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세상이 어찌나 야박하게 되었는지, 요즈음은 거리의 책가게에 들어가서 책을 좀 서서 읽을 수도 없읍니다. 좌판 위에 놓인 새로 나온 월간잡지를 이것저것 뒤적거려 보는 것이 조그마한 생활의 낙이라면 낙이라고 할 수 있겠는데, 요만한 자유마저 용납되지 않습니다. 광화문이나 종로거리의 책가게에 들어가서 5분 동안만 책을 들고 서 있어 보십시오. 점원 아이들이 얼굴 표정이 달라지지 않는 책가게가 없을 것입니다. 책을 펴 보기가 무섭게 벌써 점원 아이가 득돌같이 팔뒤꿈치 옆에 바싹 다가와서 위압을 주는 것쯤은 예사입니다. 노골적으로 책을 빼앗고 나가라고 호령을 치는 책가게도 있읍니다. 얼마 전엔가 동대문 쪽 길가에 있는 고본옥에를 들른 일이 있읍니다. 릴케의 시집이 있길래 그 안의 시를 몇 편 뒤적거리면서 읽기 시작했읍니다. 때마침 빗방울이 부슬부슬 떨어지기 시작하여서 나는 그 책사가 인심이 너그럽지 못한 책사인 줄 알면서도 미적미적 서 있었읍니다. 그랬더니 아니나 다를까, 함경도 사투리를 쓰는 임꺽정이같이 생긴 주인이 달려와서 왈칵 책을 빼앗고는 “아니, 고만 읽고 나가시오, 가게를 닫아야겠소!” 하고 모욕적인 어조로 소리를 질렀읍니다. 나는 졸지에 가게를 닫아야겠다는 말이 납득이 안 가서, “아니, 대낮에 가게를 닫아야겠다니 무슨 말이요?” 하고 반문했읍니다. 그랬더니 주인은 “오늘은 날씨도 비가 오고 해서 가게를 닫고 낮잠이나 자야겠으니 어서 나가 달란 말요.” 하면서 바로 나를 점포 밖으로 팽개치기라도 할 것 같은 험한 기세를 보였읍니다. 나하고 얼마 동안 옥신각신을 하는 중에 여학생들이 우르르 몰려들어와서, 금방 가게를 닫겠다던 주인은 그쪽으로 가 버리고, 나는 그래도 울화가 가라앉지 않아 얼마 동안 미적미적거리다가 밖으로 나와 버렸지만, 나는 가게를 닫아야겠다는 주인의 핑계가 화가 나면서도 한쪽으로는 우스운 생각이 들었던 것입니다 .. (1963.2.) / 《김수영-퓨리턴의 초상》(민음사,1978) 214쪽


 ‘고본옥(古本屋)’은 ‘헌책방’ 또는 ‘옛책방’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동대문에 있는 곳이고, 여학생들이 우르르 몰려왔다는 소리로 헤아려 볼 때, 이곳은 지금 ‘청계천 헌책방거리’를 가리키는구나 하고 헤아려 볼 수 있습니다. 시를 쓰는 김수영 님은 광화문과 종로에 있는 책방에 들른 뒤, 그길에 청계천 헌책방거리, 또는 청계천 둘레 동대문 골목골목에 있던 헌책방에 들러 책을 뒤적여 보다가 입술이 파르르 떨릴 만한 일을 겪고 글을 하나 남겼네요. 조금이나마 마음이 따순 헌책방 임자를 만났다면, 한결 살갑고 따순 마음이 묻어나는 글을 남겼지 싶습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동대문에서 김수영 님을 차갑게 내쫓은 분은 ‘헌책방에서 느낄 수 있는 아쉬운 대목’을 적바림하게 만들고야 맙니다. 하긴, 이때는 헌책방뿐 아니라 새책방에서도 ‘서서 읽는 사람 내쫓기’를 똑같이 했다니, 말 다했지요.

 그러고 보면, 서울 광화문에 있는 큰 새책방이든 나라에서든 학교에서든 ‘책을 읽자!’고 소리높여 외칩니다만, ‘서서 읽기’ 하는 사람은 ‘책읽는 사람’으로 안 치지 싶습니다. 책을 사서 읽을 수 있으면 더없이 좋겠지요. 하지만 형편이 안 되는 사람도 많잖아요. 이런 사람들은 도서관에서 빌릴 수 있고, 책방에서 서서 읽을 수 있어요. 그래, 광화문 교보문고나 영풍문고에서는 푯말을 달리 붙여야지 싶습니다. “책을 읽자!”가 아니라 “책을 사서 읽으쇼!”로. (4340.3.9.쇠.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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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해가 지고 나서 눈이 내렸습니다. 방에 있느라 눈이 내린 줄 몰랐습니다. 잠깐 바람을 쐬려고 문을 열고 마당으로 나가려다가 흠칫 놀랐어요. 하얗게 쌓인 눈, 소복하게 쌓인 눈을 보았거든요. 아, 눈이구나. 이야, 눈이네. 낮에 쌀 사러 읍내에 마실을 갈 때 조금씩 흩날리더니, 그예 펄펄 내리는 눈으로 바뀌었군요.

