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책의 존재는 알라딘 이웃 레삭매냐님의 서재를 통해서 알게 됐다. (이 자리를 빌어 감사의 말씀을 드린다^^) 작가 이름조차 생소한 시그리드 누네즈. 시그리드 누네즈를 읽는다. 어제 도서관에서 책을 대출하고 나오면서 뒷면을 보니 신형철의 추천사가 있다. , 신형철이 추천했구나.

 


추천사를 읽고 나니 아그렇지, 추천사는 이렇게 써야지. 절로 감탄이 나온다. 첫 문장이 이렇다. ‘타인을 평가할 때는 그들이 겪고 있는 고난을 기준으로 삼아야 한다는 디트리히 본회퍼의 말을 잊지 않으려 애쓰고 있다.’ , 본회퍼라니요. 너무 멀리 가신 거 아닌가요. ‘당신의 고통은 무엇인가요? (Quel est ton tourment?)’에 대한 소설적 실천. , 여기는 괜찮고요. 

 


하지만 나를 사로잡는 문장은 전혀 다른 것이었으니, 바로 여기. ‘(신형철)는 근래 드문 집중력을 발휘해 이 소설을 두 번 연달아 읽었고 그러고도 성에 차지 않아 이 작가가 쓴 수전 손택 회상기까지 내처 읽었다.’ 두 번 읽을 만하다는 거야? 이 작가가 수전 손택 회상기를 썼다고? 이미 대출한 책에 한 번 더 반하게 만드는 추천사.



첫 장면은 잘난 척하는 남성 작가를 까는 것으로 시작된다. 어찌 아니 기쁘랴.

 


사이버테러리즘, 바이오테러리즘, 불가피하게 또다시 닥쳐올 팬데믹. 그에 대해 역시나 불가피하게, 우리는 전혀 대비되어 있지 않다고 그가 말했다. 무분별한 항생제 사용으로 인한, 치료법이 없는 치명적 감염병. 전 세계적인 극우 정권의 발흥, 선전선동과 속임수가 정치 전술과 정부 정책의 기반이 되고, 그것이 정상으로 여겨지는 상황. 전 지구적 지하디즘을 제압하지 못하는 무능. 생명과 자유 - 문명이라는 이름에 값하는 것은 무엇이든 - 에 대한 위협이 만연하고 있습니다. 반면 그에 맞설 수단은 턱없이 부족하고……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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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삭매냐 2022-04-08 17:59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아, 이런 선한 영향력이라니...
고저 감사하네요.

전 오늘 이번 주에 벌쓰데이였던
지인 분에게 이 책을 날려 보냈
답니다. 모쪼록 즐거웁게 읽으시길.

두 분 모두.

그레이스 2022-04-08 18:01   좋아요 4 | URL
저도 찜이요
두분께 감사! ㅎㅎ

단발머리 2022-04-13 16:39   좋아요 4 | URL
레삭매냐님/ 좋은 책 추천 감사드려요. 친구와 죽음을 키워드로 꼽으신 것에 마음이 동했습니다. 몇 장 넘기다가 위의 남자 정체 밝혀져서 저 혼자 완전 웃었답니다^^

그레이스님/ 저도 감사합니다. 즐건 독서여행 기대됩니다^^

독서괭 2022-04-08 19:37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여러 분들이 이 책 얘기 하셨던 것 같은데 그래서 담아둔지는 오래이나.. 단발님 글 보니 급 읽어보고 싶네요 ㅠ 정말 두번 내처 읽을 정도인지?? 궁금합니다

단발머리 2022-04-08 21:27   좋아요 2 | URL
저 완전 재밌게 읽고 있고요. 작가 유머도 제 스탈이라서 기대만발입니다!!

다락방 2022-04-08 22:23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그거 아세요? 저 이 책 있어요 ㅎㅎ

독서괭 2022-04-08 22:48   좋아요 3 | URL
없다고 하시면 더 놀랐을 듯요…

단발머리 2022-04-08 23:04   좋아요 3 | URL
자매품 : 잘 지내나요? (by 이작가님)

책읽는나무 2022-04-09 08:06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신형철 님 추천사....끄덕끄덕!!!
음...수전 손택??? 음....🤔🤔
진지모드로 가다가 허걱!!! 꺄악~~
서브웨이!!!!!!!🤤🤤🤤
지금 식전인데 넘 배고파 갑자기 꼬르륵~
식구들은 일어날 생각도 없고, 혼밥이라도 해야겠군요. 아~~서브웨이 먹고 싶다!!!!
책이랑 서브웨이라니......

단발머리 2022-04-13 14:45   좋아요 2 | URL
서브웨이... 맛있더라구요. 주인공은 역시 책이 아니라 간식인 걸까요? 입을 크게 벌려야 돼요. 아아아아~~~~~~~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자매품 : 책이랑 햄버거, 책이랑 모카롤, 책이랑 초코파이 기타등등)
 





 














프랑스어 책읽기 모임의 책이다. 매일 정해진 분량의 한글책을 먼저 읽고 원문을 같이 읽는데 (정확히는, 책 두 권을 나란히 두고 단어를 맞춰보는데), 이 책은 저절로 책장이 넘겨져 이 문단까지 오게 됐다.

