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차를 놓치다 애지시선 6
손세실리아 지음 / 애지 / 201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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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는 말 그대로 절의 말이다. 극도로 절제된 언어를 사용해야 한다. 언어 자체가 이미 대상에서 미끄러짐을 경험하였다면, 우리는 언어를 통해 미끄러짐의 미끄러짐을 경험하게 된다. 

결국 모든 텍스트 읽기는 오독이라고 하는데, 이러한 오독의 즐거움을 느낄 수 있는 문학이 바로 시다.  

시에서 오독은 잘못 읽기가 아니라, 다르게 읽기이고, 기존의 읽기에서 자기만의 미끄러짐을 경험하는 행위다. 

즉 시 읽기는 언어라는 썰매를 타고, 시라는 미끄럼틀을 신나게 내려오는 재미있는 놀이이다. 

그렇다면 손세실리아의 이 시집에서 나는 어떤 즐거움을 느꼈는가. 

우선은 따뜻함이다. 이 시집에는 어렵지만 자신의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모습이 나온다. 비참하다는 생각보다는 따뜻하다는 생각, 참, 세상 이렇게 볼 수도 있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한다. 시집의 제목인 '기차를 놓치다'는 시가 바로 그렇다. 없는, 노숙인이라 할 수 있는 사람들의 따뜻한 모습을 보다 기차를 놓치고 말았다는 내용의 이야기에서 왠지 추워야 하는데, 추위보다는 따뜻함이 더 느껴졌다고나 할까. 

다음은 비움에 대한 생각이다. 굳이 노자를 들먹이지 않더라도 비워야지만 채울 수 있다. 비움이 없으면 더 이상의 채움은 없다. '시를 버리다'에서 버리기 위해서 시를 쓴다는 말이나, '봉안터널'에서 길을 내기 위해 비워야 한다는 내용을 보면 결국 우리 삶은 어떻게 비우냐에 따라 더 충만한 삶을 살 수 있음을 깨달았다고나 할까. 

여기에 덧붙여 '곰국 끓이던 날'과 '늙은 호박'을 보면 자신의 삶을 온전히 살아온 모습이 느껴지고ㅡ 우리 삶 역시 이렇듯 최선을 다해, 자신의 전존재를 삶에 걸고 온 길이었음을 생각하게 되었다. '얼음호수'란 시에서 '세상으로 부터 나를 완전히 봉해 본 적 있던가'고 외치고 있는데, 세상으로 부터 나를 완전히 봉한다는 말은 결국 나를 완전히 비울 수 있는 존재가 되어 본 적이 있는가라는 말로 바꿀 수도 있지 않을까. 호수가 얼음으로 자신을 완전히 봉한다는 것은 자신을 완전히 드러내기 위해서 하는 행위이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채우기 위해 비워야 한다. 이 비움을 통해 채움이 일어날 수 있음을, 더 아름다운 충만함은 비움에서 온다는 사실을 이 시집을 읽으면서 다시 한 번 생각해 보게 되었다. 

이웃에 대한 따뜻한 관심, 내 삶에 대한, 내 주변 사람들의 삶에 대한 관심, 그리고 우리는 어떤 삶을 살아야 할지 생각해보게 하는, 그러나 결코 어렵지 않은, 언제고, 어느 장이나 펼쳐 눈에 들어오는 시를 읽어도 좋은 그런 시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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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오의 세기 - 20세기는 왜 피로 물들었는가
니얼 퍼거슨 지음, 이현주 옮김 / 민음사 / 201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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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는 '아(我) 와 비아(非我)의 투쟁'이라는 말도, '과거와 현재의 끊임없는 대화'라는 말도 있는데, 우리는 역사를 소홀히 다루고 있지는 않은지 생각해 본다. 

역사에 소홀하면 자신을 바르게 바라볼 수가 없다. 즉 자신을 비출 거울이 없다고 할 수 있다. 역사, 개인의 역사가 아니라 국가, 민족, 세계의 역사라면 이는 단지 자신만을 비추지 않고, 인류의 운명을 비추어주는 역할을 하게 되니, 역사에 소홀하면 인류는 자신이 건설한 찬란한 문명을 한 순간에 잃을 수도 있다. 

우리는 역사를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서라도 공부해야 한다. 마르크스는 '역사는 두 번 반복된다. 한 번은 비극으로, 한 번은 희극으로'라고 했지만, 역사가 반복되는 순간 인류는 또다시 비극에 빠지게 된다. 

