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날, 죽음이 만나자고 했다 - 죽기로 결심한 의사가 간절히 살리고 싶었던 순간들
정상훈 지음 / 웅진지식하우스 / 202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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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라인 서점이 무료로 제공하는 "미리 보기" 서비스를 그다지 선호하지 않았다. 사이다 들이켜기 전, 김 빼기 일부러 하는가? 종이책으로 앉은 자리에서 한 번에 읽기를 선호하기 때문에 김 빼기, 굳이 하진 않는다. 그러나 [어느 날, 죽음이 만나자고 했다]의 '미리 보기'를 클릭했다가, 그대로 책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저자가 이제는 훌쩍 큰 아들에게 고해성사를 하는 편지 형식 도입부였는데, 부담스러울 만큼 저자의 고백이 솔직했다. '미리 보기'까지만 읽고 끝냈다면, 저자 정상훈을 '세속적 성공 면에서는 엘리트겠으나, 일상을 꾸리는 능력 면에서는 낙제점을 면치 못할 열패자'로 낙인찍을 뻔했다. 그렇지 않다. [어느 날, 죽음이 만나자고 했다]를 다 읽고 나니, 저자의 과잉 솔직함은 오롯이 아들을 향한 애정과 자기성찰로 벗겨져 나온 피부 비늘이란 걸 알겠다. 그는 부단한 노력으로 얼룩덜룩한 피부의 비늘을 벗겨내고, 새 살을 돋우려 했던 것이다. 책 제목에서 '죽음이 만나자고" 했다지만, 그가 진정 희구하는 것은 극단적 선택이나 단절이 아니라, 충만하게 지속되는 하루하루였다.

*

[어느 날, 죽음이 만나자고 했다]의 저자 정상훈은 서울대학교 의대 출신으로 '행동하는의사회' 창립자이자 '국경없는의사회' 해외구호활동가였다. 굳이 "서울대 의대" 출신임을 강조하는 이유는, 그가 우울증과 자살충동에 시달릴 때 그의 지인들은 "서울대 나온 의사가 뭐 아쉬울 게 있어서"의 반응을 보였고, 그의 어머니에게 그는 "서울대 나온 의사 아들"이었기 때문이다. 그런 타인의 시선, 특히 어머니의 기대는 저자의 정신세계에 상당한 독이었다. 나는 [어느 날, 죽음이 만나자고 했다]를 읽으며, 가족, 특히 어머니와의 관계가 한 개인의 정신세계에 이렇게 압도적 영향을 끼칠 수 있는가를 곱씹어 생각하였다. 정상훈의 자기 파멸적이고 가족을 질식시키는 우울증은 뿌리를 두었는데, 바로 작가의 어머니이다. 작가의 어머니는 우울증을 앓았다. 자녀들 앞에서 부부싸움하는 게 일상이었다. 저자의 아버지가 라면 한 박스를 들쳐 매고 와서는 매일 저녁, 어머니가 차린 밥상 옆쪽에서 따로 입 꾹 다물고 라면을 드셨다는 일화는 듣기만 해도 폭력적이다. 저자는 결국은 가정을 깬 엄마와 같이 살면서, 정신적으로 많이 힘들었나 보다. 그가 8살 난 아들과 아내 자궁 속에 둘째 아이를 남겨두고 아르메니아, 레바논, 시에라리온으로 떠나간 이유의 근원에도 어머니가 있었다. 저자는 어머니와 대화를 할 수 없었다. 입만 열면 서로 화를 내거나 상대를 정서적으로 괴롭혔다.

