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96일 - 유괴, 감금, 노예생활 그리고 8년 만에 되찾은 자유
나타샤 캄푸쉬 지음, 박민숙 옮김 / 은행나무 / 2011년 9월
평점 :
절판


 

 

아침에 대전 모 여고 학생이 자살했다는 뉴스 보도를 보았다. 학교 친구들로부터 괴롭힘을 당했고, 선생님에게 도움을 청했지만 묵살당했다고 했다. 인터넷에서는 훨씬 전부터 이 사건이 알려져 그 친구들과 선생님을 비난하는 여론이 들끓고 있었다.

 

사건에 대한 보도와 글을 읽으면서 마음이 너무 아팠다. 친구가 삶의 전부이고, 학교만이 내 세상인 그런 나이에, 친구들로부터, 학교로부터 자신을 부정당했다. 성인이 되어서도 연인으로부터, 회사로부터, 사회로부터 등등 나를 부정당하는 건 늘 불쾌한 감정이 뒤따른다. 그러니 이 어린 친구한테는 얼마나 더 고통스러운 일이었을까.

 

.....

 

안타까운 마음을 안고 그저께부터 읽던 <3096일>을 펼쳐 들었다. 저자 나타샤 캄푸쉬는 1988년 2월 오스트리아 빈에서 태어났고, 열 살이 되던 1998년에 유괴되어 무려 3096일, 약 8년의 시간을 볼프강 프리클로필이라는 남성에 의해 감금되어 보냈고, 2006년에 혼자 힘으로 탈출했다.

 

나타샤의 어린시절은 불안정했다. 어머니가 늦은 나이에 예상치 못한 임신으로 나타샤를 낳았기 때문에 '원치 않았던 아이' 라는 생각이 늘 그녀를 괴롭혔다. 부모님은 허구헌날 싸웠고, 어머니는 나타샤에게 폭력을 가하는 것으로 스트레스를 해소했다. 나타샤는 마음의 상처를 달래기 위해 폭식을 했고, 그 탓으로 학교에서는 뚱뚱하다는 놀림을 받았다. 그러면 다시 먹는 걸로 스트레스를 풀고, 매사에 무력해지는 악순환이 반복되었다. 

 

그 시절 어린 나타샤의 머릿속에 각인된 영상이 있었다. 바로 텔레비전 뉴스에서 본 아동 유괴, 성폭행에 관한 영상이었다. 당시 유럽에서는 어린 소녀들을 노리는 범죄가 기승을 부리고 있었다. 나타샤는 비슷한 또래의 소녀들이 피해자라는 사실이 놀랍고 두려웠고, 만약 자신에게 그런 일이 생긴다면 어떻게 할지 생각해 보았다.

 

그러던 어느날. 평소와 다를 것이 없었던 등굣길. 유독 차 한 대가 신경이 쓰였지만 기분 탓이려니 하고 애써 무시하며 발걸음을 재촉했다. 그러나 불길한 예감은 왜 비껴가지를 않는지. 눈깜짝할새에 한 남자가 나타샤를 납치했고, 어느 지하방에 감금했다. 무서웠지만, 나타샤는 뉴스에서 본 것처럼 며칠만 지나면 부모님과 경찰이 자신을 구조해주리라고 믿었다. 하지만 그 며칠이 몇 주가 되고, 몇 개월이 되고, 몇 년이 지나 8년이 될 줄은 그때는 미처 몰랐다.

 

나타샤는 무려 8년을 오로지 범인 한 사람과 보냈다. 그것도 지하방이라는 제한된 공간에서, 범인의 통제와 억압, 착취, 폭력, 성폭행 등을 견디면서 말이다. 범인은 정확히 어떤 문제를 가지고 있었던 사람인지 책에 나오지 않지만, 그녀의 설명을 보면 일종의 반사회적 성향, 여성혐오증과 결벽증 등을 가진 인물이었던 것 같다. 그것이 아이이자 여성인 나타샤에 대한 감금과 폭력으로 나타났고, 그것도 모자라 그녀의 사소한 행동, 말과 생각까지도 통제하려고 했다. 심지어 그녀의 이름도 없애고, 추억도, 꿈도 모두 파괴하며 '나타샤 캄푸쉬'라는 인간의 존재 자체를 부정했다.

 

하지만 나타샤는 그런 범인에게 결코 굴하지 않았다. 다른 이름으로 불리고, 부모님 얘기를 하면 얻어맞는데도, 어린시절과 가족에 대한 기억을 잃지 않기 위해 틈나는대로 글을 썼고, 탈출하면 학교 수업도 받고 사회생활도 하기 위해 교묘하게 범인을 설득해서 책을 읽고 공부도 했다. 후에 범인의 폭력이 심해져서 멍든 몸이 아파 잠을 못 이룰 때는 탈출해서 보통의 삶을 살고 있는 자신의 모습을 상상하려고 애썼다.

 

.....

 

여기까지만 보면 여느 범죄나 흉악 사건의 피해자의 수기와 크게 다를 것이 없다. 극악무도한 범인과 약하고 무력한 피해자. 범인의 악행이 아무리 심해져도 피해자는 꿋꿋이 버티며 정의를 믿는 그런 구도.

 

그런데 그녀의 회상 중에는 보통 독자가 읽기에는 어색하게 느껴지는 부분이 있다. 그렇게 그녀의 몸과 정신 모두를 파괴하려고 애쓴 범인인데, 그녀의 추억 속에서 범인은 때로는 이웃집 아저씨, 오빠처럼 자상하고 친절한 사람이었다는 것이다.