 뽀독뽀독 눈을 밟아 볼까 싶었지만 그만두기로 합니다. 가만히 저 눈을 바라보기만 하렵니다. 그래 보았자 다가오는 새날 아침, 해가 반짝 비치면 슬금슬금 녹을 테지만.

 이렇게 눈이 오면 부랴부랴 눈을 쓰는 분이 있고, 눈이 와도 멀거니 구경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저는 한때 부랴부랴 눈을 쓰는 사람이었는데, 요사이는 눈을 쓸지 않습니다. 그냥 두어도 며칠 지나지 않아 모두 녹던걸요. 겨울이라 해도 한 주면 다 녹고요. 길에 쌓인 눈을 쓴다면, 자동차가 덜 미끄러지라는 뜻입니다. 하지만 자동차도 천천히 달리면 그다지 미끄러지지 않아요. 아니, 차가 미끄러질 만큼 눈이 많이 오는 일이란 거의 없습니다. 앞으로도 눈이 수북히 오는 일이란 없을 테며, 그저 몇 센티미터 오면 많이 왔다고 할 테지요. 이런 눈이라면 가만히 두고 눈을 즐기면 어떨까 싶어요. 눈싸움 할 만큼 많이 쌓이지 못했으니 눈싸움은 못하고, 눈사람도 못 굴리겠지만, 가만가만 눈길을 걸으며 눈을 느껴 보고, 고개를 들어 하늘바라기를 하며 얼어붙은 하늘도 보고, 눈 덮인 산기슭에 짐승들 발자국이 있나 두리번두리번 살피기도 하고. (4340.3.7.물.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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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을 읽다가 잠깐 덮습니다. 문득, 요즈음 널리 입에 오르내리는 《요코 이야기》가 떠오릅니다. 이 책을 펴낸 출판사는 한때 책이 없어서 못 팔 만큼 되었지만, 이제는 책을 더 안 찍기로 했다고 합니다. 저는 이 책을 보지 못했고, 그다지 볼 마음이 없지만, 책을 더 안 찍기로 했다니 사서 볼 길은 없군요. 헌책방에 나온다면 그때는 사 볼 수 있겠지만. 아무튼. 제 나름대로 든 몇 가지 생각을 적어 보고 싶습니다.


.. 당시 일반 시민들은 개인적인 정도의 차이는 있어도 대체로 조선인 차별관을 가지고 있었다고 여겨진다. 또 특별히 식민지 지배사상의 오염을 강조하지 않더라도 어느 나라나 편집광이나 맹신자는 있기 때문에 유언비어가 일반 민중 차원에서 발생했다는 것을 명확하게 부정할 수는 없다 … 조선인에 대해 “선천적으로 배신자이고 거짓말꾼이며 무능력자이고 사회의 부적격자”라고 부르고, ‘언제나 너희들은 이등국민이다’라며 치안 단속의 대상으로 삼아 왔던 관헌집단의 존재는 재일 조선인 역사의 전 과정에서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고 단언할 수 있다. 해방 전 재일 조선인으로서 ‘특고내선계 나리’들의 신세를 지지 않은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  《강덕상-학살의 기억, 관동대지진》(역사비평사,2005) 91, 104쪽


 ㄱ.사람을 괴롭히는 짓

 
 《요코 이야기》에 담긴 줄거리를 모두 거짓이라고만 볼 수는 없으리라 생각합니다. 일본이 전쟁에서 진 뒤 한국땅에서 물러나야 했을 때, 그 북새통에서 일본사람들이 겪어야 한 일들은 얼마나 속이 쓰렸을까요. 그동안 ‘이등국민’으로 깔보고 짓밟던 조선사람들한테 돌을 맞고 집과 재산을 빼앗긴 채 몸만 달랑 빠져나와 부리나케 고향나라로 돌아가야 했으니 말입니다. 낫이며 도끼를 들고 일본사람들 때려죽이려고 돌아다니던 조선사람이 없었을까요? 틀림없이 있었겠지요. 저라도 그때 일본놈들 죽이려고 온갖 곳 돌아다녔으리라 생각합니다. 그렇다면, 일본이 전쟁에서 진 뒤 조선땅에서 ‘고향 일본으로 돌아가는 사람을 들볶던 조선사람’이 저지른 잘못과, 수십 해 동안 일본이 조선을 식민지로 삼으면서 백성들을 들볶고 괴롭히던 잘못은 어떻게 다를까요.

