땅의 역사 6 - 흔적 : 보잘것없되 있어야 할 땅의 역사 6
박종인 지음 / 상상출판 / 202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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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디어ㅓㅓㅓㅓㅓㅓㅓㅓㅓㅓㅓㅓㅓㅓㅓㅓㅓㅓㅓㅓㅓㅓㅓ !!!!!!!!!!!!!!!


박종인 기자님의 『땅의 역사』 6권이 나왔다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


정말로 얼마나 기다린 『땅의 역사』 시리즈인가?!!! 정말 진짜 이대로 완전 장기연재 가주세요, 기자님...흐어어허엏엏






자타공인 역사더쿠인 내가 다음 권을 기다리는 역사책인 박종인 기자님의 『땅의 역사』. 물론 기자님이 매주 올리시는 신문기사를 봐도 되고, 기자이 진행하는 땅의 역사 유튜브를 봐도 되지만... 내 습성과 환경상(?) 그게 잘 안된다. 역시 (회사에서ㅋㅋㅋ)책으로 봐야 제맛인듯!!



흠흠.




우리가 사는 이 땅에는 오랜 역사의 흔적이 켜켜이 쌓여있다. 우리는 그 역사를 학교에서 배우고, 매체를 통해서 배운다. 헌데 잘 생각해보면, 우리가 배웠던 역사는 생각보다 단조로웠다. 언제나 우리에게 자랑스러운 역사라던가, 뭔가 치욕스럽고 오점이 될 역사 같은데 이상하게 정신승리해서 결국 좋은 식으로 이야기한 역사였다. 뚜렷한 ‘공/과’가 있는 역사적인 인물에 대해서는 주로 ‘공’에 대해서만 배웠다. 



아주 유명한 역사적 인물의 뚜렷한 ‘과’를 이야기 하거나, 우리에게 치욕스런 역사에 대해 돌직구로 말하려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우리나라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 매국노로 취급받는다. 물론 요즘은 과거에 비하면 이런 분위기가 많이 사라지긴 했지만, 여전히 그런 분위기가 남아있다. 이처럼 매번 좋은 말만 이야기하는데, 이보다 단조로운 역사교육이 또 있을까 싶다. 이러니 매번 나라가 위기를 맞이해도 돌파구를 찾지 못하고, 그걸 계속 반복하는게 아닌가.



이런식으로 영광스런 역사, 정신승리하는 역사만 배웠을 때 사회적으로 어떤 부작용이 일어났는지는, 우리 역사만 돌아봐도 알 수 있다. 우리가 제일 많이 알고, 제일 많이 배우는 6백년의 기간. 그러니까 조선까지의 역사적 사건만 역으로 나열해보자.




▶광복 이후 군부독재 시절 → 일제강점기 → 조선 후기 서구열강의 침입 → 조선 병자호란 → 조선 임진왜란 등등.




위 역사들은 우리 역사에서 꽤나 굵직한 사건들이고, 우리도 학창시절 분명하게 배웠다. 하지만 정말 우리가 제대로 알고 있는게 맞을까? 적어도 내가 학교에서 배웠을 땐 저런 치욕스런 사건들이 일어난 대부분의 이유를 ‘외부’에서 찾았다. 이 땅을 침입한 놈들이 나쁜놈이고, 독재를 한 인간들은 시대상황에 따라 어쩔수 없었다는 식으로 말이다. 근데 정말 과연 그럴까? 모든 이유는 외부에만 있었던 걸까?



조선 전기 내 평화에만 찌들어 외세 침입에 대한 대비는 등한시 했던 조선 정부. 일본보다 더 빠른 시점에 조총이 국내에 들어왔음에도, 그걸 개발하기는 커녕 외려 녹여서 사찰의 동종을 제조한 조선 정부. 거기다 일본이 쳐들어올 것이라는 보고를 받았음에도 무시했던 조선 정부. 일본이 쳐들어오자 누구보다 먼저, 발 빠르게 도망간 조선의 왕!! 그것도 목적지는 조선 땅이 아닌, 조선을 벗어난 명나라. 모르긴 몰라도, 명나라에서 입국거부만 하지 않았어도, 조선은 임진왜란 중에 명나라의 속국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뭐 이건 시작일 뿐이고, 임진왜란/정유재란 기간 내내 조선 정부의 문제는 너무 많아서 각설.



그렇게 일본과의 전쟁이 끝나고 30년도 채 안되서 일어난 정묘호란/병자호란은 또 어떤가. 임진왜란의 문제를 외부에서만 찾는게 아닌, ‘내부’에서 찾은 서애 류성룡이 《징비록》. 하지만 조선의 위정자들은 징비록을 외면했다. 그 결과, 조선 정부는 임진왜란 발발 전보다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 않은 아주 문제적 상황에 있었고, 결국 정묘/병자호란이 터졌다. 더 슬픈 건 그 이후에도 변하지않았고 계속해서 치욕스런 역사는 반복되었다. 그 어떤 반성 하나 없이, 지금까지 말이다. 



치욕스런 역사에 대한 반성이 없었기에, 우리 근대사를 비롯해 현대사도 문제가 많았고, 지금도 문제가 많다. 말그대로 현재진행형! 이게 얼마나 심각하냐면, 고종이 독립운동을 했다는 전제하에 수많은 미디어 매체가 나왔고(덕혜옹주도 그렇고), 정부기관에서도 이에 동조했다. 관련 관광산업까지 꾸려가면서 말이다. 정말 어처구니가 없을 뿐.



그나마 다행인건! 그 누군가가 나서서 치욕스런 역사를 아무리 미화하고 정신승리를 한다고 해도, 절대 바꿀 수 없는 역사적 진실을 그대로 보여주는 흔적들이 아직 이 땅에 남아있다는 사실이다.  물론 그 흔적들은 시간이 흐름에 따라 사라져가고, 사람들 기억속에서도 잊혀지고 있지만.



새삼 정말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 박종인 기자님처럼 역사의 진실이 담겨있는 흔적을 찾아다니는 사람이 았다는게T_T.



조선의 국립대학총장과 서울시장 평균 재임 기간은 3개월?!


오늘 날로 치면 국립대학총장에 준하는 성균관대사성과 서울시장에 준하는 한성판윤. 매우 중요한 직책이자, 권력이 있던 자리이며, 유능한 사람들은 한 번씩 거쳐갔던 직책이다. 헌데 정말 놀랍게도 조선 오백년간 그들의 평균 재임기간은 고작 3개월이었다. 3개월이면 요즘 말로 수습기간아닌가? 과연 일은 제대로 할 수나 있었을까? 조선 오백년간 성균관은 어떻게 운영되었고, 수도였던 한성(서울)은 어떻게 굴러갔을까?



조선을 함께 설계한 정도전은 그 설계도인 ‘조선경국전에’ 이렇게 적어놓았다.

‘학교는 교화의 근본이다. 여기에서 인륜을 밝히고 여기에서 인재를 양성한다.’

땅의역사 6권 p 076



1) 오늘날의 국립대학총장, 성균관대사성


유학의 나라 조선. 조선이 건국되면서 유학을 가르치는 성균관도 당연히 존재했다. 정확히 말하자면 성균관은 유학이 들어온 고려말부터 존재했다. 역사가 깊은 교육기관인 것이다. 성균관은 공자를 포함한 역대 중국 성인을 배향한 대성전과 학생들을 가르치는 명륜당으로 구성되어있으며. 가르치는 과목은 당연히 유학, 즉 성리학! 지금도 성균관 명륜당 건물이 서울 한복판에 남아있고, 성균관 이름을 딴 대학교가 있을정도로 ‘성균관’ 이라는 이름은 조선을 대표하는 ‘국립교육기관’ 이었다.




대학 운영 전반에 걸친 최고 책임자가 대학총장이듯이, 성균관의 최고 책임자는 성균관 대사성이다. 조선이라는 나라를 지탱하는 유학자들을 양성하는 만큼, 조선 정부에서도 성균관을 향한 지원은 대단했다. 성균관 출신들이 정부 요직을 차지하는 것은 기본이기도 하고. 여튼 그렇게 중요한 성균관이고, 그런 성균관의 최고 책임자가 성균관대사성이니, 그 임무가 얼마나 막중했겠는가.



대사성은 성균관을 책임지는 기관장이요 지금으로 치면 국립대 총장이다. 품계는 정3품으로 여섯 판서보다 낮지만 성리학 교육 수장으로서 명예로운 직책이었다. 1392년 조선왕조가 건국된 이래 1910년 이 나라가 멸망할 때까지 518년 동안 이 명예와 책임을 입은 대사성은 몇이나 될까. ‘2,101명’이다, 이백 명이 아니다. 이천백한 명이다. 평균 재임기간은 ‘3개월’이다. 3년이 아니라 석 달이다. 세종 때 최고 27.9개월이었던 대사성 재임기간은 갈수록 줄어들어서 ‘학문을 사랑한 군주’ 정조 때는 1.2개월로 급감했다. 고종 때는 1.3개월이었다. p 075



태조부터 연산군까지 1,425개월 동안 모두 96명이 대사성으로 근무했다. 평균 재직 기간은 14.8개월, 즉 1년 3개월이었다. 충분히 명예와 무게를 견디고 책임을 수행할 만한 기간이었다. 그런데 연산군을 몰아내고 왕이 된 중종 때 대사성 평균 재임기간이 7.5개월로 급감한다. 중종 472개월 동안 대사성이 63명이나 바뀌었다는 뜻이다. 연산군까지 평균 14.8개월이던 대사성 재임 기간은 중종 이후 순종 때까지 2.5개월로 추락했다. 중종~순종 4,987개월 동안 대사성 숫자는 무려 2,005명 이었다. p 078



막중한 임무와 책임을 가진 성균관대사성의 평균 재임기간이 3개월이란다. 3년도 아닌 3개월. 요즘 회사 신입사원도 입사후 3개월? 신입 티도 못 벗고 업무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는 경우가 빈번하다. 그런데 성균관대사성 평균 재임기간이 3개월!!!!!





실록을 비롯한 기록에 따르면 적어도 망나니 연산군때까지만 해도 평균 재임기간이 1년이 넘었었다. 그런데 연산군을 몰아낸 중종 때부터 성균관 대사성 평균 재임기간이 폭락한다. 성균관대사성 자리는 아주 수시로 교체되었다. 조금 아이러니하다. 중종반정을 주도한 세력은 다름아닌 성리학을 맹신하는 사림세력이 아닌가. 성리학 교육을 대폭적으로 늘리고 지지해도 이상하지 않을판인데, 대체 왜 대사성 평균 재임기간이 뚝 떨어졌는가.



사림은 연산군 때 ‘도의’를 외치다 각종 사화로 절멸된 뒤 초야에 묻혀 있던 세력이다. 그 사림 눈에 정부가 주도하는 관학인 성균관은 가치가 없었다. 철학과 고담준론과 명분을 가르쳐야 할 성균관이 공무원 입시 학원과 같은 경서 암기 학교로 전락해있다는 것이다. 실제로 성종 때는 성균관에 등교하는 학생이 없고 과거시험장에만 나타난다는 보고가 있기도 했다. 무늬만 학교인 그 성균관이 연산군 때는 기생파티장으로 추락하더니 중종 때는 마침내 텅 빈 교정이 소를 잡아먹는 도살장으로 변해버렸다. 사림은 이를 세력을 확대할 명분으로 삼았다. “성균관이 도살장으로 변했다”는 보고는 국가가 망쳐놓은 성리학 교율을 자기들이 하겠다는 암시였다. p 080



사림이 만들었던 서원은 당쟁소굴이 됐다. 서원 철폐령이 수시로 떨어지더니 흥선대원군은 아예 400개가 넘는 서원을 40여 개로 정리해버렸다. 대사성 권이 또한 자유 낙하했다. 왕권이 강력하던 숙종 때는 567개월 동안 208명이 갈려나갔다. ‘학문을 숭상하고’ 자칭 ‘만천명월주인옹’이었던 정조 때는 최악이었다. 300개월 동안 대사성이 된 사람은 251명으로 평균 임기는 1.2개월에 불과했다. 심지어 정조 때는 하루에 대사성이 세 번 갈리기도 했다. p 081



알고보니 사림세력은 성균관을 버린 것이었다. 교육기관으로서는 더이상 가망이 없다고 생각한 것이다. 왜? 성균관은 이미 망가질대로 망가져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림세력이 선택한 것이 바로 ‘서원’.



