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인 구달의 생명 사랑 십계명
제인 구달.마크 베코프 지음, 최재천.이상임 옮김 / 바다출판사 / 200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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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제인 구달의 생명사랑 십계명>은 지난 해 예스24 다락방 페스티벌 행사에서 같이 했던 기부 이벤트를 통해서 구입한 책입니다(http://blog.joinsmsn.com/yang412/11858730). 오랫동안 책상머리에 두고 눈팅만 해오다가 이번에 드디어 완독에 들어갔습니다.

잘 알려진 것처럼 1934년 영국 런던에서 태어난 구달 박사는 "타잔을 읽으면서 타잔의 애인인 제인보다 내가 더 잘할 수 있을텐데라고 생각했다"고 회고할 정도로 아프리카 밀림을 동경했다고 하는데, 저 역시 제인하면 타잔의 애인이 먼저 떠오른다고 고백해야 할 것 같습니다. 1957년부터 아프리카 케냐에서 시작한 침팬지 연구는 1960년 여름에부터는 탄자니아 곰베로 이어졌고, 1965년 케임브리지 대학교에서 동물행동학을 연구하여 박사학위를 받은 후 탄자니아로 돌아와, 1975년에 설립한 제인 구달 연구소를 통하여 야생 침팬지에 대한 연구에 몰입하였다고 합니다.

구달 박사는 야생동물에 대하여 보다 많은 사람들이 관심을 기울여줄 것을 촉구하기 위하여 세계 여러 나라를 방문하고 있는데, 1996년에는 우리 나라를 처음으로 방문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이 책을 번역하신 최재천 교수의 말씀에 따르면 한국에 영장류연구소가 세워지면 손수 침팬지를 데려오겠다고 약속을 하셨다(25쪽)고 하는데, 제가 2004년부터 추진하던 영장류연구소가 퇴직하면서 표류하면서 결국은 사람들의 관심을 잃고 말았던 일이 생각나서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습니다.

구달 박사는 서문을 통하여 “우리가 지구에서 함께 살아가고 있는 다른 여러 생물들에게 좀 더 윤리적인 태도를 갖고 자연 세계를 가까이 느끼자는 내용(8쪽)”으로 이 책의 공저자인 마크 베코프 박사와 함께 제안하고 있는 “열 가지 계명을 생활 속에서 실천한다면, 우리의 관점이 달라질 뿐 아니라, 이 지구상에서 살아가는 방식이 달라질 것이다. 이 십계명은 간단하지만 그 의미는 심오하다. 한 마디로 요약하자면, 십계명은 ‘모든’ 생명체를 존중하며 살 것에 대한 내용을 담고 있고, 자연 지킴이로서의 우리 역할을 분명히 해 줄 것(21쪽)”이라고 믿고 있답니다.

십계명하면 구약성서 출애굽기에 나오는 예언자 모세가 떠오릅니다. 기원전 13세기 경 이집트에서 노예로 고통받던 히브리 민중을 이끌고 이집트를 탈출하여 가나안땅으로 향하는 길에 홍해도 도달했을 때 이집트 병사들이 급박하게 뒤쫓는 절체절명의 순간 홍해를 가르는 기적을 그려내던 영화장면도 생각납니다. 그리고 가나안 땅으로 이르는 길이 너무 멀고 험해서 흔들리는 민중을 바로 세우기 위하여 시나이 산에서 계약 의식(儀式)을 통해 십계명을 받아들던 장면이 지금도 선합니다. 그러면 그 구달과 베코프의 <열 가지 계명>을 살펴보겠습니다.  

첫 번째 계명 : 우리가 동물사회의 일원이라는 것을 기뻐하자

두 번째 계명 : 모든 생명을 존중하자

세 번째 계명 : 마음을 열고 겸손히 동물들에게 배우자

네 번째 계명 : 아이들이 자연을 아끼고 사랑하도록 가르치자

다섯 번째 계명 : 현명한 생명지킴이가 되자

여섯 번째 계명 : 자연의 소리를 소중히 여기고 보존하자

일곱 번째 계명 : 자연을 해치지 말고 자연으로부터 배우자

여덟 번째 계명 : 우리 믿음에 자신을 갖자

아홉 번째 계명 : 동물과 자연을 위해 일하는 사람들을 돕자

열 번째 계명 : 우리는 혼자가 아니다. 희망을 갖고 살자  

 

열 개의 계명은 통하여 두 저자들이 오랜 세월 동물을 연구하면서 얻게 된 동물에 대한 사랑에 공감하게 될 것입니다. 각각의 계명을 설명하기 위하여 다양한 사례와 연구결과들을 적절하게 인용하고 있어 누구나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 가운데는 우리에게 감동을 주는 자연 다큐멘터리 영화가 제작되는 과정에서 오히려 동물을 학대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는 점 같이 우리가 미처 모르던 놀라운 사실들도 적지 않습니다(61쪽). 인류의 생명을 구하기 위한 약물개발과정 등에서 사용되는 실험동물이 남용되거나 학대받는 상황에 대한 저자들의 견해에도 관련 분야에 종사했던 경험을 되살려 보면 충문히 공감하게 된다는 말씀을 드리지만, 이런 실험들을 인간세포를 이용하거나 컴퓨터로 시뮬레이션을 하거나 아니면 자원하는 사람을 대상으로 실험하는 방안에 대해서는 동의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다른 동물이라면 어땠을까 한번 상상해보자. 영장류, 개, 돌고래, 박쥐, 비둘기, 혹은 지렁이, 혹은 집게벌레였다면 말이다. 아마도 여러분은 집게벌레가 된 자신을 상상하면서 미소를 지었을 것이다.(88쪽)”는 저자의 상상이 틀렸을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합니다. 오히려 카프카가 <변신>을 통해서 표현하고 있듯이 어느 날 아침잠에서 깨었더니 자신이 벌레로 변신되어 있었다면 아마도 놀라서 숨이 끊어졌을 것 같습니다.