 집과 재산을 모두 놓고 고향나라로 돌아가야 한 일본사람들은, 그동안 자신들이 조선땅에서 저지른 죄값(?)을 고스란히 돌려받는다고 느끼면서, ‘아, 나도 얼마 앞서까지만 해도 저렇게 조선사람을 괴롭혔지’ 하고 뉘우쳤을까요. 또는, 자기들이 지난날 저질렀던 일은 까맣게 잊고, 지금 눈앞에서 벌어지는 일만 놓고 ‘저 나쁜 조선놈들’ 하고 생각했을까요. 소설 《요코 이야기》에는 어떤 눈길과 생각이 담겼을까요. 궁금합니다.

 
 ㄴ.전쟁문학


 《요코 이야기》를 펴낸 출판사 ‘문학동네’는 인터넷 누리집을 닫고(이제는 인터넷검색조차 안 됩니다) 해명글을 올려놓았습니다. 해명글을 보면, “『요코 이야기』의 출간을 결정했던 것은 이 책을 통해, 일본민족=가해자, 우리민족=피해자라는 기존의 민족주의적 관점에서는 충분히 논의될 수 없었던 ‘여성에게 가해지는 전쟁폭력’의 문제에 대해 한번쯤 생각해볼 수 있는 계기가 될 것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입니다” 하고 적습니다. 이 해명글에 나오는 “기존의 민족주의적 관점”이란 무엇일까요. 그리고 이런 “기존의 민족주의적 관점”으로 “여성에게 가해지는 전쟁폭력” 문제를 다룬 적이 우리 문학 발자취에서 한 번도 없는지, 또는 제대로 다룬 적이 없었는지도요.

 전쟁폭력은 ‘여성한테만’ 쏟아졌을까요. 여성한테 좀더 많이 폭력이 저질러졌다고 하겠으나, 이 나라에 살며 친일부역을 하지 않은 사람들은 누구라 할 것 없이, 여자니 남자니 어른이니 아이니 할 것 없이 똑같이 괴로울 수밖에 없었습니다.

 한편, 이런 발자취와 이야기들, 이 가운데 여성한테 쏟아진 전쟁폭력 이야기는 꾸준하게 책으로 묶여 나왔습니다. 이런 아픔을 달래고 추스르는 움직임도 적잖이 있습니다. 다만, 이런 책이나 움직임에 제대로 눈길을 두는 사람이 잘 안 보인다뿐입니다. 몇 해 앞서 이승연 씨가 ‘종군위안부 알몸사진’을 찍으며 말썽을 일으킨 일을 떠올려 봅니다. 이승연 씨와 사진 찍은 회사에서는 ‘조금도 상업주의 의도가 없었다’고 몇 차례나 힘주어 말했지만, 상업주의 뜻이 없었다면 처음부터 경기도 광주시 퇴촌면에 있는 〈나눔의 집〉에 찾아가 할머님들한테 이런 일을 해서 사람들한테 널리 알리겠다고, 할머님들 아픔을 뼛속 깊이 느끼며 이런 아픔이 잊혀지지 않도록 하겠다고 말했겠지요. 그러면서 할머님들 눈물 뜻을 속깊이 헤아렸겠지요. 하지만 이승연 씨나 회사에서 보여준 모습은 어떠했나요. 처음부터 상업주의였기 때문에 〈나눔의 집〉 할머님한테 찾아가기는커녕 귀기울여 이야기를 들은 적이 없습니다. 들끓던 여론도 곧 잠자겠거니 하다가, 외려 여론이 나빠지니 뒤늦게 사과를 하고 무릎을 꿇고 빌었지만, 종군위안부로 몸과 마음을 다친 할머님들 가슴에는 또다른 날선 칼이 들쑤시고 지나가고 말았습니다. 하지만 이런 이야기에 제대로 눈길을 두는 우리들이었을까요? 윤정모 님이 이런 이야기로 소설을 쓰고, 이토 다카시라는 일본 사진작가가 종군위안부 할머님 삶을 사진이야기로 남겨 놓고, 정대협 사람들이 할머님들 증언자료를 모아서 책으로 묶어내는 동안, 우리들 눈길은 얼마나 쏟아졌을까요.

