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술의 충격 - 테크놀로지와 함께 진화하는 우리의 미래
케빈 켈리 지음, 이한음 옮김 / 민음사 / 201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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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평론가 조우석님은 케빈 켈리의 저서 <기술의 충격>를 읽고, 한 단어로 압축해서 “뷰티풀!”이라 하였습니다(http://blog.joinsmsn.com/yang412/12239882). 저도 흉내를 내보려 머리를 쥐어 짜 보았습니다만, 그 보다 더 좋은 표현을 찾아낼 수 없었습니다.

‘제1장 의문을 품다’에서 저자는 대학을 중퇴하고 기술과는 동떨어져 보이는 아시아의 오지를 돌아다닌 일부터 귀국해서도 미국대륙의 횡단여행에 이르기까지 10년의 세월을 보낸 끝에 자신이 기술의 본질을 잘 모른다는 점과 기술과 모순되는 관계를 맺고 있다는 점을 깨닫고 기술에 관한 탐구에 다시 7년여의 시간을 투자해서 정리한 결과가 바로 <기술의 충격>이라고 합니다. 솔직하게 말씀드리면 기술의 과거 현재 그리고 미래상에 대한 저자의 열린 시야는 한마디로 ‘충격!’ 그 자체로 다가왔습니다.

이 책에서는 테크늄(technium)이라고 하는 생소한 단어를 자주 만나게 됩니다. 그는 “우리 주변에서 요동치는 더 크고 세계적이며 대규모로 상호 연결된 기술계(system of rechnology)”를 의미하는 단어로 테크늄이라는 단어를 만들어냈다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덧붙여서 “테크늄은 반질거리는 하드웨어를 넘어서 문화, 예술, 사회 제도, 모든 유형의 지적 산물들을 포함한다. 그것은 소프트웨어, 법, 철학개념 같은 무형의 것도 포함한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점은 그것이 더 많은 도구, 더 많은 기술 창안, 더 많은 자기 강화연결을 부추기는, 우리 발명품들의 생성충동을 포함한다는 것이다.(21쪽)”라고 정의하고 있습니다.

심지어 저자는 지구상에 존재하는 생명체를 나누는 6가지 생명계에 추가하여 테크늄을 제7의 생명계로 분류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지구상에 생명체가 나타나 꾸준한 진화과정을 거쳐서 현재에 이르게 된 것처럼 테크늄 역시 생명체 이전의 우주가 생성된 이래 점진적이고 꾸준한 진화를 거쳐서 현재에 이르렀으며 현대에 들어서면서 그 진화의 속도가 빨라지고 있고 앞으로는 상상할 수 없을 정도의 빠르기로 진화할 것이라는 예측을 내어놓고 있고, 그 근거를 제시하고 있습니다. 그는 “테크늄은 이제 우리 세계에서 자연처럼 위대한 힘이며, 테크늄에 대한 우리의 반응도 자연에 대한 반응과 비슷해야 한다.”고 하며 그러기 위하여 기술의 행동을 이해하고 기술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파악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그런 이유로 저자는 이 책의 제목을 <What technology wants (기술이 원하는 것)>이라고 했나 봅니다. 하지만 저는 번역된 책의 제목처럼 <기술의 충격>이 더 마음에 와 닿는 것 같습니다.

제7의 생명계인 테크늄이 다른 생명계와의 중요한 차이점은 두 가지라고 하는데, “생명에서는 형질의 혼합이 시간상 ‘수직적으로’ 일어나는데 반하여 테크늄에서는 주로 수평으로 일어난다는 점과 유기체의 진화는 점진적인 변형이 규칙이고 혁명적인 단계는 거의 없는데 반하여 기술은 앞으로 도약하고, 갑작스럽게 뛰고, 점진적인 단계를 건너뛸 수 있다는 점이지만, 태어난 것의 진화와 만들어진 것의 진화 사이의 가장 큰 차이점은 생물학상의 종과 달리 기술의 종은 멸종하는 일이 거의 없다는 점(67쪽)” 라고 합니다.

캘리는 기술이 어디로 향하는지 알기 위하여 먼저 그것이 어디에서 왔는지 알아보려 과거로의 여행을 시작했지만 거슬러 올라갈수록 그것은 더 먼 과거로 물러나고 있다고 생각하고 인류기원부터 추적을 시작하여 결국은 생명체의 기원으로 거슬러 올라가고 있습니다. 물론 과거로 거슬러 올라갈수록 기술의 질이나 양은 보잘 것 없었지만, 인류를 비롯하여 생명체가 기술없이 생활하던 시기가 있었는가 살펴보면 절대로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선대로부터 본능적으로 전달되던 무형의 기술이 한 단계 도약하게 된 계기는 언어가 만들어진 것이 첫 번째 획기적인 계기가 되었으며, 다시 오랜 세월이 지난 다음 문자가 만들어져 유형의 기록을 남기게 되면서 두 번째 도약이 이루어지고, 다시 인쇄술이라고 하는 문서의 대량생산이라는 기술적 진보에 힘입어 세 번째 도약이 가능했다고 보고 있습니다.