매 계명을 시작하면서 저자들은 계명이 의미하는 바를 짧게 요약하고 있고, 마지막에는 저자들의 희망을 담은 메시지로 정리하고 있습니다. 처음 책을 읽을 때는 잘 들어나지 않았지만, 검은 색의 글씨는 구달박사가 황록색의 글씨는 베코프박사가 쓴 내용으로 보입니다. 두 분의 말씀이 별 다른 설명이 없이 섞여서 이야기가 진행되다 보니 다소 연결이 미흡한 부분도 없지 않은 듯 합니다.

어린이들에게 동물사랑을 배우도록 하기 위하여 다양한 프로그램을 제안하고 있습니다만, 애완동물에 대하여 크게 매력을 느끼지 못하고 있는 저로서는 조금은 덤덤한 느낌이란 말씀을 드립니다. 화석연료를 대체할 전기자동차 등을 이용해야 한다는 저자들의 주장도 전기생산에는 화석연료도 어느 정도 참여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라는 점도 지적해야 할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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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리게 산다는 것의 의미 2 - 바람 부는 길에서 동문선 현대신서 93
피에르 쌍소 지음, 김주경 옮김 / 동문선 / 200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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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나는 지금 어느 길 앞에 서 있다. 이 길이 나를 어디로 데려갈는지, 그것은 나도 모른다. 아니, 어디론가 데려가 주기는 할 것인지조차도 알 수 없다. 하지만 이 길이 나를 무언가로부터 자유롭게 해주리라는 것은 분명히 알 수 있다.(9쪽)”
일찍이 느림의 미학을 우리에서 설파한 피에르 쌍소의 느림에 관한 두 번째 이야기는 ‘바람부는 길에서’라는 부제처럼 ‘길’이 화두가 되고 있습니다. 길에 대한 이야기를 앞에 인용한 글로 시작하고 있습니다. 제가 살 수 있는 삶의 반환점을 돌고 있다고 생각되는 시점에서 돌이켜보면 어느 날 세상에 태어난 우리네 삶이 바로 인생이라는 먼 여행길을 떠나는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래서 “인생은 나그네 길 어디서 왔다가 어디로 가는가 구름이 흘러가듯 떠돌다 가는 길에…”하는 최희준씨의 노래 하숙생의 가사말이 가슴을 적시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쌍소는 다양한 길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우리에게 말하고 있습니다. 시골 동네길로부터 숲속에 난 작은 오솔길, 자전거를 타고 가는 길, 기찻길, 고속도로, 그리고 그 길에 얽힌 이야기들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그가 전하는 말을 듣고 있다 보면 바로 내가 그런 길을 걸은 기억이 튀어나와 깜짝 놀라게 합니다. 먼저 ‘자전거를 타고 가는 길’을 따라가 보겠습니다. 중고등학교에 다닐 적에는 걸어서 20~30분 걸리는 학교엘 자전거를 타고 다니고 싶어 자전거를 사달라고 많이 졸랐던 기억이 있습니다. “청소년기의 우정, 그리고 오늘날엔 사라져 버린 시골의 들판은 얼마나 자전거와 잘 어울리는가!”라고 시작하는 자전거길에 대한 쌍소의 이야기야말로 저의 청소년기의 바람과 꼭 맞아 떨어지는 것입니다. 친구들과 같이 자전거를 타고 들판으로 동네를 넘나들면서 내달리면서 삶을 공감하는 일이야말로 청춘을 아름답게 하는 일이 아닐까 싶습니다. 하지만 언제나 낭만만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중2때 던가 어느 일요일에 군산에서 전주까지 42km정도 되는 길을 “자전거로 한 번 갔다 와 볼까?”하는 친구의 바람에 우쭐해서 군산을 출발했지만, 절반인 익산에도 가보지 못하고 되돌아오고 말았는데 돌아오면서 힘이 빠져 헉헉대다가 지나는 자동차에 사고가 날 뻔하기도 한 적도 있습니다.
요즈음은 기차를 타는 일이 그리 많지는 않습니다만, 기차여행, 특히 완행열차에 얽힌 추억은 참 많습니다. 제 기억에 가장 또렷하게 남아 있는 기차여행은 남원에서 근무할 때 갑자기 쏟아진 눈 때문에 차를 두고 기차를 타고 서울로 향하면서 차창 밖으로 내다보이는 설경이 너무 황홀했을 때입니다. 그리고 미국 미시간주에 있는 Sault Ste Marie에 있는 철도길이 가을철 단풍과 겨울철 설경이 참 좋다는 이야기를 들었지만 가보지 못해서 지금도 아쉬운 곳으로 남아 있습니다. 쌍소는 기찻길의 매력이 제대로 살아나려면 아름다운 풍경을 해쳐서는 안되고 그 아름다운 풍경 속으로 자연스럽게 들어가야 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 점을 고려한다면 동해안을 따라 달리는 기찻길도 승객에게 큰 위안을 주는 길이라고 생각합니다. 언젠가는 가보아야 할 길이기도 하구요.


기찻길과 관련한 쌍소는 미처 확인하지 못하고 기찻길 근처에서 밤을 보내면서 고통스러웠던 기억을 말하고 있습니다만, 저 역시 캐나다를 여행하면서 나이아가라폭포 근처에서 하루밤을 묵게 되었을 때 바로 옆으로 기찻길이 지나는 것을 모르고 모텔을 정하는 바람에 밤늦게까지 기차가 지날 때마다 잠에서 깨는 바람에 다음날 운전하는데 애를 먹었던 추억도 지금은 아름답기만 합니다.

