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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리스와 소크라테스의 사과, 스피노자(?)의 사과나무, 세 모습의 사과' 이야기다. 커플사과, 합격사과, <실낙원>의 사과, 애플사의 로고까지, 『이야기의 힘』 후반부에는 성공적인 스토리텔링으로, "네 개의 사과에 얽힌 스토리텔링"이 예시된다. 서양 고전의 ‘파리스의 사과’,  플라톤 대화편 한 권을 압축한 듯한  ‘소크라테스의 사과’, 마틴 루터(스피노자?)의 사과나무까지 애플이야기 3종모음이다. 장관 청문회장에서 흘러나온 '(나는 (그해 봄에) 당신이 알고 있었다는 것을 알고 있다.' 심오한 한마디가 화제다. 이 한 문장도 다루게 될 것이다.

 

먼저 『이야기의 힘- 매혹적인 스토리텔링의 조건』(이창용 외, 황금물고기)에 실린 '사과에 얽힌 스토리텔링 네 가지'다. 첫 번째가 커플사과(사랑이 이루어지는 커플사과가 있습니다~)다. 발렌타인 데이에 이러한 사과판매가 대박이 난다. 설정이다. 두 번째가 유명한 일본 아오모리 현의 합격사과 이야기, 실화다. 거센 태풍에도 견딘 소수의 사과를, 떨어지지 않는 합격사과라고 수험생 지인들에게 비싼 값에 팔았단다. 세 번째가 '게빈 터크'의 <실낙원>(2006)의 사과다. 작품이다. 먹고 꼭지와 속 줄기만 남은, 말라비틀어진 사과 사진을 영국의 팝 아티스트는 500만 원에 판매한다. 네 번째가 애플사의 사과(로고)다. 컴퓨터의 원형을 개발한 천재 수학자 '엘런 튜링'은 동성애자라는 이유로 여성 호르몬을 투입하는 처벌을 받아야 했다. 그는 괴로움을 이기지 못해 치사량의 청산가리를 주입한 사과를 베어 물고 자살하고 만다. 이에 애플은 '튜링'의 사과를 연상시키는 로고를 만들었다는 것. 상품이다.  

 

"네 개의 사과에 얽힌 스토리텔링", 애플사 로고와 관련해선 의견 분분

그런데, 네 번째 사과와 관련해서는, 애플을 '세팅한' 스티브 잡스(1955~2011)의 고향에 과수원이 있기 때문이라거나,  만유인력의 법칙을 발견한 뉴턴에게서 영감을 얻었다는 설도 있다. 그러나 기왕에 스티브 잡스의 전기에서 근거를 찾으려면, 한 발 더 들어갈 필요가 있다. 한때 스티브 잡스가 수학했다는 미국의 사립대학, 리드칼리지 대학 얘기다. 이 대학은 "인문학과 자연과학의 균형을 중시하며 신입생들은 무조건 그리스 로마의 고전들과 순수 인문학을 필수과목으로 이수해야” 한다. 그럴듯하게 내세우는 교육 방침이 아니다. 실제로 그러한다. 미국의 교양교육, 위대한 고전 읽기 프로그램의 전통은 시카고대학으로 거슬러 올라야 한다(허친스의 시카고플랜Chicago Plan에서 시작되는), 그런데 리드칼리지의 교양교육 또한 특화되어 있는 모양이다. 이 대학에서는 해마다 신입생들에게 입학허가서 우송시 책 두 권을 선물하는데, 호메로스의 『일리아스』와 『오뒷세이아』 세트란다. 스티브 잡스는 비싼 학비를 감당할 수 없어, 6개월 만에 중퇴하고, 이후 18개월을 학적 없이 이 대학에 머물며 듣고 싶은 강의를 청강한다. 널리 알려진 이야기다.

 

스티브 잡스의 리드칼리지의 입학선물은 『일리아스』_오뒷세이아』 세트

스티브 잡스가 애플사의 로고를 확정하는 데에는, 서양 정신의 시원인 고대 그리스의 신화, 곧 '파리스의 사과' 얘기가 그 배경으로 작용하지 않았을까? 밑그림 중 밑그림은 이 사과 이야기가 아니었을까? 파리스(알렉산드로스)는 사과 '덕분에' 아프로디테의 도움으로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인, 헬레네를 트로이아로 데려가지만 ‘때문에’ 조국을 전쟁과 파멸 속으로 끌어들인다. 또한 헤라와 아테네는 (『일리아스』가 끝나는 순간까지) 파리스의 트로이아를 미워한다. 그러나 호메로스는 24권 초반까지 이 신화에 대해 일언반구를 하지 않는다. 헥토르를 죽여 절친(파트로클로스)의 복수를 한 것까지는 신들도 허용한다. 그러나 장례식과 추모 장례경기까지 주관한 아킬레우스가 여전히 분을 삭이지 못해, 헥토르의 시신을 훼손하는 건 용납할 수 없다. 무려 아흐레 동안이나 신들은 대책회의를 하고 있다. 아르고스를 보내 시신을 빼내오자! 다른 신들이 모두 찬성하지만 세 신들은 이를 완강히 거부한다. '헤라'와 '포세이돈'과 '빛나는 눈의 처녀‘(아테나 여신)이다. 셋은 전쟁 중에 일관되게 그리스연합군을 지원한다. 그런데, 서사시가 마무리되는 시점까지도, 두 여신의 노여움은 서슬퍼런데, 왜 그러한지 이때에 이르러서야 두 여신이 파리스에게 가진 해묵은 원한을 언급한다.

 

"그들에게는 신성한 일리오스와 프리아모스와 그의 백성들이
알렉산드로스의 죄 때문에 여전히 처음처럼 미웠으니,
그는 이들 여신들이 그의 농장을 찾아갔을 때 이들을 모욕하고
파멸을 초래할 색욕(色慾)을 그에게 준 여신을 찬양했던 것이다." 『일리아스』 24권, 27~30행

 

애플사의 로고 확정의 밑그림 중 밑그림은 파리스의 사과가..

파리스(알렉산드로스)의 선택, '가장 아름다운 이에게'라고 적힌 그 유명한 사과 이야기다(자세한 소개는 생략). 어쨌든 이 신화(배경)을 전혀 알지 못한 독자들이 있다고 하면, 그는 『일리아스』를 읽는 동안, 신들이 왜 저토록 두 편으로 나뉘어 ‘사생결단’ 인간들의 전쟁에 개입하는지, 무척 궁금할 것이다. 이는 단적인 예일 뿐이고, 최초의 서양문학 작품들은 배경(신화 등) 지식을 알면 알수록 보이는 것이 많고, 더 많이 발견하게 된다. 그런데, 더 큰 고민은 1/n인  일반 독자보다는 그들과 함께 독서토론을 진행하는 이들에게 있다. 대체 어디까지 설명해야 하나, 적절한 거리를 유지하기가 쉽지 않기 때문이다.

 

이제 그리스 고전(?)에서 두 번째의 사과를 만나보자.  ‘소크라테스의 사과’다. 소크라테스 관련 실제 일화가 있는 것 같지는 않다. 출처는 『하버드대 박사가 들려주는 위즈덤 스토리북』(인생을 바꾼 지혜의 터닝포인트, 윌리엄 베너드, 유소영 옮김, 일빛 2008)이다. 하버드대학 교육학 박사인 저자는 라이트 형제, 데일 카네기, 에이브러햄 링컨, 월트 디즈니, 마이클 델 등의 성공실화를 엄선하여 '목표-자신감-성공-사색-발상-용기-감동-성찰-노력-기회'라는 10개의 지혜 도구들로 정리하였다. ‘소크라테스의 사과’는 4장. <사색>편에 등장한다. 일종의 스토리텔링이다.

 

* 생이란 무엇입니까?, 어느 날 몇몇 제자들이 소크라테스에게 물었다. 소크라테스는 그들을 사과나무 숲으로 데리고 갔다. 때마침 사과가 무르익는 계절이라, 달콤한 과육 향기가 코를 찔렀다. 소크라테스는 그들에게 숲 이편에서 저편 끝까지 걸어가며, 저마다 가장 마음에 드는 사과를 하나씩 따오게 했다. 다만, '다시 되돌아갈 수 없으며, 선택은 한 번뿐'이라는 조건을 붙였다. *그들은 사과나무 숲을 걸어가면서 유심히 관찰한 끝에 가장 크고 좋다고 생각되는 열매를 하나씩 골랐다. 제자들이 모두 사과나무 숲의 끝에 도착했다.  *미리와서 그들을 기다리던 소크라테스가 웃으며 학생들에게 말했다. "모두 제일 좋은 열매를 골랐겠지?" 그러나 제자들은 서로의 것을 비교할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소크라테스가 다시 물었다. "왜? 자기가 고른 사과가 만족스럽지 못한가?"  *"선생님, 다시 한 번만 고르게 해주세요." 제자 하나가 이렇게 부탁했다. "숲에 막 들어섰을 때 정말 크고 좋은 걸 봤거든요. 그런데 더 크고 좋은 걸 찾으려고 따지 않았어요. 사과나무 숲 끝까지 왔을 때야 제가 처음 본 사과가 가장 크고 좋다는 것을 알았어요.” 다른 제자가 급히 말을 이었다. "전 그와 반대예요. 숲에 들어가 조금 걷다가, 제일 크고 좋다고 생각되는 사과를 골랐는데요. 나중에 보니까 더 좋은 게 있었어요. 저도 후회스러워요." "선생님, 한 번만 기회를 더 주세요." 이구동성, 다른 제자들도 약속이나 한 듯 이렇게 말했다. * 껄껄 웃던 소크라테스, 단호하게 고개를 내저으며 진지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게 바로 인생이다. 인생은 언제나 단 한 번의 선택을 해야 하거든.”

 

“인생은 언제나 단 한 번의 선택을 해야”, 소크라테스의 사과.

꾸준히 메일링서비스를 하는 분의 메일에서 문득 보았던 듯한데(견디고 있다), 본래 텍스트가 손을 탄 것 같다, 필자가 좀 다듬었다(머잖아, 원본과 대조하여 수정해놓을 예정). 짧은 이야기에는 심오한 세계가 깃들어 있다. 겉으로는 인생에서의 ‘선택’ 문제인 듯하지만. 앎의 문제를 제기한다. 곧 우리가 안다고 생각하는 것이 정말 아는 것인가? 제대로 아는 것인가? 이 주제와 관련된 플라톤의 대화편이 『테아이테토스』이다. 이 대화편은 끝 무렵에 "나는 지금 멜레토스가 제출한 고발장에 답변하기 위해 왕의 주랑으로 가야 하네."(210d)라고 한다. 소크라테스는 ‘‘지식에 관한' 이 대화가 끝나자마자 서둘러 재판정(아테나이의 아고라에 있던 주랑)으로 가고 있다(재판 당일은 아니다). 그런데, 곧이어 소크라테스는 다음 날 이 대화편의 대담자 중 한 사람 테오도로스와 만나자고 약속하는데, 또 다른 대화편 『소피스트』의 대화가 예약된다. 그리고 그 다음다음날 이어지는 대화편이 『정치가』다. 최소한 소크라테스는 스스로 변론하러 재판정에 서는 날에 임박하여, (부랴부랴) 세 편의 대화를 진행한 것으로 보인다. 플라톤이 해당 대화편을 언제 썼느냐와 상관없이 '변론'을 전후의 주요 대화편들의 순서(대화 順)를 정하면 다음과 같다.

 

'『테아이테토스』'―『소피스트』―『정치가』―[『소크라테스의 변론』]―『크리톤』―『파이돈』

 

특히, 재판이 하루하루 다가오는데 세 편의 대화편(대화)을 진행한 것으로 되어 있다. 이는 플라톤의 치밀한 구성이고 스승 사후의 기획이다. 이 충실한 제자의 아테나이 법정에 대한 원한이 깊다. 헤라와 아테네, 두 여신 못지않다. 이처럼 그는 ‘소크라테스의 변론’을 대화편들로 보완하는데, 거의 확인사살이다. 소크라테스의 혐의는 '젊은이들을 타락시키고(1)', '나라의 신들을 믿지 않았다(2)는 것'. 소피스트 혐의(1)를 반박하는 주 대화편은 『소피스트』(비판)이며, 『정치가』는 ‘소피스트’들과 결이 다른 다른 부류를 정의하는 ‘대안’이다. 크게 같은 맥락이다. ‘변론’ 이후의 대화편들도 그 중심에 ‘변론’이 있다. 또한 『테아이테토스』는 ‘나라의 신들을 믿지 않았다(2)’는 혐의의 반박과 연결된다. 소크라테스는 자신은 '알지 못한다는 사실만을 겨우 아는' 사람일 뿐이라며 '무지(無知)의 지(知)'를 주장하는데, 이 주장을 하는 동안 신탁이 언급되며 그것이 도리어 불리한 변론으로 연결된다. 나는 내가 '알고 있는 것을 알고 있다.' 내가 알고 있는 것은 내가 알지 못한다는 그 사실이다. 이들 대화편이야말로,  ‘변론’의 변론인 것이다.