 적어도 문학을 한다는 사람들만큼이라도, 문학책을 낸다는 출판사에서라도 이런 움직임에 따순 손길을 보내 본 적이 있었는지요. 그러면서 고작 펴내는 책이 ‘여성에게 가해지는 전쟁폭력 이야기를 만날 수 있는 좋은 책’이라는 이름을 붙인 《요코 이야기》뿐인지. 이것도 출판 다양성이라면 다양성이라고 생각합니다만, 여태껏 여성이 받은 전쟁폭력을 다룬 살뜰한 책이 제대로 없는 판이라면 모르되, 그런 책이 있어도 눈길을 거의 안 두었으면서, 《요코 이야기》 하나만 앞에 내세워도 좋은지 모르겠네요.

 나아가, 《요코 이야기》를 내치는 왼손이 있다면, 일제 식민지 역사를 있는 그대로 살피고 돌아보는 책을 찾아서 손에 쥐는 오른손도 있어야지 싶어요. 아울러 ‘여성한테 쏟아진 전쟁폭력’을 느끼고 헤아릴 수 있는 책을 찾아볼 수 있는 눈길도 추스르고요. 우리 스스로 일제강점기 때 우리가 겪어야 했던 아픔들을 적바림할 수 있는 움직임도 있어야겠고, 이런 적바림을 문학으로 빚어내는 움직임도 있어야겠으며, 문학으로 빚어진 열매를 반갑게 맞아들이고 널리 읽고 나누는 움직임까지 있어야지 싶어요.

 
 ㄷ.언론과 교육

 
 우리한테는 얼마나 언론 자유가 있었을까 생각해 봅니다. 친일부역자 죄값을 달게 물은 적이 있는지, 일제 강점기 때 죽을 고생을 했거나 끝내 죽고 만 사람들 아픔과 슬픔을 달래거나 씻어 주는 언론매체가 있었는지 모르겠습니다. 친일부역자들은 언제 한 번 죄값을 달게 받았을까요. 이 땅에서 친일부역자들이 판치는 모습을 막거나 붙잡을 수 있었나요. 아직까지도 친일부역으로 조선총독부한테 물려받은 땅을 ‘찾겠다’는 소송을 거는 친일부역자 후손이 판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들 움직임을 막거나 꾸짖는 손길이나 움직임은 거의 안 보입니다.

 일제강점기 때 피해자들은 지금 어찌 지내고 있나요. 한국땅에서, 일본땅에서, 중국땅에서, 러시아땅에서, 또 중부아시아땅에서 일제강점기 피해자들은 어떤 모습으로 어떤 삶을 꾸리고 있나요. 가만히 생각해 볼 일입니다. 이 나라 역사교육도 짚어 보면서.

 이 나라 학교교육에서 역사를 어떻게 가르치고 있지요? 시험문제에 나오는 지식으로만 가르치지 않나요. 아이들이 일제강점기 역사를 있는 그대로 돌아보고 살피며 살갗으로 느끼도록 가르치는가요. 교과서 달달 외우기와 시험점수 따지기에만 푹 빠진 이 나라 학교교육에서 우리는 무엇을 듣고 보고 배우고 깨달으며 살아가나요. 이런 흐름을 헤아릴 때, 《요코 이야기》는 이 나라에서 살아가는 어른과, 자라나는 아이들한테 어떤 길잡이 노릇을 할 수 있을까요. 역사 교육이 엉터리인 한국에서 소설 《요코 이야기》는 얼마나 ‘전쟁이 일으키는 아픔’을 우리들 가슴마다 깊이 새겨 놓을 수 있을까요.

 
 ㄹ.책

 
 문득, 이 나라에서 역사ㆍ문화ㆍ사회를 샅샅이 살피고 파헤친 책이 얼마나 대접받는지 생각하고 싶습니다. 이런 책이 나왔을 때 얼마나 언론매체 눈길을 탔을까요. 얼마나 제대로 소개가 되었을까요.

