케이크와 맥주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394
서머싯 몸 지음, 황소연 옮김 / 민음사 / 202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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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명한 작가 에드워드 드리필드가 타계하고, 드리필드가 무명시절부터 알고 지냈던 작가 어셴든은 동료 작가인 엘로이 키어로부터 드리필드의 회고록 집필을 제안받지만 거절한다. 어셴든과 로이는 드리필드의 두번째 아내 에이미로부터 고인의 저택에 초청을 받았고, 로이는 사실 자신이 드리필드의 회고록을 집필하기로 했다며 어셴든에게 드리필드의 무명시절에 대한 정보를 얻으려 한다. 어셴든은 로이에게 드리필드 부부에 대해 해줄 말이 없다고 피하지만, 그들과 함께했던 다소 자랑스럽지 않은 과거를 회상하게 된다.
어셴든은 16살에 블랙스터블이라는 시골 마을에서 드리필드를 만났다. 당시 무명이었던 드리필드 부부는 그 고장 사람들에게 평판이 좋지 않았고, 특히 드리필드의 첫번째 아내 로지는 술집 여급 출신으로 조지 캠프라는 사기꾼같은 유부남과 불륜관계라는 소문까지 파다했으나, 어셴든은 그런 로지에게 순수한 마음이 있어 그들 부부와 어울리기를 좋아했다. 어셴든은 부모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드리필드 부부와 가깝게 지냈으나, 드리필드 부부는 조지 캠프의 도움으로 블랙스터블에서 많은 점포에 외상 값이 밀린 채로 도주해 버린다. 이후 청년이 된 어셴든은 런던에서 의대를 다니며 지내다 우연히 드리필드 부부를 만나고, 어셴든과 로지는 드리필드 몰래 불륜에 빠진다. 드리필드는 런던에서 바턴 트래퍼드 부인의 후원으로 유명한 작가가 되지만, 로지는 블랙스터블에서 사업을 벌이다 파산하고 아내와 자식을 버린 조지 캠프와 함께 또다시 도주해 버린다.
드리필드의 두 번째 부인인 에이미 드리필드는 드리필드의 천박한 첫번째 부인 로지를 드리필드의 과거에서 지우고 싶어하고, 로이를 비롯한 다른 문인들에게 드리필드의 첫번째 부인에 대한 저속한 평가는 한때 연정을 품었던 어셴든을 불편하게 하지만, 그의 로지에 대한 아련한 추억은 다른 기억으로 남아있다.
에이미 드리필드와의 만남에서 에이미는 로지가 조지 캠프와 결혼하고 십년 전 죽었다고 말하지만, 어셴든은 뉴욕에 방문했을 때 건강한 로지를 만났었다. 조지 캠프는 죽은 후였으며, 로지는 드리필드가 죽었을 때 그의 유명세에 놀랐다는 말과 함께, 그의 논란이 됐었던 <생명의 잔>이라는 작품이 그들 사이에 있었던 아이의 실제 죽음을 묘사했던 일이라는 것을 알게된다. 조지 캠프와의 도주 과정과 그가 진정한 신사였다는 말로 소설은 끝난다.

서머싯 몸의 여성에 대한 가부장적이고 편협한 시선은 여전하지만 그의 소설은 확실히 재밌다. 몸의 여성 평가에 대한 논란은 있지만, 이 소설은 그가 노년에 집필한 소설이라 그런지 과거 작품에 비해 편견을 조금 덜어내고 좀 더 유순해진 마음으로 여성을 보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무명 작가가 평단의 주요 인사의 후원을 통해서 주류 작가로 거듭나는 과정은 약간의 조소가 담겨 있어 풍자적이지만, 모두가 폄하하는 여성에 대한 순수했던 자신의 연정을 품고 사는 중년의 신사가 덤덤하게 과거를 회상하는 것이 꽤나 낭만적이기도 했다.
<달과 6펜스>가 고갱을 실제 모델로 지은 소설인 것처럼 이 소설은 토마스 하디를 두고 쓴 소설이다. 실존 인물이라는 것은 알았지만 그 인물이 누구인지는 일부러 찾아보지 않고 완독 후 해설에서 그 인물이 토마스 하디라는 것을 알게됐다. 국내에 유명한 작품이 <테스>뿐이고, 중학생 때 이 소설을 너무 재밌게 읽은 기억이 나는데, 내용은 기억나지 않고, 농장에서 마늘싹을 찾아 다니던 사람들과 결말에 주인공의 비극적인 자살 정도만 어렴풋이 기억난다.

