완벽한 아이 - 무엇으로도 가둘 수 없었던 소녀의 이야기
모드 쥘리앵 지음, 윤진 옮김 / 복복서가 / 202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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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섯째 아이] (도리스 레싱)

&

완벽한 아이 (모드 쥘리앵)



노벨문학상 수상작가 도리스 레싱의 [다섯째 아이]를 재미있게 읽고 재확인한 지혜가 있습니다.

'책 덕후들의 리뷰가 뜨거울 땐 다 이유가 있다, 미루지 말고, 바로 읽어라.'

그래서 이번에는 [완벽한 아이]를 읽었습니다. '아이 child'만 일부러 찾아다닌 건 아니고요, 이 책 역시 최근 몇 년 이웃님들 서재에 자주 올라왔거든요. 역시나! 재미있었습니다. 토요일 오후부터 잠들기 전까지 책을 손에서 놓지 못했습니다.




[완벽한 아이 (The Only Girl in the World)]는 회고록입니다. 소설이 아닙니다. 그럼에도 읽는 내내, 1인칭 시점에서 회고하는 '모드 쥘리앵'이 가공의 인물이라고 착각이 들었고, 차라리 그러기를 바랐습니다. 그 정도로, 그녀가 견뎌 낸 유년기는 가혹했습니다. 20세기 유럽, 그것도 프랑스라는 문명국가에서 한 아이가 18년이나 감금된 채 가스라이팅 당하고, 정서적이고 육체적 학대까지 감내했다는 사실이 믿기 어려웠습니다. 차라리 소설이라면 마음이 덜 불편할 텐데, '모드 쥘리앵'은 실존인물입니다. 책 표지에 빨간 두건을 쓴 아가가 바로 쥘리앙입니다. 암울해집니다. 그 가혹한 18년을 견뎌낸 아이는 어떻게 살란 말입니까? 다행히 모드 쥘리앵은 정신의학을 공부한 후, 현재 심리치료사로 활동 중입니다. 자신처럼 학대 받고 가스라이팅 당해 어둠의 세계에서 빠져나오지 못한(했던) 이들을 돕고 있습니다.


 18년 삶을 축약한 [완벽한 아이]를 빠르게 이해하는 데, 다음 두 단어가 유용합니다.

"식인귀" 그리고 "초인"

먼저, 식인귀. 저자 '모드 쥘리앵'은 이 책을 어머니께 바칩니다. 그런데 수식어가 예사롭지 않습니다.

식인귀의 첫 희생자였던

나의 어머니에게


식인귀? 

네, 실은 모드 쥘리앵의 아버지를 칭하는 말입니다. 실존 인물이자 성공한 사업가였던 모드 디디에를 구글 검색하면 거구의 풍채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딸과는 무려 56살이나 나이차가 나는 이 남자는, 완벽한 아이, 즉 초인의 길러내기 위해 위해 말 그대로 씨앗부터 사 왔습니다. 이 남자는 6살밖에 안 된 여자아이를 가난한 광부 아빠에게서 사 온 후(말이 좋아 잘 키워주고 교육도 시키겠다는 제안이지, 현대판 씨받이와 다를 바 없는 발상이기에 소름이 돋습니다), 6살 소녀를 22년간 착실히 기르다가 어느 시점에서 자식을 생산하게 합니다. 계획된 것입니다. 어린 모드 쥘리앵조차도 가족관계의 기형성을 인식합니다.

***

아버지는 정말 내 아버지일까, 어쩌면 어머니의 아버지가 아닐까.

[완벽한 아이] 44쪽


모드 쥘리앵의 어머니 역시, 딸에게 가해자인 동시에 피해자입니다. 이렇게 어린 시절을 회상합니다.


어느 날 큰언니 앙리에트가 네 아버지를 데려왔어. 처음 본 내 눈에는 아주 크고 무서운 어른이었지...네 아버지가 처음 찾아왔을 때 난 여섯 살이었어. 지금 네 나이지. 네 아버지에게 나도 너 못지 않게 중요한 존재라는 걸 알아두렴. [완벽한 아이] 45쪽


****

같은 남성을 아버지로 둔 어머니로서 딸을 제대로 사랑하기 어려웠던 걸까요? 질투였을까요? 공포감 때문이었을까요? 어머니는 딸이 겪는 고행의 설계자는 아닐지언정, 집행자 역할에 무척 충실합니다. 외부 세계와 단절시켜 학교도 보내지 않고 엄격한 가정 교육을 시키는 아버지의 조력자가 됩니다. 쥘리앵의 아버지는 특전사 훈련인 양 신체적 극한 상황을 견뎌내고 욕구들조차(수면욕, 맛있는 음식을 먹고, 따뜻한 물로 씻고, 깨끗한 환경에서 살고 싶은 욕망)도 억누릅니다. 피우던 담배를 쥘리앵의 허벅지에 대고 끄는 가학적인 음악 선생님을 아예 가정 교사로 들이지를 않나, 말 그대로 물에 집어 던져서 죽음의 공포 속에서 수영을 스스로 깨치도록 유도합니다. 쥐떼가 찍찍 거리는 어두운 지하실에 가둬 놓거나, 전기 울타리를 손으로 쥔 채 포커 페이스로 고통을 참으며 공포를 극복하도록 훈련합니다. 최악은, 이 모든 부조리한 훈육과 학대가 어떠한 위기 상황에서도 살아남을 수 있는 '초인,' '멈추지 않고 땅을 파내려가는 나사송곳' 되는 과정이라고 어린 소녀를 가스라이팅한 것입니다. 그래서 [완벽한 아이]에는 "초인"이라는 단어가 자주 등장합니다. 




