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파리 공주 1
히가시무라 아키코 지음 / 학산문화사(만화) / 201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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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랑을 하지 않으면 못난 채로 살아야 하나요
 [만화책 즐겨읽기 26] 히가시무라 아키코, 《해파리 공주 (1∼2)》



 만화를 그리는 사람들은 글을 쓰거나 사진을 찍는 사람하고 견줄 수 없이 일에 파묻힙니다. 글을 쓰는 사람도 글 한 꼭지에 온삶을 바치고, 사진을 찍는 사람 또한 사진 한 장에 온마음을 쏟지만, 만화를 그리는 사람이 만화 하나에 들이는 땀과 품과 겨를을 헤아리면 아무것 아닐 수 있지 않느냐 싶기도 합니다.

 짧은만화를 그리면 짧은만화대로 잘 짜인 이야기가 되어야 하고, 긴만화를 그리면 긴만화대로 꾸준히 이어가는 이야기가 되어야 합니다. 만화는 그림을 바탕으로 글을 넣어 이야기를 이룹니다. 그러니까, 그림그리기와 글쓰기를 함께하는 만화인 셈입니다. 그런데, 그려야 하는 그림이란 아무리 적어도 주마다 스물∼서른 장이요, 스물∼서른 장에 이르는 그림을 다 다르게 다 다른 줄거리와 이야기 옷을 입힐 뿐 아니라, 만화에 나오는 사람들 모습과 움직임 또한 다 다르게 보여주어야 합니다.

 똑같은 그림은 없습니다. 모두 새로 그리는 그림입니다. 연필로 밑그림을 그리고 펜으로 마무리를 짓습니다. 먹으로 채우거나 톤을 붙여야 하고, 지우개로 연필 자국을 지웁니다. 이야기를 짜자면 소설쓰기와 같은 마음이어야 하고, 그림을 그릴 때에는 ‘사람 그리기(인체 데생)’와 ‘자연 그리기(풍경 데생)’가 함께 이루어져야 합니다.

 그림과 함께 넣는 글을 생각해 봅니다. 만화에 나오는 사람들이 하는 말(대사)이 따분하거나 앞뒤가 어긋나면 만화를 읽는 재미가 없습니다. 아니, 이야기가 이루어지지 않겠지요. 그림은 그림대로 ‘밑그림(기본 데생) 훈련’이 잘 되어야 하고, 글은 글대로 ‘글쓰기 훈련’이 훌륭히 닦여야 합니다. 그림쟁이 넋과 글쟁이 얼이 만나야 만화쟁이가 됩니다. 그림을 조금 깨작거릴 줄 알거나 글을 얼추 건드릴 줄 안대서 만화를 그리지 못합니다. 만화에 담는 이야기가 ‘거짓 아닌 참’이 되도록 바지런히 취재를 다니거나 공부를 하거나 책을 읽어야 합니다. 이러하다 보니, 만화를 그리는 이들은 밤샘을 밥먹듯이 합니다. 주마다 이어그리는 만화를 그리는 이들은 한 주 내내 쉴 겨를이 없이 몰아친 다음 마감으로 넘기고 나서야 비로소 달게 잠을 잤다가 다시금 새 마감에 쫓기며 일해요.


- ‘엄마. 엄마 말이 옳았어요. 일러스트레이터를 꿈꾸며 상경한 지 어연 반 년. 이곳 대도시 도쿄에는, 그야말로 공주님들이 가득해요. 하지만 죄송해요, 엄마. 이쯤에서 안타까운 소식을 전할게요. 어느샌가 츠키미는, 어디서 뭐가 잘못된 건지, 공주님과는 거리가 먼 동인녀가 되고 말았어요.’ (1권 8∼10쪽)
- ‘무섭게도 도쿄에는 남자 공주님이 있어요. 그것도 강하고 아름다운 남자 공주님이.’ (1권 59쪽)
- ‘만일, 만일 내가 다시 태어난다면, 그땐 인간이 아니었으면 좋겠어요. 하지만 개나 고양이는 싫어요. 예쁜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이 있으니까. 만일 다시 태어난다면, 난 그저 일렁일렁 바닷속을 유영하는 해파리가 되고 싶어요.’ (2권 64∼66쪽)



 요사이 일본만화를 보면 ‘동인녀(또는 오타쿠)’ 이야기가 더러 나타납니다. 동인만화를 그리는 여자라는 뜻도 될 텐데, 만화쟁이가 되기를 꿈꾸며 만화그리기에 온마음을 기울이는 여자요, 만화 아닌 다른 데에는 거의 눈길을 두지 않거나 생각하지 않는 여자라 할 수 있습니다.

 여자가 동인녀라면 남자는 동인남이 될까요. 바삐바삐 만화를 그리자면 햇볕 쬘 틈이 없는데다가 책상맡에 붙어 밤을 지새우기 일쑤이니, 저절로 옷차림이라든지 머리모양이라든지 마음을 덜 쓰거나 안 씁니다. 다른 도시내기는 옷차림을 뽐낸다든지 얼굴이나 머리를 예쁘장하게 가꾼다든지 하겠지요. 그러나, 밤새 만화그리기에 매달릴 사람들은 얼굴에 떡을 바른다거나 예쁜 옷을 갖춰 입을 까닭이 없습니다. 뾰족구두를 신을 일도 없어요. 오래도록 한 자리에 앉아 일하기 좋은 헐렁하며 홀가분한 차림새여야 합니다. 며칠 밤샘을 한다면 언제 머리를 감거나 씻겠습니까. 아니, 머리를 감았다가 물이 덜 마르면 만화 원고에 물방울이 떨어질 테니, 원고 마감에 바쁜 이들은 물을 건드릴 수 없습니다.

 문득 생각합니다. 제주섬에서 오름을 찍던 김영갑 님은 오름 둘레에서 살았습니다. 당신이 바라는 사진 한 장을 기다리면서 오름 둘레에서 몇 날 며칠 몇 달이고 살기를 열 해 스무 해 했습니다. 사진 한 장 찍자며 오름 둘레에서 한뎃잠을 자던 김영갑 님을 누군가 보았다면 ‘뭐 저런 거지가 다 있나?’ 싶을 만큼 덥수룩하거나 초라해 보였으리라 생각합니다. 그러나 사진 하나 제대로 얻으려고 힘쓰는 만큼 다른 데에는 눈길을 두지 못해요. 모든 기운을 쏟아 시 한 줄 소설 하나 일구는 이들이 원고지를 붙잡을 때에도 똑같습니다. 박수근이나 이중섭이든, 반 고흐나 벨라스케스이든, 우리 둘레 우리가 알거나 모르는 숱한 그림쟁이이든, 그림 한 장에 당신 삶과 목숨을 바칠 때에 바야흐로 우리 가슴을 쿵쾅쿵쾅 뛰도록 하는 작품을 낳습니다. 이동안 그림쟁이 모습은 얼마나 헙수룩하거나 꼬질꼬질해 보일까요.


- “대체 여긴 왜 또 온 거예요? (해파리) 클라라라면 보다시피 건강하니! 더는 걱정하지 않으셔도!” “왜냐니, 그야, 츠키미가 보고 싶어서 왔지.” (1권 76쪽)


 만화책 《해파리 공주》 1권과 2권을 읽습니다. 만화쟁이가 되고픈 꿈을 안고 작은도시에서 큰도시인 도쿄로 찾아온 열여덟 살 젊은 아가씨가 주인공입니다. 젊은 아가씨는 어린 날 어머니하고 본 해파리를 몹시 좋아합니다. 누군가 옆에서 바라본다면 ‘해파리 매니아’라 할는지 모르나, 그저 ‘해파리 즐김이’입니다. 해파리가 어떠한 목숨인지를 꾸준히 익히고, 해파리 그림을 그리며, 반짝거리는 해파리 빛깔과 모양을 담은 신부옷을 입는 꿈을 꿉니다.

 아직 스물조차 안 된 나이라면 홀로서기를 할 만한 만화쟁이까지는 멀었다 할 만합니다. 밑그림 그리기를 더 익히고, 다른 만화쟁이 밑에서 심부름을 하면서 만화일을 배울 때라 할 만합니다. 만화쟁이도 몹시 바쁘지만, 만화쟁이 곁에서 심부름을 하는 사람도 참 바쁩니다.