사람이 살아가면서 겪어야 하는 어려움 가운데 하나는 한
때 친밀하게 지냈으나 시간의 경과에 따라 흥미를 잃어버린 사람을 응대하는 것이다. - P23

위선만큼 성취하기 어렵고 진이 빠 지는 악덕도 없다. 위선은 한시도 늦추지 않는 경계심과 영혼 을 초월하는 극기가 필요하다. 불륜이나 폭음과 달리 짬짬이 훈련으로 달성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하루를 온전히 투자해 야 하는 작업이다. 또한 이기적인 마음가짐도 필요하다. - P27

"영향력이 있는 사람들이 모두 자네와 의견을 달리하는데
조금 불편하지 않은가?" - P42

"그렇게 말해도 무리는 아니지. 내가 봐도 독창적이지 않으 니까. 하지만 자네가 왜 나 자신의 판단을 믿느냐고 물으니 자 네에게 설명하려고 한 말일 뿐이야. 수줍음을 무릅쓰고 이 시 대의 교양 있는 의견을 옹호하고자 말하네만, 나는 당시에 존 경을 받을 만하다 여겨졌던 일부 작가들을 그다지 존경하지 않았고, 결국은 내가 옳았음이 밝혀졌지 않은가. 또한 그때 내 가 진심으로, 본능적으로 좋아했던 것들은 세월의 검증을 거쳐 현재 나도 그렇고 일반 평론도 인정하고 있어." - P44

많은 여자들이 로지를 욕하지만 그 여자들도 로지처럼 기회
가 많았다면 별수 없었을 거예요. - P108

대부분의 세상 사람들과 일류 비평가들은 그 의 여성들이 매력적인 영국 여성의 전형으로서 환달하고 정중 하며 숭고한 정신의 소유자라는 데 의견을 같이한다. 또한 그 들은 셰익스피어의 여주인공들과 자주 비교되어 왔다. 그러나 여자들이 곧잘 변비에 걸린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이 없거늘 소설에서 여자들을 항문이 없는 존재처럼 그리는 것은 기사 도 정신의 과잉이라고밖에 안 보인다. 그런데도 여자들은 자기 들을 그런 식으로 그리는 것을 좋아하니 나로서는 놀라울 따 름이다.
평론가는 형편없는 작가에게 세상의 이목을 집중시킬 수 있고 세상은 전혀 가치 없는 자에게 열광할 수 있지만 두 경 우 모두 오래가지는 못한다. 세상의 어떤 작가도 상당한 재능 없이 에드워드 드리필드처럼 오랫동안 대중을 사로잡기란 불 가능하다고 봐야 한다. 선택된 자들은 대중성을 비웃는다. 그 들은 대중성을 평범함의 증거로 치부하는 경향이 있으나 이 는 후대 사람들의 선택이 한 시대의 무명작가들이 아니라 유 명한 작가들 중에서 이루어진다는 점을 간과하는 것이다. 용 후의 명작이 언론의 외면 속에 사장되는 일이 계속되어 왔을 지 몰라도 후대 사람들은 그 존재를 알 길이 없다. - P138

아름다운 것이 마법 같은 감성을 불러일으킬 때 마다 내 마음은 즉시 방황하기 시작한다. 사람들은 어떤 풍광 이나 그림을 몇 시간씩 바라볼 수 있다고 말하지만 나는 그 말이 도무지 믿기지 않는다. 아름다움은 황홀감이고 배고픔 만큼이나 단순하다. 이러쿵저러쿵 떠들 만한 거리가 아닌 것 이다. 장미 향기와 같아서 한번 냄새를 맡으면 그것으로 끝이 다. 이것이 예술 비평이 지루한 이유다. 아름다움과 무관한 즉 예술과 무관한 내용이라면 모르겠지만. 세상의 모든 그림들 중에서 가장 순수한 아름다움을 가졌다고 할 만한 티치아노의 「그리스도의 매장」에 대해 모든 평론가들은 그저 가서 직접 보라고 말하면 된다. 그것 말고 더 할 말이 있다면 역사 나 전기 정도뿐이다. 하지만 사람들은 아름다움에 다른 특성 들- 숭고함, 인간적 관심, 부드러움, 사랑 -을 덧붙인다.아 름다움이 그들을 오래 만족시키지 않기 때문이다. - P141

아름다움은 심미적 본능을 만족시킨다. 하지만 대 체 누가 만족하기를 원하는가? 배부른 것이 진수성찬 못지않 게 좋다는 말은 어리석은 자에게나 해당된다. 아름다움은 지 루하다는 것을 직시해야 한다. - P142

