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 안 써야 우리 말이 깨끗하다
 (2059) 어디의 1 : 어디의 예의냐

 

갑자기 남의 얼굴에 손을 대는 건 어디의 예의냐
《데즈카 오사무/도영명 옮김-칠색잉꼬 (5)》(학산문화사,2012) 11쪽

 

  “손을 대는 건” 같은 말투는 오늘날 그대로 두어야 할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한겨레는 예부터 이처럼 말하지 않고 “손을 대는 짓은”처럼 말했어요. ‘것(건)’이 아닌 ‘짓’이라는 낱말을 넣으며 말했어요. ‘것’이라는 낱말을 넣은 말투를 아무 자리에나 쓰지 않았어요.


  그러고 보면, 한겨레는 토씨 ‘-의’ 또한 아무 자리에나 쓰지 않았지만, 오늘날 사람들은 거의 아무 자리에나 ‘-의’를 쓰고 맙니다. 옳게 생각하거나 살피면서 말을 하는 사람이 드물고, 바르게 헤아리거나 가다듬으면서 글을 쓰는 사람이 적어요. 띄어쓰기나 맞춤법은 돌아본다지만, 옳은 말법이나 바른 글투를 곱씹는 사람은 좀처럼 안 나타납니다.


  스스로 사랑스러운 손길이 되어 사랑스러운 글빛을 드러내기란 어려울까요. 스스로 아름다운 눈길이 되어 아름다운 말빛을 나누기란 힘들까요.

 

 어디의 예의냐
→ 어디 예의냐
→ 어디서 배운 짓이냐
→ 어디서 굴러먹은 버릇이냐
 …

 

  내 어릴 적을 곰곰이 떠올립니다. 나는 “어디서 배운 버릇이냐” 하는 말투를 곧잘 들었고, 동무들끼리 다툼이 있을 때에 서로 이런 말을 외치곤 했어요. 아마, 어른들이 우리를 나무랄 적에 “너희들 그게 어디서 배운 말버릇이냐” 하고 윽박지르셨겠지요. 그래서 어린 우리들도 어른들 말투를 똑같이 물려받아 이런 말을 읊었지 싶어요.


  “어디의 예의냐” 같은 말투는 듣지 못했고 쓰지 않았어요. “어디서 배운 예의냐”라든지 “어디에서 굴러먹은 예의냐”처럼 듣고 썼어요.


  일본사람이라면 ‘の’를 넣는 말투가 익숙하거나 올바를 테고, 한국사람이라면 ‘-의’ 아닌 뜻이랑 느낌을 살리는 말투여야 알맞으며 아름답습니다. 토씨 ‘-서’나 ‘-에서’를 붙일 노릇입니다. 조금 더 살피면, “남의 얼굴에”도 “남 얼굴에”처럼 적거나 말할 수 있어요. 입으로 “남 얼굴에 손을 대는 짓”처럼 말해 보셔요. 술술 부드럽게 말이 흐르는구나 하고 느낄 수 있습니다. 4346.1.27.해.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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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자기 남의 얼굴에 손을 대는 짓은 어디서 배웠느냐

 

(최종규 .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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묶음표 한자말 175 : 다정(多情)


이쯤 되면 다정(多情)은 틀림없는 병이다
《편해문-아이들은 놀이가 밥이다》(소나무,2012) 86쪽

 

  한자말 ‘다정’을 쓰고 싶을 때에는 그냥 쓰면 됩니다. 따로 한자를 밝히면서 묶음표에 적지 않아도 됩니다. 이처럼 묶음표를 따로 쳐서 밝혀야 하는 낱말이라면, 한국사람이 쓸 만하지 않은 낱말인 한편, 한국말이 아니라는 소리입니다.


  한국사람이 꽤 많이 먹는다고 하는 어느 과자는 ‘情’이라고 하는 한자를 드러내어 씁니다. 한글로 ‘정’이라 쓰는 일이 없을 뿐 아니라, 묶음표를 치면서 ‘정(情)’처럼 쓰지도 않아요. 그냥 ‘情’이라고만 씁니다.


  이러한 말씀씀이를 올바로 바라보는 사람이 너무 적은데, 한글로 안 적고 다른 글로 적는 낱말, 이를테면 한자로 적거나 알파벳으로 적거나 가나로 적는 글은 한국글도 아니고 한국말도 아닙니다. 바깥말이요 바깥글입니다.