고속도로에 대한 쌍소의 이미지는 상당히 부정적인 것 같습니다. 고속도로의 건설 자체가 자연파괴적인데다가 빠른 이동을 목표로 하기 때문에 느림의 미학과는 거리가 있다고 보는 것 같습니다. 옛날에는 지금처럼 과속감시카메라가 없던 시절에는 교통순경이 과속을 감시하였기 때문에 위험지역을 제외하고는 거의 날아다니다시피 운전을 하기도 했습니다. 요즈음은 과속감시카메라가 많아졌다고는 해서가 아니라 과속을 하는 경우에는 아무래도 바짝 긴장해야 하는 것이 싫어지는 탓에 규정속도를 지키면서 여유를 보이게 되는 것 같습니다. 굳이 “인간의 모든 불행은 단 한 가지, 고요한 방에 들어앉아 휴식할 줄 모른다는 데서 비롯한다.(217쪽)”는 파스칼의 경구를 기억하지 않더라도 말입니다.

씽소는 특히 시골길을 예찬하고 있습니다. “흔히 시골길은 오르막길과 내리막길로 기복이 심하다. 기복이 많은 길을 걷고 있으면, 지구의 등뼈 위를 걷고 있는 듯한 기분이 든다.(98쪽)”고 한 비유는 정말 묘한 느낌을 가지게 합니다. 몇 해 전부터 아내와 함께 서울 도심 혹은 인근에 있는 야트막한 산책길을 따라 걷고 있습니다. 쌍소가 말하는 지구의 등뼈 위를 걷는 듯한 기분이 드는 코스가 어디일까 되짚어 보았더니, ‘도시 위의 산책로, 능선’이라는 부제를 달았던 안산근린공원에서 백련사에 이르는 능선길이 딱인 듯합니다(http://blog.joinsmsn.com/yang412/11872339). 서울의 도심을 굽어보면서 바위산의 능선을 따라가는 코스는 정말 지구의 등뼈를 밟는 느낌을 얻을 수 있습니다. 아직까지는 산책길을 따라가면서도 더 여유를 부리지 못하고 있는 것이 마음에 걸리고 있습니다만, ‘느림의 미학’을 더 깨우치게 되면 지금보다 더 주위를 살피고 숲을 느끼게 될 것 같습니다.

얼마 전에 읽은 월든에서도 호수의 새로운 발견이 화두가 되었습니다만, 저 역시 마음속에 호수를 담고 있어서 호수를 발견한 쌍소의 생각에 공감하게 됩니다. “그곳의 산들을 비추어 주고 있는 맑은 호수가 하나 필요했다. 마침 그런 호수를 발견하였고, 나는 망설이지 않고 얼음처럼 차가운 물 속에 몸을 담갔다. 그리고 차갑게 얼어버린 깨끗한 몸이 되어 물 속에서 나왔다. 그러자 나를 친절하게 받아 준 이 지구에게 다시 감사하다는 생각이 들었다.(139쪽)”라는 쌍소의 말을 듣다보면, 느림의 미학은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모든 것에 감사하는 마음이 절로 들도록 만드는 것 같습니다.

제가 태어나던 1954년에 개봉된 <길; La Strada>이라는 영화가 있습니다. 명화극장을 통해서 보았는지 기억이 가물거립니다만, 트렘펫으로 연주되는 애절한 주제가 ‘젤소미나의 테마’는 리노 로타가 작곡한 것으로 듣는 이의 마음에 깊은 여운을 남깁니다. 스토리는 떠돌이 차력사로 나오는 안소니 퀸이 젤소미나라는 지능이 조금 모자라는 여인을 사서 조수로 데리고 다니다가 써커스단에서 동료와 갈등을 빚는 과정에서 젤소미나와 헤이지게 되는데 세상을 떠돌아다니다가 젤소미나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서는 나는 외톨이라고 절규하면서 후회한다는 스토리라고 합니다. 이 영화에서 나오는 ‘길’의 의미는 인생의 험한 세파를 의미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평화롭던 어느 일요일 갑자기 몰아닥친 전쟁을 피해서 목적지가 어디인지도 모를 피난길에 올라야 했던 우리 부모님들이 겪은 것처럼 우리의 아픈 역사에서도 ‘길’은 깊은 상처로 남아 있습니다. 그런데 쌍소 역시 같은 경험을 말하고 있습니다. 아마도 2차 세계대전 기간이었을 것으로 생각합니다만, “그해 6월의 40일간. 국가적인 재난의 시간에, 우리들이 기도하고 신음하고 사랑하고, 또 먹고 자기도 했던 곳이 바로 길 위였다.(26쪽)” 아마 우리 부모님들도 같은 사정이었을 것 같습니다. 그래도 쌍소가 길은 샘이고 빛이라고 생각한 것처럼 우리 부모님들도 길 위에서 보내야 했던 위기의 순간에도 희망을 버리지 않아 결국은 오늘날의 번영을 이루어내어 우리에게 전해주셨다는 것을 늘 기억하고 감사해야 하겠습니다.

“나는 걷는다. 걸으면서 지평선에 점점 가까이 가고 있는 것이라 믿고 있지만, 절대로 지평선에 닿을 순 없을 것이다.(271쪽)”라고 쌍소는 말하고 있습니다만, 살아간다는 것이 어떠한 형태로든지의 길을 걷는 것이라고 한다면 걷고 걷다보면 언젠가는 생을 마감하는 지평선에 이르게 될 것이니 서두른다고 피할 수 없는 죽음이라면 삶을 여유있게 즐기는 태도 역시 중요할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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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술의 충격 - 테크놀로지와 함께 진화하는 우리의 미래
케빈 켈리 지음, 이한음 옮김 / 민음사 / 201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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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평론가 조우석님은 케빈 켈리의 저서 <기술의 충격>를 읽고, 한 단어로 압축해서 “뷰티풀!”이라 하였습니다(http://blog.joinsmsn.com/yang412/12239882). 저도 흉내를 내보려 머리를 쥐어 짜 보았습니다만, 그 보다 더 좋은 표현을 찾아낼 수 없었습니다.

