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랑말랑하다

 

[1] 매우 또는 여기저기가 야들야들하게 보드랍고 무르다.

[2] 사람의 몸이나 기질이 야무지지 못하고 맺힌 데가 없어 약하다.





고급 양장으로 만들어진 오래된 가족 사진첩은 딱딱하고 무겁다. 책장 깊은 구석에 꽂힌 사진첩을 꺼내면 여간 성가시다. 사진첩에 사진을 소중히 넣어 보관한다고 해도 누렇게 변한다사진에 그날의 순간이 남아 있지만, 그날의 감정은 남아 있지 않다세월이 지날수록 사진만 변색하는 게 아니라 사진에 드러난 감정까지 탈색되기 때문이다. 사진에 보이지 않는 감정을 기억하려면 글로 기록해야 한다그러면 세월에 의해 닳아져서 사라지기 쉬운 내 인생의 어떤 순간을 온전히 간직할 수 있다.






이도 글 · 그림 이도 일기》 (탐프레스, 2022)




이도 일기말랑말랑한 그림첩이다[1]일상의 순간을 사진으로 담는 대신에 이도 일기처럼 글과 그림으로 기록하면 좋은 점이 있다언제든지 꺼내 볼 수 있으며 사진 변색을 걱정할 필요가 없다그리고 사진에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린 순간의 감정을 힘겹게 떠올리면서 찾지 않아도 된다


직접 글을 쓰고, 그림을 그린 이도독립출판 단편소설 보름달》(2018)을 쓴 작가다. 출판 스튜디오 탐프레스(tampress)’에서 펴낸 문집 W. 살롱 에디션집필진으로 참여했다글이든 그림이든 시간을 흘려보내지 않고 개인의 삶을 기록하는 행위는 일종의 독백이다. 기록하는 사람은 상대방이 누구든 내 이야기를 봐주면 얼마나 좋을까, 기대하면서 자신의 감정을 꾸밈없이 솔직하게 드러낸다. 저자의 독백은 자기 내면과 주변 세상을 꾸준하게 들여다본 결과물이라는 점에서 전혀 가볍지 않다


이도 일기에 나오는 주요 인물은 저자의 반려인과 반려묘. 저자는 단독 주택에서 이들과 함께 보낸 사소한 일상뿐만 아니라 살면서 불쑥 튀어나오는 걱정과 고민을 들려준다. 이러한 부정적인 감정이 머리 안에서만 머물면 가슴이 짓눌린다. 삶을 압박하는 내밀한 고통은 어느 순간 일상을 무너뜨리기도 한다. 더 무거워지기 전에 부정적 감정을 모조리 털어내어 한 자 한 자 기록하다 보면 자신을 괴롭히는 감정의 원인을 찾게 되어 고통이 옅어진다. 저자는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바라보고 인정하면서 글을 쓴다. 작년부터 쓰기 시작한 저자의 글을 읽으면 그녀의 말랑말랑한 마음[2]이 점점 단단해짐을 느낄 수 있다.


저자는 단어의 의미를 허투루 보지 않을 정도로 민감하다. 그녀는 작년 521일에 쓴 글에서 여성의 존재를 부정적으로 보게 만드는 낡은 속담들을 비판한다.






 사위 관련 속담이 궁금해 검색했다. 10개 중 하나 빼고는 긍정적인 의미였다. 다시 며느리로 검색했는데 관련 속담 109개 중 긍정적인 게 없다. 끝까지 읽기 힘들 정도였다. 시어머니와 며느리는 여성의 다양한 역할 중 하나일 뿐, 결국 한 사람이다. 자아 분열하지 않고 사이좋게 지내려면 오래되고 이상한 속담부터 정리할 필요가 있다. 109개의 속담 중 다음 세대에 남겨줄 만한 게 1도 없다. 여자의 적은 여자가 아니다


(51)



누군가는 개인적 생각을 일기로 써서 공개할 필요가 있느냐고 생각할 것이다하지만 글 쓰는 사람이라면 특정 대상에 편견을 덧씌우는 단어와 문장에 민감해져야 한다. 너무 당연하게 여겨져서 사전에 딱 달라붙은 그 이상한 단어를 펜으로 깨뜨려야 한다펜은 단어보다 강하다.

     




















[레드스타킹 20226월 도서] 임솔아, 김멜라, 김병운, 김지연, 김혜진, 서수진, 서이제 2022 13회 젊은작가상 수상작품집(문학동네, 2022)





단어에 균열을 내는 글쓰기올해 젊은 작가상 수상작김지연의 단편소설 공원에서에 나오는 주인공의 비판 의식과 닮았다소설 속 주인공은 여자를 부정적으로 묘사한 속담이 더 많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서 사전에 인간의 온갖 차별의 역사가 담겨 있다고 생각한다고루한 역사가 반영된 단어를 깨부수면 빈칸이 생긴다. 김지연 작가는 공원에서의 작가 노트 제목을 빈칸을 채우시오로 정했다. 그녀는 사전에 있는 차별적인 단어를 해체하면서 생긴 빈칸에 어떤 말을 채울 수 있을지 생각하면서 소설을 썼다고 밝힌다. 그러면서 무엇이든 쓸 수 있다라고 결론을 내린다.


