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파트에 미치다 - 현대한국의 주거사회학
전상인 지음 / 이숲 / 2009년 2월
평점 :
절판




 아파트에 미친 한국? 아파트에 길들고 매인 한국!
 [잠깐 읽기 28] 전상인, 《아파트에 미치다》


- 책이름 : 아파트에 미치다
- 글 : 전상인
- 펴낸곳 : 이숲 (2009.2.25.)
- 책값 : 12000원



 (1) 집, 삶, 돈


 한국땅에서 가장 큰 도시인 서울은 ‘걷는’ 도시였습니다. 나라안에서 지하철과 버스가 가장 촘촘히 있어 어디를 가든 엉덩이 느긋하게 앉히며 다닐 수 있는 도시이기도 했지만, 산동네 비탈길까지 마을버스가 탈탈거리며 오르는 도시이기도 했지만, 두 다리로 걷지 않으면 다닐 수 없는 골목이 곳곳에 많은 도시였습니다.

 서양과 일본이 이 나라로 쳐들어오며 인천과 서울 사이에 철길을 놓기는 했습니다만, 철길을 타고 다닌 사람보다는 걸어서 인천과 서울을 오간 사람이 많았습니다. 그리고, 걷는 시간을 아깝다고 여기지 않았습니다. 버거운 짐바리를 이고 지고 안고 메고 하면서도 한나절이든 하루든 들여 걷는 일을 마다하지 않았습니다. 넓디넓은 서울이라지만, 동쪽 끝에서 서쪽 끝, 북쪽 끝에서 남쪽 끝까지 걸어서 오가는 데에는 네 시간이면 넉넉합니다. 버스와 지하철보다 느리다 하겠으나, 사람이 걷는 두 다리는 온 동네를 두루 거치며 몸으로 느끼고 눈으로 보고 코로 맡게 했습니다. 다 다른 동네에서 다 다르게 사는 사람을 마주치며 이렇게 다르구나 생각하는 한편, 모두 똑같은 사람이기도 함을 헤아리도록 했습니다.

 이제 서울은 ‘걷는’ 도시가 아닙니다. ‘타는’ 도시입니다. 탈거리 가운데에서도 자전거를 타는 도시가 아니라 자가용을 타는 도시입니다. 한 집에 두 대씩 굴리는 자가용은 흔한 일이요, 자가용 없는 집이 없다고 할 만한 도시입니다. 그러나 서울만 이러하다고 느끼지 않습니다. 다른 도시도 비슷하며, 다른 도시도 똑같이 ‘타는’ 도시가 되었으며, 시골 또한 ‘걷는’ 시골이 아닌 ‘타는’ 시골로 탈바꿈했습니다.


.. 아파트 위주의 주거문화가 보편화되는 과정에서 주택의 가치는 쉽게 계량화되었고, 그것이 재산증식 수단으로서의 주택수요와 겹치면서 주택의 과소비 현상이 만연하게 되었다. 그 결과, 우리 나라의 아파트 가격은 한마디로 ‘미쳤다’고 표현할 수밖에 없을 정도로 비싸졌다. 지금 현재 우리 나라는 한 개인이 살아가는 과정에서 자신의 힘으로, 그리고 정상적인 방법으로 주거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사실상 불가능해진 상태다. 자산이 아닌 소득을 통해 주택을 소유하는 일이 보통사람들에 무망해진 것이다. 게다가 주택 임대시장마저 우리 나라는 외국에서 찾아보기 힘든 특수성을 갖고 있다. 바로 전세 제도다. 그리하여 임대주택에 입주하는 것조차 자력으로는 버거운 곳이 바로 우리 나라인 것이다 … 2008년 11월 현재 서울시 전역에 걸쳐 시가 1억 원 미만의 아파트 가구 수는 겨우 592개만 남았다고 한다. 이른바 저가 아파트 가격이 뛰기 시작했던 2006년 9월 대비, 98.8%가 감소한 것이다 … 강북과 강남을 불문하고 이젠 고가의 아파트만 즐비한 세상이 되고 있는 것이다 ..  (178∼181쪽)
 





 서울 나들이를 할 때면 예전에 살던 셋집 둘레를 스쳐 지나가기도 합니다. 아직 그 셋집이 그대로 있는가 궁금하여 슬그머니 길을 에둘러 가노라면, 높고 빽빽한 빌라들 사이에 옹크리고 있는 옛날 적산가옥 나무집이 빠꼼히 들여다보입니다. 용하다 싶으면서 반가워, 고개를 꾸벅 숙여 인사를 한 다음 지나가곤 합니다. 그러나 앞으로 몇 해 지나지 않아 종로구 평동 둘레는 광화문 둘레와 마찬가지로 비죽비죽 하늘을 찌르는 아파트로 바뀌어 가리라 봅니다.

 지난날 신문을 돌리며 살던 이문동과 회기동과 석관동 둘레를 거닐기도 하지만, 넓지 않은 골목을 쉴 새 없이 싱싱 내달리는 자가용들이 찾아드는 새 아파트 숲을 올려다보면서, 이곳도 머잖아 아파트 아닌 데를 찾아볼 길이 없게 될 테며, 동네 문화며 자취며 깡그리 바뀌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러다 문득, 새로 지어진 이 아파트 숲에 살고 있는 사람은 ‘집에 사는’ 사람이 아니라, ‘아파트에 사는’ 사람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이문동에 사는 사람이 아니라 ‘무슨무슨 아파트’에 사는 사람이라는 생각입니다. 대방동에 사는 사람이 아니라 ‘어느어느 아파트’에 사는 사람이라는 생각입니다. 등촌동이나 화곡동이나 신도림동이나 성수동이나 한강로나 구산동이나 삼양동에 사는 사람이 아니라 ‘이런저런 아파트’에 사는 사람이라는 생각입니다. 자기 몸을 누이는 동네다운 다름을 느끼거나 나누면서 사는 사람이 아닌, ‘어떠한 아파트 이름’에 따라서 살고 있는 사람일 뿐이라는 생각입니다.

 서울 아닌 데에 사는 사람이라고 다르지 않다고 느낍니다. 어떠한 아파트 이름을 내거는 데에 보금자리를 틀어, 어떠한 마트 이름을 내거는 데에서 물건과 먹을거리를 장만하며, 어떠한 이름을 내거는 일터에서 숫자로만 셈해지는 돈벌이에 모든 시간을 바치고 있습니다. 아이들이 다니는 학교는 한 사람으로서 오롯이 서고자 하는 됨됨이를 익히는 터전이 아닙니다. 어떠한 이름이 내걸리는 대학교 졸업장을 따기까지 경쟁을 익히는 곳, 아니 경쟁에 길들고 물드는 곳입니다. 좀더 빠르고 좀더 세고 좀더 흔들림없는 시험성적을 정년퇴직하는 그날까지 고이 이어나가도록 다그쳐지는 훈련마당입니다.


.. 대한주택공사는 2009년까지 경상북도 울릉군 울릉읍 저동리에 처음으로 국민임대아파트 71채를 공급할 예정이라고 한다. 이는 ‘독도 지키기’ 운동의 일환이라고 주장되는데, ‘아파트의 나라’ 대한민국에서 아파트는 마치 주권의 상징이라도 되는 모양이다 … 동경올림픽을 주최하면서 일인당 국민소득이 4000달러 정도에 이르렀던 1964년경 일본의 경우, 가구당 주거공간 평균 면적은 12∼15평 내외였다 … 우리 나라에서 아파트는 높은 지위를 과시하는 상징이기에 그것의 외형과 외관은 각별히 중요하다. 그리하여 무엇보다도 부자가 사는 고급 아파트일수록 눈에 잘 띄는 것이 필수적이다 … 그들의 지위 과시욕망은 스스로 세상을 내려다보고 싶게 하고, 남들로 하여금 자신을 높이 올려다보고 싶게 만드는 것이다. 사는 사람들의 신분에 걸맞게 아파트는 일단 높을수록 좋은 것이 우리 나라의 현실이다 … 중산층 혹은 상류층이 주로 입주한 전자의 경우에는 낯선 외국어 사용이나 다언어 혼용이 많고, 아파트 이외의 특별한 범주 이름을 사용하는 일이 흔하다. 예컨대 왕족이나 귀족 거주지라는 의미의 팰리스, 하임, 스위트, 카운티, 캐슬 등을 쓰는 일이 많다 ..  (24, 70, 75∼76, 80쪽)


 아이나 어른이나 고마운 밥 한 그릇을 받아들지 않습니다. 배를 채우는, 아니 혀를 즐겁게 하는 밥술을 뜰 뿐입니다. 아이나 어른이나 마음에 반가운 책 하나를 펼쳐들지 않습니다. 마음밭을 따뜻하게 덥히는 책이 아닌, 지식을 늘리고 처세를 잘하여 돈 잘 벌게 되는 길을 찾는 부적을 갖출 뿐입니다. 자동차를 몰아도, 어느 곳으로 즐겁게 간다거나 짐을 거뜬히 나른다든가 하는 데에 쓰지 않습니다. 제 몸값을 높이며 남 앞에서 뽐내는 치레일 뿐입니다.

 환경 문제뿐 아니라 1회용품 문제이든 전기와 물 문제이든 석유 문제이든, 온갖 사회 잘잘못 이야기가 나돌아도 어느 한 가지 달라지지 않습니다. 어느 한 가지 우리 스스로 고치지 않습니다. 어느 한 가지 기꺼이 소매 걷어붙이고 나서게 되는 일이란 없습니다.

 중학교에 들어간 처남 시간표를 들여다보니, 도덕이 한 주에 두 시간 있는 ‘주 5일 수업 시간표’인데, ‘미술’과 ‘역사’ 수업은 보이지 않습니다. 모두 아홉 반인 다른 반 시간표를 죽 훑으니 ‘미술’ 수업이 있는 반에는 ‘음악’ 수업이 없습니다. 그래도 ‘체육’ 수업은 모두한테 있습니다. 그러면서 ‘기가’와 ‘창재’라는 이름이 붙은 수업이 있고 ‘컴퓨터’가 한 주에 두 번씩 들어 있습니다. 거의 모든 수업은 ‘영어ㆍ수학ㆍ국어’에 몰립니다. 하루에 여섯∼일곱 시간만 수업을 한다니, 그지없이 꿈만 같은 시간표인데(저는 하루 여덟 시간 정규수업으로 빡빡히 채운 다음, 새벽과 저녁으로 보충수업과 자율학습이 가득 찼었기 때문입니다), 과목 숫자는 줄었으되 이러한 수업이 중학교 다니는 아이들한테 어떤 삶과 생각과 슬기를 가꾸게 될는지 궁금해집니다. 남은 시간은 스스로 알아서 학원에 가라는 뜻인지, 날마다 이만큼만 학교에서 배우면 된다는 뜻인지, 앞으로 사회살이를 할 때에 이만큼 익히면 넉넉하다는 뜻인지, 실습이나 체험이란 도무지 보이지 않는 우리네 시간표는 언제까지나 그 모습 그대로 이어가야 한다는 뜻인지, 아리송하면서 적잖이 슬픕니다. 배우는 아이들만큼이나 가르치는 어른들은 학교에서 어떤 보람과 즐거움을 안고 있을지 근심과 걱정입니다.


.. 서구에서처럼 국가의 재정적 지원에 의한 사회주택 혹은 영구적 임대주택 공급이 우리 나라에서는 어렵다고 판단한 정부는, 국가가 기업적 방식으로 주택건설 사업을 추진하기 위한 목적으로 대한주택공사를 설립했다. 이는 우리 나라의 주택정책이 사회복지 차원이 아니라, 건설사업의 성격으로 시작되었음을 의미한다 … 서울과 같은 거대도시의 아파트만 놓고 1인당 주거면적을 따져 보면, 우리 나라가 결코 좁고 불편하게 사는 나라가 아닐 것이다. 주거문화의 질적 향상은 물론 필요하다. 하지만 그것을 주거면적의 양적 확대에서 주로 찾는 일은 토건국가와 건설자본의 입장에 치우친 측면이 있다 ..  (38, 71쪽)


 아침 일찍 똥을 눈 아기를 씻기고, 빨래를 하고, 옆지기와 처제와 제가 먹을 카레를 끓이고, 아기 손톱을 깎고, 아기 잠든 옆자리를 지키면서, 슬슬 인천집으로 돌아갈 준비를 합니다. 짐을 꾸려 끙차 하고 가방을 메고 버스정류장으로 나아가서 전철역까지 가는 버스를 잡아탄 다음, 전철을 타고 멀디멀리 돌아가는 길에서 또 책을 바지런히 읽겠구나 싶습니다. 버스 타는 데까지 가는 길은 걸어가는데 거님길 한복판에 나무가 심겨져 있어 혼자 걸어도 요리조리 비켜 걸어야 합니다. 큰길로 나오면 거님길 절반은 자전거길로 나뉘어 있으나, 가게마다 차를 버젓이 세워 놓고 있습니다. 환경을 걱정한다는 친환경엘피지 버스가 나날이 늘어나고 있는 모습을 보면서, 그처럼 환경을 걱정한다면 모든 버스를 바꾸어야 하지 않느냐 생각하게 되지만, 갈 길이 멀고 고단하니 잠깐 생각했다가 잊습니다. 전철로 서울을 꼭 거쳐서 빙 도는 길이 아닌, 자전거로 가까이 달릴 수 있는 길이면 얼마나 좋으랴 싶지만, 자가용 아니면 인천과 일산을 짧게 오갈 수 없는데, 전철 빈자리 얻어 앉아 하품을 하다가 잠들면 이런저런 생각은 이내 잊힙니다.

 밟고 치고 미는 바쁜 사람들 가득한 전철 틈바구니에서 벗어나면 후유 하고 한숨을 돌리면서, 왜 그렇게들 바쁜 사람이 되었는지 슬픈 마음이 일어나지만, 내 한몸 건사하기에도 고단한데 그런 데까지 더 생각할 힘이 어디 있느냐 싶어 곧바로 털어냅니다. 도원역이나 동인천역에서 내려 삼십 분이나 한 시간쯤 골목을 휘 돌아 사진 몇 장 찍고 집으로 돌아오면 몸은 파김치가 되어 가방을 내려놓고 옷가지를 벗으면 바닥에 풀썩 주저앉게 됩니다. 따로 더 무엇을 헤아리거나 되돌아볼 마음이 들지 않습니다. 손발을 씻고 자리에 드러누워 천장을 바라보면 스르르 눈이 감기고 어느새 깊은 잠에 빠져드는데, 깜짝 놀라듯 퍼뜩 깨어 일어나 앉아 책을 잠깐 만지작거리다가는, 아무리 무쇠 같은 사람이라도 지치고 힘들고 고달프면 책이고 뭐고 생각이고 뭐고 착함이고 뭐고 빛줄기고 뭐고 어디에 있겠느냐 싶어집니다.

 다른 사람들은, 또 내 동무들은, 아무 생각 없이 텔레비전 단추를 누르고, 언제나처럼 옷가지는 세탁기에 던져 넣으며, 저절로 냉장고 문으로 손이 가다가는, 손전화 단추 빅빅 누르면서 또 하루가 지나가겠구나 싶습니다.


.. 골목에서는 도시문화의 대표적인 풍경인 ‘걷기’가 만보나 산보의 형태로 활발했지만, 아파트 숲과 엘리베이터 안에서는 그러한 행위가 통째 사라져 버렸다. 대신 간혹 눈에 띄는 것은 운동을 목적으로 하는 ‘뛰기’ 혹은 속보 정도다 … 닭장 같은 아파트라고 해서 사람들이 모래알처럼 흩어져 사는 것은 아니다. 아파트촌은 나름대로 삶의 공동체이다 … 예컨대 국내 최고가 아파트 가운데 하나인 타워팰리스에서는 입주민들 간의 인적 네트워크가 활발하다고 한다. 가장 활성화된 것이 각종 동호회 활동이라고 하는데, 골프 모임만 해도 30개 이상이며, 외국대학을 포함한 대학동문회도 자주 열린다고 한다 ..  (90, 102∼103쪽)
 





 모두들 똑같아지는 삶이 아닌가 싶습니다. 모두들 똑같은 곳(병원)에서 태어나 똑같은 먹을거리(가루젖)를 먹고, 똑같은 곳(학교)에서 똑같은 지식을 머리에 집어넣으며 젊고 푸른 나날을 보내는데, 사내아이면 군대에서 사람 죽이는 재주를 배우게 되고, 공부를 잘하건 못하건 대학교 들어가도록 채근을 받으며 겨우겨우 대학생이 되고, 대학생인 동안과 대학생을 마치고 나서도 영어 공부를 학원 다니며 하고, 회사에 들어가면 연봉과 혼인과 아이 낳아 기르는 데로 생각이 뻗으며 아주 자연스럽게 아파트 한 채 얻어 살게 되는 흐름으로 녹아들리라 싶습니다. 다 다른 사람이지만 다 같은 삶이고, 다 다른 목숨이었으나 다 같은 아파트에서 다 같은 지식을 안고 다 같은 차를 몰고 다 같은 월급쟁이로 꾸리는 삶이 됩니다. 보람? 즐거움? 기쁨? 아름다움? 거룩함? 착함? 글쎄……. 자연? 나무? 흙? 풀? 논밭? 바다? 산들? 구름? 무지개? 글쎄……. 돈과 함께 세상에 나와, 돈으로 세상을 누린 다음, 돈과 함께 세상을 떠나는 우리 모두가 되어 있지 않은가 싶습니다.


