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조仁祖 1636 - 혼군의 전쟁, 병자호란
유근표 지음 / 북루덴스 / 202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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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조 오백년, 나라와 백성을 버리고 도망간 군주가 세 명 있다. 첫번째는 선조(임진왜란), 두번재는 인조(이괄의난, 정묘호란, 병자호란), 마지막은 고종(아관파천). 셋 모두 조선의 혼군 중의 혼군이라 말할 수 있지만(내 개인적으로는 최악의 왕들이라고 손꼽기도 하지만), 이 세 명의 왕 중에서도 나라와 백성을 버리고 도망간 횟수에 대해 우위를 따지자면, 단연코 ‘인조’ 다. 도망간 횟수가 장장 세 번이나 되기 때문이다. 이정도면 도망의 고수 중의 최고수랄까.




나는 인조에 대한 포스팅을 꽤 여러번 올렸다. 관련 역사책 서평, 인조와 관련된 유적지 답사, 인조와 관련된 인물에 대한 유적지 답사 등 말이다. 내 개인적으로는 인조를 조선 최고의 혼군으로 손꼽을 정도로 정말 싫어하지만, 싫어하는 것과는 별개로 인조에 대해 공부를 했다는 이야기다. 어떠한 사람을 싫어하는 것도, 그 사람에 대해 어느 정도 알아야만 가능한 일이니까!



고로.. 그 연장선에서 최근 읽은 책이 「인조 1636 - 혼군의 전쟁, 병자호란」 이다. 병자호란을 떠나서 인조 대의 이야기는 명치 끝이 꽉 막히고, 고구마 오백만개는 먹은 만큼 답답해지지만 그래도 어찌하겠는가. 엄연히 우리의 역사이니. 그것도 아주 제대로 알아야하는 역사이니. 여러 포스팅에서 언급했듯, 나는 빛나는 역사도 중요하지만 어두운 역사도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니 말이다.



이 책은 ‘병자호란’이라는 줄기를 기준으로 인조라는 인물에 대해 세 부분으로 나뉘어 설명한다. 병자호란 전, 병자호란 중, 병자호란 후 이렇게 말이다. 오롯이 인조에 대한 설명만 있는 것이 아니라, 당시의 동아시아 정세까지 같이 포함해서. 그도 그럴 것이, 병자호란은 후금(청나라)과 조선이 치룬 전투이자 패배한 전투이다. 심지어 병자호란에 앞서, 똑같이 후금이 처들어온 정묘호란이 있었다. 또 정묘호란이 일어나기 약 30여년 전에는 일본과 7년간 싸워온(명나라도 참전한), 그 유명한 임진왜란(정유재란)이 있었다. 즉, 병자호란을 설명하기 위해선 당시 한/중/일 정세도 정확하게 알아야 한다는 것. 아, 뭐 -.. 인조대에선 일본의 정세는 대충 임진왜란 정도만 알면 되긴 하다.




이 책의 저자는 서문에 이런 글을 남겼다.


병자호란을 일으킨 주체가 청나라이므로 그 1차적 책임은 전쟁을 주도했던 청 태종, 홍타이지에게 돌려야 맞을 것이다. 그러나 당시 앞뒤 정황을 살펴보면 인조를 정점으로 한 서인 정권에서 자초한 측면이 강하게 드러난다. 오늘날 일부 학자들 간에는 병자호란 발발의 책임이 청 태종에게 있다고 주장하기도 하나, 이 책은 전란의 책임이 인조에게 있다는 관점하게 기술하고 있다. 전란 발발의 책임을 인조에게 물은 것은 왕권 국가에서는 강토와 백성 모두가 국왕의 소유물로 여길 만큼 왕의 권한이 적대적이기 때문이다. p 008



나 역시도 병자호란 발발의 전적인 책임은 인조에게 있다고 생각하고 있기에, 서문부터 완전 공감하는 마음으로 이 책을 읽게되었달까 뭐랄까.



저자의 말대로 조선은 왕권 국가였으며, 강토와 백성 모두가 국왕의 소유물이었다. 즉 왕이 어떻게 행동하느냐에 따라 강토와 백성이 평안하게 사느냐, 죽어나가느냐가 달려있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인조는 어떤 왕이었을까? 대체 어떤 왕이었기에 인조는 무려 세 번이나 강토와 백성을 버리고 도망을 갔던걸까? 대체 어떤 왕이었기에 정묘호란, 병자호란 두번의 외침을 받았던걸까? 대체 어떤 왕이었기에 병자호란의 끝을 모욕적인 ‘삼배고구두례’로 끝냈던걸까? 대체 어떤 왕이었기에 자기 아들이자, 세자였던 소현세자를 비롯한 그의 일가를 죽음으로 몬 것일까? 



하.. 인조라는 인물이 참 다채로운 인물이다보니(^^), 꼬리에 꼬리를 물고 수많은 질문들이 생성된다. 



나야 이곳저곳 인조와 관련된 유적지를 다녀왔고, 인조/병자호란과 관련된 역사책을 꽤 많이 읽었기에 내 나름대로 저 질문들에 대한 답을 찾았다. 하지만 아직 답을 찾이 못한 사람들이 있다면, 이 역사책 「인조 1636」을 추천하고 싶다. 인조를 향한 수많은 질문에 대한 답을 찾는데, 이만큼 최적인 역사책이 또 있을까?




이 포스팅에선 이 책의 ‘병자호란 전 인조’ 챕터에 대해서만 간략하게 써보려 한다.



우선 인조가 왕위에 오르기 전, 능양군이었을 적을 보자. 


일본과의 참혹한 7년 전쟁, 임진왜란 당시 재위했던 왕 선조. 그에게는 아들이 여럿 있었는데, 인조와 관련된 인물만 이야기하자면 광해군과 정원군이다. 광해군은 선조의 뒤를 이어 다음 왕이 되었다. 정원군은 인조의 부친이다. 뭐, 임진왜란 이야기나, 광해군의 외교나, 정원군의 조선 최고의 싸이코패스였다는 이야기는 생략하고. 광해군 재위 말, 당시 능양군이었던 인조는 반정을 일으켰고 그렇게 광해군 다음으로 조선의 왕이 되었다. 



인조 반정은 인조의 공보다는, 엄연히 신하들의 공이 월등히 컸다. 공신들도 어마어마했다. 근데 공신들끼리도 알력다툼이 꽤나 있었는데, 결과론적으론 그로 인에 ‘이괄의 난’이 일어났다. 이괄이 무서웠던 인조와 그 외 공신들은, 도성을 버리고 공주로 도망갔다. 



여기서 중요한 사실 하나, 이 때는 임진/정유재란이 끝난지 약 40여년도 채 흐르지 않았던 시기다. 오롯이 나라 재건에 힘써야 했던 시기다. 하지만 인조를 비롯한 조선의 위정자들은 나라 재건은 개뿔, 권력 다툼으로 많은 시간을 허비했다. 반면에 대륙에선 명나라가 쇠퇴하고, 누루하치의 후금이 세력을 확장하는 등 하루하루 상황이 급변하고 있었다. 임진왜란으로 인한 상처가 채 아물지 못한 조선이었기에, 만약을 위해서라도 명과 후금 사이에서 적절한 외교를 펼쳐야했으나, 슬프게도 인조는 그럴 생각이 단 한개도 없었다. 무엇보다 인조는 전 왕이었던 광해군과 1부터 10까지 반대로 행동했으니 말이다(이건 작금의 정치와도 크게 다른게 없어서 더 없이 슬픈 모습). 



인조는 죽으나 사나 친명배금을 외쳤다. 그 결과 후금이 조선으로 쳐들어오니, 바로 정묘호란이다. 인조는 이 때, 강토와 백성을 버리고 두번째 도망을 간다.


적군이 의주를 함락하고 곧 안주에 이를 것이라는 치계가 조정에 당도한 것은 1월 17일 이었다. 치계를 접한 인조와 중신들의 얼굴은 흙빛으로 변했다. 명과의 의리를 지키고 오랑캐 나라인 후금을 배척하겠다는 명분을 내걸고 반정을 일으킨 인조정권이었다. (…) 인조는 도체찰사로 임명한 이원익과 좌의정 신흠을 포함해서 26명의 배정관을 하여금 세자를 따르게 하고, 이원익의 후임으로는 부체찰사로 임명했던 김류를 승진 임명했다. 세자에게 분조를 맡긴 인조는 종묘의 신주와 종실 가족들을 이끌고 강화도 몽진을 결정했다. p 104



노량나루에서 배를 탄 인조의 몽진 행렬은 양천에서 하룻밤을 묵었다. 이튿날 통진에 도착한 인조는 김포에 조성된 자신의 생모 ‘연주부부인’이 잠들어 있는 육경원을 참배하느라고 이틀을 머문다. 인조의 생모는 정묘호란이 일어나기 한 해 전인 1626년 1월 14일에 사망했다. 이때 인조는 한성부의 방민 1,200명을 뽑아 산역꾼으로 보내고, 여기에 더하여 도성 백성들 중 귀천을 가리지 않고 매 호당 1인씩 차출한 여사군(상여꾼)만도 4,700명에 달했다.(…) 인조는 자신의 생모가 왕후를 지내지도 않았을뿐더러 몽진 중임에도 불구하고 참배를 강행했다. 그 후 후금과의 강화가 이루어지고 나서 귀환길에 인조는 또다시 육경원 참배를 강행했다. p 105



정말 대단한 왕 나셨다. 백성을 두번이나 버리면서도, 도망중에 자신의 모친 무덤은 굳이 찾아가서 참배하는 왕이라니. 생각해보면, 그렇다. 제대로 된 명분 따위 없이 왕이 된 인조다. 나라 꼴이 처참하든 말든 그저 전 정권이 추진하던 일은 무조건 반대로만 하던 인조다. 그런 인조가 어떻게든 쥐꼬리만큼의 지지를 받기 위해서는 단 한가지 방법밖에 없었다. 충,효가 중요한 주자학의 나라 조선에서 인조가 그나마 내보일 만한건 다름아닌 ‘효’.



뭐, 여튼 그렇게 인조는 강토와 백성을 내던지고 두번째 도망을 갔다. 백성들이야 죽든 말든, 자기 몸 하나 살기 위해서 말이다. 그럼 인조 밑에 있던 신하들은 어땠을까? 두 부류로 나뉘어졌다. 곧죽어도 명나라에 사대하며 오랑캐랑은 강화하지 않겠다는 척화파와, 허울뿐인 명분은 버리고 강화하자는 주화파로. 여기서 잊지 말아야 할 점은, 정묘호란 당시 척화파와 주화파, 인조가 탁상공론을 펼치고 있는 와중에도 백성들은 아주 참혹하게 유린되고 있었다.



최명길을 비롯한 몇몇 중신들은 강화를 적극적으로 추진했다. 강화를 반대하는 척화파들은 조선 땅을 침범하고 죄 없는 백성을 살해안 오랑캐들과 화해 운운하는 것은 생각조차 할 수 없는일이라고 열을 올렸다. 반면에 강화를 찬성하는 주화파 측에서는 민생은 도탄에 빠지고 백성들은 어육이 되고 있는 마당에 허울뿐인 명분만 내세울 거냐며 맞받아쳤다. p 107



“지금 이후로 조선과 후금국 중 누구라도 맹약을 어긴다면 이와 같이 피와 골이 나오게 될 것”이라 낭독하고, 모든 참석자들이 술과 고기를 먹는 것으로써 대미를 장식했다. 1627년 3월 3일 조선과 후금 사이에 강화협상을 맺은 내용은 ‘조약’이라는 말 대신 ‘약조’라는 문구를 사용하는데, 그해가 정묘년이므로 ‘정묘약조’라 부른다. 4개 조항으로 된 정묘약조의 내용은 아래와 같다.

첫째, 화약 후 후금군은 즉시 철병한다.

둘째, 후금군은 철병 후 다시 압록강을 넘지 말아야 한다.

셋째, 양국은 형제국으로 정하되, 후금이 형이 되고 조선이 아우가 된다.

넷째, 조선은 후금과 화약을 맺되, 명나라와 적대하지 않는다. p 109



결국 조선은 후금에 고개를 숙일 수 밖에 없었다. 애초에 질 전쟁이었다. 아니, 전 정권이었던 광해군 처럼 외교에 조금이나마 신경을 썼다면 애초에 일어나지도 않을 전쟁이었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후금은 생각보다 조선을 후하게 대접해주었다. 후금이 바라는건 조선과의 ‘형제국’, 그리고 ‘자신들과 명나라 싸움에 끼지 말것’ 이었으니까. 뭐, 이 외에도 후금이 요구한 건 자잘자잘하게 많긴 하지만 전쟁의 승자와 패자로 보았을 땐 그러한 요구는 어쩔수 없는 것들이기도 했다. 무엇보다 이정도면 과거 몽고가 고려를 대접한 것보다는 조금 낮지만, 그럼에도 꽤나 후한 대접이었다.



하지만...



