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깥은 여름
김애란 지음 / 문학동네 / 201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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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그 시절은 단 한 번뿐이다. 이미 일어난 일은 돌이킬 수 없다. 아인슈타인은 상대성 이론을 통해 시간이 역행할 수 있다고 말했지만, 스티븐 호킹 경은 그건 불가능하다고 딱 잘라 말했다. 이처럼 바꿀 수 없는 시간은 회상과 상상을 통해 재생되고 변형된다. 시간을 복원하는 문학적인 시도가 일어나는 것이다. 김애란 작가는 무심코 지나쳐버린 범속한 일상의 시간으로부터 누구나 쉽사리 포착할 수 없는 그 이면의 진실들을 건져 올린다. 그 문학적인 시도의 결과물이 바깥은 여름(문학동네, 2017)이다.

 

김애란이 2000년대 젊은 소설의 대표 명사로 알려지기 시작했을 때 평론가 유종호김애란 소설의 특징은 개그적 재능이다. 개그처럼 즉흥과 되풀이가 많다고 했다. 이청준 선생은 김애란의 첫 번째 창작집 달려라, 아비(창비, 2005)장면만 제시하고 지나가는 TV 드라마와 같은 소설이라고 평가했다.[1] 지금으로부터 십 년 전에 그녀를 의혹과 불신의 눈초리로 바라보는 사람들이 있었을 것이다. 그때 그렇게 넘겨짚은 분들이 있었다면 이번에 출간된 작가의 네 번째 소설집 바깥은 여름을 꼭 읽어 보길 바란다. 유종호 평론가와 이청준 선생은 그 당시 국내 문단의 샛별이나 다름없던 김애란의 포텐(poten, 잠재력)이 얼마만큼 터질지 몰라서 성급한 평가를 했다. 나는 김애란에 대한 두 분의 표현이 지금으로선 적절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김애란 소설의 본령은 인간의 내면을 꿰뚫는 명민한 시선과 탁월한 조망에 있기 때문이다. 김애란은 죽음과 상실의 고통을 대처하는 방식에 대해 깊이 파고든다. 그녀의 소설에 우리가 살면서 느끼게 되는 시간의 모순과 같은 묵직한 소재도 녹아 있다.

 

나는 누구일까. 그리고 몇 살일까.”, “나는 누구일까. 그리고 어디 살까.”, “나는 누구일까. 그리고 어찌될까.”[2] 침묵의 미래는 자기 자신을 향해 끈질기게 묻는 걸까. 침묵의 미래에서 작가는 독자들에게도 많은 질문을 던진다. 독자들은 이야기 중간중간마다 나오는 질문 공세로부터 조금도 자유롭지 못하다. 독자는 끝도 없이 대답을 준비하거나, 혹은 혼잣말로 그때그때 질문들에 응수하면서 침묵의 미래와 대면한다. 이 소설에서 작가는 지금사는 사람들에게 언어가 과연 무엇을 의미하는지 사뭇 진지하게 묻고 있다.

 

직선적인 시간은 그저 미래를 향하여 순차적으로 흐르다가 어느 순간 멈춘다. 우리는 그 시간의 소유자를 라고 부르게 된다. 그 시간의 소유자가 세상에 종언을 고하는 순간, 로는 독해할 수 없는 치명적인 고독에 갇혀 버린다. 그것이 바로 죽음이다.

 

이들은 모두 이 세계에 단 하나뿐인 언어를 구사하는 마지막 화자들이다. 그리고 대부분 혼자 산다. 이들은 이미 오래전에 자신이 쩌렁쩌렁한 모어(母語) 한복판에, 우주 한가운데에 버려졌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시끌벅적한 시장에서 엄마를 잃어버리고 뒤늦게 울어 봐야 소용없었다. 다 죽고 살아남은 건 오직 자기 자신과 엄청나게 아름답고 어마어마하게 정교해 혼자서는 도저히 감당이 안 되는 그 뿐이라는 걸…‥ 결국 받아들여야 했으니까. 이들은 깊이를 알 수 없는 어둠과 침묵 속에서 자신에게 일어난 일을 이해하려 애썼다. (127~128)

 

마지막 화자는 소수언어를 기억하는 몇 안 되는 사람들을 의미하지만, 나는 이 대상을 좀 더 포괄적으로 바라보고 싶다. 마지막 화자죽음 앞에 한발 짝 다가선 인간이다. 인간이 사라지면서 남게 된 언어는 사어(死語), 즉 생명력이 없는 무의미한 기호일 뿐이다. 죽음이라는 치명적인 고독 앞에 선 인간은 대화가 단절된 외로운 고아와 같다. 죽은 인간은 레테의 강물을 한 모금씩 마시게 되고, 살아생전 입안에 맴돈 언어가 씻겨 내려간다. 그렇게 강물에 떠내려간 언어는 다시 이승으로 돌아오고, 새롭게 태어난 시간의 소유자가 잊힐 뻔한 언어를 건져낸다. 하지만 소수언어박물관의 전시장에 갇힌 언어는 생명력이 느껴지지 않는다. 여기서 작가는 시간의 모순을 정면으로 포착한다. 과연 기억하기 위해서 보존이라는 목적으로 전시장에 갇힌 언어가 살아 있다고 말할 수 있을까. 차라리 죽어서 박제가 된 언어들이 레테의 강물에 떠내려가면서 완전히 사라지는 게 나을지도 모른다. 작가는 기억해야 할 것을 무의미한 것으로 만들어버리는 기억의 보존성을 비판한다.

 

죽음과 상실의 경험. 오늘을 살아가는 그것과 같은 불안함과 공포를 느껴 본 것이 언제였을까. 우리는 충격적인 공포 경험으로부터 한 발짝 벗어나 있다. 살면서 겪을 일이 많지 않다. 우리는 대개 죽음의 의미를 진지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그런데 김애란은 잊을 만하면 이 어려운 질문을 독자에게 재차 묻는다. 어디로 가고 싶으신가요에서 남편을 잃은 명지가 스마트폰 인식음성 프로그램 시리(Siri)에게 던지는 질문은 죽음이란 무엇인가’, 즉 작가가 독자에게 전하고 싶은 화두다.

 

사람이 죽으면 어떻게 되나요?” (259)

 

사실 이 질문은 익숙하다. 일상에서 불현듯 떠오르는 본질적인 낯익은 질문, 그러나 이 문제는 늘 죽음에 대한 불안을 들여다보는 것으로 돌아오게 마련이다. 풍경의 쓸모 시작 부분에서 나오는 사진기의 플래시 불빛은 평온한 일상에 묻힌 죽음에 대한 불안을 살짝 비춘다.

