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녀장의 시대
이슬아 지음 / 이야기장수 / 202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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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믿고 읽는 작가, 이슬아 작가가 돌아왔다.

이메일 뉴스레터 <일간 이슬아>로 이번 가녀장 시리즈를 읽으면서 이 글이 어느 장르에 들어갈까 궁금했는데 소설이다. 이슬아 작가의 첫 소설이다.

이번 책의 제목은 『가녀장의 시대』. '가녀장'이라는 이름은 예전에 <님과 함께>라는 가상 연애 프로그램에서 윤정수와 호흡을 맞췄던 김숙의 '가모장' 발언을 연상하게 한다. 그 낱말이 국어사전에 있기는 하지만, 이는 오랫동안 가부장제의 전통이 뿌리내린 나라에서 '큰 화제가 되었다. '가부장'에 대한 통쾌한 미러링이라며 환호하는 사람들도 적지 않았다.

과거 우리나라에는 일제강점기 때부터 이어진 '남성호주제'라는 희한한 제도가 있었다. 부계 혈통을 기반으로 한 일원적이고 수직적인 위계 체제였다. 가부장이라는 절대적인 권위자 아래 모든 가족 구성원이 놓여있었다.

자녀들은 물론이고, 배우자인 아내마저도 가부장인 남편에 법적으로 종속되었다. 더욱 황당한 것은 남편이 아내보다 먼저 죽으면 아들이 가장을 이어받는다는 점이었다. 아들 나이가 아무리 어리더라도.

그런 상황에서 아들이 미성년이면 엄마가 실질적으로 가계를 책임질 수밖에 없는데도 법적인 가장은 어린 아들이었다. 공고했던 가부장제는 IMF 사태를 겪으면서 흔들리기 시작했고, 2008년에 드디어 '남성호주제'가 완전히 폐지되면서 적어도 제도상에서는 완벽하게 사라졌다.

이제 가부장제는 문화적으로도 숨을 다해가는데 이처럼 우리 사회가 거쳐 온 사회·문화적 배경을 돌이켜보니, 이슬아 작가가 쓴 첫 소설의 제목에서 '가녀장'이라는 단어가 지닌 의미가 결코 작지 않은듯하다.






이슬아 작가의 실화를 모티브로 한 '픽션'인 소설 『가녀장의 시대』에서 슬아는 '낮잠'이라는 출판사를 운영하는 가녀장이다. 슬아가 가녀장인 이유는 (당연한 말이지만) 집안의 경제를 전적으로 책임지고 있는 딸이기 때문이다. 한때는 자기만의 직업이 있었던 아빠인 웅, 엄마인 복희는 슬아가 사장인 작은 출판사의 직원이다.

제목이 '가녀장의 시대'인 만큼 소설은 주로 슬아와 슬아를 둘러싼 낮잠 출판사의 직원이자 가족의 이야기를 슬아의 시선으로 보여준다. 가끔은 슬아가 아닌 복희가 슬아를 관찰하는 모습을 보여주기도 한다.

'장편 소설'이라고는 되어있지만 내용이 시간이나 사건 순으로 계속 이어지는 게 아니라, 각각 독립된 에피소드를 한 권으로 엮은 거라서 어느 편을 먼저 읽어도 무방할듯하다. 저자와 편집자가 더 잘 알겠지만, 장편소설이라기보다는 연작소설이라고 해야 하지 않을까 싶기도 하다.

앞에서 '가부장제니 '가모장'이니 하면서 거창하게 말을 꺼내긴 했으나, 이 책에서 그런 진지한 주제 의식을 담고 있는 것은 아니다. 단지 '가녀장'이라는 어휘에서 내가 혼자 떠올린 감상일 뿐이다. (다만 과거 60~80년대에 오빠나 남동생의 학업을 뒷바라지하고 가족을 전적으로 부양하면서도 가장이 될 수 없었던, 옛날의 공순이 시절을 경험했던 분들께는 감격스러운 호칭이 아닐까.)