그럴 만도 한 것이 예로부터 노인들은 그들이 젊은이들보다 더 현명하다고 젊은이들을 끊임없이 세뇌했고, 젊은이들은 그것이 허튼소리임을 깨달을 즈음엔 이미 늙은이가 되어 그 기만적 행태에 편승해 이익을 봐 왔다. 또 한 정치인들의 세계에 발을 들여놓은 사람치고 국가를 다스 리는 데 별다른 지능이 요구되지 않는다는 것을 모를 수가 없 다(결과만 봐도 판단이 가능하다.) 하지만 작가들은 왜 나이가 들어 갈수록 존경을 받아야 하는지 나는 오랫동안 의구심을 품어 왔다. 만약 이십 년째 주목할 만한 작품을 쓰지 못하는 노작가라면 경쟁자로서 젊은 작가들에게 아무런 위협이 되지 못하므로 그의 가치를 극찬해도 괜찮다는 점에서 합리적 찬 사라는 생각을 한 적은 있다. 알다시피 두럽지 않은 경쟁자를 칭찬하는 것은 만만찮은 경쟁자를 견제하는 좋은 방법이다.
그러나 이는 인간성을 너무 폄하하는 시각일 수 있고, 싸구려 냉소주의라는 비판을 자초하고 싶은 생각은 없다. 곰곰이 숙 고한 끝에 내린 결론은 이렇다. 평균 나이를 넘긴 노작가가노 년에 보편적으로 칭송받는 진짜 이유는 지식인들이 서른 살 이 넘으면 글을 전혀 읽지 않기 때문이다. 나이가 들수록 젊 었을 때 읽은 책들은 화려한 빛을 발하기 마련이니 그 책을 쓴 저자의 가치는 해마다 높아진다. 물론 계속 글을 쓰고 대 중의 시선 안에 머무는 노작가여야 한다. 걸작을 한두 편 쓴 것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걸작들을 떠반친 받 침대로 변변찮은 작품을 사오십 편쯤 펴내야 한다. 시간이 결 리는 일이다. 매력으로 독자를 사로잡을 수 없다면 무게로 독 자를 압도하겠다는 각오로 대량 생산을 해야 한다. - P144

정직에 대한 빅토리 아 시대적 통념이 박힌 내게 블랙스터블에서 드리필드 부부 가 외상값을 갚지 않고 달아난 사건은 대단한 충격이었다. 아 주 파렴치한 것 같았다. 그들이 느낄 부끄러움을 생각하니 나 도 너무나 부끄러웠다. - P174

하지만 바턴 트래퍼드 씨는 저속한 사람들의 편견을 초월한 사람이었고(이것을 불운 이라 해야 할지 모르겠지만 그는 역사의 위인들이 철학을 통해 인내 했듯 이 불운을 이겨 냈다.) 오리냐크54) 부잇돌과 신석기 시대 도끼날에 대한 연구를 그만두고 그 작고한 소설가의 전기를 쓰기로 동의했다. 작가의 천재성에 그의 아내가 얼마나 지대 한 영향을 끼쳤는지를 분명히 드러내는 전기였다. - P185

우리는 나이가 들수록 인간의 복잡성과 변덕, 부조리를 더 강 하게 의식하게 된다. 이것은 중년이나 노년의 작가들이 더 진 중한 주제로 생각을 돌려야 마땅함에도 가상 인물의 사소한 관심사에 몰두하는 유일한 변명이 되곤 한다. ‘인류에 대한 올 바른 연구는 인간을 연구하는 것‘에이 맞다면 현실의 불합리 하고 모호한 인물보다는 일관되고 견고하며 의미가 있는 가공 인물에 전념하는 것이 더 현명하기 때문이다. 가끔 소설가는 자신을 신처럼 생각하고 작중 인물에 대해 모든 걸 이야기하 려 들 때가 있지만, 반면에 작중 인물에 대한 모든 것이 아니 라 자기가 아는 것만 이야기하기도 한다. 우리는 나이를 먹을 수록 자신이 신이 아니라는 걸 점점 더 의식하기 마련이니 작 가가경험으로 체득한 것 이상은 쓰지 않으려 한다고 해도 놀 랄 일은 아니다. 일인칭 시점은 이 제한된 목적에 한해 대단히 유용하다. - P211

또한 여성적 책략에 남성적 의지가 접목된 여 인이자 선량한 심성에 큰 기회를 알아보는 안목을 갖춘 여인 으로서 현명한 이해심을 발휘했다. - P247