사림은 지방 곳곳에 서원을 만들고, 일명 ‘사액’을 받아서 그 힘을 키웠다. 그 시작은 풍기군수 주세붕이 세웠던 백운동 서원을 ‘소수서원’으로 사액한 것. 그렇게 지방 곳곳의 서원들이 조선의 유학자 양성을 도맡게 되었다. 그럼 성균관은? 이름만 남은 허수아비일뿐. 



자, 그렇다면.. 지방 곳곳에 설립된 사액서원들은 제대로 굴러갔을까? 성리학교육을 제대로 했을까? 일단 그들이 교육한 성리학은, 엄밀히 따지만 ‘주자학’이었다. 주자학의 병폐야 뭐 말해 뭐해. 몸집이 커져버린 서원들은 수많은 폐단을 일으켰다. 그 결과가 훗날 일어나는 서원철폐! 무엇보다 이런 서원에서 교육받은 사림세력들, 조선후기 정권을 잡은 그들은 조선을 갉아먹고 또 갉아먹었다.



고종시대 533개월에는 한 달 아흐레에 한 번씩 자그마치 398명이 대사성 벼슬을 달고 나갔다. 세도정치 주역 가문인 안동 김씨 대사성, 풍양 조씨가 배출한 대사성은 각각 74.1%, 68.3%가 세도정치시대와 고종시대에 몰려 있다. 고총 외척 여흥 민씨는 모두 31명이다. 조선왕조 전체를 통들어 여흥 민씨 대사성 50명 가운데 절반 이상이 고종 때 사람들이었다. 거기에 소년 대사성 민영익 또한 이름을 올린 것이다. p 083



수시로 교체되는 성균관 대사성에는 무려 만 18세 소년도 있었다. 그의 이름은 민영익. 바로 민비의 조카다. 민영익은 경복궁 근정전에서 춘계시험 삼일제를 치루고, 왕과 왕비의 빽으로 중간 시험은 모두 생략(^^)하고, 바로 마지막 시험인 전시를 통과한 인물이다. 그렇게 등과한 만 18세 소년 민영익은 최연소 성균관 대사성이 되었다. 지금으로 치면 만 18세가 서울대학교 총장이 되었다는 뭐 그런 이야기.



“1395년 임명된 초대 서울시장(판한성부사)부터 

1907년 대한제국 마지막 서울시장(경성부윤)까지

512년 동안 서울 시장은 모두 2,012명이었다. 

각 시장 평균 재직 기간은 3개월이었다.” 

땅의 역사 6권 p 085




2) 오늘날의 서울 시장, 한성판윤



그렇다면 오늘날의 서울시장격인 조선시대 한성판윤은 어땠을까? 정말 놀랍게도 조선의 서울시장 평균 재임기간도 3개월이었다. 짜고치는 고스톱도 아니고 어쩜 이럴수가 있는지! 


‘조선시대 한성부 판윤으로서 유명한 인물은 주로 조선 전기에 많았다. 그러나 이들의 정치적, 학문적 업적은 많이 알려져 있으나 한성부 판윤으로서의 행정 실적은 별로 기록된 내용이 없는 것이 특징이다. (박경룡, 『한성부연구』 국학자료원, 2000)’



‘(조선 후기) 한성판윤은 사회가 혼란하고 정치가 안정되지 않았다는 사실을 증명하는 단적인 예다. (류시원, 『조선시대 서울시장은 어떤 일을 하였을까』 한국문원, 1997)’



한성판윤은 품계가 종2품으로 장관급 고위직이다. 한 나라 수도 행정을 책임지는 최고위 공직자다. 그런데 전기에는 행정실적 기록이 없고 후기에는 불안정한 사회와 정치의 상징이라고 한다. 왜 이런 평가가 나올까. p 085



자타공인 기록의 나라 조선이다. 임금부터 시작해서 수많은 인물들이 업적이 기록으로 증명된다. 그런데 어찌하여 수도 한성을 책임지는, 한성판윤의 업무 기록은 없는걸까? 놀랍게도 그 이유는 《경국대전》이 규정한 한성판윤의 업무에 있었다.


※『경국대전』이 규정한 한성판윤 업무※

1. 호적, 시장, 가옥, 전답, 임야, 도로, 교량, 하천, 세금 등에 관한 세무

2. 민간 빚 문제(부채), 폭력(투구), 살인사건 검시권을 가짐

3. 어전회의 출석 및 대중국 외교관



1번 항목은 행정가가 당연이 해야할 업무이다. 2번 업무는 지금이야 사법부가 분리되었으나, 조선에선 수령의 업무였다. 문제는 3번!!! 한성판윤은 수시로 개최되는 어전회의 참석자 중 하나였고, 빈번하게 들락날락하는 대중국 외교관이었다. 



막중하고 폭넓은 업무를 역대 한성판균은 제대로 수행했을까? 못했다. 왜? ‘서울 실정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이직을 거듭했으니까’. 게다가 한성부 공식 업무는 ‘판윤이 좌기(출근해 업무를 시작함)한 뒤라야’ 하급 관리들이 업무를 시작할 수 있었다. 한성판윤은 수시로 어전회의에 출석해 국정을 논하고 중국 사신이 오면 의전을 맡아 자리를 비웠다. 그러니 조선국 한성판윤은 시정 장악이 구조적으로 불가능한 직책이었다. 그나마 석달밖에 근무하지 않고 전근을 가곤 하는 시장. p 087



무엇보다 조선왕국 사대부들은 소위 ‘9경’ 경력을 가문의 영광으로 여겼다. 9경은 정2품 의정부 좌우참찬, 육조판서와 한성판윤이다. 하지만 경력 관리 차원에서 한성판윤을 받아들였을 뿐, 실질적인 서울 행정에는 관심이 없었다는 뜻이다. 이런 명목상 시장이 주는 행정 공백을 막기 위해 조선 정부는 장기 근무를 원칙으로 하는 ‘구임관’을 두었다. 한성판윤 자리가 수시로 바뀐다는 전제를 깔고 마련한 정규직이다. p 088



1864년 고종 등극 이듬해부터 1907년 고종 퇴위 직전까지 한성판윤은 모두 429명이었다. 43년 사이 한 해 열 명이 넘는 시장이 한성 행정을 책임졌다. 『고종실록』에 따르면 1890년에는 한 해 동안 모두 29명이 한성판윤 사무실에 짐을 풀고 짐을 쌌다. 그해 판윤 평균 재직 날수는 12.3일이었다. p 090



어전회의 참석과 대중국외교관. 이 두 가지만으로도 한성판윤은 본래 자신의 업무인 한성의 행정업무를 할 수가 없었던 거다. 한성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교량은 몇개인지, 인구는 몇이나 되는지 알아볼 시간조차 없었던 거다. 문제는 한성의 최고책임자가 매번 자리를 비우니, 한성의 하급 관리들도 당연히 행정업무를 할 수가 없었다. 한성의 하급 관리들은 ‘판윤이 출근해야’ 업무를 할 수 있었으니까. 



결국 한성판윤도 성균관대사성 처럼 허울뿐인 자리였다. 



헌종 때는 1848년 11월 30일 형조판서 이돈영이 1618대 한성판윤에 임명됐다. 그런데 그날 마침 이돈영이 지방에 출장 중이라는 보고가 올라왔다. 그러자 헌종은 즉시 한 해 전 판윤을 지냈던 김영순을 판윤으로 임명했다. 이돈영은 하루살이 판윤이 됐다. 1799년 9월 27일 1293대 판윤에 임명된 서유대는 다음 날 무관직인 금위대장으로 전보되고 판윤은 이의필로 교체됐다. 이유는 불명이다. 이렇게 하루 혹은 하룻밤 만에 시장직에서 내려앉은 사람이 한 두명이 아니다. 역대 판윤 2,012명 가운데 153명이 열흘 만에 자리에서 나갔다. 


세도정치시대엔 헌종과 철종 때 한성판율을 지낸 이가우 별명은 ‘판윤대감’이었다. 이가우는 10년 동안 모두 열 번 판율을 지냈다. 그런데 그가 판윤직을 수행한 기간은 총 1년 3개월에 불과했다. p 088



한성을 제외한 지방관을 보면 문제는 더 심각해진다. 지방관은 『경국대전』과 『대전통편』에 임기가 정해져있다. 관찰사는 360일, 중급 수령은 900일, 하급수령은 1,800일이다. 하지만 이 임기를 제대로 채운 수령은 단 한명도 없었다. 1746년 제정된 『속대전』의 변방 수령은 1년으로 임기가 짧았다. 1506~1894년 부산 동래 각급 수령 인사를 기록한 「동래관안」에 따르면 388년 동안 임기를 만료하고 교체된 수령은 전체 280명 가운데 25명 밖에 없었다. 게다가 이 「동래관안」에는 교체 이유도 명백하게 기록돼 있지 않은 인사도 7%나 됐다. p 089



수도 한성이 그러할진데 다른 지방들은 어땠을까? 조선이 망하지 않고 오백년을 굴러간게 놀라울 정도다. 진작에 망해도 이상하지 않았으나, 백성들의 힘으로나마 허울뿐인 조선이 유지될 수 있었던거다.



그렇게 허울뿐인 책임자 자리를 수많은 사람들이 오고갔다. 일도 하지 않는 사람들이니, 그저 자리만 오고갔으면 좋으련만, 때마다 의전행사가 진행되었다. 옛 사람 보내고, 새 사람 반기고. 그때마다 세금이 낭비되고, 노동력이 동원되었다. 위민하는 책임자는 일절 보이지 않았다. 이게 조선 5백년의 속살이다.



정체는 숨겼지만, 이건 역사적 의미가 있는 사료다?


우리나라 곳곳을 다니다보면 역사적인 흔적을 알리는 표석이 정말 많이 알려져있다. 근데 그 표석들을 잘 보면, 이상하게 자랑스러운 역사만 새겨져 있거나, 알고보니 만들어진 역사가 새겨져 있는 곳도 많았다. 예컨데 북촌한옥마을. 현재 우리가 아는 북촌 한옥마을은 고관대작이 살기는 개뿔, 조선시대만해도 바위산이었던 곳이다. 구한말기에 독립운동가 정세권님이 일제에 삶의 터전을 빼앗긴 조선인들을 보호하기 위해 만든 곳이다. 그걸 조선의 고관대작이 살았던 곳이라고 서울시는 몇년째 홍보하고 있다.



또 다른 사례22 로는 역시나 서울 인사동에 있는 경인미술관. 지금은 겁나 감성돋는 카페로 유명하지만, 실상은 민씨 척족이자 거부 친일파 민영휘의 저택이었다. 하지만 이러한 내용은 내가 갔을 때만해도, 그 어디에도 없었다. 아마도 지금도 없을듯? 참고로 그 자손들은 나미나라공화국(일명 남이섬^^)으로 많은 돈을 쓸어 모으는 중. 



또 다른 사례 333 으로는 일제강점기 우리나라 곳곳에 세워졌던 신사의 흔적들이 있다. 내 특성상(?) 어두운 역사가 남아있는 장소를 자주 찾아다니는데, 그중 한 곳이 바로 일제 신사(사찰) 터다. 대부분 눈에 띄는 흔적은 사라졌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참배의 흔적인 계단이나 석물들이 남아있는 경우가 꽤 있었다. 하지만 그것들이 언제부터, 왜, 이곳에 있었는지에 대한 설명은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었다. 아! 단 한곳, 광주광역시의 광주공원빼고. 광주시는 광주공원은 일제 신사의 흔적에 대해 정확하게 안내하고, 일제의 잔재라는 것 또한 안내하고 있었다. 반대로 포항이나 목포, 경주는 그런 안내는 커녕 오히려 관광지 홍보용으로, 한마디로 치욕적인 역사는 없애고 홍보하고 있었다. 아예 일언반구 없던 지자체도 있었고. 뭐 지금은 달라졌을지 모르겠지만?



