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집
사이바라 리에코 지음, 김문광 옮김 / AK(에이케이)커뮤니케이션즈 / 201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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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된 일 마치고 드러누워 읽는 책 하나
 [만화책 즐겨읽기 46] 사이바라 리에코, 《우리 집》


 더운 여름날, 창문을 활짝 엽니다. 아직 한 달이 안 된 둘째는 후덥지근한 날씨에 애를 먹습니다. 그런데 멧골자락 밭뙈기에서 골을 내어 고구마를 심는 이웃이 새벽과 아침과 낮으로 기계를 쓰느라, 기계 소리하고 기계에서 나는 매연이 집안으로 스며듭니다. 아이가 겨우 잠이 들 만하면 소리에 깨고 매캐한 냄새에 숨이 막힙니다. 창문을 닫으면 창문을 닫는 대로 답답합니다. 이웃에 갓난쟁이가 있는 줄 헤아리지 못하기도 하지만, 이웃에 갓난쟁이가 있는 줄 알아도 밭일을 미룰 수 없으니, 시끄러운 소리를 고스란히 떠안아야 합니다.

 오늘날은 시골이라 하더라도 기계 없이는 흙을 못 일군다 할 테지요. 흙하고 오래오래 살아온 할머니와 할아버지를 빼고는, 시골사람 가운데 자동차를 몰지 않는 사람이란 없습니다. 논을 일구든 밭을 일구든 기계 없이 일구는 사람은 찾아볼 수 없습니다.

 괭이로 땅을 파고 호미로 풀을 베지 않습니다. 손으로 모를 심지 않고 손으로 벼를 베지 않습니다. 효율과 돈과 품과 겨를 모두를 따질 때에 기계만큼 좋은 일벗이란 없다 할 만합니다. 이제는 자연과 삶과 사람과 사랑과 흙과 물을 살피며 흙일꾼으로 지내려고 하는 사람은 아주 드뭅니다.


- “저 너머 마을에서 한 달 일하면 매일 아침 된장국에 계란을 넣을 수 있댔어. 계란 따위 안 넣으면 어때. 그냥 다 같이 사는 게 제일 좋은 건데, 그치?” “맞아, 나도 찬성이야. 된장국엔 조개만 있어도 냄새 좋은걸. 아침에 둑에 나가서 조개랑 돌김, 박박 긁어 오면 돼. 그게 젤 맛있어.” 배가 오자, 누나랑 나는 손을 흔들었다. 배에서는 귤꽃처럼 작은 손이 흔들리는 것이 보였다. 아마 모두들 자기들이 가장 보고 싶은 사람으로 착각했을 거라 생각한다. (2∼4쪽)


 첫째 아이를 낳고 두 해 즈음 살던 인천 골목동네를 떠올립니다. 골목 안쪽 작은 집이라 자동차가 적게 다니기는 했으나, 적게 다닐 뿐 안 다니지 않습니다. 자동차를 모는 이는 새벽이나 낮이나 밤을 가리지 않습니다. 골목을 달리든 큰길을 달리든 운전대를 쥔 사람이 얼마나 바쁜가만을 따집니다. 골목집 한켠에 갓난쟁이가 겨우 새근새근 잠들든 말든 아랑곳하지 않을 뿐더러, 생각조차 하지 않습니다.

 시골로 살림을 옮기면서 갓난쟁이가 낮잠과 밤잠을 걱정없이 잘 수 있으리라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막상 시골로 살림을 옮기고 나서도 마을하고 아주 멀리 떨어지고 이웃집이 없는 외딴 곳에서 살지 않는다면, 시끄러운 기계 소리를 떨칠 수 없습니다. 우리 살림집에 빨래기계를 안 들이고 텔레비전을 안 들이면 뭐 하겠습니까. 이웃집이 자동차를 씽씽 몰거나 라디오를 큰소리로 틀면 도루묵입니다. 우리가 텃밭에 풀약을 안 치더라도 이웃이 너른 밭에 풀약을 치면 도루묵이 되듯, 이웃이 지내는 삶은 우리가 지내는 삶에 고스란히 묻어듭니다. 거꾸로, 우리가 지내는 삶이 이웃이 지내는 삶으로도 묻어들겠지요.

 저마다 무엇을 생각하거나 사랑하거나 아끼면서 살아가느냐를 돌아보아야 한다고 새삼 깨닫습니다. 나부터 조용하면서 착한 삶을 사랑하는 사람으로 살아가며, 내 이웃 또한 조용하면서 착한 삶을 사랑하는 터를 살펴야 한다고 다시금 일깨웁니다. 도시라 해서 늘 나쁘지만 않으나, 시골이라 해서 노상 좋지만 않습니다. 도시에서도 사람다운 내음과 멋과 꿈과 이야기를 돌볼 수 있고, 시골이지만 여느 도시와 다를 구석 없이 물질문명으로 둘러싸여 살가운 꿈하고는 동떨어질 수 있습니다.


- 누나는 내 귀를 파면서 이야기를 해 주었다. “오늘, 낮에 사람이 죽었어. 죽은 사람은 이제 할 수 없지만, 일을 저지른 애는 무척 착한 애거든. 단지 어렸을 때 조금 안 좋았어. 그래서 동네 사람들이 그 애 욕을 많이 했지. 그랬더니 그 애가 진짜로 나빠진 거야. 착한 아이였는데. 누나는 동네 사람들이 그 애를 나쁜 애로 만든 거라고 생각해. 그 증거로, 그 애 도망치기 전에 자기 엄마를 찾아왔었대. 그리곤, ‘힘들게 낳아 줬는데 미안해, 엄마.’ 그랬대.” (20∼21쪽)
- “이래도 저래도 다 같은 사람인걸. 가끔은 이런 일도 있는 거야.” (43쪽)



 만화책 《우리 집》(에이케이커뮤니케이션즈,2011)을 읽으면서 생각합니다. 이러하든 저러하든 ‘우리 집’이 가장 좋은 보금자리라고 이야기하면서 사람이 착하고 예쁘게 살아가는 길이란 무엇인가를 톡톡 건드리려고 합니다. 그렇지만, 가장 좋은 보금자리인 ‘우리 집’이지만, ‘집이라는 물건’이 아니라 ‘집에 깃든 사람을 사랑하는 넋’을 들여다보지 못한다면, 정작 ‘우리 집’에 머물어도 어떠한 살림터인가를 느낄 수 없다고 덧붙입니다.

 만화를 그린 분은 어떤 삶을 일구었기에 이러한 만화책을 그릴 수 있을까 궁금합니다. 숱한 물결을 헤쳤기에 이 같은 만화책을 그릴 수 있을까요. 아무런 물결을 헤치지 않았지만, 오래도록 한결같이 이은 고운 사랑을 따스히 보살피기 때문에 이렇게 만화책을 그릴 수 있을까요.


- “사오리.” “왜?” “남보다 조금 빨리 어른이 되었지만, 그건 또 그거대로 좋은 점도 있어.” (105쪽)
- “알았어. 그럼 이 누나가 용서해 준다. 네가 어디서 뭘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다신 안 한다니, 이 세상 사람 모두가 안 된다고 해도 누나는 용서해 줄게.” (111쪽)



 더 나은 일자리란 없습니다. 더 좋은 사람이란 없습니다. 더 훌륭한 책이란 없습니다. 더 빼어난 몸매란 없습니다. 더 높은 이름값이란 없습니다. 더 멋진 얼굴이란 없습니다. 더 많은 돈이란 없습니다. 더 착한 마음씨란 없습니다.

 다 같이 사람이고 사랑이며 삶이에요. 다 함께 꿈이고 꽃이며 열매예요.

