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내와 걸었다 - 2007년 10월 고도원의 아침편지 추천도서
김종휘 지음 / 샨티 / 2007년 6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돈으로 할 수 없는 여행, 돈으로 가꾸지 못하는 삶
 [잠깐 읽기 5] 김종휘, 《아내와 걸었다》



- 책이름 : 아내와 걸었다
- 글ㆍ사진 : 김종휘
- 펴낸곳 : 샨티
- 책값 : 13000원



 (1) 여행, 걷기, 삶, 돈, 집


 옆지기하고 ‘먼 나들이’를 하기로 했으나, 좀처럼 짬을 못 내고 있습니다. 금ㆍ토ㆍ일에 도서관 문을 열어 놓고 있어야 하기도 하지만, 우리가 사는 동네를 하루빨리 재개발과 재생사업이라는 이름으로 쓸어내 버리고 싶어하는 인천시장과 개발업자하고 싸우는 일을 거드느라 이틀이나 사흘쯤 자리를 비우고 떠나는 일도 못하는 판입니다. 우리 두 사람이 없다고 해서 일손이 줄어들거나 모자라지 않겠지, 하고 생각할 때가 있는데, 막상 여러 가지 일이 닥치다 보면, 참말 일손이 없습니다. 사진을 찍어 주는 사람도 없고, 이야기를 글로 남겨 주는 사람도 없고, 그보다 자질구레한 온갖 일을 맡아 주는 ‘한 사람 손길’이 그립곤 합니다.

 몸이 더 무거워지기 앞서 다문 이틀이나 사흘이라도 맑은 숨과 따순 볕을 누릴 수 있는 곳에서 지내 보고 싶은데, 다른 일거리 걱정이 없이 자전거를 달리고 싶기도 한데, 풀숲이 우거진 그늘에서 실컷 단잠을 자 보고 싶은데, 내리쬐는 햇볕을 고스란히 받으면서 흙길을 걸어 보고 싶은데, 아무래도 마음이 바쁜 탓일 테지요. 스스로 느긋하지 못한 탓일 테지요. 바쁘다는 말은 핑계이고, 떠날 마음이, 움직일 마음이, 돌아다닐 마음이 없거나 얕은 탓일 테지요.


.. 반지하 원룸에서 혼자 웅크리고 살다가 34층 고층으로 뛰어올라 한강 야경을 누리며 살았을 때, 그리고 그 집에서 내려왔을 때, 나는 다시는 되돌리기 어려울 어떤 방향을 정하고 있었다. 그것은 아내가 아프지 않을 집, 숨쉴 수 있는 집, 같이 꿈꾸는 집, 덜 벌고 덜 쓰며 나를 충족하고 나를 살릴 수 있는 집으로 한 발씩 나아가는 일이었다 ..  (239쪽)


 모자라나마 낮 나절에라도 한 시간 남짓 동네 골목길 마실을 합니다. 저녁 나절에도 한 시간 남짓 골목길을 떠돌곤 합니다. 흙이 아닌 시멘트나 아스팔트로 발라진 길이긴 하지만, 한 층짜리 집으로 이루어진 골목길을 거닐면서, 차소리가 아닌 사람 사는 소리를 듣습니다. 창가로 흘러나오는 텔레비전 소리와 이야기 소리와 도마질 소리를 듣습니다. 때때로 세탁기 돌아가는 소리를 듣고, 여름임에도 보일러 돌아가는 소리를 듣습니다. 예순 넘은 나이는 할머니나 할아버지라고도 할 수 없을 만큼, 일흔 여든 넘은 분들이 많이 사는 오래된 동네이다 보니, 여름에도 보일러를 돌리며 방을 데웁니다.


.. 온전히 하루 이상을 걸어 본 사람이라면 걷기를 조금씩 길게 거듭할수록 알게 되는 재미가 있다. 배낭 속 목록이 하나둘 줄어가면서 몸과 마음의 무게도 가벼워지는 맛, 불필요하게 불었던 살이 쪽쪽 빠지는 기분, 보잘것없는 한 가지라도 짐을 줄이면 몸과 마음은 환히 빛난다 ..  (20쪽)


 골목길을 거닐며 골목집 담벼락을 쓰다듬기도 하고, 늘 대문 바깥, 울타리 따라 나란히 놓아 둔 꽃그릇을 가만히 들여다보기도 합니다. 새벽에 들여다볼 때, 낮에 들여다볼 때, 저녁에 들여다볼 때, 밤에 들여다볼 때 모두 다릅니다. 빛줄기에 따라서, 또 거리등 불빛에 따라서 생김새도 모양새도 다르게 느껴집니다.

 골목길 앵두나무가 좋아서 마냥 사진만 찍었는데, 그제 앵두나무 열매를 다시 보려고 그곳으로 갔더니 그새 아직 덜 여문 열매까지 따 버리고 없더군요. 덜 여문 열매까지 따 간 모습을 보면, 나무 임자가 그러지는 않았을 테고, 몰래 훔쳐서 먹는다고 해도, 덜 여문 열매는 남겨 놓아야지, 원.


.. 바닷가 마을에서 본 아이들은 아무도 똑바로 걷지 않았다. 왔다갔다 제멋대로 걸었다. 살아 있는 제 몸에 맞게 움직이며 길을 걸을 줄 알았다. 그런 아이를 데려다가 줄 맞추게 하고 일렬로 걷게 훈련시키는 학교를 오래 다녀선지, 또는 운전을 시작한 다음부턴지, 나는 직진의 대로를 직선 코스로 가는 것만이 길인 양 착각하고 살아온 것이다. 해안가의 길도 대부분 곧고 넓게 뻗은 길이 차지하고 있었다 ..  (90∼91쪽)


 골목집마다 기름보일러를 많이 씁니다. 기름이 도시가스보다 훨씬 비싸기는 하지만, 가스보일러로 바꾸랴, 도시가스를 신청하랴, 뭐 하랴 해서 들어가는 목돈을 엄두를 못 내고 그대로 쓰는 집이 제법 됩니다. 또한, 세들어 사는 사람으로서도 목돈 들여 바꿀 꿈을 못 꿉니다. 집임자는 굳이 자기 돈 들여서 바꾸어야 할 까닭을 느끼지 못합니다. 기름보일러조차도 들이기 힘든 집은 연탄을 땝니다. 우리 동네에서 가까운 신흥동에는 아직도 잘 돌아가는 강원연탄 공장이 있고, 이웃 동네에서도 연탄 때는 집이 퍽 많습니다.

 나중에 골목집이 모두 허물리고 30층이 넘는 아파트로 바뀌어 버린다면, 그때 비로소 이 동네에도 도시가스가 들어오리라 봅니다. 지금 있는 이 집들 그대로 간직하고 가꾸어 주기보다는, 집장사와 땅장사로 시세차익을 얻는 데에만 마음을 쏟을 지역정부일 테지요. 삶을 사람들 어울림이 아닌 돈흐름으로 재고들 있으니까요.

 나라에서는 ‘경제성장율’을, 우리들은 ‘월급봉투 두께’에 더 눈길을 두고 있어요. 텔레비전 연속극을 보지 않아도, 극장에 가지 않아도, 또 책을 읽지 않아도, 우리들은 얼마든지 문화를 누리거나 즐기거나 기쁨으로 가득할 수 있는데, ‘문화복지’를 동네 스스로 일구어 가도록 내버려 두지 않아요.

 자그마한 꽃그릇 하나 돌보고 푸성귀를 손수 심어서 뜯어먹는 일도 문화입니다. 삶이며 문화입니다. 공원에 갔다가 매발톱꽃이 지고 꽃씨주머니가 여문 모습을 보고는 이 꽃씨주머니를 톡톡 따다가는 주머니에 챙겨 넣고 집에 와서 비어 있는 헌 그릇을 찾아 흙을 퍼 온 뒤 이듬해에 여기에 심어야지, 하고 생각하는 일도 문화입니다. 삶이자 문화입니다. 오늘 저녁에는 무얼 먹을까 생각하면서 저잣거리에 장바구니 하나 들고 가서 나물 천 원어치 두부 천 원어치 양파와 감자 천 원어치씩 사다가 찌개 하나 끓여서 두어 식구 함께 먹도록 밥상을 차리는 일도 문화입니다. 삶이면서 문화입니다.


.. 돈을 냈으니 본전을 뽑아야 한다는 생각이 분명 한몫 거들었을 것이다. 창피한 일이지만 손해 보지 않겠다는 기분 때문에 엄청나게 물을 낭비했다. 식당에 들어갔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음식을 시켰다가 기대에 못 미치면 화가 났다. 돈 버리고 입 버렸다는 감정에 쉽게 휩싸였다. 그 기준은 돈이었다. 돈 낸 만큼 대접받지 못했다는 생각 ..  (128쪽)


 임금님 수라상만 문화이겠어요? 임금님 수라상만 ‘우리네 옛 밥 문화’이겠어요? 여느 사람들 된장찌개 올려놓은 밥상도 어엿한 ‘우리네 옛 밥 문화’입니다. 우리가 가꾸는 문화, 곧 전통이고, 우리가 일구는 삶, 곧 역사입니다.
 

 (2) 《아내와 걸었다》라는 책을 덮고


 ‘먼 나들이’는 못하고 ‘가까운 나들이’만 하고 있는 몸. 오랜만에 찾아와서 얼굴도 보고 이야기도 나눈 형은 “아, 제주도나 가 볼까?” 하면서 기지개를 켰습니다. “제주섬이라? 좋지? 좋겠네. 부럽네.” 제주섬 앞바다 파아란 물에 발을 담그고, 아니 몸을 담그면 얼마나 시원하고 개운할까. 흑흑흑. 제주시에 깃든 헌책방 〈책밭서점〉에 찾아가면 헌책방 아저씨가 오랜만에 찾아왔다고 반기면서 ‘한라산물순한소주’에다가 회 한 접시 먹자고 하실 텐데. 엉엉엉. 사진쟁이 김영갑 님이 온삶을 바쳐 누볐던 오름 아무 데나 한 곳 찾아가서 뒹굴뒹굴 구르면서 놀 수 있을 텐데. 아이고아이고아이고.

 마음은 구만 리도 아닌 백만 리이고. 몸은 4층집 씻는방에서 빨래를 북북 비벼서 빨고. 집 옆으로 지나가는 전철 소리를 들으면서 햇볕에 빨래를 널고.


.. 뭐해? 와 봐! 뭔데? 어느새 아내는 쪼그려앉아 무언가를 열심히 쳐다보고 있었다. 그렇게 나를 부를 때마다 나는 가지 않았고, 우두커니 서 있었다. 가끔 가 보거나 잠시 뒤에 전해 들으면 별것 아니었다. 민들레거나 이름 모를 풀꽃이었다. 불가사리나 이름 모를 조개껍데기였다. 그 자리마다 어김없이 야아- 하는 아내의 탄성이 흘러나왔다 ..  (196쪽)


 내 몸은 ‘먼 나들이’ 하는 사람들 이야기가 담긴 책을 펼치면서 입맛을 다십니다. 쩝쩝쩝. “그냥 어느 날이었다. 답답했다.”면서 길을 떠난 이야기를 묶어낸 책 《아내와 걸었다》를 읽습니다. 그리고 덮습니다.

 이 사람은 좋겠네. 그냥 어느 날 답답해서 길을 나설 수 있었으니. 더구나 자기가 길을 나선 이야기를 책으로까지 낼 수 있었으니. 게다가 혼자도 아닌 짝꿍도 함께 손잡고 다녔으니.

