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나이 있는 양반



  스무 해 앞서 으레 듣던 말을 떠올립니다. 그무렵 내 글을 읽던 이들은 ‘나이도 어린’이나 ‘나이가 어린’과 같은 말을 참 흔하게 썼습니다. 이런 말은 마흔 살이 될 무렵까지 자주 들었습니다. 이런 말을 들을 적마다 왜 이렇게 나이를 따지려 하나 알쏭달쏭했습니다. 이야기를 나누려면 ‘이야기’를 보아야지, 왜 자꾸 ‘나이’를 보려 하나 싶어 쓸쓸했습니다. 나이를 들추려는 사람하고는 아무 이야기를 나눌 수 없다고 느꼈습니다. 이야기가 아닌 나이를 보니까요. 이야기가 아닌 나이를 생각하니까요.


  어떤 이는 나이조차 아닌 ‘학번’을 묻습니다. 그래서, “저는 고졸입니다. 학번이란 무엇인가요?” 하고 되묻는데, 이렇게 되물어도 “그래도 학번으로 치면 뭔지 알지 않느냐?” 하면서 끝까지 ‘나이 아닌 학번’으로 사람을 따지거나 재려는 사람이 꽤 있었습니다. 그래, 참다못해 “저는 토끼띠입니다.” 하고 말했더니, 띠로 나이를 헤아릴 줄 모르는 사람도 많더군요.


  글을 쓰려면 어느 만큼 나이를 먹어야 할까요? 어떤 글을 쓸 만한 사람은 어느 만한 나이를 먹은 사람뿐일까요?


  모차르트나 베토벤 같은 사람을 안 뒤에는, 내 글을 놓고 ‘나이’를 들먹이는 사람한테 “모차르트가 지은 노래를 들으면서, 모차르트가 몇 살에 이 노래를 지었는지를 따질 생각이느냐?” 하고 물었습니다. 노래가 아름다우면 아름다운 빛을 느낄 노릇이고, 노래가 사랑스러우면 사랑스러운 숨결을 느낄 일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물으면 엉뚱하게 “네가 모차르트인 줄 아니?” 하고 되묻는 사람이 퍽 많았습니다.


  세계대회에서 1위를 거머쥐는 운동선수는 나이가 어리거나 젊기에 1위를 거머쥐지 않습니다. 스스로 솜씨를 쌓고 재주를 키웠기 때문에 1위를 거머쥡니다. 무척 어린 나이에 테니스 대회나 골프 대회에서 1위를 차지하기도 하고, 무척 늙은 나이에 테니스이건 수영이건 골프이건 1위를 차지하기도 합니다. 그뿐입니다. 스스로 어떤 일을 할 수 있는 까닭은, 스스로 몸과 마음을 하나로 다스리면서, 스스로 나아갈 길을 걸어가기 때문이라고 느껴요.


  나는 어느새 마흔 살 나이로 접어듭니다. 마흔 살이 지나니, 이제 내 글을 읽으면서 ‘나이도 어린’이나 ‘나이가 어린’이나 ‘나이가 젊은’과 같은 말을 하는 사람이 부쩍 줄어듭니다. 아니, 이제는 이런 말을 하는 사람은 거의 없지 싶습니다. 그리고, 예전과 달리 ‘나이 있는 양반’이라든지 ‘나이가 있는 사람’이라든지 ‘나이를 먹은 어른’이라든지 ‘나이도 먹고 애도 있는 양반’과 같은 말을 듣습니다.


  이 나이를 먹고 다시금 ‘나이’ 소리를 들으니 헤헤 하고 웃음이 납니다. 히히 하고 웃음이 터집니다. 내 나이가 어리다 할 적에는, 또 내 나이가 많다 할 적에는, 나는 내 이웃한테 어떤 모습인 셈일까 궁금합니다. 나이가 어리면 ‘이렇게 해야’ 하고, 나이가 있으면 ‘저렇게 해야’ 할까 궁금합니다.


  나이가 어려도 깨달은 사람은 깨달은 사람입니다. 나이가 많아도 안 깨달은 사람은 안 깨달은 사람입니다. 나이가 어려도 참거짓을 바라볼 줄 아는 사람은 바라볼 줄 아는 사람입니다. 나이가 많아도 참거짓을 가릴 줄 모르는 사람은 가릴 줄 모르는 사람입니다.