가장 인류의 문명이 발달되기 시작한 20세기에 왜 그토록 많은 전쟁이 일어났고, 전쟁까지는 아니더라도 그 많은 학살이 일어났을까? 원인이 뭘까? 막을 수 없었을까? 역사는 가정을 허용하지 않는다고 하지만, 우리는 이러한 가정을 통해 미래를 대비할 수 있다. 아니, 대비해야만 한다. 

이 책을 읽는 내내 인간은 경쟁을 중심으로 살아가는 존재일까, 아니면 협동을 중심으로 살아가는 존재일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을 막기 위해서 홉스는 국가가 필요하다고 했는데, 사실 20세기에 일어난 많은 학살들은 국가에 의해 일어나지 않았던가. 그렇다면 홉스식의 국가는 폐기 되어야 하지 않나. 오히려 아나키스트들이 주장하는 대로 국가 자체가 폭력이니 우리는 국가권력을 포기하고, 상호연대성에 기반한 집단으로 살아가야 하지 않나. 

유럽에서도, 아시아에서도, 그리고 아프리카에서도, 아메리카에서도 빼놓지 않고 많은 살륙이 있었는데, 이 살륙들이 차이를 인정하지 않고, 하나가 되려고 하는 광기에 의해 일어나지 않았던가. 다만 더 많은 국가들이 참여한 학살은 세계 전쟁이란 이름으로, 한 국가에서 일어난 학살은 내전, 또는 학살이라는 이름으로 자행되고 있지 않았던가. 

우리가 이러한 역사에서 배울 것은 더 이상 이런 학살이 일어나지 않게 하기 위해서 어떤 일을 하여야 할까인데, 21세기가 된 지금도 우리는 이 책의 저자가 말한 증오의 세기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지 않은가. 

서양부터 동양까지 방대한 역사적 사실들을 통해 20세기가 얼마나 증오로 점철되어 있는가를 설득력 있게 제시하고 있는 이 책은, 다시는 이런 역사가 반복되지 않기 위해 우리가 얼마나 차이에 대한 포용력을 지니고 있는가를 살펴보는 계기를 마련하고 있다. 

잘 지내던 이웃이, 어느 날 학살자로 변한 모습을 이 책의 곳곳에서 볼 수 있는데, 우리가 단일민족이라고 자랑스레 이야기하는 것이 어쩌면 또다른 줄긋기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게 만들었다고나 할까. 

협동, 용서, 상호연대. 우리에게 필요한 덕목은 바로 이것이다. 이 책을 읽으면 이 세 요소가 얼마나 우리 인간에게 필요한지 알 수 있다. 남은 바로 나의 다른 이름이라는 사실, 명심하자. 그러면 우리는 증오의 세기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이다. 

증오의 세기를 벗어나기 위해서도, 이 책 증오의 세기는 읽을 필요가 있다. 이 책을 읽으며 우리는 인류의 거울을 하나 마련해야 한다. 우리 인류를 잘 비춰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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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이 필요한 시간 - 강신주의 인문학 카운슬링
강신주 지음 / 사계절 / 201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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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신주가 쓴 글은 잘 읽힌다. 그가 철학자임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그래서 그의 글은 쉽다는 느낌을 준다. 세상에 철학에 관한 글인데, 쉽단 생각을 하게 하다니... 그래서 제목에 철학이 들어가도 별로 거부감이 생기지 않는다. 대단한 글솜씨다. 아니, 그만큼 내공의 힘이 깊다고 해야 하나.

장자부터 시작했다. 그의 글을 읽게 된 계기가. 

"장자, 차이를 횡단하는 즐거운 모험" 이 책에서 소백산 칼바람 얘기가 나온다. 그 칼바람을 정면으로 맞으며 소백산을 걷는 일.. 그러나 철학은 이러한 칼바람을 맞는 일과는 다르다. 아니다. 철학은 이렇게 칼바람을 온몸으로 맞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칼바람 맞고서도 정상에 서는 것이다. 그,렇게 정상에 섰을 때 우리는 세상을 향해 소리칠 수 있다. 철학, 별거 아니구나! 이런 생각이 들었다. 장자에 대해 참 재미있게 읽었다고나 할까.