 넨장. 안 되겠군. 나도 자전거를 타고 조금 멀리 나들이를 해야겠다. 조금 멀리라고 해 보아야, 요기 인천 동구에서 남구까지, 또는 부평구까지, 또는 시청 앞까지, 또는 수봉공원이나 연안부두까지일 테지만. (4341.6.9.달.ㅎㄲㅅㄱ)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버려진 조선의 처녀들 - 훈 할머니 편
정신대할머니와 함께하는 시민모임 지음 / 아름다운사람들 / 2004년 2월
평점 :
품절






 이 책 하나 50 ― ‘나라’는 내버리고, ‘우리’는 등돌린 여자
 : 정신대할머니와 함께하는 시민모임, 《버려진 조선의 처녀들》


- 책이름 : 버려진 조선의 처녀들
- 글 : 정신대할머니와 함께하는 시민모임
- 펴낸곳 : 아름다운사람들(2004.2.24.)
- 책값 : 8000원


 (1) ‘미친’ 소와 ‘미친’ 날씨


 유월을 사흘 넘긴 아침, 찌푸린 하늘에서는 비가 오다가 구름이 걷히다가 해가 나다가 슬며시 더웠다가 바람이 불었다가 합니다. 벌써 유월인데 올해 여름은 어찌 되려나 궁금합니다. 올여름은 지난여름처럼 끔찍하려나. 올해에는 여름이란 싹 사라지고 곧바로 겨울로 이어지려나. 그치지 않는 더위만 이어졌다가 겨울 같지 않은 겨울이었다가 갑자기 얼어붙은 채 두 달 가까이 이어졌던 지난 한 해 날씨인데. 봄과 여름과 가을과 겨울이 사라지고 철과 절기도 사라진 오늘날, 하루하루 날씨를 헤아릴 때마다 두렵습니다.

 우리들 밥상에 올려질 밥과 반찬도 걱정이지만, 우리 삶에 골고루 영향을 끼치는 날씨도 걱정입니다. 여름인데 덥지 않아서 걱정이고, 여름인데 햇볕이 뜨겁지 않아서 걱정입니다. 모기가 온 집안을 휘젓지는 못하고 바퀴벌레도 좀처럼 나다니지 않아서 한숨을 돌리지만, 이 같은 날씨가 우리 몸에, 또 아기 몸에 끼칠 영향을 생각하면 겹겹이 걱정입니다.


.. 이남이는 경상남도 마산 진동에서 나고 자랐다. 집에서 걸어가면 바다 푸른 물결을 볼 수 있었다. 어릴 적, 친구들과 방파제에 나란히 앉으면 고깃배가 드나들었다. 부두에서 배를 타고 앞바다 섬에도 가 보았다. 부두로 가기 전 지나치는 곳엔 제법 큰 염전이 있었다 ..  (16쪽)


 지난 토요일, 목포에서 일하는 형이 동생을 보러 인천 나들이를 왔습니다. 하루밤 함께 묵고, 이튿날 아침에 슬슬 골목길을 거닐었습니다. 형은 이 골목을 아주 오랜만에 걷기도 하고 많이 바뀌어서 못 알아보겠다고 이야기합니다. 동인천역에서 내려 우리 집으로 찾아오는데 중앙시장에서 헤맸다고 합니다. 저도 처음에는 헤맸습니다. 골목골목 늘어서 있던 집들이 죄 사라지고 길이 넓어졌거든요. 없던 찻길이 생기고 없던 넓은 길이 늘어났거든요. 극장은 한 군데 빼고 모조리 문을 닫았고, 극장을 둘러싸고 있던 온갖 집과 길도 싹 바뀌었습니다. 저잣거리도 바뀌었습니다. 다만, 섣불리 재개발이 이루어지지 않은 곳들에는 예전 자취가 남아 있어요.

 동인천역 뒤편, 송현동 골목길마다 활짝 피어 있는 꽃을 구경하며 거닐던 때입니다. 조그마한 노란 꽃이 꽃그릇에 줄줄이 피어 있습니다. 오이꽃일까, 생각하며 다가갑니다. 오이꽃이 아닙니다. 토마토꽃입니다. 이야, 이렇게 집에서 토마토를 꽃그릇에 심어서 기르기도 하는구나.

 이제 막 어른 새끼손톱 만하게 열매가 영글기도 하는 토마토. 아직도 꽃을 마알갛게 피우기도 하고, 하나둘 열매가 맺기도 하고. 그래, 5월 끝머리부터 6월 첫머리에 오이꽃도 피고 호박꽃도 피고 참외꽃도 피고 수박꽃도 피지.


.. 그 일본사람은 이남이에게 ‘하나코’라는 이름을 지어 주었다. 이남이는 왜 ‘이남이’라는 이름을 버리고 ‘하나코’가 되어야 하는가. 일본사람은 자신을 ‘주인’이라 부르게 했다. 일본사람을 ‘주인’이라 불러야 하는 조선 여자들은 ‘노예’가 되었다. 도착하고서야 이제 분명해졌다. 조선 여자들은 일본군인의 성노예로 이 먼 곳까지 강제로 끌려온 것이다 ..  (32∼33쪽)


 응? 그러고 보니, 정작 오이며 참외며 수박이며 토마토며, 꽃필 무렵은 유월 앞뒤인데. 커다란 할인매장에는 철없이 늘 토마토가 있었고 오이가 있었잖아. 저잣거리에 참외가 모습을 드러낸 지도 거의 석 주가 되었고, 수박도 두어 주 앞서부터 많이 나왔는데.

 철에 따라 움직인다면, 철에 따라 피고진다면, 참외며 수박이며 이제 막 꽃을 피울 때인데. 토마토도 이제부터 꽃이 필 때인데. 제철을 따지자면, 바로 이맘때 딸기를 먹고 살구를 먹고 복숭아를 먹어야 하지 않어?

 그런데 우리는 포도를 언제 먹지? 딸기가 어느 날부터 저잣거리에서 싹 사라졌지? 밤은 언제 거두지? 능금과 배는 언제 열매가 익어서 언제 우리가 먹었지?


.. 그들에게 조선 여성은 인간이 아니었다. 이남이는 일본군인에게 성욕을 배설하는 도구였을 뿐이었다 … 프놈펜에 도착해서 처음 이틀은 쉬었다. 단지 군인들이 안 왔을 뿐이지 그것은 휴식이 아니었다. 일본병원에 갔다. 성병검사. 그 검사는 여자들을 위한 검사가 아니었다. 성병검사는 일본군인들을 위해서였다 … 그 높은 사람은 이남이의 부탁쯤 군복에 살짝 달라붙은 먼지 털어 버리듯 아무렇지 않게 털어 버렸다. 이남이는 아픈 어머니가 계신 고향으로 가지 못했다 ..  (34,38,44∼45쪽)


 모내기는 유월에 했다지만, 요새 유월에 모내기를 한다고 하면 건달농사도 아닌 바보짓을 한다고 할 테지. 보리를 심거나 거두는 때, 밀을 심거나 거두는 때, 수수를 심거나 거두는 때, 옥수수를 심거나 거두는 때가 도무지 어찌 되었나. 지금 우리들은 쌀도 먹고 보리도 먹고 율무도 먹고 겨자도 먹고 파도 먹고 감자도 먹고 고구마도 먹고 양파도 먹고 빨간무도 먹고 고사리도 먹고 시금치도 먹고 냉이도 먹고 고들빼기도 먹고 두릅도 먹고 하지만, 정작 어떤 나물이 어느 때에 어디에서 나고 자라는지, 정작 어떤 푸성귀를 어느 때 캐거나 따거나 뜯는지를 알고나 먹고 있으려나.

 아니, 우리들한테는 딸기가 언제 어떤 빛깔 꽃을 피우는지, 딸기가 덩굴풀인지 아닌지, 딸기가 한해살이인지 두해살이인지 여러해살이인지, 딸기가 언제 익어 언제 따서 먹는지는 몰라도 될는지 모를 일일는지도.

 가게마다 딸기값이 어떻게 다른가만 알아도 넉넉한지도. 어느 가게에서 사는 딸기가 크고 달고 좋더라, 하는 정보만 알면 그만인지도. 여름이 아닌 봄에 먹든, 여름이 아닌 가을이나 겨울에 먹든 알 바 없는지도.


.. 세상을 다 뒤져도 찾을 수 없는 누나 이남이. 남동생 이태숙은 그렇게 누나를 그리워하다 92년에 암으로 세상을 떴다. 56년 아버지, 72년 어머니, 79년 언니 덕이가 그립던 동생 소식 모른 채 세상을 떠났다. 그리고 남동생마저 갔다. 이제 이 세상에서 이남이를 알아볼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  (65쪽)


 생각해 보니 그렇습니다. 제가 국민학교를 다니던 때, 동무들이 공부를 지루해 하고 모두 축 처져서 힘들어하고 꾸벅꾸벅 졸고 있으니까, 담임선생님이 당신 옆지기가 아이 낳을 때 이야기를 해 주었습니다. 한겨울이었는데, 입덧을 하면서 딸기를 먹고 싶어하더랍니다. 그런데 그 추운 겨울날 어디에서 딸기를 얻겠습니까. 요즘이라면 아무 걱정이 없을 터이나, 1980년대 국민학교 교실에서 그 이야기를 들으면서도 ‘입덧을 하면 여자도 걱정이지만, 남자도 먹을거리를 마련해 주느라 참 힘들겠구나. 그런데 나는 나중에 커서 옆지기가 한겨울 밤에 딸기를 먹고 싶다고 하면 어떡하지?’ 하고 생각했습니다.

 이제는 어느 누구도 아이 밴 여자가 입덧을 한다 할지라도 걱정이 없습니다. 어떤 열매도 철이 없기 때문입니다. 나라안에서 키우지 않는 먹을거리라 해도 돈만 있으면 어렵지 않게, 게다가 금세 사들일 수 있습니다.

 한겨울에도 배를 먹을 수 있거든요. 여름날 쌀 떨어질 걱정을 누가 합니까. 식량자급율이 20%를 가까스로 넘는 한국땅이지만, 밥이 없어서 못 먹는 일이란 없습니다. 돈이 없어서 밥을 굶을 뿐입니다. 돈이 없을 때에만 못 사고 못 먹고 못 즐길 뿐입니다.


.. 우리 나라에 캄보디아말을 전공한 사람을 제대로 찾을 수가 없어서 훈 할머니의 속마음을 쉽게 헤아리기는 힘들었다. 말로 통할 수 없기 때문에 할머니는 눈빛, 표정, 몸짓을 잘 지켜봐야 했다. 살아남기 위해서는 캄보디아사람이 되어야 했던 훈 할머니. 그래서 더욱더 캄보디아말만 열심히 했을 할머니를 떠올리면 ..  (115∼116쪽)


 ‘미친소’ 고기 이야기를 들으면서, 저나 옆지기는 소고기든 돼지고기든 거의 사먹을 일이 없어서 걱정이 되지 않습니다. 우리들 걱정은, 우리들이 늘 먹는 곡식과 푸성귀를 마음놓고 얻거나 먹을 수 없는 대목, 또 싱싱한 푸성귀 구경이 어렵다는 대목에 있습니다. 우리 형편은 닿을 수 없어서 손수 논밭을 일구지 못합니다. 농약과 비료 안 쓴 곡식값이 비싸다고 하나, 제가 느끼기로는, 지금 우리네 곡식값은 너무나도 낮은 헐값입니다. 유기농 곡식을 사먹는 일은 조금도 비싸다고 느끼지 않습니다. 외려 싸다고 해도 틀리지 않습니다. 다만, 씨눈이 살아 있는 누런쌀을 먹고 싶으나, 우리처럼 쌀깎기를 거의 안 한 누런쌀을 좋아하는 사람이 드물어서, 이런 누런쌀 얻기가 쉽지 않을 뿐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아무리 눈밝히고 귀밝히면서 좋은 곡식을 얻어서 먹는다 한들, 나날이 날씨가 미치고 물과 바람이 어지러워지고 말면, 제아무리 유기농이라고 하는 곡식도 오롯이 살아 있는 밥이 되기 힘듭니다. 도시뿐 아니라 시골 구석구석 공장이 들어서잖습니까. 산골짜기 안쪽까지도 아스팔트가 놓이잖습니까. 손으로 짓고 똥오줌으로 거름내어 짓던 농사가 자취를 거의 감추어 버렸잖습니까. 날마다 똥오줌 안 누는 사람이 없건만, 그 어마어마한 똥오줌이 거름이 아닌 쓰레기가 되어 하수구로 흘러들며 물을 더럽히고 자원을 헤프게 버리는 한편, 쓸데없는 데에 시설투자와 건물짓기가 끊이지 않잖습니까.

