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비나스 타자윤리학
김연숙 지음 / 인간사랑 / 200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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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 철학의 전통은 인간의 이성을 중심으로 선, 빛, 능동성, 형상, 완전성 등에 긍정적 시선을 보냈다. 반대 항에 놓인 감성, 악, 어둠, 수동성, 질료, 불완전성 등은 지양한다. 근대의 인식론적 패러다임도 주체/객체, 이성/감성, 정신/물질의 이분법은 지속된다. 고대의 존재론적 이분법이나 최근의 인식론적 패러다임의 이분법은 이성에 우월한 가치를 부여한다. 플라톤에게 감성 작용을 가능하게 하는 몸은 영혼의 감옥이었고, 아리스토텔레스는 정념을 이성에 의한 조정과 통제의 대상으로 평가했다. 현대인은 이러한 사유의 틀에서 자유롭지 않다. 과학기술 중심의 교육체계는 물론 인문, 사회 분야도 ‘과학’을 붙여야 마땅한 대접을 받는다. 신 중심 사회에서 이성 중심 사회로의 이동은 인류를 이성적 존재로 거듭나게 했으며 야만에서 문명사회로 나아가게 했다. 그러나 숱한 순기능에도 불구하고 주체 중심의 존재론은 윤리학에 치명적 약점을 초래했다. 이 지점에서 레비나스의 타자윤리학은 후설의 현상학과 하이데거의 존재론에 반기를 든다.

“감성의 주체를 강조하는 레비나스의 윤리학을 감성의 윤리학, 타인의 호소에 귀기울이는 타자의 윤리학이라 말할 수 있는 것이다.”라는 김연숙의 평가는 이 시대의 윤리학을 다시 점검하게 한다. 자아와 타자의 윤리적 관계는 무식해서 용감한 누구 말마따나 자유와 평등의 원리가 적용될 수 없다. 대개 윤리학은 비대칭을 전제되기 때문이다. 타자의 불행에 대한 도덕적 책임에 있어 인간의 몸과 감성 측면에 주목한 레비나스는 몸적 존재로서 타인의 호소와 요청에 노출된 존재론적 자아의 윤리에 대해 우리에게 묻고 있다.

김연숙은 사르트르의 적대적 타인관을 비판하며 “도덕성(la conscience morale)은 이성적인 의지나 이성적인 자유에 뿌리를 둔 것이 아니고 이웃을 환대하는 태도, 이웃의 삶을 나의 삶보다 더 중시하면서 이웃을 환대(hospitalité)하는 태도 속에 있는 것이다. 요컨대 레비나스는 자유를 자율성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에 따르면 도덕적 자유는 타자의 타자성(altérité du l'autre)에 정향되어져야만 한다.”라고 정리한다. 타자의 타자성에 정향되지 않는 도덕적 자유는 심하게 말하면 현대사회에서 합법적으로 저지르는 범죄에 해당한다. 기울어진 저울에 균형점은 수학적 평균일 수 없다. 민주주의를 표방하는 대한민국의 윤리학은 정치와 사회에 뿌리내리지 못하고 공동체가 유지되는 도덕 규범조차 뿌리채 흔든다. 아니, 타자윤리학 자체가 존재하지 않는지도 모른다. 타자는 타인과 다르다.

타자―

(외재성)

환경적 물질의 세계

대상화 가능, 자기화의 영역―향유의 관계

타인

열망과 초월의 대상―형이상학적‧윤리적 관계.

자아 안으로 동일시할 수 없는 무한성을 내포함

열망과 초월의 대상이지만 타인의 얼굴을 통해서 나타남

기후, 환경 문제가 인류의 생존을 위협하며 인구 80억 시대를 열었다. 주기적으로 인류의 삶을 위협하는 전 세계적 팬데믹과 그 후유증은 직접적으로 우리 삶에 위협으로 작용한다. 정치인들의 부작위는 범죄다.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하지 않는 사람들, 침묵하고 외면하는 사람들이 실정법을 위반하는 자들보다 더 위험하다. 구체적인 호명, 수많은 비명과 아우성을 듣지 못하는 무능이야말로 이 시대의 패륜이다.