여튼 뭐 이런 식이다. 어두운 역사는 뒤로 숨기고, 빛나는 역사만 조명하거나 혹은 빛나는 것처럼 역사를 만들어서 광고하거나. 이 책에서 소개하는 정독도서관 부지 내에 있는 ‘역사적 사료’라고 하는, 커다란 돌덩이도 그렇다.


서울 화동 2번지 정독도서관 본관 건물 뒤편, 정독독서실 건물 앞 철책 속에 커다란 돌덩이가 있다. 돌에는 한자 24글자가 새겨져 있다. 뜻은 이러하다.


‘둥근 우물돌이다. 아마 고려 때 것 같은데 샘은 매립돼 흔적이 없고 돌만 우뚝하다. 광무4년(1900년) 겨울 평재(平齋)가 적다.’


옆에 안내판이 있는데 이렇게 적혀있다.


‘이 우물에 새겨진 명문을 해석한 결과 역사적으로 의미 있는 사료라 여겨져 현재와 같이 관리하게 되었다. 2000년 8월 1일 정독도서관장’


앞 글을 적은 사람 ‘평재’는 1905년 대한제국 외부대신 자격으로 을사조약에 도장을 찍었던 평재 박제순이다. 우물돌이 남아 있는 바로 이 자리는 박제순이 살던 집터다. p 181



그렇다. 정독도서관은 부지 내에 있는 커다란 돌덩이가 있는데, 이게 ‘역사적의로 의미있는 사료’라고 판단하여 보존한다는 것이다. 어떤 역사적 의미가 있는지, 단 한마디도 없이. 하지만 정독도서관이 말하는 역사적 의미, 한자를 읽고 이해할 줄 아는 사람이면 바로 캐치할 수 있다. 왜? 정독도서관이 보존한다는 그 돌덩이에, 대놓고 한자로 쓰여있으니까. 심지어 그 한자를 세긴 이가 누구인지도. 



그는 다름아닌 바로 평재 박제순. 을사오적이다. 아주 대표적인 친일파 거물이다.




 



즉, 아주아주 넓은 정독도서관 부지 중에서 저 돌덩이가 있는 저 곳은 을사오적 박제순이 살던 집 터 였다. 조금 더 들여다보면, 현재 정독도서관 부지는 친일파 박제순을 포함하여 조선 말 부터 일제강점기까지 꽤 많은 역사를 담고 있다.



1884년 양력 12월 4일 김옥균이 일으킨 갑신정변은 만 46신 만에 실패로 끝났다. 주모자들은 망명하고, 망명하지 못한 자들은 거리에서 죽었다. 가족은 연좌해 처형되거나 자살했다. 그리고 재산은 파가저택, 집을 부수고 못을 만들어 흔적을 없애버렸다. 1894년 3월 28일 고종 정권이 보낸 자객 홍종우에 의해 청나라 상해에서 암살된 김옥균은 4월 14일 한성 양화진에서 ‘조선왕조 최후의’ 사후 능지처참이자 부관참시를 당했다. 5월 31일 고종은 역적 처형을 축하하는 대사면령을 발표했다. 그런데 청일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하며 조선에 갑오개혁 정부가 서자 고종은 이듬해 1월 22일 김옥균의 관작 회복 칙령을 내렸다. p 183



1884년 갑신정변 주모자였던 김옥균의 저택도 그 곳에 있었다. 김옥균 옆집에는 갑신정변을 같이 주도했던 서재필도 살고 있었다. 역시나 현재 ‘정독도서관’ 부지에 속해있다. 하지만 갑신정변 실패, 주모자들의 처형 및 망명 등으로 인해 갑신정변 주도자들의 집과 땅은 헐리고 팔리고 그렇게 사라졌다. 갑신정변 주모자들에 대한 고종의 분노는 끈질기고 집요했다는건 안비밀. 뭐, 이에 대해서 할말은 많으나, 생략하고!



1899년 개혁을 원했던 그들이 살던 그 땅에 관립중학교가 개교했다. 그 한 켠에 거부 친일파 평재 박제순의 집이 있었다. 이후 1910년 한일병탄조약으로 나라는 사라졌고, 관립중학교는 ‘경성고등보통학교’로 바뀌었다. 박제순이 죽은 뒤, 박제순 저택이 있는 부지까지 ‘경성고등보통학교’에 편입되었다. 





갑신정변 주모자 김옥균과 서재필. 그리고 을사오적 친일파 박제순. 현재 정독도서관 부지가 담고 있는 역사다. 하지만 정독도서관은 이 모든 내용중에서 일부만 선별하여, 나머지는 숨겼다. 그리하여 친일파 박제순은 사라지고 위에서 언급했던 ‘역사적 사료’라는 우물돌이 남았다. 김옥균의 집터를 알리는 비석이 있지만, 서재필의 집터를 알리는 비석은 없다. 




고종, 나라가 사라졌지만 나는 사랑을 하련다.


조선 역대 왕 중에서 나라와 백성를 버리고 도망간 왕이 셋 있다. 이미 모두에게도 유명한 선조와 인조, 그리고 고종이다. 선조와 인조의 몽진은 정말 유명한데, 고종의 몽진은 생각보다 인식하는 사람이 적다. 참으로 이상하다. 우리는 분명 고종의 ‘아관파천’을 배웠는데 말이다. 분명 고종은 러시아공사관으로 도망갔는데, 그 누구도 이걸 나라와 백성을 버리고 ‘도망갔다’고 인식하지 않는다. 아마도... 최근 20년간 일어난, 그것도 지자체와 각종 미디어에서 주도한 고종 미화(예컨데 독립운동 지원이라는 개소리)에 대한 부작용이 아닐까 싶다.



제 기득권과 권력, 안위를 지키기 위해서라면 모든 것을 다 팔아넘긴, 고작 무당 한 명에게 의지하여 수많은 재산을 갖다받친, 못 살겠다고 들고 일어난 동학농민군을 개틀링건으로 쏴죽인, 바로 그 사람 고종을 말이다.



‘갑신정변 주역인 김옥균과 박영효를 죽이기 위해 자객을 보냈던 고종은 이완용 등 을사오적을 죽이기 위해 자객을 보낸 적이 없었다. 을사조약과 합방으로 을사오적이 호의호식하는 것보다 더 황실은 편안한 일상을 보냈다. 식민지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하는 사람은 분명하다. 고종이 뛰어난 지략가로 외세를 잘 이용하고 나라의 근대화를 위해 절치부심하고 굶주리는 백성을 위해 눈물로 베갯잇을 적셨다고 해도 그 책임은 면할 수 없다.’



2004년 김윤희, 이욱, 홍준화라는 세 역사학자가 쓴 『조선의 최후』에 나오는 글이다. (…) 일본은 40년 넘도록 그 나라를 이끌었던 이 황제를 죽이거나 신분을 떨어뜨려 모멸감을 주지도 않았다. 오히려 일본은 고종과 그 가족을 천황 황명으로 조선왕과 조선공에 책봉해 식민시대 내내 우대했다. p 238



고종은 갑신정변 주모자들을 증오했다. 자객을 보낼정도로. 부관참시를 할 정도로. 왜 그정도로 증오했을까? 이유는 간단하다. 갑신정변은 근대국가로 가기 위한 개혁이었고, 이는 즉 전제왕권의 몰락이었다. 왕권을 매우 중요시한 고종에게는 절대 용서할 수 없는 일이었던 것이다. 세계가 공화국으로 가고 있을때도, 이 작은 땅 한반도에서 왕을 하던 고종은 시대에 역행하여, 대한제국을 선포하고 스스로 황제에 올랐던 인물이다. 대한제국 헌법만 봐도 전부 ‘대황제께옵서~’로 시작한다. 일제가 조선 침략을 위해 여러 조약을 맺을 때도, 참 이상하리만치 조선 왕족의 처우만은 유지했다. 심지어 일본의 황족에 준하게. 뭐 이정도면 말 다한거 아닌가.





그런 고종이다. 자신의 안위만을 챙기는 사람이니 일제가 우리 백성들을 어떻게 희생시키던, 신경조차 안썼을 위인이다. 그러니 계속 후궁이 늘어났겠지?


1897년 10월 20일 상궁 엄씨가 아들을 낳았다. 제국을 선포하고 일주일이 지난 날이었다. 이 아들이 영친왕 이은이다. 아들이 태어나고 이틀 뒤 고종은 엄 상궁을 후궁인 귀인으로 승격시켰다. 3년 뒤인 1900년 8월 3일 고종은 또 다른 후궁 귀빈 이씨를 정2품 후궁 소의로 봉했다. 소의 이씨 또한 일찍 딸을 낳았는데 요절했다. p 242



‘고종이 전 상궁 엄씨를 불러 계비로 입궁시켰다. 민 왕후가 생존해 있을 때는 고종이 두려워하여 감히 그와 만나지 못하였다. 10년 전 고종은 우연히 엄씨와 정을 맺었는데, 민후가 크게 노하여 죽이려 했지만 고종의 간곡한 만류로 목숨을 부지하여 밖으로 쫓겨났다가 이때 그를 부른 것이다. 시해 사건이 발생한 지 겨우 5일 째 되던 날이었다.’ (황현, 『매천야록』)


넉 달 뒤 고종이 경복궁을 떠나 러시아 공사관으로 달아난 ‘아관파천’도 엄상궁이 주도한 일이었고, 1897년 2월 경운궁으로 환궁하고 8개월 뒤 영친왕이 태어났으니 이은은 그 러시아공사관에서 잉태된 아들이었다. 을사조약 직전인 1905년 10월 5일 황제 고종은 황귀비 엄씨에게 서봉대수훈장을 수여했다. 서봉장은 1904년 3월 신설한 여자 전용 훈장이며 황귀비는 그 첫 수훈자였다. p 243



조선의 마지막 옹주, 고종의 막내딸이라는 덕혜옹주. 과연 고종의 자식은 덕혜가 끝이었나? 땡. 답은 아니다. 덕혜가 막내딸은 맞으나, 그 뒤로도 고종의 자식이 둘 이나 더 태어났다. 어린 나이에 죽었지만.



1911년 7월 20일, 식민화 이후 ‘황귀비’에서 ‘태왕비’로 명칭이 바뀐 엄씨가 죽었다. 장례는 8월 20일 치러졌다. 1912년 고종에게 딸이 태어났다. 이 딸이 고종이 아꼈던 외동딸 덕혜옹주다. 어머니는 궁녀 양춘기였다. 덕혜옹주가 태어난 날은 양력 5월 25일이었다. 열 달 회임 기간을 역산하면, 엄비 장례 기간에 덕혜가 잉태된 것이다. 1852년생인 고종은 그해 환갑을 넘겼고 양씨는 서른 살이었다. 창덕궁에 살던 고종의 맏아들 순종은 38세였다. p 244



덕혜가 고종에게 막내딸은 맞지만 막내 자식은 아니었다. 덕혜가 태어나고 2년이 지난 1914년 7월 3일 밤 고종에게 아들이 태어났다. 아들을 낳은 여자는 궁녀 이완덕이었다. 나이 열 셋세 세수간 궁녀로 입궐했던 이씨는 스물여덟살에 승은을 입고 이듬애 아들을 낳고 광화당이라는 당호를 받았다. 고종은 예순두 살이었다. (…) 한 해가 지난 1915년 8월 20일 예순셋 먹은 고종에게 또 아들이 태어났다. 친모는 서른세 살 먹은 궁녀 정씨였다. 정씨는 보현당이라는 당호를 받고 후궁이 되었다. (…) 고종은 또 김옥기라는 또 다른 궁녀를 후궁으로 들였는데 자식을 낳지 못해 후궁지위에는 오르지 못했다. 훗날 순종이 그녀에게 삼축당이라는 당호를 내렸다. 이들 후궁은 모두 고종 생전부터 급료를 받았다. p 246 ~ 247



고종이 러시아공사관으로 도망갔던 그 때 엄상궁을 품에 안고, 엄상궁은 영친왕 이은을 임신했다. 엄황귀비가 된 엄상궁. 1911년 엄황귀비가 죽었다. 이때는 이미 조선이라는 나라가 사라진뒤다. 조선은 사라졌지만, 조선왕족은 호의호식하던 그 때다. 뭐 여튼. 고종은 엄황귀비 장례기간에 양씨 궁녀를 품에 안았고, 양씨는 덕혜를 임신했다. 덕혜가 태어나고 2년뒤, 이번에 고종은 이씨 궁녀를 안았고 역시나 아들을 임신했다. 또 2년 뒤 고종은 정씨 궁녀를 안았고, 아들을 임신했다. 그리고 또 김씨 궁녀를 안았다. 



