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녀 연예인 이보나
한정현 지음 / 민음사 / 202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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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편의 소설이 묶여 있다. 다 다른 내용이다. 그런데 등장인물들의 이름이 겹치고, 사건들도 어느 정도 겹치기도 해서 연작소설이라는 느낌을 주는 소설집이다. 분명 연작소설은 아님에도.


등장인물의 이름이 같지만, 내용은 소설마다 다르다. 그러니 이 소설들은 서로 연결이 되지 않는다고 봐야 한다. 하지만 이상하게 연결이 된다. 등장인물들의 이름이 주는 연결성인지, 각 소설에서 펼쳐지는 내용이 서로 연결을 해주는지 판단하기는 어렵지만, 아마도 이 둘이 소설과 소설을 이어주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소설을 이어주는 이런 요소들은 결국 사랑이다. 있는 그대로의 사랑. 누군가의 편견으로 굴절된 사랑이 아니라, 누군가의 기대대로 행해지는 사랑이 아니라, 자신의 마음을 받아들이면서 나아가는 사랑. 그런 사랑들이 이 소설집에서 이루어지기 때문에, 각 소설들은 독립되어 있으면서도 느슨한 연결망을 만들어내고 있다.


그리고 이런 연결망 속에서 우리는 '사랑'에 대해서 생각하게 된다. 삶의 다른 이름이 사랑이라면, 이 소설집을 통해서 삶을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각자의 삶은 각자의 삶이 있다. 함께 살아가면서도 우리는 절대적인 개인으로 살아갈 수밖에 없다.


내 삶을 누군가 규정할 수 없는 것이다. 내 삶을 온전히 내 삶으로 받아들여 줄 수 있는 존재가 있다면, 그것이 바로 사랑이다. 내가 원하는 삶이기도 하다. 그런 삶이 바로 사랑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많은 경우 사람을 사람으로 보기보다는 어떤 틀에 맞춰서 판단하는 경우가 많다. 이미 사회에 존재하고 있는 관점이라는 안경을 통해서 보는 경우. 그런 경우 그 사람을 그 사람으로 보지 않고 사회라는, 틀이라는 관점에서 비틀어서 보게 된다.


즉 틀에서 벗어난 사람을 배제하고 도외시하게 된다. 틀에서 벗어난 사랑을 인정하지 않으려 하고, 틀에 맞추려고 한다. 그것이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둔갑되어 행사되기도 한다. 사랑이 아니라 폭력인데도, 폭력이라고 생각하지 않는 분위기가 팽배한 사회에서는 틀에 맞지 않는 삶을 살아가는 사람은 억압받고 배제된다.


그런 모습들이 이 소설집에서 잘 형상화되어 있다. 따라서 이 소설집에 실린 소설들은 무겁다. 읽어가면서 무거운 압력을 느낀다. 짧은 소설이라 금방 읽을 수 있을 것 같지만, 아니다, 글자들, 문장들이 계속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게 잡는다.


한걸음 한걸음 소설을 읽어나가는 일이 버겁다. 소설의 무게에 눌려 더 천천히 읽게 된다. 그러면서 과거-현재의 틀을 계속 의식하게 된다. 이 틀들이 여전히 존재하고 있음을, 앞으로도 쉽게 사라지지 않을 것임을, 이 소설집에 나오는 인물들을 통해서 실감하게 된다.


이 소설집에 나오는 인물들은 대부분 소수자들이다. 틀에서 벗어나 있는 사람들이다. 하지만 틀에서 벗어나 있다고 틀 속에 갇히려고 하지 않는다. 그들은 틀에서 벗어나 있기에 편견 없이 다른 사람들을 바라볼 수 있다.


"아무렴 어때!" 삶은 삶일 뿐이다. 모두에게 모두의 삶이 있을 뿐이다. 그런 삶은 부끄러운 것도,억압받고 배제되어서도 안 되는 삶이다. 그렇게 있는 그대로 보는 것, 그것이 사랑이다. 그런 사랑이 소설에 스며들어 있다.


그렇기 때문에 소설은 무겁지만, 주저앉게 하지 않는다. 무겁지만 한발 한발 나아가게 한다. '우리의 소원은 과학 소년'이라는 소설 속 인물이 하는 말이 마음에 새겨진다.