 ‘미친소’ 고기가 아니더라도, 우리 나라 땅에서는 이 많은 도시사람들 밥상을 채울 수 있을 만큼 고기소를 기르기 어렵습니다. 한 달에 한두 번, 어쩌다가 한 번 먹는다고 한다면 한국땅에서도 고기소를 기를 수 있을 테지요. 그러나 한 주에 한 번도 아닌, 거의 날마다 고기를 밥상에 올려 버릇하고, 술안주로 삼는 우리들 삶이라 한다면, ‘미친소’ 고기가 아닌 ‘한국땅 소’ 고기라 하더라도 항생제와 사료로 자라는 소고기일밖에 없어요. ‘미친소’ 고기가 왜 ‘미친소’ 고기가 되었겠습니까. 하루치 사료 값이라도 줄이려고 성장촉진제를 먹이고 갖가지 ‘질병 막는 항생제’를 먹입니다. 사료에는 처음부터 이러한 항생제와 호르몬제를 담아 놓고 내다 팝니다. 우리는 고기를 먹는다기보다 항생제를 먹는다고 해야 옳습니다.


.. 할머니는 누가 누군지 모르니 투표 안 하겠다고 하셨다. 다음날 잔니에게 전화가 왔다. 투표하고 왔다고. 신문사, 방송사 기자들이 집에 왔었노라고. 할머니는 집에 계시고 싶어했는데 어쩔 수 없이 갔다고. 한 회원은 이 소식을 듣고 흥분해서 방송사에 전화를 했다. “할머니가 정말 투표하고 싶으셨을까요?”라고 물었더니 “취재를 하는 것만도 관심을 갖는 것 아닙니까?”라고 대답했단다. 관심이란 어떤 것일까? 우린 정말 어떤 것을 보고 관심이라고 부르는 걸까? ..  (126쪽)


 한여름도 아닌 5월부터 참외를 먹으면서 속이 찜찜했습니다. 여름도 아닌 3월부터 딸기를 먹으면서 속이 께름했습니다. 나라밖에서 들어온 오렌지를 먹고 바나나를 먹으면서, 시큼달콤한 석류를 먹으면서, 더구나 한국땅에서 석류를 거두어들이지도 못하면서 한국땅에 넘쳐나는 ‘석류 마실거리’를 이웃사람한테 얻어마시면서 속이 껄쩍지근했습니다.

 참말로, 권정생 할아버지가 쓴 《하느님의 눈물》에 나오는 토끼처럼, 바람을 먹고 이슬을 마시면서 살아갈 수는 없을 노릇인가요. 햇볕을 쬐고 물만 마시고 바람을 들이쉬면서 살아갈 수는 없는 사람인가요. 사람으로 태어난 몸, 어쩌는 수 없이 이것도 먹고 저것도 먹으면서 살아갈밖에 없나요.

 철을 잊건 말건, 공기가 나빠지건 끔찍해지건, 흐르는 물을 마실 수 없고 수도물도 바로 마실 수 없으니 끓이거나 정수기를 집집마다 달아 놓고 마셔야 하건 말건, 이리하여 날마다 더더욱 찌푸려지고 미쳐가는 날씨를 느끼지 못하더라도, 우리 삶은 돈벌이만 잘할 수 있으면 그만인 셈인지요. 몸이 무너지고 망가지더라도 몇 손가락으로 꼽히는 대학교에 동무보다 높은 점수를 받아서 들어갈 수 있으면 즐거운 노릇인지요. 참사람 되는 매무새를 익히지 않더라도, 어릴 적부터 한자 지식과 영어 지식을 머리속에 많이 집어넣고 있으면, 늙어서 죽는 날까지 걱정 하나 없을는지요.


.. 고향에 와서는 캄보디아에 있는 자식들이 못내 눈에 밟혔고, 그래서 다시 돌아간 캄보디아에서는 다시 이 땅이 그리웠다 ..  (138쪽)


 촛불집회로 그나마 ‘미친소’ 고기 하나라도 막아 보려는 그 발버둥 같은 몸부림조차 주먹질과 몽둥이질과 물뿜질과 발길질과 방패질로 피를 흘리며 쓰러져야 하는 이 나라입니다. 이 땅을 어찌 ‘큰 한겨레인 민주 나라(大:크고 韓:한겨레이며 民:백성이 임자인 國:나라)’라 할 수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2) 《버려진 조선의 처녀들》이라는 책


 《버려진 조선의 처녀들》이라는 책이 있습니다. 책이름은 “버려진 조선의 처녀‘들’”이지만, 정작 이 책에서 다루는 “버려진 조선의 처녀”는 오직 한 사람, 캄보디아에서 살고 있던 ‘훈 할머니(이남이)’입니다.


.. 피해자들을 침묵에 가두고 싶어했던 건 어쩌면 일본 정부만이 아니다. 당연히 피해자들을 대신해 싸워야 할 정부, 그리고 이 사회에 사는 우리도 피해자들에게 침묵을 강요한 건 아닌가 ..  (80쪽)


 누군가 훈 할머니가 캄보디아에 살고 있음을 ‘찾았다’고 했지만, 누군가 찾지 않았어도 할머니는 살아 있었습니다. 우리들이 못 보고 있었을 뿐, 아니 보려고 안 했을 뿐입니다.

 가만히 보면 그래요. 훈 할머니를 비롯해서 세계 곳곳, 아니 아시아 곳곳에는 당신들 어린 날 받은 깊은 생채기를 가슴에 끌어안고 조용히 살다가 숨을 거둔 할머님들이 많습니다. 우리들은 이 숫자를 제대로 모릅니다만, 한둘이나 이삼백이나 삼사천이 아닙니다. 사오만도 아닙니다. 얼추 이십만이라는 숫자를 헤아리고 있습니다. 나라안에서도, 또 나라밖에서도 당신들 아픔과 괴로움을 선뜻 털어내지 못합니다. 정작 눈물을 흘리며 아픔을 달래면서 새힘을 얻어야 할 피해자는 할머님들인데, 할머님 둘레에 있는 사람들이 할머님을 고이 받아들이지 않았어요. 일본 제국주의자와 군인이 먼저 이 나라 여자를 괴롭혔다고 하겠습니다만, 일본 제국주의와 군인이 물러간 자리에서 이 나라 사람들(그 가운데 남자들)은 무엇을 했던가요.


.. 할머니가 자신을 되찾은 날은 77년 전 일본에게 나라를 빼앗겼던 날이다. 훈 할머니는 가족을 찾았는데, 할머니가 찾아야 할 것은 그것만이 아니다. 일본 정부는 자신들의 범죄를 인정했는가. 범죄를 저지른 자들은 처벌을 받았는가. 당시 끌려간 아시아 20만 일본군 ‘위안부’를 향해 진정한 사죄와 배상을 했는가. 일본 국민들에게 이 사실을 왜곡하지 않고 제대로 알렸는가. 진실을 알렸는가 ..  (89쪽)


 저는 꿈꾸기를 좋아합니다. 꿈을 꾸고 난 다음에는 제 깜냥껏 조금이나마 움직여 보고자 애써 봅니다. 요즈음 꾸는 꿈 하나는 이렇습니다. 제 몸은 인천 배다리라는 곳에 있고, 이곳에서 동네사람하고 힘에 벅차도록 인천시 개발업자 공무원하고 싸워야 할 일이 있어서 멀리까지 힘을 북돋우거나 거들지는 못합니다만, 광화문이나 청계천 둘레, 또 시청 둘레에서 촛불을 들고 한목소리를 내는 분들이, 수요일 하루쯤은 한두 시간이어도 좋고 삼십 분이어도 좋으니, 일본 대사관 앞에 함께 찾아가서 할머님(일본군 성노예로 몸과 마음이 다친 할머님)들과 함께 ‘수요집회’를 한 다음, 다시 촛불집회 터로 돌아가 보면 어떨까 하고 꿈을 꾸어 봅니다.


.. 한 이산가족의 애달픔으로 바라보지 말자. 잠시 흐르는 뜨거운 눈물로 우리 자신을 위로하지 말자. 이 눈물의 현장에 일본 제국주의를 불러다 놓자. 역사를 왜곡하며 뻔뻔스러운 얼굴을 하는 일본을 불러다 놓자. 일본군 ‘위안부’ 문제는 다 끝났다고 재를 뿌리는 정부를 갖다 놓자. ‘다 지나간 일, 좋게 좋게’라고 하는, 역사를 잊은 우리를 불러다 놓자 ..  (97쪽)


 촛불집회를 하려고 날마다 꾸준하게 광화문에 모이시는 분들이라면, 목요일에는 탑골공원 앞으로 잠깐 걸어가서 ‘민가협(민주화실천가족운동협의회)’ 분들하고 목요집회를 해 볼 수 있습니다.

 수요일에는 ‘왜 저 할머니들이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열 해도 넘는 긴 세월을 일본 대사관 앞에서 저렇게 싸우시나’ 하고 생각해 보고, 목요일에는 ‘왜 저 아주머니들이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이렇게 국가보안법 문제를 외치나’ 하고 생각해 보는 셈입니다.


.. “내가 살아온 것, 어떻게 다 말로 해요. 말을 하려면 자꾸만 눈물이 나요.” ..  (143쪽)


 이명박 대통령과 이 나라 공무원과 수입업자들이 ‘미친소’이든 ‘미치지 않은 소’이든 자꾸자꾸 들여오는 까닭과 뿌리는 다른 데에 있지 않습니다. 멀리 있지도 않아요. 바로 우리 곁에 가까이 있습니다. 언제나 우리 둘레에 있습니다. 우리가 미처 못 느끼거나 안 돌아보고 있었을 뿐입니다.

 조금만 둘러보면 됩니다. 살며시 마음을 기울여 보면 됩니다. 촛불이 횃불이 되고 횃불이 우둥불이 되도록 손에 손을 잡고 어깨동무를 하면 됩니다. (4341.6.3.불.ㅎㄲㅅㄱ)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송건호 전집 - 전20권
송건호 지음, 강만길 외 엮음 / 한길사 / 2002년 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한국현대인물사론》


 송건호라고 하는 분이 있습니다. 2001년에 세상을 떠났고, 2002년에 스무 권짜리 ‘송건호 전집’이 나왔습니다. 그러나 전집이 나오면서, 당신이 써 온 낱권책은 모두 품절이나 절판이라는 길을 걸었고, 40만 원짜리 전집이 아니고서는 당신 글을 읽을 수 없게 되었습니다.

 2008년 오늘날, 송건호라고 하는 분 책을 하나씩 따로 읽고 싶다면 헌책방을 가야 합니다. 헌책방에는 당신이 쓴 《민족지성의 탐구》며 《한국민족주의의 탐구》며 《서재필과 이승만》이며 《김구》며 《의열단》이며 《한국현대사》며 《한나라 한겨레를 향하여》며 《분단과 민족》이며 《드골 평전》이며 《민중과 자유언론》이며 《소크라테스의 행복》이며 《민주언론, 민족언론》이며 《무지개라도 있어야 하는 세상》이며 《민족통일을 위하여》며 《동양의 고사》며, 또 아이들한테 읽히려고 쓴 위인전이며, 수많은 책을 어렵잖이 만날 수 있습니다.

 이 가운데 1984년에 펴낸 《한국현대인물사론》이라는 책은, 김구ㆍ여운형ㆍ김창숙ㆍ안재홍ㆍ이동녕ㆍ안창호ㆍ이승만ㆍ김교신ㆍ한용운ㆍ신채호ㆍ함석헌ㆍ이광수ㆍ최남선ㆍ이용구, 이렇게 열네 사람 이야기를 담습니다. 김교신 꼭지를 읽어 봅니다. “김교신은 45세의 젊은 나이로 그렇게도 그리던 민족의 광복을 몇 달 앞두고 세상을 떴다. 그의 평생은 파란이 많았던 것도 아니고 생전에 높은 요직에 있었던 것도 아니다. 한낱 중학교의 평교사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나 사대주의가 도도히 흐르는 기독교계에서 그처럼 기독교의 민족화를 위해 헌신한 사람은 없고 그토록 독실하게 기독교를 믿으면서도 교회와 서양 선교사를 외면하고 오로지 하느님과 성경만을 의지한 기독교인은 없었다(276쪽).”는 대목에 눈이 멎습니다.

