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몽실언니]를 도돌이표로 반복해 읽으면서, 불과 70여 년 전 우리 사회에서 쓰이던 어휘, 정서, 인간관계의 스킬 등에 크게 이질감을 느끼는 스스로를 반성했다. 물질문화의 변화 속도에 비해 정서적 측면의 변화속도는 당연히 더 느릴 것이라 생각해왔는데, 내가 [몽실언니] 인물들의 정서적 반응과 인간관계에 공감하지 못한다는 사실에 두려움도 느꼈다. 21세기, 2~3배 빠르게 재생하기의 속도로 내달리는 사회에 살고 있으니, 앞으로 나 역시 이해받지 못하고 변화를 파악하지 못할 거라는 두려움이 크다.

권정생 선생님의 책을 한 권 더 찾아 읽었다. 일부러 6*25 전쟁을 배경 삼은 작품으로 골랐다. 추천사에 반가운 존함이 보인다. "보리" 윤구병 선생님(사장님^^)께서 출판사 식구분들께 권정생 선생님 작품을 그림책으로 내보자고 제안하시어 세상에 나온 책이다. 아름다운 사람, 아름다운 작가 권정생을 이런 방식으로 추모하고 애정 하시는 윤구병 선생님의 마음이 각별하게 느껴졌다. (아쉽게도 이 책이 세상에 나오기 전에 권정생 선생님께서 영면하셨다고 한다)


영혼이 되어 산천을 떠도는 어린이 곰이와 북군 병사의 전쟁 회상담이 담담하게 펼쳐지기에 더욱 처연하게 아픔이 전해지는 이야기 [곰이와 오푼돌이 아저씨]. 일러스트레이터 이담 작가님의 그림으로 그 정서가 더 진하게 피어오른다.

우리는 못나게시리 그 오누이끼리 싸운 거야. 호랑이한테 서로 잡아먹히지 않으려고 누나는 동생을 호랑이에게 떼다밀고 동생은 누나를 떼다밀고........

[곰이와 오푼돌이 아저씨]


-아저씬 누구랑 전쟁을 하셨어요?

곰이가 물었습니다.

-국군하고 싸웠지.

-국군은 어떤 사람들이었어요?

-나라를 지키는 사람이야.

-어느 나라를 지키는 사람인데요?

-이름만 다르지 나하고 똑같은 사람이야.

-똑같다니요?

-다 같은 단군 할아버지의 자손들이니까.....

- ........

- 다만 나는 북쪽에서 살았고, 그들은 남쪽에 살았다는 것밖에 다른 게 없었어.

[곰이와 오푼돌이 아저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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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책 읽은 지 며칠 지났거나 실물 책이 옆에 없을 때, 리뷰 쓰기 망설여집니다. 기억에 의존해서 작가나 작품을 곡해한 리뷰를 남길까 봐 두려운 거죠. 소설 장르가 더욱 그러한데, [소금 아이]가 지금 제게 그런 망설임을 불러일으키고 있습니다. 읽은 지는 사흘밖에 지나지 않았습니다만, 제가 이희영 작가를 오해한 글을 쓰게 될까 조바심이 나기 때문이겠죠. [소금 아이]를 읽기 전 '맑음'이었던 제 기분은 소설을 다 읽은 후 급격히 심란해졌습니다. 방어할 틈도 없이 명치를 세게 가격 당한 기분이었습니다. 고백하자면, 책 읽기 전만 해도 발랄해 보였던 작가의 실물 사진조차 음험해 보였습니다. 솔직히 무서웠죠. 동시에 작가에게 미안했습니다. 첩보원을 주인공 삼은 소설을 썼다거나 살인자의 수법을 자세히 묘사했다고 작가가 그 인물들의 삶을 살았다고 볼 수 없습니다. 독자로서 당연한 상식이죠. 하지만, 이희영 작가의 [페인트]에 이어 [소금 아이]를 나란히 읽은 제게는 두 작품의 기저에 흐르는 음울함을 놓칠 수가 없었습니다. 청소년을 주 대상 삼은 두 소설이 생소할 분들을 위해 가볍게 소개 드리자면, [페인트]는 가까운 미래를 배경으로 저출산 한국 정부가 입양아를 키우면 월급제로 돈도 주고 연금도 주는 제도를 운용한다는 설정으로 전개됩니다. 당연히 입양되는 아이들은 입양자들 대다수가 돈 때문에 자신을 데려간다는 것을 인지하고 있으며, 가족애愛가 아닌 '너 좋고 나 좋고' 전략으로서 모르는 타인과 맺어집니다. 부모에게 버려진 주인공 Janu301은 자신의 뿌리에 대해 아무것도 모릅니다. 그저 1월, January에 버려졌기에 자신의 이름이 제누라는 것만 알뿐. 흥미롭게도 소설 [페인트]의 어느 페이지에서도 Janu301은 부모에 대한 애증이나 그리움을 전혀 내비치지 않습니다. 자칫 소시오패스처럼 느껴질 정도로 차갑게 자기 앞가림을 잘하면서 독립적으로 성장하지요.


