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해력"증진, "죽기 전에 꼭 읽어야 할" 명저 100선, 수능 필독서 등등. 요즘 꼬마님들 책 읽으려면 따라붙는 목적이 참 많죠? 조건 따지지 않고 그저 책 읽는 재미에 폭 빠져드는 경험이 요즘 꼬마님들에게 필요한 데 말입니다. '어떤 책이 있을까?' 고민해 봤어요. 아! 삐삐! 빨강머리 삐삐가 떠올랐습니다. 말 한 마리쯤은 번쩍 들어 올리는 천하장사에, 엉뚱하기로는 당할 자 없는 9살 꼬마이지요. '삐삐' 드라마의 테마곡을 흥얼거리면서, 수십 년 만에 [내 이름은 삐삐 롱스타킹](1945)을 다시 찾았습니다. 책 읽는 내내 이런 생각이 들었어요. 어른인 저도 푹 빠져드는데, 꼬마 독자들은 얼마나 열광할까? 80살 다 된 이 스웨덴 동화는 왜 21세기에도 세계적으로 사랑받을까?


?


그 대답은 바로 캐릭터의 힘, 말괄량이 삐삐의 매력이지 않을까 싶습니다. 삐삐에게는 천사 엄마와 식인종의 왕인 아빠가 계시다지만, 어른들은 알죠. 돌봐줄 어른이 없는 9살이라는걸. 즉, 차가운 언어로 규정하자면 삐삐는 '고아'입니다. 하지만 '고아'하면, 사람들이 떠올리는 진부한 스테레오 타입에 전혀 들어맞지 않는 캐릭터이죠. 스스로 자장가를 불러 자신을 잠 재우고, 발가락 꿈지럭거릴 여유 공간을 확보하려 발 사이즈 2배나 되는 큼직한 신발을 신습니다. 똑바로 걸으면 덜 신나니까 뒤로 걸어보고, 말도 타보고, 지붕 위에도 올라가는 등 반복적 일상성을 비웃기라도 하듯 삐삐의 하루하루는 알록달록 다채롭게 변주합니다. 삐삐는 당당하고, 독립적이고 진취적이며 쾌활하죠. 빳빳하게 다린 면 원피스가 더러워질까 봐 얌전하게 놀아야 하는 옆집 소녀 아니카네 남매와는 딴판이지요.

*

삐삐 캐릭터는 1940년대 스웨덴 사회, 그리고 2020년대 한국 사회에도 만연한 '이상적인 가정과 어린이'에 대한 고정관념을 뒤흔듭니다. 삐삐는 정상가족 틀거리에 맞진 않지만, 1인 가족 체계를 멋지게 구축했죠. 또 남의 도움에 의존하지 않으며, 주체적 판단이 가능하고 실행력도 뛰어나며, 시스템의의 날개 아래 있지 않아도 스스로 보호할 수 있으며, 엄마아빠가 보고 싶다고 밤마다 몰래 울지 않습니다. 이처럼 삐삐는 그 빨강머리의 상징성만큼이나 전복적인 캐릭터이지요.

어쩌면 이런 설정은 작가 아스트리드 린드그랜이 사회에 전하려 했던 메시지를 간접적으로 전하는 방식일지도 모릅니다. 그녀는 10대 시절, 상사와의 불륜으로 아들을 낳은 후 싱글맘으로서 잠시 살면서, 사회의 편견과 고정관념을 겪었죠. 그러나 사회적 시선에 주눅들기보다는 뒤엎기를 꿈꿨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삐삐를 1940년대, 이상적인 가정과과 이상적인 어린이 유형에 들어맞지 않는 비정형적 인물로 창조한 것도 그 저항의 한 방식일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요.