욕구와 고통은 완화될 수 없고 만족으로 사라진다. 그러나 열망은 절대 채워지지 않는다. 최소한의 욕구를 인간적 욕구를 충족하지 못하거나 고통받는 사람들을 외면하는 자아 혹은 사회는 지속 불가능하다. 가족 이기주의 너머에 놓인 불행을 외면하는 자아의 행복은 불가능하다. 레비나스는 자아와 타자를 연결해주는 것이 ‘초월’이라고 했다. 형이상학적 타자성의 관계를 가능하게 하는 것은 초월에로의 이행, 절대적으로 다른 타자에로 향해가는 움직임, 이행이다. 레비나스는 이같은 초월의 운동이야말로 형이상학적 관계, 윤리적 관계라고 말한다. 너와 나의 배타적 친밀성에 머무는 것이 아니고 타자에 대한 윤리적 응답, 도덕적 책임은 모든 인류에게로 확대된다. 이 같은 점에서 레비나스는 “제대로 질서 잡힌 정의는 타자와 더불어 시작한다(la justice bien ordonnée commence par autrui)”라 말한다.

서양철학의 전통을 넘어선 레비나스의 타자윤리학은 동양 윤리와 닿는 면이 많다. 이 책은 그린비 출판사에서 ‘레비나스 선집’(전6권)이 나오기 17년 전인 2001년에 출간된 책이다. 연구자의 꼼꼼한 해설과 원전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당대 철학적 사유, 서양 철학과의 비교 등 공시적, 통시적 측면에서 레비나의 사상과 타자윤리학을 치우침 없이 소개하고 분석하고 있다. 자본에 종속된 인간의 이기적 욕망을 간과한 점이 아쉬움이 남는다. 또한 모든 철학적 사유와 사회학의 논의가 그러하듯 “그래서 어쩌라고?”와 같은 구체적 실천방안에 대한 진지한 논의와 대안을 마련하기 위한 고민으로 이어질 수 있을지 언제나 그것이 궁금하다.

타자윤리에서 열망은 유한한 자아가 무한한 존재의 타자를 대하는 방법이다. 타자를 열망하는 태도는 타자를 자기 안으로 통합시키거나 자기화하는 작용이 아니라 타자를 향하여 자기 자신을 열어 젖히고 헌신하는 것이다. 타자에 대한 열망과 초월은 자아의 열림, 개시, 내 집의 현관문을 열어주고 타자를 환영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타자에게로 열려진 문, 그것은 타자에 대한 초월적 열망과 일치한다. 그리고 그것은 타자와의 충만한 관계, 윤리적이고 사회적인 관계를 의미한다. - 21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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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을의 물리학 - 아침노을과 저녁노을이 다른 이유에 관한 물리학적 탐구
황춘성 지음 / 에이도스 / 202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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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 질 녘, 저녁놀, 일몰, 낙조, 노을, 석양...푸른 시간, 매직 타임, 개와 늑대의 시간은 모두 동일한 시간을 가리킨다. 박재삼 시인의 「울음이 타는 가을 강」 또한 이 시간을 배경으로 삼았다. 낮이 저물고 밤이 시작될 무렵, 어둠이 걷히고 여명이 밝아올 즈음에 하늘빛은 형언하기 어렵다. 기묘한 아름다움과 슬픔, 아쉬움과 기대가 교차하기 때문일까. 붉게 물든 하늘의 장엄한 모습이 치열했던 일상과 존재론적 허무를 위로하기도 한다. 인간은 본래 하잖은 존재라며 겸손을 가르치고, 덧없는 시간 앞에서 무엇을 망설이느냐며 용기를 내라고 속삭인다. 


“어느 날 나는 해가 지는 걸 마흔세 번이나 보았어!”


