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으로 살림을 옮긴 올 4월부터 아침 또는 낮 또는 저녁에 틈틈이 동네 골목길 마실을 합니다. 으레 사진기를 한쪽 어깨에 메지만, 사진기를 놓고 다닐 때도 있습니다. 사진기를 들고 나오지 않을 때면 꼭 ‘이 모습은 사진으로 찍어야 하는데’ 하는 생각이 들어 아쉽지만, 이런 아쉬움을 느끼는 일도 좋다고 느낍니다. 사진은 발자국이 되어, 제가 이 세상을 떠나고 없을 때에도 뒷사람들이 살펴보고 요즈음 인천 삶터를 느끼도록 해 줄 테지만, 제 눈으로 비춰지고 제 마음에 담긴 인천 골목길 삶터 모습은, 비록 ‘눈으로 그려 볼 수 있는’ 발자국으로 남지 못할지라도, 제가 만나는 사람들한테 하나하나 펼쳐지겠지요. 사람과 사람으로 부대끼고 복닥이고 어울리는 느낌이 건네지면서.

 달동네 골목길 밤마실을 하면, 저기 시내가 한눈에 펼쳐지고, 깊어가는 밤에 반짝이는 전기불빛 가운데 도드라지는 붉은 십자가, 하얀 십자가가 많이 보입니다. 예배당이 참 많구나, 하는 소리가 절로 터져나옵니다. 보고 보고 또 보아도 이런 소리가 터져나옵니다. 그러던 지난주, ‘저 예배당 사람들도 설교를 하고 성경을 읽으면서 지금 우리 지구가 많이 아파하고 환경이 더러워지고 있음을 이야기로 듣고 할 텐데, 왜 밤에도 십자가 불을 켜 놓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밤길이 어두워서? 깊은 밤에도 동네사람들한테 따순 사랑과 믿음을 나누어 주고 싶어서?

 지난 목요일, 모처럼 서울 나들이를 한다며 전철길에 오릅니다. 인천에서도 서쪽 끝에서 전철을 타고 서울로 가는 길. 참 멉니다. 걸상이 천이 아닌 쇠붙이로 된 열차가 드문드문 있어서, 이런 열차를 타고 가자면 엉덩이도 시렵지만 기분이 나쁩니다. 누가 불지를까 걱정된다고 전철 깔개를 쇠붙이로 한다면, 버스 깔개와 기차 깔개도 이렇게 해야 하지 않나요? 비행기는 어떻고? 궁시렁궁시렁 중얼중얼 투덜투덜 하면서 책을 읽습니다. 그즈음, 양복을 쪼옥 빼입은 머리 벗겨진 아저씨가 긁직한 목소리로 ‘하느님 찬양’과 ‘예수 천국, 불신 지옥­’을 읊습니다. 전철을 함께 탄 옆지기는, 저 아저씨 예전에도 보았다고 옆구리를 쿡 찌르며 이야기합니다. “그런가?” 하고 시큰둥하게 대꾸하며 읽던 책에 다시 머리를 박습니다. 조금 뒤 책을 덮고 고개를 듭니다. 참사랑이라면, 믿는 사람한테만 축복을 내리는 사랑이 아니라, 믿지 않는 사람한테도 축복을 내리는 사랑일 텐데, 하는 생각이 스멀스멀. 참사랑이라면, 믿지 않는 사람한테 저주를 퍼붓는 사랑이 아니라, 믿지 않는 사람을 억지로 잡아끌지 않으며 더욱 아끼고 지켜볼 수 있는 사랑일 텐데, 하는 생각이 꼬물꼬물. 하느님을 믿는다기보다 자기 이익을 믿기 때문에, 하느님 사랑을 믿는다기보다 자기 이름과 돈과 힘을 믿기 때문에, 하느님을 믿는다기보다 하느님 말씀을 자기 좋을 대로 풀이해 버리기 때문에, 세계에서 가장 많이 팔리고 읽히는 책이 성경이라고 해도 전쟁이 끊이지 않고, 외려 ‘하느님 이름’으로 전쟁이 판치지 않나 하는 생각이 모락모락. (4340.10.24.물.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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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서관에서 띄우는 글]
 3 ― ‘책 싸게 사는 길’ 여쭙는 님이시여