 

순전히 까맣기만 하고 하얗기만 한 것은 없다. 어느 누구도 선하거나 악하지만은 않다. 이는 유괴범에게도 유효하다. 이런 말은 유괴를 당했던 희생자에게서 흔히 들을 수 있는 이야기가 아니다. 선과 악에 대한 뚜렷한 정의를 내려주는 틀을 뒤흔드는 말이기 때문이다.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워진 세상 속에서 방향을 잃지 않기 위해 기꺼이 따를 준비가 되어 있는 그러한 틀. 내가 이런 말을 할 때 대부분의 제3자의 얼굴에서 동요와 거부의 빛을 발견하곤 한다. 내 운명을 동정하며 이해하던 사람들의 마음은 곧장 얼어붙고 거부감으로 변한다. 또한 감금생할의 내면을 손톱만큼도 들여다보기 싫은 사람들은 나의 개인적인 경험을 '스톡홀름 신드롬'이란 한 단어로 단정 짓는다. (p.184)

 

열 살 소녀에서 열 여덟 살 성인이 되기까지, 그 중요한 시기를 오직 범인 한 사람에 의존하여 살았던 나타샤에게 범인은 이 모든 고통과 슬픔을 안겨준 악인이기도 하지만, 때로는 밥도 주고 잘 곳도 주고 가끔씩 선물도 주고 책도 주는 선인이기도 했다. 이 상황은 그녀로 하여금 범인을 죽도록 미워하면서도 필요로 하는 모순적인 감정을 가지게 했다. 결과적으로 아버지, 어머니, 언니들, 선생님 등 ㅡ 보통의 소녀들이라면 어른으로 성장하는 데 필요로 했을 그 모든 사람들의 도움을 준 사람이 나타샤에게는 바로 범인 한 사람뿐이었던 것이다.

 

그로 인해 나타샤는 탈출 후 가족들을 다시 만나고 경찰과 심리학자의 도움을 받는 상황이 더 어색하고 외로웠다고 고백한다. 다시 만난 가족들은 ㅡ 가족이라면 당연히 알아야 할 ㅡ 그녀의 성장과정을 몰랐고, 경찰은 믿음직하지 못했고, 심리학자는 그녀의 심리를 `스톡홀름 신드롬`이라는 단어로 규정지으며 그녀의 모순적인 감정과 그로인한 고통을 무시했다.

 

이 사회는 볼프강 프리클로필과 같은 범인을 필요로 한다. 그 사회 안에 존재하는 악에 형상을 부여하고 그 악을 자신으로부터 분리해내기 위해서. 사회는 지하감방과 같은 배경을 필요로 한다. 폭력이 그 파렴치하고 악랄한 얼굴을 무수한 방이나 앞마당에서 드러내는 광경을 보이지 않기 위해서는. 사회는 일상적으로 일어나는 범죄의 수많은 익명의 피해자들, 아무리 도움을 요청해도 아무도 도와주지 않는 희생자들에 대한 책임을 회피하기 위해서 나와 같은 엽기적 사건의 피해자를 교묘하게 이용한다. (p.203)

 

이렇게 보면 사건의 일차적인 범인은 볼프강 프리클로필이지만, 이차적인 책임은 사회 전체에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직접적으로 폭력을 가하거나 억압한 것은 아니지만, 범인을 방기하고, 사건이 일어난 후에도 무려 8년이라는 시간을 잊고 있었으며, 사건이 해결된 후에도 여전히 피해자라는 굴레를 씌워서 그녀의 삶을 규정지으려고 하는 사회 말이다.

 

또 나타샤의 설명대로 그녀의 사건이 너무나 극악무도하고 엽기적이어서 화제가 되었을뿐이지, 사회에는 이미 수많은 악이 판치고 있는데도 절대악이 아니고서야 악인지 조차 인식하지 못하는 사람들 때문에 무시되는 경우가 허다한지도 모르겠다. `나를 괴롭히는 가족, 연인, 동료나 선배, 상사는 그저 나를 괴롭힐 뿐이지, 악인은 아니야. 악인은 뉴스나 영화나 소설에 나오는 그런 악당들이나 악인이지...` 이렇게 생각하며 일상의 폭력을 가볍게 넘기며 회피하고 있는 사람들, 그리고 그런 사람들을 거리 위에서, 건물 안에서 수없이 마주했겠지만 알지도 못하는 나 같은 사람.

 

그래서 그 작은 상처가 ㅡ 나타샤 사건처럼 ㅡ 깊이 곪아 터졌을 때 그제서야 비로소 두려워하고 정의를 운운하고, 그리고 얼마 안 가서 잊어버리겠지. 또 다른 무시무시한 사건이 터질 때까지. 

 

.....

 

아주 작은 괴롭힘도 누군가에게는 범죄와 같은 상처를 남길 수 있고, 그 상처는 진짜 범죄로 이어질 수 있다. 그러면 그 범죄를 저지른 사람만이 범죄자일까? 처음에 작은 상처를 주었던 사람, 그 모습을 보고도 못 본 척한 사람들, 너무 무관심해서 보지도 못한 사람들에게는 책임이 없는 것일까?  

