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문화재로 만나는 백제의 흔적

내 개인적으로 제일 백제 역사책 추천을 한다면 이 책, 「문화재로 만나는 백제의 흔적」이다. 제일 큰 이유는 저자이신 김희태님은 오로지 사료와 문화재에 입각하여 글을 쓰시고, 연구자에 따라 의견이 불분명한 부분에 대해서는 있는 그대로 글을 쓰시고, 판단은 책을 읽고 있는 독자의 몫으로 남겨두시기 때문이다. 참고로 말하자면 희태님은 쓰시는 책 모두, 행여나 부정확한 오류를 담아서 역사 왜곡을 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오롯이 사료나 문화재를 통해 명확하게 입증된 것을 기준삼아 글을 쓰신다.


이 책은 청소년들에게 추천하기 딱 좋은 역사책이다. 학교 국사시간에 배우는 백제 문화재가 고스란히 책속에 나오기 때문이다. 아무래도 책의 주제가 ‘문화재로 만나는’ 백제의 흔적이다보니 그럴지도 모르겠다. 


대게 ‘백제’라고 하면 우리는 한성백제, 웅진백제, 사비백제, 그리고 익산 왕궁리(천도여부를 떠나서)를 배운다. 더군다나 각 시기에 해당하는 백제성이 남아있기도 하고. 한성은 몽촌토성/풍납토성, 웅진은 공산성, 사비는 부소산성 이렇게 말이다. 시대순으로 우리가 잘 알고 있는 한성백제(서울) 몽촌토성, 풍납토성은 물론이고, 웅진백제(공주)의 공산성, 사비백제(부여)의 부소산성 그리고 익산 왕궁리 기본으로 나온다. 그리고 이 성들은 해당 지역에 있는 다른 백제 유적지와 함께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되어 있기도 하다. 


난 학창시절 엄마아빠와 여행을 다닐때, 대게 국사책에 사진이 실려있는 유적지 위주로 다녔다. 그래서 당연히 공주, 부여 여행도 갔었다. 공산성을 다 돌고, 송산리고분군(+무령왕릉)을 보았다. 부여에 가서는 역시나 부소산성(+낙화암)을 다돌고, 능산리고분군, 정림사지를 보았다. 이것들을 직접 눈으로 보았때야 비로소, 국사책에서 공부했던 백제에 대해 이해하기 시작했다. 확실한 건 엄마아빠와 역사여행을 주로 다녔기에, 역사를 더 좋아하게 되었다는 점이다. 엄마아빠와 여행 추억은 덤이고! 아,  어쩌면 이건...엄마아빠의 의도였나 싶기도 하고.....허허.


그저 책으로 공부하는 것과, 직접 가서 보고 공부하는 것은 많이 다르다. 그렇기에 이 책은 자녀를 둔 부모들에게 필히 추천하고 싶은 역사책이기도 하다. 이 책을 읽으면서 책속의 장소로 여행을 떠나고, 그 장소에서 이 책을 다시 꺼내 읽어보고, 그러다보면 막연했던 고대국가 백제가 어느새 눈 앞에 다가온다. 약간 삼천포긴 하지만, 저자의 다른 책인 ‘왕릉으로 만나는 역사, 신라왕릉’도 같이 읽어보면 좋을 듯하다.




2) 백제왕조실록 1,2

우리집 책장 한켠에는 살림지식총서가 쫘르르 꽂혀있다. 물론 전권은 아니고, 역사에 관련된 책들에 한해서만! 이 책 「백제왕조실록 1,2」는 살림에서 고조선부터 조선까지 ‘실록’형태로 출판한 역사책 중 하나이다. 우리집에 백제관련 역사책도 꽤 있는데, 굳이 이 책을 고른 이유는 말그대로 ‘실록’ 형태로 기록되어 있어서, 백제사를 시간순으로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대체적으로 이 책은 《삼국사기-백제본기》를 기본으로 서술한다. 물론 삼국사기가 고려시대에 집필된, 신라의 시선에 입각하여 쓴 책이긴 하지만, 우리나라에 남아있는 고대사 사료는 삼국사기 밖에 없기 때문이다. 물론 삼국유사도 있긴하나 야사이며, 고대사의 정사는 삼국사기가 유일하다. 물론 삼국사기 만으로는 내용이 빈약할 수 있으므로, 우리와는 달리 고대의 사료가 많이 남아있는 중국, 일본 사료의 내용도 이 책에 담겨있다. 


1권은 1대 온조왕부터 ~ 25대 무령왕까지, 2권은 26대 성왕부터 ~ 31대 의자왕까지다. 1권에 백제 왕의 4/5가 몰빵되어 있는 이유는, 고대중에서도 고대라(^^) 사료가 그만큼 빈약하고, 워낙에 금방 죽은 왕들도(...) 꽤 있었기 때문이다. 반면 2권의 성왕, 위덕왕, 혜왕, 법왕, 무왕, 의자왕 쪽은 중국이나 일본쪽의 사료도 꽤나 남아있기에, 그 분량이 1권과 맞먹는다. 그리고 대체적으로...우리가 국사시간에 알고 넘어가야하는 백제 왕들은 대게 후반부 왕들이기도 하고. 하ㅏㅎ.ㅎ.ㅏ하.


책 자체도 작고 얇다보니, 백제 역사를 처음부터 끝까지 간략하게 한눈에 살펴보기엔 이 만한 역사책이 없지싶다. 





3) 백제왕의 죽음

이 책은 내가 고등학생 때 쯤 부터 우리집 책장에 꽂혀있던 책이다. 그때도 지금처럼 역사를 좋아한 건 매한가지였고, 심지어 그때는 부천역 교보문고랑 영풍문고를 제 집처럼 드나들때였기에 아마 그 즈음에 샀던 책이 아닐까 싶다. 다만 당시에는 책을 읽어도 어딘가에 기록한 적도 없었기에, 내가 이 책을 읽었을 때 어떤 생각을 가졌었는지.....뭐, 아마 당시에는 지금처럼 전문서적보다는 흥미위주의 대중서적을 읽다보니, 다 곧이곧대로 믿지 않았을까 하는 느낌이 들긴 하지만 ㅋㅋ


1n년이 흐른 지금와서 다시 읽어본 「백제왕의 죽음」이란 책은 두번 읽을 책은 아닌 느낌이다. 뭐라고 해야하나, 꼭 조선왕 독살사건 이란 책의 백제버전이라고 해야하나? 읽는 사람으로 하여금 ‘혹!!’ 하게 하는 그런 책이다. 한마디로 흥미위주의 책이랄까. 하하. 


이 책은 백제왕들의 죽음을 다루고 있으며, 백제왕의 죽음을 크게 3가지(의문사, 객사, 전사) 로 나누었다. 근데 의문사든 객사든 어느 에피소드를 읽어도 결국 ‘추정’으로 끝난다. 정확히는 본인의 추정을 ‘단정’한다. 뭐, 백제같은 고대사는 사료가 많이 남아있지 않다보니, 추정이 많이 들어갈 수 밖에 없긴하다. 단, 고대사를 추정하는데 있어서는 남아있는 사료(대내외기록, 문화재 등)를 분석하여, 당대의 기준으로 최대한 합리적이라 생각하는 쪽으로 추정한다. 그래서 같은 사건에 대해 어떤 사람은 A라고 추정하고, 또 어떤 사람은 B라고 추정하기도 한다. 이런 고대사의 추정은 들어보면, 둘다 그럴듯하기에 ‘오오! 그럴수도 있겠군!’ 할 수 있다. 단, 언제 어디서 또 다른 사료가 뿅! 하고 나타날 수 있기 때문에, 추정을 할 뿐 단정짓지는 않는다. 근데 이 책은.....자신의 주장을 추정을 빙자한 단정같달까. 음, 이걸 어떻게 표현해야하나. 뭐랄까, ‘조선왕의 1/3이 독살당했다’고 주장하는 그런 이야기와 비슷한 맥락으로 보인달까.



거기다 분명 책의 주제는 백제왕의 ‘죽음’인데, 책의 반정도 되는 분량밖에 안된다. 네, 그냥 뭐 그렇다구요. 백제사에 흥미를 가지는 초기 입문 대중서로는 썩 나쁘지는 않긴한데, 워낙 발매한지도 오래된 책이고, 백제사 초기 입문 대중서로는 지금 나온 책들도 잘나온 책이 너무 많으니(예를 들어 위에 쓴 「문화재로 만나는 백제의 흔적」 같은), 굳이 찾아볼 필요는 없는듯. 허허허하하.하ㅏㅏ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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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코와 함께 한 일본 사찰 순례 - 우리가 미처 몰랐던 불교의 나라 일본 이야기
나카노 요코 지음, 최선일.홍은미 감수 / 종이와나무 / 2018년 5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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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 「요코와 함께한 일본 사찰 순례」는 2018년에 출간되어, 당시에 읽었던 책이다. 거기다 아주 소오름돋게도 당시에 책을 읽고 리뷰를 남겼던 기록이 이 블로그에 고스란히 남아있다-_-;;; 당시의 리뷰 포스팅을 지금 읽어보니 참 쉽게도 썼다. 때마침 일본여행도 무비자로 풀렸고해서, 이 책을 다시 읽고 리뷰를 남겨보자 한다. 




나는 일년에 2~3회 일본을 갈 정도로 일본 여행을 좋아했다(물론 19년 4월 이후로 지금까지 일본을 못가고 있지만). 이렇게 일본을 가면 내가 주로 방문하는 여행지는, 흔하디 흔한 관광지보다는 주로 한반도와 관련된 유적지(고대부터 근대까지)를 찾아다닌다. 한국에서도 유적지를 찾아다니는데, 일본에서라고 다를까! 거기다 한반도 도래인과 관련된 유적지는 대게 사찰 아니면 신사다보니, 당연히 이 책을 읽을 수 밖에! 겸사겸사 도래인과 관련된 사찰이 아니어도, 일본에도 멋진 사찰이 많기도 하니까.



이 책은 저자의 나라, 교토, 시가 지역 사찰 여행기를 담은 일본 여행책이다. 해당 사찰에 대한 유래와 역사적 사건들, 사찰과 연계해서 가볼만한 곳 등이 이 책에 실려있다. 내 개인적으로는 어디를 가든, 그 곳에 대해 조금은 알고 있어야 더 재밌다고 생각하는 편이다. 그곳이 한국이든 외국이든. 하지만 한국인에게 일본 사찰은 그냥 외국 절 또는 관광 그 이상, 이하도 아닌 경우가 많다. 거기에 일본 사찰 유래라니, 모르는게 당연하달까? 그래도 알고 보면 좀 재미있으니, 아무리 일본에 놀러왔다고 하더라도, 조금은 알고 봤으면 좋겠다. 특히 한반도 도래인과 관련된 유적지는 더더욱 그랬으면 좋겠다. 그래서 혹시나 일본여행을 계획하고 있다면, 그중에서도 교토여행을 계획하고 있다면(나라, 시가 포함) 이 책을 여행책으로 추천하고 싶다.


한반도 도래인에 의해 창건되었거나, 도래인과 관련된 사찰들은 일본 곳곳에 산재해있다. 그중에서도 대표적인 곳이 대표적인 곳이 나라의 아스카데라, 호류지, 도다이지 등이다.


비행기가 없었던 옛날에도 배를 타고 한반도에서 일본을 건너온 사람들이 있었다. 바로 도래인이다. 5세기 이후 아스카에서는 한반도를 기원으로 하는 토기나 건물, 온돌 등 도래인의 흔적이 많아졌다고 한다. 『일본서기』에 의하면 도래인 기술자들을 아스카 마을 시마노쇼 부근에 정착시켰다고 한다. 도래인들은 건축, 야철, 방직, 토기, 문서 작성 등 여러 분야에서 활약하고 일본 문화와 기술발전에 크게 기여했다. 6세기 들어 백제에서 불교도 전래되었다. 지금은 일본에서 불상을 배례하는 것이 당연한 일로 받아들여지지만 당시에는 큰 충격이었음을 상상할 수 있다. p 017



아스카데라를 발원한 소가씨는 도래인의 후손으로 알려져있으며, 아스카데라를 건축한 기술자들도 도래인으로 추정된다. 실제로 도래인과 관련된 지역에서는 한반도계 유물들이 나오기도 하고, 인근 지명들도 백제(쿠다라), 고구려(코쿠리), 신라(시라기), 가야(카라) 와 관련된 것들이 많이 있다. 지금까지 내가 책으로 읽고, 직접 보고온 것으로 비춰볼 때 대체적으로 나라지역은 백제계 도래인이, 교토지역은 신라계 도래인이, 도쿄는 고구려계 도래인이, 큐슈는 가야계 도래인과 관련된 것들이 많이 보인다. 특히 고구려, 백제, 신라, 가야 도래인들은 기존에는 국가간 외교로 넘나들다가, 일본으로 대거 넘어간 시기는 대체로 각 국가들이 멸망했던 시기이다. 특히 백제부흥운동, 백촌강전투 패배를 기점으로 백제인들이 일본으로 대거 넘어가기도 했다. 