 (2) 엉뚱한 마무리로 이끌며 스스로 무너진 책


 “불과 한 세기 동안 한국사회가 식민지와 건국, 전쟁, 산업화, 독재와 민주화, 지구화 등을 연이어 숨차게 경험하다 보니, 세상을 움직이는 것은 무언가 거시적인 과정, 어딘가 구조적인 요인, 아니면 모종의 집단적인 동력이라고 생각하는 데 시나브로 익숙해져 왔는지 모른다. 그리하여 소소한 개인의 일상이나 주변의 생활세계에 대해서는 눈길이 별로 가지 않았을(머리말)” 것이라면서, 우리 둘레에서 가장 흔하게 보고 부대끼는 ‘아파트’ 이야기를 다루는 《아파트에 미치다》를 읽습니다. 글쓴이는 오늘날 사회학자들이 “한국의 사회과학을 상당히 재미없게 만들었다(머리말)”고 이야기하면서, 당신이 내는 이 책은 ‘재미있게’ 읽을 수 있도록 썼다고 밝힙니다. 책을 덮고 나서 곰곰이 되짚고 되읽는 동안, 글쓴이 말마따나 여느 인문사회과학 책하고 견주면 ‘가볍게 쓴’ 글투임이 틀림없다고 느낍니다. 따분하거나 재미없거나 지루하게 느껴지지 않도록 무척 마음을 쏟았음을 느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네 인문사회과학 책들이 가볍게 쓰지 않아서 재미가 없었을는지, 아니면 ‘너무 큰 이야기만 해대’어 재미가 없었을는지 아리송합니다. 가볍게 쓰지 못한 탓도 있으며, ‘살아가는 자잘한 이야기’를 헤아리지 못하는 아쉬움은 어디에나 있기는 하지만, 정작 아쉽고 안타까운 대목은 ‘왜 그런 크고작은 이야기’를 하려 했는지가 아닌가 싶습니다. ‘그런 크고작은 이야기를 하면서 어떻게 하겠다’는 다짐을 제대로 밝히지 못한 탓이 아닌가 싶습니다. ‘그런 크고작은 이야기를 머리속 생각을 갈무리한 책으로만 엮어내고, 정작 자기 몸뚱이를 움직여 세상을 차근차근 고쳐 나가려고 하지’ 못하는 지식그릇에 머무는 데에 있지 않느냐 싶습니다. 이를테면, 사회 얼거리를 흔드는 잘잘못을 비판한다고 할 때에, 남들한테 참거짓을 들려주기 앞서, 자기 스스로 참을 북돋우고 거짓을 다스리려고 무엇을 하고 있는지를 보여주지 못하는 한편, 참을 북돋우려고 하는 일이 없는데다가 거짓을 몰아내려 애쓰지 않고 이론으로만 길게 떠든다고 하면 부질없는 산울림으로 그치고 맙니다.

 이런 테두리에서, 《아파트에 미치다》라고 하는 인문학 책 하나는 얼마나 ‘자기 실천’이 뒤따르는 책이 되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겉으로 드러나는 모습을 훑는 눈썰미를 넘어서는 몸짓이, 속으로 깊고 넓게 파헤치려는 몸부림이, 얼마나 차곡차곡 나타나고 알뜰살뜰 보여지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 냉장고나 텔레비전은 가족의 일부가 되는 데 비해 진짜 ‘이웃’은 ‘사촌’처럼 가까워지지 않는 것이 바로 아파트 거주문화의 단면인 것이다. 요컨대 아파트는 본질적으로 이웃의 문제와 사회적 관심사로부터 멀어지게 하는 주거형태다 … 신식 문화주택에 입주한 한국인 샐러리맨 혹은 회사원들은 그것이 제공하는 가족주의에 안주하고 탐닉하는 태도를 보였다. 말하자면, 그들은 그 시대가 일제 식민지 치하라는 사실을 망각한 채, ‘부르주아 프라이버시’라는 가상공간을 만들고 피아노나 축음기 등의 문화적 상징을 소유함으로써, 상층계급에 진입하는 행복한 환상에 사로잡혔던 것이다 … 아파트에서 사람들은 문화생활을 하거나 문화생활을 한다고 믿음으로써 자신을 중산층으로 여기는 경향이 있다 ..  (126, 132∼133쪽)


 글쓴이 전상인 님은, 몇 해 앞서 프랑스 학자가 내놓은 《아파트 공화국》(발레리 줄레조,2007)을 ‘그리 잘 쓴 책’이 아니라고 꾸짖습니다. 여러모로 살피면 《아파트 공화국》은 아쉬움이 많이 남는 책입니다. 그러면, 아쉬움이 남는다는 《아파트 공화국》에서 밝히지 못한 이야기를, 한국 학자 전상인 님은 어떠한 눈길과 눈높이와 눈매로 다루었을까요. 아파트란 한국땅에서 어떠한 곳이며, 아파트 나라가 되어 버린 한국은 얼마나 아름다운 나라이며, 아파트에서 살아가는 수많은 이 나라 사람들은 얼마나 올바르고 슬기롭게 살아간다고 할 수 있는가요? 자그마한 책 《아파트에 미치다》에서는, 한국땅과 한국사람과 한국정부가 어떻게 아파트에 ‘미치게’ 되었고, 이 ‘미친’ 흐름이 얼마나 옳거나 그르며, 이런 흐름이 앞으로 어떻게 나아가야 하는지를 어느 자리에서 보여줄까요?

 전상인 님 스스로는 아파트에서 사는지 아닌지를, 전상인 님 스스로는 아파트를 어떻게 생각하는지를, 전상인 님 스스로는 아파트를 어떻게 받아들이거나 껴안는지 궁금합니다. 그런데, 이런 궁금함은 첫 쪽부터 마지막 쪽까지 한 줄도 읽어낼 수 없습니다. 글쓴이 전상인 님은 따로 이러한 ‘자기 삶’을 조금도 밝히지 않기 때문입니다.


.. 실제로 한국의 화이트칼라는 1987년 노동자 대투쟁 당시 한국사회의 이념적 좌경화를 막는 결정적인 방파제 역할을 했다. 그러나 반군부독재 민주화를 향한 물꼬를 트는 데에도 그들의 역할이 결정적이기는 마찬가지였다. 결국, 한국의 아파트 중산층 계급은 권위주의적 산업화 과정의 수혜자이면서 동시에 민주화의 견인차이자 파수꾼의 역할도 함께 담당했다고 보면 좋을 것이다 … 이와 같은 (아파트) 문제는 궁극적으로 우리 사회 전반에 걸쳐 좌파 진보 평등주의 이데올로기가 쉽게 파급될 수 있는 온상을 제공한다. 성공한 대한민국 건국 60주년을 아무리 자화자찬하면 뭐하는가, 당장 내 평생 내 힘으로 내 집 하나 마련할 꿈이 아스라이 멀어지고 있는데 말이다. 결국, 가족관계를 인격적으로 정상화하기 위해서라도, 미래세대의 밝은 인생관과 건전한 세계관을 고무하기 위해서라도, 그리고 좌파 포뮬리즘의 득세를 막아 대한민국 체제의 안정적 확대재생산을 담보하기 위해서라도 우리 나라의 주택정책은 조만간 확실히 달라질 필요가 있다 ..  (136, 183쪽)


 그러면서 책 사이사이에 ‘좌경화’니 ‘좌파 진보 평등주의 이데올로기’니 ‘좌파 포뮬리즘’이니 하는 이야기를 들먹입니다. 아파트하고 ‘좌파’가 어떻게 맺어져 있기에? 한국땅에서 ‘좌파’가 어떠했기에? 곳곳에 뜬금없이 나타나는 ‘좌파 = 한국을 망치는 이들’이라는 느낌 짙은 글월을 읽으며, 이런 생각을 바탕에 깔고 펼치는 이야기책이, 아니 인문학 책이 ‘재미있게 읽을’ 만한 책이 되는가 하고 고개를 갸웃거리게 됩니다. ‘좌파들이 쓰는 인문학 책’은 따분하고 재미없기에, 당신 스스로 좌파를 꾸짖으면서 ‘제대로 아파트를 이야기하는 책’을 펴낸다고 생각하는지 알쏭달쏭해집니다.

 좌파든 우파든, 잘못을 했으면 잘못을 따지면서 올바른 길로 접어들도록 다스려 주어야 합니다. 잘못하지 않고 잘하고 있으면 기꺼이 북돋우고 토닥거리면서 어깨동무를 할 노릇입니다. 왼날개이면 모두 나쁘고 오른날개이면 반드시 좋다는 법이 어디에 있습니까. 거꾸로, 오른날개이면 모두 나쁘고 왼날개이면 반드시 좋다는 법이란 없습니다. 어느 날개이느냐가 아닌, 어떻게 살아가느냐입니다. 어느 집에 사느냐(아파트이냐 골목집이냐 다세대이냐)가 아닌, 참다운 사람 삶을 꾸리느냐 못 꾸리느냐에 따라 우리 세상이 아름다운지 아름답지 않은지가 갈립니다.
 





.. 대입수능시험이 그러하듯이 아파트는 주거수준에 관련하여 전 국민을 획일적으로 서열화시킨다 ..  (172쪽)


 글쓴이 스스로 좀더 ‘정부 아파트 정책’을 돌아보고 꿰뚫는 눈을 길렀으면 얼마나 좋았으랴 싶습니다. 온나라를 들끓게 하는 재개발 정책이 얼마나 우리 모두를 헤아리는 일인지를 차분히 살피고 곱씹었으면 얼마나 좋았으랴 싶습니다.

 ‘아파트에 살 권리’만큼 ‘아파트 아닌 집에 살 권리’가 있습니다. ‘자가용을 몰 권리’만큼 ‘자가용 없이 대중교통만 타거나 두 다리로 걷기만 하거나 자전거로만 다닐 권리’가 있습니다. ‘돈이 많이 즐겁게 쓸 권리’가 있다면 ‘가난하고 찢어지게 못 살아도 똑같은 한국사람으로 대접받을 권리’가 있습니다.

 아파트를 둘러싼 사회 흐름이 어디로 치닫는가를 더 속깊이 들여다보았다면, 책이름 그대로 왜 “아파트에 미치다”라고 할 만한가를 우리 마음속으로 파고들도록 이야기를 건넬 수 있었다고 느낍니다. 아파트를 앞세워 ‘돈 없으면 아파트고 뭐고 아예 살 수도 없게 되는 한국땅’이 어이하여 이 모양이 되었는가 하는 고갱이를 잡아채면서 우리 머리를 일깨우는 슬기로움을 나눌 수 있었다고 느낍니다. 모든 재개발과 재건축이 어김없이 ‘아파트 아니면 안 된다’고 하는 까닭이 무엇인지를 샅샅이 알아보고 다루었다면, ‘우리가 아파트든 다른 무엇에든 미치지 않고 웃음으로 즐길 살가운 길’이란 무엇인가를 톺아보도록 하는 훌륭한 마음결을 찾을 수 있었다고 느낍니다. (4342.3.17.불.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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흐느끼는 낙타
싼마오 지음, 조은 옮김 / 막내집게 / 2009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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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책 하나 92 ― 자유롭지 못한 넋이라면 죽은 목숨
 : 싼마오, 《흐느끼는 낙타》


- 책이름 : 흐느끼는 낙타
- 글 : 싼마오
- 옮긴이 : 조은
- 펴낸곳 : 막내집게 (2009.2.11.)
- 책값 : 9800원



 (1) 우리는 어디에서 어떻게 살아갈까


 세 식구가 옮겨갈 살림집을 알아보려고 수봉공원 둘레로 찾아갑니다. 아기는 아빠가 등에 업습니다. 옆지기는 나날이 몸이 안 좋아지고 있어, 아기를 안거나 업고 걸을 수 없습니다. 배다리 한켠에 있는 우리 살림집에서 나와 도원역을 지나 숭의동 109번지 골목을 가로질러 제물포역에 닿습니다. 역 앞으로 나오니 1000원짜리 호박엿을 파는 할머니가 우리를 부릅니다. 그러나 아기 몸에 아토피가 나는 가운데 젖을 먹여야 하는 옆지기는 길에서 파는 엿을 먹을 수 없습니다. 못 들은 척 지나가면서 미안합니다.

 저 멀리 건널목 푸른불이 들어옵니다. 아기 업고 뛰기에는 벅차기에 건널목에 미처 안 닿았음에도 찻길을 건넙니다. 우리처럼 건너는 할머니 할아버지가 많아 그 김에 섞입니다. 옆지기는 그리 건너지 말자고 했지만, 차 싱싱 다니는 길에서 신호 기다리며 서 있고 싶지 않습니다. 그리고 애 업고 서 있기는 수월하지 않습니다. 아기 무게가 조금씩 느껴집니다.


.. “사막의 어떤 게 당신을 그렇게 사로잡았어요?” 샤이다는 이상하다는 듯 물었다. “어떤 게 나를 사로잡았냐고요? 높은 하늘과 넓은 땅, 뜨거운 태양과 거센 바람 …… 고적한 생활에는 기쁨도 있고 슬픔도 있어요. 이 무지한 사람들에게 사랑도 느끼고 원망도 느끼고요. 뒤죽박죽 헷갈리네요. 에이! 나도 분명히 모르겠어요.” “만약 이 땅이 당신 고향이라면 어쩌겠어요?” “아마 당신처럼 간호를 배우지 않았을까요. 사실 …… 내 고향이 아닌 곳과 고향인 곳을 어떻게 가르겠어요?” ..  (108쪽)


 천천히 천천히 거닐면서, 앞으로 우리가 어디에 살아야 좋을지를 이야기 나눕니다. 가장 좋은 집이라면 도시집이 아닌 시골집인데, 우리가 도서관까지 함께 옮겨서 꾸릴 만한 살림집이 있을 시골이 어디일까는 쉽게 종잡지 못합니다. 강원도로, 지리산으로, 제주로, 익산으로, 음성으로, …… 아는 이들 있는 곳을 하나하나 떠올려 보지만, 아는 사람만 보고 옮길 살림이 아니라, 우리가 가지고 있는 수만 권에 이르는 책들을 즐거이 나눌 마을사람이 있는 터와 공장이나 고속도로 따위가 깃들지 않을 조용한 시골마을까지 살펴야 하기 때문에.

 그러나 이런저런 일과 책을 떠나, 무엇보다도 사람이 사람다움을 지킬 수 있는 길을 생각한다면. 아이도 아이다운 삶과 생각을 지키며 어버이도 어버이다운 삶과 생각을 지키자면. 옳게 먹고 옳게 일하고 옳게 놀고 옳게 생각하고 옳게 이야기하며 옳게 어울리고 옳게 죽어 흙으로 돌아갈 나날을 헤아리면.


.. 우리는 결혼하면서 서로 동료가 되어 주기를 바랐을 뿐, 피차 무리한 요구나 집착은 없었다. 내가 호세를 선택한 것은 그에게 의지하기 위해서도 아니었고, 평생 독신으로 살까 하는 걱정 때문은 더더욱 아니었다. 그런 건 나에게는 그리 중요하지 않았다. 호세가 나를 원한 것도 밥하고 빨래해 주는 여자가 필요해서는 아니었고, 미인 아내를 원했던 건 더더욱 아니었다. 바깥의 세탁소와 음식점은 값싸고 서비스도 좋았고, 지지배배 재잘대는 여자들은 집에 있는 이 사람보다 상냥했다. 그런 데 쓰는 돈을 다 합쳐도 한 가정을 이루고 사는 비용을 초과하지 않을 것이다 ..  (215쪽)


 한 시간 남짓 아기를 업고 걸으니 아기는 어느새 새근새근 잠이 듭니다. 아기를 업은 등판과 이마로 땀이 살짝 돋고 흐릅니다. 수봉공원 기슭 숭의동 8번지 골목집 사이를 걷습니다. 비어 있는 집이 많이 보이고, 동네는 무척 고즈넉합니다. 그렇지만 이 가운데 우리가 깃들 만한 데가 있으려나. 인천 같은 도시에서도 가까이 산이 있기는 하다만, 이곳은 우리 식구가 머물 만한 집자리가 되어 줄 수 있으려나.

