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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들의 행복한 시간
공지영 지음 / 푸른숲 / 2005년 4월
평점 :
구판절판


  손목에 수갑을 찬 숀 펜과 그 옆에서 발자국 소리만 공포스럽게 울려퍼지는 긴 복도를 함께 걷던 수잔 서랜든의 표정이 사진처럼 선명하다. 영화 <데드 맨 워킹dead man walking>에 대한 기억은 강렬했다. 개인적으로 1년에 50편 이상을 봐야 직성이 풀렸던 암중 모색기였고 영화에 대한 진지한 고민을 하던 무렵이었다. 아마 숀 펜이라는 미국 배우의 연기를 주목하기 시작한 계기가 되었고, 그 영화를 만든 팀 로빈스는 <쇼생크 탈출>의 주연으로 강한 인상을 받았기때문에 더욱 호감을 가지고 봤었는지 모르겠다.


  소설 장르의 의미는 독자 반응 중심 비평이 이루어지기 시작하기 이전부터 다양하게 논의되어 왔다. 그런 논의에 이제 난 별로 관심이 없다. 주관적일지 모르지만 모든 것은 내 안에서 결정되는 이기적 소화방식 때문인지 모르겠다. 편견과 독선에서 벗어나지 못한 책읽기나 문학에 대한 역할론을 한마디로 결론 내렸다는 뜻은 더더욱 아니다. 소설은 그저 모든 사람들에게 작은 목소리로 영혼의 울림을 전해준다. 그 울림은 한 사람, 한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고 모든 사람의 마음을 움직여 우리 모두의 행동이 되고 현실이 되기도 한다.
 
  빅토르 위고와 알베르 까뮈의 소설로 촉발된 사형제 폐지 논의는 프랑스에서 1980년이 되어서야 미테랑 대통령에 의해 종지부를 찍게 된다.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의 민감한 문제를 문학으로 끌어들일 수 있는 용기는 아무나 가질 수 없다는 점에서 공지영의 소설은 놀랍다. 그것은 그만큼의 위험부담과 실패 가능성을 전제로 출발해야 할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공지영의 소설은 내게 늘 불편했다. 아니, 모든 소설은 늘 나를 불편하게 만든다. 그녀의 소설은 ‘특히’라고 말해야 옳겠다. 이유는 그녀의 말하기 방식이다. ‘울림’이 있는 말하기 방식이다. 감성을 자극하거나 행간을 건너뛰는 긴장과 유려한 문장으로 말하자면 신경숙이나 은희경, 전경린이 앞선다. 내용이 문체를 결정하기 때문인지도 모르지만. 덮어두고 싶거나 외면하거나 애써 눈돌리지 않는 거적들을 걷어 올리며 냄새를 풍기고 조용한 비명으로 시선을 끈다. 그래서 불편하다. 가슴이 먹먹하고 답답했다. 오랜만에 책을 읽다가 눈시울이 붉어졌다. 평화로운 일요일 아침이었기 때문이었을까? 공지영의 소설에 따라붙는 쓸데 없는 수식들은 그 용어를 사용하는 것 자체가 또 하나의 편견일 수 있다. 공통분모나 같은 분위기를 털어내지 못했으니 어쩌면 당연했던 평가였을지도 모르지만, 그녀의 장편소설 <우리들의 행복한 시간>으로 그 논의는 일단락 되었다.

  새로움은 변화를 의미하고 변화는 작가에게 필연이다. 자연법과 사회계약설로 논거를 삼아 사형제 존치와 폐지론은 우리 사회에서도 지속적인 화제가 되어왔다. 나와 상관없는 사람들의 이야기와 문제를 심각하게 고민하거나 행동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런 의미에서 이 소설은 문학의 의미를 다시 한번 되새기게 한다. 공지영의 다음 소설을 기다리게 하는 힘도 여기에 있는지 모르겠다.

  소설속 주인공 정윤수와 문유정은 극단적 대립항으로 등장한다. 그들이 공유하거나 서로의 상처를 이해한다는 것은 그녀의 소설처럼 ‘인간에 대한 예의’가 없다는 경험 -그것이 서로 가해자와 피해자라는 서로 다른 역할을 하고 있지만- 을 공유하고 있다. 만약 여기에 초점을 맞추었거나 무게 중심이 상당부분 이동되었다면 끔찍했을 것이다. 사촌오빠에게 강간당한 경험이 있는, 세 번이나 자살에 실패한 문유정의 시선으로 바라본 사형수 정윤수의 모습은 객관적일 수 없고 그것이 이 소설의 진실이다.