‘제1장 의문을 품다’에서 저자는 대학을 중퇴하고 기술과는 동떨어져 보이는 아시아의 오지를 돌아다닌 일부터 귀국해서도 미국대륙의 횡단여행에 이르기까지 10년의 세월을 보낸 끝에 자신이 기술의 본질을 잘 모른다는 점과 기술과 모순되는 관계를 맺고 있다는 점을 깨닫고 기술에 관한 탐구에 다시 7년여의 시간을 투자해서 정리한 결과가 바로 <기술의 충격>이라고 합니다. 솔직하게 말씀드리면 기술의 과거 현재 그리고 미래상에 대한 저자의 열린 시야는 한마디로 ‘충격!’ 그 자체로 다가왔습니다.

이 책에서는 테크늄(technium)이라고 하는 생소한 단어를 자주 만나게 됩니다. 그는 “우리 주변에서 요동치는 더 크고 세계적이며 대규모로 상호 연결된 기술계(system of rechnology)”를 의미하는 단어로 테크늄이라는 단어를 만들어냈다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덧붙여서 “테크늄은 반질거리는 하드웨어를 넘어서 문화, 예술, 사회 제도, 모든 유형의 지적 산물들을 포함한다. 그것은 소프트웨어, 법, 철학개념 같은 무형의 것도 포함한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점은 그것이 더 많은 도구, 더 많은 기술 창안, 더 많은 자기 강화연결을 부추기는, 우리 발명품들의 생성충동을 포함한다는 것이다.(21쪽)”라고 정의하고 있습니다.

심지어 저자는 지구상에 존재하는 생명체를 나누는 6가지 생명계에 추가하여 테크늄을 제7의 생명계로 분류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지구상에 생명체가 나타나 꾸준한 진화과정을 거쳐서 현재에 이르게 된 것처럼 테크늄 역시 생명체 이전의 우주가 생성된 이래 점진적이고 꾸준한 진화를 거쳐서 현재에 이르렀으며 현대에 들어서면서 그 진화의 속도가 빨라지고 있고 앞으로는 상상할 수 없을 정도의 빠르기로 진화할 것이라는 예측을 내어놓고 있고, 그 근거를 제시하고 있습니다. 그는 “테크늄은 이제 우리 세계에서 자연처럼 위대한 힘이며, 테크늄에 대한 우리의 반응도 자연에 대한 반응과 비슷해야 한다.”고 하며 그러기 위하여 기술의 행동을 이해하고 기술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파악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그런 이유로 저자는 이 책의 제목을 <What technology wants (기술이 원하는 것)>이라고 했나 봅니다. 하지만 저는 번역된 책의 제목처럼 <기술의 충격>이 더 마음에 와 닿는 것 같습니다.

제7의 생명계인 테크늄이 다른 생명계와의 중요한 차이점은 두 가지라고 하는데, “생명에서는 형질의 혼합이 시간상 ‘수직적으로’ 일어나는데 반하여 테크늄에서는 주로 수평으로 일어난다는 점과 유기체의 진화는 점진적인 변형이 규칙이고 혁명적인 단계는 거의 없는데 반하여 기술은 앞으로 도약하고, 갑작스럽게 뛰고, 점진적인 단계를 건너뛸 수 있다는 점이지만, 태어난 것의 진화와 만들어진 것의 진화 사이의 가장 큰 차이점은 생물학상의 종과 달리 기술의 종은 멸종하는 일이 거의 없다는 점(67쪽)” 라고 합니다.

캘리는 기술이 어디로 향하는지 알기 위하여 먼저 그것이 어디에서 왔는지 알아보려 과거로의 여행을 시작했지만 거슬러 올라갈수록 그것은 더 먼 과거로 물러나고 있다고 생각하고 인류기원부터 추적을 시작하여 결국은 생명체의 기원으로 거슬러 올라가고 있습니다. 물론 과거로 거슬러 올라갈수록 기술의 질이나 양은 보잘 것 없었지만, 인류를 비롯하여 생명체가 기술없이 생활하던 시기가 있었는가 살펴보면 절대로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선대로부터 본능적으로 전달되던 무형의 기술이 한 단계 도약하게 된 계기는 언어가 만들어진 것이 첫 번째 획기적인 계기가 되었으며, 다시 오랜 세월이 지난 다음 문자가 만들어져 유형의 기록을 남기게 되면서 두 번째 도약이 이루어지고, 다시 인쇄술이라고 하는 문서의 대량생산이라는 기술적 진보에 힘입어 세 번째 도약이 가능했다고 보고 있습니다.

이러한 유형의 기록은 기술에 대한 인간의 생각을 상호교류하여 발전시키는 동력이 되었던 것인데, 최근 들어 기술의 폭발적 발전은 컴퓨터와 인터넷으로 이를 연결하는 기술이 개발되면서 예측이 불가능할 정도의 빠른 속도로 기술이 발전하게 될 것이라는 구체적인 데이터를 토대로 예측하고 있습니다. 세계의 모든 컴퓨터가 온라인에 접속한 가상 슈퍼컴퓨터를 가정하면 10억대의 온라인 개인용 컴퓨터가 연결되어 엄청난 양의 정보가 교환되는데, 지구를 하나의 생명체로 보는 가이아 이론을 적용할 수도 있겠다 보여집니다. 따라서 저자는 테크늄은 생물학적 진화가 장구한 세월에 걸쳐 추진해온 자기 조직화 과정을 지금 증폭하고 확대하고 가속시키고 있어 ‘가속된 진화’단계에 있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저자는 새로운 기술이 가지고 올 수 있는 치명적 상황에 대하여 인용한 '예방의 원칙(precautionary principle)'에 눈길이 끌렸습니다. 2008년 촛불정국을 뜨겁게 달구었던 이슈 가운데 ‘사전예방의 원칙’이 있었던 기억이 있습니다. 이것은 환경부문에 대한 1992년 지구 정상회의에서 리우선언의 일부로 고안되었는데, 원래는 “철저한 과학적 확신이 부족하다고 해서 그것이 환경파괴를 예방할 비용 효율이 높은 수단을 미룰 근거로 쓰여서는 안된다.(301쪽)”라고 권하는 내용이었다고 합니다. 이 구절은 그 후로 “불확실하지만 상당한 피해를 입힐 가능성을 보이는 활동들은 그 활동의 옹호자가 그것이 감지할 수 있는 피해 위험이 전혀 없다는 것을 보여주지 못한다면 금지되어야 한다.(301쪽)”로 보완 강화되었다고 합니다. 이에 대하여 저자는 다소 비판적인 시각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그것은 “예방 원칙이 정말 아주 잘하는 것이 하나 있다. 기술발전을 멈추는 것이다.(302쪽)”는 맥스 모어의 언급이나, “우리는 예방 원칙이 나쁜 방향으로 이끌기 때문이 아니라, 그것이 가치가 있음에도 어떤 방향으로도 이끌지 않기 때문에 그것에 이의를 제기해야 한다.(303쪽)”는 카스 선스타인의 주장을 인용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그렇다는 말씀입니다. 모든 기술은 어딘가에서 해로운 영향을 나타낼 수 있기 때문에, 절대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는 에방원칙의 논리에 따른다면 어떤 기술도 허용해서는 안되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저자는 “바로 여기가 우리의 선택이 개입되는 지점이다. 신기술의 진화는 불가피하다. 우리는 그것을 멈출 수 없다. 하지만 각기술의 특징은 우리에게 달려있다.(323쪽)”고 정리하고 있는데, 기술에 담을 쌓고 살아왔던 저자의 생각이 전면수정된 것은 기술의 역사에 대한 깊은 사유의 결과라 보여집니다.