 


그녀는 글을 쓴다. 온갖 색깔의 노트에다, 온갖 피로 만들어진 잉크로, 글은 밤에 쓰는데, 그렇게밖에 할 수 없다. 장을 보고, 아이를 씻기고, 아이의 학과 공부를 돌봐준 뒤이다. 그녀는 저녁상을 치운 뒤 같은 식탁에서 글을 쓴다. 밤늦도록 언어 속에 머무른다. 아이가 깜박 잠이 들거나 놀이에 빠진 사이, 그녀가 먹이는 이들이 그녀에 대해 아무것도 알 수 없게 된 순간에 글을 쓴다. 이제 아무도 침범할 수 없는 그녀 자신이 되어 있는 순간 그녀는 홀로 종이 앞에 앉는다. 영원 앞에 나와 앉은 가난한 여자이다. 수많은 여성들이 얼어붙은 그들의 집에서 그렇게 글을 쓴다. 그들의 은밀한 삶 속에 웅크리고 앉아. 그렇게 쓴 글들은 대부분 출간되지 않는다. (83)

 


읽는다는 일이 얼마나 대단한지 혹은 대단하지 않은지에 대해 자주 생각하지 않는다. 읽는 일이 즐겁고, 내게 필요한 건 그것뿐이다. 읽고, 다른 세상을 만나고, 똑똑하고 혹은 멍청한 저자를 만나고, 그들이 만들어낸 세상, 그 세상 속 사람들을 만나는 일이 즐거울 뿐이다. 그것으로 만족한다.

 

쓰는 일은 다르다. 근사한 작업실에서 멋진 노트북을 펼쳐놓고 쓰는 삶이 아니라, 그냥 쓴다는 것. 쓰는 일 자체가 던져주는 두려움이 떠오르고 나도 모르게 주눅이 든다. 자판 위에 글씨가 새겨지고 그리고 지워질 때, 내가 모르는 내가 튀어나올 때 얼만큼 후련하고 딱 그만큼 두렵다.


 

이 문단을 읽으면서는 그런 두려움에도 불구하고 쓰는' 사람들에 대해 생각했다. 그리고 자연스레 떠올리게 됐다. 큰아이 낮잠 시간에 나란히 누워 끄적였던 나의 쓰기를, 고양이를 벗으로 삼아 외로움을 이겨냈던 친구의 하염없는 쓰기를, 아이를 재워야 비로소 쓸 수 있다는 젊은 엄마의 쓰기를. 출간되지 않겠지만 멈춰지지 않는 외로운 쓰기를 떠올려본다. 쓰지 않았으면 견디지 못했을 시간을, 혼자가 된 뒤에야 쓸 수 있는 쓰기에 대해 생각한다.

 


보뱅을, 보뱅을 더 많이 읽어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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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22-04-07 09:37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저 노랗고 두꺼운 건 사전인가요? 책이 놓인 책상은 넘나 아름답네요 😍

단발머리 2022-04-07 10:39   좋아요 0 | URL
저 노랗고 두꺼운 건 프랑스어/영어 사전인데요. 많이 사용하지는 않지만 제가 겁나 사랑하는 사전인 것입니다^^
저 책상 아래 의자에는 아름답지 않은 모습으로 책들이 쌓여있....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다락방 2022-04-07 11:03   좋아요 1 | URL
사전 사야지. (꿈지럭꿈지럭)

단발머리 2022-04-07 14:13   좋아요 0 | URL
움하하하하하! 절대 찬성입니다^^

공쟝쟝 2022-04-07 09:56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그러니 우리는 읽고 쓰는 근사한 사람들 💕 왜 난 눈물이 글썽거려지는 가….

단발머리 2022-04-07 10:40   좋아요 1 | URL
읽고 쓰는 근사한 사람들이 여기 이 동네에 항상 우글우글 했으면 좋겠어요.
눈물이 글썽거릴 때도 즐거울 때도 달리고 난 뒤에도 배부를 때도 배고플 때도... 우리 같이 해요, 쟝쟝님!!!

유부만두 2022-04-18 11:35   좋아요 1 | URL
나도 낑가 줘요

단발머리 2022-04-18 11:56   좋아요 1 | URL
이쪽으로 오세요, 이쪽이요!!
여기 한 자리 남아 있어요!! 😘😘😘

공쟝쟝 2022-04-18 15:13   좋아요 1 | URL
그르게요 딱 유부님 자리는 미리 비워뒀습죠~ ㅋㅋㅋㅋ 함께해요 >0<

수이 2022-04-07 10:05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초코파이 즐겨 드시나요? 단발머리님 저는 초코쿠키! 보뱅 좋아요 저도 오늘 더 읽을래요!

단발머리 2022-04-07 10:41   좋아요 0 | URL
저는 초코파이, 나초, 후렌치파이, 오감자, 새우깡(매운맛), 꼬깔콘(군옥수수맛)을 좋아하고, 초코쿠키도 당근 좋아합니다.
보뱅 좋아요. 책이 이쁜데 내용도 좋아서 개이득!!