 《버마전선 일본군 위안부 문옥주》(이 책은 일본사람이 힘겹게 취재해서 나온 책입니다. 그것도 퍽 예전에. 2005년에 한국말로도 나왔습니다)라는 책이 나왔을 때 알아본 언론사 기자는 몇이나 되었을까요. 소개는 몇 줄이나 했을까요. 캄보디아에 살아 있던 ‘훈 할머니’를 찾았다고 호들갑을 떨며 ‘특종 취재’로 법석까지 부리던 언론매체 가운데 《버려진 조선의 처녀들》(2004)이라는 책이 나왔을 때 한 줄이라도 소개를 해 준 곳이 몇 군데나 되었지요? 임종국 선생이 《정신대실록》이라는 책을 펴냈을 때, 1990년대 첫머리부터 《강제로 끌려간 조선인 군위안부》(한울)라는 책이 나와서 3권까지 나온 뒤, 출판사를 옮겨 5권까지 나오도록, 또 《중국으로 끌려간 조선인 군위안부》라는 책이 나왔을 때에도, 이 책을 알아봐 준 언론매체는 어디가 있을까요. 《위안부가 아니라 성노예이다》라는 책이 나와도, 《일본군 ‘위안부’ 문제의 책임을 묻는다》라는 책이 나와도, 일본 사진작가가 취재한 《종군위안부》(눈빛)라는 사진책이 나왔어도, 이런 책을 하나라도 사서 읽은 지식인은 얼마나 되며, 이런 책을 기꺼이 소개하고자 나선 출판평론가는 누가 있으며, 여성학자와 여성운동가 가운데 이런 책을 둘레에 널리 알리면서 함께 읽고 공부한 이는 몇이나 될는지요.

 
 ㅁ.군복 입은 남자들

 
 《요코 이야기》를 낸 출판사에서는 ‘여성에게 가해지는 전쟁폭력’을 말하고, “동아시아권 국가들의 진정한 화해와 연대를 위한다면『요코 이야기』처럼 ‘군복 입은 남자들’의 역사와는 다른 방식으로 역사를 이야기해야 합니다” 하고 말합니다. 참 좋은 말이라고 생각합니다. 또한 거짓없는 좋은 뜻이라고 봅니다. 그렇다면 우리 현실은 어떠한가요. 우리 현실을 안 보고 말로만 좋은 이야기를 읊을 수는 없겠지요.

 일제강점기가 끝난 1945년 뒤로 이때까지 한 번이라도 제대로 된 자유와 민주와 평등과 통일을 이룬 적이 없는 우리 나라입니다. 일제강점기 때 친일부역 노릇을 했던 사람들은 고스란히 살아남아서 미군정기 때 돈과 이름과 힘을 얻었고, 이들은 이승만 독재정권 때 행정조직과 공무원 구석구석을 차지합니다. 그 뒤 이어진 박정희 독재정권 때는 아주 탄탄히 뿌리를 내렸고, 이어진 전두환-노태우 정권 때에는 이 나라 어느 두메에도 이들 손아귀가 안 뻗친 곳이 없게 되었습니다. 이런 우리 나라입니다. 우리 사회요 역사요 발자취입니다. 자유와 민주와 평등과 통일과 평화를 외친 사람들은 하나같이 붙잡혀 감옥살이를 해야 했고, 끔찍하게 고문에 시달리다가 목숨을 잃기도 했습니다. 옳은 소리 했다가 죽어나가는 모습을 보며 그저 입다물고 고개숙이며 사는 게 낫다는 몸가짐을 익히는 사람들이 많았던 우리 나라이며, 이런 흐름은 아직도 굳게 이어져 오고 있다고 느낍니다. 이런 우리 사회에서 ‘군복 입은 남자들의 역사와는 다른 방식’이란 무엇일까요. 다른 방식은 《요코 이야기》라는 소설인지요.

 글쎄, 《학살의 기억, 관동대지진》 같은 책에서는 ‘여성한테 쏟아진 전쟁폭력’을 찾을 수 없을까요. 《한국의 히로시마》 같은 책에서는 ‘진정한 화해와 연대를 바라는 길’을 찾을 수 없을까요. 《역사교과서와의 대화》 같은 책에서는 ‘군복입은 남자들의 역사와는 다른 방식으로 이야기하는 역사’를 찾을 수 없을까요.


 ㅂ.내가 참말 하고 싶은 이야기


 저도 《요코 이야기》를 읽어 보고 싶습니다. 이 책을 읽고 차분하게 돌아보고 싶습니다. 참말로 이 책에 무슨 줄거리가 담겼는지 제 눈으로 보고 싶습니다. 나중에라도 꼭 헌책방에서 찾아보고 싶습니다. 하지만, 이 책을 찾아볼 수 없는 가운데 이렇게 이야기를 하자니 힘이 드네요.