 사람들이 묻는다. 책을 싸게 사는 길을. 인터넷으로 묻는다. 아니, 인터넷 모임 게시판에 글을 남기며 묻는다. 인터넷새책방에 책소개 글을 띄워서 5만 원짜리 상품권에 뽑히라는 둥, 여러 인터넷새책방을 두루 살피며 마일리지와 쿠폰을 어떻게 주는가를 살피라는 둥, 이런저런 도움말을 들려준다. 인터넷 모임 게시판에 댓글을 남기면서.

 어떤 책을 사고 싶기에 싸게 사고 싶을까. 자기가 바라는 책은 얼마짜리 책이기에 값싸게 사고 싶을까.

 책을 싸게 사면 좋을까. 좋다면 무엇이 좋은가.

 책을 싸게 사면 더 잘 읽을 수 있는가. 책을 싸게 사면, 그 책에 담긴 줄거리를 한껏 넉넉하게, 한결 속깊이 헤아리거나 받아들일 수 있는가.

 책을 엮어내어 파는 책마을 사람들은 왜 쿠폰을 붙이는가. 인터넷새책방은 왜 마일리지를 쌓아 주는가. 이들은 왜 책소개 글을 띄워 주었다고 몇 만 원에 이르는 선물을 베풀까.




 인터넷 모임 게시판에 올려진 ‘묻기’ 글에 엉뚱한 댓글을 남기는 나. “저는 동네책방에 주문해서, 책에 적힌 값대로만 책을 사기 때문에 책을 싸게 사는 길은 모르겠네요. 님께서는 책을 싸게 사는 길을 인터넷으로 알아보기보다, 그 책을 살 수 있도록 알바를 하시는 편이 좀더 슬기롭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헌책방 나들이를 하는 분들 가운데 절반 조금 웃돌 만큼은, ‘책을 싸게 살 수 있어 좋다’고 이야기한다. 그렇지만, 헌책방에서 책을 값싸게 사는 이들이, ‘자기가 헌책방에서 사서 읽은 책’을 헌책방에 되팔려 할 때에는 무척 아까워한다. ‘2000원 주고 산 책’이라면, 이 책을 헌책방에 되팔 때 얼마쯤 받을 수 있을까? 얼마쯤 받아야 알맞을까?

 헌책방에서 책을 사며 ‘책값이 싸서 좋다’면, 자기로서는 참으로 자기 마음밭을 추스르거나 가꾸는 데에는 썩 좋은 책까지는 안 찾는다는 소리인가. 책을 살 때 헤아리는 첫 번째 잣대는 그저 ‘싼 책값’ 때문인가. 그래서 자기 마음이며 머리며 몸뚱아리며 아름답게 가꾸어 줄 수 있는 좋은 책이 있다고 해도, ‘비싼 책값’이면 도리질을 칠 생각인가. 그러면, 얼마쯤 되는 책값이 싼 편이며, 얼마쯤 되는 책값이 비싼 편일까.

 자기가 읽고픈 책을 한 권 장만하고자, 부지런히 일해서, 땀흘리며 일해서, 돈을 차곡차곡 모을 수는 없을까. 갖고는 싶은데 돈이 없는 터라 슬그머니 도둑질을 해서라도 갖고 싶은가. 갖고는 싶고 도둑질하기도 싫어서, 그 책을 갖고 있는 사람한테 빌린 다음, ‘어, 잃어버렸는데?’ 하면서 안 돌려주고 자기 책으로 삼고 싶은가.