 아무래도 만화책에서 다루는 만화쟁이 삶이다 보니 쉽게 ‘동인녀’라 이름을 붙이면서 다룬다 할 테지만, 수수하거나 꾸밈없이 살아가며 ‘내 꿈과 내 사랑’을 찾는 동인녀들이 우스꽝스럽거나 웃겨 보인다 할 수 없습니다. 번들거리는 옷을 차려입거나 겉모습을 예쁘장하게 꾸미거나 이름값이라든지 권력이라든지 돈에 눈이 먼 사람들이야말로 우스꽝스럽거나 웃겨 보인다 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내 길을 찾아 내 삶을 차근차근 일구는 사람들은 아름다운 이웃입니다.


- ‘왜 요즘 계속 이런 차림만 하냐고? 그 이유는 두 가지. 하나는, 정치가만은 절대 되고 싶지 않으니까! 차라리 변태 소릴 듣는 편이 두고두고 속 편하니까!’ (1권 103∼104쪽)
- ‘그래, 그런 따분한 얘기보다, 그 아이의 해파리 얘기가 100배는 더 재미있어. 아, 해파리 구름이다.’ (1권 107쪽)
- “사람은 입는 옷 하나로 이렇게 달라질 수 있다고. 그렇다고 해서 당신들 옷 입는 취향을 당장 바꾸라는 건 아니야. 멋쟁이가 되라는 것도 아니야. 그저, 그런 차림으로는 적과 싸울 수 없다는 것만 알아 줘.” (2권 90쪽)


 만화책 《해파리 공주》에는 두 갈래 사람이 나옵니다. 첫째는 수수하고 꾸밈없을 뿐 아니라 어떤 사람들이 보기에 그저 사회부적응자처럼 보인다는 동인녀들. 둘째는 돈과 이름과 권력을 마음껏 누리며 껍데기와 겉치레를 뽐내는 정치꾼하고 개발업자.

 《해파리 공주》 1권과 2권을 덮으며 생각합니다. 이 만화에 나오는 주인공이 ‘홀로서는 만화쟁이를 꿈꾸는 동인녀’가 아닌 ‘동네 구멍가게 일꾼’이라든지 ‘공사장 일꾼’이라든지 ‘흙을 일구는 일꾼’이라면 이야기 흐름은 어떠하고, 이 만화를 마주할 사람들 생각은 어떠할까 하고.

 저마다 놓인 자리는 다르다지만, 저마다 일구는 삶은 같습니다. 저마다 하는 일은 다르다지만, 저마다 부딪치는 아픔은 같습니다.

 동네 구멍가게 일꾼도 권력자와 개발업자들 손아귀에서 허우적거리면서 괴로울 뿐 아니라 제 고향마을이나 보금자리를 빼앗깁니다. 공사장 일꾼은 하루 내내 땀을 흠뻑 흘릴 뿐 아니라 숱한 먼지를 뒤집어쓰니까 땀내가 물씬 풍겨 ‘여느 사람’이 보기에는 가까이할 만하지 않다 느끼곤 합니다. 흙을 일구는 일꾼은 예나 이제나 늘 푸대접을 받습니다. 초·중·고등학교 교사 가운데 어느 누구도 당신이 맡는 아이들한테 “너는 커서 농사꾼이 되겠니?” 하고 묻지 않습니다. 아니 농사꾼이 되라며 가르치는 교사는 없습니다. 대학교에도 농사꾼이 되도록 가르치는 학과는 없습니다. 대학교를 마친 다음 농사꾼이 되었다는 사람은 몇이나 될는지요.

 《해파리 공주》는 만화책이고, 만화는 만화다운 재미와 꿈과 이야기를 담기 마련입니다. 만화를 그리는 사람으로서 겪거나 느끼는 어려움과 아픔을 ‘괴로우니까 힘들고 눈물이 나요’ 하면서 그림으로 그릴 수 있지만, ‘괴롭지만 즐겁게 웃고 싶어요’ 하면서 그림으로 그릴 수 있습니다.


- ‘엄마, 여자는 사랑을 하면 예뻐진다고 하는데, 그럼 사랑을 하지 않으면, 영원히 못난 채로 있는 건가요?’ (1권 154쪽)


 만화쟁이도 사랑을 합니다. 동인녀이든 오타쿠라 하는 사람이든 똑같이 사랑을 하며, 사랑을 할 수 있습니다. 정치꾼도 사랑을 하고 공무원도 사랑을 합니다. 초등학교 교사이든 대학교 교수이든 누구나 사랑을 하기 마련입니다.

 그렇지만, 사랑을 하지 않거나 사랑을 잊은 채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해파리 공주》에 나오는 개발업자나 큰돈만 노리는 이들이란 ‘돈바라기’일 뿐 ‘삶바라기’라거나 ‘사랑바라기’는 아닙니다.

 모르는 노릇이지만, 한국땅 공무원들이 참다이 사랑을 하면서 살아간다면, 제아무리 윗분들이 4대강을 파헤치라느니 무어라느니 하더라도 이런 명령을 받아들이지 않으리라 생각합니다. 참다이 내 이웃과 내 보금자리를 사랑하는 공무원이라 한다면, 내 이웃과 내 보금자리를 아낄 일을 찾으면서 씩씩하게 일하리라 생각합니다. 흙을 일구는 사람들이 흙에 땀을 바치는 까닭은 돈을 벌 생각이 아니라 땀과 흙과 삶과 사람을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교사를 일컬어 참스승이라 한 까닭은 교사라는 자리는 아이들한테 지식이나 교과서를 주워섬기는 시험공부훈련기계가 아닌 따순 피가 흐르는 사랑어린 사람이 맡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은 아름다울밖에 없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이니 예뻐질밖에 없습니다. 그러니까,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아름답지 않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이 아니라면 예쁠 수 없습니다. 마음속에 사랑은 없으나 옷을 예쁘장하게 보이도록 차려입는대서 예뻐지지 않습니다.

 반드시 이루어야만 뜻있는 사랑이 아닙니다. 가슴에 품은 사랑이기에 아름답습니다. 꼭 열매까지 맺어야 좋은 사랑이 아닙니다. 스스로 우러나오는 사랑을 내 살가운 동무랑 이웃하고 오순도순 나눌 때에 아름다운 사랑입니다. (4344.2.28.달.ㅎㄲㅅㄱ)


― 해파리 공주 (1∼2) (히가시무라 아키코 글·그림,최윤정 옮김,2010.12.∼2011.1.학산문화사 펴냄,4200원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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떴다! 무지개 상가 1
김의정 지음 / 서울미디어코믹스(서울문화사) / 201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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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은 동네 작은 사람들이 좋아
 [만화책 즐겨읽기 25] 김의정, 《떴다! 무지개 상가 (1)》



 작은 동네 작은 사람들 이야기를 담은 만화책 《떴다! 무지개 상가》 1권을 봅니다. 우리들 살아가는 이 나라를 보자면, 대한민국은 경제가 몇 위이고 뭐가 몇 위이고를 따지지만, 찬찬히 내 삶터로 내려와서 내 보금자리를 돌아본다면, 우리는 누구나 작은 동네에서 작은 사람들로 살아갑니다.

 큰 동네 큰 사람들이 아닌 우리 삶입니다. 작은 동네 작은 사람들인 우리 삶이에요. 나부터 작은 동네 작은 사람입니다. 내 이웃이나 동무 또한 작은 동네 작은 사람이에요.

 서로서로 잘 나거나 못 나거나 하지 않습니다. 오순도순 지내며, 툭탁툭탁 다투기도 하다가는, ‘다 사람 사는 일’이라고 여기며 너그러이 감싸거나 어깨동무를 합니다.

 내 삶을 애써 큰 동네 큰 사람이라고 높일 까닭이 없습니다. 나로서는 작은 동네 작은 사람으로 머물고 싶지 않고, 남보다 큰 동네에서 살며 남보다 큰 사람으로 살고프다 꿈꿀 수 있어요.

 그렇지만, 큰 동네 큰 사람이든 작은 동네 작은 사람이든, 꼭 한 번 주어지는 목숨입니다. 내 어버이한테서 딱 한 번 선물받아 꾸리는 삶입니다.