백촌강전투 당시에 일본 천황가는 신료들의 반대에도 무릅쓰고 백제에 대규모 군사지원을 하기도 했다. 왜냐? 다들 들어보았을 것이다. 일본황실에 백제인의 피가 섞여있다는 뭐 그런 이야기. 실제로 교토 히라노신사에서 모시는 네 명의 신이 모두 한반도 신이다. 뭐 걔중에서도 두 명의 신은 백제 근초고왕, 근구수왕 또는 한반도의 조왕신과 부엌의 불신이라고 하는데, 나머지 두 신은 확실하다. 두 신은 간무천황의 모친인 고야신립의 조상신과 백제 성왕이다. 간무천황의 모친인 고야신립은 무령왕의 자손이라고 하며, 백제 성왕이야 우리가 더 잘아니 PASS! ......는 어디까지나 말꼬리가 길어진 TMI. 


(*한반도 도래인 관련 도쿄, 교토 신사 및 사찰에 대한 내용은 일본여행 포스팅 곳곳에 있으니 궁금한 분들은 내 여행기 포스팅을 보면 될듯!)



다시한번 말하지만 이 책은 나라, 교토, 시가지방의 ‘사찰’여행기를 남은 책이다. 이 책에 실린 교토 사찰은 총 14곳인데, 그 중 8곳은 내가 가봤던 사찰이라, 그 사찰들을 위주로 기록을 해보려고 한다. 한마디로, 내 교토여행기 복기인셈! (나라, 시가지역은 여러 역사책으로만 익숙할뿐, 실제로는 아직 못가봤으므로^_T). 다만 아쉬운점은... 교토의 다이토쿠지가 없다는 것이다. 다이토쿠지 진짜 멋진 사찰인데T_T. 




▶ 덴류지(천룡사)


덴류지가 자리잡은 사가노, 아라시야마라고 불리는 이지역은 고대에 도래인 하타씨에 의해 개척된 곳이라고 전한다. 경치가 아름다운 이 지역은 헤이안쿄 천도 이후 천황가의 이궁과 귀족의 별장이 지어진 지역이 되었다. (생략) 임제종 덴류지파 대본산 덴류지는 1339년에 나라, 요시노에서 억울하게 죽은 고다이고 천황의 명복을 빌기 위해 아시카가 다카우지 장군이 무소국사를 개산조사로 창건한 것이다. p 152



14세기 중반에 일어난 화재를 비롯하여 8번 대화재의 피해를 입어 소실과 재건을 반복했다. 메이지 시대의 폐불훼석 때 사찰 땅이 메이지 정부에 많이 수용되어 버리고, 현재 사찰 경내지는 원래의 10분의 1정도가 되었다. 현재 경내에 있는 건물 대부분이 메이지 시대에 재건된 것이다. p 154


아라시야마는 교토에 갈때마다 들렸던 것 같다. 아무래도 교토 아라시야마를 개척, 개발한 사람들이 한반도 도래인인 하타씨다보니! 하타씨에 대해 조금 이야기하자면, 하타씨는 가야계 신라인 출신이라는 설이 제일 유력하다. 성씨는 한자로 ‘진(秦)’씨, 일본어로 읽으면 ‘하타’다.



 하타씨의 대한 흔적은 교토 곳곳에 산재해있다. 하타씨는 교토에 터를 잡고 아라시야마를 비롯하여, 교토 곳곳에 뿌리를 내렸다. 교토 아라시야마의 다리, 도월교 라던가 ‘술’ 신사인 마츠오신사는 하타씨 작품이다. 역시나 관광지로 핫한 ‘천개의 도리이’ 후시미이나리 신사도 하타씨의 작품이며, 교토 우즈마사 일대의 누에신사나 고류지, 뱀무덤 모두 하타씨가 시작이다. 하타씨의 부흥기를 일으킨 사람은 ‘진하승(하타노 카와카츠)’라는 사람으로 쇼토쿠 태자의 측근이기도 했다.


 


자, 그럼 ‘진씨’인 그들이 왜 일본에서 ‘하타씨’로 불리는가에 대해서는 여러 설이 있는데, 그중 하나가 바로 강원도에 위치해있던 고대국가 ‘파단국(파조국)’이다. 신라 지증왕 때, 그 유명한 신라장군 이사부가 실직국(삼척), 파단국(울진), 우산국(울릉도)를 점령하면서 이 땅이 신라에 병합되었는데, 당시 파단국에 있던 사람들이 바다건너 왜로 넘어가면서, 자신들의 이름을 ‘파단’의 일본 발음인 ‘하타’라고 정했다는 뭐 그런이야기다. 파단국이 신라가 되었으니, 결국 신라에서 왜로 넘어간 사람들이 되고, 자연스레 신라계 도래인이 된다고나 할까?




▶ 기요미즈데라(청수사)


도래인의 후손인 사카노우에 다무라마로는 임신한 아내에게 몸에 좋은 것을 먹이려고 기요미즈야마에 들어와 사슴을 사냥했다. 목이 말라 물을 마시려고 샘물을 찾아봤더니 오토와노타키 폭포를 찾았고 거기서 겐신을 만났다. 겐신에게 관음의 불살행과 대비의 마음에 대한 이야기를 들은 다무라마로는 큰 감동을 받아서 둘이 힘을 합쳐 함께 사찰을 건립하기로 약속했다. 780년에 기요미즈데라는 이렇게 사카노우에 가문의 사찰로 시작했다. p 115


교토의 핫하디 핫한 관광지 기요미즈데라. 교토에 간 한국인이라면 1번 이상은 갔을 것이다. 난 음...기요미즈데라를 세번갔나, 네번갔나. 여튼 자주 갔다. 이유인 즉, 남들처럼 기요미즈데라가 핫하디 핫한 관광지라서라가 아니라, 백제 도래인과 관련된 사찰이기 때문에 갔던 곳이다. 사카노우에 다무라마로는 일본 사서 <속군서류종(續群書類從)>에 따르면 290년에 백제에서 건너온 백제 왕족 ‘아지사주(아치노오미)’의 후손이라고 한다. 뭐, 여기서 조금 더 들어가면 ‘아지사주’는 야마토 아야씨의 조상이기도 하다고...는 역시나 TMI.



 


위 책에서 언급했듯 기요미즈데라를 건립한 사람은 사카노우에 다무라마로라는 사람이다. 헤이안시대 무관이면서 다이나곤 직책을 가졌던 나름 고위급 관리였다. 일본은 예로부터 한 가문에 종속된 신사나 사찰이 대다수였다. 그러한 맥락에서 기요미즈데라 역시 사카노우에 가문 사찰이었다. 실제로 현제 기요미즈데라 전각 중에는 ‘전촌당’이라는 전각이 있는데, 기요미즈데라를 창건한 사카노우에 다무라마로 부부를 모시고 있다. 다만 공개가 안되어서, 볼 수가 없다^_T. 특별한 날에는 공개를 한다고 하는데, 그 날을 잘 몰라서 ㅋㅋㅋㅋ 교토 갈때마다 키요미즈데라를 갔던 것 같다.



아참, 지금 기요미즈데라는 창건당시의 모습은 아니다. 기요미즈데라는 엔라쿠지 승병들의 잦은 습격으로 파괴와 재건이 반복되었고, 교토의 다른 사찰들처럼 오닌의 난때 완전 소실되었다가 에도시대 때 지금의 모습으로 재건된 것이다.




▶ 뵤도인(평등원)


산으로 둘러싸이고 비와코에서 내려온 우지강의 맑은 강물이 흐르는 풍광명미한 우지는 헤이안 귀족들이 별장을 짓는 곳이기도 했다. 뵤도인 시작도 9세기 중엽에 세워진 별장 우지원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주로 황실 일족이 소유하던 우지원을 후지와라노 미치나가가 998년에 물려받았다. 그는 이곳을 우지덴이라고 부르고 경승을 즐겼다. 그것을 미치나가의 아들인 요리미치가 물려받았다. 요리미치는 1052년에 본당을 건립했다. 이때부터 우지덴은 뵤도인이라는 사찰로 불리었다. 이것이 뵤도인의 시작이다. p 126


우리나라 수학여행 필수 코스 경주 불국사! 불국사 다보탑은 우리나라 10원 동전에 뒷면에 새겨져있다. 그렇다면 일본은? 일본 역시 수학여행 필수코스가 있는데, 그 필수 코스가 10엔 동전 뒷면에 새겨져있다. 바로 교토부 우지시에 있는 사찰 뵤도인. 다만 이 곳은 한국인 관광객이 그리 많은 편은 아니다. 음, 거의 없다고 하는게 맞으려나. 우리가 아는 교토는 교토부 ‘교토시’에 해당하다보니, 자연스레 교토 외곽인 우지는 한국 사람들이 잘 찾지를 않는다. 완전 멋진 곳인데.....ㅋ




우지라는 곳이 헤이안 시대 귀족들의 별장이 있던 곳이기도 했을뿐더러, 뵤도인은 무려 황실 일족의 별장이 그 시작이었으니 얼마나 화려한지는 두말 하면 잔소리. 뵤도인 인근에는 우지강이 흐르고 있는데, 그곳에 <겐지모노가타리>의 저자 ‘무라사키 시키부’ 동상도 있다. <겐지모노가타리> 자체가 헤이안 시대 고위층 귀족들의 연애(좋게 말하면..ㅋㅋ)를 담은 일본 최초의 고전소설이다. <겐지모노가타리>를 읽은 게 워낙 오래전이라, 그저 히카루 겐지가 여러 궁중의 여자를 후린(-_-;;) 독보적인 바람둥이 정도로 기억...나는데 흠 뭐 여튼! <겐지모노가타리>의 배경이 헤이안시대다보니, 자연스레 교토의 여러 장소가 나온다. 우지도 당연히 소설의 배경으로 나오는데, 그래서 우지강변에 무라사키 시키부의 동상이 있었나...기억이 가물가물. 확실한건 무라사키 시키부 동상을 발견하고 좋다고 사진 찍었다는 뭐 그런 TMI.




▶ 닌나지(인화사)


닌나지가 위치한 이곳은 헤이안 시대 초기부터 경승지로 알려져있고 많은 귀족이 별장을 지었다고 한다. 여기에 886년 고코천황이 사찰을 발원했다. 그러나 이듬해 고코천황이 세상을 떠나자 천황의 아들인 우다 천황이 아버지의 유지를 받들어서 888년 사찰을 개창했다. 당시의 연호인 ‘닌나’가 닌나지라는 사찰 이름으로 붙여진 연유다. 우다천황이 897년 31세때 왕위를 아들에게 양위하고 899년에는 출가해서 법황이 되었고 904년 닌나지에 어실을 만들었다. 법황이 거주하는 곳을 오무로 라고 부르는데, ‘닌나지에 있는 오무로’가 ‘오무로가 있는 닌나지’가 되어 이후로는 ‘오무로’가 닌나지 일대의 지명이 되었다. p 098



현재 닌나지 금당이 고토고쇼 시신덴을 옮겨 놓은 것인데 당시의 궁전건축의 특징을 보여주는 건물로 정말 귀중하다. 금당뿐만 아니라 닌나지는 전체적으로 우아하고 일본미를 느낄 수 있는 분위기를 갖고 있는데 역사적으로 황실과의 깊은 관계가 있는 것이 그 연유라 할 수 있다. p 101

*법황: 출가한 태상황

*오무로: 법황이 거주하는 곳



 


 

오무로 닌나지. 한국인들에게는 조금 생소한 사찰이지만, 교토에서는 벚꽃명소로 엄청 유명한 곳이다. 이곳에서 피는 벚꽃은 교토에서는 개화가 가장 늦은반면, 아주 큰 왕벚꽃이라 엄청 이쁘다. 특히나 벚꽃 사이에 있는 오중탑을 보면 ‘오오!’ 아. 물론 봄의 닌나지는...난 사진으로만 봤다 ^_^ㅋㅋㅋ


난 가을의 닌나지만 봤을 뿐이다. 헤헤히ㅣㅎ.ㅎ..히히. 모름지기 ‘벚꽃명소=단풍명소’가 아니겠는가? 멋진 단풍을 구경할 수 있을 거라 생각하고 들렀던 닌나지는, 역시나 어마무시한 단풍들이 내 눈앞에 쫘르르르르.



