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선생의 지도로 읽는 세계사 : 서양 편 - 지리로 ‘역사 아는 척하기’ 시리즈
한영준 지음 / 21세기북스 / 202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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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책을 읽을 땐, 주로 한일관계사 책을 많이 읽는 나지만, 그렇다고 세계사에 아예 관심이 없는 건 아니다. 우리집에 있는 역사책(전문/교양책 포함)중에서 세계사책 비율이 대략 20%정도라는게 함정일 뿐. 그저 한국사와 일본사, 한일관계사에 대한 비중이 높을 뿐이다. 아무리 적은 비율을 차지하는 세계사 책이라지만, 다른 집에 비하면 평균 이상의 분량이니 뭐 ㅋㅋㅋㅋㅋㅋ 내 나름대로는 이 정도면 충분하다고 본다. 하지만....그럼에도 불구하고 신간 세계사 책이 내 손에 들어왔고...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이건 뭐 읽으라는 하늘의 계시인거죠!




내 개인적으로는 세계사를 처음 접했던 건 고등학생때다. 사탐 선택과목 중 하나가 세계사였던지라, 얼마나 빡세게 공부했던지! 그 전까지만해도 한국사홀릭이었는데, 그놈의 수능이 뭔지 세계사까지 공부하게 된 계기가 되었다. 이후 생각보다 재밌는 세계사에, 한동안 빠져서 이책, 저책 읽었던 기억이 있다. 다만, 내가 좋아했던 세계사는 역시나 고대사 ~ 중세까지. 서로 치고박고 하는 스펙타클한 그 시대! 이 나라 왕이나, 저 나라 왕이나 이름이 똑같아서 더럽게 헷갈렸던 그 시대! 그 시기가 세상 재미있었다. 그렇게 재밌게 공부하던 세계사도, 근대사로 들어오면서 세계사가 세상 재미없어지기 시작했다. 아마 이후로는 치열하게 암기만 했었던 기억이...? 그리고 다시 한국사, 일본사만 파고 지내다가 조금씩 세계사 책을 읽기 시작했다. 물론 내 주관적으로 편항된 시대, 또는 흥미로운 주제에 한해서만이었지만. 



이렇게 세계사 편식을 했던 내가, 모 예능(벌거*은 세계사)을 보면서 점점 세계사 박애주의(?)를 시작하게 되었고, 그 과정에서 읽게 된 책이 이 책, 「두선생의 지도로 읽는 세계사」이다. 이 책이 여타 세계사 책과 다른 이유는 세계사를 보는 관점이, 왕조국가라던가, 민족이라던가 이런게 아니라 바로 ‘지리’이기 때문이다. 



내가 모 예능에서 세계사에 대한 편식이 사라진 이유가, 바로 ‘지리’였다. 왜 이 나라가 저 나라를 침략하는지, 왜 이 나라는 이만큼 발전했는데 저 나라는 아직도 저모양인지에 대한 설명에 ‘지리’를  대입하니 그렇게 이해하기 쉬울 수가 없었다. 새삼.....고등학교 때 세계사 공부를 이렇게 했다면, 암기가 아닌 이해가 가능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까지 들었을 정도로!



그런 의미에서 이 책, 「두선생의 지도로 읽는 세계사」는 세계사를 공부하는 청소년들에게도 강력 추천하고 싶다.




 


 



이 책은 총 5개의 챕터로 나뉘어져 있다. 각 챕터 내에서도 자연지리와 역사, 인문지리 및 요약정리로 나뉘어서 진행이 되기 때문에, 헷갈릴 일도 전혀 없다.


챕터1. 문명의 요람에서 혼란의 대륙으로, 중동


챕터2. 지리가 만든 여러개의 나라, 유럽


챕터3. 지리가 만든 초강대국, 미국


챕터4, 가지각색 아메리카, 중남미


챕터5, 인류의 시작과 세계의 끝, 아프리카


때마침 내가 즐겨보는 모 예능에서도 요근래 위 챕터에 대한 나라들이 주제로 나왔었는데 말이다! 그 예능을 보고 이 책을 읽으니 왠지 세계사 복습을 하는 느낌이기도 하다. 반대로 이 책을 읽고 그 예능을 다시보면 그건 그것대로 이해하기가 더 쉬울 것 같기도 하다.




챕터1. 문명의 요람에서 혼란의 대륙으로, 중동


‘중동’이라는 용어는 사실  유럽적 시각에서 만들어진 용어입니다. 19~20세기 영국에서 유럽 대륙의 동쪽에 위치한 동양 세계를 근동, 중동, 극동으로 부른데서 나온 말이에요. 유럽의 눈으로 만들어진 만큼, 중동 대신 ‘메나’, ‘서남아시아와 북아프리카’라는 용어로 대신 부르자는 주장도 있습니다. p 019



지금의 중동을 하나의 문화권으로 묶은 1등 공신은 단연 이슬람교입니다. 지도를 보면 앞서 말했듯 중동 지역 대부분이 8세기 이슬람 제국의 영향력 아래에 들어옵니다. 14세기부터는 아나톨리아반도와 맞은편의 발칸반도도 이슬람 제국의 영토로 들어오죠. p 042



중동 문명이 남긴, 가장 영향력 있는 문화유산은 무엇일까요? 관점에 따라 다를 수 있지만 개인적으로는 ‘유일신 사상의 종교’라고 생각합니다. 유대교, 기독교, 이슬람교, 조로아스터교까지 모두 중동에서 뿌리를 내리고 세계적인 유일신교로 발전했죠. p 048



내가 즐겨본다는 모 예능에서 #이스라엘 #팔레스타인 분쟁에 대한 주제가 나온적이 있었다. 솔직히... 지금의 내 관점에서 중동근방은 분명 이슬람교가 태반인데, 어떻게 유대교인 이스라엘이 비집고 들어갈 수 있었나 싶기도 했다. 그저 돈이 많으면 장땡인가 싶기도 했고. 하지만 결과적으로 중동은 지금의 관점으론 이슬람교가 태반이긴 하나 역사적으로 보았을 때는, 우리가 아는 큼직 큼직한 유일신 사상의 종교들의 발생지였을 뿐이고. 하..하ㅏ...



그나저나 중동이라는 말 자체가 유럽중심의 단어라는 말에 조금 욱했다. 생각해보면 한국이나 일본을 극동이라 부르는 것도 결국 유럽중심의 시각이다. 분명 공부할 때 배웠음에도, 크게 자각하지 못했던 것 같다. 생각해보면 저 때 유럽은 서로 땅따먹기하며, 자국을 팽창시키느라 바빴다. 그 과정에서 배를 몰고 나가 신대륙발견도 하고 말이다. 반면에 동양은.... 땅덩어리가 큰 중국이라는 나라 하나에 조아리고, 우물안에 살고 있었으니. 휴. 그 덕분에 세계지명들이 대부분 유럽중심으로 정해진 것도 어쩔수 없는 것인가 싶기도 하다.



중동이란 이집트-메소포타미아문명이 꽃피고 이슬람 제국이 형성된 지역을 가리킵니다. 민족적으로는 아랍인들이 많고, 종교적으로는 이슬람교를 믿으며, 지시적으로는 사막이나 고원지대가 많죠.


아라비아반도에서 살던 아랍인들은 이슬람교를 바탕으로 현재 중동 권역의 토대를 만들었습니다. 그러나 페르시아제국을 세운 이란인들과 셀주크-오스만제국을 세운 터키인들은 이슬람교를 받아들이면서도 자신들만의 정체성을 유지하고 있습니다.


1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오스만 제국이 멸망하면서 중동 사람들은 각기 독립하지만, 유럽 열강의 영향력에 놓이게 됩니다. 특히 전 세계를 떠돌던 유대인들이 자신들의 고향인 이스라엘(팔레스타인)로 돌아오면서 중동 지역에 갈등이 유발됩니다. 또한 20세기에 중동 각지에서 석유가 발견되며 경제적 이권을 둘러싼 갈등이 현재까지도 벌어지고 있습니다. p 065 (요약정리 中)



이 책에서 제일 만족스러운 부분은 역시나 요약정리! 각 챕터내에 자연지리나, 역사, 인문지리에 대해 나라별로 알기쉽게 설명을 해준다. 분명 이해하기도 쉽다. 근데 이게 참, 이해하는 것과 남에게 아는 척(?)하면서 알려주는건 또 다른 일이라서^_T 이렇게 별도로 요약정리된 설명이 있으니, 얼마나 좋은가! 더군다나 익숙하지 않은 중동국가는 더더욱!!





챕터3. 지리가 만든 초강대국, 미국


20세기 세계 역사를 주도한 나라, ‘초강대국’이라는 수식어가 참 잘 어울리는 나라, 그러나 건국된지 고작 300여 년 밖에 되지 않는 나라. 어디일까요?  바로 미국입니다. p 125



3억 3300만여 명이 사는 세계 3위의 인구 대국, 약 9800만km2의 면적을 자랑하는 세계 3위의 영토 대국, 미국은 어떻게 거대한 영토를 차지했을까요? 미국 영토의 역사에 대해 아는 척하려면 총 여섯장면을 기억해야 합니다. p 134



1732년 영국의 13개 식민주 완성. 1783년 독립을 인정받으면서 미시시피강 동쪽까지 진출. 1803년 프랑스에 미시시피강 서쪽 루이지애나 구입. 1819년 스페인에 플로리다반도 매입과 대륙횡단조약으로 태평양 진출 발판 마련. 1845년 텍사스 병합과 미국 멕시코 전쟁을 통해 본토의 대략적인 영역 확정. 1867년 알래스카반도 구입. 1898년 미국 스페인 전쟁을 통한 대서양과 태평양 거점 마련. 이 정도면 미국의 영토가 어떻게 꾸려졌는지 아는 척 할수 있겠죠? p 147



영국의 식민지 팽창(?)의 일환으로 시작된 미국. 몇 차례 전쟁을 거쳐 엄연한 국가로 독립한 미국. 건국된지 삼백년이 고작인 미국. 하지만 초 강대국이 된 미국. 미국은 어떻게 초강대국이 되었을까? 심지어 뿌리는 분명 영국인데, 왜 영국과는 다른 문화의 나라가 된걸까? 언제나 궁금했는데, 막상 공부하려니 딱히 손이 안갔던게 미국 역사다. 그러다가 이번에도 모 예능에서 미국에 대해 나오면서, 그때서야 미국이라는 나라에 대해 조금은 알 것 같았다고나 할까? 다만 ... 내 지적호기심을 충족시키기에는 조금 부족했던 건 사실이다. 그런 상황에서 이 책 덕분에 미국 역사도 완벽하게 클리어!