 내가 느끼는 ‘책을 싸게 사는’ 가장 좋은 길이 있다면, 새책방이든 헌책방이든 도서관이든 찾아가서 두 다리가 아프도록 서서 읽는 길이 하나 있다. 다음으로는, 내 다른 씀씀이를 모두 줄이면서, 이를테면 머리를 머리집에 가서 깎지 않고 내 손으로 가위질해서 깎는다든지. 옷을 더는 사지 않고 바느질로 기워서 입는다든지. 또는 이웃사람한테 헌옷을 물려받거나 얻어서 입는다든지. 자가용은 아예 타지도 말고, 대중교통조차도 웬만하면 타지 말고 두 다리로 걸어다니든가 자전거로 다닌다든지. 밥을 밖에서 사먹지 말고 도시락을 챙겨서 먹는다든지. 과자부스러기 군것질을 하지 만다든지. 찻집에서 차를 사 마시지 말고 보온병에 담아 들고 다니면서 길거리 걸상에 앉아서 마신다든지. 비싼 술집에서 술 마시지 말고 가게에서 술을 사서 집에서 마신다든지. 노래방에 가지 말고 집에서 흥얼흥얼 노래를 부르거나 악기를 뜯는다든지. 이러저러하게 돈씀씀이를 줄이고 아낀 돈으로 책을 사는 길, 이 길만큼 ‘책을 싸게 사는’ 좋은 길은 없다고 느낀다.

 뭐, 생각해 보면, 책을 꼭 우리 집 책시렁에 꽂아 놓아야만 하지는 않아. 마음에 담아야 책이 아닐까. 머리에 새겨야 책이 아닐까. 내 두 손에, 내 두 다리에, 내 발바닥에 콱 박혀야 책이 아닐까. 내가 품는 생각에, 내가 움직이는 몸뚱이에, 내 모든 몸짓에 하나로 녹아들어야 책이 아닐까. 책에 담기는 지식 가운데 잊어버리는 것이 있으면 어떠랴. 다시 들춰보지 못하면 어떠랴. 그러면 자그마한 공책을 늘 들고 다니면서, 이 공책에 ‘자기가 읽은 책에서 마음에 와닿은 대목’을 가지런하게 옮겨 적으면 된다. 이렇게 해서 ‘내 나름대로 반갑다고 생각하는 글귀를 모은 내 책’을 새롭게 엮으면 된다.




 내가 인천 배다리 한쪽 귀퉁이 자그마한 자리에 연 도서관에는 내 나름대로 고등학생 때부터 읽어 온 책을 그러모아 놓았다. 이곳을 찾아오는 분 가운데 “여기에 책이 몇 권이나 있어요?” 하고 묻는 분이 으레 있고, 이렇게 묻는 분한테 으레 “책 권수가 그렇게 중요하나요? 그냥 읽고픈 책이 있으면 이곳에 와서 읽으시고, 이 책 저 책 죽 둘러보며 반가운 책을 찾아보셔요.” 하고 대꾸한다.

 그러다가 그끄제쯤, 이런 생각 하나가 났다. 우리 도서관에 있는 책 권수를 묻는 분이 있으면, “음, 날마다 꼬박꼬박 세 권씩 읽을 때, 당신께서 서른 해 동안 읽어도 다 못 읽을 만큼 있습니다.” 하고 대꾸해 볼까 하는. (4340.10.19.쇠.ㅎㄲㅅㄱ)

***
이 글은 <사진책 도서관 : 함께살기> 지킴이가 띄웁니다. <사진책 도서관 : 함께살기>는 인천 배다리 헌책방거리 한켠에 있으며, 금-토-일에만 열어 놓습니다. 찾아와서 책을 읽는 값은 따로 받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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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주 첫머리에 날씨가 확 쌀쌀해지며 가을 없이 겨울로 접어드는가 싶었습니다. 그러나 그 뒤로 나날이 날씨가 풀리며 마치 겨울에서 봄으로 되어 간다는 느낌입니다. 11월을 코앞에 두고 있는 날이건만. 다가오는 11월 날씨는 어떻게 될까요. 12월에는 겨울이 될지 포근한 날이 이어지며 모기와 파리가 끊어지 않을는지 모르겠습니다. 해마다 뒤죽박죽 날씨로 변덕이 죽을 끓고 있잖습니까. 올봄과 올여름은 지난해와 견주어, 지지난해와 견주어, 지지지난해와 견주어 참 알쏭달쏭 오락가락이었습니다. 장대비가 여러 날 동안 쉬지 않고 퍼붓지 않나, 그러다가 확 맑아지지 않나, 태풍이 몰아닥치다가도 날이 짠 개지를 않나. 어쩌면 우리 나라에는 봄과 여름과 가을과 겨울이 뚜렷하게 나뉘어 네 철 네 옷을 갈아입는 산과 들과 내와 바다는 멀찌감치 사라져 버렸을까요. 이름만 남은 범과 곰과 이리와 늑대와 여우입니다. 오소리와 너구리와 족제비와 수달을 어디에서 얼마나 만날 수 있는가요. 참새조차 자취를 감추며 비둘기와 까치만 맴도는 도시에서, 개구리가 왁왁 우는지 개골개골 우는지 꾹꾹 우는지 두 귀로 살펴 들을 수 없는 이 땅에서, 뜸부기며 소쩍새며 헤아려 볼 길 없는 시골에서, 우리들은 무엇을 배우고 가르치면서 살아가고 있는가요.