* *

[어느 날, 죽음이 만나자고 했다]는 '국경없는의사회'의 활동가로서 정상훈 작가가 직접 경험한 건강 불평등 현장과 생명의 소중함을 이야기하는 사이사이, 작가의 정신적 문제를 풀어나가는 과정을 보여준다. 저자가 한국을 떠나 시에라리온에 있어도, 저자에게 그 어머니는 제 몸의 세포 덩어리와 같아서 떨치려야 떨칠 수 없었다. 폭탄이 떨어지는 전쟁의 현장에서도, 다제내성 결핵 감염의 공포 앞에서도, 에볼라로 인간이 존엄의 존재에서 그저 몸뚱어리로 전락하는 현장에서도 침착할 수 있었던 근원에는 그의 우울증, 더 나아가서는 그의 어머니가 있었다. 정상훈 작가는 왜 '아빠, 할머니한테 무섭게 말 안 하면 안 돼?"라고 부탁하는 큰아들에게 왜 할머니 앞에서는 그렇게 화가 나는지를 솔직하게 고백한다. 그의 큰 아들은 올해 성년의 나이에 들어선 것 같던데, [어느 날, 죽음이 만나자고 했다]를 읽으며 아버지가 자신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얼마나 성찰적인 인물인지를 느끼지 않을 수 없겠다.

정상훈 작가의 솔직함에 압도 당해서 [어느 날, 죽음이 만나자고 했다]를 작가의 개인사와 정신적 문제 측면에서만 소개했기에 작가에게 미안한 마음이 든다. 이 책은 '국경없는의사회' 활동가가 몸으로 기록한 현장일기로도 충분히 의미 있는 자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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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크pek0501 2021-07-18 11: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으음... 어떤 책인지 알겠어요. 리뷰에서 말하지 않은 부분까지도요.
서울대 나와서 왜 우울증인가가 아니고, 제 시각에서 보자면 우울증은 서울대 출신이 가장 많을 듯합니다. 이런 류의 사람들은 인간 관계에 서툴고 고립되어 공부에만 몰두하는 경향이 있어서 어떤 문제로 스트레스가 생기면 잘 풀 수 있는 방법을 모를 것 같아요. 운동을 좋아한다면 운동으로 풀 텐데, 이런 사람들은 대체로 취미를 가진 사람이 드물 것 같아요.
다 그런 것은 아니겠지만 서울대 출신이라서 오히려 정신이 덜 건강할 수 있을 것 같단 말씀이에요.
이게 저의 편견일 수 있겠어요. ^^

얄라알라 2021-07-18 17:14   좋아요 0 | URL
저는 저자 정상훈에 대해 이 책에서 전하는 정보 외에는 전혀 아는 바가 없지만, 이 정도 솔직한 자기성찰을 독자에게 드러낸 것도 결국은 가족에 대한 사랑 때문에 가능했다고 생각이 들었어요. 책의 후반부에서는, 저자가 어머니의 발병(치매)과 간병, 그리고 죽음을 통해서 어머니와 화해한 내용이 등장하며 한결 톤이 부드러워집니다. 쓰면서 치유되고, 또 치유되었기에 이렇게 쓸 수 있는 것이 아닌가. 또 뭉클해집니다.

페크님 좋은 이야기 나눠주셔서 감사합니다.

레삭매냐 2021-07-18 22:36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저는 미리보기 하면 거의 사게
되더라구요...

아주 책쟁이들을 낚는 그런
서비스가 아닌가, 싶습니다.

고양이라디오 2021-07-19 11:23   좋아요 1 | URL
ㅎㅎㅎ 미리보기 서비스는 레삭매냐님을 낚기위한 서비스군요^^

얄라알라 2021-07-19 23:42   좋아요 0 | URL
레삭매냐님께서 졸지에 ‘낚인˝ 분이 되어버리셨어요 ㅎㅎㅎ

고양이라디오 2021-07-19 11:2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 책 꼭 읽고 싶네요!!!

좋은 책 소개 감사합니다.

2021-07-19 23:4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1-07-27 12:02   URL
비밀 댓글입니다.

얄라알라 2021-08-05 19:09   좋아요 0 | URL
<낯선 이와 느린 춤을>
고양이라디오님께서 소개해주신 이 책도 챙기겠습니다!!
 
