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 번을 흔들려야 어른이 된다 - 세상에 첫발을 내디딘 어른아이에게
김난도 지음 / 오우아 / 201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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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V를 즐겨 보지 않는 내가 오랜만에 드라마에 푹 빠졌다. 바로 장안의 화제 <응답하라 1997>. 1997년에 나는 초등학교 4학년, 즉 '초딩'이었으니 드라마 속 고등학생들과 같은 세대라고 말하기는 어렵지만, 내 주변에도 H.O.T와 젝스키스를 좋아하던 친구들이 있었고, <슬램덩크>와 천계영의 <언플러그드 보이>와 <오디션>을 보았고, '양파'라는 이름이 신기했고, '얼굴 없는 가수' 조성모의 얼굴이 궁금했고, <별은 내 가슴에>와 <신데렐라>를 모두 본방사수했던, 세상 일에(주로 연예계) 관심 많은 여자아이였기 때문에 무척 공감하며 보고 있다.

 

드라마를 통해 그 때 그 시절의 풍경과 유행했던 것들을 보면서 새삼 내가 나이를 먹었다는 것을 느꼈다. 마음은 그 때와 별로 달라진 게 없는 것 같은데, 일단 몸이 변했고, 스스로에 대한 인식과 주변 사람들, 세상을 보는 눈은 예전과 많이 달라졌다는 것을 느낀다. 다행히도 이제까지 살면서 인생을 좌우할 만한 큰 사고나 사건은 없었지만, 그 때로부터 무려 15년이라는 시간이 지나는 동안 내 곁을 작은 바람들이 무수히 지나며 내 몸을 수없이 흔들었던 탓일까.

 

 


베스트셀러 <아프니까 청춘이다>의 저자 김난도의 신작 <천 번을 흔들려야 어른이 된다>는 바로 이런 - 아이가 어른으로 커가면서 느끼는 성장통과, 겉만 자란 '어른아이'들의 고민에 관한 책이다. 어떻게 보면 이 책은 내용이나 구성만으로 보면 <아프니까 청춘이다>를 많이 닮았다. 하지만 <아프니까 청춘이다>가 주로 대학생, 취업준비생, 사회초년생 등 20대 청춘들이 대상이라면, 이 책은 어른이 되기 위한 성장통을 앓고 있는 청소년과 청년층, 그리고 겉모습은 어른이지만 아직도 아잇적 상처를 안고 있는 직장인, 은퇴자, 전업주부 등 다양한 연령과 계층을 대상으로 하기 때문에 더 많은 사람들에게 공감을 얻을 수 있을 것으로 기대가 된다.

 

이 책에는 어른이 되면서 맞닥뜨릴 수 있는 크고 작은 위기와 시련들에 대한 이야기가 실려 있다. 어렵게 들어간 직장에 적응하지 못하면서 느끼는 무력감, 열심히 공부하고 일했는데도 인정받지 못하는 서러움, 사랑받고 싶은데 사랑받지 못하고, 함께 있고 싶은데 함께 있지 못하는 데서 느끼는 쓸쓸함, 여자라서, 남자라서 느끼는 한계... 그 모든 시련들을 저자 김난도는 '바람'이라고 명명하고, 이 바람들을 견뎌냄으로써 튼튼한 고목으로, 훌륭한 어른으로 성장할 수 있다고 말한다.

 


 


책을 읽다보니 자연히 이제까지 나를 흔들었던 무수히 많은 작은 바람들이 떠올랐다. 중학교 운동장에서 친구와 배드민턴 실기 연습을 할 때 셔틀콕을 싣고 날라주었던 바람, 방송반 모임을 마치고 교문 앞에서 친구들과 붕어빵을 사먹을 때 차갑게 불어댔던 야속한 바람, 입시제도가 추첨제로 바뀌는 바람에 1지망으로 썼던 고등학교는 떨어지고 16 지망으로 썼던 고등학교에 붙어서 내키지 않는 마음으로 입학식에 참석했던 날에 불어왔던 바람, 대학교 첫 엠티를 마치고 집으로 가던 길에 불었던 바람, 알바 끝나고 피곤한 몸을 이끌고 집으로 향하던 길에 불었던 바람, 소중했던 사람과 함께 걸으며 맞았던 바람, 마지막으로 본 날 불었던 바람, 바람...