  아이들은 서로 나이를 묻지 않습니다. 어른이라는 사람들만 자꾸 이웃과 동무한테, 또 아이들한테까지 나이를 묻습니다. 이러다 보니, ‘나이를 안 묻고 살던 아이들’조차 동무끼리 나이를 따지면서 누가 오빠이니 언니이니 누나이니 동생이니 하고 자꾸 금을 긋고 맙니다. 4347.7.17.나무.ㅎㄲㅅㄱ


(최종규 . 2014 - 빛을 읽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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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죽 찢어진 왼팔



  내 오른손은 사마귀로 뒤덮였다가 사라졌습니다. 그런데 내 왼팔은 손목 언저리부터 어깨에 이르기까지 죽 찢어진 적이 있습니다. 국민학교 몇 학년 무렵인지는 떠오르지 않습니다. 다만, 국민학교 이학년이나 삼학년 무렵이었지 싶습니다. 그때 동무들은 서로 ‘담력 내기’를 곧잘 했습니다. 그무렵 살던 동네는 5층짜리 아파트가 열다섯 동이 모인 공동주택단지였는데, 모래밭 놀이터가 두 군데 있었고, 공동주택인 아파트에 공동난방을 하면서 나오는 연기를 내뿜는 커다란 굴뚝이 둘 있었어요. 아파트 지킴이 할배가 알아채면 무섭게 다그치며 나무라지만, 우리들은 5층 아파트보다 더 높이 솟은 굴뚝에 붙은 사다리를 타고 몰래 올라가면서 놀곤 했습니다. 그리고 아파트에 전기를 넣으려면 변압기인지 전압기가 있어야 했으니, 이 시설이 놀이터 구석에 있었고, 쇠가시그물로 높게 울타리를 쳤어요. 그런데, 이 쇠가시그물 맨 위쪽은 5센티미터쯤 판이 놓였습니다. 쇠울타리를 버티는 판이었겠지요. 이 판 둘레로 날카롭고 뾰족한 쇠가시그물이 잔뜩 있었는데, 동무들 사이에서 쇠울타리를 잡고 올라가서, 위쪽 5센미터밖에 안 되는 좁다란 판을 걷는 ‘담력 내기’를 하곤 했어요. 거의 모두 몇 발자국 걷지 못하고 놀이터 모래밭으로 펄쩍 뛰어내렸는데, 나는 “이 끝에서 저 끝까지 갈 수 있어!” 하고 외쳤어요.


  어디에서 이런 마음이 솟았을까요. 동무들은 “그럼 해 봐!” 하고 소리쳤고, “얼마든지 하지!” 하면서 척척 쇠울타리를 잡고 올라가서, 좁은 판을 천천히 한 걸음씩 떼면서 걸었습니다. 아주 많이 걸었어요. 동무들은 모두 입을 헤 벌리며 놀랐습니다. 그런데, 아주 많이 걷다가 거의 끝에 다다를 무렵 그만 미끄러졌어요. 미끄러지면서 몸이 흔들렸고, 몸이 흔들리면서 모래밭으로 쿵 떨어졌는데, 쿵 떨어지면서 날카롭고 뾰족한 쇠가시그물에 왼팔이 깊고 길게 찢겼습니다.


  떨어지면서 거의 넋을 잃었지 싶어요. 그래도 죽지는 않았다고 느꼈어요. 어떠한 소리도 들리지 않았고 어떠한 모습도 보지 못했어요. 그저 내 둘레로 동무들과 아이들이 몰려들어서 울고 소리치는 모습만 멍하니 보았어요. 그 다음에는 우리 형이 어머니한테서 크게 꾸지람을 듣는 소리와 모습을 멍하니 보았고, 그 다음에는 병원에 드러누운 모습을 보았어요.


  나는 이때 일이 아주 커다랗게 아로새겨졌기에 국민학교 높은학년에서도 중·고등학생 때에도, 나중에도 어머니와 형한테 이 얘기를 하곤 하는데, 아무도 이때 일을 떠올리지 못합니다. 나더러 거짓말을 지어서 한다고 말합니다.


  문득 돌아보면, 이무렵부터 나는 ‘내 몸을 떠나서 나를 바라보기’를 할 수 있었는지 몰라요. 내 몸에서 아픈 데를 느끼지 못하면서 나를 보았으니, 내 몸을 떠나서 나를 보았겠지요.


  그동안 잊던 한 가지가 얼마 앞서 생각났는데, 어머니는 나더러 내 왼팔을 쳐다보지 말라고 했습니다. 병원에서는 내 왼팔이 너무 길고 깊게 찢어져서 도무지 꿰맬 수 없다 했어요. 나이가 어려 마취를 함부로 할 수 없다고 했어요. 어머니가 나한테 했던 말은 “거기 쳐다보지 마. 다 괜찮아. 다 나아.”였지 싶어요. 나는 이 말을 듣고는 깊이 잠들었고, 병원에서 나와 학교를 다시 다닐 적에도 왼팔을 쳐다보지 않으며 지냈습니다. 자꾸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도 고개를 오른쪽으로 돌리며 살았어요.


