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들 도키오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89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문승준 옮김 / 비채 / 202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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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들 도키오'를 읽기 전에 책장을 정리했었다. 벽 한쪽을 차지한 책장을 살펴보니 히가시노 게이고의 책이 몇 권 있었다. 사실 있었는지도, 내가 샀었는지도 모르게 책의 존재를 잊어버리고 있었다. 하지만 유명한 이름값만큼이나 당연하다는 듯이 히가시노 게이고의 책이 있었고, 떠올려보니 그때도 재밌게 몰입해서 책을 읽었던 기억이 난다. 특히 '백야행'이 그랬다. '아들 도키오'는 이번에 처음 읽었는데, 어떤 내용인지 대략적으로 알고 있었어도 순식간에 책을 읽어버릴 정도로 재밌게 읽었다. 가장 핵심적인 내용을 알면서 읽으면 이어질 내용을 예측하게 되거나 중간에 흥미를 잃을 수도 있는데, 처음부터 끝까지 그 다음 전개를 궁금해하며 읽었다. 대단한 사람이었다. 

 

 " 저 사람이 젊음 탓에 실수하는 모습을 보는 건 괴롭다 ... (327) " 는 도키오의 말처럼 다쿠미가 정말 싫은 느낌의 사람이라 나 역시도 읽는 동안 괴로웠다. 생판 남의 눈으로 봐도 보고 있기 괴로울정도로 철없는 모습을 보이는데, 도키오의 마음이 어땠을지 이해가 됐다. 도키오를 통해 다쿠미가 자신의 문제를 깨닫고 성장하기를 기대하며 읽었는데 아주 극적이지는 않아도 조금씩 선을 지키며 행동하는 모습을 보인 점이, 읽으면서는 아쉬웠지만 나중에는 납득이 되는 내용이었다. 답답한 상황에서 주인공이 '먼치킨'적인 능력을 발휘하고 '사이다' 결말을 내놓길 바라는 데에 익숙해졌었나보다.  

 

 책을 읽다보니 문득 마음이 서늘한 것이 어쩌면 미래의 누군가가 나에게도 찾아왔었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허황된 생각이 진짜건 아니건 스스로 질문해보게 되는 것이다. 나는 어떤 사람이지? 누군가 내 모습을 지켜보는 일이 괴롭다고 생각하게 행동했던 적은 없었나? 미래인을 만났을지도 모른다고 상상하는 것이 좀 우스울지 모르지만 화들짝 자신에 대해서, 또 지금은 기억나지 않는 지난 인연들에 대해서 되돌아보았다. 반대로 만약에 나는 과거의 누군가에게 찾아갈 것인가 생각도 해봤다. 젊은 시절의 부모님을 만나러 간다면 어떨까, 무슨 말을 무엇을 할 수 있을까, 같은 생각들을 오래도록 해봤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게 가장 좋겠지만.

 

 소설은 미래에서 온 아이라는 타임슬립 소재만으로도 흥미로운데 그 안에 심각한 사건도 얽혀 있어서 끝까지 긴장의 끈을 놓지 않고 이어진다. 갑자기 사라진 다쿠미의 (전)여자친구가 휘말린 사건과 다쿠미가 그동안 외면했던 뿌리찾기가 자연스럽게 한데 얽혀 전개된다. 제멋대로인 다쿠미가 도키오의 말만은 무시하지 못하고 따르게 되는 장면을 볼 때마다, 말도 안된다고 생각하겠지만 핏줄의 운명적인 끌림!으로 미래에서 왔다는 도키오의 말을 믿어주기를 기대했다. 뻔한 신파는 싫다고 생각하면서 감동이 몰려오는 내용이 있지 않을까 미련을 가졌다. 이를테면 허생원이 '자네 왼손잡이인가'하는 것처럼. 그래서 좀 아쉽기도 했다.