몹시 슬플 때는 해지는 모습이 좋다는 어린 왕자의 말 때문이었을까. 아주 가끔, 붉은 노을이 아름다운 지평선에서 춤을 추는 상상을 한다. 얼마나 슬펐으면 하루에 마흔세 번이나 해가 지는 게 보고 싶었을지 궁금한 게 아니라 그렇게 마음대로 석양을 볼 수 있는 권력과 자유가 부러웠는지 모르겠다. 원하는 걸 손에 넣을 수 있는 사람은 억압된 욕망에 대해 생각할 필요가 없다. 소혹성 B-612를 소유한 자의 슬픔은 지구별에서 오늘을 사는 70억 분의 1의 마음을 헤아리기 어렵다. 그래서일까. 어린 왕자는 부끄러움을 잊기 위해 술을 마시는 주정뱅이, 자기가 소유한 별을 세는 사업가, 가장 중요한 건 눈에 보이지 않는다는 사막의 여우를 만나면서 조금씩 생각이 바뀐다. 자신을 객관화하기는 어려우나 타인을 평가하는 일은 너무 쉽다. 어린 왕자의 슬픔은 우리가 잃어버린 동심이 아니라 타인의 눈에 비친 자신의 모습 때문이 아닐까. 


현실에서 의자를 옮겨 앉으며 언제든 석양을 바라볼 수 있는 사람은 없다. 현실적으로 지구는 지나치게 빠른 속도로 움직이고 노을은 너무 빨리 지기 때문이다. 지구의 둘레는 대략 40,000km이다. 지구의 하루에 해당하는 24시간으로 나누면 1666.666km이다. 평균 1,667km/h 속도로 움직이는 지구의 자전 속도는 현기증이 날 정도다. 지구는 1초에 463미터를 달린다! 극지방의 자전 속도는 0km/h이지만 우리나라의 자전 속도는 1,337km/h이다. 고속도로를 시속 130km로 달리는 자동차는 속도위반인데 우리는 그보다 100배 빠른 속도로 돌고 있는 지구별에서 불편 없이 살아간다. 때때로 자명한 과학적 진실이 비현실적이어서 사람들은 내일 당장 죽을 것처럼 살고, 영원히 살 것처럼 배우는 걸까.


황춘성은 ‘왜 아침노을과 저녁노을이 다르지?’라는 질문에 답을 찾아 한 권의 책을 썼다. 질문과 호기심은 관심의 다른 이름이다. 관심이 사랑의 시작인 것처럼. 알고 싶은 마음이 열정을 만들고 행복을 부른다. 아주 가끔, 알면 다치기도 하고 모르는 게 약일 수도 있으나 대체로 무지는 미필적 고의에 의한 ‘악’으로 판가름 난다. 지난 역사와 오늘의 현실이 이를 증명하고 있다. “해와 달이 가하는 조석력은 비슷하므로, 달이 해라면, 지구가 자전할 때 해로부터 멀어지는 쪽의 지구를 비추는 햇빛은 가까워지는 쪽의 지구를 비추는 햇빛보다 늘 더 많은 공기분자와 만나야 했다.”라는 사실을 알고 나면 저녁노을이 아침노을보다 붉은 이유를 깨닫게 된다. 눈에 보이는 사물과 현상 이면에는 늘 필연적이고 합리적인 이유가 숨어 있다. 물리학은 이성의 영역으로 붉은 저녁노을을 설명한다. 이문세는 “붉게 물든 노을 바라보면 슬픈 그대 얼굴 생각이나 고개 숙이네 눈물 흘러 아무 말 할 수가 없지만 난 너를 사랑하네 이 세상은 너 뿐이야 소리쳐 부르지만 저 대답 없는 노을만 붉게 타는데...”(「붉은 노을」)라고 노래했으나 황춘성은 흡수와 편광, 파동과 도플러 효과, 중력과 조석력의 세계를 보여준다. 가히 감성 파괴자라 할만하다. 아니, 오히려 모르고 싶은 이야기를 상세하게 설명한다. 마치 다섯 살짜리 조카에게 산타 할아버지가 거짓말인 이유를 조목조목 설명하는 얄미운 삼촌 같다. 그러나 산타 할아버지와 달리 붉은 노을의 비밀을 저절로 알게 되는 사람은 없다. 하늘에 떠가는 흰 구름도, 사람들이 모여 사는 세상도 의식적 노력과 적극적 성찰과 비판적 안목이 없으면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사는 대로 생각하고 보이는 대로 믿는다. 그래서 노을의 물리학은 인생의 물리학, 세상을 위한 물리학으로 고쳐 읽고 싶어졌다. 사람들은 왜 그런지, 세상은 왜 이런지 들여다보고 싶어지는 건 하루 이틀의 문제가 아니지만 누구도 그럴듯한 답을 내놓은 적이 없다. 그래서 여전히 저마다 흥분된 목소리만 높이는 걸까. 오늘 저녁에는 조금 더 아름다운 저녁노을을 보고 싶다. 아니 매일매일 그렇다. 그 정도면 충분하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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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oldenbug 2022-11-09 22: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안녕하세요? 얄미운 삼촌입니다.
리뷰를 아름답게 써 주셔서 고맙습니다. ^^

