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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도시에 갔다가 돌아오면 늘, 안정감을 느낀다 . 익숙해서 그렇기도 하지만깨끗하고 조용한 도시다.  특별한 아름다움은 아니지만 수원은 오래된 품격을 가진  도시라고 느낄 만하다 .




내가 고등학교 다니던 76 년에는 확실히 조용한 도시였다 . 76 년 무렵엔 20 만이던 인구가 이제는  100만이나 되었고 토박이 보다는 이주해 온 사람들이 더 많은 도시가 되었다 . 하지만 특별히 수원을 떠나고 싶다거나 수원이 사람 못살 데라고 느낀  적은 없다 .




우리 아버지 고향은 개성이다 . 아버지가  한국전쟁 때 폭격을 피해 남하해서 수원에 자리잡은 건 ‘10 전투 비행장’ 에 일자리를 잡아서라고 들었다 . 물론 그 당시 일자리가 번듯한 게 있을 리 없고 미군부대 식당  종업원 즉  하우스보이 노릇을 했다고 한다 .  그리고 이제나 저제나 고향에 돌아가기를 기다리던 아버지는  다시는 고향땅을 밟아보지 못한 채 7 년 전 돌아가셨다 .  수원 서민병원 병실에서 .  그리고  아주대병원 영안실에서 장례를 치르고 연화장 납골당에서 개성으로 돌아갈 날을 기다리고 있으시다 .




나는 수원에서 40 년 넘게  살았다 . 대학 다닐 때와 결혼 뒤 잠시 이천에서 산 것을 빼 거의 수원살이를 한 셈이다 .   지금은 화성이 세계 문화유산이라고 여기를 답사하는 사람도 생겼지만 (!) 내가 어렸을 때 화성은 그냥 놀이터였다 . 나는 어린 시절 줄곧 북수동 , 신풍, 장안동에서 살았다 . 최근에 화서동 아파트로 입주를  했지만 돌아가신 어머니 소망대로 성안에서만 산 셈이다 (!) 어머니는 어쩐 일인지 사람은 반드시 성안에서 살아야 한다고 생각하셨다 . 그래서 초등학교 시절에 서문 근처 신풍동과 장안동에서 살았을 때는 서문이 우리들 놀이터였다 . 




지금은 옹색하게도 느껴지는 동네지만 그때는 자연 환경이 좋은  놀이터였다 . 그때는 누구나 서문 위에 올라가서 놀곤 했다 .아니면 공심돈에서 누가 목매달아 죽어서 귀신이 나온다고 가슴 두근거리며 들여다 보기도 했다 .  아이들은 서문 누각 위에서 내려오는   계단 난간을  미끄럼처럼 타고  내리는 놀이를 하곤 했다 . 바로 밑에 동생 란이가 세 살 때인가, 하루는   난간을 미끄럼타고 놀던 란이가 미끄럼을 시작하자마자 균형을 잃고 굴러 떨어졌다 . 그런데 서문 근처 바닥은 넓적한 자연석으로 모자이크되어 깔려 있었는데 거기 바로 떨어졌으면 머리가 깨져 죽었을 것이다 . 그런데 당시는  그 근처에  솜틀집이 있었다  .때마침    솜틀집 주인이 서문 누각 계단 아래에  나무 반자(문짝)을 펴놓고 거기에 튼 솜을 펼쳐놓고 말리곤 했다 , 다행히 란은 펴말리던 솜 뭉치위에 떨어졌다 . 그래도 머리 어디에선가 피가 흘렀다 . 나는 놀라서 란을 흔들다가 마침 동네 미용실에서 고데를 하던 어머니를 찾아  뛰어갔다 . 어머니는  “ 엄마! 란이가 서문에서 떨어졌어요!” 하는 비명을 듣자 머리에 고데를 하던  한지 조각을 그대로 붙인 채 내달아왔다 . 어깨에 두른 분홍색 케이프가 황금박쥐  망토처럼 펄럭거렸다 .