  이렇게 한참 지내다가 왼팔이 찢어졌다는 생각까지 잊던 어느 때, 내 왼팔을 문득 보았는데, 감쪽같이 생채기가 사라졌습니다. 딱히 왼팔에 무엇을 했다고는 느끼지 않아요. 어머니가 날마다 소독만 해 주었겠지요. 오십 센티미터 남짓 찢어졌을 텐데, 이 생채기는 무엇이었을까요. 이 생채기는 왜 나한테 왔다가 사라졌을까요.


  내 왼팔이 찢어졌다가 아문 지 서른 해쯤 됩니다. 이제 나는 두 아이와 살아가는 아버지입니다. 아이들이 넘어지거나 부딪혀서 어딘가를 다칠 적에, 피가 나거나 찢어지거나 할 적에, 아이들한테 늘 말합니다. “괜찮아. 다 괜찮아. 다 나아. 그러니 그냥 놀아.” 4347.7.6.해.ㅎㄲㅅㄱ


(최종규 . 2014 - 빛을 읽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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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군대 얘기 하기 싫어


  나는 군대 얘기를 하기 싫습니다. 왜 하기 싫을까 하고 돌아보면, 내가 현역병으로‘자대 배치’를 받을 때에, 뜻하지 않게 ‘행정병’으로 불려 갔기 때문이지 싶습니다.

  나는 군입대 신체검사를 받을 적에 ‘면제’가 될 줄 알았습니다. 왜냐하면, 내 눈과 코가 몹시 나빠서, 눈으로는 제대로 보지 못하고 코로는 숨을 제대로 쉬지 못했고, 병원 신세를 아주 자주 졌어요. 그런데, 군입대 신체검사를 받을 적에 ‘군의관’이 나더러 ‘줄을 잘못 섰다’고 하면서, 내 앞뒤에 있는 아이들은 몸에 결격사유가 하나도 없으나 ‘면제를 받아야 하는 상황’이라고 했습니다. 그 아이들은 돈이나 권력이 있는 집안이라서 면제를 받는다고 했습니다.

  1995년 봄날, 수원에 있는 병무청에서 군의관뿐 아니라 내 앞뒤에 있던 아이 둘은 나한테 “미안하다”고 말했습니다. 나는 피식 웃으면서, 군의관과 내 앞뒤에 있던 아이 둘한테 딱 한 마디만 했습니다. “개소리 하지 마. 씨발것들.” (아, 두 마디를 했군요)

  이러구러 군대에 현역병으로 끌려가야 했는데, 내가 받은 군대 주특기는 ‘106(1114) 무반동총’입니다. 나는 내 주특기가 어쩐지 마음에 들어서, 훈련소에서 16킬로그램짜리 무반동총(바추카포)을 대나무 작대기처럼 가볍게 들고 다녔습니다. 다른 이들은 그 무거운 쇳덩이 때문에 끙끙 앓지만, 나는 그 무거운 쇳덩이가 하나도 안 무겁다고 느꼈으며, 무척 재미있는 놀잇감이라고 느꼈습니다. 나는 쉴 참에도 내 놀잇감인 쇳덩이를 닦고 손질하면서 보냈습니다.

  그런데, 자대배치를 받고 강원도 양구 동면 원당리 비무장지대 안쪽 깊숙하게 철책 바로 코앞에 있는 부대로 가서 며칠 있은 뒤, 나를 눈여겨본 사람들 가운데 ‘가장 고참’인 사람 때문에 행정병이 되어야 했습니다. 나는 무거운 바추카포를 참말 가볍게 들고 다녔고, 강원도 양구 멧골짝에서 2미터 가까이 쌓인 눈을 싸리비로 쓸어서 치울 적에 누구보다 빠르게 각을 지어서 치웠습니다. 이등병 주제에 말이지요. 군대에 가기 앞서 신문배달을 하던 경험이 있기도 했지만, 나는 언제나 새벽 네 시에 잠에서 깼어요. 일찌감치 남들보다 먼저 일어나 침낭과 모포를 개고 전투화를 닦았습니다. 내 전투화를 닦고 시간이 남아돌아서 고참 전투화도 그냥 닦아 주었습니다. 눈과 코는 엉터리였지만 다른 몸은 튼튼해서 이런 심부름이든 저런 막일이든 모두 즐겁고 가볍게 했습니다.