 교과서에 이름이 실려 익히 알 만하거나, 이래저래 무슨 행사 때마다 들먹여지거나, 우리 나라 곳곳에 크고작은 기념관이나 기념빗돌이 서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들이 무슨 일을 어떻게 했고, 어떤 마음과 넋으로 이 땅에서 살아갔는가를 얼마만큼 헤아리고 있습니까. 북한산국립공원이 왜 국립공원인지, 지리산국립공원은 국립공원으로서 얼마나 뜻이 있는지 헤아리면서 그곳을 찾아가십니까. 우리가 날마다 일터에 가서 하루 여덟 시간, 또는 더 길거나 짧은 시간을 바치면서 하는 일은 우리 은행계좌에 들어오는 돈을 넘어서 얼마나 우리 삶터를 북돋우거나 돌보고 있습니까. 우리가 날마다 먹고 마시는 밥과 물과 바람은 우리 몸에 어떻게 영향을 끼치고 있습니까. 밥과 물과 바람이 지금 어떤 형편인지 알고 있습니까.

.. 일제 36년 간 조선에는 숱한 인물들이 나왔으나 지식 청년이나 일반 청년에 관계 없이 조선 청년대중에게 가장 폭넓은 영향을 미친 것은 아마 춘원 이광수를 따를 사람이 없었을 것이다. 이광수는 세상이 다 아는 문인이었으나 지금과는 달리 일제 때의 춘원에 대한 기대는 단순한 문인으로서보다 위대한 민족의 지도자로서였다. 그런데 해방이 되고 얼마 후 1946년 여름쯤 되지 않았을까. 어느 날 이광수에 관한 기사가 신문에 조그맣게 보도된 일이 있다. “초췌한 모습의 이광수, 아내와 합의 이혼 수속차 종로구청에 출현”, 대체로 이런 내용의 기사였는데 머지않아 친일파로 단죄될 이광수가 재산을 보호하고자 아내 허영숙과 합의 이혼하고 재산을 아내의 이름으로 명의 변경했다는 보도였다. 8ㆍ15 후의 춘원은 온데간데 존재도 없었다. 8ㆍ15 전까지만 해도 민족의 우상처럼 존경받던 춘원이 해방이 되자 ‘친일파 이광수’로 변해 욕설이 그에게로 집중되었던 것이다. 세상이 변하니까 하룻밤 사이에 사람에 대한 평가가 이렇게 달라지나 싶어 인생의 무상함까지 느껴지기도 했다 ..  (이광수 꼭지/348쪽)

 송건호 님이 거쳐간 〈조선일보〉와 〈한국일보〉와 〈경향신문〉과 〈동아일보〉, 여기에다가, 온몸 바쳐 태어나게 한 〈한겨레〉는 오늘날 얼마나 힘차고 야무진 붓끝으로 우리한테 밝고 고운 이야기를 건네고 있습니까. 〈조선〉 기자와 〈한겨레〉 기자는 얼마나 송건호 님 발자취를 톺아보면서 당신들 발걸음을 튼튼하게 이 땅에 내딛고 있습니까.

 책이 없어서 사람을 못 보지는 않을 테지요. 사람이 없다고 책을 안 보지는 않을 테지요. 마음이 없고 뜻이 없어서 몸을 안 움직이고 어깨동무를 안 할 뿐일 테지요. (4341.5.15.나무.ㅎㄲㅅㄱ)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마음의 조국, 한국 범우 세계 문예 신서 6
다카노 마사오 지음, 범우사 편집부 옮김 / 범우사 / 2002년 7월
평점 :
품절



 이 책 하나 48 ― ‘한국’은 누구한테 고향나라인가
 : 다카노 마사오, 《마음의 조국, 한국》



- 책이름 : 마음의 조국, 한국
- 글 : 다카노 마사오
- 옮긴이 : 편집부
- 펴낸곳 : 범우사(2002.7.15.)
- 책값 : 9000원


 (1) 골목을 걸으면서


 아침에 보건소로 찾아갑니다. 보건소에서 ‘아기 밴 어머니’한테 철분제를 준다고 해서 옆지기가 보건소로 전화해서 여쭈어 본 뒤 찾아갑니다. 전화를 마친 옆지기는 ‘지난겨울에 보건소에 찾아갔을 때에는 병원에서 임신증명서를 떼어 오라’고 하더니 이번에 전화하니 보건소 직원이 예전에 그렇게 말한 적이 없다고 시치미를 뗀다며 성을 냅니다.

 성을 낼 만합니다. 그때 우리는 동네에 있는 보건소 두 군데에 찾아갔습니다. 집에서 가까운 중구 보건소에 먼저 찾아갔더니 주소지가 동구로 되어 있으니 동구 보건소로 가라고 해서, 동구 왼쪽 끄트머리에 붙어 있는 보건소까지 퍽 먼거리를 걸어서 갔습니다(집부터 동구 보건소까지는 중구 보건소까지 가는 거리 세 곱). 그러니 동구 보건소 직원은 ‘보건소에서 해 주는 기초검사는 병원에서 먼저 진단을 받고 임신증명서를 떼 와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이때 중구 보건소 직원은, 우리가 병원에 가지 않고 집에서 아이를 낳으려 한다고 하니, 그러십니까 하고는 검사를 해 주려다가 주소지 때문에 그리로 가라고 했습니다. 크지도 않은 동네에서 멀찍이 떨어진 보건소까지 가라는 대목에서는 씁쓸했지만, 공무원들 일이 이렇구나 하고 느낄밖에 다른 길이 없었습니다.


.. 가다가 쓰러져 죽은 시체에서 먹을 것과 입을 것, 구두 등속을 털어가는 사람들. 나도, 그 무리 속에서 또 남은 찌꺼기를 털며 살아왔다. 불타버린 벌판의 패전국이 되어버린 일본. 규슈 하카다의 암시장에서 술을 마시고 담배꽁초를 피우고 필로폰을 맞고 나이프칼을 휘두르며 들개처럼 굶주림을 면해 온 슬프고 쓰라린, 그러나 죽고 싶다거나, 눈물을 흘린 적은 없었다. “이름은?” “다카노 마사오.” “써 봐.” “쓸 줄 몰라.” “장난치지 마!” 느닷없이 걷어차며 마구 때린다 ..  (19쪽)


 철분제를 받은 옆지기가 보건소를 나오면서, 보건소 직원이 준 책을 넘깁니다. 무언가를 골똘히 찾습니다. 펼친 자리를 가만히 읽습니다. 뭘 그리 읽나, 집에 가서 읽지 했는데, 안에서 그 직원한테 ‘아이 밴 달수에 견주어 배가 더 나온 듯한데 왜 그러한가?’ 하고 물었을 때 아무 대답을 못해 주었답니다. 그런데 그 직원이 준 책(보건소에서 만들어서 나누어 주는 책)에는 이 물음에 대답을 해 주고 있습니다.





.. 비자연장과 외국인등록증 수속, 재학증명서, 은행잔고 증명서, 신원보증서, 사진 2장, 수수료 합계 6만 원. 축산대학의 교환유학생인 요시노 씨의 수속은 3분 정도로 끝났는데 나에게는 “부모는? 직업은? 목적은?” 하며 집요하게 묻는다. 그것도 더듬거리는 일본어로. “구 만주에서 돌아온 전쟁고아로서 재일조선인 할아버지의 도움을 받았기 때문에 언젠가는 할아버지의 모국어를 배우고 싶은 염원이 있었다” “할아버지의 이름은? 그런 나이로 이제 와 공부해서 뭘 하려고? 그런데 부모는 무엇을 하고 있어요?” 아무리 설명해도 끝이 없으니 나는 화가 칠밀어 …… 공무원의 거만은 어디나 마찬가지인가 보다 …… 들어갈 때, 수강증을 보여주어도 여러 가지 질문을 하는데 말을 못하기 때문에 “나는 일본인이고 한국어를 공부하고 있다”고 일본어로 말하니까 겨우 통과시켜 주었다. 학교 정문에서도 경비원의 제지를 받는다. 차림새로 판단하지 말라! 교수님들에게는 꼬박꼬박 인사하면서! ..  (38∼39,41쪽)


 여러 날 찌뿌둥하고 바람 또한 세게 불며 쌀쌀해졌던 날씨와는 달리 오늘 하루는 따뜻합니다. 따사로운 햇볕을 느끼며 천천히 걷습니다. 만석동을 지나 화수동을 걷습니다. 다섯 층이 안 되는 네 층짜리 화수아파트가 보입니다. 아까 보건소로 오던 길에 옆지기는 “꼭 하니가 살던 아파트 같다.”고 했습니다. 으잉? 뭔 소리여? 했더니, 만화 〈달려라 하니〉에 나오는 ‘하니’가 살던 옥탑방 같은 느낌이랍니다. 그런가? 하고 고개를 들어 올려다봅니다. 음, 어쩌면. 어쩌면 그럴는지도. 그러고 보면, 이제 만화영화 ‘하니’가 살던 옥탑방 같은 집은 거의 다 사라지지 않았는가? 전국에 그와 비슷한 집이 얼마나 남았을까? 돈도 절도 집도 피붙이도 없이 외로이 살아가야 하는 사람들이 겨우 깃들일 만한 값싸고 조그마한 집은, 그러면서도 마당이 조촐하니 있는 집은 어디에 있을까? 나중에 〈달려라 하니〉를 영화로 만든다고 할 때에는 옥탑방 있는 집이 죄 없어진 다음이 될 텐데, 그때 옥탑방 집을 억지로 새로 만든다고 큰돈 들이고 법석이지 않을까? 그런데 옥탑방을 새로 지을 만한 자료는 어디에서 얻을까?


.. 대학제 준비가 여기저기에서 진행되고 있지만, 지난 세월 반권력투쟁의 최전선에 서 있던 서울대학의 모습은 어디에도 없다. 그때 당시의 학생들은 지금 어디서 어떤 생각을 하며 살아가는지 확인하고 싶다 ..  (76쪽)





 부동산 앞을 지나갑니다. 세거리 골목길을 나누는 모서리에 자리한 부동산. 이름은 부동산인데, 가게 앞과 안쪽까지 꽃그릇이 가득합니다. 간판이 없다면 이곳은 꽃집으로 알지 부동산집으로는 안 알겠구나 싶습니다. 화평동 냉면거리 들머리에 섭니다. 이 길을 지나갈 때마다 ‘손님 끌어들이기’에 바쁜 목소리에 시달리기 싫어서 고단합니다. 그렇다고 이 길을 안 지나가며 빙 돌아가기도 싫고.

 맛있으면 스스로 찾아가서 먹지 않겠나, 먹고 싶은 사람이 알아서 찾아가면 그만 아닌가 싶지만, 우리 나라 어느 관광지를 가도 손님 잡아당기는 목소리 그득합니다. 지난겨울에 자전거 타고 소래와 오이도에 갔다가 아주 질려서 다시는 가기 싫어졌습니다.


.. 최근, 야간중학생이라는 것, 졸업생이라는 것을 감추는 학생이 점점 늘어나고 있따고 들었다. 배운다는 것을 왜 수치스럽게 생각하는가. 글자와 말을 빼앗긴 우리들의 서러움과 고통과 분노와 분함. 그리고 배운다는 것. 산다는 것의 진실한 의미와 감동을 필사적으로 되찾은 우리가 왜 부끄러워해야 하는가 ..  (82∼83쪽)





 다른 길로 가자고 생각하다가 마침 화수시장이 보여서, 시장에 가서 찬거리를 장만하기로 합니다. 들머리가 조그마한 화수시장으로 들어섭니다. 안쪽이 많이 어둡습니다. 장사하지 않는 자리가 제법 많습니다. 오늘은 쉬는 날인지 모릅니다. 한 바퀴 빙 둘러보다가 ‘고무신 집’이 한 곳 보입니다. 오, 고무신 집? 참말 고무신 파는 집인가? 가게 앞에서 두리번두리번하니 뒤에서 부르는 목소리. “뭐 찾아요?” “네, 고무신 까만 녀석 있어요?” “네, 몇 문이에요?” “이백칠십이요.”