어머니는 동생 란을 안고 도립병원까지  울면서 뛰어갔다 .  당시에 도립병원은 지금 행궁자리에  경기 간호전문학교와 함께 있었는데 그 오른쪽엔 경찰서 건물이  있었다 .  어머니가  동생 란을 안고 서문서부터 지금 제일교회자리인 도서관을 거쳐 법원자리였던 선경도서관 앞을 거치고 신풍학교 앞을 거쳐 도립병원까지 뛰어갈 때 나는 동생이 죽을까봐 그리고 그 애가 죽은 다음  동생 제대로 데리고 놀지 못했다고 혼날까봐 가슴 조이던 공포를 기억한다 . 119 구급차가 없었던 건지 거기에 연락할 수단이 없었던 건지 아무튼 인간 구급차 어머니는  피 흘리는 딸을 안고 뛰었다.




그리고 동생은 다행히 죽지는 않았지만  열 살이 되어보아야 사람이 될지 알 수 있다는 의사 진단처럼 입이 짦고 마른데다 약하고  암기력 부족한 아이로 자랐다 . 하지만 그냥저냥  중학교에 다니고 고등학교는 멀찌감치 영신여고를 다녀서 그때  추락 경험이  아무래도 두뇌활동에  일종의 영향을  미치지 않았나 하는 짐작을 하게끔 했다 .  평준화가 되기 전 당시 영신여고는 학업보다는 자유로운 청소년기를 보내는 학생들이 선택하는  학교였다 .병약한 란을  유달리 사랑하던 아버지는 영신학교 덕분에 우리 둘째딸이 ‘고녀’를 졸업했다고 좋아하시곤 했다 . 내 동생이 영신여고 1회 졸업생이었다 .




3 학년 때부터 화홍문 근처 북수동에 살았는데 거기서 화홍문과 북문 , 성벽은 우리들 놀이터였다 . 68 년 무렵에 화홍문에는 깨끗한  물이 흘렀고 68 년에 태어난  막내 동생 기저귀를 화홍문에서 흘러내리는 수원천 물에 빨았던 기억이 생생하다 . 어머니는 양력 12 월에 지금은 없어진 김종훈 산부인과에서 서른아홉 노산으로 아기를 낳았다. 서울서 해산구완을 오신 이모님이 빨래방망이를 꽂고 엄마와 아기 빨래가 든 빨래 함지를 이고 화홍문 아래로 가셨다 . 나는 눈길을 걸어 그 뒤를 따라갔는데  그다지 춥지는 않았다 . 빨래돌을 찾아 자리 잡고 앉아  어머니  개짐을 물에 헹구니 붉은 핏물이 물에 흩어지며 흘러가던 기억이 선연하다 . 




그때는 여름이고 겨울이고 많은 부녀자들이 빨래함지를 이고 나와 거기서 빨래를  했다 . 여름이면 아이들이 거기서 멱을 감고 장마통엔 화홍문 일곱 수문이 미어지도록 수량이 넘쳤다 . 우리는 그곳을 ‘냇갈둑’ 라고 불렀는데  어느 핸가는 홍수가 나서  냇갈둑 제방이 넘칠까봐  사람들이 모두 나와 서서 구경하던 게 떠 오른다 . 설마 그 냇갈둑이 무너질 거라곤 생각안했다. 그러나   평이한 나날을 보내던 아이들이 뭔가 새로운 일이 일어나기를 기대했던  것 같다 . 그리고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




내가 다니던 신풍학교 근처가 지금은 상전벽해가 된 것을 본다 .   지금 우체국 맞은 편 자리가 70 년대 당시엔 시외버스 터미널이었다 . 용인에 사는 고모님댁에 가기 위해 거기서 시외버스를 타곤 했는데 그 터미널 화장실 냄새가 지금도 기억난다 .  가뜩이나 비위가 약한 나는 버스에서 내리면 멀미가 나서 곧 토하고 싶은데 화장실에 가면 버스 매연 냄새에 잘 씻겨내려가지 않은 오물 냄새가 아주 복잡한 구성으로 어린 내 속을 복대겼다 . 나는 거기서 실컷 토하고 입가심도 제대로 못한 채 터미널 옆 낚시점과 그 근처 점포들 풍경을  보며 집으로 돌아가곤 했다 . 그런데 수원서 오랜 산 친구들도 터미널 얘기를 하면 잘 기억하지 못한다 . 그건 내가 만들어낸 기억일까 싶기도 하지만 우체국 옆 동아약국 이층에 있던 동아치과에 갈 때마다 터미널 냄새를 아주 오래 기억하던 걸 보면 조작된 기억은 아닐 것이다 .