 


'나를 키운 건 팔할이 바람이다'라는 서정주의 유명한 싯구처럼, 나를 키운 것 역시 팔할은 바람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중요한 건 바람이 불었다는 사실 그 자체가 아니라, 그 바람으로 인해 내가 전보다 더 단단하게 여물어지고 성숙해졌다는 것. 지금 불고 있는 바람도 충분히 이겨낼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과 기대. 바로 그것이 아닐까. '흔들리지 않는 것이 어른이 아니라 천 번을 흔들려야 어른이 된다', 그 때의 흔들림이 '지극히 당연한 어른 되기의 여정' 이었다는 저자의 말을 믿어보고 싶다.

 

 

 


사실 나는 <아프니까 청춘이다>를 읽었을 때만 해도 란도쌤은 우리나라 최고 대학 법대 출신에 교수라는 위치에 있는 분인 만큼 나 같은 ‘잉여 청춘’에 대한 시각이 보통 사람들과 같지 않은 게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번 신간을 읽으면서 란도쌤도 전셋집 구하느라 애먹고, 부모님 생각에 아프고, 자식 걱정을 하는 보통 사람이라는 점이 엿보여서 재미있기도 하고, 따뜻하고 정감 있게 느껴졌다.

 


돌아보면 사회적으로 성공한 어른이 전문 분야나 업적이 아닌 자기 자신의 이야기를 하는 모습을 보기가 어렵다. 그래서 젊은이들이 어떤 직업인, 사회인이 되고 싶은가를 생각하기 이전에 어떤 사람이 되어 어떤 삶을 살고 싶은가에 대해 생각해볼 기회가 없는 것 같기도 하다. 앞으로도 선생님께서 생활에 대해, 인생에 대해 어떤 생각을 하고 계신지를 계속 들려주셨으면 좋겠다.

 

 

 

 

청춘은 젊음이 자연스레 가져다주었는지 모르지만 어른은 다릅니다. 나이를 먹는다고, 학교를 졸업한다고, 절로 어른이 되진 않습니다. 시행착오를 되풀이하고 흔들리며 조금씩 삶을 배워나가면서, 꼭 그만큼씩만 어른이 됩니다. (p.9)

 

지금 취업을 못 하고 있다고 해서 인생이 멈춰있는 것은 아닙니다. 인생이라는 버스는 가고 있습니다. 다만 서서 가야 하다보니 앉아 있는 사람들보다 힘들게 느껴지는 것이지요. (p.34)

 

'아, 내 안에 아직도 열지 않은 서랍이 많구나.' 싶다. 어른이 된다는 것은 조심스럽게 자기 내면의 서랍을 열고 그 안에 무엇이 담겨 있는지 확인하고, 또 그 안에 새로운 것을 담아가는 과정이라는 것을 깨닫는다. (p.52)

 

내가 조금씩 배우고 성장하면서 더 풍요한 존재가 되는 일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세상의 평판이 아니라, 나라는 이름의 초인에 끊임없이 다가가려는 시도들이 나의 가치를 만든다.


우리는 우리가 시도하는 그 무엇이다. (p.82)

 

꿈은 결코 도망가지 않는다. 도망가는 건 항상 당신 자신이다. (p.98)


우리는 서로에게 달 같은 존재다. 계속 같은 반구만 보여준다. 가장 밝은 면만 말이다. 그래서 우리는 상대방의 어두운 뒷면은 볼 수가 없다. 내 어둠을 아는 것은 나뿐이라는 사실은 하나의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p.2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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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도가 바다의 일이라면
김연수 지음 / 자음과모음 / 201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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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을 즐겨 읽는 편은 아닌데, 유일하다시피 관심을 가지고 신간이 나오면 살펴보게 되는 작가가 바로 김연수다. 이유는 잘 모르겠다. 분위기가 좋아서? 글이 좋아서? 아무튼...... 김연수의 소설을 읽을 때마다 나는 그가 한국의 무라카미 하루키 같다는 생각을 한다. 작은 사건에서 시작하여 급물살을 타듯이 큰 주제로 나아가는 이야기 전개 방식도 그렇고, 담담하고 간결한 글의 느낌도 비슷하다. 무엇보다도 자국 문학의 한계를 뛰어 넘어 이국적인 것, 외국의 것을 글 속에 도입하려고 노력하는 점이 닮았다. 한국 문학이 앞으로 세계에 더 알려졌으면 좋겠고, 한국 문학의 장르와 내용이 보다 풍성해지길 바라는 마음에 김연수에게 남다른 애정을 가지는 건지도 모르겠다.

