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온 / 크라튈로스 원전으로 읽는 순수고전세계
플라톤 지음, 천병희 옮김 / 도서출판 숲 / 201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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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라톤의 대화편 <크라튈로스>, 부제는 '이름의 올바름에 관하여'인데, 주제를 잘 드러내 준다. 일부 학자들은 이 대화편의 주제를 '언어의 기원'에 대한 것으로 보는데, 이는 부수적인 논의거리일 따름이다. 이 대화편에서는 '이름'의 사례로 주로 고유명사와 일반명사를 예시하지만, 형용사들에, 심지어 동사들에 적용되기도 한다. 이제이북스 옮긴이들(『크라튈로스』,김인곤, 이기백, 2007)은 작품해설에서 때문에 '이름'을 외연이 넓은 '낱말'로 번역하는 것이 나을지도 모르겠다고 한다. 이 대화편의 주제는 이름이 (1)'있는 것들' 각각에 자연적으로 있는가, 아니면 (2)합의나 관습에 의해서 있는 것인가 하는 것이다. 이 문제에서 크라튈로스는 '자연주의'(1)라 불리는 입장에 서고, 헤르모게네스는 ‘규약주의’(2)라 불리는 입장을 견지한다. 이를 풀어서 설명해보자.
또 하나의 원전번역 『이온/크라튈로스』(,천병희, 숲, 2014)의 책 정보에 따라 좀 더 풀어서 설명해보자, <크라튈로스>는 사물들의 이름이 어떻게 붙여지는지에 관한 이야기이다. 사물은 자연의 본성에 따라 저마다 올바른 이름이 본래 따로 정해져 있으며, 그에 맞지 않다면 이름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크라튈로스의 견해다. 앞서 ‘자연주의’라 했다. 이와 달리 이름은 그 대상의 본질과 상관없이 사회적 합의와 관습으로 만들어진다, 헤르모게네스의 주장으로 앞서 '규약주의'라 불렀다. 그렇게 부르기로 하자, 일종의 약속이라는 얘기다.
말과 언어의 근간이 되는 이름(낱말)에 대해, 왜 그 이름을 그렇게 부르게 되었느냐와 관련된 플라톤의 대화편을 읽는 일이 처음부터 숨이 턱 막힌다. 이런 상반된 주장을 가진 크라튈로스와 헤르모게네스, 둘 사이에서 중재하거나 논박하면서 사물의 이름에 관한 철학을 다듬는 이가 소크라테스이다.
여기까지는 그런대로 왔다. 그런데 앞서 부제를 소개할 때 '이름의 올바름'이란 말부터가 불편했다. 그렇다고, '이름에 관하여'라고 할 수도 없으니, '올바름'이 대체 무슨 의미인지를 정확히 파악해야 해야 한다. 자세한 해설을 수록한 이제이북스의 작품해설에는 이를 '어떤 이름이 올바른 이름이 되게 해 주는 것(1)' 또한 올바른 이름을 판별하는 기준, 곧 '올바른 이름의 기준(2)'이라고 나와 있다. 그러니까 이 대화편의 부제는 전자에 따르면 ''어떤 이름이 올바른 이름이 되게 해주는 것에 관하여'가 된다. 언어에 관해 논한 최고(最古)의, 주용한 문헌들 중 하나답게 쉽지 않다. 어쨌든 앞서 '언어의 기원'에 관한 논의만이라도 볼 수 없다고 하였거니와 철학의 심오한 분야에까지 논의는 깊어지고 있다. 1)인식론적 문제, 2)존재론적 문제, 여기에 3)언어학의 문제까지 아우르는 플라톤의 사상을 접할 수 있다는 것.
그러나 천리 길도 한걸음부터다, 이제이북스(작품해설)에는, 대화편 초반부에 소개되는 두 상반된 주장을 다음과 같이 정리한다. 먼저 크라튈로스의 견해다.
1)있는 것들 각각에는 이름의 올바름이 본래 자연적으로 있다.(객관적으로) 
2)이름은 사람들이 합의하고서 붙이는 것이 아니다.(규약주의가 아님)
3)이름의 올바름은 본래 있으며, 그것은 그리스 사람과 이민족 사람 그들 모두에게 똑같은 것이다.(보편적으로)

이에 헤르모게네스는 객관성과 보편성을 모두 부정한다.
1)이름의 올바름은 합의와 동의에 의해 정해진다.(자연주의가 아님) 
2)누군가가 어떤 것에 무슨 이름을 붙이든 그것은 올바른 이름이다.
3)어떤 이름도 각각의 것에 본래 자연적으로 있는 것이 아니고, 규칙과 관습에 의해서 있는 것이다.

그런데, 규약주의에 입각한 주장 중 2)번은 틀을 벗어난 것처럼 생각된다. '개인의 의지에 따라 이름이 붙여진다는 입장'이 좀 그렇지 않은가! 자의(恣意)적인 이름붙이기까지 포함해야 한다니…….  그러나 이 대화편은 '자기 자신과의 합의'도 고려한다(435a), 곧 규약의 범위를 넓게 잡을 수도 있다고 하므로, 그렇게 틀인 주장이 아닐 수 있다. (천병희의 번역 해당 부분을 보자. ‘그게 사실이라면 자네는 자네와 합의를 한 것이고, 이름이 올바름은 자네에게는 합의의 문제가 되었네.’ …… 관습은 닯은 이름들 뿐 아니라 닮지 않은 이름들도 사물들을 표현할 수 있게 해주는 것 같으니까. 435a에서 소크라테스는 크라튈로스를 논박하고 있다. 논박 과정에서 크라튈로스가 헤르모게네스의 주장에 일부 동의하게 되는 것이다.)
이처럼 소크라테스는 대체로 크라튈로스의 견해를 지지하나, 헤르모게네스의 규약주의를 논박한 다음, 크라튈로스의 자연주의적 견해도 논박하여 이론을 정리해간다.
이제 훌쩍 건너뛰어, 거의 결론 부분을 살펴보자.

 

"소크라테스: 잠깐만! 잘 지어진 이름들은 이름 지어진 사물들을 닮았으며, 그래서 그런 사물들의 상(像)이라는 데에 우리는 누차 동의하지 않았나?
크라튈로스: 그랬지요.
소크라테스: 만약 이름들을 통해서도 사물들에 관해 배울 수 있고, 사물들 자체를 통해 사물들에 관해 배울 수도 있다면, 어느 쪽 배움이 더 훌륭하고 명료할까? 상(像)에서 상 자체가 훌륭한 모방물인지 배우고 그것이 모방하는 진리를 배우는 쪽인가, 아니면 진리에서 진리 자체를 배우고 진리의 상이 제대로 만들어졌는지 배우는 쪽인가?
크라튈로스: 진리에서 배우는 것이 더 좋을 수밖에 없겠지요.
소크라테스: 사물들에 관해 어떤 방법으로 배우고 알아내야 하느냐는 어쩌면 나와 자네가 감당하기에는 너무나 큰 문제인 것 같네. 그러니 우리는 사물들을 통해 그렇게 하기보다는 사물들 자체를 통해 그렇게 하는 편이 더 바람직하다는 결론에 이르게 된 것으로 만족해야 할 걸세. 439a-b, 175~176, 천병희)"

 

앞서, 이 대화편은 3)언어학의 문제는 기본이고, 인식론적 문제, 존재론적 문제까지 포함하고 있다고 했다. 논의의 출발범에서와는 논점이 달라져 있을뿐더러 길이가 달라짐을 발견할 수 있다. 어떤 사물(사태)을 무엇이라고 부르는 '이름'에 대한 논의에서 '상(像)에서 상 자체'란 말이 등장하고, '모방'을 거론한다. 때문에 이 대화편의 집필시기에 대해 의견이 분분할 수밖에 없다. 일단 대표적인 중기 대화편인 『국가』의 유명한 논의(동굴의 비유)를 떠올려보라.
이제이북스(작품해설)에 따르면, <크리튈로스는 중기 대화편의 측면뿐만 아니라 후기 대화편의 측면도 갖고 있는데, 세들리의 주장이 설득력이 있다는 것. 곧 "플라톤이 후기(말년)에 이 대화편의 초판을 수정했을 것이라는 가정"이 유력한 해석이란다. 이제 앞서 인용을 좀 더 살펴보자.