  내가 들어간 중대에서 최고참이 행정병인 탓에 행정병으로 끌려갔고, 나는 이등병이면서 ‘불침번 근무표’를 짜고 ‘휴가 계획표’를 짜며 ‘중대장과 행정보급관 상신보고서’라든지 ‘훈련계획서’와 ‘중대일지’ 따위를 쓰는 행정병 노릇을 해야 했습니다. 그리고 1원이 아닌 0.01원 단위로 끊어지는 ‘사병 월급 회계정리’까지 배워서 해야 했습니다.

  16킬로그램짜리 신나는 쇳덩어리를 어깨에 짊어지고 천 미터 넘는 멧골을 오르락내리락하는 재미를 누리고 싶던 나는, 펜대를 손에 쥐는 행정병이 되어야 했으니 군대에서 보낸 스물여섯 달이 몹시 고단했습니다. 떠올리기 싫은 내 발자국이 되어야 했달까요. 그런데, 이런 행정병이 된 탓에 그동안 하나도 생각해 보지 않은 수많은 것들을 두 눈으로 보고 알았어요. 무엇보다, 군대에서 장교나 하사관이 돈을 얼마나 많이 빼돌리는가를 알았습니다. 중대에 있는 중대장이나 하사관이나 행정보급관은 푼돈(한 해에 천만 원 즈음)을 빼돌린다면, 대대에 있는 간부는 목돈을 빼돌리고, 대대 위에 있는 연대와 사단과 군단 따위에서는 큰돈을 빼돌리는 줄 알았습니다. 군대에서는 회계부정을 서로 알면서 눈감아 주더군요. 그리고, 사단과 연대와 대대에서는 ‘일반 사병한테 오는 소포에 넣은 돈(현금)’을 거의 모두 가로챕니다. 이런 일은 내가 1996∼1997년 사이에 두 눈으로 보고 겪었습니다. 내가 있던 중대에서는, 소포나 편지마다 다 뜯긴 뒤 풀로 붙인 자국을 보아야 했어요.

  행정병이었어도 훈련은 똑같이 뛰지만, 여느 때에는 펜대를 잡아야 하는 일이 참 싫었습니다. 그러나, 여느 때에 늘 펜대를 잡으면서 ‘사병뿐 아니라 간부 성향이 무엇인지 모두 알아야’ 했어요. 내가 있던 중대에서 중대장이나 소대장이 어떤 성향인가 하는 ‘개인 신상관리표’라는 것이 있는데, 이런 ‘개인 신상관리표’를 중대장이나 소대장 본인은 열어 볼 수 없지만, 나는 열어서 볼 수 있었습니다. 나는 내가 있던 중대에서 간부들이 대대나 연대나 사단 따위에서 ‘어떤 평가’를 받는지를 다 알 수 있었습니다.

  며칠 앞서 강원도 어느 멧골 비무장지대(지오피)에서 ‘전역을 고작 석 달 앞둔 병장이 총을 쏘아 여러 사람을 죽였다’는 이야기가 나왔습니다. 이 가녀린 아이는 ‘A급 관심사병’이었다고 합니다. ‘관심사병’이라는 이름이 참 웃기지요. 그런데, 군대에서는 이런 이름을 아무렇지 않게 써요. 그리고, 서로 다 압니다. 중대장이든 소대장이든 하사관이든, 이런 말을 ‘그 관심사병한테 대놓고 말합’니다. ‘관심사병’이 되는 아이들은 스스로 ‘관심사병’인 줄 알아요. 군대에서 보내는 동안 얼마나 괴롭고 머리가 터지는 줄 스스로 알아요.

  전역이 석 달 남았다고 하지만, 이 아이들한테 석 달은 석 달이 아닌 ‘평생’입니다. 군대에서 석 달이 얼마나 긴지, 그러면서 얼마나 짧은지 알기란 쉬울는지 어려울는지 모르겠습니다. 왜냐하면 군대라는 곳은 늘 실탄과 수류탄 따위를 만지는 곳이기 때문에, 전역을 하루 앞두고도 수류탄이나 총알에 맞아 죽기 일쑤이기 때문입니다. 전역을 보름쯤 앞두고 지뢰를 밟아서 죽었다고 하는 이웃 중대 병장도 있었어요.

  ‘A급 관심사병’이기에 비무장지대에 갑니다. 군대가 그렇습니다. 사람들이 제대로 몰라서 그렇지, 비무장지대라는 곳에 끌려가는 사병이든 간부이든 으레 ‘A급 관심사병’입니다. ‘A급 관심사병’이 아닌 사람 가운데에는 ‘참말 군대를 좋아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참말 군대를 좋아하는’ 사람은 누구인가 하면, 영화 〈포레스트 검프〉에 나오는 ‘베트남전쟁에서 소대장 맡은’ 사람입니다. 사회에서 바보로 여기는 사람과 사회에서 바보가 된 사람이 바로 비무장지대로 끌려갑니다. 그리고, 사회에서 바보로 만들려는 사람이 비무장지대로 끌려가요.