미국은 지리적으로 천연 요새의 모습을 띱니다. 동서로 거대한 바다가 존재하고, 남북으로는 사막과 얼음 땅이 있어서 역사적으로 본토를 공격받은 경험이 거의 없습니다. 또한 국토 중앙에는 로키산맥과 애팔래치아산맥 등에서 발원하는 미시시피강과 많은 지류가 흐르면서, 농업에 적합한 대평워닝 형성되어 있습니다.


거대한 미국에는 다양한 사람들이 살고 있습니다. 미국은 크게 북동부와 남부, 중서부와 서부로 나눌 수 있죠. 각 지역은 지리적으로 구분될 뿐만 아니라 주민 구성과 역사적 경험도 조금씩 달라서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으로도 구분할 수 있습니다. p 161 (요약정리 中)




서양편을 읽고보니, 동양편은 언제나오나 목이 빠지게 기다려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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택리지 서해문집 오래된책방 13
이중환 지음, 허경진 옮김 / 서해문집 / 200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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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은 지 거의 한달만에 리뷰를 쓰게된 우리 고전문학 《택리지》. 모름지기 내가 책 리뷰를 쓰는 이유는 책을 다시 한번 읽는다는 개념으로, 머리속에 있는 책에 대한 생각을 꺼내놓기 위함이다. 그런데.........가끔 이런식으로 책을 읽고나서 리뷰를 미루다가 저 멀리 안드로메다★로 보내는 경우가 왕왕 있다. 그럼 책을 읽었어도 읽은 것 같지 않고, 왠지 책 내용이 기억이 안나고 막 그런 느낌적인 느낌? 그래서 이렇게 더 미루다간 머리 속에 남는게 없겠다 싶어서, 부랴부랴 기억나는 내용만 적어보려고 한다. 




이 책 《택리지》의 저자 이중환은 조선의 대표적인 실학가중 한명이다. 세력도 좋았고 나름대로 탄탄대로의 삶을 살았던 이중환이지만, 그가 살던 시기는 당쟁이 극렬했던, 숙종이 재위했던 때였다. 이중환의 당색은 남인. 숙종은 남인과 서인 사이에서 저울질하며 여러번의 환국을 단행했다. 남인의 손을 잡았을 땐 서인을 축출하고, 서인의 손을 잡았을 땐 남인을 축출했다. 숙종이 환국을 단행하는 카드로 사용했던 사람이 남인쪽 장희빈과 서인쪽 인현왕후(+숙빈 최씨)였다. 즉, 최종적으로 장희빈이 몰락하고 인현왕후가 복귀하면서 남인은 완벽하게 축출, 서인의 세상이 되었다. 조선이 망할때까지 쭉!



남인이었던 이중환은 이 모든 당파싸움 한 가운데서 모든 것을 겪었다. 권력 가까이에 있었으나, 권력 밖으로 밀려난 이중환. 그는 그렇게 방랑자의 삶을 택했다. 그의 명분은 조선팔도에서 사대부가 살만한 땅이 어딘지를 찾아다니는 것이었으나, 실상은 본인이 살만한 장소를 찾아다니는 것이었다. 뭐, 이유야 어쨌든 이중환은 전국 팔도를 돌아다니며, 그 땅에 얽힌 역사, 지리적 이점, 사회 문화상 등을 본인의 저서인 #택리지 에 조목조목 설명했다.


이중환이 《택리지》의 〈팔도총론〉에서 우리나라 인문, 지리를 설명했지만, 진정한 본문은 〈복거총론〉이라고 할 수 있다. 〈팔도총론〉이 “사대부는 어떤 곳에 살아야 하는가?”라는 질문에 답하려고 모아 정리한 자료라면, 〈복거총론〉은 바로 그 대답이다. 지리, 생리, 인심, 산수, 네 항목은 그때까지 다른 지리서에서 설명하지 못했던 부분이다. 지세가 좋고, 생업이 넉넉하며, 인심이 후하고, 경치도 빼어난 곳. 이런 곳은 그도 끝내 찾아내지 못했다. 그는 〈총론〉에서 다시 이 네가지를 묶어 간단히 설명했다. 그런데 이것은 단순한 요약, 설명이 아니다. 그는 〈복거총론〉 ‘인심’ 부분에서 조선 후기에 사대부들이 겪은 당쟁을 설명하며, 당쟁이 없는 곳이 바로 사대부가 살 곳이라고 했다. 그런데 〈총론〉을 보면 그가 당쟁을 사대부만 겪은 피해라고 여기지는 않았음을 알 수 있다. 당쟁이 300년 가까이 이어지면서, 사대부뿐만 아니라 모든 백성이 치우친 논의를 하게 되었다고 본 것이다. 그렇다면 그가 염원한 땅이 어떠한 곳인지 짐작할 수 있다. 사람들이 치우친 논의를 하지 않고 사는 곳이다. 그는 사대부가 제 사명을 다하지 못하면, 차라리 농, 공, 상으로 사는 것이 마음 편하다고 했다. p 006(옮긴이의 머릿말 中)



그는 어떤 곳을 좋아했는가? 〈팔도총론〉에서 가장 살기 좋은 곳으로 판단한 곳은 공주 갑천 일대다. 그가 공주의 금강 언저리를 설명하면서 ‘사송정은 울지 집’이라고 한 것을 보면, 그는 결국 자기 고향을 가장 살기 좋은 곳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그는 고향에서 편하게 살지 못하고 두 차례나 유배 생활을 했으며, 그 뒤에는 별다른 벼슬도 못하고 온 나라 안을 30여 년 동안이나 떠돌아다녔다. (……) 그가 지리서의 성격에 어울리지 않을 정도로 당쟁에 대해서 장황하게 기록한 이유는 그 자신이 누구보다도 당쟁의 폐해를 심하게 겪었기 때문이다. 그의 처가는 경종 때 신임사화를 계기로 당시의 왕세제였던 영조를 모함하면서 정권을 잡았지만, 뒷날 영조가 즉위하면서 몰락의 길을 걸었다. 처가와 운명을 함께할 수밖에 없으니, 문과에 급제해 병조의 정5품 벼슬인 정랑까지 올랐던 그가 집도 없이 떠돌아다니는 신세가 되었다. 그러니 그가 인심이 좋은 마을에 살아야 한다고 하면서 사대부들의 당쟁 탓에 온 나라 인심이 나빠졌다고 개탄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p 007(옮긴이의 머릿말 中)



〈팔도총론〉



이중환은 팔도총론편에서 각 지역을 언급하며, 그 지역의 환경과 역사적인 유래, 현재상황등을 설명하고 마지막에 사대부가 살기 좋은지 아닌지에 대한 결론을 내린다.


-함경도


옛날에는 숙신에 속했다가, 한나라 때는 현도에 속했다. 그 뒤 주몽이 차지했는데, (고구려)가 망하자 여진이 차지했다. 고려때는 함흥 남쪽 정평부를 (북쪽) 경계로 했다가, 중엽에 윤관으로 하여금 군사를 거느리고 가서 여진을 쫓아 버리게 하고, 두만강 북쪽으로 700리를 지나 선춘령을 경계로 했다. 그 뒤 금나라에게 땅을 다시 돌려주고, 함흥을 경계로 삼았다. 우리나라 장헌대왕(세종) 때 김종서에게 북쪽으로 1000여 리 땅을 개척하고, 두만강 가에 6진과 병영을 설치하게 했다. (이때부터) 백두산 동남쪽에 있던 여진이 근거지가 모두 우리 판도에 들어왔다. p 040



또 나라 습속이 문법을 중히 여겨서 서울 사대부는 서북 사람과 혼인하거나 벗으로 사귀지 않았다. 서북 사람도 감히 스스로 사대부와 동등하다고 여기지 않았다. 그래서 서북 양도에는 드디어 사대부가 없게 되었고, 사대부들도 그곳에 가서 살지 않았따. 오직 함종 어씨와 청해 이씨, 본관이 풍양인 안변 조씨만이 조선 초기에 높은 벼슬을 했으며, 서울로 옮겨 와 살면서 대대로 과거에 급제했다. 그 밖에는 (이름난) 사람이 없다. 따라서 서북의 함경도, 평안도는 (사대부가) 살 만한곳이 못된다. p 048



-황해도


대체로 이 도는 국도 서북꽂에 위치해 평안도, 함경도와 이웃했으므로 활쏘기와 말 타기를 좋아하는데, 문학하는 선비는 적다. 산과 바다 사이에 끼어 있어 납, 철, 면화, 벼, 기장, 생선, 소금 등이 많이 나 부유한 자는 많지만, 사대부 집안은 적다. 그러나 평야 지대에 있는 여덟 고을은 땅이 기름지고 바닷가 열 고을은 경치 좋은 곳이 많으니, 역시 (사대부가) 살 지 못할 곳은 아니다. p 056



-강원도


(강릉부)이 지방 사람들은 노는 것을 좋아해서, 노인들이 기생, 악공과 함께 술과 고기를 싣고 호수와 산으로 가 질탕하게 놀기를 즐기며, 이것을 큰일로 여긴다. 그들의 자제들도 이에 물들어 문학에 힘쓰는 자가 적다. 또한 지역이 두 서울에서 멀어, 예부터 훌륭하게 된 사람이 적다. 오직 강릉에서만 과거에 급제한 사람이 제법 나왔다. (……) 대체로 이 아홉 고을은 모두 바닷가에 있으므로, 주민들은 고기 잡고 미역 따며 소금 굽는 것을 생업으로 한다. (……) 한때 노닐기에는 좋지만 오래 머물러 살 곳은 아니다. p 059



결론적으로 한반도 북부쪽은 사대부가 살만한 곳이 못된다는게 이중환의 총평이다. 이유는 다양하다. 함경도나 평안도는 여진과 경계에 있고, 농사지을 땅이 별로 없다. 심지어 함경도, 평안도를 비롯하여 황해도나 강원도는 문학보단 무예 또는 노는 것을 좋아하기 때문에 더더욱 사대부가 살만한 곳이 못된다고 한다.