이 책은 시트콤을 보듯 편하게 감상하면 된다. 한창 재미나게 읽는 중에 깊이를 발견하게 되는 게 이 작품의 매력이다. 이메일에서 이 작품을 읽으면서도 이미 생각했던 건데, 언젠가 영화나 드라마로도 볼 수 있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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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편지는 제주도로 가는데, 저는 못 가는군요 - 문학과 삶에 대한 열두 번의 대화
장정일.한영인 지음 / 안온북스 / 202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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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인생 처음으로 ‘서평단’이라는 것에 참여하게 됐다. 그런데 인생 최초의 서평단에 처음 쓰는 책도 ‘비평서간집’이라 생소한 분야다. 잡지나 신문에 실린 개별 글을 가끔 읽을 때는 있지만, 아예 단행본으로 엮어 나온 걸 읽은 건 이번이 처음이다. 그러니 영 자신이 없지만, 서평을 써서 책을 홍보해주는 조건으로 안온북스에서 책을 제공받았으니 밥값은 해야겠지. 


‘비평서간집’은 처음이지만 서간집을 읽은 건 내가 기억하는 한 이번이 두 번째다. 두 권 다 올해에 읽었다. 한 권은 이슬아 작가와 남궁인 작가(겸 의사)가 함께 쓴 『우리 사이엔 오해가 있다』, 그리고 이번에 읽은 책이 장정일 시인과 한영인 평론가가 쓴 『이 편지는 제주도로 가는데, 저는 못 가는군요』이다. 그래서인지 서간집 형식이 그리 낯설게 느껴지지는 않았다.





공동 저자 중 한 사람인 장정일 시인은 내겐 시인보다는 비평가나 서평가로 더 친숙하다. 그도 그럴 것이 그는 시집은 거의 내지 않았고 한때 소설가로 이름을 알렸지만, 상당히 오랫동안 서평가로 명성을 떨치고 있으며 비평가로도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어서다. 그래서 이 책이 시인과 문학평론가의 만남이지만, 이 책에서 단지 문학작품만을 논하지는 않을 것 같다고 생각했는데 실제로도 그랬다. 


실제로 철학자 한병철의 저서 『피로사회』와 장일순의 『나락 한 알 속의 우주』, 이정수 외 저자의 『케이팝의 역사, 100번의 웨이브』 같은 비문학 작품들도 다루고 있었다. 하긴 만일 문학작품만 다루었더라도 다룰 수 있는 주제들은 무궁무진했을 테다. 문학은 시대와 삶과 동떨어져서 생각할 수 없으니까.


62년생에 태어나 84년부터 집필 활동을 시작한 시인 장정일, 84년에 태어나 2014년부터 평론가로 활동한 한영인. 이 책은 이 두 사람이 이메일로 서로의 생각을 나눈 기록이다. 세대를 뛰어넘어 편지로 의견을 주고받는 모습은 예전에 국사 시간에 배운 이황과 기대승의 사단칠정 논쟁을 떠올리게 했다. 물론 그들이 나눈 편지를 내가 읽어본 적도 없고 읽어봤자 전혀 이해하지 못하겠지만, 그들의 대화도 비슷한 느낌 아니었을까.


이황과 기대승의 논쟁은 철학 논쟁이었지만, 장정일과 한영인의 대화는 더 폭넓은 분야에서 이루어진다. 책에서 파생되는 민주주의, 노동, 민족, 문학, 정치 등의 이야기가 풍성하게 전개된다.     


그날 저는 제가 좋아했던 시인들과 최근에 읽은 백무산의 신작 시집과 김혜진의 소설 《9번의 일》(한겨레 출판, 2019)에 대한 소감을 얘기했죠. (…) 그래도 지금까지 남아있는 인상은 이 작가가 굉장히 진지하게 노동의 의미를 묻고 있다는 것. 노동은 인간의 총체적인 인격 활동인데, 자본은 노동자의 노동이 '임금'으로 환원될 수 없는 그 이상의 것임을 냉정하게 거부합니다. 작가는 이 점을 끈질기게 파고들더군요. (9쪽)    

 