인조는 “우리 조선은 200년 넘게 명을 부모지국으로 섬겨왔고, 임진왜란 때에는 재조지은까지 입었는데, 어떻게 부모의 나라를 치는데 협조하겠느냐”며 그들의 요구를 정면으로 거부했다. 당시 인조가 저들의 요구를 노골적으로 거부한 것은 그의 용기라기보다는 평소에 지녔던 숭명사상이 그 척도였다. 그러나 숭명 사상의 척도를 떠나 그 무렵 조선의 재정 상태는 파탄 직전에 이르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최악이었다. 이런 저런 사정이 겹처 조선에서는 날이 갈수록 배금 사상만 높아지게 되었으니, 그것은 언제 터질지 모르는 활화산이었다. p 120



즉위식에 참석한 패륵들과 대신들은 물론 만주인, 한인, 몽골인을 비롯한 모든 사람들이 빠짐없이 새 황제에게 삼궤고구두를 행하고 만세를 불렀으나, 유독 조선의 춘신사 나덕헌과 이확만은 이를 거부했다. 이들의 머릿속에는 하늘 아래에는 오직 한 분의 황제, 즉 명의 숭정제만이 황제였을 뿐 그 외 다른 사람들이 황제를 칭하는 것은 하늘의 뜻을 거역하는 것이라 여겼다. 나덕헌과 이확의 행동을 유심히 지켜보던 청의 관료들은 격분했다. p 127



명은 망했다. 후금이 대륙의 주인이 되었고, 국호를 ‘청’으로 바꾸며 황제국이 되었다. 하지만 인조는 시종일관 숭명배금을 고수했다. 하지만 그동안 인조가 한 일 이라고는 자신의 생부 정원군을 추존왕으로, 생모 구씨를 추존왕비로 만드는 것이었다. 다시한번 언급하지만 정원군은 실록에도 언급될 만큼 많은 사람을 죽인, 싸이코패스중의 싸이코패스다.



아니, 다 떠나서 싸이코패스일 지언정 자신의 부친이니 효를 다하기 위해 왕으로 추존했다고 치자. 하지만 친명배금은 왜? 이쯤되면 무능의 끝판왕이라고밖에 할 수가 없다. 아무리 자기가 끌어내린 광해군과는 반대로 간다한들, 이미 명은 망했고, 대륙은 청나라의 손에 넘어갔다. 이쯤되면 명은 손절하고 청나라에 잘 보여야하는게 맞다. 더군다나 조선은 이미 정묘년에 청의 아우국이 되기로 약조하였던 전적이 있다. 그 약조만 잘 지켰어도, 중간을 갔을텐데 인조는 기어이 스스로 파국을 불러들였다.



인조는 3월 1일 팔도에 내린 ‘절화교서’를 통해 “오랑캐와의 관계가 파국에 이르러 조만간에 전쟁이 발생할지도 모르니, 충의로운 선비는 각기 있는 책략을 다하고 용감한 사람은 종군을 자원하여 다 함꼐 어려운 난국을 타개하고 나라의 은해에 보답하라”고 하달했다. 인조는 교서를 발표하고 나서 엿새가 지난 3월 7일 평안감사에게 문제의 ‘절화교서’를 금위영 군사 편에 보냈으나, 어이없게도 그 교서는 도중에 후금 군사에게 탈취당하고 만다.사실상 ‘선전포고’나 다름없는 절화교서를 본 홍타이지는 그 즉시 여러 패륵과 대신들에게 절화교서를 보이고 이에 대한 대책 논의에 들어갔다. 이날 그 자리에 참석했던 패륵과 대신들 모두가 격앙된 어조로 “대군을 출정시켜 조선국을 멸하자!”고 했으나, 홍타이지는 “사신을 보내 조선의 왕자와 대신을 인질로 데려오라 하여 그들이 응하면 그대로 덮어두겠으나, 만약 불응하면 그때 가서 조선 정벌을 논의하자“고 하며 한 호흡 늦춘다. p 135



인조 재위기는 임진왜란이 끝난지 40년이 채 안되어, 나라가 피폐했을 당시였다. 하지만 인조는 반정 이후 공신들의 책록을 제대로 하지 못해 벌어진 이괄의 난으로 인해 한번 백성을 버렸고, 끊임없는 친명배금 정책으로 인해 정묘호란이 일어나 두번 백성을 버렸다. 그 와중에 인조가 한 일이라곤 전 정권인 광해군과의 반대로 반대로, 오직 반대로 가는 것이었으며, 자신의 부친과 모친의 추존이었다. 거기다 자신의 첫번째 왕비였던 인열왕후가 죽자, 그 장례식도 아주 호화롭게 치렀다. 그리고 대대적으로 청나라와 ‘절교’한다는 교서를 반포했다.




여기까지가 병자호란 전 인조의 행보다. 이 이후의 인조의 행보에 대해서는 이 책을 읽어보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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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직장인 열전 - 조선의 위인들이 들려주는 직장 생존기
신동욱 지음 / 국민출판사 / 201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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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전에 「어른의 한자력」 이라는 책의 서평을 쓴 적이 있다. 그 책을 읽으려고 펼쳤는데, 문득 눈에 들어온 저자의 이름. 어딘가 익숙한 이름인데? 싶었기에, 바로 내 책장을 훑어보았다. 그리고 발견했다. 조선사 역사책이 꽂혀있는 책장 한켠에서. 그렇다. 나는 이미 이 저자가 쓴 역사책을 구입한적이 있었던 거다.  그 역사책은 바로 「조선 직장인 열전」. 물론 읽지는 못했었지만. 본디 책이란.. 사는 속도와 읽는 속도가 엇박자를 일으키니까^_T. 


뭐, 이유야 어찌돼었든! 이제서야 「조선 직장인 열전」을 읽었다.



생각해보니, 내가 알고 있는 대부분의 역사적 인물들은 나라의 녹을 받는 직장인(일종의 공무원) 이었다! 오, 놀라워라. 매일 그들의 공/과를 따지고, 그들의 행적에 대해서만 보았지, 직장인으로서의 그들을 생각해 본적은 단 한번도 없었다는 사실에 소오름. 그렇게 역사적 인물들을 ‘직장인’ 으로써 마주하는 순간, 왠지 그동안 가지고 있었던 존경심은 저 멀리 날라가고 측은함이 저절로 샘솟았다. 그도 그럴것이, 현대의 직장인들은 말 한마디 잘못했다고 (진짜!)모가지가 날라가지는 않지만, 조선의 직장인들은 말 한마디 잘못했다가는 (진짜!!) 모가지가 날라갔으니까. 뿐만이랴, 삼대가 멸문을 당하는 경우까지도 왕왕 있었다. 정말 조선시대의 직장인들은 우리와는 차원이 다른, 살얼음판을 걷는 직장생활을 해왔던 것이다. 



이야, 다시 생각해도 소름이네. 만약 당시 CEO가 연산군이었으면? 오우. 정말 수백의 직장인 모가지가 날라가는 걸 눈 앞에서 보거나, 혹은 내 모가지가 날라가거나. 반대로 CEO가 세종이었다면? 거기다 만약 일잘러였다면? 퇴계 이황처럼 늙어 죽을 때까지 노동착취를 당했을지도 모른다. 반대로 내가 너무 뛰어난 인재였다면? 주변 동료들의 모함으로 아주 참혹한 정리해고를 당했을지도 모른다. 주식회사 조선의 직장생활은 정말 모 아니면 도. 차라리 현대의 직장인이 백번 낫다. 



1n년간 직장에서 온갖 상황을 마주하며, 이제는 더 마주할 인간 유형(?)도 없고, 그 어떤 상황에 마주해도 당황하지 않을거라 자부한 나였건만, 그건 나의 오만이었고 오판이었다. 지금보다 더 험난했던 직장생활을 한 그들에게서, 다시 한번 배우고 겸손한(?) 마음가짐으로 복직해야지!  



이 책에는 여러 직장인(?)을 소개한다. 정도전이나 황희, 김육, 이황 등 대체로 우리가 학교에서 배웠을 법한 역사적 인물이자 직장인(ㅋㅋㅋ)들이며, 우리가 그들에게서 무언가를 배울만한 점이 있는 직장인들이다. 반대로 홍국영이나 허균처럼 반면교사 삼을 비운의 직장인도 소개한다. 난 이 책에 실린 여러 직장인 중, 주식회사 조선의 최고의 직장인과 반면교사 삼아야할 직장인을 단 한 명씩 선택하라고 한다면 아래와 같이 선택하고 싶다.




눈치를 잘 보는 것도 실력이다. 하륜

- 실력과 처세 능력을 동시에 갖추어 누구보다 조직 생활을 잘할 수 있는 인재라고 자부합니다


제 1,2차 왕자의 난부터 시작하여 태종의 치하 기간은 왕권에 위협이 되는 그 어떤 인물도 남겨놓지 않았던 숙청의 피바람이 불던 시기다. 그런 엄혹한 시대 속에서도 하륜은 70세 일기로 천세를 누리다 세상을 떠났다. 어떤 처세 비법이 있었기에 정리해고 한 번 당하지 않고 끝까지 살아남을 수 있었을까? p 097


하륜은 향리집안 출신으로 명망가 출신은 아니었으나, 하륜이 과거급제 했을 당시 그를 눈 여겨 본 사람이 있었다. 그 사람은 권문세족이자, 당대 권력가였던 이인임의 형, 이인복. 이인복은 그의 동생인 이인미의 딸과 하륜을 결혼시킨다. 결과적으로 하륜은 이인임 가문과 사돈이 되었다. 그렇다고 하륜이 권문세족의 편으로만 있었던 것도 아니었다. 하륜은 이색의 제자였기에, 당연히 또 다른 이색의 제자들인 신진사대부와도 좋은 관계를 유지했다. 그중 대표적인 인물이 바로 정몽주와 정도전.



여말선초, 우리가 드라마로도 봐왔듯 공민왕/우왕/창왕에 이어 조선이 개국되고 이성계가 조선 초대왕이 되었다. 당대 권력가였던 이인임이 쫓겨나면서 하륜도 권력의 뒷편으로 밀려났지만, 결과적으로 그 덕택에 그는 자신의 몸을 보전할 수 있었다. 이성계가 쓰러졌을 당시 정몽주가 잠시 권력을 잡았을 때나, 이방원의 선죽교 사건(?)이 있었을 때나, 조선 건국 후 정도전의 숙청의 칼날등에서 말이다. 



하지만 하륜은 똑똑히 보았다. 동문이었던 정도전이, 자신의 스승과 또 다른 동문들을 어떻게 숙청해나가는지를.


하륜이 정도전과 제대로 충돌하는 사건이 발생하는데 바로 ‘표전문 사건’이다. 명나라 황제 주원장이 조선의 외교문서가 불손하다며 심각한 외교 갈등을 야기한 것이다. 명나라에서는 이 문제의 발단을 정도전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고 그의 압송과 해명을 요구했으나 응하지 않았다. (…) 그럼에도 정도전은 움직이지 않았다. 도의적으로라도 직접 문제를 해결해야겠다는 의지를 보이기는 커녕 전혀 관련도 없는 하륜을 사신으로 보내버리고 만다. 정도전을 제거할 기회로 본 하륜이 당사자인 정도전이 직접 가서 해결해야 한다고 주장했기 때문이다. 정도전에게 오히려 보복을 당한 셈이었지만 하륜은 명나라 황제를 훌륭히 설득하여 문제를 해결하고 돌아왔다. 이 사건으로 하륜의 명성은 올라간 반면 정도전에 대한 비난은 더욱 커질 수 밖에 없었다. p 040



정도전이라는 못된 선배를 둔 하륜은 어떻게 대처했을까? 처음에는 정도전에 맞서 투쟁하는 방식을 택했다. 하지만 태조 이성계라는 든든한 뒷배가 있는 정도전으로부터 돌려 받은 건 이전보다 더 강해진 견제였다. (…) 사실 견제를 받는다는 것은 내가 그만큼 실력이 있다는 반증이다. 그 선배는 실력 있는 내가 자신을 앞서갈까 두려운 것이다. 일단 그것으로 위안을 얻자. 그리고 선배에 맞서 투쟁하기보다는 묵묵히 자기 일을 열심히 하는 모습을 보이자. 분명히 기회는 올 것이다. 마치 하륜이 새로운 상사 이방원을 만나게 된 것처럼 말이다. p 041



정도전과 맞서는 족족 실패한 하륜은 마음을 바꿔 먹었다. 다름아닌, 때를 기다리는 것이다. 정도전이 그랬던 것 처럼. 그렇게 하륜은, 정도전이 걸었던 길을 걷기 시작했다. 이방원과 손을 잡았고, 때를 기다렸다. 


여기서 한 가지 재미있는 사실을 발견한다. 바로 하륜이 이방원과 손을 잡았다는 사실이다. 이방원이 누구인가? 가장 존경하던 선배, 그리고 고려 사수파로서 정치적 입장을 함께 했던 정몽주를 죽인 장본인이 아닌가. (…) 이방원을 군주로 모신다는 것은 변절의 끝판왕이라 불릴만 했다. 그럼에도 그들은 손을 잡았다. 공동의 적 정도전이 있었기 때문이다. p 044



하륜은 누구와도 손을 잡을 수 있는 인물이었다. 신진사대부였음에도 권문세족인 이인임의 후광으로 출셋길을 달렸다. 정몽주와 손을 자복 고려 사수파에 섰다가 고려가 멸망하자 곧 조선의 신하가 된다. 그리고 존경하는 선배 정몽주를 죽인 이방원과 손을 잡는다. 정도전이 좀 더 포용력을 가지고 다른 이들의 의견도 적극적으로 받아들일 줄 아는 인물이었다면 아마 하륜은 정도전과도 손을 잡았을지 모른다. 하지만 자신의 생각만 옳고 다른 사람들은 다 배제해 버리는 정도전의 성격상 그것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대신 하륜은 이해관계가 일치한 이방원과 손을 잡았고, 마침내 임금 다음가는 실권자가 된다. p 045



여기까지만 봐도 하륜은 정말 대단한 사람이다. 선배이자 정적인 정도전이 그러했듯, 하륜도 기다렸고 성공했다. 하지만 하륜이 선택한 남자는 이방원이다. 이성계는 정도전을 무한 지지했지만, 이방원은 달랐다. 이방원은 선죽교 사건과 왕자의 난에서도 보았듯, 잔혹한 군주이기도 했다. 왕위에 오른 뒤에는 자기에게(또는 후대의 왕에게) 걸림돌이 될만한 사람이라면 최측근은 물론, 처가, 사돈댁을 거의 몰살 시켰다. 하지만 그런 피바람 속에서도 하륜은 아주 멀쩡하게 살아남았다.