 내 삶에서 서른일곱 나이는 딱 한 차례 흐르다가 지나갑니다. 스물일곱 나이도, 열일곱 나이도, 일곱 나이도 오직 한 차례만 흐르다가 지나갑니다. 두 번이나 세 번 보낼 수 없는 열여덟, 스물여덟이에요. 싫거나 못마땅하기에 서른이나 마흔을 훌쩍 건너뛸 수 없어요. 누구나 똑같이 누리는 삶입니다. 누구나 고르게 맞아들이는 나이입니다. 우리는 모두 작은 동네 작은 사람입니다. 내가 선 작은 동네를 느끼면서 작은 동네 이야기를 글이나 그림이나 만화나 사진으로 담을 수 있고, 나 스스로 꾸리는 삶을 돌아보면서 내 삶을 글이나 그림이나 만화나 사진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 “저기 혹시, 여기가 별로 즐거운 추억의 장소는 못 되니까 무조건 달아나려는 건 아니야?” “뭐, 솔직히 얘기하자면 그런 면도 없지 않아. 여기는 아버지 땜에 숨막혀 했던 기억밖에 없는 곳이니까. 하지만 내가 여길 벗어나려는 게 그것 때문만은 아냐. 나는, 나는 우리 아버지처럼 살고 싶지 않아. 이런 구석탱이 동네에 틀어박혀서 매일같이 사진관 문이나 열고 닫으면서, 매번 틀에 박힌 똑같은 사진이나 찍어대셨지. 난 그렇게 꿈도 희망도 없이 현실에 끌려다니는 사람은 되고 싶지 않아.” (74∼75쪽)
- “정말 가긴 가네. 조만간 송별회나 한번 하자고.” “잠깐 있다 가는 건데요, 뭘. 그런 거 안 해 주셔도 돼요.” “자네야 그럴지 몰라도 우리한테 풀꽃사진관은 잠깐이 아니지 않은가.” (77쪽)


 이름이 남는다 해서 한결 돋보일 삶이 아닙니다. 이름을 못 남긴다 해서 슬플 삶이 아닙니다. 돈을 더 번다고 훨씬 좋은 삶이 아닙니다. 돈을 얼마 못 벌었으니까 참 못난 삶이 아닙니다.

 즐거이 태어나서 즐거이 살다가 즐거이 죽는 목숨입니다. 즐거이 사귀다가 즐거이 어우러지며 즐거이 헤어지면서 즐거이 눈을 감는 목숨입니다.

 구석탱이 동네에서 뿌리를 내린다고 내 삶이 구석탱이 삶이지 않습니다. 생각해 보면, ‘우리 가슴을 짠하게 울리거나 움직이는 사진’을 찍은 분들은 하나같이 ‘구석탱이 동네’에 깃들거나 찾아와서 사진을 찍습니다. ‘커다란 동네’나 ‘부자 동네’ 사람들 삶을 사진으로 담아 ‘아름답다 느낄 사진을 선보이는 사람’은 거의 없거나 아예 없습니다. 연예인을 사진으로 찍거나 패션사진을 한다는 이들은 커다란 동네 커다란 사람을 담는 셈일까요. 이들 연예인이나 유명인사는 우리들 수수한 사람들하는 참으로 동떨어진 먼나라 사람일까요. 연예인은 똥을 안 누거나 밥을 안 먹을까요. 대통령은 잠을 안 자거나 하품을 안 할까요.


- “오메, 여기 707호 형님 걸려 있네!” “엉? 내 사진이?” “언제 찍은 거여?” “5년 전 칠순 잔치 때 찍은 사진이네.” “어째 5년 전에 찍은 사진보다 오늘 받은 사진이 더 젊어 보여?” “그러게! 호호호호.” “이 사진이 좀더 자연스러워 보이긴 하네, 그치?” (49쪽)
- “마리가 아버지한테 잘 보이고 싶어서 (사진을) 시작했던 거예요. 물론 아저씨의 반응은 냉담했지만. 그 무렵에 마리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얼마 지나지 않아 마리가 무슨 사진 공모전에서 상을 하나 받아왔어요. 마리가 아버지의 마음을 위로해 드릴 수 있겠다고 잔뜩 들떠 있었죠.” (66쪽)



 굳이 꾸밀 까닭이 없이 살아가는 작은 동네 작은 사람입니다. 애써 잘 보이려 하지 않는 작은 동네 작은 사람입니다.

 만화이든 소설이든 연속극이든, 왕자님이나 공주님 이야기를 담아야 하지 않습니다. 크고 까만 비싸구려 자동차를 몰아야 왕자님이지 않습니다. 아이 오줌기저귀를 빤대서 왕자님이 아닐 까닭이 없습니다. 밥순이 집순이 노릇을 하는 사람이기에 공주님이 아닐 까닭이 없습니다. 아니, 사람들이 온통 왕자님이고 공주님이면 누가 밥을 하고 누가 옷을 빨며 누가 집을 돌보지요? 밥을 안 먹고 옷을 안 입으며 집살림을 안 돌보아도 괜찮은 내 삶인가요?

 시시껄렁해 보이는 수다로 느낄는지 모릅니다. 쓸데없는 이야기로 여길는지 모릅니다. 그런데 바로 이 시시껄렁해 보이는 수다가 사람을 살찌웁니다. 바로 이 쓸데없는 이야기가 삶을 북돋웁니다.

 오이 하나 밀가루 한 봉지 필름 한 통 책 한 권마다 손때와 손길과 손자국과 손무늬가 남습니다. 한꺼번에 밀어붙여 40층이니 60층이니 하는 높고 비싼 아파트를 숲처럼 올려세워야 멋들어지거나 놀라운 도시가 되지 않습니다. 있으면 있는 대로 없으면 없는 대로 옹기종기 모여서 크고작은 살림집을 이루어 달동네이든 꽃동네이든 해동네이든 나무동네이든 텃밭동네이든 골목동네이든 복닥이면 아름다운 내 나날이고 내 삶자락입니다.


- “이것도 우리 짐이었던가? 스크랩북? 자기야, 아버님이 생태사진작가셨어?” “뭔 소리야?” “이거 아버님 사진하고 성함 아냐?” “응?” “아버님 맞지?” “아, 응.” “자기도 몰랐던 거야?” “전혀. 생전 처음 보는.” “아버님이 처음부터 사진관을 운영하신 게 아니었구나.” (91∼93쪽)
- (마리 아버지가 젊을 적 일) “여기에 사진관 개업하신다는 게 사실입니까?” “소문 참 빠르기도 하구먼.” “네? 왜요? 형님 지금 잘 나가고 있잖아요! 더 좋은 사진을 찍을 수 있는 기회가 있는데 왜 포기하시는 겁니까?” “포기는 무슨. 그냥 내 성미에 안 맞을 뿐이야. 몸도 약한 마누라를 어린 것한테만 떠맡기고 좋은 사진을 찍으면 뭘 하겠나?” (97쪽)


 이제 1권이 나온 만화책 《떴다! 무지개 상가》가 2권부터 어떤 사람들 어떤 이야기로 아웅다웅 북적거리는 삶을 보여줄는지 궁금합니다. 거룩하거나 훌륭하거나 놀랍거나 대단한 이야기가 아니어도 얼마든지 좋습니다. 자잘하거나 하잘것없거나 하찮거나 초라한 이야기일지라도 얼마든지 좋습니다. 크든 작든 내 삶을 담으면 아름답습니다. 잘 났든 못 났든 내 이야기를 나누면 즐겁습니다. 빛나든 어둡든 내 발걸음을 디디면 사랑스럽습니다. 잘생겼든 못생겼든 내 얼굴이 가장 귀엽습니다.

 대통령도 시장도 국회의원도 판사도 모두 아버지이거나 어머니이면서 딸이거나 아들입니다. 고운 목숨을 선물하는 사람이면서 고운 목숨을 선물받은 사람입니다.

 사랑하는 삶과 사랑받는 삶 이야기를 조곤조곤 적바림하는 어여쁜 만화로 이어가면 좋겠습니다. 미더운 사람과 믿음직한 사람 이야기를 소곤소곤 들려주는 아리따운 만화로 마음문을 열면 고맙겠습니다. (4344.2.23.물.ㅎㄲㅅㄱ)


― 떴다! 무지개 상가 1 (김의정 글·그림,마녀의책장 펴냄,2010.11.30./6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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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리가면 45
미우치 스즈에 지음 / 대원씨아이(만화) / 201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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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둠을 헤매는 가녀린 별
 [만화책 즐겨읽기 24] 미우치 스즈에, 《유리가면 (45)》



 마음은 무럭무럭 자라면서 아픕니다. 주근깨투성이 말괄량이 삐삐는 엄마가 하늘나라에 계시고 아빠가 먼바다에서 배를 타고 돌아다니니까, 고작 아홉 살밖에 안 된 어린이인데 혼자서 씩씩하게 집살림을 꾸리면서 학교는 안 다니고, 그저 신나게 놀면서 사람들하고 어울립니다. 삐삐는 언제나 맑고 밝지만, 삐삐 또한 무럭무럭 자라면서 아플밖에 없습니다. 둘레 어른들한테서 썩 좋은 모습을 그다지 찾아볼 만하지 않거든요.