신풍학교가 곧 헐릴 거라는 소문을 들었다 . 그래서 동창들이 반대를 한다는 둥 남창학교랑 통합을 한다는 둥 바람이 실어온 소문들이 어디까지 사실인지는 모르겠다 . 어린 시절에 낙남헌을 교무실로 이용하던 일도 있는데 시대에 따라 모든 게 달라질 것이다 . 나와 내 동생들과 내 딸까지 졸업한 신풍학교가 없어지면  좀 서운 할 것이다 . 그처럼  넓어보이던 운동장과 소풍날과 운동회날만 비가 오게 하던 이무기 전설어린  느티나무도  베어버릴 것이다 . 운동장 가에 선 은행나무가 가을이면 아름다운  황금빛 은행잎을 떨구던 기억도 소멸 될 것이다 . 그러나 모든 걸 인력으로 막을 수는 없고 어떻게든  달라질 것이다 ,그렇더라도 이담에 내 딸에게 혹은 내 딸 자식들에게 들려줄 수원 이야기는  여전히 남아있을 것이다 .




어디를 가더라도 누가 ‘어디 사람’ 이냐고 물으면 나는 ‘수원 사람’ 이라고   대답한다 . 그리고 깨끗하고 조용한 도시라고 , 한 번 와 보시라고 한다 . 그리고  누구나 이 도시에 한 번 와보면 참, 조용하고 깨끗하구나 하는 인상을 받을 거라고 생각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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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배 배추에게 문자가 왔다 . 둘째가 태어났다고 ...

이 수상한 시절에 태어나다니 괴롭겠구나 .

하지만 부모가 반듯한  사람들이니 제대로 살 수 있겠지 .

특히 아비가 착하고 능력있는 사람이니까...

 

내 딸도 이날 태어났다 . 1990년...

그애가 태어나던 날은 좀 추웠다 . 애 낳을 준비가 안 된 나는

미혼모처럼  혼자 병원에 가서 몸을 풀었다 .

 

그리고 18 년 후 .

오늘 딸에게 말했다.

내년부터는 네 생일 날 엄마에게 고깃국을 끓여주고 상을 차려다오 .

너를 낳느라 애슨 엄마에게 고마움을 표시하는 날로 삼으리고 .

딸은 알았다고 한다 .

알아서 알았다고 하는 건지

아니면 자본 앞에서 굴복하는 건지 잘 모르겠다 .

 

6,000원짜리  티라미슈 케익을 사다놓고

촛불을 밝히고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

"애낳느라 애썼어/ 애낳느라  애썼어

사랑하는 우리 엄마 / 애낳느라 애썼어 !"

훅!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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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는 게 힘들다고 다들 아우성이다 . 근데 내 나이 쉰하나 , 산전수전 공중전 시가전

다 겪고 살아와보니  평생을 칼날 위에서 살아온 것 같다 . 그래서 더 힘들고 자시고 할 것도 없이 늘 힘들다 . 다만 탐욕과 만족의 임계점을 최대한 낮추면 그런대로 살아갈 수 있다는 걸 알 뿐이다 .

어느 해라고 미디어를 떠들썩하게 만드는 자살 사건이 없으리오만 올해는 유독 “자살” 이 세상을 재단하는 열쇳말이 된 기분이다 . 누가 자살을 했다 해도 오늘 허덕거리며 사는 서민이나 빈민들은 별 충격을 안 받은 지 오래됐다 . 다만 유명 연예인이 그 많은 재산과 화려한 삶을  접고 자살했다는 게 희한하게 느껴져 장례 생중계까지 하는 건지도 모른다 .

그런 많은 죽음 가운데 가장 안타까운 건  10 대가 택하는 자살이다 . 이건 어쩌면 자살이라기보다 시대 환경이 등 떠미는 폭력 같은 것이기 때문이다 .

우리 집은 23 층이라서 소심한 고3 딸아이에게 심한 말 한 번 제대로 못해봤다 . 나는 안 했다고 하지만 딸이 들으면 “심한  말 좀 들었는데요...” 할지도 모르는 일이지만 .....