 

햇빛이 충분치 않은 공간에서 이따금 플래시가 터졌다. 사진기는 펑! ! 시간에 초크질을 하며 현재를 오려갔다. 플래시 소리는 낙하산 퍼지는 기척과 비슷해 우리가 죽을지도 모른다는 불안과 함께 살았다는 안도를 줬다. 운전자를 덮치는 에어백마냥 푹신한 충격을 줬다. (150)

 

죽음의 실재를 파악할 수 없다. 그래서 죽음에 의한 상실은 마음 어딘가에 꼭꼭 숨겨진 불안과 공포의 근원으로 자리한다. 인간은 누구나 늙을 수밖에 없고 결국 죽음을 맞게 마련이지만 누구도 이 같은 사실을 선선히 받아들이려 하지 않는다. 가리는 손는 자신이 일하는 곳인 요양병원에서 자신이 늙은 모습을 생각하게 되고, 늙은 엄마의 모습을 회상한다. 보통 늙는 것이 죽음으로 이어진다고 생각해서 그러한 두려움이 밀려오는 것은 아니다. 늙어가면서 겪게 되는 여러 가지 신체 증상을 직접 겪거나 눈으로 보게 되면 노화를 두려워한다.

 

죽을 때까지 우린 이 세상의 모든 것들을 보고, 듣고, 말하고, 마시고, 먹고, 느낀다. ‘인생이라는 이 소중한 시간이 그러한 행위의 끝없는 반복의 연속인지도 모른다. 시간은 사람의 기분에 따라 어떨 때는 짧게, 어떨 때는 길게 느껴지게 한다. 기분이 나쁘면 시간이 빨리 지나가기를 바란다. 반대로 기분이 고조돼 있을 때는 주변의 일에 집중하는 탓에 시간의 신호에 신경 쓰지 않는다. 즐거운 시간은 빨리 지나가고 불편한 시간은 한없이 길게 늘어지는 이유다. 입동에서의 시간은 존재하는 것들을 모조리 집어 삼키는 거대한 소용돌이다. 사고로 아들을 잃은 부부는 삶에 대한 의욕마저 시간의 소용돌이 속으로 흘러 보낸다. 부부의 시간은 빨기 감기한 필름처럼 확 스쳐 지나간다.

 

우리는 평소와 다름없는 나날을 보내려 애썼다. 그러니까 어제와 같은 하루, 아주 긴 하루, 아내 말대로라면 다 엉망이 되버린하루를. 가끔은 사람들이 시간이라 부르는 뭔가가 빨리 감기한 필름마냥 스쳐가는 기분이 들었다. 풍경이, 계절이, 세상이 우리만 빼고 자전하는 듯한. 점점 그 폭을 좁혀 소용돌이를 만든 뒤 우리 가족을 삼키려는 것처럼 보였다. (20~21)

 

상실감에 빠진 사람은 허무 의식을 드러낸다. 매일 자연스럽게 행하던 일들이 전부 무의미하게 느껴지고 억지로 해야 하는 짐처럼 느껴진다. 깊은 슬픔은 일상생활을 뒤죽박죽 엉망으로 만든다. 소중한 존재를 잃을 때 오는 상실감이 특히 혼자 극복하기 힘들다. 노찬성과 에반 의 노찬성은 자신의 유일한 친구이자 반려견 에반의 죽음을 감당하기 어려운 아이다. 상실감에 빠질 땐 죄책감이란 감정도 끊임없이 괴롭힌다. 마음이 여린 에반은 사랑하는 존재의 죽음을 막지 못했다는 생각 혹은 살아있을 때 더 잘해주지 못했다는 생각에 죄책감을 느꼈을 것이다. 사랑하는 존재를 떠나보낸 자의 고통과 슬픔이 강할수록 세상과의 단절을 부를 위험이 있다.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것이 되어버린 부부의 시간, 그리고 에반과의 작별인사를 제대로 하지 못한 찬성의 모습이 독자의 명치 끄트머리를 아프게 찔러온다.

 

나를 포함한 현대인들은 어느 정도로는 어디로 가고 싶으신가요의 명지와 가리는 손를 닮았을 것이다. 김애란 소설을 읽으면 자신이 어떤 모습으로, 어떻게 살고 있는지 확인할 수 있다. 죽음을 통해서만 우리는 타자의 진실, 나의 진실을 발견할 수 있는 것이라면, 그렇다면 현실의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우리는 살아 있음을 확인하기 위해, 죽음과도 같은 아픔을 참고 견딜 수밖에 없다. 아무리 고통스러워도 출구는 있는 법이다. 그러나 이 소설에서는 작은 희망의 빛 한 줄기가 보이지 않는다. 내가 못 찾은 것일 수도 있다. 그것이 내게는 바깥은 여름의 다소 아쉬운 측면이기도 하다. 만일 작가가 이런 작은 선물이라도 독자들에게 허여하지 않았다면, 나는 매우 서운했을 것이다. 바깥은 여름아직 오지 않은 시간에 얽매이고, ‘죽음에 묶여 버린 인간의 내면 심리를 보여줌으로써 우리에게 삶과 죽음을 깊이 사유하도록 한다. 어쩌면 김애란은 다람쥐 쳇바퀴 돌듯 틀에 박힌 생활에 익숙해진 우리에게 경종을 울리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김애란이 그려내는 일상 풍경의 기저에 잠재적 불안의 근원이 있는 것은, 이런 점에서 보자면 당연해 보인다. 우리가 체감하는 삶과 죽음의 간격은 그다지 크지 않다.

 

 

 

 

[1] 커버스토리-‘달려라 아비의 김애란(주간경향, 200767)

[2] 침묵의 미래123, 125, 1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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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7-21 08:54   URL
비밀 댓글입니다.

cyrus 2017-07-21 17:49   좋아요 1 | URL
어머니가 사고로 한 달 간 입원한 적 있습니다. 그때 정말 어머니가 돌아가시는 줄 알았어요. 표현을 안 해서 그렇지 내심 불안했고, 걱정했습니다. 그 일을 겪은 이후부터 사고는 예고도 없이 찾아온다는 걸 깨달았습니다.