두 번째 책, "철학적 시읽기의 즐거움-우리 시에 비친 현대 철학의 풍경" 시와 철학이 따로 떨어질 수 없으니, 그가 시도한 시읽기를 통한 철학에 다가가기도 참 좋다. 결국 시를 이해한다는 것은 시를 온몸으로 받아들인다는 얘기이고, 이는 바로 자신이 철학적으로 산다는 얘기가 되기 때문이다. 철학은 우리 삶에서 떨어져 나온 어떤 것이 아니라, 바로 우리 삶을 구성하는 어떤 것, 우리 삶 자체라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시도 읽고, 철학에 대한 생각도 하고, 일석이조(一石二鳥)

이들에 이어서 읽게 된 책. "철학이 필요한 시간" 

이 책을 읽으면서 강신주는 어쩌면 무림의 고수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다. 무림의 고수는 결코 자신을 드러내지 않는다. 자신이 어떤 실력이 있다고 내세우지도 않는다. 자신을 알아달라고 누군가에게 하소연하지도 않는다. 그리고 혹 제자를 받게 되면 제자에게 딱딱한 이론을 가르치려고 하지도 않는다. 원론을 가르치고, 이게 기본이야 하지도 않는다. 그냥 일상생활에서 할 수 있고, 해야만 하는 일을 하게 한다. 그 일을 하면서 자연스레 무공을 익히게 한다. 그것이 바로 무림고수다. 

금강경의 첫부분에 대한 글을 가끔 읽는다. 세상을 제도한다는 부처도 금강경이라는 난해한 경전에서 처음 시작은 일반인들과 다르지 않다. 그냥 밥 먹고 앉아 쉰다. 그 행위에 부처가 되는 법이 있단다. 

철학도 마찬가지다. 어려워서는 안된다. 우리의 일상생활에 철학이 이미 들어 있는 것이다. 이 사실을 알려주는 사람, 그 사람이 바로 철학자이어야 한다. 그런데 철학이라고 하면 난해한 용어부터 생각하고, 무슨 무슨 주의부터 생각하게 된다. 이는 학교교육이 잘못된 데 있겠지만, 이 잘못된 교육에서부터 벗어나려는 노력을 우리가 하지 않는데도 책임이 있다. 

즉 모든 잘못을 교육자에게만 돌려서는 안된다. 우리 자신이 철학하면 이미 마음의 문을 닫아버린 경우가 얼마나 많은가.  

앞의 경우와는 다르게 강신주는 우리에게 지금까지 우리가 철학에 대해 배워온 것을 잊게 한다. 그리고 다시 시작하게 한다. 결코 어렵지 않게, 저 멀리 구름 따먹는 소리가 아닌, 바로 우리 일상생활에 있는 이야기로 시작한다. 그래서 그는 금강경의 부처처럼, 철학이 결코 우리 일상에서 떨어져 있지 않음을 자연스레 알게 한다. 그는 고수다. 엄청난 내공을 지닌 고수.

처음부분도 시작하게에 참 좋은데, 끝부분도 좋다. 나는 이 책은 끝부분을 먼저 읽어도 된다고 생각한다. 이 책의 에필로그(지나가는 말이지만 에필로그라는 어려운 말 대신, 맺음말, 또는 나가는 말 정도로 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에서 저자는 독서를 여행에 비유하고 있다. 여행, 자신을 비우고, 간 곳에 감응하고, 결국 자신의 일상을 낯설게 바라보는 경험을 하는 것, 그 때서야 한층 성숙해진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고, 독서도 마찬가지라고.  

이 책을 읽고 독자가 조금이라도 감응을 했다면 그게 다행이라고. 

그렇다. 48명의 철학자와 그들의 저서가 나오는데, 이 저서들을 안 읽었다고 기죽을 필요가 없다. 걱정할 필요도 없다. 우리가 이 책들을 다 읽었다면 굳이 강신주가 쓴 이 책을 읽겠는가. 우리는 이 책을 아예 안 읽었거나 일부만 읽었기 때문에 강신주의 이 "철학이 필요한 시간"을 읽는다. 그리고 그가 얘기해준 내용에 감응도 하고, 반발도 하고 한다. 이 책을 읽다가 어떤 철학자에게 꽂혔다면 그 철학자의 책을 읽으면 된다. 읽어서 제 것으로 만들면 된다.   

이렇듯 이 책을 읽으며 감응하고, 반발하는 과정이 바로 철학을 하는 시간이고, 인문학적인 소양을 쌓는 시간이다. 그리고 우리는 바로 이 과정을 통해서 나를 낯설게 볼 수 있는 여유를 가지게 된다. 결국 여행이든, 독서든, 철학이든 여유에서 나온다. 번갯불에 콩 구워 먹듯이 책을 읽는다면 이는 책을 읽는다는 행위를 기계적 행위로 취급하는 것밖에는 안된다.  