참고로 저자가 제시한 우주의 두 종류 게임을 소개합니다. 바로 유한게임과 무한게임입니다. 유한게임은 카드게임, 포커판, 복권, 축구와 같은 스포츠처럼 누군가 이길 때 끝이 나는데 반하여 무한게임은 진화, 생명, 마음, 테크늄과 같이 게임을 계속 진행하기 위해 하는 것이라고 합니다.(428쪽) 모든 참가자가 가능한 오래 게임을 하도록 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변하지 않는 규칙을 가지고 하는 유한게임과는 달리 무한게임은 규칙을 바꿔야만 계속 진행할 수 있고 규칙을 상대로 게임을 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저자는 여기에서 창조에 관한 자신의 생각을 비치는데 솔직하게 제대로 이해되지 않아 깊이 언급할 수 없다는 점을 고백합니다.

끝으로 사족이 될 것 같습니다만, 언젠가 신문기사로도 소개되었던 것이 기억납니다만, 저자가 기술의 진화모델을 설명하는 자료로 동아시아지역의 야간 위성사진에서 밝게 불빛이 점멸하는 인근국가들과는 달리 평양지역을 제외하고는 캄캄한 북한지역을 인용하여 현대기술이 부재한 국가라고 꼬집고 있어(224쪽) 안타까움보다 아픔을 느꼈다는 말씀을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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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원에서 죽는다는 것 - 개정판
야마자키 후미오 지음, 김대환 옮김 / 잇북(Itbook) / 201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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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년 전 쯤의 일입니다. 치매에 대한 기획취재를 지원하기 위해서 KBS TV취재팀과 함께 미국을 방문할 기회가 있었습니다. 인터뷰 대상을 섭외하고 인터뷰를 지원할 뿐 아니라 인터뷰 내용을 번역하는 일까지 일인 몇역을 했는지 헤아리기도 어려운 여행이었습니다. 당시 인터뷰를 한 분이 자신이 쓴 책을 건네주어 받았습니다. 눈물에 관한 책인데 읽어가다 보니 일반인이 읽어도 재미있겠다 싶어 번역을 해서 몇몇 출판사와 접촉을 했지만 별반응을 얻지 못했습니다. 그 이유는 출간된 지 10년이 넘은 탓이 최신지견이 부족하다는 이야기였습니다. 개정판이 나온다면 고려해보겠다는 것이었지만, 원저자는 개정판을 낼 뜻이 없었습니다. 번역한다고 공연히 헛힘만 썼습니다. 재미있는 것은 번역한 내용의 일부가 방송소재로 나오더라는 것입니다. 아마도 작가가 번역원고를 인용한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은 했지만, 확인할 방법이 없었습니다.

느닷없이 옛날이야기를 끄집어내는 이유는 야마자키 후지오 선생이 쓴 <병원에서 죽는다는 것>을 읽으면서 당시 번역원고출판을 거절당했던 생각이 나서입니다. 이 책을 번역하신 김대환님의 번역후기를 보면 1990년에 처음 출간된 <병원에서 죽는다는 것>을 번역하여 우리나라에 소개한 것이 2005년이었는데, 이번에 개정판을 내게 된 것이라고 합니다. 하지만 번역 원본은 여전히 1990년에 발표된 것으로 되어 있어 후지오 선생이 원본을 가필보완한 것은 아닌 듯 합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의 평균수명은 도 20년 전인 1990년의 69.8세에서 2010년에는 79.4세로 10년이나 늘어났습니다. 또한 노령화속도가 세계에서 가장 빠른 국가로 꼽히고 있습니다. 평균수명이 급속하게 늘어나면서 나타나는 현상 가운데 암환자발생 역시 급속하게 늘어나고 있다는 점입니다. 거꾸로 말하면 우리나라 의료계의 암환자를 치료하는 의료수준이 세계정상급에 진입하여 이제는 새로운 치료법을 개발해내는 위치에 이른 효과가 평균수명연장으로 나타나고 있다는 해석도 가능합니다.

당연히 암환자를 치료하는 기본틀에도 많은 변화가 있다는 말씀을 먼저 드리면서 후지오 선생의 <병원에서 죽는다는 것>에 담긴 이야기들이 우리나라 의료계의 현 상황과는 상당한 거리가 있다는 점을 지적하고자 합니다.