 마지막으로 몇 가지 다른 책 이야기를 하고 싶습니다. 먼저 《맨발의 겐》(아름드리미디어)이라는 만화책. 일본에서 나온 ‘역사 다룬 만화책’ 가운데 일제식민지와 태평양전쟁을 바탕으로 균형을 어느 만큼 잘 잡고 자신들 잘못과 전쟁문제를 날카롭게 잡아챘다고 해서 널리 칭찬을 받았고, 나라안에도 10권까지 번역이 되었습니다. 다음으로 《히로시마》(사계절)라는 그림책. 이 그림책은 원자폭탄을 맞은 일본은 ‘철저히 피해자이기만 한 것’처럼 이야기를 풀어나가며 ‘평화와 사랑을 찾아야 한다’고 외칩니다. 이 그림책은 《맨발의 겐》과는 달리 따가운 눈총을 많이 받았습니다. 만화책 《맨발의 겐》도 ‘히로시마 원폭 피해자’가 주인공이 되어 나오지만, 이 주인공은 ‘미국놈 미워함’으로 그치지 않습니다. ‘전쟁을 일으킨 일본 권력자와 천황제’를 남김없이 비판합니다. 하지만 《히로시마》는 ‘일본이 왜 원자폭탄을 맞았는가?’ 하는 뉘우침이나 돌아봄이 없습니다. 갑자기 하늘에서 떨어진 날벼락이라고 이야기합니다. 그러면서 되뇌이는 말은 ‘전쟁은 나빠, 평화를 사랑하자’입니다.

 그림책 《히로시마》를 펴낸 출판사도 《요코 이야기》를 펴낸 출판사와 거의 비슷한 말로 ‘전쟁문학을 봐야 하는 까닭’을 이야기했습니다. 말은 참으로 옳습니다. 그런데, 그 좋은 말을 느낄 수 있도록 하는 책으로 왜 《히로시마》나 《요코 이야기》 같은 책을 골라야 했을까요? 그 많은 전쟁문학 가운데 우리 나라에도 번역해서 펴낼 만한 책이 이런 책밖에 없었을까요?

 일본에서는 《혐한류》(2005)라는 만화책이 나와서 꽤나 많이 팔리고 있습니다. 저도 이 만화책을 헌책방에서 한 권 우연하게 찾아서 샅샅이 읽었습니다. 모두 아홉 가지 이야기로 이루어진 《혐한류》는 ‘한국이 일본을 미워할 수밖에 없는 까닭’이 아무런 근거 없는 헐뜯기라고 둘러대면서 ‘한국이야말로 일본 문화를 베껴먹기로 훔치는 도둑나라이고, 거짓말과 노예근성이 가득한 못된 나라이다’ 하고 이야기를 합니다. 이 만화책을 보는 동안, ‘혐한류라는 만화책을 보며 우리 사회에 깃든 편향성과 온갖 문제를 비판하고 뉘우치자’는 말을 앞세워 번역할 출판쟁이는 없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아직까지는 이런 출판쟁이가 없는데, 다양성을 생각한다면 이런 책도 나올 수 있겠지요. 그러나 ‘다양성’을 빼면, 이런 책은 무슨 값이, 무슨 뜻이, 무슨 생각이, 무슨 가르침이 남을까요.

 《요코 이야기》 말썽은 시간이 지나면 오래지 않아 잊혀지리라 생각합니다. 생각의나무 출판사 사재기 말썽도, 한젬마 대리창작 말썽도, 정지영 대리번역 말썽도 벌써 잊혀진 옛일이 되었잖아요. 《마시멜로 이야기》는 이제 광고 한 번 안 때리고도 베스트셀로 높은자리를 아무 어려움없이 차지하는 책으로 튼튼히 자리를 잡았습니다. 한젬마 말썽은 이 일을 세상에 알린 〈한국일보〉를 빼놓고는 아예 기사로 다루지 않습니다.

 숨을 돌리며 생각을 마무리지어 봅니다. “《요코 이야기》 따위는 없어져야 한다”고 외치는 분들 가운데 얼마나 많은 사람들은 ‘이 나라 역사를 돌아보도록 하는 책’을 부지런히 읽어 줄까요. ‘이 나라에서 전쟁피해자로 아파한 사람들 이야기’를 얼마나 따순 눈길로 살펴봐 줄까요. 제가 지금까지 읽은 전쟁이야기(전쟁피해와 군대와 학살을 둘러싼 갖가지 이야기) 가운데, 《요코 이야기》 때문에 가슴이 아팠거나 씁쓸함을 느꼈거나 화가 잔뜩 치민 분들께서 다음과 같은 책들을 하나하나 살펴봐 주면 어떨까 싶습니다. ‘얄궂은 책 비판’은 참으로 중요하지만, ‘살갑고 훌륭한 책 읽기’로 이어지지 않는다면 말짱 도루묵이 될 테니까요. (4340.2.20.불.ㅎㄲㅅㄱ)