 

 어떤 기억들이 살아가면서 잊혀지고 흐려진다는 것에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는 결과를 품고 있어서 지난 시간들을 자꾸 까먹는 나이가 된 것을 좀 덜 섭섭해하려고 마음먹었다. 적지 않는 분량의 책인데 한번 읽기 시작하니 쉴 틈 없이 쭉 읽혔다. 히가시노 게이고는 다쿠미를 두고 자신이 가장 아끼는 캐릭터라고 했지만, 개인적으로는 매력이 덜해서- 사실은 너무 별로라 끝까지 정이 가지는 않았는데 그래도 내용이 재미있어서 무리없이 읽었다. 한동안 잊고 있었는데 히가시노 게이고를 다시 만나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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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 뒤에서 인문 서가에 꽂힌 작가들
조르조 바사니 지음, 김운찬 옮김 / 문학동네 / 201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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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쩌다 읽게 됐는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책은 한참동안 순서를 기다리고 있었다. 거실에 있는 탁자 한켠에 놓아둔 읽을 책들의 목록 안에서 몇번이나 순서가 밀렸다. 쌓아뒀던 책들도 지금은 거의 다 사라지고 몇권 남지 않았는데, 다른 책을 먼저 읽었다가 몇장 읽지 않고 그만두고 오늘 그냥 갑자기 '문 뒤에서'를 먼저 집어들었다. 아무래도 집중이 안될 것 같아 조금 읽다가 재미없으면 정말 그만 둬야지 그런 마음이었다. 정말 솔직하게.

 

 원어로 책을 읽어도 그럴까. 번역되어 나온 책을 보면 가끔 특유의 꾸밈, 묘사가 좀 부담스럽고 어색하게 느껴진다. " 그는 키가 크고 말랐으며, 벌써 젊은이였고, 젊은이처럼 비쿠냐 원단의 긴 회색 바지에 다른 옷에 비해 색조가 무거운 직물 재킷을 입고, 호주머니에 열 개비짜리 마케도니아 담뱃갑을 넣고, 목에는 실크 넥타이를 매고 다녔다.(27)" 같은 어딘지 어색한 문장이 그렇다. 주인공이 사춘기이고 예민한 성격이기 때문에 초반에는 그 신경질적임을 견디는 것도 어려웠다.

 

 그런데 문득 정신을 차리고보니 이미 책의 중반에 와 있고 그 다음 내용이 어떻게 될지 계속해서 궁금해졌다. 분량 자체가 160쪽 정도밖에 되지 않는 짧은 책이긴 하지만 초반의 어수선함, 바탕 다지기같은 작업이 지나고 나면 확 재미있어져서 순식간에 읽게 된다. 끝까지 관통하는 '문 뒤에서'라는 제목의 의미와 함께 내용의 여운도 깊게 남는다. 성석제의 '첫사랑'을 보는 것 같기도하고, 이 또래에 흔히 있을 법한 현실감을 잘 살렸다.

 

 생각해보면 이보다 더한 막장 소재들도 넘쳐나는 와중에 '치유할 수 없는 상처가 화인처럼 찍힌 그날'이라는 문구는 좀 애매했다. 이런 일이 얼마나 흔하냐면, 싸이시절에도 그랬지만 아직도 SNS 저격글이란 이름으로 이런 상황에 대한 경고문구를 만들어놓은 사진들이 10대들에게는 유행처럼 돌아다닌단다. '너 호박씨 까는거 내가 모를 줄 알았지' 어쩌고 하는 내용으로. 친군줄 알았는데 내 뒷 얘기하고 다니는 사람이었다, 는 상처가 흔하긴하지만 어쨌든 당하면 속은 상할 사건이긴 하겠다.

 

 솔직히 말하면 숙제를 같이 하는 그룹이니 초대니 하는 말들 때문에, 주인공이 게이인가, 혹은 저 동네 애들은 저렇게 좀 끈끈하게 친구관계를 만드는가 싶은 의문이 들었었다. 오텔로라는 친구에게 새로운 친구를 사귀었냐고 떠보듯 물어보는 것도, 또 그의 덩치에 의지했다는 표현도 그랬다. 풀가가 카톨리카들 앞에서 말했을 때도 그렇고. 애초에 둘이 숙제를 핑계로 딴짓을 할 때도 마찬가지로, '저게 진짜로 그렇게 된다고?' 싶은 도시전설의 발견이었다. 남자들의 우정이 원래 그런 것이란 말이야......? '첫사랑'의 서양 버전 같다.