자신의 존재 이유가, "인내를 통해 승리하는 나사송곳이 되"(93) 는 것으로 세뇌 당했던 쥘리앵은 그렇게 초인으로 길러집니다. 가스라이팅 당한 나머지, 자신의 아버지가 환생을 거듭하며 피타고라스에게서 배웠고, 템플기사단의 갑옷을 입고 십자군전쟁에도 참가하는 등 기적의 인물이라고 믿었죠. 그래서, '아버지 - 어머니 - 자신' 3인으로 구성된 기괴한 컬트 집단에서 별반 반항 하지 않고 컸던 것입니다. 과연 딸을 세상에 둘도 없는 초인으로 강화시키려는 아버지의 계획은 성공했을까요? 

****

모드 아버지에게 반항하는 이 대목이 의미심장합니다. 


여름이다. 우리는 베란다에서 점심을 먹는다. 오래된 네델란드 치즈를 잘라야 하는데 굳어서 잘 안된다. 어머니가 화를 내며 치즈와 칼을 빼앗아가다 손을 벤다. 어머니가 나 때문에 다쳤다고 화를 낸다. 아버지는 "정신 버쩍 나게 혼내줘야겠다"라고 고함을 친다. 그 순간 나는 고함소리에 진저리가 난다. 칼을 집어 들어 치즈 도마 위에 놓인 다른 쪽 손에 힘껏 내리꽂는다... 내 손에는 여전히 칼이 박혀 있다. 아버지가 진다. 아버지가 졌다. 어머니에게 소리친다. "위스키 가져와. 그 손 상처에 반창고도 붙이고."

...

불편한 무언가가 마음을 들쑤신다. 조금 전 내가 위스키를 부을 때 아버지의 이글거리던 눈 속에서 보인 어던 것 때문이다. 그 희미한 그림자...그것은 자부심이었다...지금 나는 오히려 아버지의 기대에 부응하고 있는 게 아닐까? 힘, 용기, 결단, 위력...아버지가 바라는 이런 것들을 실천하고 있는 게 아닐까? 나는 스스로 무얼 하는지도 모른 채 아버지의 정신적 지령에 복종하는 불쌍한 꼭두각시일 뿐일까?


태산같이 꿈쩍도 안할 것 같던 아버지와의 기싸움에서 이겼다는 기쁨도 잠시, 딸은 자신의 이런 반항적 행동 역시 '아버지가 설계한 작품의 일부가 아닐까? 자신은 꼭두각시에 지나지 않을까?' 회의합니다. 

실제, 18년 만에 모드 쥘리앵은 그 집에서 나올 수 있었으나, 진정한 해방은 아니었습니다. 아이러니하게도,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억눌렸던 고통들이 신체화되어 기절과 공황발작이라는 형태로 새롭게 쥘리앵을 잠식합니다. 



다행히 어린 시절, 동물과의 교감, 음악과 책이 소녀가 무너지지 않게 지탱해 주었듯, 20대의 모드 쥘리앙은 '머리 고치는 의사'가 되겠다는 유년기의 꿈을 안정제 삼아 공황발작과 공포를 다스리게 됩니다. 자신을 일으켜 도움으로서 남을 돕는 사람으로 우뚝 섰지요. 그래서 지금 우리가, 모드 쥘리앵의 회고록, [완벽한 아이]를 읽을 수 있는 것이고요. "무엇으로도 가둘 수 없었던" 소녀, 모드 쥘리앵의 어깨에 따뜻한 손은 살포시 얹어주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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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ersona 2023-01-29 22:4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엠마 도너휴 책이나 제이시 두가드 책이 생각이 나네요. ㅠㅠ 에고 읽기 힘드셨겠어요. 칼 이야기는 너무 끔찍해요. ㅠㅠ

얄라알라 2023-01-29 23:04   좋아요 2 | URL
엠마 도너휴 / 제이시 두가드....