죽음을 무릅쓰고 정의를 위해 법정 투쟁을 중단하지 않았던 미하엘 콜하스, 309일간 크레인 농성을 벌였던 김진숙 지도위원, 성폭행에 가담한 외손자를 고발하는 영화 <시>의 주인공 양미자는 모두 안티고네죠. 이들은 우리가 손가락질받거나 두려워서 하지 못하는 일을 죽음충동에 이끌려 해냅니다. 한마디로 미친 것인데, 미치지 않으면 주체가 될 수 없고, 윤리적이 될 수 없죠.(60쪽) 

         

한때는 문화적이고 문학적이 된다는 것이 진보와 해방을 의미했지만 점점 자본과 체제를 구성하는 중요한 행위자가 되어가는 것 같아요. 안타까운 것은 '문화의 덫'에 걸린 인간은 분노와 슬픔에 둔감해진다는 거예요. 분노하고 슬퍼할라치면, 문화라는 바셀린 연고가 자본과 기술 문명에 얻어맞고 찢긴 상처에 살포시 내려옵니다. 많은 작가와 예술가가 그 과정에서 '멘토'가 되고 '셀럽'이 되기도 하죠. 이를테면 연쇄살인마가 출현하거나 엽기적인 사건이 벌어지면 그걸 소재로 삼은 시와 소설이 등장할뿐더러, 연극이나 영화로도 만들어지죠. (117~118쪽)   

  

한영인과 장정일이 이메일로만 소통한 것만은 아니다. 친분은커녕 태어나서 한 번도 만난 적이 없었던 그들은 제주도에서 처음 만났다. 한영인은 제주도에 집이 있었고, (집필 작업 때문이었는지 몰라도) 본래 제주도 사람은 아닌 장정일이 마침 우연히 한영인의 집과 멀지 않은 곳에서 머물고 있었던 덕분이었다. 한영인은 친분이 있는 소설가 K를 통해 장정일을 소개받았고 애월에 있는 한 식당에서 처음으로 장정일을 만날 수 있었다.


요즘 세상에서는 정말 희귀하겠지만, 장정일이 핸드폰을 사용하지 않는 사람이어서 두 사람은 주로 이메일로 약속을 잡았다. 요즘같이 스마트폰으로 실시간으로 소통할 수 있는 시대에 그것은 분명 번거롭고 불편한 일이었겠으나, 이메일이라는 매체의 특성상 카카오톡에선 담아낼 수 없는 깊이 있는 대화를 나눌 수 있었다. 덕분에 이 책을 읽는 우리도 두 지식인이 나누는 통찰이 담긴 ‘지적 수다의 향연’이라는 혜택을 받을 수 있게 되었다. 그렇게 보면 뭐든 일장일단이 있는 법이다.     


스마트폰을 가진 우리는 서로 실시간으로 언제든 통화할 수 있고 메시지를 주고받을 수 있지만, 가끔은 이메일로 소통을 해봐도 좋지 않을까. 안온북스에서 나온 『이 편지는 제주도로 가는데, 저는 못 가는군요』처럼 책으로 만들 수 있을 정도의 대화는 못하더라도, 이메일을 주고받을 때마다 우리도 조금씩 깊이가 더해지지 않을까. 


※ 본 독후감은 안온북스에서 책을 제공받고 글쓴이의 주관적인 시선으로 쓴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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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값이 만만하지 않아 도서관에 희망도서로 신청해둔 책이 얼마 전에 도착했다. 조금 전부터 읽기 시작했다. 한국사 개설서를 읽는 건 오랜만이다. 새로운 연구 경향이 반영되어있다니 전공자 출신인 사람으로 더욱 반갑다. 책이 일반 도서보다 훨씬 커서 인상적이었다. 역사 전공 새내기 시절의 마음으로 돌아가 날마다 조금씩 읽으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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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어른에게는 자신을 어린아이로 만들어줄 사람이 필요하다.그건 가족일 수도, 연인일 수도, 친구일 수도, 스스로일 수도 있다. 그런 존재가 없는 인생은 버티기 힘들 것 같다. 난 언니들이 있어서 이만큼 산다. - P14