"이름을 기억할 것" "낙관할 것" (276쪽)


그렇다. 이들은 모두 이름을 지니고 살아가려 한다. 주어진 이름이 아니라 자신이 직접 이름을 짓기도 한다. 소설집 제목에 나오는 '이보나'라는 이름 역시 인물이 직접 지은 이름이다. 이름을 갖는다는 것, 이것은 배제하려는 사회에 맞서 자신을 지키고, 자신도 있음을 알리는 일이다.


트랜스젠더인 인물이 스스로 이름을 '제인'이라고 짓듯이 (제인은 이 소설집 여러 곳에 등장한다. '소녀 연예인 이보나'에서 제인은 자기 스스로 이 이름을 짓고 그렇게 살아가고자 한다), 또한 '우리의 소원은 과학 소년'에서 죽어가는 엄마가 아이에게 이름을 지어달라고 하고 주인공이 스스로 '안나'라는 이름을 짓듯이, 자신을 같은 사회에서 살아가는 뚜렷한 한 존재로 인식하려는 의도가 이 이름을 짓고, 기억하는 것에 달려 있다.


누군가가 지어준 이름이 아니라 자신이 지은 이름으로 살아가고자 하는 인물들의 삶은 무겁다. 무겁지만 희망이 있다. 


이 소설집에는 우리나라 역사에서 기억해야 할 아픈 사건들이 나온다. 그런 사건을 통해서 약한 사람이 더욱 힘들어지는 현실을 작가는 보여주고 있다. 광주민주화운동과 공권력에 의해서 자행된 성추행(성고문이라고 할 수도 있다) 등은 물론이고, 성소수자들에 대한 탄압이 얼마나 그들의 삶을 파괴했는지도, 그리고 그들을 바라보는 시각이 얼마나 폭력적이었는지도 소설을 통해서 잘 드러내고 있다.


무겁지만 앞으로 나아가고 있다. 그래서 소설을 읽으면서 희망을 버리지 않게 된다. 다만 앞으로 나아가는 길에 많은 장애물이 있음을, 결코 빨리 갈 수는 없음을 소설 속 인물들을 통해서 깨닫게 된다.


[나를 마릴린 먼로라고 하자]를 읽으면서 많은 생각을 했다. 이 소설집에 실린 소설보다 나중에 나온 소설인데 읽는 순서가 바뀌었지만, 발표 순서와는 관계 없이 소설 속 현실은 지금-여기에서 우리가 겪고 있는 일임을 잊지 않게 한다.


책을 내려놓기 싫은 마음이 드는, 천천히 각 소설들의 인물들을 따라서 자꾸 뒤돌아보면서 그렇지만 앞을 향해 뚜벅뚜벅 나아가는 읽기를 하게 한 소설집이다.


좋은 작품을 쓴 작가에게 고마움을 느끼고, 이 작가의 다른 작품들을 찾아서 꼭 읽어야겠다는 생각을 한다. 읽고 난 후에도 여전히 마음에 묵직하게 남아 있는 무거움을 느끼게 한 소설들이니... 그 무거움이 앞으로 한걸음 한걸음 나아가게 한다고 생각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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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녀장의 시대
이슬아 지음 / 이야기장수 / 202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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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부터 경쾌하다. 가부장제에 대한 비판을 이렇게 가볍게 할 수가 있다니. 역시 가장 무서운 비판은 웃음을 동반한 비판이다. 정치인 중에 이런 비판을 가장 잘했던 사람이 고 노회찬이었지.


이 소설은 그렇게 고 노회찬의 웃음을 동반한 날카로운 비판을 떠올리게 한다. 소설의 시작이 '태초에 가부장이 있었다'다. 


가부장제. 당연하게 받아들여서는 안 되지만, 아직도 가부장제는 공고하다. 소설은 '슬아가 태어나서 가장 먼저 배운 말은 '할아버지'였다.'(7쪽)로 시작한다. 그러나 이것이 끝이다. 이 첫장을 제외하면 가부장은 나올 수가 없다.


가부장이 아니라 '가녀장'이 나온다. 딸인 이슬아가 집안을 이끌어간다. 출판사를 차리고 직원을 고용하는데, 직원은 달랑 둘이다. 바로 엄마인 복희와 아빠인 웅.


그렇다. 딸이 모부를 먹여살린다. (이 소설의 강점은 부모라고 하지 않고 순서를 바꾸어서 모부라고 한다.) 모부 역시 딸을 사장으로 여기고 자신들이 맡은 일을 한다.