 

폭력과 억압에 맞서 8년이란 긴 시간을 견디고 스스로 탈출한 나타샤 본인의 의지도 빛나지만, 그 고통의 시간들을 기록으로 남기고, 자신과 같은 피해자가 다시 나오지 않도록 용감한 주장을 한 것이 너무나도 멋지다. 그녀가 홀로 싸워야 했던 시간들이 단순한 회고록으로 남지 않았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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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전 김중혁의 <뭐라도 되겠지>를 읽다가 공감 가는 구절을 발견했다. 저자는 대학 시절 학교 도서관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며 근로장학금을 받았다. 그 시절 그저 시간을 보내기 위해 도서관에서 읽었던 책들이 돌아보니 삶에 더할 나위 없는 자양분이 되었다는, 뭐 그런 내용이었다.

 

 

 

나도 학교 때 근로장학금을 받았다. 1학년 때는 신청 자격이 안되어서 못하고, 졸업학기 때는 바쁘다는 핑계로 안 한 걸 빼면 꼬박 5학기, 2년 반을 받은 셈. (근로장학금은 웬만한 아르바이트보다 시급이 높고, 공강 시간을 활용하여 학교 안에서 돈을 벌 수 있는 제도이므로 대학생들에게 강추한다.) 2학년 겨울 방학 때 일했던 곳이 중앙도서관이었다. 우리학교 도서관은 관내에 가방을 가지고 들어가지 못하는 대신 도서관 입구에 가방을 맡기도록 되어 있었는데, 내가 일했던 곳이 바로 그곳 가방 보관소였다. 그 해 겨울 내리는 눈을 바라보며, 교직원 선생님들, 같이 일하던 친구들과 보냈던 시간이 떠오른다. 귤도 까먹고, 교직원 선생님이 가을에 학교 교정에서 모아두신 은행도 구워먹고 그랬는데... 지금은 다들 어떻게 지내려는지...

 

 

혼자 일할 때는 시간이 나는 틈틈이 책을 볼 수도 있었다. 그 때 읽었던 책 중에 가장 기억에 남는 책을 고르라면 바로 이 책, 알렉스 헤일리의 <뿌리>다. 표지에 나온 흑인 소년의 긴박한 표정만 보아도 알 수 있겠지만, 내용이 정말 손이 오들오들 떨릴 정도로 긴장되고 절박했다.

 

부끄러운 얘기지만, 그 전까지는 인종차별을 직접 겪어본 적도 없고, 경험한 적도 없어서 이것이 미국 내에서 얼마나 심각한 문제였는지, 아니 어떤 문제인지조차 진지하게 생각해보지 않았다. 이 책을 읽고 많이 반성했고, 그 후로는 인종문제에 관한 책을 틈틈이 들여다보려고 했다.

 

 

 

캐서린 스토킷의 소설 <헬프>도 바로 인종문제, 구체적으로 말하면 흑인 인권 문제에 관한 소설이다. 같은 주제를 다룬 기존의 책들과 달리, 이 책은 흑인이 아닌 백인의 시각에서 쓰여졌다는 점이 독특하다. 저자 캐서린 스토킷은 실제로 흑인 인권 운동이 정점에 다다랐던 1960년대에 미국 남부 미시시피의 백인 가정에서 태어났다. 여느 남부 백인 가정 자녀들이 그러했듯이 저자 역시 어머니가 아닌 흑인 보모의 손에 자랐고, 부모님이 일찍 이혼하시는 바람에 흑인 보모를 어머니처럼 따르며 자랐다.

 

<헬프>의 주인공 스키터는 저자의 분신 같은 인물이다. 스키터는 흑인 가정부의 손에 자란 백인 여성으로, 대학 졸업 직후 고향집에 도착하자마자 보모이자 가정부였던 콘스탄틴이 떠났다는 청천벽력 같은 소식을 듣게 된다. 딸처럼 자신을 사랑해주었던 콘스탄틴이 왜 아무 말없이 떠났는지 스키터는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러나 대체 콘스탄틴이 어디로 떠났는지, 왜 떠난 건지 이유를 물어도 가족들, 마을 사람들 모두 대답을 피했다.

 

이 때, 스키터의 오랜 친구 미스 힐리는 스키터가 시름에 빠졌든말든 아랑곳하지 않고 엉뚱한 일을 벌이기 시작했다. 흑인은 더럽고 병균을 옮기는 인종이니 흑인 가정부들이 백인 주인들과 같은 화장실을 쓰면 안되고, 흑인 가정부가 쓰는 화장실을 따로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얼마 후 마을에서 흑인 소년이 어이 없는 이유로 린치를 당하고, 흑인들이 죽어나가는 사건이 연이어 발생한다.

 

스키터는 콘스탄틴이 떠난 이유가 이 말도 안 되는 현실과 관계가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작가 지망생이었던 그녀는 이 이야기를 글로 쓰기로 마음먹는다. 흑인인데다가 여자라는 이유로 가장 심한 차별을 받고 하찮게 여겨지는 존재, 남의 자식을 온 정성을 다해 키우고도 작별의 인사조차 허락받지 못한 채 떠나야했던 콘스탄틴 같은 흑인 가정부들의 삶에 대해서 말이다.

 

 

하지만 백인 여성인 스키터가 흑인 가정부들의 삶에 대한 글을 쓴다는 것은 당시로서는 가당치도 않은 일이었다. 흑인들에 대한 글을 쓴다는 것 자체가 금기시되는 일이었고, 백인은 흑인과 같은 자리에서 오랫동안 함께 시간을 보내는 것조차 허락되지 않았으니 글 쓰는 데 필요한 인터뷰를 할 수가 없었다.