 인천 시내가 훤히 내려다보이는 언덕배기 쉼터에서 잠깐 숨을 돌립니다. 옆지기는 걷기도 벅차다고 합니다. 집으로 돌아갈 때에는 택시를 타야겠습니다. 잠든 아기까지 세 식구는 말없이 해지는 시내를 물끄러미 내려다봅니다. 온통 시멘트로 올린 집과 아파트만 빼곡한 시내에는 나무 한 그루 보이지 않습니다. 틀림없이 골목길 사이사이에는 수많은 꽃그릇이 있고, 손바닥 만한 땅뙈기에 심어 가꾸는 나무가 있기는 하지만, 인천 도시행정이 마련한 조각숲이나 조각공원은 하나도 안 보입니다.

 도시란 데가 워낙 나무며 흙이며 풀이며 꽃이며 없는 데라고 하지만. 산이며 냇물이며 바다며 파란하늘이며 볼 수 없는 곳이라 하지만. 그래도 참으로 쓸쓸합니다. 더없이 서늘합니다. 그지없이 팍팍합니다.

 우리는 초등학교 때부터 ‘푸나무 없이는 사람이 숨을 쉴 수 없다’고 배우는데. ‘비료나 풀약에 더럽혀지지 않은 흙이 없으면 사람이 먹고살 수 없다’고 배우는데.

 아니, 이제는 이렇게 안 배우는지 모르지요. 푸나무 없이도 공기청정기를 쓰고, 튼튼한 흙 없이도 식품공장에서 먹을거리를 쏟아내니까요. 돈을 많이 벌면 걱정없이 맑은 물이며 시원하거나 따뜻한 바람이며 배부른 밥이나 빠른 차나 큰 집이나 넉넉하게 품에 안을 수 있다고 배우는지 모르지요.


.. 창녀, 내 눈에 비친 이 여인에겐 직업도 도덕도 중요하지 않았다. 그저 무감각하고 습관적인 일이었다. “사실 여기서 기숙사를 청소하는 사람도 매월 2만 페세타는 벌 수 있어요.” 나는 부자연스럽게 한마디 했다. “2만 페세타? 청소하고 침대 정리하고 빨래하고, 죽도록 고생하고 고작 2만 세페타를 버는 일을 누가 해요!” 그녀는 깔보듯 말했다. “내가 보기에는 당신이야말로 고생스러워 보이는데요.” 나는 느릿느릿 말했다. “하하하!” ..  (30쪽)


 일요일 저녁이라 그런지 문을 연 부동산집은 없습니다. 유리창에 붙인 쪽글을 읽습니다. 보증금 100에 달삯 10 받는 집이 없을까 생각하며 눈알을 굴립니다. 200에 15나 100에 20짜리 집은 몇 군데 보입니다.

 둘레에서 우리보고 ‘나라에서 해 준다는 전세금 대출 지원’을 받으라며 따뜻한 말씨로 알려주곤 합니다. ‘6000을 받아 다달이 25만 원씩 이자로 내고 여섯 해 뒤에 갚으면 되고, 못 갚아도 다시 이으면 된다’면서, 아이를 생각해서라도 이 돈으로 아파트에 들어가서 지내야 하지 않느냐고들 합니다.

 그런 말씀을 들으며 ‘네, 고맙습니다’ 하고 인사를 드립니다만, 참말 아이를 생각하는 길이라면 물과 바람과 흙이 맑은 곳에서 살 수 있는 길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더 하게 됩니다. 나라에서 우리 같은 사람을 걱정한다면 ‘전세금 대출 이자’를 받으려 하기보다, 전세금와 이자돈 없이도 걱정과 근심을 털어내고 지낼 만한 대책을 내놓아 주어야 하지 않느냐 싶습니다. 이보다는, 도시에서건 시골에서건 개발바람에 속썩이지 않는 가운데 맑은 숨과 물을 마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미국 쇠고기를 먹을 자유’를 생각해 주시면서 나라밖에서 이러한 고기를 들여와 주셔도 나쁘지 않겠습니다만, 맑고 튼튼한 농사로 일군 좋은 푸성귀와 곡식을 언제 어디서나 먹을 수 있는 자유와 권리를 먼저 생각해 주셔야 하지 않느냐 싶습니다.


.. “전에는 다들 휘파람 말을 할 줄 알아서 멀리서도 자유롭게 이야기를 주고받았어요. 그런데 외지의 경찰이 들어와서 자기네가 못 알아듣는다는 이유로 휘파람 말을 못 쓰게 했어요.” “당신들이 휘파람 말로 그들을 속여 넘겼군요.” 내 말에 그들은 깔깔거리며 말했다. “당연하죠. 경찰이 범인을 잡으러 산속으로 들어갔는데, 다른 사람이 인적 드문 골짜기에 숨어서 계속 휘파람 말로 경찰이 어디 있는지 가르쳐 준 거죠. 그러니 어떻게 범인을 잡겠어요.” 가게 주인이 말했다. “젊은이들이 휘파람 말을 배우려 들지 않아서 세계에서 유일한 휘파람 말이 점점 사라져 가고 있어요. 오직 우리 섬에만 있는 말인데. 이렇게 섬세한 휘파람 말이 사라지다니 정말 안타깝죠!” ..  (169쪽)


 택시를 타고 우리 집 있는 동네로 돌아옵니다. 집 가까이에서 내립니다. 잠에서 깬 아기를 품에 안고 걷는데, 옆지기가 “엄마나 할머니가 차려 준 밥을 먹고 싶다”고 혼자말처럼 말합니다. 열흘쯤 푸성귀를 빻아 우린 물하고 김하고 능금 몇 쪽에다가 콩밥 몇 숟갈만 먹고 지낸 터라, 궁금하기도 하고 힘들기도 했겠지요. 적게 먹으니 속은 홀가분하다는데, 아기한테 젖을 물려야 하고 날마다 씨름을 해야 하니 고달프기도 할 테고요.

 집에 거의 다 와서 발걸음을 돌립니다. 동네 밥집으로 갑니다. 집밥이 생각날 때면 가끔 들르는 곳입니다. 밥 한 상과 오징어데침을 시키고, 막걸리 반 주전자도 시킵니다. 밥집 할머니가 막걸리 안주로 먼저 내어준 김치 한 접시를 먹는 옆지기는 아주 맛있다며, 이런 집김치를 먹고 싶었다고 이야기합니다. 밥집에서 ‘백반’을 먹어 볼 일이 거의 없는 옆지기는, 밥집 할머니가 차려 주는 반찬이 아주 많다면서, 이렇게 받아먹어도 되느냐 묻습니다. 그러나 백반은 으레 이처럼 차려주는걸요. 아기는 잠깐 엄마젖을 물다가 그만두고, 밥집에 있는 다른 손님과 할매 할배한테 눈웃음을 칩니다. 엄마와 아빠는 반찬그릇을 모두 깨끗하게 비웁니다. 속이 든든해진 옆지기는 시원한 게 당긴다고 합니다. 얼음과자 사러 구멍가게로 찾아갑니다. 저는 제 몫으로 보리술 한 병을 삽니다.

 셈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려는데 아기 양말 한 짝이 없습니다. 오는 길에 흘린 듯합니다. 구멍가게까지 오던 길을 거스릅니다. 동사무소 앞 골목 네거리에 떨어져 있습니다. 양말을 줍고 아기 발 한쪽을 담요로 더 똘똘 감싸며 걷습니다.

 집으로 가는 길에 옆지기는 우리가 도시에서 더 살려면 다른 동네로 가서 이웃 하나 없는 데에 있기보다 지금 이 동네에서 찾아야 하겠다고 이야기합니다. 아무래도 그쪽이 낫다고 느낍니다. 얼른 새 살림집을 찾아 옮기고, 옆지기 다른 피붙이들이 살고 있는 용현동이며 포천이며 거창이며 나들이를 다녀야겠다고 생각합니다.


.. “싼마오, 이리 와 봐.” 호세가 내 손을 잡아끌었다. 나는 꼬치를 내려놓고 따라갔다. “저 아이는 노예야.” 호세는 아이가 듣지 못하게 나지막이 말했다. 나느 깜짝 놀라 입을 가리고 눈을 휘둥그레 뜬 채 아리를 쳐다보았다. 그리고 다시 가만히 아이를 바라보았다. “노예라니 어떻게 된 거예요?” 나는 아리에게 차갑게 물었다. “그들은 대대손손 노예예요. 그렇게 태어났으니까.” “처음으로 세상에 태어난 흑인의 얼굴에 씌어 있었나요? 나는 노예라고?” 나는 아리의 갈색 얼굴을 들여다보며 추궁했다. “당연히 아니죠. 잡아 온 거예요. 사막에 사는 흑인을 보면 잡아다 때려서 기절시키고 도망치지 못하게 한 달 간 밧줄로 묶어 놔요. 온 식구를 잡아 오면 더더욱 도망칠 수가 없죠. 이렇게 대대로 내려오면서 재산이 된 거예요. 지금은 사고팔 수도 있어요.” 내 불편한 기색을 보고 아리는 곧바로 덧붙였다. “우리는 노예를 학대하지 않아요. 저 아이는 저녁에 부모가 있는 천막으로 돌아간다고요, 마을 밖에 있는. 아주 행복한 거죠. 날마다 집에 가는데.” ..  (37∼38쪽)


 아기 얼굴을 씻기고 풀물을 바릅니다. 젖을 물려 재웁니다. 그러고 우리 두 식구는 인터넷을 켜고 ‘미디엄’이라는 미국 연속극 5부를 챙겨 봅니다. 우리 말로 옮겨진 5부 다섯째를 보니, ‘피 안 섞인’ 손녀 때문에 ‘피 섞인’ 딸을 죽이고 마는 할머니 이야기가 나옵니다. 피 섞인 딸은 어떤 까닭에서인지 간호사로 일하던 때 한 번 사람을 죽이고(자기가 혼인하려는 남자 아내), 나중에는 그 집 어린 딸아이도 얼음과자에 약을 타서 차츰차츰 말려죽이려 합니다. 할머니는 이를 알아채고는 딸아이를 불러 그러면 안 된다고 하면서 외려 당신이 딸아이를 죽이고 땅속에 파묻는데, 주인공은 이를 알게 되지만 끝내 할머니를 고발하지 못합니다. 주인공 또한 세 딸을 키우는 어머니이기도 하지만, 슬픔과 아픔이 더 이어지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이 있기도 해서가 아니랴 싶습니다.

 그렇지만, 셈틀을 끄고 잠든 아기를 꽁꽁 싸매고 함께 자리에 누워 잠이 들면서도 마음이 개운하지 못합니다. 아무리 연속극 이야기라고 하지만, 왜 그렇게들 제 배속을 챙기면서 다른 이 삶을 밟거나 괴롭혀야 하는지, 왜 다른 이 삶을 끝장내면서 제 삶만 이으려고 하는지. 함께 살아갈 길은 그예 찾을 수 없는지, 서로 웃고 함께 울면서 어깨동무할 삶은 찾을 길이 없는지.


.. “외투를 입어요! 당신들에게 국립공원을 구경시켜 줘야지. 나는 수도 없이 다녀 봤다오.” 과연 높은 산 험준한 고개 속에 기개가 넘치고 비범한 소나무숲이 펼쳐졌다. 운전사는 우리에게 아름다운 경치를 조근조근 설명해 주었다. 차에 탄 시골 사람들은 아무도 원망하는 기색이 없었다. 그들 역시 자기네가 사는 아름다운 땅을 넋을 잃고 바라보았다 … 더없이 평온하고 정겨운 광경이었다. 시간마저 멈춘 듯했다. 천만 년 전에도 천만 년 후에도, 이 들판은 이 모습 그대로 변치 않을 것만 같았다 ..  (173∼174쪽)


 길지 않은 밤, 아기가 칭얼댈 때 틈틈이 깨는 가운데 꿈을 꿉니다. 아주 낯선 곳에서 낯선 사람들하고 부대끼는 꿈인데, 아침에 일어나면서 영 개운하지 않습니다. 요즈음 둘레에서 부대끼는 사람들이 하나도 달갑지 않을 뿐더러, 달가울 만한 목소리나 손길을 느끼기 어려운 탓인가 하고 생각해 봅니다. 그렇기는 해도 아기가 좀더 자라서 어느 만큼 자기 어릴 때를 떠올릴 수 있을 무렵까지는 이곳 인천이라는 데에서 터잡으면서 살아내고 싶은데, 얼마나 살아낼 수 있을까 모르겠습니다.

 앞으로 도시 아닌 시골에서 세 식구가 오순도순 살기를 바라고 있으나, 도시라는 데에서도 지금 우리 동네 같은 골목길 같은 데는, 여느 도시 삶자락과는 사뭇 다름을 느끼게 한 다음 도시를 떠나고 싶은데, 아기가 살짝 철이 들 무렵까지 얼마나 인천 골목길이 골목길다움을 잃지 않으면서 버틸 수 있을까 모르겠습니다.

 낮은자리도 아닌 밑바닥자리에서 복닥복닥 치고받고 하여도 살가움을 나누고 있는 이 골목집 사람들 삶을, 모자라다기보다 아예 없는 가운데에도 옹기종기 모여서 서로 나누는 사랑이 있는 이 골목동네 사람들 삶터를, 이 나라 정부나 지자체 공무원이 끝내 모르게 되더라도 우리 아이가 이런 느낌을 살갗으로 받아들일 수 있을 때까지 어느 만큼 견디며 발붙일 수 있을까 모르겠습니다.


 (2) 사막을 사랑한 싼마오가 살아온 이야기, 《흐느끼는 낙타》


 《사하라 이야기》에 이은 싼마오 님 두 번째 산문모음 《흐느끼는 낙타》를 읽습니다. 《사하라 이야기》를 읽던 때와 마찬가지로, 자유롭지 못한 넋이라면 죽은 목숨이라고 여기고 있구나 싶은 싼마오 님 이야기책은 중국에서 스물여섯 권짜리 전집으로 나왔다고 합니다. 앞으로 우리 나라에서는 몇 권쯤 더 옮겨질 수 있을까요.

 새로운 책이 나왔다는 소식을 언론매체에서는 하나도 안 다루어 주지만, 책 좋아하는 이들은 입소문으로 퍼뜨리고 나누면서 새로운 싼마오 님 문학이 나오는 날을 손꼽아 기다리고 있는데, 이와 같은 흐름은 앞으로 얼마나 더 이어가게 될까요.


.. 그는 석상처럼 가만히 앉아 있었다. 음료수를 조금 마시고 자기가 가져온 마른 빵을 먹었을 뿐, 다른 음식에는 손도 대지 않은 상태였다. 나는 팔짱을 낀 채 그를 가만히 쳐다보았다. 벙어리 노예는 내 마음을 알아차리고 곧바로 일어나서 손짓을 했다. “화내지 말아요. 집에 가져가서 아내랑 아이들에게 먹이고 싶어서 안 먹었어요.” … 그는 내가 봉투에 음식을 담는 것을 보더니 고개를 숙였다. 부끄러움과 기쁨이 뒤섞인 복잡한 표정을 보고 나는 울컥했다 … 사소한 음식을 얻고도 저렇게 기뻐하는 걸 보니, 벙어리 노예는 자신의 아이들을 진심으로 사랑하는 게 틀림없었다. 분명 행복한 가정을 꾸리고 있을 것이다 … 벙어리 노예는 멍하니 하늘을 바라보다가 자기의 피부를 가리키며 한숨을 내쉬었다. 잠시 후 그는 또 미소를 지으며 자기의 가슴을 가리켰고, 새를 가리키며 날아가는 시늉을 했다. 나는 그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 알 수 있었다. “내 몸은 자유롭지 못하지만 내 마음은 자유로워요.” ..  (46, 50쪽)


 《사하라 이야기》를 읽을 때에는, 싼마오 님이 남달리 사막을 사랑하는구나 하고 생각했습니다. 두 번째 산문모음 《흐느끼는 낙타》를 읽으며, 싼마오 님은 사막뿐 아니라 섬도 사랑하네 하고 생각합니다. 다만, 도시는 사랑하지 않습니다. 사람을 싫어하거나 꺼려하지 않으나, 복닥이는 사람물결은 반가워하지 않을 뿐더러 멀리멀리 떨어지고자 합니다. 전기제품을 쓰고 자동차를 몰지만 이런 물건을 쓰기도 할 뿐이지, 이런 물건에 매이지 않습니다. 아무런 물건 없이 얼마든지 살림을 꾸리고 어떠한 물질을 두 손에서 놓더라도 홀가분합니다.

 이웃사람은 모두 꺼리고 놀리고 들볶는 사막 노예한테 처음으로 말을 걸며 동무로 사귀는 싼마오요, 싼마오네 남편 호세입니다. 노예 몸을 자유롭지 못하고 얽어맨 이들은 한껏 자유를 누리는 듯하지만 외려 마음은 갇혀 있을 뿐이고, 몸이 갇혀 있어도 마음은 누구보다 자유로운 노예한테 삶을 배우고 슬기를 듣는 싼마오요, 싼마오네 남편 호세입니다. 이 둘은 그 무엇으로도 서로를 옭매지 않는 가운데, 둘레 다른 사람을 옭매고픈 마음이 없는 한편, 사회나 나라가 사람을 옭매는 일을 거스릅니다.