 하루하루 고맙게 맞이하는 삶입니다. 누구나 울거나 웃으면서 보내는 나날입니다. 밥을 먹었으니 똥을 눕니다. 고단하게 일했으니 달콤하게 잠자리에 듭니다. 아이를 번쩍 안으면 까르르 웃음꽃을 피웁니다. 기저귀를 빨아 널면 햇볕과 바람에 보송보송 마릅니다. 냇물은 흐르고 구름은 지나갑니다. 따스한 햇살과 어여쁜 달빛이 온누리를 비춥니다.

 우리 집은 우리 사랑이면서 우리 이야기입니다. 우리 집은 내 집이면서 네 집입니다. 우리 집은 쉼터이면서 일터입니다. 곡식과 푸성귀와 열매에다가 술 한 병과 책 한 권이 덤으로 있으면 더할 나위 없이 즐겁겠지요.


- 누나랑 생선을 먹으면서 난 매일 생선 몇 마리랑 책을 읽을 이불 하나 정도의 공간만 있으면 평생 살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 누나한테 말하니 ‘그거 좋구나, 아주 좋아.’ 하고 웃어 주었다. (191쪽)
- “너, 이런 것에 왜 그렇게 집착해? 이게 그렇게 죽고 죽이고 할 만한 거니? 왜 안 해도 될 고생을 해? 싫으면 도망치면 될 것을.” (221쪽)


 네 살 아이를 왼팔뚝에 누여 재우면서 책 하나를 펼쳐 읽다가 스르르 잠듭니다. 아버지가 먼저 잠들고 아이는 나중에 잠듭니다. 아버지가 먼저 깨고 아이는 한 시간 남짓 더 잡니다. 아버지는 조용히 일어나서 아까 읽다가 잠들어 못 읽은 책을 조금 더 펼치다가 덮습니다. 기지개를 켜고 둘째 오줌기저귀는 또 얼마나 새로 나왔는가 가늠합니다. 오늘도 어김없이 마흔 장을 알뜰히 채우겠군 하고 생각합니다. 둘째 오줌기저귀가 줄려면 앞으로 또 몇 날을 눈코 뜰 새 없이 빨래살이로 보내야 할까 하고 헤아립니다. 참 바쁘고 몹시 벅찹니다. 그래도 이렇게 바쁘고 저렇게 벅차면서도 손에 책 하나 쥘 수 있으니 고맙습니다. 바쁘기에 바쁜 만큼 책을 손에 쥐고, 벅차기에 벅찬 만큼 책을 손에 듭니다. 어버이라는 자리에 앞서 한 사람으로서 내 삶을 사랑하고 싶고, 어버이로서 아이와 함께 이 보금자리에서 사랑스레 살아가고 싶습니다. (4344.6.15.물.ㅎㄲㅅㄱ)


― 우리 집 (사이바라 리에코 그림·글,김문광 옮김,에이케이커뮤니케이션즈 펴냄,2011.1.20./75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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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산개 방실이 책공장더불어 동물만화 2
최동인 지음, 정혜진 그림 / 책공장더불어 / 201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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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개발이든 재개발이든, 고운 삶 짓밟는 돈벌이
 [만화책 즐겨읽기 45] 정혜진·최동인, 《용산개 방실이》


 사람들은 누구나 살아갑니다. 뿌연 하늘을 이면서 살아가기도 하고, 맑은 하늘을 어깨동무하면서 살아가기도 합니다.

 시골집 밤하늘을 올려다봅니다. 저녁에 첫째를 씻기고 나서 마당으로 데리고 나왔습니다. 아이 손을 잡고 멧길을 조금 오르다가는 마을 안쪽 길을 조금 걷습니다. 어두운 멧자락 한켠에서 우리 살림집을 바라보면 어떠한가 하고 아이한테 보여줍니다. 어디에도 불빛이 없이 깜깜한 시골자락을 이야기합니다. 하늘에 뜬 별이 반짝이는 모습을 보여주고, 이제 첫째 아이도 제법 컸으니 시골 밤녘에는 눈을 틔워 밤길을 알아볼 수 있어야 한다고 이야기합니다.


- “방실이고 뭐고 왜 데리고 왔냐고?” “같이 살 거니까.” (58쪽)
- “당신이 우겨 봤자 방실이는 이제 우리 가족이야.” “가족? 허, 참, 개가 가족이라고? 미치겠네, 정말.” “당신이 아무리 그래도 방실이 안 보내.” (60쪽)



 오늘날 한국에서는 들짐승이나 멧짐승 가운데 사람을 잡아먹을 만한 짐승이 없습니다. 깊은 밤이고 이른 밤이고 새벽이고 낮이고, 사람 그림자 보이지 않는 멧자락이든 들판이든 무서울 일이 없습니다. 참말 사람이 가장 무섭지, 사람 아닌 목숨이 무서울 일이 사라진 오늘날 한국입니다.

 그런데, 아이들이 보는 그림책에는 범도 나오고 사자도 나오며 늑대나 여우도 나옵니다. 한국땅에서 살아갈 일이 없는 코뿔소나 코끼리나 기린이나 불곰이나 흰곰이나 이구아나 들은 그림책에 얼마든지 나옵니다.

 생각하는 힘을 키운다는 그림책이라지만, 막상 한 번도 두 눈으로 볼 일이 없을 뿐더러, 두 눈으로 본다 하더라도 동물원에서나 볼 뿐이니, 범이나 사자가 무서울 턱이 없습니다. 왜 무섭거나 어떻게 무서운지 알 수 없어요. 어른들이 무섭다 말하니 무서운가 보다 할 뿐이에요.

 그러니까, 이 땅 이 나라에는 사람 아닌 목숨은 없는 셈입니다. 드문드문 고라니를 보거나 다람쥐를 보거나 생쥐를 본다 하더라도 참 드문드문 보는 목숨입니다. 참새나 비둘기나 까치는 좀 흔하다 싶지만, 이러한 새를 사람하고 똑같이 아름다우며 사랑스러운 목숨이라고 여기는 사람은 매우 드뭅니다.

 사람 스스로 목숨빛을 잃거나 잊으면서, 숱한 다른 목숨은 아예 이 터전에서 깡그리 쫓겨나거나 사라지고 맙니다.


- “재개발, 재개발, 도대체 몇 번째야. 심심하면 나오는 소리.” “신경쓰지 마. 할 것 같으면 벌써 하고도 남았지.” “하긴. 얼마 전에도 말만 있다가 흐지부지된 거잖아.” “그러니 신경쓰지 마.” “근데 재개발하면 돈 번다는데 우리도 그런가? 새 가게도 주고 인테리어 비용도 주고 그러는 건가?” “…….” “당신도 몰라?” “모르지.” (76∼77쪽)


 만화책 《용산개 방실이》를 읽습니다. 그림결은 그저 그러한 만화책을 펼치면서, 한국사람 만화 그리는 솜씨는 그닥 발돋움하지 못하네 하고 느낍니다. 밑틀을 단단히 다스리면서 꾸준히 발돋움하는 한국 만화란 한국 터전에서는 꿈꾸거나 바랄 수 없는지 모릅니다. 왜냐하면, 한국이라는 나라는 한국사람 스스로 한국사람다이 살아가며 서로서로 아끼거나 사랑하도록 열리거나 아름다운 터전이 못 되거든요. 더 겨루거나 다투어야 하고, 혼자서 더 거머쥐어야 하며, 홀로 더 누려야 하는 한국 터전입니다.

 그렇지만, 조금은 엉성한 그림결이라 하더라도 무슨 이야기를 나누려 하느냐 하는 실마리가 있으면 반갑습니다. 따스한 실마리 하나로 이루어지는 만화이고 문학이며 삶입니다.