특히나 닌나지는 ‘오무로’라는 단어에서 알 수 있듯, 법황이 있던 곳이라 사찰의 위용이 대단하다. 당시 천황가에서 팍팍 밀어줬으니, 으리으리할 수 밖에! 물론 오닌의 난 때 다른 교토의 사찰들처럼 잿더미가 되어버렸지만, 에도시대에 고토고쇼의 건물 일부를 하사 받았다. 닌나지의 금당이 바로 고토 고쇼의 건물! 황궁의 건물을 사찰로 썼으니 으리으리할 수 밖에 ㅋㅋㅋㅋ




▶ 킨카쿠지(금각사)


킨카쿠지 정식 명칭은 로쿠온지라고 한다. 현재 킨카쿠지가 있는 곳이 원래 무로마치막부 3대 장군인 아시카가 요시미쓰의 별장 기타야마전이 있었다. ‘로쿠온’은 요시미쓰의 법호인 ‘로쿠온인’에 유래된다. 킨카쿠지라는 이름이 널리 알려진 것이 에도시대에 들어서다. (생략) 1408년에 요시미쓰가 세상을 떠난 후 기타야마전의 대부분이 해체되어 다른 사찰로 옮겨졌다. 유일하게 남은 것이 훗날 킨카쿠지라고 불리는 사리전과 정원이었다. 이 사리전을 중심으로 창건된 사찰이 바로 킨카쿠지다. 1420년 무렵에 덴류지 개산조사인 무소국사를 권청개산으로 기타야마전이 로쿠온지가 되었다고 전한다. p 160



창건 후 큰 전란이나 화재를 겪으며 버텨오고, 살아남은 킨카쿠지였지만, 1950년에 방화로 건물과 안에 있던 문화재 6점이 소실되었다. 범인은 킨카쿠지의 21세 학승이었다. 다행히 메이지 시대에 킨카쿠지를 해체, 수리했을 때의 기록이 남아 있어 이것을 기반으로 1955년에 복원되었다. 또 1987년에 보통 금박보다 5배 두꺼운 금박을 입혔다. p 163

*권청개산: 실제 개산이 아닌 신앙상 과거의 사람을 개산으로 할때, 그 사람을 가리키는 말


교토에서 기요미즈데라 만큼이나 핫한 사찰이 바로 킨카쿠지다. 아주 금빛이 번쩍번쩍해가지고 튀기도 엄청 튄다. 물론 원래 이름은 킨카쿠지가 아닌, ‘로쿠온인’. 그저 금박이 씌어있다보니, 에도시대부터 금각사라고 불렀을 뿐이다.



난 교토 핫한 유적지는 오픈런(ㅋㅋㅋ)을 하곤 한다. 그럼 대체로 사람이 없으니까. 후시미이나리신사가 그랬고, 기요미즈데라가 그랬다. 하지만 금각사는 네버. 오픈런이고 뭐고 걍 사람많다...ㅋㅋㅋㅋㅋㅋ 인파에 밀려 한바퀴 돌고나오면 끝! 근데 참 뭐라고해야할까, 금각사는 삐까뻔쩍하고 눈에 뛰긴하는데, 저게 끝이다보니... 여기 갈때마다 ‘내가 왜 또왔지?’ 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은각사는 정원이 멋지기라도 하지, 금각사는 음....^^




▶ 긴카쿠지(은각사)


긴카쿠지는 임제종 쇼코쿠지파에 속하는 선종사찰이고 정식 명칭이 긴카쿠지가 아니라 도잔 지쇼지라고 한다. ‘지쇼’는 8대 장군인 아시카가 요시마사의 법호에서 유래되었다. 1482년에 요시마사가 자신의 은거처로 건립을 시작한 별장인 히가시야마전이 긴카쿠지의 시작이다. 3대 장군 아시카가 요시미쓰의 손자인 요시마사는 8세라는 어린 나이로 8대 장군이 되었다. (생략) 요시마사는 1473년에서야 장군자리를 아들에게 물려주었고, 1477년 마침대 오닌의 난이 종결되자 젊었을 때 부터 갖고 싶었던 별장 짓기를 시작했다. 그것이 위에서 말한 히가시야마전이다. 요시마사가 1490년에 세상을 떠나면서 남긴 유언이 무소국사를 권청개산으로 한 선종 사찰, 바로 오늘날의 도잔 지쇼지-긴카쿠지가 되었다. p 171



긴카쿠라고 하면 원래 은박이 입혀 있었는지 없었는지에 대해서 논의가 있었다. 2007년에 실시된 엑스선 조사 결과, 은박이 입혀지지는 않았던 것으로 판명되었다. 은박을 입힐 계획이었다가 요시마사의 죽음으로 실현되지 않았다라는 주장도 있지만, 원래 긴카쿠라는 명칭은 에도시대의 자료에서 나온 것이지 창건당시의 이름이 아니다. p 172


위의 킨카쿠지에 이어 긴카쿠지도 아시카가 쇼군이 지었다. 정확히 말하면 킨카쿠지는 아시카가 막부 3대 쇼군(할아버지), 긴카쿠지는 8대 쇼군(손자)! 이 손자가 할아버지가 지은 별장인 킨카쿠지처럼 너~~~무나 별장을 짓고 싶었는데, 짓지를 못하다가 쇼군 자리를 자기 아들에게 물려주고서야 겨우 만든 별장이 바로 긴카쿠지다. 별장으로 짓긴 했는데, 정작 죽기 전에 이 별장을 사찰로 바꿨다는 그런 이야기다. 근데 이것마저도 킨카쿠지와 비슷한 것이, 킨카쿠지와 동일하게 권청개산을 무소국사로 했다는 것. 그러니까 하나부터 열까지 전부 자기 할아버지가 만든 킨카쿠지를 따랐다는 뭐 그런 이야기.



난 긴카쿠지가 원래는 은박을 씌우려고 했기에, 은각사라고 불리는 건 줄 알았더니만 그건 아니었나보다. 그냥 썰이었던걸로!





▶ 료안지(용안사)


료안지 자리에는 10세기 말에 천황의 발원으로 건립된 사찰이 있었고, 12세기 중반에 후지와라 가문의 귀족이 여기에 산장과 사찰을 지었다. 무로마치 시대에 들어 장군을 보좌하는 관령직을 맡은 호소카와 가츠모토가 이 땅을 양도받아 1450년에 기텐겐쇼 선사를 개산으로 료안지를 건립했다. 가츠모토는 기텐겐쇼선사에 깊이 귀의했었다. 두 분의 관계는 마치 북송 용안산 도설사의 종열선사와 재상 장상영의 깊은 관계와 비슷하다고 해서 사찰 이름이 료안지가 되었다. 료안지는 1467년에 시작된 교토를 중심으로 벌어진 큰 전란으로 소실되었다. 불행하게도 가츠모토는 그 전란 가운데 중심인물의 하나였다. 가츠모토가 죽은 후 가츠모토 아들이 사찰 재건에 나섰다. 석정은 그때 만들어졌다고 한다. p 164


료안지는 정말 고요한 사찰이다. 인근에 있는 금각사와는 전혀 다른 분위기랄까? 뭐 애초에 대부분의 관광객은 금각사를 가지, 료안지를 찾지는 않는다. 여기 진짜 힐링되는 사찰인데, 큽. 무엇보다 료안지의 정원인 석정(세키테이)는 ‘가레산스이식 정원’의 대표로 각광받는 곳이기도 하다. 대학 전공책에서 석정 사진을 봤을때는 별 다른 감흥이 없었는데, 실제로 와서 보니....오오. 너무 힐링되서 나중에 엄마아빠를 모시고 또 왔었는데, 엄마아빠는 아니었나보다ㅋㅋㅋㅋ. 나만 힐링되었던걸로.




 


 

▶ 난젠지(남선사)


난젠지 창건은 13세기 가마쿠라 시대이다. 지금 난젠지 자리에는 원래 가메야마 천황이 지은 이궁이 있었다. 이궁에서는 밤마다 나타나는 요괴에 시달렸다. 그때 법황이 되었던 가메야카가 고승에게 부탁해서 요괴를 없애려고 기도했으나 효과가 없었다. 그래서 도호쿠지의 스님에게 기도를 부탁했더니 효과가 있었다. 그후 가메야마 법황이 선사에게 깊의 귀의하여 1291년 이궁을 선종 사찰로 바꾸었다. 처음엔 사찰 이름이 젠린젠지 였다가 중국에서 일본에 전한 선종이 남긴 남종선이어서 난젠지로 바뀌었다. p 174



난젠지에서 입장료를 지불하고 들어갈 수 있는 곳은 주로 삼문, 방장, 난젠인이다. 지온인, 닌나지와 함께 ‘교토 3대문’으로 꼽히는 난젠지 삼문은 높이 약 22미터, 2층 누각으로 훌륭한 문이다. 중요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는 난젠지 삼문은 도쿠가와 이에야스와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아들인 히데요리를 중심으로 한 도요토미가 사이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희생된 사람들의 명복을 빌기 위해 1628년에 건립된 것이다. 일반 방문객은 2층에 올라갈 수 있다. p 175

*방장: 주지가 지내는 방


난젠지는 가을에 가면 정말 멋진 곳이다(인근 에이칸도 포함ㅋ). 단풍이 단풍이 아주 최고다! 거기다 수로각은 알아주는 포토스팟이랄까. 한국 관광객들도 꽤 오는 걸 보면, 어느정도 입소문을 탄 곳이긴 한가보다. 근데 한국 관광객들은 대게...수로각에서 사진만 찍고 가는게 함정ㅋㅋ



개인적으로는 난젠지 방장정원을 추천한다. 물론 유료입장이긴하지만, 단풍철에 방장정원에 들어가면...오!!! 방장정원이 이렇게 멋진 이유는, 역시나 난젠지가 천황가의 이궁이었기 때문에 그런게 한 몫한다. 역시 천황이든 법황이든 황실 출신이 만든 건물 출신 사찰들이 멋지긴 오지게 멋지다.




▶ 그리고 책에는 없는, 교토 다이토쿠지(대덕사)


대덕사는 교토에서 내가 정말 좋아하는 사찰이다. 정확히는 대규모 사찰단지(...) 라고 해야하나? ‘대덕사’라는 사찰을 중심으로 조그만 사원들이 경내에 옹기종기 포진되어있다. 무엇보다 한국사람들은 잘 모르는 곳이라고 해야하나, 잘 안오는 곳이라고해야나. 뭐 그렇다. 하지만 대덕사는 과거에 조선통신사가 잠시 머물던 곳이기했다는 점^^



다만, 대덕사를 포함해서 경내에 있는 수 많은 사원들을 전부 구경할 수는 없다. 상시개방되어있는 일부 사원만 구경할 수 있다는 것. 내가 갔을 당시만해도 4곳의 사원이 상시공개였다. 근데 그 일부 사원만 구경해도 시간가는 줄 모를 정도로 멋지다. 일단 사람없어서 고요하고, 정원이 너무 멋져서 사진찍느라 바쁘고, 가만히 앉아서 정원을 바라보고 있으면 힐링되고!