 지금 우리한테는 ‘먹고살아야 한다’는 큰 목표가, 아니 ‘돈을 더 많이 벌어야 한다’는 큰 목표가, 아니 ‘남보다 내가 더 많은 돈을 가져야 한다’는 큰 목표가, 아니 ‘나 홀로 1등이 되어 떵떵거리며 지내다가 드문드문 가난뱅이들한테 돈 몇 푼 쥐어 주며 으시대자’는 큰 목표가 이 나라 모든 사람을 휘감고 있습니다. 어른들만 휘감지 않고 아이들도 휘감습니다. 아니, 어른들 스스로 자기를 다그치는 데 그치지 않고, 자기들이 낳아 기르는 딸아들을 서너 살부터 영재와 천재로 만들어 ‘네 이웃과 동무를 밟고 올라서서 너 혼자 잘 먹고 잘 되는 길로 걸어가는’ 버릇을 익히게 하도록 채근하고 있습니다.

 문득, 요즈음 초등학교 교과서에는 어떤 줄거리가 담기나 궁금합니다. 집 앞에 있는 헌책방에 가서 5학년 2학기 〈사회〉 교과서를 펼쳐 봅니다. ‘우리 나라의 경제 성장’과 ‘정보화 시대의 생활과 산업’과 ‘우리 겨레의 생활 문화’ 세 가지를 다룹니다. 첫 단원에서는 ‘자유와 경쟁-우리 경제의 발자취-세계 속의 우리 경제-우리 기업의 해외 진출’을 다루는데, 모두 기업에서 돈 많이 벌고 공장에서 물건 많이 팔고 자동차 대수가 늘어나는 일이 ‘발전’이라고 이야기합니다. 6학년 〈생활의 길잡이〉 교과서를 펼칩니다. 7단원 ‘자연 사랑’을 보니, 우리 나라에 디젤 자동차가 많아 공기가 많이 더러워진다고, 이 문제를 풀려면 나무를 많이 심으면 된다고 이야기합니다. 나무가 하루아침에 자라지도 않지만, 자동차 줄일 생각은 아예 없고, 정작 공기가 더러워지는 큰 뿌리는 안 짚습니다. 고등학교 교과서도 꺼내어 펼치다가 제자리에 꽂아 놓습니다. 손이 덜덜 떨립니다. 아이를 낳으면 학교에 보내야 하나요? (4340.10.18.나무.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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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새벽에 잠이 깨어 일어납니다. 새벽바람이 서늘해 좀더 드러누울까 싶었으나 그냥 일어납니다. 꿈에서 저는 고등학교 2학년에서 3학년으로 갓 올라간 학생입니다. 얼굴에는 아무런 빛깔이 없고 그저 무뚝뚝함만 흐릅니다. 저뿐 아니라 동무들도 마찬가지. 모두들 대학교 들어가기만을 생각하고, 3학년 담임이 된 사람도 처음 교실에 들어와서 우리들한테 하는 말이 ‘너희들 어느 대학교에 가고 싶은지 손을 들어 보라’입니다.