 

'무지의 지'와 『테아이테토스』, 소피스트 혐의를 반박하는 『소피스트』

물론 앞서 소개한 일화를 액면 그대로 인생에서의 선택 문제로 볼 수 있다. 여러 제자들의 그것은 파리스의 선택과 다르지 않다. 여신들은 파리스를 매수하기 위해 선물을 약속한다. 헤라는 강력한 권력을, 아테네는 전쟁의 승리를, 아프로디테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성을 제시했다. 파리스는 아프로디테에게 사과를 넘겨준다. 덕분에 그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인을 얻는데, 헬레네는 이미 스파르테의 왕비였고, 그녀를 데려오는 바람에 전쟁하게 된 것이다. 강대진은 『일리아스, 영웅들의 전장에서 싹튼 운명의 서사시』, 그린비, 2010년)에서, 파리스의 판정의 의미는 알레고리적인 해석이 우세하다며 언급한다.

"세 여신의 선물은, 인생의 목표가 될 만한 세 가지를 상징한다는 것" "나른한 건달이 벌거벗은 여자 셋을 놓고 누가 가장 예쁜지 판정을 내리는 것이 아니라, 인생의 위기에 세 가지 여성적인 원리 가운데 하나를 선택해야 하는 인간의 모습을 보여 주는 게 된다."(562면)라고. 선택은 늘 '일회적'이고 '결정적'이며, 따라서 '두려운' 것이다. “소크라테스의 사과”는 이처럼 중의적이며, 파리스의 사과와 연결된다.

 

‘일회적' '결정적' '두려운' 선택, '소크라테스의 사과'는 곧 '파리스의 사과'

"내일 지구가 멸망하더라도 나는 오늘 한 그루의 사과나무를 심겠다.“ 스피노자 하면 바로 떠오르는 명언이다. 하지만 스피노자는 이런 말을 한 일이 없단다. 몇 년 전 뉴스에도 소개되고 칼럼들에서도 인용하는 이야기다. 문득 ‘주사위는 이미 던져졌다’라는 말이 떠오른다. 기원전 49년 1월, 루비콘 강을 건너면서 로마의 카이사르(기원전 100∼44년)가 남겼다는 이 유명한 말, 그러나 “주사위는 이미 던져졌다”는 말의 저작권은 그리스 신희극 작가 메난드로스에게 있다. 인터넷의 기록을 살피니(출처 아래), 사과나무와 관련된 이야기를 잘 정리해 놓았다. 1966년 7월, <경향신문> ‘여적’(단평란)에 '최초로' 스피노자의 사과나무 전설이 실렸단다. "모름지기 값싼 상혼(商魂)에만 사는 사람들, “내일 세계가 무너지는 한이 있더라도 오늘 한 그루의 사과나무를 심어야겠다”고 한 스피노자의 밀을 일생 동안 한번쯤은 되씹어보라." 사과나무만이 아니라 전국의 숲에 나무심기가 절실하던 시절이다. 그리고 5년후인 1971년, <중앙일보> 사설에서 이 문장을 다시 소개함으로써, 오로지 한국인의 기억 속에만 스피노자의 명언으로 자리 잡게 된 것. 그런데, 과연 <경향신문>이 처음일까?  의문이 남는다. 어쨌든 외국에서 이 격언은 16세기 독일의 종교개혁자 마틴 루터가 남긴 것으로 통한다(구글 검색창에 'martin luther'를 치면 자동검색어로 'apple tree quote'가 따라붙는다. 역으로 구글에서 ‘Spinoza’와 ‘apple’을 입력하고 검색하면 이 문장은 말할 것도 없고, 비슷한 표현도 걸리지 않는다) 『이솝우화』의 「여우와 덜 익은 포도송이」(‘여우와 신 포도’가 아니다. 천병희가 밝힌) 얘기도 그렇고, 연식이 좀 있는 어르신들을 위한 기존 지식을 바로잡을 교과서 한 권쯤 국가 차원에서 만들어야 하는 것은 아닌가! 가짜뉴스도 막지 못하는 지금, 무모한 희망일까?

 

상식의 오류를 바로잡는 어르신들을 위한 교과서 한 권쯤 국가 차원에서..
어쨌든 세 번째의 사과는 좀 싱겁게 되어버렸다. 대신 귀에 어른거리는 오래된 가요 하나가 있다. “종로에는 사과나무를 심어보자. …을지로에는 감나무를 심어보자. …우리의 서울. 거리마다 푸른 꿈이 넘쳐흐르는 아름다운 서울을 사랑하리라.” 가수 이용의 <서울>이란 곡. 1982년 앨범 『잊혀진 계절』에 수록되었다. 그것이 착오이든 어쨌든 이 노래를 들으면서, 스피노자의 사과를 떠올렸던 기억이 있다. “아무런 일도 없었다는 듯이” 5.18광주민중항쟁은 쉬쉬하기 바빴고, 컬러TV가 보급되었으며, 프로야구가 생겼고 <국풍81>인가 난데없는 요란한 축제를 대대적으로 개최하기도 했다. 왜? 그리고 마침내 전남 도청이 제대로 복원된다는 뉴스를 어젯밤에 접했다. 스피노자의 사과나무로 와전된 기록이, 신문의 기록으로 1966년, 1971년에 소개되었고, 그것이 이러한 관념으로, 대중가요로 연결도;었다면 좀 놀랍지 않은가? 스피노자의 사과나무와 종로의 사과나무라~ 많은 시민들의 기억에서 스피노자의 사과나무 이야기를 바로잡을 수 있을까?

 

*위 인터넷의 기록_ "스피노자의 사과나무가 아니라는 것만은 분명하다는 것이 요지"
https://steemit.com/kr/@fielddog/3v6dz#@matildah/re-fielddog-3v6dz-20180217t132539064z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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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이란 말은 못해도…….  그것이 무엇일까? 사랑한다는 것은……. <뤼시스>와 <이온>과 <테아이테토스>, 플라톤의 대화편 셋을 에피소드 중심으로 엮어 보았다. 굳이 핵심어를 하나 제시하라면 '잡은 물고기'다. 이것을 어찌 받아들여야 할 것인가? 플라톤의 초기 대화편 셋이 묶여 한 권의 책이 되었다. 『뤼시스/라케스/카르미데스-초기 대화편들』이다. 셋은 초기·중기·후기로 나뉘는 플라톤 대화편들 중 '초기'에 해당한다. 또한 인간이 갖춰야 할 탁월하고 훌륭한 자질, 곧 미덕(arete)들을 다루는데, 복잡하지 않게 설정한 주제에 집중하고 있다. <뤼시스>는 우정을, <라케스>는 용기를, <카르미데스>는 절제가 무엇인지 탐구한다.

 

'잡은 물고기'란 말이 떠오르면 그 사랑은 끝난 것
"생각보다 플라톤의 초기 대화편들은 어렵지 않다." 대체적인 평가다. 그러나 중기와 후기의 대화편들에 비교하여 '상대적'으로 그렇다는 얘기지, 이들 대화편 어느 것도 대화의 흐름을 따라가면서 논지를 파악하기란 녹록치 않다. 그것이 플라톤 대화편들을 읽는 재미이기도 하지만, 하나도 빼놓지 않겠다고 작심하고 읽노라면 내가 왜 이러고 있는 것일까, 회의감에 빠지곤 한다. 주석을 빠짐없이 읽어도(그러면 그럴수록) 여전히 이해되지 않는 부분은 남아 있다. 기본적으로 플라톤은 어렵고, 그의 문장은 난해(난삽 難澁)하기에 겪는 문제이다. 그렇게 열심히 '학구열'을 불태운 독서를 했음에도, 다시 집어 들면 처음 접하는 것처럼 텍스트는 늘 낯설게 다가온다. 시 삼백편이 사무사다.
쉽지는 않겠지만, 철학 전공자들의 이해와는 다른 사변적인 얘기를 하려 한다. 세 대화편 중 <뤼시스>에 관해 그것도 '모든'이 아니라, '어떤' 이야기를 하려 한다. 거의 대부분의 대화편들이 본 대담을 전후하여 그 대화를 진행하게 된 배경을 제시한다. 일종의 '설정'이다. 이는 토론주제와 연관되어 있으며, 때론 억지스러운 점이 드러나지만 소크라테스라는 인간을 읽을 수 있는 소중한 기록들이기도 하다. 이러한 설정이며 등장인물(대담자들)의 선정에 이르기까지 '구성'을 살피면, 그리스 비극(장르)처럼 하나의 극적인 상황이 부여되었을 뿐만 아니라, 대화편 자체가 시민 교육을 위한 또 하나의 매체임을 알 수 있다. 너무 어렵지 않게 적절한 주제의 대화편을 고르고, 이를 각색하면 한 편의 훌륭한 연극으로 무대에 올리는 일이 어렵지 않아 보인다.

 

대화편 자체가 시민교육을 위한 또 하나의 매체

특히, <뤼시스>의 주제는 우정(友情: philia 필리아)이지만, 이 단어(개념)는 사람과 사람 사이, 곧 관계에서 대단히 포괄적인 의미로 사용되고 있다(오래 전에 살핀 바 있다). 다만 천병희는 <뤼시스>에서 'philia'(필리아)를 우애(友愛)로, 'philos'(필로스)를 ‘친구로’옮긴다. 그리스어 '필리아'는 '우정(友情)', '우애(友愛), '친애(親愛)’ 나아가 연인 사이의 '사랑'의 의미까지도 모두 가지고 있다. 플라톤 이후, 아리스토텔레스의 윤리학(니코마코스 윤리학)에 'philia'는 전가의 보도라고 할 만큼 저술 전체에서 핵심개념으로 사용된다. 해서, 번역가에 따라 해당 우리말을 선택해야 하지만, 고민이 깊어, 천병희는 '우애'를, 강상진·김재홍·이창우(『니코마코스 윤리학』)는 '친애'를 채택했다.

 

 

정리하면, <뤼시스>는 우정에 대해 토론하고 있지만, 연인 사이의 사랑의 문제도 포괄하고 있다고 할 수 있는 것. 유명한 대화편 『향연』처럼 사랑 그 자체에 스포트라이트를 비추지는 않지만, 분화되기 이전의 'philia(필리아)'를 다루고 있기에, 여러 관계에 대한 이야기로 확대해석해도 무방하게 되는 것이다. 다만 여기에서 연상의 ‘연인’(사랑하는 사람)이 연하의 ‘연동’(사랑받는 사람)을 사랑하고, 그 마음을 얻고자 하는 남성들 간의 동성애(오늘날의 개념과는 사뭇 다른_쉽지 않은 언급이다)가 곧 '사랑'으로 등식화되어 있다. 이 점에 대해서 그냥 남녀 사이의 사랑이라고 여기고 받아들여도 좋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소크라테스는 <뤼시스>에서 훌륭한 연애상담자로 '자리매김'한다. 주제가 이러하다보니 소크라테스를 제외한 등장인물들(대담자)의 관계가 심상치 않다.

 

philia(필리아)는 우정이면서 사랑, 분화 이전의 관계 언어
힙포탈레스는 10대 후반의 부잣집 아들이고 크테십포스는 그와 또래인데, 둘은 동성애에 관심이 많다. 이들이 동성애와 관련하여 (좀 이른 나이인 듯하나) '연인'의 입장이라면, '연동' 쯤에 해당하는 두 인물이 더 등장한다. 13세쯤 된 메넥세노스와 또래인 뤼시스다. 힙포탈레스는 뤼시스를 열렬히 사랑하는 연인인데, 뤼시스는 크테십포스의 사촌이기도 하다. 둘이 사촌간이어서인지는 알 수 없으나, 크테십포스는 그 자신 동성애에 관심이 있으면서도 뤼시스를 향한 힙포탈레스의 태도에는 비판적이다. 대화편 도입부에서 또래인 두 사람, 힙포탈레스와 크테십포스의 미묘한 '갈등'이 흥미로우며, 사랑에 빠진다는 것은 무엇인지 그 상태를 엿볼 수 있어, 새롭다.
소크라테스는 연애상담 전문가답게 힙포탈레스가 "사랑하고 있을뿐더러 사랑에 푹 빠져 있다는 것"을 알아본다. 하지만 그는 더욱더 얼굴을 붉힐 뿐, 수줍어서 나서지를 못한다. 크테십포스가 이런 친구를 마구 나무라는데, 하루 한 순간도 멈추지 않고 뤼시스를 향한 사랑타령을 하는(힙포탈레스를) 것을 지켜보기 민망할 지경이라면서 구체적인 사례를 든다(이 친구 아직 사랑을 모르는 것 같다).

"아무튼 우리는 그가 뤼시스라는 이름을 귀에다 쏟아붓는 바람에 귀머거리가 되다시피 했어요. 그리고 그가 술이라도 마시면 우리는 이튿날 아침에 깨어서도 여전히 뤼시스라는 이름을 듣고 있는 것 같은 착각에 빠진다니까요."(뤼시스: 204d)

구구절절, 예를 들지 않더라도 사랑에 빠진 이의 상태가 어떠한가, 이처럼 적절한 묘사가 또 있을까? 그 대상에게는 직접 나설 용기가 없고, 그러니, 그 표현할 길 없는 마음을 곁의 친구에게 끊임없이 쏟아내는 것인데……. 자신이 사랑에 빠졌음을 알리고 공감을 얻고자 하는 '과시욕'에서 자유롭지 못한 것이다. '맞아 맞아'' 그래 그래'라고 '좋아요!' 하나 꾹 눌러주면 될 것을. 여기까지는 '그렇고 그런'이라고 치자. 문제는 다음이다. 대화보다도 더 끔찍한 상황은 따로 있단다.

"(대화는) 그가 시와 산문을 지어 우리에게 쏟아부을 때 비하면 약과예요. 그러나 최악은 그가 괴상한 목소리로 사랑하는 소년을 칭송하고, 우리는 그런 노래를 들어야 할 때지요. 그런 그가 지금 선생님께서 그 이름을 묻자 얼굴을 붉히는데요."(뤼시스: 204d) 

 

사랑을 하면은 예뻐져요, 덤으로 누구나 시인이 된다. 