 

대덕사를 갔을 때 내가 제일 보고 싶은 곳은 ‘고토인(상시공개)’이었는데, 당시에는 내부보강공사중이라 들어갈 수 없었다^_T. 여기에 센노리큐가 소장했었던 조선의 석등이 있다고 했는데(아마도 임진왜란 당시 가져온 걸로 추정..?), 그래서 꼭 보고 싶었는데T_T. 근데 이게 무슨 횡재인지? 비공개 사원 중 하나인 ‘소켄인’이 가을 특별공개로, 한시적 공개가 되었다. ‘소켄인’은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오다 노부나가를 기리기 위해 건립한 사원인데, 이 안에는 오다 노부나가를 비롯한 오다 일족 묘소도 있다. 진심 완전 ‘개꿀bbb’. 당시 권력자인 도요토미가 건립해서 그런지, 정원도 공을 엄청 들인것 같고. 한마디로 멋졌다는 이야기.



‘소켄인’이 오다를 기리기 위해 도요토미가 건립한거라면, 반대로 오다가 도요토미에게 명해서 건립한 사원인 ‘오바이인’도 경내에 있다. 이곳도 원래 비공개 사원인데 가을 특별공개(개꿀^^)로 볼 수 있었다. 역시 당시 권력자가 건립한 사찰은22222


이 책 덕분에 교토 사찰여행을 복기하니, 다시금 가고 싶어진다. 흑. 이제야 일본여행이 무비자로 풀렸는데!!! 왜 가지를 못하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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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기묘한 미술관

난 독서를 즐기는 만큼, 책을 수집하는데도 꽤나 진심이다. 이 책 『기묘한 미술관』은 그 수집벽의 일환으로 읽은 책이다. 어쩌다보니 내 책장에는 『방구석 미술관』 시리즈와 『혼자보는 미술관』이 책장에 꽂혀있었다. 물론 내돈주고 산 책들은 아니고, 선물로 받은 책들이긴 했지만. 그래도 뭐랄까. 책장에 꽂혀있는 이 책들을 보니 미술관 시리즈를 완성을 시켜야 될 것 같은 그런 강박관념(?)이 생겨버렸다.

다만, 이런 류의 책은 돈 주고 사기엔 쵸오끔 아까운 느낌도 있다보니, 회사 독서통신(^^) 제도를 활용했다. 이럴땐 우리 회사 꽤 만족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이 책은 앞선 방구석 미술관 시리즈 처럼, 코로나 시국으로 인해 미술전시회를 온전히 활용하지 못하는 사람들을 위한 책이다. 물론 요즘은 위드코로나라고 해서 이것저것 방역도 완화하고, 출입제한도 완화해서 미술전시회도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지 갈 수 있다. 하지만 방역완화와는 별개로 확진자수는 n십만명 단위로 급증하고 있으니, 솔직히 나한텐 이런 전시회를 가는건 목숨을 거는 것과 같다고 본다. 뉴스에선 매일 독감정도라고 하지만, 대한민국에서 독감으로 매일 몇십만명이 걸린적이 있기나 했었나? 무엇보다도 사망자도 급증하는 추세고. 뭐, 누군 무증상으로 훅 지나갈지도 모르겠지만, 누군가는 코로나로 인해 목숨을 잃고 있으니 말이다. 그러니까 난 앞으로도, 꽤 오랜기간 직접 가서 보는 것보다는 이렇게 책으로 간접구경을 하는 편을 선택하련다.

행여 코로나를 뚫고 미술전시회 가서 명화들을 직접 본다고 할지언정, 옆에 해설사가 없으면 누가 그렸는지, 이 그림에 무슨 이야기가 있는지 모르는건 매한가지다. 그냥 몇 초간 그림만 멀뚱히 보다가 나올뿐. 반면에 안전하게 내 방구석에서 이 책 한권을 읽으면, 그림 속에 어떤 이야기가 남겨있고, 누가 그렸는지, 왜 이런 그림을 그린건지 한눈에 알 수 있고 얼마나 편하고 좋은가!

무엇보다 이 책에서 마음에 드는건, 그림 속에 있는 사연들! 애초에 책 제목 자체가 ‘기묘한’미술관이다. 즉, 미스터리한 이야기가 담겨있다는 것! 난 미스터리한 이야기도 늠나 좋아하다보니, 꽤나 내 취향을 저격한 미술책이라고나 할까?


2) 방구석 미술관

예전에도 이와 비슷한 책을 읽은 적이 있다. 책 한 권으로 손 쉽게 보고, 그 명화를 어떻게 해석하는지까지 알려주었던 책. 이 책도 그렇다. 책 한 권으로 내노라하는 명화들을, 내 집에서, 내 책상앞에서 마주할 수 있는거다. 미술관을 좋아하는데, 코로나19로 인해서 집 밖으로 나가지 못하는 사람들에게는 정말 단비와도 같은 책이랄까?

그저 단순하게 ‘이 그림은 이런 뜻이야’가 아니다. 이 그림을 그린 화가가 어떤 시대를 살았으며, 어떤 삶을 살았는지, 어떤 감정 속에서 이 그림을 그렸는지도 이 책 속에 있다. 단순히 그림 뿐만 아니라 그림을 그린 화가에게 초점을 맞춘, 그림을 인문학적으로 해석한 책이라고나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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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화문 괴담 - 오류와 왜곡에 맞서는 박종인 기자의 역사 전쟁
박종인 지음 / 와이즈맵 / 202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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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디!어! 땅의역사 5권 이래 박종인 기자님의 신간이 나왔다. 크흡 기다렸어요 신간 ㅠㅠㅠ 진짜 완전 정말로!!! 



인터넷 서점 알ㄹ딘, 예ㅅ24에 박기자님 신간 알람을 아주 당연하게 걸어놨기에, 알ㄹ딘에서 「광화문괴담」 예약주문뜨자마자 냉큼 주문했는데 이게 왠걸? 와이즈맵 출판사에서 도서협찬 메일이 왔고ㅋㅋㅋㅋㅋ 아쉽아쉽. 만약 기자님 친필 사인본(^^)을 준다고 했으면, 모르는척 하고 책을 받았겠지만 난 너무 양심적인 독자라(..) 이미 책을 구매했다고 고사해버렸다. 어차피...서평쓸거니까 ㅋㅋㅋㅋㅋ?



박종인 기자님의 역사책은 대체적으로(?) 자/타의에 의해 숨겨진 역사의 진실을 수면위로 끌어올리고, 타의에 의해 사실로 둔갑된 역사왜곡을 반박할 수 없는 증거(기록, 사진등)로 깨부순다. 근데 뭐랄까... 상상출판에서 출간되는 박종인기자님의 땅의역사 시리즈는 순한맛 이라면, 와이즈맵에서 출간되는 박종인 기자님 역사책들은 매운맛이라고 해야하나? 근데 난 역시 매운맛이죠아....ㅎ.....(실상은 맵찔이ㅋㅋ)



하지만 우리 뿡뿡이를 낳기 전 태교는 순한맛인 땅의역사 시리즈 정주행^_^ㅋㅋㅋ(TV프로그램 땅의역사 포함!) 이제 순한맛은 끝내고, 다시 박종인 기자님의 매운맛 「광화문괴담」 차례다!



이쯤에서 대놓고 역사책 추천하자면! 시중에 출간된 수많은 역사책 중에서 정말 읽을만한 역사책이 어떤 책인지 고르지 못하겠다면!! 학생들에게는 상상출판에서 출간되는 순한맛 땅의역사 씨리즈를! 어른들에게는 와이즈맵에서 출간되는 매운맛 대한민국징비록, 매국노고종, 광화문괴담을 아주 강력하게 추천하고 싶다. 이 모든 책들 리뷰는 내 블로그에 고스란히 있으니, 한번 슬쩍 훑어보고 선택하면 좋지 않을까.........하는 뭐 그런 이야기 ㅋㅋ



우리가 아주 당연하게 역사적 ‘사실’로 인식하는 것들. 그들 중 일부는 아~~~주 저명하신 전문가들이 역사적 사실이랍시고 TV에서, 책에서, 여러 매체에서 반복적으로 언급했기 때이다. 아~~~주 저명하신 전문가들이 역사적 ‘사실’이라고 계속 반복해서 말하니, 우리는 당연히 ‘사실’로 받아들인다. 왜? 전문가가 그렇다고 하니까!



설마 전문가들이 역사왜곡을 하겠어? 거짓부렁을 말하겠어? TV에도 자주 나오고, 책도 자주 쓰는 사람들인데?



정치에도 권력이 있듯, 문화에도 권력이 있다. TV에도 출연하고, 베스트셀러도 낸 저명한 전문가들이니 우리는 당연히 그들을 믿고, 우리의 믿음으로 그들은 문화권력을 갖게 되었다. 이게 무한 반복된다. 전문가인데 유명하고, 유명한 사람이 하는 말이니 사실이고, 전문가니 거짓말은 안할거라고 생각하는 안일한 믿음의 반복! 물론 그들이 하는 말이 전부 거짓말은 아닐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중에는 거짓이 숨어있다. 역사적 검증이 되지 않은, 뇌피셜로 끼워맞춘 그런 이야기들. 하지만 전문가이기에 그들이 하는 말은 그렇게 가짜뉴스가 역사의 ‘사실’이 되어버렸다.



이 책 「광화문 괴담」은 그런 문화권력자들이 만든 역사왜곡과 오류를 깨부수기 위한 책이다. 이 책에서 박종인 기자님이 깨부수는 역사왜곡, 역사의 가짜뉴스는 총 16편! 이 16편은 많은 사람들이 역사적 ‘사실’로, 아주 당연하게 받아들이고 있는 이야기다.



-청와대는 예로부터 천하 명당?

-풍수지리로 만든 조선의 수도 한성?

-조선 500년 간 광화문 앞에 월대가 있었다?

-일본 군 말 위령비가 조선 왕실 제단?

-고종이 '고종의 길'을 통해 러시아 공사관으로 달아났다고?

-남대문이 임진왜란 일본군의 개선문?

-총독부가 경희궁을 없앴다고?

-원나라가 고려왕을 강제로 사위로 삼았다?

-베트남 호찌민의 애독서가 <목심심서>?

-추사 김정희가 명필 이광사의 현판을 떼라고 했다고?

-선조가 류성룡의 반대로 명나라 망명을 단념했다고?

-정조가 조선 학문 부흥을 이끈 왕?

-실학이 조선에 영향을 미쳤다고?

-의병장 최익현이 대마도에서 아사순국?

-헤이그밀사 이준의 할목자살은 '대한매일신보'의 가짜뉴스!

-나라는 팔렸는데 조선왕실은 그대로!



아마도 대부분의 사람들이 전부 역사적 사실이라고 믿고 있는 내용이 아닐까? 8번째 주제인 원나라가 고려왕을 강제로 사위로 삼았다는 가짜뉴스에 대해선, 최근에 들어서 고려가 계속 사위삼아달라고 거듭 요청해서(!!) 라는 내용이 여러 TV 프로그램에서 나왔으니, 그나마 아주 살짝(!) 바로잡힌 내용중 하나라면 하나랄까. 하지만 대체적으로.. 많은 사람들은 저 내용 그대로가 역사적 ‘사실’이라고 믿고있는다. 왜? 전문가들이 그랬거든. 그런 전문가들 중에는 문화권력을 제대로 쥐고, 한자리 하고 있는 인물들이니까^^! 거기다 누군가가 역사적 ‘사실’이 아니라고 지적을 하면 ‘니가 감히?’ 라는 시선들이 따라오기도 하고. 


세종대왕과 이순신 장군과 다산 정약용과 개그맨 유재석은 금기라는 우스개가 있다. 함부로 비판하거나 비난하면 위태롭다는 뜻이다. 그래서 김정희는 역사적 인물이 아니라 역사적 권력이다. 세종도 그러하고 정약용도 그러하다. 김정희와 세종과 정약용을 찬양하는 사람들은 전문가로 인정받는다. 그 전문가들은 이제 스스로 권력자가 된다. p 010



“전설도 사람들이 믿으면 사실이 된다.”

이렇게 말한 사람은 독일사람 요제프 괴벨스가 아니라 한국사람 유홍준이다. 맞다. 전 문화재청장이고 <나의 문화유산답사기>라는 불후의 명작을 서술한 그 사람이다. 여러 경로를 통해 유홍준은 이렇게 설파했다. “전설도 사람들이 믿으면 사실이 된다. 굳이 ‘전설에 따르면’ 이라고 붙일 이유가 없다.” 셀 수 없이 많은 저작과 강연 중에서 그는 이렇게 말했다. 한두 번도 아니고 여러 번. 필자와 전화통화에서도 똑같은 말을 했다. 