Janu301 ● 李水

이희영의 최신작 [소금 아이]에서도 주인공 "이수"는 아버지를 모릅니다. 아버지를 궁금해하지도 않죠. 게다가 출생의 비밀이란 게 얼마나 허접한지 듣고 나서는 차라리 귀를 막아버리고 싶을 정도였죠. 주민센터에서 출산장려금이라도 탈 심산으로 신생아 등록을 하러 갔던 어머니가 마침 보았던 달력에서 "수요일의 水"자를 보았기 때문에 이름이 "이수"가 되었죠. 이수는 부모에 대한 어떠한 기대도 원망도 애증도 잘 보이지 않습니다.


[페인트] 중반부에서 주인공 제누는 자식을 해하는 권력욕에 취한 원숭이 이야기를 합니다. 그 자식이 커서 자기 자리를 위협할까 두려워하는 원숭이지요. [소금 아이]에서 아래 세대의 주인공인 이수는 처단의 방식으로 단죄합니다. 작가는 피와 피비린내가 난무하는 이 청소년 소설 [소금 아이]를 자신의 노트북 폴더에만 고이 모셔놓으려 했었답니다. 작가 스스로 자신의 유년기가 '회색, 그중에서도 검은색이 많이 섞인 회색'이었고 그런 유년기를 자식에게 되풀이시키고 싶지 않아 노력했다는 이야기를 했었는데, [페인트]와 [소금 아이]를 나란히 읽다 보니, 작가가 빵 부스러기 흘리는 헨젤처럼 소설이라는 분신을 통해 상처를 조금씩 드러내고 흘림으로써 자신을 치유하고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제가 잘못 이해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렇다면 미리 작가에게 사과드립니다. 그리고, 읽기엔 정서적으로 거리감이 있었지만 작가가 치열하게 써 내려간 [소금 아이]가 분명, 저며진 심장이 소금으로 절여진 청소년들에게 공감해 주는 목소리로 다가갈 거란 확신이 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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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해력"증진, "죽기 전에 꼭 읽어야 할" 명저 100선, 수능 필독서 등등. 요즘 꼬마님들 책 읽으려면 따라붙는 목적이 참 많죠? 조건 따지지 않고 그저 책 읽는 재미에 폭 빠져드는 경험이 요즘 꼬마님들에게 필요한 데 말입니다. '어떤 책이 있을까?' 고민해 봤어요. 아! 삐삐! 빨강머리 삐삐가 떠올랐습니다. 말 한 마리쯤은 번쩍 들어 올리는 천하장사에, 엉뚱하기로는 당할 자 없는 9살 꼬마이지요. '삐삐' 드라마의 테마곡을 흥얼거리면서, 수십 년 만에 [내 이름은 삐삐 롱스타킹](1945)을 다시 찾았습니다. 책 읽는 내내 이런 생각이 들었어요. 어른인 저도 푹 빠져드는데, 꼬마 독자들은 얼마나 열광할까? 80살 다 된 이 스웨덴 동화는 왜 21세기에도 세계적으로 사랑받을까?


?