-경상도


신라는 영남의 여러 나라를 다 차지하고, 고구려와 백제가 쇠망하기를 엿보다가 삼국을 통일했다. 그러나 말엽에 (진성)여왕이 즉위하자 명령이 시행되지않고, 불도를 지나치게 받들어 산골짜기마다 절이 두루 섰으며, 많은 백성들이 중이 되었다. 그러자 궁예가 고구려 땅을 차지하고, 견훤도 백제 땅에서 반란을 일으켰다. 그러다가 고려 태조가 나서서 고구려 땅과 백제 땅을 통일하자, 신라도 땅을 바치고 (고려에) 붙어버렸다. p 069



우리 왕조에 와서도 선조 이전에는 국정을 맡은 자들이 모두 이 도 사람이었고, 문묘에 모신 사현도 이 도사람이었다. 그런데 인조가 율곡 이이, 우계 성혼, 백사 이항목의 문생 자제들과 어지러운 정국을 진정시킨 뒤부터는 서울에 대대로 사는 집안의 사람들만 치우치게 등용했다. (……) 그러나 옛날 선배들이 남긴 풍습과 혜택이 지금까지도 없어지지 않아, 예의와 문학을 숭상하는 풍속이 있으며, 지금도 과거에 많이 합격하기로는 여러 지방 가운데 으뜸이다. p 070



(동래부와 대마도) 해마다 대마도 사람이 도주의 문서를 받아 왜인 수백명을 이끌고 와서 왜관에 머문다. 우리 조정에서는 경상도에서 바치는 조세 가운데 일부를 떼어, 왜관에 머무는 왜인에게 주었다. 그러면 그들이 절반을 도주에게 바치고, 나머지 절반을 경비로 썼다. (……) 이 섬은 원래 왜국에 딸린 것이 아닌데, 두 나라 사이에 있으면서 왜국을 빙자해 우리에게 요구하고, 우리나라를 빙자해 왜국에게 중하게 보였으니, 박쥐 노릇을 하며 이로움을 취하는 것이다. 그러니 이들을 토벌해 우리에게 복속시키는 것이 상책이다. 그러지 않으면 도주를 해마다 한 번씩 우리 조정에 조회하게 해 신하로 복종케 하고, 상을 주는 예로써 전에 주던 액수와 같이 후하게 줄수는 있다. 그러나 관을 지어 머물게 하며 조세를 주는 것은 마치 (우리가 그들에게) 조공하는 것 같아 명분이 바르지 않으니, 빨리 폐지하는 것이 옳다. p 075~076



-전라도


노래와 여색을 좋아하고 사치를 즐기는 습속이 있어 경박하고 간사한 사람이 많으며, 문학을 대단치 않게 여긴다. 그러므로 과거에 급제해 훌륭하게 된 사람의 수가 경상도에 미치지 못하니, 문학에 힘써 자신의 이름을 널리 알리는 사람이 적기 때문이다. 그러나 인걸은 땅의 신령스러운 기운을 타고나는 것이므로, (전라도의 인걸) 또한 적지 않다. 고봉 기대승은 광주 사람이고, 일재 이항은 부안사람이며, 하서 김인후는 장성사람인데, (모두) 도학으로 이름이 높았다. 제봉 고경명과 건재 김천일은 모두 광주 사람이며 절의로 이름이 높았다. p 083



(남원부) 구례의 서쪽에 있는 봉동은 샘과 바위가 기이하다. 동쪽에는 화엄사와 연곡사 같은 명승지가 있고, 남쪽에는 구만촌이 있다. 임실에서 구례까지 강을 따라 내려오면서 이름난 곳과 훌륭한 경치가 많고 큰 마을도 많은데, 구만촌은 시냇가에 자리해 강산과 토지의 이로움과 거룻배 및 생선, 소금의 이로움도 있으니, (이 가운데) 가장 살 만한 곳이다. p 091



옛날에 속수공이 ‘민지방 사람들은 교활하고 음흉하다’고 했지만, 주자 때 이르러 어진 사람들이 많이 나왔다. 어진 사람이 살면서 부유한 생업을 바탕으로 예의, 사양, 문장, 행실을 가르치게 되면, 살지 못할 곳은 아니다. 게다가 (전라도는) 산천에 기이하고 훌륭한 곳이 많은데 고려 때부터 조선에 이르기까지 크게 드러난 사람이 없었으니, 모였던 정기가 한 번쯤은 나타날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지역이 먼 데다 풍속이 더러우니, 살 만한 곳이 못된다. p 096



한반도 북부와 다르게 경상도에 대한 이중환의 평은 꽤나 좋다. 무엇보다 지리가 아주 좋다고 극찬한다. 뿐만 아니라 옛 신라가 있던 곳이며, 경상도는 문학을 숭상하고 문장과 덕행, 절개를 지키는 등 인재들이 많이 나온 곳이라고 한다. 물론 경상 좌도쪽은 땅이 메말라 백성이 가난하긴 하지만, 그럼에도 역시나 문학하는 선비가 많다고 호평한다. 그 와중에도 동래부와 대마도를 콕 집어서, 조선조정에 비판할 건 비판한다. 조선 백성들도 힘든데, 왜 우리 세금으로 왜놈들을 먹여주고 재워주냐는 이야기다. 무엇보다 왜놈들때문에 임진왜란/정유재란을 다 겪고, 나라가 피폐해졌음에도 말이다.



경상도에 대한 극찬과 극명하게 대비되는게 전라도에 대한 비판이다. 물론 전라도에도 인재가 있었고, 임진왜란 당시에는 왜놈과 맞서싸운 의병들에 대한 극찬도 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전라도는 간사한 사람이 많고, 문학을 숭상하지 않으며, 음흉하여 살만한 곳이 못된다고 못박는다. 앞서 한반도 북부에 대한 비판과는 사뭇 다른, 감정이 오백스푼 들어간 평이다. 이쯤되면 전라도 사람에게 대놓고 데인적이..................아! 그러고보니 선조 때 동인을 대학살시킨 서인, 송강 정철이 전라도에서 은거하던 사림들에게 수학했는데, 설마 그때문인가?(동인이 후에 남인과 북인으로 갈라짐)



-충청도


물산이 많기로는 영남이나 호남에 미치지 못하지만, 산천이 평온하고 아름다우며 서울에 가까운 남쪽이어서 사대부들이 모여 사는 곳이 되었다. 서울에 대대로 사는 집 가운에 이 도에 논밭과 집을 마련해 생활의 근본으로 삼지 않은 집이 없다. 게다가 서울과 가까워 풍속에 큰 차이가 없으므로, 터를 골라 살기에 가장 알맞은 곳이다. p 097



-경기도


(수원부) 여기서 서쪽으로 30리쯤 물길을 가면 연흥도가 있다. 고려 말엽에 종실 익령군 왕기는 고려가 장차 망할 것을 알았으므로, 성명을 바꾼 뒤 가족을 모두 데리고 바다를 건너 이 섬으로 도망 와 숨었다. 그래서 고려가 망한 뒤에도 (다른 왕족들처럼) 물에 빠져 죽는 환난을 면했고, 자손들이 그대로 (이 섬에) 살게 되었다. 지금은 (그들의 신분이) 낮아져 목장의 목자가 되었다. p 133



(개성부) 가장 통탄할 점은 정도전이 목은 이색의 문인으로서, 고려 말엽에 재상 반열에 있었으면서도 왕검과 저연이 하던 짓을 본받아 나라를 팔아서 이익을 챙기고 스승을 해치며 벗을 죽인 것이다. 게다가 고려가 망하자 또 왕씨 종실들을 없애는 계책까지 냈다. 자연도에 귀양 보낸다고 핑계를 대고서 큰 배 한 척에 왕씨들을 가득 태워 바다에 띄운 다음, 남몰래 보자기에게 배 밑바닥에 구멍을 뚫으라고 해서 가라앉힌 것이다. p 143



(개성부) 성에서 동남쪽으로 10여 리 되는 곳에 덕적산이 있는데, 이 산위에 최영 장군의 사당이 있다. 사당 옆에 침실을 만들고 민간의 처녀를 두어 사당을 모시게했다. 지금까지 300년을 하루같이 그렇게 했다. 그 시녀가 말하길 ‘밤이되면 신령이 내려서 교접한다’고 했다. 그러나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 최영은 무모하고 용맹만 있는 사내여서, 자기 딸을 왕우의 비로 삼았고, 나랏일을 잘못해 마침내 사직이 다른 사람의 손에 넘어가게 했다. (죽은 뒤에도 혼이) 하늘에 오르지 못하고 땅에도 들어가지 못해, 국사도 교사도 받지 못하는 귀신이 되었다. 그런데도 남녀의 즐거움을 잊지 못했으니, 그가 자신의 죽음에 대해 심복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그는 어리석고도 음탕하다고 말할 만 하다. p 146



이중환이 말하는 사대부가 살기 좋은 땅이 충청도편에서 나온다. 충청도 중에서도 어딘고 하니, 바로 공주다. 아주 여러 이유를 들어 충청도가 살기 좋다고 극찬하지만, 자세히 보면 여기에도 사심이 오백스푼 들어가있는 듯 보인다. 그도 그럴것이 충청도 공주는 이중환의 고향이기도 하다. 뭐, 근데 이중환의 고향인 것을 떠나서, 현재 기준으로 충청도는 수도권은 아니지만, 수도권에 인접하고, 수도권보다는 집값이 저렴하니 지금도 살기 좋은 땅은 맞는 것 같다. 



경기도 편에는 이래저리 그 땅에 얽힌 고려말 조선초의 이야기를 많이 한다. 정확히는 조선조정에 의해 학살된 고려사람들 이야기를. 그 와중에도 최영장군을 깎아내리는 듯한 민간전승도 이야기한다. 뭐 이렇든 저렇든, 결론적으로 경기도는 당쟁에 편승한 사대부가 많이 살고 있기에, 경기도도 전체적으로 살만한 곳이 못된다는게 이중환의 평이다.