 아이들한테 쪽지를 하나씩 나누어 주기에 뭔가 하고 들여다보니, 세 가지 주의사항이 적혔고, 세 번째 것은 담임선생이 들어와서 말할 때는 아무 소리도 내지 말고 다른 것도 하지 말고 자기만 바라보며 조용히 하라는 것. 속으로 뭐 이런 놈이 다 있나 생각하며 짜증스러운 얼굴로 그이 얼굴을 바라보며 이야기를 듣습니다. 아니, 이야기라 할 수 없는 중얼거림을 듣습니다. “너희들이 어느 대학교에 가고 싶은지는 모르겠지만, 맨 처음에는 의대를 써라. 그 다음에는 ……” 꿈에서도, 꿈을 깬 뒤로도, 이 소리가 무슨 생각으로 하는 말인지 갈피를 못 잡겠습니다. 담임이라는 사람은 한참 중얼중얼 떠들더니, “자, 그러면 묻자. 너희들 가운데 혹시 대학교에 가지 않겠다는 사람이 있느냐?” 하고 묻습니다. 맨 앞에 앉은 녀석이 손을 듭니다. 뒤따라 저도 손을 듭니다. “하나, 그리고 둘이냐?” 하는 중얼거림을 듣다가 잠이 깨었습니다. 그 뒤로 어떻게 되었을지, 또 그 뒤로 고3 교실에서 어떻게 지냈을지 모르겠습니다. 꿈이기는 하지만 다시 꾸기 싫고, 꿈이 아니라면 몹시 끔찍하겠구나 싶습니다. 남자만 다니는 학교에서 1학년 2학년 3학년 내내 남자 선생만 담임으로 보내야 하는 학교. 현실에서도 제 고등학교 3학년은 남자 선생 담임뿐이었고, 학교도 남학교였습니다. 지난날 칙칙함이 꿈에서도 똑같이 살아나 진저리가 쳐지기도 합니다.

 콩물 한 잔 마시고 마당으로 나옵니다. 담벼락에 책을 올려놓고 기지개를 켭니다. 하늘을 올려다봅니다. 별이 제법 많이 보입니다. 구름 한 점 없는 하늘인 듯하네요. 새벽에 신문을 돌리는 오토바이 소리가 들리고 드문드문 지나가는 차 소리가 들립니다. 예전에는 밤하늘 별이 훨씬 많았겠지요. 이 도시에서도.

 그러고 보니, 이 나라에서 고등학교 3학년 자리에 있는 아이들은 곧 대학교 입학시험을 치르겠네요. 대학교에 가려는 아이들도, 대학교에 갈 마음이 없는 아이들도.

 학교에서는 아이들한테 대학교 들어가는 시험을 치를 준비를 시키고, 내신성적이라는 이름으로 중간고사와 기말고사를 치르고, 틈틈이 모의고사를 치러서 ‘교과서 지식을 얼마나 머리속에 잘 간수하고 있는가’를 살핍니다. 아이들은 머리속에 잘 간수하고 있는 교과서 지식에 따라 차례가 매겨지고, 이 차례에 따라 모범생과 문제아이가 갈립니다.

 아이들은 ‘무슨무슨 대학교에 가려 하는가’로 ‘장래희망’을 상담하게 될 뿐입니다. 시골집에서 농사를 지을 아이라든지, 공장에서 일하려는 아이라든지, 출판사에 들어가 일하려는 아이라든지, 그림을 그리거나 사진을 찍거나 노래를 부르거나 춤을 추거나 하는 자기 예술을 가다듬으려는 아이라든지, 온몸을 바쳐 사회봉사나 사회운동을 하고픈 아이라든지, 다 다른 생각과 몸짓을 다 다른 방법으로 펼쳐 나가고자 하는 몸짓과 매무새를 추스르려면 어떻게 하면 더 나을지를 담임 교사와 상담할 수 없습니다. 무엇보다도 고등학교 3학년 담임 교사들이 ‘개성 넘치는 아이들 모두한테 걸맞게 세상 경험을 들려줄 만한’ 깊이나 너비가 없다고 하겠습니다. 시인으로 살고픈 아이한테 ‘그렇구나, 네가 시인으로 살려면 어떻게 하면 좋을까?’를 머리 맞대며 헤아릴 교사가 있을까요. 버스기사가 되고 싶은 아이한테 ‘그래, 네가 뜻있고 멋진 버스기사가 되려면 어떻게 하면 좋을까?’를 골똘히 헤아리며 함께 길찾기에 나서 줄 교사가 있을까요.