복희는 살림을, 웅이는 청소 및 운전, 배달을 맡아 일을 한다. 살림을 맡은 복희는 정규직원이기 때문에 그에 합당한 보수를 받는다. 가부장제에서는 상상도 못할 살림이 공식 노동으로 인정된다. 


이렇게 소설은 가녀장을 통해 소위 집안일이라고 하는 살림 역시 노동임을 보여준다. 그리고 가족이 가부장이라는 위계로 지탱되는 것이 아니라, 가녀장을 중심으로, 즉 일을 중심으로 유지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이런 가족 관계를 '서로에게 정중한 타인'(307쪽)이라고 표현할 수 있다. 누가 누구에게 속한 존재가 아니라 함께 하지만 존중받아야 할 타인임을 소설은 그들의 관계를 통해서 보여준다. 


'지구에서 우연히 만난 그들은 무엇보다 좋은 팀이 되고자 한다. 가족일수록 그래야 한다는 걸 잊지 않으면서.'(308쪽)


아마도 소설의 거의 마지막에 있는 이 표현이 새로운 가족 관계를 표현하고 있는 말이리라. 가족이 되기까지의 우연, 그리고 그런 우연을 통해 맺는 관계가 종속적인 관계가 아니라 서로가 서로에게 힘이 되어주는 관계가 되는 상호의존적인 관계임을, 가부장이라는 용어를 폐기하고 가모장이라는 용어를 쓰는 대신, 가녀장이라는 용어를 쓴 이유이기도 하리라.


이런 가족이 만들어가는 일상들이 소설에서 유쾌하게 펼쳐진다. 그렇다고 소설은 가족 관계만을 다루지는 않는다. 가족이 확장되면 사회가 되듯이, 가족이 겪는 일들이 사회적 사건들에서 동떨어질 수가 없다.


따라서 소설은 이들의 모습을 통해서 여전히 우리 사회에 남아 있는 가부장적인 모습들을 생각하게 한다. 무겁지 않게, 웃으면서 비판하는 그런 표현으로. 특히 '남의 찌찌에 상관 마'와 '혼란스러운 가부장', '헷갈리는 식탁 예절'은 가정에서 사회로 시야를 확대하게 해준다.


분명 무거운 주제인데 무겁지 않게 낄낄 웃으면서, 그렇지만 무언가 진한 여운을 느끼면서 읽을 수 있는 부분들이다. 


이렇게 소설에서 다양한 사건들이 벌어지는데, 이 소설을 읽으면서 한편의 '시트콤'을 떠올렸다. 이 소설을 대본으로 바꾸면 그대로 시트콤이 될 수 있음을. 


그냥 웃고 끝나는 것이 아니라 웃음 뒤에 바꿔야 할 무엇이 있음을 깨닫게 해주는 소설이다. 가부장제에 대한 풍자소설이라고 해도 좋은 소설인데.


무엇보다도 이들 가족이 맺어가는 튼튼한 관계가 다른 인물들에게도 자연스레 녹아들어가는 모습이 표현되어 있어서 좋다. 


시도때도 없이 자신이 해결할 수 없는 문제가 생기면 연락을 하거나 찾아오는 미란이라는 친구의 모습에서, 의지할 수 있는 존재가 있음이 얼마나 행복한지, 또 이것저것 안 해본 일이 없는 웅이가 살다보니 자연스레 그렇게 되었다고 하는, 자신의 일을 하기 위해 타인의 처지가 되어본 사람만이 지니게 되는 삶의 기술들이 얼마나 소중한지, 자신과 다른 삶을 사는 사람들도 스스럼없이 받아들이는, 자신의 관념을 저항 없이 수정해가는 복희를 작가가 잘 보여주고 있다.


하여 소설은 가족도 정중한 타인이 되어야겠지만 만나는 모든 사람들에게 정중한 타인이 되어야 함을 생각하게 한다.


처음부터 끝까지 웃음을 놓을 수 없는 소설이다. 유쾌, 통쾌, 상쾌라는 말이 통할 수 있는 소설. 촌철살인이라는 말이 어울리는 소설이라고 할 수 있다. 오랜만에 웃으면서 읽은 소설. 


우울한 마음을 한꺼번에 날려버린 소설이었다.


덧글


재미있게도 이 소설에는 출판을 하면서 겪는 파본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원고를 정확히 넘겼음에도 인쇄 과정에서 페이지가 뒤섞여 그것을 해결하는 내용. '책을 사랑하고 두려워하기'


그런데 소설의 이 부분에서 어라, 이게 작가의 의도인가? 아니면 그냥 실수인가 하는 부분이 있으니, 바로 173쪽. 