이도 작가는 20211028일 일기에 버지니아 울프(Virginia Woolf)의 말을 인용한다.

 


 “여러분이 쓰고 싶은 것을 쓰는 것. 그것만이 중요한 일입니다. 그러므로 나는 여러분에게 아무리 사소하고 광범위한 주제라도 망설이지 말고 어떤 종류의 책이라도 쓰기를 권하고 싶습니다.”



내가 쓰고 싶은 것을 쓰는 일은 개인적이고 무의미한 일이 아니다. 이도 작가는 W. 살롱 에디션 Vol. 2: 쓰는 여자에 수록된 자신의 글 소설, 쓰는 사람에서 소설을 쓸 때면 소설가가 된다고 말한다. 그러면서 불꽃처럼 피어오르는 글쓰기 욕망이 생기면 세상을 향해 쓰겠다고 다짐한다






* 김정희, 권지현, 이도, W.살롱 커뮤니티 참여자들 

W. 살롱 에디션 Vol. 2: 쓰는 여자_ 펜은 눈물보다 강하다》 

(탐프레스, 2020)




이도 작가는 2020년의 다짐을 올해에 지키는 데 성공했다. 이도 일기는 단독 주택과 작업실을 넘어 힘차게 세상으로 나아갔다세상을 향해 꾸준히 쓰고 있는 작가의 다음 행보가 기대된다.






※ 《이도 일기정오표



* 50



 영빈은 J에 비해 나를 훨씬 많이 알고 있지만 J 영빈보다 나를 더 잘 이해할 때가 있다.


J J






* 61

 




핼로윈 핼러윈






* 152





자세히 보니 검의 때가 잔뜩 묻은 치즈 아깽이었다.

 

검의 검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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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은빛 2022-07-03 14: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속담이 오래된 글이었기에 더욱 성차별적인 내용일 수 밖에 없겠다는 생각이 드네요. 속담마저도 자주 쓰지 않는 우리 세대는 과연 얼마나 성차별적인 표현들을 자주 쓰고 있나 검열해봐야겠어요. 22년 수상작품집 다 읽었었는데, 급하게 읽느라 말씀하신 문제 의식을 깨닫지 못했네요. 다시 읽어봐야겠어요.

cyrus 2022-07-03 20:13   좋아요 0 | URL
저는 <공원에서>의 주인공처럼 사전의 단어에 의문을 제기하고 비판하는 식으로 생각한 적이 있어요. 그래서 책을 읽다가 미심쩍은 단어를 마주하면 그냥 못 넘어가요. 종종 사전의 의미를 나름 비판하면서 재해석한 글을 몇 편 쓴 적이 있는데 그중 하나가 ‘노가다’였어요. 유발 하라리의 책 <사피엔스>에 ‘노가다’라는 단어가 나오는데, 당시에 그 단어를 보자마자 ‘이건 아니다’라고 바로 느꼈어요.
 

 

 

2005년에 미국의 출판사 알프레드 노스(Alfred North)는 고양이를 주제로 한 세계의 시를 모은 <The Great Cat>를 출간했다.

 

 

 

 

 

 

 

 

 

 

 

 

 

 

 

 

 

 

* 이장희 봄은 고양이로다(아인북스, 2017)

* 이상화, 이장희 이상화. 이장희 시선(지만지, 2014)

    

 

 

 

 

 

 

 

 

 

 

 

 

 

 

 

 

* 보들레르 악의 꽃: 앙리 마티스 에디션(문예출판사, 2018)

* 보들레르 악의 꽃(아티초크, 2015)

* 보들레르 악의 꽃(문학과지성사, 2003)

    

 

 

 

 

 

 

 

 

 

 

 

 

 

 

 

 

 

* 릴케 검은 고양이(민음사, 1974)

 

    

 

 

 

 

 

 

 

 

 

 

 

 

 

 

 

 

 

* 박성민, 송승현 옮김 고양이를 쓰다: 작가들의 고양이를 문학에서 만나다(시와서, 2018)

    

 

 

이 시 선집에는 악의 꽃에 실린 보들레르(Baudelaire)고양이, 릴케(Rilke)검은 고양이등이 수록되어 있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시인들의 시를 한자리에 모은 이 책에 우리나라 시인이 쓴 시도 있다. 그 시는 바로 고월(古月) 이장희봄은 고양이로다. 영문 제목은 ‘The Spring is a cat’이다.