표맥(漂麥) 2017-07-21 22: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녀를 의혹과 불신의 눈초리로 바라보는 사람들이 있었을 것이다. 그때 그렇게 넘겨짚은 분들이 있었다면... (순간 헉! 어찌 알고...) 이번에 출간된 작가의 네 번째 소설집 《바깥은 여름》을 꼭 읽어 보길 바란다. (소설 잘 안읽지만 이 책은 읽어봐야겠구나...) ^^

cyrus 2017-07-22 14:01   좋아요 0 | URL
누구나 다 그렇습니다 신인 작가에게 대하는 반응이 기대 반 의심 반입니다. ^^;;

페크pek0501 2017-07-27 16:4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달려라, 아비》를 읽고 김애란 작가의 진가를 본 듯했어요.
개그 같은 면이 있어서 재미있으면서도 깊음이 있었어요.

cyrus 2017-07-30 09:52   좋아요 0 | URL
김애란 작가의 소설을 다 읽고나서 한국 작가의 소설에 무관심했던 제 자신이 부끄러워졌습니다. ^^;;
 
공터에서
김훈 지음 / 해냄 / 2017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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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씨의 리뷰가 불량합니다. 저항기가 있군요. C급입니다.”[1]

    

 

 

인생 여정의 중간 혹은 종착점에 이르면 자기가 걸어온 길을 뒤돌아보고 싶은 마음이 생긴다. 달려온 길이 고통스러워도, 현재의 삶이 가치 있다고 느끼면 뒤돌아보고 싶은 충동은 더욱 강렬하다. 부모님 세대는 청년기에 경험한 전쟁의 참혹한 기억을 잊지 못한다. 그 지옥의 시간은 이미 소설이나 영화 속 과거가 되었다. 그리하여 이제 그런 시대를 얼마간 편안한 마음으로 보며 추억하고 있다. 50~70년대 시절 부모님 세대가 겪었던 분산된 기억들을 끄집어내 영화와 소설이라는 문화적 메커니즘을 통해 조직하고, 그리하여 개인들의 체험이 보편적인 경험으로 확대되고, 세대 차원의 공통된 기억으로 자리 잡게 하는 의미가 있다. 우리의 근대사는 감히 눈을 똑바로 뜨고 바라볼 수 없었던, 힘의 논리와 저항으로 일관됐던 부자(父子) 관계의 연속이었다. 그것을 용서하기 위해서는 향수(鄕愁)의 힘이 필요했다.

   

공터에서는 마씨 집안의 삶을 통해 우리 시대의 모습을 그려내고 있다. 마동수는 6 25전쟁 때 이도순을 만나 고생 끝에 가정을 이룬다. 그들이 낳은 자식 마장세와 마차세도 시대의 그림자에 벗어나지 않았다. 마장세는 복역 중에 월남전에 파병되었고, 제대한 후에 괌으로 건너가 사업을 한다. 그는 자신을 가족으로부터 격리된 삶을 산다. 장남의 빈자리는 자연스럽게 마차세가 이어받는다. 마차세는 아버지의 사망과 가난 때문에 대학을 졸업하지 못한다. 학업을 포기하고 신문기자로 취업했지만, 언론통폐합 조치로 펜을 내려놓게 되고 물류회사에 재취업하여 오토바이 배달을 한다. 고달픈 시련 속에서 마차세는 박상희의 내조에 힘입어 희망의 끈을 놓지 않으면서 착실하게 살아간다.

     

작가는 현대사의 주요 계기들 속에서 무기력했지만, 묵묵히 시대를 감내하며 살아온 부모님 세대에 대한, 쓸쓸하면서도 애정 어린 연민을 보여준다. 소설에서 그려진 아버지상은 그런 역사의 질곡을 다시 바라보려는 과정에서 나온 타협의 산물이다. 이 소설이 불러일으키는 폭넓은 공감은 이 시대의 고통과 상처를 되돌아보는 계기를 제공해준다. 공동의 기억을 토대로 세워지는 상상의 공동체는 모든 세대를 하나로 묶는 데 크게 이바지할 것이다. 인간은 미래에 대한 전망보다 과거에 대한 공동의 기억으로 더 잘, 더 쉽게 하나가 되게 마련이다.

    

하지만 나는 그런 진부한 징후들 속에서 음습하게 스며 있는 구시대의 늙은 유령의 그림자를 함께 본다. 김훈은 소설을 통해 아버지와 자신이 살아온 시대를 그리려 했다고 말한다.[2] 그 표면적 서사 밑에 독자들, 특히 중장년층 남자 독자들을 강하게 끌어당기는 또 하나의 흐름이 들어 있다.[3] 인내심과 책임감 그리고 힘으로 상징되는 가부장제에 대한 매혹이 그것이다. 부모님 세대들의 영혼 깊은 곳에 유령처럼 스며들어 있는 건 전쟁의 공포만 있는 것이 아니다. 가부장제 사회에 대한 향수는 현대에 들어 힘과 권위를 상실해가고 있는 중장년층 아버지들의 어깨를 다독여주는 환상의 그림자다.

 

이 소설에서 가장 의아한 장면이 있다. 마차세가 일자리를 잃어 백수로 지내고 있을 때, 박상희가 그에게 집안일을 맡겼다. 마차세는 아내의 요구를 순순히 응한다.

 

박상희는 마차세가 실직한 동안에 집안일의 일부를 남편에게 맡겼다. 마차세는 가끔씩 빨래를 널고 유리창을 닦고 싱크대를 청소했다. 박상희는 그 사소한 노동으로 남편의 마음이 일상에 정착하기를 바랐다. 마차세는 아내의 마음을 짐작했지만 내색하지 않았다. (195)

 

박상희가 미대 출신이라서 상대적으로 진보적인 여성으로 보일 수 있다. 이에 대한 반론은 나중에 설명하겠지만, 이렇게 생각하는 것은 착시에 가깝다. 그러나 국가가 가부장적 권위를 강요하던 사회적 분위기를 생각해보시라. 1970년대의 여성은 보수적 분위기로 인해 가부장제 이데올로기에 흡수될 수밖에 없었다. 가부장적 가치관을 등에 지고서 억척같이 밖에서 일했던 아버지들은 이 장면을 어떻게 볼지 무척 궁금하다. 아버지들은 집안일은 '아내라면 당연히 해야하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아내를 존중하는 마차세의 배려심에서 비롯된 것처럼 그려지지만, 아무래도 잘 이해가 되지 않는다. 페미니스트에게 호되게 당한 적 있는 작가가 의도적으로 여성성을 강조하고 싶은 걸까. 작가 입장에서는 이런 표현을 시도해볼 수 있지만, 조금은 생뚱맞게 느껴진다.