프레이야 2022-04-07 11: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프랑스어 책 읽기 보뱅 책이면 더 좋은 거 같고 막 멋집니다. 블라인드 틈새로 스미는 빛살이 책상 위를 더 아름답게 비추네요. 초코파이랑 커피 잘 어울려요 ^^

단발머리 2022-04-07 11:28   좋아요 0 | URL
블라인드 틈새로 스미는 빛살 때문에 책등이 모두 누렇게 변색되어서 저는 한낮에도 집을 어둡게 하고 있답니다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멋지다고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난티나무 2022-04-07 15: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완벽한 책상 사진!!!
후렌치파이!!! ㅎㅎㅎ 추억 돋고요.
책등 변색 아 저도 싫어합니다….^^

단발머리 2022-04-07 18:24   좋아요 0 | URL
재작년에 이사하고 꿈의 책상 구입했는데요. 물건 쌓아두고 사진 배경으로 주로 쓰다가 요즘에 좀 치우고 있습니다.
후렌치파이는 사과맛과 딸기맛이 있고요.
담에 사진 한 장 올려볼게요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책읽는나무 2022-04-07 20: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단발머리님의 요 책상, 요 색상 블라인드가 있는 요기 요 장소 사진 늘 그리웠다는~ㅋㅋㅋ
이젠 북플친님들이 늘 본인의 책을 읽고, 공부하는, 정해진 장소에서의 사진들은 눈에 익어 정겹습니다.
저렇게 정리된 듯한 편안한, 여백 많은 책상에 앉아서 공부 절로 하고 싶어지는군요.
하지만 프랑스어라서 더 다가갈 수가 없겠군요ㅋㅋㅋ
초코파이랑 커피랑 필기구에 혹해서 자리에 앉았을 뻔 했겠어요. 나 이틀 전에 딸아이가 남겨둔 초코파이 냉장고에 숨겨뒀다가 먹었어요ㅋㅋㅋ 근데 필기구도 이쁘군요?^^

쓴다는 행위에 대해 좀 더 진중하게 생각해 보는 계기를 만들어 주시는군요^^

단발머리 2022-04-08 17:17   좋아요 1 | URL
요 책상, 요 색상 블라인드가 저의 픽쳐존입니다. 옆쪽, 뒤쪽 엄청 지저분한데 다 자르고 요기만 찍어봅니다.
자기만의 책상, 자기만의 방, 자기만의 공간은 참 중요한 거 같아요. 저는 아직도 식탁이 편하지만 제가 식탁에 있으니 가족들이 다 식탁으로 모이는 기이한 현상. 제가 책 들고 쇼파로 가면 또 거기가 우글우글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초코파이는 넘나 맛있는 것으로서 항상 대기하고 있어요. 필기구 중에 저기 저 연필이, 요즘 저의 최애 아이템입니다^^
 






 














책 많이 사는 사람 아닌데 3월이라 책 샀다.

 

『엔드 오브 타임』은 대선 끝나고 한반도를 떠나 우주로 가야만 해서 구입했던 책이다. 지적인 면에 있어서 도전을 불러일으키는(모르는 거 엄청 많이 나옴) , 극찬받는 이유를 충분히 수긍하고도 남는다.


 

『레이디 크레딧』은 여성주의 책 같이 읽기 4월의 도서라 미리 구입했다. 『비폭력의 힘』은 이 페이퍼의 주인공 같은 책이다. 친구님 서재에서 책과 머그잔을 보고 찜해 놓았는데  다음날 아침 결제하려고 하니 머그컵이 품절되어서 큰 실망을 했더란다. 혹시나 하고 지난 금요일에 다시 들어가 보니 머그컵이 돌아왔다!!! 머뭇대는 사이 없어질까 급하게 주문하느라 이 책만 단독배송 (택배기사님, 죄송합니다) 크고 가볍고 예쁜 머그컵을 손에 넣고 나니 더 이상 바랄 게 없다.



 
















『Crying in H mart』는 내용도 모르면서 친구에게 선물했던 책인데, 나도 궁금해서 구입했다. 『Where the crawdads sing』은 초대박 베스트셀러로만 알고 있었는데, 테일러 스위프트가 영화 OST 작업에 참여했다는 이유로 테일러 왕팬이 읽어야 한대서 구입했다. 『작은 파티 드레스』와 『Une petite robe defête』는 프랑스어 책읽기 이웃님들과 같이 읽는 책. 진도 밀려서 얼른 가서 숙제해야 한다

 



3월이 이렇게 다 간다. 새 학기는 아이에게도 엄마에게도 벅찬 시간인데, 올해는 대선이 있어 더 힘들었다. 한 주를 호되게 앓고 나니 벌써 31. 다시 계획을 세워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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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수하 2022-03-31 09:39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저는 저 머그 내일 4월에 사겠어요!
(이미 책이 아니라 머그를 산다고 말한다)

단발머리 2022-03-31 09:41   좋아요 3 | URL
머그 사는 거 너무 좋죠. 그럼 책이 따라 오더라구요^^ 일석이죠?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수이 2022-03-31 11:33   좋아요 2 | URL
이미 갖고 있는 저도 또 사고싶은!!!

단발머리 2022-03-31 13:52   좋아요 1 | URL
수하님은 되고 비타님은 안 돼요!! 🤭🤭🤭🤭🤭

라로 2022-04-01 16:45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Where the crawdads sing은 뒤로 갈수록 별로였어요, 저는. 이런 말 할 필요는 없는데 아무래도 제가 오늘 베베 꼬였나 봐요. 이해해주시는 거죠? 단발머리님?

단발머리 2022-04-01 16:58   좋아요 0 | URL
네, 그럼요 ㅋㅋㅋㅋㅋㅋ 어차피 저는 안 읽을 거 같아서요. 전혀 괜찮습니다^^

psyche 2022-04-06 03:01   좋아요 0 | URL
사실은 저도 왜 사람들이 열광하는지 이해가 잘 안 되었어요. 자연 묘사는 아름다웠다는 거 말고는 저도 별로....
 