 

 카톨리카의 행동도 이해못할 것이 상처주고 싶었던 걸까, 진짜 갑자기 오지랖을 부리고 싶었던 걸까. 갑자기 왜? 둔한 중년의 감성이 기민하게 눈치채지 못한 뭔가가 있는 것 같다. 무슨 심리들인 것이지 대체. 사춘기처럼 예민하던 시절에는 이런 글을 읽으면 인과관계가 보일 듯 했던 것 같은데, 요즘은 성질급한 한국인이 되어서 혹은 좀 무덤덤한 둔치가 되어서 그런지 '왜 저렇게 행동하지'싶은 의문만 남는다. 누가 설명해줬음 좋겠다. 어쨌든 짧고 재밌다. 무슨 내용일지 몰라 미뤄뒀었는데 진작에 후딱 읽어치울걸, 싶었다. 조르조 바사니 다른 책들도 읽어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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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스트 러브 소설Q
조우리 지음 / 창비 / 201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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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처음 '라스트 러브'의 출간 소식을 듣고 친구에게 먼저 알렸다. 1세대 아이돌 팬클럽 출신인 작가가 쓴 소설이 나왔대, 하면서. 부정확한 얘기긴 한데, 그렇게만 전했어도 친구는 이미 '라스트 러브'에 대해 알고 있었다. 그리고 나보다도 훨씬 빨리 이 책을 읽었다. 얘기를 나누고 1주일, 2주일이었던가 한달이 채 되지 않아서 읽었다고 메세지를 보내왔었다. 그래서 그만 아차, 하고 다음에 만나기 전까지 나도 읽어봐야지 하고는 이제서야 읽었다. 책을 읽기 전에는 읽고나서 친구를 만나면 말 할 꺼리가 생기겠다고 생각했는데, 읽어보니 솔직히 내가 잘 모르는 세계에 대한 내용이라 어정쩡해졌다. 응칠같을거라고 생각했는데, 전체관람가일거라고 생각했는데 예술영화제 출품작이었던 그런 느낌이다. 

 

 누군가의 팬이 되어본 적이 없다. 누구도 그렇게 열정적으로 좋아지지 않았다. 연예인을 좋아하는 건, 그냥 텔레비전에 나오면 잠시 채널을 고정해두는 정도, 인터넷을 하다 이름이 나오면 사진 한 번을 보는 정도, 얼마간 기억해두다 금새 잊어버리고 마는 작은 정보를 눈으로 훑어보는 정도였다. 팬클럽에 가입하고 방송국에 찾아가고 앨범이나 사진, 뭐 굳즈같은 것을 사고 댓글을 달고 n차를 찍고 그런 열성적인 일을 해본적이 없다. 연예인이라서만이 아니라 사실 내가 누구를 좋아하는 방식이 그렇지 못한 편에 가깝다. 주변에서는 어떻게 생각할지 모르지만, 스스로 느끼기에는 누굴 그렇게 많이 좋아해본 적이 있는가 싶다.

 

 그래서 책 곳곳에서 피어나는 연예인과 팬의 관계성 같은 걸 제대로 공감하지 못하고 읽었다. 누군가의 팬이었던 적이 있는 사람이라면 아마 이 책이 더 각별하게 느껴지지 않았을까, 그럼 이 책이 훨씬 더 재밌거나 혹은 읽으면서 떠올릴 것이 너무나도 많아 풍부하게 즐길 수 있었을까 싶었다. 그럼 그건 참 부럽겠다. 누굴 좋아해서 인생이 어떻게 더 풍부해졌고, 힘든 시기를 이겨냈고, 현생을 갈아서 쏟아부을 목표가 있고, 어쩔 땐 눈물의 탈덕도 해보고 이런 것들도 사실 부럽다. 새우젓이고 모래알이고 연예인만 빛나고 팬은 아무것도 아닌 것 같이 느낄때가 있겠지만, 경험해보지 못한 나에게는 그게 마치 환하게 빛나면서 타오르는 에너지로 보인다.