1924년(17세)의 Astrid Lindgren


저는[내 이름은 삐삐 롱스타킹]을 읽으면서, 제가 얼마나 타인의 시선과 평가, 나아가 관습적 틀에 매여 굳어졌는지 깨닫고 슬펐습니다. 제가 자꾸만 삐삐의 구김살 없이 밝은 모습을 부모 잃은 슬픔을 애써 위장하는 것으로 분석하려 든다든지, 삐삐를 '고아,' '돌봄이 필요한,' 혹은 '가정 교육이 결여된' 아이로 평가하더라고요. 삐삐의 예의범절, 특히 테이블 매너도 매의 눈으로 날카롭게 판단했고요.(미안해 삐삐야....내 안의 예의 바른 어른이 고집스러워 부끄럽구나!) 예를 들어 삐삐가 친구 아니카와 토미의 집에 초대받았을 때, 손님용 다과로 나온 케이크를 혼자 몽땅 다 먹어 버리거나 응접실 바닥에 설탕을 뿌린 후 맨발로 돌아다니기는 장면에서, 저는 '흐아! 저 바닥 청소를 어찌 다하누! 테이블 매너가 빵점이야.'하여 걱정을 하더라고요. 이제 저는 삐삐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기엔 너무 굳어버린 걸까요?하긴, 저만 그런 것도 아닌 듯 합니다.

2023년 대한민국의 꼬마들, 여름 방학인데도 '게임 - 학원 - 숙제'의 삼각편대를 벗어나지 못한 채 밍밍하게 사는지, 표정이 굳어 있는지, 만약 삐삐가 1945년에서 타임머신을 타고 와서 대한민국의 친구들을 만난다면, 적응하기 어려울 것 같네요. 삐삐라면 어떻게 '게임 - 학원 - 숙제'란 반복적 일상에 활기와 변화를 불어넣을까요? 아니면 우리가 삐삐라면? 우리 자신이 삐삐 되기에는 너무 굳어 버린걸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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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삭매냐 2023-07-20 10:45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이게 스웨덴 도라마였던가요?

제 어릴 적, 최애 도라마였거든요.

힘이 장사인 빨간머리 삐삐의 활
약상에 넋이 나갔더라는.

그리고 보니 삐삐야말로 자유로
운 영혼의 표상이 아니었나 싶습
니다.

얄라알라 2023-07-21 12:42   좋아요 1 | URL
ㅎㅎ 도라마!! 역시 매냐님의 언어유희!!!
네네,
제가 원래 작품이 맘에 들면 유투브 열심히 뒤져서, 작가 인터뷰며 관련 영상 싹 찾아보는 편인데, 스웨덴 말을 하나도 모르는 관계로 ㅎㅎㅎ패쓰했어요.

독서괭 2023-07-20 17:2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는 삐삐롱스타킹을 읽지 못했어요^^;; 아이들과 함께 읽어봐야겠네요. 아스트리드 린드그렌에게 그런 아픔이 있었군요.
그나저나, 저도 읽으면 ‘어른‘으로서 그런 생각 할 것 같은데 ㅋㅋㅋ 아이들은 다를 것 같아서 궁금합니다.

얄라알라 2023-07-21 12:43   좋아요 1 | URL
ㅋㅋㅋ맞아요. 독서괭님

저 바닥 청소 누가 다하나, 어찌 다하나... 옷 망가뜨려 놓으면 또 사야하는디.....ㅋㅋㅋ

자꾸 이런 생각이 올라와서, 민망스러웠네요.

아이들은 따라 해보고 싶겠죠?^^

잉크냄새 2023-07-20 19:1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도 제 안의 고지식한 어른의 힘이 너무 세군요.

얄라알라 2023-07-21 12:44   좋아요 0 | URL
ㅎㅎ저만 그런 게 아니어서,
살짝 위안이 됩니다.

삐삐가 저희 집에 놀러온다고 하면.....‘아! 우리 야외에서 만날래?‘ 그럴 것 같습니다 ㅋ

페크pek0501 2023-07-21 19:5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삐삐는 티브이로 본 적 있어 반갑네요. 80년이나 되었나요?
작가는 떠나도 작품은 그렇게 남는 거군요.
 