.. 스페인 정부가 이곳(그란카나리아 섬)을 자유항으로 개방한 이후로 가전제품, 사진기, 시계 등 무거운 세금이 부과된 물건을 파는 가게들이 거리거리 가득 늘어섰다. 난잡한 도시는 꼭 홍콩 같은 분위기였고, 벌떼처럼 거리를 가득 메운 관광객들로 복잡하고 어지럽기 짝이 없었다. 언젠가 대만 어업계의 대가 추 선생에게 그란카나리아 섬의 인상이 어떤지 물어 본 적이 있었다. 그는 어선 일로 해마다 몇 번씩 이곳을 다녀갔는데, 이렇게 대답했다. “개성이 없어요. 아주 조잡하고. 문화라고 말할 수 있는 게 하나도 없어요.” ..  (183쪽)


 아무래도 싼마오며 호세며, 그리고 또다른 숱한 ‘싼마오와 호세’ 들은 저마다 다 다른 삶임을 깨닫고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내가 다르고 네가 다른 삶임을 잘 알고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다름을 아니까 껴안을 줄 압니다. 다름을 알기에 사랑할 줄 압니다. 다름을 알고 있으므로 어깨동무할 줄 압니다. 다름을 알려 하니 기꺼이 손길과 눈길을 내밉니다.

 다름을 모를 때 어깨동무를 못합니다. 다름을 모르는 가운데 사랑이란 없습니다. 다름을 모르면서 믿을 수 없고, 나눌 수 없으며, 함께할 수 없습니다. 다름을 모르니 막개발이 이루어지고, 다름을 짓밟으니 독재자가 일어서며, 다름을 내리누르니 군사쿠테타가 일어납니다.

 다름을 깨닫는 어른이라면 아이들한테 입시지옥을 선물하지 않습니다. 다름을 깨달은 어른이라면 돈바라기 정치나 경제를 펼치지 않습니다. 다름을 깨달으려는 어른이라면 지식으로 권력을 세우지 않습니다.

 산 사람이 되고자 하니 서로 다른 길을 걷습니다. 산 넋이 되고자 하니 서로를 꾸밈없이 맞아들입니다. 죽은 사람이 되었기에 서로 똑같이 되려는 겨루기를 하면서 1등으로 올라설 꿈을 키웁니다. 죽은 넋이 되었기에 서로서로 겉치레와 겉꾸밈으로 뭔가 돋보이거나 남달리 보이려고 애쓰고 맙니다.


.. 낯선 곳에 갔을 때 그곳 사람들과 완전히 친해지지도 않았는데 마구 사진을 찍어대는 것은 무례한 짓 같아서 사진기를 꺼낼 수가 없었다 ..  (62쪽)


 자유를 사랑했기에 사막을 사랑한 싼마오입니다. 평화를 사랑했기에 섬을 사랑한 싼마오입니다. 평등을 사랑했기에 아름다운 사람을 찾고 만나고 어울리며 스스로도 아름다워지고자 한 싼마오입니다. (4342.3.9.달.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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곰돌이 2009-03-13 16: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가끔와서 읽고 갑니다
님 글 보면서 우리가족이 왠지 같이 생각이 들어서 흐흣
아무튼 오늘도 잘 읽고 갑니다 ^^

숲노래 2009-03-13 17: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에구구 고맙습니다.
곰돌이 님 식구들
언제나 즐거우면서 씩씩하고 튼튼하시길 빌어 봅니다~~~
 
돌아오지 않는 내 아들 - 군의문사 유족들은 말한다
군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 엮음 / 삼인 / 200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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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군대는 아들을 머저리로 만들고, 딸한테 생채기를 남긴다
 [잠깐 읽기 24] 군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 《돌아오지 않는 내 아들》



- 책이름 : 돌아오지 않는 내 아들
- 글ㆍ사진 : 군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
- 펴낸곳 : 삼인 (2008.12.5.)
- 책값 : 12000원



 (1) 내가 겪은 군대


 새근새근 잠든 아기를 보면서, 이 아기가 사내로 태어나지 않아 얼마나 반가운가 하고 다시금 생각합니다. 사람들 앞에서는 우스갯소리로 ‘사내였으면 기저귀를 갈다가 갑자기 오줌을 찍 사면 얼굴에 맞잖아요’ 하고 말하지만, 그런 아기 오줌질이야 아무렇지 않습니다. 우리 나라에서 사내로 태어날 때 가장 걱정스러운 ‘군대’ 문제는 아직도 풀릴 길이 까마득하기 때문에 이렇게 생각할 뿐입니다.


.. 현재 국방부 훈령인 전공사상자 처리 규정엔 ‘자살’ 규정만 있고 ‘구타나 가혹 행위 등’으로 인한 자살의 경우는 명시돼 있지 않다. 이를 근거로 공무 수행 중 자살에 대한 순직을 인정하지 않는다 ..  (64∼65쪽)


 그렇다고 계집으로 태어난 우리 아이가 ‘군대’ 문제 때문에 피 볼 일이 없으리라 생각하지 않습니다. 이 아이가 커서 사귀는 남자아이가 군대에 갈 때라든지, 이 아이가 나중에 어른이 되어 사랑하여 혼인할 남자아이가 ‘군대에서 지내는 세월에 걸쳐 몸과 마음에 받은 생채기’가 고스란히 남아 있을 때에는 똑같이 ‘군대’ 때문에 피를 보게 됩니다.

 저처럼, 군대에서 바보 멍텅이 돌대가리가 되어 버릴 뿐더러, 군대를 거치면서 입이 걸어지고 마음이 메말라 버리는 사람들도 ‘군대’ 때문에 피를 보지만, 저하고 함께 사는 옆지기도 ‘군대’ 때문에 피를 보는 셈이고, 우리 아버지 어머니, 또 장인 장모 모두 ‘군대’ 때문에 피를 보는 셈입니다.


.. 너무나 억울하고 원통했다. 국가에서 데려간 아들이 싸늘한 주검이 되어 돌아왔는데 그 원인조차 밝히려 하지 않는다는 사실이 기가 막혔다. 함께 배를 타고 먹고 잤다는 부함장이라는 사람은 20여 일이 지나서야 아들을 찾아왔다. 그러면서 하는 말이 “부대와는 아무 상관없는 일”이라며 모르쇠로 일관했다. 아들 잃은 슬픔에 잠겨 식음 전폐하기를 몇 날 며칠. 부모는 생업도 접고 아들이 죽음에 이르게 된 원인을 찾아나섰다. 그 과정에서 아들의 속옷이 제대로 인계되지 않고 심지어 일부 품목은 부모의 확인 과정도 거치지 않고 세탁돼 있었다. 자꾸 감추려 한다는 의심을 지울 수 없었다 ..  (76쪽)
 

 나날이 군대 가는 사내 숫자가 줄어, 이제는 중졸자도 군대로 끌려간다고 합니다. 얼마 앞서까지는 중졸자까지는 군대에 안 갔습니다. 제가 군대에 간 1995년에는 ‘고퇴자(= 중졸자)’도 군대에 갈 수 없었습니다. 어쩌다가 중졸이면서 군대에 온 녀석들이 있었는데, 이들은 군대에서 “야, 넌 어떻게 군대에 와서는 안 되는데 군대에 왔느냐?”는 소리를 들어야 했고, “대한민국 군대에 너희들이 잘못 들어왔어도 국방부 시계가 멈출 때까지 나갈 수 없어!” 하면서 까닭없는 주먹질과 얼차려를 덤으로 받기도 했습니다. 더군다나, 그무렵 제 후임병으로 ‘다른 형제와 친척 없는 외동 장남이면서 어머니를 홀로 모시는 생활보호대상자’ 집안 아이도 여럿 들어왔는데, 도무지 군대에 와서는 안 되는 이 아이들이 어찌 군대에 들어왔던가 하고 어처구니없어 하면서 신상기록카드를 곰곰이 살피니, 이 아이들은 하나같이 ‘북파간첩 키우는 부대’로 끌려갔다가(징집) ‘북파간첩 대상자 부적격 판정’을 받고 ‘일반 군대, 이 가운데 강원도 산골짝 가장 깊숙한 곳에 처박힌 육군 보병’으로 흘러든 셈이더군요.

 요즈음도 북파간첩을 키우는지는 잘 모릅니다. 다만, 1997년에 전역을 하는 그때까지, 한국군에서는 틀림없이 북파간첩을 키웠고, 그 부적격자는 우리 부대로 많이 들어왔습니다. 이 아이들은 모두 ‘연고자가 더 없는 외로운 집’에서 살던 아이들이었고, 이 아이들은 자기들이 군대면제자였음을 알지도 못하는 가운데 훈련소를 거쳐 자대에 왔으며, 전역하는 날까지도 이런 일은 1급비밀에 붙여져 있었습니다.

 그러고 보면, 제가 어릴 적 살던 동네 이웃집 아저씨도 북파간첩 출신이었습니다. 이 아저씨는 키 크고 덩치 우람해 또래 동무들 모두가 무서워했지만, 우리들보고 ‘남자는 체력단련을 잘해야 해!’ 하고 으르렁댈 때를 빼놓고는 그럭저럭 괜찮았습니다. 그러나 그 집 형은 아버지한테 얻어맞으면서 태권도와 무술을 배웠고, 집에서도 매섭게 체력단련을 해야 했습니다. 북파간첩 출신 아저씨는 5층짜리 아파트 마당에 샌드백과 평행봉을 손수 용접하고 시멘트 부어서 만들어 놓고 우리보고도 체력단련을 하라고 시켰고, 아저씨 말이 아니더라도 이런저런 체력단련은 재미있는 놀이라서 곧잘 즐겼습니다.

 아저씨네(라기보다는 이웃집 형네) 놀러가면 때때로 아저씨가 임진강이며 북한강이며 물속으로 헤엄쳐 북녘으로 넘어 들어가던 이야기를 들려주었는데, 당신이 군대에서 일찍 나온 까닭은, 임무를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들통이 나서 자기 동료가 바로 옆에서 온몸에 총알구멍이 나면서 죽는 모습을 보았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동료 주검이라도 건지고 싶었지만 자기 또한 죽을까 두려워 혼자 빠져나왔다는데 그 죄책감을 씻을 수 없었답니다.

 한 번 깊게 숨을 들이마시면 5분 동안 물속에서 헤엄쳐야 하는 훈련을 받는 이야기를 들을 때면, 물속에서 자기들이 숨을 못 참고 물 밖으로 나올라치면 고참들이 군화발로 머리를 까고 몽둥이로 두들기면서 꼭 5분 동안 물속에서 물을 마시면서라도 버티게 했다고 했는데, 소름이 돋는 한편, 나도 5분 동안 물속에서 참을 수 있을까 하고 집에서 바가지에 물을 받아 머리를 처박아 보곤 했습니다.


.. 진상 규명 결정이 내려졌지만, 늙은 아비와 어미는 여전히 답답함이 남았다. 아들의 사망에 책임이 있는 자들은 아무런 처벌도 안 받고, 국방부가 군의문사위원회의 조사 결과를 받아들일지도 미지수이기 때문이다 … 가족들은 사인을 밝히기 위해 부검에 동의했다. 아들을 두 번 죽이는 일이었지만 진실을 밝히고 싶었다. 부검 결과는 대부분의 의문사가 그렇듯 자살이었다. 심한 모욕과 얼차려, 구타를 자행해 아들을 사지로 내몬 병사와 간부들은 제대로 된 징계 한 번 받지 않았다 ..  (81, 94쪽)


 어릴 때에는, 저 또한 군대라는 곳에 들어가기 앞서까지는, 우리 아버지가 군대에서 지역차별을 받으면서 얼차려와 주먹다짐으로 시달리다 못해 고향 동무들하고 같이 실장갑에 대못을 박고 “썅, 서로 죽어 보자!”고 싸움박질을 했다는 일이 장난이나 거짓이나 뻥튀기가 아닐까 하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저 또한 군대에 들어가고는, 그리고 그 군대가 남녘땅 군대에서는 가장 외지고 춥고 고되다는 곳으로 용케(?) 들어가서 스물두 달을 채우고 나오는 동안에는 생각이 아주 뒤바뀌었습니다. 왜 부잣집 사람들이, 정치꾼 사람들이 자기 아들을 ‘군대에 안 보내려’ 하는지를 온몸으로 깊디깊이 깨달았습니다. 훈련소와 자대에서는 ‘신상명세서 쓰기’ 종이를 나누어 주며 한쪽에 ‘내 식구나 친척 가운데에 국회의원, 시도 지사 따위가 있는지 적으라’는 대목이 있었습니다. 아니면, 유명인사나 유명 연예인이나 재벌 간부 가운데 식구나 친척이 있으면 적으라 했는데, 이렇게 적은 동기들은 모두 ‘좋은’ 데로 빠져나갔고, ‘줄 닿는 뒷배’가 없는 저 같은 떨거지는 기차와 배와 군짐차를 여러 차례 갈아타면서 강원도 양구 산골로 엉덩이가 걷어차이며 들어갔습니다.

 자대에 들어가던 무렵부터 눈이 얼마나 오지게 오던지, 사단휴양소에서 이틀이나 머물러 있어야 했는데, 눈밭을 헤치고 겨우 자대에 들어가니 더블백을 풀기 앞서 빗자루와 눈삽과 흙삽을 하나씩 받고는 한 시간 동안 산을 타고 올라가서 보급로 눈치우기를 해야 했습니다. 훈련소와 자대를 거치며 ‘이놈(고참)들 눈에 밉보이면 그대로 죽어 버릴 수 있구나(이때는 ‘의문사’를 몰랐고, 그냥 ‘개죽음’만 알았습니다)’ 하고 느꼈기에 죽자 사자 고참 꽁무니에서 1미터 거리가 떨어지지 않으려고 따라붙어 겨우 ‘눈치우기 산타기’에서 낙오를 안 했는데, 고참은 자기 뒤에 1미터 넘게 떨어진 모든 후임병을 눈밭에 머리박기를 시키며 발로 뻥뻥 걷어찼습니다. 등과 배와 얼굴을. 낙오를 안 해 옆에서 다리쉼을 할 수 있는 저로서는 ‘안 맞아서 다행’이 아니라, ‘나만 안 맞으니 이따 돌아가서 지금 맞은 사람(다른 고참)들한테 맞지 않을까 하는 걱정’이 더 크게 들어서 부들부들 떨렸습니다.

 이등병 때, 치약뚜껑에 머리박기를 하며 저녁점호를 받던 동기는 ‘치약뚜껑에 머리박기를 하는 채’로 고참한테 발길질을 받아서 이마가 쭉 찢어져서 죽는 날까지 지워지지 않는 흉터로 남았고, 제가 전역할 무렵 스물여섯 나이로 고시에 실패해서 들어온 ㄱ대 공부벌레 늦깎이는 날마다 뒷간에서 대여섯 살 아래 동생(고참)들한테 얻어맞고 우느라 늘 눈이 부어 쳐다보기에 언제나 안쓰럽기에, 제 앞으로 나오는 담배를 몇 갑씩 슬그머니 주머니에 찔러 주곤 했습니다. 이 녀석(형)은 이때부터 담배를 배웠습니다.


.. 경찰들은 또 장례를 치러야 된다고 가족들을 설득했다. 하지만 가족들은 먼저 현덕의 동료 부대원들을 만나 보고 싶었다. 혹시 부대에서 가혹 행위가 있었던 것은 아닌지, 아니면 자살할 만한 다른 이유가 있었던 것은 아닌지 궁금했다. 경찰은 가족들의 방문 요청을 받아들였다. 단, 부대원과의 개별 면담은 허락하지 않았다 … 부모는 아무리 애간장이 끊어져도 죽은 아들은 아무런 말이 없다. 찾아간 군부대에서는 오히려 “아들이 나약해서 스스로 목숨을 끊고 부대에 피해를 주었으니 부끄러운 줄 알라”고 호통을 쳤다. 적반하장에 온몸이 부들부들 떨렸지만, 군대라는 거대한 조직과 맞서기에 늙은 부모는 너무나 힘이 없었다 ..  (146, 156쪽)


 그렇지만 모든 군대가 주먹다짐과 욕설과 얼차려로 얼룩져 있으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제가 나왔던 그 양구 골짜기 부대만(민통선 안쪽에서 이북 군인과 마주하고 있는) 더 모질었는지 모릅니다. 해병대 전적비가 있는(도솔산) 그 산골짜기 부대는 한 해에 꼭 닷새만 해를 볼 수 있는 비와 안개와 눈으로 덮인 곳이었고, 주둔지 대대와 멀리 떨어져 있고, 중대에서도 소대가 따로 지내기도 했던 만큼, 밖으로 드러나지 않는 무시무시함이 더 깊었는지 모릅니다.