바로 찾아볼게요. 감사드려요 Persona님,
네 읽기 힘들었어요. 동시에 너무나 재미있었어요. 정신과 몸을 억압해도 틈새를 비집고 밖으로 나오려하는 아이의 모습이 행간에 있어서...‘칼‘ 에피소드는 끔찍한 동시에, 벗어나고 뒤돌아 봤더니 자신이 여전히 그 미로 안에 갇혀 있는 겹겹의 가위처럼 느껴져서 무서웠어요

얄라알라 2023-01-29 23:07   좋아요 2 | URL
세상에나....제이시 두가드 역시 실존 인물이네요...힘들어서 <도둑맞은 인생>은 못 읽겠네요^^;;

persona 2023-01-29 23:20   좋아요 2 | URL
엠마 도너휴 책 <룸Room>도 프리츨 사건의 희생자에게 직접 인터뷰해서 쓴 소설이라 거의 실화예요. 둘다 읽다가 다 못 읽었답니다. ㅠㅠ 그런 실화라니 너무 끔찍하죠. ㅠㅠ

초란공 2023-01-29 23:24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헉... 실제 피해자가 쓴 글이라는 말씀이네요. 생각만 해도 소름돋습니다. 소설이나 영화가 괜히 나오는 게 아닌 것 같아요. ㅜㅜ

얄라알라 2023-02-01 01:56   좋아요 0 | URL
[미녀와 야수]였던가요? 영화 보다, 주인공 엠마가 야수의 성에서 답답할 때, 도서관에서 미소를 찾는 장면에서 저는 저도 모르게 눈물이 펑펑 터졌었는데 [완벽한 아이]의 모드 쥘리앵 역시, 책과 음악, 동물친구들과의 교감이 정신의 줄을 잡게 해주었어요....

초란공님 말씀처럼 소름 돋는 이야기 속에서 희망이 보이는 부분이었네요...

오히려 실제 영화로, 영상으로는 이 이야기를 도저히 못 볼 것 같습니다 T T

호우 2023-01-30 09:1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읽는 동안 많이 힘들 거 같아요. 그런데 읽어보고 싶기도 하네요. <룸>은 영화로 봤는데 소설은 더 심각하겠죠? 대개 영상화 과정에서 어느 정도 수위 조절을 하는지 글이 더 쎄더라고요.

얄라알라 2023-02-01 01:57   좋아요 1 | URL
저자 모드 쥘리앵이, 일기를 쓰지도 않았고, 아빠가 원하는대로 빡빡한 스케줄대로 살다보면 일기 쓸 시간도 없었을 텐데, 어린시절을 저렇게 상세히 기억하고 묘사할 수 있다는 점도 놀랍더라고요...

호우님께서 말씀하셨듯, 힘들기도 했어요
하지만, 제가 이런 잔혹한 이야기에 찐한 호기심을 느낀다는 자체가 죄스럽기도 했어요. 동시에...

그레이스 2023-01-30 17:2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도 비슷한 생각을 했습니다.
차라리 소설이었으면 하구요.

얄라알라 2023-02-01 01:58   좋아요 1 | URL
네, 그레이스님, 분명 논픽션인걸 알면서도
제가 읽으면서 자주 소설이라고 상상하고 있더라고요

고양이라디오 2023-01-31 10:2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실화라니... 참 현실은 무섭고 대단합니다.

얄라알라 2023-02-01 02:00   좋아요 1 | URL
고양이라디오님 말씀을 들으니, 사실 멀리 196-70년대 프랑스의 예가 아니라
지금 이 사회에서도 많은 예가 있을텐데...

그 생각 하니, 씁쓸하고 맥이 빠지네요....^^;;;
 
천 번의 죽음이 내게 알려준 것들 - 호스피스 의사가 전하는 삶과 죽음에 관한 이야기
김여환 지음 / 포레스트북스 / 202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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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_ 死 _ ◆(검은색) 


F층.

21세기. 2023년인데, 아직도 4층을 "F"로 표기한 엘리베이터 버튼을 종종 본다. 영화관에서건, 음악회 객석에서건 "4열" 좌석을 강박적으로 피했던 친구도 생각난다. 그 친구, 여전히 숫자 "4"에서 도망가며 살고 있을까? 포천시 모현 호스피스의 수녀님들은 하늘색 베일을 쓰신다. 검은색 베일은 상복 혹은 "死"를 연상시키니까...


여전히 한국 사회에서 "죽음"과 "죽어감"은 금기의 화두인가? 입 밖으로 내뱉지만 않는다면, 초대장 발권을 막을 수 있는 불청객인가? 아. 니. 그렇지 않다는걸, 우리는 안다. 호스피스 의사 김여환이 [천 번의 죽음이 내게 알려준 것들]에서 전하는 핵심 메시지 역시 그것이다. 죽음은 피하거나 덮을 수 없으며, 독학이 불가능하다. 따라서 인간은 타자의 경험을 통해 죽음을 배운다. '너/그것/그들' 주어로 전개되는 죽음의 현재성은 내가 필연적으로 도달할 미래라는 것. 발화하지 않거나, 초대하지 않는다 해서 나를 피해가지 않을 죽음. 그러한 죽음관이 있기에, 호스피스 의사 김여환은 환자와 환자의 보호자들에게 친절할 수 있었던 것 같다.


에세이에서 저자 김여환은 자신의 과거를 많이 드러내진 않는다. 알콜 중독자인 아버지와 정신분열증을 앓는 어머니 밑에서 컸고, '공부를 잘해서' 현실의 어려움을 극복하려는 노력 끝에 의대를 졸업했다는 정도? 저자는 그 귀한 졸업장을 묵혀둔 채 13년간 전업 주부로만 살다가, 40세에 수련의 과정을 시작했다.