sceptic 2023-12-26 15:43   좋아요 0 | URL
감사합니다.
 
미끄러지는 말들 - 사회언어학자가 펼쳐 보이는 낯선 한국어의 세계, 2022 세종도서 교양부문
백승주 지음 / 타인의사유 / 202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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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통이 사회 구조적 폭력에서 기인했을 때

공동체는 그 고통의 원인을 해부하고 사회적 고통을 사회적으로 치유하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 김승섭, 『아픔이 길이 되려면』중에서


한 인간의 죽음에 대한 평가와 해석은 제각각일 수밖에 없다. 개인적 관계, 사회적 시선에 따라 사자死者의 삶을 다르게 바라보기 때문이다. 그러나 제노사이드, 전쟁, 천재지변, 교통사고, 여객선 침몰, 비행기 추락, 교량과 백화점과 아파트의 붕괴에 이어 압살 사고를 목도하고 난 후에 사람들의 반응은 어떤가. 꽃다운 나이의 죽음을 애도하고 추모하는 일은 모든 인간에 대한 예의다. 그 원인과 결과 사이를 미끄러지는 말들은 칼날이 되어 산 자들에게 상처를 남긴다. 함부로 뱉은 말은 휘두른 주먹보다 가학적이다. 우리 주변에만 존재하는 ‘선량한 차별주의자’는 누구이며, ‘미끄러지는 말들’을 하는 사람이 따로 있을까. 나는, 그리고 당신은?


백승주를 사회언어학자로 명명한 게 누구든 발화 의도와 목적에 맞는 의미를 차자고 그 말들이 흐르고 흘러 닿는 곳에서 제 기능과 역할을 하고 있는지 모르겠다. 급식체와 인테넷 약어, 비속어 등 우리말과 글을 가꾸고 지키자는 PC한 잔소리도 아니고 혐오와 차별의 언어 사이사이에서 공동체의 도덕심을 고양할 목적도 없다. 어쩌면 백승주는 자기 삶을 더듬고 일상을 살피며 지극히 개인적인 관점과 고민들이 자기 언어 안에서 어떻게 고이고 어디로 흘러가는지 가만히 바라보고 있는게 아닐까. 


특별하지 않은 사람들의 평범하고 진솔한 이야기가 울림을 가지려면 특수성 안에서 보편성을 획득해야 한다. 구체적 경험은 생각을 통해 단단히 벼려지고 타인에게 닿아 온기를 전하거나 찬물을 끼얹어야 한다. 무엇이, 어떻게 잘못된 걸까. 그 원인과 대책은 바람직한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는가. 도저히 손쓸 수 없는 자연재해도 아니고 교통수단에 의한 사고도 아니며 이기적 목적의 살육전쟁도 아닌 저 수많은 죽음 앞에서 그들의, 아니 우리들 혀에서 미끄러지는 말들은 결국 인간에 대한 예의와 세상을 향한 태도를 고스란히 드러낸다. 정치인들뿐만 아니라 어느 자리에서 무엇을 했든 사고에 대한 반응, 문제를 해결하고 책임을 묻는 과정이 어떻게 흘러가는지 가만히 지켜볼 일이다. 