     

세대 갈등은 아버지와 아들의 불화(不和)’에 비유되곤 한다. 아버지 부정(否定)’은 누구나 한 번쯤 겪는 진통이다. 마차세는 아버지의 자리에 서면서 비로소 아버지를 이해하고 화해하게 된다. 박상희는 산파가 산모의 출산 과정을 돕듯, 마차세의 마음을 옥죄이는 아버지의 존재감을 떨쳐낼 수 있도록 도와준다. 그런데 그녀의 역할은 마동수의 아내이자 마장세 · 마차세의 어머니 이도순의 존재감을 위축시킨다. 이도순은 숨 가쁘게 달려온 현대사의 그늘에서 인고와 희생으로 우리 가정과 사회를 지탱해온 우리네 어머니들의 원형이다. 70년대엔 인내 · 순종 · 희생의 어머니상이 지배적이었다. 이도순은 마장세에게 보낸 편지에 자신의 고통을 언어로 호소한다.

 

너의 아버지라는 사람은 무슨 헛것이 씌었는지 도통 밖으로만 싸지르고 두어 달에 한 번씩 집에 오는데, 왜 오는지 모르겠다. 내가 그 인간하고 살을 섞고 살아서 너희들을 내지른 세월을 생각하면 내 가슴에서 벌레가 끓고 들불이 인다. 너는 힘들고 쓸쓸하면 너보다 더 쓸쓸한 이 어미를 생각해라. 그게 내가 하려는 말의 전부다. (170)

 

가부장제의 큰 피해자는 아내어머니의 역할을 맡은 여성이다. 가부장제 사회에서 여성은 개인이 되지 못했고, 자기 언어를 가질 수 없었다. 그러나 여성을 무겁게 짓누르는 가부장제 사회에 도전하고, 반항하는 소수의 목소리들도 있었다. ‘가족이라는 명목으로 자행되는 여성에 대한 가부장제의 압력 앞에서 개인의 존엄을 지켜내기 위한 목소리이다. 그런데 박상희는 힘들고 쓸쓸한이도순의 목소리를 듣지 못한다. 소설 속 박상희는 마차세의 아내로서의 역할을 보여줄 뿐이다.

 

박상희 : “어머니는 어땠어?”

마차세 : “그저 그래. 잠든 거 보고 왔어.”

박상희 : “어머니보다 당신이 더 가엾어.”

 

(245)

 

박상희는 치매에 시달리는 어머니를 홀로 돌보는 남편의 정신적 부담감을 이해한다. 그녀는 마차세를 어머니보다 더 가엾은 남편(아들)’으로 바라본다. 그녀의 시선은 홀로 사는 어머니와 가족을 충실히 돌보는 가장의 고통을 부각할 뿐, 어머니의 고통을 외면한다. 이러한 박상희의 시선은 사회적 가부장제의 전형을 보여준다. 바로 남성 중심의 이데올로기가 그대로 반영됨을 의미한다. 박상희는 무의식적으로 가부장제 유지의 정당성에 가담하고 있다.

 

아버지, 아들로 이어지는 수직적인 가부장제 위계구조는 아들들을 또 다른 가부장으로 만든다. 마차세는 빈약한 물적 토대를 세워야하는 가부장이 된다. ‘머뭇거리고, 두리번거리고, 죄 없이 쫓겨 다니는[4] 마동수와 마차세는 지금 현실에서 강력한 권위를 가진 가부장을 갈망하는 중년 남성들의 무의식의 초상으로 볼 수 있다. 그래서 40대 남성 독자들이 김훈의 소설에 찬사를 보내는 것이다. 그렇지만 공터에서는 모든 독자의 공감대를 형성하는 데 실패한 소설이다. 김훈은 과거 가부장제의 환상에서 깨어날 생각을 하지 못한다. 그는 이번 신작 소설을 통해 남루한 사람들의 슬픔과 고통에 대해서 말하고 싶었다고 밝혔지만, ‘여성도 슬퍼했고, 아팠다라고 제대로 말하지 못했다.

 

     

 

 

[1] 원문은 김훈 공터에서193쪽

 

[2] <소설가 김훈, 장편 공터에서출간 “70년간 갑질의 시대아버지와 내가 살아온 야만의 시대를 그렸다”> 경향신문, 201726일자

 

[3] <김훈 공터에서베스트셀러 종합 1“40대 남성 독자 지지”> 아시아경제, 2017224

 

[4] 나의 등장인물들은 늘 영웅적이지 못하다. 그들은 머뭇거리고, 두리번거리고, 죄 없이 쫓겨 다닌다. 나는 이 남루한 사람들의 슬픔과 고통에 대해서 말하고 싶었다.” (작가 후기, 공터에서3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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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2-27 17:42   URL
비밀 댓글입니다.

cyrus 2017-02-28 13:05   좋아요 1 | URL
저는 이 소설처럼 과거를 이해하면서, 희망을 발견했음을 암시하는 전개를 좋아하지 않습니다. 이런 전개는 단순하고, 뻔합니다.

이 소설의 독자서평을 다 읽어봤는데요, ‘아버지‘라는 인물에 초점을 맞춘 평이 많았어요. ‘어머니‘ 이도순에 대해 짧게나마 언급한 독자서평은 알라딘에 1편뿐이었습니다. 이도순도 마동수 못지 않게 힘들게 살아왔고, 개인적 상처가 깊은 인물입니다. 박상희가 마차세에게 ‘어머니보다 당신이 더 가엾어‘라고 말하는 장면을 보고, 황당했습니다. 박상희를 제외한 마씨 집안 사람들 모두 가엾은 인물입니다.

레삭매냐 2017-02-28 09:0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소설의 시작이자 끝이 왜 독재자가 죽은 기미년
으로 잡았을까 궁금해집니다.

그 뒤의 등장할 격동의 현대사를 다룰 자신이
없어서가 아니었을까 하는 작은 의구심이 듭니다.

cyrus 2017-02-28 13:06   좋아요 0 | URL
그렇게 볼 수 있군요. 저는 시대적 배경과 이야기 전개 구조에 대해서 생각한 적이 없었어요. ^^;;

스윗듀 2017-02-28 16:1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하 cyrus님 문학동네이벤트 당첨되셨던데.... 50권이라니요..! 이거야말로 책심은데 책나고 가진 자가 더 가지는 상황 아닙니까? 에잇 ㅋㅋㅋㅋㅋㅋ 축하드려요!!

cyrus 2017-02-28 16:30   좋아요 1 | URL
이벤트 당첨 사실을 알리지 않는 성격이라서 조용히 넘어가려고 했는데, 그걸 보셨군요.. ㅎㅎㅎ 축하 인사해주셔서 정말 고맙습니다. ^^

knulp 2017-03-01 02: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예리하게 분석하셨네요. 저 역시도 김훈의 글에 열광하는 1인. 뭐 가부장제에 딱히 동의하진 않지만 그의 문체가 좋습니다. 무겁고 무거운. ㅎㅎ 그래서 읽어요. 시대 의식도 강하고. 서평이 큰 공부가 되었습니다.