저자가 소설가 박완서를 좋아하는 이유는, 박완서 역시 40세로 늦게 등단하였기 때문이라고도 했다. 비록 우여곡절 끝에 45세라는 늦은 나이에 직업세계에 본격 입문했으나, 김여환은 대구의료원 호스피스 완화의료 센터장까지 역임했다(현재는 가정의학과 전문의). 의사로서 천 번도 넘게 임종을 선언했던 경험을 토대로 [천 번의 죽음이 내게 알려준 것들]을 썼다. 환자, 환자의 가족, 호스피스 자원봉사자 등등 다양한 인물들이 에피소드에 등장한다. 읽으며, 유난히 와 닿았던 문장들을 옮겨 본다.



  • 우리는 늦기 전에, 더 늦기 전에 우리의 마지막과 접촉해야 한다. 한 번도 본 적 없는 연예인의 일상은 꿰고 있으면서, 한 번도 입밖에 내지 않을 영어 단어를 외우는 데는 많은 시간을 허비하면서, 정작 미래에 반드시 닥칠 죽음의 길에.대해서는 아무 지도도 가지고 있지 않다는 것이 얼마나 아이러니한가. 7

  • 죽음은 독학할 수 없다. 타자로부터 배워야 한다.8

  • 의학적으로 말기 암이란, 죽기.직전의 상태가 아니라 더는 항암제가 암세포를 죽이지 못ㅎ는 시기를 뜻한다 66

  • 죽음은 숨기고 싶었던 삶의 비밀을 서슴없이 내보인다. 이 가족에게도 말 못할 갈등이 있는 게 분명했다.67

  • 3명 중 1명이 암에 걸리는 현실에서 암 환자의 현재는 우리의 미래일 수 있다. 79

  • 병마로 눈빛이 흐려지고 나무껍질처럼 피부가.거칠어져도 한국 사람들은 후회나 미련보다 전성기의 추억이남겨준 자신감을 간직하고 있다. 1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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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삭매냐 2023-01-27 15:59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죽음은 독학이 불가하다.
타자로부터 배워야 한다.

전적으로 공감할 수 밖에
없는 말이지 싶습니다.

얄라알라 2023-01-27 17:13   좋아요 2 | URL
안녕하세요? 레삭매냐님
저도 저자인 김여환 선생님이 정서적으로나 물리적으로 지칠 수 있는 상황에서도 환자와 환자의 보호자에게 친절할 수 있었던 이유 중 하나가, 그(들)이 경험하는 죽음이 곧 나의 것이라는 성찰 떄문이지 않은가 하며 이 책 읽었어요^^ 2023년 차차 죽음학에도 손을 대고 싶어집니다^^

혹시 생각나시는 소설이 있으실까요? 넓고 깊게 읽으시는 레삭매냐님께 제가 부담을 드려보아요 ㅎㅎ

바람돌이 2023-01-27 16:52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저도 죽음은 타자로부터 배워야한다는 말이 들어오네요.
언제 닥칠지 모르지만 반드시 닥치고야 마는 것이 죽음인데, 죽음에 대한 터부를 깨는것부터 필요하다는 생각이 절로 듭니다.

얄라알라 2023-01-27 17:16   좋아요 0 | URL
당연한 말인데도, ˝죽음은 독학 불가˝ 이 표현 읽고 저 잠시 멍 때렸어요
다 아는 이야기인데, 막상 누가 입 밖으로 혹은 문장으로 확 고정 시켜 놓으면 현타 겪는 기분이랄까요.
1월도 이렇게 휘리릭 가버리네요...
죽어감의 순간에서는 이전 수십 년이 수초처럼 휘리릭 지나갈테지만요..


제가 좀....이상한 이야기를 했나봐요....자꾸시간이 가니 초조해서 하는 말이네요.

바람돌이님, 행복한 금욜 오후 보내시기를.....항상 제 서재 들려주셔 따뜻한 댓글 남겨주심에 감사드립니다

고양이라디오 2023-01-27 17:2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핵심 문장들을 보니 이 책 읽어봐야겠다는 생각이 드네요. 새해 죽음으로 시작하는 것도 아주 좋을 거 같습니다!

2023-01-27 17:2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3-01-27 23:51   URL
비밀 댓글입니다.

고양이라디오 2023-01-29 16:44   좋아요 1 | URL
벌써 읽으셨군요ㅎ 전 어제 도서관에서 빌렸습니다. 겨울이라 확실히 추워서 처지네요ㅠㅋ

독서괭 2023-01-27 17:3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와 40세에 수련의 과정을 시작하셨다니 대단하네요!
사람의 죽음을 천번 선언한다는 게 참 어떤 경험일지 상상이 안 갑니다. “한번도 입밖에 내지 않을 영어 단어를 외우는 데는 많은 시간을 허비하면서 정작..” 이 부분에 뜨끔합니다^^;

얄라알라 2023-01-27 23:49   좋아요 1 | URL
네, 독서괭님.

정말 대단한 결단이 아니고서는 13년간 전업주부로 지내다가 전문직에 도전한다는 게...

의학 지식적으로나 숙련도나 여러 면에서 수련의 과정에서 수모와 힘든 일을 많이 겪으셨던 것 같아요.