‘거짓말도 반복하면 사실이 된다’는 괴벨스 말은 워낙 유명하니 모를 리 없으리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말을 했다면 ‘전설도 사람들이 믿게 되면 사실이 된다는 신념의 소유자’라는 뜻이다. 사실여부와 상관없이 전설을 거듭 말하면 사람들이 믿게 되고 그 믿어진 전설(근거가 있든 없든)이 사실을 대체해도 무방하다고 생각하거나 대체하기를 기대한다는 뜻이다. 전설이 사실을 이기는 것이다. 그래서? 재미와 교훈은 찬란하게 빛나고 진실은 ‘사망’한다. p 010



전 문화재청장 유홍준 교수와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이 책들 중 몇권은 우리집에 있다. 특히 일본편이 나왔을 때는, 한일고대사를 좋아하는 나로써는 반갑기 그지 없었다. 반가운 마음과 유홍준 이라는 네임벨류에 대한 기대감에 가득찬 채 책을 읽었는데, 하! 안읽음만 못했다. 특히 아스카, 나라편은 정말 실망실망대실망. 오죽하면 그 마음을 블로그 리뷰 포스팅에까지 썼을까. 내가 전문가는 아니지만, 그래도 한일고대사 관련 책을 나름 닥치는대로 읽어온 나인데, 그런 나조차도 실망했다. 책을 쓸거면 조금만 더 자료를 찾아보고 썼다면 좋았을텐데- 하는 그런 마음이었달까. 하긴, 생각해보면 추사 전문가라는(!) 유홍준 교수가 출간한 <완당평전>은 비전문가였지만 추사 애호가였던 한 사람에 의해 200여군데 이상이나 오류를 지적당했다지. 그렇게 유홍준 교수의 <완당평전>은 자의반, 타의반 절판처리되었다. 그리고? 이후에 다시 유홍준 교수는 <추사 김정희>라는 책으로 이름을 바꿔서 다시 출간! 추사에 대해 기본적인 것만 알고 있는 나로서는, 괜히 읽었다가 곧이곧대로 믿어버릴까봐 읽어보진 않았으나, 절판처리한 그 책 내용의 많은 부분이 그대로라고 하는데 음. 근데 베스트셀러^^. 네, 뭐 그렇다구요. 하하하.



이때 깨달았던게 ‘아, 저명하고 유명하신 전문가는 네임벨류만 있으면 뇌피셜로 말해도 사람들이 다 믿는구나!’ 라는 거였다. 이후 내가 역사책을 고를 때, 책을 선택하는 방법 중 하나가 지은이가 전문가라고해서 무조건 읽지않기, 신봉하지 않기였다. 실제로 비전문가여도 전문가 뺨치게 파고들어, 사실을 연구하는 사람들도 많다는 것을 알았으니까(이쯤대면 비전문가가 아니라, 전문가라고 해도 이상하지않겠지만).



고로 전문가라고 역사왜곡 안하는게 아니고, 반대로 비전문가여도 전문가보다 더 치열하게 연구하고 제대로 알고 있다! 라는 뭐 그런 이야기?


청와대가 터가 예로부터 명당이라는 것은 이곳에서 발견된 '天下第一福地'라는 문구에서도 엿볼 수 있다. 1990년 노태우 대통령 시절 현재의 본관 집무실이 공사를 진행할 때 북악산 기슭 암벽에서 발견됐다. 그 기원을 알 수 없지만 이 '천하제일복지'란 언급은 청와대 풍수에 대한 관심을 다시 불러 일으켰다. (중략) 그렇다면 청와대 풍수의 핵심은 어디일까. 김두규 교수는 "현 수궁터, 처오아대 구본관이 있떤 자리가 중출맥의 기세가 온전히 전해진 진혈 자리에 해당된다"면서 "주산(북악산)에서 내려온 내룡이 내려앉은 곳"이라고 했다. 현재 이곳에는 천하제일복지라는 표지비석이 있고, 야트막한 동산이 조성돼 있다. (2022년 5월 31일 <매일경제> '풍수학자 김두규 교수와 청와대 가보니…북악산 기운 꿈틀대는 용맥') p 021


삼각산의 정기를 이어받아 북악을 거쳐 경복궁 쪽으로 길게 뻗어 내린 이곳은 일찍이 명당으로 알려져 고려 숙종 9년 1104년 왕실의 이궁이 자리잡았던 곳이다. 이 가운데 융문당과 융무당이 있던 높은 터를 경무대라 불렀다. 예로부터 천하제일복지라고 알려졌던 이곳 명당 터에 일제는 1939년 7월 총독관사를 건립하여 민족정기 단절을 획책함으로써 이 건물은 경복궁 내 조선총독부 청사와 더불어 외세 침탈의 상징이 되었다. (청와대 안내판) p 029


청와대가 ‘예로부터(!)’ 천하제일의 명당이라는 이야기는 하도 많이 들어서 귀에 딱지가 앉아있을 정도다. 지금은 청와대가 개방되었지만, 개방되기 전 광클에 성공한자들만 갈 수 있다는 청와대 관람을 나역시 몇번 갔었는데, 그때마다 해설사가 꾸준히 이야기 한 말이다. 뿐만인가? TV에서도 하도 말해서 전 국민이 청와대는 천하제일의 명당이라고 생각한다. 그 이유는 단 하나, 바위에 새겨진 ‘천하제일복지’라는 문구. 언제 새겨졌는지 모르지만, 이걸 증거로(!!) 청와대는 정말 천하제일의 명당이다! 라는게 그 이유다. 그래서 나도 이 말을 믿었다지.......^^?





근데 여기서 반전. 이 ‘천하제일복지’라 새겨진 문구에 대해선 이미 연구결과가 나와있었다. 화강암에 음각한 획의 풍화정도가 깨끗하고, 비바람에 약한 화강암의 특성을 고려하면, 이 각자가 새겨진 건 빨라야 1850년대라는 결론. 거기다 필체는 12세기 남송시대 명필가인 ‘연릉오거’의 필체를 따라한 거라고! 하지만 이런 연구결과는 휴지통으로 슝슝슝. 청와대 부지가 ‘예로부터’ 명당이라는걸 널리 알리려면, 이런 연구결과는 알려지면 안되니까! 이 연구결과가 휴지통으로 들어가는 바람에, 이 각자가 왜 돌에 새겨졌는지조차 알려지지 못했다는건 함정이다.



청와대가 천하제일의 명당이라고 알리고 싶은 사람들은 신경안쓰겠지만, 이 각자가 새겨진 1850년대는 흥선대원군이 당백전까지 미친듯이 발행하면서, 무리하게 경복궁을 중건하던 시기였다. 청와대부지가 원래는 경복궁 부지라는 것을 감안한다면, 네. 그렇죠. 경복궁 중건의 명분을 만들이 위한 흥선대원군의 한 수! 그러니까 흥선대원군이 만든 가짜뉴스를, 전문가라는 사람들까지 지금까지도 옳다구나!하고 답습 중^^



세종 때 조성된 월대는 임진왜란으로 경복궁이 화재로 소실되면서 사라진 것으로 판단되며, 1867년 경복궁 중건 당시 광화문과 함께 다시 세워진 것으로 추정된다. 기록에 따르면 광화문 앞에서는 왕실의 환궁 행사, 중국 사신을 맞이하는 행사, 장례 등 왕실의 주요 행사를 거행하였으며 백성과 소통하는 공간으로 활용하였다. 광화문 월대는 행사용 무대와 같은 기능으로 사람들에게 구경이 가능하도록 개방되었다는 점에서 금단의 영역인 궁궐과 백성의 거주지 사이를 연결해주는 역할로 의미가 있다. (명지대학교 한국건축문화연구소,《경복궁 광화문 월대 및 동,서십자각 권역 복원 등 고증조사 연구용역 보고서》, 문화재청,2018) p 055


따라서 '월대 복원'은 왕도정치와 시민주권을 연결하고 소통하는 역사적 가치와 화합, 통합의 미래적 가치를 담는 상징적 표현이다. (<2020년 문화재위원회 제9차 사적분과위원회회의록>문화재청, 2020년 9월 9일) p 055



오랜 세월 역사 속에 잠들어 있었던 경복궁 앞 월대의 복원은 조선시대 왕과 백성이 소통하고 화합하던 상징적 공간의 복원으로 그 역사적 의미가 남다르다. (2021년 4월 27일 서울시장 오세훈 긴급 브리핑) p 057


백성과 소통공간이라던 광화문 앞 월대. 그래서 억소리나는 국비와 서울시비를 들여서 복원한다는 월대! 어마어마한 세금이 들어가는 이 복원공사의 명분은 슬프게도 가짜뉴스다. 더 웃긴건 광화문 앞 발굴조사 시 ‘고종 이전 시대 월대 흔적이 나오지 않더라도 월대 복원공사를 강행’한다고 했다. 뭐 정확히 저렇게 말한건 아니지만, 문화재청장이 고종 때의 경복궁 완공 시점인 1888년부터 궁궐로서의 기능 상실 이전 시기인 1907년 까지를 복원 기준 연대로 잡았는데, 혹시나 그 시기 이전의 월대 흔적이 없어도, 없는 걸 복원한다는 뭐 그런이야기?



애초에 정도전이 설계했을 당시의 경복궁도 아니고, 임진왜란 전의 경복궁도 아닌, 고종시대 ‘전제’ 왕권강화를 위해(!) 급격하게 비대해진 경복궁을 복원한다는 것도 웃기는 짬뽕인데, 거기에 세종때는 없었던 월대를 굳이 세종까지 운운하면서 복원한다고 하니 뭐. 억소리나는 세금을 이렇게 마구잡이로 쓰는게 우리나라 행정이지, 암 그렇고 말고.



세종 때 월대가 없었음은 실록에서 아주 대놓고 증언하고 있다. 오히려 세종은 농사에 방해된다며 월대공사를 기각! 이 외에 세종 때의 월대에 대한 기록은 실록에 전무하다. 그럼 고종 때 만들어진 월대는 백성과 소통의 공간이었나? 그것도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다. 그런데 참 이상하게도 경복궁 월대는 문화재청은 세종 때 국민과 소통의 장소라고 하고, 정부와 서울시는 억소리 나는 돈을 들여 월대를 복원한다고 하고!! 당시 정부는 이상하리만치 고종을 미화하는 것을 뛰어넘어 띄워주기를 해댔는데, 꼭 광화문앞 월대복원도 그 연장선상에 있는 게 아닌가 싶은 의심아닌 의심이 든다. 있지도 않은 ‘고종의 길’ 복원한다고 했을 때 부터 알아봤어 아주-_-.




문화재청은 용산 미군기지 내 미대사관 예정부지 약 2만 4,000평에 대한 지표조사를 국립문화재연구소에 의하여 2005년 6월 16일, 28일(2일간) 실시하였습니다. 조사결과 소량의 조선시대 토기편 및 백자편, 기와편 및 석재를 비롯하여, 조선시대 제천행사를 거행하던 '남단' 자리(추정)을 확인한 바 있습니다. (2006년 문화재청 확인감사 김재윤 의원(민주당) 서면답변) p 073


"거기에요. 그것이 있는가 없는가 봤더니 있어요. 남단이 있는게 아니라, 주춧돌과 위에 흐트러져 있는게 이 자리다, 하는 사이트는 정확하게 짚을 수 있고, 그 남단의 의미는 굉장히 크고…" (유홍준 용산공원조성추진위원회 민간공동위원장, 2020년 1월 7일 CBS<시사자키 정관용입니다> 인터뷰) p 073


진심 전문가들이 만든 역사왜곡 중 제일 웃긴게 용산공원 남단 터다. 비전문가인 내가봐도 일본식 비석 기단인데, 무엇을 보고 남단 터라고 했는가 싶은? 아니 왜성이나 일본비석 기단을 봤다면, 이걸 구분못할리가 없는데? 우리나라 방식과는 대놓고봐도 다른데, 대체 어딜 어떻게 보고 그 석재가 남단 터라는 것인지. 진짜 기가막히고 코가막힐 노릇이다. 문화재청장이자, 현 용산공원추진위원장이라는 유홍준 교수나, 그걸 곧이곧대로 믿는 다른 전문가들이나 정부나. 어휴. 심지어 그 석재가 일본군 야포병연대가 포 운반을 위해 동원된 말들을 위해 새운 추모비라는 사진까지 있는데? 