여유, 그것에서 낯섬이 나오고, 낯섬에서 성찰이 나온다. 성찰을 통해 우리는 우리의 삶을 더욱 풍성하게 만들어갈 수 있게 된다. 이 책의 마지막이 마르크스의 '포이어바흐에 관한 테제'로 되어 있다.  그 중에 마지막 11번째 테제가 생각이 났다. "철학자들은 세계를 단지 여러가지로 해석해왔을 뿐이지만, 중요한 것은 그것을 변혁시키는 일이다" 대학 시절, 얼마나 마음을 울리던 말이었던가. 아니 지금도 이 말은 유효하고, 이 책을 읽은 다음에도 역시 유효하다.  

책을 읽는다는, 철학을 한다는 것은 단지 해석을 한다는 차원이 아니라, 변혁, 실천을 한다는 차원으로 나아가야 한다. 아마도 이 책을 읽고나면 조금은 자신의 삶이 변화되어 있다고 느끼지 않을까. 이 때문에 이 책은 단지 해석의 차원이 아니라, 실천의 차원으로까지 나아가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처음부터 끝까지 읽지 않아도 된다. 그냥 마음에 드는 부분을 읽고 그만 책을 접어도 된다. 그래도 이 책은 가치가 있다. 그것이 바로 낯설게 하기고 자신을 다르게 바라보는 능력을 알게모르게 키워줬으니 말이다. 

그래서 강신주는 고수다. 어려운 철학용어를 얘기하지 않아도, 철학적으로 살라고 강요하지 않아도 자연스레 우리 몸에 철학함이 밴다. 고기집에 가면 고기 냄새가 배듯이 그의 책을 읽으면 철학이 우리 몸에 자연스레 밴다. 그래서 그의 책을 읽으면 즐겁다. 읽는 과정도 즐겁고, 읽은 뒤에도 그 향기를 맡을 수 있어서 즐겁다. 

덧말: 근데, 내가 알던 지식과는 다른 게 하나 있다. 이거 기억이란 믿을 게 못된다지만, 아무래도 이건 내 기억이 더 맞는다는 생각이 드는데... 270쪽 노자의 도덕경을 설명하면서, 덕치를 이야기할 때 세종을 예로 드는데, 집현전 학사 중에 세종이 어의를 벗어주었다는 학사는 성삼문이 아니고 신숙주 아니었던가. 나는 일화를 통해 이를 신숙주로 알고 있었고, 이 일이 나중에 사육신에게 신숙주가 욕 먹는 계기가 된다고 알고 있었는데...  허나 근거를 찾지는 못 하겠고, 오직 기억에 그러하니...이거 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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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국가를 말하다 - 공화국을 위한 열세 가지 질문
박명림.김상봉 지음 / 웅진지식하우스 / 201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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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국가를 벗어나 살지 못하고 있으면서 국가를 처음부터 주어진 존재로만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나에게는 국가를 선택할 권리가 없고, 국가를 변화시킬 능력도 없으며, 국가는 나와는 너무도 거리가 먼 거대한 존재라는 생각이 지배적이다. 

하지만 우리나라 헌법 제1조 1항은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 이고 2항은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에게서 나온다고 되어 있다. 즉 국가는 우리의 외부에 존재하지 않고 바로 우리들 자신이 구성하는 존재라고 할 수 있다.  

이 책은 바로 이 헌법 1조에서 시작한다. 우리가 막연히 알고 있던 민주공화국에서, 공화국이란 무엇인가, 우리는 어떤 나라를 추구해야 하는가에 대한 질문으로 우리가 추구해야 할 국가는 당연히 헌법에 있는 공화국이며, 공화국이 왜 지금 문제가 되는지, 공화국은 무엇인지, 지금까지 우리나라는 어떻게 존재해 왔는지를 살피고 있다. 

이 책의 전반부에는 이러한 공화국의 개념에 대해 두 학자의 이야기가 전개되고 있다. 공화국이란 법치와 공공성이 기준이라는 김상봉 교수와 공화국에는 공공성(공준), 자기 결정의 원칙인 인민주권, 그리고 법의 지배, 균형과 타협을 기본으로 하는 견제와 중용이 기본이라는 박명림 교수의 이여기가 상호보완을 이루고 있다. 