구체적으로 누구냐 등등(사랑에 빠진 사람들 주위에서 이런 걸 좀 물어줘야 한다), 구체적인 답변을 요구받는 힙포탈레스. 다른 것은 다 인정하면서도 "연동에 관해 시를 짓고 산문을 쓴다는 것은 부인"한다. 사랑하는 사람에게 사랑하는 그 마음을 드러내거나 전하기 위해 글을 쓰는 일. 돌아보면 유치찬란한 것일지 몰라도, 그것이 작가의 글쓰기에 시작이었다는, 유명작가들의 인터뷰나 자전적인 기록에서 가끔 보곤 한다. 크테십포스는 여기서 물러서지 않고 고자질을 한다. 힙포탈레스는 "노파들이 읊어대는 이런 이야기와 그 밖에 그와 비슷한 수많은 이야기를 시나 산문으로 지어서는 우리더러 들으라고 강요해요."라고.
이쯤에서 소크라테스는 이것은 연동을 얻기 위한 나름대로의 노력인데, 그러한 연시나 연서가 궁극적으로는 '자신을 위한' 곧 "자네의 노래들은 자네를 칭송하는 승리의 송가"가 될 것이라며, 훌륭한 조언을 한다.

"연애 전문가는 연동을 손아귀에 넣기 전에는 연동을 찬양하지 않는다네, 장차 일이 어떻게 될지 염려되니까. 또한 잘생긴 소년들은 누가 칭찬하고 추어주면 자만심에 차서 점점 도도해진다네. 자네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가?"

밀당 얘기다. 그리고 소크라테스는 사냥꾼이 사냥감을 놀라게 하여 잡기 더 어렵게 한다면  "그는 형편없는 사냥꾼"이란 대답을 받아낸다. <뤼시스>의 다음 이야기는 직접 확인하시라.

 

사냥꾼은 사냥감을 놀라게 하지 않아, 사랑의 기술
이제 플라톤의 대화편 <이온>이다. <이온>은 『이온/크라튈로스』(천병희, 숲, 2014년 10월)에서 처음 (원전)번역이 되었고, 근래에 『고르기아스/메넥세노스/이온』(박종현, 서광사,2018년 12월)이 출간되었다. 가장 짧은 대화편이지만 던지는 메시지는 만만치 않다. 이른바 창작에 관련하여 ‘영감론(靈感論)’이 처음 등장한다. 시인은 신들린 상태에서(영감을 받아) 작시(作詩)하는 만큼 자신의 행위에 대해 정확히 알지 못한 채 그리 한다는 것이다. <이온>에서 소크라테스는 서사시를 음송하는 직업을 가진 이온을 만나, 전달자인 당신만이 아니라 그 훌륭한 서사시를 지은 사람(호메로스)조차도 제정신이 아닌 상태에서 어떤 (신적인) 도움을 받아 굿판의 무당처럼 뭔가에 씐 상태에서 작품을 쓴다는 것이다. 국내 가요사만 봐도, 늘 새롭고 보다 훌륭한 곡을 쓰기 위해 대마초와 마약 등을 창작의 방편으로 복용했다가 고생한 뮤지션들이 한둘이 아니다. 그리고 정말 훌륭한 작품은 '영감론'에 의지하지 않고는 설명하기 힘들다. 앞서 <뤼시스>에서 살핀 사랑에 빠진 사람이 그 사랑을 표현하기 위해 (그 사랑을 얻기 위한 도구로) 광적으로 몰두하는 글쓰기의 경지가 있지 않나, 그렇게 <뤼시스>와 <이온>은 연결된다.

 

뭔가에 씐 상태에서 작품을 쓰는 시인, 사랑하는 이도

이제 플라톤의 다른 대화편, 어렵기로 악명 높은 <테아이테토스>로 가자. 『테아이테토스』(정준영, 이제이북스, 2013년 11월)가 첫 원전번역이고, 그 다음이 번역가 천병희가 작업한 '플라톤의 다섯 대화편'에 수록된 <테아이테토스>다. [『플라톤의 다섯 대화편-테아이테토스/필레보스/티마이오스/크리티아스/파르메니데스』(천병희, 숲, 2016년 5월)] 그리고 천병희는 『테아이테토스』(숲, 2017년 6월)만 독립시켜 반양장으로 펴냈다. 이 대화편은 한마디로 ‘무지의 지’를 깊이 살피는데, 궁극으로는 『소크라테스의 변론』의 주요 논지 가운데 하나를 변론하다. 난해하기 이를 데 없는 대화편이지만, 읽는 이가 천재가 아닌 한, 그때그때 흥미로운 에피소드들만이라도 기억하는 것이 필요하다. 유명한 새장 속의 새 비유가 그렇다. 새(비둘기) 사냥에는 두 가지가 있단다.

 

"하나는 소유하기 전에 소유하기 위해서 하는 사냥이고, 다른 하나는 소유한 뒤에 이미 소유한 것을 붙잡아서 손안에 갖기 위해서 하는 사냥" -<테아이테토스> 199d, 천병희, 위 반양장)

 

여기서 새(비둘기)는 '지식'의 은유(비유)다. 한 차례 습득한 지식이 기억의 저장고(새장)에 머문다고 하여 그것은을 '안다'고, 곧 내 것이라고 할 수 있겠는가? 그런 반문이다. 그렇거늘 맘에 드는 책을 구입해서 내 서가에 꽂아놓았다고 그것이 나의 지식이라고 할 수 있는가? 그것을 읽고 뭔가를 얻어낼 때 비로소 그것은 나의 지식이 된다. "소유한 것을 붙잡아서 손안에 갖기 위해서 하는 사냥"이 곧 독서다. '책은 곧 지식'이라는 등식에 의거, 비약해서 설명해본 것이다.

 

소유한 것을 붙잡아 손안에 갖기 위해서 하는 사냥 혹은 사랑
연애상담 전문가 소크라테스가 연인에게 연동의 마음을 얻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한 수 설파한 바 있다. 사랑하는 사람을 그토록 뭔가에 씐 것처럼 열정에 들뜨고, 훌륭한 작가를 만들어놓기도 하는 사랑, 그러나 그 열정이 식었을 때는 어떻게 되는가? 그것이 사랑이었음을 나중에야 깨닫게 되지 않던가? 결혼은 과연 시작인가? 얼기설기 바느질한 느낌이 있지만, 플라톤의 ‘대화편들’을 너무 대단한 목표를 가지고 읽기보다는 우선 친해졌으면(philia) 하는 마음에서 '소프트' 한(정말 그런가?) 글 하나를 정리해보았다. '잡은 물고기'라는 말이 있다. 이 말을 사용하는 쪽이나 받아들이는 쪽이나, 둘 다 문제가 있다. 사랑에서 '잡은 물고기'라는 비유가 등장할 때, 그 사랑은 이미 회복 불가능 상태에 이르러 있는 것이다. 사랑을 얻기까지도 '툴'이 필요하지만, 그 사랑을 '관리하는'데에 필요한 사랑의 기술이 있고, 그제야 사랑은 비로소 시작되는 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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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호랑이 2019-03-28 17:3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timeroad 님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플라톤의 작품을 읽었을 때 미처 깨닫지 못했던 부분을 배워갑니다. 감사합니다.^^:)

timeroad 2019-03-28 19:16   좋아요 1 | URL
감사합니다. 늘 안개가 걷히지 않은 산길을 걷는 기분이라서, 좀 쉽게 몇 가지 이야기만 하고 싶어서요.

ransky 2019-05-11 16:5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소크라테스는 연애상담 전문가라니!
진작 상담을 받을껄!

timeroad 2019-05-12 00:39   좋아요 0 | URL
분화 이전의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를 얘기한 듯, 어쨌든 요즘 얘기하는 사랑 포함이라. 책 한 권 분량으로 넘치는 얘기네요.
 
일리아스 원전으로 읽는 순수고전세계
호메로스 지음, 천병희 옮김 / 도서출판 숲 / 201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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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일리아스다. 『일리아스』에서 발견하는 숫자 이야기를 하다, 열두 척의 배 이야기를 시작했고, 문득 정유재란 당시 충무공에게 주어진 미션을 단편소설 분량으로 헉헉 '구성'했다. 『일리아스』를 읽다보면 대체로 2권 함선목록 부분에서 위대한 고전읽기의 희망찬 항해의 닻을 내린다지만 그래도 인내하며 읽는 동안 보이는 것이 있다. 그런 이야기다. 그런 이야기 중 하나다. 『일리아스』에는 열두 척 함선과 관련된 세 인물(혹은 영웅)이 등장한다. 오뒷세우스가 그렇다. 그 다음은 아이아스다. 세 번째 인물은 누구일까? 아직은 말하지 않겠다. 호메로스가, 장렬히 전사하는 순간에야, 그는 이런 사람이었다고 연민을 자극하지만 (살아)있을 때 좀 잘해주시지, 그런 생각이 들 때가 한두 번이 아니다. 그런 의미에서 호메로스는 인류 최초의 부고(부음)전문 기자가 아닌가 싶을 때가 있다.

 

[01]어떤 아이아스요?

하는 질문을 자주 접하다 보니 ‘큰’ 아이아스가 된 사람이 있다. 덩치의 크고 작음으로 구분한 것 같은데, 실제로 공적에서도 그러니까(영웅들의 서열에서도) 앞서는 큰 아이아스는 큰 아이아스이다. 그는 열두 척의 함선을 몰고 원정에   참여한 사람이다. 텔라몬의 아들 아이아스, 그만큼 크지 않은 그보다 훨씬 작은 아이아스는, ‘오일레우스의 아들’인데, 서사시는 '오일레우스의 날랜 아들' 작은 아이아스라고 하여 구분한다. 몸집이 작으면 좀 날랜 것 아닌가? 어쨌든 '큰 아이아스'는 살라미스 섬의 지휘관인데('왕'이라는 의미 포함), 살라미스는 영화 <300>2의 배경인 바로 그 섬이다. 페르시아 전쟁 당시에도 아테나이의 부인들과 노약자들을 피란시킨 섬, 그것을 교두보로 삼아 해전은 승리한다.

'교두보'는 은유다. 펠로폰네소스전쟁 이전부터 이후에도, 양대 세력 사이 긴장감이 안개로 상주하는 섬이 살라미스다. 그런데, 함선목록은 아킬레우스 다음으로 가장 잘 싸우는 용장을 단 두 줄로 소개한다.

 

"아이아스는 살라미스에서 열두 척의 함선들을 이끌고 와서
아테나이인들의 대열이 서 있는 곳에 세웠다." -2권, 557~558행.
 
참전하면서 동원한 함선 수는 곧 전사들의 수, 병력의 규모이기도 하다. 때문에 함선 몇 척이라고 할 때의 숫자는 전사들의 숫자이기도 하기에, 더는 설명하지 않아도 될 것 같다. 호메로스의 '공정의 선지자'라고 할 정도로 한정된 텍스트 안에서, 숱한 인물들을 다루면서 '공정'과 '균형'을 유지하기에, 아이아스가 '일당백'을 하는 영웅이기에 이렇게 인색구나, 생각하면 될 것이다. 하긴 배만 많다고 무엇을 하겠나, 아테나이와 코린토스지협의 메가라 사이, 코딱지만 한 섬에 인구(전사)가 얼마나 된다고, 생각한다. '전투파업'으로 『일리아스』의 전체 분량에 비해 영웅 아킬레우스의 등장 분은 그리 많지 않다. 해서 디오메데스가 용장으로 활약이 돋보이는데, 이 친구는 시인의 설정으로, 아킬레우스 부재 시(時,) '용장' 아킬레우스의 대역 역할을 한다. 일종의 카게무샤(かげむしゃ ‘影武者’ 그림자무사)다. 하지만, 큰 아이아스는 실세로서 용장 No2다.

 

[02]어떤 아이의 아버지요?
또 한 사람 섬 출신 영웅이 있다. 이타케 섬의 오뒷세우스다. 우선 2권 함선목록에서의 언급을 살피자. 그도 그 유명한 열두 척을 배를 몰고 참전했다.

 

"지혜가 제우스 못지않은 오뒷세우스가 지휘했는데,
그와 함께 이물에 주홍색을 칠한 함선 열두 척이 따라왔다." -2권 636-637행.

 

그가 동원한 함선 또한 열두 척이지만. 이 지휘관을 소개하는 분량은 적지 않을 뿐 아니라 우호적이라 큰 아이아스와 구분된다. 『일리아스』 텍스트(작품 그 자체)에만 집중하자. 오뒷세우스의 지혜가 '제우스 못지않은'가에 대해 다들 의심한다. 그가 이 서사시의 시인 호메로스의 『오뒷세이아』의 주인공이기 때문이다. 임기응변, 언변에 능한 '소통의 전도사'였을지 모르지만 적어도 『오뒷세이아』의 오뒷세우스는 본래 의미의 '지혜'와는 약간 거리가 있다. 그러나 자기를 앞세우지 않고 소통을 이뤄내는 사람, 갑과 을 사이에서 조율하는 능력 그 자체만으로 그는 또 하나의 '일당백'이 아니겠는가! 시인에 의해 설정된 『오뒷세이아』의 오뒷세우스가 한층 『일리아스』에서보다 진화한 인간형을 제기한다고는 하지만, 실제 인간 모습은 이 작품에 잘 드러나 있다고 생각한다. 너무 나서지 않고 그렇다고 거리 운운하면서 침묵하지도 않고, 아직까지의 성공하는 ‘비지니스 모델’로서 그는 영향력을 유지하고 있다.
어쨌든 그는 『일리아스』 영웅 군(群)에서는 지장(智將) 1순위다. 큰 아이아스나 오뒷세우스는 (다른 뜻은 없다) 섬 출신이라는 공통점, '겨우’ 혹은 '비록' 열두 척의 배들만을 동원했지만 한 사람은 손에 꼽히는 '용장'으로, 다른 한 사람은 '지장'으로서, 정정당당 그리스연합군 내부에서 제 역할을 충분히 하고 있다.