엔드 오브 타임 - 브라이언 그린이 말하는 세상의 시작과 진화, 그리고 끝
브라이언 그린 지음, 박병철 옮김 / 와이즈베리 / 2021년 2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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곤란한 일이 생겼을 때였다. 머리 속 생각을 떨쳐내려 아무리 노력해도 불가능했다. 할 수 있는 방법을 차례로 시도하며 활활 타오르던 마음이 좀 수그러들었을 때. 그 때, 우주로 나갔다. 우주, 그 자체를 생각했다. 이 광대한 우주 속, 숱하게 많은 은하계. 구석 은하계의 구석, 그 한쪽 귀퉁이 태양계 속의 지구를 머리 속에 그렸다. 그 지구 속의 내 모습이 얼마나 작을지 생각했다. 달에서 볼 때 지구가 얼마나 작을지 상상했다. 한반도는, 서울은, 그리고 나는. 내 안의 그 고민과 갈등은, 어쩌면 생각보다 훨씬 더 작은 것일지 모른다고 생각했다. 나 자신을 우주로 보내 버림으로써, 지구를 떠남으로써 나는 문제를 다르게 바라보려 했다.

 


주변에 무언가 물질이라 부를 만한 것을 발견한다면 그 자체로 기뻐해야 한다. 생명체는 지구에서만 발견되는 아주 특별한 물질이다. 내 주위에 생명체가 있다면 이것은 놀라워해야 할 일이다. 더구나 그 수많은 생명체 가운데 나와 같은 종을 만나는 것은 기적에 가깝다. 다른 인간을 사랑해야만 하는 우주론적 이유이다. (『김상욱의 과학 공부』, 13

 


며칠 전 한겨레 연재 기사에 김상욱 교수의 인터뷰가 소개되었던데 김상욱 교수의 여러 저서 속 수많은 문장 가운데 기자가 이 부분을 발췌한 것을 보았다. 그 때. 내가 우주로 가고자 했을 때, 인간에게 실망했을 때, 그리고 미움이 내 안에 차오를 때 내가 의지했던 문장들이다. 이 넓은 우주 가운데, 생명체로서 만난 존재를 사랑하자. 나와 같은 종으로 만난 것을 환영하자. 반가워하자. 다시, 사랑하자. 4-5년전 일이다. 그 때와 지금 나의 생각이 크게 달라진 것 같지는 않지만, 그 때는 나름대로 힘들고 고생스러웠다. 이제서야, 이만큼 시간이 흐른 지금에서야 그래, 그럴 수 있지라고 말할 수 있게 됐다. 우주에 다녀온 뒤에야 나는 그렇게 말할 수 있게 됐다.

 

대선 결과가 확정되고 암울하고 속상했던 그 날 밤. 나는 또 우주로 가기로 했다. 서울을 떠나, 대한민국을 떠나, 한반도를 떠나, 지구를 떠나 우주로 가 보기로 했다. 책이 도착하자마자 다른 일을 접어두고 이 책만 읽었다. 제일 좋아하는 두꺼운 색연필을 꺼내 놓고 줄을 치며 읽었다. 누워있을 때도 언제든 볼 수 있게 바로 옆에 책을 놓아 두었고, 외출할 일이 있을 때는 많이 읽지 못할게 뻔한데도 굳이 책을 들고 나갔다. 그렇게 우주 속을 거닐면서 시간을 보냈다. 우주 속에서 그렇게 시간이 흘러가게 했다.

 

 

시작은 언제나 죽음이다. 죽음을 영혼과 육체의 분리라고 규정했을 때, 부패되어 재배열되는 육체와 달리 영혼은 어디로 가는지 알 수 없다. 더 정확히는 영혼의 존재조차 불명확하다. 영혼이 없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육체 내에 영혼의 자리가 없음을 그 증거로 삼는다. 해부학적 연구 결과가 축적된 상태에서 영혼이라는 기관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주장이다. 또한 진화의 과정 중에 영혼이 등장했던 순간을 특정할 수 없다는 것도 근거 중의 하나가 된다. 질문은 이어진다. 영혼은 정신과 어떻게 다른가. 영혼과 마인드의 경계는 어디인가. 의식은 어떻게 다른가. 뇌의 인지를 어디까지 믿을 수 있는가’. 의식은 무엇인가. 나 자신을 통합된 자아로 인식하는 것을 뇌의 속임이라고 단언할 수 있는가. 질문은 이렇게 수렴된다. 나는 누구인가. 여기는 어디인가. 우주의 시작은 어떠한가. 죽음 이후에 우리의 삶은 어떤 방식으로 존재하는가.

 


컬럼비아대학교의 물리학과 및 수학과 교수이자 초끈이론에서 중요한 업적을 남긴 이론 물리학자 브라이언 그린도 같은 지점에서 출발한다. 첫 문장이다.

 


모든 생명은 때가 되면 죽는다. (19)

 


물리학자로서 답을 찾아가는 과정은 섬세하고 조심스럽다. 기원과 엔트로피에 대한 탐구가 그렇고 생명과 마음, 언어와 두뇌에 대한 언급이 그러하다. 『생명이란 무엇인가』라는 책 속에서, 자신이 알고 있는 지식을 총동원해 생명 현상을 설명하려 했던 슈뢰딩거가 자주 언급되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이론 물리학자이자 수학자, 과학자인 저자가 우주의 저-엔트로피 상태에 대해, 빅뱅 직후 원소량의 변화와 태양계의 기원에 대해, 생명 정보에 존재하는 통일성에 대해, 의식과 스토리텔링에 대해 설명할 때, 세세한 내용을 이해하기 어려운 평범한 독자조차도 놓칠 수 없는 구체적이고 논거가 확실한 정보가 빼곡하다. 시험 봐야 해서, 외워야 해서 읽는 게 아니고, ‘읽는 행위그 자체로서 즐겁게 읽히는 책이다. 발견의 기쁨이 가득하다. 새로운 지식의 발견 뿐 아니라 내가 얼마나 무식한지를 발견할 수 있어서 그렇다. 의식과 양자물리학에 대한 고찰이 특히 그렇다.