 삐삐는 더는 크고 싶지 않습니다. 언제까지나 어린이로만 머물도록 해 준다는 약을 이웃집 토미랑 아니카랑 함께 먹습니다. 이 약이 참말 약인지 콩알인지는 모르지만, 삐삐 스스로 어른이 안 되도록 하는 약이라고 여긴다면 어른이 안 되도록 하는 약이 틀림없습니다. 무럭무럭 자라서 어른이 된다면, 다른 어른, 이를테면 아버지나 어머니가 시키는 일은 안 하고 나 스스로 내가 좋아하는 일을 찾아서 얼마든지 할 수 있습니다. 늦잠을 자든 낮잠을 자든, 물구나무 서며 밥을 먹든, 들딸기를 찾으러 들판을 누비든, 얼마든지 홀가분하게 돌아다닙니다. 그러나 어른이 된다는 일은 이것저것 할 수 없는 일이 많을 뿐더러, 돈을 벌라는 둥 짝꿍을 사귀어 집안을 꾸려야 한다는 둥 말이 많습니다. 일자리를 마련하거나 아이를 낳는 일은 거룩합니다. 그러나 햇볕 따사로운 날 살결이 구리빛으로 타면서 들꽃과 들짐승하고 벗삼지 못한다면 아름답지 못합니다.

 사람은 하루하루 자랍니다. 키가 크지 않더라도 하루하루 마음이 자랍니다. 어떤 이는 아름다이 자라는 마음일 테고, 어떤 사람은 슬프게 자라는 마음일 테지요. 아름다이 자라는 마음일지라도 아픔과 슬픔을 함께 먹습니다. 슬프게 자라는 마음 또한 아픔과 슬픔을 같이 먹습니다.

 한 사람을 사랑하거나 한 사람한테서 사랑을 받아도 아플밖에 없습니다. 한 사람을 그리거나 한 사람한테서 미움을 받아도 아플밖에 없습니다. 꿈이나 뜻을 이루었대서 늘 기쁠 수만 없습니다. 나 혼자 꾸리는 삶이 아니요, 나 혼자 살 수 없는 나날입니다. 나한테는 빛일 테지만 내 이웃한테는 그늘이요 어둠입니다. 나한테 그늘이거나 어둠이라지만 내 동무한테는 빛이기도 합니다.


- “그게 단가?” “예. 그게 답니다.” “여전히 본심을 말하지 않는 사람이군. 마스미, 자넨.” “이것도 본심의 일부분이죠. 선생님.” (5쪽)
- ‘다카츠 그룹 회장의 손녀딸과 결혼하면 총수가 될 수 있는 사람인데, 나 같은 걸 진심으로 생각할 리가 없잖아. 설령 보라색 장미를 보내 날 위로해 주는 팬이라고 해도 그 이상은 아냐.’ (11쪽)
- “두 개로 나뉜 하나의 영혼, 또 하나의 나, 나이·외모·신분에 상관없이 만나면 서로에게 끌리고, 또 다른 자신을 찾아 헤맬 수밖에 없는, 만나기 위해 태어난 내 생명의 반쪽. 하지만 이젠 상관없어요. 전 절대 만날 수 없단 걸 알았으니까요. 마스미 씨 축하해요. 정말 기쁘시겠네요. 멋진 ‘영혼의 반쪽’을 찾아서.” (14쪽)


 만화책 《유리가면》 45권이 나왔습니다. 언제 이야기가 마무리될는지 알 수 없는 긴 만화 《유리가면》입니다. 만화를 그리는 분이 언제까지 몸이 받쳐 주어 이 만화를 그릴는지 알 수 없으며, 만화에 나오는 키타지마 마야와 아유미가 〈홍천녀〉 연극을 놓고 벌이는 겨룸이 마지막 겨룸인지, 이 겨룸 끝에 새로운 겨룸이 또 나타날는지 알 수 없습니다. 키타지마 마야와 마스미 씨가 서로를 잇는 사랑고리를 참다이 깨달아 바보스럽거나 어리석은 맴돌기를 그칠 수 있는지, ‘죽음으로 사랑이 끝난다고 생각하지 않아요’라는 말마디처럼 서로 엇갈릴 수밖에 없으나 마음속 깊은 데에서는 예쁘게 만나면서 빛나는 사랑이 열매를 맺을는지 알 수 없습니다.

 그러고 보면, 만화책 《유리가면》은 줄거리가 어떻게 펼쳐지든 그리 대수롭지 않습니다. 만화책 《유리가면》에 나오는 사람들은 하루하루 나이를 먹으며 무럭무럭 자랍니다. 자랄 때마다 모두 아픔을 먹습니다. 기쁘게 웃음을 짓기만 할 수 없습니다. 웃음 뒤에 바로 눈물이 찾아들고, 눈물 다음에 또 웃음이 찾아들어요.

 웃고 울며 좋아하다가는 괴로워하는 삶입니다. 한결같이 좋거나 한결같이 궂지 않습니다. 모든 좋음과 궂음은 꾸준히 되풀이됩니다. 되풀이되는 좋음과 궂음은 사람들을 단단하게 이끌어 주고, 한 사람이 살아가는 데에 대수로운 대목이란 ‘돈·이름·힘’이 아님을 모두들 찬찬히 깨닫습니다. 사람이 살아가는 데에 대수로울 대목이란 ‘사람·사랑·삶’일 뿐임을 모두들 가만히 받아들입니다.


- “관객의 마음에서 벗어난 연극은 그저 관상용 꽃처럼 구경거리일 뿐이니까. 연극이 만드는 이야기 속에 녹아들 건 없어. 다른 인간으로 태어나. 그것만큼 이야기 전달을 잘하는 방법은 없지.” (47쪽)
- “말해 두지만, 연극 속의 세 사람 역시 남북조라는 현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이야.” “앗!” “물론 지금 사는 세상과는 확연히 달랐지. 시대의 색깔이란 것도 무시할 순 없어. 하지만 세 사람 모두 그 시대에선 현대인으로 살고 있다는 걸 잊지 마!” “네.” “리얼리티가 살아 있는 연기만이 옳다는 건 아니지만, 역할을 이해 못한 채 형식적이기만 한 연기보다는 나아. 적어도 연기에 설득력은 있을 테니까.” (61쪽)
- “머리로 이해하지 말고 마음으로 깨달아! 이 세상이 왜 존재하는지 머리로 백날 생각해 봤자 아무 소용없으니까!” (78쪽)
- “난 너희가 공간이 가진 성질과 영향력에 민감해지길 바라. 배우 역시 공간을 변화시키는 힘을 가졌거든. 연기라는 창조성에 따라 공간을 살리고 죽이는 건 모두 너희에게 달렸다.” (81쪽)
- “물론 해석은 보는 사람의 자유야. 이걸 만든 사람은 그런 의도가 전혀 없었는지도 몰라. 하지만 내겐 그렇게 느껴지거든.” (90쪽)



 오늘 하루가 아름다워야 할 삶입니다. 아름다워야 할 삶이란 돈이 넘치는 삶이 아닙니다. 내 이름을 드날리는 삶이 아름답지 않습니다. 내 힘이 뻗쳐 누구도 나를 넘보지 못한대서 아름답지 않습니다.

 나 스스로 나를 사랑하면서 내 이웃과 동무와 살붙이를 한몸으로 사랑할 때에 아름답습니다. 나부터 튼튼하고 씩씩한 사람으로 오롯이 서야 비로소 아름답습니다. 내 힘이 세든 여리든 늘 즐거이 일하고 놀며 어울릴 때에 아름답습니다.