그 대답은 바로 캐릭터의 힘, 말괄량이 삐삐의 매력이지 않을까 싶습니다. 삐삐에게는 천사 엄마와 식인종의 왕인 아빠가 계시다지만, 어른들은 알죠. 돌봐줄 어른이 없는 9살이라는걸. 즉, 차가운 언어로 규정하자면 삐삐는 '고아'입니다. 하지만 '고아'하면, 사람들이 떠올리는 진부한 스테레오 타입에 전혀 들어맞지 않는 캐릭터이죠. 스스로 자장가를 불러 자신을 잠 재우고, 발가락 꿈지럭거릴 여유 공간을 확보하려 발 사이즈 2배나 되는 큼직한 신발을 신습니다. 똑바로 걸으면 덜 신나니까 뒤로 걸어보고, 말도 타보고, 지붕 위에도 올라가는 등 반복적 일상성을 비웃기라도 하듯 삐삐의 하루하루는 알록달록 다채롭게 변주합니다. 삐삐는 당당하고, 독립적이고 진취적이며 쾌활하죠. 빳빳하게 다린 면 원피스가 더러워질까 봐 얌전하게 놀아야 하는 옆집 소녀 아니카네 남매와는 딴판이지요.

*

삐삐 캐릭터는 1940년대 스웨덴 사회, 그리고 2020년대 한국 사회에도 만연한 '이상적인 가정과 어린이'에 대한 고정관념을 뒤흔듭니다. 삐삐는 정상가족 틀거리에 맞진 않지만, 1인 가족 체계를 멋지게 구축했죠. 또 남의 도움에 의존하지 않으며, 주체적 판단이 가능하고 실행력도 뛰어나며, 시스템의의 날개 아래 있지 않아도 스스로 보호할 수 있으며, 엄마아빠가 보고 싶다고 밤마다 몰래 울지 않습니다. 이처럼 삐삐는 그 빨강머리의 상징성만큼이나 전복적인 캐릭터이지요.

어쩌면 이런 설정은 작가 아스트리드 린드그랜이 사회에 전하려 했던 메시지를 간접적으로 전하는 방식일지도 모릅니다. 그녀는 10대 시절, 상사와의 불륜으로 아들을 낳은 후 싱글맘으로서 잠시 살면서, 사회의 편견과 고정관념을 겪었죠. 그러나 사회적 시선에 주눅들기보다는 뒤엎기를 꿈꿨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삐삐를 1940년대, 이상적인 가정과과 이상적인 어린이 유형에 들어맞지 않는 비정형적 인물로 창조한 것도 그 저항의 한 방식일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요.


1924년(17세)의 Astrid Lindgren


저는[내 이름은 삐삐 롱스타킹]을 읽으면서, 제가 얼마나 타인의 시선과 평가, 나아가 관습적 틀에 매여 굳어졌는지 깨닫고 슬펐습니다. 제가 자꾸만 삐삐의 구김살 없이 밝은 모습을 부모 잃은 슬픔을 애써 위장하는 것으로 분석하려 든다든지, 삐삐를 '고아,' '돌봄이 필요한,' 혹은 '가정 교육이 결여된' 아이로 평가하더라고요. 삐삐의 예의범절, 특히 테이블 매너도 매의 눈으로 날카롭게 판단했고요.(미안해 삐삐야....내 안의 예의 바른 어른이 고집스러워 부끄럽구나!) 예를 들어 삐삐가 친구 아니카와 토미의 집에 초대받았을 때, 손님용 다과로 나온 케이크를 혼자 몽땅 다 먹어 버리거나 응접실 바닥에 설탕을 뿌린 후 맨발로 돌아다니기는 장면에서, 저는 '흐아! 저 바닥 청소를 어찌 다하누! 테이블 매너가 빵점이야.'하여 걱정을 하더라고요. 이제 저는 삐삐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기엔 너무 굳어버린 걸까요?하긴, 저만 그런 것도 아닌 듯 합니다.