오해 하나! 책표지 소녀가 "샬롯"이라 생각했어요. 오해 둘! 주인공인 "인간" 샬롯이 돼지 혹은 거미, 즉 인간 아닌 존재들과 우정을 나누는 동화인 줄 알았습니다. 사실, [샬롯의 거미줄]을 처음 다 읽고도 크게 달리 생각하진 않았어요. 물론, "샬롯"은 소녀가 아니라 거미였지만, 전 이 작품의 키워드를 우정으로 봤거든요. 먼저 읽은 분들도, 책 광고 문구에서도 한결같이 "우정"을 강조했으니까요.

하지만, 이 작품을 두 번, 세 번, 그리고 네 번쯤 읽으니 생각이 달라졌습니다. [샬롯의 거미줄]은, 어느 하나의 키워드로 규정할 수없이 인생의 희로애락을 응축한 품위 넘치는 작품이더라고요. 40 즈음에 농장 생활을 시작했다는 작가 엘윈 브룩스 화이트(Elwyn Brooks White, 1899-1985)가 얼마나 여유롭게 사색하고, 농장의 모든 생명체들을 애정 어린 시선으로 관찰했는지를 짐작할 수 있었지요.




많은 독자들이 [샬롯의 거미줄]을 '우정"이라는 깔때기 안에 담아두는 게 아쉬워서 제 감상을 끄적여 봅니다. 물론 샬롯과 윌버는 서로 지극히 아끼고, 지지하고 서로에게 고마워합니다. 우정의 속성을 다 갖춘 관계이지요. 하지만, 다른 관점에서 보면, 이 둘은 '부모-자녀' 관계의 은유로도 읽힙니다. 제가 이렇게 해석하는 건, 단지 샬롯이 임신과 출산을 경험한 암컷 거미이고 윌버가 어린 수퇘지여서가 아닙니다. 둘 사이의 관계성은 돌봄을 제공하는 모성과 그 돌봄 속에서 성숙함으로써 다시 사랑의 호혜성을 보여주는 자녀의 모습을 보여주기도 합니다. 샬롯은 베이컨이 될 숙명을 타고난 식용돼지가 느끼는 죽음에 대한 공포를 덜어주고자, 어려운 약속을 합니다. '살려 주겠다'라는, 신도 지키기 어려운 약속. 그리고, 비롯 작은 몸집의 거미이지만 그 누구도 할 수 없었을 기적, 바로 윌버를 살게 해주는 약속을 지켜냅니다. 그뿐만 아니라, 윌버가 거친 세계에서 현명하게 대처하며 생존하도록 지혜와 용기도 불어 넣어 주지요.

반면, 철없는 어린 돼지 윌버는 그런 샬롯에게 고마워는 하지만, 받는 존재로서의 위치에 익숙해진 모습을 보입니다. 예를 들어, 샬롯이 알을 낳아야 하는데도 샬롯에게 품평회에 같이 가면 재미있을 거라며 동행을 기대합니다. (사람으로 치면 출산 임박한 산모에게, 나 혼자 놀이동산 가면 무서우니까 같이 가서 거기서 출산하면 재미있을 거라는......). 죽어가는 샬롯의 변화를 감지하지 못한 채, 자기의 운명에 대한 불안감만 토로하기도 하고요. 물론, 윌버는 삶의 경험이 적은 어린돼지이기 때문에 타인을 섬세하게 배려하는 연습이 되어 있진 않습니다.

감동적인 점은, 샬롯에게 받기만 했던 윌버가 위기의 순간, 즉 샬롯이 514마리 새끼들만 남겨 놓고 죽어가는 그때, 냉철한 판단 주체로서 우뚝 서서 샬롯을 돕는다는 점입니다. 성장의 단계를 몇 단계 뛰어넘어 성숙해진 윌버의 모습에서, 사랑의 힘을 봅니다. 사랑은 베푸는 자 자신을 성숙시키고, 또 사랑받는 이를 다음 단계로 끌어올립니다. 돌고 도는 사랑의 힘, 사랑의 호혜성입니다.

