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게 남은 사랑을 드릴게요 자이언트 픽
이유리 외 지음 / 자이언트북스 / 202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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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식간에 읽는다. 고도의 집중력이 필요없다. 그냥 소설을 따라가면 된다. 한편 한편이 모두 그렇다. 하지만 읽고 나면 무언가를 계속 생각하게 한다. 그런 힘이 있는 소설들이다.


SF소설이라는 생각을 하지도 못했다. '내게 남은 사랑을 드릴게요'라는 노래 가사가 제목이 된 소설도 있으니, 사랑이야기인가 보다 했다.


사랑이야기. 그렇다. 소설은 모두 사랑이야기다. 어떤 사랑을 다루느냐에 따라 시간과 공간, 그리고 인물과 사건이 다 달라질 뿐이다.


인간과 인간, 인간과 자연, 인간과 다른 인공물 등등, 소설은 우리가 살아가면서 겪는 일들을 다룬다. 소설의 인물이 꼭 인간이 아니어도 되는 이유가 있다. 우리가 고전소설인 [토끼전]을 읽으면서 '우화소설'이라는 말을 쓰지만, 아마도 'SF소설'이라는 말이 이미 있었다면 우화소설이라는 말과 함께 SF소설이라는 말도 함께 썼을 테다.


그만큼 요즘 소설은 다양한 인물들이 나와 삶의 모습을 우리에게 보여준다. 작가들의 상상력이 인간에게만 국한되지 않는다는 말이기도 하다.


읽어가면서 아, 이 소설집은 SF소설집이라고 할 수 있겠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 인물과 배경, 사건들에서 다양한 면모를 발견할 수 있기 때문이다.


SF소설을 이렇게 이야기한다. 이 소설집의 끝부분에서. 참고할 만하다. 그리고 이런 정의를 SF소설에만 국한시킬 필요도 없다고 본다. 모든 소설이 이렇지 아니한가.


'시간을 뛰어넘는 타임 슬립이나 루프를 다루는 소설, 인간과 비슷한 로봇이 등장하는 소설, 비슷한 맥락에서 인간 복제를 다루는 소설, 외계인과의 접촉을 다루는 소설, 우주를 탐험하고 새로운 세계를 발견하는 소설, 인간과는 다른 존재가 사건을 경험하는 소설(SF를 사변 소설이라고 봤을 때) 대체 역사를 전개해보는 소설 등 종류는 다양하다. 장르 작가는 이러한 세부 장르를 선택하여 장르의 규칙을 지키되 나름의 방식으로 새로운 이야기를 만들어나간다. 반복-장르에 충실한 독자가 읽었을 때 대번에 어떤 세부 장르인지 알 수 있다-과 변주-러나 뻔하게 전개되기를 기대하지는 않는다-를 통해 장르의 규칙은 재확인되고 동시에 장르의 경계는 확장된다.' (281-282쪽)


그렇다면 이 소설집에는 어떤 소설들이 실렸을까? 최근에 SF소설가로 김초엽과 천선란 작품들을 읽었는데, 다른 작가들의 작품도 이번 기회에 읽을 수 있어서 좋았다. 작가와 작품은 다음과 같다.


이유리, 내게 남은 사랑을 드릴게요

김서해, 폴터가이스트

김초엽, 수브다니의 여름휴가

설재인, 미림 한 스푼

천선란, 뼈의 기록


첫번째 소설 '내게 남은 사랑을 드릴게요'는 감정 전이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다. 최근에 몸을 고치는 성형이야 일반화되어, 자신의 외모가 마음에 안 들어 수술하는 사람이 많아졌는데, 이를 감정에까지 확대하면 어떨까?


내게 쓸모없는 감정이라고 생각하는 것들을 그 감정을 필요로 하는 사람에게 전이해준다면 그야말로 꿩 먹고 알 먹는 효과를 거두는 일 아닐까?


그런 발상을 할 수 있다. 우리가 감정으로 인해 얼마나 고통을 받는가? 고통 받는 감정을 수술로 없앨 수 있다면 누구나 할까? 그렇다면 그렇게 빼나간 감정의 빈자리는 어떻게 되는가? 소설은 이 점을 추구한가?


성형부작용이 있듯이, 감정 전이 부작용도 분명 있을터. 부작용? 과연 그것만을 걱정해야 하는가? 감정을 남에게 전이한다. 자신의 감정을 깊게 들여다 보고, 그 감정의 문제들을 받아들이며, 해결하는 과정을 거치지 않고, 수술로 없애버린다. 그리고 필요한 감정을 돈으로 사면 된다.