  “행위는 사실일 뿐. 진실은 늘 그 행위 이전에 들어 있는 거라는 거, 그래서 우리가 혹여 귀를 기울여야 하는 것은 사실이 아니라 진실이라는 거……” 나는 이 한마디로 이 소설을 읽었다. 개별적 상황과 사건들에 해당될 수 있는, 문학의 역할과 본령을 토해내듯 하는 문유정의 처절한 외침이다. 이것은 우리들 삶에 대한 참담한 진실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소설을 읽는지도 모르겠다. 외면해버리고 싶은 삶의 진실들을 바로 보거나 “몰랐다”는 말 한마디로 면죄부를 받을 수 없는 우리들 삶의 진정성을 들여다보고 싶어서.

  소설의 형식 또한 조금 색다르다. ‘블루 노트’는 정윤수의 유서 형식으로 죽는 순간 그의 진실이 되는데 이 노트는 시간상 소설이 끝나면서 시작되지만 소설의 처음부터 문유정의 시각과 교차되어 소설이 끝나면서 마지막 장을 보여준다. 각 장마다 예수를 비롯한 여러 사람들의 이야기를 간접적으로 전하고 있다. 짧지만 강한 여운이 남는 글들은 쉽게 페이지를 넘기지 못하고 한참 들여다 보게 한다.

  좋은 책과 나쁜 책, 좋은 소설과 나쁜 소설을 구별하라면 모?사람들의 기준이 다를 수 있으리라. 다만 그 기준의 공통분모는 ‘삶의 진실, 대리경험을 통한 생의 진정성’이 아닐까 싶다. 누가 감히 소설을 가지고 인생의 의미를 가르쳐 줄 것이며, 인생이 무엇이라고 말해 줄 수 있을까마는 다만 다양한 방식으로 소리 높여, 때로는 나지막한 목소리로 내가 아닌 우리를 돌아보게 한다.


200505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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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나는 너를 사랑하는가 (반양장)
알랭 드 보통 지음, 정영목 옮김 / 청미래 / 200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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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너에게는 우연이나

  나에게는 숙명이다.


  우리가 죽기 전에 만나는 일이

  이 얼마나 아름다우냐


  이 시는 정호승의 <새벽편지>에 수록되어 있는 ‘첫눈’이라는 시의 일부다. 1987년 민음사에서 출판된 이 시집을 읽고 나는 시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고, 어쩌면 먼 미래의 삶에 대해서도 절대적인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유치할만큼 사랑에 관한 짤막한 구절일 뿐이었지만, 감수성 예민한 고등학생에겐 오래 잊혀지지 않는 구절이 되어 버렸다.


  ‘사랑이란……?’는 질문을 받는다면 지구위에 60억명이 제각기 다른 대답을 하게 된다. 누구도 정답을 말할 수 없다. 아니 정답이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누구나 감염되는 바이러스처럼 피해갈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가장 진부하면서 가장 흥미진진한 인간의 본질을 들여다볼 수 있는 이성에 대한 사랑을 한 철학자가 고민하고 있다.


  소설 <왜 나는 너를 사랑하는가>와 <키스하기 전에 우리가 하는 말들>은 그렇게 3년의 간격을 두고 나에게 찾아왔다.


  2002년 여름에 출판된 ‘왜 나는 너를 사랑하는가’는 신선함으로 다가왔다. 원제가 ‘Essays in love’였고 ‘로맨스’라는 제목으로 95년에 번역되었지만 주목을 끌지 못했었다고 번역자는 전한다. 재번역판은 제목만으로도 주목 받을만하다. 모두가 궁금해하는 내용 아닌가. 이 책을 읽으면서 나는 혼란스러웠다. 친절하게도 제목위에 ‘소설’이라고 장르를 지정해줬기 때문이다. 하지만 내용은 작가의 대단히 사적인 경험을 들려주는 것으로 진행된다. 작가가 사랑했던 여인 ‘클로이’를 5840.82분의 1의 확률로 만나 사랑을 하는 과정을 보여주고 헤어지는 장면을 설명한다. 헤어진 후의 감정까지도 상세하게 보여준다. 하지만 그 과정속에서 들려주는 알랭 드 보통의 이야기는 보통을 넘어선 특별함이 있다. 그것은 주관적 감정을 객관적으로 확대 시키는 능력이다. 또한 사적인 영역의 상황들을 모든 사람들이 공감할 수 있는 일반적 상황으로 분석하고 정리하는 잠언과 같은 말하기 방식이다. 