2023년 대한민국의 꼬마들, 여름 방학인데도 '게임 - 학원 - 숙제'의 삼각편대를 벗어나지 못한 채 밍밍하게 사는지, 표정이 굳어 있는지, 만약 삐삐가 1945년에서 타임머신을 타고 와서 대한민국의 친구들을 만난다면, 적응하기 어려울 것 같네요. 삐삐라면 어떻게 '게임 - 학원 - 숙제'란 반복적 일상에 활기와 변화를 불어넣을까요? 아니면 우리가 삐삐라면? 우리 자신이 삐삐 되기에는 너무 굳어 버린걸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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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삭매냐 2023-07-20 10:45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이게 스웨덴 도라마였던가요?

제 어릴 적, 최애 도라마였거든요.

힘이 장사인 빨간머리 삐삐의 활
약상에 넋이 나갔더라는.

그리고 보니 삐삐야말로 자유로
운 영혼의 표상이 아니었나 싶습
니다.

얄라알라 2023-07-21 12:42   좋아요 1 | URL
ㅎㅎ 도라마!! 역시 매냐님의 언어유희!!!
네네,
제가 원래 작품이 맘에 들면 유투브 열심히 뒤져서, 작가 인터뷰며 관련 영상 싹 찾아보는 편인데, 스웨덴 말을 하나도 모르는 관계로 ㅎㅎㅎ패쓰했어요.

독서괭 2023-07-20 17:2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는 삐삐롱스타킹을 읽지 못했어요^^;; 아이들과 함께 읽어봐야겠네요. 아스트리드 린드그렌에게 그런 아픔이 있었군요.
그나저나, 저도 읽으면 ‘어른‘으로서 그런 생각 할 것 같은데 ㅋㅋㅋ 아이들은 다를 것 같아서 궁금합니다.

얄라알라 2023-07-21 12:43   좋아요 1 | URL
ㅋㅋㅋ맞아요. 독서괭님

저 바닥 청소 누가 다하나, 어찌 다하나... 옷 망가뜨려 놓으면 또 사야하는디.....ㅋㅋㅋ

자꾸 이런 생각이 올라와서, 민망스러웠네요.

아이들은 따라 해보고 싶겠죠?^^

잉크냄새 2023-07-20 19:1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도 제 안의 고지식한 어른의 힘이 너무 세군요.

얄라알라 2023-07-21 12:44   좋아요 0 | URL
ㅎㅎ저만 그런 게 아니어서,
살짝 위안이 됩니다.

삐삐가 저희 집에 놀러온다고 하면.....‘아! 우리 야외에서 만날래?‘ 그럴 것 같습니다 ㅋ

페크pek0501 2023-07-21 19:5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삐삐는 티브이로 본 적 있어 반갑네요. 80년이나 되었나요?
작가는 떠나도 작품은 그렇게 남는 거군요.
 



오해 하나! 책표지 소녀가 "샬롯"이라 생각했어요. 오해 둘! 주인공인 "인간" 샬롯이 돼지 혹은 거미, 즉 인간 아닌 존재들과 우정을 나누는 동화인 줄 알았습니다. 사실, [샬롯의 거미줄]을 처음 다 읽고도 크게 달리 생각하진 않았어요. 물론, "샬롯"은 소녀가 아니라 거미였지만, 전 이 작품의 키워드를 우정으로 봤거든요. 먼저 읽은 분들도, 책 광고 문구에서도 한결같이 "우정"을 강조했으니까요.

하지만, 이 작품을 두 번, 세 번, 그리고 네 번쯤 읽으니 생각이 달라졌습니다. [샬롯의 거미줄]은, 어느 하나의 키워드로 규정할 수없이 인생의 희로애락을 응축한 품위 넘치는 작품이더라고요. 40 즈음에 농장 생활을 시작했다는 작가 엘윈 브룩스 화이트(Elwyn Brooks White, 1899-1985)가 얼마나 여유롭게 사색하고, 농장의 모든 생명체들을 애정 어린 시선으로 관찰했는지를 짐작할 수 있었지요.




