옹글게 쓰는 우리 말
 (1562) 잘난척쟁이

 

아이들은 매번 일등 하는 아이를 ‘잘난척쟁이’로 몰아가는 식으로 이러한 제도를 거부하려 하지만
《에냐 리겔/송순재 옮김-꿈의 학교, 헬레네 랑에》(착한책가게,2012) 173쪽

 

  누구나 말을 지을 수 있습니다. 모든 사람은 새로운 말을 지을 수 있습니다. 꽃이름이나 풀이름, 벌레이름이나 나무이름은 수수한 여느 사람이 지었습니다. 임금님이나 지식인이나 학자가 지은 꽃이름이나 풀이름은 없습니다. 대통령이나 시장이나 군수가 지은 벌레이름이나 나무이름은 없습니다.


  사람을 사람 아닌 톱니바퀴 되도록 내모는 제도권교육에 얽혀들지 않는다면, 누구라도 마음을 트며 새로운 말을 짓습니다. 사람을 사람 아닌 쳇바퀴 되도록 몰아세우는 제도권사회에 길들지 않는다면, 누구나 생각을 열어 새로운 말을 짓습니다.


  틀에 갇히면 새로운 말이 태어나지 않습니다. 이를테면, 이 보기글에서는 ‘매번(每番)’과 “몰아가는 식(式)”으로”와 ‘거부(拒否)하려’가 틀에 가두는 말입니다. 사람들이 수수하게 쓰는 여느 말이라면, ‘늘’이요 ‘언제나’이며 ‘노상’입니다. ‘한결같이’나 ‘어김없이’를 쓸 수도 있어요. 때와 곳에 따라 새로운 말이 하나둘 태어납니다. “몰아가면서”나 “몰아가는 투로”나 “몰아가듯이”처럼 생각을 가다듬습니다. ‘거스르려’나 ‘손사래치려’나 ‘내치려’처럼 생각을 추스릅니다.


  쉽게 쓰는 말이 생각을 여는 말입니다. 가볍게 쓰는 말이 마음을 트는 말입니다. 어린이와 함께 나눌 수 있는 말이 생각을 사랑하는 말입니다. 시골 어르신하고 주고받을 수 있는 말이 마음을 아끼는 말입니다.


  잘난 척을 하니까 ‘잘난척쟁이’라 이름을 지을 만합니다. 잘난 척이란 자랑하고 한 갈래이니까 ‘자랑쟁이’라 이름을 지을 수 있습니다. 자랑하는 이들은 으레 거들먹거리니, ‘거들먹쟁이’라든지 ‘거들먹꾼’이라 이름을 지어도 돼요. ‘우쭐쟁이’라든지 ‘콧대쟁이’라 이름을 지어도 재미있습니다. ‘잘난척쟁이’에서 한 글자 줄여 ‘잘난척꾼’이라 할 수 있어요. 때로는 ‘잘난척바보’와 같이 이름을 지을 수 있겠지요. ‘잘난척이’라든지 ‘잘난척나무’라 불러도 잘 어울립니다. 4346.1.22.불.ㅎㄲㅅㄱ

 

(최종규 .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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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알량한 말 바로잡기
 (1581) 용변

 

아가가 엉거주춤 / 용변을 보고 있습니다
《정세훈-부평 4공단 여공》(푸른사상,2012) 108쪽

 

  한국사람이 하는 말이라면 한국말이지만, 오늘날 한국말은 껍데기는 한국말이라 하더라도, 알맹이는 한국말이라 하기 어렵습니다. 지난날에는 중국 사대주의에 찌들면서 한문을 높이 모셨고, 일제강점기에는 일본 제국주의에 짓눌리면서 일본말과 한자말과 일본 말투가 파고들었으며, 해방 뒤에는 영어 자본주의가 넘치면서 영어와 번역 말투가 퍼집니다. 세 갈래 거친 물줄기를 떨치면서 오롯이 한국말다운 한국말을 누리는 사람이 매우 적어요. 그래서 “용변을 보고 있습니다” 같은 말투를 시인조차 제대로 못 느끼면서 쓰고 말아요.


  이 대목에서는 첫째, “보고 있습니다”가 잘못입니다. 한국 말투는 이러하지 않아요. “봅니다”라고만 해야지요. 한국말에는 현재진행형이 없습니다. “본다”나 “봅니다” 한 마디로 모든 때를 가리킵니다. 어떤 이는 “보고 계시다”처럼 적기도 하는데, ‘계시다’라 한대서 높임말이 아니에요. 높임말을 옳게 하자면, “보신다”처럼 적어야 올바릅니다.


  둘째, ‘용변’이 잘못입니다. 한자말 ‘용변(用便)’은 “대변이나 소변을 봄”을 가리킨다고 해요. 여기에서 ‘대변(大便)’은 “‘똥’을 점잖게 이르는 말”이라 하고, ‘소변(小便)’은 “‘오줌’을 점잖게 이르는 말”이라 하지요.