  군대는 아주 엄청난 곳이에요. 어마어마한 세뇌와 강요와 압박으로 ‘나는 스스로 바보이다’ 하고 외치도록 하는 곳입니다. 어떤 이는 이런 세뇌와 강요와 압박을 한귀로 흘리면서 제 모습을 잃지 않습니다. 어떤 이는 이런 세뇌와 강요와 압박으로 보내야 하는 나날을 ‘좋은 경험’으로 삼으면서 씩씩하게 참고 받아들입니다. 그리고 어떤 이는 이런 세뇌와 강요와 압박에서 스스로 터집니다. 죽어요.

  비무장지대에서는 사병 스스로, 또 간부 스스로 ‘내가 왜 여기로 끌려왔는지’ 다 압니다. 그리고 이를 둘레에 밝히지 않으려 합니다. 그래도 행정병으로 있는 사람은 모두 다 꿰뚫지요. 저마다 얼마나 연극을 잘 하는가를 다 볼 수 있습니다.

  나도 비무장지대에서 늘 실탄과 수류탄과 크레모아와 이것저것 따위를 늘 손으로 만지작거리며 살았고, 박격포탄이라든지 온갖 무기를 늘 손에 쥐고 살았습니다. 스스로 죽으려면 얼마든지 죽을 수 있었고, 누군가 죽이려면 얼마든지 죽일 수 있었습니다. 군대가 그토록 위계질서를 내세우면서 끔찍하게 폭력을 저지르는 까닭은 딱 하나예요. ‘늘 실탄과 무기를 가진 사람’들이 모인 군대이기 때문에, 저쪽에서 ‘내가 쉬거나 잘 때에’ 갑자기 들어닥쳐서 나를 죽이겠다는 생각이 들지 않을 만큼 더 무섭고 무시무시하게 휘두르는 폭력과 강압이 되어야 합니다.

  군대에서 불침번을 세우는 까닭은 오직 하나입니다. 누군가한테 불만을 품은 누군가가, 누군가를 죽이려고 밤에 몰래 일어나서 일을 저지르지 못하도록 하는 장치입니다. 바깥에서 들어오는 적을 막으려는 불침번이 아니라, ‘내부에서 내부를 단속하려는 장치’가 불침번입니다. 그만큼 군대 얼거리는 아주 엉성할 뿐 아니라 위험하지요. 군대에서는 ‘스포츠신문’과 ‘조선일보’만 볼 수 있고, 텔레비전은 ‘스포츠’와 ‘영화’와 ‘연속극’만 볼 수 있습니다. 왜 이렇게 할까요?

  나는 행정병이 몹시 싫었지만, 행정병으로 현역병 복무기간을 마치고 전역을 했습니다. 내가 있던 부대에 ‘A급 관심사병’은 몇 사람이나 있었을까요? 거짓말이라고 여길 분들이 있으리라 생각하지만, 내가 있던 부대에 있던 모든 사람이 ‘A급 관심사병’입니다. 이것이 ‘참’입니다. 우리 집 곁님은 군대 이야기가 이래저래 떠도, 군대에서 터진 사건이나 사고 이야기가 떠도, 그리 눈길을 두지 않습니다. 우리 곁님은 이러한 경험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경험이 있어도 곁님한테 대수롭지 않기 때문입니다. 나한테 군대 이야기라든지 군대에서 터진 사건이나 사고 이야기가 자꾸 눈에 걸리는 까닭을 생각해 봅니다.

  무엇인가 밝히려는 뜻이 아니라, 내가 두 눈으로 날마다 보던 ‘참’과 ‘거짓’을 내 이웃들한테 ‘말하라’는 뜻이겠지요. 군대에서 본 ‘병적기록부’는 참 놀라웠습니다. 나 스스로 모르던 내 이야기가 내 병적기록부에 있어요. 나도 모르지만, 나도 모르는 사이에 누군가 나를 지켜보면서 내 ‘발자취’를 만들어 놓아요. 남녘이나 북녘이나 똑같지요. 누가 서로를 ‘감시’하도록 시킬까요? 그리고, 누가 서로를 감시하면서 본 것을 ‘기록으로 적어서 기록부’를 만들까요? 그리고, 왜 군대가 있을까요. 우리 사회는, 우리 정부는, 우리 학교는 어떤 구실을 할까요. 우리가 이대로 흘러가기만 한다면, 사회 통념에 사로잡히는 사람이 되리라 느낍니다. 4347.6.23.달.ㅎㄲㅅㄱ

(최종규 . 2014 - 빛을 읽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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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나이와 철



  나는 어릴 적부터 ‘나이 많은 사람이 두렵다’고 느낀 적이 없습니다. ‘돈 많은 사람이 어렵다’고 느낀 적도 없습니다. 그저 그럴 뿐이었습니다. 그러나 사회에서는 늘 ‘나이·돈·이름·힘’이 많거나 높거나 큰 사람이 앞에 있으면 고개를 숙이라고 했어요.