 


양자계가 외부로부터 자극을 받으면 (자극을 가한 주체가 의식이건, 의식이 없는 도구이건 간에) 양자적 확률 구름이 걷히면서 명확한 하나의 현실을 마주하게 된다. 지난 세월 동안 실행된 수많은 실험이 이 관점을 강력하게 지지하고 있다. 따라서 명확한 하나의 현실이 나타나는 것은 의식이 아닌 상호 작용 때문이다. 물론 이것을 증명하거나 반증하려면 의식이 개입되어야 한다. 나의 의식이 개입되지 않으면 결과를 알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양자적 과정에서 의식이 아무런 역할도 하지 않는다는 증거는 없다. 그러나 명백하게 다른 두 미스터리의 피상적 구별을 뛰어넘은 정교한 접근법에서도 양자 세계와 의식의 연결 관계는 쉽게 드러나지 않는다. (211)


 

현실과 양자역학의 수학 체계에서 해결의 열쇠가 의식인 경우 여러 개의 가능성 중 하나만 남기고 나머지의 가능성은 현실에서 지워진다.(211) 하지만 양자역학에 대한 이해가 깊어지면 육체와 두뇌를 포함한 모든 미시물리학적 과정도 설명할 수 있을 것이라는 저자의 주장은, 의식이 양자역학의 범주 안에서 설명될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를 갖게 한다. 관찰자의 시선 혹은 광자의 개입 이외의 변수가 과학적으로 설명될 수 있다는 것인지, 동시에 존재하는 두 개의 사실 혹은 진실이 가능하다는 건지, 점점 더 궁금해진다. 입자의 집합으로서의 와 자유의지간의 연결 관계에 관한 서술 역시 흥미롭다. 나를 구성하는 입자의 행동이 곧 나의 행동이다. 나를 구성하는 각각의 입자들이 지금의 나, 현재의 나를 구성한다.

 


임의의 순간에 ''는 입자의 집합이며, 입자의 특별한 배열을 나타내는 약칭이다(이 배열은 역동적으로 변하고 있지만, 개인의 정체성을 유지할 정도로 충분히 안정적이다. 그러므로 나를 구성하는 입자의 행동이 곧 나의 행동이다. 그 저변에서 물리 법칙이 나의 입자를 제어하고 있다는 것은 실로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나의 행동(입자의 거동)은 자유의지와 무관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나의 특별한 입자 배열(유전자, 단백질, 세포, 뉴런, 연접부의 네트워크 등의 고유한 배열 상태)은 나만의 독특한 방식으로 반응한다." 라는 거시적 서술이 퇴색되지는 않는다. 당신의 행동과 반응, 생각이 나와 다른 이유는 입자의 배열 상태가 서로 다르기 때문이다. (224)

 


신화와 종교의 발생 원인에 대한 부분에서는, 내면에서 겪은 일의 원인을 바깥 세상에서 찾는 인간의 경향을 지적한 부분이 흥미롭다. 지난하고 오랜 기간 축적된 사고 과정 가운데서, 인과론의 사슬을 완벽하게 끊어낸 자유로운 인간이란 존재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시적인 불멸이란 부분에 대해서는 전적으로 동의하기 어렵다. 언젠가 죽을 수밖에 없는 인간이 예술적 성취를 통해 영원에 이를 수 있다는 주장인데, 물론 도스토예프스키의 작품은 지금도 살아서 우리의 마음에 심대한 영향을 미칠 수 있겠지만, 그의 어떠한 의도와 상관 없이, 즉 그것이 우리에게 선사하는 기쁨, 통찰과 상관 없이 도스토예프스키의 삶은 그 자체로 종결되었다. 우리가 향유하는 감동과 환희, 그리고 고마워하는 마음이 도스토예프스키에게 닿지는 않는다. 인간으로서 피할 수 없는 필멸의 삶, 그리고 계속되지 않고 결국 그 끝을 보게 될 우리 우주의 운명. 과학자의 결론은 이러하다.

 


그렇다. 우리는 무상하기 그지없는 일시적 존재다. 그러나 우리가 존재하는 짧은 시간은 우주의 역사를 통틀어 매우 희귀하고 특별한 시간이다. 이 시간 동안 우리는 자기 성찰을 통해 만물에 가치를 부여하고, 형이상학적 가치를 창출했다. 영원히 변치 않을 유산을 남기고 싶은 마음도 있지만, 이미 우주의 타임라인을 조망한 우리는 그것이 이룰 수 없는 목표임을 잘 알고 있다. 그러나 소규모의 입자들이 모여서 현실을 인지하고, 자신을 돌아보고, 자신이 얼마나 단명한 존재인지를 깨닫고, 지칠 줄 모르는 열정으로 아름다움을 창조하고, 연결 관계를 확립하고, 우주의 미스터리를 풀었다는 것은 정말로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455)

 


오랫동안 무신론자였다가 나이 든 후에 불가지론자로 바뀐 줄리언 반스의 잘 모르겠다는 말이 기억에 남는다. 나 역시 내가 가진 신념의 범위를 쉽게 벗어나지는 못할 것 같다. 입자의 합으로서의 나와 느끼고 생각하는 나, 통합된 자아로서 기능하고 있는 나. 그런 나에게 가장 험난하고 거친 난제는 무의미성 그리고 무목적성이 아닐까 싶다. 아무 이유 없이, 아무 목적 없이 그냥 이렇게 아름답고 완벽하게 존재하고 있는 이 광대한 우주를, 나는 아무렇지 않게 바라볼 수가 없다. 나의 죽음으로 이 우주는 얼마만큼 종말을 맞게 되겠지만, 그것이 전부라는 이야기는 아직도 내게 낯설다.