많은 독자들이 [샬롯의 거미줄]을 '우정"이라는 깔때기 안에 담아두는 게 아쉬워서 제 감상을 끄적여 봅니다. 물론 샬롯과 윌버는 서로 지극히 아끼고, 지지하고 서로에게 고마워합니다. 우정의 속성을 다 갖춘 관계이지요. 하지만, 다른 관점에서 보면, 이 둘은 '부모-자녀' 관계의 은유로도 읽힙니다. 제가 이렇게 해석하는 건, 단지 샬롯이 임신과 출산을 경험한 암컷 거미이고 윌버가 어린 수퇘지여서가 아닙니다. 둘 사이의 관계성은 돌봄을 제공하는 모성과 그 돌봄 속에서 성숙함으로써 다시 사랑의 호혜성을 보여주는 자녀의 모습을 보여주기도 합니다. 샬롯은 베이컨이 될 숙명을 타고난 식용돼지가 느끼는 죽음에 대한 공포를 덜어주고자, 어려운 약속을 합니다. '살려 주겠다'라는, 신도 지키기 어려운 약속. 그리고, 비롯 작은 몸집의 거미이지만 그 누구도 할 수 없었을 기적, 바로 윌버를 살게 해주는 약속을 지켜냅니다. 그뿐만 아니라, 윌버가 거친 세계에서 현명하게 대처하며 생존하도록 지혜와 용기도 불어 넣어 주지요.

반면, 철없는 어린 돼지 윌버는 그런 샬롯에게 고마워는 하지만, 받는 존재로서의 위치에 익숙해진 모습을 보입니다. 예를 들어, 샬롯이 알을 낳아야 하는데도 샬롯에게 품평회에 같이 가면 재미있을 거라며 동행을 기대합니다. (사람으로 치면 출산 임박한 산모에게, 나 혼자 놀이동산 가면 무서우니까 같이 가서 거기서 출산하면 재미있을 거라는......). 죽어가는 샬롯의 변화를 감지하지 못한 채, 자기의 운명에 대한 불안감만 토로하기도 하고요. 물론, 윌버는 삶의 경험이 적은 어린돼지이기 때문에 타인을 섬세하게 배려하는 연습이 되어 있진 않습니다.

감동적인 점은, 샬롯에게 받기만 했던 윌버가 위기의 순간, 즉 샬롯이 514마리 새끼들만 남겨 놓고 죽어가는 그때, 냉철한 판단 주체로서 우뚝 서서 샬롯을 돕는다는 점입니다. 성장의 단계를 몇 단계 뛰어넘어 성숙해진 윌버의 모습에서, 사랑의 힘을 봅니다. 사랑은 베푸는 자 자신을 성숙시키고, 또 사랑받는 이를 다음 단계로 끌어올립니다. 돌고 도는 사랑의 힘, 사랑의 호혜성입니다.

아직 [샬롯의 거미줄]을 읽지 않으신 분들이라면 꼭 시를 음미하듯 천천히 여러 번 읽기를 추천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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깐깐한 책 덕후도, 그저 "표지 디자인이 예뻐서" 책을 고를 수 있다. 영롱한 홀로그램이 대놓고 유혹적인 [잔류 인구 Ramnant Population]를 읽은 이유였다. 바로 알아봤다. 엘리자베스 문 Elizabeth Moon(1945~)이 멋진 분임을. 그래서 2021년 12월, 작가의 대표작[어둠의 속도 The Speed of Dark]까지 읽었다.



당시 "앞으로 (Elizabeth Moon을) 더 많이 좋아할" 것이라고 썼던데, 그랬다. 17개월 만에 다시 읽으니 작가가 더 좋아졌다. 나도 모르게 주인공 오필리어 Ofelia 할머니를 작가의 분신으로 상상하며 읽었다. 정작 엘리자베스 문은 50대 초반에 이 작품을 썼다. 하지만, 관절이 찔리듯 아프고, 건조해진 피부와 체구는 쪼그라들고, 사회의 시선에서는 '별 존재감 없는, 그냥 노인'으로 보이는 80대 고령의 경험과 정서를 생생하게 살려 냈다.


오필리어는 제목인 "잔류 인구"를 대변한다. '인구 population'라고는 하지만, 1인 '단독자'로 행성에 남는다. 갑작스러운 이주 명령에 따르다가 극저온 냉동수면 과정에서 죽느니, 40년 동안 일궈온 행성에서 내 맘대로 사는 걸 선택했기 때문이다. 오필리어는 행성 이주 프로젝트에서 노쇠한 자신은 이송비용만 많이 드는 폐기화물과 다름없음을 간파하고 존엄한 삶을 결단한다. 많은 고민이 따르지 않았다. 그냥 "떠나지 않을 거야."하는 내면의 목소리가 올라왔다. 행성에 잔존해야 할 당위나 거창한 이유 목록이 있었던 게 아니었다. 그냥 그러고 싶어서 그랬다. (떠나기 싫어서 남았다. So Cool!!!)