[03]어떤 아이요?
굳이 셋으로 세팅하려고 또 하나의 '함선 열두 척'으로 참전한 지휘관을 찾아야 했다. 확증편향인가? 고생 끝에 찾아내고야 말았다. 의외로 수비 진영은 트로이아 측 참전자 가운데, 그 대상을 발견했다. 2권 함선목록 후반부 트로이아 진영 참가자들이 소개되지만 거기에는 없는 인물, 이피다마스다. 아가멤논이 명불허전을 증명하려는 듯 전투 씬의 분량을 좀 소화하는 데가 11권이다. 거기서 시인이 묻는다.

 

"이제 말씀해주소서, 올륌포스의 궁전에 사시는 무사 여신들이여!
트로이아인들 자신과 이름난 동맹군들 중에서
맨 먼저 아가멤논과 대전한 자는 누구입니까?"  -11권: 218-220.

 

그가 트로이아의 전사 이피다마스다. 생소한 인물이므로(필자에게는) 인용에 좀 지면을 할애하자. 앞의 인용에 이어지는 부분이다.

 

"그것은 안테노르의 아들 이피다마스였다. 그는 당당하고 큰
사나이로 작은 가축 떼의 어머니인 기름진 트라케 땅에서
자랐으니, 볼이 예쁜 테아노를 낳은 그의 외할아버지 킷세우스가
어릴 적부터 그를 자기 집에서 길렀던 것이다.
그리하여 그가 마침내 영광스런 성년이 되었을 때
킷세우스는 그를 그곳에 붙들어두려고 자기 딸을 아내로 주었다.
그러나 그는 갓 결혼한 신랑의 몸으로 신방을 뛰쳐나와
아카이오이족의 소문을 좇아 부리처럼 휜 함선 열두 척을
이끌고 왔다. 하나 균형 잡힌 함선들은 페르코테에 남겨두고 
그 자신은 걸어서 일리오스까지 왔다.
바로 그가 이때 아트레우스의 아들 아가멤논과 대전했다." -11권: 221-231.

 

1)그는 트라케(작은 가축 떼의 어머니인 기름진)에서 자랐다.

2)외할아버지 킷세우스가 어릴 때부터 그를 길렀다(킷세우스와 혈연일까, 아닐까?).

3)(볼이 예쁜) 테아노는 킷세우스의 딸이다.

4)이피다마스의 아버지는 안테노르이고 어머니는 테아노다.

4행까지는 그렇고 그런 가족 소개로 보인다. 문제는 5번째 행부터다. 5~6행이 따르면, 이피다마스와 킷세우스는 혈연이 아니며, '주워서'라는 말은 없지만, 킷세우스 나이 차이도 있고 하여 자신의 친딸 테아노(와 사위 안테노르)의 양아들로 삼아 기른 것으로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그가 성년이 되어 떠날까봐 '두려워서' 킷세우스가 자기 딸을 (주어) 결혼하게 했다는 것인데, 그 딸(이피다마스의 아내)은 이피다마스의 어머니(티아노)와 자매간이고, 이피다마스는 이모와 결혼하게 되었다는 얘기다. 좀 부담스럽지 않은가? 이피다마스가 이처럼 주워서 기른(입양은 보류) 아이였는데(테아노를 친엄마라고 생각하고 지내렴, 또한 친정집에 나이차가 모자뻘인 귀여운 사내아이가 함께 살게 되어 어머니 역할을 하였을 수는 있다). 어느덧 청년이 되니 이제 내 갈 길을 가야겠다. (고마운 것은 고마운 것이고, 나는 어차피 남남이니 일가를 이뤄야겠다, 이렇게 자랐던 집을 떠나려 했나? 또한 그럴 수밖에 없다는 것을 킷세우스도 알고 있고 때문에 맘에 드는 그를 가족으로 붙잡는 방식으로 (무리해서) 딸과 혼인시켰다는 얘기인가?

 

<잠시 주로를 벗어나 조선으로> 우리 역사에도 이런 사례가 없지는 않다.

이상의 추리가 어느 정도 타당성이 있다면 조선의 압구정(호) 한명희는 그리스의 킷세우스가 된다. 수양대군을 왕(세조)으로 옹립시킨 일등공신인 그에게는 '손 안에 세상의 모든 것은 쥔'이 그를 수식하는 '공식구'('일리아스'처럼)가 될 것인데, 그는 자신이 성취한 권세에 만족하지 않고 자신의 두 딸을 왕에게 시집을 보내 부원군의 지위를 거듭 유지하면서 지속가능한 권력을 꿈꾸었다.

세조를 잇는 예종의 정비 '장순왕후' 한씨(1445~1461년)가 첫째 딸이다. 그녀는 17세에 사망하는데, 세조가 사망하고 예종(해양대군, 19세)이 즉위하던 1968년에는 세상에 없다. 그런데, 예종이 재위 13개월 만에 세상을 뜬다. 그런데 해양대군(예종)은 세조의 둘째아들로, 먼저 세자로 책봉되었던 형 의경세자(1438~1457, 추존 '덕종')가 비명횡사하자, 8세에 세자로 책봉되었다가 즉위한 것. 이 예종(1450~1469,세종32~예종1)이 죽었을 때, 후위로 떠오른 사람은 1)예종의 아들 제안대군(원자, 5세)과 2)예종의 형 의경세자의 장남 월산군이었다. 그런데, 의경세자와 한확(韓確)의 딸 소혜왕후(昭惠王后) 사이에는 월산군 말고도 차남 자산군이었다. 그 사람, 차남 자산군이 예종을 이어 왕에 오르는데 그가 성종으로 당시 13세였다. 당시 그도 어리기는 하였지만 원자와 친형을 제치고 제위에 오른 것은 의외였다. 여기에는 당대 두 사람의 막강한 실력자의 ‘조정’이 있었다.

1)남편 세조가 죽고 예종이 즉위할 때부터 수렴청정(조선 최초의 수렴청정이다)을 하는 정희대비가 힘을 썼다. "월산군은 어릴 때부터 병이 잦았고, 세조가 생전에 자산군의 칭찬이 남달랐던 점"이 이유다. 또 한 사람.

(2)자산군 즉위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인물이 이번에도 한명회다. 자산군(성종)은 한명회의 막내딸과 결혼(1467년, 세조13년)에 결혼한 상태였던 것. 세조가 죽고 예종(큰사위)가 즉위하기 불과 1년 전 한명회는 막내딸을 자산군에게 시집을 보냈으니, 결과적으로 후사도모다. 불안정한 상황을 읽은 후 처방한 것이다. 어쨌든 성종의 정비가 공혜왕후다. 그녀는 언니(장순왕후)의 뒤를 이어 정비의 맥을 잇는다. 그러나 그녀는 성종 즉위 5년 만(1474년)에 사망하였고, 자식이 없었다. 이후 성종은 윤기무의 딸 숙의 윤씨를 새 왕비로 맞아들였고, 그녀가 아들 하나를 낳으니 연산군이다. 성종으로선 어쨌든 자신의 숙모(아버지의 동생의 아내)의 여동생과 결혼하게 된 셈. 친이모가 아니라서 다행이지만, 한명회의 '권력 집착'을 엿존다. TV 사극과 영화에서 자주 접했던 그렇고 그런 왕실의 계보다. '성종이 자신의 막내이모와 결혼을 했다고?' 희미한 기억을 확실히 했지만 그렇다고 킷세우스와 한명회의 아버지로서의 닮은 점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일리아스』에서 안테노르는 프리아모스의 왕과 함께 트로이아성의 스카이아이에서 전세를 관망하는(메넬라오스와 파리스의 일대일 대결 중) 원로 중 1인이다. 당시 양군의 책임자가 맹세를 위해 만날 때, 프리아모스를 호위하여 결전 현장을 다녀오는 이가 그이고, 안테노르의 부인으로 되어 있는 '볼이 예쁜' 테아노는 <일리아스> 6권, 전투 중 갑자기 성안으로 돌아온 헥토르가 청하여 어머니 헤카베가 도시의 아네네의 신전에 청원할 때 이 신전지기를 하고 있기 때문이다. 해당 부분이다.

 

"그리하여 그들이 성채 위에 있는 아테네의 신전에 이르자
킷세우스의 딸로 말을 길들이는 안테노르의 아내인
볼이 예쁜 테아노가 그들을 위해 문을 열어주었으니,
트로이아인들이 그녀를 아테네의 사제로 삼았기 때문이다.
그러자 그들은 모두 통곡하며 두 손을 들어 아테네에게
기도했고, 볼이 예쁜 테아노는 옷을 받아
머릿결 고운 아테네의 무릎 위에 올려놓고
위대한 제우스의 딸에게 기도하고 빌었다." -일:6권 297~304행

 

여기에도 앞의 인용처럼, '킷세우스의 딸', '안테노르의 아내', '볼이 예쁜' 테아노는 그 여인이다. 다만 '아테네의 사제'라고 하면 될 것을 '트로이아인들이 그녀를 아테네의 사제로 삼았다'고 하는 것을 보면, 그런 임명은 의외이며 외지인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또한 그녀의 고향은 해협 건너 트라케, '작은 가축 떼의 어머니인 기름진 트라케 땅'이며 그곳은 친정아버지 킷세우스가 살고 있다. 두 권 두 부분(인용)만으로는 일관성은 있다. 확실한 것은 킷세우스의 친딸(혈육)이 (볼이 예쁜) 테아노라는 것 말고는 확정하기 힘든 대목들이 『일리아스』에는 등장한다. 안테노르와 동명이인은 작품 속 어딘가에 있는 듯한데, 안테노르의 아들들(친아들들로 추정)이 몇 곳에서 등장하고 있다. 그가 그인가, 그가 그가 아닌가!

 

1)‘스카이아이의 원로’ 안테노르에게는 세 아들이 있고, 이들은 트로이아군의 주요 장수로 활약한다.

 

"트로이아 백성들에게서 신처럼 존경 받는 아이네이아스
그리고 안테노르의 세 아들인 '폴뤼보스', 고귀한 '아게노르',
불사신과도 같은 젊은이 아카마스를 둘러싸고 있었다." -일: 11권 58~60행

 

'아이네이아스'에 이어 거론됨에 주의해야 한다. 이외에도 이들 관련 인용은 더 있다. 특히, 2권(후반 함선목록) 트로이아 진영의 지휘관을 소개하는 대목이다.

 

"다르다니에인들은 앙키세스의 당당한 아들 아이네이아스가
지휘했다. 고귀한 아프로디테가 앙키세스에게서 그를 잉태했으니,
그녀는 여신이면서도 이데 산의 골짜기에서 인간과 동침했던 것이다.
그는 혼자가 아니라 안테노르의 두 아들 아르켈로코스와 아카마스가
함께했는데, 이들은 둘 다 전투에 관해서는 무소부지였다." -일: 1권 819~823행)

 

여기서 안테노르의 아들은 위와 '아카마스'만 일치한다. 트로이아의 원로 안테노르의 아들이 맞다는 것도 확인할 수 있다. 거기다가 3권에서는 아프로디테의 명을 받은 이리스가 헬레네를 파리스가 머무는 침소로 데려갈 때, 라오디케의 모습으로 변장하는데, 라오디케는 '안테노르의 아들 통치자' 헬리카온의 아내이며 '프리아모스의 여러 딸들 가운데 가장 미인'으로/ 당시 헬레네에게는 시누이다.(일: 3권, 121~125행) 안테노르와 프리아모스는 사돈 관계임을 알 수 있고 둘 사이를 연결한 아들이 헬리카온인데, 새로 등장하는 아들이다.
 
2)혈연 여부를 떠나 앞서의 인용(11권) 후반에 따르면 이피다마스는 가장 먼저 아가멤논에게 대항하여 나서는 트로이아의 용감한 전사다 하지만 그는 아가멤논에게 죽는다. 그런데, 이를 복수하기 위해 나선 전사들 가운데 코온이 나섰다가 곧이어 죽는다. 그런데, 이 코온이 안테노르의 맏아들이란다.

 

"그러나 이때 전사들 중에서도 이름 높은 코온이 그를 보았다.
코온은 안테노르의 맏아들로 아우가 쓰러지는 것을 보자
크나큰 슬픔이 그의 두 눈을 덮었다.“  _일:11권 248~250행.

 

코온은 안테노르이 맏아들이며, 이피다마스의 형이다. 이어지는 대목을 보면, "이때 코온은 같은 아버지에게서 난 아우 이피다마스의 발을 잡고/ 열심히 끌고 가며 자기 편 장수들에게 큰 소리로 구원을 청."(일: 11권 257~258행)하다가 죽는다. 앞서 코온은 아가멤논 팔꿈치 아내를 찔러 부상을 입히지만 아가멤논은 그의 동생 이피다마스의 사지 위에 코온의 목을 쳐서 떨어뜨린다. 형제들이 함께 죽는 경우는 더 있지만 장렬한 최후다. 어쨌든, 여기에도 안테노르의 두 아들이 등장하는데, 이피다마스는 코온의 '같은 아버지에게서 난 아우'다. 