"이렇게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알다시피 그녀는 사랑을 불 러일으키는 여자는 아니었어요. 애정만 끌어냈죠. 그런 여자 를 두고 질투한다는 건 말이 안 되는 거예요. 숲속의 빈터에 있는 맑고 깊은 샘물 같은 여자였어요. 뛰어들면 참으로 황홀 한. 떠돌이, 집시, 사냥터 관리인이 나보다 먼저 뛰어들었다고 해서 그 물이 덜 시원하거나 덜 깨끗할 리가 없잖습니까." - P2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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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기로운 B급 며느리 생활
김진영 지음 / 김영사 / 201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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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가 자식과 남편 을 돌보며 살아오신 인생이 안쓰럽다고 생각하는 것은 무척 오만한 태도라고 생각한다. 어머니의 인생은 그녀의 선택이 다. 그녀가 남들에게 인정받을 사회적 커리어가 없거나 통장 에 쌓아놓을 금전적 이익을 직접 창출하지 못했다고 해서 왜 그녀가 살아온 인생까지 무용한 것으로 쉽게 단정 짓는 것인 가? 정작 자신은 그 보살핌 덕분에 오늘날까지 살아왔으면서 말이다. - P149

‘성평등‘이라는 것은 ‘공기‘와 비슷한 것 같다. 아이들을 책상 머리에 앉혀놓고 ‘남자와 여자는 평등해. 똑같은 사람이잖니. 여자를 무시하면 안 되고, 여자를 때리는 것은 절대 안 된단 다라고 가르치는 것은 행동과 의식에 제약을 줄 수는 있을지 몰라도 평등의 본질을 깨닫게 하지는 못한다. - P1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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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지랄의 기쁨과 슬픔 - 물욕 먼슬리에세이 1
신예희 지음 / 드렁큰에디터 / 202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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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위한 선물‘이란 상투적 표현은 싫지만, 돈지랄은 ‘가난한 내 기분을 돌보는 일‘이 될 때가 있다. - P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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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자의 미학 - 20주년 개정판
승효상 지음 / 느린걸음 / 201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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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레기도 아름답게 포장할 줄 알아야 한다.

침묵의 메타포로 가득 차 있던 그 학생의 작품을 읽으며, 나는 막스피카르트의 말을 기억해냈다.
"살아있는 침묵을 가지지 못한 도시는 몰락을 통해 침묵을 찾는다." - P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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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브 플랜트 트리플 11
윤치규 지음 / 자음과모음 / 202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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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인칭 컷>
직장 내 회식자리에서 희주는 팀장인 최팀장에게 성희롱을 당한다. 그런데 피해자인 희주대신 사내커플이었던 남자가 가해자에게 사과를 받았다. 희주는 사과를 납득할 수 없고, 가해자의 전보를 요구했지만 회사 방침은 피해자에게 원하는 곳으로 인사발령을 내준다는 것이었다. 회사는 성희롱 당시 가해자와 피해자의 남자친구의 몸싸움이 있었으니 문제가 커지지 않길 바라면 남자에게 희주의 반발을 조용히 잠재우라는 압박도 있었다. 멍청한 남자는 회사의 의견이 합리적이라 생각했고, 심지어 희주가 자기와 결혼해 빨리 회사를 그만두기를 내심 바란다. 희주는 회사를 그만두고는 비혼을 선언한다. 남자는 끝까지 희주의 경고를 눈치채지 못한다. 마치 회식자리에서 성희롱일 발생했을 때, 최팀장의 성희롱을 눈치채지 못했던 것처럼. 말레이시아 여행에서 남자는 계속 커플사진 대신 희주를 관찰자 시점으로 촬영한다. 자기중심적으로 희주만 바라보던 남자는 그제서야 자기 앵글 안의 희주의 시점에 대해 궁금해지기 시작한다…

<완벽한 밀 플랜>
타인을 이해하려는 시도는 무모한 짓이다. 투어 가이드가 말한대로, 이해하려는 자는 뿔달린 물고기고 이해받아야 하는 대상은 바다거북이처럼, 이해하려는 자가 이해받아야할 대상을 자기 뿔로 찔러 동반 추락하고 마는 꼴이다. 사실 화자의 방식은 누구를 이해하려는 시도가 아니다. 자신의 기준대로 상대방의 행동양식을 강요하는 행위이다. 호텔에서 뛰어내려 암흑의 바다를 헤엄쳐 가는 현영을 보며, 화자는 현영이 어둠의 바다처럼 아무것도 알 수 없는 존재라는 걸 깨달으려는지 모르겠다.