아직 [샬롯의 거미줄]을 읽지 않으신 분들이라면 꼭 시를 음미하듯 천천히 여러 번 읽기를 추천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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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한국의 저출산 현상을 걱정하는 일반 시민의 대화를 가까이에서 들을 기회가 있었다. 솔직히 고백하자면, 오가던 이야기의 80%는 잡아두려 애써도 귀 밖으로 새어 나갔다. "저출산이 진짜 심각해. 빨리 해결해야 나라가 산다" 식 주장은, 질리도록 들어온 데다가 공허했기 때문이다. 마치, 언젠가 여의도 국회의사당 쪽에서 보았던 "아이 울음 소리 들리는 대한민국 만들기" 홍보 포스터처럼 말이다.

*

"우리 옆집은 애가 안 생긴대요."

"아들 내외가 애를 안 낳겠다니, 우리 집부터 저출산이야."

"학원비가 월 몇백씩 나가는 데 어떻게 애를 낳나요?"

* *

슬슬 뻔한 대화가 지겨워질 즈음, 누군가가 '금쪽이'를 화두에 올렸다. 늘어져 있던 귀가 갑자기 쫑긋해졌다. 예능 프로그램 전혀 안 보는 나조차도 알만큼 인기 많은 '금쪽이' 왜 갑자기 저출산 연관어로 튀어나온 거지? 궁금했다. '금쪽이'를 비판하던 분의 논리는 다음과 같았다.


  • 육아 예능 프로그램에서 '금쪽이,' 소위 자녀계의 문제아이를 출연시켜서 "전투 육아" 9단용 고난이도 육아의 고단함을 과장한다.

  • 젊은 세대는 ('금쪽이'같은 자녀의) 양육에 대한 공포감을 느낀다.

  • 자녀 낳고 기르기를 차라리 포기한다.

이런 주장이었다. 아울러 그는 해법도 내놓았다.

  • 양육 경험 스펙트럼의 부정적 극단에 있는 '금쪽이들'대신, '키우기 쉽고 사랑스러운 자녀들'을 출연을 늘려야 한다. 육아의 행복과 보람을 강조하는 콘텐츠에 젊은 세대를 많이 노출시키자.

  • 그래야 젊은세대가 '애 키워보고 싶은' 욕구를 느끼고 육아를 긍정적으로 생각한다.

  • 궁극적으로는 자녀 출산으로 이어진다.


육아의 행복, 과장 보태자면 육아를 통해 '자아실현'하는 긍정 부모상을 보여줌으로써, 출산과 육아를 유도할 수 있다는 주장이 조금 억지스럽게도 들렸지만, 흥미로웠다.

그런들, 이런들......'금쪽이들'을 출연시키든, '금쪽이들'의 노출을 자제하든,

큰 틀에서의 구조적 흐름이 안 바뀌고 있는데, 생존 문제가 여전히 치열한데 저출산 경향성이 어찌 급반전 할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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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삭매냐 2023-07-06 12:58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거의 혁명에 가까운 대대적인
사회 개혁을 수반하지않는 이상,
저출산이라는 거대한 사회적 흐
름을 거스를 수는 없다고 생각
합니다.

20년 전에, 저출산 문제가 앞으
로 심각해질 거라는 어느 산부
인과 의사님의 진단을 듣고 무
신 소릴~ 이랬던 적이 있었는데
현실이 되어 버렸네요.

교육개혁, 부동산개혁, 취업 등
이 연계되어 있다는 걸 위정자
들이 모르지 않을 텐데, 허구헌
날 소모성 저출산 대책만 양산해
내는 모습이 고저 안타깝습니다.

2023-07-06 13:23   URL
비밀 댓글입니다.

망고 2023-07-06 14:45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육아의 행복, 사랑스러운 아이 키우기의 육아예능은 이미 있지 않나요? 근데 그런 프로그램은 또 부모들 박탈감 느끼게 한다고 내가 저정도 수준으로 내아이에게 못 해주는데 애를 어떻게 낳으란 말이냐고 등등의 소리를 많이 하던데요ㅋㅋㅋ누구는 또 나혼자산다같은 프로그램이 저출산 원인이라고 하질않나...참 재밌어요

얄라알라 2023-07-06 17:26   좋아요 2 | URL
오, 망고님, 감사드립니다!!

