내며 부딪히면서 배우거나 느끼거나 생각한 이야기를 짤막짤막 끄적이면서 자그마한 책을 묶을 수 있다면 얼마나 아름다울까요.

 살아온 이야기를, 살아가는 이야기를, 살아갈 이야기를 조촐하게 나눌 수 있다면 얼마나 즐거울까요.


.. 하느님께 십일조를 바치는 게 원칙이라고 외치면서도 교회 자신은 가난한 이를 위한 구호비로 십일조를 떼어놓지 않는 모순 속에 빠져 있다 … 여유가 있을 때 남을 돕는다는 것은 우선 거짓말이다. 풍부할 때 남을 도우려는 사람은 영영 남을 도울 수 없다. 남을 돕는다는 것은 가난을 함께 나누는 것이다. 사랑의 정신이란 먹고 나머지를 주는 것이 아니라, 부족한 빵을 함께 떼는 것을 뜻한다 ..  (183∼184쪽)


 《조선왕조실록》에도 역사가 담기고 문화가 담깁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가난한 마음》 같은 여느 사람들 살아간 이야기 한 자락에도 역사가 담기고 문화가 담깁니다. 여느 사람들 역사와 문화에는 자연스러운 믿음이 스미고 풋풋한 뜻과 살가운 사랑이 배어듭니다. (2008.1.28.달.)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책을 말하는 책이 없는 나라
― 해적판, 《두뇌의 회전을 도우는 독서술》



- 책이름 : 두뇌의 회전을 도우는 독서술
- 글쓴이 : ?
- 펴낸곳 : 신조사 (1972.8.15.)


 책을 말하는 책이 요즘 들어 퍽 많이 나옵니다. 너무 갑작스럽다고 할까나, 어떤 바람이라고 할까나, 그동안 거의 없던 ‘책을 말하는 책’이 나오는 까닭은 좀 얄궂다고, 꽤 알쏭달쏭하다고 생각합니다.


.. 읽는 책의 선택과 읽지 않는 책의 선택은 표리의 관계가 있다. 목적을 세우고 그 목적을 위해 책을 읽는다. 그밖의 책을 읽지 않는다고 정하는 것도, 책을 읽지 않는 연구의 첫발이고 기본인 셈입니다 ..  (116쪽)


 요즈막에 쏟아지는 ‘책을 말하는 책’은 ‘우리들이 읽을 만한 책’을 이야기한다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두루’ 이야기한다거나 ‘깊이’ 이야기한다고는 느끼기 힘듭니다. 저마다 다 다르게 살아가는 사람들이 당신 뜻과 생각과 마음에 맞게 ‘다 다르게 반갑게 맞이할 만한 책나라’를 열어젖히는 이야기까지 나아가지도 못한다고 느낍니다. 뭐랄까요, 우리가 읽을 책이 있다면 ‘읽을 수 없는 책’이 있는데, 읽을 수 있는 책과 읽을 수 없는 책을 제대로 나누어 말하지 않거든요. 아니, 못한다고 할까요.

 ‘책을 말하는 책’이 많이 나오는 까닭이라면, 요즈음 들어 참으로 수많은 책이 엄청나게 쏟아져 나오기 때문입니다. 엄청나게 쏟아지는 책은 교보문고나 영풍문고 같은 큰 책방에도 제대로 꽂히지 못합니다. 신문이나 잡지나 인터넷에도 제대로 못 알려진 채 사라지는 책이 참으로 많습니다. 그러나 여태까지 나온 ‘책을 말하는 책’들은 ‘반갑게 나왔으나 빛을 못 보는 책’은 거의 다루지 못합니다. 아니, 아예 안 다룬다고 해야 맞습니다. 굳이 ‘책을 말하는 책’에서까지 이야기하지 않아도 될 만한 책, 굳이 이런 책에서 말하지 않아도 누구나 훤히 아는 책밖에 못 다룬다고 하겠습니다.

 곰곰이 생각해 보면, ‘책을 말하는 책’은 반드시 있어야 합니다. 하루에 새로 나오는 책만 해도 수십 가지가 될 테고, 한 주면 수백 가지에서 천 가지, 한 달이면 만 가지가 넘을 수 있겠지요. 그러면 우리들은 몇 권이나 읽을 수 있을까요. 바지런히 읽어서 날마다 두 권씩 읽는다 해도 한 달 동안 100권 읽기 어렵습니다. 한 해에 1000권 읽기란 참 까마득합니다. 더구나 우리들이 책만 읽고 살아갈 수는 없는 터. 그렇다면 이렇게 어마어마하게 쏟아지는 책 가운데 ‘저마다 다 달리 살아가는 우리들한테 골고루 알맞을 책’이나 ‘저마다 다 달리 살아가는 우리들한테 따로따로 반가울 책’은 어떻게 가려야 좋을까요. 어쨌든 우리 스스로 눈길과 눈높이를 추슬러야 하지만, 눈길과 눈높이는 어떻게 추슬러 나가야 좋을까요.

 ‘책을 말하는 책’은 이런 이야기를 다룰 수 있어야 합니다. ‘읽으면 좋은 책’과 ‘읽어야 할 책’만 아니라 ‘읽지 않아도 되는 책’과 ‘읽을 까닭이 없는 책’과 ‘읽어서 시간만 버리는 책’을 저마다 스스로 깨달을 수 있도록 말하고 이끌 수 있어야 좋아요.


.. 옛날 사람뿐 아니라 지금의 독서가라도, 이를테면 아랑은 “되풀이 읽을 수가 없는 소설이라면 처음부터 읽을 필요가 없다”고 했읍니다. 그는 다시 일보 전진하여 “무릇 책을 읽는데 노으트를 할 필요는 없다. 노으트를 하지 않으면 잊어버릴 만한 일이라면, 잊어버리는 편이 위생적이다. 잊혀지지 않을 만한 일이라면, 일부러 종이에 적을 것까지도 없다”고 까지 말했던 것입니다 … “늦게 읽어라” 하는 것은 “고전을 읽어라” 하는 것과 같은 것이 되고, 또 반대로 “고전을 읽어라” 하는 것은 “늦게(천천히) 읽어라” 하는 것과 같은 것이 되겠지요 ..  (53∼55쪽)


 《두뇌의 회전을 도우는 독서술》이라는 책이 1972년에 나왔습니다. 얼핏얼핏 ‘일본책을 그대로 베끼지 않았나?’ 싶은 대목이 있지만, 군데군데 ‘한국사람이 썼구나’ 싶은 대목이 있습니다. 글쓴이를 밝히지 않고 ‘편집부’라고만 했기 때문에 알 수 없습니다. 다만, 책을 어떻게 읽으면 좋은지, 책을 어떻게 마주하면 좋은지, 책이란 우리 삶에 무엇이며, 책으로 우리 삶을 어떻게 가꿀 수 있는지를 참 단출하고 알뜰히 펼쳐 보입니다. 그런데 이만한 책이 나온 지 서른다섯 해가 지난 2007년이지만, 아직까지 이만큼 제 눈을 밝혀 주는 ‘책을 말하는 나라안 책’은 눈에 안 뜨입니다. 아무래도, 아직 제가 못 알아보았다고 해야 옳고, 못 찾았다고 해야 올바르겠지요. 참말, 내 눈이 더없이 얕고, 내 마음이 그지없이 좁은 터라, 좋은 책을 좋은 눈썰미로 살펴보지 못했다고 해야 맞겠지요. (4340.2.7.물.ㅎㄲㅅㄱ)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