 서울에서 수수하게 살고프다 하든, 작은 도시에서 조촐히 살고 싶다 하든, 시골에서 조용히 살겠다 하든, 한국에서는 좀처럼 사람을 사람다이 놓아 주지 않습니다. 서울사람은 서울사람대로 갖은 재개발이나 학력이나 돈줄 따위에 얽매입니다. 지역사람은 지역사람대로 서울바라기가 되면서 제 고장을 참다이 사랑할 줄을 모릅니다. 조용한 시골은 땅값이 싸다며 숱한 공장이 자꾸 밀려들 뿐 아니라, 도시사람은 시골사람이 농약과 풀약과 비료와 항생제 안 쓰며 흙을 일구도록 놓아 두지 않습니다. 더 굵으며 때깔 좋게 보이는 푸성귀와 곡식과 열매를 거두라 할 뿐 아니라, 돈 되는 농사 아니면 짓지 말라며 논밭을 허물거나 깎거나 밀어서 고속도로나 고속철도를 깔거나 아파트나 공장을 세우려 합니다.

 애꿎으며 슬프게 숨을 거두고 만 용산사람 둘레에 방실이라는 작은 개가 있었다면, 애꿎으며 슬프게 숨을 거두지만, 서울사람 신문·방송에 실리지 못할 뿐더러 알려지지 못하면서 눈물을 훔치는 사람들 둘레에는 온갖 작은 목숨과 꿈과 사랑이 있습니다.

 어느 누구도 뜸부기가 죽는 줄 살피지 않아요. 어느 누구도 꾀꼬리가 쫓겨나도 알아채지 못해요. 어느 누구도 맹꽁이가 밟히는 일을 느끼지 않아요. 어느 누구도 잠자리와 나비가 차에 치여 스러져도 알아보지 못해요.


- ‘거창한 걸 바라는 것도 아니고, 그냥 지금처럼만 살면 좋겠다.’ (185쪽)
- “왜 이리 살기가 힘드냐. 열심히 산 것 같은데 뭐 하나 되는 일도 없고. 인생이 왜 이리 내리막길이냐.” (202쪽)


 서울 용산에서 죽은 사람이건, 살아남은 사람이건, 대단한 꿈을 빌지 않았습니다. 떵떵거리는 삶이라든지 잘나가는 삶을 꾀하지 않았어요. 다만, 대단하지 않다 할 만한 꿈이라지만, 아주 안 대단한 꿈은 아니었습니다. 아주 작은 삶은 아니었어요.

 더 작은 아파트도 좋고, 아파트 아닌 작은 연립집이어도 좋습니다. 서울 아닌 부천이나 인천이나 광명도 좋습니다. 도시 아닌 시골도 좋아요. 굳이 시여야 하지 않아요. 군이어도 좋고, 읍이나 면에서 살아도 아름답습니다.

 빚을 몇 억씩 짊어지면서 서울에서 장사를 하며 빚 갚고 돈 벌기를 꾀하는 일이 나쁘다는 소리가 아닙니다. 빚을 안 지고 내 논밭을 내 자그마한 돈으로 마련해서 내 자그마한 손으로 내 자그마한 살림을 조용히 일구면서 살아갈 수 있어요. 갑갑한 시멘트집에서 외롭게 지낼 방실이가 아니라, 너른 땅에서 흙을 밟고 멧자락을 타고 숲을 누빌 방실이가 되게 할 수 있어요. 방실이도 흙을 밟고, 방실이네 어머니랑 아버지도 흙을 밟을 수 있어요.

 정치권력을 쥔 사람이나 개발업자들이 돈에 눈이 멀어 이웃과 동무를 바라보지 못하는 일은 몹시 안타깝습니다. 그러나, 정치권력을 안 쥐거나 개발업자로 살아갈 마음이 없는 여느 사람들이 돈에 너무 젖어든 서울 같은 큰도시에서 ‘수수한 꿈’을 꾼다는 일이 어쩌면 터무니없는 꿈이 아닌가 싶어요. 서울은 수수한 사람 수수한 꿈이 수수하게 이루어지며 수수한 삶이 되도록 풀어 주지 않습니다. 서울은 피가 튀기도록 치고박으면서 더 힘이 세고 더 돈이 있으며 더 이름 드높이는 사람만 살아남도록 하는 싸움터입니다.

 돈을 벌겠다는 생각이 나쁘다는 소리가 아니라, 삶을 사랑하겠다는 아름다운 생각으로 거듭나야 할 내 모습이 아닌가 싶어요. 부지런히 땀흘리면서 보람을 느끼지 못하는 도시에서 훌훌 떠나, 부지런히 땀흘리는 만큼 보람과 기쁨과 웃음을 누리는 고즈넉하며 따사로운 살림터를 찾아야 하지 않느냐 싶어요.


- ‘망루에 올라가는 걸 말리지 못했다. 다만 얼마라도 건져야지란 생각에. 아이들 아빠도 두려움을 애써 감추고 있다는 걸 알면서도 말리지 못했다.’ (247쪽)


 ‘용산개 방실이’에 앞서 수많은 방실이가 있었고 수많은 용산이 있었습니다. 서울에서든, 서울 둘레에서든, 한국에서든, 이웃나라에서든, 돈과 이름과 힘이 없는 사람은 언제나 짓밟히거나 짓눌립니다. 그런데, 정치권력자나 공무원이나 개발업자만 수수한 여느 사람을 짓밟거나 짓누르지 않습니다. ‘자그마한 꿈’이라고 말하지만, 막상 따지고 보면 ‘돈을 더 벌겠다’는 꿈인 수수한 여느 사람들 마음자리가 앞으로도 수많은 용산과 수없는 방실이 이야기를 쏟아내리라 생각합니다.

 내 밥그릇을 채우려면 내 이웃 밥그릇에서 빼앗아야 해요. 내 이웃 밥그릇을 채우려면 내 밥그릇에서 덜어야 해요. 다 함께 돈이 넘치는 길이란 없습니다. 다 함께 나누는 길은 있으나, 다 함께 돈을 벌며 흥청거리는 길이란 없어요. 서울 용산에서 재개발을 밀어붙이려 했던 사람들도, 또 이러한 일을 밀어붙일 때에 주먹과 방패와 몽둥이를 들고 앞장서던 사람들도, 또 이러한 일을 언론에 기사로 쓰거나 법정에서 법으로 다스리는 사람들도, 서로서로 사랑을 나누려는 마음으로 제 밥그릇에서 밥술을 하나 덜지 않을 때에는 다시금 아픔과 슬픔이 되풀이됩니다.

 싱그러운 벼포기가 볍씨를 나누어 주어, 이 볍씨로 쌀을 만들어 밥을 해 먹습니다. 벼한테서 목숨을 선물받아 고이 살아가는 목숨인 사람이에요. 돼지한테도 목숨을 얻고 소한테도 목숨을 얻으며 닭한테도 목숨을 얻어요. 머리가 나쁜 사람을 일컬어 닭대가리라 놀리지만, 닭한테서 고운 목숨을 얻는 줄 잊는다면 사람이야말로 머리가 나쁜 노릇이에요. 올챙이 적을 모르는 개구리보다 고마움을 모르는 사람이 되고 말아요.

 아름다우면서 사랑스러운 나라가 되자면, 더 많은 돈이 있으면 안 돼요. 더 높은 경제성장이나 더 많은 자격증이나 더 좋다는 졸업장이 있으면 안 돼요. 더 센 힘이나 더 큰 군대나 무기는 참으로 부질없을 뿐 아니라, 아름다움과 사랑스러움하고는 참 동떨어져요.