누런 벽지
샬럿 퍼킨스 길먼 지음 / 내로라 / 202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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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시간이면 읽을 책을 한 달이나 방치한 이 심보는 무엇이었나? 알라디너분들께 추천 많이 받다 보니, 읽은 듯 친숙했던 탓일까? 자전적 소설에 감정이입함으로써 에너지가 소모된 후의 폭풍을 미리 걱정했던 것일까? 




 [누런 벽지]를 읽고, 두 가지 점에서 안도했다. 


1. 먼저, 아름다운 한글에 "누렇다"라는 형용사가 있어 다행이다. 샬롯 퍼킨스 길먼Charlotte Perkins Gilman이 "아픈 역할 sick role"을 수행하며 미쳐가는 여성을 그려낼 때, 그 배경이 되는 방의 벽지색상은 "누런 색"이어야 했다. 상큼한 레몬색이나, 때 안 탄 병아리깃털 색이어서는 안 된다. 그것은 "변색된, 들끓는 불결을 담은, 전반적으로 칙칙한, 군데군데 폭력적일만큼 선명한 오렌지 색이 섞여 있고 나머지 부분은 매케한 유황을 떠올리게 하는 (37)" 누런 색이어야 한다. 



"The color is repellant, almost revolting; a smouldering, unclean yellow, strangely faded by the slow-turning sunlight. It is dull yet lurid orange in some places, a sickly sulphur tint in others (36)"



2. "월간내노라"라는 작은 출판사의 기획이 성공예감이라 안도했다. '내노라" 팀(?)은 한달에 한 편, 영문 단편 소설을 번역해서 시리즈로 출간하고 있다. "짧지만 강렬한 이야기"를 선정해내고, 유려한 문체로 번역해내는 이들은 페미니즘, 영문학, 문화비평을 넘나드는 지적 모험가들이 아닐까 상상해본다. 


[누런 벽지]를 읽고 분노했다. 


[누런벽지]가 자전적 소설임을 모르고 읽었다면 가스라이팅 실시간 중계 스릴러라고 착각했을까? 


아내는 "방 안에 갇힌 다 큰 아이"로 길러진다. 배려심 많은 남편이 돌보고 길러준다. 그 남편은 아내를 "꼬마 아가씨 little girl"이라 부르고, 아내에게 "바라는 만큼 한껏 아프라"고 축복을 내려주기도 한다. 심지어 의사이기까지 하다. 아내에게 신선한 공기와 양질의 먹을 것, 휴식을 선사해주며 아내의 건강 회복을 돕는 좋은 남편이라는 역할에 푹 빠져 있다. 이 연극이 잘 수행되려면, 아내는 아파야 한다. 남편의 돌봄을 더 격하게 필요하기 위해서는,  더 취약하기 위해서는 지적인 노동(?)은 금물이다. 쉬어야 한다. 글을 써서도 안 된다. 아내는 남편의 시선과 기대, 자신에게 기대된 "환자역할"을 잘 안다. 역겹다. 누런 벽지만큼이나 닳아빠진 고정관념이 역겹다. 놀랍게도 이런 "방구석에 가두고 쉬게하기"가  19세기 특히 여성에게 많이 제안되었던 "휴식치료법 The Rest Cure"라 한다. 돌봄이 필요하지 않은 주체인데, 그 아내는 돌봄받아야만 온건해지는 환자, 객체로 좁혀진다. 존재는 확장이 아니라 오그라든다.



"사회적 단절", 2~3마디의 문장만으로 충분히 삶이 가능한 하루하루를 진공 속에 반복하던 때, 일하고 싶었다. 긴 문장을 뿜어내며 진공 밖 세계의 요철과 압박감을 느껴보고 싶었다.허나, 나를 방 안으로 끌여들였던 목소리는 노기를 띠었다. "네 그 욕심이, 애정결핍증후군 낳는다. 노란 바나나를 탐닉하는 걸 보니, 엄마됨의 부족함을 바나나의 달달함으로 채우려는 걸 보니, 너는 더더욱 집 안의 천사가 되어야 한다." 