이중환이 가장 좋은 지리적 환경으로 꼽는 땅은 기름진 곳이고, 그 다음은 배와 수레와 사람과 물자가 모여들어 필요한 것을 서로 바꿀 수 있는 곳이다. 그는 무엇보다 인간의 생산 활동, 창조적인 생명력이 있는 땅을 중시했다. 인간은 자신의 생존을 위해 생산 활동에 참여할 수 밖에 없는데, 생산활동에서 무엇보다 중요한 것이 지리적 환경을 이용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우리나라의 지리적 환경이 상선의 운용에 가장 좋은 조건을 갖추고 있는데도 이것을 최대한 이용하지 못해 모든 물자를 말로만 운송하는 문제점을 지적했다. 또한 그런 문제는 조선술이 발달하지 못한 데 있다고 보았으며, 물자의 운반 수단에 대한 대대적인 개선을 주장하기도 했다. 이는 박지원, 박제가 등이 배, 수레의 제조 및 활용을 주장한 것과 연관이 있다. p 151(《택리지》에 나타난 이중환의 실학사상)



이러한 《택리지》에도 한계점이 없는게 아니다. 풍수사상, 자연과 인간의 관계에 대한 환경결정론적 시각, 선호하는 지방이나 지역에 대한 편견에서 벗어나지 못했고, 지리적 패러다임을 구체적으로 제시하지 못한점 등이다. 물론 《택리지》가 풍수지리의 내용을 담고 있다고 해서 큰 문제가 되는 것은 아니다. 이것은 이중환 자신의 사상이라기보다는 18세기 사회 전반에 팽배한 길흉화복에 대한 음택풍수의 사유를 수용하고 나타낸 것 뿐이다. p 153(《택리지》에 나타난 이중환의 실학사상)



팔도총론편을 읽으면 이중환이 살기 좋은 환경으로 꼽는 곳의 주된 공통점이 있다. 농사짓기 좋은 기름진 땅이 있는 곳이거나, 배가 드나드는 강/바다 등 수로가 있는 곳, 수레가 다니는 넓은 도로가 있는 곳이다. 조선에서는 직업의 우선순위를 ‘사/농/공/상’으로 나뉘어, 제일 귀한건 공부하는 선비, 그 다음이 농사를 짓는 농부였다. 공업이나 상업같은 생산활동은 주자성리학자 입장에서는 멸시하는 쪽에 가까웠다. 고로 배, 수레 운반에 대한 중요성을 이야기 한다는 것은 조선의 사대부, 즉 주자성리학자에게는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조선 사대부들에게 이중환 같은 사람들은 사문난적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이중환은 개의치 않았다. 공부, 농사도 분명 중요하다. 하지만 돈이 없으면 당연히 가세가 기우니 공부를 할 수 없고, 운반을 할 수 없으면 농사를 지어도 잉여농산물을 팔 수가 없다. 어찌 운반이 중요하지 않겠는가. 그렇다. 이중환은 조선후기 실학자의 계보를 잇는 사람 중 하나였다.



〈복거총론〉


팔도총론에서 각 지역별 장,단점을 이야기하며 시동을 걸었다면, 복거총론은 팔도총론에 대한 해설과 함께 정말 살기좋은 땅이란 무엇인지, 자신의 의견을 서술한 택리지의 실질적 본편이다. 


-지리


무릇 살 터를 잡는 데는 지리가 으뜸이고, 다음으로 생리가 좋아야 하며, 인심이 좋아야 하고, 아름다운 산과 물이 있어야 한다. 이 네가지 가운데 한 가지라도 없으면 살기 좋은 땅이 아니다. 지리가 좋아도 생리가 모자라면 오래 살 수 없고, 생리는 좋아도 지리가 나쁘면 역시 오래 살 수 없다. 지리와 생리가 아울러 좋아도 인심이 나쁘면 반드시 후회할 일이 생긴다. 또한 가까운 곳에 노닐만한 산수가 없으면 성정을 도야할 수가 없다. p 156



-생리


공자의 가르침에도, 넉넉해진 뒤에 가르친다고 했다. 제 몸도 가리지 못하고 빌어먹게 되어, 조상의 제사도 받들지 못하고 부모를 봉양하지도 못하며 처자의 윤리도 모르는 자에게 어찌 가만히 앉아서 도덕과 인의를 말할 수 있겠는가? p 161



물자를 옮겨서 교역하는 방법은 신농 성인이 만들었다. 이러한 법이 없으면 재물이 생길 수 없다. 그런데 (물자를 옮기는 방법으로는) 말이 수레보다 못하고, 수레가 배보다 못하다. 우리나라는 산이 많고 들이 적어서, 수레가 다니기에는 불편하다. 그래서 온 나라의 장사꾼들이 모두 말에다 짐을 싣는다. 그러나 (갈) 길이 멀면 옮기는 비용은 많이 들면서도 소득은 적다. 그러므로 (말로 짐을 옮기는 것이) 배에 짐을 실어 옮겨서 교역하는 이익보다는 못하다. p 164



-인심


서울은 사색당파가 모여 살아 풍속이 뒤섞여 고르지 않다. 지방은 서북 삼도를 빼고는, 사색당파가 동남 오도에 나뉘어 살고 있다. 경상도만은 모두 예안 이황의 학문을 숭상하는데, 유성룡은 이황의 문인이었다. 남인이라는 이름이 유성룡 때문에 생겼으므로, 온 도의 사대부들이 남인이 되어 의논이 통일되었다. 그러나 나른 도에는 사색당파가 고을마다 섞여 살고 있다. p 187



개벽 이래 천지간 여러 나라에서 인심이 일그러지고 무너져 본성을 잃었지만, 지금처럼 붕당 때문에 걱정한 적은 없다. 이를 그대로 두고 고치지 않으면 장차 어떤 세상이 될 것인가. 한 귀퉁이의 탄환만 한 나라가 비록 작다고는 하지만 산 백성이 100만이나 되니, 장차 그 심성을 다 잃어버려 구제할 수 없게 된다면 그 또한 슬픈 일이다. p 191



그러나 (같은 색목끼리 모여 사는 즐거움도) 사대부가 없는 곳을 가려서 문을 닫고 교제를 끊으며, 홀로 자신을 착하게 하는 것보다는 못하다. 그렇게만 되면 비록 농사꾼이 되거나 장인이 되거나 장사꾼이 되어도 (참된) 즐거움이 있을 것이다. 이와 같이 되면 (그 고장의) 인심이 좋은지 나쁜지도 따질 필요가 없을 것이다. p 190



-산수


산수는 정신을 즐겁게 하고 감정을 화창하게 한다. 사는 곳에 산수가 없으면 사람을 촌스럽게 만든다. 그러나 산수가 좋은 곳 가운데는 생리가 박한 곳이 많다. 사람은 자라처럼 (모래 속에) 살지 못하고, 지렁이처럼 (흙만) 먹을 수 없다. 그래서 오직 산수만 보고 삶을 누릴 수는 없다. 그러므로 (산수만 보고 사는 것보다는) 기름진 땅과 넓은 들에 지세가 아름다운 곳을 골라 집을 짓고 사는 것이 좋다. 그리고 10리 밖이나 반나절 거리 안에 산수가 아름다운 곳을 사 두었다가 생각이 날 때마다 때때로 오가며 시름을 풀고 머물러 자다가 돌아온다면, 이야말로 계속할 수 있는 방법이 될 것이다. p 251



특히 이중환은 ‘인심’편에서 맹모삼천지교를 이야기하며 지방의 풍속의 중요성을 이야기 한다. 그러면서.....동서 당쟁의 시초를 시작으로 붕당정치의 폐해, 인조반정, 서인들의 집권 및 분열 등을 길게 이야기 한다. 이중환 본인이 사대부이면서 당쟁의 피해자이기도 하지만, 당쟁의 피해가 사대부 뿐만 아니라 일반 백성들에게까지 미친다는 이야기를 한다. 



당쟁의 피해가 백성에게까지 피해를 미친 대표적인 사례가 앞서 팔도총론에서 이야기했던 임진왜란이다. 임진왜란 발발 전 일본에 사신으로 갔던 황윤길과 김성일은 각각 서인과 동인이었다. 그들은 동/서인의 격렬한 당쟁속에서 선조에게 상반된 의견을 보고했다. 물론 그 보고에 따라 올바른 판단을 해야하는건 조선의 왕 선조였고, 선조가 올바른 판단을 하지못한것도 문제지만, 서로 당파가 다르다는 이유로 상반된 보고를 한 두 사람도 문제였다. 결국 일본이 조선으로 처들어왔고 조선 땅에서 7년동안 전쟁이 벌어졌다. 또 다른 사례로는 병자호란도 있다. 병자호란 역시 조선의 사대부들이 척화파와 주화파로 나눠서, 서로 명분싸움만 하는 바람에 조선의 백성들이 또한번 피해를 입고야 말았다.



당쟁의 폐해는 비단 과거의 문제가 아니다. 민주공화국이 된 현재를 보면, 각 정당들이 서로 반대를 위한 반대만을 외친다. 그 피해는 고스란히 국민들에게 돌아오고 있다. 역사를 공부하는 이유가 이렇게 ‘반복’되는 좋지못한 행동을 개선하기 위함인데, 이 나라에선 언제끔 그게 가능해질런지, 그럴 가능성이 있긴 한건지 당최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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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문화재로 만나는 백제의 흔적

내 개인적으로 제일 백제 역사책 추천을 한다면 이 책, 「문화재로 만나는 백제의 흔적」이다. 제일 큰 이유는 저자이신 김희태님은 오로지 사료와 문화재에 입각하여 글을 쓰시고, 연구자에 따라 의견이 불분명한 부분에 대해서는 있는 그대로 글을 쓰시고, 판단은 책을 읽고 있는 독자의 몫으로 남겨두시기 때문이다. 참고로 말하자면 희태님은 쓰시는 책 모두, 행여나 부정확한 오류를 담아서 역사 왜곡을 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오롯이 사료나 문화재를 통해 명확하게 입증된 것을 기준삼아 글을 쓰신다.


이 책은 청소년들에게 추천하기 딱 좋은 역사책이다. 학교 국사시간에 배우는 백제 문화재가 고스란히 책속에 나오기 때문이다. 아무래도 책의 주제가 ‘문화재로 만나는’ 백제의 흔적이다보니 그럴지도 모르겠다. 