 우리는 누구나 따뜻한 마음으로 넉넉히 사랑을 나누어야 할 고운 목숨을 선물받은 한 사람입니다. (4344.5.28.흙.ㅎㄲㅅㄱ)


― 용산개 방실이 (정혜진 그림,최동인 글,책공장더불어 펴냄,2011.1.13./11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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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느질 수다 - 차도르를 벗어던진 이란 여성들의 아찔한 음담!
마르잔 사트라피 글 그림, 정재곤.정유진 옮김 / 휴머니스트 / 201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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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만 하는’ 여자와 ‘사랑 못 받는’ 여자
 [만화책 즐겨읽기 43] 마르잔 사트라피, 《바느질 수다》


 새벽에 일어나고 아침에 밥을 차리며 빨래를 조금 하다가는 청소를 또 조금 하면 금세 낮입니다. 낮에는 또 낮대로 아이한테 무엇을 먹일까를 헤아리고, 몇 가지 일을 하노라면 어느덧 저녁입니다. 날마다 맞이하는 하루는 날마다 훌쩍 지나간다고 느낍니다.

 바깥이 희뿌윰하게 밝는 새벽 네 시 무렵이면 으레 잠이 깨는데, 오늘은 다섯 시 오 분에 겨우 일어납니다. 어제 하루 일요일을 맞이해서 빨래도 꽤 하고, 이런저런 집일을 퍽 한 탓인지 몸이 좀 무겁습니다. 닭 우는 소리가 꽤나 시끄럽다고 느끼며 일어나는데, 닭이 우는 때는 요즈음 봄철에는 새벽 네 시 반쯤부터가 아닌가 싶습니다.

 텃밭 가장자리에서 쉬를 눈 다음, 이제 잎을 무럭무럭 돋우는 감자를 돌아봅니다. 잎사귀 앞뒤로 숨거나 달라붙은 무당벌레를 하나하나 잡아서 돌로 눌러 죽입니다. 토마토 잎을 꽤나 갉아먹은 무당벌레도 하나하나 잡습니다. 새벽에 잡고 낮에 보면 또 꽤나 달라붙고, 낮에 잡은 뒤 저녁에 다시금 돌아보면 또 많이 달라붙습니다. 잡아 죽이고 또 잡아 죽여도 끝나지 않습니다.

 고랑에서 돋는 풀은 뽑거나 캐도 그치지 않습니다. 또 돋고 새로 돋으며 자꾸 돋습니다. 그야말로 쑥쑥 돋는 온갖 풀입니다. 푸성귀를 길러서 내다 파는 이들이 푸성귀에 붙이는 값은 너무 싸지 않나 하고 생각하면서 무당벌레를 잡습니다. 어쩌면, 손으로 벌레를 하나하나 잡고, 손으로 풀을 하나하나 캐거나 뜯으면서 키운 푸성귀라면 제값을 받아야 할 노릇인지 모릅니다. 또한, 풀약을 치며 키운 푸성귀라 하더라도 풀약을 치는 값과 품이 만만하지 않은 만큼, 이러거나 저러거나 제값을 받으려면 오늘날 사람들이 가게에서 사들이는 값에 몇 곱을 해야 하리라 느낍니다.

 언제부터인가 ‘공정무역’이라는 말이 떠돕니다. 다국적기업이나 재벌기업이 시세차익을 많이 노리면서 가난한 나라 아이들이나 어른들을 마구 부리며 만드는 물건이 아니라, 가난한 나라 일꾼이 일한 보람을 옳게 거둘 수 있도록 하는 물건을 사고팔자는 일이라 합니다. 우리 식구들도 때때로 공정무역 물건을 장만하지만, 공정무역이라는 이름이 썩 내키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커피나 코코아나 초콜릿 들을 공정무역으로 사고파는 일이 나쁘지 않습니다만, 사람들이 날마다 흔히 먹는 곡식과 푸성귀와 열매부터 옳고 바르게 사고팔아야 한다고 느끼거든요.

 한국사람은 쌀부터 얼마나 옳거나 바르게 사고팔면서 먹을까요. 배추 한 포기를, 무 한 뿌리를, 시금치 한 손을 얼마나 옳거나 바르게 사고팔는지요. 생활협동조합 회원으로 들지조차 않거나 생협 물건은 너무 비싸서 돈있는 사람만 사다 먹는다고 여기지는 않나 궁금합니다. 논을 일구는 일꾼이 거둔 벼가 쌀이 되기까지 들이는 품을 헤아리면서 가게에서 쌀을 사다 먹는 도시사람은 얼마나 될는지 궁금합니다.


- 점심식사를 마치고 남자들은 늘 그랬던 것처럼 낮잠 자러 가고 여자들은 상을 치우기 시작했다. (2쪽)


 만화책 《바느질 수다》를 읽습니다. 만화책 《페르세폴리스》를 그린 마르잔 사트라피 님이 그린 작품입니다. 140쪽밖에 안 되는 만화책이 1만 원 값이 붙어 무척 비쌉니다. 여느 만화책을 생각한다면, 값이 세 곱이나 비쌉니다. 두꺼운 껍데기를 붙였기에 이토록 비싼가 싶지만, 2005년에 나온 《페르세폴리스》를 헤아리니 이때에 159쪽으로 나온 만화책도 1만 원이었습니다. 여느 만화책을 만드는 종이보다 좋은 종이를 쓰니까 값이 더 비쌀밖에 없는지 모르는데, 한결 빼어난 작품이더라도 여느 만화종이를 쓰고 여느 만화책으로 만들어 여느 사람들이 여느 손길로 사랑할 수 있게끔 여느 사랑을 다스린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고 꿈을 꿉니다.


- “그래도 그 여잔 복도 많네. 최소한 불알 하나는 건드려 본 거 아냐. 나는 건드려 보기는커녕 지금까지 구경도 못했다고. 뭘 그렇게 쳐다보고 그래?” “그럼 네 새끼들은 어떻게 낳았는지 설명해 봐!” “성령으로 잉태했나 보지!” “자기들 말이 맞긴 해. 나는 자식을 넷이나 낳았지. 무려 넷이나. 하지만 남자 물건을 본 적은 없어. 그 사람은 방에 들어와 불을 끈 다음엔, 으차! 으차! 으차! 그렇게 나는 애를 가졌지. 그러니 고추를 볼 새가 있었겠어?” (21∼22쪽)
- “내 말 좀 들어 봐. 나는 열세 살에 처음 결혼했어.” “열세 살이요?” “그래, 열세 살! 족보 있는 집안에서 태어나 장관이나 장성한테 시집가는 걸 당연하게 생각했어. 그래서 나보다 쉰여섯 살이나 많은 장군님을 남편으로 맞아야 했지.” “쉰여섯 살 차이요?” “그래, 예순아홉이나 먹은 노인네였어.” “아, 전혀 몰랐어요.” “이제는 알게 됐잖니.” “그 나이에도 여전히, 음, 그러니까, 그거 가능해요?” “사실, 나도 모른단다.” “어떻게 모를 수가 있어요?” “자꾸 말 끊지 말고 내 얘길 들어 봐! 그 사람은 어머니께 결혼 허락을 받으러 왔고, 어머니는 단숨에 그러라고 하셨지.” (25∼27쪽)



 만화책 《바느질 수다》를 읽으며 생각합니다. 책이름은 “바느질 수다”이지만, 이 만화에 나오는 할머니나 아주머니 가운데 바느질을 하는 사람은 보이지 않습니다. 이 만화책에서뿐 아니라, 집에서 바느질을 할 만한 사람은 아무도 안 보입니다. 바느질을 하면서 수다를 떠는 줄거리가 아니라, 차를 마시면서 수다를 떠는 줄거리인 《바느질 수다》입니다.