좋은 세상일까? 이런 세상에서 과연 제대로 된 관계가 유지될까? 관계를 맺기 위해서 거쳐야 하는 수많은 과정들이 수술을 통해서 단번에 해결된다면 사람과 사람의 관계가, 사람과 다른 존재의 관계가 더 지속적이고 좋아질 수 있는가? 


어느날 상대가 싫어지면 그냥 수술로 지워버리면 되지 않나? 고통을 겪으면서, 지속적인 시간을 거치면서 함께 만들어가는 감정 또는 관계란 오히려 귀찮다고 여기게 된다. 그런 인물이 감정 전이를 한 주인공에게 나타난다. 자, 유토피아라는 생각이 드는가? 아니, 이는 디스토피아다. 감정마저도 돈으로 해결되는 사회라니... 인간들의 감정이 거세된, 그저 프로그래밍된 관계, 그런 삶일 뿐이다.


꼭 이렇게까지 나아가지 않아도, 자신이 힘들다고 그 감정을 무시하거나 외면하는 경우가 많다. 그냥 자신의 마음만 편하면 된다고. 그러면 더 나은 관계를 만들어갈 수 없다. 그 점을 생각하게 하는 소설이다. 감정만이 아니라 몸을 고치는 성형에 대해서도 생각을 확장할 필요가 있다는 생각이 들게 하는 소설,


이 소설과 대변되게 감정을 존중하는 로봇이 나온다. 빠로 '뼈의 기록'이다. 장의사로 일하는 로봇. 그 로봇은 사람의 마지막을 보내주는 일을 한다. 최선을 다해서. 그렇지만 입력된 대로 하지는 않는다.


그와 이야기를 나누던 모미가 죽었을 때, 로봇은 모미가 무엇을 싫어하는지 생각한다. 그간 맺어온 관계가 형식적인 절차를 거쳐 화장하는 것을 거부하게 한다. 로봇은 모미를 우주선에 태워 우주로 보내준다. 멀리 멀리 우주로 나아가게.


바로 이것이다. 감정 전이 수술과 다른 점이. 상대의 뼈에 새겨진(이를 마음에 새겨진 바람이라고 해도 좋겠다) 감정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일. 그런 관계는자기가 싫다고 거부하지 않는다. 나를 중심에 놓는 관계가 아니라 상대를 중심에 놓는 관계다. 이렇게 두 소설은 관계라는 점을 생각하게 한다.


관계에 대해 생각하다 보니, 나머지 세 소설도 결국은 관계의 문제다. 관계를 잘 맺지 못하는 사람이 인정받았을 때 남을 구원할 수 있다는 점을 생각하게 하는 '폴터가이스트', 다른 존재라서 완전히 인정을 받지 못한 존재가 자신의 로봇 정체성, 그리고 금속으로서 서서히 녹슬어가는 것을 추구하는 '수브다니의 여름휴가', 외계 생명체와 지구 생명체 사이의 폭력, 지구 생명체 사이의 폭력을 다루고 있는 '미림 한 스푼'


관계다. 상대의 감정을 조금이라도 이해한다면 그렇다면 다른 소리에 의해서 파멸에 이르지 않게 되고(폴터가이스트), 다른 정체성을 지닌 존재들을 이상하게 보지도 않게 되며(수브다니의 여름휴가), 비록 낮고 어두운 공간에 있지만 한 사람을 온전히 받아들일 수 있게(미림 한 스푼) 된다.


이런 관계는 무엇인가? 사랑이다. 그래서 이 소설집은 사랑을 이야기한다. 우리가 추구해야 할 사랑의 모습이 어떤지 보여주고 있다. 평탄한 삶만을 추구해서는 관계를 맺기 힘들다. 관계는 수많은 우여곡절을 겪으며 더 단단해지기 때문이다. 


그래서 좋다. 이런 소설을 읽는 일은. 가상의 공간, 시간, 인물들이 펼치는 사건들을 통해서 내 삶을 생각할 수 있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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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스트 오브 차이니즈 SF : 중국 여성 SF 걸작선
시우신위 외 지음, 김이삭 옮김 / 아작 / 202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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굳이 여성이라고 하지 않아도 된다. 성적 지향이 세칭 주류가 아닌 사람들이 쓴 소설이라고 하면 된다. 중국 작가들이 쓴 소설.