 사단장이나 별 달고 무궁화 단 분들께서 우리 부대에 나들이하실 때마다 모든 중대원이 하루 내내 ‘취나물 뜯기 사역’을 해서 몇 마대씩 선물로 앵겨 드리지 않으면 대대장 지시사항으로 우리 중대에 벼락이 떨어졌지만, 그래도 뭐 이런 일은 괜찮았습니다. 한 해에 한 번씩 사단장님께서 헬기가 아닌 지프를 타고 가칠봉전망대로 헤엄을 치러(가칠봉gop 꼭대기에는 수영장이 마련되어 있어서 별 단 분들께서 헤엄치러 놀러옵니다. 마땅한 소리이지만, 지오피 꼭대기에 마련된 수영장은 우리 같은 땅개들이 자갈과 시멘트와 모래와 물을 주둔지부터 한 사람씩 등짐 지고 날라서 만들었습니다) 가시는데, 사단장님 지프가 작은 돌멩이 하나에라도 바퀴가 통! 하고 흔들리다가는 연대장 지시사항으로 우리 중대에 불벼락이 떨어졌지만, 그래도 뭐 이런 일이야 아무것도 아니었습니다.

 혹한기훈련을 앞두고 사격훈련을 하는데 그 추위에 총기고장도 잦고 손이 떨려 제대로 맞추기도 어려웠겠지만, 이런 형편은 아랑곳 않고 제대로 못 쏜다고 몇 시간 동안 ‘뒤로 포복’으로 눈밭을 밀며 자대복귀 시키다가 그래도 성이 풀리지 않아 무전병 헬멧에 총질을 해대어 구멍을 내고 다음에는 우리들 대갈통에 구멍을 내겠다던 중대장을 생각해 보면, 이런 일도 그리 아무것도 아니었습니다. 때때로 관물검사를 하며 ‘불온서적 색출’을 하는데, 《아리랑》과 《태백산맥》을 불온서적이라고 스무 권 남짓 찾아내어 태우게 하는 일이 저한테 떨어져, 어찌 책을 태우나 속이 아파서 안 태우고 소각장 한쪽 구석에 몰래 숨겨 놓았으나 들키고 말아, “너 빨갱이 아냐? 간첩 아냐? 너희 같은 새끼들은 총으로 쏴죽여서 저기(철책) 안쪽에 갖다 던지면 월북했다고 신고하면 그만이야!” 하는 소리와 함께 갖은 징계와 구박과 주먹질을 받던 일도 있었는데, 여느 날 늘 벌어지는 주먹다짐과 욕설과 얼차려를 돌아보면 새발바닥 피 같은 장난입니다. 논산훈련소에서 똥물먹기가 터져나오기도 했지만, 그러기 앞서 우리 부대에서도 푸세식 뒷간을 혀로 핥아서 닦기를 시키는 고참이나 중대장이나 행정보급관이 있었고, 삽날과 곡괭이자루로 맞는 일은 어디서나 볼 수 있었으며, 소총 소염기에 머리박느라 머리에 구멍이 나는 일도 잦았습니다. 






 (2) 군대에서 살아남으면 용하지만


 군대에 있는 동안 참 많이 맞았지만, 저는 적게 맞은 셈이고, 저 또한 후임병을 아주 적게 때렸습니다. 저는 꼭 세 번 때렸는데 세 번 때릴 때 거의 반죽음으로 때려 놓았으며, 웬만하면 주먹이 아닌 입으로 후임병을 들볶았습니다. 저를 때렸던 고참은 전역 뒤에 어느 한 사람도 연락이 되지 않습니다. 저한테 맞은 후임병 셋도 두 번 다시 연락이 안 됩니다. 때린 분한테는 왜 때렸는지 묻고프고, 맞은 동생한테는 너무 미안하다고 빌고 싶으나, 어느 누구도 보거나 만나거나 알고 지낼 수 없습니다.

 그저 다들 그 끔찍한 데에서 살아남았으니, 그 일로 다 잊자고 생각하는지 모릅니다. 저한테 욕 많이 먹던 어느 분은 예닐곱 해 앞서인가 길거리에서 두어 번 마주쳤는데, 술이나 마시자며 연락처 좀 주고받자고 했으나 ‘다음에 또 만나면 그때 마시지’ 하면서 끝내 연락처를 알려주지 않았습니다.

 모르지만, 모두들 어디에선가 어떻게든 군대에서 보냈던 일은 훌훌 털어버렸는지 모를 노릇이고, 털어낸다 해도 털어지지 않아 그때 생채기가 오늘날 자기 모습으로 굳은 가운데 사람들과 부대끼고 있는지 모를 노릇입니다.


.. “우리 애를 제일 괴롭혔던 그 군인이, 아주 부대 안에서 소문이 났더라고. 부산역 TMO에서 그 자를 조사하는데, 난 좀 늦게 갔어. 헌병 조사관이 추궁을 하니까, ‘어, 그럼 진술 거부하겠다’ 그러더군. 그러니 헌병이 또 달래서 진술을 시키는데……. 그 정 아무개라는 사람이 날보고 힐책을 하더라고. ‘왜 아들을 그리 약하게 키웠습니까’라고. 바로 조사관들 앞에서, 허허허 ……. 허허허, 우리 애를또 많이 괴롭혔던 자들 중에 전주에 있는 한 명은 그래도 가식적으로나마 사과를 하고 그랬는데. 그러니까 자기가 쥐어박아도 살살거리고 살아남지 않아서 그렇게 됐다는 뜻이겠지.” ..  (250쪽)


 《돌아오지 않는 내 아들》이라는 책을 읽으며, 어느 한편으로는 ‘군대에서 죽은 이 사람들은 그나마 자기들 목숨을 내려놓았을 때’ ‘그래, 이제 더는 안 맞아도 되고 더 욕을 안 먹어도 되며 더 속으로 눈물 안 흘려도 돼’ 하고 생각했습니다. 제 군대 적 때 일이 그러했으니까요. 이등병 때 수없이 얻어맞고 불쌍하게 있던 동생들이 일병이 되고 후임병이 생기니 자기가 받은 그대로 후임병한테 고스란히 물려주는 모습을 보며, “야, 너도 이등병 때 그렇게 겪었는데 왜 그러느냐?” 하고 불러세워 따끔히 한 마디 하면 “네, 죄송합니다! 안 그러겠습니다!” 하면서도 눈빛에는 ‘씨, 씨, 그동안 맞은 만큼 돌려줘야지!’ 하는 불기운이 서려 있었습니다.

 군대라는 곳은 뼛속 깊이 ‘시키는 대로 해라. 안 그러면 맞는다. 맞다가 죽을 수 있다. 맞다 죽으면 그냥 개죽음이다’ 하는 생각이 박혀 있으니 우리들 여느 사람 여린 힘으로는 어쩔 길이 없는가 싶곤 합니다. 그냥저냥 이등병 일병 때는 죽지 안을 만큼 맞고 버티자고 하다가, 상병 병장이 되면 죽지 않을 만큼 때려 주면서 속풀이 하자고 생각하게 되는가 싶곤 합니다. 안 맞고 크면 이상하고, 안 때리며 고참질 하면 또 이상하게 생각하게 되는가 싶습니다. 제가 상병이 되어도 동생들을 한 번도 안 때리니 동기들이 “야, 너만 안 때리면 우리가 어떻게 되냐. 너 때문에 우리가 상병이 되도 병장들한테 맞잖아. 그렇게 하면 안 돼!” 하고 자꾸 그래서, 상병 6호봉에 이르러 처음으로 동생들한테 욕을 했고, 병장 계급장을 달고 나서 비로소 주먹다짐을 했습니다. 이때에는 “얌마, 병장이 되어서도 그러면 우리 밑에 있는 애들이 함부로 날뛰어!” 하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이리하여 군대 조직 질서가 남자들 몸과 마음이 하루하루 또아리를 틀고, 사회에 돌아와서도 이 버릇이 씻기지 않아, 한국땅 남자들은 ‘군대에서 아무리 몸소 손빨래를 하고 다림질을 하고 옷을 개고 내무반 쓸고 닦고 이부자리 치우고’ 했어도, 군대에서 벗어나는 그때부터 모든 집안일은 ‘여자들이 알아서 할 일’로 넘기고, 무슨 일만 있으면 쉽게 주먹을 들고 손찌검을 하고 회초리나 몽둥이를 들지 않느냐 싶습니다.

 입시지옥에서 벗어난 푸름이들이 ‘제도권 교과서’가 아닌 ‘마음밭 살찌우는 진짜 책’을 찾아나서지 못하듯, 군대지옥에서 풀려난 젊은 사내가 ‘폭력으로 얼룩진 위계 질서’를 떨구지 못하고 자기 또한 ‘밥그릇 서열과 주먹힘’ 따위로 사람을 깔보거나 얕보거나 푸대접하지 않느냐 싶어요.


.. “텔레비전을 보면 매번 군대가 좋아졌다, 군대가 변했다는 얘기를 떠들잖아. 난 그거 하나도 안 믿어. 군대 깊숙이 자리잡은 폐쇄성과 폭력성이 사라지기 전에는 변했다는 말을 하면 안 돼.” ..  (98∼99쪽)


 2006년 여름이던가, 서울 어느 미술관에서 ‘이름난 어느 서양 그림책 작가’ 원화전시회가 있었습니다. 그분 이름을 잊었지만, 온나라 어린이와 어버이한테 사랑받는 분인데, 이분은 미국사람이면서 ‘군대에 안 가고 산림보호원 공익근무’를 했다고 합니다. 군대에서 총을 드는 일은 자기 마음을 다치게 할 뿐 아니라, 내 이웃을 다치게 하기에 군대에 안 가겠다고 하여, ‘대체 복무’로 산속 깊숙한 곳으로 들어가 자연을 들이마시면서 자연사랑과 사람사랑을 더욱 키울 수 있었다고 밝히더군요.

 오늘날 한국땅에서 군대라는 조직을 키워야 한다면 어쩔 수 없이라도 키울 노릇입니다. 그런데, 지금처럼 돈-이름-힘이 있는 사람은 다 빼돌릴 수 있는데다가, 군대라는 곳부터 ‘좋고 나쁜’ 곳으로 갈리는 한편, ‘사람 죽이는 훈련’을 아무렇지도 않게 하면서 우리 스스로 이 땅 젊은 넋을 살인기계이자 바보로 만드는 틀거리가 그대로 이어지는 가운데 ‘대체복무제’가 하나도 없다면, 우리 나라 앞날이 어찌 될는지 걱정과 근심일 뿐입니다. 권력자한테는 젊은 넋이 모두 깨어 ‘권력이 썩지 않도록 일어서는’ 일이 걱정과 근심일는지 모르나, 이 나라와 삶터를 돌아본다면, 젊은 넋은 ‘살인기계 훈련’이 되도록 할 일이 아니라 ‘참다이 나라를 사랑하는’ 마음과 몸을 기르고 다스리도록 이끌어 주어야 합니다.

 따뜻한 손길을 바라는 외로운 어르신이 얼마나 많습니까. 일손이 모자란 공장과 농촌이 얼마나 많습니까. 젊은 넋이 세상을 더 알뜰하고 애틋하게 껴안거나 부대끼도록 하자면, 이 젊은 넋들 손을 ‘참다운 땀방울 흘리는 곳’으로 돌려놓아야지 싶습니다. 젊은 넋이 총칼 훈련 받을 시간에, 시골 논밭에서 손농사를 짓도록 하면, 우리 나라 농업은 100% 유기농으로 바꾸는 한편, 나라밖에서 곡식과 푸성귀를 사들이지 않아도 얼마든지 넉넉할 수 있습니다. 젊은날, 공장에서 일하면서 ‘물건 하나 만들기까지 얼마나 어려운가’를 몸소 배울 수 있고, 이 젊은이들이 새벽녘 길거리 청소를 해 보면서 ‘우리가 술주정을 하면서 길을 마구 더럽히거나 쓰레기 함부로 버리는 일이 동네를 어떻게 망치는가’를 헤아릴 수 있습니다.

 이 땅 모든 아들들은 《돌아오지 않는 내 아들》이 되어서는 안 되는 한편, 또래 동무들뿐 아니라, 이 나라 절반을 차지하는 딸들한테 사랑스러운 벗님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지금 같은 군대 틀거리로는 이 땅 모든 아들들은 이태 동안 영 글러먹은 머저리나 깡패가 되어 갈 뿐입니다. (4342.2.5.나무.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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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은 못 봐도 정의는 본다 - 일본 최초의 시각장애 변호사 다케시타
고바야시 데루유키 지음, 여영학 옮김 / 강 / 2008년 11월
평점 :
절판




 장애인이 살 수 없는 나라, 한국
 [잠깐 읽기 22] 고바야시 데루유키, 《앞은 못 봐도 정의는 본다》


- 책이름 : 앞은 못 봐도 정의는 본다
- 글 : 고바야시 데루유키
- 옮긴이 : 여영학
- 펴낸곳 : 강 (2008.11.28.)
- 책값 : 12000원



 (1) ‘루이 브라이’ 우표와 ‘박두성’ 기념관


 올 1월 2일, 2009년 첫 우표가 나왔습니다. 고등학생 때까지 즐겨하던 우표모으기를 이제는 거의 못하지만, 이날만큼은 우표 나오기를 손꼽아 기다렸고, 우체국에 달려가 전지 두 장을 삽니다. 우체국 아저씨는 언제나 그러하듯, 우표 설명쪽지와 함께 전지 두 장을 건네주고, 어떤 기념우표인지는 딱히 살피지 않습니다. 전지 두 장을 받아들고 들떠 있던 저는, “아저씨, 이번에 나온 우표는 아주 대단한 우표예요.” 하고 말을 겁니다. “그래요? 어떤 우표인데요?” “이번 우표는 점자를 만든 사람이 나왔거든요.” “아, 그래요? 어디 한 번 봐야겠네.”


.. 다케시타는 대학 시절에 현재의 아내인 도시코와 결혼했다. 결혼을 앞두고 신부 집안의 반대에 부딪혔다. 앞을 보지 못하는 데다, 그때까지 시각장애인이 사법시험에 응시한 전례조차 없는 상황에서 변호사가 되겠다고 주장하는 다케시타와의 결혼을 반대하는 건 어쩌면 부모로서 당연한 일이었다. 그럼에도 결혼을 강행했고, 얼마 지나지 않아 아이가 태어났다. 한 가정의 가장이 된 다케시타는 사법시험을 준비하면서 안마 아르바이트까지 해 가며 가정을 꾸려 나가야 했다. 병원에서 신생아 안마도 하고 여관의 호출을 받고 노인들을 상대로 마사지도 했다. 되돌아보면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여러 사람들을 안마하며 나눈 소통의 경험이 후에 변호사 활동을 하는 데 커다란 밑거름이 되었다. 병원에서 안마를 할 때는 ‘선생’으로 불렸지만 여관에 가면 ‘안마사’가 되었다. 사회라는 게 이런 곳인가 싶었다 ..  (26∼27쪽)


 1월 2일 우표는 ‘루이 브라유 탄생 200주년’을 기립니다. 이름을 보고는 ‘응? 루이 브라유?’ 하고 한동안 고개를 갸우뚱갸우뚱했습니다. 1999년에 옮겨진 《루이 브라이》(다산기획/마가렛 데이비슨 씀)라는 책과 2007년에 옮겨진 《루이 브라이, 점자로 세상을 열다》(보물창고/데이비드 애들러 씀)라는 책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2008년 5월에 나온 《세상 밖으로》(큰북작은북/러셀 프리드먼 씀)라는 책에서는 ‘루이 브라유’로 적습니다. 이제까지 ‘어니스트 톰슨 시튼’이라고 잘 말하고 있던 사람이름이 하루아침에 슬그머니 ‘어니스트 톰프슨 시턴’으로 바꿔 적도록 되었듯, ‘루이 브라이’로 오래도록 알려지고 사랑받은 사람이름 또한 하루아침에 살며시 ‘루이 브라유’가 된 듯합니다.

 아무래도 정부에서 내놓는 외래어적기법에 따라서 바꾸었구나 싶습니다. 하루아침에 제대로 알리지 않으며 이처럼 외래어적기법에 따라 사람이름을 쉽게 고쳐 버리는 일이 얼마나 옳으냐 싶은 한편, 이렇게 사람이름을 고치면서 ‘이름 고친 그 사람’이 한 일과 발자취는 제대로 헤아리고 있는지 궁금해집니다. 사람이름을 올바르게 고치자면, 누구보다도 ‘반 고흐’라는 그림쟁이 이름도 고쳐야 합니다. 정부가 내세우는 ‘원음주의’에 따르면, 네덜란드사람인 ‘Van Gogh’는 ‘퐌 호흐’입니다. 우리들이 익히 ‘히딩크’라 말하는 네덜란드사람 또한 ‘히딩끄’입니다. 이준 열사가 죽은 곳은 ‘헤이그’가 아닌 ‘덴 하흐(Den Haag)’이고요.