나는 바나나를 최근까지도 먹지 않았다. 못 먹겠다. 누런 벽지를 다 뜯어낸 들, 세포 자체에 수분이 빠져나가는 이제 "집안의 천사"는 감지덕지의 역할인가? 바나나를 탐닉해야하는 건 어쩌면 나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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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인트 (양장)
이희영 지음 / 창비 / 201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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얇아 보이는데 판매지수가 대단하다. 무려 6만점 대. 게다가 100자평이건 리뷰건, 호평 일색. 

소설 [페인트]를 만났다. 


기대가 컸고, 몇 가지 선입견이 있었다. 


  1. 첫째, (표지만 보고) 그래픽 노블인줄 알았다. 
  2. 둘째, (소설 도입부까지는) 근 미래, 저출산 한국 사회라는 구체적 배경 아래 인구의 정치, 재생산신기술 및 새로운 형태의 가족들과 얽힌 사회문제를 비판하려는 목적성이 뚜렷한 소설이라 생각했다. 
  3. 셋째, (끝까지 다 읽으면서도) 작가가 20대 후반에서 30대 초반, 아직 생성가족을 만들지 않은 비혼자에 양육 경험 없는 사람이라고 상상했다. 



촉도 없으면서 감 있는 척 했다. 셋 다, 그렇지 않았다. 


  1. 첫째, [페인트]는 그림 없는 소설이었다. 그것도 아주 참신한 소설. 
  2. 둘째, 물론 출생방식 및 양육 경험에서의 차이로 사람을 구별짓고 차별까지 하는 사회, 출산과 양육이라는 영역에 국가가 깊숙히 개입하고 통제하는 양상, 자본이 매개된 위선의 관계(정부보조금을 타기 위해서는 입양에 성공해야 한다. 따라서, 최대한 준비된 모범적인 부모의 모습을 연출해야한다) 등을 대놓고 비판한다. 하지만, 소설 후반으로 갈수록, 이 작가는 정서적인 측면에서 부모-자식 관계, 생물학적 부모와 사회적 부모 사이의 우선성 문제, 양육과정에서의 트라우마를 극복하는 인간적 성장일기를 이야기한다는 인상을 받았다. 
  3. 셋째, 놀랍게도 작가는 열두살 자녀를 둔 엄마이자 아내였다. 즉 최소한 3~40대 일 것으로 추정한다. 생성가족을 경험하지 않은 비혼자일 거라는 상상에 보기 좋게 콧잔등을 얻어 맞았다. 


 이희영 작가가 하루 다섯 시간 이상씩 키보드를 두드려 낳은 작품이 [페인트]라 한다. 작가는 회색 중에서도 검은색에 가까웠던 유년기 회색을 본인의 자식에게 물려주고 싶지 않아 노력하고 있고, 마음이 아픈 자신을 치유하기 위해 글을 썼다 했다. 자라지 못한 자기 안의 어린아이와 놀아주는 방식이 글쓰기라 했다. 가시돋힌, 냉소적인, 세상을 뚫어보는 애어른. 그 아이와 많이 놀아주어야 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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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cott 2021-02-17 20:2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와 전 페인트 현대판 피노키오 같다고 생각했어요

얄라알라 2021-02-19 22:13   좋아요 1 | URL
scott님께서 피노키오 언급하셔서 며칠 동안 짬짬 생각했어요^^ 작가님께서 scott님 피드백 들으면 기뻐하실 것 같아요. 저는 Janu301이 극도로 냉소적이고 소위 애어른인 점이 내내 맘에 걸리더라고요. 비워지고 틈새가 보이면서 오히려 예측도 못하게 크는 것이 어린이, 청년(?)일 텐데 자기를 지키기 위해서라도 틈을 안 보이게 큰다는 게 쓸쓸했거든요.
 