1)상(像)에서 상 자체가 훌륭한 모방물인지 배우고 그것이 모방하는 진리를 배우는 쪽인가,
2)아니면 진리에서 진리 자체를 배우고 진리의 상이 제대로 만들어졌는지 배우는 쪽인가?

이에 앞선 선택지를 정리하면
1)만약 이름들을 통해서도 사물들에 관해 배울 수 있다.
2)사물들 자체를 통해 사물들에 관해 배울 수도 있다.

(아래) 1)과 2) 가운데, 어느 쪽 배움이 더 훌륭하고 명료할까? 이렇게 물었다. 그리고 이 선택지를 부연한 것이 앞서 (위)1)과 2)로 정리한 것이다. '상(像)'은 곧 이름(낱말)을 말한다. 진리 그 자체가 아니라 그것을 모방한 상(象)처럼, 사물(사태) 그 자체를 지시하고 그에 대입하는 이름이 있는 것.

"이름의 한계: 아무리 적절하고 적합하며 훌륭한 그에 걸맞은 이름(象)이라도

그 사물 자체를 오롯이 대치(代置)하는 데 한계가 있다는 얘기'로 읽혀"

A라는 사물의 생김새나 쓸모 등을 고려하여 그 [A]라는 이름을 붙였다. 누가 봐조 [A]라는 이름(을 통해)으로 사물 A를 떠올릴 수 있고, 사물 A를 파악할 수 있다. 또한 이러니러한 A라는 사물(사태, 현상)를 [A]라고 부르기로 하여 [A]라고 부르는 경우도 있다. 이름을 붙이는 데 있어 규약주의척인 측면을 전적으로 배제할 수 없다는 얘기다.
위 인용(439a-b)을 달리 얘기하면(또 다른 비유를 하기가 좀 그렇지만) ‘손가락이 달을 가리키는데 달은 보지 않고 손가락 끝만 본다’는 불교의 『능엄경』의 유명한 비유가 떠오른다. 손가락 끝이 ‘이름’이고, ‘달’은 이름이 지칭하는 ‘사물 그 자체(진리 자체)’가 된다. 달을 보라는데 손가락 끝을 보고 달이라고 우기는 것처럼, 아무리 적절하고 적합하며 훌륭한 그에 걸맞은 이름(象)이라고 해도 그 사물 자체를 오롯이 대치(代置)하는 데 한계가 있다는 얘기로 읽힌다.
우선은 사물들의 이름이 어떻게 붙여지는지에 관한 두 견해, '자연주의(크라튈로스) VS '규약주의'(헤르모게네스)' 두 견해를 논박하는 소크라테스의 논박 과정을 살피는 것만으로도 '의미 있는'한 첫걸음을 내딛을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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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Book] 푸른 용과 강과 착한 물고기들의 노래 문학동네 시인선 117
곽재구 지음 / 문학동네 / 201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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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이 만발한 감자밭, 순풍을 받고 달리는 범선, 아기를 낳고 난 뒤의 여인. 가장 아름다운 세 가지 광경이다', 이것은 에이레의 속담이다. '(이거) 왜이래!'가 아니고, 에이레다. 이 나라의 정식명칭은 아일랜드공화국(Repubilc of Ireland)으로, 게일어로 에이레(Eire)다. 수도는 더블린(Dublin). 에이레라고 할 때는 낯설더니 검색하자마자 '아일랜드'에 이어 '더블린'이 나타나고, 곧 익숙해진다. 대서양의 영국 서부에 아일랜드 해를 사이에 두고, 동북쪽 북아일랜드와 접하여 있는 도서국가로, 해안선의 길이는 1448㎞라고. ‘속담’이란 그 민족 그 국가 사람들의 생활과 밀접한 것이다. 그러므로 ‘가장’ 앞에 '세상에서'를 앞세우진 않았지만, 그들에게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세 가지가 이러하다. 그리고 그것이 왜 그러한지 알려면 최소한 이 나라의 지정학적 위치 정도는 참고해야 한다. 아이를 낳은 여인이야 어딘들 아름답지 않겠나. 이제 '감자(꽃)'와 '바다(범선)'가 남는데, 두 가지는 경제활동 곧 '풍요'와 관련 깊은 듯하다.

 

에이레의 속담에 가장 아름다운 세 가지 광경은 풍요..

필자는 농촌에서 자랐음에도 몇 년 전까지 감자꽃에 대한 기억이 없었다. 풀꽃들의 이름과 생태를 좀 안다고 자부하였기에, 놀라운 발견이었다. 감자가 주식이 아니라서 그런 것 같은데, 아일랜드에서 감자는 주요 식량자원인 듯하다. 또한 해안선이 1448㎞라니 그들의 바다는 또한 '어장'이다. 식민지를 개척하든 해상무역을 하든 수산자원을 채취하든, 바다는 경제 활동의 주무대이니 어찌 순풍에 달리는 범선을 바라보는 마음이 흐뭇하지 않을 수 있으랴. 어쨌든 아일랜드의 속담에서, 가장 아름다운 광경은 '생산'과 관련되어 있다. 누구든 몇 가지를 손에 꼽는다면 그것은 그가 소중하게 여기는 가치와 연관되어 있다. 그것도 No1, No2, No3 순으로 꼽는다.

'세상에서 가장'은 지금 이야기하려는 이 시인, 곽재구 시인의 기행수필에서 자주 접하는 '어구'이다. 『세상에서 제일 맛있는 짜장면』(창작동화집)을 오래 전에 펴낸 적도 있으니, 그렇고 그런 구절을 예시하지 않아도 되리라. 『와온 바다』(창비, 2012)에 이어 7년 만에 신작 시집을 펴내면서(『푸른 용과 강과 착한 물고기들의 노래』문학동네 2019. 1.)에서 시인은 '시인의 말'에서 세 가지를 이야기한다.
강은 흐르고/ 바람은 불고/ 새들은 노래한다

시인은 여섯 줄 가운데, 강과 바람과 새들에게 한 행씩 분양했다. 이 세 (개의) 행을 줄이면 '세계世界'가 된다. 그리고 세 행이 이어진다. 

인간인 나는 강을 따라 걷는다/ 지난 10년 내가 제일 잘한 일이다/ 시여, 푸른 용과 함께 날자

'2019년 1월 순천의 샛강 동천에서'에 쓴 시인의 말이다. 나는 곧 자아(自我)다. 10년(시간) 동안 가장 잘한 일이라는 평가가 담겨 있으며, 시업(詩業)의 정진을 스스로 응원한다. 시를 정의하여 '자아의 세계화'라고 하는데, 시인은 '시인의 말'에 으레 포함해야 할 항목들을 두루, 간명하게 시로 담았다.