다 이겨내고 우뚝 커리어를 세우니 멋진 분이신 듯..

저도 ˝영어 단어를....˝ 이 부분에 뜨끔해서 책 읽다가 적어둔 문장입니다요 ㅎㅎ

서니데이 2023-01-28 16: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40대에 수련의 과정이면 이전에 배운 것들은 다시 배워야 할텐데, 시도하기 많이 어려웠을 것 같아요.
매일 열심히 살아야겠습니다.
얄라알라님, 추운 날씨 건강 조심하시고, 따뜻한 하루 보내세요.^^
 


다른 책을 읽는 중간중간, 도리스 레싱의 [다섯째 아이]가 생각난다. 어느 소설을 읽고도 이렇게까지 오래 찜찜해 한 적 없는데...... 왜일까?.....그건 아마도 "다섯째 아이"의 엄마, 헤리엇을 싫어하는 마음이 영 떳떳하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만약 내가 헤리엇과 같은 상황에 처한다면? 혼자 아이 넷을 돌봐야 하는 와중에 다섯째로 태어난 아이가 '半사피엔스 + 半네안데르탈인' 돌연변이로  느껴진다면? 그 누구라도 "모두에게(다른 아이들, 남편, 시댁 어르신, 친정 어머니...등)" 만족스러운 선택을 내릴 수 없음은 뻔한데, 내가 헤리엇에게 너무 가혹했나 보다. 


 https://blog.aladin.co.kr/757693118/14262653


반면, 왜 나는 지난 리뷰에서 헤리엇의 아버지, 데이비드에 대해선 이야기하지 않았을까? 이상적인 다산 가족의 환상이 산산이 깨졌는데도, 밑빠진 독 물 붓듯 양육비를 메꾸려 쉴 새 없이 일하는 데이비드를 나도 모르게 측은하게 보았나 보다. 늦었지만, 데이비드를 다른 관점에서 보려 한다. 

*

벤은 분명 데이비드의 자식이다. 하지만, 그는 다섯째 아이 벤에게 "어쨌건 그 앤 내 애가 확실히 아니야"(101)라며 선을 긋는다. 데이비드는 벤이 조금이라도 더 안전하고 나은 삶을 살 수 있도록 이끌어본 적도 없다. 작가는 데이비드의 속마음을 한 문장으로 보여준다. "적어도 그가 생각하는 한 벤은 해리엇의 책임이었고 자신의 책임은 아이들, 진짜 아이들이었다. (122)"

*

벤을 짐승이나 외계인으로 비인간화했던 헤리엇.

벤에게 애정 커녕 증오감을 품고 망설임 없이 밀어낸 데이비드. 

*  *

눈물이나 후회, 한숨이 데이비드가 상상해온 행복한 삶에 들어올 여지가 없듯 "부족한" 아이는 데이비드가 품을 여지가 없나 보다. 재력이 대단한 데이비드의 친부와 사회적 지위가 번번한 데이비드의 친모 내외가 수를 써서 벤을 시설에 감금하기로 결정했을 때 데이비드는 도리어 농담하며 웃기까지 했다. 지구에 잠시 왔던 벤이 이제 화성으로 돌아가려나 보다고.  시설에 가면 그 아이가 머잖아 죽을 거란 걸 뻔히 알면서도.....그것이 바로, 남들 보기 부족함 없는 이상적 가정을 꿈꿨던 데이비드가 자신의 세계에 들이기에 부적합한 자들을 처리하는 방식이었을지도 모른다.


소설 읽은지 한 일주일 만에 벤의 아버지 데이비드에까지 생각이 미친 걸 보면, 나 역시 돌봄의 주책임자를 엄마로 한정짓는 낡은 사고에서 벗어나지 못했던 게 아닐까? 부끄럽다. 반성한다.  여러모로, [다섯째 아이]는 여전히 내게 찜찜함을 남겨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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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괭 2023-01-13 05:3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어휴 전 이책 읽을 때 엄마에게 이입해서 너무 불쌍했어요 ㅠㅠㅠ <케빈에 대하여>랑 비슷한 시기에 읽어서 더 그랬던 듯도. 데이비드의 태도 지적해 주신 데 공감이 가네요. 순식간에 읽었던 것 같은데 기억에 오래 남는 소설 같습니다.

얄라알라 2023-01-13 15:02   좋아요 1 | URL
독서괭님도....여러 분이 그런 말씀 해주시네요

이렇게 저렇게 생각해도 떨떠름(?) 합니다....그래서 노벨문학상 수상 작가인가도 싶고요^^

고양이라디오 2023-01-13 10:35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궁금해지는 책이네요. 순식간에 읽어진다니 한 번 읽어보고 싶군요ㅎ

얄라알라 2023-01-13 15:01   좋아요 1 | URL
저도 첫 번째 읽을 때는, 쉬지 못하고 읽었어요. 외출하려다가 [다섯째 아이] 때문에 외출포기^^;;
고양이라디오님께서도 혹시 읽으시면 한 자리에서^^

yamoo 2023-01-13 13:02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내 애가 확실히 아닌데, 해리엇은 도대체 벤을 시설에서 왜 데려왔을까요?? 그냥 놔뒀다면 모든 가족이 해피했을 거 같은데...데려오고나서 무책임하게 부랑아 학생에게 맡겨버리고...우리나라 엄마였으면 대개 그런 선택을 하지 않았을 듯해요. 끝까지 책임지고 키워서 올바른 아이로 성장했을거 같다는 생각을 햇습니다..ㅎㅎ
 