그래봤자 책, 그래도 책
박균호 지음 / 소명출판 / 202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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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가에서 뽑아 들기 가장 쉬운 높이에 '조르르' 진열된 책들이다. 설 연휴가 끼어 있기 때문에 더욱 마음이 바빠진다. 도서관에서 빌려 온 책들은 "꼭 읽고 반납한다"라는 (거의 완수하기 어려운) 임무를 계속 떠올리기 때문이다. 그렇다. 나는 공공도서관 시스템을 최대 활용하는 수혜자이다. 상호대차, 도서예약, 희망도서 신청 등등. 사서도 아니건만, 여러 도서관 거의 매일 순회하는 이유이다(도서관별로 최대 대출권수를 채워 대출하면 2-30권도 빌릴 수 있다!). 처음부터 책을 이렇게 빌려서 읽지는 않았다. 적어도 관심 분야인 사회과학, 인문학 신간은 대부분 샀다. 색열필로 칠하고, 메모하고 줄 그어가며 읽었다. 그러면 내용이 훨씬 잘 기억나기 때문에 다음번 참고할 때 필요한 페이지를 바로 찾을 수 있었다. 하지만, '비우고 또 비우기' 미니멀 강박은 책들을 몰아냈다. 있는 책도 부담스러운데, 더 들이기 조심스러워졌다. 전략 수정. 도서관에서 빌려서 깨끗하게 읽고 반납한다. 일회성 만남이니, 잠시 빌어온 책 내용을 가급적 최대한 머릿속에 찍어두려한다. 리뷰를 이렇게 열심히 올리는 이유도 그 때문이다. 



서두가 길었다. 박균호 작가의 [그래봤자 책, 그래도 책]을 소개하려는 리뷰였는데 샛길부터 다녀왔다. 설레하며 [그래봤자 책, 그래도 책]의 첫 장을 펼쳤고, 중간엔 다른 책에 손 대지 않았을 정도로 한 호흡에 주욱 읽었다. 재미 있었으니까! 소명출판사의 정성 담뿍 담은 북디자인에 감탄하며, 그에 합당한 예의를 갖춰 소중히 책장 넘기며 읽었다. 책 곳간만 3곳에 나눠 채우고 있다는 저자의 독서 취향이 '다양성'을 추구하는 만는 만큼이나 [그래봤자 책, 그래도 책] 역시 틀에 매이지 않은 버라이어티 쇼의 재미를 준다. 책 덕후, 특히 책 사모으는 재미에서 삶의 소소한 즐거움을 느끼는 책 수집가로서의 고백기, 출판사와 출판인들의 무대 뒤 이야기, 책 좋아하는 이들끼리는 통할 '덕질' 노하우 공유, 그리고 본격적 서평까지 다양하게 버무린 즐거운 책이다. 




무엇보다 [그래봤자 책, 그래도 책]의 큰 소득은, "책덕후"의 범주를 생각하게 한 점이다. 나는 휘발하려는 활자를 어떻게 해서든 물컹거릴 뇌 안쪽으로 붙들어 매려고 노력하는 범주의 덕후일 뿐 책 수집하는 데 취미가 없다. 위 주머니는 작은데, 진수성찬을 차려 놓은들 아까워질 거라는 걸 알기 때문에 내 소화력 수준의 서가만 유지한다. "비우자"  미니멀리스트이다. 반면, "책덕후" 범주의 한 축은 책의 물질성에 환희를 느끼고, 그 물질과 물질을 연결하는 보이지 않는 끈들을 재구성하는 고고학자들이다. 박균호가 그렇다고 느꼈다. 물질로서의 책에서 그것을 쓰고 만들고 읽는 사람들의 비물질적 관계를 찾아낸다. 또 자신이 책에 생명을 불어넣으며 느끼는 환희를 기꺼이 다른 책덕후들과 나누고자 한다. 




그러기 위해서, 그는 아내의 눈을 피해 책을 사들이고, 이미 소장한 책인 줄을 까맣게 잊고 같은 책을 사기도 한다. 심지어는 주문하자마자, 자신의 서가 어딘가에 그 책이 있다는 것을 인지하기도 한다. 솔직한 저자의 실수담(?)에 인간적인 매력도 느낀다. 솔직하게, 담담하게 그러나 읽고 나면 묵직한 알갱이들이 가라앉는 박균호의 화법. 그래서 중고등학교에서 오래 재직해온 직장인이자 생활인이면서도 벌써 열 손가락에 가까운 숫자의 책을 펴낸 게 아닐까? 1쇄가 아닌 2쇄, 2판, 3판 가는 책을 펴낸 게 아닐까?