  국민학교 낮은학년 때였지 싶은데, 조선 무렵 역사를 이야기하던 교사는 예전에 임금 같은 사람이 지나갈 적에 모두 고개를 숙이거나 엎드려야 한다고 했어요. 이때에 고개를 안 숙이거나 안 엎드리면 목아지를 치거나 죽이기까지 했다고 했어요. 이런 이야기를 하면서 ‘오늘 우리 사회는 신분과 계급이 없이 평등하다’고 했는데, 내 마음으로는 예나 이제나 똑같이 안 평등하다고 느꼈어요. 왜냐하면, 예전에는 권력으로 누가 누구를 죽이거나 괴롭혔다면, 오늘날에는 나이나 돈이나 이름이나 힘 따위로 누가 누구를 죽이거나 괴롭히거든요.


  어릴 적인데, 언젠가 ‘철’이라는 낱말을 동네 어느 할아버지가 알려주었어요. 철이 들지 않으면 어른이 아니라고 했어요. 철이 들 때까지는 모두가 아이라고 했어요.


  이 말을 듣고 할아버지한테 여쭈었지요. 내 나이가 마흔이 되어도 철이라는 것이 들지 않으면 어른이 아니냐고. 할아버지는 그렇다고 했어요. 다시 여쭈었어요. 내가 할아버지만큼 나이를 먹어도 철이 들지 않으면 어른이 아니냐고. 할아버지는 또 그렇다고 했어요.


  우리는 현대 물질문명 사회가 되면서 제대로 가르치거나 배우지 못합니다. 아니, 제대로 가르치던 틀이 사라졌고, 제대로 배우던 삶이 사라졌어요.


  오늘날 사회에서는 ‘어린이’라는 낱말이 새로 태어났고, ‘청소년(또는 푸름이)’이라는 낱말도 새로 태어났습니다. 이러한 새 낱말은 학교에서 씁니다. 그래서, 학교와 사회에서는 ‘아이·학생·어른(성인)’으로 사람을 가릅니다. 무척 오랫동안 ‘학생 표’와 ‘어른 표’로 나누던 사회였어요. 요즘에는 ‘청소년 표’라는 이름이 생겼지만, 시골에서는 아직도 ‘초등학생 표’와 ‘중학생 표’와 ‘고등학생 표’를 가르곤 합니다.


  우리는 사람을 나이로 보거나 이름이나 돈이나 힘 따위로 보는 틀에 익숙하거나 길듭니다. 그런데, 한국이라는 사회는 한 가지 재미있어요. 때때로 ‘나이’를 넘어서거나 ‘힘’이나 ‘이름’이나 ‘돈’을 넘어서곤 해요. ‘족보에 따라 몇 대 손’인가를 따질 때에 그래요. 나이는 어려도 항렬이 높으면 ‘어르신’으로 모시면서 높임말을 쓰지요.


  어릴 적부터 이 두 가지 사회 얼거리를 보면서 늘 궁금했어요. 우리 사회 한쪽에서는 사람을 껍데기(겉)로 갈라요. 이러면서 우리 사회 다른 한쪽에서는 사람을 알맹이(속)로 갈라요. 그러면, 우리는 무엇일까요. 우리는 어떤 목숨이고 어떤 사람일까요.


  우리가 스스로 사람을 갈라야 한다면, 나이라든지 항렬 같은 것이 아니라, 다른 것으로 갈라야 하지 않을까요. 그러니까, ‘철’이라는 것으로 갈라야, 아니, ‘철’로 사람을 바라보아야 하지 않을까요.


  철은 우리 넋을 가리키는 낱말이면서 날씨를 가리키는 낱말입니다. 봄과 여름과 가을과 겨울을 가리키는 철인 한편, 우리 마음바탕이 어떠한가를 살피는 철입니다. 마음바탕을 살피는 철일 때에는, 마음에 어떤 빛이 있는가를 헤아립니다. 겉(몸)을 살피는 철일 때에는, 우리 몸이 발을 디디며 살아가는 터전인 지구별을 헤아립니다.