'잘 몰랐으니까. 몰라서 무턱대고 씩씩하게 

수 있었다. 지금의 슬아는 그렇지 않다'로 되어 있는데, 씩씩하게와 수 있었다가 줄바꿈이 되어 있는데, 이 사이에 '할'이 들어가야 하지 않나? 


'씩씩하게 수 있었다'가 아니라 '씩씩하게 할 수 있었다'라고 해야 하는데, 이것이 작가의 의도였다면, 정말, 이런 유머를 소설에서 구사하다니 하고 더 웃을 수 있을 테고, 작가의 의도가 아니더라도 출판에 관한 부분에서 이런 일이 생기다니 이런 우연이 하면서 웃을 수 있으니, 이래저래 웃음을 유발하는 소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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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적인 체험 을유세계문학전집 22
오에 겐자부로 지음, 서은혜 옮김 / 을유문화사 / 200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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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은 개인적인 체험을 보편적인 경험으로 바꾸어주는 역할을 한다. 그러한 소설이 오랫동안 읽힌다. 소설을 읽으면서 작중 인물이 겪는 개인적인 체험이 자신의 삶 어느 부분과 일치한다고 느끼기 때문이다.


즉 개인적인 체험이 보편적인 경험이 되도록 하는 것, 그것이 바로 소설가의 일이다. 오에겐자부로의 이 작품도 그렇다.


작가가 겪은 경험을 바탕으로 썼다고 할 수 있는데, 그렇다고 이 작중 인물인 버드가 겪은 일들이 작가 오에겐자부로가 겪은 일이라고 해서는 안 된다. 오에겐자부로는 자신의 개인적인 체험을 작중 인물 버드로 하여금 소설 속에서 다시 개인적인 체험을 하게 하지만, 그럼으로써 독자들에게 보편적인 경험을 안겨준다고 할 수 있다.


아이가 태어났다. 그런데 아이가 정상이 아니다. 수술에 성공해도 정상적으로(?) 살 수가 있는지 의문이다.


소설은 여기서 시작한다. 그리고 주인공 버드는 아이를 받아들일 자신이 없다. 아이로부터 도피하고 싶다. 아이가 차라리 죽었으면 한다. 아이가 자신에게 준 비극을 받아들을 수가 없다. 그는 대학교 때 친구 히미코에게로 도피한다.


히미코와 함께 지내며 아이를 잊으려고 한다. 아니, 아이를 없애려고 한다. 그러나 그는 어느 순간, 그것은 도피에 불과함을 깨닫는다. 이 도피의 끝은 자신의 망가진 삶뿐이라는 것을.


소설의 끝부분이 이를 잘 말해주고 있다.


"아기 괴물에게서 도망치는 대신 정면으로 맞서는, 속임수 없는 방법은 자기 손으로 직접 목을 조르거나, 아니면 받아들여 기르는 것, 두 가지뿐이야. 애초부터 알고 있었지만 나는 그걸 인정할 용기가 없었던 거지." (271쪽)


이런 버드의 체험을 통해서 우리는 자신이 삶에서 도피하고 있는지 또는 정면으로 맞서고 있는지를 생각해 보게 된다.


소설의 거의 끝까지 계속 도망만 치는 버드의 모습에서 고난을 받아들이기 힘들어하는 우리 모습을 발견하게 되고, 그것이 과연 바람직할까 생각하게 된다.


불현듯 버드는 자신이 도망만 치고 있음을 깨닫는 듯이 보이는데, 이것은 그동안 그가 자신이 처한 현실로부터 도망치고 있는 모습을 보여주었기 때문에 그런 과정 속에서 고민하던 그가 그 고민을 떨쳐버리는 것은 한 순간에 불과하다.


그가 술이든 히미코든 관계없이 현실을 잊으려고, 벗어나려고 노력하면 노력할수록 그는 그가 처한 현실에서 벗어날 수가 없게 되는데... 그런 현실을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은 현실과 마주서는 것밖에는 없음을 알게 된다.


그가 술을 토해내는 것과 히미코와 가기로 한 아프리카 여행을 포기하는 것이 바로 그렇다. 그렇지만 그가 받아들인 현실이 결코 녹록치는 않으리라.