 1.몽실언니 (권정생)
 2.엄마 없는 아이와 아이 없는 엄마와 (츠보이 사카에)
 3.너를 부른다 (이원수)
 4.에미 이름은 조센삐였다 (윤정모)
 5.노근리 이야기 (박건웅)
 6.버마전선 일본군 위안부 문옥주 (모리카와 미치코)
 7.종군위안부 (이토 다카시)
 8.강제로 끌려간 조선인 군위안부들 (1∼5)
 9.맨발의 겐 (나카자와 케이지) (1∼10)
 10.학살의 기억, 관동대지진 (강덕상)
 11.나무소녀 (벤 마이켈슨)
 12.여군은 초콜릿을 좋아하지 않는다 (피우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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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본 만화를 볼 때마다 놀라는 대목이 있습니다. 그림결이 깔끔하고 그린이마다 개성이 뚜렷하게 드러나는 한편, 사람이든 사물이든 참 훌륭하게 그려냅니다. 만화 그림이란, 사물을 있는 그대로 그리는 정물은 아니지만, 정물을 빈틈없이 그릴 수 있는 그림 솜씨를 바탕으로 자기 눈길과 생각과 그림감에 따라서 아주 단출한 금 몇 가지로 모든 것을 담아내는 예술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 일본 만화는 바로 이런 예술에 아주 알뜰합니다. 한편, 줄거리로 담아내는 그림감도 테두리가 넓습니다. 테두리가 넓으면 깊이가 모자라기 쉬운데, 넓게 여러 가지 그림감을 다루면서도 깊이를 놓치지 않습니다. 이는 그리는이 혼자서 애쓰기 때문이 아니라, 도움을 주는 사람이 둘레에 많기 때문이겠지만, 그리는이 스스로 자기가 그림으로 담아내어 줄거리로 살을 입히는 만화에 온마음을 쏟아붓지 않으면 이룰 수 없는 일입니다. 자전거 한 대를 그려도 그냥 떠오르는 대로 그리지 않는다는 소리입니다. 야구공 하나를 그려도, 공을 차는 다리 모양을 그려도, 이삿짐차와 책을 실은 짐차와 얼린 물고기를 실은 짐차를 그려도, 대충대충 그리지 않아요.

 여기까지만 되더라도 대단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 만화를 보자면, 이만큼이라도 된 만화를 요즘에는 거의 찾아볼 수 없습니다. 뭐, 몇 사람쯤, 혼자서 바득바득 애쓰는 분들 만화에서는 엿볼 수 있는데, 초중고등학교 아이들까지 두루 즐겨보는 만화를 그리는 사람들한테서는 좀처럼 찾아보기 어려워요. 너무 대충 그립니다. 아무래도, 도움이(배경이나 말풍선이나 칸을 그리며 도와주는 일꾼)를 쓰기 쉽지 않은 형편도 한몫 할 테지요.


 요즘 틈틈이 보는 일본 만화 가운데 《교도관 나오키》(고다 마모라 그림,학산문화사,2006)가 있습니다. 어느덧 3권까지 우리 말로 나왔는데, 이 만화는 제가 즐기는 다른 일본 만화와 마찬가지로 깊은 생각이 담겼습니다. 제가 달가이 여기지 않는 말로 한다면 ‘철학’이 담긴 만화라 하겠어요. 사형제도를 꼭지점으로 놓고, 끔찍한 범죄를 저지른 사람, 끔찍한 범죄로 피해를 입은 사람, 범죄자를 가두어야 하는 사람, 범죄자한테 교수형 집행을 손수 치러 주어야 하는 교도관, 벌을 내리는 판사와 변호하는 사람, 가해자와 피해자 유족, 이런 사형제도를 꾸려 나가는 정부… 어느 것 하나 빠뜨리지 않고 꼼꼼하게 살피면서 이야기를 건넵니다. 객관이라든가 냉철로 줄거리를 다루지 않습니다. 있는 그대로 보여줄 뿐인데, 있는 그대로 보여주는 한편, 우리들 모두가 ‘사람’이라는 대목을 놓치지 않습니다.


.. 반성한 사람을 이렇게 공포에 질리게 한 다음 죽여 버리다니… 사형을 집행하는 사람은 귀신이에요, 악마예요? 이건 도저히 인간이 할 짓이 아니에요! ..  〈3권 147쪽〉

.. 아오야마는 처음부터 자기 죽음으로 속죄할 각오를 하고 있었어. 그래서 오오키의 위증을 알고도 사형을 감수했다고 나는 생각해. 나는 그런 아오야마의 고결함에 감복하고, 복구규정을 어기면서 특별대우를 해 주는 거야. 이해해 줘, 나오키 ..  〈3권 198쪽〉