SF라고 하지만 이상하게도 친숙하다. 서양 사람들이 쓴 SF가 주로 우주 공간과 외계 생명체들을 등장시키고 있다면, 이번 소설집은 그러한 외계생명체와 우주 공간도 나오기는 하지만, 고전소설을 읽는 듯한 느낌을 주는 인물, 배경들이 등장한다.


마치 우리나라 최초의 소설이라고 알려진 [금오신화]를 읽는 느낌이라고나 할까? 누군가는 그것을 괴력난신 이야기라고 했지만, 괴력난신이라는 말 자체가 우리의 이성이 인식할 수 없는 수준의 일들이 일어난다는 말이니까, 이것이 SF와 통하지 않을까 한다.


많은 소설이 실려 있는데, 중국의 신화, 전설이나 문화를 알면 더 잘 이해되는 작품들이 있다. 그런 작품들을 읽으면 SF소설이 아니라 고전소설을 읽는 듯한 느낌을 주니...


그림이 지닌 주술성에 대한 이야기도 있고, 그림 속으로 들어가는 이야기도 있으며, 주술을 통해서 현대의 환난을 피하는 내용도 있다.


그렇게 지금 우리가 겪고 있는 문제를 다양한 방식으로 제시하고, 그것을 해결해 가는 과정을 보여주는 작품들이 있다.


이 작품집에 실린 레스토랑을 배경으로 하는 작품이 두 편 있는데, 결말이 상반된다. 하나는 음식의 맛을 간직하는 쪽이라면, 하나는 음식으로 인해서 사람이 죽어가는 쪽이니, 음식점을 배경으로 하더라도 다양한 이야기가 펼쳐질 수 있음을 잘 보여준다.


작품들 중에 [아가야, 아가야, 난 널 사랑해]라는 작품. 아이 낳기를 거부하는 우리 사회에 어떤 시사점을 주는 소설이라는 생각이 든다.


실제 아기를 낳는 일이 힘들고, 키우는 일이 더 힘드니, 점점 아이를 낳지 않으려는 사회. 그러한 사회에서 홀로그램으로 아이를 키우는 프로그램을 만드는 사람.


자신이 창조한 아이와 실제 아이의 차이. 과연 무엇일까? 편리함만을, 자신이 원하는 대로 자라주기만을 바라는 것이 과연 사랑일까? 그것이 인간의 삶일까?


이 소설은 홀로그램 아이와 실제 아이에 대한 주인공의 태도를 살펴보면서 살수록 인공물에 의존하는 우리들의 삶을 생각하게 한다.


이 소설집은 광활한 우주 이야기, 시공간을 자유롭게 넘나드는 그런 내용보다는, 우리 고전 소설에서 느낄 수 있었던 것들을 만나볼 수 있는 소설집이어서 좋았다고나 할까.


SF소설의 다양한 면을 만날 수 있는 소설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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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봇 동화 - 설재인의 로봇 동화 다시 쓰기 FoP Classic
스타니스와프 렘 지음, 정보라 옮김 / 알마 / 202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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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화는 아이들이 읽는 이야기라고 할 수 있다. 우리는 어릴 때 동화를 읽고 자란다. 아무리 동화를 읽지 않는다고 해도 이야기로는 들었을 것이다. 기억 속에 있는 동화들이 최소한 한두 편은 있는데...


예전 동화에는 잔혹한 내용도 있었다. 또한 특정 인물을 나쁘게 묘사한 부분도 있었고... '계모' 하면 악인이었는데... 그래서 현실에서도 계모에 대한 인식이 좋지 않았을 수도 있었는데... 물론 동화에 나온 이야기는 아이들이 성장해 가는데 겪게 되는 과정들을 이야기로 만들어냈다고 하는 베텔하임의 이론을 만나고는 생각이 많이 달라졌지만.


그럼에도 어린 시절 아직 생각이 더 나아가지 못할 때, 주인공을 괴롭히는 인물로 계모가 나오면, 계모에 대한 인식이 좋을 리가 없다. 현대처럼 이혼을 하는 가정이 30%가 넘는 사회에서는 더더욱 이런 동화들은 아이들에게 좋지 않을 수도 있다.


물론 동화들을 통해 간접 경험을 하고, 그런 간접 경험이 계모와 실제 생활하는 데서는 좋은 쪽으로 발현이 될 수도 있다고 하겠지만, 그래도, 문해력이 걱정되는 요즘 시대에, 이렇게 옛날 이야기를 고수하는 것은 고려해 봐야 한다.