 대학교를 바라는 아이들한테는 어떠할는지요. 지구에서 가장 많이 살고 있는 벌레(곤충) 한삶을 헤아리고 싶은 아이가 생물학과에 가고 싶다고 한다면, 이 아이가 생물학과라는 곳에 가기에 알맞도록 차근차근 도와줄 만한 깊이를 갖춘 교사가 몇 사람쯤 있을까요. 잠자리를 연구하고 싶은 아이한테, 물방개를 연구하고 싶은 아이한테, 가문비나무를 연구하고 싶은 아이한테, 삵을 연구하고 싶은 아이한테, 우리네 고등학교 3학년 담임 교사들은 무슨 도움말을 건네고 어떤 도움책을 알려줄 수 있을까요.

 그림을 그리고픈 아이한테 입시미술이 아닌 생활미술을 일러 주면서, 스스로 자기 그림감을 찾아나서도록 이끌고, 학원미술이 아닌 자기 그림결을 찾는 그림그리기로 나아가도록 붙잡아 줄 고등학교 3학년 담임 교사가 있을까요. 사진을 찍고픈 아이한테, ‘오호라, 사진을 찍고 싶다고? 그렇다면 지금 네가 있는 이 학교에서 사진을 찍어 보지 않으련?’ 하고 먼저 나서서, 교실 풍경과 학교 삶을 두루 사진에 담도록 마음을 써 줄 만한 고등학교 3학년 담임 교사가 있을까요. 아니, 초중고등학교 아이들 삶과 교사들 삶을 사진으로 담아내어 보여주는 교사는 몇 사람이나 있을까요. 우리들이 초중고등학교를 다니면서 느끼고 보았던 모습을 꾸밈과 거짓과 숨김과 감춤이 없이 있는 그대로 드러내려고 힘쓰고 마음을 기울이는 ‘사진 찍는 교사’란 참말 있기나 할까요. 교사 스스로 더 넓은 세상을 보려고 하지 않으니까, 아이를 낳아 기른다는 부모 스스로 더 깊은 세상을 느끼려 하지 않으니까, 아이들은 오로지 대학바라기만을 하면서 그 풋풋하고 싱그럽고 살가운 젊음을 형광등 불빛만 쬐며 허여멀건 얼굴로 늙어버리고 있지는 않은지요. 생각해 보니, 대학교에서 사진을 배우는 학생들도 자기들이 다니는 대학교 모습이나 대학생 삶이나 대학교 둘레 사람들 발자취를 사진으로 더듬거나 헤아리는 일은 안 하고 있네요.

 지난밤에 《전태일 통신》(후마니타스,2006)이라는 책을 읽었습니다. 여러 사람들이 짤막하게 쓴 글을 그러모은 책입니다. 이 가운데 민종덕이라는 분이 쓴 글을 읽으니, ‘국민학교 졸업장도 없는 전태일한테 명예졸업장(초등학교)을 주려고 하던 뜻깊은 일’을 이야기합니다. 글 끝에 ‘졸업장 하나 없이 살아간 전태일’한테 ‘졸업장이 꼭 있어야 했을까?’라고 하면서, 우리 사회는 왜 이리 졸업장 열병에 물들어 있을까를 놓고 따끔하게 한 마디 합니다. 대학교에 돈 많이 바친 어느 재벌총수한테 명예박사학위를 주려 하니 학생들이 반대하더라는 이야기를 곁들이면서.