대게 ‘백제’라고 하면 우리는 한성백제, 웅진백제, 사비백제, 그리고 익산 왕궁리(천도여부를 떠나서)를 배운다. 더군다나 각 시기에 해당하는 백제성이 남아있기도 하고. 한성은 몽촌토성/풍납토성, 웅진은 공산성, 사비는 부소산성 이렇게 말이다. 시대순으로 우리가 잘 알고 있는 한성백제(서울) 몽촌토성, 풍납토성은 물론이고, 웅진백제(공주)의 공산성, 사비백제(부여)의 부소산성 그리고 익산 왕궁리 기본으로 나온다. 그리고 이 성들은 해당 지역에 있는 다른 백제 유적지와 함께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되어 있기도 하다. 


난 학창시절 엄마아빠와 여행을 다닐때, 대게 국사책에 사진이 실려있는 유적지 위주로 다녔다. 그래서 당연히 공주, 부여 여행도 갔었다. 공산성을 다 돌고, 송산리고분군(+무령왕릉)을 보았다. 부여에 가서는 역시나 부소산성(+낙화암)을 다돌고, 능산리고분군, 정림사지를 보았다. 이것들을 직접 눈으로 보았때야 비로소, 국사책에서 공부했던 백제에 대해 이해하기 시작했다. 확실한 건 엄마아빠와 역사여행을 주로 다녔기에, 역사를 더 좋아하게 되었다는 점이다. 엄마아빠와 여행 추억은 덤이고! 아,  어쩌면 이건...엄마아빠의 의도였나 싶기도 하고.....허허.


그저 책으로 공부하는 것과, 직접 가서 보고 공부하는 것은 많이 다르다. 그렇기에 이 책은 자녀를 둔 부모들에게 필히 추천하고 싶은 역사책이기도 하다. 이 책을 읽으면서 책속의 장소로 여행을 떠나고, 그 장소에서 이 책을 다시 꺼내 읽어보고, 그러다보면 막연했던 고대국가 백제가 어느새 눈 앞에 다가온다. 약간 삼천포긴 하지만, 저자의 다른 책인 ‘왕릉으로 만나는 역사, 신라왕릉’도 같이 읽어보면 좋을 듯하다.




2) 백제왕조실록 1,2

우리집 책장 한켠에는 살림지식총서가 쫘르르 꽂혀있다. 물론 전권은 아니고, 역사에 관련된 책들에 한해서만! 이 책 「백제왕조실록 1,2」는 살림에서 고조선부터 조선까지 ‘실록’형태로 출판한 역사책 중 하나이다. 우리집에 백제관련 역사책도 꽤 있는데, 굳이 이 책을 고른 이유는 말그대로 ‘실록’ 형태로 기록되어 있어서, 백제사를 시간순으로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대체적으로 이 책은 《삼국사기-백제본기》를 기본으로 서술한다. 물론 삼국사기가 고려시대에 집필된, 신라의 시선에 입각하여 쓴 책이긴 하지만, 우리나라에 남아있는 고대사 사료는 삼국사기 밖에 없기 때문이다. 물론 삼국유사도 있긴하나 야사이며, 고대사의 정사는 삼국사기가 유일하다. 물론 삼국사기 만으로는 내용이 빈약할 수 있으므로, 우리와는 달리 고대의 사료가 많이 남아있는 중국, 일본 사료의 내용도 이 책에 담겨있다. 


1권은 1대 온조왕부터 ~ 25대 무령왕까지, 2권은 26대 성왕부터 ~ 31대 의자왕까지다. 1권에 백제 왕의 4/5가 몰빵되어 있는 이유는, 고대중에서도 고대라(^^) 사료가 그만큼 빈약하고, 워낙에 금방 죽은 왕들도(...) 꽤 있었기 때문이다. 반면 2권의 성왕, 위덕왕, 혜왕, 법왕, 무왕, 의자왕 쪽은 중국이나 일본쪽의 사료도 꽤나 남아있기에, 그 분량이 1권과 맞먹는다. 그리고 대체적으로...우리가 국사시간에 알고 넘어가야하는 백제 왕들은 대게 후반부 왕들이기도 하고. 하ㅏㅎ.ㅎ.ㅏ하.


책 자체도 작고 얇다보니, 백제 역사를 처음부터 끝까지 간략하게 한눈에 살펴보기엔 이 만한 역사책이 없지싶다. 





3) 백제왕의 죽음

이 책은 내가 고등학생 때 쯤 부터 우리집 책장에 꽂혀있던 책이다. 그때도 지금처럼 역사를 좋아한 건 매한가지였고, 심지어 그때는 부천역 교보문고랑 영풍문고를 제 집처럼 드나들때였기에 아마 그 즈음에 샀던 책이 아닐까 싶다. 다만 당시에는 책을 읽어도 어딘가에 기록한 적도 없었기에, 내가 이 책을 읽었을 때 어떤 생각을 가졌었는지.....뭐, 아마 당시에는 지금처럼 전문서적보다는 흥미위주의 대중서적을 읽다보니, 다 곧이곧대로 믿지 않았을까 하는 느낌이 들긴 하지만 ㅋㅋ


1n년이 흐른 지금와서 다시 읽어본 「백제왕의 죽음」이란 책은 두번 읽을 책은 아닌 느낌이다. 뭐라고 해야하나, 꼭 조선왕 독살사건 이란 책의 백제버전이라고 해야하나? 읽는 사람으로 하여금 ‘혹!!’ 하게 하는 그런 책이다. 한마디로 흥미위주의 책이랄까. 하하. 


이 책은 백제왕들의 죽음을 다루고 있으며, 백제왕의 죽음을 크게 3가지(의문사, 객사, 전사) 로 나누었다. 근데 의문사든 객사든 어느 에피소드를 읽어도 결국 ‘추정’으로 끝난다. 정확히는 본인의 추정을 ‘단정’한다. 뭐, 백제같은 고대사는 사료가 많이 남아있지 않다보니, 추정이 많이 들어갈 수 밖에 없긴하다. 단, 고대사를 추정하는데 있어서는 남아있는 사료(대내외기록, 문화재 등)를 분석하여, 당대의 기준으로 최대한 합리적이라 생각하는 쪽으로 추정한다. 그래서 같은 사건에 대해 어떤 사람은 A라고 추정하고, 또 어떤 사람은 B라고 추정하기도 한다. 이런 고대사의 추정은 들어보면, 둘다 그럴듯하기에 ‘오오! 그럴수도 있겠군!’ 할 수 있다. 단, 언제 어디서 또 다른 사료가 뿅! 하고 나타날 수 있기 때문에, 추정을 할 뿐 단정짓지는 않는다. 근데 이 책은.....자신의 주장을 추정을 빙자한 단정같달까. 음, 이걸 어떻게 표현해야하나. 뭐랄까, ‘조선왕의 1/3이 독살당했다’고 주장하는 그런 이야기와 비슷한 맥락으로 보인달까.



거기다 분명 책의 주제는 백제왕의 ‘죽음’인데, 책의 반정도 되는 분량밖에 안된다. 네, 그냥 뭐 그렇다구요. 백제사에 흥미를 가지는 초기 입문 대중서로는 썩 나쁘지는 않긴한데, 워낙 발매한지도 오래된 책이고, 백제사 초기 입문 대중서로는 지금 나온 책들도 잘나온 책이 너무 많으니(예를 들어 위에 쓴 「문화재로 만나는 백제의 흔적」 같은), 굳이 찾아볼 필요는 없는듯. 허허허하하.하ㅏㅏ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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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코와 함께 한 일본 사찰 순례 - 우리가 미처 몰랐던 불교의 나라 일본 이야기
나카노 요코 지음, 최선일.홍은미 감수 / 종이와나무 / 2018년 5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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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 「요코와 함께한 일본 사찰 순례」는 2018년에 출간되어, 당시에 읽었던 책이다. 거기다 아주 소오름돋게도 당시에 책을 읽고 리뷰를 남겼던 기록이 이 블로그에 고스란히 남아있다-_-;;; 당시의 리뷰 포스팅을 지금 읽어보니 참 쉽게도 썼다. 때마침 일본여행도 무비자로 풀렸고해서, 이 책을 다시 읽고 리뷰를 남겨보자 한다. 




나는 일년에 2~3회 일본을 갈 정도로 일본 여행을 좋아했다(물론 19년 4월 이후로 지금까지 일본을 못가고 있지만). 이렇게 일본을 가면 내가 주로 방문하는 여행지는, 흔하디 흔한 관광지보다는 주로 한반도와 관련된 유적지(고대부터 근대까지)를 찾아다닌다. 한국에서도 유적지를 찾아다니는데, 일본에서라고 다를까! 거기다 한반도 도래인과 관련된 유적지는 대게 사찰 아니면 신사다보니, 당연히 이 책을 읽을 수 밖에! 겸사겸사 도래인과 관련된 사찰이 아니어도, 일본에도 멋진 사찰이 많기도 하니까.



이 책은 저자의 나라, 교토, 시가 지역 사찰 여행기를 담은 일본 여행책이다. 해당 사찰에 대한 유래와 역사적 사건들, 사찰과 연계해서 가볼만한 곳 등이 이 책에 실려있다. 내 개인적으로는 어디를 가든, 그 곳에 대해 조금은 알고 있어야 더 재밌다고 생각하는 편이다. 그곳이 한국이든 외국이든. 하지만 한국인에게 일본 사찰은 그냥 외국 절 또는 관광 그 이상, 이하도 아닌 경우가 많다. 거기에 일본 사찰 유래라니, 모르는게 당연하달까? 그래도 알고 보면 좀 재미있으니, 아무리 일본에 놀러왔다고 하더라도, 조금은 알고 봤으면 좋겠다. 특히 한반도 도래인과 관련된 유적지는 더더욱 그랬으면 좋겠다. 그래서 혹시나 일본여행을 계획하고 있다면, 그중에서도 교토여행을 계획하고 있다면(나라, 시가 포함) 이 책을 여행책으로 추천하고 싶다.