 제대로 그렸다는 생각이 드는 일본 만화를 보면서, ‘야, 이래서 요즘은 영화가 책보다 더 사랑을 받는구나’ 싶은 생각이 듭니다. 한편, 만화에 나오는 대사만 쏙 뽑아서 소설을 쓴다고 해도 거의 똑같이 마음이 꿈틀거렸으리라는 생각도 듭니다. 그러고 보니, 요즘 우리 나라에서 나오는 여러 가지 책을 살펴보았을 때, 마음이 꿈틀거리게 하는 책이 드물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드는군요. 얼마 없어요. 어느 만큼 ‘참, 좋네’ 하는 생각으로 이끄는 책이 있기는 하지만, 눈물이 똑똑 떨어질 만큼 마음 깊은 곳까지 파고드는 이야기를 건네지는 못한다고 할까요? 더 깊이 곰삭이며 자기 목소리를 낮출 줄 알고, 누구나 다 함께 귀기울여 들을 만한 이야기로, 깊은 밤에도 불을 밝히며 읽을 만한 이야기로, 바쁘고 고되게 일하는 가운데에도 틈을 짜내어 헤아리고 살필 만한 이야기로 빚어내는 책이 뜻밖에도 적구나 싶어요.

 훌륭하다는 생각까지도 드는 일본 만화를 보다가, 잠깐 덮습니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듭니다. 이 만화를 그린 사람은 만화 하나를 훌륭하게 그렸는데, 만화가 아닌 소설을 썼어도, 시를 썼어도, 수필을 썼어도, 이와 거의 같은 즐거움과 뭉클함을 선사했으리라고요. 다만, 만화라는 매체이기 때문에 ‘책을 좋아한다는 사람’들이 제대로 눈길을 안 둘 뿐이며, 찬찬히 살피지도 않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제대로 된 만화 하나가 나오자면, 글책 하나가 나오는 시간 못지않게 힘과 땀을 들여야 하고, 살가운 사진책 하나 엮어내는 시간 못지않게 오랜 세월 붓에 모든 것을 바쳐야 하는데 말입니다.

 그러고 보면, 저는 생각을 담은 책을 좋아합니다. 생각을 담은 만화를 좋아합니다. 생각을 담은 그림책, 생각을 담은 사진책, 생각을 담은 경제-경영-과학-종교-예술-교육-문학-인문학-어린이책 들을 좋아합니다. 생각을 담지 않은 책은 이 나라에서 가장 훌륭하다는 출판사에서 낸 책이라 해도, 가장 이름난 글쟁이가 쓴 책이라 해도, 100만 부나 200만 부가 팔려나갈 만큼 인기가 높은 책이라 해도, 대통령이 칭찬하고 신문과 방송마다 크게 칭찬하는 책이라 해도, 거들떠보지 않습니다. 누가 거저로 안겨 줘도 읽지 않습니다. 그냥 헌책방에 가져다줍니다.

 생각을 담은 만화, 생각을 담은 소설, 생각을 담은 교육학, 생각을 담은 사진, 생각을 담은 동화 하나 그립습니다. (4339.6.6.불.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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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모님 집에서 설을 맞이합니다. 차례를 지낸 뒤 식구들이 둘러앉아 떡국을 먹습니다. 마루에 켜 놓은 텔레비전에서는 ‘무슨 시험대회 1등’을 했다는 사람들이 나와서 문제맞히기를 겨룹니다. 펄 벅이라는 분이 쓴 소설이름을 맞추는 문제가 나옵니다. 문제를 들은 분은 곰곰이 생각하더니 “《대지》?” 하고 작은 목소리로 말하고, 문제 낸 이는 “네, 맞았습니다!” 하고 외칩니다. 문득, 《대지》가 아니라 《넓은 땅》이라고 말했으면 어찌 되었을까 궁금해집니다. 우리들은 익히 ‘大地’란 한자말 이름으로 알고 있으나, 펄 벅 님 작품을 우리 말로 처음 옮길 때 “너른 땅”이나 “넓은 땅”, 또는 “어머니 땅”으로 옮겼을 수 있으니까요. 앞으로 언제가 되든 이렇게 살갑게 책이름을 고쳐 옮길 수도 있고요. 철학가 플라톤이 남긴 말을 모은 책은 1950년대에 《잔치》라는 이름으로 옮겨집니다. 그 뒤 《향연》이라는 이름으로 옮긴 이가 있습니다. 요즘은 ‘잔치’로 책이름을 쓰는 곳이 있는 한편 ‘향연’으로 책이름을 쓰는 곳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 둘은 어찌 다를까요. 우리는 왜 두 가지 책이름으로 같은 책을 가리키고 있을까요. (4340.2.18.설.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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