이러한 유형의 기록은 기술에 대한 인간의 생각을 상호교류하여 발전시키는 동력이 되었던 것인데, 최근 들어 기술의 폭발적 발전은 컴퓨터와 인터넷으로 이를 연결하는 기술이 개발되면서 예측이 불가능할 정도의 빠른 속도로 기술이 발전하게 될 것이라는 구체적인 데이터를 토대로 예측하고 있습니다. 세계의 모든 컴퓨터가 온라인에 접속한 가상 슈퍼컴퓨터를 가정하면 10억대의 온라인 개인용 컴퓨터가 연결되어 엄청난 양의 정보가 교환되는데, 지구를 하나의 생명체로 보는 가이아 이론을 적용할 수도 있겠다 보여집니다. 따라서 저자는 테크늄은 생물학적 진화가 장구한 세월에 걸쳐 추진해온 자기 조직화 과정을 지금 증폭하고 확대하고 가속시키고 있어 ‘가속된 진화’단계에 있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저자는 새로운 기술이 가지고 올 수 있는 치명적 상황에 대하여 인용한 '예방의 원칙(precautionary principle)'에 눈길이 끌렸습니다. 2008년 촛불정국을 뜨겁게 달구었던 이슈 가운데 ‘사전예방의 원칙’이 있었던 기억이 있습니다. 이것은 환경부문에 대한 1992년 지구 정상회의에서 리우선언의 일부로 고안되었는데, 원래는 “철저한 과학적 확신이 부족하다고 해서 그것이 환경파괴를 예방할 비용 효율이 높은 수단을 미룰 근거로 쓰여서는 안된다.(301쪽)”라고 권하는 내용이었다고 합니다. 이 구절은 그 후로 “불확실하지만 상당한 피해를 입힐 가능성을 보이는 활동들은 그 활동의 옹호자가 그것이 감지할 수 있는 피해 위험이 전혀 없다는 것을 보여주지 못한다면 금지되어야 한다.(301쪽)”로 보완 강화되었다고 합니다. 이에 대하여 저자는 다소 비판적인 시각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그것은 “예방 원칙이 정말 아주 잘하는 것이 하나 있다. 기술발전을 멈추는 것이다.(302쪽)”는 맥스 모어의 언급이나, “우리는 예방 원칙이 나쁜 방향으로 이끌기 때문이 아니라, 그것이 가치가 있음에도 어떤 방향으로도 이끌지 않기 때문에 그것에 이의를 제기해야 한다.(303쪽)”는 카스 선스타인의 주장을 인용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그렇다는 말씀입니다. 모든 기술은 어딘가에서 해로운 영향을 나타낼 수 있기 때문에, 절대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는 에방원칙의 논리에 따른다면 어떤 기술도 허용해서는 안되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저자는 “바로 여기가 우리의 선택이 개입되는 지점이다. 신기술의 진화는 불가피하다. 우리는 그것을 멈출 수 없다. 하지만 각기술의 특징은 우리에게 달려있다.(323쪽)”고 정리하고 있는데, 기술에 담을 쌓고 살아왔던 저자의 생각이 전면수정된 것은 기술의 역사에 대한 깊은 사유의 결과라 보여집니다.

참고로 저자가 제시한 우주의 두 종류 게임을 소개합니다. 바로 유한게임과 무한게임입니다. 유한게임은 카드게임, 포커판, 복권, 축구와 같은 스포츠처럼 누군가 이길 때 끝이 나는데 반하여 무한게임은 진화, 생명, 마음, 테크늄과 같이 게임을 계속 진행하기 위해 하는 것이라고 합니다.(428쪽) 모든 참가자가 가능한 오래 게임을 하도록 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변하지 않는 규칙을 가지고 하는 유한게임과는 달리 무한게임은 규칙을 바꿔야만 계속 진행할 수 있고 규칙을 상대로 게임을 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저자는 여기에서 창조에 관한 자신의 생각을 비치는데 솔직하게 제대로 이해되지 않아 깊이 언급할 수 없다는 점을 고백합니다.

끝으로 사족이 될 것 같습니다만, 언젠가 신문기사로도 소개되었던 것이 기억납니다만, 저자가 기술의 진화모델을 설명하는 자료로 동아시아지역의 야간 위성사진에서 밝게 불빛이 점멸하는 인근국가들과는 달리 평양지역을 제외하고는 캄캄한 북한지역을 인용하여 현대기술이 부재한 국가라고 꼬집고 있어(224쪽) 안타까움보다 아픔을 느꼈다는 말씀을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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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원에서 죽는다는 것 - 개정판
야마자키 후미오 지음, 김대환 옮김 / 잇북(Itbook) / 201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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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년 전 쯤의 일입니다. 치매에 대한 기획취재를 지원하기 위해서 KBS TV취재팀과 함께 미국을 방문할 기회가 있었습니다. 인터뷰 대상을 섭외하고 인터뷰를 지원할 뿐 아니라 인터뷰 내용을 번역하는 일까지 일인 몇역을 했는지 헤아리기도 어려운 여행이었습니다. 당시 인터뷰를 한 분이 자신이 쓴 책을 건네주어 받았습니다. 눈물에 관한 책인데 읽어가다 보니 일반인이 읽어도 재미있겠다 싶어 번역을 해서 몇몇 출판사와 접촉을 했지만 별반응을 얻지 못했습니다. 그 이유는 출간된 지 10년이 넘은 탓이 최신지견이 부족하다는 이야기였습니다. 개정판이 나온다면 고려해보겠다는 것이었지만, 원저자는 개정판을 낼 뜻이 없었습니다. 번역한다고 공연히 헛힘만 썼습니다. 재미있는 것은 번역한 내용의 일부가 방송소재로 나오더라는 것입니다. 아마도 작가가 번역원고를 인용한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은 했지만, 확인할 방법이 없었습니다.

느닷없이 옛날이야기를 끄집어내는 이유는 야마자키 후지오 선생이 쓴 <병원에서 죽는다는 것>을 읽으면서 당시 번역원고출판을 거절당했던 생각이 나서입니다. 이 책을 번역하신 김대환님의 번역후기를 보면 1990년에 처음 출간된 <병원에서 죽는다는 것>을 번역하여 우리나라에 소개한 것이 2005년이었는데, 이번에 개정판을 내게 된 것이라고 합니다. 하지만 번역 원본은 여전히 1990년에 발표된 것으로 되어 있어 후지오 선생이 원본을 가필보완한 것은 아닌 듯 합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의 평균수명은 도 20년 전인 1990년의 69.8세에서 2010년에는 79.4세로 10년이나 늘어났습니다. 또한 노령화속도가 세계에서 가장 빠른 국가로 꼽히고 있습니다. 평균수명이 급속하게 늘어나면서 나타나는 현상 가운데 암환자발생 역시 급속하게 늘어나고 있다는 점입니다. 거꾸로 말하면 우리나라 의료계의 암환자를 치료하는 의료수준이 세계정상급에 진입하여 이제는 새로운 치료법을 개발해내는 위치에 이른 효과가 평균수명연장으로 나타나고 있다는 해석도 가능합니다.