 

한 행씩 분양받은 강과 바람과 새들은 '世界'가 된다

작년 여름에는 포구기행 후속편인 『신포구기행』을 낸 바 있고, 이 시집 출간에 이어 『곽재구의 포구기행』 개정판을 펴냈다(이번에는 출판사가 바뀌었다). 개정판 서문에서 세계 몇몇 나라를 여행하는 동안 자신의 기행수필을 읽고 있는 독자들을 만났을 때의 소회가 담겨 있어 눈길을 끌었다. 이제는 시인 본인도 '그러려니 한다는데', 시인은 시보다 기행수필(작가)로 널리 알려졌다. 그 바람에 '시인으로서의 정체성'을 고민하는 글을 다른 기행수필에서 읽은 기억이 있다. 그러나 필자는 곽재구 시인께 "행복한 고민을 하고 계시네요."라고 말씀드리고 싶다. 시와 산문, 시인과 산문가의 경계가 적어도 곽재구 시인에게는 오래 전부터 의미 없다고 파악하기 때문이다. 다만 작가가 있을 뿐이라고. 유려한 문체의 그의 기행수필들은 어느 한 대목 시가 아닌 곳이 없을 정도로 시와 산문의 경계를 허문 상태에 있다. 또한 그것이 시인이 가진 작가로서의 성취라고. 이번 시들 몇 편을 예를 들어 보자. 

이번 시집에서 필자가 주목한 시 가운데 하나가, <사이_상트페테르부르크의 밤>이다. (전문은 알라딘 <미리보기>에서 읽을 수 있다.)

 

사이_상트페테르부르크의 밤*

 

당신이 사랑한 사람과
당신이 미워한 사람 사이
눈이 나린다

(중략)
당신이 사랑한 사람과
당신이 미워한 사람 사이
자작나무는 자란다

(후략)

-시 <사이> 부분

이 시는 두 가지가 흥미로웠다. 하나는 시인이 7년 전에 펴낸 『와온 바다』에 수록된 한 편의 시와 연결되어 있달까, 느낌이 겹쳤다. <사랑이 없는 날>이다. 당시 필자는 그 시집 가운데 이 시가, 이  시 가운데 아래 구절이 가장 와 닿았다.
"생각한다/ 눈 오는 섬진강과 지리산 사이에/ 남과 북 사이에/ 은서네 피아노학원과 종점세탁소 사이에/ 홍매화와 목련꽃 사이에/ 너와 나 사이에// 또 무슨/ 병은 없는지"
-시 <사랑이 없는 날> 일부. 
'은서네 피아노학원'과 '종점세탁소'가 어디에 있는 가게인지 알 수 없다. 그런데 문득 시 속에 등장하는 두 간판 '사이에'를 읽는 동안 나의 미간에는 눈물이 흘렀다. 시 <사이>는 <사랑이 없는 날>과 '사이에' 뭔가를 이야기한다는 점에서만 연관성이 있다, 할 수 있을까? 어딘지 모르게 연결되어 있다는 느낌이다.
다른 하나는, <사이>를 읽는 동안 필자의 눈길은 시 본문보다는 부제 '상트페테르부르크의 밤'에 대한 설명(주석)에 더 오래 머물렀다는 것. 눈덩이 세 개를 쌓아서 만드는 눈사람, 또 그렇게 하는 이유. 나는 오히려 이것을 시로 느꼈고, 와 닿았다.

 

"동그라미 셋이 나와 너, 우리를 상징하다니" 중에서 뒷 문장만 빼면 그대로 한 편의 시가 아니겠나.

 이 시집에 첫 번째 수록된 시, <길>도 마찬가지다. 나는 이 시를 일종의 <서시>로 보는데 곁에 있고, 함께 하니 좋은 것들이 나열된다.

무신론자의 종교/ 가을의 꽃향기/ 종탑의 아기 종에게 하늘의 음계를 알려주는 초승달/ 호숫가의 나무의자/ 안나 그리고리예브나 도스토옙스카야*// 당신이 있어 세상이 참 좋았다 -시 <길> 전문

'시인이 생각하는 세상에서 가장'이라는 말이 생략되어 있다고 하자. 그런데, 이번에도 주석이 필요하다. '안나 그리고리예브나 도스토옙스카야' 대강 누군지는 알겠는데, 여행 중에 만난 새롭게 만난 그녀에 대해 또 한 편의 깨알 주석이 등장하는데,

 

곽재구 시인에겐 산문과 시의 경계가 따로 없다

한 편의 이야기 시다. 한 개의 물음표(?)는 (다른 시들이 그렇듯) 남기고 모든 마침표(.)들은 제거할 것, 그러면 한 편의 시다. 제목은 <속기사>쯤으로 하면 될 것이다. 그런데, 이 '속편'의 시와 본편의 시 <길>을 하나로 묶으면, '당신'이라는 단어로 초점이 맞춰진다. 당신이란 도스토예프스키의 아내(주석)를 말하는가? 다섯 가지 모두를 의인화하여 이르는 것인가? 아니면, 또 다른 소중한 누구에게 드리는 헌시인가? 열아홉 살에 스물다섯 살 연상인 남편과 살다가 16년 만에 혼자가 되었는데, 왜 재혼하지 않느냐는 물음에 대한 대답 말이다. "내가 도스토옙프스키와 살았는데 다른 누구와 또 살 것인가?"  관련하여 세 번째로 언급할 시는 2부 첫 번째 <징검다리>다.

 

평생 강물의 노래를 들었으나
자신의 노래를 부른 적이 없는 이가 눈보라는 맞는다
피아노의 검은 건반이 하얀 눈보라 속에 묻힌다

-시 <징검다리> 전문

자신은 한 차례도 노래를 부른 적이 없고 평생 듣기만 한 (개천에 가로놓인) 징검다리는 ‘검은 건반’으로 그것을 둘러싼 이미 내린 눈은 ‘하얀 건반’으로, 눈보라가 거세지자 ‘검은 건반(디딤돌)’이 사라지는 정황이다. 이 정도로 충분하지 않을까? 여기에도 제목 '징검다리*'에 시인의 말이 붙어 있는데, 두 면에 걸쳐 긴 이야기다. 근황과 일상을 담은 한 편의 수필이다. 앞서 언급한 두 편가 ‘주석’이면서 주석만은 아닌, 두 편의 시를 각각 품고 있다면, 이것은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가. 필자가 문득 주장했던 시와 산문의 경계를 오가는 실험인가? 앞서 시와 기행수필의 경계의 흐릿함에 대해 주장했거니와 이번 시집에서 특히 와 닿는 흐름은 시와 동시의 경계도 시인 곽재구에게는 따로 없다는 느낌이다(거론하지 않는다). 그런가 하면, <달빛>이라는 시는 절묘하여,

 

누비 홑이불 배에 덮였다
까끌까끌하고 시원한
가을 물살 같은
징검다리 곁 물고기 몇 마리가 이리 와 함께 춤추자 말할 것 같은
그런 이쁜 꽃은 지금껏 보지 못했네
누비 홑이불 밖으로
두 발을 가만히 빼본 것은 생의 우연한 일
누군가 가만히 발바닥에
고운 자기 발바닥을 대보는 이가 있었다

-시 <달빛> 전문

누군가라닌 누구이지? 본문에는 등장하지 않는 시의 제목 '달빛'이 가장 중요한 모티브다. 곧 달빛 때문에 생긴 발의 그림자를 떠올리는 순간 비로소 시가 완성되기 때문이다.