  철을 아는 사람은 날씨를 알고, 날씨를 안다고 할 적에는 지구별 흐름을 알고 온누리(우주)를 압니다. 철이 든 사람은 마음을 다스릴 줄 압니다. 마음을 다스릴 줄 알 때에는 스스로 하루를 새롭게 지을(창조) 수 있습니다. 날마다 스스로 하루를 새롭게 짓는 사람은 ‘하루가 이어진 하루’를 늘 한결같이 누리고, 하루와 하루와 하루(어제와 오늘과 모레, 과거와 현재와 미래)가 언제나 하나인 채 살아요.


  그래서, 나는 어릴 적부터 꿈을 한 가지 품었습니다. “어른이 되고 싶습니다”예요. 곧, 나는 철이 들어야겠지요. 철을 바라볼 줄 알아야겠고, 철을 느끼면서, 철을 몸과 마음으로 고루 받아들여서 삶을 지어야겠지요.


  다시 말하자면, 나는 나이를 생각하지 않습니다. 꽤 되었어요. 나이를 생각하지 않은지. 나이를 생각하지 않으니, 생일도 생각하지 않습니다. 내 생일도, 우리 집 아이들 생일도, 내 어버이 생일도, 내 동무들 생일도 생각하지 않아요. 너무 마땅히, 내 둘레 사람들 나이도 생각하지 않습니다. 내 마음을 사로잡는 책을 읽을 적에도, ‘책을 쓴 사람(작가)’이 나이가 몇 살인가를 따지지 않아요. 노래를 들을 적에도 노래를 짓거나 부른 사람이 몇 살인가를 따질 일이 없습니다. 4347.6.21.흙.ㅎㄲㅅㄱ


(최종규 . 2014 - 빛을 읽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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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케익 먹기, 눈 먹기



  나는 1995년 11월 6일에 군대에 갔습니다. 나는 오른눈이 나쁘고 코가 나빠서 현역군대면제 대상이었지만, 내 앞뒤로 ‘미리 면제를 받을’ 누군가 있은 탓에, 오른눈으로는 4급 현역을 받고 코로는 3급 현역을 받았습니다. 병무청에서 신체검사를 받기 앞서 내 눈은 ‘1.5(왼눈) + 0.1(오른눈)’이었습니다. 그러니, 너무 마땅히 면제가 나오리라 여겼는데, 신체검사를 한 군의관은 30분 동안 ‘눈 검사 기계’에 내 눈을 들이대고 나서 ‘1.0 + 0.1’로 바꾸었습니다(다른 사람은 눈 검사를 1분만에 끝냈으나 저한테만 30분 동안 했습니다). 면제를 안 주려는 숫자였어요. 내 코는 수술을 해도 만성축농증을 고치지 못한다 했고, 그무렵 늘 병원에 다녔으나 이 또한 군의관은 5급이 아닌 3급을 주었습니다. 이때 군의관은 나한테 ‘7급(재검 자격)을 받아 병원에 가서 진단서를 가지고 오면 5급(면제)을 주겠다’고 몰래 얘기했습니다만, 나는 손사래를 쳤습니다. 병원에서 진단서를 떼려면 그때에 10만 원씩 든다고 했는데, 도무지 이만 한 돈을 쓰고 싶지 않았습니다. 진단서를 떼어 오면 면제를 주겠다는 말이란, 진단서가 없어도 면제를 주어야 마땅하다는 뜻이니까요. 덧붙여, 그 자리에서 이녁한테 10만 원을 주면 병원에 다녀오지 않아도 그 자리에서 진단서를 주겠다고 했습니다.


  1995년 11월에 군대에 들어가서도 줄을 잘못 섰는지, 논산에서 18시간을 기차를 타고 이리저리 돌다가 성북역에서 한 차례 쉬면서 오줌을 누었고, 다시 기차를 달려 춘천역에 내렸습니다. 그러고는 춘천에서 군대 짐차를 타고 두 시간 달렸고, 배를 타고 소양강을 가로질렀으며, 다시 군대 짐차를 타고 저녁 내내 달렸습니다. 눈이 워낙 많이 내려서 더디게 가야 했고, 춘천에서 내린 지 이레만에 드디어 내 ‘자대(복무할 부대)’에 닿았습니다. 이동안 밤에 잠을 자던 곳에서 언제나 눈쓸기를 했는데, 태어나서 이토록 많은 눈은 처음 보았습니다. 자대에 닿으니, 곧 지오피(비무장지대)에 들어간다면서 마지막 훈련이 한창이었습니다. 자대에 온 지 하루나 이틀밖에 안 된 이등병은 훈련에서 면제라 했지만, 이때에도 어떤 까닭에서인지 더블백을 풀지도 않았으나 소총부터 받고 겨울훈련(혹한기훈련)을 뛰었습니다.