요약하자면 일제의 침략으로 조선이라는 나라는 사라졌고, 조선의 백성들은 일제의 수탈로 수십, 수백, 수천이 죽어나갔다. 또 누군가는 독립운동을 하는 힘든 삶을 선택했다. 그런 상황에서 고종을 비롯한 조선왕족은 일본 황족에 준하는 위치를 보장받고, 호의호식하며, 매해 새로운 후궁을 들였다. 이 후궁들은 당연히 급료를 받았다. 조선왕족들에게 지급되는 급료는 당연히 조선 백성들의 고혈로 이루어진 세금이었다.



진짜 제발 고종, 순종, 덕혜옹주 기타 등등 독립운동을 했다더라, 독립운동을 지원했다더라, 하는 거짓뉴스좀 그만하자. 뭐, 조선왕족의 피를 이는 누군가는 독립운동 지원을 했을 수도 있겠지. 하지만 적어도 저들은 하지않았다. 심지어 망해가는 나라의 마지막 왕족이라고 동정도 필요없다. 뭐 덕혜야 동정을 안할래야 안할수 없긴 한데, 적어도 고종이나 순종은 동정 조차도 필요 없지 않나? 



적어도 고종은 아버지에게 권력을 빼앗은 시점부터, 민비와 그 척족들에게 온갖 뇌물을 받으며, 백성들의 피눈물에는 꿈쩍않던 사람이니.



대구시가 말하는 시대상황에 굴하지 않는 민족정신은 대체 무엇인가


이번엔 위에서 말한, 일본 황족에 준하는 위치를 보장받는 조선 왕족 순종의 이야기. 


1907년 7월 20일 헤이그밀사 사건을 빌미로 고아무제 고종을 퇴위시킨 조선 통감 이토 히로부미는 바로 그해 12월 고종과 엄귀비 사이 아들 영친왕 이은을 도쿄로 보낸다. 영친왕은 순종에 이어 조선 왕위를 물려받을 왕세자였다. 그리고 히로부미는 갓 황제가 된 순종을 통감 자격으로 배종해 1909년 1월과 2월 두 차례에 걸려 북쪽과 남쪽으로 순행시켰다. 


왕세자 영친왕 유학은 명목상 권력자인 전주 이씨 왕실을 식민체제에 정신세계부터 길들이려는 조치였다. 이왕 순행은 조선왕조 내내 대중이 한 번도 보지못한 군주를 대면시켜 식민 조선인에게 자발적은 복종을 유도하려는 계획이었다. 천황 메이지를 일본 전국에 여행시켜 ‘근대화 방법을 놓고 분열돼있던 여론을 집켤시키고 중앙정부 중심의 정치체제를 확립할 수 있었던’ 메이지유신 경험을 그대로 써먹은 작업이었다. 


1909년 1월 4일 융희제 순종이 이렇게 선언했다.


“임금 자리에 오른 뒤 도탄에 빠진 백성 생활을 구원할 일념뿐이었다. 하여 직접 지방 형편을 시찰하고 그 고통을 알아보려고 한다. 통감인 공작 이토 히로부미에게 특별히 배종할 것을 명한다.” (『순종실록』) p 251



일본으로서는 대한제국 황실의 위엄을 빌어 민심을 얻을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다. 통감부는 관보를 통해 구체적인 일정을 공개했다. 사진가 2명을 따로 고용해 전 일정을 모두 사진으로 남겼다. 남순행과 서순행 전 일정에 거쳐 통감부와 일본에 거칠게 저항하는 민심은 보이지 않았다. 아직 구시대 권위를 상징하던 황제를 앞세운 선전극은 성공적이었다. p 252



순종이 일제의 허수아비였는 사실은, 한국의 근현대사를 배운 사람이라면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이다. 순종이 행한 모든 일은 일제의 계획하에 일어난 일이니 말이다. 그런데!! 아주 놀랍게도 일제와 순종의 행보를 아주 자랑스럽게 생각하여, 세금 74억원을 투입한 지자체가 있다. 바로. 대구광역시




 



1910년 한일병합조약 이후 7년이 지났다. (…) 5월 15일 열차 편으로 서울로 복귀한 순종은 6월 8일 다시 열차를 타고 부산을 거쳐 일본 도쿄로 향했다. 1912년 메이지 천황이 죽었을 때 총독 데라우치 마사타케가 도쿄 참배를 주장한 적이 있었는데, 마침내 그 동상 계획이 구체화된 것이다. 모든 일정은 총독부가 일본 궁내성과 함께 기획했고, 순종은 일본 황족에 준하는 대우를 받았다. 순종은 일본 육군대장 정장을 입었고, 가는 곳마다 황족에 준하는 예포 21발로 환영받았다. p 253



9일 순종 일행은 부산에서 황족 깃발을 게양한 일본 군함 히젠함을 타고 일본으로 향했다. 효고현 마이코에서는 방직회사에서 일하고 있던 조선 여공 120명이 나와 환영했다. 나고야에서는 동생 영친왕을 만났다. 6월 13일 도쿄에 도착한 순종은 다음날 오전 천황 다이쇼를 만났다. 배석했던 곤도 시로스케에 따르면 ‘덕담이 오가고 이왕 전화는 다시 절을 하고 물러났다.’ 옛 황제의 권위와 식민 권력의 권위를 중첩시켜 식민 조선 백성들에게 자발적인 복종을 이끌어내려는 거대하고 정교한 이벤트였다. p 254



2017년 4월 대구 중구청은 순종이 걸었던 달성공원 앞 도로를 ‘순종황제 남순행로’로 조성하고 순종 동상을 세웠다. 국비 35억 원 포함해 74억 원이 투입됐다. 동상 앞에는 ‘시대상황에 굴하지 않는 민족정신’이라고 적혀있다. p 255



A부터 Z까지 일제의 계획 하에 진행된 순종의 남순행. 이토 히로부미와 모든 일정을 같이한 남순행. 거기다 아주 많은 기록이 남아있는 남순행. 



대구광역시는 이런 순종의 남순행을 ‘시대상황에 굴하지 않는 민족정신’이라고 드높이고, 세금 74억원을 들여 순종의 동상을 조성했다. 대구시가 말하는 ‘민족정신’이 대체 무엇인지, 누가 나한테 좀 알려줬으면 좋겠네? 세금 74억원을 들일만큼 위대한 민족정신이 대체 뭔지 정말 궁금하네. 아 너무 궁금하다 정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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땅속의 용이 울 때 끝나지 않은 한국인 이야기 2
이어령 지음 / 파람북 / 202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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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이어령 선생의 유작, 끝나지 않은 한국인 이야기 두번째 편이 나왔다. 책 제목은 「땅 속의 용이 울때」 (첫번째 편은 「별의 지도」).




첫번째 편인 「별의 지도」를 읽은 뒤, 진정한 인문학책이란 이런 것이구나! 라는 것을 깨달았기에, 두번째 편 「땅 속의 용이 울 때」  역시도 읽기 전부터 기대가 한가득이었다. 보통 기대가 크면 클 수록 실망도 큰 법인데, 역시는 역시일까?! 이 책을 읽고보니, 이어령 선생의 책은 그 어떤 책을 읽어도 절대 실망하지 않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쯤되면 베스트셀러인 이어령 선생의 「마지막 수업」이라는 책도 한 번 읽어볼까 싶은? 



아니 뭐, 생각해보면 내가 읽고 있는 ‘끝나지 않은 한국인 이야기’ 시리즈야말로, 진정한 이어령선생의 마지막 수업이 아닐까 싶기도 하다.





이 책 제목인 「땅 속의 용이 울 때」 를 보면서, 땅 속의 용은 무엇을 빗댄 것일까? 하는 의문이 생겼다. 이 시리즈가 ‘한국인’ 이야기이니, 땅 속의 용은 분명 한국인을 비유한 것일텐데... 뭐랄까, 용과 한국인? 딱히 와닿는 게 없었다. 그도 그럴것이... 어릴 적 꼬부랑 할머니를 자처하며, 흙먼지를 풀풀 풍기는 우리내 이야기 보따리를 풀어주던 이어령 선생인데, 그런 그의 입에서 ‘용’의 이야기가 나온다는게 좀 의아했다.



그렇지 않나? 흔히들 우리 땅은 오천년의 역사를 담고 있다는데, 실상 그 속의 이야기를 들춰보면 용처럼 불을 내뿜는 강인한 이미지보다는, 오히려 땅에 나는 풀 한포기에도 감사함을 잊지않는 그런 이미지가 떠오르니 말이다. 그런데! 내 이런 의문은 순식간에 풀렸다. 그것도 이 책의 첫 챕터를 읽자마자.



흙 속에 숨은 작은 영웅, 지렁이



우리 속담에 ‘지렁이도 밟으면 꿈틀한다’라는게 있어요. 그 많은 벌레 중에 왜 하필 지렁이였을까요? 실제로 벌레 중 먹이사슬의 제일 밑바닥이 지렁이예요. 지렁이는 눈도 없어요. 그래도 몸으로, 피부로 빛을 느껴서 그 감각으로 빛을 피해 땅속으로 들어가죠. 지렁이는 암컷 수컷도 없어요. 한 몸에 암수가 다 있어요. 그리고 지렁이는 모든 동물의 밥이에요. 하늘을 나는 새부터 바닷속 물고기까지. 우리가 낚시할 때 낚싯밥으로 지렁이 쓰잖아요. 그러니까 먹이사슬의 제일 하층에 있죠. p 023



참 한국 사람들 대단하지요. 지렁이는 한자어 지룡(地龍)에서 파생된 말이에요. 그 하찮아 보이는 지렁이를, 햇빛 나면 그냥 말라비틀어질 뿐인 그 약한 지룡이를 ‘저것은 지룡(地龍)이다, 땅속의 용(龍)이다’하고 생각했어요. 용이라는게 뭐에요. 중국에서는 황제를 상징할 만큼 신령스러운 동물, 하늘을 날아다니고 자연현상을 관장하는 존재 아닙니까. 자연현상은 인간의 생존에 가장 중요한 요소에요. 그러니까 용은 인간에게 가장 두렵고도 소중한 존재이지요. 그러니까 결국 지렁이를 알아준 사람은 한국인, 그중에서도 지렁이의 울음소리를 들은 사람들이에요. 다윈보다도 먼저 말이죠. 땅속의 용인 지렁이가 환상 속의 용만큼 소중한 존재라는 것을 알고, 울지 못하는 지렁이의 울음을 들어준 우리 선조들이에요. p 046



옛날 사람들은 깊은 땅속에서 지렁이가 운다고 생각했어요. 지렁이는 울지도 않고, 소리 낼 방법도 없는데 왜 우리 농촌에서는 지렁이 울음소리를 들었을까요? 저 알수 없는 지렁이 울음을 듣고 싶은 간절함. 깊은 땅속 흙의 소리를 듣고 싶은 마음이 아니었겠어요? 우리 농촌의 저 땅, 혹은 흙 아래에서 울려오는 소리, 숲에서 울려오는 것도, 하늘에서 울려오는 것도 아닌, 땅속에서 울어 나오는 저 소리, 그게 지렁이 울음이에요. p 033



땅 속의 용, 지룡은.....지렁이였다. 가끔 햇볕이 쨍한 날 땅 위에서 말라 비틀어져 있는 그 지렁이. 먹이 사슬 최하층의 지렁이. 모두에게 짓밟히는 지렁이. 처음엔 이름 한자 없었을, 하찮디 하찮은 생명체가 어느 순간에 ‘땅 속의 용’이라는 아주 거창한 이름을 가지게 되었다. 그 이름을 붙여준 건 다름아닌 우리 조상들이었고.



우리 조상들은 지렁이의 본질을 알았던 것이다. 지렁이는 세상에서 제일 하찮은 존재이지만, 그 존재로 인해 모든 생명들이 이 땅에서 살아 갈 수 있게 해주는, 이 땅에서 제일 중요한 존재라는 것을 말이다. 그렇기에 우리 조상들은 지렁이를 ‘땅속의 ‘용’으로 보았다. 그 어떤 소리도 내지 못하는 하찮은 존재였으나, 우리 조상들로 인해 땅 속의 ‘용’이 된 지렁이. 우리 조상들은 땅 속에서 들리는 소리를, 땅속에 사는 용이 우는 소리라 칭했다.