cyrus 2017-03-02 13:49   좋아요 0 | URL
저도 김훈 작가의 문체, 특히 그 문체의 매력이 많이 발산되는 산문을 좋아합니다. 이번 소설에서 가장 인상 깊은 문체가 미장세가 초콜릿 한 입 베어 먹는 순간을 묘사한 내용이었습니다. ^^
 
라요하네의 우산
김살로메 지음 / 문학의문학 / 2016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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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 사는 곳에서라면 어디에나 있는 ‘관계’. 그 다양한 맥락 속에 거짓과 위선, 희망과 진실이 한데 엉킨 삶의 모습이 있다. 김살로메의 소설집 《라요하네의 우산》에는 관계 맺기에 목말라하는 사람들이 나온다. 인간 사이의 관계 맺기는 이 소설에서 중요한 핵심이다. 사람들 사이의 관계 속에서 서로의 상처를 캐고 보듬는 가운데 얻어지는 것이라는 것을 이 작품은 보여준다. 관계의 본질을 정확하게 이해할 수 없는 인간은 운명적으로 자신의 타자가 된다. 작가는 “내 안의 위선과 진실, 내 안의 악마성과 순진성 사이에 소설이 존재”[1]한다고 말한다. 이런 이중성 때문에 일상의 삶은 흔들리고 부서진 것이 되며, 때로는 그것마저 실재감을 잃어버린 환상으로 빠져들기도 한다. 타인과의 관계 맺기 역시 불모와 불가능, 변질로 끝나기 십상이다. 자아의 정체성이든, 타자와의 관계든 거기에는 ‘고통스럽고 부끄러운 일’[2]이 깃들여 있다. 그럼에도 작가는 ‘고통스럽고 부끄러운 일’을 공감하고 탐색하는 자세가 삶을 구성하는 능동적인 힘임을 믿는다.

 

『알비노의 항아리』의 주인공들은 빙 둘러 가는 접촉을 통해 힘겹게 관계 맺고 있다. 남편과 아내는 너무 다르다. 남편은 굳건한 일상의 틀을 지키면서 평범하게 살아가지만, 아내는 피부와 머리카락이 하얗게 변하는 알비노(Albino)라는 희귀 질환을 겪고 있다. 이 병의 원인에 대해 사람들의 이해가 부족하다 보니 아내는 태어날 때부터 환영받지 못하고 선입견 속에 살아간다. 일상의 세계는 인간끼리의 접속이 힘들 뿐만 아니라 끊임없이 위험에 노출돼 있다. 아내의 소변을 정력제로 확신하는 남편의 어머니는 말해지지 않은 부부 사이 마음의 틈을 점점 벌어지게 한다. 언제 깨질지 모른다. 아무리 완벽하다고 생각하지만 언제 깨질지 모른다. 그러나 마침내 부부는 서로 참다운 사랑을 확인함으로써 합일될 수 있는 관계에 도달한다.

 

『암흑 식당』은 자신에게 부과된 강제적 현실에서 벗어나려는 인간의 욕망을 보여준다. 우리 자신들이 모순적으로 겪고 있는 내면적 그늘을 남다르게 포착해내는 깊이를 내보이고 있다. 암흑 식당은 형상이 유발하는 선입관과 현혹이 완전히 차단되는 장소다. 그래서 지겨운 일상에서 눈을 돌려 암흑 식당 안에서 이루어지는 관계는 은밀해서 달콤하다. 아이러니하게도 현실의 가면을 벗기 위해 진짜 가면을 쓴 암흑 식당 손님들의 기이한 관계 맺기는 타인의 욕망 대상이 된다. 섹스는 이성적 합일을 완성할 수 있는 가장 극적인 체험이지만, 이 소설에서는 섹스조차도 그토록 열망한 사랑의 확인이 아니라 현대인의 불행을 보여준다.

 

작가는 『라요하네의 우산』에서 불안한 인간의 내면을 무심하게 드러내면서 동시에 조각난 사건들을 보여주면서도 어떤 가능한 자기만의 세계를 그려낸다. 소설의 등장인물 샌드리는 시메트리(symmetry) 증후군에 시달린다. 그녀는 ‘균형’이라는 이미지에 사로잡혀 있고 그 이미지의 압박감을 떨쳐버리지 못한다. 이 소설에서 언급되는 에밀 아자르의 《자기 앞의 생》은 샌드리가 자신의 삶 속에 묻혀 있는 상처를 되돌아보게 하는 거울과도 같은 역할을 한다. 《자기 앞의 생》은 합리적인 우리 삶의 심층에 자리 잡은, 남모르게 앓고 있는 고통에 주목하는 문학 고유의 영역에 대한 은유이기도 하다.

 

누구에게나 평범하게 보이는 일상적 관계의 뒷면에는 잊힌 상처가 있다. 그것은 선천적으로 기형적인 육체의 아픔일 수도, 인간 사이에서 주고받는 고통의 기억일 수도 있다. 그러나 그 모두는 상처라는 이름으로 서로 소통할 수 있다. 《라요하네의 우산》의 매력은 요란스런 사건의 전개 대신 일상생활 속 아픔과 극복 과정을 잔잔한 어투로 복원해 내는 것이다. 그래서 이 작품에서 나타나는 정신적 상처와 결핍의 모습은 생활을 통해 간간이 새어 나오는 슬픔이다. 있는 그대로, 자신을 상대방에게 속이지 않고, 또 자신을 속이지 않고, 자신의 나약함을 상대방의 결점을 그대로 받아들여 이해하고 안아줄 수 있는 것. 그것이 이 소설집에서 확인할 수 있는 상처 치유력을 가진 정신적 약재들이다. 관계의 어긋남에서 비롯된 상처란 다시 관계 속에 던져져야만 진실하게 아물어 갈 수 있다.

 

 

 

 

[1] 작가의 말, 317쪽

[2] 『라요하네의 우산』 9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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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ureka01 2017-02-03 14:2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그럼요..관계함으로써 상처가 없을 수가 없죠..서로 생채기를 내고..다시 보듬고..그래서 아물고 ...그러므로써 관계가 더 단단해져야하거든요..문제는 인간과 인간 사이에 이거 없다면 관계 자체가 성립하지 않으니까요. 가급적이면 서로가 상처를 주고 받기보다는 위로와 헌신과 희생으로 오고가면 더 좋겠지요.....

cyrus 2017-02-03 17:13   좋아요 0 | URL
네, 맞습니다. 여러 사람들과 어울리면 감정이 상하는 일을 피할 수 없습니다. 살면서 겪어야 할 일입니다. 서로 간에 감정이 다치지 않도록 이해하고 배려하는 마음이 정말 중요합니다. 이게 안 되면 어렵게 맺은 관계를 회복하기 어려워요.