  ‘러브’나 ‘love’는 한국글도 한국말도 아닙니다. ‘마인드’나 ‘mind’는 한국글도 한국말도 아니에요. ‘스토리’나 ‘story’ 또한 한국글도 한국말도 아니지요. 한국말이요 한국글이 되자면, ‘사랑’과 ‘마음’과 ‘이야기’여야 합니다. 곧, ‘다정’이 되든 ‘정’이 되든 한국말이나 한국글이 아닌 줄 깨달아야 합니다. 한국사람이 한국땅에서 쓸 한국말을 슬기롭게 찾고 생각하며 알아야 할 노릇입니다.


  국어사전을 뒤적입니다. ‘다정(多情)’은 “정이 많음. 또는 정분이 두터움”을 뜻한다 합니다. ‘정(情)’은 “느끼어 일어나는 마음. 사랑이나 친근감을 느끼는 마음”을 뜻한다 합니다. ‘정분(情分)’은 “사귀어서 정이 든 정도”를 뜻한다 합니다. 이 같은 말풀이로는 세 가지 한자말 ‘다정-정-정분’을 헤아리기 힘들지만, 가만히 살피면 ‘마음’을 조금씩 달리 나타내는구나 하고 짚을 만합니다.

 

 다정(多情)은 틀림없는 병이다
→ 따순 마음은 틀림없이 병이다
→ 따순 손길은 틀림없이 병이다
→ 따스함은 틀림없이 병이다
→ 살가운 마음은 틀림없이 병이다
→ 살가움은 틀림없이 병이다
 …

 

  한국말은 한국말입니다. 한국말은 한겨레가 먼먼 옛날부터 이 땅에서 살아오며 이웃과 나누던 이야기를 보여줍니다. 한겨레 삶빛이 드러나고, 한겨레 삶무늬가 나타나며, 한겨레 삶사랑이 샘솟는 한국말입니다.


  한국말은 “빙그레 웃다”요 “싱긋 웃다”이며 “방실방실 웃다”입니다. 빙글빙글 웃기도 하고, 싱긋빙긋 웃기도 하며, 빙긋빙긋 웃기도 합니다. 웃음을 나타내거나 가리키는 낱말은 끝이 없어요. 사람마다 다 달리 나타내고, 때와 자리에 따라 늘 다르게 보여줍니다.


  우리 마음은 언제나 다릅니다. 언제나 다른 마음이라서 “따순 마음”일 때가 있고 “따스한 마음”일 때가 있습니다. “따뜻한 마음”이기도 하며 “따사로운 마음”이기도 해요. “뜨뜻한 마음”이라든지 “뜨거운 마음”일 때가 있을 테고, “보드라운 마음”이거나 “포근한 마음”일 때가 있어요.


  한자말이자 바깥말인 ‘다정-정-정분’하고 1:1로 맞춤할 만한 한국말은 없습니다. 그리고, ‘따스함-따뜻함-따숨-따사로움-뜨거움-포근함’ 같은 한국말하고 1:1로 맞춤할 만한 한자말이나 바깥말 또한 없습니다. 서로 다른 삶자리에 따라 서로 다른 사람들이 나누던 말인 만큼 1:1로 맞출 수 없어요.


  따스한 마음은 ‘살갑다’ 할 수 있습니다. 살가운 마음은 ‘사랑스럽다’ 할 수 있습니다. 사랑스러운 마음은 ‘넉넉하다’ 할 수 있어요. 넉넉한 마음은 또 무엇이라 할 만할까요.


  생각을 해 봐요. 생각을 차근차근 이어 봐요. 마음을 헤아려 보셔요. “정을 나눈다”고 하는 말은 무슨 소리인지 생각을 해 봐요. “마음을 나눈다”고 말한다면, 이때에 무슨 이야기를 나누려 하는가 생각을 해 봐요. “따스함을 나눈다”라든지 “넉넉함을 나눈다”라든지 “사랑을 나눈다”라든지, 이런 한국말을 ‘정’이나 ‘다정’이나 ‘정분’이라는 한자말이나 바깥말로는 가리키지 못할 테지요.


  마음을 기울일 때에 알맞게 쓸 말을 찾습니다. 마음을 쏟으면서 내 뜻 알뜰살뜰 꽃피울 말을 깨닫습니다. 한국말 ‘마음’과 ‘사랑’은 뜻도 테두리도 쓰임새도 넓이도 깊이도 끝이 없는 아름다운 낱말입니다. 4346.1.25.쇠.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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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쯤 되면 따순 마음은 틀림없이 병이다

 

(최종규 .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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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의' 안 써야 우리 말이 깨끗하다
 (2060) -의 : 빛의 향연

 

특히 도심의 뒷골목은 밝음과 어둠이 공존하는 ‘빛의 향연’이다
《진동선-사진가의 여행법》(북스코프,2008) 109쪽

 

  ‘특(特)히’는 ‘더욱이’나 ‘게다가’로 다듬습니다. “도심(都心)의 뒷골목”은 “도심 뒷골목”이나 “도시 한복판에 있는 뒷골목”이나 “도시 한복판 뒷골목”으로 손볼 수 있고, ‘공존(共存)하는’은 ‘어우러지는’이나 ‘얼크러지는’이나 ‘함께 있는’으로 손보며, ‘향연(饗宴)’은 ‘잔치’로 손봅니다.