하륜의 직장 생명력을 이해하는 데에는 그가 태종에게 생명의 은인이었던 점도, 정치적으로 많은 업적을 남긴 훌륭한 신하였따는 점도 중요하다. 하지만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상사의 의중을 눈치껏 이해하면서도 절대 선을 넘지 않는 탁월한 처세 덕분이었다. p 048



하륜은 태종의 언어를 정확히 이해한 신하였다. 태종은 “왕위를 넘길게”라고 말했지만 사실 정말 하고 싶었던 말은 “왕위는 털끝만큼도 건드리지마” 였다. 하륜은 신하의 본분을 지킨다는 마음이 있었기에 그 말의 진의를 정확히 이해할 수 있었고 이숙번과 같은 실수를 저지르지 않았따. 이것이야말로 하륜이 서릿발 같은 태종의 치세에서도 오랫동안 평탄하게 그 자리를 지킬 수 있었던 비결인 셈이다. p 051



상사가 업무에 대해 정확히 지시하고, 언제까지 끝내라는 명확한 가이드라인도 함께 주면 실무자 입장에서는 정말 일하기 편하다. 그렇지만 상사의 스타일에 따라 그렇지 않은 경우도 허다하다. 상사가 “이거 좀 한번 알아봐요”라고 흘리듯 이야기했고 부하직원은 별것 아닌 것으로 지레 짐작하고 뭉개버렸다고 하자. 그런데 며칠 후 갑자기 상사가 그 건에 대해 다시 물어본다면 그 앞에서 땀을 삐질삐질 흘리며 서 있는 나를 발견하게 될 것이다. 상사가 아무리 대충 흘러가듯 이야기하더라도 일단 지시하는 것으로 해석이 된다면 즉시 나의 주요 업무로 삼아야 한다. 결국 이것은 ‘직장인의 눈치 보기 능력’과 매우 관련이 높다. p 052




“인생은 하륜처럼” 이라는 말이 괜히 나온 말이 아니다. 무엇보다 한동안은 내 인생의 모티브가 “인생은 하륜처럼” 이기도 했고. 



따지고 보면 한 나라를 무너뜨리고 새 나라를 세운, 킹메이커 정도전도 대단한 직장인이다. 심지어 정도전이 한 많은 것들이 조선 오백년을 만들어냈다고 할 수도 있으니까. 하지만 그의 말년은 너무 뻣뻣했고, 성급했다. 때를 기다릴 줄 알았던 정도전이 사라지는 순간, 정도전은 수많은 적을 만들어냈고, 그 결과는 참혹한(?) 정리해고. 



하륜은 조선이라는 직장에서 정도전에게 괴롭힘을 당하면서도, 정도전이 그랬듯이 ‘미리 준비하며, 때를 기다릴줄 아는’ 것을 배웠고, 그대로 실천했다. 뿐만 아니라, 전 직장인 고려에서 체득한 처세술을, 조선이라는 직장에서 십분 활용하여 곳곳에 아군을 만들었다. 거기다 까다로운 상사인 이방원의 언어의 참 뜻도 헤아릴 줄 알았다. 그 결과 하륜은 모든 직장인이 바라는 평화롭고 안정적인 삶과 정년퇴임을 얻었다. 




평판관리가 중요한 이유. 허균

스스로 몰락을 자초하다.


홍길동전은 허균이 쓴 고전소설로 세상에 알려져 있다. 최초의 한글소설이라는 점도 파격적이지만 당시 조선사회의 모순을 과감하게 비판한 최초의 사회소설이었다는 점에서 허균은 시대를 앞서간 천재로 불릴 만하다. 금수저 집안에서 태어난 엄친아였지만, 결국 역적죄로 사형당하고 만 허균. 무엇이 그를 지독한 불운으로 몰고 갔을까? p 106



홍길동의 저자 허균. 그는 조선 선조 때 문신인 허엽의 아들이자, 허난설헌(허초희)의 동생이다. 뿐만 아니라 아비를 비롯하여 형인 허성을 비롯하여 누이인 허난설헌까지 줄줄이, 그의 집안은 아비고 자식이고 문장가로써 이름을 날렸다. 이 말은 곧, 허균은 마음만 먹으면 나는 새도 훨훨 떨어뜨릴 수 있는 자리까지도 쉽게 올라갈 수 있었다는 이야기다. 하지만 허균은 그러지 못했다. 외려 주식회사 조선에서 참혹하게 정리해고를 당했다(여기에서 말하는 정리해고는 말그대로 진짜 모가지 댕강^^). 그가 참혹하게 정리해고를 당한 이유야, 모두가 다 알듯 ‘역모죄’라는 누명을 썼기 때문이다. 심지어 허균과 같이 일하던 수많은 사람들도 누명이라는 것을 알았으니까. 하지만 그 누구도 허균을 도와주지 않았다. 



허균은 과거에 급제하고 예문관 검열 겸 춘추관 기사관 등의 관직을 거쳐 30세 때 황해도 도사에 임명되었다. 그러나 한양 기생을 데려와 같이 살고 무뢰배들과 어울리며 청탁을 일삼는다는 이유 등으로 1년도 되지 않아 파직된다. 또한 어머니가 별세했음에도 찾아가 보지 않고, 유교 예법에 따라 삼년상을 치르기는 커녕 상중에도 고기를 먹어 세간의 비난을 샀다. 당시에는 이단으로 여겨지던 불교에 관심을 가진 것도 그의 평판을 떨어트리는 요인이 되었다. p 107



또 광해군 2년 때에는 허균이 시험관으로 참여한 과거 시험에서 일어난 부정 사건에 연루되기도 했다. 과거 합격자의 상당수가 시험관의 자제, 조카사위, 동생, 사돈들이었는데 이 중에 허균의 조카와 조카사위도 끼여 있었다. 조카는 정처 없이 떠도는 승려였고 조카사위는 이미 불합격 판정을 받았음에도 기어이 다시 합격자 명단에 끼워 넣었다. p 107



무엇보다 허균은 스스로 많은 적을 만들었다. 자신보다 상관이던 심희수를 다른 사람들 앞에서 노골적으로 망신 주어 그의 원한을 샀던 것이 대표적인 사례였다. 그는 스스로 고립되는 것을 자처했고, 결국 역모자로 몰렸을 때 누구도 그를 위해 나서는 사람이 없었다. p 108



기자헌은 원래 허균과 정치적 동지였고, 그 아들 기준격은 허균의 제자였으나 허균의 공격으로 아버지가 유배를 가자 격노한 기준격은 허균이 평소 역모를 꾸몄다는 탄핵을 한다. 거기에 허균과 가까이 지냈던 곽영도 그를 격렬히 비난하는 상소를 올리고, 언론기관인 사간원과 사헌부에서도 동일한 내용의 상소를 올린다. 허균의 평한이 얼마나 최악에 도달했는지 짐작이 된다. p 110



나라의 녹을 받기 시작한 허균은 일반적인 직장인과는 조금 다른 생활을 했다. 보통의 직장인이라면 본인의 이미지 메이킹에 신경을 쓸법도 한데, 허균은 달랐다. 이미지 메이킹은 커녕, 자기 자신의 부정적인 평판을 무한 생산했다. 심지어 몸소 나서서 적군을 대량 생산하기까지! 자기의 상사를 공격하는 건 기본이고, 자기 동료와 동료의 부친까지도 공격했다. 본인 스스로 아군까지 내치는 상황을 만든 것이다. 거기에 더해, 간신 중의 간신인 이이첨의 손을 잡기까지 했다. 



이이첨과 손을 잡은 후에 허균은 반대 세력 제거에 앞장섰다. 본인 스스로 아군도 잘라낸 허균이다보니, 반대세력 제거에 앞장 설만도 하다. 이후 허균에게 역모죄 누명이 쓰여졌다. 손을 잡았던 이이첨 마저도, 자신이 저지른 잘못까지 허균에게 언지며, 허균을 손절했다. 한마디로 토사구팽. 그 누구도 허균을 도와주는 사람은 없었다.



이쯤되면 비교되는 인물이 있으니 바로 조선 초, 청백리로 이름난 맹사성이다. 맹사성도 정치적 위기에 몰린 적이 있었다. 하지만 수많은 동료들이 앞다투어, 맹사성을 구하겠다고 나섰다. 자칫 잘못하면 본인들까지 연루될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말이다. 맹사성은 그 정도로 만인의 존경을 받는 사람이었고, 만인의 존경을 받을만한 사람이었다. 내미는 발길 족족 적을 만들어내는 허균과는 달리.



평판이란 조직 내에서 어떻게 인식되고 있는가의 문제다. 다른 사람이 나에 대해 어떻게 생각할지 신경 써야 하는 것은 사실 별로 유쾌한 일은 아니다. 하지만 나에 대한 평가가 내려질 때는 업무 성과와 더불어 평판이 함께 반영된다. 내 노력에 대한 보상, 즉 월급과도 직결될 수 있다는 점에서 평판 관리는 결코 가볍게 볼 일이 아니다. 더 나아가 나의 직장 생활 수명에도 영향을 미치는 것이 바로 평판이다. p 111



무엇보다 좋은 평판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사람에 대한 예의가 중요하다. 부하 직원이라고 함부로 대하거나 무시하는 행동은 반드시 주의해야 한다. 물론 부하 직원뿐만 아니라 상사나 동료에 대한 기본적인 예의를 지키는 것도 당연히 중요하다. 협력업체나 거래처 직원에게도 주의해서 행동해야 한다는 것을 잊지말자. p 113



만약 허균이 삐딱선을 타지않고 맹사성 처럼, 동료들을 존중할 줄 알았다면 어땠을까? 그랬다면 허균의 인생은 적어도, ‘누명’을 써서 참혹하게 정리해고 당한채 끝나지는 않았을 것이다. 




직장은 정글이다. 절대로 자기 혼자 살아남지 못한다. 좋든 싫든 웃어야하고, 토악질나는 사내정치도 어느정도 견뎌야 한다. 누군가가 나를 공격한다면, 그 자리에서 날카롭게 받아치기 보다는 유연하게 흘러 넘기는 법도 필요하다. 뿐만 아니라 누군가 비판을 한다면, 귀담아 듣고, 비판받은 행동에 대해 고치는 자세도 중요하다. 



이제 평생 직장이라는 말은 옛말이라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직장 내에서 필요한 모습은 과거나 현재나 달라지지 않았다. 평생을 다닐 직장이든, 2~3년만 다닐 직장이든, 직장에 몸을 담고 있는 동안에는 적을 만들지 말고, 누구나가 존중해주는 사람이 되는 것이 중요하다. 퇴사를 하는 제일 큰 이유는 바로 ‘사람’ 이니까. 그러기 위해선 본인 역시도 동료들을 존중해주는 것은 기본이다. 두번째가 바로 성과. 성과에 따라 보상이 귀결되는 사회이니, 이 만큼 중요한게 또 있을까. 뭐... 동료들의 존중을 받는다는 것 자체가 이미 그 사람은 일잘러에, 평판도 엄청 좋은 사람이라는 말이긴 하다.



인생을 하륜 처럼 살 것인지, 허균 처럼 살 것인지, 선택은 당신의 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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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이 묻고 인문학이 답하다 - 우리가 사랑이라 말하는 모든 것들 날마다 인문학 4
정지우 지음 / 포르체 / 202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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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는 풀리지 않은 명제가 많다. 대체적으로 이과적인게 많지만, 문과적인 것에서 찾자면- 그건 아마도 사랑이 아닐까? 사랑이란 무엇일까!




도대체 사랑이란게 무엇이기에 사랑을 하고 있는 사람으로 하여금, 지금까지 살아왔던 삶과는 다른 삶을 살게 하는 것일까. 이렇게 사랑에 대해 궁금해 하는 건 비단 나뿐만은 아닐 것이다. 하지만 이에 대한 해답은 명확하지 않다. 무엇보다 사랑의 정의, 사랑의 형태, 사랑의 모습 등등 수많은 질문에 대한 대답 자체가 사람마다 다르기에, 사랑이란 무엇인지 명확한 해답을 찾고자 하는 것 자체가 모순일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 사람은 사랑이 무엇인지, 무엇이기에 사람을 바꾸는지 치열하게 고민했다. 그리고 사랑에 대해 글을 써내려 갔다. 그 글은 책이 되었고, 그 책이 나에게 들어왔다. 제목은 「사랑이 묻고 인문학이 답하다」.



「사랑이 묻고 인문학이 답하다」를 읽고 난 뒤, 한 줄 감상은 이렇다. 사랑에 대한 인문학책이라고 하기에는 1%부족하지만, 사랑에 대한 인문학적 에세이라고 했을 때는 이 만한 책이 없다! 사랑이라는 감정의 수많은 모습을 인문학적으로 써내려간 이 책을 읽고 있노라니, 나 역시 사랑이란 무엇인지 다시금 생각하게 되었다. 



본디 사랑이란 내가 사랑하는 상대의 모습에 따라 남녀간의 사랑 뿐만아니라, 부모자식간의 사랑, 친구간의 사랑, 연예인을 향한 사랑, 반려동/식물을 향한 사랑 등등 수많은 모습을 하고 있지 않은가. 사랑의 형태는 이토록 다양하다. 그리고 나 또한 이토록 다양한 사랑을 해왔다. 아니, 나뿐만이 아니라 많은 사람들이 다양한 사랑을 하고 살았고, 살고 있으며, 살아갈 것이다.