페크pek0501 2017-02-03 15:06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고통스럽거나 부끄러운 일’이 나만의 경험이 아니고 다른 누구도 겪은 일이라는 걸 확인할 때 위로가 됩니다. 그래서 요즘 공감하는 친구가 참 필요한 거구나, 친구 없는 사람은 외롭겠구나, 생각하게 되어요.
제일 듣기 싫은 말 중 하나는 ‘복에 겨워 그러는거야.˝라는 말이에요. 같은 일이라도 사람에 따라서 느끼는 강도가 다름을 놓치지 않았으면 합니다. 우리 모두요...

cyrus 2017-02-03 17:16   좋아요 0 | URL
오늘 본 인터넷 뉴스 내용인데요, 30대 이후부터 친구 수가 줄어든다고 합니다. 저도 20대 후반을 살아오면서 그렇게 생각했었습니다. 나를 이해해주고 공감해주는 친구가 소중한다는 것을 느끼게 됩니다.

2017-02-03 16:0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7-02-03 17:2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7-02-04 09:1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7-02-04 10:36   URL
비밀 댓글입니다.
 
미스 함무라비
문유석 지음 / 문학동네 / 2016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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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헌법 제11조 1항은 “모든 국민은 법 앞에 평등하다. 누구든지 성별 · 종교 또는 사회적 신분에 의하여 정치적 · 경제적 · 사회적 · 문화적 생활의 모든 영역에 있어서 차별을 받지 아니한다”고 선언하고 있다. 그런데 이 법 조항은 일반적 평등조항으로 성 평등권을 명시한 것은 아니다. 성 평등은 한 사람의 남성과 한 사람의 여성 사이의 평등이 아닌, 사회적으로 구조화된 불평등을 제거하는 것을 의미한다. ‘여성이 법에 보호받는다’는 발상의 이면에는 남녀는 같지 않으므로 결국 동등하게 볼 수 없다는 생각이 전제되어 있다. 여성의 평등권은 법적인 면에서 보장되고 있지만, 여전히 형식상으로 인정될 뿐 불평등이 잔존해 있는 게 사실이다.

 

‘법’이라는 다소 어려운 주제를 웃음으로 버무려 낸 《미스 함무라비》는 부담 없고 통쾌한 장점이 한껏 돋보인다. 특히 우리 사회에 여성차별이 얼마나 뿌리 깊게 박혀있는지 놀랄 만큼 생생하게 그려냈다. 여성차별 문제라면 나와는 상관없는 일이라고 무관심한 남성들이 대부분이다. 단지 여성이라는 이유로, 힘이 남성보다 부족하기에 폭력을 행사함은 물론 부적절한 성차별적 언행을 한다. 정의 실현의 최후 보루인 법정 안에서도 여성차별은 엄연히 존재한다. 《미스 함무라비》는 습관이 돼버린, 그래서 더 무서운 성차별의 형태를 자각해보는 계기를 마련해준다. 초임 판사 박차오름이 보고 겪은 일상적인 성차별은 독자들에게 자신의 삶을 되짚어 보면서 때로는 뜨끔한 느낌을 받게 한다.

 

‘여자는 여자답게 조신해야 한다’, ‘성범죄는 짧은 치마를 입은 여자가 잘못’이라고 생각하는 한세상 부장의 논리는 성폭력이 권력 관계에서 강자가 약자에게 성적으로 가하는 폭력이라는 사실을 인지하지 못하는 데서 나온다. 이런 관계는 피해자들의 저항을 어렵게 하고, 가해자의 법적 처벌을 면하는 어처구니없는 상황을 만든다. 그리고 가해자들의 권력에 의해 이들 사건은 곧잘 왜곡되거나 은폐됐다. 아르바이트 여대생을 성희롱한 홍보부 차장의 아내는 가부장제 문화에 매몰된 여성이다.[1] 그녀는 신입사원 시절부터 남성 중심적 질서에 타협하여 살았기 때문에 남편(가해자)의 잘못보다는 피해 여대생의 품행을 의심한다. 그녀의 입장은 사회생활을 통해 더욱 강화돼 남성중심문화를 유지하는 역할을 한다.

 

서로 알고 있는 부부 사이에 일어나는 ‘아내 폭력’에도 여성책임론은 영락없는 단골 메뉴다. ‘아내 폭력’은 성차별적 가부장제에 의해 남편이 아내에게 가하는 신체적 · 정신적 폭행이다. 남편의 구타에 시달린 아내는 생명의 위협을 받으면 자기방어에 가까운 범행을 저지른다. 그러나 아내가 휘두른 칼에 찔린 남편과 담당 변호사는 가부장적 권위를 앞세워 아내를 ‘서방 죽인 년’으로 몰아세운다.[2] 아내가 겪는 폭력의 심각성과 공포를 잘 모르는 법조인은 구타 피해가 입증돼도 가해자에게 미약한 수준의 처벌을 내린다. 폭력의 고통을 당해본 다음이 아니고서는 남편을 죽인 아내의 죄과에 대해 함부로 왈가왈부할 수 없다. 박 판사는 어린 시절 ‘아내 폭력’의 고통을 간접적으로 체험했다. 그녀는 아빠에게 구타당한 엄마가 본연의 목소리를 잃고 정신적 외상을 입는 모습을 기억한다. 엄마는 남편의 명예와 딸의 행복을 위해 마음을 닫아걸고 억압을 표현할 용기를 잃었다. 박 판사는 이런 침묵 뒤에 가려진 피해 여성들의 목소리를 듣게 된다.

 

성차별과 성폭력은 한 인격을 모독하는 것이며 인권을 유린하는 행위다. 더욱이 인권을 보호해야 할 법원이 유독 이 문제에 대해 여성에게 불리한 잣대를 들이대는 것은 법원이 아직도 가부장적 문화를 방증하는 것이라고밖에 볼 수 없다. 한 부장처럼 남성중심주의 시대에 보호를 받고 자란 남성들은 여성의 목소리를 듣지 못한다. 그동안 억압받고 눌려왔던 여성들이 자기 자리를 찾으려는 움직임을 자신들에 대한 복수나 억압으로 생각한다. 부당한 사회에 향한 여성들의 목소리는 남성에 대한 여성의 보복이 아니다. 어떤 사회 변화를 겪어도 남성과 여성이 공존하면서 사는 것은 불변의 진리다. 여성의 권리 위에 잠자는 시민이 되지 말아야 한다.[3] 성차별과 성폭력 없는 사회를 만들기 위해 혜안을 모아 여성의 인권을 유린한 자를 엄단하는 법조인이 많이 나오길 바란다.