이러한 공화국의 개념에 맞는 나라를 형성한다면 복지국가 논쟁은 이 공화국의 개념안에 포함이 되고, 진보집권 플랜에서 주장했던 많은 사항들이 공화국의 내용을 이루는 정책으로 포함될 수 있다. 

즉 사회주의니, 자본주의니, 사회민주주의니, 시장자본주의니 이러한 개념들을 정치화 하는 작업보다는 우리 헌법에 나와 있는 공화국이라는 개념을 기본으로 삼아, 헌법에 명시되어 있는 나라를 건설하자는 것이 이 책의 주장이다. 

그러기 위해 시민의 권한과 책임, 정치, 법, 경제, 교육, 다문화, 분단과 통일에 대한 문제들을 각론으로 각가의 의견을 개진하고 있다. 

공화국에서는 당연히 국민이 아니라, 시민이 개별주체로서, 서로주체성을 형성해나가야 한다는 김상봉의 주장도, 공적 문제에의 참여와 절제와 배려, 인간적 사회적 차별 금지, 즉 평등의식이 바로 시민의 권한과 책임이라는 박명림의 주장도 모두 공화국을 형성해가는데 필수적인 요소이다. 즉 공화국은 시민 개개인이 주체성을 지니고, 국가에 대한 권한과 책임이 있다는 생각으로 참여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는 정치로 나아갈 수 있고, 이 정치가 현실 원리라면 보편원리라 할 수 있는 국가 권력에서 독립한 법치까지 나아가며, 자연스레 시장경제가 아닌 민주주의를 통해 시장을 통제하는 사회가 즉, 시장화와 사회화의 결합을 통한 인간화의 길이 바로 공화국이라는 주장으로까지 나아간다. 

이런 공화국을 건설하는 주체를 양성하는 일이 시급하니, 교육의 문제가 중요하게 대두되고, 복마전처럼 얽혀 있는 교육문제에 대해 이들 나름대로 해결책을 제시하나, 문제는 시민 한 사람 한 사람이 책임감을 지니고 교육문제 해결에 나서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논의는 여기서 멈추지 않고, 세계로 향한다. 이미 우리는 단일국가로는 생존할 수 없는 환경에 처해있기 때문이다. 세계화, 공화국에서 세계 시민으로 살기 위해서는 다문화 문제, 즉 차별의 문제를 해결해야 하며 우리나라가 안고 있는 분단문제를 해결해야만 한다. 

그래야만 진정한 공화국을 만들 수 있고, 우리는 공화국 시민으로서 공화국에 권한과 책임을 지니며 또한 세계 시민으로서도 책임과 권한을 가지고 살 수 있을 것이다. 그러면 우리는 조금 더 행복한 세상에 살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 책 읽으면서 조국과 오연호의 대담집인 "진보집권플랜", 이창곤이 쓰고 엮은 "우리는 어떤 복지국가에서 살고 싶은가", 장하준의 "그들이 말하지 않는 23가지", 그리고 "일등만 기억하는 더러운 세상", 또 "복지국가 스웨덴" 등의 책이 생각났다. 이 책들이 각자 각론을 주장하고 있다면, "다음 국가를 말하다"에서는 이들에 대한 총론으로 우리가 원하는 나라는 바로 공화국이라고, 그 공화국은 이러이러한 요소들로 형성되어 간다고 주장하고 있다.  

생각이 종합된다는 장점이 있어서 좋았다고나 할까.  

이 책의 저자들 말대로 나라는 만남에서, 온전한 만남에서 이루어진다면 우리는 나라를 이미 존재하는 불변하는 존재로 보지 말고, 내가 또다른 나인 남과 함께 만들어가는 우리가 형성해가는 나라임을 명심하고 이 만남의 자장을 더더욱 넓혀가는 자세를 만들어야겠단 생각이 들었다.

다만 한 가지 이 놈의 옥의 티... 

이런 책에선 작은 실수가 큰 티를 남길 때가 있는데, 이 실수는 무시할 수도 있지만, 그래도. 