한반도 도래인에 의해 창건되었거나, 도래인과 관련된 사찰들은 일본 곳곳에 산재해있다. 그중에서도 대표적인 곳이 대표적인 곳이 나라의 아스카데라, 호류지, 도다이지 등이다.


비행기가 없었던 옛날에도 배를 타고 한반도에서 일본을 건너온 사람들이 있었다. 바로 도래인이다. 5세기 이후 아스카에서는 한반도를 기원으로 하는 토기나 건물, 온돌 등 도래인의 흔적이 많아졌다고 한다. 『일본서기』에 의하면 도래인 기술자들을 아스카 마을 시마노쇼 부근에 정착시켰다고 한다. 도래인들은 건축, 야철, 방직, 토기, 문서 작성 등 여러 분야에서 활약하고 일본 문화와 기술발전에 크게 기여했다. 6세기 들어 백제에서 불교도 전래되었다. 지금은 일본에서 불상을 배례하는 것이 당연한 일로 받아들여지지만 당시에는 큰 충격이었음을 상상할 수 있다. p 017



아스카데라를 발원한 소가씨는 도래인의 후손으로 알려져있으며, 아스카데라를 건축한 기술자들도 도래인으로 추정된다. 실제로 도래인과 관련된 지역에서는 한반도계 유물들이 나오기도 하고, 인근 지명들도 백제(쿠다라), 고구려(코쿠리), 신라(시라기), 가야(카라) 와 관련된 것들이 많이 있다. 지금까지 내가 책으로 읽고, 직접 보고온 것으로 비춰볼 때 대체적으로 나라지역은 백제계 도래인이, 교토지역은 신라계 도래인이, 도쿄는 고구려계 도래인이, 큐슈는 가야계 도래인과 관련된 것들이 많이 보인다. 특히 고구려, 백제, 신라, 가야 도래인들은 기존에는 국가간 외교로 넘나들다가, 일본으로 대거 넘어간 시기는 대체로 각 국가들이 멸망했던 시기이다. 특히 백제부흥운동, 백촌강전투 패배를 기점으로 백제인들이 일본으로 대거 넘어가기도 했다. 



백촌강전투 당시에 일본 천황가는 신료들의 반대에도 무릅쓰고 백제에 대규모 군사지원을 하기도 했다. 왜냐? 다들 들어보았을 것이다. 일본황실에 백제인의 피가 섞여있다는 뭐 그런 이야기. 실제로 교토 히라노신사에서 모시는 네 명의 신이 모두 한반도 신이다. 뭐 걔중에서도 두 명의 신은 백제 근초고왕, 근구수왕 또는 한반도의 조왕신과 부엌의 불신이라고 하는데, 나머지 두 신은 확실하다. 두 신은 간무천황의 모친인 고야신립의 조상신과 백제 성왕이다. 간무천황의 모친인 고야신립은 무령왕의 자손이라고 하며, 백제 성왕이야 우리가 더 잘아니 PASS! ......는 어디까지나 말꼬리가 길어진 TMI. 


(*한반도 도래인 관련 도쿄, 교토 신사 및 사찰에 대한 내용은 일본여행 포스팅 곳곳에 있으니 궁금한 분들은 내 여행기 포스팅을 보면 될듯!)



다시한번 말하지만 이 책은 나라, 교토, 시가지방의 ‘사찰’여행기를 남은 책이다. 이 책에 실린 교토 사찰은 총 14곳인데, 그 중 8곳은 내가 가봤던 사찰이라, 그 사찰들을 위주로 기록을 해보려고 한다. 한마디로, 내 교토여행기 복기인셈! (나라, 시가지역은 여러 역사책으로만 익숙할뿐, 실제로는 아직 못가봤으므로^_T). 다만 아쉬운점은... 교토의 다이토쿠지가 없다는 것이다. 다이토쿠지 진짜 멋진 사찰인데T_T. 




▶ 덴류지(천룡사)


덴류지가 자리잡은 사가노, 아라시야마라고 불리는 이지역은 고대에 도래인 하타씨에 의해 개척된 곳이라고 전한다. 경치가 아름다운 이 지역은 헤이안쿄 천도 이후 천황가의 이궁과 귀족의 별장이 지어진 지역이 되었다. (생략) 임제종 덴류지파 대본산 덴류지는 1339년에 나라, 요시노에서 억울하게 죽은 고다이고 천황의 명복을 빌기 위해 아시카가 다카우지 장군이 무소국사를 개산조사로 창건한 것이다. p 152



14세기 중반에 일어난 화재를 비롯하여 8번 대화재의 피해를 입어 소실과 재건을 반복했다. 메이지 시대의 폐불훼석 때 사찰 땅이 메이지 정부에 많이 수용되어 버리고, 현재 사찰 경내지는 원래의 10분의 1정도가 되었다. 현재 경내에 있는 건물 대부분이 메이지 시대에 재건된 것이다. p 154


아라시야마는 교토에 갈때마다 들렸던 것 같다. 아무래도 교토 아라시야마를 개척, 개발한 사람들이 한반도 도래인인 하타씨다보니! 하타씨에 대해 조금 이야기하자면, 하타씨는 가야계 신라인 출신이라는 설이 제일 유력하다. 성씨는 한자로 ‘진(秦)’씨, 일본어로 읽으면 ‘하타’다.



 하타씨의 대한 흔적은 교토 곳곳에 산재해있다. 하타씨는 교토에 터를 잡고 아라시야마를 비롯하여, 교토 곳곳에 뿌리를 내렸다. 교토 아라시야마의 다리, 도월교 라던가 ‘술’ 신사인 마츠오신사는 하타씨 작품이다. 역시나 관광지로 핫한 ‘천개의 도리이’ 후시미이나리 신사도 하타씨의 작품이며, 교토 우즈마사 일대의 누에신사나 고류지, 뱀무덤 모두 하타씨가 시작이다. 하타씨의 부흥기를 일으킨 사람은 ‘진하승(하타노 카와카츠)’라는 사람으로 쇼토쿠 태자의 측근이기도 했다.


 


자, 그럼 ‘진씨’인 그들이 왜 일본에서 ‘하타씨’로 불리는가에 대해서는 여러 설이 있는데, 그중 하나가 바로 강원도에 위치해있던 고대국가 ‘파단국(파조국)’이다. 신라 지증왕 때, 그 유명한 신라장군 이사부가 실직국(삼척), 파단국(울진), 우산국(울릉도)를 점령하면서 이 땅이 신라에 병합되었는데, 당시 파단국에 있던 사람들이 바다건너 왜로 넘어가면서, 자신들의 이름을 ‘파단’의 일본 발음인 ‘하타’라고 정했다는 뭐 그런이야기다. 파단국이 신라가 되었으니, 결국 신라에서 왜로 넘어간 사람들이 되고, 자연스레 신라계 도래인이 된다고나 할까?




▶ 기요미즈데라(청수사)


도래인의 후손인 사카노우에 다무라마로는 임신한 아내에게 몸에 좋은 것을 먹이려고 기요미즈야마에 들어와 사슴을 사냥했다. 목이 말라 물을 마시려고 샘물을 찾아봤더니 오토와노타키 폭포를 찾았고 거기서 겐신을 만났다. 겐신에게 관음의 불살행과 대비의 마음에 대한 이야기를 들은 다무라마로는 큰 감동을 받아서 둘이 힘을 합쳐 함께 사찰을 건립하기로 약속했다. 780년에 기요미즈데라는 이렇게 사카노우에 가문의 사찰로 시작했다. p 115


교토의 핫하디 핫한 관광지 기요미즈데라. 교토에 간 한국인이라면 1번 이상은 갔을 것이다. 난 음...기요미즈데라를 세번갔나, 네번갔나. 여튼 자주 갔다. 이유인 즉, 남들처럼 기요미즈데라가 핫하디 핫한 관광지라서라가 아니라, 백제 도래인과 관련된 사찰이기 때문에 갔던 곳이다. 사카노우에 다무라마로는 일본 사서 <속군서류종(續群書類從)>에 따르면 290년에 백제에서 건너온 백제 왕족 ‘아지사주(아치노오미)’의 후손이라고 한다. 뭐, 여기서 조금 더 들어가면 ‘아지사주’는 야마토 아야씨의 조상이기도 하다고...는 역시나 TMI.



 


위 책에서 언급했듯 기요미즈데라를 건립한 사람은 사카노우에 다무라마로라는 사람이다. 헤이안시대 무관이면서 다이나곤 직책을 가졌던 나름 고위급 관리였다. 일본은 예로부터 한 가문에 종속된 신사나 사찰이 대다수였다. 그러한 맥락에서 기요미즈데라 역시 사카노우에 가문 사찰이었다. 실제로 현제 기요미즈데라 전각 중에는 ‘전촌당’이라는 전각이 있는데, 기요미즈데라를 창건한 사카노우에 다무라마로 부부를 모시고 있다. 다만 공개가 안되어서, 볼 수가 없다^_T. 특별한 날에는 공개를 한다고 하는데, 그 날을 잘 몰라서 ㅋㅋㅋㅋ 교토 갈때마다 키요미즈데라를 갔던 것 같다.



아참, 지금 기요미즈데라는 창건당시의 모습은 아니다. 기요미즈데라는 엔라쿠지 승병들의 잦은 습격으로 파괴와 재건이 반복되었고, 교토의 다른 사찰들처럼 오닌의 난때 완전 소실되었다가 에도시대 때 지금의 모습으로 재건된 것이다.