 연극에 꿈과 뜻을 바친 어리며 젊은 넋들은 연극이 그저 연극일 뿐 아니라 삶임을 아주 천천히 맞아들입니다. 아주 천천히 헤아리면서 아주 천천히 자라납니다. 연극이 어떠한 삶인가를 깨닫는 동안 지난날 얼마나 어리석었나 하고 돌아봅니다. 어리석던 지난날을 되새기며 씁쓸합니다. 그러나 어제는 어제요, 오늘은 오늘입니다. 오늘은 오늘대로 새롭게 꾸릴 삶인 줄을 조금씩 알아챕니다. 부딪히거나 헤매거나 쓰러지거나 넘어지거나 다치면서, 이러한 모든 아픔이 얼마나 고마우며 기쁜 선물인지를 알 듯 모를 듯 곰삭입니다.


- ‘지구가 하나의 생명체? 사랑스러워? 그런 건 상상해 본 적 없었다. 사랑스러운 지구.’ (68쪽)
- ‘굉장한 생동감이다. 마치 살아 있는 것 같아. 이걸 조각한 장인은 이미 7백 년 전에 죽고 없는데, 불상은 아직도 이렇게 생생하게 남아 있다니. 사람들은 이런 부처에게 합장을 하며 무슨 소원을 빌었을까?’ (118쪽)
- ‘난 왜 여기 이러고 있는 거지? 네가 여기서 〈홍천녀〉 연습을 하고 있다는 얘길 들었기 때문에? 난 여기서 무슨 생각을 하고 무엇을 깨달았을까. 난 또 왜 이렇게 널 신경쓰는 거지?… 두 개로 나뉜 하나의 영혼, 홍천녀의 사랑, 그런 건 없어. 현실 세계에. 그런데 왜 난 이 오브제 앞에서 움직일 수 없는 걸까? 왜 벗어날 수 없는 걸까?’ (123쪽)



 지구별은 목숨 하나입니다. 지구별은 사랑 하나입니다. 여태껏 모를 수 없는 이야기이나, 여태껏 생각해 보지 못한 이야기입니다. 나는 지구별하고 똑같고, 지구별은 나와 똑같습니다. 나는 내 동무랑 똑같고, 내 동무는 나와 똑같습니다. 내 어머니는 나와 똑같으며, 나는 내 어머니와 똑같습니다. 나는 나무하고 똑같은 한편, 나무는 나하고 똑같아요. 나는 내가 날마다 먹는 밥하고 똑같을 뿐 아니라, 내가 날마다 먹는 밥은 나하고 똑같아요.

 살아가는 사람이라면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살아가며 볼 수 있는 사람이 된다면 사랑을 합니다. 살아가며 볼 수 있어 사랑을 한다면 내 목숨이 얼마나 고마운가를 돌이키면서, 내 둘레 뭇목숨마다 얼마나 고마운 목숨이요 아끼며 돌볼 목숨인가를 느낍니다.

 잠자리를 같이하거나 살을 부벼야 사랑이 되지 않습니다. 편지에 사랑노래를 잔뜩 적어 띄워야 사랑이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사랑은 삶입니다. 삶이 곧 사랑입니다. 사람은 삶이며 삶이 바로 사람입니다. 사람이 바야흐로 사랑이며 사랑이기에 다시금 사람입니다.

 곰곰이 되돌아보면, 만화책 《유리가면》은 1권부터 45권에 이르는 서른 몇 해에 걸친 작품 어디에나 이러한 사람과 사랑과 삶을 조촐히 담았구나 싶습니다. 오래도록 그리는 만화 작품에 어쩜 이리도 한결같은 이야기를 담을 수 있나 놀랍지만, 이러한 마음이 아니었으면 마흔 해 가까이 작품 하나를 이어그릴 수 없었겠지요. 만화쟁이부터 스스로 사랑과 사람과 삶이라는 세 꼭지마디를 깊이 아끼며 보살피기에, 1권부터 45권에 이르기까지 즐거이 만화삶을 선보일 수 있겠지요. 언제 번역될 지 모르는 46권이거나 47권이나 48권일까 궁금하면서, 앞으로 이어질 뒷권은 뒷권대로 하나하나 새로우며 아름답고 기쁘며 슬픈 삶·사랑·사람 이야기를 담겠구나 싶습니다.


- “〈홍천녀〉를 포기하라고요? 어린 시절부터 꿈이었던 〈홍천녀〉를? 엄마조차 연기하지 못한 〈홍천녀〉를? 배우로서의 삶? 〈홍천녀〉를 뺀 배우로서의 삶 따윈 생각해 본 적도 없어요.” (131∼132쪽)


 살아가는 보람을 연극으로 찾는 두 사람으로서는 ‘〈홍천녀〉를 뺀 배우 삶’을 생각조차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홍천녀〉를 뺀 배우 삶’을 생각할 수 없다면, 굳이 ‘〈홍천녀〉가 있어야 하는 배우 삶’이지 않습니다. 연극쟁이한테 〈홍천녀〉는 어마어마한 꿈을 엄청나게 이루어 주는 길일 수 있지만, 〈홍천녀〉은 〈홍천녀〉입니다. 연극하는 마음이 살아가는 마음이요 사랑하는 마음이며 사람다운 마음이라면, 흑천녀이든 백천녀이든 그리 다르지 않습니다. 연극쟁이 두 사람은 〈홍천녀〉를 거머쥐어야 뜻을 이루지 않습니다. ‘왜 〈홍천녀〉인가?’이며 ‘왜 연극인가?’를 깨달아야 뜻을 이룹니다. 연극이 무엇이고 사람과 사랑과 삶이 무엇인가를 알아채며 가슴과 온몸으로 삭일 때에야 시나브로 꿈을 꽃피웁니다.

 만화쟁이 미우치 스즈에 님은 앞으로 어떤 사람들 사랑 삶을 보여주면서 당신이 만화를 그리며 즐거이 나누는 사랑꽃과 눈물열매를 베풀는지 손꼽아 기다립니다. 어둠을 헤매는 가녀린 별이 언제쯤 어떻게 어둠에 가려진 빛을 보고 빛과 함께하는 어둠을 스스럼없이 손바닥에 살며시 얹을는지 예쁘게 지켜보고 싶습니다. (4344.2.18.쇠.ㅎㄲㅅㄱ)


― 유리가면 45 (미우치 스즈에 글·그림,서수진 옮김,2011.2.15./45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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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바닥으로 하늘가리기
박연 지음 / 대교출판 / 1995년 7월
평점 :
절판




 재미있는 삶이 아니면 재미없는 책
 [만화책 즐겨읽기 23] 박연, 《손바닥으로 하늘가리기》



 책이란 하늘에서 똑 떨어진 이야기를 다루지 않습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나날하고 동떨어진 이야기를 담는 책이 아닙니다.

 만화책이든 글책이든 그림책이든 사진책이든, 우리가 살아가는 이 땅에서 부대끼는 이야기를 다룹니다. 어떠한 책이든 사람이 살아가는 이야기를 담습니다.

 책이 재미없을 수 없습니다. 나하고 안 맞는 책을 만났을 뿐입니다. 책을 재미없게 여길 수 없습니다. 내가 살아가는 나날이 재미없다면 책 또한 재미없고, 내가 살아가는 나날이 재미있을 때에 내가 읽을 책도 재미있습니다.

 책은 학습지나 교재나 교과서나 참고서가 아닙니다. 책은 그예 책이며, 이야기를 종이에 글로 적바림한 묶음입니다. 책은 ‘학습지-교재-교과서-참고서’처럼 지식을 가르치거나 지식을 외우도록 이끌거나 지식을 풀어놓지 않습니다.

 그러나 오늘날 이 땅 수많은 책은, 책이라는 이름이나 허울을 썼지만, 속을 들여다보면 정작 책이 아니기 일쑤입니다. 학습지이면서 책이라는 이름을 붙인다든지, 교재나 참고서일 뿐이면서 책이라고 껍데기를 씌우기 일쑤입니다.

 책이 재미없다고 느끼는 사람은, 교재나 학습지가 책인 줄 잘못 알기 때문입니다. 책을 재미없어 하는 사람은, 참다운 책, 곧 참책이라 할 만한 책을 만나지 못했을 뿐 아니라, 스스로 책다운 책이 무엇인가를 살피거나 생각하거나 헤아리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내가 나하고 함께 노는 동무를 재미없다고 여긴다면, 나하고 함께 노는 동무도 나한테 재미있다고 느낄 수 없습니다. 왜 재미없다고 여기거나 느낄까요? 재미없다고 느끼면 재미없다고 느끼는 까닭을 생각하거나 찾거나 알아보면서, 이 재미없는 밑뿌리를 고치거나 가다듬거나 추슬러야 합니다.