그렇게 이름없는 하찮은 존재가, 땅 속에서 울부짖는 위대한 용이 되었다.



지렁이는 구체적으로 다섯 가지 덕(德)이 있다고 알려져 있어요.


첫째, 지구의 땅은 지렁이 덕분에 유지되고 있습니다. 흙 속의 유기물을 먹고, 배출하는 과정에서 토양을 비옥하게 하며, 질감도 좋게 만들어요.


둘째, 지렁이들은 뭐든 다 먹어 치웁니다. 부식한 것, 짐승이 절대로 먹지 않는 썩은 것도 먹어서 나쁜 균은 전부 자신의 장으로 걸러내고 좋은 미생물만 쏟아내죠. 또 지렁이의 배설은 다른 생물에 유익하고, 미생물이 먹어 치워 자연으로 돌아갑니다. 지렁이가 오줌을 누면 딱딱하게 변해서 그게 칼슘 같은 것이 되어 흙이 된다고 해요. 지렁이가 죽으면 미생물들이 또 먹습니다. 그래서 퇴비가 되죠. 나서 죽을 때까지 지렁이 신세를 지고 인간은 살아갑니다.


셋째, 먹이사슬의 최하층답게 방어 수단은 일절 없지만, 상위 포식자에게 자신을 기꺼이 내어주어 생태계가 유지되도록 돕습니다. 지렁이의 천적은 두더지, 개구리, 두꺼비 같은 양서류, 새, 설치류, 육식성 거머리, 그리고 딱정벌레, 지네, 여치, 사마귀 같은 육식성 곤충등이 있지요.


넷째, 약재와 식용으로도 쓰입니다. 뉴질랜드나 아프리카 등지에는 아예 식용으로 쓰는 굵고 커다란 녀석이 있다고 해요. 우리나라도 토룡탕이라는 것을 먹는데 그냥 먹는 게 아니라 지렁이를 고아서 만든 국입니다.


다섯째, 지렁이는 강력한 생명력의 소유자입니다. 원폭이 떨어져도 산다고 알려져 있어요. 그리고 자신뿐만이 아니라 지구의 다른 생명의 삶까지 책임지는 존재입니다. p 026~027



생각해보면 그렇다. 현대인들은 지렁이를 그저 지렁이로 대할 뿐, 지렁이가 우리에게 어떤 존재인지에 대해서는 단 하나도 생각해 본적이 없다. 아! 식집사들은 예외일지도. 적어도 식집사들은 지렁이들이 만들어주는 흙, 일명 ‘지렁이 분변토’를 돈주고 사온다. 간혹 화분에서 지렁이가 나온다면? 그 순간 지렁이는 지렁이‘님’이 되어 박멸이 아닌, 귀빈 모시듯 다시 고이 화분 속 흙으로 보내준다. 왜? 지렁이가 내 화분 속의 흙을 더 좋게 만들어주고, 그 좋은 흙 덕분에 식물들이 더 많은 영양을 얻을 테니 말이다. 



일개 화분에서 발견된 지렁이도 이렇듯 귀빈 모시듯 하는데, 과거 농업이 주가 되었던 이 땅의 조상들은 땅 속에서 발견된 지렁이들이 얼마나 이뻤을까? 그러니 지렁이를 땅속의 ‘용’으로 대접하지 않았을까. 



하찮지만 귀한 존재 지렁이. 이어령 선생이 이 책을 통해 하고 싶은 말이 무엇인지를 이제서야 깨달았다. 어째서 한국인 이야기에 ‘땅 속의 용’을 빗대었는지 말이다.



그래서 지금도 난 늘 이야기를 해요. 한국 사람이 자랑할 것이 별로 없다고요. 세계적으로 지금 우리보다 잘사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아요. 국민소득으로 따져도 잘 해봐야 우리는 세계 10위에서 13위를 왔다 갔다 하니까 우리보다 잘사는 나라들이 10개 나라도 넘는거에요. 그 나라들보다 우리가 못살고, 노벨평화상 하나를 빼고는 학술 분야에서 노벨상을 탄 사람도 없잖아요. 그러나 우리는 남의 민족 눈에서 피눈물나게 하고 그 가슴에 못질한 적도 없어요. 남을 침해하지 않은 민족 가운데 우리만큼 사는 민족이 있으면 나와보라고 해라! 정말이에요. p 125



우리는 남을 정복하기는커녕, 우리 고향에서도 내쫓기던 민족이었어요. 그래도 남의 눈에 피눈물 안 나게, 남의 가슴에 못 안 박고 올바르게 살았기에 지금 이렇게 살아가고 있는 겁니다. 우리만큼, 아니 우리보다 더 잘사는 다른 사람들, 다른 민족들은 다 전과자에요. 어디 가서 이야기하면 바로 “너희 몇 년에, 몇 세기 때 우리에게 와서 착취했던 나쁜 사람들이야”라고 지탄받지만 우리는 그게 없잖아요. p 126 



지금이야 K문화가 하나의 장르가 되었을 만큼, ‘대한민국’ 전 세계에서 그 위상이 드높다. 하지만, 불과 백년 전...아니 백년도 채 안되는 시간 전까지만해도 이 땅에 살던 사람들은 주기적으로 쳐들어오는 외세로 인해 이리저리 휘둘려 살았다. 우리 역사에서 굵직한 외세침략을 꼽아보면 일제강점기, 임진왜란, 병자호란, 귀주대첩, 원간섭기, 살수대첩 등. 정말 역사의 매 시간대마다 외세의 침략이 있어왔다. 뭐, 한반도의 지정학적 위치로 인해 어쩔수 없다면, 어쩔수 없는 것이긴 해도. 이렇듯 언제나 외세에 짓밟히던 한반도였다.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바로 여기서 대한민국의 위대함이 드러난다.



지금 세계에 위상을 드높이는 여러 나라들을 보면, 전부 수많은 식민지를 거스렸던 나라들이다. 오로지 한 나라의 식민지였던, 대한민국을 제외하고 말이다. 한마디로! 대한민국을 제외한, 잘산다고 하는 10여개의 나라들은 불과 백여년 전 온 나라가 더 많은 식민지를 거느리기 위해 눈에 불을 켰던 그 시기에, 식민지에서 약탈해온 것들을 토대로 부를 쌓아 올렸다는 이야기다. 



뭐, 조금 더 따지고 들어간다면 우리도 월남전에, 베트남 민간인들 눈에 피눈물 나게 한 역사도 있긴 하다. 하지만 이는 우리가 돈받고 파병한 것이며, 어디까지나 미국의 입김이 작용한 결과이다. 물론!!! 그렇다고 우리 국군이 베트남 민간인들 학살한 것이나, 베트남에서 버려진 라이따이한 등 안면볼수 한 사건들에는 절대로 면죄부를 주면 안되지만 말이다. 



누군가 여러분에게 “너는 앞으로 어떻게 살래?” 라고 묻는다면 “나 지렁이처럼 한 번 살아 볼래”라고 말하면 어떨까요. 한번 생각해보세요. 사실 지렁이처럼 살면 밟힙니다. 하지만 우리 역사는 ‘밝은 자’의 역사가 아니라 ‘밟힌 자’의 역사예요. 미사여구가 아닙니다. ‘밟힌 지렁이’가 없었으면 어떻게 초목이 나오고 어떻게 나뭇잎이 다시 살아나는 봄이 옵니까? 우리의 모든 역사는 ‘밟힌 자들의 역사’이기에 영웅이 생겨나고 지도자가 있어온 것이 아니겠어요? 그게 없었다면 어떻게 우리가 이 많은 사람들을 바라볼 수 있겠어요. 그러니까 우리는 앞에서 이야기한 암흑의 영웅, 무명의 영웅, 밟히면 꿈틀한다는 먹이사슬 최하위에 있는 지렁이의 울음을 들어야 합니다. 저 땅속에서 울리는, 사실은 울지도 못하는 지렁이의 울음을 들었다고 고집해야 합니다. 실제로는 땅강아지의 울음이라고 해도 그걸 지렁이 울음이라고 합시다. p 228




이어령 선생은 우리에게 이런 말을 하고 싶었던 것이다. 가장 하찮은 지렁이가 이 세상을 지탱하고 있듯, 외세에 침략을 받던 한반도가 지금은 전 세계에 K문화를 선도시키듯, ‘가장 약한 것이 가장 강한 것’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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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 지기 전에
권용석.노지향 지음 / 파람북 / 202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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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읽는 첫장부터 눈물흘리기가 쉽지 않은데, 이 에세이 『꽃 지기 전에』가 그것을 성공해냈다. 



보통 책을 읽을 땐 서문을 꼭 읽는지라, 이 에세이를 읽을 때도 다르지 않았다. 정말 가볍게 책을 열고 읽었는데, 왠걸. 방심했다. 서문에 쓰여있던 글은 이 책의 공동 저자 권용석님이 아내이자 또 다른 저자 노지향님에게 받치는 글이었다. 자신의 생이 얼마 남지 않았음에, 자신의 끝을 함께 해줄 이에 대한 사랑과 고마움, 그리움이 담긴 글이었다. 분명 담백하고 짧은 글이었음에도, 순식간에 저자에게 이입이 된건지 눈물이 나와서 조금 당황했다. 하필 책을 읽은 공간이 회사였기에, 더 당황했다면 당황했달까. 하하.


나의 남편 권용석은 1963년 태어났고 1988년에 결혼, 10년은 검사로 그 후 15년은 변호사로 살았다. 2009년 사단법인 행복공장을 설립하여 이사장으로 지내다가 2022년 5월 20일에 세상을 떠났다. 이 책에 실린 글은 그가 가기 4, 5년 전 부터 쓴 것들이다. p 015


담백하면서도 슬픈 서문을 읽고 난 뒤 알게된 사실은, 이 글을 썼으며 이 책을 공동으로 집필한 권용석님은 이미 고인이 되었다는 사실이다. 그렇다. 정확히 말하면 이 책은 권용석 님의 유고집이다. 권용석님이 살아오면서 써온 글과 시를 모아서, 아내인 노지향님이 책으로 엮어서 낸 것이다. 



사실상 이 세상에 사는 모든 사람들의 삶의 끝은 죽음이다. 어찌보면 죽기 위해 살아간다고 해도 이상하지 않다. 그래서 한번 뿐인 인생이라고 하지 않는가. 하지만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은 자신의 죽음이 가깝지 않다고, 먼 훗날의 일이라고 생각하며 정작 중요한 일은 뒷전에 둔 채 하루하루를 보낸다. 그러다 갑자기 죽음을 선고 받고 나서야, 자신의 삶을 돌아보고 후회하고 또 후회한다.


어쩌면 삶이 그렇게 어렵고 복잡한 것이 아닌데, 내가 그렇게 만든 것 같습니다. 해야 할 것과 말아야 할 것을 구별해서 해야 할 것을 하고, 하지 말아야 할 것을 하지 않으면 되는데, 해야 할 것에 대해서는 ‘해야 하는데’ 하면서 하지 않고, 하지 말아야 할 것에 대해서는 ‘하지 말아야 하는데’ 하면서 미루어 왔던 일들이 지금 내가 할 일이고, ‘하지 말아야 하는데’ 하면서 계속 했던 일들이 내금 내가 그만두어야 할 일입니다. 남은 삶 동안이라도 쉽게, 단순하게 살겠습니다. p 028


그동안 생각해 본 적이 없었던 죽음이 구체적인 가능성으로 다가 왔습니다. 왜 그리 걱정하고 안달하며 살았을까? 뭐가 그렇게 못마땅해서 미워했을까? 나 자신이 바보처럼 느껴졌습니다. 만일 시간이 좀 더 주어진다면 훨씬 기쁘고 생생하게 살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p 037



주 저자인 권용석님은 검사로, 변호사로 치열하게 살았다. 그러다 모든 직을 내려놓고 ‘행복공장’을 설립해 오롯이 자기 자신의 뜻을 펼치려고 해던 찰나에 암 선고를 받았다. 그것도 완치가 어려운 암. 그렇게 젊다면 젊은 나이에 그는 시한부가 되었다. 언젠가 죽는다가 아닌, 곧 죽을 것이다라는 선고를 받게 된 그의 삶과 시간은 기존과는 조금 다르게 흐르기 시작했다.