 

그의 신작 <파도가 바다의 일이라면> 역시 한국이 아닌 외국에서 이야기가 시작되고, 외국으로 입양된 여인 카밀라가 주인공이라는 점이 특이했다. (그의 단편집 <세계의 끝 여자친구>에도 입양아가 한국에 와서 부모를 찾는 비슷한 설정이 있었다.) 작가인 카밀라는 의뢰받은 글을 쓰기 위해 사진 한 장만 달랑 들고 사진 속 어머니의 땅 한국을 찾는다. 그녀는 수소문 끝에 사진에 관한 정보와 어머니에 대한 단서를 하나씩 하나씩 알게 되고, 상상조차 하지 않은, 자신의 출생에 관한 무서운 진실을 알게 된다.

 

후반으로 갈수록 카밀라보다는 카밀라의 출생의 비밀에 관한 내용이 주가 되는데, 이 때 카밀라가 아닌 다른 화자의 입을 빌어 서술되는 점 역시 신선했다. 카밀라만 보면 단순히 입양된 여자가 어머니를 찾는 이야기다. 하지만 후반부는 다른 화자의 입을 빌림으로써 사건의 진실이 객관적인 르포가 아닌, 여인의 원한 서린 비가(悲歌) 같은 느낌으로 절절하게 다가왔다. 뿐만 아니라 카밀라의 출생의 비밀을 파헤치는 큰 줄거리 속에 노동자와 사주 간의 대립, 노동자들의 비참한 현실, 사람 사이의 소통이 단절되고 끝내 부재하는 현상, 고독의 문제까지 다양한 문제가 어우러진 점도 인상적이었다. 개인의 삶은 언뜻 섬처럼 떨어져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수많은 사람들의 관계와 사건의 중첩으로 만들어진다는 것을 여실히 보여주었다.

 

생각해보니, 카밀라는 우리말로 '동백' - 추운 겨울에 눈부시게 붉은 빛깔을 뽐내는 꽃의 이름이다. 도무지 꽃이 필 수 없을 것 같은 계절에 피어나는 동백처럼 카밀라는 태어났고, 우리 인간도 도무지 살 수 없을 것 같은 환경에 놓여져도 꿋꿋이 살아간다. 아니, 살아진다. 그것은 인간의 힘이기도 하지만, 인간이 태어나기 전부터 엄청난 사랑과 애정을 쏟아부어준 존재 - 바로 그 존재가 있었기 때문이 아닐까.

 

그렇기에, 언젠가 이 책을 잊어도 '파도가 바다의 일이라면, 너를 생각하는 것은 나의 일이었다'던 화자의 말은 잊을 수가 없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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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짝반짝 추억 전당포 스토리콜렉터 11
요시노 마리코 지음, 박선영 옮김 / 북로드 / 201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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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상한 날이었다. 친구가 결혼을 하는데 가지도 못하고, 나보다 어려 보이는 수험자들 사이에서 시험을 보고... 어른이 되는 기준이 취업을 하거나 가정을 꾸리는 것이라면 난 아직도 애. 나이만 먹은, 몸만 큰 애 같은 기분으로 책을 집어들었다. 그 책이 바로 이 책 <반짝반짝 전당포>였다.

 

<반짝반짝 전당포>의 등장인물들은 대부분 어린 학생들이다. 부모님의 간섭이 귀찮고, 친구 때문에 고민하고, 애정 문제에는 한없이 서툰, 아주 보통의 아이들이다. 그들 중에서도 중심에 있는 소녀가 리카다. 신문부원이자 우등생인 리카는 아이들 사이에서는 주도적인 역할이고 어른들에게는 싹싹하고 착한 여학생이다. 리카가 사는 마을에는 아이들 사이에만 알려져 있는 비밀의 장소가 있다. 바로 '추억전당포'. 이 곳의 마녀에게 추억을 맡기면 그만큼 돈을 주는, 말 그대로 추억을 받는 전당포인 셈이다. 이 곳에는 한 가지 규칙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스무살이 되면 이 곳에 관한 기억이 모두 사라진다는 것이다. 그래서 아이들은 어른이 되면 이 곳을 잊어버리게 되고, 그런 식으로 이 곳은 아이들 사이에만 공유되는 비밀로 남을 수 있었다.