 참말로 내 삶부터 재미없고, 내가 읽어야 한다는 책이 재미없으며, 내 둘레에서 흔히 보는 책이 재미없는지를 살펴야 합니다. 내 삶이 재미없는 사람은 어떠한 책을 갖다 주어도 재미있을 수 없습니다. 내 삶을 살뜰히 이어가겠다는 생각을 품지 못하는 사람은 어떠한 책을 마주하더라도 가슴이 뭉클하거나 움직이기 어렵습니다.

 내 삶을 사랑하는 사람이 내 동무를 아끼며 좋아합니다. 내 동무를 아끼며 좋아하는 사람이 날마다 받아드는 밥 한 그릇을 고마이 여깁니다. 밥 한 그릇 날마다 고마이 여기는 사람이 내가 뛰어놀거나 살아가는 이 땅 들판과 멧자락과 냇물을 즐거이 맞아들입니다. 내 보금자리를 즐거이 맞아들이는 사람이 될 때에 비로소 책 하나 좋아하는 마음을 북돋웁니다.


- 생명의 신비를 가득 안고 있는 이 알갱이들이, 자라서 수많은 새 생명들을 잉태하고 키워낼 이 작은 알갱이들이, 지금 여기, 너를 위해 죽어 있는 거란다. 네 목숨을 이어 주기 위해 … 지금 여기, 너를 위해 기꺼이 죽어 있는 거란다. 네 한 목숨이 살아갈 수 있도록 자기 목숨들을 버렸단다, 얘야. (13∼17쪽)


 만화책 《손바닥으로 하늘가리기》를 읽습니다. 어렵게 나왔으나 쉽게 판이 끊어진 만화책을 헌책방에서 찾아내어 읽습니다. 어렵게 나왔으나 쉽게 판이 끊어진 만큼, 이 책을 헌책방에서 만나기도 몹시 힘듭니다. 갓 새책으로 나왔을 때부터 알아본 사람이 적었고, 나중에 버려지거나 잊혀지며 헌책방으로 한두 권 흘러들었어도 사랑하거나 아끼는 사람이 적으니까, 이 만화책 하나를 알뜰히 즐기기란 참으로 만만하지 않습니다.

 시골에서 흙을 일구고 살아가면서 만화를 그리는 박연 님이 내놓았던 만화책 《손바닥으로 하늘가리기》입니다. 이 만화책에 담긴 이야기는 만화쟁이 박연 님이 머리로 꾸민 이야기가 아닙니다. 모두 둘레에서 듣거나 몸소 겪은 삶을 도란도란 이야기 나누듯 그려낸 만화입니다. 가만히 보면, 동무나 다른 사람한테서 들은 이야기라 할지라도, 얼마든지 어린 날 겪었음직한 이야기요, 보았음직한 이야기입니다. 또는 오늘날에도 이 나라 곳곳 어디에서나 흔히 일어나는 이야기라 할 수 있어요.

 만화책이든 글책이든 그림책이든 사진책이든, 사람이 살아가는 이야기를 다룹니다. 사람이 살아가며 생각하고 부대끼거나 복닥이는 이야기를 담습니다. 더 잘난 이야기가 없고 더 못난 이야기가 없어요. 모조리 우리 이야기요, 온통 우리 삶입니다.


- “저도 처음엔 네 식구라고 생각했는데, 여기를 보세요, 선생님. 그림에 직접 보이지는 않지만, 신발이 여기 있으니까 방에 한 사람 더 있는 거 아녜요? 그러니까 다섯 식구죠. 우리 아빠가 회사에 나가셔서 안 계시다고 우리 집 식구가 아닐 수 없는 것처럼, 지금 우리 눈에 안 보인다고 해서 한 식가가 아니라고 할 수 없잖아요.” (79∼80쪽)


 찬찬히 들여다보면서 받아들일 때에 내 가슴속에서 아름다운 꽃송이가 피어납니다. 가만히 헤아리면서 마주할 때에 내 마음속에서 어여쁜 꽃씨가 싹을 틉니다.

 작은 밭뙈기에 고구마나 감자를 심어 풀을 매고 거두어들이는 흔하거나 수수한 이야기라 하더라도, 씨를 묻고 북을 돋우며 풀을 매고 거두기까지 찬찬히 들여다보면서 하루하루 달라지는 모습과 날마다 하던 일을 적바림해 놓고 보면, 알뜰살뜰 즐길 이야기로 거듭납니다.

 날마다 받는 밥상에 놓은 밥과 반찬을 누가 어떻게 마련해서 이렇게 내가 받아먹을 수 있는지를 곰곰이 살피면서 하나하나 적바림하다 보면, 날마다 밥먹는 이야기로도 날마다 재미나게 이야기꽃 피울 만합니다.

 똑같은 날은 없고 똑같은 말은 없으며 똑같은 일은 없습니다. 늘 다르고 언제나 바뀌며 노상 움직입니다. 늘 다른 줄을 느껴야 재미난 삶입니다. 언제나 바뀌는 줄 알아야 내 동무를 사랑하거나 좋아합니다. 노상 움직이는 줄 깨달아야 내가 이렇게 목숨을 선물받아 살아가는 고마움을 알아챕니다.


- “흥! 지 히이 맞는데 가만 있을 놈 뉘 있노! 보이소, 선상님요. 지 히이 맞는데 가만 있을 놈 뉘 있습니껴?” (152∼153쪽)


 대단하다 싶은 이야기를 꾸며서 글로 적어야 대단하다 싶은 이야기책이 되지 않습니다. 놀랍다 싶은 이야기를 눈부시게 그려서 엮어야 놀라운 만화책이 되지 않습니다. 어마어마하다 싶은 이야기를 온갖 빛깔로 담아서 보여주어야 어마어마한 그림책이 되지 않습니다.

 손재주를 부린다고 해서 칼질을 더 잘하거나 자전거를 더 잘 타지 않습니다. 함께 밥을 먹는 사람을 생각하면서 칼질을 하고 밥을 차립니다. 한손으로 자전거를 타든 두 손 모두 놓고 자전거를 타든 그리 대단하지 않습니다. 내가 가야 하는 곳까지 자전거를 타고 즐겁게 오갈 수 있으면 넉넉합니다.

 물려입거나 얻어서 입거나 1천 원 주고 사 입거나 10만 원이나 100만 원 주고 사 입든 똑같은 옷입니다. 때가 묻거나 더러워졌으면 똑같이 빨래를 해서 똑같이 말린 다음 다시 입는 옷입니다. 내가 입은 옷이 더 좋다거나 네가 입은 옷이 더 꾀죄죄할 수 없습니다. 서로서로 제 몸에 알맞춤한 옷을 입을 뿐입니다.

 어디에서 무엇을 하면서 살아가든 내 하루입니다. 어떤 놀이를 즐기거나 어떤 일을 하면서 돈을 벌든 내 삶입니다. 내 하루는 내가 알차게 보내야 합니다. 내 놀이와 내 일은 나 스스로 사랑하면서 붙잡아야 합니다. 칭찬을 받는다고 더 좋은 내가 아니고, 꾸지람을 듣는다고 더 못난 내가 아닙니다. 칭찬을 받으며 더 사랑스레 살아가면 되고, 꾸지람을 들으며 더 씩씩하게 지내면 됩니다.


- ‘으응? 쟤들이 또 득이에게 무슨 짓을.’ “너희들, 무슨 일이니?” “이 녀석, 뭐 먹었는 줄 알아? 바보 녀석! 그걸 먹으라고 먹어.” “나 이만 한 바퀴벌레 먹었다. 창수가 잡아 줬어.” “이 바보야! 누가 바퀴벌레 따위 먹으랬어? 그런 거 먹으라고 먹니, 이 바보야! 왜 먹었어, 왜 먹었어? 왜?” “배가 고파서. 왜?” (212∼216쪽)


 만화책 《손바닥으로 하늘가리기》를 다시 읽습니다. 만화를 그린 박연 님은 당신이 좋아하는 사람들을 당신이 사랑하는 그림결에 담습니다. 박연 님 만화를 쥐어들어 펼칠 때에 박연 님이 좋아하는 사람들이 사랑스레 복닥복닥 보내던 지난날을 예쁘며 곱게 즐길 수 있기를 바라는구나 하고 느낍니다.