▶ 뵤도인(평등원)


산으로 둘러싸이고 비와코에서 내려온 우지강의 맑은 강물이 흐르는 풍광명미한 우지는 헤이안 귀족들이 별장을 짓는 곳이기도 했다. 뵤도인 시작도 9세기 중엽에 세워진 별장 우지원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주로 황실 일족이 소유하던 우지원을 후지와라노 미치나가가 998년에 물려받았다. 그는 이곳을 우지덴이라고 부르고 경승을 즐겼다. 그것을 미치나가의 아들인 요리미치가 물려받았다. 요리미치는 1052년에 본당을 건립했다. 이때부터 우지덴은 뵤도인이라는 사찰로 불리었다. 이것이 뵤도인의 시작이다. p 126


우리나라 수학여행 필수 코스 경주 불국사! 불국사 다보탑은 우리나라 10원 동전에 뒷면에 새겨져있다. 그렇다면 일본은? 일본 역시 수학여행 필수코스가 있는데, 그 필수 코스가 10엔 동전 뒷면에 새겨져있다. 바로 교토부 우지시에 있는 사찰 뵤도인. 다만 이 곳은 한국인 관광객이 그리 많은 편은 아니다. 음, 거의 없다고 하는게 맞으려나. 우리가 아는 교토는 교토부 ‘교토시’에 해당하다보니, 자연스레 교토 외곽인 우지는 한국 사람들이 잘 찾지를 않는다. 완전 멋진 곳인데.....ㅋ




우지라는 곳이 헤이안 시대 귀족들의 별장이 있던 곳이기도 했을뿐더러, 뵤도인은 무려 황실 일족의 별장이 그 시작이었으니 얼마나 화려한지는 두말 하면 잔소리. 뵤도인 인근에는 우지강이 흐르고 있는데, 그곳에 <겐지모노가타리>의 저자 ‘무라사키 시키부’ 동상도 있다. <겐지모노가타리> 자체가 헤이안 시대 고위층 귀족들의 연애(좋게 말하면..ㅋㅋ)를 담은 일본 최초의 고전소설이다. <겐지모노가타리>를 읽은 게 워낙 오래전이라, 그저 히카루 겐지가 여러 궁중의 여자를 후린(-_-;;) 독보적인 바람둥이 정도로 기억...나는데 흠 뭐 여튼! <겐지모노가타리>의 배경이 헤이안시대다보니, 자연스레 교토의 여러 장소가 나온다. 우지도 당연히 소설의 배경으로 나오는데, 그래서 우지강변에 무라사키 시키부의 동상이 있었나...기억이 가물가물. 확실한건 무라사키 시키부 동상을 발견하고 좋다고 사진 찍었다는 뭐 그런 TMI.




▶ 닌나지(인화사)


닌나지가 위치한 이곳은 헤이안 시대 초기부터 경승지로 알려져있고 많은 귀족이 별장을 지었다고 한다. 여기에 886년 고코천황이 사찰을 발원했다. 그러나 이듬해 고코천황이 세상을 떠나자 천황의 아들인 우다 천황이 아버지의 유지를 받들어서 888년 사찰을 개창했다. 당시의 연호인 ‘닌나’가 닌나지라는 사찰 이름으로 붙여진 연유다. 우다천황이 897년 31세때 왕위를 아들에게 양위하고 899년에는 출가해서 법황이 되었고 904년 닌나지에 어실을 만들었다. 법황이 거주하는 곳을 오무로 라고 부르는데, ‘닌나지에 있는 오무로’가 ‘오무로가 있는 닌나지’가 되어 이후로는 ‘오무로’가 닌나지 일대의 지명이 되었다. p 098



현재 닌나지 금당이 고토고쇼 시신덴을 옮겨 놓은 것인데 당시의 궁전건축의 특징을 보여주는 건물로 정말 귀중하다. 금당뿐만 아니라 닌나지는 전체적으로 우아하고 일본미를 느낄 수 있는 분위기를 갖고 있는데 역사적으로 황실과의 깊은 관계가 있는 것이 그 연유라 할 수 있다. p 101

*법황: 출가한 태상황

*오무로: 법황이 거주하는 곳



 


 

오무로 닌나지. 한국인들에게는 조금 생소한 사찰이지만, 교토에서는 벚꽃명소로 엄청 유명한 곳이다. 이곳에서 피는 벚꽃은 교토에서는 개화가 가장 늦은반면, 아주 큰 왕벚꽃이라 엄청 이쁘다. 특히나 벚꽃 사이에 있는 오중탑을 보면 ‘오오!’ 아. 물론 봄의 닌나지는...난 사진으로만 봤다 ^_^ㅋㅋㅋ


난 가을의 닌나지만 봤을 뿐이다. 헤헤히ㅣㅎ.ㅎ..히히. 모름지기 ‘벚꽃명소=단풍명소’가 아니겠는가? 멋진 단풍을 구경할 수 있을 거라 생각하고 들렀던 닌나지는, 역시나 어마무시한 단풍들이 내 눈앞에 쫘르르르르.



특히나 닌나지는 ‘오무로’라는 단어에서 알 수 있듯, 법황이 있던 곳이라 사찰의 위용이 대단하다. 당시 천황가에서 팍팍 밀어줬으니, 으리으리할 수 밖에! 물론 오닌의 난 때 다른 교토의 사찰들처럼 잿더미가 되어버렸지만, 에도시대에 고토고쇼의 건물 일부를 하사 받았다. 닌나지의 금당이 바로 고토 고쇼의 건물! 황궁의 건물을 사찰로 썼으니 으리으리할 수 밖에 ㅋㅋㅋㅋ




▶ 킨카쿠지(금각사)


킨카쿠지 정식 명칭은 로쿠온지라고 한다. 현재 킨카쿠지가 있는 곳이 원래 무로마치막부 3대 장군인 아시카가 요시미쓰의 별장 기타야마전이 있었다. ‘로쿠온’은 요시미쓰의 법호인 ‘로쿠온인’에 유래된다. 킨카쿠지라는 이름이 널리 알려진 것이 에도시대에 들어서다. (생략) 1408년에 요시미쓰가 세상을 떠난 후 기타야마전의 대부분이 해체되어 다른 사찰로 옮겨졌다. 유일하게 남은 것이 훗날 킨카쿠지라고 불리는 사리전과 정원이었다. 이 사리전을 중심으로 창건된 사찰이 바로 킨카쿠지다. 1420년 무렵에 덴류지 개산조사인 무소국사를 권청개산으로 기타야마전이 로쿠온지가 되었다고 전한다. p 160



창건 후 큰 전란이나 화재를 겪으며 버텨오고, 살아남은 킨카쿠지였지만, 1950년에 방화로 건물과 안에 있던 문화재 6점이 소실되었다. 범인은 킨카쿠지의 21세 학승이었다. 다행히 메이지 시대에 킨카쿠지를 해체, 수리했을 때의 기록이 남아 있어 이것을 기반으로 1955년에 복원되었다. 또 1987년에 보통 금박보다 5배 두꺼운 금박을 입혔다. p 163

*권청개산: 실제 개산이 아닌 신앙상 과거의 사람을 개산으로 할때, 그 사람을 가리키는 말


교토에서 기요미즈데라 만큼이나 핫한 사찰이 바로 킨카쿠지다. 아주 금빛이 번쩍번쩍해가지고 튀기도 엄청 튄다. 물론 원래 이름은 킨카쿠지가 아닌, ‘로쿠온인’. 그저 금박이 씌어있다보니, 에도시대부터 금각사라고 불렀을 뿐이다.



난 교토 핫한 유적지는 오픈런(ㅋㅋㅋ)을 하곤 한다. 그럼 대체로 사람이 없으니까. 후시미이나리신사가 그랬고, 기요미즈데라가 그랬다. 하지만 금각사는 네버. 오픈런이고 뭐고 걍 사람많다...ㅋㅋㅋㅋㅋㅋ 인파에 밀려 한바퀴 돌고나오면 끝! 근데 참 뭐라고해야할까, 금각사는 삐까뻔쩍하고 눈에 뛰긴하는데, 저게 끝이다보니... 여기 갈때마다 ‘내가 왜 또왔지?’ 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은각사는 정원이 멋지기라도 하지, 금각사는 음....^^




▶ 긴카쿠지(은각사)


긴카쿠지는 임제종 쇼코쿠지파에 속하는 선종사찰이고 정식 명칭이 긴카쿠지가 아니라 도잔 지쇼지라고 한다. ‘지쇼’는 8대 장군인 아시카가 요시마사의 법호에서 유래되었다. 1482년에 요시마사가 자신의 은거처로 건립을 시작한 별장인 히가시야마전이 긴카쿠지의 시작이다. 3대 장군 아시카가 요시미쓰의 손자인 요시마사는 8세라는 어린 나이로 8대 장군이 되었다. (생략) 요시마사는 1473년에서야 장군자리를 아들에게 물려주었고, 1477년 마침대 오닌의 난이 종결되자 젊었을 때 부터 갖고 싶었던 별장 짓기를 시작했다. 그것이 위에서 말한 히가시야마전이다. 요시마사가 1490년에 세상을 떠나면서 남긴 유언이 무소국사를 권청개산으로 한 선종 사찰, 바로 오늘날의 도잔 지쇼지-긴카쿠지가 되었다. p 171



긴카쿠라고 하면 원래 은박이 입혀 있었는지 없었는지에 대해서 논의가 있었다. 2007년에 실시된 엑스선 조사 결과, 은박이 입혀지지는 않았던 것으로 판명되었다. 은박을 입힐 계획이었다가 요시마사의 죽음으로 실현되지 않았다라는 주장도 있지만, 원래 긴카쿠라는 명칭은 에도시대의 자료에서 나온 것이지 창건당시의 이름이 아니다. p 172


위의 킨카쿠지에 이어 긴카쿠지도 아시카가 쇼군이 지었다. 정확히 말하면 킨카쿠지는 아시카가 막부 3대 쇼군(할아버지), 긴카쿠지는 8대 쇼군(손자)! 이 손자가 할아버지가 지은 별장인 킨카쿠지처럼 너~~~무나 별장을 짓고 싶었는데, 짓지를 못하다가 쇼군 자리를 자기 아들에게 물려주고서야 겨우 만든 별장이 바로 긴카쿠지다. 별장으로 짓긴 했는데, 정작 죽기 전에 이 별장을 사찰로 바꿨다는 그런 이야기다. 근데 이것마저도 킨카쿠지와 비슷한 것이, 킨카쿠지와 동일하게 권청개산을 무소국사로 했다는 것. 그러니까 하나부터 열까지 전부 자기 할아버지가 만든 킨카쿠지를 따랐다는 뭐 그런 이야기.



난 긴카쿠지가 원래는 은박을 씌우려고 했기에, 은각사라고 불리는 건 줄 알았더니만 그건 아니었나보다. 그냥 썰이었던걸로!