  글쓴이는 여러 한자말을 쓰는데, 이 같은 낱말은 스스로 쓰고프면 쓸 만하지만, 곰곰이 따지면 굳이 써야 할 까닭이 없습니다. 한국말이 버젓이 있을 뿐 아니라, 오래도록 한겨레가 주고받던 가장 쉽고 수수하며 고운 말이 어엿하게 있어요. 글을 쓰는 분이라면 무엇보다 이 대목을 생각할 수 있어야지 싶어요. 스스로 어떤 사람으로 살아가고, 스스로 어떤 넋으로 이야기꽃 피우며, 스스로 어떤 꿈과 사랑을 말로 담느냐 하는 대목을 생각해야지 싶습니다.

 

 빛의 향연
→ 빛으로 이루는 잔치
→ 빛으로 벌이는 잔치마당
→ 빛으로 얼크러진 잔치터
→ 빛잔치
→ 빛놀이
 …

 

  함께 있기에 ‘함께 있기’입니다. ‘공존’이 아닙니다. 이 대목도 생각을 기울이면 ‘함께있기’나 ‘함께있다’를 새 한국말로 빚을 만합니다. 이와 같은 얼거리로 ‘함께쓰다’라든지 ‘함께살다’라든지 ‘함께찾다’라든지 ‘함께보다’ 같은 낱말을 빚을 수 있어요.


  잔치를 벌이기에 ‘잔치’입니다. 예순잔치나 일흔잔치를 합니다. 백날잔치나 돌잔치를 합니다. 혼인잔치나 이웃잔치, 또 마을잔치나 나라잔치를 해요. 사진을 즐기는 이는 사진잔치를 하고, 그림을 즐기는 이는 그림잔치를 합니다. 글을 쓴다면 글잔치이고, 노래를 부른다면 노래잔치가 될 테지요.


  빛으로 이루는 잔치라면 ‘빛잔치’입니다. 빛잔치는 ‘빛마당’이나 ‘빛놀이’라 할 만하고, ‘빛그림마당’이라든지 ‘빛놀이판’처럼 새롭게 생각을 이을 수 있습니다. ‘빛놀이터’라든지 ‘빛잔치놀이’처럼 생각해 볼 수 있어요. 4346.1.23.물.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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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욱이 도심 뒷골목은 밝음과 어둠이 어우러지는 ‘빛잔치’이다

 

(최종규 .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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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옹글게 쓰는 우리 말
 (1562) 잘난척쟁이

 

아이들은 매번 일등 하는 아이를 ‘잘난척쟁이’로 몰아가는 식으로 이러한 제도를 거부하려 하지만
《에냐 리겔/송순재 옮김-꿈의 학교, 헬레네 랑에》(착한책가게,2012) 173쪽

 

  누구나 말을 지을 수 있습니다. 모든 사람은 새로운 말을 지을 수 있습니다. 꽃이름이나 풀이름, 벌레이름이나 나무이름은 수수한 여느 사람이 지었습니다. 임금님이나 지식인이나 학자가 지은 꽃이름이나 풀이름은 없습니다. 대통령이나 시장이나 군수가 지은 벌레이름이나 나무이름은 없습니다.


  사람을 사람 아닌 톱니바퀴 되도록 내모는 제도권교육에 얽혀들지 않는다면, 누구라도 마음을 트며 새로운 말을 짓습니다. 사람을 사람 아닌 쳇바퀴 되도록 몰아세우는 제도권사회에 길들지 않는다면, 누구나 생각을 열어 새로운 말을 짓습니다.


  틀에 갇히면 새로운 말이 태어나지 않습니다. 이를테면, 이 보기글에서는 ‘매번(每番)’과 “몰아가는 식(式)”으로”와 ‘거부(拒否)하려’가 틀에 가두는 말입니다. 사람들이 수수하게 쓰는 여느 말이라면, ‘늘’이요 ‘언제나’이며 ‘노상’입니다. ‘한결같이’나 ‘어김없이’를 쓸 수도 있어요. 때와 곳에 따라 새로운 말이 하나둘 태어납니다. “몰아가면서”나 “몰아가는 투로”나 “몰아가듯이”처럼 생각을 가다듬습니다. ‘거스르려’나 ‘손사래치려’나 ‘내치려’처럼 생각을 추스릅니다.