 

“좋은 시는 아주 쉬운 언어로 쓰여야 합니다. "

이례적으로 시집 끝에는 다른 누군가가 덧붙인 해설 대신 시인의 산문 한 편(<강은 노래하고 푸른 용은 춤추네>)이 실려 있다. 시인이 시업을 쌓기 시작한 계기와 현재, 역사를 엿볼 수 있는 기록이다. 최근에 모처럼 TV에 출연해 근간 작품들에 대해 얘기했다. 관련해서는 tbs교통방송 TV책방 북소리(3월 20일, 2019, <일상에 지친 당신에게 전하는 '포구에서 찾은 따뜻한 위로'> 곽재구 시인편)을 참고하시기를. 본 시집에 앞서 작년에 출간된 『신포구기행』은 월간 <전원생활>에 3년 동안(2016.1~2018.12.) 연재한 기행수필들 대부분을 한 권으로 엮은 것인데, 본 시집 출간까지 포함하여 지승호 작가의 인터뷰를 일부 소개한다. 3년간의 연재를 마무리하는 인터뷰다. 지승호 작가는 좋은 시는 뭐냐고 묻자 시인이 답한다.
“좋은 시는 아주 쉬운 언어로 쓰여야 합니다. 그런데 깊이가 있어야 합니다. 따뜻해야 하고 촉촉해야 합니다. 그런데 이것을 알기가 쉽지 않습니다. 이때 어떤 것이 좋은 시인지 스스로 판별하는 리트머스 시험지가 뭐냐 하면 눈물입니다. 울면서 쓴 시가 좋은 시라고 생각합니다. 작가나 시인이 눈물을 백 방울 흘리면서 써야 독자는 한두 방울 흘리는 겁니다. 그런데 그렇게 혼을 다해서 쓴 작품을 보고 아침에 부끄러워하는 거예요. 그게 진짜 좋은 시인 거죠. 제가 쓴 것 중에 아끼는 작품이 있어요. ‘아기 참새 찌꾸’라는 동화를 쓰고 마침표를 찍는데 그 위에 눈물이 떨어지는 거예요. 그래서 잉크가 번지는데, 그 느낌이 좋았습니다.”
_월간 <전원생활> 2019년 1월호 곽재구 시인 인터뷰 <삶이란 자기 자신을 더 많이 사랑하는 시합>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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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meroad 2019-03-31 23: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미지로 소개한 주석들은, 이 책 (알라딘) 미리보기를 히시면 읽으실 수 있습니다. 시 전편과 함께.
 

'잠은 자연이 준 가장 값진 선물들 중 하나이고, 친구이자 보물이며, 마법사이자 나직이 위안을 주는 자이다.'(헤르만 헤세) 그러나 그 잠들지 못하는 사람들의 잠 못 이루는 밤이 있다. 책을 읽느라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지새는 밤이라면 좋겠지만, 관련된 구절들을 모아보았다.

 "내 마음 속에 잠들어있는 네가/ 다시 나를 찾아와 나는 긴긴/ 밤을 잠 못들것 같아/ 창밖에 비가 내리면 우두커니/ 창가에 기대어 앉아"_가요, <잠 못 드는 밤에 비는 내리고>(김건모, 1992) 중에서

 

 "죽은 부인을 사랑한 만큼 다른 여자를 사랑할 수 있나요?
-그건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에요!
그럼 어쩔거죠?
-매일 억지로 일어나 숨을 쉬며 살아가야 하겠죠. 그러다 언젠가는 혼자 일어나
눈 뜨는데 익숙하게 되겠죠. 숨쉬며 사는 것도 익숙하게 되고 추억도 잊어버리겠죠."

_영화 <시애틀의 잠 못 이루는 밤>(Sleepless In Seattle, 1993)에서
"이 영화는 2016년 12월 28일 재개봉되었다. 손에 꼽히는 명대사들이다."

"장기간 지속되는 불면의 고통을 아는 자, 겨우 반시간 정도 꾸벅꾸벅 조는 것으로 만족하는 법을 배운 자는 누구나 내 마음을 아프게 한다. 그러나 나는 살면서 하루도 불면의 밤을 가져보지 않은 사람은 사랑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 그는 분명 더없이 순수한 영혼을 지닌 자연아일 것이다. -<잠 못 이루는 밤>, 헤르만 헤세 『잠 못 이루는 밤』(홍성광, 현대문학)

 

 "자연과 사상과 방랑의 구도자 헤르만 헤세가 펼쳐 보이는 내면의 진솔한 고백, 『잠 못 이루는 밤』은 소설이 아니고 헤세가 생전에 남긴 (자전적) 에세이로, 모두 42편이 실려 있다."

 

『일리아스』(호메로스, 쳔벙희, 숲, 2015개정판)에도, 읽노라면 모두 잠든 밤에 잠을 이루지 못하고 뒤척이는 주인공들이 있다. 제우스(2권)와 아가멤논(10권)과 아킬레우스(24권)다. 세 인용의 공통점은 각 권 맨 첫부분이라는 것.  작품이나 저술에서 첫 문장은 중요하다. 첫 문장만 쓰면 작품 전체가 술술 풀린다는 고백을 듣곤 한다. 읽은 지 오래된 독자들도 인용 덕분에 이후 서사를 상기할 수 있기를!

 

#01.

"다른 신들과 전차(戰車)를 타고 싸우는 인간들은 밤새도록 잠을
잤으나 제우스는 어떻게 하면 아킬레우스의 명예를 높여주고
수많은 아카이오이족을 그들의 함선들 옆에서 도륙할 수 있을지
마음속으로 궁리하느라 단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아무리 생각해보아도 아트레우스의 아들 아가멤논에게
거짓 꿈을 보내는 것이 역시 상책인 것 같았다." 
-『일리아스』, 2권: 1~6행.
"어떻게 해야 테티스와의 약속대로 아킬레우스의 명예 회복을 위해 그리스연합군을

도륙할 수 있을까, 제우스는 잠을 이루지 못한다. 2권.아가멤논의 꿈_함선 목록."

 

#02.

 "전 아카이오이족의 다른 장수들은 모두 부드러운 잠에 제압되어
그들의 함선들 옆에서 밤새도록 잠을 잤으나, 백성들의 목자인
아트레우스의 아들 아가멤논은 단잠을 이룰 수가 없었으니
마음속으로 여러 가지 일들을 곰곰이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마치 머릿결 고운 헤라의 남편이 번개를 내리치며
형언할 수 없이 큰비나 우박을 만들 때와 같이,
또는 들판 위에 하얗게 휘몰아치는 눈보라나
고통을 가져다주는 전쟁의 큰 아가리를 만들 때와 같이,
꼭 그처럼 자주 아가멤논은 가슴속 심장 밑바닥으로부터
깊은 한숨을 쉬었고 그의 마음은 안에서 떨고 있었다." 
-『일리아스』, 10권: 1~10행.
"아킬레우스에게 보낸 사절단은 빈손으로 돌아왔다. 가멤논은 고민 끝에 한밤에 회의를 소집하고, 10권.돌론의 정탐" 

 

#03.