 

 재밌는 건 읽으면서 나도 모르게 최애가 생긴다는 점이다. 다인이 분량이 가장 많은 것 같아서 다인이를 눈으로 쫓다가, 지유가 제일 예쁘대서 지유에게 관심이 갔다가 지유와 재키는 제로캐럿에서 탈퇴해버렸으니 도로 다인으로 정했다. 매번 가장 좋은 파트를 가져갔다고 했으니 무대에서도 제일 눈에 띄었겠지, 연기도 하고 재계약도 하니까 하나만 터지면 앞으로 더 잘되겠지 싶었다. 다른 사람들도 읽으면서 이런 생각을 했을까, 그럼 다들 누구를 최애로 여기면서 책을 읽었을까 싶었다. 아이돌은 많이 나오니까 언젠가 누가 제로캐럿이라는 이름으로 데뷔하지 않을까, 그럼 작가가 성덕이 되는걸까, 제로캐럿이 성덕이 되는걸까.

 

 생각보다 덤덤히 읽혔는데, 파인캐럿의 내용이 가장 재밌었다. 굳이 이유를 찾자면 비슷한 글을 가장 많이 봐서 익숙하기도 하고 해서, 그냥 그랬다. 이제 친구를 만나면 '라스트 러브' 얘기를 꺼낼 수 있게 됐다. 그건 다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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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할머니에게
윤성희 외 지음 / 다산책방 / 202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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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머리속이 복잡했다. 솔직히 말하자면 할머니와 나 자신이 얽힌 이야기를 끌어오고 싶지 않다. 지나치게 개인적이고 또 고통스러운 이야기기 때문에 굳이 풀어내고 싶지 않다. 하지만 책의 내용이 내용인지라, 그런 개인적인 경험을 바탕으로 어떤 이야기인지 읽어보고 싶었고, 자연스럽게 비교도 하고 지난 시간을 떠올리게도 됐었다. 책을 읽으며 했던 생각들을 전부 꺼내어 둘수는 없을 것 같아 이리저리 잘라내다 보니 별로 할 수 있는 말이 남아있지 않았다. 풀어낼 수 없는 말들이 쌓여 마음이 조금 무거워졌다. 차라리 밝고 희망찬 얘기로 채워져있는 소설들이라면 좋았을 것을. 얼마 전 읽은 '씨씨 허니컷 구하기'는 할머니와 소녀가 나오지만 '나의 할머니에게'와는 정반대의 분위기였다. '나의 할머니에게'를 읽고 기분이 좀 묵직해졌다면 '씨씨 허니컷 구하기'가 조금 위로가 되지 않을까,싶다.

 

 남아있는 시간이 유한하다는 것을 너무 늦게 알았다. 그때는 몰랐지만, 유한함을 절감한 뒤로는 항상 남은 시간들이 간절해졌다. 그래서인지 손보미 작가의 '위대한 유산'에서 1918년에 태어나 1972년에 죽은 할아버지(108)에 대해 얘기하면서 그리 단명한 것은 아니라고 적혀있어 눈을 의심했다. 환갑에 미치지 못하게 50여년 남짓 살았다는 것인데, 짧지 않은가. 시대가 시대니만큼 평균수명이 지금과는 다르겠지만 그래도 짧다. 그래서 할아버지를 두고 얼마나 더 살았어야 할머니를 만족시킬 수 있었을까(108) 생각하는 부분이 마음에 걸렸다. 정해진 기간이 없었으리라 생각도 되고, 어찌되었건 떠난 사람을 생각하면 계속해서 같이 있었으면 하고 바라는 일 밖에는 없을텐데 왜 그리 차게 썼을까 싶었다.