  이 소설은 “삶에서 낭만적인 영역만큼 운명적 만남을 강하게 갈망하는 영역도 없을 것이다.”라는 구절로 시작된다. 누구나 믿고 싶은 내 사랑의 숙명론. 하지만 그것이 얼마나 확률적으로 어려운 것인가를 설명한다고 해서 우연이 필연을 가장할 수 있는지. 사랑을 시작하는 연인들의 심리 묘사가 탁월하다. “전화는 전화를 하지 않는 연인의 악마 같은 손에 들어가면 고문 도구가 된다.”는 간단한 진술은 경험해보지 않고서는 쓸 수 없는 대목들이다. 그래서 이 책은 공감대를 형성하고 많은 사람들에게 자신의 경험을 투사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했는지 모르겠다.


  사랑이라는 감정을 분석한다는 것이 불가능하겠지만, 작가는 나름대로 두 사람 사이에 벌어진 사소한 대화와 상황을 통해 그것을 시도한다. 여기에 많은 철학자가 동원되고 여러사람의 금언들이 인용된다. 그런 장치들이 사랑이라는 감정을 객관화시키는데 일조하고 있는지는 의심스럽지만 읽는 사람들의 제각기 다른 상황에 적용하거나 공감하는데는 분명히 긍정적인 효과를 거두고 있다.


  그렇게 한 여자를 사랑하고 헤어지는 과정속에 아리스토텔레스, 비트겐슈타인, 역사, 종교, 마르크스까지 총동원하며 사랑의 딜레마를 풀어내려는 시도가 신선했다. 그것이 억지스럽지 않고 공감할 수 있는 내용으로 녹아들 수 있는 것은 작가의 경험에 바탕을 둔 진지한 태도 때문이기도 하다. 두 책에서 얘기하는 섹스에 대한 흥미로운 견해를 살펴보면,


  생각만큼 섹스와 대립하는 것은 없다. 섹스는 육체의 산물이다. 무분별하며, 디오니소스적이며, 직접적이며, 이성의 굴레로부터의 해방이며, 희명을 동반한 육체적 욕망의 해소이다. - 왜 나는 너를 사랑하는가


  섹스가 친밀함의 상징이기는 하다. 그러나 섹스 자체가 두 사람이 친밀해지는 것을 보장하진 않는다. 오히려 섹스가 상징하고 있는 이상적인 조건을 깨뜨릴 수도 있다. - 서로에 대해 알아가는 좀더 험난한 과정을 회피하는 방법으로 누군가와 섹스를 나누는 것은, 마치 책을 사두고 그것을 읽었다고 착각하는 것과 같다. - 키스하기 전에 우리가 하는 말들


  분명 시간이 흘렀고 사람 사이의 긴밀한 관계에 대한 관점이 변화했음을 느낄 수 있는 다른 표현들이다. 앞의 책에 비해 ‘Kiss & Tell’(유명한 인물과 맺었던 밀월 관계를 인터뷰나 출판을 통해 대중에게 폭로하는 행위)이라는 원제를 가진 <키스하기 전에 우리가 하는 말들>은 ‘형식의 새로움’이 가장 큰 매력이다. 번역본의 제목이 주는 상업성은 정말 대단하다. 개인적으로 파란 하늘에 흰구름을 배경으로 한 표지만 한동안 바라보았다. 책은 내용 이전에 손으로 만져보고 쓰다듬고 냄새맡는 과정을 거쳐야 한다. 오감으로 다가오는 책의 즐거움은 내용을 넘어선 감동을 준다. 이 제목과 표지를 보면 누구나 사고 싶어지는 책이다.


  하지만 내용이 주는 감동은 전만 못하다. ‘클로이’라는 여성의 이야기를 다뤘던 앞의 책과 마찬가지로 이 책은 ‘이사벨’을 주인공으로 마치 한 사람의 전기를 쓰는 형식을 취하고 있는 독특함이 있다. 책 중간에 이사벨이 실존인물이라는 사실을 확인시켜주는 어린 시절의 사진과 가족, 친구들의 사진은 잠시 이 책의 의미를 착각하게 만든다. 작가의 의도이든 아니든 나는 한 개인의 연애 보고서 이외의 다른 의미로 읽지는 못했다.