 흰고무신과 보라고무신은 어느 저잣거리에서도 팔지만 검정고무신은 파는 곳이 몹시 드뭅니다. 도시에서 고무신 신고 다니는 사람이 없을 터이니, 고무신 장사를 안 할 테지요. 신는 사람만 있다면 무슨 신이든 안 팔겠습니까. 시골 신집이나 오일장을 찾아가야 할 텐데 하며 걱정하고 있었는데, 마침 잘되었습니다. 지금 신고 있는 고무신이 거의 닳아 바닥에 구멍이 날 판이었거든요. 그런데 이곳 화수시장에 고무신 가게가 예전 간판 그대로 걸어놓고 있다 함은, 요 둘레 동네에서는 검정고무신을 찾는 사람이 쏠쏠히 있다는 소리일까요.

 문제는 값. 설마 도시라고 한 켤레에 만 원을 부르지는 않겠지? 뒷주머니에 넣고 있던 오천 원짜리를 꺼내어 내밉니다. 거스름돈을 안 주십니다. 헛. 오천 원이라고?

 “아저씨, 검정고무신은 삼천 원이잖아요, 털신하고 보라고무신이 오천 원이고요.” 하고 대꾸를 할까 하다가 그만둡니다. 시골까지 검정고무신 사러 가자면 찻삯에다가 시간에다가 품에다가 만만치 않게 드니까, 그 값을 치렀다고 생각합니다. 동네 저잣거리 한켠에 고무신 집 간판을 그대로 살려놓고 있는 보람을 이천 원으로 값해 드려도 나쁘지 않으리라 생각합니다.





.. 예배가 끝난 후에 두 사람과 헤어져 여성들의 희망에 따라 젊음의 거리인 이화대학 거리에서 쇼핑하는 데 동행했다. 하라주쿠를 연상시키는 골목길에 넘쳐나는 젊은이들과 거리 양쪽으로 빽빽이 들어선 패션가게들. 이상하게도 구두점이 많은 것은 왜일까? 음악이 아니라 소음으로 위협해 와 다시는 가고 싶은 마음이 없다. 저 젊은이들은 무슨 생각을 하고, 무엇을 추구하고 있는가? 한국의 재생은 가능할 것인가? ..  (107쪽)


 화수시장을 나옵니다. 튀김닭집이 세 군데 잇닿아 있는 골목으로 접어듭니다. 차가 들어오지 않는 호젓한 골목길입니다. 무슨 까닭인지 몰라도 집을 허물고 난 빈자리에 남은 흙을 일구어서 마련한 텃밭이 있습니다. 빼곡하게 심어 놓은 푸성귀 텃밭이 있는 골목에서 잠깐 발걸음을 멈춥니다. 배추흰나비가 팔랑거리며 날아다닙니다. 골목집 아저씨 한 분이 당신 집 앞 길가에 한 줄로 이어놓은 푸성귀 그릇을 손질합니다. 이 건너편으로도 옛 집터에 가꾼 텃밭이 있습니다. 텃밭은 아주 야무지게 손질되어 있습니다. 틀림없이 이곳 화평동 골목집 할매와 할배 손길을 탔으리라 봅니다.


.. 우리 어른들은 아이들의 미래에 무엇을 해야 하는가? ..  (216쪽)


 “우리, 박정희 할머님 댁에 들렀다 가요.” 옆지기가 이야기합니다. 그러마, 하고 대꾸하며 골목길 바깥으로 나옵니다. 저쪽 골목길로 극작가 함세덕 선생 옛집이 바라다보입니다. ‘함세덕’이라는 분이 어떤 극을 썼고 어떤 일을 했는지는 뚜렷이 모릅니다. 다만, 한국전쟁 때 인민군 편에 있다가 죽었다는 마지막 이야기만 얼핏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분이 그때 죽었는지 안 죽었는지, 살아 있는지 안 살아 있는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남녘에서도 모르고, 북녘에서는 알까 모를 일입니다. 그저, 함세덕 선생이 살았던 옛집이 바로 이곳, 인천 동구 화평동, 이른바 ‘냉면골목’이라는 새이름이 붙은 자리 안쪽에 조용히 깃들어 있음은 뚜렷하게 알 수 있습니다. 또한 이분 옛집은 ‘생가 복원’ 계획도 없이 묻혀져 있는 한편, 언제 어떻게 사라질지 모르는 운명입니다. 전국을 휩쓰는 재개발(뉴타운) 바람과 맞물려, 이 동네도 재개발로 싹 쓸어버리면, 그나마 터라도 남아 있고 옛 기와집 자취가 고스란히 있는 함세덕 선생 옛집을 비롯한 모든 근현대 유적지와 서민 살림집 원형은 두 번 다시 찾아볼 수 없게 될 뿐입니다.


 (2) 그림할머니와 만나고


 ‘그림할머니’ 박정희 님 일터인 〈평안수채화의 집〉 앞에 섭니다. 수채화집 유리문에 종이 한 장 붙어 있습니다. 종이에는 박정희 할머님 연락처가 손글씨로 적혀 있습니다. 안 계신가? 하고 고개를 갸우뚱하다가 문에 적힌 또다른 손글씨인 ‘미세요’대로 문을 밉니다. 열립니다. 안쪽에 있는 덧문에는 ‘돌려서 미세요’라고 적혀 있습니다. 이 말을 따르며 돌려서 밉니다. 열립니다. 문에 걸린 딸랑이가 딸랑딸랑 울립니다. 조금 뒤 안쪽에서 “누구 오셨어요?” 하는 소리가 들려옵니다. “네!” 하고 길게 대꾸하면서 안쪽 방으로 들어갑니다.

 안쪽 방에는 그림을 배우는 할머니와 아주머니 들 해서 모두 다섯 분이 앉아 있습니다. 네 분은 그림을 그리고 있습니다. 박정희 할머님은 그림 그리는 분들 사이에 앉아 계십니다. 얕은 찻상을 팔걸이로 삼고 앉아 계십니다.





.. 따라가지 못하는 학생은 도태된다. 참으로 필연과의 투쟁이다. 왜 나는 서울에 와 있는가? 왜 한국어를 배우는가? 글을 안다는 것(배운다는 것), 빼앗긴 것을 되찾는다는 것 등의 차원이 아니다. 유학생활에 익숙해진 젊은 여성들은 유창한 영어로 서슴없이 질문하므로 필요 이상으로 분통이 터지고 주눅이 든다. 영어를 배울 거면 뉴욕에 가야지, 영어 같은 건 쓰지 말라. 다 한국어로 하라고 외치고 싶지만 말이 안 나오는 이중의 안타까움! ..  (31쪽)


 옆지기는 ‘여기서 그림을 배우려면 어떻게 해야 해요?’ 하고 여쭙니다. 할머님은, “내가, 그림 그린다면서 여기 와서 궁둥이 붙이고 앉아 있는 사람한테 달마다 5만 원씩 받고 살아.” 하고 말씀합니다. “월요일에 아침 열 시부터 저녁 여섯 시까지 그리는데, 도시락까지 싸 와서 맛있게 먹어.” 하고 덧붙입니다.

 올해로 여든여섯이 된 박정희 할머님은, 우리가 묻지 않은 이야기를 줄줄줄 늘어놓으십니다. ‘서방님(옆에 앉아서 그림 그리는 분들이 ‘서방’이 아닌 ‘영감’이라며 말을 고쳐 줍니다)’하고 예순두 해를 같이 살았는데 먼저 떠나버리니 가슴이 허전한데도 당신은 아이들을 이끌고 수채화 그린다면서 돌아다니고 있더라고. 젊어서는 살림하느라고 집 바깥에를 못 나가고, 이제는 늙어서 몸이 성하지 않으니 돌아다니며 그림을 그리고 싶어도 움직이지 못한다고. 그제는 어느 분이 강화에 같이 가자고 하면서 차로 데려다준다고 하는 이야기를 듣고 하도 기쁘고 좋아서 밤새 잠이 안 오셨다고, 그래서 새벽 세 시부터 잠을 못 자고 기다렸다고, 그렇게 하고 차를 얻어타고 강화에 가서 하루 내 그림을 그리다가 저녁에 돌아왔는데, 집 앞에서 내리고 보니 몸이 아주 녹초가 되어서 걷지도 못하고 네 발로 기어서 엉금엉금 집에 겨우 들어와서 누웠다고. 이제는 누가 집 앞으로 자동차를 끌고 와서 태워서 나들이를 시켜 주지 않으면 다니지 못한다고. 옆지기한테 아이가 있느냐고 묻다가, 배속에 아기가 있다고 하니, “철이 다 난 다음에 애를 낳는 것도 기뻐요.” 하면서 손뼉까지 치며 기뻐해 줍니다. 할머님이 딸만 줄줄 낳은 이야기를 하니, 옆에 있던 할머니가, 딸은 가게 갈 때 같이 가기도 하고 이야기도 나누는데, 아들이나 며느리하고는 아무것도 안 된다면서, 딸이 참 좋다는 말씀을 덧붙입니다.


.. 내가 배우고 있는 한국어 교과서도 한국어와 영어의 설명만 있는 것이다. 하물며 시험에도 영어의 설명이 있다 ..  (73쪽)


 얘기를 들으면서 벽에 차곡차곡 붙여놓거나 그림틀에 담아 놓은 그림 들을 찬찬히 살펴봅니다. 할머님이 낸 책 두 권에 실려 있는 그림으로 볼 때와, 이렇게 두 눈으로 볼 때하고 느낌이 사뭇 다릅니다. 할머님은 벽에다가 흰테이프로 그림을 착착 붙여놓기도 합니다. 누가 보면, ‘작품에다가 이렇게 하면 안 되지 않아요?’ 할 성 싶기도 하지만, 더없이 할머님다운 그림걸이가 아니랴 싶습니다.

 저는 제가 찍은 사진을 빨래집게로 집어서 빨랫줄에 착착 걸어놓습니다. 그러고 보니 예전에는 누런테이프로 해서 벽이나 문에 붙여놓곤 했습니다. 떠올려보니, 예전 우리 집에 놀러오시는 분들이 ‘작품에다가 테이프를 그렇게 붙여놓으면 어떡해요?’ 하고 물었구나 싶습니다. 그림이든 사진이든, 작품으로 여기면 작품이지만, 작품이고 아니고를 떠나서, 나 스스로 즐기고 싶고, 내 이웃하고 더욱 가까이 즐기고 싶어서 이렇게 붙여놓습니다. 언제라도 스스럼없이 즐기고, 언제라도 떼어낼 수 있습니다. 다음 그림이나 사진이 나오면 다음 그림이나 사진을 붙입니다. 그리고 이 그림이나 사진은 누구한테라도 기꺼이 내어줄 수 있습니다. 어디 돈을 바라는 사회단체가 있다면 잘 여미어서 그림틀이나 사진틀에 담아서 알맞는 값을 받고 팔아서, 그림이나 사진 판 값을 모두 바치기도 합니다.


.. 암기할 수밖에 없다, 라고 선생님과 동급생들이 입을 모아 말하지만, 나는 그런 방법을 써 오지 않았었다. 암기는 하지 말라, 아무리 하더라도 사전에는 이기지 못한다. 만물박사는 되지 말라, 너희들이 만물박사가 된다 하더라도 백과사전에는 이기지 못한다. 너희는 왜 야간중학에 왔는가? 왜라는 의문에 매달릴 때 그것이 너희들에게는 진짜 공부이다 ..  (81쪽)





 박정희 할머님이 그리는 수채그림을 ‘미술사’라는 테두리로 보면 어떤 대접을 받을까 하는 데로 생각이 이어집니다. 글쎄요, 우리 나라 미술 역사에서 수채그림도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을는지.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면 어떤 사람들 어떤 그림이 들어가 있을는지.