▶ 료안지(용안사)


료안지 자리에는 10세기 말에 천황의 발원으로 건립된 사찰이 있었고, 12세기 중반에 후지와라 가문의 귀족이 여기에 산장과 사찰을 지었다. 무로마치 시대에 들어 장군을 보좌하는 관령직을 맡은 호소카와 가츠모토가 이 땅을 양도받아 1450년에 기텐겐쇼 선사를 개산으로 료안지를 건립했다. 가츠모토는 기텐겐쇼선사에 깊이 귀의했었다. 두 분의 관계는 마치 북송 용안산 도설사의 종열선사와 재상 장상영의 깊은 관계와 비슷하다고 해서 사찰 이름이 료안지가 되었다. 료안지는 1467년에 시작된 교토를 중심으로 벌어진 큰 전란으로 소실되었다. 불행하게도 가츠모토는 그 전란 가운데 중심인물의 하나였다. 가츠모토가 죽은 후 가츠모토 아들이 사찰 재건에 나섰다. 석정은 그때 만들어졌다고 한다. p 164


료안지는 정말 고요한 사찰이다. 인근에 있는 금각사와는 전혀 다른 분위기랄까? 뭐 애초에 대부분의 관광객은 금각사를 가지, 료안지를 찾지는 않는다. 여기 진짜 힐링되는 사찰인데, 큽. 무엇보다 료안지의 정원인 석정(세키테이)는 ‘가레산스이식 정원’의 대표로 각광받는 곳이기도 하다. 대학 전공책에서 석정 사진을 봤을때는 별 다른 감흥이 없었는데, 실제로 와서 보니....오오. 너무 힐링되서 나중에 엄마아빠를 모시고 또 왔었는데, 엄마아빠는 아니었나보다ㅋㅋㅋㅋ. 나만 힐링되었던걸로.




 


 

▶ 난젠지(남선사)


난젠지 창건은 13세기 가마쿠라 시대이다. 지금 난젠지 자리에는 원래 가메야마 천황이 지은 이궁이 있었다. 이궁에서는 밤마다 나타나는 요괴에 시달렸다. 그때 법황이 되었던 가메야카가 고승에게 부탁해서 요괴를 없애려고 기도했으나 효과가 없었다. 그래서 도호쿠지의 스님에게 기도를 부탁했더니 효과가 있었다. 그후 가메야마 법황이 선사에게 깊의 귀의하여 1291년 이궁을 선종 사찰로 바꾸었다. 처음엔 사찰 이름이 젠린젠지 였다가 중국에서 일본에 전한 선종이 남긴 남종선이어서 난젠지로 바뀌었다. p 174



난젠지에서 입장료를 지불하고 들어갈 수 있는 곳은 주로 삼문, 방장, 난젠인이다. 지온인, 닌나지와 함께 ‘교토 3대문’으로 꼽히는 난젠지 삼문은 높이 약 22미터, 2층 누각으로 훌륭한 문이다. 중요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는 난젠지 삼문은 도쿠가와 이에야스와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아들인 히데요리를 중심으로 한 도요토미가 사이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희생된 사람들의 명복을 빌기 위해 1628년에 건립된 것이다. 일반 방문객은 2층에 올라갈 수 있다. p 175

*방장: 주지가 지내는 방


난젠지는 가을에 가면 정말 멋진 곳이다(인근 에이칸도 포함ㅋ). 단풍이 단풍이 아주 최고다! 거기다 수로각은 알아주는 포토스팟이랄까. 한국 관광객들도 꽤 오는 걸 보면, 어느정도 입소문을 탄 곳이긴 한가보다. 근데 한국 관광객들은 대게...수로각에서 사진만 찍고 가는게 함정ㅋㅋ



개인적으로는 난젠지 방장정원을 추천한다. 물론 유료입장이긴하지만, 단풍철에 방장정원에 들어가면...오!!! 방장정원이 이렇게 멋진 이유는, 역시나 난젠지가 천황가의 이궁이었기 때문에 그런게 한 몫한다. 역시 천황이든 법황이든 황실 출신이 만든 건물 출신 사찰들이 멋지긴 오지게 멋지다.




▶ 그리고 책에는 없는, 교토 다이토쿠지(대덕사)


대덕사는 교토에서 내가 정말 좋아하는 사찰이다. 정확히는 대규모 사찰단지(...) 라고 해야하나? ‘대덕사’라는 사찰을 중심으로 조그만 사원들이 경내에 옹기종기 포진되어있다. 무엇보다 한국사람들은 잘 모르는 곳이라고 해야하나, 잘 안오는 곳이라고해야나. 뭐 그렇다. 하지만 대덕사는 과거에 조선통신사가 잠시 머물던 곳이기했다는 점^^



다만, 대덕사를 포함해서 경내에 있는 수 많은 사원들을 전부 구경할 수는 없다. 상시개방되어있는 일부 사원만 구경할 수 있다는 것. 내가 갔을 당시만해도 4곳의 사원이 상시공개였다. 근데 그 일부 사원만 구경해도 시간가는 줄 모를 정도로 멋지다. 일단 사람없어서 고요하고, 정원이 너무 멋져서 사진찍느라 바쁘고, 가만히 앉아서 정원을 바라보고 있으면 힐링되고!




 

대덕사를 갔을 때 내가 제일 보고 싶은 곳은 ‘고토인(상시공개)’이었는데, 당시에는 내부보강공사중이라 들어갈 수 없었다^_T. 여기에 센노리큐가 소장했었던 조선의 석등이 있다고 했는데(아마도 임진왜란 당시 가져온 걸로 추정..?), 그래서 꼭 보고 싶었는데T_T. 근데 이게 무슨 횡재인지? 비공개 사원 중 하나인 ‘소켄인’이 가을 특별공개로, 한시적 공개가 되었다. ‘소켄인’은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오다 노부나가를 기리기 위해 건립한 사원인데, 이 안에는 오다 노부나가를 비롯한 오다 일족 묘소도 있다. 진심 완전 ‘개꿀bbb’. 당시 권력자인 도요토미가 건립해서 그런지, 정원도 공을 엄청 들인것 같고. 한마디로 멋졌다는 이야기.



‘소켄인’이 오다를 기리기 위해 도요토미가 건립한거라면, 반대로 오다가 도요토미에게 명해서 건립한 사원인 ‘오바이인’도 경내에 있다. 이곳도 원래 비공개 사원인데 가을 특별공개(개꿀^^)로 볼 수 있었다. 역시 당시 권력자가 건립한 사찰은22222


이 책 덕분에 교토 사찰여행을 복기하니, 다시금 가고 싶어진다. 흑. 이제야 일본여행이 무비자로 풀렸는데!!! 왜 가지를 못하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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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기묘한 미술관

난 독서를 즐기는 만큼, 책을 수집하는데도 꽤나 진심이다. 이 책 『기묘한 미술관』은 그 수집벽의 일환으로 읽은 책이다. 어쩌다보니 내 책장에는 『방구석 미술관』 시리즈와 『혼자보는 미술관』이 책장에 꽂혀있었다. 물론 내돈주고 산 책들은 아니고, 선물로 받은 책들이긴 했지만. 그래도 뭐랄까. 책장에 꽂혀있는 이 책들을 보니 미술관 시리즈를 완성을 시켜야 될 것 같은 그런 강박관념(?)이 생겨버렸다.

다만, 이런 류의 책은 돈 주고 사기엔 쵸오끔 아까운 느낌도 있다보니, 회사 독서통신(^^) 제도를 활용했다. 이럴땐 우리 회사 꽤 만족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이 책은 앞선 방구석 미술관 시리즈 처럼, 코로나 시국으로 인해 미술전시회를 온전히 활용하지 못하는 사람들을 위한 책이다. 물론 요즘은 위드코로나라고 해서 이것저것 방역도 완화하고, 출입제한도 완화해서 미술전시회도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지 갈 수 있다. 하지만 방역완화와는 별개로 확진자수는 n십만명 단위로 급증하고 있으니, 솔직히 나한텐 이런 전시회를 가는건 목숨을 거는 것과 같다고 본다. 뉴스에선 매일 독감정도라고 하지만, 대한민국에서 독감으로 매일 몇십만명이 걸린적이 있기나 했었나? 무엇보다도 사망자도 급증하는 추세고. 뭐, 누군 무증상으로 훅 지나갈지도 모르겠지만, 누군가는 코로나로 인해 목숨을 잃고 있으니 말이다. 그러니까 난 앞으로도, 꽤 오랜기간 직접 가서 보는 것보다는 이렇게 책으로 간접구경을 하는 편을 선택하련다.

행여 코로나를 뚫고 미술전시회 가서 명화들을 직접 본다고 할지언정, 옆에 해설사가 없으면 누가 그렸는지, 이 그림에 무슨 이야기가 있는지 모르는건 매한가지다. 그냥 몇 초간 그림만 멀뚱히 보다가 나올뿐. 반면에 안전하게 내 방구석에서 이 책 한권을 읽으면, 그림 속에 어떤 이야기가 남겨있고, 누가 그렸는지, 왜 이런 그림을 그린건지 한눈에 알 수 있고 얼마나 편하고 좋은가!

무엇보다 이 책에서 마음에 드는건, 그림 속에 있는 사연들! 애초에 책 제목 자체가 ‘기묘한’미술관이다. 즉, 미스터리한 이야기가 담겨있다는 것! 난 미스터리한 이야기도 늠나 좋아하다보니, 꽤나 내 취향을 저격한 미술책이라고나 할까?


2) 방구석 미술관

예전에도 이와 비슷한 책을 읽은 적이 있다. 책 한 권으로 손 쉽게 보고, 그 명화를 어떻게 해석하는지까지 알려주었던 책. 이 책도 그렇다. 책 한 권으로 내노라하는 명화들을, 내 집에서, 내 책상앞에서 마주할 수 있는거다. 미술관을 좋아하는데, 코로나19로 인해서 집 밖으로 나가지 못하는 사람들에게는 정말 단비와도 같은 책이랄까?

그저 단순하게 ‘이 그림은 이런 뜻이야’가 아니다. 이 그림을 그린 화가가 어떤 시대를 살았으며, 어떤 삶을 살았는지, 어떤 감정 속에서 이 그림을 그렸는지도 이 책 속에 있다. 단순히 그림 뿐만 아니라 그림을 그린 화가에게 초점을 맞춘, 그림을 인문학적으로 해석한 책이라고나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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