올려주신 이야기 다 재미있어요.^^ (저는 몰랐던...슈퍼맨이 간다?인가 요 프로그램만 들어본..)

‘나혼자 산다‘ 프로그램에 그런 비판도 있군요.

갑자기 코에 걸면, 귀에 걸면이 생각났어요^^

보는 관점의 문제일수도 있겠네요.

금쪽이 유형이 많아진건지,(마치 중국 소황제처럼)
아님 언론에서 과장된 건지 모르겠지만
금쪽이가 육아에 대한 부모의 책임과 개념을 바꿔놓는 것도 같아요.
 


읽으랴 쓰랴 바쁜 6월, [셰임 머신]이 달콤한 후식처럼 유혹적이어서 메인 메뉴를 밀쳐 두고 먼저 손이간다. 100자평은 다음과 같다.

*

부럽! 하버드대 수학 PhD로서 학계와 월스트리트에서 이름을 날렸던 데이터 과학자가 직업 칼럼니스트 이상 글도 잘 쓰다니, 이 다재다능함은 뭐람?

*

케시 오닐(Cathy O'neil)의 [대량살상 수학무기 Weapons of Math Destruction](2016)은 무려 80주나 amazon 베스트셀러에 머물렀을 정도로 영향력과 인기가 컸다. 6년 만에 나온 [셰임 머신 The Shame Machine: Who Profits in the New Age of Humiliation] 역시 저자의 직진형 사회비판과 솔직한 자기성찰, 데이터 전문가로서의 해박함과 필력을 감추지 않는다.

GRuban, CC BY-SA 4.0 <https://creativecommons.org/licenses/by-sa/4.0>, via Wikimedia Commons



저자에게는 미안하지만, 서문 읽다가 덮고, 저자가 얼마나 뚱뚱한지 궁금해서 구글 검색하기도 처음이었다. 왜냐하면 서문에서 저자는 거의 평생 따라다닌 비만 수치심(shame) 때문에 이 책을 쓰게 되었다고 밝히기 때문이다. 고학력자인 자신과 마찬가지로 수학 박사이신 부모님과 최상류층에게만 허락된 뉴욕 부촌에 살아왔지만, 캐시 오닐은 비만 수치심에 사로잡혀 살아왔다. 낮은자존감과 자살충동도 경험했다. 하지만, 그녀는 문제의 본질을 심층 분석하는 수학자답게 개인적 경험에서 나아가, 오늘날 수치심이 혐오를 조장함으로써, 사회를 계급화하고 데이터 산업의 몸집을 불려주는 먹이로 활용된다는 통찰력을 보인다.


Shame machine

수치심은 돈이 된다


[세임 머신] 1부에서 저자는 비만, 약물(마약) 중독, 빈곤, 그리고 외모를 빌미로 수치심을 유발하고, 그 수치심에 혐오와 비하의 의미를 더함으로써 이익을 내온 산업이 어떻게 작동하는지 구체적인 사례를 들어 보여준다. 예를 들어, 현재 미국에서 마약중독 재활사업은 350억 달러 규모로 성황이다. 그녀는 사회가 유도하는 각종 '질병-비만, 중독, 악취증, 히키코모리 등등'과 그 질병에 찍는 '낙인'은 어떤 이익집단에는 돈벌이가 되는 현실에 차갑게 분노한다. 

빅데이터와 알고리즘

혐오를 조장하고 확산한다


[셰임 머신]이 흥미로운 이유는, 여타 '뚱뚱함의 고해성사'나 '비만인의 before & after'를 보여주는 여타의 책처럼 수치심을 개인적 차원의 정서 상태로 보지 않는다는 점이다. 데이터 과학자로서 캐시 오닐은, 인간 심리와 본성을 간파한 알고리즘이 혐오를 조장하고 확산시킴으로써 수치심을 사회통제 도구로 활용한다고 주장한다.