우리 동네도 역시 다른 동네나 마찬가지로 낮으면 15 층 높으면 30층이 즐비한 아파트 밀집지역이다 . 그래서 10대들 자살 소식이  전해졌다하면 대부분 투신자살이다 . 올해도 작년에도 재작년에도 자살 사건이 들려오는데 전부 ‘성적 비관 ’자살이다 . 그리고 들리는 말에 의하면 ‘1 등 하던 애가 2 등으로 떨어져서 ’ 라고  한다 . 그러면 10대들 반응은, “그러면 우리들은 전부 죽어야 하냐 ? ” 고 학부모들은 , “얼마나 볶았으면 애가 죽냐 ?” 다 .

그러면서도 자살은 쉬지 않고 진행되고 사람들은 무감각해져서 성적이 떨어지면 자살해야하고 우리 애만 자살 안하면 된다고 생각을 굳히는 거나 아닌지 모르겠다 .

실제로 작년에 서울 유명한 외고에서 남학생 둘이 자살을 했다고 재학생에게 들었다 .그냥 평준화 중학교에서도 자살하니까 외고라서 자살하는 건 아닐 거다 . 평준화중도 자살하고 일반고도 자살하고 외고도 자사고도 자살한다면 대한민국 중고교생은 모두 자살 위험에 노출되어있다는 건데 그게 정말 별 거 아닌 건가 ?  아무도 10대들 자살에 대해 고민하거나 자살방지를 위해 애쓰는 어떤 운동도  벌어지는 걸 못 보았다 . 다만 십대 자살의 중요 원 인이 되는  학벌 사회를 폐지하자는 운동을 하는 분들이 있는데  그래야 한다고 공감하지만 실제로 그게 가능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드물어 보인다 . 그러니까 전부 아이들을 사교육으로 몰아넣고 사교육을 시키기 위해  어머니들은 사교육비 벌려고 일을 한다 . 이게 정상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없을 것 같은 데 그냥 다 따라한다 .

그래서 이번에 공정택  교육감이 ‘국제중’을 설립한다고 한 게 주효해서 당선되었다는  사실이 의미하는 바가 크다 . 그것은 바로 지옥으로 가는 급행열차를 타는 길이기 때문이다 . 실제로  청심국제중 지원하는 초등 6 학년을 사교육 지도한 사람 말을 들어보면 지원자 학부모가 상장이 필요하다며 상을 탈 수 있게 글짓기 몇 편을 강사에게 써달라고 요청했다고 한다 . 남들도 다 그렇게 한다는 것이다 . 초등 6 학년이 청*어학원에서 영어를 배우고 방학마다 캐나다나 뉴질랜드 어학 연수가고 논술강사에게 글짓기 써달라고 해서 수상실적 올리고 학교 회장해서 리더십 키워서 청심국제중을 간다 . 그렇게 간 소년소녀들이 어학영재로 영어몰입교육을 해서 국제고를 가고 대학에서 특목고 우대로 ‘스카이대’를 가서 사회지도층이 되어서 상위 2% 되는 걸 학부모들이 ‘로망’ 으로 삼는다면 우리나라 미래는 없다, 고 단언한다 . 세상에는  영재도 있고 천재도 있는 건 사실이다 . 하지만   학부모 사비 들여서  사교육으로 영재 만들고  그 학생들이 나중에 사회 리더가 된다는 건 어쩐지‘ 구린 냄새’가 난다 . 그건  영재나 리더가 아니라 돈으로 만든 인형이기 때문이다 . 돈으로 그렇게 만든 부모는 ? 인형을 조종하는 인형사와 다름없다 .

그리고 거기서 낙오되거나 좌절한 많은 십대들이 오늘도 고층 아파트에서 몸을 던지거나 압박붕대로 목을 매서 자살을 한다 . 그러고도 어른들은  여전히 국제중을  만들고 국제고를 만들며 학원버스들은 “이제부터 전쟁이다! 무슨무슨 학원  방학 특강! 1 등급  만들” 이런 걸 차 옆구리에다  펄럭이며 다닌다 . 그리고 많은 학부모들이  거기에 동조한다 . 