오필리어는 인간이 지워진 행성에서 나체와 맨발의 자유를 만끽한다. 칙칙한 작업복을 벗어던져 부끄러워했던 늙은 피부를 드러낸다. 화려한 비즈 장식을 만들어 달고, 알록달록 풍성한 색감의 옷을 입는다. 햇살에 기미가 짙어지건 말건, 모자도 없이 땡볕에서 밭일을 하고, 이웃이었던 사람들의 냉장고를 열어 음식도 챙긴다. 평생 돌보고 일구며 살아온 할머니는 자신의 몸과 집, 이웃의 집, 심지어는 행성에 남은 양과 소까지 챙긴다. 그러다가, "종족" 즉 행성의 원거주생명체를 만나게 되면서 이야기가 급물살을 타고 전개된다.

통념이라는 사회적 잣대로 보았을 때, 할머니는 결핍투성이다. 힘 부족, 학력 부족... 하지만, [잔류 인구]에서 엘리자베스 문이 입체적으로 살려낸 오필리어는, 매 순간 삶의 에너지로 충만하고 자신과 주변을 채워주는 사람이다. 외람되지만, 귀여우시기까지 한 할머니. 어슐러 K. 르 귄 역시 오필리어 할머니를 두고 "Ofelia—tough, kind, wise and unwise, fond of food, tired of foolish people—is one of the most probable heroines science fiction has ever known.”라고 찬사를 보냈다.


[잔류인구]는 [로빈슨 크루소]나 [파리대왕]처럼 젊은 남성(들)의 생존기가 아닌, 고령의 단독자 할머니의 생존기라는 면에서도 독특하다. 또한, 역사와 인류학을 공부했던 저자가 독자에게 인간존재와 사회에 대해 풍성한 질문을 던진다는 점에서도 귀한 작품이다. "다른 존재, 다름"에 대한 폭력적 상상과 타자화, 언어를 넘어선 비언어적 소통과 교감의 아름다움, 현대 산업 사회 제도화된 '배움'의 경직성에 대한 반성, 개체의 생명뿐 아니라 공동체의 가치를 '우등/열등'의 판단 아래 차등화해온 인간의 역사가 우주확장 시대에도 마찬가지로 재연되는 데 대한 인간으로서의 부끄러움, 돌봄의 가치와 돌봄능력에 대한 젠더화된 상상. 등등.


이렇게 많은 이야기를 한 권의 소설에 욱여넣을 수 있다니, 엘리자베스 문 할머니는 정말 부지런하신 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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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은빛 2023-06-09 19:5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어둠의 속도]와 [잔류 인구] 담아갑니다.

할머니가 주인공인 이야기는 거의 본 적이 없는 것 같아요.
얄라알라님이 아래쪽에 남겨주신 말씀들에 하나하나 다 공감합니다.

얄라알라 2023-06-10 08:56   좋아요 0 | URL
오! 감은빛님 혹시라도 이 책들 읽으신다면
같이 채팅으로라도 더 이야기를 나누고 싶어집니다!

새벽엔 BING AI로 엘리자베스 문에 대해 여러 질문을 하며 놀았어요. 그 정도로 저는 이 텍사스 출신 할머니 작가님께 호기심이 생긴답니다^^

행복한 주말 보내세요

서니데이 2023-06-10 15:0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제목이나 표지 디자인이 좋은 책은 구매하는데 영향이 있는 것 같아요.
일단 눈에 잘 들어오니까요.
얄라알라님, 즐거운 주말 보내세요.^^

얄라알라 2023-06-11 10:13   좋아요 1 | URL
돌풍 우박 주의보는 봤지만, 현재로서는 날씨가 너무 좋아서 놀러가고 싶네요

서니데이님께서도 해피 선데이 보내시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