<러브 플랜트>
이혼 후 꽃집을 차린 현준은 결혼 실패 후 같은 건물 은행에 역시나 이혼 후 독신으로 지내는 이미나 차장에게 호감을 표현하기 두려워한다. 이미나 차장의 부하직원인 김정한 대리는 상대를 고려하지 않는 사적인 질문을 함부로 던지는 사람이다. 현준은 김대리처럼 결혼 전에는 상대에게 쉽게 감정표현을 하는 사람이었지만, 상대만 비난하며 끝난 이혼 소송 후 누군가에게 감정을 표현할 수 있는 권리에 대한 고민이 깊어졌다. 그래서 누군가에게 고백하려고 꽃다발을 사려 하면 말리고 싶은 심정인데, 김정한 대리가 술에 취해 자신에게서 산 꽃다발로 이미나 차장에게 막무가내로 고백하는 모습을 목격하며 자신의 과거를 상기하게 된다. 이미나 차장은 그 사건 이후 본사로 발령나며 소식이 뜸해졌지만, 언젠가 주말에 오픈하기 전 자신의 꽃집을 찾아온 이미나 차장을 기억하며 주말에도 일찍 가게문을 여는 습관이 생겼다. 마치 이미나 차장에게 보이지 않지만 자신의 마음을 어떻게든 표현하려는 듯이.

연애부터 시작해 결혼 후 이혼까지 이어지는 연작소설 같은 구성이다. 연애에 대해 진심인 작가인 듯하고 <일인칭 컷>에서 받은 임팩트가 강해 차기 작품을 찾아보게 될 것 같다.

"너는 꼭 그래본 적 없는 것처럼 말하네." - P25

그곳에는 ‘경험 많은 선원은 바다를 장담하지 않는 다‘라고 적혀 있었다. - P41

다만 유일한 문제는 괜찮다는 대답이 진심으로 좋다는 의미인지, 아니면 아무래도 상 관없다는 것인지 구분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 P55

"그냥 행복한데 불안하고, 그래서 불행하게 느 껴지는 거. 아니면 반대로 불행해서 편안하고, 그래서 행복한 거. 그런 게 쌓이다가 어느 날 목 끝까지 잠겨버 려" - P60

너한테는 디폴트인 게 다른 사람한테는 아닐 수도 있어 - P72

누군가를 좋아한다고 해서 그 상대방에게 자신의 감정을 드러내고 쏟아부을 권리까지 생기는 걸까? 누 군가를 좋아하는 감정은 자신에게는 한없이 아름답지 만 그만큼 또 일방적이라 상대방에게는 어떻게 받아들 여질지 전혀 알 수가 없는데 그렇게 함부로 표현해도 괜찮은 일일까? - P75

그러니까 유 책이라는 말은 누구에게 더 책임이 있다는 의미일 뿐이 고 이혼소송은 피해자와 가해자를 가리는 재판이 아니 었다. - P90

"소송으로 헤어지면 바닥을 본다고 하잖아요. 그러니까 그건 상대방 바닥도 보지만 결국 내 바닥도 보게 되는 거예요. 전 저의 밑바닥을 완전히 봐버린 것 같아요." - P96

예전에는 사랑한다는 말에 반드시 사랑한다는 말로만 대답할 수 있으며 웅당 그래 야 한다는 원칙이 있었다. 하지만 엄밀히 따지면 사랑 한다는 말은 내가 너를 사랑한다는 말의 줄임말로 내가 사랑하는 만큼 나의 방식으로 너를 사랑한다는 의미이 지, 상대방이 원하는 방식으로 원하는 만큼 사랑하겠다 는 뜻은 아니다. 어리석게도 나는 그 의미가 반드시 같 거나 같아야 하는 줄로만 알아서 누군가에게는 사랑한 다는 말을 들으면 아직 그럴 단계가 아닌데 이상하다고 부담감을 느꼈고 누군가에게는 사랑한다는 말을 들으 면 이미 사랑에 충분히 빠졌어야 할 대목인데 너무 부 족하다고 모자람을 느꼈다. 연애라는 게 내가 정해놓은 플롯대로 진행될 수가 없는 것인데 매번 고민할 필요조 차 없는 일로 혼자 괴로워하고 또 상대방을 괴롭혀왔 다. 그리고 그건 사실 누군가를 정말로 사랑했던 게 아 니라 누군가를 사랑하는 내 자신을 사랑했던 것인지도 모른다. - P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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