 

 용변을 보고 있습니다
→ 똥을 눕니다
→ 오줌을 눕니다
→ 똥오줌을 눕니다
→ 볼일을 봅니다
→ 뒤를 봅니다
 …

 

  똥은 똥이고 오줌은 오줌입니다. 똥이나 오줌을 ‘점잖게’ 말해야 할 일이 없습니다. 굳이 점잖게 말하고 싶다면 ‘볼일’이나 ‘뒤’라 말하면 돼요. 더군다나, 아가라 하면 아예 달리 쓰는 말이 있어요. ‘응가’가 있거든요.


  생각을 하면서 말을 합니다. 한국사람이 쓸 한국말은 어떤 빛과 무늬와 결일까 하고 생각을 하면서 말을 합니다. 내 살가운 이웃과 살가이 나눌 어여쁜 말은 어떤 모습일까 하고 생각을 하면서 말을 합니다.


  수수하게 나누는 말입니다. 즐겁게 주고받는 말입니다. 아이들이 어릴 적부터 ‘똥’과 ‘오줌’과 ‘볼일’과 ‘뒤’와 ‘응가’ 모두 스스럼없이 받아들이며 쓰는 쉽고 바른 말이 되도록, 우리 어른들이 힘을 기울이기를 빕니다. 4346.1.21.달.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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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가가 엉거주춤 / 응가를 눕니다

 

(최종규 .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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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 말도 익혀야지
 (945) 얄궂은 말투 95 : 산보, 미소

 

스님 두 분이 아침 산보를 나왔다가 내게 다가옵니다 … 어린아이처럼 맑은 미소를 띠며 나와 함께 신기한 듯 계속 바라봅니다
《안재인-아니온 듯 다녀가소서》(호미,2007) 116쪽

 

  한자말 ‘신기’는 ‘新奇’일 때에는 “새롭고 기이하다”를 뜻하고, ‘神奇’일 때에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색다르고 놀랍다”를 뜻합니다. 보기글에서는 어느 쪽일까요. 어느 쪽이라 하더라도 “신기한 듯”은 “놀라운 듯”이나 “새로운 듯”이나 “새삼스러운 듯”으로 다듬어 봅니다. ‘계속(繼續)’은 ‘자꾸’로 손질합니다.


  이 글월에서는 “아침 산보”와 “맑은 미소를 띠며”라는 말투가 나오는데, 적기로는 한글이지만, 알맹이로는 한국말이 아닙니다. ‘산보’와 ‘미소’는 한국사람이 쓰는 낱말이 아니거든요.


  국어사전을 찾아보면 ‘산보(散步)’는 “= 산책(散策)”이라 나옵니다. 다시 ‘산책(散策)’을 찾아보면 “휴식을 취하거나 건강을 위해서 천천히 걷는 일”이라 나옵니다. 국어사전 말풀이를 읽으면 느낄 수 있는데, 국어사전 말풀이 또한 껍데기는 한글이지만 알맹이는 한국말이 아니에요. “휴식을 취하거나”란 무슨 소리인가요. “건강을 위해서”는 또 무슨 소리일까요. 국어사전부터 한국말을 옳고 바르게 써야 알맞습니다. “쉬거나”로 적고 “몸을 생각해서”로 적어야 알맞아요. 그리고, ‘산보’이든 ‘산책’이든, 한국말로는 ‘걷기’로 적어야 올바릅니다. 이 자리에서는 ‘마실’이나 ‘나들이’로 적을 수 있어요.


  ‘미소(微笑)’라는 낱말은 국어사전 말풀이에 “소리 없이 빙긋이 웃음”이라고 나오지요. 지난날 이오덕 님이 숱하게 이 낱말을 꼬집었고, 방송에서도 이 낱말은 안 써야 한다고 나오는데, 누가 꼬집든 방송에서 다루든, 한국말이 될 수 없는 ‘미소’예요. 한국말은 ‘웃음’이니까요. 그러나, 한국사람은 한국사람이면서 한국말 익히고 가다듬는 일에는 젬병인 탓에, 자꾸자꾸 ‘미소’라는 낱말을 들먹이면서 한국말 ‘웃음’은 자취를 감춥니다. 요새는 ‘스마일(smile)’ 같은 영어까지 끼어듭니다. 한국사람은 한국이라는 나라에서 세 가지 말을 쓰는 꼴입니다. 이동안 ‘빙긋이’나 ‘빙그레’나 ‘빙긋’이나 ‘빙글’ 같은 낱말은 차츰 사라져요. ‘싱긋’이든 ‘싱글’이든 설 자리가 없어요. 말놀이가 아니라 참말로, ‘싱글’이라 적은 낱말을 바라보는 한국사람은 웃음결 가리키는 낱말이 아니라 영어 ‘single’을 떠올릴 테니까요. 4346.1.8.불.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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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님 두 분이 아침 마실을 나왔다가 내게 다가옵니다 … 어린아이처럼 맑게 웃음을 띠며 나와 함께 새삼스러운 듯 자꾸 바라봅니다