백승주는 표준어와 일상어, 폭력과 재난 혐오와 차별의 현장에서 미끄러지는 말들을 꼼꼼하게 점검하고 한국어 교실에서 경험한 자신의 이야기를 풀어낸다. 그리고 언어 너머의 의미를 더듬는다. 여러 글들을 모은 책으로 체계와 구성이 단단하지는 않으나 우리 사회에서 사용하는 언어는 결국 공동체 구성원 전체의 집단적 무의식을 드러내며 우리 사회의 문화, 전통, 현재와 미래를 가늠하게 한다. 


가끔, 사람들은 ‘말실수’라며 눙치고 넘어가거나 오해를 풀라고 하고 양해를 강요한다. 그러나 대개 그 실수는 무의식의 반영으로 평소 생각과 태도 자신의 신념이 고스란히 드러난 말들이다. 감추고 싶거나 입 밖으로 내뱉지 말아야 할 말들이 혀에서 미끄러졌으니 급정거하는 버스 안에서 타인의 발을 밟는 진짜 실수와 구별되는 가짜 실수다. 언어는 존재의 집이며 하나의 세계다. 우리는 우리가 하는 말, 보내는 메시지, 써놓은 SNS, 심지어 메모와 낙서로 자신의 존재를 증명한다. 미끄러지는 말들이 우리의 생각이며 태도이고 자기 정체성이 아닐까. 말과 글을 조심하고 삼가야 하는 게 아니라 평소 타인과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과 태도를 성찰할 일이다. ‘마인드 리딩Mind Reading’과 ‘공감Empathy’능력은 본능이 아니라 학습과 노력의 결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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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려공구 - 공구와 함께 만든 자유롭고 단단한 일상
모호연 지음 / 라이프앤페이지 / 202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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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크 렌치와 육각 렌치를 집어 든 건 자전거 때문이었다. 타이와 튜브를 갈고 안장 높이와 브레이크를 손보며 공구를 손에 들기 시작한 건 부끄럽지만 최근의 일이다. 거의 쓸 일 없이 구비했던 망치는 캠핑용 팩을 박을 때만 사용하다 보니 트렁크에 던져뒀고, 그나마 전동 드라이버와 택배 상자를 여는 칼과 가위 정도가 자주 사용하는 공구의 전부다. 평생 책장만 넘기던 희고 고운 손이 부끄러울 때가 많았다. 이삿짐을 나르고 에어컨을 설치하고 나물을 다듬고 농사를 짓는 분들의 손을 가끔씩 훔쳐볼 때마다 슬그머니 내 손은 주머니를 찾았다. 카센터, 재래시장, 이삿날, 시골 들녘과 바닷가 수산시장에서 거칠고 투박한 손을 훔쳐볼 때마다 이유 없이 부끄러웠다. 용접하는 손이든 타자기를 두드리는 손이든 큰 차이가 없어 보이지만 노동자의 손은 그 자체로 아름답다. 인간에게 가장 중요한 반려 공구는 손이다. 


모호연의 이야기는 모호하지 않고 분명하다. 메시지가 분명하고 목적이 뚜렷하다. 마치 드라이버와 망치의 길이 다른 것처럼. 공구는 동물이 아니지만 ‘반려’의 수식을 받아 재해석되고 의미를 부여받아 새로운 가치로 거듭난다. 책상 위 필통에 꽂힌 커트와 드라이버, 공구통의 다양한 공구들이 생명을 부여받아 한 사람을 위해 헌신한다. 감정 소모나 배려와 소통도 필요 없다. 묵묵히 언제나 그 자리에서 제 역할을 다한다. 의미를 부여하고 정성을 쏟는 건 생물이 아니어도 괜찮지 않을까. 