 역사에 담는 그림은 무엇이며 역사로 다루는 그림은 무엇일는지. 미술평론가라는 이름을 걸고 있는 사람들은 어떤 그림을 보면서 글을 쓰고 논문을 쓰고 책을 쓰는지. 신문이나 방송에서 알리는 그림잔치 소식은, 어떤 그림을 그린 사람들 소식을 알리는지.


.. 선생님께서 “갖고 싶은 것이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학생들은 텔레비전, 돈, 연인, 꽃이라는 등의 대답이었지만, 나는 “꿈을 주세요”라고 큰소리로 대답하자, 선생님과 학생들은 모두 놀라 숨을 들이켰다 ..  (91쪽)


 할머님은 옆지기보고 “그러면, 지금 한 장 그리고 가지?” 하고 묻습니다. 옆에서 그림을 그리는 다른 아주머니들도, “그래요, 지금 그리고 가요?” 하고 묻습니다. 그렇지만 우리는 아직 아침밥도 안 먹은 몸. 그리고 제 몸은 몹시 안 좋습니다. 지난주부터 앓는 몸살이 아직 다 안 떨어졌습니다. 입술과 코가 부르트고 입안이 다 헐고 부어서 말하기도 힘들고 숨쉬기도 벅찹니다.

 다음주부터 와서 그림을 그리겠다고 몇 번 거듭 말씀을 드리며 자리를 물러나옵니다. 옆지기는 나보고도 함께 그림을 그리자고 하는데, 어찌해야 할까 모르겠습니다. 그림을 그리고픈 마음도 있으나, 그러자면 십만 원인데. 요즘 우리 형편에 오만 원까지는 더 치를 수 있다지만 십만 원이라면.

 그러나 여든여섯 그림할머님한테 그림을 배울 수 있는 나날도 앞으로 얼마 없다는 데에 생각이 미칩니다. 때는 기다리지 않는 법이라고, 언제 찾아오는지 알 수 없는 법이라고, 왔는지 모르고 지나치다가는 그예 돌이킬 수 없게 되는 법이라고, 나중에 돈이 조금 넉넉해져서 그림을 그릴 틈이 주어진다고 할 때에는 그림할머니가 이 세상 분이 아닐 수 있어요. 그때 가서 아이고, 저번에 그림 배우자고 할 때 배울걸, 하고 땅을 친들 아무 쓸모가 없습니다.


.. 1일 1과, 소화해 가는 수업은 선생님도 허탈하겠지만 우리 쪽은 더욱 허탈하고 비참하다. 배운다는 것, 살아간다는 것의 원점을 확신하기 위해서 바다를 건너왔는데, 이 현실은 무엇이란 말인가? ..  (93쪽)


 집으로 돌아가는 길. 송림초등학교 앞에서 이삼학년 쯤으로 보이는 사내아이 하나가 계집아이 것으로 보이는 신발 한 짝을 땅바닥에 패대기를 쳤다가 하늘 높이 집어던졌다가 발로 찼다가 하면서 천천히 걷습니다. 아이 옆으로는 윤선생영어교실 사람들이 어깨띠를 두른 채 ‘집으로 돌아가는 아이들을 구스르는 일’을 하려고 기다리고 있습니다. 경찰 한 사람이 지나갑니다. 파란 조끼를 입은 공공근로 아저씨 두 분이 보입니다. 그렇지만 어느 한 사람도 아이가 신발 한 켤레를 패대기치고 던지고 밟고 차고 하는 짓을 말리지 않습니다. 슬쩍 한 번 보았다가 지나갑니다. 우리 둘이 아이 바로 뒤까지 걸어갑니다. “어이?” 하고 아이를 부릅니다. “네?” 하고 뒤돌아보는 아이한테, “네 신발은 아닌 듯한데 이렇게 던지고 차고 하니?” “땅바닥에 떨어져 있었어요.” “너희 반 여자아이 것은 아니고?” “아니오, 떨어져 있던 거 주웠어요.”

 아이를 타일러서 보냅니다. 옆지기와 함께 초등학교 앞으로 돌아와서 문간 잘 보이는 곳에 올려놓습니다. 아까는 아이 하는 짓을 쳐다보지도 않던 사람들이 그제야 다가와서 이것저것 묻습니다. 웃는 낯으로 이러쿵저러쿵 대꾸해 주었지만.






.. 김혜미자 씨의 안내로 국립도서관에 갔다. 이 건물은 전두환 대통령 시대에 일본에 조사원을 보내어 그것을 참고로 건축했다고 한다. 당시로서는 넓은 부지에 8층 건물의 초근대적인 도서관으로, 인터넷실, 컴퓨터실, VTR, CD, 신문열람실, 별관의 식당 등 흠잡을 데 없을 정도로 훌륭했다. 그러나 이곳을 이용할 수 있는 사람은 극히 일부분의 사람일 듯 싶다. 09:00시부터 17:00까지가 개관시간이고, 오늘도 학생 중심의 젊은이들밖에 없었다. 특히 지방 사람들에게는 전혀 인연이 없는 시설이다 ..  (147쪽)


 집으로 돌아옵니다. 한쪽에 쌓아 놓은 상자더미를 뒤적거립니다. 영화잡지를 오려서 겉에 붙여놓은 상자 하나를 꺼냅니다. 끈이 옥매듭으로 되어 있어 가위로 끊습니다. 안을 열어 유치원 때 받은 상패와 사진을 꺼내고, 거의 서른 해가 묵은 주판을 꺼냅니다. 어릴 적 형하고 놀던 탁구채와 탁구그물을 꺼냅니다. 탬버린을 꺼냅니다. 국민학교 6학년 때부터 고등학교 1학년 때까지 쓰던 스케치북을 꺼냅니다. 형이 고등학생 때 쓰던 학교 허리띠를 꺼냅니다. 42인치짜리라 그런지 참 깁니다. 고등학교 교련옷 바지가 한 벌 나옵니다. 우표 담은 상자가 하나 있고, 수류탄 모형이 하나 있습니다. 그리고 고등학생 때(1991) 동인천 대동화방에서 퍽 비싼 값을 치르고 샀던 그림물감이 하나 나오고, 국민학생 때 형한테 물려받아서 쓰던 벼루도 하나 나옵니다. 붓도 한 묶음 있으나 털이 다 빠져서 못 씁니다. 파레트도 있습니다만, 파레트를 마지막으로 쓰고 난 뒤 씻어 놓지 않아서 녹이 다 슬고 못 쓰겠군요. 그렇지만 그림물감 하나는 아직도 쓸 만합니다. 열일곱 해를 묵은 그림물감이란 말이지? 후후.





 (3) 한국말 배우는 일본 할아버지와 《마음의 조국, 한국》


 《마음의 조국, 한국》을 세 번째 읽고 덮습니다. 이제는 책꽂이에 고이 모셔 놓으려 합니다. 다카노 마사오 할아버지. 1939년에 만주에서 태어난 할아버지는 만주땅에서 아버지를 잃고(전쟁으로 죽음), 어머니하고는 일본으로 돌아오는 길에 헤어져서 끝내 못 만납니다. 어린 나이부터 홀몸이 되어 길거리에서 양아치로 살았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한길에서 굶은 데다가 꽁꽁 얼어붙어 죽을 뻔했는데, 넝마주이로 있던 재일조선인 한 분이 마사오 씨를 거두어들여서 살려냅니다. 이때 스무 살짜리 철부지 양아치 마사오는 처음으로 ‘세상에도 빛이 있음’을 깨달을 수 있었고, 자기 이름은 있어도 자기 이름을 한 글자도 쓸 줄 모르던 어두움에서 깨어납니다. 스무 살에 야간중학교에 들어가 스물네 살에 마치면서, 일본땅에서도 ‘글 한 줄 모르며 살아가는 아주머니와 아저씨와 할머니’가 몹시 많음을 처음 알게 됩니다.


.. 스무 살에 도쿄의 아라카와 구중 야간학급에 가입학. 일본인이 되기 위해 호적을 만들고 야간중학생이 됐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학교 책상에 앉았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차별없는 사회를 알았다. 일본에 헌법이 있다는 것을, 아동헌장이, 교육기본법이, 학교교육법이 있다는 것을 처음 알았다 …… 헌법에 보장되어 있는 ‘살 권리’와 ‘배울 권리’를 빼앗아 가는 놈들은 누구 하나 지탄받지 않고, 빼앗긴 우리가 왜 권리를 박탈당해야 하는가. 한 장의 종이쪼가리로 ..  (20∼21쪽)


 철부지 양아치한테 빛을 베풀어 준 넝마주이 할아버지는 어느 날 아침 싸늘한 주검이 됩니다. 공무원들은 넝마주이 할아버지 주검을 쓰레기 치우듯 갖다 버립니다. 젊은 마사오가 할 수 있던 일은 오로지 주먹을 부르르 떨고 이를 덜덜 갈기. 그렇지만 이때 일을 잊지 않습니다. 마음에 새깁니다.

 어느새 자신을 거두어 준 넝마주이 할아버지와 비슷한 나이가 된 마사오 씨. 자기 앞으로 남은 삶을 무엇을 생각하고 무엇을 하며 어떤 사람으로 보내야 하는가를 놓고 몹시 머리앓이를 합니다. 그러다가 한국에 가기로 합니다. 한국으로 가서 한국말을 배우기로 합니다.


.. “일본에서 제일 아름다운 곳은 어디입니까?”라고 흔히 질문을 받는다. 다른 나라 학생은 바로 자기 나라의 명소를 자랑스럽게 말한다. 나는 야간중학생들이 공부하는 모습이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말로 나타낼 수 없어 안타까운 마음에 도쿄의 ‘긴자’라고 말하는 자기 자신이 서글펐다 ..  (86쪽)


 1998년에 서울대학교 어학연구소와 봉천동 어머니학교에서 한글을 배웠습니다. 그리고는 거의 해마다 틈을 내어 한국에 찾아옵니다. 지난 2007년 5월에도 한국을 찾아왔습니다. 마사오 할아버지는 한국에 와도 경기도 광주 ‘나눔의 집’을 찾아가서 할머님들을 뵙습니다. 인사동 한쪽 귀퉁이에 자리를 마련해서 ‘인간선언’ 네 글자를 새긴 옷을 입고 글을 대자보 비슷하게 써붙이면서 당신이 쓴 책을 손수 팝니다. 책을 팔면서 한국사람들하고 한국말로 이야기를 나누려고 합니다. 젊은 사람한테는 젊은 넋이 무엇인가를 귀기울여 들으려고 하고, 나이든 사람한테는 나이든 사람 얼이 무엇인가를 귀담아서 들으려고 합니다.


.. 거리에서 익히는 말은 살아 있어 빛이 난다 ..  (209쪽)


 어쩌면 올해 5월에도 다시 한국을 찾아올는지 모릅니다. 벌써 4월에 한국을 찾아와서 길거리에서 한국을 느끼고 한국사람을 만나셨는지 모릅니다. 마사오 할아버지는 “거리에서 익히는 말은 살아 있어 빛이 난다”고 했는데, 올 2008년 한국사람들 말도 살아 있다고 느끼실까요. 당신한테 ‘마음 조국’인 한국은, 당신한테 무엇을 보여주거나 베풀어 주고 있는가요. (4341.4.28.달.ㅎㄲㅅㄱ)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행복한 사람, 타샤 튜더 타샤 튜더 캐주얼 에디션 2
타샤 튜더 지음, 공경희 옮김 / 윌북 / 2006년 8월
평점 :
구판절판



 이 책 하나 43 ― 할머니한테 듣는 ‘사람 사는’ 슬기
 : 타샤 튜더, 《행복한 사람, 타샤 튜더》



- 책이름 : 행복한 사람, 타샤 튜더
- 글 : 타샤 튜더
- 사진 : 리처드 브라운
- 옮긴이 : 공경희
- 펴낸곳 : 윌북(2006.8.20.)
- 책값 : 9800원



 (1) 비와 술과 골목가게


 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토요일 저녁입니다. 이제 막 여섯 시를 넘겼는데 날은 꽤 어둡습니다. 매지구름이 짙게 깔렸습니다. 이번 비는 지난주에 내린 비처럼 차갑지는 않습니다. 조금 쌀쌀하기는 하지만, 참말로 봄을 부르는 비로구나 싶습니다.