소설은 그가 '인내'라는 낱말을 찾아볼 작정이었다(276쪽)고 끝나고 있는 것에서 알 수 있듯이, 그 길은 결코 쉽지 않다. 쉽지 않음에도 그렇게 할 수밖에 없는 버드. 그는 긴긴 방황과 도피를 끝내고 이제는 현실로 돌아왔다. 


여기에 필요한 것은 바로 희망과 인내다. 소설은 이렇게 희망과 인내로 끝난다. 가능성으로 끝나는 것.


버드의 며칠이 어두운 분위기로 시작하지만, 아니다. 그가 절망의 늪에서 허우적댈 때 만났던 젊은 불량배들을 대하는 모습과 나중에 다시 만나게 되는 불량배들을 대하는 모습은 확연히 차이가 난다. 그가 불량배들을 알아보지만 불량배들이 그를 알아보지 못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즉 버드는 도피의 늪에서 빠져나왔던 것이다. 늪에서 빠져나왔다고 해도 그 길이 결코 평탄치는 않겠지만, 그 길을 똑바로 걸어가겠다는 버드의 의지가 그를 다른 사람으로 만들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이렇게 우리는 버드라는 [개인적인 체험] 속 인물이 겪는 개인적인 체험을 통해서 우리가 살면서 맞닥뜨리게 되는 일들에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를 경험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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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라진 소녀들의 숲
허주은 지음, 유혜인 옮김 / 미디어창비 / 202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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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적 배경은 조선시대. 아직 명나라에 여인들을 공녀로 바치던 시대. 공간적 배경은 제주도. 조선이라는 나라에서도 외딴 곳으로 그다지 주목받지 못하던 곳. 


제주도에서 열세 명의 소녀들이 사라진다. 그리고 그 실종사건을 수사하던 민 종사관도 실종이 된다. 실종된 아버지를 찾아 제주도에 오는 민환이로부터 사건은 시작된다. 환이에게는 제주도에는 남겨두었던 동생 민매월이 있다.


도대체 왜 소녀들이 사라진 것일까? 누가 사건의 주범인가? 누가 환이와 매월을 도와줄 수 있는가? 두 자매를 중심으로 유선비라는 술주정뱅이와 문촌장과 죄인 백씨, 그리고 매월을 키워주고 있는 노경 심방. 촌장의 딸과 죄인 백씨의 딸. 환이의 고모, 제주 목사가 등장한다.


처음부터 환이는 난관에 봉착한다. 도대체 누가 범인이란 말인가? 단서는 없다. 그러다 하나하나 단서를 찾고 문제를 풀어가게 된다. 결국 범인을 찾아내고 사건을 해결하는데... 이 과정에서 조선이, 그 전 나라였던 고려가 겪었던 여인을 공녀로 바쳐야만 했던 역사적 비극이 나타난다.


이런 비극을 힘을 모아 해결하려 하지 않는다. 제주 목사는 실종이 아닌 가출로 판단하고 수사를 하지 않고, 촌장 역시 손을 놓고 있는 상태. 


이것은 '나만 아니면 돼'라는 태도이고, 이런 태도는 오히려 지배층에서 더 잘 나타난다. 자신의 딸을 지키기 위해 다른 사람의 딸을 대신 보내려는 사람들. 사건의 중간 쯤 가면 사라진 소녀들은 누군가의 딸을 대신해서 끌려갔음을 짐작하게 된다. 힘있는 사람들이 자신들의 딸을 지키기 위해서 저지른 일.


힘없는 사람들은 이렇게 하지 못한다. 단지 힘있는 자들만이 이런 일을 할 수 있을 뿐이다. 그리고 그들은 내륙이 아닌 제주도에서 소녀들을 구한다. 왜냐하면 지배층들이 자신의 딸을 대신하여 공녀로 보내려는 소녀를 내륙에서 구한다면 이는 사건이 공론화 될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 그들은 제주도에서 소녀들을 구해 대신 보내려 한다. 


제주도. 내륙에 비해 차별을 받는 곳. 여기에 제주도 여인들은 더한 차별을 받으니, 이중 차별이라고 할 수도 있는데, 하층민들의 삶은 더더욱 그렇다. 비밀을 밝히려는 소녀들은 죽음에 이르고, 이를 지배층들은 무마하기만 하고.


돈과 권력과 개인의 이익이 결탁했을 때 피해를 보는 사람은 하층민들이다. 이 하층민들은 어디 하소연할 데도 없다. 슬퍼하고 슬퍼하고, 좌절하기만 할 뿐.