 

이제 그리고 일단 세 번째, '열두 척의 배'의 의미를 마무리해야겠다.

약간 미스테리한 결론이다(앞의 11권 인용 참고). 그가 갓 결혼한 신랑으로 몸으로 신방을 뛰어나온 것은 임박한 전쟁에 참여하기 위한 전사의 출전인가, 이를 빙자한 (결국은) '가출'인가? 트라케에서 트로이아로 가려면 가깝지만 배를 이용해야 한다. 해서 '부리처럼 휜 함선 열두 척을 이끌고' 간다. '갑자기 뛰쳐나왔다'고 좀 그런 보기에는 준비된 출정이다. 킷세우스(길러준 외할아버지)는 그가 이렇게 떠나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던 듯하다. 전쟁에 참전하면 죽을 것인데, 그것을 막고 싶어 급했던 것일까? 그러나 안테노르(트로이아 사람)와 테아노 사이에서 태어난 그가 어려서부터 자란 곳이 트라케였다고 할 때, 그리고 이모(혹은 친이모)와 결혼해야 하는 상황이다. 그런 이상한 결혼을 그가 받아들일 수 없었던 것은 아닐까? 육지에서 수성하는 트로이아 군 입장에서는 지금 당장 배가 필요 없다. 뿐더러, 전세를 볼 때 그리스군은 그런 배들은 가장 먼저 파괴될 것이 자명하다. 해서 이피다마스는 '균형 잡힌 함선들은 페르코테에 남겨두고' 걸어서 일리오스(트로이아 군에)에 합류한 것이다. 아마도, 이때 또 하나의 안테노르의 아들은 코온은 동생 이피다마스와 동행하였고, 거의 동시에 죽음을 맞이한 것 같다.

몇몇 의문점(이 부분을 명확히 제기하려면 또 하나의 글이 필요할 것이다)을 살피는 동안, 이피다마스가 하필 인간들의 왕, 그리스연합군 최고사령관 아가멤논이라는 '골리앗'에게 맞서는 제1주자가 된 데는(아무리 아가멤논이 종이호랑이처럼 여겨지더라도) 자초한 죽음, 곧 자살공격에 가깝다. 한 번의 떠남으로는 씻지 못하는 뭔가 찜찜한 것이 있다. 해서 그는 영원히 떠나는 길을 자초한 것일까? 필자는 그가 페르코테에 남겨 놓고 온 '부리처럼 휜 함선 열두 척'을  일종의 보험으로 본다. 그것이 최선이었든 차선이었든. 그가 자주적인 삶을 위해 그 배들을 몰고 떠났다면 현존할 리 없겠지만 『오뒷세이아』에 앞서 조금 일찍(10년쯤) 항해를 떠난 서사 『이피다마스』의 시작되지 않았을까, 하는 것. 또 하나, 당시 트라케에서는 뭔 일이 있었던 듯한데, 이피다마스 주변에 어른거리는 오이디푸스의 고뇌랄까, 그 그림자가 드리우고 있음을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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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ren 2019-03-28 00:56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일리아스>에 나오는 인물들은 너무나 여러 곳에서 시도 때도 없이 (눈 밝은 독자가 아니고서는 전후관계를 도저히 파악하기 힘들 정도로) 등장하기 때문에, 누가 누구의 아들이고, 누가 누구의 할아버지인지를 따져보는 것조차도 쉽지 않을 때가 많은 듯합니다. 가령, 트로이아의 프리아모스 대왕만 하더라도 아들이 무려 50명이나 되고, 딸이 12명이나 될 정도니까, <일리아스>에 등장하는 프리아모스의 아들 이름만 다 밝혀내는 것마저도 쉽지 않을 정도지요.

말씀해주신 ‘안테노르‘도 하도 여러 곳에서 등장하기 때문에 이 사람의 실체를 <일리아스> 만으로는 규명(?)하기 쉽지 않을 듯합니다. 다행히(?), 네이버 지식백과에 들어가 보면 이 사람에 대한 아주 자세한 정보를 일목요연하게 정리해 놓은 게 있더군요. 그는 ‘트로이 전쟁‘ 이전에도 ‘헬레네 납치 사건‘을 해결하기 위해 트로이로 찾아왔던 사절단이었던 오뒷세우스와 메넬라오스를 극진히 대접하고, 화평을 극구 주장했던 인물로 나오더군요.

그리고, 네이버 백과사전을 살펴 보면 안테노르 역시(!) 아들이 꽤나 여럿 있었던 것으로 나옵니다.

<안테노르는 트라키아 왕 키세오스의 딸인 테아노와 결혼하여 아르켈로코스, 아카마스, 리카온, 글라우코스, 라오도코스, 아게노르, 이피다마스, 라오다마스, 히폴로코스, 에우리마코스, 헬리카온 등 여러 명의 아들을 두었다.>

또한, 안테노르의 아들인 이피다마스는 외할아버지 밑에서 양육된 후 친이모와 결혼한 게 (신화학적으로) 맞는 듯한데, 킷세우스가 여러 명의 딸을 두었다면 큰 딸(?)의 아들, 즉 외손자와 나이 어린 친딸을 결혼시킬 수도 있었지 않았겠나 싶은 생각도 해보게 됩니다. 또한, <일리아스>에 나오는 내용을 보더라도 그가 ‘못마땅한 현실‘에서 벗어나고자 전쟁터로 달려온 건 아니지 않나 싶기도 합니다.^^

* * *

그리하여 그는 가엽게도 결혼한 아내의 곁을 멀리 떠나 도성의 백성들을 도우려다가 그곳에 쓰러져 청동의 잠을 자게 되었던 것이다. 그 아내를 위해 그는 재미도 못 보고 구혼 선물만 잔뜩 주었으니, 먼저 그는 소 백 마리를 주고 나서 그가 수없이 갖고 있던 염소와 양을 합쳐 천 마리를 주기로 약속했던 것이다.(<일리아스>, 11권 240-245행)

timeroad 2019-03-28 09:09   좋아요 2 | URL
섬세한 댓글 감사합니다. 간력하게 12철 배와 관련된 것, 3개를 묶어보자는 취지인데, 자꾸만 눈에 들어와서 또한 글이 길어지는 것이 부담스러워서, 서둘러 정리한 면이 있습니다. 이래저래 언급하다보면 끝이 없어서요. 감사합니다.

oren 2019-03-28 01:04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헬레네 납치 사건을 ‘전쟁‘이 아닌 ‘회담‘을 통해 해결하고자 애썼던 흔적들이 <일리아스>에서 얼마나 자주 등장하는지는 모르겠지만, 안테노르와 달리 그들 사절단들을 죽여버리자는 의견들도 없지는 않았던 듯합니다. ^^

* * *

이렇게 두 사람은 울면서 부드러운 말로 왕에게 빌었으나, 그들이 들은 것은 무자비한 목소리였다.

˝너희가 진실로 현명한 안티마코스의 아들들이라면
바로 그자가 전에 트로이아인들의 회의석상에서
신과 같은 오뒷세우스와 함께 사절로 간 메넬라오스를
그곳에서 죽여 아카이오이족에게 돌려보내지 말라고 권했다니,
이제 너희 아비의 수치스런 행동의 대가를 지불하도록 하라.˝
(<일리아스> 11권 136-142)

timeroad 2019-03-28 09:12   좋아요 2 | URL
그렇군요. 안테노르는 트로이아 진영에서 그리스군이라면 네스토르와 유사한 역할을 한달까, 그런 듯합니다. 감사합니다.

ransky 2019-05-11 17:0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그러면 이순신은 조선의 오뒷세우스? ㅎㅎ

timeroad 2019-05-12 00:40   좋아요 0 | URL
오뒷세우스이기도 하고요.
 

"속은 쓰리지만 겉으론 조심조심 국보급 백자 달항아리를 다루듯, 경상우수사 배설의 동태와 심기를 관리하며 열두 척의 배를 '안전하게' 그리고 '완전하게' 인수하는데 노심초사하는 충무공 이순신의 마음과 행보, 당면한 한반도 평화도 이처럼.. 쓰라린 칠천량해전 대패에서 명량해전의 달콤한 승리까지, 『난중일기』 <정유년Ⅰ>을 새롭게 읽었다. 4월 1일에 시작, 10월 8일까지. 한 번의 대패와 한 번의 대승을 포함하는 이날들의 기록이다. 두 해전은 승자에게도 패자에게도 극적인 전환점. 플롯의 초고급인 급반전이랄까? 마음이 분주하시면 후반부 인용만을 읽으셔도 됩니다. 그러나 필사 수준으로 입력한 깨알같은 인용과 정리에 보물이 숨어 있다는..<필자>  

‘상유십이(尙有十二)’, "지금 신에게 아직 전선 열두 척이 있사오니"는 『이충무공전서』 중 이분李芬의 「행록」이 그 출처다. 이충무공문서(전집)에서는 『난중일기』(1592년 1월 1일부터 1598년 11월 17일까지의 일들)가 상당 부분을 차지한다. 어쨌든 ‘장계’에서 충무공은 수군을 재건해야 하며, 그 길만이 또 한 차례 나라를 누란의 위기에서 구하는 방법임을, 왕에게 읍소한다. 그는 이 장계를 언제 어디에서 쓴 것일까, 『난중일기』 <정유년Ⅰ>에서  작성 시기를 추정할 수 있다. 그러나 내용은 언급하지 않는다. 충무공의 뜻대로 명량해전은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는데, 이 유명한 장계는 치열한 해전의 승리를 통해 스스로 결재했다고 할까. 그만큼 수군 재건과 응전에 관한 왕과 중신들의 의지는 흔들리고 있었다. 필자는 ‘열두 척의 배’가 충무공 자신에게, 조선 수군에, 그리고 조선에 어떤 의미인지를 텍스트를 통해 살펴보고자 한다(사실 이 글은 이어질 <서사시 『일리아스』 속 ‘열두 척의 배’들>에 대한 머리말에서 길어졌음을 밝힌다). 

 

‘상유십이(尙有十二)’, 치열한 해전의 승리를 통해 ‘스스로 결재한’ 장계
인터넷 사전 기록을 보자. "명량해전(鳴梁海戰) 또는 명량대첩(鳴梁大捷)은 1597년(선조 30) 음력 9월 16일(양력 10월 25일) 정유재란 때 이순신이 지휘하는 조선 수군 13척이 명량에서 일본 수군 130척 이상을 격퇴한 해전이었."(백과) 12척이 아니라 13척이다. 그러나 일본 수군에 대해서는 '130척 이상'이라고 하여 의견의 분분함을 반영한다. 국어사전에는 "이순신이 이끄는 수군이 명량에서 왜선(倭船)을 쳐부순 싸움. 10여 척의 전선(戰船)으로 적 함대 133척을 맞아 싸워, 적국의 배 31척을 격파하여 크게 이겼다."고 이 전쟁을 정의한다. '10여 척'이라고 한 발 물러서면서, 적 함대는 '133척'이라고 명시한다. 사실 이미 관용구처럼 쓰는, '상유십이(尙有十二)'는 충무공이 직접 올린 장계에 따른 기록이니, 실제 전쟁에 투입된 전선이 12척이냐, 13척이냐의 문제는 중요하지 않다. 다만 필자는 이 열두 척을 어떻게 충무공의 통제에 들어왔으며, 칠천량해전에서 대패하여 무너진 조선 수군을 충무공이 재건하는데, 어떻게 불씨 역할을 하는지를 살폈다. 거의 필사수준으로 입력하면서 해당 일기(<정유년Ⅰ>)를 읽었다. 소회를 직접 담고 있지는 않지만, 충무공이 경상우수사 배설로부터 12척의 배를 인수하는 과정이 녹록치 않았던 듯하다.

 

12척 혹은 13척이냐는 중요하지 않아, 배설로부터 인수과정이 녹록치 않아 

대한 압축·정리하고 필요시 주석을 인용하고 설명을 덧붙였다 하지만 지면(이라고 하면 그렇지만) 관계를 고려함에도 스크롤 압박이 좀 있을 것이다. 우리나라 역대 최대영화 관객1위(누적 관객수 177,615,152명)를 ‘아직’ 유지하고 있는 <명량>(2014)은 배경쯤으로 참고하는 것으로 하자, ‘무료상영’까지 들어간 <극한직업>의 누적관객수가 16,258,132명 (2019.03.24.,)이라는데, <명량>이 1위자리를 고수했으면 하는 바람이 있다. 어쨌든 <트로이>라는 영화가 고전 『일리아스』를 제대로 읽는데, 도움이 되면서도 걸림돌이 되듯, 『난중일기』만을 충실히 살핀 결과라는 것(훗날의 평가에 얽매이지 않고)을 다시 강조한다. (해당 월일은 모두 음력이다.)
"1597년 7월 16일. 칠천량해전. 조선의 지휘관 원균의 거북선 세 척과

판옥선 100여 선 침몰, 수군 2만여 명 궤멸, 원균 사망."
실패한 전투에 대한 기록, 칠천량해전의 결과다. 그날 원균이 죽지 않고 1601년까지 살아있었다던가 하는 기록 등, 이처럼 간명한 이 기록에도 이의제기는 많지만 왜군의 급습에 조선 수군이 순식간에 무너진 사실은 부인할 수 없다. 우선 좀 색다르게 접근해보자. 『난중일기』에는 이 전투를 전후로 한 '날씨'가 맨 앞에 적혀 있는데, 조선의 운명이면서 충무공의 울분과 분노를 담은 마음지도 같아, 정리하면서 놀랐다. 그 무렵 충무공은 칠천량(거제)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경남 합천과 산청 사이로 추정)에 머물고 있다. 그리고 칠천량해전의 패배를 설욕하는 결정적인 해전은, 그날로부터 정확히 두 달 후인 9월 16일에 이루어진다. 명량해전이다.