어떠한 형태의 사랑이든, 사랑을 했을, 하고 있을, 할 예정인 사람이라면 이 책을 읽어보는건 어떨까?








내가 사랑하는 그 사람은 내 욕망의 특이함을 보여준다. (…) 수많은 사람 중에서 내 욕망에 꼭 들어맞는 이미지를 찾기 위해 얼마나 많은 우연과 놀라운 우연의 일치가 필요했던가!

-롤랑 바트르, 《사랑의 단상》 中


지금껏 많은 사람과 소개팅도 하고, 썸도 타며 만났지만 당신만큼 나에게 ‘특별히’ 마음에 드는 사람은 없었다. 그 말은 당신의 특별함을 이야기하지만, 그 이상으로 내 욕망이 특별하다는 점을 강조하는 것이기도 하다. 나는 특별함을 지키기 위해 당신이 필요하다. (…) 우리가 사랑하는 그 사람은 세상 모두에게 특별한 사람이 아니다. 많은 사람들이 내가 사랑하는 사람에게 시큰둥 할 수 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그를 좋아하든 아니든 상관없다. 나에게는 남들이 모르는, 연인에 대한 ‘나만의 지식’이 있다. p 029



우리는 사랑이 나와 당신만이 맺는 관계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실제로는 나와 내 욕망이 맺는 관계이기도 하다. 나는 내 욕망을 사랑한다. 그 사람이 내 곁에 있어야 하는 이유는 이 특별한 욕망을 지키고 싶기 때문이기도 하다. 이 특별한 욕망이 주는 삶의 활기, 인생에서 무언가에 몰입하는 힘, 욕망을 채우기 위해 움직이는 힘까지…. 우리에게는 삶을 생기로 가득 채우는 이 욕망이 필요하다. p 030




사랑이라는 욕망을 사랑한다는 생각은 해본 적이 단연코 없었다. 그런데 이 책을 읽으며 곰곰히 생각해보니, 나역시도 사랑이라는 욕망 자체를 사랑했었다. 물론 당시 사랑의 대상, 그러니까 내 애정을 한 몸에 받았던 대상은 일종의 스타, 뮤지컬 배우다. 그 배우가 출연하는 뮤지컬을 보기 위해 피켓팅을 마다하지 않고, 오히려 피켓팅하는 그 시간의 쫄깃함까지 즐겼다. 주말에는 공연을 보러가니, 평일에는 으쌰으쌰하며 나에게 주어진 삶을 보낼 수 있었다. 그 배우가 출연하는 공연을 보기전 까지의 모든 시간이 나에게는 두근거림의 연속이었다. 하지만 공연을 보고 나온 뒤에는 허했다. 다음 공연 스케쥴이 잡힐 때까지 쭉 마음이 허했다. 그때는 그저 공연을 보지 못하는 거에 대한 공허함이라 생각했는데, 다시금 돌이켜보니 내가 사랑한건, 사랑이라는 욕망 그 자체가 아니었을까? 나의 언어로 바꾸자면, 나의 시간과 비용을 써가며 얻어낸 티켓과 공연을 보러가기전의 두근거림과 기다림. 그 두근거림과 기다림이 있었기에, 나는 디데이를 맞이하기 위한 하루하루를 활기차게 보낼 수 있었지않았나 싶다.



물론 이건 어디까지나 과거의 일이고. 지금의 내가 사랑하는 욕망은 무엇인지 곰곰히 생각해봤는데, 아직은 모르겠다. 그저 아기 보는데 하루 24시간이 너무 후딱 지나가기에, 욕망을 사랑할 시간조차도 지금의 나에겐 사치인 느낌이랄까.



우리는 마술에 걸린 채 황홀해하며, 잠들지 않고 잠 속에 있으며, 잠들기 전의 어린애 같은 쾌감 속에 있다. (…) 시간, 법률, 금기 등. 아무것도 고갈되지 않으며, 아무것도 원해지지 않는다.

-롤랑 바르트, 《사랑의 단상》 中


늘 엄마와 아빠에게 사랑한다고 말하는 아이에게 사랑이 무엇이냐고 물어보았다. 아이는 고민하다가 “안아주는 거”라고 말했다. 나는 내심 ‘많이 좋아하는 거’ 정도를 기대하고 있었기에 아이의 말이 생경하게 들렸다. 아이에게 사랑은 아주 구체적인 무언가인 모양이었다. 기분 좋고, 따스하고, 행복하고, 편안한 느낌을 주는 구체적인 행위 그 자체, 즉 안아주는 행위가 곧 사랑인 것이다. p 047



완벽한 껴안음의 순간에, 우리는 더는 아무것도 원하지 않고 그저 그 따사로운 평온으로 완전하게 채워진다. 그 속에서는 다른 욕망의 작동이 정지하며, 그저 ‘괜찮은’ 상태가 된다. 욕망과 결핍이 인생을 계속 어딘가로 이끌고 간다면, 포옹과 충일은 우리를 여기에 머무르게 한다. 꼭 껴안고 있으면 불안에 떨며 채우기 위해 무언가를 쫓지 않아도 괜찮다. 그래서 바르트는 포옹이야말로 사랑에서 최고의 순간으로 꼽는다. p 048



아이에게 언젠가 “왜 아빠보다 엄마가 더 좋아?”라는 나의 볼멘소리에 이렇게 대답한 적이 있다. “엄마가 더 많이 안아주니까.” 그 말을 듣고 나는 꽤 반성했다. 아이에게 사랑이란, 아주 구체적인 감각이다. 어른들이 따지기 바쁜 능력이니 미의식이니 하는 것들이 아니라, 가장 직접적이고 섬세하며 생생하게 존재하는 감각의 향연이다. 아이는 그 누구보다 그것을 정확하게 알고 솔직하게 말할 줄 안다. p 049




완벽한 껴안음의 순간. 그 순간이야말로 사랑 그 자체다. 나 역시 그렇게 확신할 수 있다. 누군가를 안아준다는 건, 특히 안아주는 그 품이 따뜻하게 느껴진다면, 그건 분명 그 누군가를 사랑하는 감정이 있기 때문이다. 그게 남녀간의 사랑이든, 가족간의 사랑이든, 친구간의 사랑이든, 그 무엇이든. 그 어떤 사랑의 모습 중에서 거의 공통되게 나타나는 현상이 바로 ‘안아주는 것’일테니까. 



나와 신랑은 육아로 인해 하루하루가 너무 고되다. 말못하는 아기와 실랑이를 할 수 있는 것도 아니기에 더더욱. 그렇게 힘든 하루를 보내다가도, 아기를 안고 있으면 1분전까지도 힘들었던 순간이 순식간에 사라진다. 아기를 안고 있는 그 시간만큼은 ‘내가 힘들었었나?’ 싶을정도로 말이다. 힘들 때는 내가 아기를 사랑하고 있는게 맞을까 싶다가도, 아기를 안는 순간 ‘아, 나는 우리 아기를 정말 사랑하는구나’하고 확신한다. 육퇴 후에 나에게 고생했다며 안아주는 신랑 품도 그렇다. 정말 그렇게 따뜻할 수가 없다. 말을 하지 않아도, 잠시잠깐 안는 것으로도 나도 사랑받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정말 확실하게 말할 수 있다. 안아주는 것 그 자체가 바로 사랑이라는 것을.




그토록 우리에게 큰 고통을 안겨주고 우리의 삶을 온통 뒤집어 놓은 그들이, 인생의 어느 지점에선 우리가 전혀 알지 못하는 무의미한 존재였다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다.

-안드레 애치먼, 《알리바이》 中


사랑하게 된 사람이 눈 앞에 있다. 그는 온통 내 삶을 뒤집어 놓았다. (…) 그렇게 격렬한 감정들을 느끼게 하는 사람이 한때는 나에게 ‘아무것도 아니었다’는 사실은 기묘하다. 예를 들어 학교나 직장 등 한 공간에서 그 사람을 오랫동안 보아온 경우라면 더욱 그럴 법하다. 지난 몇 달간, 혹은 지난 몇 년간 나에게 완전히 ‘무의미’한 존재였던 그가 나와 ‘연인관계’가 되었다는 이유만으로 완전히 다른 존재가 된 것이다. 이 간극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p 081



어제까지 아무 관계도 아니었던 당신이 오늘부터 나와 연인 관계를 맺기 시작하면 우리 사이에는 무언가 일어난다. 일단 ‘연인이라면 해야하는 것’의 목록이 각자의 가슴에 주어진다. (…) 즉, 연인 관계로 진입하는 그 순간부터 그들은 서로에게 의무를 가진 존재가 된다. 다른 사람들은 내게 그런 의무가 없다. 오직 당신만이 그런 의무가 있을 뿐이다. 달리 말하면, 당신만이 내게 그만한 ‘의미’를 가진 존재가 된다. p 081~082



그렇기에 사랑을 대할 때는, 오로지 감정만 떠올리기보다 앞서 말한 ‘계약상 의무 준수’에 관해 생각해야 한다. 사랑의 핵심이 감정일 지는 모르지만, 그 감정을 지탱하는 형식 또한 빼놓고 사랑을 설명하기는 어렵다. 우리는 어떤 형식에 진입함으로써 사랑하는 사람, 연인이 된다. 그래서 사랑 앞에서는 때론 의미와 형식, 그리고 의무를 떠올려야 한다. 우리는 그러한 ‘딱딱한 것들’ 또한 사랑의 일부라는 걸 인정해야 한다. 때로는 사랑에 딱딱한 태도가 필요하다. p 083




신랑과 가끔 ‘라떼’를 이야기할 때가 있다. 우리에게 라떼란, 서로가 서로를 모르던 바로 그 시기다. 태어나서부터 대학에 입학하기 전까지의 약 이십여년간의 시간. 그 시간동안 우리는 서로가 서로에게 아무 의미가 없던, 그야말로 ‘타인’이었다. 어쩌면 그 이십여년간 어딘가에서 마주쳤을지도 모르겠으나, 우리는 철저하게 타인이었다. 그렇게 타인으로 살다가, 한 공간에서 만나게 되었고, 그렇게 연애를 하게 되었다. 그러다 연애가 끝나고, 결혼을 하였고, 지금은 이쁜 아기를 키우고 있다. 이것만큼 놀라운 일이 또 어디있을까? 생면부지의 생판 남인 사람들이, 어느날 갑자기 연인이 된다는 것. 어쩌면 우리가 아닌, 서로 다른 사람을 만났을 가능성도 있었을텐데, 그럼에도 우리가 만난 것. 난 지금도 이 모든게 놀랍고 신기하다.



그래서 그럴까? 우리는 이 책에서 말하는 소위 ‘계약상 의무 준수’에 대해 한치의 어긋남이 없었다. 서로에게 연락을 하고, 혹시라도 연락이 힘든 상황이 올 경우 그전에 어떠한 상황인지 미리 이야기를 하는 등, 서로가 서로를 존중했다. 그 덕분에 연애기간, 결혼, 그리고 현재까지 1n년간 큰 싸움(?)없이 아주 잘 살고 있다. 뭐, 아이가 학교를 가기 시작하면 또 달라진다고는 하지만, 나와 신랑은 지금의 모습과 크게 변하지 않을 듯 싶다.



서로 사랑하라, 허나 사랑에 속박되지는 말라. (…) 서로의 잔을 채우되, 어느 한 편의 진만을 마시지는 말라. (…) 함께 노래하며 춤추며 즐거워하되, 그대들 각자는 고독하게 하라.

-칼릴 지브란, 《예언자》 中


결혼의 가장 큰 특징이라고 한다면, 이전의 어떤 연애보다 타인과 더 깊이 사생활을 모두 공유한다는 점일 것이다. 사회마다 결혼의 의미가 다르긴 하지만 특히, 우리나라에서는 양가 부모님등 가족들의 사정까지 서로 깊이 알고 생활의 일부가 되어 간다는 걸 의미한다. 연애 때와는 다른 밀착감이 생기고, 서로가 서로의 삶의 일부가 되어간다. p 105



결혼에 위기가 찾아온다면, 아무래도 가장 큰 이유는 너무 오랜 시간동안 함께 지내면서 하나가 되어 버렸기 때문이다. 사랑하는 사람은 그 누구보다 서로 결합하기를 원한다. 하지만 막상 그렇게 되고 나면 사랑의 위기가 시작된다. 너무 오래 지내면서 모든 걸 다 알게 되어 서로에 대한 환상과 호기심이 사라지고, 더는 새롭게 할 이야기나 재미가 없어 질리는 것이 사랑과 결혼의 역설일지도 모른다. 그런 결혼에 대해 칼릴 지브란은 말한다. “그대들 각자는 고독”하라고 말이다. p 106



상대가 자기만의 내면을 가진 고유한 존재라는 사실을 유념하면 지루했던 일상도 조금은 달라진다. 나는 자기만의 감각과 마음으로 세상을 받아들이는 한 존재와 함께 걷고 있다. 그러면 그의 기분이나 마음이 궁금해진다. 그에게 지금 이 산책의 기분은 어떠하냐고. 오늘은 어떤 마음이냐고 묻게 된다. 그 대답에서 상대의 마음을 알게 되고, 또 그와 비슷하거나 다른 나의 마음에 대해 이야기 한다. 그것만으로도 ‘당연한’ 존재가 될 뻔했던 내 곁의 사람은 한 명의 고유한 존재로 서게 된다. 나와 당신은 함께 있지만 동시에 거리를 가진, 고유한 존재로 실재한다. p 107




신랑과 난, 연애시절의 환상과 호기심은 당연히 사라진지 오래지만, 상대방을 향한 감정은 연애시절보다 결혼한 지금 더 커졌다면 커졌다고 확신할 수 있다. 연애기간까지 합치면, 내 나이의 ⅓ 정도나 되는 다소 긴(?) 기간을 함께 했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그 이유는 위에서도 언급했다시피, 서로를 향한 존중이다. 혼자 있는 시간을 지켜주고, 함께하는 시간은 함께하는 것. 