 

존재하지 않는 과거와 존재하지 않을지도 모를 미래 사이에서, 지금 바로 현재가 가장 중요하다는 저자의 말은 과학자가 아닌 인문학자의 말처럼 들린다. 백만장자라면 최첨단 냉동기술로 죽음의 순간을 한동안 유예할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우리 평범한 인간에게 죽음은 피할 수 없는 일이다. 광활한 우주 속, 먼지보다 작은 우리 인간은 우주의 시작과 죽음의 신비를 밝혀내기 위해 또 다시 한 발을 내딛는다. 지금 당장, 우리가 원하는 혹은 진실에 가까운 답을 찾을 수는 없겠지만 답을 찾으려는 노력을 멈출 수는 없다.

 


우주에서 돌아왔더니 곧 용산시대가 열린다고 한다. 교통지옥이라 쓰고 용산시대라 읽는다. 다시 우주로 나가야 하나. 브라이언 그린의 다른 책이 있나 찾아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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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인간, 달리기와 음악의 힘으로
    from 책이 있는 풍경 2022-10-25 21:25 
    오후 3시 51분. 막 『An American Bride in Kabul』 읽기를 마치고 그냥 덮으면 잊어버릴까, A4 한 장 안 되는 분량으로 감상을 썼다. 이제 좀 놀아볼까. 한 시간 전에 너무 졸려서 잠 물리친다고 서가를 거닐다가 가져온 책 『상상하기 어려운 존재에 관한 책』을 펼쳤다. 책을 뽑기 전, 책 등만 보았을 때는, 이 책이 지구 이외의 행성에 사는 외계 존재에 대한 책일거라 추측했다. 그게 이 책을 뽑아 든 이유이기도 했다. 하지만, 목
  2. ‘나는 누구인가’와 ‘나는 무엇인가’의 사이에
    from 책이 있는 풍경 2023-04-17 21:18 
    결국 질문은 ‘나는 누구인가’와 ‘나는 무엇인가’이고, 해답은 그사이 어디쯤 존재할 것이다. 나는 그 해답 사이의 간극에 관심이 있다. <인생 수업>을 읽고 있다. 현대 물리학(현대 물리학 잘 모르는 사람)에서 원자의 발견은 가장 혁신적인 일이었을 것이다. 지구 문명이 모조리 파괴되었을 때, 후세를 위해서 딱 한 마디만 남길 수 있다면 무슨 말을 남기겠냐는 질문에 천재 물리학자 리처드 파인만은 답했다. “모든 것은 원자로 이루어져 있다!” 인
 
 
거리의화가 2022-03-29 09:23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리뷰 잘 읽었습니다. 안 그래도 이 책을 읽어볼까 하던 참이였어요. 물리학자가 넓은 범위를 다루고 있다는 생각이 드네요. 의식과 불멸에 대한 생각도 궁금해집니다. 읽는 행위 자체로 즐거움을 주는 책이라니. 저도 책을 통해 우주로 떠나보고 싶습니다!

단발머리 2022-03-31 09:45   좋아요 2 | URL
모든 걸 이해하려는 게 아니니까 ㅎㅎㅎ 읽는 것 자체가 즐거운 시간이었어요. 저의 우주여행은 만족스러웠습니다.
거리의화가님도 그런 좋은 시간 되시길요^^

얄라알라 2022-03-29 10:05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첫문단에서의 ˝우주로 가다˝ 단발머리님을 걱정하며 읽었는데, 중간 이후에서 대선 이후에도 우주 다녀오셨다는 마음에 그래도 안도했습니다. ˝내가 얼마나 무식한지 발견할 수 있어˝ 기쁘시다고 말씀하시는 단발머리님, 진정한 공부의 재미를 아시는 분! 저는 어제오늘 메타버스 책 보는데 제가 초등생보다 모른다는 걸 알았어요^^:;;;;; 기쁘지 않고 뒤쳐지는 우울한 느낌인데...ㅋ기뻐야겠습니다

단발머리 2022-03-31 09:46   좋아요 1 | URL
아직도 새롭게 발견할 게 많이 남아 있어서 (사실 어마어마하게 많이 남아있지요) 넘 즐거운 시간이었습니다.
발견의 기쁨을 함께 나누어요, 얄라알라님!!!
참, 저도 메타버스는 완전 초대박 무식이라서요, 얄라님 글 읽고 공부하려고요. 헤헤!

책읽는나무 2022-03-29 12:25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가시게 되더라도 너무 오래 머물진 말고, 빨리 돌아오셔요^^

단발머리 2022-03-31 09:47   좋아요 2 | URL
저 방금 지구로 돌아왔다는 소식입니다^^ 책나무님 반가워요!!