 

마을 아이들 모두가 이 곳의 존재를 알고 있고 게임기나 간식을 사기 위해 돈이 필요하면 추억을 팔고 돈을 받으며 이 곳을 이용했지만, 리카만은 이 곳의 존재를 알면서도 이용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당돌하게도 학교 신문부의 이름으로 마녀를 찾아가 인터뷰를 하고 다른 음모가 있는 것은 아닌지 캐물었다. 그런 리카가 우연한 사건으로 인해 그토록 믿고 싶지 않았던 '추억전당포'의 단골 손님이 되고, 여전히 추억은 팔지 않지만 마녀와의 우정을 쌓으면서 어른으로 성장해가는 이야기가 이 소설의 전체 줄거리라고 할 수 있다.

 

마을 아이들이 추억을 팔아 돈을 버는 모습은, 어른들이 돈을 버느라 아이 시절의 순수한 마음을 잊어가는 것에 대한 일종의 비유가 아닐까 싶었다. 추억전당포를 드나드는 아이들의 모습을 보면 화가 날 만큼 불쾌한데도, 현실의 어른들이 그런 식으로 사는 모습을 보면 아무렇지도 않은 이유는 무엇일까. 돈이 주는 면죄부일까, 어른이 만드는 변명일까.

 

그에 반해 리카가 '추억전당포'의 존재를 믿게 되는 과정은, 무리해서 어른이 되려 했던 모습을 반성하고 아이로서의 순수함을 지키면서도 자기 스스로의 힘으로 어른이 되겠다는 자각을 해나가는 모습으로 볼 수 있다. 성적이 비슷하고 성격도 얼추 맞는 - 소위 비슷한 그룹의 친구 대신 겉모습은 달라도 마음이 잘 통하고 진심으로 서로를 응원할 수 있는 친구 메이를 사귀게 되는 과정과 남자친구 유키나리와의 비틀린 관계를 정리하는 과정에서 리카가 전에 비해 얼마나 성장하고 성숙해졌는지 느낄 수 있었다. 만약 리카가 예전의 모습 그대로 거짓된 관계를 이어나가고 무리해서 어른이 되려고 애썼다면 그토록 소중한 친구를 만날 수 있었을까? 어쩌면 어른이 되어서도 어설픈 아이처럼 살고 있는 것은, 아이였을 때 어른인 척 하느리 좀 더 느긋하게 어른이 될 준비를 하지 못 했기 때문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내 입으로 말하기는 민망하지만, 나는 리카가 학창시절의 내 모습을 보는 것 같았다. 신문부라는 것도 그렇고, 선생님과 친구들의 눈을 신경 쓰며 행동하는 것도 그렇고, 아이들이 모두 믿는 '추억전당포'의 존재를 본인만은 믿지 않고 오히려 의심하고 추궁하는 당돌한 성격도 그렇다. 메이 같은 친구를 동경한 점, 게다가 자기와 다른 성격의, 냉정하지만 솔직한 소년 유키나리에게 끌린 점까지도 똑같다. 그리고 나에게도 '추억전당포' 처럼 눈을 돌리면 언제나 추억을 떠올리게 만드는 소중한 존재가 있다. 그래서 리카가 어린 시절의 추억을 간직한 채로 멋진 어른으로 성장했듯이, 어쩌면 나에게도 지금의 이 늦되고 오랜 성장통이 헛된 것만은 아니지 않을까, 그렇게 믿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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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나미의 아이들 - 재난이 휩쓸고 갈 수 없는 것들에 관한 이야기
모리 겐 지음, 이선미 옮김 / 바다출판사 / 201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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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 3월 11일에 일어난 동일본 대지진 소식을 처음 들었을 때, 나는 그저 일본에서 흔히 있는, 진도 1,2 정도의 약한 지진이겠지 하고 생각했다. 하지만 국내 언론과 일본 방송, 그리고 인터넷과 SNS 서비스를 통해 들려오는 소식을 연달아 접하면서 엄청난 재해가 일어났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거기에 후쿠시마 원전 사고, 전력 부족으로 인한 정전과 피재지 난민들의 어려운 사정을 접하면서 같은 나라 사람이 아닌데도 안타깝고 슬펐다. 얼마 후 일본 사회는 복구 작업을 개시했고, 시민들은 피재지에 지원 물자를 보내고 솔선하여 절전 운동을 하면서 국난 극복을 위해 일치 단결하는 모습을 보였다. 그렇게 잘 마무리 되고 있다고, 국내에는 거기까지만 보도가 되었다.