  키스에 대한 느낌은 오히려 앞의 책에서 이렇게 고백했었다.


  가장 달콤한 키스, 키스라면 이래야 한다고 꿈꾸어오던 키스였다. 가볍게 스치다가 머뭇머뭇 살며시 밀고 나가자, 우리 살갗에서는 독특한 맛이 풍겨나왔다. - 왜 나는 너를 사랑하는가 - 왜 나는 너를 사랑하는가


  키스에 대한 환상과 작가의 느낌을 설명해 줄거라는 기대는 끝까지 버리지 못했지만 결국 한 줄도 언급되지 않고 마지막 순간까지 결국 이사벨과도 헤어지고 만다. 그러고 보면 두 책의 공통점은 비극이다. 실패한 연애 이야기다. 만약 연애의 성공이 결혼이라고 가정한다면……


  이 책의 화두는 ‘감정이입’이다. “감정이입은 다른 이의 눈을 통해 세상을 보는 능력이다.”라고 선언하며 작가는 이사벨을 만나는 순간부터가 아니라 헤어지는 순간부터 제시해서 독자들의 들뜬 마음을 일단 진정시키고 출발한다. 사랑을 하는 과정을 한 여자의 일대기를 보여주는 형식으로 보여준다고 해서 특별한 내용이 전해지는 것은 아니다. 다만 그 소소한 과정과 대화들, 한 개인에 대한 철저한 관심과 기억들이 빚어내는 놀라운 효과는 행간의 의미로 다가온다. 이 책을 읽는 모든 이들의 머리, 혹은 가슴속에 그려질 ‘이사벨’을 그려본다면 그 효과는 더욱 확실하게 나타나는 셈이다. 그런 측면에서,


  누구나 감추고 싶은 것이 있다. 다른 사람들이 그 사실을 알아버리면 더 이상 자기를 좋아하거나 사랑하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에 사로잡히기 때문이다. 프라이버시에 대한 욕구 뒤에는 누군가가 우리에 관한 모든 사실을 알아버리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이 놓여있다. 그것이 비밀 누설에 대한 두려움을 키우는 주범이다. - 키스하기 전에 우리가 하는 말들


  라는 작가의 발언은 주목할만하다. 누구나 감추고 싶은 무언가를 바닥까지 뒤집어 보여주려는 의도를 짚어내는 것으로 이 책의 의미는 드러난다. 거울처럼 투명하게 독자들에게 되비쳐 주려는 것이 작가가 노린 효과는 아니었을런지 모른다. 특별한 형식과 독특한 방식으로 또 하나의 연애이야기를 들려주고 있지만 앞의 책에서 보여준 감동과 공감의 울림이 부족하다. 앞으로도 가볍고 친숙하게 그의 책들이 쏟아지겠지만 골라 읽기가 또 하나의 숙제로 남는다.


  그 변화를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누군가를 알 수 있는 기회가 많아질수록 알고자 하는 의지는 줄어든다는 역설을. - 키스하기 전에 우리가 하는 말들


200506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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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재미 문학과지성 시인선 320
문태준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0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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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련

작은 독에 더 작은 수련을 심고 며칠을 보냈네
얼음이 얼듯 수련은 누웠네

오오 내가 사랑하는 이 평면의 힘!

골똘히 들여다보니
커다란 바퀴가 물 위를 굴러가네

문태준의 <가재미>를 읽다가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본다. 긴 여운과 촉촉한 울림은 오래동안 계속된다. 메아리처럼 울렁거리는 긴 터널을 빠져 나온 듯 깊은 숨을 쉬어도 쉽게 떨쳐지지 않는 이 느낌은 우리가 지금까지 알고 있던 바로 그 서정시의 본령이다. 머리에서 가슴까지 그 먼 길을 돌아가는 방법은 말로 다 헤아릴 수 없다. 이성과 감성의 위험한 줄타기를 하는 시인이 얼마나 많은가. 우리말의 탄탄함과 아름다움을 살려낼 수 있는 힘과 부드러움을 문태준은 모두 지니고 있다.