백번 양보해서 일본군 말 추모비 사진을 찾지 못해서 모른다고 치더라도 문화재청 정도 되면 왜성 축성방식은 잘 알텐데 말이다. 심지어 왜성은 우리나라 남부지방에도 고스란히 남아있잖아? 일본식 탑 기단은 우리나라 곳곳에 아직도 남아있고. 나만해도 이런 일본식 탑 기단을 목포에서도 봤고, 포항에서도 봤는데 허 참. 오백번 양보해서 일본군 추모비 사진이라는 것도 못봤고, 왜성 축성방식이란 걸 몰랐다고 치자. 그럼 남아있는 남단에 대한 기록은 연구를 안했나? 왜 기록의 위치와는 전혀 다른 곳을 남단이라 칭하는걸까? 진짜 문화재청 직원들은 일을 안하나....뭐지 정말?



남단 받고 하나 더!


1904년 러일전쟁을 계기로 일본군은 대륙 진출을 위한 군용철도를 건설하는데, 그 정거장 위치가 현 신용산역이다. 철도역 주변과 군사기지를 중심으로 일본인 신시가지가 급속도로 건설됐다. 그 철도 동쪽에 건설한 군사기지를 일본군은 용산기지라고 불렀따. 용산공원 역사 설정을 주도한 유홍준은 이렇게 말했다. 

“거기 있는 산을 용산이라고 그랬으니까, 용 용자에 뫼 산자로 해서” (2020년 1월 7일 CBS<시사자키 정관용입니다>)


용산이 용산공원에 있따고? 괴담이 아니라 무식이다. 문화재청장을 역임하고 용산공원 설계를 총책임지는 지식인 입에서 이런 천박하고 무식한 말이 튀어나오다니. 믿을 수 없다.


유홍준이 말한 ‘거기’ 용산공원 부지에는 용산이라는 산도 없었고 따라서 아무도 이곳을 용산이라고 부르지 않았다. 옛 용산은 서대문 쪽 안산 줄기에서 한강 쪽으로 뻗어있는 산줄기가 용을 닮아 붙은 이름이다. 지금 원효대로 좌우측 지역, 구체적으로는 숙명여대-효창동-공덕동-용문동-원효로2가 지역이 옛 용산이다. 그래서 조선후기 공식 명칭은 ‘용산방’이었다. 


그렇다면 용산공원 부지는 무엇이었나. ‘둔지방’이었다. 용산방은 ‘용산’을 중심으로 한 행정구역이었고 둔지방은 이곳에 있는 ‘둔지산’을 중심으로 존재했던 행정구역이었다. 둥지방에 있는 산 이름은 유홍준이 믿는 것처럼 ‘용산’이 아니라 ‘둔지산’이다. ‘자연이 단절돼 있다’는 승효상 주장과 달리 엄연하게 지금 용산공원 안에 우뚝 솟아 있는 그 둔지산이다. <대동여지도>에 표시된 산줄기가 바로 둔지산이다. 용산이 아니라 둔지산이다. 지금도 여전히 존재하는 따라서 ‘다시 잇는 작업’이 필요 없는 둔지산이다. p 086 ~087


더 말해 뭐하겠는가. 문화를 권력으로 쥔 사람들이 사실을 알고 은폐한건지, 아니면 진실을 모르는 상황에서 본인의 뇌피셜로 구성한건지. 문제는 이런 문화권력자들의 입에서 나온 말들이 아주 당연하게 ‘사실’로 받아들여진다는 것.




베트민의 호찌민이 부정과 비리의 척결을 위해서는 조선 정약용의 <목민심서>가 필독의 서라고 했다는 이야기가 전하고 있으니, 이런 것을 그분 위대함의 보론으로 삼고싶다.(유홍준<나의 문화유산 답사기> 1권, p70) p169



베트남 국민이 가장 존경하는 호찌민 주석의 애독서가 조선시대 유학자 정약용 선생이 쓴 <목민심서>라는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입니다. (2017년 11월 11일 '경주 세계문화엑스포' 개막식, 문재인 대통령 축하영상 메시지) p173


호찌민의 애독서가 <목민심서>라는 이야기는 전 문화재청장 유홍준 교수가 TV에서 하도 말을 많이해서, 아마 다들 속고 있는 가짜뉴스 중 하나가 아닐까. 문재인 전대통령까지도 저렇게 말할 정도면, 거의 전 국민이 다 믿고있는 가짜뉴스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듯하다. 뿐만 아니라 소설가 황인경, 시인 고은, 다산연구소 이사장까지도 같은 말을 반복해서 했다. 



호찌민의 <목민심서> 애독서 설은 시간순으로 보면 ‘소설가 황인경(<소설 목민심서>, 1991) - 유홍준(<나의 문화유산 답사기>, 1993) - 시인 고은(<경향신문> 인터뷰, 1994) - 다산연구소 이사장 박석무(다산연구소 2004)’ 라고한다. 이들은 호찌민의 목민심서 애독서/필독서 주장을 하면서, 정작 호찌민이 어떤 경로로 <목민심서>를 입수했는지에 대한 근거는 대지 않았다. 그러니까 소설가를 통해서 시작된 이야기는, 저명한 전문가를 거쳐서 역사적 사실이 되었다. 심지어 2009년에 또다른 소설가 안재성은 박헌영을 통해 호찌민이 <목민심서>를 선물받았다는 살을 붙이면서, 호찌민의 <목민심서> 필독서 설은 근거까지 완벽한 사실이 되고 말았다.


박헌영이 국제레닌학교에 입학한 1929년 호찌민은 정글 속에 있었다. 1919년 프랑스 파리에서 활동했던 호찌민은 1923년 모스크바로 가서 동방노력자공산대학에 다니며 활동한 뒤 중국을 거쳐 1928년 태국 방콕에서 본격적인 반제국주의 투쟁을 하고 있었다. 두 사람이 모스크바에 체류한 기간이 겹치지 않는다. 만남 자체가 불가능했으니, 앞의 <박현영 평전(소설가 안재성)>의 주장은 참고할 가치가 없다. p 179



1902년 장지연이 처음으로 <목민심서>를 출간했다. 그 전에는 지방 관청에서 저마다 만든 필사본밖에 없었다. (중략) 정약용이 흘려 쓴 글을 활자로 옮긴 한분본에 분량 또한 48권 16책으로 방대하다. 아무리 한자권 지식인이라도 호찌민이 정글에서 들고다니며 애독하는 것은 상식적으로 사리에 맞지 않는다. 게다가 박헌영은 <여유당전서> 출간 전인 1929년 국제레닌학교를 졸업했다. 호찌민은 박헌영을 만날 방법이 없었고, 정약용의 존재 자체를 알 방법이 없었다. p 180


소설가에서 시작한 말들은 말그대로 소설이다. 그걸 곧이곧대로 받아들이는 전문가라니. 아, 물론 내용이 워낙 우리에게는 빛나는 이야기니 혹 할 수 있다. 하지만 전문가잖아, 아무리 믿고싶은 이야기라도 사실인지 아닌지 연구정도는 해봐야하는거 아닌가? 근데 느낌적인 느낌상 알면서도 이런 가짜뉴스를 미친듯이 퍼트리고 다니는 것 같기는 하다만...



호찌민이 있던 베트남에서조차도 ‘목민심서 호찌민 애독서’ 설은 명백한 허위, 가짜뉴스!! 라고 이야기 했다.


2006년 1월 9일 <연합뉴스> 베트남 특파원 김선한은 ‘호찌민박물관과 집무실에는 <목민심서>가 없다’고 보도했다. 김선한은 “<목민심서>와 관련된 주장은 와전된 것이 분명하다”는 응웬티띵 관장 말도 함꼐 전했다. 김선한은 “한국에서 호찌민 <목민심서> 애독설이 나올 때마다 베트남 주재원들이 본사로부터 사실 파악 지시가 빗발쳐 생고생을 했다”고 했다. 띵 관장은 이렇게 말하기도 했다. “한국이 일본에 대해서는 역사왜곡하지 말라고 하면서, 왜 우리에게는 그것을 자행하는가.” p 181



현지에서조차 역사왜곡을 하지말라고 하지만, 띠링! 우리나라의 저명한 전문가들은 신경도 안쓰는걸?



“전설도 사람들이 믿으면 사실이 된다.”라고 본인 입으로 말한 아주 유명하고 저명한 전문가의 말은 아주 완벽하게 들어맞았다. 전문가와 국가기관, 유명 연구소등이 나서서 역사왜곡이 담긴 가짜뉴스를 아주 수도없이 온갖 매체에서 떠벌렸고, 그 결과 대다수의 국민들은 가짜뉴스를 그저 찬란하고 빛나는 우리 역사라 생각하며 ‘사실’로 받아들였으니까.



정말 역사왜곡에 대해선 진보정권이든 보수정권이든 넘 똑같아서 실망이고 소름이다. 역사를 배우면서 그 속에서 내가 가는 길이 옳은 길인지 아닌지, 중심을 잡고 나아가는 것인데, 이런 왜곡된 역사 속에서 대체 뭘 배우라는건지. 그저 우리의 역사를 빛나는 역사로만 기억되게 하려는 건가? 어둡고 슬픈 역사는 숨겨버리고? 뭐, 생각해보면 지금까지 배워온 역사는 대체로 빛나는 역사의 비중이 엄청 높았지. 아니 거의 대부분이라고 해야하나? 정작 지구 반대편에 있는, 우리가 선진국이라고 이야기하는 그런 나라들은 어두운 역사 교육에도 상당부분 할애한다던데. 참으로 비교되는군.



아참참참, 참고하자면 이 책에서 다루는 역사왜곡은 모든 정권을 망라했다. 그러니 혹시나 한 편으로 치우쳐져있는건 아닌지 의심하는 사람들은 그 의심을 접도록! 그나저나 지금 정권은.... 요즘 핫한 국가교육위원회 위원들도 그렇고, 서울시 총독부 사진이나, 축제에 일왕, 일본순사옷 입고 사진찍기 부스도 그렇고, 대체 왜들그러는건지. 자라나는 아이들이 대체 뭘 보고 배우겠냐구요.



이제 4개월된 우리 뿡뿡이......이런 역사왜곡 속에서, 올바른 역사를 가르치려면 어떻게해야하나T_T 한숨이 절로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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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한 식물의 세계 - 끝내 진화하여 살아남고 마는 식물 이야기
김진옥.소지현 지음 / 다른 / 202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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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동안 알라딘 펀딩에서 내가 원하는 책이 없었는데, 간만에 내가 원하는게 나왔다. 일종의 식물책인 「극한 식물의 세계」. 물론 가드닝책은 아니다. 엄연히 따지면 식물의 진화(?)에 대한 책이랄까? 식물의 진화 중에서도 유독 ‘극한 환경’에 진화해온 식물들에 대한 이야기다. 이런 식물책... 식집사로써 그냥 지나칠 수 없으므로 ㅋㅋㅋㅋ 펀딩을 안할 수가 있어야지!!