라디오를 듣다가 청취자가 보낸 고민 사연에
‘매사에 마음가짐이 중요하다‘고 마무리하는 사람이 있었다. 하지만 그런가? 마음가짐이 중요하다는 말은 곧 마음을 그렇게밖에 못 먹는 네 잘못이라는 얘기잖아.
이 세상에 마음가짐으로 해결할 수 있는 문제는 거의 없다.
그걸 받아들이지 못하는 사람만 불행해진다.
나는 왜이럴까, 나는 왜 이모양일까 하면서.
마음을 어려워하는 사람에게 마음가짐이 중요하다. 라는 말만큼 폭력적인 말이 어디 있다고.
그 말을 하는 그 사람은 정작 자기 마음 간수는 잘 하고 사는지 궁금하다. 말한 것처럼 잘 안 될걸? - P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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쉽게 읽는 북학의 - 조선의 개혁.개방을 외친 북학 사상의 정수
박제가 지음, 안대회 엮고옮김 / 돌베개 / 201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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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러져가는 조선을 일으키기 위해 조선 후기에 등장한 실학자들이 있었다. 하나는 농업을 강조한 무리였으니, 하나는 오늘날 우리가 중농학파라고 부르는 유형원·이익·정약용이었고, 다른 하나는 홍대용, 박지원, 박제가를 비롯한 상공업 진흥을 강조한 중상학파였다. 이런 시대 배경 속에서 서자 신분으로 태어난 박제가는 19살에 연암 박지원의 제자가 되면서 북학파(중상학파) 학자들의 영향을 받게 된다. 29살에는 친구 이덕무와 청나라에 다녀온 후 책을 저술했으니, 바로 《북학의北學議》 다. 


나는 고전 번역으로 저명한 안대회 교수가 엮은 『쉽게 읽는 북학의』를 골랐다. ‘북학의’에서 ‘북학北學’은 당시 조선의 북쪽에 있는 청나라의 선진 문물을 배우자는 것이다. 당대의 주류 유학자들은 여전히 청나라를 오랑캐로 여겨 배울 것이 없다고 생각했지만, 박제가는 조선이 경제, 국방, 문화, 기술 등 모든 분야에서 낙후되어 오직 더 발전한 국가에서 배워야 조선이 살아남고, 부강한 나라가 될 수 있다고 말한다. 그는 《북학의》에서 많은 지면을 할애해 청과 조선을 대조하며 조선의 낙후된 모습을 묘사한다.


부강한 청나라와 비교해서 참혹한 조선의 현실에, 박제가는 다음 글귀와 같은 비유로 소비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소비가 경제의 윤활유 역할을 하는 것은 비단 자본주의 사회만의 일만은 아닌가 싶다. 국가의 흥망성쇠는 보통은 사치 때문이지만, 박제가는 조선이 망한다면 그건 지나친 검소함 때문이라고 보았다. 


재물은 비유하자면 우물이다. 우물에서 물을 퍼내면 물이 가득차지만 길어 내지 않으면 물이 말라 버린다. 마찬가지로 비단옷을 입지 않으므로 나라에는 비단을 짜는 사람이 없고, 그 결과로 여성의 기술이 피폐해졌다. 조잡한 그릇을 트집 잡지 않고 물건을 만드는 기교를 숭상하지 않기에 나라에는 공장工匠과 도공, 풀무장이가 할 일이 사라졌고, 그 결과 기술이 사라졌다. 나아가 농업은 황폐해져 농사짓는 방법이 형편없고, 상업을 박대하므로 상업 자체가 실종되었다. 사농공상 네 부류의 백성이 너나 할 것 없이 다 곤궁하게 살기에 서로를 구제할 길이 없다. (196쪽)


가난한 나라와 백성들을 위해 상공업을 진흥시킬 것을 외쳤던 박제가는 여기에 그치지 않는다. 더 나아가 그는 놀고먹는 사대부를 ‘좀벌레’라고 신랄하게 비판하며, 사대부에게도 상업을 권장해야 한다는 급진적 주장을 펼친다.


신은 수륙의 교통 요지에서 장사하고 무역하는 일을 사대부에게 허락하여 상인 명단에 올릴 것을 요청합니다. 밑천을 마련하여 빌려주기도 하고, 점포를 설치하여 장사하게 하며, 그중에서 인재를 발탁함으로써 권장합니다. 그들로 하여금 날마다 이익을 추구하게 하여 점차로 놀고먹는 추세를 줄입니다. 생업을 즐기는 마음을 갖도록 유도하며, 그들이 가진 지나치게 강력한 권한을 축소시킵니다. 이것이 현재의 사태를 바꾸는 데 일조할 것입니다. (28쪽)


하지만 그 역시 농본주의 국가인 조선의 유학자였기에 농업을 경시하지는 않았다. 이는 다음 구절을 통해 알 수 있다.