"이윽고 경기도 끝나고 백성들은 각자 자신의 날랜 함선들로
돌아가기 위해 뿔뿔이 흩어졌다. 그들은 저녁 식사와
달콤한 잠을 즐길 참이었다. 그러나 아킬레우스는 사랑하는
전우를 생각하며 울었고, 모든 것을 정복하는 잠도
그만은 붙잡지 못했다. 그는 누워서 이리저리 뒤척이며
파트로클로스의 남자다움과 고상한 용기를 그리워했다.
아아, 전사들의 전쟁과 고통스런 파도를 헤치며 그와 더불어
얼마나 많은 일을 해냈고, 얼마나 많이 고생했던가!
그는 이런 일들을 생각하며 때로는 모로 누웠다가
때로는 바로 누웠다가 또 때로는 엎드리기도 하면서
눈물을 뚝뚝 흘렸다. 그러다 그는 벌떡 일어나
바다의 기슭을 정처 없이 거닐었고, 새벽의 여신은
그가 모르게 바다와 해안 위에 나타난 적이 없었다." 
-『일리아스』, 24권: 1~13행.
"그리움으로 밤새 잠을 이루지 못하는 아킬레우스, 새벽이면 헥토르의 시신을 끌고 무덤 주위를 세 바퀴씩 도는 짐승의 시간이 시작된다. 24권.몸값을 주고 헥토르의 시신을 돌려받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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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세이돈 관련된 사실적 질문과 해석적 질문 사이, 굳이 제목 하나를 내세운다면 그렇다. 결정적인 순간 두 신 사이에는 여신 헤라가 개입하지만, 『일리아스』 경향 각지에서 제우스와 포세이돈, 두 형제는 대립각을 세운다. 당면한 전세에 대한 판단 차이, 정보의 불균형에서 오는 것으로 보인다. 하나 궁극은 권위적인 제우스의 일방적인 주도권 행사에서 태어나는 갈등이다. 그런데, 이들 형제들에게는 해묵은 갈등이 상수로 작용하고 있다. 포세이돈은 늘 한 발 물러서는 쪽이지만, 제우스에 대한 불만은 늘 해소되는 것이 아니라 임시 봉합되고 억눌려질 뿐이다. 힘의 우위에서 자신이 열세이기에 포세이돈 스스로 인정하는, 현실적인 처신도 곳곳에 보인다. 이들이 갈등하는 진짜 원인은 호메로스에만 의존해서는 찾기 힘들 듯하다. 호메로스가 펼쳐놓은 갈등을 푸는 데에 그가 아닌 당대의 다른 시인의, 신화를 다룬 작품을 엿보아야 한다. 호메로스는 작품 밖에서도 생각해볼 여지를 많이 남겼는데, 이 점에서도 위대한 고전의 저자인 셈이다.

 

포세이돈의 분노, 권위적인 제우스의 주도권 행사에서 나와

일명 '티탄신족과의 전쟁'(Titanomachia)은 10년 동안 진행되었다. 제우스를 우두머리로 하는 젊은 신들이 신권을 획득하기까지, 제우스와 포세이돈과 하데스 세 형제의 역할이 두드러진다. 그 결과 셋은 제비를 던져 우주를 삼분(三分)하여, 다스리기로 하였고, 다스리고 있다. 티탄신족을 제압해 타르타로스에 가두고 전쟁을 끝내는데, 무엇보다 제우스의 번개의 힘이 가장 결정적이었다. 하지만 못지않게 거친 일을 도맡아했던 포세이돈의 역할도 상당했다. 때문에 포세이돈은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삼분(三分)의 일(一)의 분할한 세계에 대한 지휘권에 만족하고 있다. 절차상 분배는 공정했다. 다만, 그 약속이 지켜지지 않을 때가 많다고 포세이돈은 생각한다. 그가 제우스에게 가진 불만의 핵심이다. 헤시오도스의 『신들의 계보』다. 

"레아는 크로노스에 눌려 영광스런 자식들을 낳았으니, /헤스티아, 데메테르, 황금 샌들의 헤라, /지하 집에서 사는 무자비한 마음의 /강력한 하데스, 굉음을 울리며 대지를 흔드는 이, /그분의 천둥 아래 넓은 대기가 떠는 인간들과 신들의 아버지 /지략이 뛰어나신 제우스가 그들이다." _<신들의 계보> 453~458행, 66면

 

우주를 삼분(三分)하여, 다스리기로 하였고, 다스리고 있다.
'계보'는 우리에게 익숙한 족보와 같아, 태어난 순서대로 나열된다. 이에 따르면 세 아들은 하데스, 포세이돈, 제우스 순으로 태어났다. 그러나 이런 헤시오도스와 달리 호메로스(일리아스)에서는 제우스가 이들 형제 중 맏아들이다. 그렇게 되어 있다. 왜 그런가, 왜 그래야 하는가? 이야기의 곁가지를 치자면 끝이 없지만, '그렇게 되어 있는 것'이다. 포세이돈의 궁극적인 불만이 무엇인지 살피는데, 『일리아스』는 시원한 답을 주지 않는다. 다만, 그 단초랄까? 두 형제 중 누가 형이냐, 하는 문제가 제우스에 의해 거론된다. 헤라는 제우스와 동침하여 속이고(14권), 그가 잠든 사이 포세이돈이 그리스연합군을 도와 전세가 역전된다. 15권 초입, 문득 잠에서 깬 제우스는 자신이 속았음을 깨닫고, 전투현장에서 트로이아군을 몰아붙이는 포세이돈을 보고 대로하여 그가 철수하게 만든다. 전령 이리스를 보내 으름장을 놓는데, 거기서 나오는 이야기다.

 

"(제우스:) 나는 그보다 훨씬 더 강력하고 나이도 위라고
자부하는 바니까. 그런데도 그는 겁도 없이 다른 신들도
두려워하는 나와 스스로 동등하다고 생각하는구나.” (165~167)

제우스가 포세이돈에게 전하라는 말이다. '나이도 위라고 자부'한다? 사실이 그렇다면 굳이 이런 말을 할 필요가 있을까? 막말로 “나이도 어린 것이…” 하면 될 것을, 결이 좀 다르다. 실제로는 제우스의 나이가 더 어리다(독자들은 그렇게 알고 있다!)고 봐야 자연스럽다. 호메로스는 신들의 아버지(보호자)로서의 역할을 제우스에게 부여하느라 맏아들로 설정했을 뿐, 신화에서는 포세이돈이 더 연장자로 알려져 있었다. 이들이 신권을 획득하는 과정, 곧 신화에 결정적인 근거가 있다.

 

'나이도 위라고 자부'? '나이도 어린 것이.'하면 될 것을…
(그리스 신화에서) 우라노스(Ouranos 하늘)와 가이아(Gaia 대지) 사이에는 모두 12명의 자녀가 태어난다. 막내(아들)인 크로노스가 어머니 가이아의 권고에 따라 아버지 우라노스를 거세한 다음 우주의 지배자가 된다. 크로노스는 (자신 또한) 자식들 중 한 명에 의해 축출될 운명임을 알고 자식이 태어나는 족족 삼켜버린다. 그러나 레아는 지혜를 발휘하여 갓 태어난 제우스만은 빼돌려 크레테 섬 동굴에 감추고, 대신 강보에 싼 돌을 크로노스에게 먹인다. 장성한 제우스는 (첫째 아내가 된) 메티스(Metis)를 설득하여, 크로노스에게 구토제를 먹이고 그가 삼킨 자식들을 토하게 한다. 제우스는 이들과 합세해 '티탄신족과의 전쟁'을 일으킨다. 만약 제우스가 세 아들 중 장남이라면, 크로노스는 (호메로스에 따르면) 돌덩이를 삼킨 후에도 새로 태어난 아들들(포세이돈과 하데스)을 집어삼켰다는 얘기다. 그럴 수 없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호메로스는 신화의 이 대목을 언급하지 않는다. 그냥 제우스가 장남일 뿐이다. 그러나 이미 한 아들을 구했으면서, 이어 태어난 하데스와 포세이돈이 ‘변고를 당하는’ 것을 지켜보고만 있었을까?