저자는 각 공구의 쓰임새와 종류, 사용법과 주의사항을 살뜰하게 설명한다. 익숙한 도구도 많지만, 수동 샌딩기, 타카, 실리콘건처럼 가정에서 잘 활용하지 않는 도구도 소개된다. 허나 DIY 가구에 관심이 있거나 각종 기계류, 잡다한 물건을 만들고 수리하는 취미를 가진 사람이라면 이 책을 통해 타인의 공구 사용법과 나만의 노하우를 비교해 보는 재미도 느낄 수 있는 책이다. 


실용주의는 자본주의의 동생쯤 사촌 동생쯤 되지 않을까. 인간은 ‘쓸모’를 찾아 성장하고 교육받고 진로와 직업을 고민한다. 그런 면에서 공구는 행복하다. 분명한 쓸모와 제각기 뚜렷한 목적을 가지고 정확하게 활용되기 때문이다. 자연과 사물을 곁에 두는 사람들의 속내는 저마다 다르겠으나 예측 가능성에 바탕을 둔 자연과학적 태도를 견지할 수 있다는 점에서 안정감과 편안함을 추구하는 게 아닐까 싶다. 순리대로 사용하지 않으면 반드시 부작용이 발생하는 공구는 그런 면에서 실용주의의 출발이자 종착역이다.


이 책을 굳이 분류하자면 에세이가 되겠으나 저자의 감정과 생각보다 공구에 관한 깊은 관심과 설명이 주를 이루고 있다. 자기계발서로도 손색이 없는 전형적인 실용서다. 유튜브와 인터넷이 잠식한 자리에 여전히 텍스트가 존재할 수 있는 이유를 웅변하듯 공구의 사용법뿐만 아니라 사용자의 정서, 인생에 관한 비유, 글쓴이의 일상 등이 고루 다뤄지고 있어 색다른 재미를 느끼게 하는 책이다. 매뉴얼 같은 실용서가 기존 책의 성격과 범주를 넘나든 지 오래다. 운동, 요리는 물론 공구에 이르기까지 바야흐로 모든 사람이 크리에이터로 기능하는 시대다. 누구든 쓸 수 있고 모든 게 컨텐츠다. 


어쩌면 공구의 사용은 세상살이와 유사하다. 모든 사람에게 스물과 서른이 처음이듯, 예순과 여든도 처음이다. 아빠 연습을 해본 적이 없고, 이혼을 예상하지 않았으며, 부모와 자식 잃은 슬픔은 두 번 경험할 수 없다. 모든 공구의 사용도 마찬가지다. 익숙해지기까지 시행착오를 겪고 각자의 손 모양, 악력, 신체 조건에 따라 다르게 활용해야 한다. 처음이 제일 어렵다. 익숙해지면 그런대로 견딜만한 슬픔과 고통처럼 공구도 빈도에 따라 어깨에 힘을 빼고 사용할 수 있는 여유와 자신감을 준다. 인생도 별반 다르지 않다. 앞으로 남은 첫 나이들, 첫 경험들, 그 모든 ‘첫’들을 위해 반려 공구가 곁에 있다면 좀 위로가 될까?

그러니 기억하자. 망가진 드라이버는 우리의 자존심을 상하게 할 뿐, 인생에 아무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 3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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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에 우리 영혼은
켄트 하루프 지음, 김재성 옮김 / 뮤진트리 / 201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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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년은 주문하지 않은 택배다. 아무도 늙기를 원하지 않지만 누구도 피할 수 없는 시간이 다가온다. 시간이 흐른다고 해서 인간의 욕망과 외로움이 덜해지지 않는다. 밤에 우리 영혼은 평안과 안식을 원하지만 오히려 철저한 외로움을 느끼기도 한다. 친밀한 가족 관계, 애틋한 연인이 곁에 있는 사람이 노년에 그들과 이별한다면 상실감과 외로움은 배가 된다. 켄트 하루프의 마지막 소설의 주인공 애디와 루이스는 그렇게 특별하지 않은 인생을 살다 혼자가 된 여, 남 노인이다. 