 봄내음 맡으면서 밟아 줄 흙이 없는 도시이지만, 나긋나긋한 바람을 느끼면서, 집에서 가까운 송현시장으로 걸어가 보면, 아주머니랑 할머니랑 차려놓은 고무다라이에는 풋풋한 봄나물이 가득가득. 찬거리로 무엇을 살까 망설이다가 나물다라이 앞에 멈추자, 나물집 아주머니는 “이거는 냉이고, 이거는 진달래고, 이거는 취나물이고 ……” 하면서 하나하나 알려줍니다. 이름을 알아보는 나물이 있지만, 언뜻선뜻 아리송한 나물이 있는데, ‘젊은이가 고것도 모르남?’ 하는 투는 조금도 없습니다. 마치 어린아이한테 가르쳐 주듯 차분하게 알려줍니다.


.. 1830년대의 미국인들은 젊은 조국에 대해 열등감을 지녔다. 그들은 유럽이 더 낫다고 생각했지만, 나라면 동의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들에게 주어진 것을 보면 안다. 이 순결한 나라를 상상해 보자. 얼마나 아름다웠을까. 밑에 덤불이 자라지 않는 숭고한 나무들, 순수한 강과 호수, 하지만 우리는 이 나라의 숲을 없애버렸다. 나무는 사람들의 적이었고, 땅을 개간하느라 거대한 뿌리와 밑동을 태우는 연기가 하늘에 자욱했다. 우리 국민은 받은 것의 가치를 제대로 몰랐다 ..  (130쪽)


 시장을 죽 둘러보니 봄나물을 이곳처럼 가지가지 늘어놓고 파는 데가 없습니다. 오늘은 여기서 사고, 앞으로도 이 집에 자주 와야겠다고 생각하면서 묻습니다. “어떻게 주세요?” “한 근에 1500원씩이요.” “음…….” 무슨 나물을 할까 망설입니다. 쑥을 할까? 냉이를? 홑잎나물을? 그래도 이때 아니면 먹기 힘든 나물을 먹자는 생각으로, 진달래 한 근과 냉이 한 근, 취 천 원어치를 삽니다. 취나물은 천 원어치만 사는 데에도 거의 한 근만큼 담아 줍니다. 가만히 보면, 한 근어치 산 다른 나물도 말이 한 근이지, 아주머니가 저울도 안 달고 담아 주는 품새가 한 근 반이나 두 근쯤 될 듯.


.. 20∼30년 간 기른 화초에서 새싹이 움트는 것을 보는 것이야말로 설레는 일이다 ..  (34쪽)


 집으로 돌아와서 옆지기하고 나물무침으로 밥을 먹습니다. 큰 그릇에 된장을 비벼서 나물밥을 먹습니다. 취나물은 물에 씻어서 그냥 먹습니다. 물에 씻을 때 보니, 나물집 아주머니가 먼저 손질을 깔끔하게 해 두셨습니다. 흙도 거의 남아 있지 않습니다.

 문득, 한 근 천오백 원은 무척 싼값이 아니냐 싶습니다. 봄철 아니면 맛볼 수 없는 나물을, 하나하나 손질해서 파는데, 아주머니 품삯을 헤아리면 다문 500원이라도 더 받아도 되지 않을까 싶은.


.. 어머니와 오빠는 내가 중요한 일에 무관심하자 몹시 실망했다. 그들이 중요하게 여기는 ‘여자 청년 연맹(상류 여성들의 사회봉사 단체)’과 ‘빈센트 클럽’을 심드렁해 했으니까. 보스턴 사교계에 데뷔하는 것도 그렇고. 난 오로지 정원에서 일하고 소젖을 짜고 싶어했다 ..  (42쪽)


 냠냠짭짭 맛나게 밥을 먹다가 또다른 생각이 듭니다. 곰곰이 생각하니, 아주머니는 저한테 내내 높임말을 쓰셨습니다. 아주머니 나이를 헤아리면 저는 아들 뻘일 텐데, 아들도 맏아들이 아니라 막내아들쯤 될 텐데, 어쩌면 손주를 본 할머니일지 모르는데.

 아주머니는 당신 나물집을 찾아오는 모든 손님한테 높임말을 쓰지 않았을까요. 또한, 나물이름을 제대로 모르는 젊은내기한테도 높임말로 차근차근 이야기해 주지 않았을까요. 그저 돈 몇 푼으로 사먹을 줄은 알아도 손수 들판이나 산으로 가서 뜯거나 캐어 먹을 줄 모르는 우리들 젊은내기를 안쓰럽게 생각할 수도 있을 터이나, 귀엽고 애틋하게 돌아보아주는 마음결은 아니었을까요.


.. 나는 개들을 제대로 먹이려고 무척 애를 쓴다. 깡통에 든 사료는 먹이지 않는다. 꿈에도 그런 생각은 해 본 적 없다! 녀석들에게 집에서 만든 수프나 염소 고기를 먹이고, 마늘을 듬뿍 먹게 한다 ..  (56쪽)


 우리 집 둘레에는 자그마한 구멍가게가 골목마다 많이 있습니다. 제가 알고 있는 우리 동네 구멍가게는 열한 군데? 아니 큰길 건너편까지 치면 열다섯? 열일곱? 스물? 걸음이 닿는 데까지 치면 서른이나 마흔 군데가 넘습니다. 전철역 둘레까지 치면 쉰 군데도 넘고 예순 군데, 아니 백 군데까지 헤일 수 있을 만큼 아주 많습니다.

 이 구멍가게는 말 그대로 ‘구멍 하나 낸 듯한’ 가게들입니다. 모르긴 몰라도, 당신님들 사는 집에서 방 한 칸을 터서 만든 구멍가게로 보입니다. 달삯 받고 내어주는 그런 가게가 아니라, 조그맣게 꾸리면서 골목집 동네사람을 마주하며 장사하는 가게입니다. 골목골목 살아가는 우리들이 어디 먼 데까지 가서 장만해 오기에는 멋쩍고 그때그때 써야 할 자잘한 물건을 갖추고 있는 가게입니다. 150원짜리 볼펜부터 귀후비개에 손톱깍이에 라면에 장기판과 바둑알에 100원짜리 소시지에 50원짜리 초콜릿과 알사탕을 갖춘 작은 가게.

 며칠 앞서였습니다. 우리 동네 골목가게 가운데 한 곳에 찾아갑니다. 저는 이곳이 그다지 내키지 않아 발길을 끊고 있는데, 옆지기가 가 보자고 합니다. 우리 집에서 가장 가까운 구멍가게거든요. 그러면 옆지기 구경삼아 가야지 하고 들어갑니다. 들어갔으니 무어라도 하나 들고 나와야겠다 싶어서, 저는 막걸리 한 병을 고르기로 합니다. 냉장고를 열고 막걸리 한 병을 꺼내는데 유통기한이 두 주 지났습니다. 헉, 두 주나 지난 막걸리……. 꺼낸 막걸리를 집어넣고 옆엣것을 봅니다. 한 주 지난 막걸리입니다. 다른 막걸리 유통기한도 비슷비슷.

 뒤에서 구멍가게 할머니가 부릅니다. “왜? 유통기한 지났어?” 옆에 있던 할아버지가 말을 거듭니다. “뭘, 젊은 사람들이 눈이 좋으니까 알아보지.” 그러나 할머니 할아버지 두 분 모두 ‘유통기한 지난 막걸리’를 치울 생각이 없어 보입니다. 유통기한이 두 주가 지난 막걸리라면 석 주 앞서 들여놓은 물건일 텐데, 맥주나 소주가 아닌 막걸리를 이렇게 두고 있다니. 한두 병도 아닌 모든 막걸리가.


.. 하지만 오래된 물건들을 지닌 것은 내가 소중히 다루기도 했고, 집안 어른들이 잘 간수한 덕분이다 … 나는 다림질, 세탁, 설거지, 요리 같은 집안일을 하는 게 좋다. 직업을 묻는 질문을 받으면 늘 가정주부라고 적는다. 찬탄할 만한 직업인데 왜들 유감으로 여기는지 모르겠다. 가정주부라서 무식한 게 아닌데. 잼을 저으면서도 셰익스피어를 읽을 수 있는 것을 … 물레질, 뜨개질, 직조를 하노라면 마음이 푸근해진다. 자급자족하고 싶고, 내가 쓰는 물건을 어떻게 만드는지 익히고 싶다 … 내 물레는 1700년대부터 집안에서 쓰던 것이라, 페달이 많이 닳아서 매끄럽다. 혹시 오래된 나무의 감촉을 좋아하지 않는지? 쇠처럼 차지 않고 손에 닿는 느낌이 부드럽다 … 시간을 들일 가치가 있는 일이다. 난 하루에 한 시간씩 천을 짠다. 이런 일은 조금씩 조금씩 해 나가는 것이 최선이다  … 우리는 선물을 다 직접 만들려고 애썼다. 뜨개질을 하고 종이상자를 꾸미고 나무를 깎아 엄마 거위와 아기 거위 네 마리를 만들었다 ..  (142∼158쪽)


 제가 단골로 가는 구멍가게, 가장 자주 찾아가는 구멍가게에는 냉장고에 술이 하나도 없는 날이 있습니다. 이곳 할머니와 할아버지는 늘 알맞춤하게 물건을 갖추어 놓기 때문에, 그날 따라 잘 팔려서 금세 동이 나는 물건이 있으면 더 팔지 못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이곳 할머니나 할아버지는 더 많은 돈을 벌고자 더 많은 물건을 들여놓지 않습니다. 물건이 떨어져서 없으면 “오늘은 다 팔렸네. 이거 미안해서 어쩌나?” 하면서 너털웃음을 짓습니다. 그러면 우리들은 다음 구멍가게로 갑니다. 다음 구멍가게에도 우리가 바라는 물건이 없으면 또다른 구멍가게로, 그 옆에 있는 구멍가게로, 또 그 구멍가게에서 스물이나 서른 걸음 떨어져 있는 구멍가게로 갑니다.

 이 가운데 어느 집은 밤늦도록 불을 켜 놓기도 하지만, 웬만한 집들은 저녁 열 시나 열한 시면 문을 닫습니다. 더 일찍 닫는 집도 있습니다. 그저 주어진 대로, 있는 그대로 동네사람을 만나고 동네장사를 합니다.


.. 바랄 나위 없이 삶이 만족스럽다. 개들, 염소들, 새들과 여기 사는 것 말고는 바라는 게 없다. 인생을 잘 살아왔다는 생각이 들지만 사람들에게 해 줄 이야기는 없다. 철학이 있다면, 헨리 데이빗 소로우의 말에 잘 표현되어 있다. ‘자신 있게 꿈을 향해 나아가고 상상해 온 삶을 살려고 노력하는 이라면, 일상 속에서 예상치 못한 성공을 만날 것이다.’ 그게 내 신조다. 정말 맞는 말이다. 내 삶 전체가 바로 그런 것을 ..  (174쪽)


 어제는, 단골 구멍가게 할배 할매가 저녁을 자시고 있더군요. 집에 곁달린 구멍가게에 밥상을 차려놓고 두 분이 마주앉아서 저녁을 자시더군요. 그래서, 한 말씀 여쭈었습니다. “아이고, 저녁 드시는데, 사진 한 장 찍어야겠네요!”


 (2) 몸 냄새


 오늘은 조금 나아졌는데, 어제까지만 해도 우리 집과 도서관을 잇는 계단에 담배 연기 자욱하고 냄새가 어마어마했습니다. 도서관은 3층에 있고, 우리 집은 1957년에 지은 집이라 그때 문화를 보여주듯이 계단이 참 많습니다. 올라오는 계단짬에는 언제나 담배꽁초가 여기저기.