넉넉한 사람들은 자녀들을 조기유학인지 뭔지를 시키고  그렇잖은 사람들은 ” 애들아! 미안해 “ 하면서 눈물짓는 게  현실이다 .  그러고도 나라가 굴러가고 폭동이나 혁명이 안 일어나는 게 희한하다 . 십대가 자살을 해도 성적만  올리면 되고 어떻게든 애들을 점수 노예로 만들어 ’스카이대‘를 보내 졸업시켜 ‘삼성맨’ 이나 ‘국가공무원’ 이나 ‘의사’ 나 ‘변호사’를 시키려고 한다 . 그리고 그런 사람들이 만든 나라가 이 모양 이 꼴이다 . 아름다운가 ?

딸아이를 제도 교육 속에서 12 년을 보낸  내 경험에 의하면 전혀 아름답지 않다 .이건 정상으로 사람 사는 게 아니다 . 왜 부모들이 사교육에 저당 잡힌 인생을 살아야하며 왜 십대들이 놀지도 못하고 성적 노예가 되어 허덕거리거나 낙오되면 자살해야하는지 말해주는 사람이 없다 . 홍세화 선생,  김상봉 선생같은  이들이 ‘학벌을 폐지해야하고 대학 평준화를 이루어야 한다’ 고 주장하지만 사람들은 갈피를 잡지 못 한다 . 그런 세월은 전혀 올 것 같지  않아서 일단 내 애는 국제중이나 특목고나 ‘스카이대’ 에 집어넣어야 안심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 그런데 그게 말이 되지 않는다 . 그 모든  학교에는 정원이 있어서 물구나무서기를 해도 그 학교에 들어가는 애들은 한정되어 있다 .

그렇다면 다같이 그런 걸 거부하면 되지 않겠는가 ? 다른 건 다 좋다 .  하지만  적어도 우리들이 세상을 꽤 살아본 어른이라면 눈을 감고 ...십대 소년, 소녀들이 그 잘난 성적이 뭐라고 그것 때문에 고층 빌딩 옥상에서 저 아득한 바닥을 내려다보다가 , “아! 그냥 여기서 떨어져 으깨지면 이제  이 모든 고민은 끝이야 ” 하고 허공에  몸을 날리는 순간을 상상해보라 . 일제고사를 보아 십대들 손에 등수를 매긴  성적표를 주고 너희들은 몇 등 짜리 인간이야, 등수가  안 되면  몸을 날려, 라고 등 떠미는 인간이 과연 어른인가 ?

이미 자살한  십대 소년 , 소녀들아! 아줌마가 아무 것도  못해서 미안하다 . 하지만 나도  ‘학벌없는 사회http://www.antihakbul.org/ ’회원이고 앞으로 더욱 그 운동을 지속하겠지만  미안하다 , 미안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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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늦어도 11 월에는

 

...<늦어도 11 월에는 >, 이런 제목을 가진 소설이 있다 .

"당신과 함께라면 이대로 죽을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하는 떠돌이 남자의 말을 듣고

가출을 하는 여자의 이야기다 . 결말은 비극이지만

나에게도 그런 말을 해주는 남자가 있었다면 가출했을 것이다 .

(참! 그랬다가 망했지 ...ㅠㅠ 오래되어서 깜박 잊었다 .-.-;;)

이 책이 불륜녀의 단순한 이야기는 아니지만 어쨌든...

 

어쨌든 11월도 다 지나간다 .

딸은 엊그제 수능을 치르고 왔다 .

아침에 마산 친구가 , " 지금 기도라도 하노 ? " 하고 문자를 보냈길래

" 니는 아직도 내를 모르나 ? " 고 답신을 보냈다 .

평화롭고 편안하게 공부할 분위기를 만들어줬고

졸리면 자고 시간나면 공부했으니 나머지는 하늘이 정해주는 운세다 .

기도는 무슨......

 

그런데...두둥~ 채점을 해보더니 운다 .

울고울고 또 운다 .

 

나도 재수 , 삼수 해봤는데

재수까지는 할만하다 .

좌절과 소외감을 겪으며  자기성찰을 할 수도 있다 .

문제는 감옥살이가 일 년 유예되는 어미 역할이다 .