책읽는나무 2022-03-31 10:00   좋아요 1 | URL
반갑습니다^^
다녀오시더니 뭔가 새로운 분위기를 가득 안고 돌아오신 듯 합니다. 더 똑똑해져서 돌아오신 듯도 하고???
거기 위치가 어딥니까?
저도 좀 그 기운 받으러, 한 번 다녀오고 싶네요ㅋㅋㅋ

책읽는나무 2022-03-31 10:01   좋아요 1 | URL
모쪼록 몸도 마음도 건강한 단발머리님 계속 유지하시길요♡

단발머리 2022-03-31 10:06   좋아요 2 | URL
반겨주셔서 감사해요, 책나무님!!
제가 다녀온 곳은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브라이언 그린네였습니다. 열역학 제2법칙과 양자역학, 그리고 DNA와 인간의 의식에 대한 논의가 활발한 곳이어서, 전 잠시 지구 관련 문제를 모두 잊어버리고 말았답니다. 내일부터 4월이라 하니 화이팅 하나 더 필요했는데 책나무님 댓글이 제 화이팅이네요!!! 감사합니다^^ from 과학책을 읽으며 마음껏 자유로워진 어느 문과졸업생

라로 2022-03-29 23:53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다 읽으셨군요!! 저는 시작했다가 멈췄어요. 어려워서.^^;;
님의 리뷰 읽고 다시 저도 정신을 모아모아 읽어 봐야겠어요.
브라이언 그린의 초끈이론으로 유명한 책 엘레건트 유니버스 읽으셨나요?
그거 저는 사놓기만;;;
근데 많이들 좋다고 해요,, 저는 다른 책에서 추천해서 사놓긴 했는데... 이 책도 어려울 것 같고요.

단발머리 2022-03-31 09:50   좋아요 1 | URL
저는 이해한다는 생각을 아예 내려놓고 시작해서 그런지 맘 편히 잘 읽었습니다.
브라이언 그린 책 추천 감사해요. 여러권 있던데 어떤게 좋을까 생각중이었거든요^^

psyche 2022-04-06 03:0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요즘 매일 뉴스보기가 두렵네요. 뉴스를 안 보려 하는데 그래도 또 보게 되고 보면 속이 답답하고 열불이 나고. 에고고

단발머리 2022-04-07 14:17   좋아요 0 | URL
저는 아직도 뉴스 끊은 상태에요. 음악 듣고 영화 보고 드라마 보고.... 그러고 있어요. 에휴 ㅠㅠㅠ
 





 












특히 여성은, 크리스테바의 관점에서, 배설물과 월경이라는 두 가지 점 때문에 오염시키는 대상과 관계가 깊다. 이것은 여성으로 하여금 비체와 특별한 관계를 맺도록 한다. (37)

 


월경은 여성에게만 일어나는 일이다. 출산 역시 여성만 가능하다. 하지만 생명체로서 이 세계에 존재할 때, 남성이든 여성이든 인간은 동물로서 존재한다. 먹고 마시고 잠자고 숨 쉬고 땀 흘리고, 그리고 배설하는 존재이다.

 



 












폴 로진은 원초적 혐오의 모든 대상은 동물이거나 동물적 물질이라는 점에 주목했다. (일부 사람들이 혐오스럽다고 느끼는 오크라 같은 끈적끈적한 식물은 예외적이다.) 혐오의 대상은 동물성을 상기시키는 것’, 즉 우리 자신의 동물성과 결국 죽을 수밖에 없는 운명을 상기시키는 것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타인에 대한 연민』, 141)

 


폴 로진의 주장에 따르면, 동물성에 대한 인식, 죽음에 대한 예지가 원초적 혐오를 불러온다. 동물에 불과한 인간이 자신의 동물성을 용인하지 못하는 것이다. 죽음을 예상케 하는 존재에 대해 인간은 혐오감을 느낀다. 자기 자신에 대한 지속적인 혐오를 수용하는 건 어려운 일이다. 그래서, 인간은, 인간 남성은 그런 혐오의 감정을 투사할 집단을 찾게 되었고, 다수이며 대척점에 선 인간으로서 여성을 타자화했다.

 




 












이처럼 형이상학이라는 인식 체제는 여성 혐오를 필연적으로 내포합니다. 여성 혐오는 몸이나 육체성에 대한 혐오, 죽음이라는 유한성을 상기시키는 것에 대한 공포와도 밀접하게 이어져 있기 때문입니다. 형이상학의 이분법적 인식틀은 여성이라는 항에 몸, 감정, 정념, 쾌락, 가변과 사멸의 요소들을 응축해 넣어 여성을 허위이자 믿을 수 없는 것, 동물성, 표피성, 천박함과 미천함, 오염 등으로 열등 가치화합니다. (『지워지지 않는 페미니즘』, 134)

 

 