 

세계의 명시들을 모은 책에 한국의 시인으로 유일하게 소환된 이장희는 누구인가. 그건 너’, ‘한 잔의 추억등의 히트곡을 부른 가수 이장희의 동명이인이다. 시인 이장희의 본명은 이양희다. 1920년에 장희(樟熙)로 개명했고, 필명으로 장희(章熙)를 썼다. 그는 1900년 대구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조선총독부 중추원 참의를 지낸 이병학이다. 이장희는 이병학과 첫 번째 아내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이었는데, 이장희가 다섯 살 때 친어머니가 세상을 떠났다. 이병학은 두 번째 부인과 결혼하여 56녀를 두었으며 이장희가 죽기 5년 전에 세 번째 아내를 맞아들였다. 당연히 이장희의 이복 형제와 자매가 더 늘어났다. 이병학은 두 명의 아내만으로는 성에 차지 않았는지 첩 1명을 두었다.

 

고월은 생전에 많은 시를 쓰지 않았다. 1924년에 문단에 등단했고 1929년에 음독자살하였다. 고월의 몇 안 되는 친한 문인 중 한 사람이었던 동향 출신의 시인 목우(牧牛) 백기만1951년에 <상화와 고월>이라는 시 선집을 편찬했고, 한동안 잊힌 이장희의 시 열한 편이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상화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를 쓴 시인 이상화를 가리킨다. 지금은 대구를 낳은 유명한 문인이라면 가장 먼저 이상화와 운수 좋은 날의 작가 빙허(憑虛) 현진건을 떠오르지만, 백기만과 이장희도 대구 시민이라면 반드시 기억해두어야 할 대구 출신의 문인이다. 이장희, 이상화, 현진건 이 세 사람 모두 광복을 보지도 못하고 삶을 마감했다. 앞서 언급했듯이 고월은 1929년에 자살했고, 이상화와 현진건은 1943425일 같은 날에 숨을 거두었다. 이들과 친하게 지낸 목우만이 조국의 광복을 지켜봤다.

 

고월은 대구의 부호 집안에서 태어났으면서도 불우한 유년 시절을 보냈다. 친어머니의 이른 죽음, 그리고 이복 형제와 자매가 많은 복잡한 가정환경은 시인의 폐쇄적인 성격을 형성하는 원인이 되었다. 우울하고 조용한 성격 탓에 친하게 지낸 지인과 동료 문인이 많지 않았다. 시인 겸 국문학자 양주동은 고월을 술 마실 줄 모르는 말수가 적은 문인으로 기억했다. 문인들 사이에서 주당으로 유명한 양주동과 목우가 있는 술자리에 고월이 합류했는데, 목우는 술을 입에 대지 않고 안주만 먹는 고월에게 핀잔을 주기도 했다.

 

이상화가 나라 잃은 시대에 대한 고뇌를 안으면서 시로 쓰고 있을 때, 고월은 친일파 아들이라는 죄의식에 갇혀 살았다. 어쩌면 친일파의 아들이라는 낙인은 너무나도 소심한 시인을 더욱 고립하게 만든 원인으로 작용했을 것이다. 고월은 상화와 목우처럼 항일 운동을 하면서 시를 쓰진 않았지만, 고월이 생각하기에 식민지 시대에 저항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아버지와의 불화를 받아들이는 일이었다. 이병학은 일본에서 유학 생활을 했으며 일본어에 능숙한 고월이 자신의 가업을 이어받기를 원했다. 이병학은 고월에게 중추원의 어떤 직무를 맡아달라고 제안했으나 고월은 거부했다. 시인은 일본인과 관련된 아버지의 명령을 모조리 거부했고, 아버지와의 갈등은 더욱더 깊어졌다. 다만 고월이 친일파 아버지의 명을 거부했다고 해서 그를 ‘저항 시인으로 단정할 수 없다. 고월은 사교성이 부족했던 사람이다. 그는 사람을 많이 만나야 하는 아버지의 일이 자신의 적성에 맞지 않는다고 판단했을 수 있다.

 

고월은 절제된 언어로 이미지를 묘사하는 시를 주로 썼는데, 그의 섬세한 감각을 유감없이 보여준 시가 바로 봄은 고양이로다. 고월은 이 시에서 생동감 넘치는 봄의 기운을 고양이의 신체 부위로 비유했다.

 

 

꽃가루와 같이 부드러운 고양이의 털에

고운 봄의 향기가 어리우도다.

 

금방울과 같이 호동그란 고양이의 눈에

미친 봄의 불길이 흐르도다.

 

고요히 다문 고양이의 입술에

포근한 봄 졸음이 떠돌아라.

 

날카롭게 쭉 뻗은 고양이의 수염에

푸른 봄의 생기가 뛰놀아라.

    

 

(봄은 고양이로다20)

 

 

한국 모더니즘 시의 지평을 연 수작으로 평가받는『봄은 고양이로다는 19세기 프랑스 모더니즘의 선구자 보들레르의 고양이와 함께 언급되곤 한다. 그러나 보들레르의 시에 나타난 고양이는 퇴폐미와 생명력을 동시에 가진 팜 파탈(femme fatale)의 이중적인 매력을 의미한다.

 

고월은 총 서른여섯 편의 시를 남겼는데, 봄은 고양이로다』가 가장 많이 알려진 작품이. 고월의 시는 숨어 있는 보석’과 같다고 할 수 있는, 내가 개인적으로 높이 평가하고 싶은 고월의 시는 겨울의 모경(暮景)이다.