 

칠천량해전 전후 충무공의 일기, 사변을 바라보는 저자의 ‘마음지도’ 같아
삶은 늘 전쟁이다. 그런데 당시 전쟁은 생활이었다. 전투 현장 부근의 날씨를 통해, 칠천량해전 전후의 사정을 되짚어본다. 당시 충무공은 이 전장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서 머물렀고, 걱정스럽게 지켜보아야 했다. 그러므로 다음을 『난중일기』에서 추출한 당시의 <날씨와 생활>이라고 하자. 충무공은 하루도 밀리지 않고 일기를 썼다. 사실이다. 또한 날씨를 거짓으로 적지 않았다. 역시 사실이다.

 

<7월> [14일]맑음, [15일]비가 오다 개다 했다, [16일](칠천량 해전 당일)비가 오다 개다 하면서 끝내 흐리고 맑지 않았다. [17일]비가 간간이 내렸다, [18일]맑음, [19일]종일 비가 내렸다, [20일]종일 비가 내렸다. [21일]맑음, [22일]맑음, [23일]비가 오다 개다 했다, [24일]비가 계속 내려 그치지 않았다, [25일]늦게 갬. [26일]비가 오다 개다 했다. [27일]종일 비가 내렸다. [28일]비가 내렸다, [29일]비가 오다 개다 했다, 밤 내내 큰비가 왔다. <8월> [1일]큰비가 와서 물이 불었다. [2일]잠시 갰다. [3일]맑음.


공교롭게도 (다음에 살피는)  하루하루 그날의 맑거나 흐르거나 쾌청하거나 하는 날씨와 당시 전황(충무공이 파악한 것이 아니라)을 받아들이는 조선인의 마음이 꼭 닮았다. 더구나 충무공은 가끔 꿈을 기록하는데, 중요한 순간마다 일이 벌어지기 전에 꿈을 꾼다. 일종의 전조인데, 걱정하는 마음, 바라는 마음이 반영된 결과이기도 할 것이다.   

*7월 7일: 꿈에 원균이 나타남. 즐거운 기색인데 그 징조를 잘 모르겠다.(10일도 안 되어, 칠천량해전에서 패배한다) *8월 2일: 잠시 갰다. 이날 밤 꿈에 임금의 명령을 받을 징조가 있었다. *8월 3일: 맑음. 이른 아침에 선전관 양호가 뜻밖에 들어와 교서와 유서를 주며 당부하는데, 그 내용은 곧 삼도통제사를 겸하라는 명령이었다.

 

그날들의 날씨와 칠천량해전 패배(전황)가 쓰라인 조선인의 마음이 조응
위 날씨 기록과 해당 일을 비교해보면 흥미롭다. 이제 『난중일기』를 자세히 살펴보자. <정유년Ⅰ>편은 4월 1일에 시작하여, 10월 8일에 끝난다. 한 번의 대패와 한 번의 대승을 포함하고 있는 날들의 기록이다. 내용이 결코 길지 않으나 이제 상당수는 '날씨'는 빼고 그 중 필요한 대목만 따왔으며, 주석이나 필자의 설명인 괄호 안에 처리했다. 먼저 감옥에서 풀려나 임지로 가는(권율 도원수가 머무는 순천 부근으로) 과정을 살핀다. 생략한 날이 많다. 

 

<4월> [1일] "맑음. 옥문(獄門)을 나왔다. 남대문 밖 윤간의 여종 집에 이르니.. [3일]맑음. 일찍 남쪽으로 길을 떠났다. [4일] 오산, [5일]선산(先山)(현재 충남 아산시 음봉면 삼거리 어라산의)을 찾아 선친의 산소에 참배, [13일]어머님 마중하려고 바닷가의 길로 가다가, 어머님 부고를 접함. [19일]어머님 영전에 하직을 고하고 길을 떠남. [26일] 구례현 도착. <5월> [28일]하동현에 이름. <6월> [2일]단계(丹溪:경남 산청군 신등면 단계리)에서 점심, 삼가(三嘉: 지금의 합천군 삼가면)의 관가에 숙박, [4일]삼가를 떠나 오리쯤에 갈림길을 만남(한 길은 고을로, 다른 한 길은 초계로 가는 길이다). 십리쯤 더 가니 원수(권율)의 진이 보였다. [5일]점심을 먹고 도배를 함(당일 초계군수가 급히 찾아옴), [6일]잠자는 방을 다시 도배, 군관이 쉴 대청 두 칸을 만듦.

 

6월 4일 일기에 주목한다. '초계'는 지금의 경남 합천군 초계면으로, 최계 변씨(卞氏)들의 본향이다. 주석에 따르면, 충무공 집안은 3대가 초계 변씨와 결혼했다. 할머니는 변함의 딸이고, 어머니는 변수림의 딸이며, 누이도 변기에게 출가했다. 얼마 전에 작고한 어머님과 할머니의 고향이 지척에 있다. '삼가'를 지나서 만난 갈림길(삼거리)에서 잠시 고민하는 모습을 엿본다. 도원수 권율이 머물고 있는 곳은 순천인데, 합천, 산청, 진주 등 인접한 당시의 지명과 실제 위치를 고증한 자료는 적지 않으리라. 충무공이 거처로 정한 곳이 거제 곧 칠천량에서 멀지 않은 곳이라고만 해두자.

 

초계는 다산에게 강진 같은 돗, 삼가를 지나 삼거리에서 충무공은 무슨 생각을..
또한, 이즈음부터 '도배'를 하고, 군관들이 머물 장소를 마련하는 것으로 보아. '발령대기' 상태이지만 근무를 시작했다. 또한 다산 18년의 귀양 때에 외가(해남 윤씨)의 지원을 받았듯이, 임시 머무는 곳이지만 이곳이, 할머니와 어머니의 본향인 점, 덕분에 충무공이 고단한 심신을 추스르는 데 도움이 된 듯하다. 이곳에 머물며, 권율의 종사관 등을 통해 전황을 살피고, 칠천량해전 직후까지 머문다. ‘그날’이 가까워질수록 전선의 어두운 소식이 들려온다. 주로 원균과 관련된 소식들이다.

 

<6월> [11일]한산도와 여러 곳에 갈 편지 열네 장을 씀. [12일]이른 아침에 종 경과 종 인을 한산도 진으로 보냄(수신인 중에는 경상 수사(배설), 녹도 만호(송영종), 거제 현령(안위) 등이 보임), [17일]원수(권율)에게로 가니, 원균의 정직하지 못한 점을 많이 말함. [19일]진에 이르러 원수와 황 종사관을 만남. '원수는 원균에 관한 일을 내게 말하는데'(우려가 가득함), [25일]황 종사관이 와서 만나고는 해전에 관한 일을 많이 말하였다. [27일]늦게 황여일(황 종사관에 대한 호칭이 달라지고 있다)이 와서 만나 한참 동안 이야기함. <7월> [7일]꿈에 원균이 나타남. 즐거운 기색인데 그 징조를 잘 모르겠다. [10일]황 종사관(여일)이 와서 한참 동안 이야기했다. [14일]황 종사관은 사람을 보내, 전황이 담긴 첩보를 보내와 공유함. "7일 왜선 오백여 척이 부산을 드나들고, 9일 왜선 천 척이 합세하여 우리 수군과 절영도 앞바다에서 싸웠는데, 우리 전선 다섯 척이 두모포에 표류하여 대었고, 일곱 척은 간 곳이 없었다.", 달려가 점호 중인 황 종사관을 만남. [15일]우리 수군 이십여 척이 적에게 패했다는 소식을 들음. [16일]저녁에 7월 4일~6일의 해전에 참여했다가 단신으로 살아온 사노에게 전쟁 소식을 생생하게 전해 들음(전투가 벌어진 당일에 10여 일 전의 전황을 참전자에게 듣고 있다). "우리나라에서 믿는 바는 오직 수군에 있었는데, 수군이 이와 같으니 또다시 가망이 없을 것이다. 거듭 생각할수록 분하여 간담이 찢어지는 것만 같다." [18일]칠천량 패배 소식을 접함. 해안지방을 살피러 가겠다고 원수와 상의하고, 길을 떠나 삼가현에 이름. [21일]노량에서 거제 현령(안위)와 영등포 만호(조계종) 등 여남은 명을 만나, 자세한 소식을 듣다. "경상 수사(배설)는 도망가 보이지 않았다.", "그들이 대장의 잘못을 말한 것을 입으로는 다 말할 수 없고 그 살점이라도 뜯어먹고 싶다고들 하였다.", "잠시도 눈을 붙이지 못해 눈병을 얻었다."

 

앞서 '배설'에 대한 언급은 두 번. 이후 기록을 읽는데도 그의 등장에 주목한다.

<7월> [22일]맑음. 아침에 배설이 와서 보고 원균이 패망한 일을 많이 말했다(아마도 이때 에 12척의 배에 대한 얘기와 충무공의 당부가 있었을 것임. 후주는 1597년, <선조실록> 30년 7월 22일 기록 중 "경상우수사 배설과 옥포, 안골의 만호 등은 간신히 목숨을 건지고, 많은 배들이 불에 타고 무수한 왜선은 한산도로 향하였습니다."고 소개한다.) [26일]정개산성 밑에 있는 송정 아래로 가서 황종사관 및 진주 목사와 함께 이야기했다(실질적인 대책회의로 보임. 도원수 권율의 뜻을 반영한) [29일]원수가 보낸 군사는 모두 말이 없고 활과 화살도 없어 쓸모가 없었다. 매우 한탄스러웠다. <8월> [2일]이날 밤 꿈에 임금의 명령을 받을 징조가 있었다. [3일]이른 아침에 선전관 양호가 뜻밖에 들어와 교서와 유서를 주며 당부하는데, 그 내용은 곧 '삼도통제사'를 겸하라는 명령이었다. [4일]압록강원에 이르러 점심(압록은 보성강이 섬진강과 만나는 전남 곡성군 죽곡면 압록리), 오후에 고성고을 숙박. [6일]옥과 →[7일]곡성 강정(현 곡성 목사동면) →[8일]부유창(순천 주암면 창촌'을 거쳐 순천부 관사) →[9일]낙안→보성 조양창(보성면 조성리)까지 이동.

 

삼도통제사를 겸하라는 교서를 받은 이후(8월 3일) 충무공의 행보가 빨라진다, 우수영(전남 해남)으로 가면서 전투 준비를 하는 것. 무엇보다 12척의 전선을 인수하는 일이 급하다. 일단 보성군 조성면에 머무르며, 장계를 쓰고, 휘하의 장군들을 만나는 등 정비한다.

 

<8월> [12일]맑음. 장계의 초안을 잡았다. 그대로 묵었다. 거제 현령(안위)과 발포 만호(소계남)가 와서 만났다."(여기에서 '열두 척의 배' 관련 장계를 쓰기 시작, '삼도통제사'를 겸하는 직책을 수행 중이므로, 휘하의 장수들이 집결하기 시작한 것으로 보임) [13일]맑음. 거제 현령과 발포 만호가 와서 인사하고 돌아갔다. 수사(배설)와 여러 장수 및 피해 나온 사람들이 묵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다. [15일]비가 계속 오가다 늦게 맑게 갰다. 선전관 박천봉이 유지를 가지고 왔다. 그것은 8월 7일에 성첩한 공문이었다.(영의정 유성룡이 보냄, 곧바로 답장) [17일]맑음. 일찍 아침 식사 후에 곧장 장흥 백사정(白沙汀)에 이르렀다. 점심 후에 군영구미(軍營仇未)로 가니, 온 경내가 이미 무인지경이 되었다. 수사 배설은 내가 탈 배를 보내지 않았다.('백사정'은 장흥군 장흥읍 원도리로 추정, '군영구미'는 강진군 대구면 구수리로 추정. 일설에 '군영구미'는 1457년 수군만호진을 설치했던 곳, 현재 보성군 회천면 진일리에 소재한 군학(群鶴)마을, '백사정'은 회천명 벽교리에 소재한 명교해수욕장 일대라고 함)
[18일]맑음. 회령포(會寧浦)에 갔더니, 수사 배설이 배 멀미를 핑계 대므로 만나지 않았다. 회령포 관사에서 잤다.(충무공 이곳에서 배를 인수하여, 우수영으로 떠날 계획인 듯, '회령포'는 전남 장흥군 회진면 회진리, 이곳에서 열두 척의 배의 정비가 이뤄진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칠천량 이후 한 달이 흘렀다. '회령포에서 시작된 열두척의 기적!'이라는 주제를 내거는 등 해마다 9~10월, 장흥 회진항에서는 관련 축제가 열린다, 작고한 이청준 작가, 작가 한강의 아버지로 젊은이들에게는 알려진 한승원 작가의 고향마을이다. 이청준 원작 소설과 영화 <천년학>의 배경이기도 하다)
[19일]맑음. 여러 장수들이 교서에 숙배하는데, 배설은 교서를 위하여 지영(祗迎)하여 절하지 않았다. 그 능멸하고 오만한 태도가 이루 말할 수 없기에 그의 영리에게 곤장을 쳤다.('지영'은 공경하여 맞이한다는 뜻. 이날 비로소 충무공은 12척의 배를 인수한 것으로 보인다. 수사 배설의 머뭇거림이 심상치 않다. 왜 그러는 것일까? 차마 수하 장수를 욕보일 수는 없고, 그의 부하에게 곤장을 내리는 마음을 편찮아 보인다.)