 

한 아들을 구한 레아, 하데스와 포세이돈의 변고를 지켜만 봤을까?
또한 막내아들 크로노스가, 아버지 우라노스에게 한 것처럼 자신이 당할 것 같아, 자식들이 태어나는 족족 ‘활동하지 못하게’ 하는 것을 보면, '신들의 대권 삼세'인 제우스 또한 막내라야 자연스럽고, 막내 아들이라야 한다. 또 하나 제우스도 자신의 자리를 넘보는 누군가(또 하나의 아들)를 극도로 경계한다. 신들의 왕으로서 확고한 자리를 구축한 제우스는 테티스를 사랑한다. 하지만 둘 사이에 낳은 아들이 아버지를 능가하리라(자리를 빼앗으리라는)는 비밀(프로메테우스가 알려준)에 시달린다. 때문에 여신을 별로 대단치 않은 인간 남자(펠레우스)와 결혼시키는데, 그들 사이에서 난 아이가 아킬레우스다. 이런 선택 덕분에 제우스는 영원한 신들의 왕으로서 자리를 보전한다. 같은 맥락이고 신화는 공식처럼 반복된다. 트로이아, 인간들의 10년 전쟁에도 제우스의 선택은 개입되어 있다. 인간남자 펠레우스와 여신 테티스의 결혼식에 불화의 여신 에리스만이 초대를 받지 못하고,‘가장 아름다운 이에게’라고 새겨진 사과를 연회장을 흘려보내는 것이니까(파리스의 선택).

 

크로노스처럼, 태어날 자신의 아들을 경계하는 '막내아들' 제우스
15권. 앞서 인용에 이어, 여신 이리스는 포세이돈을 설득하면서 "그대도 아시다시피 복수의 여신들은 항상 연장자를 돕지요.”(15:204행)라고 한다. (필자가 너무 예민한지는 모르겠으나) 나이를 내세워 이리스가 슬쩍 거드는 모양새다. 제우스가 더 연장자임을 거론하면서 압박하는 것. 이에 포세이돈은 자신이 양보하겠다고 하지만, 그 대답에 제우스에 대한 진짜 서운함이 무엇인지가 담겨 있다.

 

"그러나 그와 동등한 몫을 운명으로부터 나누어 받은 나를 
그가 노기를 띠고 꾸짖으려 할 때마다
나는 마음에 심한 모욕감을 느낀다오." (15:218~210)

모욕감이다. 우주를 삼분(三分)하여 다스리기로 했다. 그런데 자신을 주식 1/3을 가진 주주로 대등하게 대우하지 않고, 화를 내어 꾸짖고, 무엇보다 ‘가르치려’한다. 포세이돈은 늘 '심한 모욕감'에 시달린다. 아마도 제우스는 그러면서도 그런 줄을 모르고, 해서 포세이돈을 더 화나게 할 것이다. 정리해보면 포세이돈은 제우스 때문에 '명예'가 손상되었고, 손상되곤 하며, 손상될 예정이다.

 

제 인간들을 보자. 아킬레우스가 아가멤논에게 분노하는 것은  눈앞의 전리품(브리세이스)을 빼앗긴 때문만은 아니다. 전쟁 기간 내내, 아가멤논의 역할과 처사에 그의 불만은 쌓였고 마침 그때(1권) 폭발한 것일 뿐. 제우스가 형이라고 하자. 그런데 포세이돈은 사실은 내가 제우스의 형이라는 (헤시오도스에 따르면) 서열 때문에 분노하는 것은 아니다. '제우스=신들과 인간들의 아버지'라야 한다. 제우스에게 필요한 이미지들 때문에, 포세이돈은 위화감(소외)을 느끼는 것. 호메로스의 뜻이다. 『일리아스』 부록, 주요신명 '제우스'에서 옮긴이(천병희)는 ‘아버지 제우스’를 정리한다.

“실제 그렇지 않음에도 사실 제우스는 "모든 신들의 아버지는 아니며, 인간을 만든 것도 그가 아니라 데우칼리온 또는 프로메테우스라고 한다. 이 별명은 그가 통치자 및 보호자란 의미에서 아버지(Pater)이며, 그런 의미에서 또 가정의 보호자(Herkeios)이자 재산의 보호자(Ktesios)이기도 하다."
결국 제우스의 (본래) 계획(트로이아가 그리스군에 멸망하는)과 포세이돈은 바람은 다르지 않다. 그런데 갑자기 테티스가 '국민청원'을 하는 바람에 일이 틀어졌다. 1)그리스군은 트로이아군에 밀려 멸망 직전에까지 이르고, 2)아가멤논은 전투파업 중인 아킬레우스에게 구원을 손길을 내밀 수밖에 없다. 3)트로이아의 멸망은 그때부터 시작해도 늦지 않다. 다만, 제우스는 변경된 계획도 다른 신들과 공유하지 않고, 헤라나 포세이돈과의 불필요한 대결을 기꺼이 받아들이며 애를 태운다. ‘그리스 연합군의 승리는 곧 아킬레우스의 승리’라는 상식만으로 신들은 제우스의 의중을 이해할 수 없다. 아킬레우스는 '명예회복'이라는 자신만의 또 하나의 전쟁을 펼치고 있다. 이를 아는 사람은 제우스와 테티스와 아킬레우스 자신과 독자 여러분들뿐이다. 이런 정보의 불균형 때문에 포세이돈은 을(乙)의 입장에서, 갑(甲)인 제우스에게 그때마다 '속내'를 드러내고야 만다. 아킬레우스(가 속한 그리스 군이)가 승리하기를 바라는 것은 의리파 포세이돈, '좌고우면하지 않는' 그의 마음은 늘 상처를 입을 수밖에 없다.

 

정보 불균형, 을(乙) 포세이돈 갑(甲) 제우스에게 '속내' 털려
인간들의 왕 아가멤논이 권위 때문에 자기 잘못을 시원스럽게 인정하지 않고, 교만한 행동을 이어간다. 때문에 그리스군의 희생은 눈덩이처럼 커진다. 제우스가 포세이돈을 대우하는 방식도 닮아 있다. 곧 '아가멤논 : 아킬레우스 = 제우스 : 포세이돈'이라는 방정식이 어떤 면에서는 유효한 셈이다. 호메로스의 뜻이다. 이제 호메로스의 창의력은 한 걸음 더 들어간다. 아킬레우스는 어머니와 상담하고, 제우스에게 청원이 접수된 후, 결정적인 순간이 오기만을 먼발치에서 관망한다. 이런 아킬레우스에게 포세이돈은 어떻게 보였을까? 사사건건 상황 상황마다 자신과 뜻을 함께 하는 신들(특히, 헤라와 아테네)의 뜻대로 그리스군의 승리를 위해, 불철주야 활동하는 포세이돈을……. 사사건건 제우스에게 대항하는 포세이돈의 행동과 격정에서 '아킬레우스'는 대리만족을 하였을까? 호메로스는 1권에서 여신 테티스가 제우스에게 베푼 호의가 있다고 하고, 아킬레우스도 알고 있다. 헤라, 포세이돈, 아테네가 제우스를 포박하려 했는데, 테티스가 구해줬다는 것(『일리아스』에만 나오는 전승이다)도, 포세이돈과 제우스 사이의 갈등 원인(개연성을 높이는 역할)이 되고 있다.