 졸업장이 많다고 농사를 잘 짓지 않습니다. 졸업장이 많다고 차를 얌전하게 잘 몰지 않습니다. 졸업장이 많다고 사기공갈 안 친다는 법이 없습니다. 졸업장이 많다고 가난하고 힘겨운 이웃을 알뜰히 사랑하거나 보살피도록 마음을 더 기울이지 않습니다. 졸업장이 많다고 주정뱅이가 안 되지 않습니다. 졸업장이 많다고 자기가 땀흘려 번 돈을 사회에 돌려주며 값있는 일을 하는 사람이 되지는 않습니다. 졸업장이 많다고 동화책을 잘 쓰지 않으며, 사진을 더 잘 찍지도 않고, 만화를 더 잘 그리지도 않습니다. 졸업장이 많은 사람이 인문학 책을 더 잘 써내지 않는 한편, 종교를 다룬 책이든 문화를 다룬 책이든 철학을 다룬 책이든 경제를 다룬 책이든, 더욱 속속들이 헤아리며 짚어낼 수 있는 눈길이나 눈높이가 있지 않습니다.

 꿈 이야기로 돌아가겠습니다. 새벽까지 꾼 꿈을 깬 뒤 잠깐 눈을 붙였습니다. 그때 꿈속 고3 담임 교사한테 이렇게 읊습니다. “저는 대학교에 가지 않겠습니다. 앞으로 사진을 찍으며 살 생각입니다. 그래서 하나 부탁드리고 싶습니다. 다른 동무들 공부하는 데 거슬리지 않게 있고, 없는 사람인 듯 조용히 지낼 테니, 교실에서 사진을 찍도록 허락해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제가 다니는 이 학교 모습을 사진으로 담아 10년쯤 뒤에 사진책 하나 내고 싶습니다.” (4340.10.17.물.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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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금이 가을인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다만 어젯밤, 그리고 오늘낮, 집에 있는 온도계를 보니 16∼17도입니다. 햇살이 내리쬐는 바깥은 20도를 넘길까요? 오늘은 며칠 만에 해가 얼굴을 내밀고 있어서 부랴부랴 이불을 걷어서 담벼락에 널어 놓습니다. 그러고는 머리를 감고 웃도리와 수건 빨래를 합니다. 온도계로는 가을이라 그런지 이른새벽이나 이른아침에는 머리감기 힘듭니다. 이제 막 가을 문턱을 넘어서서 그럴 텐데, 조금 지나면 익숙해지겠지요. 한겨울에도 찬물로 머리를 잘만 감아 왔으니까요.

 빨래는 집안에 널어 놓은 다음, 머리카락 물기를 조금 털어내고 마당으로 나와 해바라기를 합니다. 갈비뼈처럼 보이는 양털구름이 좋아 보여서 사진 한 장 찍습니다. 앞집 하나 건너에 있는 기찻길로 전철이 오가는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봅니다. 요새는 전철길을 따라 길게 울타리가 놓여서 시끄러운 소리를 조금이나마 막아 줍니다. 이 울타리조차 없던 지난날에는 기찻길 옆 사람들은 우예 살았을까요. 아니, 지난날에는 기찻길 옆에 살아가는 사람들이 ‘소리 공해’에 시달린다는 생각을 아예 안 했겠지요. 생각해 보면, 기찻길이든 넓은 찻길이든 가난한 사람들 살림집을 밀어내고 죽 밀어붙였어요. 그래서 가난한 사람들 모여살던 마을은 그예 두 동강이 나서 얼결에 남북, 또는 동서로 갈린 채 서로 만날 수 없는 사이처럼 되고 맙니다. 때때로 고속버스를 타고 고속도로를 달릴 때면, 이 고속도로 왼편과 오른편으로 갈린 마을에서 사는 사람들은 어떻게 오갈 수 있을까 싶어 가슴이 짠합니다. 어쩌면, 두 마을 분들은 서로 오갈 일이 없을지 모르겠고, 고속도로로 나뉜 지 오래되어서 서로 오갈 일도 사라졌는지 모르겠어요.

 잠깐 동안 해바라기를 하고 있는 데에도 머리카락 물기가 거의 다 마릅니다. 웃도리를 들고 도서관으로 내려옵니다. 물 한 잔 마시고 책상 앞에 앉습니다. (4340.10.11.나무.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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