 

회령포(장흥 회진)에서 한 달 만에 무사히 12척의 전선을 인수

이후 배설과 관련된 '부분' 위주로 살핀다. 전후 과정은 영화 <명량>를 떠올려도 좋고, 후반부는 오늘날 이름난 포구기행의 여행지들이기도 한데(낚시 프로그램에 얼마나 자주 나오나), 충무공이 항해한 동선에도 어떤 의미가 있다. 8월 27일, 해남 어란포에 머물 때다. 이미 12척의 배와 장수들이 이곳에 집결했고, 가끔 교전이 이루어진다.

 

<8월> [28일]맑음. 적선 여덟 척이 뜻하지 않게 들어와 여러 배들이 두려워 겁을 먹고 피하려고 하니, 경산 수사(배설)가 피하여 후퇴하려고 하였다. 나는 꼼짝 않고 있다가 적선이 바짝 다가오자 호각을 불고 깃발을 지휘하며 뒤쫓게 하니, 적선들이 물러갔다. 갈두(葛頭)까지 쫓아갔다가 돌아왔다. 저녁에는 장도(獐島)에 옮겨 머물렀다. [29일]맑음. 아침에 벽파진(碧波津)으로 건너갔다.('벽파진'은 전남 진도군 고군면 벽파리) <9월> [2일]맑음. 정자에 내려가 앉았는데, 포작 전세가 제주에서 와서 인사했다. 이날 새벽에 배설이 도망갔다.(벽파정은 최근에 복원되었다. 이렇게 충무공과 수사 배설과의 인연은 끝난다) [14일]맑았으나 북풍이 거세게 불었다. 임준영이 육지를 정탐하고 달려와서 말하기를(이 첩보에 따라, 먼저 우수영 부근으로 전령선을 보내 피란민들을 이동하게 한다) [15일]맑음. 밀물이 들었다. 여러 배를 거느리고 우수영 앞바다로 들어가 거기서 머물렀다. 밤에 꿈에 이상한 징조가 많았다. [16일]맑음.(명량해전 당일) …… 매우 천행한 일이었다. 우리를 에워싸던 적선 서른 척도 부서지니 모든 적들이 저항하지 못하고 다시는 침범해 오지 못했다. 그곳에 머무르려고 했으니 물이 빠져 배를 대기에 적합하지 않으므로 건너편 포(浦)로 진을 옮겼다가 달빛을 타고 당사도로 옮겨서 정박하여 밤을 지냈다.

 

해전 당일 도착한 ‘'당사도'는 전남 신안군 암태면 당사도(唐沙島)다. 8월 24일 회령포를 출발하여(마침내 수군의 지휘관으로 항해를 지휘한다), 해남 어란진에서 머물다가, 8월 29일, 진도 벽파진으로 건너갔다. 그리고 9월 15일 해전 하루 전에 해남 우수영으로 건너간다. 전투 준비가 벽파진에서만 이뤄진 것은 아니다. 다만, 당일(9월 16일) 전투를 치르고, 곧장 신안군의 당사도까지 진을 물린다. 왜의 수군을 완파한 것은 아닐 것인데, 왜군들의 횡포(화풀이)는 오죽 했을까 싶다. 이후 <9월> [17일]여오을도(汝吾乙島:신안군 지도면 어의도) →[19일]칠산도(七山島:영광군 낙월면)→법성포 선창→홍룡곶(洪龍串:영광군 흥농읍 계마리), →[21일]고참도(古參島:부안군 위도면 위도) →[21일]고군산도(古群山島: 군산시 옥도면 선유도)로 이동.

 

[해전 당일 신안군(당사도)까지 진을 물려, 왜군들의 횡포는 오죽 했을까?

이후 선유도에 며칠 머무르며, 대첩에 관한 장계를 작성하여 보낸다(27일). 10월 2일에는 아들 회가 고향으로 떠나고, 10월 3일 변산(邊山: 전북 부안군 변산반도)을 거쳐 법성포 선창에 이른다. 『난중일기』는 따로 요약할 것도 없이 길이도 짧고 문체도 간결하다. '난중(亂中)'인 상황에 쓴 일기이기에 그렇고, '9월 22일. 맑음'과 같이 날씨만 밝히고 끝맺은 날도 다수 있다. 이것을 '평화'라고 해야 할까? 병사들이 쉬어야 하고, 배들도 정비하고, 장계(보고서)도 써야 하니까, 특히, 9월 22일~25일, '맑음'이란 단어로 끝내는 일기에서는 말하지 않은 것이 더 많이 말하는 듯하다. 겨우 장례만 치르고(그것마저도 천행으로 '백의종군'의 길에서), 이후 그나마 고향 가까이(후방이긴 하지만) 항해한 데서는 아들 이순신의 죄책감과 회한이 느껴진다. 글머리에 인용한 충무공의 장계(이분의 「행록」)의 내용은 이러하다.

 

"임진년부터 5년, 6년 간 적이 감히 호서와 호남으로 직공하지 못한 것은 수군이 그 길을 누르고 있어서입니다. 지금 신에게 아직 전선 열두 척이 있사오니(尙有十二 상유십이) 죽을 힘을 내어 막아 싸우면 이길 수 있습니다. 지금 만약 수군을 모두 폐한다면 이는 적들이 다행으로 여기는 바로서, 말미암아 호서를 거쳐 한강에 다다를 것이니 소신이 두려워하는 바입니다. 전선이 비록 적으나, 미천한 신이 아직 죽지 않았으니(微臣不死 미신불사) 적들이 감히 우리를 업신여기지 못할 것입니다."

 

지금의『난중일기』에는 없는 내용이다. 유사시 보안 문제를 염두한 것처럼, 조심스럽다. 더구나 임금에게 보낸 장계를 일기에 수록할 수는 없는 일. '상유십이(尙有十二)'다. 아직 열두 척의 배가 남아 있다. 그리고 미신불사(微臣不死)다. "미천한 신이 아직 죽지 않았으니" 희망은 있다는 얘기다. 이제 비로소 영화 <명량>의 한 장면이 가슴 깊이 다가온다. "저토록 몰염치한 임금한테 말입니까?"라고 재우쳐 묻는 아들 회에게 충무공은 대답한다. 

 

“-무릇 장수된 자의 의리는 충(忠)을 쫓아야 하고 충은 백성을 향해야 한다.
임금이 아니고 말입니까?
-백성이 있어야 나라가 있고, 나라가 있어야 임금이 있는 법이지.“

 

잠시 고대 그리스로 가자. 펠론폰네소스전쟁 발발이 기정사실이 되었을 때, 페리클레스가 아테나이 인들 앞에서 행한 연설이 있다. 그 유명한 전몰자를 위한 추도연설(전쟁사 Ⅱ권) 이전의 연설이다. 라케다이몬에서 온 마지막 사절단이 왔을 때다. 그들은 평화조약을 깬 것은 자신들이 아니라는 명분을 쌓고 있다. 아테나이인들은 사절단을 물리고, 자기들끼리 대책을 논의하는데, 페리클레스의 연설에 주목할 부분이 있다.

 

"우리가 슬퍼해야 할 것은 집과 영토를 잃는 것이 아니라 사람 목숨을 잃는 것입니다. 집과 영토가 사람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집과 영토를 만들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내가 여러분을 설득할 자신이 있다면, 여러분이 나가서 손수 여러분의 재산을 파괴함으로써 여러분이 재산 때문에 펠로폰네소스인들에게 복종하는 일이 없을 것임을 보여주라고 권하고 싶소."

-투퀴디데스, 『펠로폰네소스 전쟁사』1권 143장(5)

 

“집과 영토가 사람을 만드는 게 아니라 사람이 집과 영토를 만든다.”

 

스파르테는 육군이 워낙 강하다. 그러므로 우리는 여차하면 우리 자신을 섬 주민으로 여기고 "영토와 집은 포기하되" (우리 아테나이는 해군이 주력이므로) "바다와 도시는 지켜야" 한다고 주장한다. '겨우' 열두 척이 아니라 '천행으로' 남은 '열두 척'의 배를 오롯이 인수하기 위해, 노심초사하는 충무공의 마음을 읽었다. 그러나 어찌 배의 많고 적음이 문제이겠나. 누가 어떻게 지휘하느냐에 따라, 곧 전쟁의 승패는 사람의 문제임을 충무공의 장계는 은근히 주장하고 있으며, ‘압박’하고 있다. '열두 척의 전선'을 인수하기까지 충무공은 한시도 마음을 놓지 못한다. 신중하게 그리고 조심스럽게 경남우수사 근황과 심기를 살핀다. 정유년 8월 19일. 회령포에서 배설에게서 배를 인수하고는, 임금이 내린 교서에 예의를 지키지 않는다는 것을 구실로, 그의 부하에게 곤장형을 내리는 충무공의 지시, 충무공의 마음에서 배설은 그날 그 순간 사라진, 죽은 목숨인 것이다.

 

백자 달항아리 만지듯, 배설의 심기관리하며 12척 전선을 인수하는 충무공

광화문 광장의 이충무공의 동상과 세종대왕상의 위치를 옮기는 문제로 의견대립을 하는 모양이다. 중지를 모아야 하리라. 다만, 당신들의 유지를 기리는 방법은 눈에 보이는 상징물에만 있는 것은 아니다. 충무공을 기리며 우선 추구할 것은 국가 안보다. 곧 한반도의 평화를 위한 한 걸음 한 걸음 나아가는 일이다. 한반도 평화를 위해서는 남북갈등의 해결이 급선무인데, 이처럼 절호의 기회를 가로막는 남남갈등, 이를 부추김으로서 기득권을 지키려는 세력들을 어떻게 볼 것인가? 반대를 위한 반대로 일관하는 이들이 문제다. 두 분의 상징물이 어디에 있든, 한반도 냉전의 지속가능을 바라는 이들은 충무공의 유지를 거론할 자격이 없다. 이런 생각으로 『난중일기』를 일부나마 다시 읽었다. 속은 쓰리지만 겉으론 조심조심 백자 달항아리를 다루듯, 배설을 관리하며 열두 척의 배를 안전하게 인수하는 이충무공의 마음과 행보, 당면한 한반도 평화도 그렇게 만들어가야 하는 것이 아닐까?

=이 글은 이어질 가제목 <서사시 『일리아스』 속 ‘열두 척의 배’들>에 대한 머리말을 쓰다가 길어진 글임을 다시 밝힙니다. 완성후 이 자리에 링크해놓을게요. <필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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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meroad 2019-03-26 16: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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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리아스 원전으로 읽는 순수고전세계
호메로스 지음, 천병희 옮김 / 도서출판 숲 / 201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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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일리아스]<네 번의 결혼식과 한 번의 장례식>(Four Weddings and a Funeral, 1994)이란 특별한 이름의 영화가 있었다. 그런데 『일리아스』(이하 <일리아스>)에는 특별한, 세 번의  '아흐레'와 세 번의 '열두 번째 되는 날(아침)'이 등장한다. <일리아스>라는 작품 속 시간 이야기다. 무슨 얘기이신가, 하실 분들이 있을 것인데, 여러 번 읽다보니 문득 보이는 ‘발견’이랄까, 그런 규칙이 있는 듯하다. '아흐레(9)는 정수 기본 수 가운데 극수라는 점에서 어떤 의미가 있는 듯하고, 열두 번째(12) 되는 날은 문제가 해결되는 날이다. 다시 말해 아흐레 되는 날은 ‘슬픔’이든 ‘역병’이든 ‘시신훼손’이든 갈등이 극에 치닿는, 서사장르 구성의 '절정'이라고 해야 할까? 그동안 <일리아스>를 읽으면서 발견한 것들을 정리해본다. 

 

No01."열 이틀째 되는 날 다시 올륌포스로 돌아오실 것인즉"
테티스가 아들 아킬레우스에게 당부하는 말이다.  아가멤논의 교만(한 말과 행동) 때문에 촉발된 아들의 분노는 위험천만한 것이다.

 

"그동안 너는 빨리 달리는 함선들 옆에 앉아 아카이오이족을

원망하며 전쟁에는 일절 관여하지 마라."(『일리아스』 1권: 421-422행)
회의장에도 전장에도 나가지 말고 함선들 옆에 꼭 붙어 있으라, 신신당부를 하는 것. 아킬레우스의 분노가 극에 이르렀을 때, 여신 아테네가 올룀포스에서 내려와 제지하지 않았다면 아킬레우스는 아가멤논을 단칼에 베어버렸을 것이다. 어쨌든 '그동안'이란 대체 며칠을 얘기하는 것일까?

 

"제우스께서는 어제 나무랄 데 없는 아이티오페스족의 잔치에

참석코자 오케아노스로 가셨고, 다른 신들도 모두 따라갔다.