먼저 책의 전편을 통하여 보면, 이 책이 저술될 당시 일본 의료계에서는 암환자가 죽을 때까지 병명을 감추는 것이 일반적인 흐름이었던 모양입니다. 하지만 제 가물거리는 기억으로도 우리나라에서는 당시 환자에게 병명을 알려주고 치료에 적극 동참하도록 요청하는 의사들이 적지 않았다고 생각되며, 지금은 대부분의 의사들이나 환자들도 자신이 암이라는 사실을 직접 확인하기를 원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그 이유는 대부분의 암에서 수술, 항암치료, 방사선치료, 면역요법, 유전자치료 등 다양한 치료법을 적용하고 있어 이제는 암이 불치의 병이라기보다는 만성질환으로 다루는 경향도 있기 때문입니다. 즉 시대의 흐름과 동떨어진 이야기일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건강보험공단을 비롯하여 다양한 기관에서 실시하는 정기검진을 통하여 암을 조기에 발견할 수 있게 되면서 손을 쓸 수 없는 말기암의 빈도가 줄어드는 것도 중요한 요소가 될 것 같습니다.

이 책이 소개될 당시 “인간으로서의 존엄을 지키고 싶다면 절대 병원에서 죽지 말라(292쪽)”고 소개했다고 하는데, 사실 우리는 죽음을 집에서 맞고 장례를 집에서 치루는 전통을 지켜왔습니다. 제가 인턴으로 병원근무를 시작할 무렵 만해도 병원에서 치료받던 환자들이 죽음에 이르게 되면 집으로 모셔가겠다는 보호자의 요구 때문에 인턴선생이 손으로 인공호흡을 시키는 백을 일분에 20회씩 쥐어짜면서 앰뷸런스로 환자집까지 다녀와야 했습니다. 하지만 아파트가 늘어나면서 아무래도 번잡한 장례를 집에서 치러내는 것이 어렵게 되면서 장례식장을 이용하는 것이 대세가 되고 말았습니다. 병원장례식장의 경우는 그 병원에서 돌아가신 분들을 위한 공간도 내기 어려워 오히려 임종 무렵에 병원에 입원하게 된다는 역설적인 이야기도 심심치 않게 들리는 것이 현실입니다.

후미오 선생은 호스피스에 관심이 많다고 하는데, 아마도 호스피스에 대한 사회적 관심을 높이기 위한 목적을 염두에 두고 집필을 하셨다고 보여집니다. 존엄사에 대한 관심이 커지면서 의미없는 연명이 오히려 환자의 안녕과 존엄을 무너뜨린다는 인식이 자리 잡게 되면서 호스피스에 대한 사회적 관심 역시 커지고 있습니다. 일본에서도 재택간호라는 개념이 자리를 잡아가고 있다는 이야기는 얼마 전에 읽은 <애도하는 사람; http://blog.joinsmsn.com/yang412/12263003>에서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일본에서는 여전히 장례를 집에서 치루는 경향이 남아 있는 것 같습니다. 우리나라에서는 건강보험 체계의 요양병원과 요양보험이 지원하는 요양시설이 호스피스에 준하는 역할을 하고 있는데, 죽음을 피할 수 없는 말기 재발암, 전이암 환자들이 남은 삶을 편하게 지낼 수 있도록 적극적으로 치료하는 새로운 개념의 병원이 등장하고 있습니다(http://blog.joinsmsn.com/yang412/12276586).

후미오 선생은 의과대학을 갓 졸업한 인턴선생이 죽어가는 환자를 대상으로 기관 내 삽관을 실습했다는 믿을 수 없는 내용을 고발(?)하고 있습니다.(38쪽) 의사로서 환자를 실험의 대상으로 삼는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노릇입니다. 제 경우도 의과대학을 졸업하고 응급실에서 근무를 시작한 지 얼마되지 않아 기관 내 삽관을 해야 되는 환자를 만나게 되었는데, 선배님의 조언을 들어가면서 별 어려움 없이 성공했던 기억이 있습니다. 지금은 기관 내 삽관을 연습할 수 있는 장비가 개발되어 의과대학 학습과정에서 익힐 수 있다고 합니다. 공연히 의료계에 대한 국민들의 불신을 키울 수 있는 사족에 불과합니다.

장례를 치르려면 의료인이 사인을 기입한 사망진단서를 관할 관청에 제출해야 가능합니다. 그런데 “사망진단서를 확실하게 밝혀내지 않으면 사망진단서를 끊어드릴 수 없습니다.(49쪽)”면서 병리해부(부검이라는 명칭으로 일반화되어 있습니다)를 강압적으로 요구하는 의사가 있다는 고발도 있습니다. 동양권에서는 돌아가신 분의 몸에 칼을 대는 행위가 돌아가신 분을 두 번 죽이는 것이라 해서 거부하는 전통이 오래동안 자리잡아 왔습니다. 물론 최근 들어 보험과 관련하여 혹은 죽음의 원인을 밝혀야 수사에 도움이 되는 변사사건 등처럼 부검이 이루어지는 사례가 적지 않습니다. 사실 현대의학이 여기에 이르게 되는데는 르네상스 이후에 활발하게 이루어진 부검이 지대한 공헌을 하였다는 것이 일반화된 시각입니다. 하지만 영상의학을 비롯하여 다양한 검사법들이 개발되면서 사망원인을 규명할 수 있게 되면서 이들나라에서도 사망후 부검율이 현저하게 낮아지고 있습니다. 특히 부검에 드는 비용은 보험에서 지원되지 않는 나라일수록 더욱 그러합니다. 물론 최근 들어 정확한 진단이 요구되는 치매와 같은 신경계질환의 경우는 부검하는 사례가 늘고 있기도 합니다.