당연히 암환자를 치료하는 기본틀에도 많은 변화가 있다는 말씀을 먼저 드리면서 후지오 선생의 <병원에서 죽는다는 것>에 담긴 이야기들이 우리나라 의료계의 현 상황과는 상당한 거리가 있다는 점을 지적하고자 합니다.

먼저 책의 전편을 통하여 보면, 이 책이 저술될 당시 일본 의료계에서는 암환자가 죽을 때까지 병명을 감추는 것이 일반적인 흐름이었던 모양입니다. 하지만 제 가물거리는 기억으로도 우리나라에서는 당시 환자에게 병명을 알려주고 치료에 적극 동참하도록 요청하는 의사들이 적지 않았다고 생각되며, 지금은 대부분의 의사들이나 환자들도 자신이 암이라는 사실을 직접 확인하기를 원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그 이유는 대부분의 암에서 수술, 항암치료, 방사선치료, 면역요법, 유전자치료 등 다양한 치료법을 적용하고 있어 이제는 암이 불치의 병이라기보다는 만성질환으로 다루는 경향도 있기 때문입니다. 즉 시대의 흐름과 동떨어진 이야기일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건강보험공단을 비롯하여 다양한 기관에서 실시하는 정기검진을 통하여 암을 조기에 발견할 수 있게 되면서 손을 쓸 수 없는 말기암의 빈도가 줄어드는 것도 중요한 요소가 될 것 같습니다.

이 책이 소개될 당시 “인간으로서의 존엄을 지키고 싶다면 절대 병원에서 죽지 말라(292쪽)”고 소개했다고 하는데, 사실 우리는 죽음을 집에서 맞고 장례를 집에서 치루는 전통을 지켜왔습니다. 제가 인턴으로 병원근무를 시작할 무렵 만해도 병원에서 치료받던 환자들이 죽음에 이르게 되면 집으로 모셔가겠다는 보호자의 요구 때문에 인턴선생이 손으로 인공호흡을 시키는 백을 일분에 20회씩 쥐어짜면서 앰뷸런스로 환자집까지 다녀와야 했습니다. 하지만 아파트가 늘어나면서 아무래도 번잡한 장례를 집에서 치러내는 것이 어렵게 되면서 장례식장을 이용하는 것이 대세가 되고 말았습니다. 병원장례식장의 경우는 그 병원에서 돌아가신 분들을 위한 공간도 내기 어려워 오히려 임종 무렵에 병원에 입원하게 된다는 역설적인 이야기도 심심치 않게 들리는 것이 현실입니다.

후미오 선생은 호스피스에 관심이 많다고 하는데, 아마도 호스피스에 대한 사회적 관심을 높이기 위한 목적을 염두에 두고 집필을 하셨다고 보여집니다. 존엄사에 대한 관심이 커지면서 의미없는 연명이 오히려 환자의 안녕과 존엄을 무너뜨린다는 인식이 자리 잡게 되면서 호스피스에 대한 사회적 관심 역시 커지고 있습니다. 일본에서도 재택간호라는 개념이 자리를 잡아가고 있다는 이야기는 얼마 전에 읽은 <애도하는 사람; http://blog.joinsmsn.com/yang412/12263003>에서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일본에서는 여전히 장례를 집에서 치루는 경향이 남아 있는 것 같습니다. 우리나라에서는 건강보험 체계의 요양병원과 요양보험이 지원하는 요양시설이 호스피스에 준하는 역할을 하고 있는데, 죽음을 피할 수 없는 말기 재발암, 전이암 환자들이 남은 삶을 편하게 지낼 수 있도록 적극적으로 치료하는 새로운 개념의 병원이 등장하고 있습니다(http://blog.joinsmsn.com/yang412/12276586).

후미오 선생은 의과대학을 갓 졸업한 인턴선생이 죽어가는 환자를 대상으로 기관 내 삽관을 실습했다는 믿을 수 없는 내용을 고발(?)하고 있습니다.(38쪽) 의사로서 환자를 실험의 대상으로 삼는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노릇입니다. 제 경우도 의과대학을 졸업하고 응급실에서 근무를 시작한 지 얼마되지 않아 기관 내 삽관을 해야 되는 환자를 만나게 되었는데, 선배님의 조언을 들어가면서 별 어려움 없이 성공했던 기억이 있습니다. 지금은 기관 내 삽관을 연습할 수 있는 장비가 개발되어 의과대학 학습과정에서 익힐 수 있다고 합니다. 공연히 의료계에 대한 국민들의 불신을 키울 수 있는 사족에 불과합니다.

장례를 치르려면 의료인이 사인을 기입한 사망진단서를 관할 관청에 제출해야 가능합니다. 그런데 “사망진단서를 확실하게 밝혀내지 않으면 사망진단서를 끊어드릴 수 없습니다.(49쪽)”면서 병리해부(부검이라는 명칭으로 일반화되어 있습니다)를 강압적으로 요구하는 의사가 있다는 고발도 있습니다. 동양권에서는 돌아가신 분의 몸에 칼을 대는 행위가 돌아가신 분을 두 번 죽이는 것이라 해서 거부하는 전통이 오래동안 자리잡아 왔습니다. 물론 최근 들어 보험과 관련하여 혹은 죽음의 원인을 밝혀야 수사에 도움이 되는 변사사건 등처럼 부검이 이루어지는 사례가 적지 않습니다. 사실 현대의학이 여기에 이르게 되는데는 르네상스 이후에 활발하게 이루어진 부검이 지대한 공헌을 하였다는 것이 일반화된 시각입니다. 하지만 영상의학을 비롯하여 다양한 검사법들이 개발되면서 사망원인을 규명할 수 있게 되면서 이들나라에서도 사망후 부검율이 현저하게 낮아지고 있습니다. 특히 부검에 드는 비용은 보험에서 지원되지 않는 나라일수록 더욱 그러합니다. 물론 최근 들어 정확한 진단이 요구되는 치매와 같은 신경계질환의 경우는 부검하는 사례가 늘고 있기도 합니다.