 

이 때 그녀를 돕게된 또다른 흑인 가정부가 있었으니, 그녀가 바로 에이빌린이다. 에이빌린의 도움으로 스키터는 여러 흑인 가정부들을 소개 받았고, 사람들의 눈을 피해 에이빌린의 집에서 비밀스럽게 인터뷰를 진행한다. 인터뷰를 통해 스키터는 흑인 가정부들의 고통스러운 삶에 대해  알게 되었고 그들도 자신처럼 똑같은 감정과 꿈을 가진 여성이라는 것을 이해하게 되었다. 그리고 책을 쓰기 위해서가 아니라 진심으로 그녀들을 도와주고 싶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이 때문에 스키터가 포기해야 한 것도 많다. 흑인은 백인보다 열등한 인종이라고 굳게 믿는 가족들, 친구들이 그녀로부터 등을 돌렸고, 사랑하는 남자에게도 그녀의 비밀스런 작업에 대해 고백할 수 없었다. 게다가 미스 힐리의 악행이 도를 지나칠 정도로 심해져 각종 사건을 불러 일으켰다. 그때마다 미스 힐리와, 그녀만큼이나 악독한 백인 사회와 질긴 인종차별의 벽 앞에서 스키터는 많이도 울었다. 하지만 책을 완성해야한다는 집념과, 책을 써서 그렇게라도 흑인 가정부들에게, 콘스탄틴에게 속죄하고 싶다는 바람으로 끝까지 맞섰다.

 

 

분명 교과서나 책에서 1968년에 마틴 루터 킹 목사가 암살되었다든가, 70년대까지도 흑인 인권운동이 활발했다든가 하는 내용을 배웠지만, 이렇게 소설로 접할 때에는 느낌이 전혀 다르다. <뿌리>만 해도 흑인들이 미국에 처음 도착했을 무렵의 이야기라서 먼 옛날 얘기처럼 들렸지만, <헬프>는 불과 몇십년 전인 1960년대가 배경이라서 섬뜩하기까지 했다. 60년대라면 비틀즈가 미국에 진출하고, 케네디가 인간을 달에 보내겠다고 공언했던 시대가 아닌가.

 

주제는 진지하지만 등장인물 한명 한명이 개성있고, 스토리 전개가 스릴있으며, 따뜻함과 유머를 함께 느낄 수 있는 작품이라서 미국 내에서는 오랫동안 베스트셀러 자리를 지켰고, 엠마 톰슨 주연으로 영화화까지 되었다. 그러나 일부에서는 흑인 인권 문제에 있어 피해자가 아닌 가해자 측에 속하는 백인 여성이 이런 주제의 책을 쓴 것에 대해 비판하는 목소리도 있다. 저자도 이런 비판이 있을 것을 가장 우려했다고 한다. 그저 백인 여성과 그녀를 키운 흑인 보모 사이의 사랑과 추억을 바탕으로 쓴 소설로 보기엔 흑인 인권 문제가 여전히 미국 사회에서는 공공연히 다루어지기 어려운 문제이기 때문이다.

 

실제로 흑인 인권 문제를 소설 중에서 가장 유명한 고전인 마크 트웨인의 '허클베리 핀의 모험'에는 흑인을 비하하는 'nigger'라는 말이 300번 가까이 등장하는데, 이 때문에 보수적인 지역이나 흑인 학교에서는 이 책을 금서로 지정하거나 'nigger'를 'slave'로 고쳐서 가르치고 있다고 한다. 표현의 자유를 존중하여 원문 그대로 가르칠 것인지, 아니면 흑인들의 의사를 인정하여 이 책을 가르치지 않거나 수정할 것인지를 두고 미국에서는 여전히 논쟁이 일어나고 있다고 한다. <헬프>에도 여러번 이 표현이 등장한다. 캐서린 스토킷 역시 마크 트웨인과 마찬가지로 당시의 사회상을 그대로 전하고자 하는 의도였을 것이고, 마크 트웨인이 살았던 시대와 지금은 많이 다르지만, 여전히 불편하게 느끼는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소설은 소설일뿐이지만 현실과 떨어질 수 없고, 이야기를 통해 재미를 느끼는 사람이 있으면 한편에서는 고통을 받는 사람도 있다는 것을 다시 한번 느낀다.

 

돌이켜보니 올 한해 읽었던 책 중에 가장 감명 깊었고 재미있게 읽은 책이 아니었나 싶다. 나는 번역본은 책이 두 권으로 나누어져 있어서 비싼 반면, 한 권짜리 페이퍼백인 원서는 번역본 한 권 값도 안 되어서 원서로 구입해서 읽었다. (많이 어렵지 않으니 도전해보시길!)

 

우리나라에서는 흑인 인권 문제가 큰 이슈가 아니다보니 이 소설이 미국에서만큼 주목을 받지는 못한 것 같지만, '인권'이라는 큰 차원으로 보면 어느 나라에서든 의미가 있는 문제이니 많이 읽혔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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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에는 '먹고 기도하고 사랑하라' 라는 제목으로 소개된 엘리자베스 길버트가 쓴 <Eat, pray, love>는 무려 158주 동안이나 뉴욕타임스 베스트셀러에 오르고 40여 개국에서 번역되었을만큼 엄청난 사랑을 받은 소설이다. 