다섯째 아이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7
도리스 레싱 지음, 정덕애 옮김 / 민음사 / 199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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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친 Y님께서 "각을 멈출 수 없게 하는 글의 힘이 새삼 놀라울 뿐"이라며 [다섯째 아이]의 리뷰를 마무리했다. 도리스 레싱의 이 소설을 읽고 나서 나 역시 생각을 멈출 수 없다. 꼬리를 물며 확장하는 질문 때문이 아니라, 해소 안 된 불편감, 즉 찜찜함 때문이다. 

(이하 줄거리 스포입니다)



24살 해리엇과 30살 데이비드는 파티에서 한 눈에 끌려, 결혼했다. 아이 예닐곱을 낳아 큰 집에서 뛰놀게 하는 부모를 꿈꿨던 이들은 지불 능력 밖의 대저택을 구입했다. 그들의 부모는 '행복한 영국인 중산층 가정의 전형'을 현실화하려는 신혼부부의 욕심을 에둘러 나무라면서도 지원하는 데 인색하지는 않았다. 


그 대저택, 같은 방에서, 


1. 1966년 큰 아들

2. 1968년 큰 딸

3. 1970년 둘째 딸

4. 1973년 둘째 아들이 잉태되었고, 태어났다. 


6년 사이 무려 네 번의 임신과 출산을 반복한 헤리엇은 감당하기 어렵게 전개되는 상황에 압도당했다. 짜증이 늘었고, 친정 어머니에게 점점 더 많이 기대었다. 하지만 "눈물과 속상함은 협의 사항에 결코 포함하지 않았던(49)" 이들 부부는 크리스마스나 여름 휴가 시즌이면 행복한 중산층 가정의 무대를 실수 없이 연출해냈다. 아슬아슬했던 평온은 오래가지 않았다. 피임이나 유도분만 등 일체의 기술적 개입을 배척했던 자연주의파 헤리엇이 덜컥 다섯째 아이를 임신했기 때문이다. 




헤리엇은 임신기간부터 그 태아를 남다르게 느꼈다. 그녀에게 산후 우울증이 있었던걸까? 헤리엇은 뱃속의 아기를 "원수, 야만적인 것, 짐승, 괴물"이라 여겼다. 심지어 "커다란 부엌 칼로 자기 배를 갈라서 애를 꺼내는 상상(66)"까지 했다. 그러니, 그 태아가 몸 밖으로 나왔을 때 얼마나 애정이 있었으랴! 아가를 향한 헤리엇의 증오와 혐오감은 점점 더 강렬해진다. 물론 아가의 생김새나 반응 패턴은 평범하지 않다(신생아 때는 엄마 젖가슴을 멍들게 하더니, 걸어 다닐 무렵엔 생닭을 이빨로 헤집어 놓았다). 다른 이들도 다섯째 아가 Ben에게 거리를 두고 비인간인 양 대우한다. 벤을 "외계인," "다른 종족" "몽골 사람" "네안데르탈 아기" "고약한 작은 짐승" "귀신이 바꿔놓은 아이" "도깨비"  "난쟁이" "호비트" "짐승 같은 것"이라 생각하는 인물들이 이 소설에는 계속 등장한다. 헤리엇은 온 세상이 아이에게 '비정상, 비인간, 다른 종족'이라 진단 내려주고(낙인 찍어주고), 자신을 "Poor Harriet"이라 동정해 주길 원한다. 자신은 남다른 아이를 낳았다는 이유만으로 죄인이 되었으니 희생자라는 논리이다. 



하지만, 자신이 벌린 상황을 수습하지 못해서 자신도 파멸하고 다른 가족의 삶까지 단절과 침묵으로 몰아 넣는 그녀는 과연 희생자인가? 그녀의 시가 부모들은 "대파국(99)"이 예견된다면서, 벤을 요양원(이라 말하고 수용소)로 보내 버린다. 침입자 별종 같던 존재가 사라지자 헤리엇 부부네 대저택엔 다시 웃음소리가 들려온다. 그러나 "그 앤(Ben) 내 아이가 아니야"라며 차갑게 손절했던 친부 데이비드와 달리 헤리엇은 죄책감과 공포심에 짓눌린다. 

결국, 그녀는 뻔히 "대파국" 결말이 예상되는 선택을 했다. 그렇다. 자신이 "고약한 작은 짐승"이라 부르던 그 아이를 다시 집에 데려와 "인간화시키려는(156)" 노력을 한다. 헤리엇은 심지어 자기가 내버렸던 벤에게 "진짜 자식 중 하나를 대할 때처럼(112)" 불쌍함을 느끼기도 한다. 과연 그녀는 죄책감 때문에 감당도 못할 거면서 다시 데려온 아이에게 끝까지 책임을 다했을까?