그러다 환이가 등장한다. 아버지를 찾는 과정에서 문제를 알아가는 환이. 나라가 겪는 비극을, 힘없는 나라에서는 여인들이 더욱 수난을 받을 수밖에 없음을 환이를 통해서 작가는 잘 보여주고 있다.


아름답게 태어났다는 사실이 죄가 될 수 있는 나라. 자신의 의지보다는 부모의 의지에 휘둘려 살아갈 수밖에 없는 여인들. 환이 역시 마찬가지였다. 오로지 아버지를 기쁘게 해드려야 한다는 생각으로만 살아왔던 환이.


환이의 세상은 아버지의 세상이었다. 그런 아버지가 실종되었을 때에야 비로소 환이는 자기 세상을 만나기 시작한다. 자신과 비슷한 여인들이 겪는 어려움도 알게 되고. 


약한 자신을 의식하고 두려움에 떨기도 하지만 옳음을 포기하지 않는다. 옳음을 포기하지 않는 길이 자신과 동생 매월이를 지키는 길이기도 하다는 것을 깨닫고.


범인은 결국 지배층에서 나올 수밖에 없다. 제주도에서 지배층이라고 해야 내륙에서는 보잘것없는 직위겠지만, 그럼에도 제주도에서는 나름 돈과 권력을 쥐고 있다. 물론 제주 목사로 내려온 사람처럼 자포자기하는 관료도 있지만, 토착민으로서 촌장의 지위에 오른 자는 강한 권력을 쥐고 있을 수밖에 없다.


많은 우여곡절을 겪지만 결국 환이는 문제를 해결한다. 이 문제를 해결하는 과정이, 사라진 소녀들을 찾는 과정이기도 하지만 자신을 찾는 과정이기도 하다. 아버지에게서 벗어나는 과정이라고도 할 수 있다.


아버지의 수사 일지를 바탕으로 자신의 일지를 써나가는 환이. 그런 환이를 도와주는 매월. 두 자매가 갈등하며 서로를 알아가고 의지해가는 과정을 통해 이들은 아버지의 그늘에서 벗어나게 된다.


주체적인 여성으로 서게 되는 환이의 이야기라고 해도 좋은데, 그 과정에서 공녀라는 역사적 비극을 생각하게 되고, 그러한 비극 앞에서도 계층에 따라 비극의 강도가 달라지고 있음을 소설은 보여주고 있다. 


작가가 캐나다에 살고 있다고 하는데, 영어로 쓰인 소설을 번역했다고 하지만 번역했다는 느낌이 들지 않을 정도로, 작가에 대한 소개가 없이 또 책 표지에 옮긴이를 밝히지 않았다면 그냥 한국에서 한국어로 출판한 소설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을 정도로 매끄럽게 진행된다.


때때로 다른 길로 들어서는 환이의 모습에 안타까워 하기도 하고, 단서를 해석하면서 사건의 본질에 다가갈 때는 응원하는 마음이 들기도 한다. 여기에 같은 여성으로서 알게모르게 도와주는 다른 인물들을 통해, 약자들의 연대에 대해서도 생각하게 된다.


사건이 해결되는 과정까지 긴박하게 전개되고 있으며, 사건 해결 후에는 환이가 어떤 삶을 살지, 주체로 서게 되는 환이의 모습이 후일담으로 나와 흐뭇한 마음으로 책을 덮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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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보고 싶어하는 세상
장강명 지음 / 문학동네 / 202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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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는 SF소설이라고 하지 않는다. 자신이 쓴 소설을 STS(Science, Technology and Society) SF라고 하고 싶다고 한다. 자신의 소설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정의를 내리고 있는 것. 이는 독자들에게 이런 식으로 읽어달라는 주문과도 같다.


즉, 자신이 쓴 소설을 과학과 기술이 사회와 맺는 관계 또는 사회에 미치는 영향을 중심으로 읽고, 그 소설을 통해 당신이 살고 있는 세상에 대해서, 당신이 살고 싶은 세상에 대해서 생각하라는 얘기로 받아들일 수 있다. 그만큼 지금 과학기술이 곧 이룰 미래의 모습이 소설에 담겨 있다고 할 수 있다.