박균호 작가가 소개한 책수집가, 애서가 중에서는 유난히도, 그 책들을 사회에 환원한 대인배들이 많이 등장한다. '성문종합영어'의 저자이자 국립중앙박물관에 어마어마한 고서들을 기증한 송성문 선생이나, "임화 문화예술전집" 출간에 소명의식을 가진 박성모 사장 등이 그렇다. 나는 박균호 작가도 언젠가는 자신의 책 곳간을 열어 사회를 밝히는 데 쓰려는 (무의식적? 의식적?) 지향이 그런 선택을 하게 했다고 믿는다. 박균호의 책 곳간은 언제, 어떤 방식으로 열릴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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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미 2021-02-08 12:58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솔직히 인정할께요!나중에 읽으려고 잘 버텼는데 사랑님까지 ‘한 호흡에 쭉‘이라니..두손두발 다들었음!ㅋㅋㅋ🤔저도 어서 읽어볼래요!
뒤집혀 있어서 끌린 <그림속천문학>도 찜~♡

얄라알라 2021-02-08 13:07   좋아요 3 | URL
이명현 선생님 대중 강연에서 들으니, 천문학과 명화 사이에 또 흥미로운 끈들이 있더라고요^^ 저도 아직 <그림속 천문학> 못 읽었어요. 헉헉헉! ^^

2021-02-08 13:4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1-02-08 15:01   URL
비밀 댓글입니다.

붕붕툐툐 2021-02-08 20:59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ㅋㅋㅋ마지막 대목을 읽고 박균호 선생님이 심리적 압박을 무척 느끼실 거 같은...ㅋㅋㅋㅋ
저도 사실 이 책 읽는 중인데, 명품 리뷰 읽으니, 저 다 읽고 북사랑님 리뷰를 읽으시오라고 해야 하나 고민이 되네용~ㅎㅎ

박균호 2021-02-08 21:34   좋아요 1 | URL
툐툐님의 리뷰를 간절히 기대하고 았습니다 !!

붕붕툐툐 2021-02-08 21:37   좋아요 1 | URL
아니 또 저자님이 이렇게 원하시면, 제가 외면을 할 수가...ㅋㅋㅋㅋㅋ
 
러스트벨트의 밤과 낮 - 여성 철강 노동자가 경험한 두 개의 미국
엘리스 콜레트 골드바흐 지음, 오현아 옮김 / 마음산책 / 202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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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스트벨트Rust Belt" 

이름 그대로 녹슨 갈색 혹은 잿빛을 상상하게 하는데, 책 표지의 오묘한 분홍빛에 끌렸다. 3년 전에 읽은 [힐빌리의 노래]와 마찬가지로, 학력자본과 필력을 생존무기 삼아 일어난 러스트벨트 출신 저자가 썼다. 사진을 뒤져보아도, [러스트벨트의 밤과 낮] 표지 사진처럼 제철소 연기가 매혹적인 꽃분홍색인 경우는 드물다. 



이처럼, 저자 엘리스 콜레트 골드바흐는 그 주황+분홍의 불꽃에 장엄한 의미를 부여한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독자로서 나는 420쪽이나 되는 책을 읽는 내내 그녀가 제철공장의 기계와 작업환경에 얼마나 큰 두려움을 느꼈는지, 죽음의 공포가 얼마나 지속적이었는지를 파악했다. 저자는 어려서 수녀되기를 꿈꾸다가 교수가 되는 꿈을 품고, 대학원에서 영문학을 공부했다. 하지만, 학자금 대출을 갚느라 쥐가 출몰하는 아파트에 살아도 형편이 나아질 기미가 없자, 29세에 클리블랜드 제철소에 취직했다. 그 곳 보수가 넉넉했기 때문이었다. 