소설 초반부에 헤리엇의 친정어머니 도로시는 사위와 딸에게 "너희 둘은 마치 모든 것을 움켜잡지 않으면 그것을 놓쳐버릴 거라고 믿으며 살아가는 것 같구나."(23)라고 에둘러 꾸짖는다. 헤리엇의 시어머니 몰리는 "순응하지 않는 것처럼 보이고 싶어하면서도 사실은 인습의 정수였고 과장이나 과다함의 징후"(19)를 극혐하는데, 며느리를 그 표상으로 본다(시어머니와 며느리 사이는 소설 후반부에서는 틀어진다). 헤리엇은 자기 자식을 두고, "그 애는 인간이 아니다"(142) "정상이 아니다(70)"란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뱉어왔으면서, 막상 다른 사람들이 제 자식을 "몽골 사람"이냐 묻거나 "동물원에 가두자는 거냐" 물으면, 별안간 윤리적인 교양인이 된다. 

나는 엄마를 비난하는(mother blaming) 시선을 경계하지만 솔직히 해리엇에게 호감을 느끼기 어려웠다. 엄마로서가 아닌 한 성인으로 보아도 그러하다. 이중적이고 남탓하기 좋아해서 맘에 들지 않는다. 


챕터 나눔 없이 주욱 이어진 소설의 마지막 장은 당혹스럽게도,  엄마 헤리엇이 집나간 탕아, 벤의 불행한 미래를 과도하게 상세히 상상하는 넋두리로 끝난다. 45세 노안의 중년이 된 그녀는 대형 원목 식탁의 반들반들한 표면을 보면서 "화목한 가정과 행복"을 움켜쥐고자 했던 오만함을 반성한다. 20대에 4명, 30대 초반에 한 명, 모두 다섯 아이를 낳았어도 곁에 어떤 자식도 남아 있지 않은 외로운 엄마. 게다가 남편은 그녀에게 "우린 애가 없어. 해리엇. 아니, 나는 애가 없어. 당신은 애가 하나 있지."라며 정곡을 콕 찔러 준다. 

왜 노벨문학상 내공의 작가 도리스 레싱은, 주인공이 제 자식의 불행한 미래를 구체적으로 상상하며 시간을 보내는 장면으로 소설을 끝냈을까? 그 대답으로서 나는 이 문장에 주목했다. "그녀의 사고는 이런 틀 안에서 맴돌았다." (158)

작품에서 해리엇은 아이를 많이 낳고 기르고, 그 아이들이 다시 가정을 이룬 후에도 가끔 들리거나 돌아올 수 있도록 큰 집을 유지하고 싶어한다. 그런 틀에 갇힌 욕망이나 엄마 정체성 외에 그녀가 어떤 사람인지 나는 소설을 두 번이나 읽고도 잘 모르겠다. 도리스 레싱은 도돌이표를 그리고 사고가 같은 수위에서 맴도는 헤리엇을 두고 "그녀의 사고는 이런 틀 안에서 맴돌았다" 한 게 아닐까? 소설의 마지막 페이지야 말로, 헤리엇 스스로가 벗어나기 원치 않아 머무르고 맴도는 틀을 보여준다고 생각한다. 온통, 자식 생각....집 생각... 그런 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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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파랑 2023-01-12 23:2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도 이 책 읽고나서 많이 찜찜하더라구요. 그래서 리뷰도 엄청 찜찜하게 썼던 기억이 납니다 ㅋ 그래서 도리스 레싱 다른책도 손이 안가더라구요 😅

얄라알라 2023-01-13 00:40   좋아요 1 | URL
저는 읽을 때는 하도 푹 빠져 읽어서 몰랐는데, 다 읽고나서 보니 이 책은 챕터 분할 없이 통째로 가는 구조더라고요
어쩜 이렇게 긴박감(?) 있게 소설을 잘 쓰시는 건지...게다가 회선이 꼬이다 못해 합선 화재라도 날 듯, 이슈들을 동시다발적으로 던져 놓네요....다른 책도 읽어봐야 더 알것 같아요^ ^

yamoo 2023-01-13 13: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얄라님의 리뷰 잘봤습니다. 얄라님두 생각을 멈출 수 없으셨군요! 얄라님은 해리엇의 ‘내아이가 아니야‘에 꽂히셨군요..ㅎㅎ
저는 이 책에서 해리엇의 히스테리 핵심이...정신과 의사와 여타 엄마들 그리고 학교 샘에게 벤이 이상한 아이라는 걸 확인받고 싶었는데, 그러질 못해서 그랬던 거 같아요. 어쨌거나 얄라님의 리뷰로 읽으니 새롭군요!^^

얄라알라 2023-01-13 15:04   좋아요 0 | URL
처음엔 아빠이자 남편 데이비드가, 헤리엇을 말리는(?) 자세에서 점차 적극적으로 데이비드가 ˝내 애가 아냐. 당신 애야....˝의 태도로 나아가더라고요.

처음엔 놓쳤는데, 계속 생각하다 보니, 야무님 말씀처럼 그 대사가 무척 불편합니다.