농사는 비유하자면 물과 곡식이고, 수레는 비유하자면 혈맥血脈입니다. 혈맥이 통하지 않으면 살지고 윤기가 흐를 도리가 없습니다. 『의서도인』醫書導引에 따르면, 약의 이름에 하거河車(탯줄)란 것이 있는데 이러한 뜻을 담고 있습니다. 수레와 화폐는 농사에 직접 관련되지는 않지만 농사에 도움을 주므로 나라를 경영하는 사람이라면 반드시 급선무로 삼아야 합니다. (41쪽)


이밖에도 박제가는 《북학의》를 통해서 조선의 군사제도, 과거제도, 외국어 교육, 도로, 통상, 건축, 상업, 공업, 농업, 목축 등 조선의 총체적인 개혁을 역설한다. 


안대회 선생이 편역한 『쉽게 읽는 북학의』를 읽으며 놀라운 점은 우선 두 가지다. 하나는 박제가가 아무리 중상학파였지만 사대부들에게도 상업을 권장할 것을 언급한 급진성이고, 다른 하나는 당대 선진국이었던 청나라와 대조되는 조선의 비참한 현실이다. 특히나 전자는 지금 봐도 놀라운데, 당시로서는 얼마나 충격적인 주장이었을까. 모두 알다시피 당시는 사농공상의 신분질서가 엄존하던 시대였다. 그런 시대에 사농공상의 꼭대기에 있는 사대부에게 제일 말단의 상업을 권하다니. 후자는 그래도 당시가 우리가 조선의 르네상스라고 부르는 정조시대였다는 점을 감안하면 더욱 놀랍게 느껴진다. 


박제가는 이런 참담한 현실을 극복하기 위해 뱃길을 통해 여러 나라들과 통상할 것을 간언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이런 박제가의 주장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지난 역사를 돌아보면, 우리가 식민지로 떨어지지 않을 수 있을 기회가 적어도 두 번은 있었다. 처음 한 번은 병자호란으로 청나라에 끌려갔다가 서양과학 기술에 눈을 뜬 소현세자 때였고, 마지막 한 번은 실학자들이 왕성하게 활동했던 정조 때였다. 적어도 박제가가 《북학의》를 썼을 당시에 우리가 스스로 무역의 빗장을 열었더라면, 우리의 이후 역사는 조금은 달라졌을 수도 있다.


지금은 박제가가 살던 수백 년 전의 시대와는 많은 점에서 다르다. 굉장히 폐쇄적인 무역 구조를 지녔던 당시와는 다르게, 오늘날 한국은 전 세계 수많은 나라와 교역을 하고 있다. 지금은 당시의 조선과는 정반대로 과도한 무역의존도를 걱정하는 이들도 있을 정도다. 또한 그때의 조선이 상업을 천시했다면, 오늘날 한국은 자본가들이 사회의 중심인 완전한 자본주의 국가가 된 지 오래다. 그러나 현시대 우리 농촌의 현실은 지방 소멸의 위기에 몰려있을 정도로 위태롭다. 만일 박제가가 이 시대에 살고 있다면, 상공업보다는 농업 진흥과 농촌의 부흥을 더 강조하지 않았을까.


지금은 우리 시대에 맞는 《북학의》가 필요하다. 어쩌면 이미 있는데 우리가 모르고 있을지도 모른다. 모든 개혁에는 적기(適期 : 알맞은 시기)가 있는 법이다. 다시는 개혁의 적기를 놓치고 후회하는 일이 벌어져서는 안 된다. 그것이 우리가 역사를 배우는 이유 중 하나이고, 우리가 《북학의》에서 읽어내야 할 메시지 중 하나가 아닐까.



※ 이 글은 브런치에서도 읽으실 수 있답니다.

https://brunch.co.kr/@lifeinreading/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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