  제가 배치를 받은 중대를 거느리는 중대장은 ‘똘아이’라고 했습니다. 제풀에 미쳐서 날뛰면 대대장이나 연대장 앞에서도 삿대질을 하는 놈이었습니다. 연대장이 ‘너무 추우니 훈련을 멈추고 어서 천막을 치고 병사를 재우라’고 명령했지만, 중대장은 산속에서 길을 잃은 일 때문에 혼자 창피하고 짜증이 난다면서 밤샘걷기를 했어요. 18시간 동안 강원도 양구 멧골짜기를 쉬지 않고 오줌도 누지 못하는 채 완전군장을 메고 걷기만 했습니다. 먹지도 쉬지도 오줌을 누지도 못하는 채 또 ‘18’(왜 18이라는 숫자가 되풀이되었을까요? 나중에 알아차릴 날이 오겠지요?)시간을 걷다가 문득 눈을 주워서 먹자고 생각했습니다. 옛날에 물이 없으면 하얀 눈을 녹여서 마셨다고 했으니, 물을 마시는 셈치고 눈을 먹자고 했어요.


  병장을 단 고참이 ‘눈을 먹으려면 조금만 먹어야 한다’고, 많이 먹으면 배앓이를 한다고 했어요. 그러나, 나는 이 말을 듣지 않기로 했습니다. 배가 너무 고팠거든요. 둘레에 가득 쌓인 이 하얀 눈을 눈이 아닌 ‘먹을 것’으로, 먹을 것 가운데 ‘케익’으로 그리기로 하면서 먹었어요(나는 배앓이를 안 했습니다).


  나는 군대에 가기 앞서까지 케익을 못 먹었습니다. 생크림조차 못 먹었습니다. 빵을 먹어도 크림빵은 안 먹고 단팥빵만 먹었어요. 생크림이나 케익을 먹으면 늘 배앓이를 하거나 물똥을 여러 날 누었습니다. 생일잔치를 할 적에 어릴 적에 크림케익을 꼭 한 번 먹고 크게 배앓이를 해서, 그 뒤로 늘 롤케익만 먹었어요. 그런데 왜 크림케익이 떠올라, 크림케익을 먹는다는 생각으로 눈을 집어먹었을까요?


  비무장지대에 들어가기 앞서 짧게 휴가를 받았습니다. 닷새 말미로 나온 휴가에서 동무들이 “뭐 먹고 싶니? 고기 먹고 싶지? 고깃집 가자?” 하고 말했지만, 나는 “아니, 케익.”이라는 말이 튀어나왔어요. 동무들은 깔깔 웃으면서 나를 고깃집으로 데려갑니다. 동무 하나가 밖에 나가서 생크림케익을 사 주었습니다. 1초쯤? 망설이다가 세겹살 고깃점과 케익을 나란히 먹었습니다. 케익을 먼저 혼자 다 먹었습니다. 그러고 나서 동무들은 케익을 하나 더 사 주었고, 또 혼자서 고깃집에서 케익을 다 먹었습니다.


  군대에서 사회로 돌아온 지 어느덧 스무 해 가까이 됩니다. 이제 나는 생크림케익을 먹을 수 있습니다. 내가 강원도 양구 멧골짝에서 먹은 눈은 무엇이었을까요. 그리고 고깃집에서 먹은 케익은 무엇이었을까요.


  여느 때에 그냥 물 한 잔을 마실 적하고, 물 한 잔에 이마를 대고 조곤조곤 사랑스러운 말을 속삭인 뒤 마실 적하고, 내 몸은 어떻게 맞아들일까요.


  군대를 마친 뒤 내 눈은 더 나빠졌으나, 내 코는 나아졌습니다. 깊디깊은 멧골짝에서 스물여섯 달을 살았기 때문일까요? 아마 그러하리라 느낍니다.


  좋은 것은 무엇이고 나쁜 것은 무엇일까요. 좋은 길은 무엇이고 나쁜 길은 무엇일까요. 1995년 3월에 신체검사를 받고 11월에 군대에 가기로 했기에, 깊은 멧골에서 스물여섯 달을 오롯이 보낼 수 있었고, 이때 기운이 바탕이 되어 나는 오늘 깊은 시골에서 네 식구 살림을 꾸릴 수 있습니다. 4347.6.8.해.ㅎㄲㅅㄱ


(최종규 . 2014 - 빛을 읽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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