수치심 네트워크는 우리를 부지런히 끌어들인다. 우리는 그 안에서 사회구조에 균열을 내고, 그때마다 잠깐씩 고양되는 기분을 느끼며 옹졸한 권력감이나 분노, 복수심 같은 감정에 중독된다. 우리는 나한테 관심을 주는 듯한 소규모 커뮤니티에 상주하며 과도한 감정에 몰입하지만, 그 감정을 기계적으로 자극하는 허술한 시스템은 눈치채지 못한다. 그 시스템은 바로 영속적으로 굴러가는 수치심 머신이다. (154쪽)



무기로서의 수치심

Punch Up!


달랑 300여 쪽의 책 한 건이지만, 내가 활자로 느낀 캐시 오닐이라는 인물은 세 아들의 엄마이자 건강한 시민으로서의 상식, 지식 전문가로서의 소명의식, 호불호가 명확하고 감추지 않는 황소의 뚝심, 꺾이더라도 굴하지 않는 저항정신을 지닌 멋진 사람이다. [셰임 머신]의 1부와 2부에서는, 대중이 잘 모르던 수치심 산업이 눅눅한 지하의 곰팡이처럼 현대사회의 공동체와 사람들의 정신을 좀 먹고 있음을 경각시키는 데 주력한다. 비판과 각성하라는 촉구만으로 끝내지 않는다. 3부에 와서는 그 수치심 자체가 사람들의 무기가 될 수 있음을 역발상으로 보여준다. 즉, 수치심 기계가 사회를 계급화하고 정서를 조정하고, 서로가 서로를 대하는 방식에 영향을 끼쳐왔다면 (punch down), 역으로 그 수치심을 활용해 정의를 복구하는 무기 삼을 수 있다고 독자들을 고무시킨다! 간디의 비폭력 저항 운동, 나이지리아의 촛불 집회, 2020년대 Me T00 운동 등 구체적인 실례와 함께.

더 살만한 세상을 위해

수치심 머신을 해체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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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nan 2023-06-12 17:4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얄라알라님 책소개 감사합니다.
수치심의 비즈니스화 꼭 읽어봐야겠네요~^^

얄라알라 2023-06-13 09:24   좋아요 0 | URL
Conan님 오랜만이십니다^^

저는, 알고리즘이니 빅데이터니 하는 걸 전혀 모르지만, 이 책은 그쪽의 전문지식 없이도 무척 흥미롭게 술술 읽을 수 있는 책이었어요. 저자의 넓은 시야 덕에 많이 배웠답니다.

Conan님께서도 나중에 후기 올려주시면 보러 갈게요^^

초란공 2023-06-12 21:4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 저자분 신간이 나왔나 보네요~! 교묘한 알고리즘으로 먹고 사는 기득권 세력들이 결코 달가워하지 않을 인물일 듯 합니다. ^^ 그래도 업계 전문가로서 내막을 정확하고 비판적으로 알려주는 인물들이 있어 다행이라는 생각도 들고요.

얄라알라 2023-06-13 09:26   좋아요 0 | URL
네네, 맞습니다. 저도 읽으면서 특히 Punch Up 파트에서, 저자의 과감성에 존경의 맘이 들면서도 놀랐어요

심지어 본인이 오래 살아온 뉴욕 상류층 동네 사람의 실명을 거론하면서까지 논의를 촉발하는데
뒷감당에 대한 부분....소심한 저는 걱정이 되는데, 이분은 강하시더라고요. 자기 주장 펼치는 데 주저함이 없고...