열 이틀째 되는 날 다시 올륌포스로 돌아오실 것인즉," (1권: 423-425행)

비로소 ‘그동안’을 가늠해볼 단서와 숫자가 등장한다. '어제' 제우스가 신들을 거느리고 올룀포스를 떠나, 12일 동안의  여행을 시작했다. 오늘은 제외하고, 내일부터 10일째 되는 날, 테티스는 제우스를 찾아가 청원하겠다고 한다. <일리아스>에서 처음 등장하는 '열 이틀째 되는 날'이다. 그리고 오늘은 역병에서 벗어나기 위해 아킬레우스가 소집한 회의가 열렸는데, 역병에서 벗어날 길을 찾은 날이다. 역병이 발생한 지 아흐레는 이미 흘렀고, 오늘이 10일째 되는 날이다. 역병에서 벗어날 방법은 찾았지만, 회의를 주도하는 아킬레우스가 미운 아가멤논은 그에게서 브리세이스를 빼앗고, 분노가 촉발되는 바로 '그날'이다. 아폴론이 보낸 역병에서 더 이상 헤어날 수 없음을 깨닫기까지 9일은 임계점으로 해석한다. 9는 기본수 가운데, 극수로 '무한', ‘영원’ 등을 상징한다. 역병이 그리스 군을 전멸시킬 수 있음을 암시하는 무시무시한 숫자인 것, 그런데 제우스는 하필 이날을 잡아 약속이라도 한 듯, 출장을 떠난 것이다. 오늘로부터 11일째 되는 날 아침 제우스는 돌아오고 테티스는 지체 없이 올룀포스에 올라, 아들의 명예회복을 위한 청탁을 한다. 아킬레우스에게 '그동안'은 11일쯤이 된다. 또한 역병 발생시점부터 20일째 되는 날, 아킬레우스-테티스의 청원은 접수된다. 

 

No02."열두 번째 아침이 밝았건만 그의 살은 조금도 썩지 않았으며"
이제 <일리아스> 24권(몸값을 주고 헥토르의 시신을 돌려받다)으로 가보자, 24권은 그 이야기 전개가 1권과 대칭 혹은 대조를 이룬다는 것은 널리 알려져 있다. 그런데, 또 하나의 '열두 번째 되는 날'이 24권에서도 등장한다. 앞서 22권에서 헥토르를 죽임으로써 절친의 복수를 하고, 23권에서 아킬레우스의 장례를 치른다. 그리고 그는 절친을 추모하는 장례경기를 제안하고 주관한다. 그동안에도 헥토르 시신은 아킬레우스의 막사 부근에 방치되어 있다. 그런데 아직도 그의 분노는 여진처럼 남아 헥토르의 시신을 욕보인다. 그것은 분노이고, 그리움 때문이다. 파트로클로스에 대한 그리움으로 밤새도록 잠을 이루지 못하고 뒤척이던 아킬레우스는, 새벽녘이 되면 갑자기 일어나 헥토르의 시신을 전차 뒤에 매달고 그의  무덤 주위를 세 바퀴씩 돌며 분을 삭인다.

 

"그러면 그는 날랜 말들에게 전차 밑에서 멍에를 얹고는/ 끌고 다니기 위해 헥토르를 전차 뒤에 매달았다./ 그러고는 헥토르를 끌고 죽은 파트로클로스의 무덤을 세 번/ 돌고 나서 다시 막사로 돌아와 쉬었고, 헥토르는 먼지 속에/ 엎드러져 길게 누워 있도록 내버려두었다."(24권: 14-18행)

'세 번'도 <일리아스>에서는 유의해서 살펴야 할 숫자이다. 하지만 이번에는 그냥 넘어가자. 이와 같은 일을, 장례식 이튿날 새벽부터 열두 번째 날의 새벽까지 하루도 거르지 않고, 아킬레우스가 하고 있다(12일의 기점을 어디로 잡을 것인가, 좀 더 살펴야). 누구도 말릴 수 없다. 발칵 뒤집힌 곳은 올룀포스다. 신들 대부분은 헤르메스를 보내 그의 시신을 빼내자는 주장하나 헤라와 포세이돈과 아테네는 완강하게 반대한다(이들은 그리스 군을 지원하는 대표 신들이다).

 

"그들에게는 신성한 일리오스와 프리아모스와 그의 백성들이/ 알렉산드로스의 죄 때문에 여전히 처음처럼 미웠으니,/ 그는 이들 여신들이 그의 농장을 찾아갔을 때 이들을 모욕하고/ 파멸을 초래할 색욕(色慾)을 그에게 준 여신을 찬양했던 것"(24권, 27-30행)

두 여신의 뒤끝도 상당하다. '파리스(=알렉산드로스)의 선택'(사과)에 대한 앙금이 여전하다. 헥토르는 파리스의 형인 것이다. 이제 트로이아를 지원하는 아폴론이 나서서 반대 의견을 개진한다.

 

"아킬레우스는 동정심도 수치심도 없는 자요. 수치심은/ 사람들에게 손해가 되기도 하지만 큰 이익이 되기도 하지요./ 생각건대, 많은 사람들이 그보다 더 소중한 사람을/ 이를테면 동복형제라든가 또는 아들을 잃었소./ 하지만 그들의 눈물과 슬픔에도 한계가 있었소."(24권: 44-48행)

갑론을박 중이지만 신들의 중론은 아킬레우스가 신들도 용납할 수 없는 어떤 선(線)을 넘었다는 것. 그런데 신들은, (테티스가 왔을 때 제우스가 하는 말) "헥토르의 시신과 도시의 파괴자 아킬레우스를 둘러싸고/ 아흐레 동안 불사신들 사이에 시비"(24권 107-108행) 중이다. 여기서도 '아흐레'는 더 이상 방치할 수 없는 '임계점'으로 작동한다. 1권에서 역병에 휩쓸린 날들처럼. 아킬레우스가 짐승처럼 행동하는 시간들, '미친 날들'이기도 하다. 아킬레우스가 제 맘대로 헥토르의 시신을 훼손하는 날들이 '아흐레'라고 봐야 할 것이다. 헤라의 끈질긴 반대에도 제우스가 조율하는데, "아킬레우스 몰래 헥토르의 시신을 빼내는 일은 하지 않는" 조건으로 해결책을 낸다. 마침내 (1권에서와는 역순으로, 강대진, 『일리아스, 영웅들의 전장에서 싹튼 운명의 서사시』을 참조하시라.) 제우스는 전령을 보내 테티스를 부르고, 이 여신을 통해 아들(아킬레우스)을 설득한다. 프리아모스가 장남(헥토로)의 시신을 찾기 위해, 모든 것을 내려놓고 아킬레우스의 막사를 찾는데, 신들이 그리 진행되도록 손을 써놓은 것, 어쨌든 이 글에서는 12일이 중요하므로, 전령 헤르메스가 프리아모스를 안심시키는 다음을 보자.

 

"노인장! 그는 아직 개들이나 새들의 밥이 되지 않고/ 여전히 아킬레우스의 함선 옆 막사들 사이에/ 처음 쓰러진 그대로 누워 있소. 그가 누운 지 벌써/ 열두 번째 아침이 밝았건만 그의 살은 조금도 썩지 않았으며/ 전사자들을 파먹는 구더기들도 꾀지 않았소./ 신성한 새벽이 다가올 무렵이면 아킬레우스가/ 사랑하는 전우의 무덤을 그를 끌고 사정없이 돌았지만 그를/ 손상시키지 못했소. 직접 가서 보시게 되면 놀라실 것이오."(24권: 411-418행)

어쨌든 이 시신훼손을 포함, 시신반환으로 사태가 일단락까지 소요된 시간은 열두 날이다. 열두 번째의 아침. 대체 왜 이런 것일까? <일리아스> 작품 속 시간은 또 한 번 12일을 만난다. 그런데, 여기가 끝이 아니다.

 

No03."열 이틀째 되는 날에는 양군이 전투를 개시해도 될 것"
헥토르의 시신을 돌려주면서 아킬레우스는 프리아모스 왕에게 묻는다.

 

"고귀한 헥토르의 장례를 치르자면 며칠이나 걸리겠소?

그동안은 나 자신도 쉴 것이며 백성들도 붙들어두겠소"(24권:  657-658행)

뜻밖의 제안이다. 트로이아 군은 도성에 갇힌 상태라, 화장할 땔감을 구하려면 도성 밖으로 나가야 한다. 프리아모스는 가능하다면 12일을 요청한다. 그들은 '아흐레' 동안 헥토르의 죽음을 슬퍼하다가, 열흘째 되는 날 그를 땅에 묻고 백성들에게 조문객들에게 음식을 대접하고, 열 하루째 되는 날 무덤을 만들어 줄 예정이다. 그리고 열 이틀째 되는 날에는 양군이 전투를 개시해도 될 것이라고.

 

"아흐레 동안 우리는 집에서 그의 죽음을 슬퍼하다가
열흘째 되는 날 그를 땅에 묻고 백성들에게 음식을 대접하고
열하루째 되는 날 그를 위해 무덤을 만들어줄 것인즉,
열이틀째 되는 날 꼭 필요하다면 우리는 싸울 수 있을 것이오.”(
24권:664-667)

아킬레우스는 기꺼이 헥토르의 장례절차를 밟도록 12일 동안의 휴전을 약속한다. 여기서도 아흐레 동안 죽음을 슬퍼하겠단다. 대단한 애도, 헥토르를 영원히 추모하겠다는 뜻이 된다. <일리아스>에서 만나는 세 번째의 특별한 열 이틀째 되는 날이다.

 

"이렇게 그들은 말을 길들이는 헥토르의 장례를 치렀다."(24권 804행)

이 한 행은 <일리아스> 1~24권, 대단원의 막은 내린다. 특히, 세 번째의 열두 날은 제우스의 뜻이 아니다, 인간 아킬레우스가 연민과 배려가 12일의 장례 기간 허용이다. <일리아스>를 성숙한 인간으로 변화하는 아킬레우스에 초점을 맞춰 일종의 '성장소설'이라고도 하는 데 가장 빛나는 대목이다.

 

이제 <일리아스>의 날들을 정리하자. 본격적인 전투의 날들은 4일이다. 그 앞에 전투 이전, 그 뒤에 전후이후로 <일리아스>는 3분되는데, 흘렀거나 흐른 것으로 여기는 세 번의 12일은 36일, 4일간의 전투를 포함하면 40일. 앞서, 역병에 속수무책으로 시달린 작품 이전의 아흐레(9일)를 포함하면 대략 50여 일이 <일리아스>라는 작품 속 시간이다. 10년 전쟁에 비하면 참 짧다. 왜 그런지, 그 의미가 무엇인지는 사례들을 좀 더 제시한 다음에 정리하기로 하자. <일리아스>에는 세 번씩의 특별한 '아흐레'와 열두 번째 되는 날 아침이 등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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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ren 2019-03-24 20:54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숫자로 살펴보는 일리아스도 재미있군요.

아흐레, 열두 번째, 말고도 ‘아홉 해‘도 몇 차례 등장하는지 궁금합니다.
전쟁이 아홉 해 동안 교착 상태였던 데 대해서는 2권에서만 하더라도 두 차례나 언급되어 있더군요.

어느덧 위대한 제우스의 아홉 해가 흘러
선재는 썩고 밧줄은 풀어지고 말았소이다.
(제2권 134-135)

뱀이 참새 새끼 여덟 마리와 그 새끼들을 낳은
어미를 합쳐 모두 아홉 마리를 집어삼켰듯이,
우리도 아홉 해 동안 그곳에서 전역을 치를 것이나
열 번째 되는 해에는 길 넓은 도시를 함락하게 될 것이오.
(제2권 326-329)

timeroad 2019-03-25 08:30   좋아요 1 | URL
그렇습니다. 숫자에 대해 동서양의 관념은 좀 다른 듯 하지만 닮은 점도 있는 듯하고요. 영국이 청나라에 홍콩의 조차기간을 99년으로 요구한 것은 긍정이면서 부정적인 두 의미를 다 가진 것이 아닌가, 싶기도 하고, 취재는 되어 있으니 시간이 닿는대로 올릴게요. 감사합니다.

oren 2019-03-25 23:21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일리아스』를 뒤적이다가 또 하나의 ‘아흐레‘를 발견했네요.
글라우코스와 디오메데스 사이의 무구 교환이 나오는 대목에서,
글라우코스가 자신의 출신 내력을 설명하는 대목입니다.

이윽고 뤼키아와 크산토스의 흐름에 이르렀을 때
광대한 뤼키아의 왕이 그분을 진심으로 존중해주었소.
왕은 그분을 위하여 아흐레 동안 잔치를 벌이며 황소 아홉 마리를 잡았소.
그러나 장밋빛 손가락을 가진 새벽의 여신이 열 번째 나타났을 때
왕은 자기 사위인 프로이토스로부터 무슨 표지를 가져왔느냐고
그분에게 묻고 그것을 보여달라고 했소.
(6권 172-177)

timeroad 2019-03-26 18:43   좋아요 1 | URL
그렇군요. 뭔가 있기는 한 것 같은데, 감사합니다.

ransky 2019-05-11 17:1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김옥균을 상해에서 살해한 자가 프랑스 유학자 홍종우였음은
명성왕후의 끈질긴 복수심의 끝판이었고
자객고영근 또한 면성왕후의 심복이었으니!

timeroad 2019-05-13 19:52   좋아요 0 | URL
그러게 말입니다. 인류 최고의 최초의 고전이 분노와 복수의 이야기라는 것이 예사롭지 않지요? 꼭 막장드라마가 아니라도 기본적으로 최근의 흥행하는 영화나 드라마의 골조도 그렇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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