후미오 선생이 읽고 감동을 받았다는 엘리자베트 퀴블러 로스박사의 <죽음과 죽어감>은 저도 읽은 바 있습니다만, 후미오 박사처럼 ‘의사나부랭이’로 스스로를 비하할 생각은 없습니다. 자신이 평생해야 할 의무를 가진 직업에 대하여 나부랭이로 생각하는 후미오 선생이 오히려 안쓰럽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런 생각을 가지고 있어서 환자의 “호흡이 멈추고 심장이 정지하려고 하자 내내 그때를 기다리고 있던 의사들이 ‘드디어 나설 때군,’하고 긴장된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그중 한 명이 재빨리 인공호흡을 개시127쪽)”하는 보여주는 진료를 하는 모양입니다. 사망이 임박한 환자에게는 인공호흡도 고통일 뿐입니다. 가족들을 비롯하여 환자의 죽음을 슬퍼하는 분들이 참석한 가운데 평안한 죽음을 맞을 수 있도록 하는 것도 훌륭한 의료행위라 생각합니다. 후미오 선생의 말처럼 “주역은 죽어가는 환자이고, 그 모습을 지켜보는 사람은 가족이나 친지들이어야 하기 때문(130쪽)“입니다.

하지만 꼭 피할 수 없는 죽음을 연장해야 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역시 제가 인턴 때의 일입니다만, 응급실에 실려온 젊은이의 심장이 멎었는데 가족들은 아직도 병원에 도착하지 않은 상황이었습니다. 심폐소생술을 실시하고 강심제를 투여하면서 가족들이 도착할 때까지 심장박동과 호흡을 연장하여 가족들이 작별을 할 수 있도록 한 것은 지금도 잘 한 일이라 생각합니다.

끝으로 환자를 진료하는 의료인이 환자와 감정적으로 연결되는 것에 대하여 상반된 견해가 있는 것 같습니다. 환자의 치료와 관련하여 중대한 결정을 내려야 하는 상황에서는 환자의 용태만을 염두에 두고 판단해야 하는데 감정이 개입되면 판단이 흐려질 수 있다는 논리도 있습니다. 환자와 직접 대면한 경험이 인턴 때 밖에 없습니다만, 응급실에서 그리고 병실에서 담당하던 환자가 하룻사이에 4명이나 유명을 달리한 날이 있었습니다. 그날은 정말 허탈감 때문에 일할 의욕조차 나지 않았는데, 과장님께서 아무래도 고사라도 지내야 할 모양이라고 하시면서 의료현장에서 일하다 보면 별별 상황을 다 만나게 되니 지나치게 감정에 빠져들지 말라는 말씀을 해주셨던 기억이 납니다. 물론 자신이 돌보던 환자의 죽음을 기억하는 것이 옳겠습니다만, 그 죽음 하나하나에 의미를 두고 자책을 한다면 자신의 정신건강에도 나쁜 영향을 미치게 될 것 같습니다.

리뷰가 너무 길어졌습니다. <병원에서 죽는다는 것>에 대하여 지나치게 부정적인 생각을 가질 이유는 없습니다. 자신의 생각에 따라서 형편에 맞게 죽음을 맞으면 되는 것입니다. 병원은 어떤 경우도 환자의 생각을 존중하는 곳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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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든
헨리 데이빗 소로우 지음, 강승영 옮김 / 이레 / 200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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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45년3월 말경, 나는 도끼 한 자루를 빌려 들고 월든 호숫가의 숲으로 들어갔다. 그러고는 호수 가까이에 집 한 채를 지을 생각으로 곧게 뻗은 한창때의 백송나무들을 재목감으로 베어 넘기기 시작했다. (…) 내가 일한 곳은 소나무가 우거진 기분 좋은 언덕배기였는데 나무들 사이로 호수가 보였고, 어린 소나무와 호두나무가 무성하게 자라는 숲 속의 작은 빈터도 보였다.(60-61쪽)” 헨리 데이빗 소로우가 자신으로부터 사회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한 성찰을 이루게 된 월든 호숫가의 오두막은 이렇게 만들어졌습니다.

지금은 허물어져 사라져 버렸지만, 어렸을 적에 명절 때면 차례를 지내려 찾던 종가댁 마당 아래쪽에는 사랑채가 있었습니다. 툇마루에 올라서면 작은 윗방과 아랫방이 이어져 있는데, 종가댁 할아버지께서 아랫방에 기거하셨다고 합니다. 서안에 올려진 서책을 읽으시는 할아버지의 모습을 떠올리게 됩니다. 종가댁에서는 툇마루에 할아버지께서 읽으시던 서책들을 펼쳐놓고 거풍을 시키곤 하셨습니다.

툇마루에 올라서면 마당가에 서있는 나무 사이로 남쪽으로 널찍한 호수가 바라다 보입니다. 호수를 바라보면 어느 새 마음이 활짝 열리는 것 같습니다. 언젠가부터 이런 호숫가에 집을 짓고 살고 싶다는 생각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이른 아침에는 책을 읽고, 해가 질 무렵에는 호숫가를 산책하고, 달이 뜨면 음악을 듣거나 아니면 삶에 대한 이러저런 생각을 해도 좋을 것 같습니다. 그리고 생각의 열매를 글로 남기면 금상첨화가 될 것 같습니다. 소로우가 <월든>을 남긴 것처럼 말입니다.

