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소년을 읽다
서현숙 지음 / 사계절 / 2021년 1월
평점 :
소년원에서의 국어수업이라는 소재에 확 끌렸다. 갇힌 아이들에게 책을 읽어주며 보낸 1년의 기록. ‘물론 커다란 감동도 있겠지?’하고 예상했다. 아마도 나는 신파를 기대했었나 보다.
예상했던 드라마틱한 감동은 아니었다. 소년원이라는 생경한 공간, 죄를 짓고 갇힌 소년들이라는 인물만 다를 뿐 사람과 사람의 이야기일 뿐인데 이상하게 서서히 깊게 마음에 스며들었다.
나는 이 책을 두 번 읽었다. 잘 읽었는데 뭔가를 적으려면 도무지 내 안에서 글이 되어 나오지 않는 책이 있는데 이 책도 그랬다.
이분은 글을 왜 이렇게 잘 쓰시는 걸까? 고등학교 국어 선생님이라면서 왜 이렇게 글을 맛있게 쓰시는 걸까? 두 번째 읽으니 더 좋았다.
서현숙 선생님은 마냥 온화하고 상냥하기만 한 모습으로 본인을 그리지 않았다. 잘못된 행동에 대해서는 따끔하게 지적하면서도 아이들을 위해서 뭐라도 더 챙겨주고 싶어하는 따뜻한 마음이 글 속에 스며 있었다.
나이 많고 경력은 짧은 사서교사로서 일종의 멘토를 영접하듯이 글을 읽은 것 같다. 계속해서 스스로 질문을 던졌다. ‘나였다면?’하고. 그리고 손을 번쩍 들고 싶은 순간도 많았다. “저도요. 저도요.”하고.
‘선생님 덕분에 책을 좋아하게 되었어요.’하는 말을 들으면 ‘그게 뭐 내 덕분이겠어?’하고 생각하면서도 고맙고 뿌듯하다. 또 아이들에게 손편지를 건네 받을 때 큰 감동을 받는 이유는 예상을 못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요즘 아이들’이 손편지라니, 하는 생각이 있었던 것 같다. 소년원에서 받은 편지는 어땠을까? 서현숙 선생님은 더 많은 생각을 하셨겠지.
소년들과 함께 읽을 책을 고르실 때는 어떤 생각들을 하셨을까? 작가와의 만남을 계획할 때는 무엇을 기대하셨을까? 더 많은 이야기를 나누고 싶어졌다.
이 책에 소개된 책들을 모두 읽고 싶어졌다. 올해 새학기가 시작되면 우리 학교 선생님들께 이 책을 제일 먼저 소개해야겠다. 과목과 관계없이 모든 교사들이 이 책을 읽었으면 좋겠다. 어른들이 먼저 이 책을 읽었으면 한다.
대단할 것 없는 몇 번의 납작한 건넴이었지만, 소년은 나에게 바윗덩이만큼 육중한 신뢰를 보냈다. 당신 덕분에 책을 좋아하게 되었고, 이렇게 재미있는 책이 많은 줄 처음으로 알게 되었다고. 세상에 나가서도 책을 계속 읽고 싶다는 말들이었다. 어디에서도 경험하기 힘든 절대적인 신뢰이자 지지의 말들이었다. 소년이 나에게 선물한, 내가 소년에게 필요한 사람이자 의미 있는 사람이라는 존재감에 기대어 일 년을 살아냈다.
사람을 살아가게 하는 힘은 ‘사람’이다. p.5
사람은 자신의 처지와 관점에서 책을 읽는다. 연인과 헤어진 사람은 이별 이야기에 유난히 목이 멘다. 이별을 다룬 세상의 모든 노래 가사는 내 마음을 알고 쓴 것만 같다. 갇힌 사람에게는 자유의 이야기가 절절하다. p. 24
사람이라면 누구나 자신이 주체가 될 때 즐겁다. 구경꾼 노릇은 언제나 재미없다. 무기력해지고 귀찮아진다. 아이도 어른도 마찬가지다. 내가 주인공이 되어 참여하고, 그게 몸이든 머리든 입이든 움직이면, 세상은 많은 일이 흥미진진해진다. 작가와의 만남을 준비하면서 아이들을 구경꾼이 아닌 주인공으로 만들고 싶다. 자신이 주체가 되는 짜릿함을 선물하고 싶다. p.31~32
우리는 부족할지라도 환대의 준비를 했다. 이 시간의 함께 읽기 경험에 어떤 의미가 있는지, 언젠가 아이들이 알게 될까? 환대로 사람을 맞이하는 경험, 자신이 주체로 활동하는 경험은, 나도 타인도 소외시키지 않는 연습이다. 사람의 온기를 느끼는 연습이다. 이런 연습이 쌓이면 삶에서 적어도 ‘나’를 소외시키지는 않을 것 같다. 막 살지 않을 것 같다. 길 밖으로 떨어지더라도 자신을 돌보며 다시 삶의 길 위에 올라서게 되지 않을까. 두 다리에 힘 주고 걸어가게 되지 않을까. p.50~51
어른인 우리는 이미 알고 있다. 고마움에 미안함이 왜 찰떡처럼 둘러붙어 있는지 말이다. 마음의 일이어서 그렇다. 사람이라는 존재가 마음으로 꽉 채워져 있어서 그렇다. 바다는 푸른 물결이 가득 차서 끊임없이 넘실거린다. 사람 안에는 마음이 가득하다. 마음은 단단하지 못한 채로 항시 흔들린다. 미안함, 고마움, 그리움으로 꽉 차서 넘실거린다. p.77
민우는 생애 17년 만에 첫 번째인 일이 두 가지 생겼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재미있는 책을 만났고, 자신만을 위해 책을 읽어준최초의 어른이 생겼다. 이 사실이, 나는 눈물겹다.
p.15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