이때 새로운 방향을 제시해 주는 것이 바로 스타니스와프 렘처럼 로봇을 등장인물로 동화를 쓰는 것이다.


그가 쓴 [로봇 동화]에는 로봇들이 등장한다. 로봇이라고 삐걱대는 기계들이 아니다. 인간처럼 또는 인간보다 더 지능이 뛰어난, 감수성 역시 뛰어나고 사회를 구성하고 살아가는 로봇들이 등장한다.


이런 로봇들의 이야기를 통해서 삶에 대해서 겪게 되는 온갖 일들을 간접 경험할 수 있게 된다. 즉 내가 실생활에서 겪지 못할 일들을 이런 동화들을 통해서 경험하게 되고, 이를 다시 현실의 삶으로 갖고 올 수 있게 된다.

 

동화 하면 교훈을 떠올리지만, 교훈보다 먼저 와야 할 것은 재미다. 흥미가 있어야 읽고, 읽어야 간접 경험을 할 수 있다. 생각을 하거나 성찰을 하게 되는 것은 그 이후의 일이다.


흥미와 재미. 동화의 기본 요소다. 그렇다면 이 스타니스와프 렘이 쓴 [로봇 동화]는 이 두 가지에 성공했는가? 하고 묻는다면 답은 아니오다.


동화라고 하지만, 이 책은 어른들이 읽어야 한다. 우선 과학적인 지식이 있어야 한다. 그래야 인물들의 이름에서, 또 그들의 행동에 고개를 끄덕일 수 있게 된다. 그러니 어느 정도 과학과 기계에 대한 이해가 있어야 이 동화들을 이해할 수 있다. 이해하지는 못해도 재미있게 읽을 수가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동화라는 이름을 달고 있으면 우리는 굳이 과학적일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다. 여기서 이 작품이 존재할 이유를 찾을 수 있다. 과학적 지식이 없는 아이들에게도 이 동화들이 읽힐 수 있다는 것은, 굳이 이 동화에 나오는 내용을 과학적으로 검증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과학이라는 이름을 달고 상상의 날개를 펼치면 된다. 이런 광활한 세계, 이런 보이지 않는 세계, 인간이 아닌 다른 존재들이 펼쳐내는 다양한 이야기의 세계로 들어가면 된다. 그러면서 이야기의 세계에서 잠시 벗어나 자신의 삶을 생각하면 된다.


그러면 이 동화들은 제 몫을 다하게 된다. 자, 그러면 이 로봇 동화를 읽으면서 현대 과학기술에 어떤 문제점을 제기할 수 있을까?


바로 원하는 결과를 얻을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것, 자신이 생각한 것과는 전혀 다른 결과가 나올 수 있고, 자신을 위해서 만들었지만 자신을 파멸로 이끌 수도 있다는 것을 생각해야 한다.


그런 내용을 지닌 동화들이 있다. 이 책 후반부에 실려 있는 '세상이 살아남은 이야기, 트루를의 기계'에서 그 점을 생각할 수 있다. 이런 점 말고도 인간 세상의 모습을 로봇을 빌려 이야기하고 있는 동화들도 꽤 있으니... 천천히 한편 한편 읽어보면 좋겠다.


마지막에 설재인의 <로봇 동화> 다시 쓰기는 '착각과 말로'라는 제목을 지니고 있다. 로봇이 하나도 등장하지 않는다. 그런데 읽다보면 무슨 로봇들을 들여다 보는 듯한 느낌을 받는다. 지금 우리가 살아가는 모습이 바로 이렇지 않을까? 특히 아이들을 키우는 어른들의 모습이 우리가 비판하는 로봇의 모습과 같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하는 소설이다. 


[솔라리스]와 [이욘 티히의 우주일지], [우주 순양함 무적호]를 읽고 스타니스와프 렘에 대해서 관심을 가졌는데, 이번 [로봇 동화]를 읽으면서 오래 전에 작품 활동을 했던 작가지만, 현대에서도 여전히 유용한 작가라는 생각을 하게 됐다. 


인공지능에 대한 관심이 높은 요즘 그의 소설을 읽어보는 것도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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깨어 있는 숲속의 공주 - 혹은 옛날 옛날 열한 옛날에
리베카 솔닛 지음, 아서 래컴 그림, 홍한별 옮김 / 반비 / 202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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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자 신데렐라'에 이어 리베카 솔닛이 쓴 이야기다. 기존에 있던 이야기를 솔닛이 바꿔서 쓴.