 

 

큰 거리는 저문 연기에 젖어

동정이 몽롱하고

녹슨 무쇠 같은

둔중한 냄새가 잠겨 흐른다.

그러나 가다가는

앓는 소리 은은한 전차가

물오른 풀잎 같은

뾰족한 신경을 드러내고

때 아닌 푸른 꽃을

허공에 날리기도 한다.

길바닥은

얼어서 죽은 구렁이 같이 뻗으러졌고

그 위를

세찬 바람이 돛을 달고 달아나면

야릇한 군소리가

눈물에 떨어 그윽이 들린다.

잘 주절대고 하이칼라인

제비의 유령이

불룩한 검정 외투를 휘감고 비틀거리는

사이에 있어서

흐른 은결같이 허여스름한 옷 그림자가

고요히 움직인다.

구름인지 안개인지 너머로

핏줄 선 눈알같이 불그레함은

마지막으로 넘어가는

날 볕의 얼굴이 숨어있음이라

이들 눈에 드는 모든 것이

저마다 김을 뿜어서

그는 환등의 영사막이며

침울한 데생을 보는 듯하다

  

  

(봄은 고양이로다36, 38)

 

 

 

이 시에서 고월은 근대적 시공간으로 변모하는 조선의 어느 도시(경성 혹은 대구?)를 관찰하는 산책자(flaneur: 플라뇌르). 모든 것이 서양식으로 대체되고, 인간이 소외되기 시작했던 조선의 도시. 시인은 군중 속에 쓸쓸히 걸어가면서 도시의 우울을 데생처럼 묘사한다. 도시의 모경은 도시인의 고독을 관찰하면서 도시의 멜랑콜리한 분위기를 시적으로 형상화한 보들레르의 작업을 떠오르게 한다.

 

1980년대 초반에 이장희 시 전집이 두 권이나 출간되었지만, 현재는 절판되었다(두 권 모두 알라딘에 등록되지 않은 책이라서 정확한 제목을 입력해도 찾을 수 없다. 헌책을 판매하는 웹사이트에서만 확인할 수 있다). 이상화. 이장희 시선(지만지, 2014)은 이장희의 시 34편 원문을 실었다. 고월이 쓴 시가 많지 않아서 36편을 전부 실어도 좋을 텐데 무슨 이유에서인지 시 두 편이 제외되었다. 2017년에 출간된 봄은 고양이로다 (아인북스)가 현재로선 유일하게 남아있는 이장희 시 전집이다. 이 책은 시의 원문만 실은 게 아니라 한문과 고어를 쉬운 말로 풀이한 현대문도 함께 실었다.

 

그런데 이 책에 시인의 생애를 설명한 내용이 중복되어 나온다. 그렇다 보니 독자에게 혼란을 주는 내용이 보인다. 봄은 고양이로다230이장희 프로필에는 출생 월일이 ‘190011로 적혀 있고, 231이장희 연보에는 ‘1900119로 되어 있다. ‘이장희 프로필이장희 연보는 제목만 다를 뿐 거의 비슷한 내용이다. 네이버 백과사전에 있는 이장희항목에 보면 그가 태어난 날이 ‘11로 되어 있다. 고월은 ‘1900119에 태어난 것이 맞다. 그리고 책에 고월이 이병학의 129녀 중 삼남으로 태어났다고 되어 있는데도 다음 장에는 시인이 맏아들로 태어났다고 잘못 적혀 있다. , 책 앞날개에 이장희 전짐이라는 오자가 있다. ‘전집으로 고쳐야 한다. 봄은 고양이로다는 시 전집에 걸맞지 않게 편집이 엉성하다.

 

고월 이장희는 정지용, 김기림과 함께 조선의 이미지스트(Imagist)로 평가받아야 한다. 가수 이장희가 시인 이장희보다 더 유명하다. 고향인 대구에서도 그의 이름과 시들이 잘 알려지지 않아서 안타깝기만 하다. 두류공원에 이장희 시비(詩碑)가 있다는 사실을 아는 대구 시민이 과연 몇 명이나 될까. 잊힌 요절 시인의 봄은 언제 올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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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ngela 2020-01-01 22:5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역시 cyrus님 글은 참으로 좋습니다. 감사합니다. 2020에도 좋은글 부탁드립니다~^^

cyrus 2020-01-01 22:56   좋아요 0 | URL
요즘 제가 알라딘 서재 활동에 재미를 느끼지 못하고 있어서 예전처럼 글을 많이 쓰는 모습을 보기 어려울 거예요. 이제 저는 알라딘 마을에 조용히 살려고 해요. ㅎㅎㅎㅎ

2020-01-03 02:2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0-01-02 19:08   URL
비밀 댓글입니다.