연애할 때도 그랬지만, 결혼한 지금도 모든 일을 둘이서 다 같이 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본디 오랜 시간을 타인으로 살아온 우리다. 하루 24시간 붙어서 생활한다면, 어떻게든 탈이 날 수 밖에 없다. 잠시 잠깐이라도 서로 떨어져 있는 시간도 필요하다. 하다못해 서로가 직장에 있는 시간이라도.



물론 지금의 나는...육아휴직 중인지라 혼자 있는 시간이 흔치 않다. 혼자 있고 싶으나, 내 앞에는 뽈뽈거리며 기어다니는 아기가 있으니 말이다. 그럼에도 다행인건, 우리 신랑이 주말에는 아기를 전담케어하며, 나에게 조금이라도 혼자있는 시간을 주고자 노력한다는 것이다. 신랑의 이러한 사랑과 배려가 내 원동력이 되어, 나의 온 힘을 우리 아기에게 쏟아붓고 있다. 물론, 신랑에게도 나누어줄 힘을 조금은 남겨놔야하는데, 온 종일 아기를 보다보니....아직까지 그건 좀 무리인듯^_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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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6월, 경기도 의정부시에 있는 천보산을 갔었다. 집에서 멀기도 멀거니와, 이름도 생소한 천보산을 갔던 이유는 단 하나다. 제일 험난했던 시기에 귀한 자리에 올랐으나, 비참한 일생을 지낸 한 여인을 보기 위해서였다. 그 여인의 이름은 이애숙. 생소하다면 생소한 그 이름. 하지만 그녀의 봉호를 들으면 ‘아!’ 하고 알지도 모르겠다. 그녀가 조선 왕 효종에게 받은 봉호는 바로 의순공주 이다.



의순공주에 대해서는 내 블로그에서 여러차례 포스팅을 했다. 아마 잊을만 하면 포스팅을 했다고 하는 것이 맞겠다. 의순공주의 일대기를 그린 역사소설 서평을 시작으로, 오롯이 의순공주와 환향녀에 대한 포스팅, 족두리묘 답사 포스팅, 그리고 의순공주와 당대 상황이 쓰여진 역사책 서평이 있었다. 내가 이토록 의순공주에 대한 포스팅을 끊임없이 한 이유는 단 하나다. 기억하고 또 기억해서, 이 같은 역사를 반복하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에서다. 



의순공주에 대한 이야기는 조선의 흑역사다. 사람에 따라서는 알고 싶지 않은 역사이고, 왜 계속 그런 이야기를 하냐며 마음에 안들어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도 그럴 것이, 의순공주의 이야기는 못난 리더와 못난 남자들의 환장의 콜라보로 이뤄진 이야기기 때문이다. 차라리 소설이었으면 하지만, 슬프게도 역사적 사실인 이야기, 조선왕조실록에도 떡하니 기록되어있는 이야기다.



의순공주의 이야기를 알기 위해서는, 그녀가 살았던 조선 중기 (인조 ~ 효종) 대의 상황을 알고 있어야 한다.


※빠르게 훑어보는 인조 ~ 효종까지.


콤플렉스로 중무장된 한 사람이 반정으로 왕이 되었다. 그의 할아버지는 선조이고, 아버지는 선조의 아들 정원군(조선왕실 최초의 싸이코패스)이다. 할아버지 선조와 아비인 정원군. 그 핏줄을 이어받아 왕이 된 그는 바로 능양군, 인조다.


삼촌 광해군을 몰아내고, 1623년에 왕위에 오른 인조는 즉위 직후 광해군의 정책을 전면 폐기하고, 친명배금 정책을 펼쳤다. 여기서 중요한 사실은, 이 때가 임진왜란/정유재란 7년전쟁이 막 끝난지 얼마 안된 시기라는 점이다. 당시 광해군은 그 유명한 중립외교로 명나라와 금나라(청나라) 사이에서 완벽한 줄타기를 하며, 전쟁으로 피폐해졌던 조선 땅의 안정을 찾아가고 있었다. 하지만 광해를 몰아내고 왕이 된 인조는 망해가는 명나라를 선택했다. 그렇게 조선의 안전이 다시 한번 송두리째 흔들린다.


1627년 금나라는 군대를 이끌고 조선에 쳐들어왔다(정묘호란). 이후 인조는 금나라와 형제의 관계를 맺는 것으로 겨우 마무리 하는 듯 싶었다. 하지만 인조는 다시 금나라의 뒷통수를 쳤다. 이에 빡친 금나라는 국호를 청으로 바꾼 뒤, 1636년 다시 조선으로 쳐들어온다(병자호란). 인조는 남한산성으로 도망갔다(원래는 강화도로 가려하였으나, 강화도로 가기 전에 청군에 길막당했다). 남한산성에서 항전을 하다 결국 삼전도(현재 잠실 부근)에서 청태종에게 항복을 하며, 삼배구고두례를 하며 굴욕을 맛 보았고, 조선의 왕세자를 비롯한 왕자들이 청나라로 끌려갔다.


이후 청나라와 돈독한 관계를 맺었던 소현세자가 귀국했지만, 소현세자가 요절한다. 결국 동생인 봉림대군이 왕위에 등극하니 그가 바로 효종이다. 





북벌정책으로 유명한 효종이다. 하지만 실상은 북벌다운 북벌은 한 적이 없는 효종이다. 명분이 없는 왕위였기에, 아비를 위하는 명분으로 내세운 것이 바로 북벌이었던 것이다. 뭐, 여기까진 그렇다치고. 다시 의순공주 이야기로 돌아가보면..



청나라는 효종에게 조선 왕실의 딸을 공녀를 요청한다. 하지만 효종과 종친들은 자신의 딸들을 오랑캐에게 보낼 수 없었다. 그렇다고 계속 공녀를 안보낼 수도 없는 일, 결국 종친의 한 사람이었던 금림군 이개윤이 본인의 딸을 공녀로 보내겠다고 하였다. 금림군은 효종의 10촌으로, 종친이라고는 해도 거의 남이나 다를 바 없었던, 성씨만 조선 이씨였던 사람이었다. 한마디로 힘없는 종친이 자의반, 타의반 총대를 맨것이다.



(금림군의 딸)의순공주로 간택이 결정되고 사흘 뒤 효종이 관료들에게 이리 물었다. “근래에 사대부집에서 서로 다퉈 혼사를 치른다는데 사실인가?” 사정을 모르는 양반들이 간택을 면하려고 결혼행진곡을 벌인다는 소문이었다. 효종은 열 살 된 세자와 열한 살과 아홉 살 먹은 공주 혼인을 걱정하며 8~12세 사대부 자녀 혼인 금지령을 내렸다.(『효종실록』) ‘두 살배기 공주 하나뿐’이라는 말은 삼척동자도 아는 가짜라는 자백이었다. - 역사책 「땅의 역사 5권」 中



자기 딸 대신 오랑캐 나라로 간다는 금림군의 딸 이애숙을, 효종은 자신의 양녀로 삼았다. 그렇게 우리가 알고있는 의순공주의 삶이 시작된 것이다.



효종의 양녀로 청나라로 간 의순공주는, 다행이라면 다행이게도 당시 청나라 권력가였던 예친왕 도르곤의 부인이 되었다. 뿐만 아니라 남아있는 기록에 따르면 부부사이도 좋았던 듯 보인다. 하지만 조선사람들은 이를 못마땅해했다. 그 사실은 의정부 천보산에 위치한 족두리묘와 정주당놀이로 확인할 수 있다.


병자호란과 정축하성으로 인해 울분에 차 있는 뭇 백성들 사이에 '왕실에서 공주까지 오랑캐에게 바쳤다' 라는 원성이 들끓었지. 조정에서는 몇 달 동안 민심을 무마하기 위해 무진 애를 썼으나 결국 임금께서 자신의 딸을 빼돌리고 종친의 자녀인 너를 대신 보낸 일 까지 소문이 나서 민심이 더욱 흉흉해질까 봐 전전긍긍하시는 형편이 됐단다. 그래서 궁리해낸 것이 바로 이 족두리 묘였어. 네가 연경에서 오라비들을 통해 돌려보낸 족두리를 갖고 이야기를 지어낸거야. 


의순공주는 끝내 국경을 넘지 않았다. 국경으로 가던 중 오랑캐에게 몸을 더럽힐 수가 없었다면서 평안도 정주 강에 몸을 던졌고 시신을 찾지 못한 채 족두리만 물에 떠 올랐다는 설화를 만들어 낸 것이지. - 역사소설 「애숙의 나라」 中


경기도 의정부 천보산 기슭에 금림군 가족묘역이 있다. 동쪽 끝 비석 없는 묘는 ‘족두리산소’라 불린다. 오랑캐 땅을 밟기 전 공주가 압록강에 투신해 족두리만 모셨다고 믿는다. - 역사책 「땅의 역사 5권」 中



조선은 멀쩡히 살아있는 의순공주를 죽은 사람으로 만들어버렸다. 뭐, 의순공주가 청나라에서 오래오래 행복하게 잘 살았다면 이야기는 여기서 끝났겠지만 슬프게도, 이후 의순공주에게는 비극이 연달아 일어난다. 힘든 기간을 버티며, 우여곡절 끝에 겨우 조선 땅으로 돌아왔다. 하지만 조선에서는 그 누구도 반기지 않았다. 당연히 그녀를 공주로 봉했던 조선왕실조차도 말이다. 하기사, 조선에서는 이미 죽어서 무덤까지 만든 사람인데, 살아서 돌아왔으니 반가울리가 없을 것이다. 무엇보다 의순공주는 조선의 무능을, 자신들의 무능을 그대로 보여주는 사람이기도 했으니 말이다. 



비단 의순공주 뿐만이 아니다. 조선에는 의순공주를 포함하여 청나라로 끌려갔다가 천신만고 끝에 고국으로 돌아온 수많은 조선의 여성들이 많이 있었다. 그녀들은 조선과 조선의 왕, 조선의 위정자들의 무능으로 인한 피해자였다. 그렇기에 조선은 그녀들을 눈엣가시처럼 여겼다.



정축하성의 국치*로 전쟁이 끝난 뒤 청국으로 끌려간 포로들에 대한 석방 교섭이 있었던 기묘년 이후 적지 않은 조선인들이 돌아왔다. 그런데 여인들만은 오랑캐에게 몸을 더럽혀 실절했다는 이유로 남편에게 내쳐지고 시집에서 문전박대를 받았다. 어쩌다가 도성으로 들어간 여인들도 다른사람들 눈에 띄지 말라고 별당이나 뒷방에서 유폐되다시피 홀로 쓸쓸히 지내야 했다. 대들보에 명주실을 내려 목을 걸거나, 은장도로 손목을 긋고 가슴을 찌른 여인들이 부지기수 였다. 집 안에 있는 샘에 거꾸로 뛰어들어 목숨을 끊은 이들도 한 둘이 아니었다고 한다.


아예 집안에 들어갈 수 조차 없는 여인들은 깊은 강을 찾아 몸을 던졌다. 대게는 오랑캐에게 끌려갈 때 자결하지 못한 자신을 한탄했고, 조선의 남정네들을 원망하면서 눈을 뜬 채 이승을 떠났다. 속환한 며느리가 칠거지악을 저질렀으니, 이혼을 하도록 해달라는 상소가 쉬지 않고 올라왔다. 환향한 지 한 해 만에 그렇게 한이 맺힌 채 죽어간 여성이 대략 일만 명은 넘었을 것이라는 말도 나돈다고 했다. - 역사소설 「애숙의 나라」 中

*정축하성의 국치: 삼전도의 굴욕


숱한 여자들이 청으로 끌려갔다가 매우 적은 숫자로 돌아왔다. 환향녀라 부른다. 이들에 대한 반응은 차가웠다. - 역사책 「땅의 역사 5권」 中



조선은 이들을 환향녀라 불렀다. 그리고 이들을 괄시했다. 그녀들을 괄시한 명분은 뚜렷했다. 조선의 여인에게는 매우 중요한 정절을 지키지 않았다는 이유였다. 오랑캐에게 복수는 하지 못할 망정, 끌려갔을 때 죽지도 않고 살아서 돌아왔으니 정절을 지키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 얼마나 어처구니 없는 이야기인가. 청나라에 대한 복수심을 힘없는 여인들에게 쏟아낸 것이, 당시 조선의 위정자들, 조선의 남자들이었다. 자기들이 무능해서 일어난 일이었고, 그로 인한 피해를 조선의 여성들이 입었음에도 조선의 위정자들, 조선의 남자들은 그에 대한 책임은 지지 않았다. 



의순공주는 그저 비극적인 삶을 산 여인이 아니다. 그녀의 삶은 죽지 못해 살았던 수많은 환향녀들을 대변한다. 그녀의 삶은 무능하고 치졸했던 조선과 조선의 왕, 조선의 위정자, 조선의 남자들을 고발한다. 




과거에는 의순공주 비극적인 삶 같은 조선의 흑역사를 볼 때마다 ‘만약’ 이란 생각을 했었다. 물론 역사에 가정은 없지만, 그럼에도 ‘만약에 이랬다면~’ 이라는 생각이 머리속에서 떠나질 않았었다. 하지만 지금은 좀 다르다. 이제는 ‘만약’이라는 가정이 아니라, ‘앞으로’를 위한 생각을 하게 되었다. 훗날 같은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앞으로’ 어떻게 해야하는가, 라는 생각 말이다.