 사랑스레 바라본 동무들 삶을 만화로 담았으니, 이 만화에 담긴 사람들과 삶이란 한결같이 사랑스럽습니다. 착한 일을 하든 미운 짓을 하든 한결같이 사랑스러운 사람들입니다. 처음부터 착한 사람은 없고 처음부터 나쁜 사람도 없습니다. 모두모두 사랑받아 예쁜 목숨을 선물받은 사람들이요, 누구나 사랑스런 손길을 둘레에 나누어 주며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만화에는 교훈이 따로 없습니다. 만화에는 주제도 따로 없습니다. 따지고 보면, 동화이든 소설이든, 문학이든 예술이든, 교육이든 정치이든, 우리 삶터 어디에도 교훈이나 주제는 따로 있지 않습니다. 어떻게 살아가느냐를 느낄 수 있으면 되고, 어떻게 살아가느냐를 보여주면 됩니다. 서로서로 살아가는 모습을 바라보면서 이야기를 나누고, 다 함께 이야기를 나누면서 더욱 알차며 한껏 즐거이 어울릴 터전을 돌볼 수 있으면 됩니다.

 《손바닥으로 하늘 가리기》 책날개 앞쪽에 “너…, 손바닥으로 하늘 가려 봤니?” 하는 말마디가 실립니다.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리는 일이란 참 바보스러운 짓이라고들 한다는데, 사람들은 참 바보스레 살아갑니다. 바보짓을 하고 바보일을 하며 바보놀이를 합니다. 그래도 또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립니다. 가리려 한다고 가려지겠습니까만, 따가운 햇살을 받으며 밭에서 김매기를 하다가 한 번쯤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려 봅니다. 아주 살짝이지만 꽤 시원합니다. 풀밭에 드러누워 손바닥을 쫙 펼쳐서 하늘을 가리며 놀기도 합니다. 손바닥으로 해를 가리니 파란하늘과 흰구름이 꽤 잘 보입니다. 드러누워 팔을 뻗으니 이내 팔이 저리지만,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리면서 노는 몇 분이나 몇 초는 꽤 재미납니다.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리며 놀던 아이들이 무럭무럭 자라서, 이렇게 만화책 한 권 빚어냈습니다. (4344.2.15.불.ㅎㄲㅅㄱ)


― 손바닥으로 하늘가리기 (박연 글·그림,대교출판 펴냄,1995.7.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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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이야기는 내일 또 1
콘노 키타 지음 / 대원씨아이(만화) / 201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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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사랑을 물려주고 죽는 사람
 [만화책 즐겨읽기 22] 콘노 키타, 《다음 이야기는 내일 또 (1)》



 치마처럼 길게 내려오는 겉옷을 잠자리맡에서까지 입으려 하고, 머리띠와 머리핀을 누워서까지 하려는 아이한테 “안 돼. 이제 자야 해. 얼른 벗어.” 하고 말하면 말을 듣지 않습니다. 이렇게 말해서 아이가 말을 들은 적은 거의 없습니다. “응, 이제 그만 벗고 다음날 또 입자.” 하고 말하면 으레 말을 듣습니다. “내일 또 입자.” 하고 말하면 “내일 또 입자? 내일 또 입어?” 하고 되묻고, “다음날 또 입자.” 하고 말하면 “다음날 또 입어? 응, 다음날 또 입어.” 하고 되묻습니다. 이러면서 옷을 벗겨 달라 하거나 스스로 벗습니다. 서른두 달째 함께 살아가는 아이는 제 아버지 어머니하고 이렇게 말을 섞습니다.

 제 어버이가 짜증스레 말하면 아이 또한 짜증스레 대꾸합니다. 제 어버이가 살가이 말하면 아이도 살가이 대꾸합니다.

 가는 말이 고와야 오는 말이 곱다는 옛말을 굳이 들추지 않아도, 살아 보면 누구나 알 수 있는 이야기입니다. 나부터 듣기 좋도록 말해야 할 노릇이고, 내 입에서 나올 때부터 말하기 좋도록 말해야 할 일입니다.

 내 입에서 톡톡 쏘는 말투라 한다면, 듣는 사람에 앞서 말하는 사람 입이 망가집니다. 내 입에서 포근하게 우러나오는 말씨라 한다면, 듣는 사람에 앞서 말하는 사람 입이 어여쁩니다.

 예부터 ‘어른이 되라.’고 말해 왔습니다. 옛사람들은 ‘훌륭한 사람이 되라.’라 하지 않았고 ‘멋진 사람이 되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늘 ‘어른이 되라.’고 말했으며, ‘어른이 그게 무슨 짓이냐.’고 말했습니다.

 한편, ‘아이라면 아이답게 굴어야지.’ 하고 말해 왔습니다. 내 주제를 알고 내 나이값을 하라는 이야기입니다. 아이가 어른처럼 군다든지 일찍부터 철이 든 애늙은이 같은 모습을 보이지 말라 했습니다. 아이들도 어른과 마찬가지로 집일을 거들고 논밭일을 함께해야 했으나, 아이한테는 어른과 똑같이 일을 시키지는 않습니다. 꼭 아이 몸과 마음에 걸맞게 일을 시켰습니다. 아이들이 일을 하다가 놀러 나간다며 내쁘든 일을 하다가 깜빡 잠이 들든 나무라지 않습니다. 물끄러미 바라보며 살살 어루만질 뿐입니다. 아이는 아이답게 얼마든지 잘못을 저지를 만하고, 잘못을 저지르면서 크며, 잘못을 하나하나 딛으며 삶을 깨우칩니다.


- “그 (엄마) 사진 좋아? 그럼 사야가 가져.” (8쪽)
- “그래. 국수는 엄마가 좋아하던 거였지.” (12쪽)
- “따라한다고?” “반만. 엄마가 해 주는 얘기는 신데렐라도 엄지공주도 ‘끝’이 없었어. ‘행복하게 살았습니다.’ 다음엔 늘 ‘다음 이야기는 내일 또.’라고 했거든.” (24쪽)


 내 삶자국을 곰곰이 돌아보면, 어느 하루도 더없이 올바르거나 아름답거나 훌륭히 걸었던 적은 없지 않느냐 싶습니다. 삐딱하게 걷는다든지 흔들흔들 걷는다든지 엉터리로 걷는다든지 뒤로 걷는다든지 옆길을 걷는다든지 하곤 했습니다. 그래도 용케 오늘까지 죽 살아옵니다. 어느 하나 잘 나거나 잘 하는 일이란 없으나, 못 하면 못 하는 대로 도란도란 살아냅니다. 가만히 살피면, 한 사람 삶이란 ‘뜻한 모든 일을 빈틈없이 이룰 때’에 아름답지 않습니다. 하루하루 모자라면 모자란 대로 즐거울 수 있어야 아름답습니다. 참사랑을 열다섯 나이부터 깨달아, 열다섯부터 티없고 훌륭하며 멋스러이 사랑을 하며 살아갈 수 있지 않습니다. 엉뚱하든 뚱딴지 같든 어설프든 어리숙하든, 스스로 부딪히거나 마주하거나 복닥이면서 살아내는 하루입니다. 잘못 보았다 싶은 사랑이라지만 내 마음을 쏟아서 사랑합니다. 엉터리로 본 사랑이라 하더라도 내 삶을 바치면서 껴안습니다.

 아이들이 나뭇가지로 땅을 파는 일은 부질없을 수 있습니다. 쓸데없이 힘을 버리는 셈일는지 모릅니다. 제 어버이가 애써 차린 밥을 먹고 엉뚱한 데에 힘을 쏟는다 할 테지요.

 그러나, 뜻없는 놀이를 하든 값없는 시간죽이기를 하든, 아이한테는 아이대로 부질없는 짓으로 하루를 보내는 삶이 즐겁습니다. 아직 말이 또렷하지 않은 아이한테 또박또박 말하라 할 수 없을 뿐 아니라, 글을 쓰라 할 수 없습니다. 예닐곱 살쯤 되었으면 잔심부름이나 잔일쯤 거들어야 할 터이나, 다 큰 어른처럼 도마질을 하든 국을 끓이든 하라고 도맡길 수는 없습니다. 어차피 배울 일이 아니라, 차근차근 익히는 삶입니다.