 꼭 바느질을 하는 사람만 “바느질 수다”를 해야 하지 않습니다. 책이름 “바느질 수다”는 바느질을 하는 사람들 수다라는 뜻보다 “바느질 + 수다”라는 이름에서 무언가 깊은 뜻을 넌지시 들려준다 여길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자꾸 “바느질 하는 사람들 수다”를 곱씹고 맙니다. 만화영화로도 나온 만화책 《달려라 하니》를 되새깁니다. 창수네는 제법 잘사는 집이라 할 텐데, 창수네 어머니가 집에서 창수하고 하니 이야기를 나누는 대목을 보면, 창수네 어머니는 ‘꽤 잘사는 집안 여자’라 할 만하지만, 으레 뜨개질거리를 손에 듭니다. 눈으로는 뜨개질거리를 바라보면서 입으로는 창수하고 이야기를 주고받습니다.

 아스트리드 린드그렌 님이 빚은 숱한 어린이책을 읽다 보면, 사이사이 나오는 그림에서 뜨개질하는 아주머니나 할머니가 곧잘 나옵니다. 영화로 나온 〈말괄량이 삐삐〉를 보아도, 아주머니들이 수다를 떠는 대목에서는 으레 모두들 뜨개질을 합니다. 일본에서 나온 그림책에서도 어머니들이 집에서 이야기를 나누거나 수다를 떠는 대목을 보면 으레 뜨개질을 합니다. 눈으로는 뜨개질거리를 바라보면서 이야기를 나누거나, 아예 눈으로 안 들여다보아도 빼어난 솜씨로 뜨개질을 하곤 합니다.


- “아직도 사랑하세요?” “당연히 아니지!” “그럼, 사진은 왜 가지고 계세요?” “그 사람 사진이 아니라, 내 결혼식 사진을 간직하고 있는 거야. 내가 어떻게 그런 사람을 아직도 사랑할 수 있겠니? 그런 몹쓸 짓을 당하고도. 베를린에 도착한 날, 그 사람은 마중조차 나오지 않았어.” (40쪽)
- “유부남이 애인을 만나러 갈 때는 말이다. 깨끗이 빨아 빳빳하게 다린 옷을 입고, 이에서는 광채가 나지. 입에서는 꽃향기가 나고, 기분은 더할 나위 없이 좋고, 이야깃거리도 넘쳐나지. 그리고 이런 말을 해 주잖아. ‘당신은 아름답고 지적이오. 그러니까 뭐랄까, 당신이랑 있을 때는 시간이 너무 빨리 지나가. 당신은 정말이지 귀한 진주 같다고나 할까.’ 그저 좋은 시간을 보내려는 거지.” (50∼51쪽)


 한국은 뜨개질이 자리잡은 지 얼마 안 되었습니다. 한국사람 옷짓기는 뜨개질이 아닌 바느질입니다. 이러거나 저러거나, 뜨개질을 하든 바느질을 하든, 이와 같은 옷짓기는 으레 여자가 도맡습니다. 예부터 바느질하는 어머니와 뜨개질하는 할머니가 있을 뿐이지, 바느질하는 아버지나 뜨개질하는 할아버지는 찾아보기 아주 어렵습니다.

 한국에서는 밥하는 아버지나 빨래하는 할아버지를 찾아보기 더더욱 어렵습니다. 걸레질하는 아버지나 아기 업는 할아버지는 얼마쯤 있다고 할 만할까요.

 그런데, 밥이고 빨래이고 걸레질이고 바느질이고, 한국뿐 아니라 지구별 적잖은 나라에서는 온통 여자한테 도맡깁니다. 서로 하는 집일이 아니고, 함께 즐기는 집일이 아니며, 나란히 나누는 집일이 아니에요.

 게다가, 이제는 남자도 여자도 집일을 안 하곤 합니다. 집일을 하는 일꾼을 따로 두곤 합니다. 이제 아버지도 어머니도 집일을 안 하곤 하지만, 집일만 안 할 뿐 아니라, 아이와 함께 살아가는 일마저 안 하곤 합니다. 아이를 어릴 적부터 유아원이든 어린이집이든 유치원이든 넣습니다. 초등학교에 들 무렵이면 벌써 여러 학원을 드나듭니다. 집에서 아이와 어버이가 마주하는 겨를이 몹시 적습니다. 어린 나날부터 아이하고 눈을 마주하면서 함께 살아가는 틈이 얼마 없으면서 ‘한식구’라는 말을 섣불리 씁니다.


- “정말? 네 남편도 바람피워?” “거의.” “그게 무슨 뜻이야?” “그 사람은 언제나 한눈을 팔았어. 위험할 정도로 말이야. 특히 차 타고 갈 때! 눈이 아주 360도로 휙휙 정신없이 돌아가서 사고 날 뻔한 적도 여러 번 있었어!” “그래서 어떻게 했어?” “남자들도 폐경기 같은 게 있다는 거 알지? 그런데 남자들은 티가 덜 나잖아. 그래서 젊은 여자한테 그렇게 환장하는 거야. 자기들도 젊어 보이고 싶어서. 아직 능력이 죽지 않았다는 걸 온 세상에 광고하고 싶으니까! 늙은 여자랑 같이 있으면 늙었다는 걸 인정하는 셈이 되고.” (73쪽)


 집에서 옆지기하고 이야기를 나누며 곰곰이 생각에 잠기곤 합니다. 옆지기는 이야기합니다. 아이를 낳았으면, 적어도 세 해는 아이하고 함께 살아야 한다고. 세 해 동안 어머니이든 아버지이든 집에서 함께 지내면서 바라보아야 한다고.

 첫째 아이하고 네 해째 함께 살아가면서 생각합니다. 옆지기가 하는 말을 한 해 두 해 세 해 네 해 살아내면서 몸으로 천천히 받아들입니다. 예쁜 모습도 미운 모습도 웃는 모습도 우는 모습도 집에서 고스란히 바라보거나 받아들이면서 함께 살아갈 때에, 아이는 아이대로 사랑을 받아먹고, 어버이는 어버이대로 사랑을 나눕니다. 아이는 어버이한테서 사랑을 받고, 어버이는 아이한테서 사랑을 받습니다.

 어린 아이는 사랑 말고는 받을 만한 다른 무엇이 없습니다. 어린 아이한테는 사랑 빼고는 줄 만한 다른 뭐가 없습니다. 어린 아이는 사랑 아닌 돈을 받을 수 없습니다. 어린 아이한테 사랑 아닌 돈을 줄 수 없습니다.

 그런데, 서너 살 어린 아이한테뿐 아니라 예닐곱 살 어린 아이한테도 매한가지입니다. 예닐곱 살 어린이라 하든 열한 살 어린이라 하든 사랑을 나눌 노릇입니다. 열네 살 푸름이라 하든 열여덟 살 푸름이라 하든, 사랑을 주고받도록 마음을 기울일 노릇입니다. 아이는 어버이한테서 사랑을 받아야지, 돈을 받을 수 없습니다. 어버이는 아이한테 사랑을 주어야지, 돈을 줄 수 없습니다.