<월든>은 호숫가의 오두막이 완성된 1845년 7월부터 1847년 9월까지 2년여 동안 그곳에서 홀로 지낸 소로우의 숲생활의 기록입니다. <월든>을 통해서 유추해본 소로우의 숲생활은 동서양을 넘나드는 다양한 책들을 읽고 그 의미를 새기거나, 월든 호수와 주변 숲을 거닐면서 느끼는 계절의 변화와 생명의 경이를 미세한 점까지도 놓치지 않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숲속 오두막을 찾아오거나 숲속에서 만나는 사람들과 나누는 소소한 이야기도 놓치지 않고 있습니다. 소로우의 사념은 숲과 호수를 중심으로 하는 자연에 머물지 않고 자신이 소속되어 있는 문명사회, 특히 미국의 사회정책 등에 대한 쓴소리도 아끼지 않고 있습니다. “침대는 야간의 의복이라고도 할 수 있는데 이 주거지 안의 주거지를 마련하기 위해서 우리는 새들로부터 둥지와 가슴털을 훔친다. 마치 두더지가 굴속 깊은 곳에 풀과 나뭇잎으로 된 잠자리를 마련하는 것처럼 말이다. 가난한 사람은 세상이 차다고 한탄을 한다. 우리가 느끼는 고통의 대부분은 신체적 냉기 이상으로 사회적 냉기에 기인한다.(25쪽)”

사실 저도 몇 년째 집근처에 있는 양재천에 산책을 나가고 있습니다. 산책을 하는 동안 양재천에서 느끼는 변화를 사소한 것까지도 놓치지 않으려 살피곤 합니다만, 소로우와는 차원이 다른 것 같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 이유는 시간의 흐름과 자연을 느끼는 방식의 차이, 두 가지 정도일 것 같습니다. 제가 양재천에 산책을 나가는 큰 이유는 자연을 관조하려는 것보다는 건강을 유지하려는 목적이 큰 탓에 비교적 빠른 속도로 걷기 마련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양재천의 변화는 보고 들으면서 느끼게 됩니다. 하지만 느리게 사는 법을 알고 있었던 것 같은 소로우는 천천히 걸으면서 자연에 스스로를 담기 때문에 그 변화를 마음으로 느낄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이처럼 <월든>을 읽어나가면 자연에 대한 소로우의 세심한 관찰과 사념의 깊이에 매료될 수밖에 없습니다. “들판과도 같이 넒은 물은 공중에 떠 있는 정기(精氣)를 반영한다. 그것은 위로부터 끝없이 새로운 생명과 움직임을 받아들이고 있다. 그것은 하늘과 땅의 중간적인 본성을 지니고 있다. 땅 위에서는 풀과 나무들만이 흔들리지만 물은 그 자체가 바람에 의해 잔물결이 일게 된다. 나는 수면에 미풍이 불어 지나가는 곳을 빛줄기나 빛의 파편이 번득임을 보고 알 수 있다. 이처럼 우리가 호수의 표면을 내려다볼 수 있다는 것은 대단한 일이다. 언젠가 우리는 공가의 표면을 내려다보며 한층 더 신묘한 정기가 어디를 스쳐 지나가는가를 보게 될 것이다.(271쪽)”

이웃 오두막에 사는 아일랜드 이민자 존 필드의 대화를 통하여 소로우가 원하는 미국이 어떤 모습인지 알 수 있습니다. “참다운 미국은 그런 것들(차와 커피와 고기)이 없이 살아갈 수 있는 생활양식을 자유로이 추구할 수 있는 그런 나라여야 하며, 또 노예제도나 전쟁을 국민이 지지하도록 국가가 강요하고, 그런 물건들을 사용하는 데서 직접 간접으로 초래되는 쓸데없는 비용을 국민이 부담하도록 강요하는 일이 없는 나라여야 하는 것이다.(296쪽)” 이러한 그의 생각은 1846년 7월 멕시코 전쟁에 반대하여 인두세 납부를 거부하여 투옥되었던 경험에서 나온 것이며, 부당한 시민 정부에 대한 합법적인 개인의 저항을 주장한 에세이 <시민 불복종(1849)>는 마하트마 간디의 인도 독립운동 및 마틴 루터 킹의 흑인 민권운동에 영감을 주었다고 합니다.

팔은 안으로 굽는다고 우리는 스스로에게 관대한 것을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만, 그는 스스로에 대한 비판에도 차별을 두지 않았습니다. 자신이 과거 학교경영에 간여하면서 가졌던 생각도 비판하고 있습니다. “같은 인간에 대한 사랑의 감정에서가 아니고 단지 먹고살기 위해서 아이들을 가르쳤으므로 그것부터가 실패라고 하지 않을 수 없었다.(100쪽)” 오늘날 교육에 종사하는 분들 가운데 먹고사는 문제를 떠나서 인간에 대한 사랑의 감정으로 임하는 분들이 얼마나 될까 생각합니다. 특히 이념까지 끼어들다 보면 인간에 대한 사랑은 발붙일 자리가 없지 않을까 걱정입니다.

소로우는 월든호수로 간 이유를 다음과 같이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내가 숲 속으로 들어간 것은 인생을 의도적으로 살아보기 위해서였다. 다시 말해서 인생의 본질적인 사실들만을 직면해보려는 것이었으며, 인생이 가르치는 바를 내가 배울 수 있는지 알아보고자 했던 것이며, 그리하여 마침내 죽음을 맞이했을 때 내가 헛된 삶을 살았구나 하고 깨닫는 일이 없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나는 삶이 아닌 것은 살지 않으려 했으니, 삶은 그처럼 소중한 것이다.(129-130쪽)”

그러면 왜 호수였을까요? “호수는 하나의 경관 속에서 가장 아름답고 표정이 풍부한 지형(地形)이다 그것은 대지의 눈이다. 그 눈을 들여다보면서 사람은 자기 본성의 깊이를 잰다.(268쪽)” 소로우는 대지의 눈을 통해서 자신의 본성을 들여다보려 한 것이고, 자신을 발견해낸 것입니다.