 

 가장 좋았던 글은 백수린 작가의 ' 흑설탕 캔디'였다. 다른 부분들이 비터한 느낌을 갖고 있다면, '흑설탕 캔디'는 이름답게 스윗한 내용이 포함되어 있다. 한국인 박난실 할머니와 프랑스인 브뤼니에 할아버지의 연애담인데 열일곱 첫사랑의 마음을 간직한 노년의 조심스러운 풋사랑같은 느낌이라 좋았다. 확실히 다시 읽어봐도 나이만 다를 뿐이지 닿을 듯 말 듯한 감성을 그대로 가진 첫사랑 이야기와 다름없다. 때로 나이는 먹어가는데 철은 안드는 것 같아 더 나이를 먹고서도 언제까지나 마음은 이렇게 어른이 되질 못하면 어떡하나 걱정할 때가 있었는데, 난실씨가 브뤼니에씨를 만나 떠올린 생각들이 마음에 박혔다. 지금의 나도 상상하지 못했었지만, 노년의 나는 어떨까, 늙지 않은 마음을 부여잡고 노인인척 살아가게 될까. 

 

 '위대한 유산'은 스릴러 분위기가 났고, '선베드'는 할머니에 대해서라기 보다는 불안정한 진서에게 더 관심이 갔다. 어찌되었든, 친구가 없고 가끔은 선을 지키지 못하는 그래서 결국은 혼자 남겨지게 될까봐 염려하는 진서의 모습에서 나와 주변의 닮은 점들을 발견했다. 이쯤되니 사는게 바쁘다는 핑계로 멀어진 친구들도 많아지고, 간신히 붙잡고 있는 인연들을 어떤 사소한 실수로라도 잃게 될지 모른다는 생각을 하게 되니 과잉되고 불안정해보이는 진서지만 이상하게 그녀에게 공감되는 부분이 있었다. 하지만 '나의 할머니에게'에서 가장 솔직히, 마음에 들었던 글은 윤성희 작가의 작가 노트 (35) 내용이었다. 그냥 거기에는 진짜가 담겨있는 것 같았다. 사람 사는 거 다 똑같은, 진짜. 그래서 나도 언젠가는 손녀를 앞에 두고 화투점을 치거나 민화투를 칠지도 모른다는 그런 꿈을 꾸게 만드는. 

 

 '누구도 주목하지 않았던 '할머니'의 존재성을 전면에 내세운 첫 소설집'이라는 띄지 문구가 눈에 띈다. 뭘 그렇게까지 누구도 주목하지 않았을까 싶은데, '파과'에서도 할머니 킬러가 나오질 않는가. 어쨌든 '나의 할머니에게'는 기획이나 디자인이 신선했다. 여섯명의 작가들이 할머니를 주제로 각기 펼쳐낸 이야기를 담은 책이라는 점도, 무엇보다 표지의 묘한 질감이, 중간중간 끼워진 갈피를 펼치면 만날 수 있는 조이스 진의 그림들마저 남달랐다. 다만 첫 소설집인지라 '할머니'라는 주제를 통해 작가들이 그려낸 내용이 다 비슷한 맥락을 가지고 있다는 게 아쉬웠다. 첫 소설집이니까 두번째나 세번째가 혹시 있을지 모른다. 어쩌면 앞으로 책이 더 나오게 된다면 이보다는 좀 자유로운, 혹은 넓은 시선으로 '여자 어른'을 그릴 수 있지 않을까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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씨씨 허니컷 구하기
베스 호프먼 지음, 윤미나 옮김 / 문학동네 / 202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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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 너한테 내가 필요했던 날보다 나한테 네가 필요했던 날이 훨씬 더 많았어. (71) "

 

 제목이 무슨 뜻일까 생각했었다. 씨씨 허니컷이 이름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하고. 찾는다는 것 같기도 하고 구해준다는 것 같기도 한 말이 아리송했다. 소녀와 할머니, 복숭아 같은 단어를 살펴보면서 막연히 따뜻한 이야기겠거니, 생각해봤다. 막상 책을 읽으니 씨씨의 삶이 말 그대로 구해져야만 하는 상황에 처해 있었다. 엄마도 아빠도 씨씨의 보호자가 되기를 포기했을때 누가 이 소녀를 구할 수 있을까 싶을 상황에 투티 할머니가 등장한다. 그녀는 말 그대로 씨씨 허니컷을 구한다. 아무 조건 없이, 마땅히 그애가 받았어야 할 관심과 사랑으로, 완벽하게.