, 육체성에 대한 혐오가 여성에게 속한 것으로 단정될 때, 여성이 감정적일 뿐만 아니라 동물에 가까운 존재로 폄하될 때, 인간이라는 카테고리에 부족한 종이라는 점이 계속해서 강조될 때, 혐오는 자연스럽게 믿어지고, 거부감 없이 반복된다. 혐오스러운 존재를 미워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한다. 혐오하는 대상을 조롱함으로써 자신이 그와 같지 않음을 확인할 수 있기 때문이다. 거대 산업으로까지 확장 중인 화장실 몰래카메라가 그에 대한 가장 명확한 실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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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22-03-21 08:54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저는 특히 화장실 몰래카메라에 대해서 도대체 그 마음이 뭔지를 모르겠더라고요. 왜 굳이 배설하는 여성을 보려고 하는걸까. 그러다가 누군가 그걸 보는 남자가 쓴 글을 가져온 걸 읽어보게 됐는데요, 여자들도 배설을 한다는 걸 보면서 쟤들도 대단한 거 없다, 이렇게 위안이 된다고요. 굳이 상대가 배설하는 걸 봐야만 그렇게 느껴진다면, 그 안의 열등감은 대체 뭘까요? 어떤 크기로 있는걸까요? 그런데 오늘 단발머리 님의 글을 읽으니 그들 안의 열등감을 또 생각해보게 되네요. 여성이란 신체를 비하하고 혐오하는 것은 본인에게 있지 않은, 본인과 다른 지점에 대한 받아들이지 못함이겠죠.
저는 지금 자궁 부분 읽는데, 상대를 깔아뭉개야만 비로소 자신의 가치가 높아진다는 생각이 정말 징그러워요.

단발머리 2022-03-31 09:58   좋아요 1 | URL
두려움과 호감이 혐오로 바뀌는 과정을 통해 여성 혐오가 견고해진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누구든 자신을 무시하는 사람이 싫을 수 있지만, 여자가 자신을 무시할 때 ‘참을 수 없다‘는 생각이 드는 건 여성 혐오 때문이잖아요. 너가 감히 나를? 그런 심정이요. 여성 신체에 대한 비하, 모욕주기, 혐오가 결국 화장실 몰카로까지 간다고 생각해요. 너(여성)도 별거 아니잖아... 그런 위안이 필요한 사람들이 화장실 몰카를 찾아보겠죠. 험한 세상입니다.

수이 2022-03-21 09:26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왜 그렇게 여성 몸에 대해서 안달복달하는지 모르겠어요. 몸이 다 똑같은 몸인데 왜 굳이;;;;;; 이런 식으로 혐오하고 혐오하고 혐오가 쌓여서 그들이 얻을 게 대체 뭐가 있는지 더 이해할 수 없구요.

단발머리 2022-03-31 09:59   좋아요 0 | URL
동물성을 여성에게만 옭아맴으로써 자신은 그 혐오스러운 육체에서 벗어나고 싶은 거 아닐까요. 결국 자신도 인간이면서 동물인데 말이지요. 이해못 할 일이 너무 많습니다.

바람돌이 2022-03-21 10:29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하나의 지배체제가 만들어지고 공고화되는건 상상할 수 없을 만큼 다양한 방면에서 다양한 방식으로 이루어진다는걸 확인하는 책읽기입니다. 더 끔찍한건 저 영화를 만든 사람들의 대부분이 실제 자신이 여성의 몸을 어떤 방식으로 혐오의 대상으로 만들고 차별의 근거로 만드는지를 인식하지 못하고 만든다는 점이 아닐까 그런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인간의 무의식에 침투한 차별과 배제, 혐오의 힘은 더 무서운거라는 생각이 들어서요.

단발머리 2022-03-31 10:03   좋아요 1 | URL
바람돌이님 의견에 전적으로 동의합니다. 인간, 정확히는 남자들 내면의 두려움과 혐오를 영화 속에서 그런 식으로 표현한건데, 영상을 통해 그것이 재현될 때 오히려 그런 이미지가 ‘강화‘되는 측면도 있으니까요. 한편으로 영상이라는 매체가 리얼한 면을 강조하다 보니 그것의 해악도 만만치 않을 것 같습니다. 인지하지 못한 채 무의식에 새겨지는 배제와 혐오를 어쩌면 좋을까 싶습니다.

미미 2022-03-21 12: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철학에서 남성성의 과도한 ‘초월‘추구가 타자화된 여성성의 ‘혐오‘에 한 몫한것도 같아요. 이리가레 말대로 ‘여성의 몸에 대한 착취‘가 없다면 남성들은 과연 어떻게 될까요?

단발머리 2022-03-31 10:11   좋아요 1 | URL
네, 동의합니다. 남성성의 과도한 초월 추구로 남성은 초인이 되고, 동물성을 부여받은 여성을 ‘인간 이하‘로 결론짓는게 남성들이 말하는 철학이죠. 임신, 출산, 육아, 각종 돌봄 노동, 가사 노동. 여성의 몸에 대한 착취가 없으면 남성은 생존 자체가 불가능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책읽는나무 2022-03-21 15: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이 책을 읽으면서 바람돌이님과 비슷한 생각을 했습니다.
영화를 만든 사람들은 본인들이 그런 사상에 물들어 있다는 걸 인식하지 못하고 그저 그런 것들이 자극적인 요소로만 작용하고 있을 것이란 생각으로 영화를 만든 게 아닐까?싶더군요.

본인들이 깨닫지 못하는 혐오 사상들이 만연해 있다는 것, 그저 생각없이 쾌락으로만 느끼고 즐긴다는 것, 그래서 결국 몰카 같은 범죄로 이어가고 있다는 것이 문제인 것 같습니다.

단발머리 2022-03-31 10:08   좋아요 1 | URL
네 맞아요, 책나무님!! 저는 사실 읽는 게 좀 힘들었거든요. 내용 자체가 너무 자극적이고 폭력적이고 그렇잖아요. 근데 그걸 영상으로 본다면 더 오래갈 거 같아요. 또, 원하든 원하지 않든 나쁜 동기에 의해 그 행동을 모방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도 들고요.

문제의 본질은 우리가 이미 알아챘는데 진짜 큰 문제는 이제는 화장실 몰카가 산업이라는 거라서요. 안타까운 현실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