수직과 수평의 충돌이 아니라 있지만 없는 것같은 수면의 바퀴를 찾아내는 눈과 그것을 언어로 표현하는 힘을 가지고 있는 것이 <가재미>이다. 쉽게 한번 읽고 버려지는 시집이 아니라 두 손을 적셔도 좋을만큼 한참이나 두고두고 읽을 만하다. 좋은 시는 울림이 깊은 시다. 울림은 가슴을 적시거나 이성에 메아리를 만들 수 있어야 한다. 문태준의 시는 우선 시집을 들고 있는 두 손부터 적셔준다. 땅속에서 뿌리부터 적셔주는 시인의 말은 발바닥에서 위로 삼투압 작용처럼 머리끝까지 수분을 공급해 준다.

풍경처럼 펼쳐진 그의 시들 속에 작은 움직임이나 그것들을 바라보는 시선들은 늘 안정감과 평화로움을 지니고 있다. 그것은 나와 사물과의 관계를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사물과 다른 사물과의 얽힌 시선들을 내가 풀어주고 있는 느낌이다.

벌레詩社

시인이랍시고 종일 하얀 종이만 갉아먹던 나에게
작은 채마밭을 가꾸는 행복이 생겼다
내가 찾고 왕왕 벌레가 찾아
밭은 나와 벌레가 함께 쓰는 밥상이요 모임이 되었다
선비들의 亭子모임처럼 그럴듯하게
벌레와 나의 공동 소유인 밭을 벌레詩社라 불러 주었다
나와 벌레는 한 젖을 먹는 관계요
나와 벌레는 無縫의 푸른 구멍을 사랑하기 때문이다
우리의 유일한 노동은 단단한 턱으로 물렁물렁한 구멍을 만드는 일
꽃과 잎과 문장의 숨통을 둥그렇게 터주는 일
한 올 한 올 다 끄집어내면 환하고 푸르게 흩어지는 그늘의 잎맥들


나와 벌레의 관계가 아니라 벌레와 밭 사이에 끼어든 내가 오히려 낯설지만 ‘꽃과 잎과 문장’들은 이미 하나가 되어 버렸다. 시인과 자연의 동일시를 기본적인 규칙으로 삼는 서정시에 또다른 손님이 개입된다. 그것을 바라보는 독자들이 새로운 서정시를 만났다고 여기기는 힘들지만 분명 낯선 이미지를 전달하기에는 충분하다.

나이와 상관없이 생의 감각과 느낌을 적어두는 습관과 연습은 시인의 생활이 되었을 것이다. 모두 ‘얻어온 것들’이라고 스스로 말하는 문태준의 언어는 모국어에서 빌어온 최고의 성찬이다.

바닥

가을에는 바닥이 잘 보인다
그대를 사랑했으나 다 옛일이 되었다
나는 홀로 의자에 앉아
산 밑 뒤뜰에 가랑잎 지는 걸 보고 있다
우수수 떨어지는 가랑잎
바람이 있고 나는 눈을 감는다
떨어지는 가랑잎이
아직 매달린 가랑잎에게
그대가 나에게
몸이 몸을 만질 때
숨결이 숨결을 스칠 때
스쳐서 비로소 생겨나는 소리
그대가 나를 받아주었듯
누군가 받아주어서 생겨나는 소리
가랑잎이 지는데
땅바닥이 받아주는 굵은 빗소리 같다
후두둑 후두둑 듣는 빗소리가
공중에 무수히 생겨난다
저 소리를 사랑한 적이 있다
그러나 다 옛일이 되었다
가을에는 공중에도 바닥이 있다

가을에는 바닥이 잘 보이고 ‘사랑’도 다 옛일이 되어 버렸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인가? 계절이 문제가 아니다. 우리들 삶에 바닥은 언제고 드러난다. 그 바닥을 보여줄 수 있는 자신감을 보여주고 싶다. 언제나 준비된 바닥이 되고 싶다. 항상 바닥이 되고 싶은 것이 아니라 바닥을 두렵지 않은 생이고 싶다.

여기가 바닥이다. 더 이상 없는가.

내가 돌아설 때

내가 당신에게서 돌아설 때가 있었으니

무논에 들어가 걸음을 옮기며 되돌아보니 내 발자국 뗀 자리 몸을 부풀렸던 흙물이 느리고 느리게 수많은 어깨를 들썩이며 가라앉으며 아, 그리하여 다시 중심을 잡는 것이었다

이 무거운 속도는, 글썽임은 서로에게 사무친다고 할 수밖에 없다

문태준의 시에는 감정의 속도와 기복이 느껴지지 않는다. 감정을 객관화시킨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어떤 형태로든 누구의 감정이든 스스로를 감추는 것이 아니라 절제한다고 해야 옳을 것이다. 글썽임이 서로에게 사무친다고 말하는 시인에게서 감각기능을 상실한 것걋?느낌을 받는 것은 관찰자적 시선 때문이 아니라 읽는 사람의 메마른 가슴 때문일 것이다.