 

'아가멤논:아킬레우스=제우스:포세이돈' 가능한 방정식
제우스를 우두머리로 하는 젊은 신들이 티탄신족들과 10년 전쟁을 할 때, 그들을 돕는 퀴클롭스들(호메로스에서는 외눈박이 거한들일 뿐이지만)이 세 형제에게 하나씩 특별한 무기를 만들어준다. 제우스에게는 번개, 포세이돈에게는 삼지창, 하데스에게는 '쓰면 남의 눈에 보이지 않게 해주는 모자'다. 이들은 자신의 무기에 맞는 역할로 전쟁에서 승리하고, 셋은 제비를 던져 우주를 삼분(三分)한다. 제우스는 하늘을, 포세이돈은 바다를, 하데스는 저승을 다스린다. 그리고 그들 세력권의 사이에 있는 '대지는 공유하게 함으로써' 새로운 올륌포스 신족의 시대가 시작된다.
*제우스는 천둥, 번개, 바람, 구름 같은 모든 기상 현상을 주관하는 하늘의 신으로서, 구름이 모여드는 높은 산들에 머문다.  *포세이돈의 거처는 아이가이(Aigai) 근처의 바다 속에 있으나 신들의 회의가 있을 때는 올륌포스에도 올라간다. 그는 바다의 지배자로서 폭풍이나 순풍을 보내주며, 지진의 신으로서 '대지를 흔드는 이'라고 불리는가 하면 대지를 떠받치는 이'라고도 불린다.  *하데스는 그야말로 은둔의 신으로, 아내 페르세포네와 함께 저승의 사자(死者)들을 지배한다. 하데스는 가혹하고 무서운 신이나 인간들과 다른 신들에게 적대감을 품지는 않는다. 하데스(Haides)는 '보이지 않는 자'란 뜻이지만, 『일리아스』 23권 244행(내가 하데스로 내려갈 때까지 말이오._아킬레우스의 말)에서는 유일하게 그가 다스리는 영역 즉 '저승'(자체)을 가리킨다. 그러나 20권. 

 

"이렇게 축복 받은 신들은 서로 싸우도록 양군을 격려했고,
그러다가 마침내 자기들끼리 치열한 싸움을 벌였다." (20: 54~55)

‘케세라 세라(무엇이 되어야 할 것은 결국 그렇게 되게 마련이다)’ 상황이다. 제우스의 뜻대로, 모든 신들이 출동하여 신들끼리 전투할 때에는 하계의 왕 하데스까지 ‘깨워’ 거론한다. "인간들과 신들의 아버지는 위에서 무섭게 천둥을 쳤고", "밑에서는 포세이돈이 끝없이 넓은 대지와/ 가파른 산꼭대기를 뒤흔들"고 있다. 그리하여 이데 산의 기슭들과 등성이들이 모두 흔들렸고, 트로이아인들의 도시와 아카이오이족의 함선들도 흔들렸다. 그러자,

 

"하계(下界)의 왕 하데스가 밑에서
겁에 질려 고함을 지르며 옥좌에서 뛰어올랐으니,
대지를 흔드는 포세이돈이 그의 위에서 땅을 찢어
신들조차 싫어하는 무시무시하고 곰팡내 나는 그의 거처가
인간들과 불사신들 앞에 드러나지 않을까 염려되었기 때문이다." (20:61~65)

 

‘무엇이 되어야 할 것은 결국 그렇게 되’기 마련이지만
죽음이 난무하는 전장(戰場). 때문에 죽은 그들이 가는 곳과 관련하여 '하데스'는 숱하게 언급되나 하데스의 등장이 직접 예고되는 경우는 여태 없었다. 이 순간에도 하데스는 자기 영역을 고수한다. 하계(下界)가 파손되어 드러나는 것을 염려할 뿐. 그런데, 제우스의 계획 때문에 '은둔의 신' 하데스마저 모습을 드러내려 한다. 그는 자기 영역이 침범되거나 훼손되는 것은 결코 방치하지 않을뿐더러 방어에 나선다. 앞서 삼형제가 우주를 삼분하여 제 영역을 설정하고는 '대지는 공유하게 함으로써'라는 대목을 떠올린다. 대지는 그 특성상 '공유하는' 것으로 할 수밖에 없고, 세 형제들 관할권의 경계가 된다. 하계(下界)가 곧 대지 아래라고 할 수만은 없지만, 물리적으로 그 아래인 것은 맞다. 그런데, 포세이돈 이름 앞에 붙는 공식구(정형구)는 '대지를 떠받치는 이' 혹은 ‘대지를 흔드는 이'다. 고유 영역인 바닷물이 '대지를 감싸고 있'어 붙은 이름이지만, 해일이 대지를 침범하게 만드는 것과는 또 다른 상황까지도 그가 제어할 수 있음을 알 수 있다.

 

특성상 '공유'하는 대지, 삼형제 신들 관할권의 경계
이처럼, 이들 삼형제 신이 공정하게 관할권을 나누었지만, '대지'와 같은 경계에서는 다툼의 소지가 있다. 하데스도 포세이돈처럼 일희일비하지 않았을 뿐(때론 포세이돈에게도, 그래야 하는 것이 그의 정체성이기도 하니까), 관할권과 그 경계와 관련된 해묵은 민원은 가지고 있다. 더구나 포세이돈은 영역 다툼에 특히 예민한 신이다. 제우스의 딸인 아테네와 앗티케 지방에 대한 영유권을 놓고 다투지만 승리하지 못한다. 헤라와의 아르고스 영유권 다툼에서도 패배. (아르고스의) 강물을 모두 말리고 해일이 일어나게 하여 복수한다. 이런 포세이돈이기에 제우스의 권위와 계획(방침)과 늘 맞설 수밖에 없고, 거기에서 모욕감을 느끼는 것인데, 이게 거의 습관이 되었다고 할까, 반복되는 '트라우마'다.

호메로스는 기원전 8세기 무렵 활동한 시인으로 추정한다. 헤시오도스(Hesiodos: 기원전 740년경~670년경)는, 기원전 720년경에 활동한 음유시인으로, '당시 개최된 시인경연대회에서 호메로스를 이겨 1위를 차지하기도 했다'(프로필). 헤로도토스는 역사』에서 그리스인에게 신을 만들어준 것이 호메로스와 헤시오도스라고 했다. 이처럼 두 사람은 같은 시대를 살면서 서양문화의 위대한 창시자가 되었다. 이쯤에서 확인할 것은, 오늘날 우리가 아는 <그리스 로마 신화>와 같은 신화 이야기는 한참 후에야 집대성된 책일 뿐이다. 이들 시인들이 다룬 작품에 등장하는 신들의 이야기가 훗날의 신화집에 수집되었을 뿐이다. 때문에 포세이돈이 형이냐, 제우스가 장남이냐, 하데스가 장남이냐의 문제는, 작품의 시인이 어떻게 받아들였느냐에 따라 다른 것으로 달라질 뿐이다.

호메로스는 하데스나 포세이돈이 제우스보다 형이라는, 이런 위계의 흐트러뜨림으로 갈등을 유발한 것은 아닐까? 어쨌든 이들 삼형제의 ‘우주(宇宙) 삼분지계(三分之計)'는 『일리아스』에서는 제우스 중심으로 흘러가, 공정성 문제는 야기했다. 그 약속을 믿고 그때그때 반응하는 포세이돈, 그러나 그는 그 순간에도 자신의 영역만은 침범하지 말 것을 주장하고, 하데스의 뜻도 그렇다. 호메로스도 삼형제가 한 약속을, 그리고 공유 공간에 대한 제우스의 지배권 남용을 경계하는 포세이돈의 이의제기를 인정하고 있다.