배경에서 나온 것일까? 이런 저런 생각하며 읽었답니다. ˝다행˝이라는 초란공님 말씀에는 절대 공감하고요^^

좋은 하루 시작하시어요

고양이라디오 2023-06-13 10: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대량살상 수학무기> 재밌게 읽었는데 신간이 나왔나보네요. 재밌을 거 같습니다. 좋은 책 소개 감사합니다^^

얄라알라 2023-06-13 10:13   좋아요 1 | URL
<대량살상..>은 책으로는 아직 못봤는데, 저자가 워낙 강연을 많이 해서 자료가 많더라고요.

고양이라디오님! 저는 <셰임 머신>너무 재밌게 읽었어요. 다른 책들 읽을 거 많은데, 우선순위 무시하고 이 책부터 읽었을 만큼요 ㅎ

고양이라디오님, 항상 느끼지만 진짜 다양한 분야에 손을 대시고 또 좋아하시니 저도 책 친구로서 묻어가니 좋습니다요!

<종의 기원>이후, 저희는 ㅋㅋㅋ함께 읽기 이야기도 안 꺼내고 있는 상황이네요. ^^

고양이라디오 2023-06-13 17:23   좋아요 1 | URL
<종의 기원> 읽어야 되는데... 올해도 못 읽겠네요ㅠㅠ

저도 주말에 <셰임 머신> 도서관에서 빌려보려고요ㅎ

제가 보기엔 얄라님이 다양한 분야에 관심 많으신듯요ㅎ 제가 잘 모르는 분야의 책들도 많이 읽으시고요ㅎㅎ

함께 읽기... <종의 기원>의 벽에 막힌 걸까요ㅠㅠㅋ?

페크pek0501 2023-06-13 11:2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산업이 어떻게 작동하는지 구체적인 사례를 보여 주는 점, 간디의 비폭력 저항 운동, 나이지리아의 촛불 집회, 2020년대 Me T00 운동 등 구체적인 실례와 함께˝~~ 흥미롭네요.
셰임 머신, 에 관한 글이 요즘 많이 올라오네요. 검색 들어갑니다.^^

얄라알라 2023-06-13 11:59   좋아요 0 | URL
아무래도 미국인이다 보니, 미국 사회 자잘한 예시도 자세하게 알려줘서 저는 도움을 받았어요^^

4월에 나온 책 같은데 요새도 글이 많이 올라오나 보네요^^ 좋습니다

페크님의 리뷰를 기다리는 것으로^^

유수 2023-06-13 12:4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소셜 딜레마 다큐에서 이분 인터뷰 재밌게 봤는데 책 찾아 볼 생각을 못했네요. 얄라알라님 페이퍼에 올려주신 저자 사진 덕분에 연결됐어요!! 궁금한 책이었는데 수치심을 역으로 활용한다는 게 특히 흥미로워요. 읽어봐야겠어요. 소개 감사합니다!

얄라알라 2023-06-13 12:54   좋아요 1 | URL
딜레마 다큐? 제목이 소셜 딜레마인가봐요
저야말로 유수님 덕분에 새로운 탐구거리를 가져갑니다

Punch Up, Punch Down의 느낌을 제가 이 부족한 페이퍼에서 살리지 못했는데
역으로 수치심이 약자의 무기, 혹은 대중의 펀치 업 무기가 될 수 있다는 저항의 가능성을 저자가 실례를 들어 보여주었어요. ....흠.. 제가 책이 넘 재밌어서 비판하지 않고 술술 읽었는데
다시 읽는다면 그 ˝Punch Up˝에 대해서도 고민할 지점이 있을 것 같습니다

정작 책은 반납했는데 마지막 3부를 다시 읽고 싶다는 생각이 유수님 덕분에 드네요

han22598 2023-06-18 04:0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오!. 쉐임 머쉰이라...진짜 현대 소비문화를 표현하는 적절한 단어인 것 같아요. 이 책 장바구니에 담아뒀어요...감사합니다. 리뷰해주셔서!!!