수이 2020-01-01 23: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러지마 조용히 살지 마 너 좋아하는 이들을 생각해~~~~

cyrus 2020-01-02 19:10   좋아요 0 | URL
절 좋아하는 분들이 소수라서 이분들하고 잘 지내고 싶어요. 이제는 온라인 공간에서 새로운 사람을 만나는 일에 흥미가 없어요.

syo 2020-01-02 08: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뭐라고요? 조용히 사시겠다고요??? 울까? 나 울까 확?

cyrus 2020-01-02 19:15   좋아요 0 | URL
온라인 은둔 생활을 하려고요.. syo님 댓글 처음 확인했을 때 ‘울까’를 ‘(대구로) 올까’로 봤어요... ㅎㅎㅎㅎ 울지 마요.. ^^;;

2020-01-02 08:58   URL
비밀 댓글입니다.

cyrus 2020-01-02 19:17   좋아요 0 | URL
연말에 바빠서 전화로 인사를 못 드렸네요. 새해 복 많이 받으시고, 늘 건강하세요. ^^

프레이야 2020-01-02 09: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사이러스님 오랜만의 페이퍼 반가워요.
조용히ㅎㅎ이렇게 페이퍼 올려주시면 조용히 와서 볼게요.
이장희 시인의 ‘봄은 고양이로다‘는 봄이면 꼭 떠올리는 시에요.
시집은 갖고 있지 못했는데 담아갑니다.
이상화고택이 계산성당이랑 멀지 않게 있더군요.
대구에서 일년전 겨울, 맑은 국밥 한 그릇 뜨듯하게 먹었던 기억이 나요.
새해 조용히^^ 복 많이 받으세요.

cyrus 2020-01-02 19:21   좋아요 0 | URL
대구에 관한 아주 뜨끈한 추억이 있으시군요. 방금 저녁을 먹었는데 프레이야님이 국밥을 언급하시니까 국밥이 먹고 싶어지네요. 겨울이라서 그런지 식욕이 늘어났어요.. ㅎㅎㅎ 프레이야님도 새해 복 많이 받으시고, 늘 건강하세요. ^^

레삭매냐 2020-01-02 10: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요즘 글읽기가 뜬하신지 예전 같이
왕성한 글쓰기를 보기 쉽지 않네요 :>

모쪼록 건강하시고 경자년 새해에는
소망하시는 일들 모두 이루시길 바랍
니다.

해삐 뉴 이얼 ~~~

cyrus 2020-01-02 19:22   좋아요 0 | URL
글 쓰는 몸이 늙었는가 봐요.. ㅎㅎㅎㅎ
레샥매냐님도 새해 복 많이 받으시고, 늘 건강하세요. ^^
 

 

 

어젯밤 열한 시에 눈을 붙이고, 오늘 새벽 두 시쯤에 일어나서 세 여자2을 한달음에 다 읽었다. 조선희 작가의 장편소설 세 여자1925년 여름, 단발 의식을 치르고 청계천 개울물에서 탁족을 하는 세 여인의 사진 한 장을 모티브로 시작한다. 사진 속 세 여인은 허정숙, 주세죽, 고명자.

    

 

 

 

 

 

 

 

 

 

 

 

 

 

* 조선희 세 여자(한겨레출판, 2017)

 

 

허정숙은 여성해방과 자유연애를 주장한 공산주의자로 중국으로 건너가 무장 항일운동에 참여했. 주세죽은 상해에서 공산주의자 박헌영을 만나 혼인을 하였고, 소설의 모티브가 된 사진을 세상에 알린 딸 비비안나 박을 낳았다. 고명자는 김단야의 연인이었으며 공산주의 운동과 친일 행적을 오가다 해방 후에는 여운형의 측근으로 활동했다.

 

소설은 오랫동안 잊힌 이 세 혁명가의 삶을 생생하게 보여준다. 또한 이 여성들을 중심으로 주변 남자들의 삶과 함께 1920년대에서 1950년대에 걸쳐 한국 근현대사를 폭넓게 다루고 있다. 그녀들이 세상을 바꾸기 위해, 때로는 생존을 위해 선택했던 삶의 궤적들은 소설의 씨실이 되었고, 30여 년에 걸친 역사의 격랑들은 소설의 날실이 되어 촘촘하게 교차하고 넘나든다.

 

식민지 조선의 여성들은 고등교육을 받아 어느 정도의 지식과 교양 수준을 갖추고, 뛰어난 능력이 있어도 사회를 이루는 주체적 인간으로서 충분히 대우받지 못했다. 누구의 아내, 누구의 딸, 누구의 어머니로 더 대표됐으며 그녀들의 성취는 깊이 있게 평가받지 못했다. 특히 여성 혁명가들은 이중으로 소외를 당한 존재이다. 반공 이데올로기가 지배한 시대에 사회주의 계열 인사라는 이유로 철저히 외면받았고, 또 여자라는 이유로 조명받지 못했다. 세 여자는 소설이지만, ‘상상력의 승리가 만들어 낸 의미 있는 기록이다. 작가가 12년 동안 공들여 쌓아 올린 여성들의 서사이기도 하다.

    

 

새벽에 세 여자2권을 읽다가 눈이 번쩍 뜨일 만한 대목을 발견했다.