169쪽의 1876년의 동학농민전쟁, 이건 1894년 동학농민전쟁이라고 바꿔야 한다. 아마도 편집과정에서의 실수이리라. (초판 1쇄의 경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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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력이란 무엇인가 - 폭력에 대한 6가지 삐딱한 성찰
슬라보예 지젝 지음, 이현우.김희진.정일권 옮김 / 난장이 / 201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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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젝은 이름을 많이 들었다. 최근에 우리나라에 왕성하게 그의 책들이 번역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의 책을 읽는데는 약간의 망설임이 있었다. 그가 전개하는 주장에 대한 낯섬도 있고, 칸트, 헤겔, 라캉 등등 많은 철학자들에 대한 기본적인 지식이 있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앞섰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이들 철학자들에 대해서 잘 모른다고, 언제까지 지젝이란 사람의 글을 멀리할 수도 없는 노릇이고, 요즘 폭력에 관해서 많은 글들이 있으니, 지젝은 어떤 주장을 하고 있는지 알아보기도 할겸, 예전에 읽었던 아렌트의 폭력론과는 어떻게 다른가 궁금하기도 해서 읽기 시작했는데, 역시 시작부터 쉽지 않았다. 

시작부터 쉽지 않았다는 말은 곧 이 책을 읽을 땐 집중해야 한다는 얘기다. 집중해서 읽기 시작하면 그의 주장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하고, 눈에 들어오기 시작하면 그 때부터는 재미있어진다.  

재미있어지면서  내가 처한 현실과 비교를 할 수 있게 되고, 그의 주장을 다시 한 번 생각해보게 된다. 어떤 책을 읽을 때도 마찬가지겠지만, 책을 읽는다는 행위 자체가 이미 오독을 포함하고 있을 수도 있으니, 나 역시 지젝의 글을 지젝의 의도대로만 읽을 필요는 없다고 위안을 삼으며 읽었다고나 할까. 

이 책의 처음 부분을 읽으며 가시적인 폭력보다는 구조적인 폭력이 더 무섭다는 생각이 들었다. 눈 앞에 보이는 폭력이야 바로 깨달을 수 있고, 그래서 대응을 할 수 있다고 한다면, 언어를 통해서 이루어지는 상징적인 폭력이나 경제, 사회, 문화를 통해 이루어지는 구조적인 폭력은 깨닫기가 힘들어, 그것을 폭력으로 인지하기가 쉽지 않음을 지젝은 이야기하고 있다.  

그래서 우리는 폭력을 거부한다지만,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그 폭력을 행사하고 있을 수도 있다는 사실이 마음 속에 남았다. 

이를테면 연말에 신문이나 뉴스에 나오는 어려운 환경을 극복하고 좋은 성적을 얻은 학생이야기, 이는 노력하면 되는 일인데, 그렇게 되지 않은 이유는 네가 노력하지 않았다는 사실이라고 구조적으로 언어적으로 강제하는 폭력이 될 수 있다는 얘기다. 

즉, 사회ㅡ 경제적인 문제를 개인의 문제로 치환하여 개인이 무능하다고 인식하게 만드는 기제, 이것이 폭력임을 우리가 깨달을 때 다른 세상을 향한 노력을 할 수 있지 않을까 한다. 

지젝은 이런 폭력의 문제를 상징적, 구조적인 폭력으로부터 시작하여 이웃에 대한 관점에 얼마나 많은 폭력이 담겨 있는지, 언어에는 얼마나 많은 폭력이 있는지, 그리고 우리가 말하는 관용이라는 말이 얼마나 폭력적인지를 각 장들을 통하여 설득력있게 논증하고 있다. 

이런 논증을 거쳐 그는 신적 폭력으로 돌아오는데. 이는 폭력이 다 부정적이지는 않고, 상황에 따라 폭력에 대한 관점이 달라져야 함을 그가 말하고 있다고 본다. 그에게 신적 폭력이란 구조화된 사회적공간 바깥에 있는 자들이 맹목적으로 폭력을 휘두르며서 즉각적인 정의/복수를 요구하고 실행에 옮기는 것이다(277) 결국 이러한 신적 폭력은 순수한 폭력의 영역이라 할 수 있고, 이는 법(합법적 힘) 바깥의 영역, 법제정적이지도 않고 법보존적이지도 않은 이 푝력의 영역의 사랑의 영역이라고 한다.(281) 

급진적 해방적 정치는 진정한 정치적 행위로 능동적인 것이고 어떤 비전을 제시하고 이를 강제하는 것(292)이라고 해 그가 모든 폭력을 부정하는 것은 아님을 알 수 있다. 

우리가 이 책을 통하여 우리 사회 곳곳에서 일어나는 폭력들을 인식하고, 이를 개선하기 위한 방법을 모색해야 한다. 단지 눈에 보이는 공권력의 힘만이 아니라, 사회-문화적으로 우리 자신을 규정하고 있는 폭력을 찾아내는 일, 그것이 바로 우리가 다른 사회를 꿈꿀 수 있는 힘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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