이런 소설에서는 외계 생명체가 등장할 필요가 없다. 물론 이 소설집에서도 원소기호의 이름을 딴 외계에 사는 생명체 이야기가 나오기는 한다. 그것도 불멸(부활)과 독재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지만, 이는 독재정권에 대한 우화로 읽힐 수가 있다. 


이 소설집에서 가장 긴 분량을 차지하고 있는 소설 '아스타틴'(229쪽-360쪽)이다. 란타넘족 원소기호에서 이름을 따오고, 이들이 절대권력을 잡기 위해서 싸우는 장면을 무협이나 폭력을 배경으로 하는 영화 소설을 연상시키면서 전개하지만, 독재자가 영구 집권을 할 수 없음을, 다른 세계를 추구하는 존재가 나타남을 보여주는 소설이다. 한 편의 활극을 통해 독재정권의 말로를 보여주는 소설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이 소설을 예외로 하면 나머지 소설들은 모두 배경이 지구에 살고 있는 인간들이다.


제목이 된 소설 '당신이 보고 싶어하는 세상'은 증강현실을 다룬다. 증강현실로 자신이 보고자 하는 면만 볼 수 있는 세상이 된다. 그렇다면 사람들은 어떻게 소통할까? 내가 심한 욕을 해도 상대는 자신이 듣고 싶어하는 말로 번역해서 듣게 된다.


마찬가지로 비루한 현실을 보지 않고, 증강현실로 왜곡된 현실을 보게 된다. 보고 듣고 느끼는 모든 것들이 실제와 일치할 필요가 없는 세상. 


모든 사람이 이러한 증강현실로 세상을 보게 되면 과연 그 세상은 어떻게 될까? 소통이 가능할까? 소통은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자신에게 불편한 진실을 보거나 듣지 않아도 되기 때문이다. 즉 자신에게 유리한 것들만 보고 들을 수 있는 세상에서 굳이 진실을 대면하려 하지 않는다.


이 소설을 다른 쪽으로 넘겨보면 '데이터 시대의 사랑'이 된다. 옛날에는 점쟁이를 찾아가 만남의 의미를 들으려 했다면 이제는 데이터를 기반으로 한 통계 또는 알고리즘으로 무장한 통계로 만남을 예측하는 세상이 된다면.


이런 세상에서는 자신이 데이터를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라 어느 순간부터는 데이터에 종속된 삶을 살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데이터로 분석한 내 행동이 이러했기에, 이렇게 행동할 수밖에 없다고 하면서 데이터의 예측대로 행동하려는 경향이 강해지지 때문이다. 이는 증강현실로 현실을 왜곡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삶에는 불확실성이 존재하고, 이 불확실성으로 인해서 인간의 자유의지가 작동한다고 볼 수 있는데, 데이터에 기반한다면 자유의지를 부정하게 된다. 이미 그렇게 하도록 되어 있다는, 예정설로 회귀하게 된다. 이것이 증강현실 속 인간과 무엇이 다르단 말인가?


그럼에도 장강명은 '데아터 시대의 사랑'에서 결말을 데이터 시대에서 인간의 불확실성을 받아들이는 시대로 끌어온다. 이게 인간이라는 듯이.


이 불확실성을 다른 면으로 살펴보면 '알래스카의 아이히만'이 된다.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을 차용한 이 소설은 인간의 뇌에 다른 사람이 겪은 경험을 이식할 수 있는 기술이 개발된 시대를 배경으로 한다.


'악의 평범성'이란 말을 탄생시킨 아이히만에게 유대인이 수용소에서 겪었던 일을 경험하게 하는 기술이 있다면, 과연 그는 어떻게 반응할 것인가?


상대의 경험을 자신의 뇌에 이식한다고 해서 그 경험이 온전히 자신의 경험이 될 수 있을까? 인간이 인간에 대해 느끼는 감정이 이렇게 이식될 수 있을까?


그런 감정의 전이가 된다면 사람들이 서로 맺는 관계에서 불확실성이 없어질 것이다. 그런 사회가 바람직한 사회일까? 저 사람이 무엇을 느끼는지 내가 똑같이 알 수 있다면? 또 내가 무엇을 느꼈는지 상대가 정확하게 느낄 수 있다면? 


그럼 인간 관계가 좋아질까? 오히려 더 좋아지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런 관계에서는 틈이 없기 때문이다. 자신과 상대가 함께 채워야 할 틈. 거리라고 해도 좋다. 이런 틈과 거리가 바로 불확실성에서 비롯하고, 불확실성은 함께 노력하면서 틈과 거리를 채우는 역할을 하기에 인간 관계를 더욱 풍요롭게 한다.