 외래어적기법에 따르도록 한다면 꼼꼼히 살피며 제대로 추스를 노릇입니다. 외래어적기법에 따라 나라밖 사람들 이름을 고치는 일은 잘못이 아니라고 느낍니다. 그러나, ‘루이 브라이’라고 하는 사람이 무슨 일을 왜 했는지를 가만히 살피면서 이이 이름을 고쳐쓰도록 하려는 국어학자 매무새인지, 그저 이름만 뚝딱하고 고치라 하면 그만이라고 여기는 정부 관리 움직임인지 잘 모르겠습니다.


.. “다케시타, 힘들 텐데 졸업식에는 안 와도 된단다.” 그제서야 다케시타는 앞을 보지 못한다는 게 얼마나 엄청난 일인지를 겨우 깨닫게 되었다. 귀로 수업을 들을 수는 있지만 시험을 볼 수 없었고, 선생님들은 수업을 빠져도 된다, 졸업식에 안 나와도 된다, 하는 말을 예사로 했다. 하지만 다케시타는 되받을 말이 없었다. 그저 알았습니다, 하고 대답하는 수밖에 ..  (48쪽)
 





 서양에 루이 브라이 님이 있으면, 우리 나라에는 박두성 님이 있습니다. 루이 브라이 님은 알파벳 점글을 만들었고, 박두성 님은 한글 점글을 만들었습니다. 지난 2008년은 박두성 님이 태어난 120돌이 된 해였습니다. 이해를 기리며 인천문화재단에서는 여러모로 잔치를 벌였습니다. 박두성 님이 한글 점글을 내놓은(‘훈맹정음’이라는 이름으로) 때는 1926년 11월 4일이라고 합니다. 까마득한 일제강점기 때에, 앞 못 보는 이들한테 빛줄기 하나를 나누고픈 마음으로 일한 셈입니다.

 그렇지만, 나라에서 문화인물로 뽑아 주고 박두성 님 기리는 위인전 몇 권 나오기도 하는 오늘날이라 하여도, 정작 인천에서 박두성 님 발자취를 찾아보기란 어렵습니다. 강화섬에 기념관이 마련되었으나, 정작 인천 율목동에 있던 집은 허물려 없어졌고, 박두성 님이 점글을 만들어 점글책을 만들 때 고되게 점글찍기를 돕던 따님(박정희) 사는 집(인천 화평동/평안수채화의 집) 둘레도 아파트 세우는 재개발을 한다면서 말이 많습니다. 박두성 님 따님인 박정희 님은 나라와 인천시를 믿을 수 없어 당신 스스로 그 집을 지키면서 아버지와 당신이 살아온 발자취를 그러모아 박물관을 만들어 놓고 하늘나라로 떠날 마지막꿈 하나를 간직하고 있습니다.


.. 대학은 시각장애인의 입학을 허가해 주기는 했지만 수업 시간에 쓰는 교과서와 참고서를 시각장애인용 점자 책으로 준비하지는 않았다. 점자 교과서는 스스로 만들어야 했다 … 다케시타는 어떻게든 사법시험에 합격하고 말겠다는 의욕은 강했지만, 막상 공부에는 손을 대지 못하고 있었다. 점자 시험 도입을 추진하기 위한 교섭과 회의에 너무 많은 시간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마사지 아르바이트를 중단할 수도 없었다. 법무성과 교섭을 하면서 마사지 아르바이트를 하다 보니 이런 생각이 들었다. ‘시각장애인이 사법시험을 볼 수 없다는 건, 바꾸어 말하면 이 나라에서 시각장애인은 안마사 말고는 아무 일도 하지 말라는 것과 마찬가지잖아.’ ..  (71∼72, 96쪽)


 올 2009년은 인천시에서 ‘인천관광의 해’이자 ‘인천세계도시축전’이 벌어지는 해라면서 적잖은 돈과 품을 들이고 있습니다. 시에서 말하는 ‘관광’과 ‘도시축전’이 무엇인가를 들여다보고 유인물을 살피고 인터넷방에 들어가면, 오로지 상품만 있습니다. 돈을 들여서 쓰고 버리는 상품 아니고는 없습니다. 무엇 하나 즐겨도 돈을 들여야 하고, 무엇 하나 보려 해도 돈을 바쳐야 합니다.

 관광이 문화가 아닌 산업이 된 지 오래라, 인천이 아닌 다른 곳에서 이와 같은 잔치판을 벌여도 마찬가지가 되리라 생각합니다. 그런데 문화 없는 상업(또는 산업)만 있다면, 더욱이 문화를 ‘문화산업’이라는 허울좋은 이름으로 뒤집어씌운다면, 이러는 가운데 인천이라는 곳에서 뿌리내리며 살았고 뿌리내리며 힘썼고 뿌리내리며 어깨동무했던 숱한 사람들 발자취를 톺아볼 자리가 하나도 보이지 않는다면 어떡해야 할는지요.

 박두성 님뿐 아니라, 조봉암 님이나 함세덕 님이나 현덕 님이나 이승엽 님이나 김동석 님 같은 사람들을 기릴 만한 마땅한 집 한 채 없는 인천입니다(어쩌면 이런 이름이 한국사람들한테는, 무엇보다 인천사람 스스로한테 너무 낯선 이름일는지 모릅니다. 아마도 야구선수 이승엽만 알 테지요). 한국을 식민지로 삼거나 짓누르려 했던 일본사람과 서양사람들 쓰던 건물과 집과 별장 들을 수십 억을 들여 되살리는 일을 ‘역사복원’이라고 이름붙이면서, 정작 우리 스스로 독립을 이루려 애쓸 뿐더러, 여느 사람들 삶과 문화를 북돋우고자 땀흘린 이들은 내팽개치거나 모르쇠를 하거나 아예 ‘있던 생가마저 허물’기까지 한다면, 무슨 관광이 즐거우며 어떤 축전이 보람찰까 궁금합니다. 그러나, 지금 우리들은 사고 쓰고 먹고 마시고 버리고 하는 일이 관광이고 문화라고 생각하는 데에 길들여져 있고, 이런 틀에서 벗어날 생각을 스스로 품지 않습니다.
 





.. “나는 앞을 못 보는 장애인이야. 세상 사람들은 장애인을 그저 눈이 안 보인다, 귀가 안 들린다, 다리를 못 움직인다고만 생각하지. 하지만 눈이 보이지 않고 귀가 들리지 않는 사람들이 일상생활에서 실제로 어떤 고생을 하는지 사람들은 잘 모르는 것 같아 … 변호사가 장애인의 심정을 제대로 이해하려 하지 않고 법률의 테두리 안에서만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면 제대로 일을 해낼 수 없을 거야.” ..  (109, 142쪽)


 버스를 타거나 전철을 타면서, 이 버스와 전철에 앞 못 보는 사람이 얼마나 탈 수 있을까 늘 궁금합니다. 앞을 보는 저조차, 거칠게 달리며 흔들리는 버스에서 선 채로 몸을 버티기란 쉽지 않습니다. 아기를 안고 타도 자리 얻기가 어려운데, 앞 못 보는 사람임을 여느 사람이 알아본다 한들 거친 버스에서 걱정없이 다니라며 자리를 내어줄 마음그릇 되는 분이 얼마나 될까 궁금하지만, 이보다, 버스역이 비장애인한테도 버스 잡아 타기에 퍽 나쁩니다. 버스역 길이가 짧기도 하지만, 택시와 짐차를 비롯한 다른 승용차가 으레 버스역에 버티고 서 있기 일쑤이고, 버스 여러 대가 한꺼번에 들어오면 뒤에 들어오는 버스를 알아보기 힘들고 놓치기 쉽습니다. 버스 문이 열리면 우루루 몰려들어 새치기하느라 다투는 사람은, 힘여린 사람이나 어린이나 늙은이를 모시지 않습니다. 바퀴걸상을 타고 전철을 타려는 사람은 아주 긴 시간에 걸쳐 오르내리는 리프트를 기다리느라 애먼 시간을 길에서 버려야 합니다. 요즘 지하철이 오죽 땅속 깊이 들어가 있으며, 리프트는 얼마나 느릿느릿 움직입니까.

 문득, ‘관광의 해’니 ‘세계도시축전’이니 외치면서, 비장애인 아닌 장애인이 함께 즐길 수 있는 데에 얼마나 마음을 쏟는지 궁금해집니다. 행사 안내글을 앞 못 보는 사람이 볼 수 있게끔 점글로도 찍어서 나누거나 소리로 들을 수 있도록 만들어 놓은 테이프가 있는지, 나라 안팎에서 장애인들이 나들이를 와 즐긴다고 할 때에 얼마나 수월하고 거뜬하도록 시설을 마련했는지 궁금해집니다.

 따지고 보면, 관보와 신문기사도 점글로 함께 내놓아 주어야 합니다. 방송은 스물네 시간 모든 풀그림에서(하다 못해 새소식 알리는 때라도) 화면 아래쪽에 손말 하는 사람이 나와서 이야기를 들려주어야 합니다. 또는 모든 말을 자막으로 함께 보여주거나. 승강기에만 층수 단추에 점글을 새길 노릇이 아니라, 아파트 들머리에 ‘이곳이 몇 동으로 가는 길목이고 이 앞은 몇 동인지’ 알 수 있도록 똑같은 자리에 어린이와 어른 키높이에 맞추어 점글로 된 알림판을 세워 놓아야 하고, 비장애인이 다니는 모든 길목에 ‘지금 이 자리는 무슨 구 무슨 동 몇 번지이며 갈래에 따라 어디로 갈 수 있다’고 밝히는 알림판을 세워 주어야 합니다.


.. 도쿄에서 다케시타 외에도 두 명의 시각장애인 수험생이 사법시험에 응시했는데 다 같이 낙방하고 말았다. 몇 안 되는 시각장애인 수험생들은 쉽게 가까워졌다. 서로 편지를 주고받게 되었는데 문제지에 오자와 탈자가 많다는 게 공통된 화제였다. 법무성에 문의했더니 오탈자 때문에 정정해야 할 문항이 열세 군데나 되었다고 시인했다. ‘잘못된 문제가 열세 개나 됐다면 당락에 영향을 주기에 충분하잖아! 일반 대학시험에서 틀린 문제가 열세 문항이었다면 재시험을 보든지 무효로 처리했을 거야! 시각장애인이니까 열세 군데나 틀렸어도 그대로 두는 거 아냐!’ ..  (183쪽)


 우리가 장애 있는 사람한테 마음쏟는 일은, 몸 어디가 다치거나 아픈 사람한테만 마음쏟는 일로 그치지 않습니다. 힘(권력)이 없거나 여린 이한테 마음쏟는 데로 이어지고, 돈이 없거나 적은 사람한테 마음쏟는 데로 뻗치며, 가방끈 짧은 사람한테 마음쏟는 데로 옮아갑니다.

 서울 용산 철거민을 비롯해 전국 모든 곳 철거민과 ‘재개발대상지역 주민’ 모두 자기한테 포근한 보금자리에서 자기 주머니에 알맞게 살림을 꾸릴 권리가 있습니다. 길은 자동차가 달릴 권리만이 아닌 자전거가 함께 달릴 권리가 마땅히 있을 뿐더러, 걷는 사람한테도 권리가 있습니다. 걷는 사람에는 몸 튼튼한 어른뿐 아니라 몸 여린 어른과 키 작은 어린이와 늙은 어른이 함께 있습니다.

 나라에서는 길알림판에 알파벳을 적어 넣을 뿐 아니라 한자까지 적어 넣느라 수 조에 이르는 돈을 바쳤습니다. 그런데, 길알림판에 점글을 함께 적으면서 앞 못 보는 이들이 알아보기 좋도록 했다는 소식은 아직 들은 적 없습니다. 전국 동사무소가 ‘동주민센터’로 이름을 바꾸며 어마어마한 돈을 들이기는 해도, 동사무소에 ‘점글로 된 안내책자’ 하나 번듯하게 놓인 모습은 이제까지 못 보았습니다. 건널목 가운데 띄엄띄엄 ‘소리가 나서 앞 못 보는 이들한테 도움 주는 곳’이 있습니다만, 건널목 푸른불 신호는 비장애인이 건너기에도 짧습니다. 이런 일을 모르는 분보다 아는 분이 훨씬 많을 텐데, 우리네 뒤틀리거나 엇나간 모습이 쉬 고쳐지지 않습니다. 이런 일을 익히 아는 분들이 새로 공무원이 되고 국회의원이 되지만, 정작 우리 사회 아쉬움과 모자람은 나아질 낌새가 보이지 않습니다.


 (2) 장애인이 살 수 없는 나라, 한국


 《앞은 못 봐도 정의는 본다》는, 일본에서 ‘앞 못 보는 사람으로서는’ 맨 처음으로 변호사가 된 다케시타 요시키라고 하는 사람을 다룬 이야기책입니다. 일본은 우리와 견주어 문화와 복지가 훨씬 앞서 있는 나라이기는 하지만, ‘1970년대까지는 점글로 된 법전이 없었다’고 합니다. 이제 일본은 이런 점글 법전이 있으며, 다케시타 요시키라고 하는 이는 ‘사법고시를 점글로 칠 수 있도록’ 시험제도를 고쳤고, 다케시타 님 뒤를 이어 변호사가 되는 ‘앞 못 보는 사람’이 하나둘 나오고 있다고 합니다.


.. 사람들과의 만남도 소중하지만, 다케시타에게는 점자와 맺은 인연이 그에 못지않게 중요하다. 점자를 손끝으로 더듬어가며 법률 공부를 한 것은 일본에서는 다케시타가 처음이었다 … 그러면 점자 육법전서는 어떻게 되어 있을까? 일반 서점에서는 점자 육법전서를 취급하지 않는다. 재단법인 일본점자협회를 통해서만 구입할 수 있다. 또한 책상에 올려놓을 수 있는 한 권짜리 책으로는 나와 있지도 않다. A4 크기의 종이 50쪽 분량으로 된 책이 51권이나 되며 책값도 12만 엔에 달한다. 일반 가정집의 안방을 꽉 채울 만한 분량이다 … 다케시타가 사법시험을 준비하던 1970년대 초만 해도 일본에는 점자 육법전서는커녕 점자로 된 법률 서적조차 없었다. 시각장애인용으로 나온 육법전서나 법률서적을 녹음한 카세트테이프도 물론 없었다. 수요가 별로 없기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시각장애인은 사법시험에 도전할 수 없다’는 사회적 편견도 작용했을 것이다 ..  (27∼30쪽)


 우리 나라를 생각해 봅니다. 우리 나라에는 점글로 된 법전이 있을까요. 녹음테이프로 된 법전이 있을까요. 법전까지는 아니더라도 온갖 안내글 가운데 점글로도 된 서류는 얼마나 될까요. 그 흔한 ‘손전화 가입신청서’ 가운데 점글로 만들어진 안내글은 있기나 한지 모를 노릇입니다. 은행에서 통장을 만들고 신용카드를 만들 때, 점글로 읽을 안내글이 있는지 모를 노릇입니다. 앞 못 보는 이들이 읽고 배울 수 있게끔, 우리 나라 역사와 문화와 사회와 정치와 경제와 과학 이야기를 다룬 점글책은 몇 권쯤 도서관에서 갖추고 있는지 모를 노릇입니다. 앞 못 보는 이들이 나라밖 말을 배울 수 있게끔 도와주는 점글 교재는, 또 점글로 된 영한사전이나 일한사전은 한 권이나마 있는지 모를 노릇입니다.


.. “선생님, 전 대학에 가겠습니다. 제가 하고 싶은 일과 꿈을 이루기 위해 대학에서 공부를 할 겁니다.” 다케시타는 막힘없이 시원시원하게 말했다. 그 어떤 머뭇거림도 없었다. “그래, 대학에서 무얼 공부하기로 결정했니?” “법학부에 가서 법률을 공부하고 싶습니다.” “법학부? 법학부를 나와서 무슨 일을 하려고?” 다케시타는 주눅 들지 않고 말했다. “전 변호사가 될 겁니다.” 담임선생님이 어이가 없어 입을 벌렸는지 어쨌는지는 알 수 없지만, 그 비슷한 표정을 지어ㅏㅆ으리라는 건 짐작하고도 남을 일이다. “멍청한 녀석! 꿈같은 소리를 하고 있군. 그건 허공에 집을 짓겠다는 거나 다름없어.” 이미 예상했던 반응이었다. 그러나 그 시점에선 웅변부에서 말솜씨를 연마한 다케시타가 한 수 위였다. “선생님, 저는 꿈에 대해 말하고 있는 거예요.” ..  (58∼59쪽)


 ‘장애인’이라 하면, 으레 ‘비장애인이 도와주어야 할 사람’으로 여깁니다. 아무래도 어릴 적부터 이런 생각에 길들여지고, 학교에서도 이처럼 가르치기 때문입니다. 학교라는 데가 오로지 비장애인만 다니도록 짜인 가운데, 학교 틀거리와 교과서도 비장애인이 배우는 데에만 맞춰져 있고, 교사들은 비장애인을 가르치는 솜씨만을 교대와 사대에서 익힙니다. 장애 있는 아이를 낳을 수 있을 뿐더러, 우리는 언제라도 사고가 나서 장애인이 될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장애 있는 아이를 키우도록 찬찬히 이끌어 주는 책이나 이웃은 찾아보기 어려운 가운데, 장애인과 비장애인 사이에 울타리를 높이기만 하는 우리 사회입니다.