사실 이런 소식을 들었을 때만 해도 그렇게 관심이 생기지 않았고, 국내에 줄리아 로버츠 주연의 영화가 개봉되었을 때에도 별 흥미가 안 생겼는데(그런 주제에 두 가지 버전의 페이퍼백 중에서, 단지 표지에 '줄리아 로버츠가 나왔다는 이유로' 아주 조금 더 비싼 영화 버전을 고른 것은 아이러니다), TED에서 저자 엘리자베스 길버트 강연 영상을 보고 '이 책을 꼭 읽어야겠구나' 싶었다. 저자가 말을 참 털털하게 하고 인상이 좋아서, 저렇게 행복해보이는 사람이 쓴 책을 읽으면 나도 행복해질 것 같았달까. 어떤 분이냐면...  


 

(출처 네이버 인물 정보)
이런 분이다. 동영상으로 보면 더 예쁘다. (그나저나 정치학 전공이셨다니 더 반갑네)  


국내에 그렇게 널리 알려진 분은 아닐지 모르겠지만, 이 영화는 많이들 알 것이다.

 

바로 <코요테 어글리>! 
리앤 라임스의 <can't fight the moonlight>이 삽입된, 케이블에서도 꽤 자주 방영되었던 바로 그 영화다. 기억에 나는 중2나 중3 때쯤 학교에 누가 비디오를 가져와서 같이 봤던 기억이 난다.

이 영화의 원작이 된 글을 쓰신 분이 바로 이 분이다. 즉, 평범한 삶을 살다가 갑작스럽게 '코요테 어글리'의 바텐더로서의 삶을 살게되었던 영화 속 주인공의 모델이라는 것. (다만 영화 속 주인공은 작가가 아니라 싱어송라이터를 꿈꾸는 여자였던 점은 다르다.)  

재미있게 본 영화라서 이 사실을 알고 많이 놀랐는데, 나만 몰랐나?ㅎㅎ  

   

 

본론으로 돌아와서...  

제목에서 연상할 수 있듯이, 이 책에는 저자가 1년에 걸쳐 이탈리아, 인도, 인도네시아 발리를 여행하며 '먹고(Eat)', '기도하고(Pray)', '사랑하는(Love)' 이야기가 담겨있다. <코요테 어글리>처럼 이 책 역시 저자가 겪은 실화를 바탕으로 한 논픽션에 가까운 소설 혹은 에세이다. 여행기 같기도 하고, 에세이 같기도 하고, 소설 같기도 해서 각각의 장르를 좋아하는 사람들을 모두 끌어들일 수 있었기 때문에 그렇게 큰 인기를 끌었던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든다.

처음에 나오는 이탈리아 부분은 여행기에 가깝다. 주인공(이자 저자인) 리즈가 이혼한 뒤 이탈리아로 훌쩍 떠나 이탈리아어를 배우며 먹고 노는 얘기가 이어지는 부분이다. 별다른 사건은 발생하지 않고, 바쁜 일상과 이혼 수속으로부터 벗어나 오랜만에 자유를 만끽하며 지난 인생을 되돌아보는 내용이 주를 이룬다. 

4개월 후 인도로 넘어가면셔 글의 분위기가 살짝 바뀐다. 리즈는 인도의 한 수련원에 머물며 명상과 수행을 하면서 영적인 깨달음을 얻고자 노력한다. 깨달음을 얻으면 결혼생활을 하면서 느낀 번민이나 불안, 상실감이 덜해질까 하는 생각에 말이다. 하지만 이게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었다. 집중이 안 되고, 졸리고, 몸이 들썩들썩 거리고, 잡생각이 나고... 깨달음을 얻고자 갔지만 깨달음을 얻기가 얼마나 어려운지만 깨닫고 온 셈이다. 

주인공이 바라던 신비로운 체험은 그 다음 인도네시아 발리에 갔을 때 비로소 이루어진다. 발리에서 리즈는 예전에 자신의 인생을 예언했던 점술가(이자 치료사)를 찾아간다. 그리고 그의 소개로 자기처럼 이혼하고 딸 하나를 키우며 어렵게 살고 있는 치료사를 만나 친구가 된다.  

여기서 리즈는 그저 전처럼 먹고 기도하며 수동적으로 지내는 것이 아니라 자기 힘으로 몇 가지 '기적'을 행한다. 늙고 지친 점술가를 위해서는 그가 선조로부터 물려받은 자료들을 보관할 수 있게 도와주고, 혼자 힘으로 딸을 키우는 친구를 위해서는 세계 곳곳에 있는 지인들에게 메일을 보내 기부를 받아서 친구가 생애 처음으로 자신의 집을 가질 수 있도록 해준다. 그러면서 깨닫는다. 신비로운 체험이나 영적인 깨달음은 기도나 명상을 통해서 얻는 것이 아니라, 삶 속에서 자신의 힘으로 열심히 살다보면 절로 얻어지는 것이라는 것을 말이다.  

 

. . . .

혹자는 별 어려움 없이 살아온 뉴요커 저자가 단 1년 간의 여행으로 삶의 모든 지혜를 얻은 양 글을 쓴 것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말한다. 게다가 여행 끝에 사랑하는 남자를 만나는 엔딩이라니, 로맨스 소설과 별 다를 게 없는 결말이라고 비난하는 사람도 있다.     

하지만 물질적인 풍요가 곧 정신적인 충족감을 보장해준다고는 할 수 없다. 겉으로 보기에 잘 사는 사람이라고 해서 괴로움이 없는 것은 아니다. 그래서 주인공이 오랜 기간 유지해온, 그토록 행복해보였던 결혼생활을 갑작스럽게 정리한 것이고, 경력도 돈도 포기하면서 여행을 감행한 것이다.  