 

 

 태평양전쟁 막바지에 이상한 친일 괴담류가 차고 넘치던 인사동 서점에서 이여성의 <조선복식고(朝鮮服飾考)>를 발견했을 때 명자는 청량한 한 줄기 바람을 쏘이는 기분이었다. 친일과 검열의 좁은 틈서리에서 <조선상고사>를 썼던 안재홍처럼 그도 역사에서 길을 찾았던 것이다.

 

(세 여자2, 119)

 

 

조선상고사(朝鮮上古史)단재 신채호1931년에 조선일보에 연재하기 시작한 글이다. 원래 신채호는 조선의 역사를 정리한 책을 쓰려고 생각했으나 그가 여순 감옥에 갇혀 세상을 떠나는 바람에 글은 완성되지 못했다. 신문에 연재한 신채호의 글은 1948년에 단행본으로 나와 세상의 빛을 다시 보게 되었고, 고조선부터 백제 시대까지의 고대사를 다루고 있어서 조선상고사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 신채호 조선상고사(비봉출판사, 2006)

* 안재홍 조선상고사감(우리역사연구재단, 2014)

    

 

 

신채호의 글이 연재될 당시 조선일보 사장은 안재홍이었다. 그는 1948년에 나온 조선상고사의 서문을 직접 썼다. 안재홍 역시 고대사를 연구했으며 신간화외 조선어학회 등과 관련된 독립운동 활동으로 여러 차례 옥고를 치르는 동안 고대사를 주제로 한 논문들을 썼는데, 그  논문을 모은 책이 바로 광복 이후인 1947, 1948년에 두 권으로 나온 조선상고사감(朝鮮上古史鑑)이다.

 

작가가 글을 쓰면서 조선상고사조선상고사감을 혼동했던 것 같다. 오늘 오후에 있을 북 토크가 끝나고 난 뒤에 작가에게 이 사실을 알려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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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크pek0501 2019-01-20 12: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중요한 발견을 하신 것 같군요. 잘못된 것은 바로 고쳐야지요.

cyrus 2019-01-21 18:57   좋아요 0 | URL
제가 읽은 책은 4쇄입니다. 확인해봐야겠지만, 4쇄 이후로 나온 책에서는 오류가 고쳐졌을 수도 있어요.

stella.K 2019-01-20 17: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앗, 그런감...?
나도 읽기는 조선상고사감이라고 읽은 것 같은데...
그러면서 생각은 신채호의 책을 싶다는 생각했지.
헷갈리는 일이야.ㅋ

cyrus 2019-01-21 19:00   좋아요 0 | URL
토요일 북토크 때 작가님이 안재홍을 ‘조선상고사감을 쓴 독립운동가‘라고 정확하게 언급했어요. 책을 만든 편집자가 실수했을 수도 있어요. ^^;;
 
사랑을 멈추지 말아요 큐큐퀴어단편선 1
이종산 외 지음 / 큐큐 / 2018년 8월
평점 :
절판


 

 

퀴어(Queer)는 레즈비언 · 게이 · 양성애자 · 트랜스젠더 등 세상의 모든 성소수자를 통칭하는 개념이다. 그렇다면 퀴어 소설은 성소수자의 일상을 전면으로 다룬 소설인가? 꼭 그렇지만은 않다. 성소수자가 등장하지 않는 퀴어 소설도 가능하다. 이런 퀴어 소설은 세상을 바라보는 성소수자의 시각으로 풀어낸 이야기로 볼 수 있다. 그러므로 ‘일반(一般, 이성애자)’ 작가가 소설에서 ‘이반(異般: 성소수자)’ 서사를 조형하는 일은 매우 정교한 작업이다.

 

《사랑을 멈추지 말아요》는 1인 퀴어 문학 전문 출판사인 큐큐가 선보인 국내 첫 퀴어 단편 선집이다. 현재 활발히 활동하고 있는 이종산, 김금희, 박상영, 임솔아, 강화길, 김봉곤 작가가 쓴 단편 소설이 실려 있다. 이 여섯 편의 소설들은 서양 고전을 퀴어 서사로 변주한 것이다.

 

캐서린 맨스필드(Katherine Mansfield)가 쓴 『가든파티』는 섬세한 심리 묘사가 돋보이는 작품이다. 맨스필드가 세상을 떠나기 전에 발표된 이 소설은 파티에 들뜬 부유한 사람들과 교통사고를 당한 노동자의 비참함을 비교하며 인생의 한 단면을 펼친다. 하지만 이야기를 전개하는 방식이 결코 작위적이지 않다. 그저 유복한 집 안에서 자란 소녀가 가난한 노동자의 죽음을 접한 후 겪는 심리 변화만 따라간다. 『가든파티』가 그랬듯이 이종산 작가의 『볕과 그림자』도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워진 삶의 진실에 깨닫는 인물의 내면을 담담하게 그려낸다. 죽음은 언제나 삶과 함께한다. 죽음은 삶, 그다음에 있는 것이 아니라 삶의 일부이다. 그러나 이종산 작가는 ‘죽음’에만 주목하는 것이 아니라 남겨진 자가 계속해서 살아갈 수 있게 해주는 ‘사랑’의 의미도 주목한다. 사랑도 우리 삶의 일부이다. 상실은 또 다른 사랑을 통해 치유된다. 『볕과 그림자』는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으로 느끼는 상실의 감정을 어떻게 마주치면서 극복해야 하는지 보여준다. 삶은 고통스러우나 또한 그것을 ‘사랑’과 함께 안고 살아가기에 아름다운 것이기도 하다. 작가는 말한다.