 장애인이 살기 팍팍하면 비장애인도 살기 팍팍한 줄 깨닫지 못합니다. 적게 배운 이가 살기 팍팍하면 많이 배운 이도 살기 팍팍한 줄 느끼지 못합니다. 힘여린 이와 돈없는 이가 살기 팍팍하면 힘있고 돈있는 이 또한 살기 팍팍한 줄 알지 못합니다.

 비정규직이 살기 팍팍한 세상에서 정규직이라고 살기 좋을까요? 이주노동자가 살기 팍팍한 세상에서 한국노동자가 살기 좋을까요? 《앞은 못 봐도 정의는 본다》는 책이름마따나, 세상이 이렇게 흘러가는 모습을 보면서, 이 나라 한국이 어떤 나라인지 또렷하게 말할 수 있습니다. 한국은 장애인은커녕 비장애인도 살기 나쁜 나라라고. 한국은 올바르지 못한 나라라고. 정치꾼만 올바르지 못한 나라가 아니라, 바로 우리 스스로도 올바르지 못한 사람으로 이루어진 나라라고. (4342.1.28.물.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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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겹도록 고마운 사람들아 - 이소선, 여든의 기억
오도엽 지음 / 후마니타스 / 2008년 12월
평점 :
절판


(사진은 오도엽 님이 찍었고, 후마니타스 출판사에서 보내 주었습니다. 문익환 목사님과 함께 있는 사진은 누가 찍었는지 잘 모른다고 합니다.)  




 이 책 하나 87 ― 이소선은 ‘어머니’, 전태일은 ‘아들, 형, 오빠’
 : 오도엽, 《지겹도록 고마운 사람들아》


- 책이름 : 지겹도록 고마운 사람들아, 이소선 여든의 기억
- 글 : 오도엽
- 펴낸곳 : 후마니타스 (2008.12.5.)
- 책값 : 12000원



 (1) 이야기를 나누는 삶


 아기 엄마는 아기를 어르며 함께 놀 때 끊임없이 노래를 불러 주고 이야기를 건넵니다. 아기 할머니도 아기를 어르며 함께 놀 때 부지런히 노래를 불러 주고 말을 붙입니다. 아기 이모도, 아기 아빠도 마찬가지입니다. 아기 외삼촌은 아직 노래나 말걸기를 그닥 하지 않지만, 아기를 귀여워하기는 매한가지입니다.

 어느 어버이이든, 자기 아이를 돌보고 키우는 동안 쉴 틈 없이 달래고 안고 먹이고 재우고 입히고 합니다. 이렇게 살과 살이 맞닿으면서 함께해야 아이는 사랑을 느끼고 믿음을 받으며 튼튼한 사람으로 거듭나게 됩니다.

 아이 돌보는 일은 다른 누구한테 맡길 수 없습니다. 아이와 한식구라고 느끼는 이들이 다 함께 돌보아야 합니다. 아이 엄마와 아이 아빠 가운데 어느 한쪽이 도맡을 수 없습니다. 맞벌이하느라 바빠서 할머니 할아버지한테 맡긴다거나 돈을 주고 다른 사람한테 맡길 수 없습니다. 아이한테 먹이는 밥은 어버이 사랑이 담겨야 하고, 아이한테 입히는 옷은 어버이 믿음이 스며야 하며, 아이하고 놀며 지내는 집은 어버이 삶이 깃들어야 합니다. 때때로 어쩔 수 없이 돈을 주고 남한테 맡긴다고 하지만, 어쩔 수 없다는 말은 거의 모두 핑계가 아닌가 하고 생각합니다. 하나하나 헤아리면 아이 키우기뿐 아니라 밥하고 빨래하고 치우고 하는 집일부터도, 나아가 밥거리와 옷거리를 마련하는 일부터도, 돈을 벌든 곡식을 벌든 땀흘려 애쓰는 일거리부터도, 우리 스스로 하고 우리 몸을 움직여서 해야 합니다. 누가 해 줄 수 없는 일이며, 누가 즐겨 줄 수 없는 놀이입니다.


.. 전태일과 이소선은 밤마다 참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고 한다. 피를 토하던 미싱사 이야기, 배고픈 시다들 이야기, 헌옷을 사고팔던 이야기, 사람을 만날 때 기쁘고 슬펐던 이야기……. 이소선은 그 밤과 그 이야기들을 애타게 그리워하며 잠들지 못한다 … 태일은 아무리 피곤해도 집에 오면 이소선에게 이것저것 캐물었다, 이소선이 말을 하면 ‘그랬군요’ ‘힘드셨겠네요’ ‘잘하셨어요’하며 맞장구를 쳐 주었다. 태일이도 하루 동안 있었던 일을 이소선에게 빠짐없이 이야기했다. 태일은 옳은 게 무엇인지, 그른 게 무엇인지 조리 있게 말할 줄 알았다. 어린 여공들이 졸린 눈을 비벼 가며 일하다 다리미에 화상을 입은 일이며, 먼지가 많은 곳에서 일하다 보니 폐병에 걸려 피를 쏟으며 병원에 가는 이야기, 작업반장에게 욕먹고 훌적이는 이야기……. 태일에겐 그 모든 것들이 그냥 지나칠 수 없는 일이었다 ..  (34, 35, 53쪽)


 하루 내내 아이와 함께 있으면서 아이 눈높이에 맞게 놉니다. 아이가 우리 어른 말을 알아듣는지 못 알아듣는지는 모릅니다. 말길을 모두 알아듣든 말든, 아이가 마음으로 어버이 사랑을 느끼고 어버이 믿음을 새길 수 있으면 넉넉하다고 봅니다.

 아침부터 밤까지, 또 새로운 아침부터 새로운 밤까지, 그리고 다시 새로운 아침부터 새로운 밤까지, 내내 옆지기하고 붙어 지냅니다. 집에서 일하고 집에서 살림을 꾸리고 집에서 아기와 함게 노니 늘 함께 있습니다. 저잣거리 마실을 가도 함께 다니고, 골목마실을 하며 사진을 찍어도 함께 움직이며, 책방 나들이를 해도 함께 돌아다닙니다. 요사이는 아기 때문에 때때로 혼자 다니게 될 일이 생기는데, 혼자 다니게 되든 함께 다니게 되든 부지런히 이야기를 주고받습니다. 찻길이 시끄러우면 입을 닫아야 하고, 먼지 뿌연 길가를 지날 때에도 입을 막아야 하지만, 많이 꺼내고 나누는 말이 못 될지라도 늘 보고 지내는 사이라 해도 이야기를 나눕니다.

 “배고파? 밥할까?” 하는 이야기부터, “오줌 눴네. 기저귀 갈아야겠네.” 하는 이야기까지, 그저 말없이 지나칠 수 있는 일이 많지만 끊임없이 이야기를 나눕니다. 옆지기는 잠깐 옥상마당에 나가 머리카락을 빗으면서 아래층 옥상마당에서 노는 길고양이를 부르기도 하고, 집으로 돌아와 아기한테 고양이하고 이야기나눈 일을 또 이야기합니다. 그림책을 펼치며 읽어 주기도 하고, 아기가 끼악끼악 소리를 질러대며 좋아하면, 그림 하나하나가 어떤 모습을 담아냈는지 찬찬히 거듭 들려줍니다.


.. 형사들은 이소선이 마치 간첩인 것처럼 동네 사람들에게 소문을 퍼뜨렸다. 이소선의 집에는 얼씬도 하지 못하게 엄포를 놓았다. 남산동 화재 이후 십수 년을 함께 울고 웃고 하던 이웃들이라 이소선을 간첩이라고 믿지는 않았다. 하지만 이소선 집 앞에 초소까지 세워 두고 감시하는 판이라, 동네 사람들은 순덕이가 혼자 있는 줄 알면서도 들여다볼 엄두도 내지 못했다 ..  (168쪽)


 어제 낮, 동네 이웃집에 갑니다. 우리 동네 골목집과 골목집 사이를 쪽 째어 인천 서남쪽 새도시와 인천 서북쪽 새도시를 잇는다는 ‘1자로 된 산업도로(알고 보면 고속도로)’를 반대하는 일에 처음 불씨를 당긴 아주머니 세 분이 모여 그동안 걸어온 길을 되짚는 이야기를 나누시는데, 옆에서 이 이야기를 녹음하고 타자로 받아 옮깁니다. 세 시간 남짓 손 아프고 팔 아프도록 타자로 옮기는데, 아주머니들은 산업도로와 얽힌 인천시 공무원들 안타까운 모습을 꾸짖는 가운데, 부지런히 당신들 삶을 끄집어내어 나눕니다. 항암치료 받던 이야기, 당신 늙으신 어머니 돌아가신 이야기, 당신들 어머니가 거쳐간 그 환갑 나이에 이제 당신들도 접어들게 된 이야기, 당신들 아이 키우는 이야기, 이 동네에서 살아온 이야기, …….

 생각해 보면, 우리가 일과 일로 만나는 사이라 해도, 사람과 사람으로도 이야기를 나누게 됩니다. 일 때문에 전화를 걸어도 안부를 한두 마디 묻곤 하며, 일 때문에 편지를 쓰더라도 안부인사를 꼭 넣습니다.

 그저 인사치레라 할 수 있지만, 한낱 인사치레만은 아니라고 느낍니다. 우리는 딱딱한 기계가 아니라 포근하고 따뜻한 가슴으로 살아가는 사람이라서 나누게 되는 이야기가 아닌가 싶습니다. 낯모르는 사람이건 낯익은 사람이건, 누구나 우리 이웃이며 우리 동무이며 어버이이자 동생이기도 하기 때문에 주고받게 되는 이야기라고 느낍니다.


.. “남들이 다 장기표 욕을 한다 해도 나는 절대 못한다. 난 장기표 편이다. 진짜 잘됐으면 한다. 정치에 뛰어들었으니까 정말 국회의원 뱃지라도 달았으면 한다. 김문수처럼 한나라당에 들어가서 대가리 숙이더라도 국회의원 한번 했으면 좋겠다.” “진심이야?” “썩을 놈, 꼭 그 따위로 말하지.” 장기표가 그럴 사람이 아니라는 걸 알기 때문에 내게 이리 말한다는 것도 알고 있다. 그러나 이소선은 진심이다. 김문수에 대해서도 그렇다. 한나라당에 갔다고, 하는 꼴이 개판이라고 욕을 하면서도 텔레비전에 김문수가 나온다면 볼륨을 높인다. “효도하던 자식이 불효한다고 내칠 수 있냐. 만나서 야단치고 달래고 회초리를 들기도 하고 어르기도 해야지. 또 잘난 자식 있으면 못난 자식도 있는 법 아니냐.” 자식 앞에 약해질 수밖에 없는 여느 어머니의 마음과 다르지 않다. 이소선을 아끼는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이 다 그리 말해도 이소선은 이런 말을 해서는 안 된다고들 한다. 하지만 이소선에게는 장기표도 김문수도 모두 친자식과 같다. 한 번 맺은 인연은 절대 버리지 못하는 ‘보통 어머니’가 되고 만다. 그래서 이소선은 ‘투사 이소선’도 ‘노동운동가 이소선’도 ‘민주 인사 이소선’도 아닌, 그냥 ‘어머니 이소선’에 평생 머물 것이다. 그래서 안타깝고 그래서 존경한다. “손가락질을 해도 어쩌냐. 나한테는 태일이만큼 소중한 사람들인데 말이야.” ..  (178쪽)


 아기랑 쉴 새 없이 이야기 나누는 옆지기는 아기가 하는 말을 알아들을까요? 글세, 알아들으려나? 거꾸로 보면, 아기는 우리 어른들이 하는 말을 다 알아듣는지 모를 노릇이고, 외려 우리 어른들만 아기가 하는 말을 못 알아듣는지 모릅니다. 아기들은 끊임없이 지 어버이한테 말을 거는데, 우리 어버이 된 사람들은 ‘옹알거리지만 말고 말을 해야지’ 하면서, 옹알거림에 담긴 속내와 이야기는 알아채지 못하는지 모릅니다.
 





 (2) 민주가 없는 나라에는 평등도 평화도 없는데


.. “지금 민주네 무슨 봄이내 하며 박정희의 죽음에 들떠 있을 때가 아닙니다. 다시는 독재가 활개를 치지 못하게 끝장을 내야지요. 나는 우리가 싸우지 않고는 절대 민주주의가 오지 않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저 독재놈들이 민주주의를 낼름 내줄 것 같습니까. 절대 호락호락 내주지 않습니다. 머리로만 생각하고 입으로만 떠들 때가 아닙니다. 난 배우지 못했지만 싸워야지 이길 수 있다는 것은 몸으로 알고 있습니다.” ..  (183쪽)


 올해 중학교에 들어가는 처제는 학교옷을 맞추어야 합니다. 일산에 있는 중학교는 거의 모두 학교옷이 있다고 합니다. 우리가 사는 인천에 있는 중학교 아이들도 거의 모두 학교옷을 입지 싶습니다. 인천뿐 아니라 서울도 거의 다, 아니 우리 나라 전국 곳곳에 있는 학교라면 으레 학교옷을 맞추게 하여 입힙니다. 학교옷을 안 맞추게 하는 학교는 손가락에 꼽을 만큼 드물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런데 이렇게나 많은 아이들이 학교옷을 맞추어서 입어야 한다는데, 학교옷 값은 장난이 아니도록 비쌉니다. 온삶에 걸쳐서 입는 옷이 아니요, 고작 세 해 입고 버려지는 옷임에도 싸야 20만 원이고, 50만 원을 웃돌기도 합니다. 그리고 이 모든 옷값은 학교에 보내는 어버이가 모두 짐을 져야 합니다. 반드시 학교옷을 입혀야겠다면 입힐 노릇이지만, 이와 같은 옷은 옷을 입히려는 학교나 나라(정부)에서 대주어야 하지 않느냐 싶어요. 개인옷을 입도록 한다면 마땅히 개인이 마련해야 할 일이고, 학교옷을 입도록 한다면 마땅히 학교가 마련할 일이 아닐까요. 어느 회사에서 회사옷을 개인이 사서 입으라고 합니까. 회사를 다니면서 입는 일옷은 회사가 대어 줍니다. 맞추어 줍니다. 마땅하지요. 그 회사를 돋보이게 하든, 그 회사에 있는 동안 잘 알아보도록 할 생각이든 회사는 회사 몫이 있습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학교는 학교 몫이 있어요. 아이들이 입을 학교옷은 학교에서 사들여서 아이들 몸크기에 따라 나누어 준 뒤 돌려받아야 합니다. 그리고, 학교옷 빨래는 학교에서 해야 하고, 아이들은 개인옷을 입고 학교에 와서 학교옷으로 갈아입도록 해야겠지요. 이렇게 하지 않으면 아이들은 누구나, 또 아이를 키우는 어버이는 어느 집이나 옷값이며 책값이며 부교재값이며 사교육비며 …… 진저리를 치고 주름살이 늘밖에 없습니다.


.. “저는 배운 게 없어 어떻게 말씀을 드려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제가 듣기에는 다 옳으신 말씀들 같습니다. 제 짧은 생각에는 노동자의 장례식에서 외칠 구호는 노동자들이 무슨 뜻인지 알고 함께 외칠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너무 앞선 이론을 내세우면 아직 깨우치지 못한 노동자들이 따라가기 어렵지 않을까요. 먼저 지식을 배워서 안다고 권위를 가지고 가르치려고 하면 노동자들이 쫓아가지 못합니다. 부족한 지식을 가진 노동자의 엄마가 쓸데없는 말 한다고 여기지 말고 한 번 더 생각해 주세요.” ..  (230쪽)


 어제부터 《당신에게 말을 걸다》라는 사진이야기책을 읽고 있습니다. 이 책을 쓴 백성현 씨는 한때 춤노래를 하던 ‘코요테’에서 뛰기도 했는데, 어릴 적부터 사진찍기를 좋아해서, 고등학교에 갈 때에도 실업계에 가서 사진 동아리에 들어갔다고 하더군요. 그런데 1981년에 태어나 2000년을 코앞에 둔 때에 서울에서 고등학교를 다녔는데에도 동아리 선배들은 새벽같이 동아리방에 나와 청소하고 물 끓여 놓고 하지 않으면 무엇인가 자기들한테 쏟아졌고(책에는 밝히지 않았지만, 뻔한 노릇으로 주먹질과 얼차려와 욕설이었을 테지요), 백성현 씨가 1학년 때에 3학년 선배를 제치고 교내 사진백일장 같은 자리에서 금상을 타니 이죽거리면서 손찌검을 했답니다.