그리고 결국 사랑하는 남자를 만나게 되기는 하지만, 이 사랑은 전 남편과의 사랑이나 다른 연인들과의 사랑과는 전혀 다른 형태다. 남자는 발리에, 자신은 미국에 살면서 가끔씩 만나는, 삶과 사랑 사이에서 균형을 잡기로 한 것이다. 예전 같으면 남자 생각에 밤잠도 못 이루고 생활을 전부 바쳤을 그녀로서는 상당한 발전이다. 이는 여행을 통해 그녀가 사랑만이 인생의 전부가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된 덕분이다. 그러니 배부른 여자가 쓴 허무맹랑한 얘기도 아니고, 여느 로맨스 소설과 다를 것이 없는 얘기도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보다는 여행을 통해 자신이 가진 능력과 힘을 깨닫고, 모르는 사이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받으며 지내고 있는지를 알게 되는 과정이 담긴, 여성의 성장기 내지는 성숙기(記)다. 

 







 

 

 

 

 

나는 이 책을 맨 오른쪽 원서(페이퍼백, 무비 버전)로 읽었는데 그다지 어렵지 않았다. 국내에 번역된 책이 나와있기는 하지만 원서로 읽는 것도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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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학교 때, 지역 명문고 필독도서 목록에 들어있다는 책방 아저씨의 추천으로 어머니께서 <스콧 니어링 자서전>이라는 책을 사다주셨던 기억이 난다. 중학생이 읽기에는 다소 어려운 책이었지만, 근사한 표지에, 그것도 부모님, 선생님조차 잘 모르시는 것 같은 인물의 자서전을 읽는다는 치기 어린 뿌듯함에 몇 번을 시도하여 겨우 끝까지 읽었다. 

스콧 니어링은 매카시즘 광풍으로 어둡고 혼란스러웠던 미국에서 '공산주의자'라는 비난을 받으면서도 진보적인 학자로서 꼿꼿하게 소신을 밝힌 인물이다. 결국 학계에서 쫓겨나 아내 헬렌 니어링과 단둘이 시골로 내려가게 되었지만, 자연을 벗삼아 살면서 생태주의자로서의 모범을 보여 현재까지도 많은 사람의 존경을 받고 있다. 이런 행적이 어린 마음에도 멋지고 대단하게 느껴져서 지금까지도 존경하는 인물을 물으면 이 분의 이름을 떠올리곤 한다. 다만 그렇게 살고 있지 못하는 것이 부끄러울 뿐이다.  

 

 

 

 

 

 

  

 

 

<아름다운 삶, 사랑 그리고 마무리>는 바로 이 스콧 니어링의 아내 헬렌 니어링이 쓴 책이다. 유년시절부터 혼란스러웠던 청년시절, 스콧과의 만남과 연애, 결혼생활, 그리고 스콧 사후의 삶까지 기록했으니 자서전으로 보아도 무방하겠다.  

헬렌 니어링은 유복한 가정의 둘째로 태어나서 독서를 즐기고 음악을 배우며 어린시절을 보냈다. 고등학교 졸업 후 부모님의 제안으로 유럽으로 건너가 바이올린 레슨을 받게 되고, 그곳에서 첫사랑 크리슈나를 만났다. 뜨거운 연애를 했지만 두 사람이 지향하는 바가 달랐고, 결국 헬렌은 고향집으로 돌아왔다. 

헬렌은 우연한 기회로 스콧 니어링이라는 사람과 알게 되었고, 만난지 얼마 안 되어 사랑에 빠졌다. 스콧은 헬렌보다 나이도 훨씬 많고, 학계에서 추방당할 위기에 놓여 있었으며, 전처와의 사이에 장성한 아들 둘이 있는 이혼남이었다. 부유한 가정에서 자란 젊고 아름다운 헬렌이 배우자로 택하기에는 아깝다며 부모님이 말렸다. 하지만 여느 러브스토리가 그렇듯이ㅡ 두 사람은 부모님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허름한 신혼집에서 결혼 생활을 시작했다. (두 사람은 함께 사는 동안 정식으로 결혼하지는 않은, 사실혼 관계였다)   

 

다른 사람들이 난롯가에서 축배를 들고 있을 때 내 속의 어떤 것은 오히려 식어가는 것 같고, 다른 사람들이 잔치를 벌일 때 음식을 끊고 싶은 생각이 들며, 다른 사람들이 빈둥거리며 놀 때 일하고 싶은 어떤 것이 내게 있다. 스코트처럼 내게도 금욕적이고 청교도적인 어떤 성향이 있다. (p.118) 

스코트는 생활의 질을 높이기보다 삶의 질을 높이고자 했다. 스코트는 이렇게 말했다. "삶에서 정말 중요한 것은 당신이 갖고 있는 소유물이 아니라 당신 자신이 누구인가 하는 것이다. 나는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이냐, 어떤 행위를 하느냐가 인생의 본질을 이루는 요소라고 생각한다. 단지 생활하고 소유하는 것은 장애물이 될 수도 있고 짐일 수도 있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으로 우리가 어떤 일을 하느냐가 인생의 진정한 가치를 결정짓는 것이다. (p132) 
세상에는 형편없는 집에서 사는 사람들이 가득한데 너는 커다란 집에 산다. 인류의 3분의 2는 영양상태가 고르지 못한데, 너는 지나치게 많이 먹는 사람들을 초대해 그들을 더 과식 상태로 만든다. (p.160)

 

많은 사람이 더 나은 직장, 더 좋은 집을 찾아 도시로 이주하던 시기에 반대로 두 사람은 시골로 향했다. 한적한 시골에 있는 허름한 집을 사서 부족한 솜씨로 보수하고 장작을 패고 먹을 것을 손수 마련하며 연명했다. 하지만 행복했다. 소유욕의 노예가 되지 않고, 어둡고 혼란스런 사회에서 벗어나 순수한 이상을 지키면서 사는 삶도 좋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두 사람에게는 서로를 이해하는 짝이 있지 않은가.   