이 이야기에서는 '옛날 옛날 한 옛날에'로 시작하지만, 곧 시작 부분을 바꾼다. 한 아이가 있기 위해서는 부모가 있어야 하니, '옛날 옛날 세 옛날에'로 바꾼다. 그러다 과연 이렇게만 이야기할 수 있을까?


이야기를 이루는 존재들은 더 많다. 요정들도 있고, 다른 등장인물도 있고, 하여 솔닛은 '옛날 옛날 열한 옛날에'라고 한다.


이미 시작부터 하나의 이야기는 하나로 끝나지 않고 여러 이야기와 함께 하고 있음을 말하고 있다. '해방자 신데렐라'와 같이 삽화는 아서 래컴의 그림으로 흑백으로 이루어져 있어, 특정 인종을 대변하지 않고 있으니, 그 점도 기억할 만하다.


'잠자는 숲속의 공주' 이야기를 '깨어 있는 숲속의 공주'로 바꾸고, 공주도 중세시대의 특권계급인 공주가 아니라, 남들을 위해서 무언가를 할 수 있는 능력을 지닌 존재로 바꾸어 놓는다. 여기에 잠자는 숲속의 공주에게 동생이 있다고 설정하고, 언니가 잠잘 동안 동생이 활동하는 이야기로 바꾸어 놓는다.


왕자가 등장해서 공주를 깨우는 것이 아니라, 공주는 100년이 지나면 자연스레 깨어나게 했으며, 또 왕자 대신 불새로 인해 오게 된 아틀라스라는 인물도 만들어 낸다.


여러 이야기가 합쳐져 이 이야기를 이루게 되는데, 무엇보다도 강한 존재에게 의존하지 않는 모습을 보인다.


가령 잠자는 숲속의 공주도 그냥 잠만 자는 것이 아니라 꿈을 꾸고 있으며, 갇힌 성에서 나올 때 자신의 머리카락을 이용해서 나오게 되니, 능동적인 존재로 표현되고 있다.


가장 능동적인 존재는 동생인 마야다. 언니가 잠들어 있을 때 나타난 늑대를 그림을 통해 물리치고 사람들을 구하는 존재. 아틀라스도 마찬가지고.


이렇게 솔닛은 이야기를 통해서 능동적으로 살아가는 삶을 보여주고 있다. 남에게 자신의 인생을 맡기는 것이 아니라, 자기 인생을 개척해 나가는 인물들.


홀로가 아니라 함께 살아가는 인물들. 그리고 남 위에 군림하는 인물이 아니라 남과 더불어 살아가는 인물들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다.


이야기의 힘을 통해서 사람들이 그렇게 살아가기를 바라면서... 이렇게 솔닛처럼 시대에 맞는 이야기로 만들어가야 한다. 이야기는 고정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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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 이별, 죽음에 관한 짧은 소설
정이현 외 지음 / 시간의흐름 / 202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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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편의 소설이 실렸다. 사랑에 관한 짧은 소설이라는 주제로 정이현이 쓴 '우리가 떠난 해변에'가 있고, 이별에 관한 짧은 소설이라는 주제로 임솔아가 쓴 '쉴 곳'이 있으며, 죽음에 관한 짧은 소설로 정지돈이 쓴 '내 여자 친구의 남자 친구'가 있다.


주제는 분명히 다르다. 사랑과 이별이 다르고, 이별과 죽음이 다르다. 하지만 이 셋은 사람이 겪는 일에 속한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 벌어지는 일, 또는 사람에게 일어나는 일에 사랑,이별,죽음은 반드시 있다.


어느 하나도 벗어나지 못한다. 그것이 이성에 대한 사랑,이별,죽음이든 다른 것에 대한 사랑,이별,죽음이든 살아가면서 겪을 수밖에 없다.


첫소설인 정이현 소설에는 '사랑'이 세 가지로 나온다. 사랑을 종류로 나눌 수는 없지만, 서술자의 사랑은 이미 끝났다고 봐야 한다. 끝난 사랑에서, 다른 사랑을 인터뷰하러 가는데, 그 사랑 역시 끝나가고 있다. 다만, 서술자의 사랑도 그렇지만 한 쪽에서는 사랑을 끝내지 않으려 한다. 더 이어갈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사랑.