 

하지만 일본어를 공부하고 있고 일본문화에 관심이 많은 사람으로서 꾸준히 일본 사회를 관찰하고 있는 내가 느끼는 것은 조금 달랐다. 1년 몇 개월이 지난 지금도 일본 사회가 그 때의 충격으로부터 완전히 벗어났다고 보기는 어렵다. 인력으로 어찌할 수 없었던 무서운 재앙 앞에서 일본 사회는 감정을 절제하고 변화나 새로운 시도를 삼가는 풍조가 더욱 만연해졌다. 안 그래도 경기 침체와 고령화 등으로 침체되어가는 사회 분위기 속에서 이번 쓰나미가 일본 사회의 고삐를 죈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하지만 <쓰나미의 아이들>을 읽으면서 생각이 바뀌었다. 어쩌면 내가 너무 비관적으로 보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반성하는 마음도 들었다.

 

이 책 <쓰나미의 아이들>의 저자 모리 켄은 일본을 대표하는 탐사보도 전문 저널리스트이다. 그는 쓰나미 이후 피재지의 아이들로부터 작문을 받아 아이들의 눈에 이번 재난이 어떻게 비쳐졌는지, 그들의 삶에 어떤 변화가 생겼는지를 집중적으로 취재하고 보도했다. 그의 시도는 일본 사회 내에서 큰 반향을 불러 일으켰고, 피재지 밖의 일본인들에게는 감동과 경각심을, 그리고 피재지 주민들에게는 위로와 희망을 주었다.

 

나는 책을 읽기 전에 이런 생각을 했다. 일반인보다도 훨씬 글을 잘 쓰는 저널리스트가 굳이 어린이들에게 글을 쓰게 한 이유는 무엇일까? 저널리스트라면 해박한 지식과 예리한 관찰력으로, 아이들이 쓴 글보다도 훨씬 좋은 글을 쓸 수 있지 않았을까?

 

책을 읽어보니 저자가 이런 시도를 한 이유는 따로 있었다. 바로 1933년 요시무라 아키라가 쓴 <산리쿠해안 대지진해일>이라는 책 한 권이다. 이 책에서 故 요시무라는 1933년 3월에 일어난 소화 대지진해일 때 피해를 입은 어린이들의 글을 모아 소개했다. 그 때의 해일은 이번 쓰나미의 20세기판, 소화(쇼와) 버전이라고 해도 좋을 만큼 비슷한 점이 많았다. 3월에 일어났다는 점을 비롯해 발생 지역도 겹친다. 저자는 이번 쓰나미가 유례가 없는 일이 아니고 불과 몇 십년 전에 일어났던 재난과 비슷하다는 사실에 놀랐고, 그 때의 재난을 극복하고 다시 사람들이 마을을 부흥시켰다는 점에 두 번 놀랐다. 그 중심에는 앞으로 미래를 짊어지고 갈 아이들이 있다는 것, 거기에 저자는 주목했다.

 

아이들은 성인에 비해 세상을 보는 관점이 다르다. 훨씬 민감하고 섬세하다. 그래서인지 아이들의 글은 전문 기자나 작가가 쓴 세련되고 정제된 글에 비하면 투박하지만 훨씬 안타깝고 애잔하게 다가왔다. 하루 사이에 부모를 잃고, 형제와 친구들을 잃고, 집과 학교가 부서지고, 아끼는 물건들이 망가지고... 성인인 나도 소중한 사람들, 소중한 것들이 없어지고 부서진다는 생각을 하면 그저 두렵고 무서운데 아이들의 여린 마음에는 그 때의 기억이 얼마나 많은 상처를 주었을까.

 