두 사람이 만든 농장은 제법 번성하여, 두 사람이 먹고, 스콧이 단풍나무 숲에서 채취한 메이플 시럽으로 헬렌이 사탕을 만들어 팔면 따로 수익이 생길 정도가 되었다. 도시에서 나고 자란 나로서는 상상이 잘 안 되는 생활이지만, 두 사람을 보니 요즘 같은 시대에 직접 운영하는 농장 같은 것이 있는 것도 괜찮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당신은 영화관에 앉아서, 단지 일어날 듯 믿게끔 보일 뿐 거의 일어나지 않거나 결코 일어나지 않을 일들의 그림을 보는 대신에, 학교 밖에서 당신의 상상력을 시험하고 능력을 일깨우며, 쓸모있고 아름다운 어떤 것들을 만들 수 있는 소질이 당신에게 있음을 느낌으로 확신시켜주는 그런 일들을 하는 데 시간을 쓸 수 있을 것입니다. (p.191)

 

차츰 스콧과 헬렌의 생활이 세상에 알려지고, 호응하는 사람이 늘어났다. 두 사람의 농장에 직접 방문하는 사람도 있었고, 편지로 대신 격려의 메시지를 보내는 사람들은 더 많았다. 지금은 두 사람 모두 세상을 떠났지만, 두 사람의 멋진 뜻이 담긴 말과 글이 책으로 남아 전해지고 있다.  

 

 

 

 

 

 

  

  

 

신기한 것이, 전에는 스콧의 생애에만 관심이 있었는데 나이를 먹을수록 헬렌의 삶에 관심이 가고 더욱 존경심이 느껴진다. 어두운 사회에 맞서는 삶을 살 인물의 반려자들을 보면 대개 인고와 희생으로 그려지는, 비극적인 삶을 산 사람이 많다. 하지만 헬렌의 자서전을 읽고 있자니 어느 귀부인, 재벌 부인보다도 풍요롭고 따뜻한 삶을 산 것 같았다. 물질이나 명예보다도 배우자의 믿음과 사랑을 가진 삶이 더 귀하고, 그만큼 얻기 어려운 것이기 때문일까? 

게다가 스콧처럼 보통 사람보다 큰 뜻을 품은 강직한 사람과 보폭을 맞춰 걷는 삶을 산다는 것은 여간 힘든 일이 아닐 것이다. 그런 이의 옆에서 평생을 최고의 동료이자 친구로서 산 헬렌이 참 대단하다. 의미 없는 만남과 헛된 명예 대신 이처럼 조화롭고 편안한 삶을 함께 살 누구 한 사람만 있어도 인생이 참 따뜻하고 행복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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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리시스 2011-11-19 01: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책은 못 봤는데, 정갈하고 따뜻한 페이퍼예요. 저는 밥상에는 도통 관심이 없어서, 자연친화도 모르겠고, 가끔 동물친화적이기는 한 듯한데.. 제가 가끔 들르는데 이 페이퍼 늦게 봤네요. 책 표지 모아두니까 정말 예뻐요. 우리도 조화롭고 편안한 삶을 살아요, 블랙라빗님.^-^

주말 잘 보내시구요!

키치 2011-11-22 16:34   좋아요 0 | URL
덧글이 늦었네요. 저도 읽는 책만 이렇고, 실제 생활은 자연친화, 생태적인 밥상은 고사하고 과식이나 안 했으면 싶어요ㅎㅎㅎ 들러주셔서 고맙습니다. 날씨가 많이 춥네요. 따뜻하게 지내고 계시길 바랍니다:)
 
마이 코리안 델리 - 백인 사위와 한국인 장모의 좌충우돌 편의점 운영기
벤 라이더 하우 지음, 이수영 옮김 / 정은문고 / 2011년 7월
평점 :
절판


  

 

저자는 한국인 이민자 부모 밑에서 자란 한국인 여성과 결혼한 미국인 남성이다. 원래 직업은 '파리 리뷰'라는 문예지 편집자로, 청교도 전통을 지닌 백인 중산층 가정 출신이다. 그런 그가 엉겁결에 장모와 함께 델리를 경영하게 된다. 델리는, 우리나라로 치면 동네마다 한두개쯤 있는 슈퍼마켓(그나마도 요즘은 편의점과 대형마트, 대기업 체인 마트에 밀려나 보기가 힘들다) 비슷한 것인데, 생필품, 식료품은 물론 간단한 요깃거리나 커피 같은 음료도 판다. 초기자본이 얼마 들지 않고 기술도 필요 없다보니 외국인 이민자가 주로 운영하고, 그 중에서도 생활력 강하고 성실하기로 유명한 한인들이 많이 운영한다고 한다.  