우리는 불확실성 때문에 불안해 하지만, 바로 그 불확실성 때문에 오히려 더 생동감 있는 관계를 맺게 된다. 이를 글쓰기에 적용해 보자. 작가들은, 굳이 작가가 아니라도 사람들은 글을 쓰다가 막히는 때가 있다. (사이보그의 글쓰기)


글이 도통 써지지 않을 때, 글감이 떠오르지 않을 때가 있다. 이 역시 자신이 하는 일이 불확실성에 빠지는 경우다. 그런 경우를 방지하기 위해 뇌를 자극하는 기계가 발명된다고 하자. 그 기계를 사용하면 이런 단절을 겪지 않아도 된다. 자신의 의지에 의해서가 아니라 기계에 의해서 글을 자동적으로 쓰게 된다면? 


이런 글에서 생동감을 느낄 수 있을까? 그렇지 않을 것이다. 한 발 더 나아가자. 인간에게서 가장 중요한 부분이 무엇인가 하면 논쟁이 있겠지만 '뇌'가 빠지지는 않는다. 뇌의 죽음은 인간의 죽음이니까.


따라서 뇌를 중요하게 여겨서 뇌만 남겨도 인간이라는 생각을 하는 사람들도 있다. 많은 작가들이 이러한 뇌에 대해서 소설을 쓰기도 했는데,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뇌' 역시 마찬가지다. 이런 작품과 비슷하게 뇌만 지니고 우주로 나아간 사람들 이야기가 있다. '당신은 뜨거운 별에'다.


뇌를 로봇에 장착해서 금성을 탐사한다. 충분히 가능할 것 같다. 그런데 그 뇌를 또 이익집단이 통제할 수 있다면? 자신의 뇌지만 자신을 고용한 사람들이 자극을 통해 뇌를 통제한다면 과연 그때의 나는 나인가? 오히려 남이 하라는 대로 하는 기계에 불과한 것이 아닌가 하는 의문을 지니게 된다.


이 소설을 읽으면서 그런 점을 생각해야 한다. 뇌만 남은 인간, 아니 뇌를 다른 기계에 이식한 인간. 그리고 그 뇌를 다른 집단이 통제하도록 하는 인간. 이는 자유의지가 없는 인간이다. 자유의지가 없다는 말은 자신의 행동이 초래할 불활실성을 제거했다는 말이다. 그런 사회에서 사는 인간이 과연 행복할까? 작가는 인물이 탈출하는 것으로 그런 세상에 대하여 부정적으로 보고 있음을 우리에게 알리고 있는데...


여기까지 언급한 소설들은 지금 우리 시대에 개발을 하려 하고 있는 기술들이다. 이런 기술들이 실용화된다면 그 사회는 어떤 사회일까? 우리가 행복한 사회일까를 생각해야 한다.


그래서 작가의 말에 공감하게 된다. 그의 삼단논법을 보자.


1. 오늘날 과학기술은 나의 삶과 내가 사는 사회에 큰 영향을 미친다.

2. 나는 좋은 삶을 살고 싶고, 좋은 사회를 만들고 싶다.

3. 그러므로 나는 과학기술을 통제해야 한다. (401쪽) 


이 삼단논법을 통해서 그는 '다른 사람들과 함께 '기술이 우리 삶과 사회를 어떻게 변화시킬까? 그 변화는 바람직한가?'하고 폭넓게, 적극적으로 따져 묻고 싶다. 우리가 어떤 기술에 대해서는 개발하거나 사용하지 말자고 혹은 사용을 제한하자고 합의할 수 있으며, 그렇게 해야 한다고 본다. 사실 우리는 이미 그런 일을 하고 있다.' (401-402쪽)고 말하고 있다.


작가가 이 소설을 쓴 이유다. 그리고 자신이 쓴 소설에 그냥 SF소설이 아니라 STS(Science, Technology and Society) SF라고 한 이유이기도 하다.


이 작품집에 있는 소설들 읽으면서 현대 과학기술이 가고 있는 길에 대해서 생각해봐야 한다. 논의해야 한다. 우리는 계속 이 지구에서 살아가야 함으로.


읽으면서 역시 장강명이다 하는 생각을 했다. 사람들에게 잘 읽히는 소설을 쓰는 작가, 사람들이 많은 생각을 하게 하는 작가 장강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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