 

(최종규 .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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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의' 안 써야 우리 말이 깨끗하다
 (2056) -의 : 피망의 쓴맛

 

“피망의 쓴맛을 제거하는 방법?”
《오자와 마리/노미영 옮김-은빛 숟가락 (1)》(삼양출판사,2012) 92쪽

 

  “제거(除去)하는 방법(方法)”은 “없애기”나 “빼기”나 “지우기”로 손봅니다. “없애는 방법”이나 “빼는 법”처럼 손볼 수 있습니다만, 단출하게 적을 때에 한결 나으리라 느껴요.

 

 피망의 쓴맛을 제거하는
→ 피망에서 쓴맛을 빼는
→ 피망 쓴맛을 없애는
→ 피망 쓴맛 없애는
 …

 

  한국말은 토씨를 줄이거나 덜어도 뜻과 느낌이 살아납니다. 토씨 하나 줄이면서 새 맛이 나고, 토씨 하나 덜며 새 이야기 샘솟아요. 먼저 ‘-의’에서 홀가분해야 할 노릇인데, 한국말 무늬와 결을 살찌우거나 살리는 길을 슬기롭게 생각해 보면 좋겠습니다. 4346.1.8.불.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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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망 쓴맛 없애기?

 

(최종규 .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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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살가운 상말
 610 : 여여부동

 

소리나 빛을 향한 내 성품이 너, 나의 구별이 없는 여여부동한 마음자리였으면
《김수우-百年魚》(심지,2009) 41쪽

 

  “빛을 향(向)한”은 “빛을 마주한”이나 “빛을 바라보는”이나 “빛 앞에 선”으로 다듬고, ‘성품(性品)’은 ‘마음씨’나 ‘마음결’이나 ‘됨됨이’나 ‘몸가짐’이나 ‘마음가짐’으로 다듬을 수 있습니다. 아니, 예부터 이처럼 말했습니다. “너, 나의 구별(區別)이 없는”은 “너, 나로 가르지 않는”이나 “너, 나를 나누지 않는”이나 “너, 나 사이에 금을 안 긋는”으로 손볼 만해요. “너와 내가 따로 없는”이나 “너와 내가 하나인”이나 “너와 내가 함께 있는”처럼 적어도 잘 어울립니다.


  국어사전을 찾아보면 ‘여여부동’이라는 낱말은 나오지 않습니다. 이 낱말은 한국말도 아니지만, 한국사람이 쓸 만한 한자말도 아닙니다. 중국말이거나 다른 바깥말이에요. 불교에서는 ‘여여부동(如如不動)’이라는 사자성어를 “마음이 주변 상황에 자극 받지 않고 항상 늘 원만하고 자유롭게”를 뜻하는 자리에 쓴다고 합니다. 곧, 이 사자성어를 한국말로 옮긴다면 ‘한결같이’나 ‘꾸준하게’쯤 돼요.


  그런데, 거꾸로 생각하면, 한겨레는 예부터 익히 ‘한결같이’라든지 ‘꾸준하게’처럼 말했어요. 한겨레가 ‘여여부동’처럼 말할 일은 없었어요. 불교를 파고드는 이들은 이런 한자말을 썼다지만, 처음 불교를 책에 적바림한 나라에서 한자말을 썼다 하더라도, 이 ‘한자로 지은 책’을 한국으로 받아들여 널리 퍼뜨리려 하던 사람들은 ‘한겨레가 쓰는 여느 말’로 불교 이야기를 옮겨서 나누어야 올발라요.

 

 여여부동한 마음자리였으면
→ 한결같은 마음자리였으면
→ 곧은 마음자리였으면
→ 올곧은 마음자리였으면
→ 곧고 바른 마음자리였으면

 

  집에서나 학교에서나 서로서로 아름답게 쓸 말을 주고받아야지 싶습니다. 학문으로나 역사로나 다 함께 즐거이 나눌 말을 일구어야지 싶습니다. 이 자리에서는 “보드라운 마음자리”나 “살가운 마음자리”나 “사랑스러운 마음자리”처럼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너와 나를 따로 나누지 않는 마음자리라 할 때에는 “따스한 마음자리”나 “어여쁜 마음자리”나 “환한 마음자리”나 “맑은 마음자리”라고 나타낼 수 있어요.


  생각 한 줄기 가다듬으며 말 한 줄기 가다듬습니다. 마음 한 자락 추스르며 말 한 자락 추스릅니다. 4346.1.6.해.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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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리나 빛을 바라보는 내 마음결이 너와 내가 따로 없는 한결같은 마음자리였으면

 

(최종규 .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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