- “저번 학교에도 그런 애가 있었어. 교실 창으로 하늘을 바라보고 쉬는 시간엔 혼자서 책을 읽곤 했던 애야. 반에서 겉돈다는 느낌보단 마음 내키는 대로 하는 고양이 같았어. 고양이의 눈으로 우리랑은 뭔가 다른 것을 보고 있달까. 하지만 나도 가끔 알 것 같아. 아, 이 아이는 지금 여행 중이구나. 그 시끄러운 교실 안에서 그 아이는 자기 시간 안에서 자기만의 시간을 갖고 있어.” (47∼48쪽)


 만화책 《다음 이야기는 내일 또》 1권을 봅니다. 한눈에 보기에도 그림을 그리 잘 그리지는 못하는 만화라고 알아챕니다. 그러나, 모든 만화쟁이가 처음부터 그림을 빼어나게 잘 그리라고 바랄 수 없습니다. 만화를 그리든 그림을 그리든 그림은 그림대로 제대로 그려야 하는데, 새내기나 풋내기인 만화쟁이한테는 지나치게 바라서는 안 됩니다. 다만, 하루하루 한 해 두 해 차근차근 발돋움해야지요.

 그런데 그림결은 몹시 빼어나다 할지라도 마음이 와닿지 않는 만화가 많습니다. 그림투는 아주 대단하다 할지라도 가슴을 적시지 못하는 그림이 많아요. 사진과 글도 마찬가지이고, 춤과 노래도 비슷합니다. 놀랍게 부르는 노래가 있으나, 놀랍기만 할 뿐, 가슴이 울렁거리지 않는다면, 이러한 노래를 노래라 할 만할까요. 엄청난 작품이라고 손가락을 추켜세운달지라도, 내가 차분히 바라보는 동안 내 마음속에서 불처럼 일어나는 기쁨이나 슬픔이 없다면, 이런 작품을 작품으로 여겨야 할는지요.

 만화책 《다음 이야기는 내일 또》는 초등학생쯤, 얼추 열한두 살부터 열서너 살쯤 되는 어린이 눈높이에 맞추어 내놓은 만화라고 느낍니다. 어린이들은 만화를 보면서 ‘만화를 잘 그렸다’라든지 ‘만화를 못 그렸다’라든지를 따질까 궁금한데, 아예 안 따지기도 할 테고, 어린이 나름대로 따지기도 하겠지요. 그림이란 누구나 보면 느낌으로 아니까요. 그림이란(또 글과 사진이란) 전문가가 바라보는 잣대로 값을 매기는 그림이 아닙니다. 그림이란, 즐기는 내가 바라보는 눈썰미로 사랑할 그림입니다.

 《다음 이야기는 내일 또》는 아직 옹글게 영글기까지는 한참 멀었지만, 수수한 내 삶을 수수한 그대로 아끼면서 보듬으려는 만화쟁이 넋을 어렴풋이 느끼며 집어듭니다. 공상과학이라든지 판타지라든지 하는 줄거리를 짜야만 놀라울 만화는 아니에요. 여느 삶자리에서 흔히 일어나는 일 또한 놀라울 만화이며, 줄거리가 그닥 놀랍다 할 만하지 않더라도 얼마든지 알뜰히 즐길 만한 만화입니다.

 왜냐하면 만화 또한 삶이거든요. 사람들이 살아가며 부딪히거나 부대끼거나 겪거나 치르는 이야기를 담는 만화이기에, 만화는 고스란히 삶입니다.


- “봐, 아이들은 하루가 다르게 성장한다고. 어제까진 못했던 일도 내일은 할 수 있거나, 여태 손이 안 닿았던 곳에 닿기도 한단 말야.” (71쪽)


 만화책 《다음 이야기는 내일 또》 1권을 찬찬히 들여다봅니다. 아이한테 밥을 먹이는 틈틈이 펼칩니다. 아이가 밥을 먹다가 자꾸 딴짓을 하니, 아빠는 아이가 밥을 언제 먹나 기다리다 지쳐, 그만 한손에 책을 펼칩니다. 아이가 딴짓을 쉬고 입을 벌릴 때에 비로소 밥을 퍼서 입에 넣어 줍니다. 이럭저럭 하는 동안 어느새 1권을 다 읽고, 아이한테도 밥을 다 먹입니다.

 줄거리를 살핍니다. 이웃집에 새로 옮겨 온 사람들을 마주하는 ‘이쪽 한 동네에서 오래오래 살아오던 식구’들이 ‘일찍 죽은 엄마’를 그리워 하는 말마디로 가득합니다. 아, 《다음 이야기는 내일 또》는 1권에서 그리움을 말하는구나.


- “앗. 편지도 들어 있다. ‘사야에게. 물려주는 거라 미안해. 내 몫까지 예쁘게 신어 줘. 하라다 사호.’ (씨익 웃고) 그럼 상자에 넣어 둬야지.” “구두를?” “사호 언니 편지! 사야가 처음 받은 편지잖아. 첫 편지.” (127∼128쪽)
- “사야가 답장 썼어.” “와. 고마워.” “빨랑 읽어 봐.” “‘예쁜 구두 고마워. 너무 좋아. 아껴서 신을게. 사야가.’ 기뻐. 얼른 휴대폰이 생겼으면 했는데, 편지도 나름 좋은걸.” (145쪽)


 문득문득 우리 집 딸아이 손금을 들여다봅니다. 아마 여러 달 만에 한 번쯤 들여다보지 싶은데, 어린이라서 그럴는지 몰라도, 참 정갈합니다. 다른 아이들 손금도 이렇게 정갈할는지 궁금합니다. 꼭 어린이라서 정갈하다 할는지 모르겠으나, 우리 아이가 몇 살 나이로 클 때까지 아버지랑 어머니 될 우리 둘이 함께 살아갈 수 있을까 헤아려 보곤 합니다. 내가 앞으로 꾸릴 수 있는 삶은 얼마나 되며, 내가 아주 오래오래 살아서 우리 딸아이가 아이를 낳아 손녀를 볼 즈음까지 살 수 있을는지, 갑작스레 차에 치여 꼴까닥 하고 숨을 거둘는지 알 노릇이 없습니다. 오래오래 산다고 더 즐거울는지 모르고, 일찍 흙으로 돌아간다고 더 슬플는지 모릅니다.

 이렇게 되어도 삶이고, 저렇게 되어도 삶입니다. 삶이란, 어떠한 길에서 뒹굴거나 맴돌더라도, 내 목숨을 고이 여기면서 즐기는 하루가 아닌가 하고 느낍니다. 만화책 《다음 이야기는 내일 또》에 나오는 어머님은 일찍 숨을 거두는 바람에 아이들이 한껏 큰 모습을 못 보아서 서운할까요. 이제 좀 귀엽게 말꽃을 피우면서 마음꽃 또한 무럭무럭 흐드러지는 모습을 못 보기에 슬플까요. 숨을 거두기 앞서까지 돌보거나 어루만지거나 보살핀 나날로 흐뭇할까요. 그동안 그만큼 얼굴을 보고 살결을 부비며 지냈으니 즐거울까요.


- “하늘이 모르는 물은 눈물을 말하는 거야.” (116쪽)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긴다고들 이야기하지만, 글쎄,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 이런 말은 이름있고 힘있으며 돈있는 사람한테나 할 말이 아닌가 싶습니다. 저로서는 사람은 죽으면서 사랑을 남긴다고 느낍니다. 잘난 사람이든 못난 사람이든, 누구나 손에서 힘이 다 빠져나가 손가락이 천천히 벌어지는 이때에, 여태껏 고이 움켜쥐던 사랑을 가만히 내려놓으면서 뒷사람들이 더욱 따사롭거나 넉넉히 살아가도록 사랑을 남겨 준다고 느낍니다.

 돈이 아닌 사랑을 물려주는 어버이입니다. 아이들이 어버이보다 일찍 흙으로 돌아간달지라도 이 아이들 또한 제 어버이한테 사랑을 남기고 떠난다고 느낍니다.

 하늘이 모르는 물처럼, 사람은 한삶을 사랑으로 얼싸안습니다. 하늘이 아는 물처럼, 사람은 온삶을 사랑으로 마무리짓습니다. (4344.1.30.해.ㅎㄲㅅㄱ)


― 다음 이야기는 내일 또 1 (콘노 키타 글·그림,김승현 옮김,대원씨아이,2010.12.15./55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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