 

 

 사랑하는 사람들은 영원히 떨어지지 않을 것처럼 붙어 있다. 하지만 어떤 사랑도 영원할 수는 없다. 그래서 사랑하는 사람들을 볼 때면 기쁨과 묘한 슬픔이 동시에 느껴지고는 한다.

 

(작가 노트, 35쪽)

 

 

김금희 작가의 『레이디』제임스 조이스(James Joyce)《더블린 사람들》에 수록된 『애러비』『죽은 사람들』에서 모티브를 가져온 소설이다. 아련하고 애틋한 여고생들의 첫사랑 이야기를 담고 있다. 오스카 와일드(Oscar Wilde)의 장편 소설 《도리언 그레이의 초상》은 퀴어 문학의 고전이다. 도리언은 자신의 젊음과 아름다움을 영원히 간직하고 싶어 했던 인물이다. 박상영 작가의 『강원도 형』에는 외모가 뛰어난 사람으로 인정받고 싶은 인스타그래머 ‘도이언’이 등장한다. 작가는 이 소설에서 인간의 ‘아름다움’이 무엇인지 묻는다. 소셜네트워크서비스, 언론, 광고 같은 미디어의 영향으로 외모 강박이나 외모지상주의는 점점 더 고착화하고 있다. 외모지상주의 사회에서 성소수자 역시 자유롭지 못하다. 외모지상주의는 성소수자의 몸에 대한 편견(“성소수자는 예쁘장한 외모를 유지하려고 화장을 한다”)을 낳을 뿐만 아니라 몸의 차이를 보지 못하게 만든다.

 

임솔아 작가의 『뻔한 세상의 아주 평범한 말투』허먼 멜빌(Herman Melville)『선원, 빌리 버드』를 변주한 소설이다. 이 소설은 타자를 ‘비정상’으로 규정하여 ‘정상’으로 만들려는 ‘선한 폭력’이 어떻게 인간 대 인간 관계를 불편하게 만드는지 보여준다. 모든 면에서 ‘정상적인’ 사람은 거의 존재하지 않지만, 사회는 특정한 사람만을 ‘정상’으로 인정한다. 자신이 느끼는 삶의 결핍이나 통증을 비정상적인 것으로 스스로 판단하게 된다. 타자를 ‘비정상’으로 낙인찍는 사람들의 가치 판단은 자기의 유약함에서 비롯된 것이다.

 

 “정상이라는 것은 계급이고 권력이라고 생각해. 정상성은 그 영역 안에 종속되어야 안심이 되니까. 나는 비정상이어서 아픈 게 아니라 나를 거부하면서까지 정상이 되려고 애를 썼기 때문에 아팠어.”

 

(『뻔한 세상의 아주 평범한 말투』, 135쪽)

 

 

강화길 작가의 『카밀라』는 레즈비언 뱀파이어가 나오는 세리든 르 파누(Sheridan Le Fanu)의 동명 소설을, 김봉곤 작가의 『유월 열차』미야자와 겐지(宮沢賢治)『은하철도의 밤』을 모티브로 한 소설이다. 여섯 편의 소설은 생각하기에 따라 평범하기 그지없는 내용을 담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이 이야기들이 ‘평범하게’ 느껴졌다면 이 책을 만든 작가와 출판인들 입장에선 성공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성소수자들의 사랑 또한 인간으로 살면서 느낄 수 있는 일반적인 감정이기 때문이다. ‘큐큐퀴어단편선’은 매년 한 권씩 선보인다고 한다. 여전히 세상에 호명되지 못한 성소수자들이 편안하게 기댈 수 있는 이야기들이 자주 나왔으면 한다. 이야기는 멈춰선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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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이웃의 식탁 오늘의 젊은 작가 19
구병모 지음 / 민음사 / 201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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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랙 코미디(black comedy)를 사전에서 찾아보면 ‘웃음을 통해 환멸과 냉소를 표현하는 드라마’[*]라고 설명되어 있다. 블랙 코미디에서 교훈을 찾기 어렵다. 모든 것을 조롱하는 블랙 코미디 앞에서는 교훈마저 조롱의 먹잇감이 된다. 이처럼 부조리한 상황에서 피어나오는 ‘검은 웃음’, 이것이 블랙 코미디가 자아내는 웃음이다. 불쾌하고 부조리한 상황을 희화화한다는 점에서 블랙 코미디의 웃음은 희극과 비극의 경계를 허문다. 이를 통해 블랙 코미디는 희극과 비극, 폭소와 절망 사이를 자유로이 오간다. 블랙 코미디로부터 교훈은커녕 의미조차 찾을 수 없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블랙 코미디에서 느껴지는 허무함 속에는 진실이 주는 위력이 담겨 있다. 우리 삶 자체가 그처럼 부조리하고 어처구니없는 일들로 가득 차 있기 때문이다. 블랙 코미디는 인간이 사는 곳이면 어디서든 볼 수 있다.