의순공주가 살았던 당시 조선을 보면, 임진/정유재란이 일어난지 오래 안지나서 정묘/병자호란이 일어난 것을 알 수 있다. 즉 한번 대규모의 외침이 있었으므로, 이후 방비 및 외교에 대해 ‘제대로’ 생각했더라면 의순공주와 같은 피해자들은 나오지 않았을 거라는 이야기다. 그 뿐인가? 약 이백여년 뒤 여러차례 외침이 있었고, 결국에는 일본의 식민지배까지 받았다. ‘앞으로’를 생각하지 않아서, 흑역사가 계속 반복된 것이다.



물론 우리가 사는 21세기에 저런 외침에 있겠냐고 말하는 삶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지구 반대편에서 끊이지 않고 전쟁이 일어나는 것을 보면, 음. 확실한 건 ‘앞으로’에 대해서 치열하게 고민하지 않는다면, 21세기에도 의순공주와 같은 피해자가 다시 생겨날 수도 있다는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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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시의 신사를 찾아서 - 일본·류큐·제주도 제주학연구센터 제주학총서 27
오카야 고지 지음, 이예안.이윤주 옮김 / 제이앤씨 / 2017년 11월
평점 :
절판


나는 역사에 관심이 많은 만큼, 민속학에도 꽤나 흥미를 가지고 있다. 그래서 그런지 몰라도 외국 출신 신神을 추종하는, 그 중에서도 유독 개신교로 점철된 우리나라를 보고 있노라면 대체 무엇이 문제이기에 우리 고유의 민속신앙은 이토록이나 처참하게 무너졌을까 싶기도 했다. 그래도 어렸을 적에는 시골에 가면 당산나무가 있었고, 서낭당도 있었고, 가족과 마을을 지켜주던 가택신도 있었던 것 같은데 지금은 그 흔적조차도 찾아보기가 힘들다. 이제 한반도 내에서는 우리 고유의 민속신앙을 찾기가 하늘의 별따기 수준이다. 하지만 나같은 생각을 하는 사람은 별로 없는지, 많은 사람들은 우리 고유의 신앙에 살아숨셨던 신들은 잊은채 외국 신에 열광한다. 외국 출신 신을 받드는 종교도 종교거니와, 그리스/로마/북유럽 등의 외국신화에도 열광한다. 그렇게 내가 발 딛고 사는 땅에 살았을, 우리를 지켜주었을, 우리만의 신들은 그렇게 사라졌다. 아니, 사라졌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게 아니었다. 아직 제주도에는 신이 남아있었다. 다행이라면 다행일까. 그래서 나는 제주도 신화와 관련된 책도 여러 권 읽어보았고, 제주 여행을 다닐 때는 제주의 신화와 관련된 곳을 일부러 찾아다니기도 했다. 본토에는 찾기 힘든 민속신앙을, 제주도에서는 만날 수 있었다. 그래서 난 제주도만큼은 아직 신화의 나라이며, 그네들의 전통을 잘 보존하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데 왠걸. 내가 본 제주도의 신들도, 이미 수 많은 신이 사라진 뒤였다. 그 사실을 이 책을 읽고 나서야 알았다. 사람들 눈에 띄지않게 꼭꼭 숨어있는, 본토처럼 난개발에 사라지고 있는 제주도의 ‘당’을 보고나서야 알았다. 뭐, 이 책의 주제는 사라지는 전통신앙에 대한 것은 아니니, 이 이야기는 일단 여기서 멈추고.




이 책은 일본인 저자가 제주도, 한반도 서남해안, 오키나와, 일본 본토의 신사를 답사하며 연구한 결과물이다. 제목은 「원시의 신사를 찾아서」. 



한줄로 요약하자면 “일본 본토의 신사의 원형은 오키나와의 ‘우타키’로, 그럼 이 우타키는 어디서 온 것인고 하니, 제주도의 ‘당’”이다. 물론 이렇게 한줄로 요약하기엔 그 내용이 꽤나 방대하긴 하다. 하지만 내가 누구인가. 한일고대사를 너무나 좋아할 뿐더러, 관련 역사책을 비롯하여 일본에 갔다 하면 도래인의 흔적을 찾으로 여기저기 다니던 나다. 그런 나에게 이 책은 그야말로 보물과도 같은 책이었다. 아니, 이 책을 왜 이제서야 읽었지? 산지는 꽤 되었는데. 육아하느라 시간이 없다고 미루고 미루고 계속 미루다가 이제서야 읽게 되었다는게 후회될 정도로 너무 만족스러운 책이었다. 



이 책에서 이야기하는 내용을 좀 길게 요약하자면 이렇다.



1. 일본의 신사의 원형을 오키나와의 우타키로 보고 있는데, 이 우타키의 원형은 제주도의 당으로 추정된다. 우타키나 당은 성스러운 숲, 여성사제라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2. 제주도의 당 문화는 바다건너 서, 남해안에도 퍼져있을 것으로 보이나, 제주도와는 달리 본토는 미신타파 등 토종신앙 박해등으로 당문화가 급속도로 쇠퇴하여 지금은 흔적을 찾기 어려운 곳이 많다.


3. 그렇다면 오키나와의 우타키 문화만 제주도의 당 문화가 비슷한 것인가? 아니다. 제주도와 바다를 사이에 둔 오키나와 뿐만 아니라 일본 본토 규슈 해안가에서도 비슷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 적어도 고대에는 쿠루시오 해류가 흐르는 해안가를 주변으로 동일한 문화권으로 묶여있었을 가능성이 있다. 뿐만 아니라 제주도의 풍습 역시도 오키나와나 쿠루시오 해류가 흐르는 해안가 마을과 비슷하다. 즉 제주도인과 오키나와인, 그외 큐슈 해안가 사람들의 교류가 빈번했음을 추정할 수 있다.


4. 고대의 일본 신사는 오키나와 우타키처럼 신사 건물이 없었다. 즉 성스러운 ‘숲’이나 나무, 바위 등을 모셨다. 신사에 대한 제일 오래된 기록은 한반도 도래인이, 자국의 신을 모시기 위해 세운 신사에서 시작된다. 


5. 일본 내에 있는 신사에서 출토된 제일 오래된 물품은 야요이 토기인데, 야요이 문화는 한반도 도래인의 선진문물로 시작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신사에 대한 최초의 기록과 그외 수많은 도래인이 세운 신사의 기록을 볼 때, 일본 내의 많은 신사의 성립 과정에서 한반도 도래인은 어떠한 경로로든 개입이 되어 있을 것이다.


6. 제주도의 당과 오키나와의 우타키는 기본적으로 ‘성스러운 숲’, 즉 신수신앙에 대한 인식이 깔려 있는데, 신수신앙에 대한 시작은 아무래도 신라에서 시작된 것이 아닐까 추측된다. 그 근거로 『삼국사기』에는 신라의 성스러운 숲에 대한 기사가 많이 실려있다. 또한 당시 고대 일본의 권력은 신라계 도래인이 쥐고 있었다.


7. 제주도의 당(본토 성황당 등)과 오키나와의 우타키(본토 신사)는 그 시작은 비슷했으나, 결과는 너무나 달랐다. 일본의 신사와 오키나와의 우타키는 일본 관광책자에는 무조건 실려있는 관광 명소가 되었지만, 제주도의 당이나 본토의 성황당등은 많은 수가 사라졌거나, 있어도 유명무실하며, 실제로 있는지 조차 모르는 경우가 대다수다. 일본은 기본적으로 자국의 문화를 중요시하였고, 타종교를 들여왔어도 박해를 하지 않았으나, 한반도는 달랐다. 고려 불교 오백년, 조선 유교 오백년, 현대의 새마을운동등을 거쳐 한반도 토종 민속문화는 거의 절멸하였다.


8. 한국의 토종신앙과 일본의 신사 사이에는 분명한 연결고리가 있으며, 일본에는 명확하게 검증된 고대 도래인이 세운 신사들이 많이 남아있지만 이에 대한 연구가 많지 않은게 현실이다. 제일 큰 이유는 아무래도 한국의 토종신앙을 미신으로 치부하며 타파한 유교문화이지 않을까. 그러다보니 신사가 일본 고유의 문화인 것마냥 알려지게 되었지만, 실상 일본 신사의 시작은 한반도다.




정말 이 책을 읽은 나를 너무 칭찬한다. 특히 한일고대사에 매우 큰 관심을 갖고 있는 나에게는 이만한 책이 또 어디있을까? 정말 이 책에 실려있는 모든 내용이 흠잡을 데가 없다. 정말 역사책은 ‘ㅇㅇ총서’ 정도는 되야 흠잡을 데 없고, 번역에 대한 가독성도 높아서 읽기도 좋다. 



나 역시도 일본의 신사의 시작은 고대 한반도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은 하고 있었다. 이렇게 생각한 근거를 들자면, 일본에 갈 때마다 한반도 도래인이 세운 신사와 사찰, 도래인들이 꾸려나간 지역들을 찾아다니면서 보고 들은것과, 한일고대사를 공부하면 할수록 보이는 고대 일본의 권력 중심세력이 한반도 도래인들이었다는 점이랄까? 다만 이것만으로는 그저 나만의 ‘카더라’에 지나지 않기에, 그냥 입 밖으로는 내지않고 혼자만 생각하던 것이었다. 하지만 놀랍게도 내 이런 생각들이 그저 헛된 생각이 아니었다니. 흑. 이런 연구를 하는 연구자가 있었을 줄이야, 그것도 바로 일본에! 요즘의 일본은 자국에 있는 신사와 사찰에서 도래인의 흔적을 지우고, 도래인의 흔적이 남은 지명조차도 바꾸었기에, 일본에서는 이런 연구를 하는 사람이 별로 없을 거라 생각했다. 만약 이런 연구를 한다면 극우파에 협박에 시달리지않을까 싶기도 하고 말이다. 뭐, 여기까지 각설하고!



한반도 도래인에 관해선 대충 규슈는 가야/신라, 관서는 백제/신라, 관동은 고구려 도래인 계열이 주를 이루었다고 알고는 있었다. 그 도래인들이 각 지방에 설립한 신사나 사찰에 대해서도 유래나 뭐 이런 건 대충은 알고 있었는데, 이 책 덕분에 대충 알고있던 사실을 제대로 알게 된 부분이 꽤 많았다. 특히 이세신궁과 신라의 연관성은 단 한번도 생각해본적이 없었던 터라, 와. 생각해보면 신라나 이세신궁에 대한 각각의 내용은 다 알고 있던건데, 왜 난 이걸 연관짓지 못했을까 싶기도 하고. 이래서 사람은 꾸준히 계속 배워야 하나보다.



이 책의 목차는 아래와 같이 총 10개의 챕터로 되어 있다.


-제주도 당과의 만남

-한국 다도해의 당

-제주도 당과 제

-오키나와의 우타키

-제주도와 류큐

-신사와 한반도

-신사를 둘러싼 몇 가지 문제1 (조몬, 야요이와 신사)

-신사를 둘러싼 몇 가지 문제2 (신사는 무덤인가)

-성스러운 숲의 계보

-신사, 우타키, 당



이 챕터중 일부를, 특히 내가 기억하고 공부하고자 하는 부분을 아래에 발췌했다.




▶ 제주도 당과의 만남


당은 결코 제주도만의 것이 아니다. 적어도 과거에는 신사나 우타키와 마찬가지로 한반도 어느 마을에나 있던 것 같다. 하지만 유교를 국료로 하는 조선시대 500년 동안 크게 변질되었고, 특히 최근에는 근대화(예를들어 새마을운동)나 기독교의 보급으로 한국 본토에서는 급속히 사라지고 있는 것 같다. p 012



내가 본 최초의 당은 잊을 수 없다. 그곳은 서귀포시 북쪽 교외 호근동이라는 마을의 당으로 감귤밭 속 작은 숲이었다. 『제주도 고대문화의 수수께끼』에 실려있는 사진과 똑같은, 아니 우타키의 숲 그대로였다. (…) 『니혼쇼키』와 『고지키』에 나오는 스이닌텐노의 명을 받아, 다지마모리가 바다 저편 이상향인 도코요노쿠니에 구하러 갔다는 도키지쿠노가쿠노미는 제주도의 감귤이라는 설이 있을 정도다. 다지마모리는 신라에서 건너간 아메노히보코의 후예로 알려진 인물이며, 게다가 감귤이 자라는 곳은 한반도 안에서 오직 제주도뿐이라고 하니 이설은 상당히 매력적이다. p 018



당은 신사나 우타키와 비교해서 일반적으로 청소의 손길이 닿지 않아 청결하지 않다. 처음에는 신앙의 쇠퇴가 그 이유로 보였지만 한마디로는 정리할 수 없는 것 같다. 제를 지낼 때 이외에는 함부로 출입해서는 안된다는 일종의 금기가 있고, 또한 사람들은 일단 신에게 바친 제물은 쉽게 가져가거나 버려서는 안된다고 생각하고 있어 그러한 데에서 난잡함의 일부가 나타나는 것이기 때문이다. p 021



길에 서서 이야기를 하고 있던 네, 다섯 명의 할머니들에게 물으니 이 마을의 당은 해안가에 있었는데 새마을운동으로 파괴되었다고 했다. 새마을이란 새로운 마을을 의미하며 1970년대 박정희 대통령 지시에 의해 시작되었다. 농어촌 구습을 타파하고 시대에 걸맞은 마을 만들기를 목표로 하는 운동으로 당 신앙 등은 미신으로 규정하여 배제 대상이 되었다. p 026



 