그 역시 죽음을 선고받기 전 자신의 삶을 후회했다. 남은 시간을 어찌 살지를 치열하게 고민했다. 그저 이 에세이로나마 그의 삶을 잠시 엿본 나로써는, 죽음을 선고 받기 전의 그의 삶은 찬양받아 마땅한 것 같아 보이는데도, 그는 자신의 삶을 후회했다. 이 책에 추천사를 써준 분들의 글만 읽어봐도 알 수 있다. 남들은 선뜻 살 수 없는, 타인에게 베푸는 삶을 살아온 그였으니까. 착한 사람은 하늘이 빨리 데려간다는 말이 원망스러울 정도로, 그의 삶은 선하고 또 선했다. 이렇게 선한 사람이 검사생활을 어떻게 했으며, 검사생활을 하는 동안 얼마나 많은 스트레스를 받았을 지 눈에 보일정도로.


그렇게 바쁘게 검사, 변호사 생활을 하며 매일을 치이고 치이는 삶을 살았던 그에게는 ‘쉼’이 필요했다. 잠시 모든 것을 멈추고 쉬어갈 수 있는 공간이 필요했다. 홀로 성찰 할 수 있는 독방이 필요했다. 그래서 그는 ‘행복공장’을 설립한 공장장이 되었다. 나만 쉴 수 있는 공간이 아니라, 모두가 쉴 수 있는 공간을 만든 것이다. 선한사람은 죽음을 앞두었다 한들 달라지지 않나보다. 그는 오히려 자기 자신보다 휴식이 필요한 다른 사람들을 위해, 자기의 남은 시간을 쏟아부었다. 어쩌면 사람이 그렇게 한결 같을 수 있는지.


“세상에서 가장 큰 죄는 무엇인가? 살인, 강간, 강도보다 더 큰 죄가 있다. 그것은 자신에게 함부로 하는 것이다. 자신에게 함부로 하는 사람은 자신이 얼마나 귀한지를 모르고, 자신이 얼마나 귀한지 모르는 사람은 남이 얼마나 귀한지도 모르기 때문에 자신뿐만 아니라 남에게도 함부로 하게 된다. 여러분이 이곳에 온 이유는 여러분 자신이 얼마나 귀한지 알지 못해서 자신에게 함부로 했기 때문이다. 여러분을 가둔 것은 경찰이나 판사, 검사가 아니라 여러분 자신이다. 이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나에게 함부로 하지 말라. 나를 아끼고 사랑하고, 가장 좋은 것을 나에게 주라. 여러분은 당당하고 정의로운 사람이 되고 싶을 것이다. 구속보다는 자유를, 불행보다는 행복을 원할 것이다. 그렇다면 정의의 길을, 자유의 길을, 행복의 길을 가라. 막강한 권력을 가진 전직 대통령을 비롯한 수많은 고위 공직자들과 엄청난 돈을 가진 재벌들이 다른 길을 걷다가 수감되거나 불행한 시간을 보내고 있다. 자신에게 함부로 하면서 남이 나를 존중해주기를 바라는 것은 욕심이다. 자신이 얼마나 소중한지를 알지 못하여 자신에게 함부로 하는것으로부터 모든 죄가 시작된다.”

제 말이 학생들의 마음에 닿아서 학생들이 자신을 소중히 생각할 수 있게 되면 좋겠습니다. p 072


자기 자신에게 함부로 하지 말고, 자기 자신을 소중하게 생각하라. 비행을 저지른 청소년들에게 그가 한 말이다. 대게 자신들을 비난만 하는 어른들을 만나왔을 비행 청소년들은 당황했을 것이다. 그저 입발린 ‘나쁜짓 하지마라, 너네가 그러면 그렇지’ 라는 이야기를 하는 어른들만 보았을테니 말이다. ‘비행’ 청소년이라는 딱지가 붙기 전에, 이런 어른을 먼저 만났더라면 그 아이들의 인생에 ‘비행’이라는 딱지가 붙을 일은 없었을지도 모르겠다.




자기 자신을 소중하게 생각하라. 




이 에세이를 읽다보면 유독 자아 성찰에 대한 글들이 많이 보인다. 


뉴스나 댓글을 보면서 ‘나는 천사인가, 악마인가? 선한사람인가, 악한사람인가?’ 스스로에게 묻게 됩니다. 돌팔매질 당하는 사람에게 내 모습이 보이 기 때문인지 돌팔매집이 가혹하게 느껴지고, 환호받는 사람에게서 내 모습이 보이기 때문인지, 환호가 부담스럽게 느껴집니다. (… ) 사실 내가 살아오면서 했던 수많은 생각과 말과 행동이 모두 드러난다면, 아마도 나는 이 땅에서 고개를 들고 살지 못할 것 같습니다. 누구에나가 빛과 어둠이 공존하는데, 우리는 한쪽 면만 보면서 욕하고 박수 치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빛을 사랑하는 거은 좋지만, 빛 속에 숨어있는 어둠과 빛이 만들어내는 그림자도 충분히 경계했으면 좋겠습니다. p 091


돌이켜보면 남을 위한 일이나 남이 시킨 일은 정말 열심히 했습니다. 그러나 정작 나 자신을 위한 일이나 내가 하고 싶은 일은 소홀했습니다. 다른 사람들이 하는 말은 열심히 들으면서 내 목소리는 귀 기울여 듣지 않았고, 남들에게는 정성을 다하면서 나 자신에게는 정성스럽지 못했습니다. 남들로부터는 인정받으려 애쓸 뿐, 나 자신으로부터 인정받기 위한 노력은 하지 않았습니다. 나는 그 많은 시간을 돈을 벌고, 돈을 쓰는데 허비했습니다. 남들 살아가는 모습 구경하다가 내 삶이 떠내려가는 것을 알지 못했습니다. p 103


죽음을 앞둔 사람이라고 해도 말이다. 자기 자신의 삶을 돌아보고, 자신의 오점을 떠올리며 반성하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물론 죽음을 앞두면 삶에 대한 후회가 많아질테지만, 그 후회가 과연 자신의 삶에 대한 반성으로 이어지는냐는 다른 이야기니까. 그래서 그럴까. 그의 글을 읽을 때마다 나는 지금까지 살아온 내 삶을 돌아보게 된다. 그리고 생각한다. 나도 언젠가는 죽음을 선고받게될 날이 올텐데, 그 때가 된다면, 난 내 삶을 어떤식으로 후회를 할게될까? 후회가 반성으로 이어질까, 아니면 무언가를 하지 못한 것에 대한 이기적인 욕심으로 이어질까. 부디 전자였으면 좋겠다.


끝으로 그가 남긴 감동적인시 두 편을 소개한다.



행복공장


행복공장을 왜 하냐구요?

제가 행복하지 않아서.

행복해 보이는 사람이 별로 없어서.

다들 수심이 가득해 보여서.

행복하지 않은 내가 너를 물들일 것 같아서.

행복하지 않는 너에게 내가 물들 것 같아서.

행복으로 물들이는 너와 내가 되고 싶어서.

그래서 오늘도 행복공장을 합니다. 



꽃 지기 전에


“곧 보자” 했던 이의

‘부고’ 문자 받아들고

하늘을 본다.


보고 싶으면

정말 보고 싶으면

지금 보자.

꽃 지기 전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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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어령 선생이 작고한지도 벌써 1년이 되었다. 이제와 말하지만, 난 이어령 선생의 부고 기사가 올라오기 전까지만해도 이 분이 누군지 몰랐다. 부끄럽긴하지만, 부고기사로 인해 이어령이라는 이름을 알았고, 이 분이 문단계에서도 정말 유명하신 분이라는 사실을 알았다. 심지어 저서도, 쓰신 글도 어마무시하게 많았는데, 그럼에도 내가 이어령이라는 사람을 몰랐던 이유는 역시나....내 독서 편식이 한 몫 했기 때문일것이다. 지금이야 여러 장르의 책을 두루두루 보려고 노력하는 편이긴 하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까지 독서 편식이 남아있는데, 과거에는 독서편식이 더욱 심했으니 말 다했다.



이 책 「별의 지도」를 읽기 전까진, 이어령 선생의 저서를 읽어본 적도 없고, 그의 정치적 행보에 대해서도 아는 바가 없어서 위키를 비롯하여 여기저기서 정보를 훑어보았다. 시인이자, 소설가이며, 인문학자이자, 문학평론가, 전 문화부장관 등등. 그를 이야기하는 수식어가 정말 많았지만, 대체적으로 한국의 ‘지성’ 이라는 키워드가 많이 보였다. 그와 함께 「이어령의 마지막 수업」이라는 책도 많이 보였다. 다만 생전에 언행이나 정치적 행보에 대해서는 여러모로 비판도 많았던 것 같다. 뭐, 이 분에 대해서는 잘 모르니, 생전 행보에 대해선 내가 왈가왈부 할 건 아니고. 



그저 이번에 읽은 이어령 선생의 책 「별의 지도」에 대해서만 이야기 하자면, 이 분은 유일무이한 대한민국의 ‘이야기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쁜 의미가 아닌, 좋은 의미로써의 이야기꾼 말이다. 좀 식상한 표현이긴 하지만 책에 쓰여진 한 줄, 한 줄이 주옥같다고 해야할까? 허투루 쓰인 글이 하나도 없었다. 그의 글에는 역사와 철학, 윤리, 인문학적 사고 등 모든 것이 조화롭게 살아 움직이고 있었다. 



본디 인문학이란 ‘인간과 관련된 근원적인 문제나, 사상, 문화 등을 중심으로 연구하는 학문’이다. 그 연장선에서 보면 동양의 사상이나 문화는 공자, 맹자, 순자, 노자의 사상을 바탕으로 한다. 서양은 기본적으로 성서, 기독교가 바탕이다. 이렇게 동, 서양의 사상에서 시작하여 중세를 지내 근세, 근대로 넘어오면서 수많은 문화가 생겨나고, 사라지고, 향유했다. 이렇게 방대한 인문학이라는 학문으로 책을 집필한다면, 적어도 그에 상응하는 인문학적 지식이 있어야 한다. 하지만 요즘 나오는 인문학 책들은 읽어보면, 그냥 무늬만 인문학이 많아서 실망한 적이 한 두 번이 아니었다. 오죽하면 사람들이 추천하는 인문학책이란게 이런건가? 싶은 생각도 들면서, ‘사람들이 숱하게 말하는 인문학책들은 이제 그만 읽어야겠다’라는 생각까지도 했었다. 



헌데 왠걸? 이 책, 이어령 선생의 「별의 지도」를 읽고나서야, 진정한 인문학 책이란 바로 이런 것이구나! 하고 깨달았다. 무엇보다 이 책을 읽고 있노라면, 이어령 선생의 인문학적 지식이 얼마나 방대하고 대단한지를 느낄 수 있었다. 이 책은 동양의 정신세계의 바탕이 된 공자, 맹자, 순자, 노자를 비롯하여, 서양의 성서, 서양의 고전문화, 동양의 고전문화등에 대해서 해박하지 않다면, 절대 집필하지 못할 인문학책이다. 다름아닌, 바로 이런 책이 인문학책이다. 이런 인문학 책이라면, 나는 군말없이 인정할 것이며, 이런 책이 인문학 도서라면 수십 권도 읽을 생각이 있다. 이런 인문학책이야말로 많은 사람들에게 추천할 수 있는 인문학책이 아닐런지!



이 책에는 정말 수많은 내용이 있었다. 인문학적 사고, 삶의 태도 등 배울 점도 정말 많았다. 하지만 그 와중에도 내 머리속에서 떠나지 않았던 책 속의 키워드는 다름아닌 ‘윤동주’였다. 책의 시작부터, 끝을 장식한 이야기도 시인 ‘윤동주’였다.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윤동주’라는 이름은 모르는 사람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이 책 속의 키워드로 ‘윤동주’를 꼽는 이유는 하나다. 이어령 선생의 시선으로 본 윤동주는, 내가 알고 있던 윤동주와는 달랐다. 내가 학교에서 배웠던, 일제강점기에 시로써 일제에 저항한 ‘저항시인’ 윤동주가 아니라, 별을 노래하는 아름다운 ‘시인’ 윤동주 였다.