 

 

 

 

 

[1] 《미스 함무라비》, 105쪽

[2] 같은 책, 339~341쪽

[3] 같은 책, 125쪽(“권리 위에 잠자는 시민이 되지 말라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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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galmA 2017-01-23 11:3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맞을 만해서 때린다는 논리로 아이, 여성, 성별에 상관없이 폭력을 가하던데, 그 논리는 악행의 합리화일 뿐이죠.

cyrus 2017-01-23 14:59   좋아요 1 | URL
그런 논리는 맞아야한다고 생각하는 상대방을 약자로 설정합니다. 그리고 사실과 다르게 부당한 편견을 심어줍니다. 그래서 가해자가 ‘맞을 만해서 때린다’라고 주장하면 강자의 논리가 되어 자신의 폭행을 정당화합니다. 정말 위험한 발상입니다.

해피북 2017-01-23 16:4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 글을 읽으니 애너벨 크렙의 말이 떠오릅니다. ‘왜 여성 위인은 나오지 않는가‘ 외쳤던 그녀의 책(아내가뭄)이 말이죠 ㅎ 법조계에 여성이 많지 않은 것도 문제라고 생각합니다.아무리 여성들이 남성의 마음을 안다고 해도 다 알 수 없는거처럼 남성으로 이뤄진 법 테두리 안에서는 여성들의 불합리함을 속시원이 풀어내줄 사람이 없는것도 문제가 아닐까해요. 공감이 있어야 이해가 될텐데 말이죠. ㅎㅎ 잘 읽고 갑니다.

cyrus 2017-01-24 11:53   좋아요 0 | URL
제가 마침 정희진의 <아주 친밀한 폭력>과 애너벨 크랩의 <아내 가뭄>을 읽고 있습니다. 아무래도 남성은 이성, 여성은 감정이라는 편견이 법조인들에게도 남아 있는 듯합니다. 그래서 이런 편견 때문에 여성 법조인은 사건을 이성보다는 감정에 기대어 해결할거라고 착각합니다. ^^;;

무식쟁이 2017-01-23 17:0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일상에서 습관화 되어 있는 성차별 언행들을 이제부터라도 열심히 걸러내야 한다고 생각해요. 참고 넘기는 건 곧 묵인하는거고, 묵인은 동조의 의미이므로.

cyrus 2017-01-24 11:55   좋아요 0 | URL
맞습니다. 제 자신에게 늘 주의를 줍니다. 여성에 향한 잘못된 언행이 나오면 그 자리에 반성하고, 이런 일이 재발하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자신의 잘못을 가볍게 넘기는 것도 여성 차별을 강화하는 묵인과 동조의 의미입니다.

레삭매냐 2017-01-24 17: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리뷰 대회 참가하려고 도서관 대출을 기대해
보았지만, 선 대출자가 있어서 결국 빌려 보지
못했네요.

물론 사서 읽는 수고도 하지 않았구요. 대신
이렇게 간접으로나마 읽고 갑니다 :>

cyrus 2017-01-25 10:44   좋아요 0 | URL
사실 저도 이 책을 도서관에 빌리려고 했다가 이미 대출된 상태라서 포기하려고 했었습니다. 그러다가 시청이 운영하는 작은도서관에 갔다가 우연히 이 책을 봤습니다. 운이 좋았습니다. ^^;;
 
스파링 - 제22회 문학동네소설상 수상작
도선우 지음 / 문학동네 / 2016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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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저녁 여덟시 ‘뉴스룸’을 시청하고는 또 하루를 접는다. 그런데 매일매일 접하게 되는 뉴스이건만 한결같이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를 우울하고도 서글프게 만든다. 부정적인 것들에 대한 이 시대 사람들의 반응은 거의 무감하다. 사실 그것들은 우리 삶의 일부분이 되었고 또 그 존재를 이제 당연시하는 세태를 발견하게 된다. 번듯한 대학을 나와도 밥벌이를 찾을 수 없는 사회, 속고 속이지 않으면 살아남을 수 없는 불신, 상생(相生)할 수 없는 경쟁, 극에 달한 지도층의 부패……. 문제는 이 세상의 틀에 들지 못하면 낙오자가 되어버린다.

 

1956년인가. 그해에 콜린 윌슨의 《아웃사이더(outsider))》라는 책이 나왔다.아웃사이더는 세계와 자아에 대해 끊임없이 질문을 던지고 또한 그것을 반세계적으로 해결하려는 자들이다. 그로부터 60년이 흘렀다. 콜린 윌슨이 떠나고 없는 이 세상에 아웃사이더가 있었다. 그의 이름은 장태주. 그는 사회와 화해하지 못하고 불온하다.

 

남과 같지 않다는 게 꼭 불행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었다. 스스로 남과 같지 않으려 노력해서 얻은 세상에서 살아간다면 그게 도리어 더 가치 있는 삶일 수도 있었다. (《스파링》 18쪽)

 

도선우의 소설 《스파링》에서 일찍이 세상에 환멸을 배운 주인공 장태주는 현실의 흐름, 그리고 그 속에서의 자신의 변화를 부정하거나 못 본 체해야만 한다. 이것은 분명 퇴행이고 나쁜 선택이다. 시련이 많았던 소년기를 지나 오염된 어른들의 세상으로 가기 위한 사내의 통과의례라고 하기엔 너무나 극단적이다. 하지만 세계에 냉소와 환멸을 표하는 성숙한 아웃사이더는 성장 소설에서 자주 등장하는 매력적인 존재이다. 소설이 좋은 반응을 얻은 이유는 ‘참을 수 없는 저항’을 분출하는 주인공의 모습이 공감을 얻기 때문이다. 물론 그러한 인물 설정이 성장소설에서 봤을 법한 클리셰로 반복되고 있는 것은 지적할 만한 문제다. 하지만 가장 이상한 것은 소설 안과 밖을 하나로 묶어주는 연민의 최면, 즉 자기 연민에 빠진 주인공을 연민하게 하는 최면이다. 여기서 나는 두 가지 질문을 할 수 있다.

 

첫 번째는 독자가 장태주를 연민할 자격을 갖추고 있는지에 대한 물음이다. 그건 달리 말해, 인사이더(insider)에 속한 독자들이 정말 반역의 삶을 선택한 장태수를 옹호할 위치에 있는가에 대해 되물어야 한다는 의미다. 장태주는 세상과 잘 타협하지 못하는 비주류 삐딱이 그 자체다. 웬만한 인간은 모두 펀치를 날리며 읊조리듯 씹어대는 그의 독백에는 체제에 순응하기 위해 모순된 이중성에 눈감은 인사이더에 대한 혐오감이 담겨 있다.