▶ 한국 다도해의 당


한산도에 가는 페리안에서 일본어를 잘하는 제승당 이사장과 함께 있었기에 당의 주소를 물어보았는데 “없어요” 라고 단번에 부정을 하는 바람에 나는 섬을 돌 의욕을 잃어 제승당만 보고 다음 페리를 타게 되었다. 연화도에서도, 욕지도에서도 내 입에서 나오는 당이나 신당이라는 말에 주민들은 아무런 대답도 없이 단지 고개를 내저을 뿐이었다. (…) 그리고 작은 마을에 개신교, 천주교를 포함해 네 개나 되는 교회가 있다는 사실은 놀라웠다. 최근 한국에서 기독교, 특히 개신교의 보급은 우리 일본 사람들의 예상을 뛰어넘으며, 예를 들어 상점 하나 없는 작은 섬에도 지붕에 십자가가 반짝이는 교회만은 있다고 할 정도이다. p 039



나는 소매물도에서 처음으로 당, 정확히 말하면 당의 흔적을 보았다. (…) 그러자 주인은 나를 가게 밖으로 데려가더니 왼쪽 작은 산 정상 가까이의 산등성이에 우거져 있는 벌목된 것 같은 작은 숲을 가리키며 “옛날에 저곳에 당이 있어 제를 지냈었는데, 지금은 아무도 가지 않게 되었다”고 말했다. 나는 그곳까지 올라가 보았따. 잡목이 우거진 숲 속에는 거대한 바위가 있었고, 그 앞에는 희미하지만 제사를 지냈던 흔적이 남아있었다. 하지만 이곳은 사라진 당이었다. p 040



한려수도의 섬에서는 제주도와 비교해서 당 신앙의 자취가 매우 옅고, 당의 형태도, 그 제祭도, 제주도와는 상당히 다르다는 것을 느꼈다. p 044



(신안 지도) 당은 마을에서 조금 떨어진 곳, 아직 초목의 마른 빛깔이 남아있는 밭 속에 있었는데 주위의 평범한 풍경 속에 있어 유달이 눈에 띄는 숲이었다. (…) 신목이라고 생각되는 숲 중심에 솟아있는 커다란 팽나무 밑가지에 금줄이 쳐져있을 뿐이었다. 당은 보편적으로 마을의 뒷산과 가까운 산, 작은 산이나 조금 높은 곳에 입지하는데, 내가 처음으로 본 당인 제주도 호근동의 당과 이곳처럼 밭 가운데 있는 경우는 비교적 적다. 이런 당을 들당이라고 한다. 당이 상당과 하당으로 나누어져 있는 경우 신사의 야마미야와 사토미야과 같이 상당은 산이다 다른 높은 곳에 있고 하당은 마을이나 그 주변에 있는데, 대천리에서는 이 들당이 상당이고 마을안에 하당이 있다. p 048



비금도에서는 섬 남서부에 있는 내촌리의 당을 보러갔다. 마을 뒷산 중턱에 제를 지낼 때 제물 등을 준비하는 낡은 오두막이 있고, 그곳에서 40~50m 정도 더 올라간 곳에 돌담으로 둘러싸인 한 구역이 있었다. 그 안에 높이 1m정도의 돌로 만들어진 신기한 신상이 평평한 자연석 위에 모셔지고 있었다. 이목구비와 가슴 앞에 모은 두 손만을 매우 단순한 저부조로 새긴 반신상으로 어딘가 오리엔트나 이집트의 신상을 떠올리게 했다. 『다도해의 당제』에 의하면 먼 옜날 한 학자가 딸인 소녀를 데리고 이 마을에 유배되었다. 아버지는 어느 날 바다에 고기를 잡으러 가서 익사하고 딸은 아버지의 죽음을 모른 채 산 정상에서 아버지를 기다리는 나날을 보내는 사이 죽게 된다. 머지않아 마을 사람의 꿈에 신이 나타나 딸의 영혼을 모시라고 고했기에 모시게 된 것이 이 상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는 소녀상인 것이다. p 051



내가 이 섬을 방문하고자 한 이유는 외나로도의 신금리에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상록수 숲이 있어, 그 속에 마신馬神을 모시는 당이 있다는 것을 『남해안』이라는 한반도 남해안 가이드북을 보고 알았기 때문이다. 그 후에 최덕원씨의 「나로도의 당제」라는 글도 접하게 되었다. 최씨에 의하면 1986년 조사 시점에서 나로도 30개 마을 중 16개 마을에서 당제를 행하고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재작년 내가 돌아본 몇 개의 당 중에 2곳은 폐당 혹은 제를 지내지 않아 현재 당으로써 남아있는 마을은 드물 것이다. p 055



남해와 서해 섬들의 당을 돌아보고 깊이 느낀 점은 제주도 당의 분포가 높다는 점, 대부분이 당사를 두지 않는 작은 숲으로 되어 있다는 점, 여성이 제사를 주관한다는 점으로 다른 섬들의 당과 비교해서 상당히 이색적이라는 것이다. 물론 이질적이라는 것은 아니다. 제주도의 당과 남해, 서해 섬들의 당, 특히 신안지역 섬들의 당 사이에는 상충하는 부분이 있다. 하지만 차이점도 두드러진다. 높은 분포를 보인다는 점에 대해 말한다면, 옛날에는 다른 섬들 즉 어느 섬의 어느 마을에서도 한 곳 이상의 당이 있었다고 생각되며 실제로 그 흔적이 남아있다. 하지만 왜 섬에서 당이 이정도로 소멸되었고, 제주도에만 아직도 많이 남아있으며 게다가 그 신앙이 계승되고 있는 것일까. p 059



 


▶ 제주도 당과 제


일본에서는 ‘민간신앙과 그들의 국가 종교가 대부분 직결’되어 있는 반면, 한국에서는 ‘민간신앙이라고 하면 바로 반사적으로 미신과 타파라는 말이 튀어나온다’며 장주근씨는 약간 노기 서린 어투로 말한다(『한국의 향토신앙』). 실제로 일본의 오랜 역사 속에서 신사가 국가로부터 박해를 받은 사례는 거의 발견되지 않고 우타키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사쓰마번의 류큐정벌 이후, 번의 직할령이 된 아마미의 섬에서 우타키와 같은 신산과 그 신앙이 탄압을 받아 관리의 손에 의해 산신의 나무가 베어지는 일도 있었고, 메이지정부가 한때 우타키를 신사화 하려고 도모한 적도 있었으나 모두 극히 일시적이고 한정된 지역에서 발생한 사건에 불가하다. 이것도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제주도의 당 입지가 이러한 박해의 역사과 관계가 없다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실제로 신사나 우타키와 같이 마을 안쪽 눈에 띄는 장소에 입지하는 경우는 드믈고 대부분은 외딴 곳에 숨어 있듯이 존재한다. p 066



제의 주체가 여성이라는 점에서 제주도의 당과 오키나와 우타키는 비슷하지만, 우타키의 경우 사제자인 노로, 쓰카사도 여성에 한정되어 있다는 데 반해 제주도 당제의 사제자는 남녀 누구나 될 수 있다. 과거에는 오히려 박수 중심이었는지 17세기 초반에 병자호란 때 제주도에 오게 되었던 김상헌의 『남사록』이라는 저서에는 ‘이 지방 풍속에는 예로부터 여자 무당이 없고 귀신을 모시고 기도하는 일은 다 남자 무당이 한다’고 기록되어 있다. p 072


▶ 오키나와의 우타키


여성 사제자는 오키나와, 아마미 외에 일본 곳곳 변두리에 아직 그 존재를 겨우 유지하고 있다. 이를테면 도카라열도의 네시, 쓰시마의 묘부, 이즈칠도의 하치조섬과 아오가섬의 미코, 무녀들이다. 모두 낙도 이야기이며 본토에서는 거의 모습을 감추었다고 여겨진다. 다만 고대로 거슬러 올라갈수록 신사 제사에 여성의 영향이 커진다는 사실도 분명하다. 이세신궁의 제사에 미혼의 여성 황족을 사제로 봉사시키는 사이구제도, 가모신사의 같은 제도 사이인은 그러한 점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이 두가지 제도는 당시 다른 신사에서도 제사가 여성 중심이었다는 사실을 추측하게 한다. p 103



이러한 우타키를 대표하는 게 세이화우타키이다. 이곳은 류큐왕조의 최고 신녀, 왕비, 왕의 자매, 왕녀 등이 임명된 기코에오키기의 즉위식과 오아라우리를 행했던 곳으로 이세신궁과 견줄만한 성지이다. 지금은 가이드북에도 실려있고 주차장도 있어 관광 명소의 하나가 되었지만 과거에는 통제가 심했다. 특히 남자 엄금으로 남자가 어쩔수 없이 들어가게 되었을 때는 여장해서 들어갔을 정도의 장소이다. p 109



오키나와에서 현재까지 제사의 중심이 여성이라는 사실은 류큐왕조가 있던 시기에 기코에오키미를 정점으로 하는 확고한 신녀 조직을 구축한 점이 그 커다란 요인이라고 생각한다. 여성의 영적 우위를 인정하고 자매를 형제의 수호신으로 하는, 이른바 오나리신 신앙이 아마미, 오키나와 지방에 넓게 나타나는 것은 야나기나 구니오가 「누이의 힘」에서 다룬 이후 잘 알려지게 되었다. ‘오나리’란 형제가 자매 즉 여자형제를 이르는 말로 자매가 남자형제를 이를 때는 ‘에케리’라고 한다. p 111



(…) 세 명의 신녀가 있어 류큐왕조의 판도를 세 개로 나누고 각각 구역을 관리, 통괄했다. 그들 하에 있는 것은 하나의 마을 혹은 몇 개의 마을마다 한 명씩 둔 ‘누루’(노로라고도 함)이다. 누루는 임명제이긴 했으나 왕부에서 파견되는 일은 거의 없고 지역 구가 여성이 선택되었다. 부계를 따르는 세습으로 백모, 숙모에서 조카딸에게 이어지는 계승이 전형적이다. 현재도 누루, 쓰카사 제도는 오키나와 전역에 남아있기는 하지만 소멸 직전에 놓여있다. 이제는 경제적으로 공적인 지원을 받을 수 없고 제사 수는 많아 여러가지 제약을 받는 누루, 쓰카사를 자진해서 떠맡으려는 여성은 극히 드물다. p 112



 

▶ 제주도와 류큐


제주도와 일본의 관계는 고대부터 서로 이주와 혼혈이 반복되어 왔다는 것은 틀림없다. 특히 거리적으로 가까운 고토열도, 쓰시마에서는 그러한 일이 일상적이었다고 여겨지며, 한반도 남해와 서해의 섬들과 현해탄의 섬들은 한 때는 동일 문화권에 속해있었을 가능성도 있다. 제주도와 쓰시마에 대해 살펴보면 제주도에서 자리돔, 갈치 등 연안어업과 해조류 채취에 지금도 사용되는 떼배는 쓰시마에 현존하는 떼배와 매우 유사하다고 한다. 그리고 작은 말은 일본에는 쓰시마, 도카라 열도, 요나구니 섬에 있는데 한국에는 제주도에만 있고, 쓰시마의 말은 제주도에서 건너온 것으로 알려져 있다. p 129



『제주도 무속연구』의 저자 현용준씨에 의하면 제주도에서는 제를 지낼 때 심방이 ‘대로 만든 채롱 위에 북을 세로로 세워 올려 고정시키고, 북채를 양 손에 들어 오른쪽 고면 만을 치는 것이다’라고 하는데 현씨가 쓰시마섬, 이키섬 조사 때 신사의 제의에어 신관이 이것과 똑같은 방식으로 북을 치는 것을 몇 군데 견학한 일이 있다고 한다. p 129



부언하자면 다니가와씨가 이 책에서 한반도에서는 정월 보름에 줄다리기를 하는데 제주도만은 구마모토, 가고시마에서 남도에 걸친 지역과 마찬가지로 음력 팔월 보름날 밤에 한다는 사실을 지적한다. 이러한 사실은 제주도가 이 지역과 마찬가지로 쿠로시오 문화권에 있다는 사실을 나타내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제주도 역사학자 김태능씨는 제주 여성아 한반도 본토보다 오히려 일본에 가까운 습속으로 ‘바느질 방법, 아이를 업는 방법, 물건을 등에 지고 머리 위에 올리지 않는다’는 점을 들며 예로부터 떠돌아다니는 성향이 강해 타지에 진출하는 규슈 시마바라반도와 아마쿠사섬의 여성들이 제주도에 건너간 것은 아닐까 추측한다. p 131



김철준 교수는 ‘제주의 삼성설화는 이 지석묘 영조자들의 설화였다고 생각된다’고 까지 말한다. 삼인의 일본 여성이 안에서 나타났던 나무상자의 표착지는 제주도 동남쪽 온평리로 알려져있다. 이곳은 규슈 서부지역에 가장 가까운 장소로 한때는 열운리라고 불렸다. ‘열운리의 여는 일본의 별칭인 이에 혹은 요와 비슷한 음이며, 이에인 즉 일본인들이 상고시대부터 이주해 온 장소라고 생각된다’고 김태능씨는 말한다. p 133



이러한 습속 외에 섬이라는 지리적 조건, 독립국이었는데 결국 본토에 귀속되어 지속적으로 차별을 받았다는 점, 최근에는 본토 사람들에 의해 제주도는 43사건, 오키나와는 오키나와 전투라는 비극에 휘말린 역사가 있다는 점에서도 제주도와 오키나와는 매우 닮아있다. p 140