 

구병모의 장편소설 《네 이웃의 식탁》은 주택 공동체 속에 살아가는 네 쌍 부부의 일거수일투족을 통해 부조리한 세상을 보여주는 ‘현대인들을 위한 블랙 코미디’다. 블랙 코미디에 희비를 함께 가졌듯이 이 소설에는 정상과 비정상이 공존한다. 《네 이웃의 식탁》에선 삶의 부조리에 속절없이 말려든 인간들이 보인다. 작가는 ‘꿈미래실험공동주택’이라는 공간에서 벌어진 작은 소동극을 통해 흔히 우리가 정이 가득 묻어나는 단어라고 느끼는, ‘가족’, ‘이웃’, ‘공동체’의 어두운 이면을 펼쳐 보인다.

 

아이 셋을 낳았거나 10년 이내에 아이 셋을 낳을 계획이 있는 부부는 공동주택에 입주할 수 있다. 이곳에 네 쌍 부부가 입주하여 서로를 가족처럼 대하면서 지낸다. 출근할 때 자동차를 함께 타고, 쓰레기 분리배출도 함께하는 등 공동체 생활을 이어나간다. 속사정이 제각각인 네 쌍 부부는 아이들을 모아 놓고 함께 돌보는 공동육아를 시작한다. 공동육아는 기혼 여성의 사회진출로 인한 가사부담 증가, 독박육아 고충을 해결하기 위한 대안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공동육아는 더욱 부부들의 삶을 꼬이게 한다. 소설 속에서 부부들은 공동육아를 하고 있는데도 여전히 아내가 혼자 감당하는 육아의 무게는 변함이 없다. 소설은 공동주거생활과 공동육아 속에서 인물들이 겪는 크고 작은 불편한 일상들을 덤덤하게 보여준다. 공동체 생활은 때로는 번거롭다. 개인의 자유를 제약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소설에서 그 제한은 공동체 유지를 위해 지급해야 할 불가피한 대가로 작용한다. 이야기가 진행될수록 공동체 생활의 안전한 일상, 그 ‘친밀한 관계’ 아래 겨우 잠복해 있던 개인의 불만들이 하나씩 터져 나온다. 불편함을 참으면서 가족이나 이웃을 대하는 태도, 그들과 관계 맺는 방식 등 공동주택 입주민들의 일거수일투족은 독자에겐 웃을 수도 울 수도 없게 보인다. 공동체 생활에 불편함을 느끼는 인물들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어정쩡한 태도로 주어진 삶에 툭툭 내던져지는 돌발 상황들을 견뎌낸다.

 

작가는 진심과 표현이 일치하지 못하는 데서 파생되는 불쾌하고 부조리한 현대적 공동체 풍경을 만들어 소설에 담아냈다. 그 풍경에 실질적인 의미를 더 부여하자면, 정부의 저출산 정책과 가족 중심 문화가 교묘하게 결합하여 빚어진 일련의 부조리이며 그 안에서 허우적대는 인간들의 쓰라린 몸부림이 반영되어 있다. 소설 속 등장인물 모두가 사회의 부조리 속에서 고통받는데, 누가 잘못했냐고 탓할 수 있단 말인가.

 

 

 

 

[*] 한국문학평론가협회 엮음, 《문학비평용어사전》(국학자료원, 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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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7-12 16:16   URL
비밀 댓글입니다.

cyrus 2018-07-12 18:22   좋아요 1 | URL
아이를 돌보는 부모들에게는 저마다 사정이 있어요. 그런데 그 사정을 모르면서 부모의 육아 방식에 태클을 걸거나 지적하는 사람들이 있어요. 이런 사람들이 육아에 지친 부모를 피곤하게 만들어요. 국가는 ‘평균’을 기준 삼아 정책을 내세워요. 이렇다 보니 누구는 정책의 혜택을 보지만, 나머지 ‘평균’에 벗어난 사람들은 사각지대에 머물러 있어요. 이러한 상황은 이상과 현실의 괴리감을 보여주는 현실적인 예라고 생각합니다.

레삭매냐 2018-07-12 16: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소설에 등장하는 공동거주, 공동육아는
실패할 수밖에 없는 그런 ‘실험‘이었습니다.

오히려 잘 되는 게 이상한 거죠.

좀 빤한 이야기라 나중에 가서는 좀 그렇더라구요.

cyrus 2018-07-12 18:24   좋아요 1 | URL
소설에 나오는 공동주택이 현실적으로 느껴지는 디스토피아 같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