후미오 선생이 읽고 감동을 받았다는 엘리자베트 퀴블러 로스박사의 <죽음과 죽어감>은 저도 읽은 바 있습니다만, 후미오 박사처럼 ‘의사나부랭이’로 스스로를 비하할 생각은 없습니다. 자신이 평생해야 할 의무를 가진 직업에 대하여 나부랭이로 생각하는 후미오 선생이 오히려 안쓰럽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런 생각을 가지고 있어서 환자의 “호흡이 멈추고 심장이 정지하려고 하자 내내 그때를 기다리고 있던 의사들이 ‘드디어 나설 때군,’하고 긴장된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그중 한 명이 재빨리 인공호흡을 개시127쪽)”하는 보여주는 진료를 하는 모양입니다. 사망이 임박한 환자에게는 인공호흡도 고통일 뿐입니다. 가족들을 비롯하여 환자의 죽음을 슬퍼하는 분들이 참석한 가운데 평안한 죽음을 맞을 수 있도록 하는 것도 훌륭한 의료행위라 생각합니다. 후미오 선생의 말처럼 “주역은 죽어가는 환자이고, 그 모습을 지켜보는 사람은 가족이나 친지들이어야 하기 때문(130쪽)“입니다.

하지만 꼭 피할 수 없는 죽음을 연장해야 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역시 제가 인턴 때의 일입니다만, 응급실에 실려온 젊은이의 심장이 멎었는데 가족들은 아직도 병원에 도착하지 않은 상황이었습니다. 심폐소생술을 실시하고 강심제를 투여하면서 가족들이 도착할 때까지 심장박동과 호흡을 연장하여 가족들이 작별을 할 수 있도록 한 것은 지금도 잘 한 일이라 생각합니다.

끝으로 환자를 진료하는 의료인이 환자와 감정적으로 연결되는 것에 대하여 상반된 견해가 있는 것 같습니다. 환자의 치료와 관련하여 중대한 결정을 내려야 하는 상황에서는 환자의 용태만을 염두에 두고 판단해야 하는데 감정이 개입되면 판단이 흐려질 수 있다는 논리도 있습니다. 환자와 직접 대면한 경험이 인턴 때 밖에 없습니다만, 응급실에서 그리고 병실에서 담당하던 환자가 하룻사이에 4명이나 유명을 달리한 날이 있었습니다. 그날은 정말 허탈감 때문에 일할 의욕조차 나지 않았는데, 과장님께서 아무래도 고사라도 지내야 할 모양이라고 하시면서 의료현장에서 일하다 보면 별별 상황을 다 만나게 되니 지나치게 감정에 빠져들지 말라는 말씀을 해주셨던 기억이 납니다. 물론 자신이 돌보던 환자의 죽음을 기억하는 것이 옳겠습니다만, 그 죽음 하나하나에 의미를 두고 자책을 한다면 자신의 정신건강에도 나쁜 영향을 미치게 될 것 같습니다.

리뷰가 너무 길어졌습니다. <병원에서 죽는다는 것>에 대하여 지나치게 부정적인 생각을 가질 이유는 없습니다. 자신의 생각에 따라서 형편에 맞게 죽음을 맞으면 되는 것입니다. 병원은 어떤 경우도 환자의 생각을 존중하는 곳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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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든
헨리 데이빗 소로우 지음, 강승영 옮김 / 이레 / 2004년 1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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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45년3월 말경, 나는 도끼 한 자루를 빌려 들고 월든 호숫가의 숲으로 들어갔다. 그러고는 호수 가까이에 집 한 채를 지을 생각으로 곧게 뻗은 한창때의 백송나무들을 재목감으로 베어 넘기기 시작했다. (…) 내가 일한 곳은 소나무가 우거진 기분 좋은 언덕배기였는데 나무들 사이로 호수가 보였고, 어린 소나무와 호두나무가 무성하게 자라는 숲 속의 작은 빈터도 보였다.(60-61쪽)” 헨리 데이빗 소로우가 자신으로부터 사회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한 성찰을 이루게 된 월든 호숫가의 오두막은 이렇게 만들어졌습니다.

지금은 허물어져 사라져 버렸지만, 어렸을 적에 명절 때면 차례를 지내려 찾던 종가댁 마당 아래쪽에는 사랑채가 있었습니다. 툇마루에 올라서면 작은 윗방과 아랫방이 이어져 있는데, 종가댁 할아버지께서 아랫방에 기거하셨다고 합니다. 서안에 올려진 서책을 읽으시는 할아버지의 모습을 떠올리게 됩니다. 종가댁에서는 툇마루에 할아버지께서 읽으시던 서책들을 펼쳐놓고 거풍을 시키곤 하셨습니다.

툇마루에 올라서면 마당가에 서있는 나무 사이로 남쪽으로 널찍한 호수가 바라다 보입니다. 호수를 바라보면 어느 새 마음이 활짝 열리는 것 같습니다. 언젠가부터 이런 호숫가에 집을 짓고 살고 싶다는 생각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이른 아침에는 책을 읽고, 해가 질 무렵에는 호숫가를 산책하고, 달이 뜨면 음악을 듣거나 아니면 삶에 대한 이러저런 생각을 해도 좋을 것 같습니다. 그리고 생각의 열매를 글로 남기면 금상첨화가 될 것 같습니다. 소로우가 <월든>을 남긴 것처럼 말입니다.

<월든>은 호숫가의 오두막이 완성된 1845년 7월부터 1847년 9월까지 2년여 동안 그곳에서 홀로 지낸 소로우의 숲생활의 기록입니다. <월든>을 통해서 유추해본 소로우의 숲생활은 동서양을 넘나드는 다양한 책들을 읽고 그 의미를 새기거나, 월든 호수와 주변 숲을 거닐면서 느끼는 계절의 변화와 생명의 경이를 미세한 점까지도 놓치지 않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숲속 오두막을 찾아오거나 숲속에서 만나는 사람들과 나누는 소소한 이야기도 놓치지 않고 있습니다. 소로우의 사념은 숲과 호수를 중심으로 하는 자연에 머물지 않고 자신이 소속되어 있는 문명사회, 특히 미국의 사회정책 등에 대한 쓴소리도 아끼지 않고 있습니다. “침대는 야간의 의복이라고도 할 수 있는데 이 주거지 안의 주거지를 마련하기 위해서 우리는 새들로부터 둥지와 가슴털을 훔친다. 마치 두더지가 굴속 깊은 곳에 풀과 나뭇잎으로 된 잠자리를 마련하는 것처럼 말이다. 가난한 사람은 세상이 차다고 한탄을 한다. 우리가 느끼는 고통의 대부분은 신체적 냉기 이상으로 사회적 냉기에 기인한다.(25쪽)”