흠....(기형아! 미안하다 ....^^아직 모르지만

모든 게 일 년 미뤄질 것같은 불안....^^)

 

2. 종부세

 

나도 종부세내고 싶었는데

그걸 내려고 아껴쓰고 애썼는데 @@

그걸 휴짓조각으로 만들다니 가이쉐이들!

 

기대한 사람들에게 한 마디 하고 싶다 .

그렇게 나이브해가지고 진보는 무슨!

 

3. 울컥

 

내게는 울컥증이 있다 .

원래 너그럽지도 못하고  맏딸증세가 있어서

바로 밑엣 동생과 5 년전 싸웠는데

< 맞짱>뜨는 동생은 있을 수 없다는 자신과 스스로 정한 룰에 갇혀서

그 5 년간 만나지도 않고

전화로라도 단 한 마디도 나누지 않는다 .

 

그애 딸도 내 딸과 동갑이라서 수능보기 전에 격려품을 택배로 보냈더니

딱 그 물품대금 정도를 다음 날 둘째동생 편에 보내왔다 .

딸은 현금받고 좋아하지만

흐음! 물품을 판 것도 아니고 이것이! 하다가

참았다 . 눈치보는 올케 보기가 민망해서 .

나보기가 역겨워서 지난 5 년동안 아버지, 어머니 기일에도 안오니

올케가 얼마나 콩가루 집안이라고 흉볼지 알지만

뭐라고 좋은 소리해서 달래고 싶지 않다 .

오는 사람 막지 않고 가는 사람 잡지 않고 살기 에롭다......

 

4. 친권

 

조성민 친권가지고 말이  많다 .

별 상관도 없는 사람들이

전부 입 가지고 난리다 .

내가 보기에 이건 친권 문제가 아니고 재산문제다 .

만일 고인에게 재산이 없다면

외할머니도 외삼촌도 친부도 친권 갖겠다고 게게품 물 일이없을 거라고

단/언/한/다 .

 

그래서 나는 별 재산이 없다 .(그건 아닌 것 같기도 하다 ^^)

그리고 나는 얼마는 안되지만

보험금이나 손바닥만한 집 문제조차

다 잡음없도록 처리해놨다 .

근데 그렇게 수십~수백억 재산을 가지고도

유산에 대해 확정일자조차 받지 않았다니

순진한 건지 무지한 건지 영생을 믿은 건지....모르겠다 .

 

그 와글거리는 와중에 가장 외계인같은 네티즌들...

" 그 재산 나나 주지! "

 

5. 김장

 

7년 전, 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전까지는 김장도 하고

고추장, 된장도 담그고 청국장도 띄우곤 했다 .

아버지 소천 후에는 다 그만두고 그냥 있는 거만 먹고 사는데

올해는 네 군데서 김치 한 통씩 얻어서 재분배를 했다 .

식자재도 다르고 입맛도 다르며 솜씨도 제각각인데

제발 김치만은 공장 김치 아니고 제 손으로 담가먹고 살도록

입법을 했으면 좋겠다 -.-;;

(다양한 김치맛, 좋지 아니한가 !^^

나도 시간만 있으면 한 김치합니다요^^)

 

5. 파블로 카잘스

 

바흐 무반주 첼로조곡 전곡을 들으면서

하루 평균 80 킬로,대기 시간  3 시간을 견디는,

거리에서 시간 다 보내는 자발적 비정규직 생활을 견디고 있다 .

17년 동안 음악을 들으려고

빚을 내서라도 학원을 내는 모험을 하지 않았던 것  같다 .


카잘스 스페셜 에디션 - 초도 한정 포스터 증정
 
혹시 음악에 대해 약간의 투자를 하실 분이라면

이 음반을 권해드립니다 ^^

 

6. 베토벤 바이러스

 

예전에 '레드 바이올린'을 보고 다세대 전셋집에서 사는 처지에

딸에게 바이올린을 가르쳤다 .

4/4까지 사줬건만 결과는 그리 흡족하지 못했지만

딸은 먼 후일, 내가 없는 처지에 바이올린 가르친 걸

고마워하기나 할지 잘 모르겠다 .