 

 책을 읽으면서 다른 무엇보다 씨씨가 오델 할머니와 이별하게 되는 부분이 가장 마음 아팠고, 또 그래서 좋았다. 씨씨가 그래도 누군가에게는 의지할 수 있는 사랑을 받았고, 또 오델 할머니의 삶에도 그애가 위안이 되었다는 게 좋았다. 오델 할머니와 함께 지내게 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었지만, 그래도 어쩔 수 없는 이별이 있다는 것도 알게 해줘서 좋았다. 투티 할머니와 떠나면서 혹시 갑자기 또 학대를 당하거나 하면 어떡하나 걱정도 됐었는데, 그래서 끝까지 그애를 구해야만 하는 내용이 이어지면 어쩌나 싶었지만 씨씨가 만나게 된 모든 사람들이 (한두명을 빼면) 다 좋은 사람들이라 다행이었다. 

 

 배경이 되는 미국 남부에 대한 이미지는 다른 지역보다도 인종차별이 좀 더 심했던 것으로 남아있기 때문에 올레타의 등장이 불안했다. 올레타가 씨씨에게 차갑게 대했기 때문에 앞으로 갈등이 생기게 될까 싶었다. 씨씨가 어리기 때문에 책에서는 자세히 나오지 않지만 올레타가 홉스 부인과 갈등을 겪는 내용처럼 흑인 차별의 뉘앙스가 조금씩 느껴지는 부분들이 있었다. 비슷한 느낌으로는 영화 '헬프'가 떠올랐다. 60년대 미시시피를 배경으로 흑인 가정부들에 대한 내용으로 올레타와 씨씨의 모습이 영화 속 에이블린과 스키터와 비슷하게 느껴졌다.

 

 인종 갈등에 대한 불안은 뜻밖에도 타이비 섬 해변에서 루카스 슬레이드(250)을 만나는 것으로 터져나왔다. '우리 말을 믿어주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이 상황을 복잡하게 만들고 있단 생각이 들었다. '우리 말을 믿어주지 않을거야'. 시간을 조금 뛰어넘어 80년대 말 90년대 초를 배경으로 한 영화 '델마와 루이스'가 떠올랐다. 성폭행을 당할 뻔 한 상황에서 우발적으로 남자를 죽이게 된 두 여자가 도주를 결심하는 데에는 '우리 말을 믿어주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이 바탕이 되었다. 주류 사회에서 억압받는 사람들이 어떤 식으로 좌절되고 피해를 입고 있는지 보여준다. 60년 전의 흑인이, 30년 전의 여성이.  

 

 다행이도 이 강도 사건은 모두가 바라는대로, 올레타의 신앙심이 더욱 두터워질만큼 잘 해결되었지만, 그 뒤로도 그녀가 계속해서 모욕 당하고 (454) 차별 당하는 삶을 사는 것은 막지 못했다. 특히 모두가 모인 자리에서 홉스 부인이 한 공공연한 인종차별을 투티 할머니가 왜 방관했는지 모르겠다. 끝내는 평소에 사이가 안좋았던 굿페퍼 부인과의 싸움으로 화끈하고 시원한 마무리를 한 것으로 매듭지었는데, 투티 할머니가 모두에게 친절한 사람이기 때문이라는 평판이 그 행동에 대한 이유가 되어주지는 못했다. '씨씨 허니컷 구하기'에서 유일하게 아쉬운 점이다. 

 

 괜찮은 성장소설이었다. 지나치게 말랑해서 무른 복숭아 같았지만, 그래도 좋았다. 씨씨가 가게 된 서배너는 미국의 남부 조지아 주의 도시로 영화 '포레스트 검프'의 배경이기도 한 곳이다. 50년~70년대를 배경으로 한 영화와 67년도 엄마의 죽음을 기점으로 씨씨가 투티 할머니와 함께 서배너로 떠나게 된 시기(67년)도 비슷해서 영화 속의 서배너 풍경을 떠올리며 책을 읽었다. 씨씨의 극복까지는 좀 더 시간이 필요하겠지만, 더 그려지지 않은 미래까지 희망적으로 생각할 수 있도록 마무리되었다. 시나몬 롤과 복숭아를 떠올리며 읽을 수 있는 재미있고 감동적인 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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