 아래층에서 일하는 학습지 도매상 아저씨들이 담배를 태운 뒤 계단에 그냥 버려 놓습니다. 이걸 어찌할까 어쩌면 좋나 한참 생각한 끝에, 빈 깡통 하나 놓으면 될까 싶어서, 큼직한 참치깡통 하나를 놓았습니다. 계단짬에 버려진 담배꽁초는 비질을 하여 깡통에 쓸어 넣습니다.

 이렇게 하니 아래층 일꾼들이 계단짬에 꽁초 버리는 일이 줄어듭니다. 그래도 버리는 사람이 있습니다만, 담배를 태울 때 깡통 옆에서 태우곤 합니다. 이웃한 다른 가게 일꾼도 우리 계단으로 놀러와서 담배를 태웁니다. 아마, 당신네들 일하는 가게 임자가 담배 태우는 모습을 싫어하는가 봐요.


.. 저녁에 염소 우리에 내려가다가 날씨가 추워지리란 걸 깨달았다. 맨발로 걸으면, 땅의 냉기가 느껴져 다음날 날씨를 짐작할 수 있다 ..  (25쪽)


 그런데 말이지요, 어제 아침에, 이 담배깡통에 불이 났습니다. 갑자기 웬 연기가 모락모락 피어오르나 해서 들여다보니까, 누군가 불을 제대로 안 끄고 깡통에 넣어서, 그 안에 있던 종이컵이며 종이붙이(담배 태우는 이들이 버린 쓰레기)에 불이 옮겨 붙었더군요.

 콜록콜록 재채기를 하면서 물을 부어서 불을 끕니다. 그러는 사이 담배 냄새가 제 몸에 배어듭니다. 몇 초 안 되는 짧은 동안임에도 옷이며 몸이며 온통 담배 냄새가 …….


.. 내 삽화를 본 사람들은 모두 ‘아, 본인의 창의력에 흠뻑 사로잡혀 계시는군요’라고 말한다. 말도 안 되는 소리. 난 상업적인 화가고, 쭉 책 작업을 한 것은 먹고살기 위해서였다. 내 집에 늑대가 얼씬대지 못하게 하고, 구근도 넉넉히 사기 위해서! ..  (37쪽)


 계단가 창문을 활짝 열고 여러 시간 있으나 냄새가 안 빠집니다. 오늘까지도 냄새는 다 빠지지 않습니다. 하긴, 불타며 나던 냄새가 빠진다 해도 새로새로 담배를 피우실 테니, 새로운 냄새가 자꾸자꾸 올라올 테지요.

 아이고, 담배 냄새가 이리도 모진지, 이리도 오래 가는지, 이리도 안 빠지고 남는지 이번에 처음 압니다.


.. 난 항상 삽화의 가장자리에 나뭇가지나 리본, 꽃을 그린다. 왜 그런 결정을 내렸는지는 나도 모르겠다. 가장자리를 꾸미지 않은 적도 없다. 사람들은 가장자리 그림 속에 숨어 있는 것들을 찾아내기를 즐긴다. 사람들이 내 그림을 좋아하는 것은 상상이 아닌 현실에서 나오기 때문일 터다. 젖소의 어느 쪽에서 젖이 나오는지, 말을 탈 때 어느 쪽으로 올라타야 하는지, 어떻게 건초더미를 만드는지 난 훤히 알고 있다. 그러니 적당히 짐작으로 그리지 않는다. 내 그림 속에 나오는 사람들은 내 손자들, 친구들이고, 주변 환경은 실제 내 환경이다. 꽃들은 내 정원이나 주변 들판에서 자라는 것들이다 ..  (53쪽)


 그러나, 우리 몸에 배어 있는 냄새는 담배 냄새만이 아니라고 느낍니다. 술 좋아하는 사람 몸에는 술 냄새가 배어 있습니다. 책방이나 도서관에서 일하는 사람 몸에는 책에서 나는 종이 냄새가 배어 있습니다. 몸을 써서 일하는 사람과 운동선수한테는 땀 냄새가 배어 있습니다. 그러고 보니까, 제가 충주에서 살던 때, 자전거를 타고 서울 나들이를 할라치면, 적잖은 사람들이 제 옆에 앉거나 서기를 싫어했어요. 몸에서 땀 냄새가 너무 난다고. 하루 대여섯 시간 넘게 자전거를 타는 사람 몸은 아무리 씻고 씻어도 땀내가 빠지지 않습니다. 땀내를 자연스럽게 여기거나 좋아한다면 모르되, 요즘 사람들은 몸에서 땀내가 나도록 몸을 쓰는 일이 드물다 보니까, 이 냄새가 더없이 고약하거나 괴롭다고 느낄밖에 없구나 싶어요. 여름에는 춥게 살고 겨울에는 덥게 살잖아요. 자가용뿐 아니라 버스나 전철도 에어컨 바람이 얼마나 빵빵한가요. 요즘 도시사람한테는 땀흘릴 겨를이 없어요.


.. 정원을 가꾸면 헤아릴 수 없는 보상이 쏟아진다. 다이어트를 할 필요도 없다. 결혼할 때 입었던 웨딩드레스가 아직도 맞고, 턱걸이도 할 수 있다. 평생 우울하거나 두통을 앓아 본 적도 없다 ..  (68쪽)


 시골에서 농사짓는 사람들한테는 흙냄새와 거름냄새, 사무실에서 펜대 잡고 일하는 사람한테는 사무실 냄새와 펜 냄새, 공장에서 일하는 사람한테는 기름 냄새가 납니다. 누구나 자기가 일하는 곳 냄새를 몸에 풍깁니다. 누구든 자기가 몸담은 곳 냄새가 몸에 스밉니다. 아이들이 부모를 따라하고 부모 삶을 몸에 받아들이듯, 우리들 어른도 우리가 깃든 곳 문화와 느낌을 고스란히 받아들입니다.

 우리가 옳은 마음과 생각으로 옳은 일을 한다면, 우리가 하는 일은 저절로 옳고 아름다운 쪽으로 자리잡습니다. 우리가 얄궂은 마음과 생각으로 비뚤어진 일을 한다면, 우리가 하는 일은 어쩔 수 없이 비틀리고 뒤틀리고 구린내를 풍깁니다.

 우리 생각에 따라, 우리 마음 가는 데에 따라, 우리 몸이 움직이는 데에 따라, 우리가 깃든 곳에서 어떤 모습으로 살아가느냐에 따라서 우리 냄새는 바뀝니다. 꼭 시골에서 산다고 하여 자연스러운 냄새가 가득하지 않아요. 도시에서 사는 사람이라 해서 억지스럽거나 딱딱한 잿빛 냄새를 풍기지 않습니다.


.. 가을마다 배가 열리면 나는 병조림을 만든다. 시장에서 산 것보다 훨씬 맛이 좋다 ..  (115쪽)


 저는 충주 산골짝에 살 때부터 고무신을 신었습니다만, 도시인 인천에 와서도 고무신을 신습니다. 무엇보다도 고무신 값이 쌉니다. 한 켤레에 3000원이거든요. 그러나 값보다 좋은 대목은, 고무신을 신으면 우리가 살아가는 땅을 한결 가까이에서 느낄 수 있어요. 바닥이 아주 얇으니, 제 발이 밟는 대로 땅 느낌을 받아들입니다. 시골에서는 흙 느낌을 받아들이고 도시에서는 아스팔트나 시멘트 느낌을 받아들입니다. 이러는 동안 제 몸부터 흙을 밟을 때 제 몸이 얼마나 좋아하는지 알고, 시멘트나 아스팔트를 밟을 때 제 몸이 얼마나 싫어하는지 느낍니다. 나중에 아이를 낳아서 기를 때가 되면, 이 느낌이 고스란히 제 몸에 남아 있을 테니, 아이한테도 무엇을 가르치면 좋고, 무엇을 보여주면 좋으며, 무엇을 함께하며 살아야 하느냐 하는 생각을 추스를 수 있으리라 봅니다.


 (3) 사람이 살아가는 뿌리를 밝히는 《행복한 사람, 타샤 튜더》


 생각해 보면, 우리들은 우리 옛사람한테 물려받은 우리 나라 우리 땅 우리 바다 우리 하늘 우리 산과 들 우리 논밭이 얼마나 아름답고 훌륭한지를 제대로 깨닫지 못했습니다. 입으로는 ‘아름다운 삼천리 금수강산’을 읊을 줄 알지만, 몸으로는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아름다운 대한민국’이라고 느낀다면, 시화호와 새만금을 어찌 ‘죽음이 떠도는 바다’로 만들 생각을 하겠습니다. 원자력발전소를 왜 이리 자꾸 늘리려고만 하겠습니까. 전기를 덜 쓰면서 발전소를 줄일 수 있는 삶으로 바꿔야지요. 찻길이 모자라다고 외치지 말고, 찻길을 줄여서 우리 삶터를 고이 지켜야지요. 자동차를 만들어 팔아야 나라살림이 북돋울까요. 자동차 만드느라 더러워지는 이 나라 삶터는 얼마나 큰돈을 들여야 되살릴 수 있는데요. 아니, 더러워지고 무너진 자연 삶터는 돈으로 돌이킬 수 없습니다.


.. 우리가 바라는 것은 온전히 마음에 달려 있다. 난 행복이란 마음에 달렸다고 생각한다. 이곳의 모든 것은 내게 만족감을 안겨 준다. 내 가정, 내 정원, 내 동물들, 날씨, 버몬트주 할 것 없이 모두 ..  (22쪽)


 스스로 ‘행복한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타샤 튜더 할머니 책을 봅니다. 사진이 많이 들어가서도 그렇지만, 금세 읽고 한 번 더 읽고, 두 번 다시 봅니다. 며칠 사이에 여러 번 다시 봅니다. 그러고도 아쉬워서 다시 한 번 더듬은 뒤, 이제야 책꽂이에 살며시 얹어놓습니다.


.. 조경 계획 같은 것은 없다. 난 계획해서 화초를 심지 않고, 되는대로 쑥쑥 심는다. 많은 꽃이 뒤섞여 자라는 게 좋다 … 뱀의 얼굴을 찬찬히 본 적이 있는지? 얼마나 낙천적으로 생겼는지 모른다. 늘 배시시 웃고 있다 ..  (86쪽)


 타샤 튜더 할머님 이야기를 들어 보면, 당신은 ‘먹고살아야’ 하기 때문에, 자기가 살고픈 대로 자기 삶을 꾸리려고 하다 보면, 어느 누구도 돈을 갖다 앵기지 않기 때문에 스스로 일해서 먹고살아야 하니 그림을 그릴밖에 없었다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렇습니다. 할머님은 먹고살려고 그림을 그렸습니다. 그런데요, 당신이 남긴 이 책 《행복한 사람, 타샤 투더》를 읽어 보니까, 그저 당신 입만 채우는 먹고살기가 아니라, ‘내가 옳다고 믿는 삶을 꾸려 나가는 길’ 가운데 하나로, ‘당신이 할 수 있는 가장 멋지고 훌륭한 일’을 하면서 살았습니다.

 밥은 밥이고 삶은 삶이면서 꿈은 꿈일까요. 밥을 놓을 수 없는 가운데 삶 한 자락을 다부지게 붙잡은 타샤 투더 할머님이 오랜 세월에 걸쳐서 품어 온 당신 꿈이 소록소록 묻어난 《행복한 사람, 타샤 투더》를 읽으면서, 또 책을 덮으면서, 할머님 목소리가 조곤조곤 들려옵니다. ‘네가 아무리 기쁘게 살더라도 그 기쁨이 너한테만 기쁨이라면 너한테도 기쁨이 아닐 수 있다, 네가 아무리 슬프게 살더라도 그 슬픔을 이웃과 나누면서 살 수 있다면 너한테는 슬픔이 아닐 수 있다’는 목소리가. (4341.3.29.흙.ㅎㄲㅅㄱ)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