 

어쨌든 케이디스크에서 '베토벤바이러스' 를 내려받아서 보면서

한동안 즐거웠다 . 비정규직 연주자들 삶은 신산스러웠지만

쌀밥이나 아파트만큼

음악이나 예술도 중요하다는 걸 사람들이 안다면

우리들 삶은 이렇게 삭막하고 암울하지는 않을 것 같다 .

 

해마다 12월 31일에는 베토벤 9 번 교향곡을

불꺼놓고 들으며 한 해를 마감하곤 했다 .

주식도 망하고 펀드도 망하고

집값도 그렇고 청춘도 지나가고 애새끼도 속썩이고

아니면 장가도 못하고 시집도 못가더라도

음악을 듣는 순간 영혼이 고양되는 걸 느낀다면

뱀으로 태어나 사람들 눈을 피해

음습한 곳을 기어다니는 것보다는 낫지 않을까요 ?

(라고 생각합니다 ^^)

 

7. 마지막으로 (이 글의 ^^)

 

홈플러스노동자들이 510일만에 현장으로돌아가게 되었다고

그러나 이랜드 지부투쟁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는 문자를 받았다 .

cms후원을 중단하실 분은 문자번호로 연락주면 해지하겠다는데

나는 끝까지 후원하겠다 .

 

510일!

나같은 물렁텡이는 아마 51 일만에 물러나 개새끼 ,소새끼,

욕만 했을텐데

장하고 자랑스런 동지들이다 .

그동안 얼마나 고단했을지 ...기륭도 KTX도 다승리하길 바란다 .

 

(아 !정말 개쉐이들이다 ! 사람을 쓰다버리는 소모품 취급하다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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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리히데키의 “묵공” 이라는 만화를  보면 이런 대목이 나온다 .

묵가의 3 대에 겸애와 반전론(비폭력) 을 주장하던

묵가인(묵가를 따르는 사람들 )이 그 신조를 버리고 진나라의 침략전쟁에

동조한다 . 한나라 접경지역에서 온 혁리와 운형이 걸어가는데

이미 힘을 잃은 한나라 사람들이 침략한 진나라 병사들을 두려워한다 .

그러자  운형이  말한다 .




“...이놈 저놈 할 거 없이  벌벌 떨면서  마음속에서부터

 패배를 인정하고 있다구요 . ”




이명박이 대통령이 되고 나서 “잃어버린 10 년 ” 운운했을 때 ,

나는 우리가 상상하던 일 이상의 그 무엇도 이 정부에서 가능하겠구나 싶은

불길함을 느꼈다 . 영어몰입교육이 그렇고 경부운하가 그러하며 자사고

100곳 설립이 그러했다 .  그런데  한미 FTA 비준을 재촉할 때 ,

노무현이 뿌려논 바람을 이명박이  태풍으로 거두려고 안간힘이구나

하며 속으로 비웃었다 . 그리고 뒤이은 광우병 쇠고기 수입!




사람들이 이 싸움을 시작했을 때 나는 속으로 ,

“그래, 촛불을 들고 나서면 뭘 어쩔 거냐 ? 쇠귀에 경읽기지 .

못들은 척 하고 쇠심줄처럼 질기게  제 갈 길을 가는 게

저 사람들 일하는 방식인데 소통은 무슨 !”




그러면서  나는 운형이 일갈한 것처럼  마음속으로 이미 패배를 인정하고

있었던 것 같다.  결국 광우병 쇠고기는 수입하고 사람들은 싼 맛에

먹거나 모르고 먹은 다음 랜덤으로 인간광우병에 걸려 5 년이나

10 년 후에 쓰러지고 명박 일족은 그동안 긁어모은 재산으로 

미국에서 살며 몰디브로 휴양하러 다니겠구나...하는.




대문에 걸린 정태춘의 장마를 들으니 이 노래에 유효기간이 

없다는 사실이 서글프고 씁쓸하다 . 내가 처녀시절에  느꼈던 암담함을 

지금 젊은이들이 또 느끼고 그때 젊었던 이젠 늙은 사람들이

또 다시 느껴야하는 세태.




우리는 다시 이길 수 있을까 ? 저 단단한 자본과 수구보수로 무장한

인간들의 벽을  뚫고 승리하여 좀 사람답게 사는 세상을 구가하면 

참 좋겠다.




정태춘과 박은옥은  잘 살고 있는가 .

 2008,6,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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