 



덕분에 책장에 꽂혀있던 윤동주 시인의 시집을 다시 꺼내어 읽어보았다. 저항시인이라는 선입견에 사로잡혀 읽었을 때는 몰랐던 윤동주 시인의 시가 새로이 보였다. 



이어령 선생이 말하는 시인 윤동주. 그에 대한 내용만 발췌하였다. 윤동주 시인의 시집을 읽으려 한다면, 이 책을 읽거나, 이 포스팅을 읽은 후에 읽었으면 좋겠다. 그럼 ‘저항시인’ 윤동주가 아닌, 별을 노래하는 ‘시인’ 윤동주가 보일테니.



죽는 날 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해야지

그리고 나한테 주어진 길을 걸어가야 겠다.

오늘 밤에도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

-윤동주 <서시>



눈을 들어 밤하늘을 보면 수많은 별이 있습니다. 한국인은 ‘별’하면 먼저 윤동주 시인을 떠올리게 되지요. 지상에서 마주한 얼굴이 하늘로 올라가 하늘의 얼굴, 하늘의 눈동자가 되면 윤동주의 시에 가장 가까운 이야기가 됩니다. (…) 첫 행과 둘째 행의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러움이 없기를’ 바라는 마음은 맹자의 어록에 나오는 표현입니다. 어린 시절 윤동주는 《맹자》와 《성경》을 배웠다고 합니다. 《구약성경》에서 선약과를 따먹은 아담과 이브가 부끄러움을 알게 되었다고 하지요? 부끄러움을 알게 되었다는 것은 다른 사람의 위치에서 자신을 바라보는 눈이 생겼다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이란 하늘을 뜻합니다. 


윤동주가 《맹자》와 《성경》에서 영향을 받았으리라 여겨지지만 <서시>는 동양적인 문맥의 ‘천天’의 개념, ‘앙불괴어천’ 사상이 담겨있다고 할 수 있어요. 옛날 한국인들은 오늘의 우리보다 훨씬 더 사물로부터 많은 것을 보고 배웠습니다. 사물 속에 숨겨져 있는 본성이 있다고 생각했고 그 본성은 하늘이 주는 것이라 여겼어요. 인간은 그 무수한 사물의 본성을 통해 물질의 만족이 아니라 정신의 행복을 찾으려는 존재요. 여기서 본성이란 쉽게 말해 적자의 마음, 즉 아이의 마음입니다. 그 아이의 마음을 잃지 않고 사는 사람을 맹자는 ‘대인’이라 불렀는데, 몸뚱이가 큰 사람이 아니라 정신적 행복을 느끼고 사는 사람을 의미합니다. p 015~017



우리가 학교 다닐 때 책에 줄을 긋고 칠하면서 배운 시가 윤동주의 <서시>입니다. ‘윤동주’, ‘저항시인’, ‘죽는 날 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 없기를’ 하며 줄줄줄 외웠죠. 윤동주 저항시? 윤동주가 저항하는 거 봤어요? 다 선생님에게 들은 얘기지요. 이 시를 읽기도 전에 선생님이 알려준거에요. “윤동주는 저항 시인이다. 이 시는 일제에 저항한 시다”라고 말한 뒤 시 읽기를 시작하지요. (…) 윤동주 선생이 저항시인이 아니라는 얘기가 아닙니다. 그러나 저항시인이라는 선입견을 가지고 이 시를 보면 이 시의 진짜 값어치를 모르게 돼요. 다 일제에 저항하는 시로만 읽으니까, 이 시의 장치나 비유도 딱 그렇게 한정짓게 되니까요. p 096



저항시라는 말도 모르고 윤동주가 누구인지도 모르고 길을 걷는데 그냥 <서시>가 땅바닥에 떨어져 있기에 주워 읽었다 칩시다. 그런 마음으로 솔직하게 그냥 읽어보세요. 이 시만 읽어서 ‘아, 이분이 후쿠오카 감옥에서 생체실험 희생자로 돌아가시고, 그 집안도 다 기독교인데다 독립운동을 하신 분들이지’ 하고 느껴질까요? 그런데 저항시인이라는 프레임을 제거하고, 시대상황도 배제하고 이 시를 읽으면 ‘모든 죽어가는 것들’에 예외가 있습니까? 일본 사람, 한국 사람의 구별이 있어요? 공자님이 말씀하신 대로 ‘나라’를 빼고, 이 시에서는 ‘노자’까지 나갔어요.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이니까 ‘사람’까지 뺐잖아요. (…) 태어나면서 사형선고를 받는 것이 사람이죠. 그런데 사람들은 죽을 줄 알면서도 버티고 싸우지요. 윤동주는 그 안에서 버티는 것이 아니라 하늘까지 올라갔어요. 하늘에 올라가면 별이 있습니다. 땅을 노래하는 마음이 아니라 별을 노래하는 거니까 벌써 그 안에 역사를 내재하고 있다는 말이지요. 역사를 포함하고 점점 위로 올라가면 땅이 보이고 지구가 보이고, 거기서 쭈욱 올라가서 별을 노래하는 겁니다. 하늘을 우러러 보는거죠. 그러니까 하늘까지 못 올라간 사람, 별을 모르는 사람은 풀잎에 이는 바람에도 괴로워할 리가 없어요.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 없기를’이라는 말은 ‘현재 나 자신은 부끄러울 것이 전혀 없다, 나는 결백하다’, 이런 의미라기 보다는 ‘나는 그런 뜻을 가지고 있다’며 스스로에게 맹세하는 말이에요. 그렇게 살고 싶다고 소원하는 거죠. p 099



<서시>를 일제에 대한 저항시라고 했을 때는 이 시를 정치적 레벨에서 읽은 것입니다. 국가 간의 정치 속에서 이 시를 읽을 수 있어요. 국가의 개념을 털어내고 인간의 레벨의 문제로만 읽었을 때는 휴머니즘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그 다음으로는 종교적, 초월적 하늘의 레벨에서 읽을 수 있습니다. 해서 <서시>는 저항시(정치), 인간주의시(휴머니즘), 종교시 이렇게 3개 층위로 읽을 수 있지만 전체적인 뜻은 천지인입니다. 일제에 저항하는 민족애, 인간애, 우주애 말이죠. 이처럼 하늘, 땅, 사람으로 나눠놓으면 놀랍게도 이 시가 금세 보입니다. p 116



‘죽는 날 까지 하늘을 우러러/한 점 부끄럼 없기를’ 바라는 마음의 기저에는 ‘나-하늘’이 직접 연결돼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늘과 연결된 지상의 인간들은 사랑을 해도 뭘 해도 다 죽지만 별은 영원히 죽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해야지’라고 했을 때, 내 마음속 심리적인 부끄러움이나 괴로움을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극복한다는 이야기입니다. 별을 노래하는 마음은 시인의 마음이죠. 정치인이나 종교인의 마음이 아니라 시인이니까 윤동주는 하늘의 별을 노래하지 스스로 하늘의 별이 되지는 않았어요. 그러니까 다시 천지인으로 돌아옵니다. 제일 높은 곳에 ‘별’이 있고, 가장 아래에 ‘잎새’가 있고 그 사이에 ‘내(사람)’가 있습니다. 위를 보고, 아래를 보고, 다시 시인으로 돌아오는 것이지요. p 117



인간의 마음속에는 땅의 마음만이 아니라 하늘의 마음이 있고 인간의 마음이 있습니다. 그런 말을 하죠. “어떻게 사람이 그럴 수가 있냐. 너도 사람이냐?”고 할 때는 ‘그 말을 듣는 너라는 상대가 짐승보다 못하다’는 비난입니다. 그러데 “나도 사람이야” 할 때는 실수할 수 있고 완벽할 수는 없는, 신이 아닌 인간이라는 뜻이에요. 신처럼 완벽할 수는 없지만 짐승은 아니지요. 지금 ‘사람’은 신과 짐승 사이에 있습니다. p 120



인간은 하늘과 땅 사이에 있기 때문에 하늘을 볼 때는 신을 향하고 땅을 볼 때는 짐승을 향합니다. 그래서 그 사이에 있는 인간의 눈이 아름다운 것입니다. 윤동주의 눈이 그래서 아름다워요. 하늘을 우러러 부끄러움이 없기를 맹세하는 사람이니까 사랑해야지, 영원히 미래를 향해서 사랑해야지, 라고 말하고 있기 때문에 이 시가 이렇게 아름다운 겁니다. p 122



이 시에서 바람이 두 번 나옵니다. 처음에는 ‘잎새에 이는 바람인데, 그 바람이 지금은 ‘하늘의 별에 스치고’ 있어요. 모든 것을 시들게 하고 죽게하는 바람은 시간이죠. 그 시간이 별에 스치면 영원까지 갑니다. 그러니 윤동주가 ‘나는 나에게 주어진 길을 걸어가야겠다’라고 말할 때의 그 길은 풀잎에서부터 별까지 가는 것이지요. 바람을 따라서, 잎새에 이는 땅의 바람에, 저 허공에 부는 바람까지 뻗쳐서 별까지 가는 그 과정의 길입니다. 부끄러움이 없는 길이지요. p 123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 없기를…” 하고 서술어 대신 말줄임표 (….)를 썼어요. 이건 읽는 사람이 서술부의 시제를 무엇으로 넣어 읽느냐에 따라 이 문장을 과거로도 현재로도 미래로도 읽을 수 있다는 거지요. 한 번 해볼까요?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러움이 없기를 ‘맹세했다’라고 읽으면 과거에 맹세한 것이지요.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러움이 없기를 ‘맹세한다’라고 읽으면 지금 현재에 내가 맹세하고 있는 것이에요.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러움이 없기를 ‘맹세할 것이다’라고 읽으면 미래에 그리 맹세할 것이라는 다짐이 됩니다. 과거, 현재, 미래에도 하늘을 우러러 부끄럼이 없다는 이야기예요. 부끄럽지 않게 살았고, 살고 있고, 살 것이라는 말이지요. p 130



그런데 윤동주가 시인이 아니라 군자라면 어떻게 될까요. 군자는 이미 초월한 사람입니다. 땅에 사는 보통의 사람이 아니에요. 맹자는 《맹자》 <진심편>에서 군자에게 세 가지 즐거움이 있다고 했습니다.


첫째, 부모님과 형제가 모두 무사하면 첫번째 즐거움이고, 둘째는 위로는 하늘을 우러러 부끄러움이 없고 아래로는 사람을 대함에 있어 부끄럽지 않을 때가 두 번째 즐거움이며, 셋째는 천하의 영재를 얻더 교육을 함이 세 번째 즐거움이라 하였습니다. 윤동주의 시는 이 두 번째 즐거움에서 나옵니다. ‘앙불괴’ 하늘을 우러러 부끄러움이 없고, (…) 윤동주의 <서시>를 전부 과거형으로 고치면 윤동주는 시인이 아니라 군자가 됩니다. 과거형으로 바꾸어버린 시에는 망설임과 노력하려는 마음과 현실에서의 부딪침이 전혀 나타나지 않아요. 그런 것들이 시인의 마음인데요, 남에게 말하는 것은 시가 아니라 자랑이에요. 과거형으로 바꾼 <서시>에서 윤동주는 시인이 아니라 군자가 되었습니다. p 136



<서시> 원문을 보면 아무것도 이루어진 것이 없어요. 이루어진 것은 보통 과거형, 완료된 문장으로 서술되는데 이 시에서 과거형으로 쓴 것은 ‘괴로워했다’ 단 하나예요. 그러니까 괴고워한 것만은 사실이고 현실이지요. 나머지 서술부의 시제를 보면 ‘사랑해야지’ ‘걸어가야겠다’ 하는 미래의 다짐, 미래의 원망遠望과 의지만이 나타납니다. 일종의 자기 자신에 대한 맹세지요. p 137



산모퉁이를 돌아

논가 외딴 우물을 홀로 찾아가선

가만이 들여다봅니다

우물 속에는 달이 밝고

구름이 흐르고

하늘이 펼치고

파아란 바람이 불고

가을이 있습니다.