 

정의가 존재하지 않는 세계에서, 그 단어는 가면으로 이용되기 십상이었다. 나는 그들이 말하는 정의가 일종의 가면에 불과하다는 것을 그즈음에 이미 깨달았고, 살아오는 내내 그 가면을 어떤 인간들이 어떤 상황에서 어떻게 활용하는지를 줄곧 봐왔다. 그것은 실로 역겨운 인간들의 전유물이었다. (63쪽)

 

인사이더는 어느 정도는 사회와 개인적 가치관의 불일치 그리고 되풀이되는 사회 악습의 심각성에 대해 고민하지만, 그것의 원인이나 문제점에 대한 생각까지는 미치지 못한다. 여기서 인사이더와 아웃사이더의 차이가 명확하게 대비된다. 아웃사이더는 이러한 부분에 대해서 집요하게 또는 너무 깊게 그리고 너무 많이 보려고 한다. 장태수는 인사이더들이 보지 못하거나 애써 무시하려 하는 지배 질서의 허구성을 폭로하고 조롱했다. 《스파링》을 읽은 독자들이 불쾌한 세상에 통쾌한 주먹을 날리는 장태주에 열광하고, 그를 응원하는 반응에 그친다면 ‘무임승차’하기를 서슴지 않는 방관자에 남을 뿐이다. 사회적 실천에 뛰어들어 문제해결에 동참하고 그 열매를 나누어 가지려 하기보다는 뒷짐 진 채 뻔뻔한 얼굴로 방관만 하는 사람. 장태주는 이런 사람을 싫어한다. 이를 복싱 용어로 적용한다면, 목숨 거는 것에 두려워 피하기만 하는 아웃복서(Out boxer)다. 담임은 장태주에게 복싱의 의미를 가르치면서 정면승부를 펼치는 인파이터(infighter)가 되라고 강조한다. 인파이터는 오늘의 불합리한 사회체제를 정면으로 극복하고자 노력하며 더 좋은 사회를 꿈꾸는 아웃사이더와 비슷하다.

 

두 번째 질문은, 주인공에 향한 연민을 최고조로 끌어올린 결말에 대한 의문이다. 혹시 이 허접한 서평을 보고 있을 작가에게 한 번 묻고 싶다. 이게 최선입니까? 확실해요?[1] “내가 당신들한테 뭘 잘못했습니까?” 전혀 예상치 못한 장태주의 질문을 들은 나 역시 소설 속 기자들처럼 어리둥절한 표정이 되어 이 말의 의미를 생각해봤다.[2] 《스파링》은 시종 건조한 장태수의 시선으로 세상을 응시하면서도 그를 통해 독자의 감정적 혼란이 임계점에 이를 때까지 독하게 밀어붙인다. 그런데 자신을 괴물로 설정하는 세상에 향한 장태주의 질문은 ‘날 좀 제대로 봐 줘’ 식의 유아적인 칭얼거림을 넘어서지 못한다. 그를 구원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사랑’이라는 결론이 자연스럽게 이어진다. 장태주에게 사랑의 필요성을 알려주기 위해서 정체를 알 수 없는 누군가가 등장하는 설정은 뜬금없는 ‘데우스 엑스 마키나(deus ex machina)’다. 작가가 ‘사랑의 구원’이라는 결론에 기대는 것은 아웃사이더의 저항을 비웃으면서 가장 앞장서서 난타하고 있는 인사이더에게 면죄부를 주는 것이다. 곧 누군가를 희생제의 제물로 삼으면서 본심은 자신의 권력을 확보하려는 자들의 책임을 회피하기 위한 우회로가 된다. 이 모호한 위치의 ‘사랑’은 최면제가 되어 독자의 반성을 마비시킨다.

 

장태주는 마음의 상처를 고스란히 안은 채 미래조차 불투명한 세상을 살아가야 한다. 장태주의 무력함은 연민을 불러일으킨다. 그러나 놓치지 말아야 할 사실은 이 무력함이 자기 연민으로 이어진다면, 그 어디서도 출구를 찾을 수 없을 것이라는 점이다. 세상과 화해하지 못한 장태주의 결말은 투정만 부리다가 성장을 멈추어버린 소년이나 다름없다. 이런 점에서 《스파링》은 성장소설이라 할 수 없다. 장태주만의 사랑이 있고, 그가 행복할 수 있는 세계는 찾기는 쉽지 않다. 없는 세계(Utopia)이기에 또다시 절망하지 않을 수밖에 없다. 불행하게도 이 세상에 수많은 장태주가 있다. 살아가야 할 방향의 선택을 확인할 여유도 주지 않는 세상의 혼돈 속에서 방황하는 젊은 세대는 슬퍼하고만 있다. 과연 이들은 장태주처럼 거대한 세상에 멱살을 부여잡고, 거부하는 몸짓을 할 수 있을까. 아웃사이더는 아무나 하는 것이 아니다.

 

 

 

 

[1] 드라마 ‘시크릿 가든’ 대사

 

[2] “내가 당신들한테 뭘 잘못했습니까?” 전혀 예상치 못한 답변을 들은 기자들은 모두 어리둥절한 표정이 되어 내가 하는 말의 의미를 다른 이들에게 묻듯, 서로 얼굴을 돌아보면 눈치를 살폈다. (《스파링》 35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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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삭매냐 2017-01-24 17:2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예전에 알던 분이 쓴 책이라 서점에서 읽기에
도전했지요. 딱 101쪽 읽고 나서 고만 읽었어요.

나머지는 나중에 도서관에서 빌려다 보려구요.
아직 도서관에 안 들어온 모양이네요.

책 읽으면서 리뷰 제목도 정해 놓았었는데 다
잊어 버렸네요. 인간은 참 망각의 동물인가 봅니다.

cyrus 2017-01-25 10:48   좋아요 1 | URL
작가분이 네이버에 서평 블로그를 운영한다는 사실을 최근에 알았습니다. 한 번 그 분의 블로그를 봤는데 역시 일반 독자서평과 다른 아우라를 느꼈습니다. 알라딘에서만 활동하니까 네이버에 서평을 쓰는 좋은 독자들의 존재를 보지 못했었습니다. 작년에 예스24 블로그를 만들면서도 느꼈지만, 제가 그동안 알라딘 램프 안에 오랫동안 있었습니다. 생각보다 책을 좋아하고, 좋은 서평을 쓰는 분들이 많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