- “바하르가 결혼한다니! 상상이 가? 우리 딸이!” “이제 겨우 고등학교 졸업했는데?” “남편감이 억만장자래. 런던에 집이 일곱 채나 있대. 모나코에도 두 채나 있고.” “런던에 사는 억만장자? 몇 살인데?” “마흔한 살! 영국에 산 지 25년 됐대. 로열 칼리지 출신이래. 그 나이엔 원하는 게 확실하지! 아, 타지! 너무 잘됐어! 굉장해! 나, 너무 행복한 거 있지?” “그럼 어째서 마흔 살이나 먹었고, 25년 동안 유럽에서 살았고, 교육도 받을 만큼 받은 남자가 이제 겨우 열여덟 살짜리 계집애랑 결혼하고 싶어 하는 건지 설명해 봐!” “왜냐하면 말이지, 너도 서양 여자애들이 어떤지 알지? 열 살, 열한 살이 지나면 순수함을 잃지. 그 사람은 이란인이고! 그래서 몇 가지 기준을 가지고 있는데 우리 딸이 거기에 딱 들어맞은 거야.” “잘 들어, 파르바네! 네가 여기까지 찾아왔으니까 말인데, 내 의견을 말해 줄게. 나는 네가 아주 큰 실수를 저지르고 있다고 생각해? 바하르는 아직 어려. 공부도 하고, 독립심도 키우고, 자아를 발견할 수 있게 좀 내버려 둬! 너도 네가 고른 남자랑 결혼했잖아. 그 애도 좀더 큰 후에 스스로 결정할 기회를 줘.” “그래서 결과가 어떤지 아니? 내가 고른 남자는 말다툼을 할 때마다 내가 자기를 쫓아다녔다고 어찌나 불만을 늘어놓는지 말도 마. 양가집 규수라면 얌전히 기다렸을 거라면서 말이지.” (96∼97쪽)


 아이를 사랑하면서 살아가는 어버이는 서로서로 사랑을 나누면서 살다가 곱게 흙으로 돌아갑니다. 어버이한테서 사랑받으며 살아온 아이는 서로서로 사랑을 나누는 즐거움을 듬뿍 누리는 길을 걷다가 곱게 사랑씨를 남기며 흙으로 돌아갑니다.

 만화책 《바느질 수다》를 덮습니다. 처음 태어나던 날부터 짝꿍을 만나 아이를 낳고 할머니가 되기까지 살아온 숱한 여자들이 어린 나날부터 얼마나 사랑받았던가 하고 곱씹습니다. 만화책 《페르세폴리스》에 나오는 주인공은 당신 어머니와 아버지한테서 어린 나날부터 따스히 사랑받았습니다. 《바느질 수다》에서 이야기를 풀고 맺는 주인공 또한 둘레 할머니들과 고모들한테서 넉넉히 사랑받습니다.

 만화를 그린 마르잔 사트라피 님은 언제나 따순 사랑이 감도는 터전에서 예쁘게 자랐습니다. 그렇지만, 마르잔 사트라피네 할머님이나 고모님은 사랑을 제대로 받은 적이 없다 할 만합니다. 남자들한테 성 노리개라든지 부속품이라든지 집일을 해주는 밥어미나 심부름꾼 대접만 받았다 할 만합니다.

 제법 돈있는 집에서 살아온 여자들이든, 몹시 돈없는 집에서 살아온 여자들이든 ‘여자 삶’이라는 테두리에서 마찬가지입니다. 예쁜이 수술은 엄두도 못 낼 가난한 집 여자들이 ‘차 마시는 수다’ 아닌 ‘바느질 수다’를 떨면서 주고받을 아쉬움이나 슬픔이든, 물질문명을 퍽 누리던 지식 여성들이 느긋하게 ‘차 마시는 수다’를 떨면서 ‘여성이 누릴 살곶이’에 얽힌 고단한 나날을 주고받든 똑같습니다.

 문득 김은성 님 만화책 《내 어머니 이야기》(새만화책,2008)가 떠오릅니다. 《내 어머니 이야기》에 나오는 ‘솔방울을 속치마 샅에 끼우며 노는 할머니’ 이야기가 생각납니다.

 곰곰이 헤아리자니, 여자들 ‘바느질 수다’나 ‘차 마시는 수다’에서는 온갖 눈물과 웃음이 고스란히 배어납니다. 그렇지만, 남자들 ‘술집 수다’나 ‘담배 수다’는 그닥 재미없을 뿐 아니라 따분하구나 싶습니다. 그래도, 남자들이 논이나 밭에서 일할 때이든, 멧자락에서 나무를 하거나 바다에서 고기를 잡을 때에 펼치는 수다가 되면 몹시 재미나며 즐겁습니다. (4344.5.16.달.ㅎㄲㅅㄱ)


― 바느질 수다 (마르잔 사트라피 그림·글,정재곤·정유진 옮김,휴머니스트 펴냄,2011.2.14./1만 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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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다메 칸타빌레 25 - 완결
토모코 니노미야 지음 / 대원씨아이(만화) / 201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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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무리는 뻔할 만화일 테지만, 예쁜 사람들
 [만화책 즐겨읽기 36] 니노미야 토모코, 《노다메 칸타빌레 (24∼25)》



 한국에서는 2002년부터 옮겨진 《노다메 칸타빌레》가 2011년 4월 15일에 25권으로 드디어 마무리가 됩니다. 이제껏 니노미야 토모코 님이 그린 만화를 읽을 때마다 느끼는데, 《노다메 칸타빌레》 1권을 집어들던 첫무렵부터 이 만화가 어떻게 마무리가 될는지 훤히 보였습니다. 아주 뻔하다 싶은 줄거리로 이어질 만화가 되리라 느꼈어요.

 줄거리가 훤히 보이는 작품이지만, 《주식회사 천재패밀리》라든지 《GREEN》이라든지 《음주가무연구소》라든지 즐겁게 읽을 만화입니다. 니노미야 토모코 님 만화책은 ‘줄거리를 살피는’ 작품이 아니라, 당신 만화에 나오는 ‘사람들이 툭탁툭탁 부대끼거나 올망졸망 어울리는 삶’을 들여다보는 작품이기 때문입니다.


- “어차피 하는 건, 같은 모차르트잖아. 비에라 선생님도 나와 같은 총보를 사용해. 난 충분히 보람이 있다고 생각하는데?” (24권 113쪽)


 생각해 보면, 니노미야 토모코 님 만화책이 아니더라도, 웬만한 만화책은 마무리가 어떻게 될는지 어림할 수 있습니다. 조금 뜻밖이다 싶도록 마무리가 되더라도 ‘이렇게 될 수 있겠지.’ 하고 생각하기 마련입니다. 첫 권을 집어들면서 ‘아하, 이 만화는 이러저러하게 되다가 몇 권쯤에서 요리조리하게 끝나겠구나.’ 하고 알아챌 수 있기 때문은 아닙니다. 만화를 읽든 글을 읽든 사진을 읽든, 마무리나 줄거리는 그닥 대수롭지 않아요. 이야기를 어떻게 엮느냐가 대수로우며, 어떠한 이야기로 어떠한 사랑과 삶과 사람을 그리느냐가 대수롭습니다.


- “이 오페라만큼은 웃으며 볼 수 있는 분위기를 만들고 싶어요. 아마 우리 관객들은 오페라를 처음 보는 사람들이 많을 테니까.” (25권 123쪽)


 이제껏 한국말로 옮겨진 니노미야 토모코 님 만화책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이분 만화에 한결같이 흐르는 넋이란 ‘밝은 웃음’과 ‘맑은 사랑’입니다. 회사원으로 일을 하든 흙을 일구며 땀흘리든 피아노 건반을 두들기든, 저마다 선 자리에서 제 삶을 아끼면서 이웃이나 동무나 살붙이를 어여삐 사랑하는 나날을 살며시 보여줍니다. 더 돋보이는 삶을 보여주지 않습니다. 더 빼어난 사람을 추켜세우지 않아요. 더 따스한 사랑을 내세우지 않습니다.