앞에서 언젠가 기회가 되면 호숫가 작은 집에서 살고 싶다는 저의 작은 소망을 말씀드렸습니다. 하지만 그 소망이 언제 이루어질 수 있을지 모릅니다. 그렇다고 다람쥐 쳇바퀴 돌리 듯 세상살이에 매몰되어 정신없이 사는 삶에 매달리다보면 정신의 샘이 말라붙어버릴 것 같다는 걱정이 남습니다. 이제라도 삶에 희망을 물줄기가 흘러내릴 수 있도록 마음속에 월든호수를 담아봐야 하겠습니다. 마치 쉴 새 없이 그리움을 솟아 올리는’ 최홍규 시인님의 호수처럼 말입니다(http://blog.joinsmsn.com/yang412/109251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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뇌과학 여행자 - 신경과 의사, 예술의 도시에서 뇌를 보다
김종성 지음, 경연미 그림 / 사이언스북스 / 201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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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산의대 신경과 김종성교수님의 전작 <춤추는 뇌>를 읽은 바 있기 때문에 이번에 새로운 책을 내셨다는 말씀을 듣고서 기대가 컸습니다. <춤추는 뇌>는 일반인을 위한 책이면서도 뇌에 관한 이야기를 적지 않게 다뤄야 했기 때문에 일반인이 이해하는데 다소 어려움이 있지 않을까하는 생각도 들었습니다(http://blog.joinsmsn.com/yang412/4607547). 이번 책이 <뇌과학 여행자>라는 제목을 달고 있어 아직도 밝혀지지 않는 점이 많아 여전히 신비한 세계에 속하는 우리의 뇌를 탐색해 들어가는 내용이 아닐까 추측해보았습니다.  

 

하지만 김교수님이 서문에서 밝힌 것처럼 뇌의학을 전공하다보니 해외여행을 할 기회가 많았고, 해외여행에 나설 때마다 그 곳에서 만날 수 있는 이야기 거리를 나름대로의 시각으로 정리해보겠다는 생각을 가지게 되셨던 것 같습니다. “남들이 보기에 감히 여행기를 쓰겠다는 내 모습은 마치 말라빠진 조랑말 위에 올라타 기사 흉내를 내는 돈키호테 같을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모든 사람은 각자 자신의 시각으로 사물을 바라보는 법이며, 나 역시 신경과 의하의 독특한 취향으로 세상을 바라보았다. 여행 중에도 나의 눈을 오래 붙잡은 대상은 역시 뇌질환과 관련된 것들이었으니 말이다.(6쪽)” 아무래도 관심이 많은 분야에 시선이 더 가기 마련입니다. 저 역시 해외여행을 적지 않게 다녔습니다만, 방문일정을 빠듯하게 잡고 또 방문목적에 매달리다 보면 방문한 지역을 둘러보려는 여유가 그리 많지 않은 탓인지 김교수님의 열정이 부러울 따름입니다.  

 

<뇌과학 여행자>에는 ‘아폴리네르와 미라보 다리를 걷다’는 제목으로 파리에서 만나는 예술가들의 신경질환을 중점적으로 다루고 있고, ‘풍차에 돌진하는 돈키호테’라는 제목으로는 스페인에서 만나는 신대륙발견과 관련된 사람들 그리고 예술가와 그들의 작품에 등장하는 주인공의 신경질환을, ‘도스토예프스키, 끝없는 이야기’에서는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를 방문하면서 러시아의 문학가와 예술가의 신경질환을, ‘헨델의 메시아’에서는 런던을 방문했을 때 만났던 음악가들의 족적을 따라가면서, ‘히틀러가 뮌헨에 남긴 것’에서는 히틀러가 앓은 신경질환을, ‘아프리카 대륙에서’는 아웃 오브 아프리카의 작가와 영화에 등장하는 인물의 신경질환을, 북경에 초대받았을 때는 마오쩌뚱의 신경질환을 중심으로, 마지막으로 프랑스 프로방스를 방문하였을 때는 역시 이 지방출신 예술가의 신경질환에 관하여 추론하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물론 해외에 가신 목적이 단순하게 놀러간 것이 아니기 때문에 공식활동도 간략하게 소개하고 있습니다.  

 

<춤추는 뇌>를 읽으면서도 놀랐던 바 있습니다만, <뇌과학여행자>에서도 김교수님이 문학, 음악, 미술, 영화 등등 다양한 분야에서 조예가 상당하다는 점을 다시 확인할 수 있었고, 특히 그런 지식을 적절한 자리에 잘 버무려서 읽을 수 있도록 한 글솜씨가 더욱 발전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다음 구절을 보시면 제 생각에 동의하실거라 생각합니다. “10월 초, 파리의 맑은 공기가 나뭇잎을 가을빛으로 물들인다. 밤나무와 플라타너스 나무의 잎 가장자리는 이미 진한 갈색으로 물들어 있다. 어디선가 바람이 불고 호수에는 오리들이 놀고 있다. 갑자기 가슴이 저려온다. 파리의 가을이 너무 아름다워서일까?(47쪽)” 사실 저 역시 해외출장에 나설 때면 노트북을 메고 가서 하루 일정뿐 아니라 그날 느꼈던 점들을 소상하게 기록하고는 있습니다만, 그것들이 누군가에게 읽힐만한 수준이 아니고 누군가에게 제 삶의 흔적을 남겨두는 정도의 의미를 부여하고 있습니다.  

 

파리에서 아폴리네르, 모파상, 마네, 피카소 등 다양한 예술가들을 만나고 있는데 화두는 매독이 중심이 되고 있습니다. 19세기 유럽의 예술가들 뿐 아니라 사료계인사들을 괴롭힌 질병입니다. 이 병은 특히 뇌신경계를 침범하여 치매를 비롯한 다양한 정신질환을 일으키는 고급스러운 병이었는데, 이들에 대한 질병의 기록이 현대의학의 관점에서 얼마나 정확하게 재현할 수 있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간혹 과거 유명인사의 사인을 추측하는 내용이 뉴스를 타고 전해지곤 합니다만, 그것은 단순한 가십거리에 불과하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대부분의 그런 질환들은 현대의학으로 치료가 가능해졌기 때문이고 그들은 이미 역사 아니면 추억의 일부에 불과하기 때문일지 모릅니다. 다만 질병이 그들의 삶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당시 질병으로 고통받은 그들에 대한 사회적 시각이 어떠했는지 등에 관한 일까지도 이해할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되는 것 같습니다.  