그리고 한 사나이가 있습니다.


어쩐지 그 사나이가

미워져 돌아갑니다.


돌아가다 생각하니

그 사나이가 가엾어집니다


도로 가 들여다보니

사나이는 그대로 있습니다


다시 그 사나이가

미워져 돌아갑니다


돌아가다 생각하니

그 사나이가 그리워집니다


우물 속에는 달이 밝고

구름이 흐르고

하늘이 펼치고

파아란 바람이 불고

가을이 있고

추억처럼 사나이가 있습니다

- 윤동주 <자화상>



윤동주가 만약 별이 되었다면, 별을 노래하는 것이 아니라 별 그 자체가 되었다면, 땅을 내려다보면서 어떤 시를 썼을까요. 윤동주의 다른 시 <자화상>에서는 이미 시인을 초월해서 하늘에서 내려다보는 모습이 나타납니다. p 177



이 시를 보면 윤동주는 이미 땅 위의 인간, 시인을 초월했어요. 우물 속을 들여다보니까 제 얼굴이 있을 텐데 그것을 ‘낯선, 이상한 사람’이 있다고 이야기합니다. 그 사람은 이미 위에서 자기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는 것입니다. 윤동주가 우물 속의 자신을 들여다보는 행위는 일종의 ‘반성적 사고’ 입니다. ‘참 자기찾기’인 것이죠. 그런 점에서 현실의 어려움을 겪고 있는 자아를 들여다본다는 것은 일종의 격려 혹은 박수치는 행위와 다름이 없지요. 그러니 우물을 내려다보고 자신과 마주하며 해방감을 느낄 수 있는 겁니다. p 180



우리는 윤동주를 일제강점기 역사 속에서 사람의 마음을 울린 저항시인으로 알고 있지만, 만약 윤동주가 역사적 차원에서 저항시로만 <서시>를 썼다면 광복 후에도 우리의 가슴을 울리지는 않았겠지요. 윤동주의 시는 우리 생각의 틀을 한 번 더 깨주고 더 큰 세상을 바라볼 수 있는 시야를 만들어주었던 것입니다. 앞으로 한국인이 할 일은 날개를 달고 하늘을 나는 일, 하늘에서 한국을 내려다보는 별이 되는 일입니다. 그것이 우리 역사 속에서 천지인의 천天을 가지는 일입니다. 윤동주는 하늘로 올라가는 그 길이 아름다운 포물선임을 가르쳐준 시인입니다. p 1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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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만에 책을 읽으며 오랫동안 생각에 잠겼다그도 그럴 것이 책을  이는 영원한 청년작가로 불리우는 소설가 박범신님물론 자타공인 독서편식가인  문학소설이라고 불리우는 책과는 거리가 멀기에박범신 님께서 쓰신 소설들은 대게 「은교」나 「고산자」 처럼 영상화된 것만 봤을 뿐이다한마디로 박범신 님의 글을 제대로 읽어본 적은 없는 .



그래도 언젠가 읽어봐야지 마음은 먹었었는데이번에 박범신님 산문집 『순례』가 출간되어 !! 읽을  있었다문학소설은 당최 눈이  안가지만산문은  결이  다르기에무엇보다 이렇게 유명하신 (?) 산문집은 왕왕 읽어보고  느낌이 좋았던터라꽤나 기대를 품고 박범신님 산문집 『순례』를 읽기 시작했다.

역시나는 역시나였다박범신님의 산문집 『순례』는 읽으면 읽을수록 ‘ 대해 오래도록 생각하게 하는 힘이 있었다내가 진정으로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내가 바라는 행복은 무엇인지내가 지금 제대로 살고 있는게 맞는지 등등정말 오롯이 ‘ 대해 생각하는 시간을 갖게 되었다.


박범신님 산문집 『순례』의 전체적인 틀은 편지형식이다박범신님께서 히말라야를 순례하며그날 그날 K형에게 쓰는 편지형식의 글이다약간 삼천포긴 하지만내가 이렇게 깊이 있게 쓰인 편지를 받아본적이 있었나 싶기도 하고이렇게 편지를 써본적이 있었나 싶기도 하고만약 내가 편지를 쓴다면 이렇게 깊이있는 글을   있을까 싶기도 하다정말 이렇게 단어 하나하나에 깊이가 있다고 느낀 책은 오랜만이라고 해야하나?

그도 그럴 것이 요즘 사람들이 주로 보는 글들은 조그만 스마트폰 화면 속에 떠있는 짧은 글들이 많다심지어 누군가와 소통을  때도 조차도 글을 쓰기보단 단축말이나 이모티콘 등을 주로 이용한다깊이 있는 글은 고사하고짧은 글조차도  안쓰려는게 요즘 추세라면 추세랄까 뿐인가가끔가다 책에 대한 이야기누군가가  문장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싶어도  만한 사람이 없다.

만약 자신이 속한 집단에서 하루에아니 일주일에  1권이라고 읽는 사람이 있는지 물어보면 대다수가  읽는다고 말한다아니바빠서 못읽는다고 한다슬프지만 이게 현실이다그래서 누군가에게 ‘ 문장 너무 멋지다’, ‘  읽어봤어?’ 라고 이야기 하고 싶어도들어줄 사람도 없고 공감해줄 사람이 없다근데 정말 아이러니하다바빠서 책을  읽겠다는데왜들 스마트폰으로 이것저것  시간은 많을까그냥 뭐랄까이렇게 깊이 있는 글들이 점차 사라지는 현실이 슬프다.

이왕 주절주절거리는 김에조금  주절거리면.

요즘 나오는 에세이를 보면(심지어 베스트셀러라고 하는 책들), 대게 신변잡기 글이 많다내가 알기로는 에세이 역시 산문의 하위호환 영역일텐데이상하게 글에 깊이가 없는 경우가 많다그저 글쓴이의 이름값(?)으로 베스트셀러가  느낌이랄까그래서 그럴까 ‘에세이라고 불리는 책들 보다는이렇게 ‘산문으로 불리는 책들을 좋아한다적어도 지금까지 내가 읽었던, ‘산문집이라는 타이틀을 들고 나온 책들은 언제나 글에 깊이가 있었고나를 오래도록 생각하게 하였으니까물론 그런 산문집들의 저자는 대게 박범신님 처럼 관록이 있는 분들이 많긴 했지만.

유명인의 에세이신변잡기 글을 읽으면 이상하게도 ‘’ 자신에 대한 생각보다는 그저  앞에 보일듯 보이지 않는 성공에 열을 내거나 혹은 ‘ 사람은 했는데  이렇게 못하지?’ 같은 자기비하에 빠지는 경우가 왕왕 있다물론 정말 깊이있고오롯이 ‘’ 자신에 대해 생각해보는 에세이도 많지만 말이다하고 싶은 말은 이거다요즘 핫한 인물이  에세이베스트셀러가  에세이라고 해서  좋은 글이 아니라는 이야기다오히려  지금의 20대들에게현실에 아파하는 청춘들에게 그런 에세이보다는박범신님의 산문집 『순례』를 추천하고 싶다그대들이 지금 힘들어하는  삶의 전부가 아니라고그럴수록 오히려 ‘’ 자신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야한다고적어도  산문집을 읽은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비우니 향기롭다

히말라야는 무엇보다 내가  내가 속한 사회에서 악을 써가며 지키고자 했던 사악한 전투거짓말허세그리고 성공과 실패의 이분법이 주었떤 상처들까지얼마나 나와 상관없이 주입된 가짜 꿈들에서 비롯된 것인이 분명히   있도록 도와줍니다이곳에서   있는 일은 걷는 것뿐입니다자동차도 없고 비행기도 없습니다오직  앞에 놓인 길만이 나를 도울 뿐입니다그러므로 영혼은 분산되지 않습니다멀리 있으니 오히려  나라가 조감도처럼 한눈에 보이고 그곳에서 습관에 의지해 죽을    달려온 나의 지난 삶도 아프게 보입니다바로 ‘은혜로운 생음 불러온 본원적 세계를 사실적으로 보고 느끼는 축복을 누릴  있다는 말입니다. p 017

티베트 불교의 성자 밀라레파는 이렇게 읊었습니다그가 지닌 것은 배고픔을  견디는 몸뚱이와 누더기 면포와 헤진 방석뿐이었으나그는 세계를  가지고 있었습니다감히 밀라레파와 비교할  없겠지만 나는 이제 내가 가진 모든 이를테면 좋은 기민한 휴대전화요술 상자 텔레비전재빠른 자동차로부터 벗어나도 외롭지 않은 시간의 길로 들어갑니다느릿느릿걷겠습니다그것은 오래전 전근대의 ‘한량들이 갔던 길이며밀란 쿤데라의 표현에 따르면 ‘신의 으로 들어가는 길이기도 합니다. p028

돌림노래는 길고 따뜻했습니다.

간간이 웃음소리와 잡담이 돌림노래 사이로 섞여 들어왔습니다촛불도 켜지 않은 어둠 속에서 손에 손을 잡고 둘러앉아 돌림노래를 부르면서 밤을 보내는 저들에게 ‘가족 무엇일까요 눈엔 자꼬 가족이 모여도 서로 마주 앉기보다 일렬로 앉아 현대인의 신이기도  텔레비전을 향해 경배드리는 우리네 가정의  풍경이 자꾸 떠올랐습니다. p 052

K형에게 여기에서 다시 묻고 싶습니다당신은 행복해지기위해서 이순간 무엇 무엇을 소유하고 있습니까내가 가진 더운 밥과   넓이의 방과 시멘트 욕조와 새로  내의와 삐걱거리는 침대를 갖고 있나요지금의 나처럼 모국어에 대한 감동을  갖고 있나요그렇다면 형이 가진 그것들로 지금의 나만큼 충만되고 행복한가요?

나는 히말라야에서 보았습니다.

내가  것은 속도를 다투지 않은 수많은 길과본성을 잃지 않은 사람과문명의 비곗덩어리를 가볍게 뚫고 들어와 내장까지 밝혀주는 투명한 햇빛과 자유롭기 한정없는 바람만년 빙하를 이고 있어도 결코 허공을 이기지 못하는 거대한 설산들을 보았습니다 감히 고백하자면행복하고 충만 되기 위해서 내가 이미 너무도 많은 것을 소유하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했으며행복해지는 길이 어디에 있는이 어렴풋하게나마 찾을  있었습니다. p 087

비가 오락가락 합니다.

나는 넓은 비닐 주머니를 거꾸로 쓰고 흐느적흐느적 빗속을 겉습니다수많은 사람들이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갑니다내가 사랑했떤 사람도 떠오르지만 내게 상처를 주었떤 사람 내가 상처를  사람들도 생각납니다오해에 불과한 작은 일로 나를 버린 사람아집에 따른 어리석은 고집으로 내가 버린 소중한 사람들도 떠오릅니다회한은 많고  길은 멀고남은 사랑은 아직도 이렇듯 여일하게 뜨겁습니다. p 103

나는  순간 눈물겨웠습니다나의 존재가 너무도 가벼워 눈물겨웠고죽을    일벌레로 살아온 우리네 넓은 날의 초상이 안쓰러워 눈물겨웠고동강  조국에 살면서 그래도 세계의 중심으로 우뚝 서겠다는 장한 꿈을 쫓아 오늘도 다리가 찢어져라 내달리고 있는 조국에 대한 연민 때문에 눈물겨웠습니다.

우리는 지금 어디로 가는 것일까요. p 114

행복해지는 길을 찾지 못한다면 부자가  필요도 없습니다죽어라 일해 돈을 버는  최종적으로 나와 사랑하는 사람들이 더불어 행복해지기 위해서입니다그래서 나는 우리가 지금 어떤 ‘샹그릴라 가슴에 품고 있는지과연 행복을 향한 비전은 있는지 묻고 싶습니다물론 이런식의 질문이 자본주의적 속성을 쫓아 살고 있는 사람들에게 그다지 유쾌한 질문이 되지 않을 것이라는  나는 압니다. ‘사는  이게 아닌데….’라는 회의는 뒤집힌 압정과 같아서 밟을 때마다 하고 억눌려 있는 본성이 속에서 비명을 지를테니까요. p 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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