  쉽게 쓰는 말이 생각을 여는 말입니다. 가볍게 쓰는 말이 마음을 트는 말입니다. 어린이와 함께 나눌 수 있는 말이 생각을 사랑하는 말입니다. 시골 어르신하고 주고받을 수 있는 말이 마음을 아끼는 말입니다.


  잘난 척을 하니까 ‘잘난척쟁이’라 이름을 지을 만합니다. 잘난 척이란 자랑하고 한 갈래이니까 ‘자랑쟁이’라 이름을 지을 수 있습니다. 자랑하는 이들은 으레 거들먹거리니, ‘거들먹쟁이’라든지 ‘거들먹꾼’이라 이름을 지어도 돼요. ‘우쭐쟁이’라든지 ‘콧대쟁이’라 이름을 지어도 재미있습니다. ‘잘난척쟁이’에서 한 글자 줄여 ‘잘난척꾼’이라 할 수 있어요. 때로는 ‘잘난척바보’와 같이 이름을 지을 수 있겠지요. ‘잘난척이’라든지 ‘잘난척나무’라 불러도 잘 어울립니다. 4346.1.22.불.ㅎㄲㅅㄱ

 

(최종규 .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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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알량한 말 바로잡기
 (1581) 용변

 

아가가 엉거주춤 / 용변을 보고 있습니다
《정세훈-부평 4공단 여공》(푸른사상,2012) 108쪽

 

  한국사람이 하는 말이라면 한국말이지만, 오늘날 한국말은 껍데기는 한국말이라 하더라도, 알맹이는 한국말이라 하기 어렵습니다. 지난날에는 중국 사대주의에 찌들면서 한문을 높이 모셨고, 일제강점기에는 일본 제국주의에 짓눌리면서 일본말과 한자말과 일본 말투가 파고들었으며, 해방 뒤에는 영어 자본주의가 넘치면서 영어와 번역 말투가 퍼집니다. 세 갈래 거친 물줄기를 떨치면서 오롯이 한국말다운 한국말을 누리는 사람이 매우 적어요. 그래서 “용변을 보고 있습니다” 같은 말투를 시인조차 제대로 못 느끼면서 쓰고 말아요.


  이 대목에서는 첫째, “보고 있습니다”가 잘못입니다. 한국 말투는 이러하지 않아요. “봅니다”라고만 해야지요. 한국말에는 현재진행형이 없습니다. “본다”나 “봅니다” 한 마디로 모든 때를 가리킵니다. 어떤 이는 “보고 계시다”처럼 적기도 하는데, ‘계시다’라 한대서 높임말이 아니에요. 높임말을 옳게 하자면, “보신다”처럼 적어야 올바릅니다.


  둘째, ‘용변’이 잘못입니다. 한자말 ‘용변(用便)’은 “대변이나 소변을 봄”을 가리킨다고 해요. 여기에서 ‘대변(大便)’은 “‘똥’을 점잖게 이르는 말”이라 하고, ‘소변(小便)’은 “‘오줌’을 점잖게 이르는 말”이라 하지요.

 

 용변을 보고 있습니다
→ 똥을 눕니다
→ 오줌을 눕니다
→ 똥오줌을 눕니다
→ 볼일을 봅니다
→ 뒤를 봅니다
 …

 

  똥은 똥이고 오줌은 오줌입니다. 똥이나 오줌을 ‘점잖게’ 말해야 할 일이 없습니다. 굳이 점잖게 말하고 싶다면 ‘볼일’이나 ‘뒤’라 말하면 돼요. 더군다나, 아가라 하면 아예 달리 쓰는 말이 있어요. ‘응가’가 있거든요.


  생각을 하면서 말을 합니다. 한국사람이 쓸 한국말은 어떤 빛과 무늬와 결일까 하고 생각을 하면서 말을 합니다. 내 살가운 이웃과 살가이 나눌 어여쁜 말은 어떤 모습일까 하고 생각을 하면서 말을 합니다.


  수수하게 나누는 말입니다. 즐겁게 주고받는 말입니다. 아이들이 어릴 적부터 ‘똥’과 ‘오줌’과 ‘볼일’과 ‘뒤’와 ‘응가’ 모두 스스럼없이 받아들이며 쓰는 쉽고 바른 말이 되도록, 우리 어른들이 힘을 기울이기를 빕니다. 4346.1.21.달.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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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가가 엉거주춤 / 응가를 눕니다

 

(최종규 .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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