엘리스 골드바흐, 저자는 이미 고소공포증을 극복해가며 페인트공으로도 일해봤고 무엇보다 여자도 잘 할 수 있다는 걸 보이고 싶었다. 하지만, 러스트벨트 제철소 일은 쉽지 않았다. 신입 사원들에게 안전 교육만 수백시간을 시키고 "주황모자"임을 지속적으로 상기시켰다. 이유가 있었다. 상상하기에도 버거운 사고로 목숨을 잃는 노동자들이 많기 때문이다. 저자가 이 곳에서 3년을 일하며 주황모자(신입)를 벗고, 노랑모자(경력자)를 썼지만 "사고사"에 대한 공포는 압도적이다(적어도 책 읽는 내내, 감정이입 잘하는 나는 공포를 느꼈다).  


  



불규칙한 교대 근무 시간과 육체적으로 극한 노동 때문에 저자는 지쳤다. 게다가 가문의 병력으로 내려오는 '조울증' 증상이 심해져서 교통사고를 내거나 스스로 정신병원을 찾기도 했다. 포기하고픈 상황에서도 저자는 제철소 동료들의 동료애 덕분에 힘을 얻는다. 아픈 이야기를 품고 있으나, 주저 앉지 않고 묵묵히 살아나가는 블루칼러 노동자들에게 인간적인 존경심을 품으며 일어날 힘을 얻는다. 저자 동영상 인터뷰를 보면 누구라도 느끼겠지만, [러스트벨트의 밤과 낮]은 철강 노동자로 대변되는 미국의 블루컬러 노동자들에 대한 헌사이다(플러스, 그런 노동자들을 선동하는 트럼프에 대한 증오심을 표출하는 글이기도 하다.)



    


Jean Beaufort/CC0



[러스트벨트의 밤과 낮]는 미국에서도 베스트셀러였고, 한국에서는 '사회학, 여성학'과 연관지어 홍보된다. 하지만, 엄밀히 말해서 사회과학적 분석의 비중은 극히 낮다. 페미니즘의 교점도 얼마간 찾을 수는 있지만, 이 책은 보다 정확히는 "자전적 치유수기"로 보인다. 일상생활이나 정규직 노동자 되기 어려운 큰 정신적 문제를 안고 살던 저자가 3년 간의 제철소 노동을 마치고, 다시 석사 학위를 따서 영문학을 가르치는 대학교수가 되기까지의 여정을 담담히 서술한. 


아팠던 사람들, 혹은 아픔이 있는 사람들은 글쓰기로 풀어내는 과정이 필요한가 보다. [닥터 셰퍼드, 죽은 자들의 의사]에서도 저자 셰퍼드 박사가 자신의 정신병력을 오픈하는 마지막에 가서야 왜 이처럼 소소한 자기 이야기를 드러냈는지 이해가 되었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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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돌이 2021-02-03 14:30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예전에 제철소 견학 간적이 있었어요. 저 정말 무서웠어요. 그 작업장의 크기, 온도, 소리도 오싹했고, 엄천난 쇳물들이 컨베이어 벨트를 따라 흐르는 광경은 지금도 안잊혀져요.
요 며칠 책 읽으면서 노동의 가치는 과연 어떻게 매겨지는게 옳은건가 이런 잡다한 생각들을 하고 있는데 이 책 소개를 보니 또 아 정말 소위 말하는 블루칼라들의 노동에 대해 우리가 얼마나 잘못판단하고 있나 하는 생각이 더 드네요.

얄라알라 2021-02-03 14:36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소리에.대한 묘사가 지속적으로 나오더라고요 안전교육동영상에서 담아내지 못한게 소음...소리.. 대화가 불가능한 상황같은데도 일하시며.안에서 소리 질러 의사소통하는 형식인거같았어요..저도 책읽으며....저자가.불안해하듯 불안감을 느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