 

또 한 가지는 김교수님 덕분에 그동안 원인을 찾지 못하던 제 술버릇을 고칠 수 있는 보너스까지 챙길 수 있어 감사드립니다. 돈키호테의 수면장애에 대한 설명부분입니다. “돈키호테가 한 손에 검을 쥐고 마치 적군과 싸우듯이 마구 휘두르는 와중에도 돈키호테의 눈은 계속 감겨 있었다. 왜냐하면 그는 계속 자는 중이었고 꿈속에서 거인과 싸우고 있었기 때문이다.(81쪽)” 렘수면이 진행되는 동안 ‘렘수면 장애’환자는 팔다리를 마구 휘두르거나 소리를 지른다고 합니다. 제가 술이 조금 과한 날에는 자는 동안 심한 잠고대를 한다고 아내가 주의를 주고 있는데, 평소 무의식수준으로 눌려 있던 그 무엇인가가 음주로 인하여 억눌림이 풀리면서 의식으로 튀어 오르는 모양입니다. 최근 들어 금주를 결심한 일은 참 잘한 것 같습니다.  

 

여행을 할 때는 현지에서 볼거리를 찾아다니는 과정도 물론 중요합니다만, 여행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찾아볼 것들을 정리하여 일정에 잘 짜 맞추도록 계획하는 일이 더 중요하고 재미있습니다. 물론 계획한 것과 현지에서 마주치는 상황이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습니다만, 적지 않은 비용과 시간을 들여서 방문하는 곳에서 보다 많은 것을 보고 경험하는 것이 중요하다 생각합니다. 그런 점에서 본다면 해외여행의 기회를 최대한 활용하여 식견을 넓히고 그 경험을 다른 사람과 공유하기 위하여 책으로 써내는 노력을 아끼지 않으시는 김종성교수님의 남다름에 감탄하게 됩니다. 문학과 예술에 관심이 많으신 분들에게는 색다른 면에서의 새로운 것들을 알게 되는 기회가 될 책이라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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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물이란 무엇인가 태학산문선 102
심노숭 지음, 김영진 옮김 / 태학사 / 200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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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고문학을 다룬 책을 몇 차례 읽을 기회가 있었습니다. 아무래도 한문을 제대로 공부한 적이 없기 때문에 많은 것을 얻지는 못했지만 무언가 울림을 느꼈던 것도 사실입니다. 그것은 정민, 안대희님께서 태학산문선 발간사에서 “옛사람들은 무슨 생각을 하며 살았을까? 그때 그들이 했던 고민은 지금 우리와 무관한 것일까? 혹 그들의 글쓰기에서 지금 우리의 문제에 접근하는 실마리를 열 수는 없을까?(4쪽)”라고 지적한 것과 같은 맥락이었을 것 같습니다. 두 분은 진정한 의미의 ‘옛날’이란 언제나 살아있는 ‘지금’일 뿐이므로 옛글과의 만남이 우리의 나태해진 정신과 무뎌진 감수성을 일깨우는 가슴 설레는 만남의 자리가 되었으면 하는 결론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심노숭 산문선 <눈물이란 무엇인가>를 읽게 된 동기는 옛사람들이 슬픔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했는가를 찾아가다가 읽게 된 전송열교수님의 <옛사람들의 눈물>에서 소개하고 있는 심노숭의 ‘눈물이란 무엇인가(淚原)’라는 글의 일부를 읽고 놀랐기 때문에 그 원문을 읽어보고자 해서입니다. 심노숭은 상사(喪事)가 생겨 초빈(草殯)으로부터 시묘(侍墓)에 이르기까지 어떤 때는 한 번 곡하고도 눈물이 나다가 어떤 때는 천백 번 곡해도 눈물 한 방울 나지 않을 때가 있음을 기이하게 여겨 그 연유에 따져본 글을 짓게 되었다고 합니다.

“눈물은 눈에 있는 것인가? 아니면 마음(심장)에 있는 것인가?(51쪽)”라는 의문으로부터 글을 시작하고 있습니다. 당시 우리의 의학수준으로 해부학이나 생리학에 대한 지식이 없을 때이기 때문에 눈물을 흘리는 과정을 과학적으로 이해할 수 없었을 것임에도 불구하고 심노숭이 찾아들어가는 과정은 다분히 철학적이지만 과학적이기도 합니다. 다만 동양의학이 뇌의 기능에 대한 지식이 전무했기 때문에 정신이라고 보이는 마음이 뇌가 아니라 심장에 있다고 추정하고 논지를 전개하고 있다는 것이 차이라 하겠습니다.

재미있는 것은 “마음을 비유하자면 땅이고 눈은 구름이다. 눈물은 그 사이에 있으니 비유하자면 비와 같다.”고 한 점입니다. 얼마 전에 읽은 <마르코스와 안토니우스 할아버지>에서 인용하고 있는 멕시코 설화에서 세상을 만든 신들의 꿈인 구름들 가운데 하나가 “자신들은 어디에서 비롯되었는지, 어떻게 해서 세상을 만든 신들이 자신들로 변했는지 떠올리게 되었다. 그러자 그 구름의 고통이 눈물로 변했다. 일곱 번째 구름은 그 눈물 한 방울을 떨어뜨렸다. 최초의 신들은 일곱이었는데, 일곱 구름은 바로 땅을 위한 빛이 되려고 했던 신들의 바람이고 소망이었던 것이다.(75쪽)”는 것을 깨닫게 되었는데 그 눈물이 비가 되었다는 점에서 심노숭의 생각과 맥을 같이 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심노숭은 기(氣)의 감응으로 비가 하늘에서 내리는 것이므로 “눈물은 마음으로부터 나오고 또 눈으로부터 나오는 것이다.(52쪽)”라는 결론에 도달하게 됩니다. 어떻습니까? 멋있는 해석이 아닙니까? 자신이 “제사에 임해서 곡(哭)을 해서 눈물을 흘리면 제를 지냈다고 여겼고 그렇지 않으면 제사를 지내지 않은 것과 같다고 여겼으며, 때때로 느꺼움이 있어 눈물이 나면 신이 내 곁에 왔구나라 여기고, 그렇지 않으면 황천길이 멀구나하고 생각했다.(53쪽)”고 하니 조금은 지나침이 있기는 하지만 자신의 마음이 고인을 생각함에 있어 진심으로 애도하면 뜻이 통하여 눈물이 나온다고 생각한 것 같습니다.