“우리 같이 잘래요?” 용기를 낸 건 여성인 애디다. 성별이 바뀌었다면 아마 이 소설의 성격이 달라지고 또 다른 논쟁에 휘말렸을 수도 있었으리라. “라면 먹고 갈래요?” 보다 직설적이나 전혀 애로틱하지 않은 돌직구는 루이스에게 가 닿는다. 44년간 한집에서 산 70세 여성 노인의 제안에 47년째 가상의 도시 홀트 시에 거주하는 남성 노인은 고민 끝에 이를 수락한다. 저녁에 건너가 잠을 자고 아침에 돌아오는 일상이 이웃과 타인들의 눈에 곱게 비칠 리 없다. 그들의 외로움보다 관계를 규정짓는 일반적 시선과 각자의 도덕적 기준이 이 소설을 혼란스럽게 바라보게 한다. 혼자 사는 두 남녀 노인의 만남에는 문제가 없으나 법적으로 혼인 관계를 형성하는 데 따른 현실적 문제들 ― 이를 테면 유산 상속과 자녀들과의 관계 등 ― 앞에서 노인들은 절망한다. 아니, 쉽게 포기한다. 애디도 마찬가지다. 손자를 이기는 할매는 없다. 자식이 가로막는 노년의 위로와 행복이라니. 지나치게 현실적인 결말 앞에 모임에 참석한 분들의 의견이 갈렸으나 두 사람이 찰떡같은 티키타카는 환타지에 가깝다. 그들의 대화, 정서적 공감, 따로 또 같이 나누는 일상 등 이상적 연인의 모습이 오히려 비현실적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실 앞에 굴복하는 관계 양상이 소설의 결말을 흐릿하게 한다. 


소설 서두에서 애디는 루이스에게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하는지 관심 갖지 않기로 결심했으니까요. 너무 오래, 평생을, 그렇게 살았어요. 이제는 더는 그러지 않을 거예요.”라는 말로 자신의 남은 생을 이야기한다. 작지만 분명하고 주체적인 삶의 계획이다. 이 결심은 소설 중반에 다시 반복돼 애디의 결심을 재확인한다. 그러나 결국 자식과 손자가 어떻게 생각하는지는 관심을 갖는다. 200쪽이 안되는 중편 소설을 통해 작가가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가 무엇이든 독자들은 또 각자의 입장에서 노년의 성과 사랑, 자식들과의 관계, 현실적인 문제 등 다양하게 반응할 수밖에 없다. 모두가 상찬하거나 비난하는 소설보다 이렇게 다양한 반응을 이끌어내는 작품이 더 좋은 평가를 받아야 한다는 면에서 동의할 만하다. 그러나 개성있는 인물들을 통해 다양한 주제를 드러내는 장편 소설과 달리 중, 단편의 미덕은 칼날처럼 깊은 인상을 남기는 묵직한 한방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애디의 파격적 제안으로 시선을 끌었으나 과정과 결과는 모두를 행복하게 하는 해피엔딩의 환상도 없고, 현실에 대한 치열한 고민과 갈등도 없이 너무 쉽게 자식 앞에 무너지는 애디의 모습으로 끝을 맺는다. 전화기를 붙잡고 극복할 수 없는 현실에 대한 안타까움을 내뱉는, 소설의 마지막 문장인 애디의 “당신, 거기 지금 추워요?”는 “우리 같이 잘래요?”라고 제안할 때의 마음과 다르지 않다는 위로로 갈음되지 않는다. 루이스의 입장에선 어떤 답을 할 수 있을까?


외로움을 느끼는 정도의 차이, 혼자 사는 일상의 장단점, 노년을 위한 준비와 가족 관계, 자기 욕망과 삶에 대한 적극적 용기 등 이 소설은 어쩌면 지극히 현실적인 노년을 위한 고민을 담은 켄트 하루프의 마지막 고백이 아니었을까 싶다. 태평양 건너 미쿡이든 한국이든 늙고 병들어가며 삶의 종착역을 향해 치닫는 사람들의 태도와 삶을 대하는 자세는 별반 다르지 않아 보인다. 밤에 우리 영혼은, 그보나 낮에 우리의 삶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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