식물은 지구에 언제 나타나게 된 것일까요? 또 최초의 식물에서 지금의 식물까지, 식물은 어떤 과정을 거쳐 진화해온 것일까요? 이를 알기 위해서는 45억 7,000만 년이라는 지구의 역사와 지질시대를 함께 알아보아야 합니다. 고작 100년을 사는 우리 인간으로서는 지구의 역사라는 이 방대한 시간을 실감하기가 아주 어렵습니다. 그래서 지구의 역사 약 46억 년을 1년으로 바꾸고 지금까지 밝혀진 그동안의 일들을 달력의 날짜별로 나타내려 합니다. p 013



식물의 첫 탄생이 고...고생대다. 고생대. 전형적인 문과체질인 나에게 지구과학이란 넘나 먼 이야기인 것^_T. 선캄브리아기, 고생대, 중생대, 신생대..................ㅋㅋㅋㅋ 하 ㅋㅋㅋㅋ. 그저 ‘중생대=쥐라기월드’, ‘신생대=오스트랄로피테쿠스’가 끝이다보니, 순간적으로 동공지진이 일어났지만 잘 참아내었다. 하하하하하 ㅋㅋ



그나마 친절한 저자님들이 45억 7천만년이라는 지구의 역사를 1년(365일)로 환산하여, 간략하게 보여주셔서 얼마나 감사한지. 네, 진짜 정말 감사해요. 안그러면 진짜로 책 덮었을..뻔...ㅋㅋㅋㅋ




 


지구의 역사인 46억 년을 1년 달력으로 바꾸면 1월 1일 0시에 지구가 탄생했으며 바로 지금은 12월 31일 밤 12시 정각이 됩니다. 그리고 지구의 역사에서 약 3억 8,333만 3,333년이 1년 중 한 달을 차지하게 되며, 1,260만 2,739년은 하루, 52만 5,114년은 1시간, 8,762년은 1분, 146년은 1초가 됩니다. p 013



지구 탄생을 1월 1일 0시로 했을때, 지구에 식물이 최초로 나온 시간은 11월 24일이다. 지금으로부터 약 4억 6천만년 전 쯤이라고 한다. 이때 등장한 최초의 식물 모습은 ‘이끼식물’. 아! 다시다시, 이 때 이끼식물이 갑자기 뿅!하고 나타난 건 아니다. 11월 23일(캄브리아기)때 바다에 조류가 발생하였는데, 이 조류 중에서도 녹색을 띄는 녹조류. 그들의 식물의 조상이 된다.



지구가 1월 1일 0시에 탄생했다고 한다면 식물은 11월 24일(4억 6,600만 년 전)쯤에 ‘이끼식물’의 모습으로 나타났습니다. 그 후 3일이 지난 11월 27일(4억 2,800만 년 전)쯤 관다발을 가진 ‘고사리 식물’이 등장했습니다. 그리고 이 고사리식물은 12월 초(3억 4,000만 년 전~2억 8,9000만 년 전)에는 지구에서 가장 번성한 식물이 되었습니다. 고사리식물이 번성하던 그 무렵에 씨앗을 가진 원시적인 ‘겉씨식물’이 나타났습니다.겉씨식물은 포자로 번식하던 이전 식물들과 다르게 씨앗, 즉 종자로 번식합니다. 겉씨식물은 지금은 멸종되어 사라진 공룡과 함께 12월 20일(1억 3,800만 년 전)까지 지구를 대표하던 생물이었습니다. 마지막으로 중생대가 끝나는 시기인 12월 21일(1억 2,600만 년 전)에 ‘속씨식물’이 등장했습니다. 속씨식물은 12월 말인 신생대, 즉 지금 지구상에서 가장 번성하고 있는 식물입니다. p 019




녹조류는 녹색의 엽록소를 가지고 있는데, 이 녹조류들이 얕은 바다로 슬금슬금 오다가 파도가 칠 때 물이 없어져서 육지가 되는 곳에 터전을 잡기 시작했다. 대부분은 죽었지만, 그 와중에 육지에 적응한 녹조류가 생겨났는데 그들이 바로 이끼식물이다.



이끼식물들중 일부가 햇빛을 더 많이 받고자 하여, 위로 쑥쑥 자라나는 변이를 일으켰다. 그렇게 이끼식물에서 변이하며 키만 멀대같이 큰 식물들이 나왔으니, 그게 바로 고사리! 하지만 우리 모두가 잘 알듯 이끼나 고사리는 습하고, 축축한 환경에서 살아가기 때문에 건조한 환경으로 번식 환경을 넓힐 수가 없었다.



이끼류, 고사리류는 포자로 번식을 했는데, 그들 중 일부가 이미 과포화된 터전에서 벗어나, 건조한 환경에서 살고자 변이하였으니, 그게바로 씨앗으로 번식하는 종자식물이다. 종자식물군은 겉씨식물과 속씨식물군이 있는데, 처음 시작된건 겉씨식물이다.



다만 겉씨식물은 씨앗이 외부에 나와있다보니, 씨앗이 상하게 되는 상황이 빈번하게 발생했다. 여기서 의지의 식물들이 씨앗을 보호하기 위해 또 한번 변이를 일으켰다. 그게 바로 씨앗을 안전하게 보호하는 씨방을 가진 속씨식물이다. 우리가 알고있는 꽃피우고 열매를 맽고, 그 안에 씨앗이 있는 식물들이 전부 속씨식물이다.



결국 겉씨식물은 그 위대한 탄생을 뒤로하고 많은 수가 사라지게 되었으며 지금은 전 세계적으로 1,100여 종, 전체 식물의 0.3%만을 차지하며 지구에 살고 있습니다. (생략) 속씨식물은 이러한 꽃을 갖게 됨으로써 12월 21일(1억 2,600만 년 전)에 등장한 후 지금까지 폭발적으로 다양해졌습니다. 또 꽃과 그 안에 있는 씨방이 지구상의 많은 생물의 먹이가 됨에 따라 공존의 능력치 또한 최고를 이루었습니다. 그 결과 현재 속씨식물은 최소 36만 종에 이르는 다양성을 가지고 지구상에 살고 있으며, 전체 식물의 91%이상을 차지하고 있습니다. p 028 ~ 030



간단하게 말하자면 식물의 진화는 ‘이끼식물→고사리식물→겉씨식물→속씨식물’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바로 지금! 우리가 사는 이 지구를 점령한 식물들중 91% 이상을 차지하는 식물군은 속씨식물이다. 나머지 9%의 식물들이 이끼식물, 고사리식물, 겉씨식물이라 할 수 있는데, 그 와중에도 겉씨식물은 0.3%밖에 안된다고....허허. 생존의 세계는 식물들에게도 험난하구나.





▶ 챕터1, 크거나 작거나 中 자이언트 라플레시아


자이언트 라플레시아는 라플레시아과 라플레시아속에 속하는 식물 20종 중에서 가장 큰 꽃을 피우는 식물로 인도네시아에 서식하며 인도네시아의 국화로 지정되어 있습니다. 지금까지 알려진 자이언트 라플레시아의 최대 크기는 지름 1.1m이며, 무게는 11kg이라고 합니다. 이 꽃은 양배추처럼 생긴 꽃봉오리에서 피어나는데, 이 꽃봉오리만 해도 지름이 최대 43cm나 된다고 합니다. 하지만 이렇게 거대한 꽃을 피우는 자이언트 라플레시아는 독특하게도 잎도, 줄기도, 심지어 뿌리도 없습니다. p 043


나에게는 포켓몬스터 라플레시아(^^)로 친숙한 꽃, 자이언트 라플레시아. 그저 큰 꽃이라고 생각은 했는데 내가 생각한 것보다 더 무시무시하게 크다. 꽃의 무게가 11kg면....뭐 말 다했죠. 허허허. 근데 이렇게 거대한 꽃을 피우는데 잎도 없고, 뿌리도 없다는게 신기하다. 알고보니 라플레시아는 기생식물이라고...!!! 



테트라 스티그마라는 포도나무 속에 숨어살다가, 꽃을 피울 시기가 되면 포도나무의 줄기나 뿌리 껍질을 뚫고나온다고 한다. 완전 소오름.



 


죽은 동물이 썩었을 때 나오는 냄새가 난다고 알려진 타이탄 아룸, 일명 시체꽃과 마찬가지로 라플레시아 꽃의 냄새도 지독하기로 유명합니다. 하지만 동물의 사체가 썩는 냄새는 우리 인간에게는 지독한 냄새일지 몰라도 숲속에 있는 파리와 딱정벌레에게는 매력적인 냄새입니다. 자이언트 라플레시아는 썩은 사체에 알을 낳는 파리와 딱정벌레를 자신의 꽃가루를 옮겨줄 짝으로 선택한 것입니다. p 045



(DNA 검사 결과)놀랍게도 자이언트 라플레시아의 조상은 꽃이 매주 작은 대극과 식물이었습니다. 대극과 식물의 꽃의 크기는 커봤자 2cm 정도밖에 되지 않으며 대부분은 몇 밀리미터에 불과할 정도로 작습니다. 반려식물로 많이 키우는 꽃기린, 크리스마스 식물로 유명한 포인세티아가 대극과에 속하는 식물입니다. p 046



거기다가...냄새도 지독하다고...ㅋㅋㅋㅋㅋ 그래서 포켓몬스터에서 냄새가 지독한 냄새꼬가 라플레시아로 진화하는건가?! 아니, 근데 왜 라플레시아의 친척이 꽃이 겁나 작은 꽃기린일까. 라플레시아가 생태계에 적응하는 동안 대체 무슨 일이 있었나.........




▶ 챕터2, 빠르거나 느리거나 中 죽순대


대나무는 전 세계적으로 다양한 환경에 적응한 1,400여 종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온대와 열대지역에 걸쳐 바닷가에서부터 해발 4,000m 높이의 산속에 이르기까지, 또한 울창한 숲에서 산지의 초원에 이르기까지 드넓은 지역에 살고 있습니다. 대나무는 ‘세계에서 가장 빠르게 자라는 식물’로 알려져 있는데, 그중에서도 맹종죽이라고 하는 죽순대는 온도와 습도가 적당하고 토양이 비옥하면 하루에 최대 91cm까지 자랄 수 있다고 합니다. 그래서 이 대나무가 빨리 성장할 때는 자라는 소리를 들을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가만히 보면 자라는 것이 눈에 보인다고 합니다. p 123



죽순대가 빨리 클 수 있었던 또 다른 이유는 줄기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대나무는 이름에 나무라는 말이 있는 것과 달리 사실 풀입니다. 풀 중에서도 ‘가장 키가 큰 풀’이라서 기록에 따르면 열대지방에서 키가 가장 컸던 것은 40m였다고 합니다. p 125


담양에 가면 눈 닿는 곳마다 보이는 대나무! 빨리자란다고는 익히 들어 알고 있었는데, 정말 빠른 애들은 하루에 91cm까지 자란다고 한다. 이건 뭐...뭐지? 장마철에 급격하게 크는 잡초같은 친구들인건가?....................는 놀랍게도, 대나무는 나무가 아니라 풀이었다.



생각해보니 대나무는 다른나무들과 달리 줄기가 텅 비어있고, 다른 나무들처럼 줄기가 두꺼워지지도 않고. 아니 뭐 이런..! 생각해보면 그저 딱딱하고 키가 크니까 당연히 ‘나무’라고 생각했나보다. 그럼 대나무는 풀인데 왜 딱딱한가? 에 의문이 생기는데, 그 이유도 단순하다. 대나무 줄기에 있는 질긴 섬유인 셀룰로오스와 리그닌이라는 물질 덕분이었다. 하하..하하하.




 


죽순은 뿌리줄기라고 하는 땅속의 줄기를 통해 엄마 식물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스스로 양분을 만들어 커가는 게 아니라 뿌리줄기를 통해 엄마 식물에게서 받는 양분으로 자라는 것입니다. 그러니 죽순은 광합성을 할 필요가 없고 따라서 잎이 없어도 되니까 그냥 빨리 키만 크면 됩니다. 죽순으로 나온 지 4개월이 지나면 엄마 식물에게 더 이상 양분을 받지 않고 스스로 만든 양분만으로 살아갑니다. 그리고 어느 정도 자라면 자신도 재 뿌리줄기를 뻗어 또 다른 죽순을 키워내며 엄마식물이 됩니다. p 124



대나무의 꽃은 행운믜 메시지, 신비로운 이미지입니다. 대나무가 꽃을 피웠다는 뉴스는 언제나 사람들의 관심을 받죠. 이 관심은 대나무가 빨라야 몇 년, 느리면 130년 만에 한 번 꽃을 피우는 데에서 시작했습니다. (생략) 다만 이때 뿌리줄기로 연결되어 있는 대나무들이 한꺼번에 꽃을 피우고 일제히 죽게 되는데, 어떤 대나무 숲은 숲 전체가 하나의 뿌리줄기로 연결되어 있어 그 숲이 모조리 죽는 경우도 있습니다. p 127



나도 어딘가에서 주어들은게 있어서, 대나무가 꽃을 피면 죽는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다. 나름대로 식집사다보니 대나무가 뿌리번식한다는 것도 알았고, 뿌리번식으로 나오는 죽순은 참 맛있다는 것도(^^.....). 하하하하. 