 수수한 자리에서 수수한 나날을 수수한 사람과 수수한 사랑으로 가꾸는 착한 사람들이 어떻게 밝은 웃음을 나누면서 맑은 사랑을 꽃피우는가 하는 실타래를 풉니다.

 《노다메 칸타빌레》 스물다섯 권은 스물다섯 가지로 나누어 들여다보는 수많은 밝은 웃음과 숱한 맑은 사랑이 춤추는 노래잔치라고 할까요.


- ‘그래, 처음부터 제대로 된 적은 한 번도 없었어.’ (25권 87쪽)
- “세계적인 노다메 양이 바로 마법의 방울이지. 받아들여! 치아키.” (25권 135쪽)
- ‘그녀가 앞으로도 쭉 나와 함께 음악의 길을 가 주는 것만으로 기쁘기 때문에, 모두의 연주를 들으러 세계 각지로 가 보고 싶어.’ (25쪽 172쪽)



 빈틈 많은 사람들이 빈틈 많은 삶을 꾸리며 빈틈 많은 사랑을 맺습니다. 처음부터 제대로 된 적은 한 번도 없습니다. 어쩌면, 니노미야 토모코 님 만화책치고 ‘제대로 된’ 작품이 없다 해도 틀리지 않습니다. 그런데, 제대로 되든 안 되든 무엇이 대단하겠습니까. 웃으면서 읽고 싱그럽게 받아들이며 착하게 가슴에 여미면 넉넉할 테니까요.

 노벨상을 받겠다는 작품이 아니고, 1000만 권이 팔리기를 꿈꾸는 작품이 아니며, 세계명작으로 손꼽히기를 바라는 작품이 아닙니다. 작은 사람들이 작은 꿈을 작은 가슴에 품으면서 작은 사랑으로 열매를 이루는 작은 삶길을 보여주는 작품입니다.


- “나한텐 꿈만 같았어요! 선배와의 첫 협연!” “바보. ‘협연’은 피아노 솔로로 협주곡을 같이 하는 거야.” “전 오케스트라 속에 있는 것도 꿈이었는걸요. … 너무 행복해서 앞으로 1년 동안은 이걸 반찬 삼아 혼자서도 맛있게 밥 먹을 수 있을 것 같아요!” (25권 150∼151쪽)


 협연이면 어떠하고 오케스트라이면 어떠하며 오페라이면 어떠하겠습니까. 이것이든 저것이든 아무것이 아닙니다. 함께 살아가는 동무요 이웃입니다. 서로 아끼는 벗이며 살붙이입니다. 나란히 한길을 뚜벅뚜벅 걷는 고운 님입니다. 곁에서 따사롭게 어루만지며 돌보는 옆지기입니다.

 피아노 천재가 아닌 노다메입니다. 지휘 천재가 아닌 치아키입니다. 노래를 사랑하고, 노래를 이루는 삶을 사랑하며, 노래를 이루는 삶을 조용히 일구며 복닥이는 여느 사람들을 사랑하는 노다메이고 치아키입니다.

 사람들과 함께 살아가는 한 사람인 노다메이면서 치아키입니다. 누구 위에 올라선다거나 누구 밑에 밟히는 사람이 아닙니다. 한 자리에서 어깨동무하면서 웃고 떠들며 울다가는 얼싸안는 예쁜 사람입니다.

 예쁜 넋이 곱다시 담긴 《노다메 칸타빌레》 이야기는 2002년부터 2011년까지 꼭 열 해를 이었습니다. 이제 다음에는 어떤 예쁜 마음이 어떠한 고운 손길에 실려 새로운 이야기로 펼쳐질까 궁금합니다. (4344.5.10.불.ㅎㄲㅅㄱ)
  

― 노다메 칸타빌레 24∼25 (니노미야 토모코 글·그림,서수진 옮김,대원씨아이 펴냄,2010.9.15.+2011.4.15./4200원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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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니짱dirn 2014-05-24 09: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재밌네요!
 
서점 숲의 아카리 8
이소야 유키 지음 / 학산문화사(만화) / 201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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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 다른 책, 사뭇 다른 사랑, 서로 다른 사람
 [만화책 즐겨읽기 39] 이소야 유키, 《서점 숲의 아카리 (8)》



 봄에는 봄비가 옵니다. 지난주에 내린 봄비는 벼락을 이끌고 쏟아붓던 봄비였는데, 올들어 처음으로 ‘비가 이토록 쏟아지는데 춥지 않구나’ 하고 느꼈습니다. 벼락비가 지나간 뒤 참말 날이 퍽 포근합니다.

 여름에는 여름비가 옵니다. 여름비는 시골마다 알뜰히 심은 곡식과 푸성귀가 알차게 자라도록 도와주는 비입니다. 여름비가 한꺼번에 몰아치지 않고 사나흘에 한 번씩 알맞게 내린다면, 곡식과 푸성귀는 얼마나 싱그러이 잘 자랄 수 있을까 생각합니다. 그러고 보면, 한국땅에서는 여름 빗물을 알뜰히 건사해서 가뭄에 고맙게 쓰도록 마련하는 일이란 없습니다. 도시에서는 그저 꼭지를 틀어 수도물을 쓰면 된다고 여깁니다. 가뭄날에도 도시사람은 물을 여느 때하고 똑같이 펑펑 씁니다.

 가을에는 가을비가 옵니다. 가을비는 바야흐로 추위가 닥치니까, 겨울맞이를 잘 하렴 하고 인사를 하는 비라고 느낍니다. 추적추적 내리는 가을비를 바라보면서 집살림을 다시금 여밉니다.

 겨울비는 이제부터 꽁꽁추위로 얼어붙으니까 마음 단단히 먹으라는 뜻이로구나 싶어요. 때때로 ‘겨울이라지만 너무 춥기만 하지? 살짝 녹여 볼까?’ 하는 뜻은 아닐까 싶기도 합니다. 겨울이 물러서는 겨울비는 비로소 한숨을 놓는 비가 되기도 합니다.

 철 따라 다 다른 비입니다. 철마다 새삼스러운 비예요. 빗물은 와르르 쏟아부으며 지붕을 뚫을 듯하기도 하지만, 참으로 소리없이 흩뿌리기도 합니다. 꾸준히 내리기도 하고 갑자기 퍼붓기도 합니다. 나뭇가지와 풀잎에 맺힌 빗방울은 앙증맞기도 하고 가냘프기도 합니다. 이 빗물이 땅으로 스며들어 졸졸 흐르니까, 사람이든 짐승이든 푸나무이든, 이 물을 반가이 맞아들여 얻어 마십니다.


- “테라야마 씨.” “네.” “오늘 뭔가 할 얘기가 있었나요? 글귀에서 그런 느낌이 났거든요.” “예, 저, 나는 그때 아카리 씨에게 말한 것을 이제서야 후회하고 있습니다.” (55쪽)
- ‘왜 이러지? 별로 마시지 않았는데. (콜록콜록) 하아, 그때 난 아카리 씨에게 이런 기분이 들게 했던 걸까.’ (63쪽)



 만화책 《서점 숲의 아카리》 8권째를 읽습니다. 《서점 숲의 아카리》 8권째에는 ‘한국 서울에 새끼가게를 차린 이야기’가 나옵니다. 일본에서 일본 책방 이야기를 다루는 《서점 숲의 아카리》인 만큼 굳이 한국에 새끼가게를 차린 이야기를 다루지 않아도 됩니다. 왜냐하면, 책방이면 다 같은 책방이지, 일본이랑 한국이 뭐가 다르냐 할 만하거든요.