 

몇 달 전에 처음 얘기를 꺼냈을 때 예상한 반응은 "안 돼, 벤! 그동안 받은 교육과 자란 환경을 생각해야지. 제발 부탁이다!" 같은 거였는데, 막상 부모님은 열광적인 지지를 보냈다. ... "재미있는 경험이 될 거야. 도시 하층계급의 삶에 대한 민속지랄까, 참여연구가 되는 거지. 조지 오웰도 접시닦이로 일한 적이 있잖니. 조지프 콘래드 역시 젊은 시절 배를 타고 해외를 떠돌았고." (pp.61-2)

저자는 그때까지 백인 중산층 가정 출신답게 변화를 싫어하고 다른 인종이나 민족, 계급과 어울려 살아본 경험도 별로 없었다. 정신적인 가치만을 숭배하며, 맹목적으로 돈만 추구하는 것은 속물스럽다고 생각했다. 델리에서 일하는 것을 '재미있는 경험'으로 치부하는 그의 아버지의 말만 보아도 어떤 환경에서 자랐을지 상상이 된다. (반면 한국인 장모는 딸이 취직이 되었을 때 이렇게 말했다. "은 많이 준대니?") 그러니 책 읽고 생각하는 일이 천직인 '글쟁이' 저자에게 델리 일은 고통 그 자체였다. 육체노동은 처음인데다가, 갑자기 다양한 배경을 가진 낯선 사람들을 상대하게 되었으니 당연하다. 게다가 투잡을 뛴다는 것이 알려져 본업인 편집자 일도 간당간당하게 되었다. 처음해보는 장사도 신통치 않은데, 델리 때문에 회사에서 쫓겨나면 어쩌나 하는 고민에 시달리는 날도 있었다.     

거기에 한국인 가정에서 생활하는 고통까지 더해졌다. 델리를 시작하면서 저자는 재정적인 문제로 아내와 처가에 얹혀살게 되는데, 일찍이 청소년기부터 독립해서 살았던 그에게 이는 엄청난 변화였다. 한국 가정이 대개 그렇듯이 가족들이 노크 없이 벌컥벌컥 문 열고, 옷은 물론 속옷까지 같이 입고, 친척들이 자주 드나들고... 미국인들이 소중히 여기는 '프라이버시'라는 것을 도무지 존중받지 못하는 환경이었다. 특히 저자를 괴롭히 것은 바로 한국음식. 한국인들이 '매 끼니를 방금 단식이라도 끝낸 것처럼 먹는'다는 문장을 읽고, 금방 과식에 가까운 식사를 끝낸 스스로를 반성했다. 하지만 한국인인 내 눈에는 미국인들이 머핀 한 개, 샌드위치 한 개로 식사를 때우는 게 신기해 보인다는 걸 알까? (내 눈에 그것들은 그저 '간식'일 뿐인데 ㅎㅎ)     

  

도서전 같은 일을 통해 조지는 편집자들이 '문학'처럼 천성적으로 고귀한 것은 내버려두어도 성공하리라는 당위만 품고 관성적으로 일하는 대신, 판매 일도 해보도록 구슬렸다. 도서전으로 내몰아 판매를 구걸하도록 만들어, 자아를 파는 것 같은 행위에도 굴욕감보다는 해방감을 느낄 수 있음을 보여주려 한 것이다. 자신을 너무 대단하게 생각해서는 할 수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pp.258-9)  

하지만 델리에서 보내는 시간이 쌓이면서 그에게 점점 변화가 찾아온다. 그 변화가 극적으로 보여진 부분이 바로 회사 업무차 가게 된 도서전. 예전같으면 팔짱 끼고 부스를 지키고 있었을 그가 목청 높여 구독자를 유치하며 '영업'을 하기 시작했다. 델리에 쌓여있는 물건들을 어떻게 팔면 좋을지 고민하는 것처럼, 죽어있는 문예지를 사람들 손에서 살아나게 하고 싶다는 열망이 생긴 것이다. 

생각해보면 소비 행위가 인간에게 즐거움을 주는 것처럼 판매 행위도 그럴 것이다. 우리말로 '물건을 사다'라고 할 때 '사다(buy)'라는 말과 '삶을 살다'라고 할 때 '살다(live)'라는 말이 비슷한 것은 우연일까? '사는' 행위가 '살아있는' 기쁨을 준다면, 파는 행위도 그만큼 즐겁고 보람된 일일 것이다. 남에게 살아있다는 경험을 주는 일이기 때문이다. 고로 무엇을 팔 때 받는 것은 동전 몇 푼, 지폐 몇 장뿐만이 아니라, 누군가 나의 도움을 필요로 한다는 기쁨, 보람, 그 짜릿함도 있다. 그러니 맥주를 팔고 담배를 파는 것처럼, 편집자로서 좋다고 생각하는 글을 남들에게 파는 것은 결코 속물적인 일이 아니라고 저자는 확신하게 되었다.    

처음 이 책 소개를 읽었을 때에는 미국인 사위가 한국인 이민자 가정에서 살면서 벌어지는 에피소드 정도일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읽어보니 한 남자가 삶의 의미에 대해 생각해보고, 개인이라는 한계를 벗어나 가족과 지역사회로 시각을 넓히는, 제법 깊이  있는 성장기(저자 나이가 서른이 넘었으니 성숙기라고 해야 하나?) 였다.  

나에게는 언제 어떤 곳이 귀중한 삶의 체험의 장소ㅡ 즉, '마이 코리안 델리'였는지 궁금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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