 

"(포세이돈: )그러나 대지와 높은 올륌포스는 여전히 우리 모두의 공유물이오.
따라서 나는 결코 제우스의 뜻에 따라 살아가지 않을 것이니,
그는 비록 강력하지만 몫으로 주어진 삼분의 일에 조용히 머물러야
할 것이오.나를 겁쟁이처럼 완력으로 겁주려는 생각일랑 아예
하지 말아야 할 것이오."  (13:188~193) 193

 

'삼지창'은 삼권분립을 주장하는 포세이돈의 시위용품?
[맺으며] '삼지창'은 포세이돈을 상징하는 최고의 무기이다. 이는 또한 그의 소박하고 일관된 주장을 드러내는 '상징'이기도 하지 않았을까? 필자는 사실 이런 해석적 질문을 던지고, 자문자답으로 이 글을 시작했고, 마무리한다. 「정치·경제」라는 교과서에서 배웠던 삼권 분립을 생각한다. 국정농단, 대통령 탄핵과 투옥, 최근의 사법농단까지, 입법기관인 국회는 국민의 마음이 오래 전에 떠났음을 아직 모르는 눈치다. 강적들이다. 검찰과 경찰의 역할을 잘 분리·조정하고, ‘기소권 있는' 공수처(고위공직자 비리수사처) 설립하라는 국민여론이 2/3가 넘는데, 이를 가로막는 이들은 누구인지? 검찰과 경찰과 공수처가 '삼지창'의 세 날 역할을 하여야만 하는 때가 온 모양이다. 이렇게라도 더 이상의 적폐 생산을 누그러뜨릴 수 있기를. 삼권분립을 제대로 정립하기 위해서라도 공수처 설치는 선행되어야 할 문제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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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분이 좋으면 늘 이 노래만 부르는 군대의 선임이 있었다. 그가 이 노래를 썩 잘 부른다거나 그런 것은 아니었다. 다만 어지간해서는 속내를 드러내지 않은, 그의 상태를 조금이나마 읽을 수 있었기 때문이랄까. 아직 굳은 표정으로 노래하는 모습이 이 노래의 내용과 절묘하게 어울렸다. 해서 그렇고 그런 시간이면 선임은 부대원들 앞에서 마이크를 잡아야 했다.
똑똑똑. 적어도 이 오래된 가요에서 이 세 음절은 방문 두드리는 소리가 아니다. 또옥~ 똑 똑, 한 걸음, 두 걸음 그리고 세 걸음, 하이힐을 신은 여인이 내딛는 발걸음 소리다. 그런데 그 구두가 빨간 색이란다. 이제 소리만 듣고도 그 색깔을 안다. 이처럼 삼박자(단장격 3절운율)가 절묘하게 마음을 두드리는 공식 같은 노래가 세상에 또 있을까? 남일해가 부른 <빨간 구두 아가씨>(1964년)의 가사는 이렇다. 재즈가수 말로(Malo)의 <빨간 구두 아가씨>도 들을 만하다. 

 

솔솔솔 오솔길에 빨간 구두 아가씨
똑똑똑 구두소리 어딜 가시나
한 번쯤 뒤돌아 볼만도 한데
발걸음만 하나둘 세며 가는지
빨간 구두 아가씨 혼자서 가네~

 

 

밤밤밤 밤길에 빨간 구두 아가씨
똑똑똑 구두소리 어딜 가시나
지금쯤 사랑을 알만도 한데
종소리만 하나둘 세며 가는지
빨간 구두 아가씨 모른 척 가네.

 

 

=남일해 앨범, <오아시스 패라다이스 제1집>(1966.01.01)
 

<A Red Shoes Miss> 5행씩으로 구성된 가사의 행마다 가락은 삼분되어 노래된다. (한 번쯤/ 뒤돌아/ 볼만도 한데//발걸음만/ 하나둘/ 세며 가는지) '똑똑똑'이나 '솔솔솔' 그리고 '밤밤밤'은 그런 삼박자의 묘한 힘을 활성화하는 주문에 가깝다. 내용상 빨간 구두 아가씨와 나 사이에 일정한 거리(심리적인) 설정에서 통통 튀는 맛이 있다.

1절에서 나는 앞서 걸어가는 아가씨를 바라보고 있다. 해서 빨간 구두인 것은 알지만 이름도 성도 모르는 아가씨다. 그러나 마음을 빼앗긴 상태다. 해서 한번쯤 뒤돌아보지 않고 가는 그녀가 야속하다. 구두소리는 내 마음을 ‘즈려밟고’  가는 듯하다. 아직은 그렇게 느낀다,
2절에서는 밤, 골목길을 지나는 구두소리의 그녀를 만난다. 골목길로는 창이 하나쯤 있는 나 있는 그런 방에 나는 살고 있을까? 이젠 구두 발 소리만 들어도 그 아가씨인 줄 알고, 그것이 빨간 구두인 것도 안다. 묘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자칫 선을 넘으면 스토킹이 될 만한……. '지금쯤 사랑을 알만도 한데' 답답하다. 울리는 종소리도 성가시다. 내 마음 알면서도 모른 체 하고 간다는 것. 그것은 바람인가? 

어쨌든 이 노래는 내 마음을 사로잡은 한 여인을 향한 마음, 그 마음의 문을 여는 두드림 '똑똑똑'이라고 할 수 있다.
2010년 10월, 한 방송(KBS '여유만만')에서 남일해는 "당시에 빨간 구두 아가씨로 히트로 온 동네 여성들이 빨간 구두를 신고 다녔다"며 "그 당시는 검은 구두 아니면 백구두인데"라고 일화를 소개했다. '빨간 구두 아가씨'는 「첫사랑 마도로스」라는 그의 앨범에 수록되어 있는 곡으로 자신이 세상에 태어나기도 전에 나온 앨범을 사랑한 팬들이 많았다. 필자도 그 가운데 한 사람이다.

 

똑똑똑, 구두 발자국 소리는 사라지지만 흔적을 남긴다. 똑똑똑. 뭔가 말하기 위해 문(門)을 두드리는 신호이기도 하다. 책을 읽으면서, 책과 책들 사이에서 발견한 세 가지 소스를 중심으로, 이야기를 구성하면서 지금 당장은 아니지만 유사한 구성(내용)의 아티클들을 모은다면, 잠정적으로 <똑 똑똑 구두소리>라고 이름을 붙이며, 썼다.

 

*대화의 독립 그리고 단장격3절운율의 탄생

『시학』에서는 비극의 대화에 사용되는 3절 운율(trimetrom)을 이야기하는데 단장격 3절운율(영/iambic trimeter)이다. 중복된 단장격 운각(?─)을 다시 세 번 반복하는 운율이다(?─?─??─?─??─?─). 처음 비극에서는 단장격 4절 운율이 사용되었다.  ─?─?? ─?─?? ─?─?? ─?─?(이 도식에서 볼 수 있듯이 중복된 장단격 운각(─?)이 네 번 반복된 운율), 이 운율은 격렬한 흥분을 표현하기에 적합한 운율이다.(4장 주39)" 초기의 비극에는 사튀로스 극의 요소와 무용적 요소다 더 많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대화가 도입되자 자연히 적합한 운율을 찾게 되었다. 대화에는 단장격 운율이 가장 적합한 운율이니 말이다. "단장격운율(=단장격3절운율)은 그리스비극의 대사에 사용되던 운율이다. 대화의 탄생에 따른 변화의 시작이다. (4장 주39) /깨지네요, 운율표기는 나중에 보완하기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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