그러고 보니, 산부인과 의사와 정신과 의사와의 만남 씬이 길게 묘사되는 걸로 보아 헤리엇이 의료적인 진단을 받아 자신의 고통을 인정받고 싶었었나봐요. 야무님 말씀에 동감입니다. ^^
 

요새 정가 5000원인 책 드물 텐데... [몽실 언니] 정가가 5000원인 걸 확인했다. 언니를 서가에 모셔만 둔지 십수 년 지났나 보다.


후회된다. [Pachinco]는 득달같이 원서로 도돌이표 감아가며 읽었으면서, 정작 권정생 선생님의 [몽실언니]를 소홀히 대접했다니. 게다가 난, 고작 1/5이나 읽었을까 한 지점에서 무례하게도 책 덮고 싶었다고 토로했다. 이제 열 살도 안 된 몽실이가, 자신에게 닥친 가혹한 시련을 "제 팔자"라고 말하는 게 안타까워서 였긴 했지만...


https://blog.aladin.co.kr/757693118/14198722


[몽실언니]를 다 읽고 나니, 어머니 밀양댁도, 몽실이 새아버지도 친아버지도, 몽실이가 만났고 스쳤던 많은 사람들이 내렸던 선택과 행위들을 다른 시각에서 보게 된다.

Presentism

나에게 "직관력 있다perceptive"고 칭찬(?) 해주셨던 선생님께서는, 과거를 해석할 때 "presentism"를 경계하라고 알려주셨다. '현재주의(?)로 옮겨야 하나?' 정확한 정의를 내리지는 못하겠지만, 현재의 잣대로 과거가 남긴 편린들(물질이건 비물질적 관계이건)을 상상하려는 성향을 극복하라는 의미로 이해했다. 그런데 내가 [몽실 언니]를 읽으며 반대로 했다. 아침이면 스벅에서 뜨거운 커피 마시며 자판 두드릴 생각하며 배곯아 본 적 없는 나는, 지극히 내 중심의 현재주의적 관점에서 [몽실 언니]를 해석했으니까.

* * 

"다리 다친 건 제 팔자"라는 몽실이의 말은, "누구라도, 누구라도 배고프면 화냥년도 되고, 양공주도 되는 거예요."라는 현실 인식과 이어진다. 이제 채 열 살 정도 나이였지만, 몽실이는 구조적 폭력에 저항하기 어려운 상황에서 나름의 전략으로 생존하는 사람들을 이해하고 존중했던 것이다. 나보다 훨씬 어른스러웠다. 그래서 "언니"같다.

몽실이는 전쟁통에 태어났다는 이유로 "난남"으로 불리는 동생을 갓난이 때부터 엄마 대신 먹여 키웠다. 젖도, 쌀도, 기차삯도 동냥해서 동생과 아버지를 부양했다. 깡통을 구해 '거지'를 자청하더라도, 동생을 살리려고 최선을 다했다. 몽실이에게 "팔자"는 영어 단어의 "destiny" 뉘앙스가 아니었는데, 내가 잘못 이해했던 것 같다. 미안스럽다.

* * 

몽실이가 업어 키웠던 동생 난남은 학교에서 글을 익혔고, [안네의 일기]를 좋아했다.


자신도, 몽실이도, 죽은 금년이 아줌마도, 한국의 모든 여자들은 안네 같다고 생각했다.

...

절뚝거리며 걸을 때마다 몽실은 온몸이 기우뚱기우뚱했다. 그렇게 위태로운 걸음으로 몽실은 여태까지 걸어온 것이다. 불쌍한 동생들을 등에 업고 가파르고 메마른 고갯길을 넘고 또 넘어온 몽실이었다.


[몽실 언니] 마지막 장.

"한국의 모든 여자들은 안네 같다"라고 적어준 권정생 소설가에 대해서 더 알고 싶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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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lla.K 2022-12-23 12:3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문득 오래 전 드라마로도 나왔는데 그때 주인공을 맡은 그 소녀 탈랜트 지금은 뭐하며 사는지 궁금하네요. 똘똘하게 연기를 잘 해서 나름 인기있었는데. ㅎ

얄라알라 2022-12-23 13:0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stella K님 말씀해주시니 갑자기 검색해보고 싶어졌어요^^ 전 드라마는 본적이 없는데 단발머리 그 소녀는 알 것 같아요^^

서니데이 2022-12-23 22:4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도 예전에 권장도서여서 이 책 읽긴 했는데, 그렇게 좋아하지는 않았던 것 같아요.
지금 읽으면 또 다를지도 모르겠어요.
잘읽었습니다. 알랴알라님, 이번 일요일이 크리스마스인데, 날씨가 계속 추울 것 같아요.
추운 날씨 조심하시고, 따뜻한 주말 보내세요.
메리크리스마스.^^

얄라알라 2022-12-27 09:50   좋아요 1 | URL
안녕하세요? 서니데이님, 제가 핸드폰으로 북플 확인하다 보니 바로바로 댓글 인사를 못드렸네요.

저는 뒤늦게 읽고 보니,
다른 분들은 이미 다 읽으신 필독서였나봐요.

분량은 짧지만 저를 충격에 빠지게 한 책이었네요^^;;

서니데이님께서 해피 연말 보내시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