그리고 명확히 표현되지 않지만 또 하나의 사랑이 나온다. 인터뷰 할 대상들의 사랑에 감동받은 사람의 사랑.


하지만 사랑의, 마음을 울리는 그 사랑은 지속되지 못한다. 변하게 된다. 변하는 과정 자체도 사랑이 될 수 있어야 하는데, 인생이 과연 그런가?


좋았던 점이 안 좋은 점으로, 서로를 끌어당겼던 점들이 서로를 밀어내는 요소로 작동하지 않는가? 그런 변화까지도 사랑으로 받아들인다면, 사랑은 그리 쉽게 끝나지 않는다. 서술자가 병원에서 서성거리며 소설이 끝나듯이.


마음을 울리던 사랑, 이제는 덤덤해진 사랑, 여기서 더 나아가 서로를 견딜 수 없게 하는 사랑, 그래서 떨어질 수밖에 없는 사랑. 그러나 그런 사랑이 과연 다른 사랑인가? 나중의 것을 사랑이 아니라고 할 수 있을까?


삶에서 우리가 만나는 사랑은 어쩌면 이렇게 짧을지도 모른다. 순간 순간 변해가기 때문에... 


임솔아의 소설도 그렇다. 짧은 소설이다. 분명한 이별이 나오지는 않는다. 그런데 소설을 읽다보면 많은 이별이 있음을 알게 된다. 어린 시절의 나와 이별, 내가 알던 사람들과의 이별, 그리고 다른 사람들과의 이별.


함께 살고 있지만 살면서 많은 변화를 겪게 된다. 이 변화를 이별이라고 하자. 관계를 더욱 좋게 만드는 이별도 있지만, 관계를 좋지 않게 변화시키는 이별도 있다. 


소설 속에서는 함께 살지만 너무도 다르게 사는 부부가 나오고, 그들을 가끔 와서 지켜보는 서술자가 있다. 자, 이들은 무엇과 이별해야 하는가? 도시 생활, 사람들과의 부대낌을 견딜 수 없어서 시골로 온 남편과 사람들과 관계맺기를 잘하지 못해서, 오히려 도시 생활에서 일시적인 만남의 기회를 만들고 싶어하는 아내. 그리고 이들에 의해 키워지다시피한 남편의 동생 서술자.

                                                                

하지만 이별은 특별한 일이 아니다. 우리가 늘상 겪어야 하는 일이다. 소설의 말미에 "걱정 마. 아무렇지도 않아."(70쪽)라는 말처럼, 이별 역시 우리 삶에서 아무렇지도 않아야 한다. 그게 삶이다.


정지돈의 소설은 SF적인 요소가 있다. 물론 최근에 읽은 [죽음의 죽음]이란 책에서 이미 냉동인간에 대해서 정보를 얻었기 때문에, 이 소설이 꼭 상상에 불과하다고만은 할 수 없다고 하고 싶다.


세계에서 냉동인간이 있고, 냉동방식이 온몸을 냉동하는 방식과 두뇌(머리)를 냉동하는 방식이 있다고 하는데, 이 소설에서 택하고 있는 방식은 두뇌를 냉동하는 방식이다. 자, 실현불가능한가? 냉동까지는 현실에서 이루어지고 있다고 한다. 지금 실현이 안 되는 일은 냉동에서 부활(? 냉동을 죽음이라고 하면 냉동에서 해동되는 것은 부활이라고 할 수 있겠지만, 과연 냉동인간을 죽었다고 할 수 있을까? 죽음이란 무엇인가라는 심오한 질문을 던지는 소설이다)이다.


뇌-의식만을 되살린다면, 과연 그는 살아난 것일까? 또한 그렇게 육체 없이 깨어난(?참 어떤 말을 써야 할지 헷갈린다) 사람을 살았다고 할 수 있을까?


소설은 그 점을 생각하게 한다. 과연 죽음이란 무엇인가? 아니, 여기서 더 나아가 인간이란 무엇인가를 질문한다.


소설의 결말이 반전을 이루고 있어서 이 질문이 더욱 강하게 다가온다. 짧은 내용, 요즘 이루어지고 있는 의과학기술과 관련지어서 생각할거리를 제공해주고 있는 소설인데...


살면서 우리가 겪을 수 있는 일들을 짤막한 분량에 담고 있는 소설들이다. 길이는 짧지만 생각하도록 하는 깊이는 길고도 깊은 그런 소설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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