근데... 대나무가 꽃을 피우면 죽는다는건 알았는데, 이때 하나의 대나무만 꽃 피우는게 아니라 그 군락 전체의 대나무가 꽃을 피운다는 것이 소오름이었다. 이말은 즉 군락 전체가 꽃피우고, 군락 전체가 죽는다는 말이니까. 아니 근데, 뿌리번식을 하는데 굳이 꽃을 피울 필요가 있나? 싶었는데 왠걸. 다 죽는다는 것을 알고 있음에도 꽃을 피우는 이유는, 대나무 숲이 너무 거대해져서 땅속 양분이 고갈되었기 때문이란다. 양분이 고갈된 땅에서 번식해봤자 죽을테니, 꽃을 피어 종자의 형태로 먼 곳으로 날려보내기 위함...이야. 와. 너네, 머리 좋다?




▶챕터3, 강하거나 독하거나 교묘하거나 中 악마의 발톱


악마의 발톱은 남아프리카의 나미비아와 보츠와나, 남아프리카공화국에 걸쳐 있는 칼라하리 사막에 사는 식물입니다. 사막의 거친 모래땅에 뿌리를 깊게 내리고 땅에 바짝 엎드려서는 최대 2m까지 옆으로 뻗으며 살아가죠. 이 식물은 분홍색 나팔처럼 생긴 꽃을 피우는데, 꽃은 아름답지만 꽃이 지고 난 후 맺는 열매는 많은 사람을 두렵게 만들곤 합니다. 맨발로 모래 위를 걷다가 모르고 이 열매를 밟으면 마치 악마가 발톱으로 할퀴는 것 같은 극심한 고통을 느끼게 되거든요. 이 열매는 어른의 주먹보다도 크기가 크며, 가운데에서 사방으로 뻗어나가는 길쭉한 가시와 갈고리가 있습니다. 그래서 열매의 어느 방향으로 닿든 갈고리가 사정없이 우리의 발에 박히게 됩니다. p 184


악마의 발톱은 예전에 다큐에서도 본적이 있다. 갈고리를 이용해서 사정없이 동물이나 사람에게 박히는 그 친구! 박히면 아파서, 그래서 악마의 발톱이라는 이름까지 붙은 그 친구! 대체 악마의 발톱은 왜 이런 번식방법을 선택했나 싶었는데..... 여기엔 쵸끔 슬픈 이야기가....



 


원래 악마의 발톱은 소나 양, 그 밖의 작은 동물들에 무임승차하던 식물이 아닙니다. 그들보다 훨씬 거대한 동물들의 털에 붙거나 발바닥의 주름에 끼어 이동했었죠. 여기서 거대한 동물이란 거대동물(megafauna)이라 부르는 동물군으로 신생대 제4기의 플라이스토세에 살았던, 매머드와 같이 덩치 큰 동물들을 말합니다. 그들에게 악마의 발톱은 그리 위협적이지 않았습니다. p 186



악마의 발톱은 열매를 무심코 밟은 동물들에게 큰 고통을 가져다줄 수 있지만, 덩이뿌리가 가진 진통효과로 그 고통을 상쇄시킬 수 있는 아이러니한 식물입니다. 악마의 발톱에 탁월한 효능이 있지 않았다면, 인간은 진작에 모두 뽑아 없앴을 지도 모릅니다. 이제 악마의 발톱은 자신의 씨앗을 퍼뜨려 줄 먼 과거의 거대한 동물들을 그리워하지 않아도 됩니다. 거대한 동물들 대신 이제는 인간이 악마의 발톱 씨앗을 직접 옮기고 심어 길러주기까지 하니까요. 그래서 어쩌면 먼 훗날 악마의 발톱 열매에는 기능은 잃은 채 흔적으로만 남은 갈고리가 있을지도 모릅니다. p 188



악마의 발톱은 원래 피부가 엄청 두꺼운 매머드같은 거대동물군에게 박혀서 번식하던 친구들이었다. 흑흑. 그저 매머드에게 잘 달라붙어 번식을 하기 위해서 진화한게 갈고리모양이었는데, 하필 이런 거대동물군이 멸종해버렸네. 악마의발톱만 남아버렸네. 살아남았으니 번식은 해야하고, 그렇게 작은 동물들이나 인간에게 박히게..되었.......고..흑흑



근데 또 악마의 발톱 뿌리에 약용효과가 있다는 것이 발견되어서, 굳이 힘들게 씨앗을 옮기지 않아도 인간들이 알아서 번식시켜준다고 하니. 악마의발톱도 먼 미래에는 조금 다른 모양이 될지도..?




▶챕터4, 지나치거나 열악하거나 中 유칼립투스


유칼립투스속은 600종이 넘을 정도로 많은 수를 차지하고 있는 상록수이자 속씨식물 무리로 대부분 오스트레일리아가 원산지입니다. 오스트레일리아 대륙은 극도로 건조하고 기온이 높은 지역이 많아 산불이 자주 발생합니다. (생략) 캘리포니아 주민들은 지역에 드넓게 자리잡은 유칼립투스를 어떻게 제거해야할 지 고민하고 있습니다. 유칼립투스는 화재에 취약할 뿐만 아니라 산불을 일으키는 원인으로 지목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p 304~305



유칼립투스는 사실 산불에 최적화된 식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유칼립투스는 식물체 안에 가연성 물질을 많이 함유하고 있는데, 특히 주로 잎에 있는 오일은 휘발성이 강하고 불이 붙기 쉽습니다. 날씨가 건조하고 더운 날에는 잎에 있떤 오일이 공기 중으로 내뿜어져 아주 작은 불씨에도 큰 산불이 일어날 수 있습니다. 또 이 오일에는 살균 효과가 있어서 바닥에 떨어진 잎은 썩지 않고 남아 불이 붙기 쉬운 상황을 만듭니다. 넓적한 끈처럼 길게 떨어지는 유칼립투스의 줄기 껍질 역시 썩지 않고 그대로 남아 바람을 타고 불길을 퍼트리는 역할을 합니다. p 305


호주..... 불이 자주나기로 유명하고, 심지어 한번 불나면 어마무시한 대형산불로 번지는 동네. 그 동네에 많이 자라는 나무가 유칼립투스라고 한다. 아니, 산불이 나면 초록이들이 싹 사라지고 민둥민둥해지는데 그 곳에서 잘 산다고? 심지어 산불의 원인이 유칼립투스...??? 식물은 모름지기 불과 상극이고, 불길이 닿으면 바스라지는게 상극인데.....산불의 원인이 유칼립투스라니!! 조금 충격적이다.



아니 근데, 유칼립투스가 산불의 불쏘시개가 된다면, 불이나면 유칼립투스도 바사사삭...하고 사라질텐데, 어째서 호주에 자리잡고 사는거지?



 


아이러니한 것은 이와 동시에 유칼립투스가 산불에 아주 강하다는 사실입니다. 유칼립투스는 줄기에 단열재 역할을 하는 두꺼운 섬유질 껍질이 발달해 겉이 불에 타더라도 안에서 새로운 싹을 키워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유칼립투스의 줄기 안쪽에는 산불을 대비해 나올 준비를 하고 있는 싹들이 숨어 있습니다. 혹시나 강력한 산불에 줄기가 다 타버리게 되더라도 괜찮습니다. 땅속 바로 밑에 리그노튜버라고 하는 목질의 덩어리가 양분을 저장하고 있다가 산불로 나무가 손상되면 빠르게 새로운 싹을 만들어내기 때문입니다. 유칼립투스의 열매는 또한 단단한 목질로 되어 있어 안에 있는 씨앗을 산불로부터 보호합니다. 이 열매는 산불이 지나가고 나면 벌어져 작은 씨앗들을 바깥세상으로 내보냅니다. p 306


이야, 유칼립투스...산불의 불쏘시개역할을 하면서, 그 산불로 또 번식을 하네; 대단한 식물일세 이친구. 



근데.. 유칼립투스는 반려식물로도 꽤 인기가 많은데(물론 키우기는 까다롭지만), 화재의 불쏘시개 역할을 하는 친구라면 들이기가 급 조심스러운데? 유칼립투스 키우는 집은 화재보험 필수겠...는데..??




▶챕터5, 오래되거나 최신이거나 中 소철


멸종된 (겉씨식물)종자고사리와는 다르게 오늘날에도 살아있는 식물로 만날 수 있는 겉씨식물 중 지구에 가장 먼저 나타난 것은 소철입니다. 소철류는 고생대 석탄기에 지구에 출현한 후로 폐름기를 거쳐 중생대 쥐라기에 번성한 식물입니다. 쥐라기에 무척이나 다양했던 소철류는 백악기 후로 꽃을 가지고 점차 세력을 넓히는 속씨식물에 밀려 많은 종이 멸종되었습니다. 그리고 현재 열대지역과 아열대지역에 300여 종이 남아 그들이 번성하던 먼 옛날의 모습을 유지한 채 살아가고 있다고 여겨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소철류를 흔히 ‘살아있는 화석’이라고 부르죠. p 330


지구에 현존하는 식물군중 약 91%가 속씨식물이고, 겉씨식물은 0.3%밖에 안된다는데.... 소철이 그 0.3%안에 들어가는 겉씨식물이라니!! 거기다 쥐라기월드때부터 활약했던 나름 족보있는(?) 친구라는 사실에 놀라울 따름이다. 



 


사실 현재의 소철류는 중생대에 번성하던 그 소철류가 아닙니다. 물론 소철류의 혈통 자체는 고대로부터 지금까지 이어져온 것이라고 할 수 있지만 현재 지구에 살고 있는 소철류들은 비교적 최근에 생겨난 것입니다. 중생데 쥐라기를 ‘소철의 시대’라고 부를 만큼 쥐라기에 큰 번영을 누렸던 소철류는 중생대 말기에 꽃을 가진 속씨식물에 그 자리를 내어주며 97%가 멸종되고 말았습니다. 하지만 소철의 끈질긴 생명은 끊어지지 않은 채로 이어오다 신생대 중반(마이오세)에 다시 한번 다양화되어 현재 300여 종으로 분화되었습니다. p 332



현존하는 300여 종의 소철류를 ‘살아있는 화석’이라고 할 수는 없겠지만 소철류는 다윈이 의미했던 두 생물군을 연결하고 있는 중간 단계의 생물은 맞습니다. 왜냐하면 소철류는 고사리 식물의 특징을 가지고 있는 동시에, 씨앗을 맺는 식물이기 때문입니다. 오늘날의 소철류가 갖고 있는 이 특징은 멸종과 부활을 거치는 동안에도 그대로 가지고 내려온 조상의 유산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유산을 통해 소철류는 ‘현재 지구상에 살고 있는 겉씨식물 중에서 가장 오래된 식물’의 계통이 되었죠. p 333



하지만, 여기서 반전. 현존하는 소철류는 고대로부터 이어져 내려온 소철을 인간이 급격하게(^^) 변화를 주면서 생겨난 친구들이라며. 너무 빠른시간동안 다양화되는 바람에, 환경에 제대로 적응하지 못했다고T_T. 결국 그 결과 현존하는 소철류 중 2/3은 멸종위기종이라고 한다. 



생각해보면 소철도 반려식물로 꽤나 인기있는 친구인데, 결국 인간이 키우기 좋게 하기위해, 인간 눈에 이쁘게 보이기 위해 변화를 주면서 멸종위기종이 된것인가 싶다. 결국 소철도 인간의 손에 대멸종을 맞이하게 될 식물이 되는 것일까.


내 나름대로 여러종류의 식물 책을 읽었다고 생각했는데, 이렇게까지 극단적이고 전문적인(?) 식물의 진화와 번식에 대한 내용은 처음이다. 많은 식집사들이 식물 책을 읽는다면 대부분 가드닝 관련 책이다. 하지만 가끔은 이렇게 우리가 아는 식물이, 내가 키우고 있는 식물이 언제, 어떻게 이런 모습으로 변화되었는지 알아보는 것도 꽤 괜찮은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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