더욱 놀라운 것은 이 여린 아이들이 어른들보다도 훨씬 빨리 현실을 직시하고 미래로 나아가기 위해 일어섰다는 점이다. 먼저 아이들의 글을 받은 저자는 추후 취재를 통해 부모님이나 다른 가족, 주변 사람들을 만나면서 아이들이 쓴 이야기를 보완했다. 그 때 저자가 만난 어른들 중에는 갑작스럽게 닥친 삶의 고비 앞에 넋을 잃고 괴로워하기도 하고, 안 좋은 생각을 하는 사람도 있었다. 하지만 아이들은 오히려 어른들에게 용기를 주었다. 그런 모습을 보며 역시 아이들은 어른들의 생각을 뛰어넘는 존재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가 하면, 위기 시에는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 모범을 보인 어른들도 있었다. 자기 형편도 어려우면서 피재지를 수습하고 임시 거처를 통솔하는 어른이 있는가 하면, 부모에 조부모까지 잃고 고아가 된 조카들을 돌보는 고모, 크게 놀랐을 아이의 마음을 위로하기 위해 일부러 <산리쿠해안 대지진해일>을 구해 읽을 정도로 자식에 대한 애정이 깊었던 어머니 등... 이런 사람들이 있어서 일본 사회가 큰 재난 앞에서도 의연하고 겸허하게 대처할 수 있었고, 위기를 극복할 수 있었던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 점에서 마지막 글인 마키노 아이의 <쓰나미>는 이 책의 결정체라고 할 수 있다. 마키노 아이는 1933년 산리쿠해안 대지진해일 당시 생존하고 이번 쓰나미에도 해를 입지 않은, 그러니까 두 번이나 쓰나미를 겪고도 살아 남은 아흔 살 가까운 할머니다. 나는 차마 쓰나미를 두 번이나 겪은 사람이 있을 줄은 생각도 못하고, 글 처음에 나오는 할머니 사진을 보고 잘못 실린 것이거나 다른 사연이 있는 줄만 알았다. 할머니는 1933년 쓰나미 때 가족 모두를 잃고 천애고아가 되었다. 그러나 지금까지도, 그 큰 고통과 시련을 준 고향에서 가족을 꾸리고 살고 계신다. 어떤 시련이 와도 고향과 가족에 대한 마음은 파도가 휩쓸 수 없고, 살겠다는 의지는 재난이 꺾지 못한다는 것을 이 분을 통해 절절히 느꼈다. 그래서 일본 사회는 아직 희망이 있다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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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부르는 숲 - 미국 애팔래치아 산길 2,100마일에서 만난 우정과 대자연, 최신개정판
빌 브라이슨 지음, 홍은택 옮김 / 동아일보사 / 200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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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시키지 않아도 글을 쓰고 있는 나 자신을 발견하고 나서, 그 때부터는 앞으로 어떤 스타일로 글을 쓰면 좋을까 고민하기 시작했다. 나는 문학을 하는 사람도 아니고, 전문 지식을 전하는 사람도 아니니, 쉬우면서도 약간의 무게가 있는 글을 쓰고 싶었다.


그 때 떠오른 사람이 바로 빌 브라이슨. 이전에도 그의 책을 여러 권 읽어보았는데, 글 자체는 간결해서 읽기 쉽고 유머가 많아서 읽는 내내 낄낄거리게 되지만, 책을 덮을 때에는 왠지 가슴이 먹먹해지는 느낌이 드는 것이 참 좋았다.

 

 

나는 트레일이 지겨웠지만 여전히 이상하게도 그것의 노예가 되었고, 지루하고 힘든 일인 줄 알았지만 불가항력적이었으며, 끝없이 펼쳐진 숲에 신물이 났지만 그들의 광대무변함에 매혹되었다. 나는 그만두고 싶었지만, 끊임없이 되풀이하고 싶기도 했다. 침대에서 자고 싶기도 하고 텐트에서 자고 싶기도 했다. 봉우리 너머에 무엇이 있는지 보고 싶어했고, 다시는 봉우리를 안 보았으면 싶기도 했다. 트레일에 있을 때나 벗어났을 때나 항상 그랬다. "모르겠어. 그렇기도 하고 안그렇기도 하고. 너는 어때?" 그는 내 물음에 고개를 끄덕이면서 "그렇기도 하고 아니기도 하고."라고 말했다. (p.411)

 

 

이 책은 저자 빌 브라이슨이 친구 카츠와 함께 오랜 역사를 자랑하는 미국의 애팔래치아 트레일을 종주하는 과정을 담은 에세이다. 여행기, 종주기의 성격을 크게 벗어나지 않지만, 빌 브라이슨 하면 떠오르는 풍부한 지식과 시원한 유머가 이 책에도 유감 없이 발휘되어 있어서 빌 브라이슨을 좋아하는 독자라면 이 책도 사랑하게 될 것이다.

 

책에 보면 등산가나 모험가뿐 아니라 신혼여행 대신 혹은 서로의 호흡을 맞춰보기 위해 험한 애팔래치아 트레일을 종주하는 신혼부부가 나오는데, 나도 편하게 쉬는 여행 대신 이렇게 조금은 힘들어도 기억에 남고, 평생 함께 갈 사람을 남길 수 있는 여행을 해보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숲이, 산이 나를 부르는 기분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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