 그런데, 책방이면 다 같은 책방이라 할 때에는, 책이면 다 같은 책입니다. 이 책 저 책 따로따로 다룰 까닭이 없습니다. 더욱이, 이 사람 저 사람 다 같은 사람일 테니까, 숱한 사람들이 맺고 얽히면서 사랑하기도 하지만 미워하기도 하다가는 싫어하기도 하고, 애틋하게 여기기도 하는 온갖 삶을 보여줄 까닭이 없을 테지요.

 《서점 숲의 아카리》가 50권이나 100권까지 나올 수 있다면, 나중에는 중국이나 대만이나 미국이나 프랑스나 스웨덴 같은 나라에까지 새끼가게를 차리는 이야기를 보여줄 수 있으면 어떠하랴 싶기도 합니다. 나라마다 사람이 다르고 문화가 다르며 이야기가 다를 테니까요.


- ‘이거, 과연 끝날까. 일본에서는 어떻게 일했지? 나는 벌써 며칠째 제대로 책을 읽지 못하고 있는 걸까. 전에는 이렇게 책이 쌓인 장소에 있으면 외롭다는 생각이 안 들었는데.’  (87쪽)


 개구리알에서 깬 올챙이가 논물에 가득합니다. 왜가리와 해오라기는 이 올챙이를 잡아먹으려고, 또 일찍 개구리가 된 녀석들을 잡아먹으려고, 논가에 자주 찾아옵니다. 왜가리와 해오라기뿐 아니라 까치나 멧비둘기나 까마귀도 논을 드나듭니다. 장끼와 까투리도 드나듭니다. 올빼미와 뻐꾸기도 드나들 테지요.

 시골자락에서는 시골자락에 깃든 새들답게 시골에서 얻을 먹이를 찾아다니며 숨을 잇고 보금자리를 돌보며 새끼를 까는 멧새입니다. 도시에서라면 도시에서 살아가는 새들답게 도시에서 얻을 먹이를 찾아다니며 숨을 이을 도시새가 되겠지요.

 어느 쪽이 더 새다운 새라고 말하기는 어렵습니다. 어디에서든 새는 새일 테니까요. 어디에 살든 사람은 다 같은 사람이며, 어떤 일을 하든 사람은 다 한동아리 사람입니다. 아무리 매캐한 바람이 부는 도시라 하더라도, 푸나무는 용케 말라죽지 않습니다. 사람이든 새이든 쥐이든 뭐이든, 시끄러우며 어지럽고 시멘트로 흙이 다 덮인 곳에서 용케 살아냅니다.

 가만히 보면, 도시에서 살아가는 동안 책을 읽으면, 책은 그예 지식조각이 될밖에 없겠구나 싶습니다. 책은 종이로 만들고, 종이는 나무를 베어 만듭니다. 도시에는 나무가 없을 뿐더러, 도시에서 자라는 나무를 베어 종이를 만드는 일이 없을 뿐 아니라, 도시에는 종이를 만드는 공장이 없습니다.

 도시에는 ‘종이로 만드는 책에 실을 알맹이를 글로 쓰거나 그림으로 그리거나 사진으로 찍는’ 사람들만 있습니다.


- “테라야마 씨, 왜 그렇게 기뻐 보여요?” “예?” “첫날 사람들이 많이 왔을 때는 묘한 표정을 지었으면서.” “아니, 그게. 고객이 서서히 줄어든다는 건 책장 구성에 미진함이 있어서라고 생각해요. 아직까지 개성이 부족하다고 할까? 그런 찜찜한 상태에서 계속 손님이 오는 것보다는 우리에게는 오히려 훨씬 잘된 일인지도 모릅니다. 잘 팔릴 만한 책만 모아 둘 것이 아니라, 소규모 서점만의 개성을 표츌하고 싶어요.”  (106∼108쪽)


 만화책 《서점 숲의 아카리》 이야기를 버티는 두 기둥 가운데 하나인 테라야마 씨는 점장이 되는 길을 걷지 않다가는, 서울 지점으로 옵니다. 테라야마 씨는 점장이든 부점장이든 바라지 않습니다. 그저 책을 좋아하는 사람입니다. 책을 아끼며 책하고 함께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둘레에서 테라야마 씨를 바라보는 사람들은 테라야마 씨를 바꾸고 싶어 합니다. 책을 이만큼 잘 알며 꿰뚫는 사람이 여느 일꾼으로 머물기를 바라지 않습니다.

 책에 갇힌다 싶게 살아가는 모습은 그닥 안 좋을 수 있습니다. 책을 아끼고 사랑하되 책에 얽매이지 않아야 비로소 사람다운 사람이라 하겠지요. 테라야마 씨는 틀림없이 ‘책 울타리’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다만, 책누리에서 일하며 책 울타리에서 벗어나기보다는, ‘책이 태어나서 자라는 터전’을 몸으로 느끼고 마음으로 받아들이면서 책 울타리에서 벗어날 수 있을 때에 가장 아름다우면서 사랑스럽겠지요.


- “아까 ‘언어는 사람을 표현하는 것’이라고 말했는데, 저는 결코 ‘사람을 살피는’ 것을 잘하는 사람이 아니에요. 하지만 그게 좋아서 어학 공부를 열심히 했을지도 모르겠어요. 테라야마 씨와 저는 자라온 환경과 문화가 다르긴 하지만요, 음, 한마디로, 불안한 점이 있으면 분명하게 말로 표현해 주세요! 어려운 일일지도 모르지만! 그러면 가능한 정확하게 다른 직원들에게 전달할게요. 그게 함께 일하는 거라고 전 생각해요.“  (114쪽)


 책을 읽으면서 사랑을 알 수 없습니다. 책을 많이 읽었기에 사람을 알 수 없습니다. 몸으로 부대끼는 사람이 책에 깃든 모든 지식을 다 알지는 못하겠지요. 나는 나대로 몸으로 부대끼며 내 슬기를 갈고닦는다지만, 내 몸을 갈고닦으면서 아름다운 책을 가까이하다 보면, 내 둘레 수많은 사람들이 저마다 알뜰살뜰 갈고닦으며 아름다이 키운 슬기를 기쁘게 마주하면서 내 슬기를 한껏 북돋울 수 있습니다.

 책은 울타리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책은 좋은 보금자리가 되어야 합니다. 책은 지식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책은 따스하며 넉넉한 사랑이어야 합니다.

 《서점 숲의 아카리》에 나오는 테라야마 씨이든 아카리 씨이든, 또 카노 씨나 시오리 씨나 모두, 아직은 어느 한쪽에 얽매인 삶에 휘둘립니다. 저마다 어떤 응어리를 안습니다. 이 응어리를 깨닫거나 알아채기는 하지만 좀처럼 풀어내거나 씻어내지 못합니다. 또는 아직 못 깨닫거나 안 알아챕니다. 깨닫기는 했어도 굳이 풀어내려 하지 않는다든지, 알아채기는 했어도 대수롭지 않게 여깁니다.

 《서점 숲의 아카리》 9권부터는 이제 슬슬 이러한 응어리를 솔솔 푸는 실타래를 조금쯤은 보여주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이토록 책을 많이 읽고 책하고 둘러싸인 채 살아가면서 아무것도 못 느낀다면, 또한 둘레에 서로서로 좋은 사람을 많이 마주하면서 하루하루 예쁘게 살아가는 데에도 좀처럼 제 굴레를 벗어던지지 못한다면, 《서점 숲의 아카리》는 어영부영 뒤죽박죽이 되다가는 괜히 권수만 더 늘린다든지, 뻔한 사랑열매 맺는 흐름으로 마무리될까 싶어 걱정스럽습니다. (4344.5.7.흙.ㅎㄲㅅㄱ)


― 서점 숲의 아카리 8 (이소야 유키 글·그림,설은미 옮김,학산문화사 펴냄,2011.3.25./42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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