 학교에서 교사들이 휘두르는 손찌검은 아직 사라지지 않았지만, 교사들 손찌검뿐 아니라 ‘학교 선배’라는 이들이 ‘학교 후배’한테 휘두르는 손찌검 또한 그다지 사라지지 않았다고 느낍니다. 책에만 적히는 옛날이야기가 아니라, 우리가 두 눈으로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오늘이야기라고 느낍니다. 중학교부터가 아닌 초등학교부터도 대학입시를 바라보는 교육 얼거리로 되어 있지만, 아이들한테 학교옷을 맞춰 입도록 하고, 머리길이를 짧게 맞추며, 선후배 위계질서와 교사 학생 계급질서를 단단하게 세워 놓는 학교라는 울타리는, 어쩌면 우리들이 아주 어릴 때부터 민주라고 하는 뜻하고는 멀어지도록 하지 않느냐 싶습니다. 말로는 민주주의가 좋다고 하고, 우리 나라는 민주주의라고 하지만, 정작 민주주의로 일이 이루어지고 놀이를 즐기며 사람과 사람이 어우러지는 자리는 거의 없지 않느냐 싶어요.

 교과서 엮는 일이 민주주의답게 이루어지지 않고, 교사가 교재를 골라서 가르칠 때에 민주주의 틀에 따라 이루어지지 않으며, 학생이 교사한테 교과서로 배울 때 자기 삶을 가꿀 이야기를 민주주의 흐름에 따라 받아먹을 수 없도록 되어 있습니다.

 그나저나, 온통 대학교바라기로 되어 있는 중고등학교 틀거리인데, 아이들은 대학교에 가서 무엇을 배우고 어떤 사람이 되도록 자라게 되는가요.


.. “김대중 대통령이 어떻게 대통령이 되었냐? 죽도록 민주주의 할라고 싸워서 된 거 아니나. 아이엠에픈가 뭔가 금반지 빼서 팔라는 소리도 좋긴 한데, 그래도 몇 가지는 제대로 해 놓고 해야지. 대통령 옆에 비서라는 사람은 국회의원 공천 장사나 해먹고 있으니 제대로 되겠냐. 내가 김대중 대통령 만날 때 그랬어. 금반지 빼서 경제 살리는 것도 해야 하지만, 국가보안법 없애고 민주화 운동 하다가 죽은 사람들 누명 벗기고 해야 되는 거 아니냐고. 대통령도 국가보안법 대문에 죽을 뻔했잖아요. 막 따졌어. 제대로 안 하면, 대통령 체면 생각해서 지금은 국회 앞에서 농성하고 있는데, 앞으로는 아예 청와대 앞에서 할 거라고.” ..  (275∼276쪽)


 어린 처제가 중학생이 되어 학교에서 민주를 배울 수 있을까 궁금합니다. 처제가 민주로 둘러싸인 학교에서 민주를 배울 수 있다면, 이를 바탕으로 평등도 배우고 평화도 배우며 통일도 배우는데다가 연대와 창조도 배울 테지요. 민주를 익힐 수 있는 학교라면 스르럼없이 사랑도 익히고 믿음도 익힐 테며, 나눔과 어깨동무도 나란히 익힐 테지요.

 그런데 말입니다, 아직 초등학교 졸업식도 안 하고 중학교 입학식도 안 한 처제가 ‘중학생 머리길이’에 맞추어 벌써부터 머리를 자르게 시키는 이 나라 교육 틀거리인데, 아이들 머리길이를 이처럼 다그치는 학교 규칙은 국가보안법하고 얼마나 다를까 모르겠습니다. 이제부터 중학생이 되면, 그나마 초등학교에서 하던 ‘책을 읽고 독후감 쓰기’ 같은 숙제는 사라지고 ‘교과서 아닌 책은 못 보도록’ 할 텐데, 이런 우리네 학교 수업은 진시황이 했다는 분서갱유나 일제강점기부터 이승만-박정희-전두환-노태우-김영삼, 그리고 이명박에 걸치기까지 사라지지 않는 ‘불온도서 목록’과 ‘금서 목록’하고 무엇이 다를까 모르겠습니다. 






 (3) ‘어머니’ 이소선을 담아낸 《지겹도록 고마운 사람들아》


 몸에 불을 붙여 노동자 푸대접에 맞서기 앞서 청계천 노동자들한테 벗이 되고 오빠가 되었던 전태일 님 이야기는 《전태일 평전》과 《내 죽음을 헛되이 말라》에 담겨 있습니다. 전태일 님을 낳고 길렀으며, 전태일 님이 죽은 뒤에는 전태일 님이 걸었던 길을 다부지게 걸을 뿐더러, 더 힘차게 걷고 있는 어머니 이소선 님 이야기는 《어머니의 길》에 살뜰히 담겨 있습니다. 《전태일 평전》에 쏟아지는 눈길을 생각하면, 《어머니의 길》에도 너르고 깊이 눈길이 쏟아졌어야 하지 않을까 싶지만, 좀처럼 《어머니의 길》은 알아보는 사람이 없는데, 참 오랜만에, 《어머니의 길》이 나온 지 거의 스무 해 만에 새롭게 ‘어머니’ 이소선 님 이야기가 책으로 묶였습니다.


.. 이소선은 사라진 아들의 일기장을 찾으러 노동청에 가서 싸웠다 ..  (89쪽)


 그런데 책을 읽다가 문득, 궁금해지는 대목이 하나 나옵니다. 어머니 이소선 님은 사라진 ‘아들내미 일기장’을 찾으려고 노동청에 갔다고 하는데, 일기장을 다시 찾았다는 대목은 나오지 않습니다. 도서관에서 낡은 책 하나를 찾아내어 펼쳐 봅니다. 1970년대에 〈조선일보〉 사회부 기자로 뛰었던 이상현 기자가 쓴 글을 뒤적입니다. 이무렵(1970년 11월 13일) 이상현 기자는, 전태일 님 주검이 있는 곳으로 찾아가서 ‘일기장을 찾아내어 조선일보에 특종으로 실었다’는 글을 뒷날 밝혔습니다. 조금 길지만 이상현 기자가 쓴 글을 옮겨 봅니다.


 “사인을 필히 뒷받침할 만한 구체적 자료를 입수해 오라는 지시를 받고 나는 참으로 막막했다. 구체적 자료라면 수기나 일기인데, 그 친구(전태일) 집안의 책상이나 장롱 등을 다른 기자들이 지금껏 그냥 두지 않았을 게 뻔한 노릇이 아닌가 … 사건이 사건인 만큼, 지하실 시체실에는 가족, 노동청 관계자, 수십 명의 보도진으로 발을 들여놓을 틈이 없었다. 나는 우선 담배 한 개비를 피워 물었다. ‘일기장을 어디서 찾아낼 수 없을까? 그것만 찾아낸다면 통쾌한 스쿠프가 될 텐데, 뭔가 있긴 있을 텐데.’ 나는 추리, 상상 속에서 혼자 특종의 꿈을 꾸고 있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힘든 상상이었다. 제대로 배우지도 못한 그에게 일기 같은 게 있을 것인가 말이다. ‘여기서 도대체 내가 무엇을 취재할 수 있단 말인가?’… 시체실 한쪽 테이블에 청년이 두 명 앉아 방명록을 기록하고 있었다. 명단을 쭉 훑어봤으나 이렇다 할 지명인사는 없었다. 명단을 모두 막 훑어보고 난 순간, 그 방명록이 낡은 대학노우트였다는 사실에로 나는 섬뜩해졌다. 청색 비닐 커버의 대학노우트. 직감적으로 느낌이 이상했다. 아니나 다를까. 대학노우트를 한 장 펼쳐 보니 무언가 잔뜩 적혀 있는 게 아닌가 말이다. ‘틀림없다.’ 나는 가슴이 뛰기 시작했다. ‘이게 뭐요?’ 나는 부의금 접수를 맡은 20대 청년에게 귀엣말로 슬쩍 물었다. 주위에는 동료 기자들이 쉴사이 없이 들끓고 있었기 때문이다. ‘태일이 일기예요.’ ‘어?’ 나는 무조건 그 노우트를 움켜쥐었다. ‘잠깐 좀, 봅시다.’ ‘누구신데요?’ ‘나가 보면 압니다.’ 부의금이 적힌 대학노우트를 코우트 호주머니에 움켜넣고 내가 먼저 앞장을 서 시체실을 나왔다. 그 청년은 죽은 태일 군의 사촌형이라고 했다 … 전군이 살던 성북구 쌍문동 셋방을 홀랑 뒤져 필요한 사진을 더 찾았다. 그리고 이 일기장을 신문사로 가져가기 위해, 나는 이 일기장이 꼭 세상에 공개돼야 하며 이로써 그의 죽음이 명실상부하게 된다고 거듭거듭 설명해 그를 설득시키는 데 성공했다. 대학노우트를 들고 나는 신문사로 뛰었다. ‘일기를 구했읍니다!’ 나는 큰소리로 데스크를 향해 자신있게 소리쳤다. ‘뭐, 일기장이 나왔어?’ 데스크는 놀랐다. ‘빨리빨리 기사 써.’ ..  《이상현-사회부기자》(문리사,1977) 39∼44쪽)


 〈조선일보〉 이상현 기자는 일기장을 비롯하여 쌍문동 집까지 뒤져 사진도 가져갔다고 밝힙니다. 벌써 마흔 해 가까이 지난 옛일인데, 마흔 해 앞서, 노동청과 〈조선일보〉 기자 사이에는 어떤 일이 있었으며, 이 일은 어떻게 풀렸을는지 궁금합니다.

 《지겹도록 고마운 사람들아》에는 이 얘기가 더 실려 있지는 않습니다. 문득 1970년 그때 기자하고 2009년 오늘 기자하고, 기자들이 ‘못 배운 노동자’를 바라보는 눈길은 얼마나 달라졌을지 궁금합니다. ‘못 배운 노동자 주제에 무슨 일기를 쓰겠어?’ 하고 바라보던 1970년 기자들은 2009년 비정규직 노동자를 바라볼 때에, 어이없는 해고와 푸대접에 맞서서 집회를 여는 노동자를 쳐다볼 때에, 살빛이 검거나 거무스름한 이주노동자를 마주할 때에, 한미자유무역협정이 아니더라도 죽어나고 있는 농사꾼 이야기를 다룰 때에, 어떤 눈길과 생각과 마음결일는지 궁금합니다.


.. 그라고 이런저런 여러 가지 말을 너무 많이 했어. “학생들하고 노동자들하고 합해서 싸워야지 따로따로 하면 절대로 안 돼요. 캄캄한 암흑 속에서 연약한 시다들이 배가 고픈데, 이 암흑 속에서 일을 시키는데, 이 사람들은 좀더 가면 전부 결핵 환자가 되고, 눈도 병신 되고 육신도 제대로 살아남지 못하게 돼요. 이걸 보다가 나는 못 견뎌서, 해 보려고 해도 안 되어서 내가 죽는 거예요. 내가 죽으면 좁쌀만 한 구멍이라도 캄캄한데 뚫리면, 그걸 보고 학생하고 노동자하고 같이 끝까지 싸워서 구멍을 조금씩 넓혀서 그 연약한 노동자들이 자기 할 일을, 자기 권리를 찾을 수 있는 길을 엄마가 만들어야 해요.” 엄마가 안 하면 그걸로 끝난다고, “내 죽음을 헛되이 말라.” 그란 말도 하고 그때 뭐 별말 다 했지. “어떤 물질이나 어떤 유혹에도 타협하지 마세요. 내 부탁한 거 꼭 들어주시겠죠?” 참말로 기가 차는데 내가 무슨 말을 하겠어. 듣고만 있었지. “왜 엄마는 내가 말하는데 대답하지 않아요? 우리 엄만데 왜 대답하지 않느냐고요? 내가 죽으면, 헛되게 죽으면 안 되잖아요. 엄마가 제발 내 말 들어주세요.” 막 따지는 거야. “목사들은 이웃을 사랑한다 하면서도 사랑하지 않아요. 말로만 했지 실천은 안 한다고요. 그런 예수는 믿지 마세요. 가난한 사람을 사랑하는 예수를 믿으세요.” 지도 예수를 믿었는데 그란 말을 했어 … 그라다 한참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쓰라져 있다가 태일이가 눈을 뜨며 마지막으로 뭐라 한지 아냐? “엄마, 배가 고프다…….” ..  (84∼85쪽)


 책을 덮습니다. 아침부터 일찌감치 깨어나 놀자고 칭얼대는 아기는 어느새 잠이 들고, 옆지기는 제가 다 읽은 뒤 책상맡에 눕혀 둔 《지겹도록 고마운 사람들아》를 집어들어서 읽습니다. 아기가 30분도 채 안 자고 깨어나 끙끙거리지만, 책이 재미있는지 책에서 눈길을 떼지 않습니다. 아기 기저귀를 만져 봅니다. 오줌을 쌌다고 할는지 안 쌌다고 할는지 알 수 없지만 아주 살짝 뜨뜻합니다. 새 기저귀로 갈고 이 녀석은 말려서 다시 대야겠습니다.

 아기를 일으켜세워 잠깐 뜀뛰기를 한 다음 품에 안습니다. 아기를 안고 책상 앞에 앉습니다. 아기는 아빠 무릎에 엎드려 셈틀 화면도 들여다보고 아빠 손가락 놀리는 모습도 바라봅니다. 《지겹도록 고마운 사람들아》에서 어머니 이소선 님이 오도엽 님을 비롯한 젊은이들한테 들려주던 말이 떠오릅니다. 요새 사람들이 아이를 거의 안 낳고, 낳아도 하나만 낳는데, 아이를 좀더 많이 낳고 재미나게 살아야 하지 않느냐고 하셨습니다. 가만 보면, 어머니 이소선 님만이 아니라 동네 할머님들도 같은 이야기를 하고, 여든일곱 그림 할머님도 우리한테 더 많이 낳으라고 이야기합니다. 저희로서도 낳을 수 있는 데까지 낳고 싶은데, 우리 삶터가 너무 모질고 팍팍하면서, 집에서 아기 낳기에는 몹시 안 좋기 때문에 마음처럼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참말 힘이 닿는 데까지 낳아야 하지 않느냐 싶어요. 아기가 태어나서 자라기에 참으로 모질고 얄궂고 고달픈 우리 세상이지만, 우리 어른 된 이로서, 우리 어버이 된 이로서, 세상이 차츰차츰 밝은 쪽으로 나아가도록 힘쓰면서 아이를 신나게 낳아서 신나게 길러야 하지 않느냐 싶습니다. 비뚤어진 법과 제도가 판을 치니까, 반듯해지고 둥글둥글하며 구수한 법과 제도로 거듭나도록 애쓰고 땀흘리면서 아이 손을 잡고 당차게 걸어가야 하지 않느냐 싶습니다. 작은 데부터, 구석진 곳부터, 응어리진 자리부터, 조금씩 손보고 어루만지고 달래면서 북돋워야 하지 않느냐 싶습니다. 






.. “태일이는 참 사람을 좋아했어야. 이 말 하니까 생각난다. 배웠다는 사람들이 나한테 와서 열사님은 어떻고 저떻고 하는데 그게 말이냐? 어느 부모에게 자식이 열사겠냐. 그냥 아들이야. 태일이는 열사도 투사도 아닌 사람을 너무나 사랑했던 사람이야. 그라고 분신자살 했다고 한다. 어디 자살이냐. 항거지. 분신 항거라고 해야 해. 배운 사람들이, 기자들이 자살했다고 쓰는 것 보면 배우기나 한 건가 그런 생각이 들어. 그래서 태일이를 열사니 투사니 하지 말고 그냥 동지라고 불러 줬으면 해. 전태일 동지. 그게 맞지 않냐. 태일이는 지금도 노동자 여러분과 함께 있는 동지라고, 제발 그렇게 불러 달라고 좀 써라.” ..  (286∼287쪽)


 사람을 좋아한 전태일 님으로 자란 까닭은, 아들 전태일을 낳아 기른 어머니 이소선 님부터 사람을 좋아했기 때문이라고 느낍니다. 사람을 아끼고 사람을 섬기며 사람을 알뜰히 사랑할 줄 아는 어머니한테서 전태일이라고 하는 큰기둥 하나가 우뚝 설 기틀이 마련되지 않았겠느냐 생각합니다. 목숨을 바칠 만큼 애쓸 수 있던 까닭은, 어머니 이소선 님이 아들 앞에서 몸소 ‘목숨 바쳐 삶을 야무지게 꾸려 나갔’기 때문이 아니겠느냐고 생각합니다.

 이제 우리 집에는 전태일 님이 걸었던 발자취가 담긴 책 두 권에다가, 어머니 이소선 님이 디뎠던 발자국이 찍힌 책 두 권이 책꽂이에 꽂힙니다. 어제까지는 아빠가 읽었고, 오늘부터는 엄마가 읽습니다. 앞으로는 우리 집 어린 딸내미가 이 책을 읽겠지요. 뭐, 예닐곱 살쯤 되면 아빠나 엄마가 아이를 무릎에 앉히고 읽어 줄 수도 있습니다. (4342.1.8.나무.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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