▶ 신사와 한반도


제주도의 풍습도 포함해 당이 우타키와 관계가 있다면 우타키는 신사의 ‘원시형식’이기 때문에 당은 신사와도 관계가 있을 것이다. 아니, 야요이 시대부터 고대까지 한반도 남부와 일본 본토, 특히 기타 큐슈와는 동일 문화권을 형성했다고 할 수 있을 정도로 당과 신사의 관계는 멀리 떨어진 오키나와 우타키의 경우보다 훨씬 밀접했던 것은 아닌가라는 생각조차 든다. p 153



신사의 역사가 어디까지 거슬러 올라갈 수 있을지 알 수 없지만 신사의 신역에서 야요이 토기가 출토된 사례가 많다는 사실에서 야요이시대까지 올라갈 가능성이 충분히 있다. 그렇다면 야요이 문화는 한반도에서 건너온 사람들이 전한 문화이기에 그늘이 신사의 성립에 관련이 없었을 것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다. 그들은 벼와 철이라는 이른바 선진문명의 전수자이기도 했고, 신을 모시는 방법만 토착민들(조몬인)에게 배웠다는 일은 있을 수 없다. p 154



『하리마국풍토기』 이보군이세노조에 ‘기누누히노이테, 아야히토노도라라의 조상’이라는 백제에서의 도래인이 ‘여기에 살려고 신사를 산기슭에 세워 신을 받들어 모셨다’라는 구절이 있으며, 또한 『고고슈이』에도 오진텐노 부분에 ‘진, 한, 백제에 종속하는 백성이 각각 많다. 감탄할 만 하다. 모두 그들의 신사가 있지만 아직 제물을 바치지 않는다’라고 되어 있어, 도래인이 신사를 세운 사실을 전하고 있다. p 155



무라야마 마사오씨의 「조선관계신사고」는 「신명장」에서 도래계라고 추정되는 신사를 표로 정리해 싣고 있고, 그 수는 140여 곳에 이른다고 한다. 게다가 히라노신사, 마쓰오타이샤 등 이미 도래계로 확실히 알려진 신사는 제외한 것이니 실제수는 「신명장」 2,861사의 10퍼센트 가까이 될 것이다. 그리고 이들은 신사 명과 제신, 기록, 항간에 전하는 유래를 통해 사실로 판명된 것들이다. 하지만 중고시대 이후 신사 측에서 한반도와의 관계를 꺼리는 경향이 강해져 이들 중에도 신사 명의 표기나 발음을 바꾸고, 제신도 원래 제신을 폐하고 『니혼쇼기』와 『고지키』의 신으로 하는 사례가 눈에 띈다. 따라서 이들 이외에도 도래계였던 사실을 지금은 알 수 없는 신사도 많다고 할 수 있다. p 155



신사에 대해 말하자면, ‘교토에서 가장 도래된 절인데, 전부라고 하면 과장이 될지도 모르지만 많은 부분에서 한반도 도래인의 신앙이 밀착되어 있다’라고 어느 좌담회에서 우에다 마사아키씨는 말했다. 실제로 가모신사, 히라노신사, 마쓰오타이샤, 후시미이나리타이샤, 야사카신사 등 교토의 유명한 신사의 대부분의 창사에 도래계 사람들이 어떤 형태로든 연관되어 있다. p 161



…이나리라고 칭하게 된 유래는 하타노나카쓰헤노이미지키 등이 먼 조상의 하타씨족 이로구는 벼농사로 유명했다. 그런데 떡을 갖고 과녁으로 하여 활을 쏘았는데 떡이 백조로 변하여 날아가 이 산에 내려와 벼가 되었으므로 이를 신사 명으로 했다. 『야마시로국 풍토기』 中 인용


후시미이나리가 있는 주변은 하타우지 세력의 중심이었던 곳으로, 신사가 진좌한 이나리산과 그 주변에는 몇 개의 고분이 있다. 이 고분의 일부는 하타우지의 고분이고, 이나리 신사는 그 고분에 묻힌 하타우지의 선조를 모시기 위해 만들어서 후에 농업신이 되어 널리 신앙의 대상이 되었다고 고증하고 있다. 하타우지의 창사에 관련이 있는 교토의 신사로는 이외에도 마쓰오타이샤와 하타노사케키미를 모시는 우즈마사의 시키나이샤 오사케신사가 있다. p 162



야사카 신사의 기원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논해지고 있는데, 여기서 하나하나 소개할 여유는 없기 때문에 신사에서 나오는 『야사카신사 유서 약기』의 한 구절만을 인용하기로 한다.


…야사카 신사의 창립에 대해서는 여러 설이 있으나 사이메텐도 2년 고구려에서 일본으로 온 부사인 이리시오미가 신라국 우두산의 스사노오미코토를 야사카 지방에 모셔, 야사카즈쿠리 성을 받은 것에서 시작했다는 설은 니혼쇼키에 스사노오미코토가 아들 이소타케루노카미와 함께 신라에 내려가 소시모리에 있었다는 이야기, 그리고 신찬성씨록에 야사카즈쿠리는 고구려인 시루쓰마노오리사의 자손이라는 기록과 추정을 합하면 거의 이치에 맞는 창립이라고 볼 수 있다. p 164



이세신궁도 한반도과 관련이 있다고 생각한다. 오랜 세월동안 그런 사실은 사라지거나 감춰져 이젠 거의 눈에 띄지 않지만 향후 연구를 통해 점차 밝혀질 것이다. 김달수 씨의 『일본 속의 조선문화』 4에는 신궁 근처 이세시 구스베의 가라카미산을 찾으러 가는 도중 신궁사청에 오랫동안 근무하다가 퇴직 후에 지방사 연구에 볼두하고 있는 사람의 집을 방문하니 그 사람이 “조사를 하면 할 수록 지금 당신이 하고 있는 그대로였어요”라고 했다. “모조리 조선 분위기가 풍긴다는 겁니다. 하지만 그 말을 하면 신궁사청이 곤란해진다는 거죠”라고 대답하는 흥미로운 장면이 나온다. 덧붙여 이스즈강을 따라가는 가라카미산은 신궁의 네기(신관)의 묘지였던 곳으로 커다란 고분이 있었지만, 다이쇼 초기 이스즈강 개수 공사로 파괴되었다고 한다. 지금도 산에는 가라신사의 작은 사당이, 그리고 가까운 숲에는 구니쓰미오야신사, 오쓰치미오야신사라는 두 개의 신사가 있다. 신궁 네기의 무덤이 있던 산이 왜 가라카미산으로 불리는지, 왜 근처에 선조를 의미하는 미오야라는 이름이 붙은 신사가 있는것인지 의문만 깊어간다. p 167



이세신궁의 신궁이라는 명칭 자체가 신라에서 먼저 쓰였다는 설이 몇몇 사람들에 의해 나왔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소지마립간 9년 봄 2월조에 ‘신궁을 나을에 설치하였다. 나을은 시조가 처음 태어난 곳이다’라고 되어있는데, 이를 신궁의 첫 기록이라 한다. 그 전까지 역대 왕은 제 2대 남해왕 때 창건한 시조묘에서 제사를 지냈지만, 이후 시조묘라는 이름이 사라지고, 왕이 제를 지내는 것은 신궁이 됨에 따라 시조묘를 신궁으로 개명했거나 개편했다고 생각할 수 있다. 그리고 『삼국사기』 잡기 제1, 제사조에 남해왕이 시조 혁거세의 사당을 세웠다는 것을 기록한 후에 ‘사계절에 맞추어 제사를 지냈는데 친 누이동생 아로로 하여금 제사를 맡게 하였다’라고 하니, 이세의 제궁제를 떠올리게 하여 흥미를 불러일으켰다. p 167



마에카와 아키히사씨는 「이세신궁과 신라의 제사제」라는 논문에서 ‘이세신궁이 신사에서 신궁의 칭호가 붙게 된 전화의 계기는… 신라의 제사성의 영향에 의한것은 아닐까 생각된다’고 설명하며, 이세신궁은 제사제도까지도 신라에서 배웠다고 한다. (…) 덴무도 이후 거의 정기적으로 복정되고 있다는 점에서 적어도 제도로서 확립된 것은 덴무텐노시기로 보인다. 덴무텐도는 그 출신이 신라의 왕족이라는 설이 나올 정도로 신라에 가까운 텐노였다. 진신의 난이 덴지텐노의 친동생과 제1황자의 황위계승을 둘러싼 난이라는 종래의 설을 부정하고, 신라의 세력을 배후에 둔 오아마황자와 백제의 세력을 등에 업은 오토모황자의 싸움이라는 오와 이와오씨의 설은 매우 설득력이 있다. 이 설이 맞다면 진신의 난 이후 덴무조에서 신라의 문물이 많은 분야로 들어왔다고 충분히 생각할 수 있고 이세신궁도 예외는 아니다. 게다가 이세, 시마 지방에는 그 이전부터 많은 신라계 도래인이 거주하고 있었던 것 같다. p 168



이런 신라의 신의 숲은 당의 숲으로, 그리고 진수의 숲, 그러고 나서 우타키의 숲으로 이어졌음에 틀림없다. 신사와 한반도의 관계를 구체적인 사례에 입각해 추적해왔지만 끝이 없기 때문에 이정도로 해 두겠다. 그렇다고 해서 나라, 교토의 신사가 특히 한반도와 깊은 관련이 있다고 하는 것은 아니다. 예컨데 무라야마 마사오씨의 「조선관계신사고」에서 조선과 관련 있는 시키나이샤가 가장 많은 곳은 이즈모로 11곳, 다음은 오미 10곳, 야마토와 이세, 에치젠은 8곳으로 3위, 야마시로와 가와치, 무사시가 6곳으로 4위였다. 이주모는 지리적으로 한반도 특히 신라와 가까워 신라와의 관계에는 예사롭지 않은 무언가가 있다. p 169



약간 농담濃淡의 차이는 있으나 일본 대부분 지역에서 고대 도래인의 흔적과 그들과 연관 있는 신사를 찾아낼 수 있다. 그러므로 신사의 성립을 고찰할 때 한반도를 무시하는 일은 결코 있을 수 없다. p 171



신라의 신수신앙에 대해서는 앞에서 언급했지만, 좀 더 보충해보자.


신라의 시조 혁거세는 숲 속 우물 옆에 놓인 커다란 알에서 태어났고, 제13대 미추왕이 속한 김씨의 시조 알지는 계림에 하늘에서 내려온 금궤 속에서 나왔으며, 또한 수도 경주는 원래 계림이라고 불렸으니 이 나라는 수림樹林과 매우 밀접한 관계가 있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실성왕 시대에 경주 부근 낭산에 구름이 일어났는데, 향기가 가득 퍼져 오랫동안 없어지지 않으니 왕은 신선이 하늘에서 내려왔다고 믿어 낭산을 성지로 하여 나무를 베는 일을 금했다고 한다. p 180



당과 신사 사이의 차이점이라고 한다면 그것은 그 둘이 거쳐 온 역사이다. 신사 신앙도 우타키 신앙도 모두 시종일관 국가의 신앙으로 국가의 두터운 비호를 받으며 박해를 받은 사례는 없었다. 그에 반에 당은 유교를 국교로 하는 조선시대 500년 동안 음사로 배제되고, 때로는 박해의 대상이 되었다. 제주도 당의 박해 사례는 제1장에서 언급했지만, 그것은 제주도만의 일이 아닌 한반도 전체의 일이었다. p 181



일본에서 나오는 한국 가이드북에서 당을 접할 수 있는 책은 눈에 띄지 않는 것에 반해, 일본의 이세신궁이나 이즈모타이샤, 이쓰쿠시마신사 등에 대한 기술이 없는 한국 가이드북은 적다. 당의 자취는 희미하고, 그 존재는 없는 것과 같아보인다. 그렇기에 신사는 일본 고유의 것이라는 의식이 나타나게 된다. 한국인 스스로 손수 다룬 당과 당제에 대한 연구는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마침내 본격화되고 있고, 향후 연구가 진행되면 당과 신사가 숨겨진 형제 혹은 자매라는 점이 서서히 밝혀지게 될 것이다. p 183



 

그리고.....책 내용과는 조금, 아니 매우 관계없는 TMI



그러고보니, 이 책의 저자는 김달수 씨의 저서를 많이 인용하였는데, 그 김달수 씨의 저서가 우리집에도 있다. 그 책들은 여차저차해서 겨우 구하긴 했는데, 아직 읽지는 않았던 터라, 이 정도의 책을 쓴 저자가 인용할 정도면 그 내용도 정말 깊이가 있겠구나 싶다. 늦장 그만부리고 김달수 씨 책도 얼른 읽어봐야지(김달수 씨는 한일고대사에서 ‘도래인’이라는 단어를 처음으로 만들어 사용한 재일동포).



그러고보니22


이 책의 출판사가 제이앤씨다. 문득 내 책장에 일본사, 한일고대사에 관한 역사책들이 꽂혀있는 책장을 봤는데 놀랍게도 제이앤씨에서 출판된 책들이 여러권 있었다. 뭐지 이 출판사..? 눈여겨 봐야겠어!



그러고보니333


위에서도 말했지만 이 책은 번역이 꽤나 잘 되어 있다. TMI이긴 한데, 내가 읽어본 일본인이 쓴 책의 번역본 중 반 이상은 정말 가독성이 매우 떨어진다. 물론 나 역시도 제약논문 번역을 하면서, 번역이 어렵다는 것은 몸소 깨달았지만 그럼에도 뭐랄까. 책을 번역하는 사람들은 돈받고 하는 일일텐데, 그정도로밖에 못하나? 싶은 마음이 아주 수백번 드는건 어쩔 수 없달까. 헌데 이 책은 그저 그런 교양서도 아니고 학술총서인데, 이 정도의 매끄러운 번역이라니! 이런 번역본들만 있었으면, 내가 굳이 원서를 읽을 일들이 없었을 건데^_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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