바람의 노래를 들을 수 있는 때가 오겠지만, 언제나 그 소리에 귀 기울이며 살 수는 없다. 깨달음의 순간이 아니라 생의 모든 감각이 깨워지는 순간이 있다. 국어의 모든 자음과 모음이 살아 움직이듯, 그 언어들이 연주하는 음악처럼 문태준의 시가 아름답게 느껴지는 것은 다만 담백한 이미지나 감각적인 언어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충분한 마음의 여유와 모래바람처럼 메마른 감각이 살아 있다면 <가재미>는 오히려 훨씬 더 빠르게 우리를 적셔준다.

바람이 나에게

한때는 바람 한 점 없는 날 맑은 날 좋았는데
오늘 바람 많은 평야에 홀로 서 있네
수많은 까마귀 떼가 땅 끝으로 십 리를 가는 하늘
나는 십 리를 가는 꿈도 잃고 나귀처럼 긴 귀를 가진 바람을 보네
다급한 목숨이 있다면 늙은 어머니는 이런 노래를 부르지 않았을까
들판을 재우며 부르는 이 거칠은 바람의 노래를



090626-1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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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옥으로부터의 사색 - 신영복 옥중서간
신영복 지음 / 돌베개 / 199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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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영복선생님의 '강의'를 읽다가 문득문득 인용했던 이 책의 초판이 나온것이 벌써 17년쯤 전이라니. 88년에 난 고3이었다. 통혁당 사건으로 무기징역을 선고받고 특별 가석방으로 20년 20일만에 출소하신 분의 글들을 다시 읽는다. 사적 체험과 인식의 폭이 같은 책을 다르게 만드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스무살 무렵 이 책을 건성으로 읽을 때와의 느낌은 완연히 다르다. 69년 1월부터 88월 8월까지 감옥에서 쓴 글들을 읽어나가며 참 많은 생각을 했다. 내가 태어나기도 전에 감옥에 들어가 고3이 되던 해 여름 출소하실 때까지의 글들을 읽으며 그 끝에 적혀 있는 날짜를 답답하게 헤아리고 있었다. 마치 내가 수감된 사람처럼 88년의 여름을 기다리듯이... 3공화국 박정희를 거쳐 전두환, 노태우까지. 검열될만한 내용이 전혀 없고 그저 개인적으로 부모님과 형수, 계수에게 보내는 엽서 형식의 글들이다. 어찌보면 참으로 개인적이고 공감할 수 없는 내용들이다. 하지만 칼날같은 인식의 힘으로 그 긴 기간을 한결같이 꼿꼿하게 버텨내는 이성의 힘은 차라리 두렵기까지 하다.

인간은 무엇으로 사는가? 삶이란 무엇인가? 세상살이에 대한 나약함과 안이함이 생활속에 스며들때 찬 얼음물같은 글들이다. 타인의 불행을 거울삼아 내 행복을 감사하게 여기자는 단순한 논리 이전에 두고두고 새겨 볼 이야기들이다. 인간과 인간에 대한 애정과 스스로에 대한 치열한 연찬. 그것은 긴 시간이 주어져 있고, 자유가 주어지지 않은 상황이라면 누구나 가져야하는 삶의 자세라고 얘기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래서 선생님의 글들이 더욱 많은 사람들에게 전해지고 있는지도 모른다.

내 생활을 돌이켜 보고 어줍잖은 힘겨움과 고통에 대해서 얘기하지 않기로 했다. 피할 수 없으면 즐기라는 말처럼 삶에 대한 태도와 자세를 돌아보는 계기가 됐으면 좋겠다. 무엇을 할 것인가? 어떻게 살 것인가? 이 해답없는 문제에 대해 다시 고민 할 수밖에 없지 않은가!

세상이라 이름 붙혀지 더 큰 감옥에서 생활하고 있는 나의 모습을 본다. 자유로운가? 어디가 감옥이고 어디가 세상인가? 스스로 만든 마음밭의 감옥속에 갇혀 사는것은 아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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