사실 저도 몇 년째 집근처에 있는 양재천에 산책을 나가고 있습니다. 산책을 하는 동안 양재천에서 느끼는 변화를 사소한 것까지도 놓치지 않으려 살피곤 합니다만, 소로우와는 차원이 다른 것 같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 이유는 시간의 흐름과 자연을 느끼는 방식의 차이, 두 가지 정도일 것 같습니다. 제가 양재천에 산책을 나가는 큰 이유는 자연을 관조하려는 것보다는 건강을 유지하려는 목적이 큰 탓에 비교적 빠른 속도로 걷기 마련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양재천의 변화는 보고 들으면서 느끼게 됩니다. 하지만 느리게 사는 법을 알고 있었던 것 같은 소로우는 천천히 걸으면서 자연에 스스로를 담기 때문에 그 변화를 마음으로 느낄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이처럼 <월든>을 읽어나가면 자연에 대한 소로우의 세심한 관찰과 사념의 깊이에 매료될 수밖에 없습니다. “들판과도 같이 넒은 물은 공중에 떠 있는 정기(精氣)를 반영한다. 그것은 위로부터 끝없이 새로운 생명과 움직임을 받아들이고 있다. 그것은 하늘과 땅의 중간적인 본성을 지니고 있다. 땅 위에서는 풀과 나무들만이 흔들리지만 물은 그 자체가 바람에 의해 잔물결이 일게 된다. 나는 수면에 미풍이 불어 지나가는 곳을 빛줄기나 빛의 파편이 번득임을 보고 알 수 있다. 이처럼 우리가 호수의 표면을 내려다볼 수 있다는 것은 대단한 일이다. 언젠가 우리는 공가의 표면을 내려다보며 한층 더 신묘한 정기가 어디를 스쳐 지나가는가를 보게 될 것이다.(271쪽)”

이웃 오두막에 사는 아일랜드 이민자 존 필드의 대화를 통하여 소로우가 원하는 미국이 어떤 모습인지 알 수 있습니다. “참다운 미국은 그런 것들(차와 커피와 고기)이 없이 살아갈 수 있는 생활양식을 자유로이 추구할 수 있는 그런 나라여야 하며, 또 노예제도나 전쟁을 국민이 지지하도록 국가가 강요하고, 그런 물건들을 사용하는 데서 직접 간접으로 초래되는 쓸데없는 비용을 국민이 부담하도록 강요하는 일이 없는 나라여야 하는 것이다.(296쪽)” 이러한 그의 생각은 1846년 7월 멕시코 전쟁에 반대하여 인두세 납부를 거부하여 투옥되었던 경험에서 나온 것이며, 부당한 시민 정부에 대한 합법적인 개인의 저항을 주장한 에세이 <시민 불복종(1849)>는 마하트마 간디의 인도 독립운동 및 마틴 루터 킹의 흑인 민권운동에 영감을 주었다고 합니다.

팔은 안으로 굽는다고 우리는 스스로에게 관대한 것을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만, 그는 스스로에 대한 비판에도 차별을 두지 않았습니다. 자신이 과거 학교경영에 간여하면서 가졌던 생각도 비판하고 있습니다. “같은 인간에 대한 사랑의 감정에서가 아니고 단지 먹고살기 위해서 아이들을 가르쳤으므로 그것부터가 실패라고 하지 않을 수 없었다.(100쪽)” 오늘날 교육에 종사하는 분들 가운데 먹고사는 문제를 떠나서 인간에 대한 사랑의 감정으로 임하는 분들이 얼마나 될까 생각합니다. 특히 이념까지 끼어들다 보면 인간에 대한 사랑은 발붙일 자리가 없지 않을까 걱정입니다.

소로우는 월든호수로 간 이유를 다음과 같이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내가 숲 속으로 들어간 것은 인생을 의도적으로 살아보기 위해서였다. 다시 말해서 인생의 본질적인 사실들만을 직면해보려는 것이었으며, 인생이 가르치는 바를 내가 배울 수 있는지 알아보고자 했던 것이며, 그리하여 마침내 죽음을 맞이했을 때 내가 헛된 삶을 살았구나 하고 깨닫는 일이 없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나는 삶이 아닌 것은 살지 않으려 했으니, 삶은 그처럼 소중한 것이다.(129-130쪽)”

그러면 왜 호수였을까요? “호수는 하나의 경관 속에서 가장 아름답고 표정이 풍부한 지형(地形)이다 그것은 대지의 눈이다. 그 눈을 들여다보면서 사람은 자기 본성의 깊이를 잰다.(268쪽)” 소로우는 대지의 눈을 통해서 자신의 본성을 들여다보려 한 것이고, 자신을 발견해낸 것입니다.

앞에서 언젠가 기회가 되면 호숫가 작은 집에서 살고 싶다는 저의 작은 소망을 말씀드렸습니다. 하지만 그 소망이 언제 이루어질 수 있을지 모릅니다. 그렇다고 다람쥐 쳇바퀴 돌리 듯 세상살이에 매몰되어 정신없이 사는 삶에 매달리다보면 정신의 샘이 말라붙어버릴 것 같다는 걱정이 남습니다. 이제라도 삶에 희망을 물줄기가 흘러내릴 수 있도록 마음속에 월든호수를 담아봐야 하겠습니다. 마치 쉴 새 없이 그리움을 솟아 올리는’ 최홍규 시인님의 호수처럼 말입니다(http://blog.joinsmsn.com/yang412/109251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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