얄라알라 2023-06-25 15:41   좋아요 0 | URL
안녕하세요? han님, 셰임머신을 장바구니에 담아두셨다니, 반갑습니다.
저는 수학자인 저자가 사회비평을 쉬운 언어, 설득력 큰 예시로 해주니 참신하고도 이 책이 참 재미있었어요.

han님 혹시 리뷰올리셨으려나, 놀러가봐야겠네요^^
 

SF소설가 엘리자베스 문은 [잔류 인구 Ramant Population]에서 가방끈 짧은 할머니, '오필리어'를 통해 Ph.D 소지자들을 관찰한다. 이들이 문자와 데이터라는 상아탑에 갇힌 나머지 오감으로 흡수할 수 있는 삶의 충만함을 놓치는 어리석음을 관찰하고오필리어는 이들에게 경멸과 측은지심을 보낸다. 이런 관점은, 1940~60년대 미국 텍사스에서 교육받아 온 저자의 자기 반성일 수도 있다. 혹은 자폐증 아들을 키워 온 어머니로서, 정상성만 강조하는 제도권 교육이 인간의 무한한 가능성을 어떻게 닫아버리는지에 대한 성토이기도 하다.


엘리자베스 문은 오필리어의 입을 빌려서, 수평적이고 능동적인 배움이 얼마나 아름다운 과정인지를 독자에게 일깨워준다. "돈(학원비, 과외비, 등록금.... 촌지)"을 매개하지 않아도 잘만 굴러가는 수평적 배움에 대한 그녀의 생각을 보여주는 문장을 [잔류인구]에서 옮겨본다.

아! 나 엘리자베스 문, 많이 좋아하나 봐.


 매개하지 않아도 잘만 굴러가는 수평적 배움에 대한 그녀의 생각을 보여주는 문장을 [잔류인구]에서 옮겨본다.




오필리어는 자식들이 질문했을 때 화가 났던 모든 순간을, 괴동물의 선을 넘는 호기심에 화가 났던 모든 순간을 떠올렸다. 그런 식으로 자기 자신도 윽박지르며 살아 왔다. 배울 수 있었던 온갖 것을 배우지 못하게 막았다. 그래야 한다고 믿었던 때도 있었다. 아이들이 시간낭비를 하게 둘 순 없다고, 필요하 것만 가르치지 않으면 결코 규율을 익히지 못할 거라고. 그는 기억 속에서 환한 얼굴을, 반짝이는 눈을 봤다. 열의에 찬 목소리를 들었다...... 그리고 또한 떠올렸다. 아이들이 어떻게 변했는지, 그 자신이 어떻게 변했는지를. 그토록 왕성하던 호기심과 열의가 소극적인 복종의 틀 속에 들어가버린 것을. 단념해야 했던 만큼 많이 혹은 적게 시무룩해져서.

[잔류인구] 368쪽



나 역시 오필리어처럼 괴동물(행성 원 거주 생명체들)이 충족될 줄 모르는 왕성한 호기심을 가지고, 오필리어의 냉장고 성에를 가지고 놀 때 가벼운 짜증을 느꼈다. 비인간 종족이 인간의 배설과정을 궁금해 할때 "교육받은 짜증"을 느꼈다. 마치 교실에서 암묵적인 금기어와 금기행동을 어긴 학생에게 그러하듯. 오필리어가, 정확히 무엇을 아쉬워하는지 알 것 같았다.

[잔류인구] 덕분에 2023년 대한민국 사회에서 통용되는 "공부"의 협소한 의미와 가능성을 열어주는 "배움(터득함)"의 의미를 비교해 보게 된다. 닫혔다면, 다시 여는 노력이라도 해야겠다.




21c 대한민국에서 "공부" 하면 떠오르는 키워드? 학교, 기관, 학원, 수업료, 강사, 선생, 기출문제, 경쟁, 무한 반복, 효율성, 선생. 규율, 합격, 선행.

* * * 

오필리어가 비인간 생물체들을 통해 알게 된 '배움'의 키워드는? 호기심, 열어놓음, 주종이나 위계 관계가 아닌 수평적 관계에서 이뤄짐. 스스로 자신의 선생님. 즉 (가르칠 대상이라는) 목적어가 필요하지 않음. 서로 배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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