심노숭이 이처럼 슬픔과 눈물에 대하여 깊이 천착한 것은 “아내를 잃고 너무 슬퍼하는 자는 세상에서 비웃는 까닭에 아내를 잃은 자는 풍속을 두려워하여 그 슬픔을 숨긴다.(17쪽)”던 조선조에서 무려 26제의 시와 23편의 문을 남겨 아내를 애도하였다고 해서 참으로 독특하다고 합니다만, 그만큼 감성이 풍부하였기 때문이 아닐까 싶습니다.

심노숭의 산문집을 옮긴 김영진교수님의 해제라고 할 ‘심노숭론-조선 후기 한 문인의 독왕고래(獨往孤來)’를 보면 심노숭은 역대 문인 가운데 소동파와 원진․백거이를 가장 흠모했다고 합니다. 심노숭(沈魯崇)의 본관은 청송(靑松), 자는 태등(泰登)으로 효종 때 영의정을 지낸 심지원(沈之源)의 7대손이라고 합니다. 부친은 영·정조 연간의 문신이며 정변록(定辨錄)이란 당론서를 남긴 심낙수(沈樂洙)입니다. 1790년 진사가 되었으나 1801년부터 6년간 경상남도 기장에 유배되는 등 정치적 격랑 속에 불우한 장년기를 보냈다고 합니다.




김영진교수님은 한문으로 쓰여진 심노숭의 산문들 가운데 47편을 골라 우리말로 옮기고 이해하기 쉽도록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원문에서 인용하고 있는 고사 혹은 옛문인에 대한 설명도 각주로 달아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하고 있습니다. 또한 책의 말미에는 원문을 붙여 대조할 수 있도록 배려하고 있습니다.

47편의 글은 제1부 도망문, 제2부 인물전과 일화, 제3부 산해필희, 제4부 문예론으로 나누고 있습니다. <옛사람들의 눈물>에서도 소개드렸습니다만, 도망문(悼亡文)은 돌아가신 분을 애도하는 글입니다. 때로는 형식적으로 짓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고 합니다만, 조선 후기로 내려오면서는 도망문이 문예문으로의 완성도를 갖추어 갔다고 하는데, 심노숭의 도망문이 주목을 받는 이유는 ‘눈물이란 무엇인가’에서 토로하고 있는 것처럼 제사 때나 죽은 이를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평소에 가지고 있는 죽은 이에 대한 절절한 마음을 담아 진실한 감정으로 죽은 이를 기리는 것이 중요하다는 생각이 그의 도망문에 담겨있기 때문이라 하겠습니다. 죽은 아내에 대한 심노숭의 절절함은 아내와 이별한 지 24년이 지나 55세라는 만년에 아내의 무덤을 찾아 ‘현감 부임 길에 다시 아내 무덤 앞에 서서’라는 글에서 여전히 나타나고 있습니다.

제2부 인물전과 일화에서는 당시의 사회상을 엿볼 수 있는 사람에 대한 기록문으로 들은 이야기에 자신의 생각을 짧게 담아내고 있습니다. 제3부 산해필희(山海筆戱)는 “평생 바둑, 장기 잡희(雜戱) 등을 알지 못하더니 궁하게 지냄에 할 일도 없고 근심으로 마음이 아프기도 하고, 두려워 몸을 움츠리기도 하여 이러한 것을 잊기 위해 한결같이 붓에다 부치미 이 또한 희(戱)일 뿐이다. 산과 바다 사이에 거처가 있어 기록한 것을 ‘산해필희(山海筆戱)’라 이름한다”고 적은 서두처럼 요샛말로 하면 꽁트에 해당하는 글도 있고, 신변잡기에 해당하는 글도 있습니다만, 앞서 2부에서처럼 인물을 평하는데 있어 자신과 견해가 다른 사람에 대해서는 다소 감정이 실린 듯한 느낌도 없지 않습니다. 하지만 정치적 대립이 심각하던 시절에 권력의 중심에 있으면서도 ‘근래 벼슬길의 병폐’라는 제목의 글에서는 벼슬자리가 특정집단에 의하여 장악되고 있는 점을 과감하게 지적한 것은 대단하다 하지 않을 수 없을 것 같습니다.

제4부는 요샛말로 평론이 될 것 같습니다. 시, 문학, 미술 등 다양한 분야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적고 있는데, 예를 들면 “나는 또 시는 마땅히 심력(心力)을 써야지 기력(氣力)을 써서는 안된다고 생각하였다. 기력을 쓰면 자취가 남고, 자취가 남으면 중정화평의 도에서 멀어지게 된다.”고 시작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피력하고 있는데 재미있는 것은 상반되는 견해를 가진 아우 태첨과 논쟁을 즐긴 것 같습니다. 단원의 속화에 대한 그의 견해도 재미있습니다. “속화(俗畵)는 화가의 화재(畵材) 가운데 가장 하류의 것이다. 이런 까닭에 비록 빼어난 가량을 발휘해도 사람들이 다 천시한다. 하지만 진실로 묘(妙)의 경지에 나갔다면 산수화이든 속화이든 가릴게 무엇이 있는가?”라고 하였으니 예술에 대하여 열려있는 그의 생각을 읽을 수 있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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