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왓치맨에 코미디언이 나오잖아
어쩐지 ‘선’의 모습이 아니야
그건 악의 모습이지
본능적이고 폭력적이지
누구 하나 코미디언을 착하게 보지 않아
모순이지

그런 코미디언을 낳은 엄마 역시 악이었을까
알 수 없지
결국 코미디언은 악의 모습으로 실크 스펙트를 강간하지
그 둘 사이엔 ‘제인’이 태어나잖아

그리고 제인은 가장 선한 편에서
선한 모습으로
사람들을 도와주는 거야
닥터 맨허튼을 정신으로 지탱해주지

코미디언이라는 악이 존재하지 않았다면
제인이라는 선한 모습이 탄생하지 않았다는 거지

제인은 무모순성의 모습을 띠는 거야
선과 악이란 정말 모호한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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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장면을 보면 아버지의 기억으로 온통 채워져 있는 스즈와 큰언니 사치는 행동이 비슷하다. 하마다 점장이 없어진 발가락 6개를 보여 준다고 할 때 두 사람은 기겁을 하거나 절레절레 흔든다. 하지만 그러거나 말거나 요시다는 밥이나 먹고 치카는 혼자서 계속 자신의 말만 한다
.

이 영화는 정확히 17분 40초부터 행복해지기 시작한다. 그리고 영화가 끝나면 칸노 요코의 음악과 함께 행복이 온몸에 가득 차있다는 것을 느낀다
.

영화 속의 마을은 있을 수 없는 마을의 모습이지만 보는 우리는 그 마을에 동화된다. 스즈를 처음 데리고 간 바다고양이 식당에서 코치가 좁은 식당에서 포즈로 축구선수를 맞추라고 했을 때 그것을 맞추는 사람은 식당에서 일을 하는 종업원이다. 마을에 사는 사람들은 모두가 그렇다
.

고 감독은 가족의 이야기를 영화로 여러 편 만들어냈다. 바뀐 가족, 떨어진 가족, 버려진 가족
.

바닷마을 다이어리는 새로운 가족의 이야기로 스즈의 언니들, 그리고 온 마을의 사람들이 스즈가 가족으로 스며들 수 있게 배려한다
.

그건 우리나라에만 있는 가족과 식구의 개념을 떠올리게 한다. 왜냐하면 인간이 가족을 이루는 사람은 다름 아닌 타인이 식구가 되면서 가족을 이루기 때문이다

 

 

마음에 딱 들어붙었던 장면은 치카와 스즈 둘이서 카레를 먹는 장면이다. 일분도 안 되는 장면으로 아버지와 추억이라고는 전혀 없는 치카와 온통 아버지의 기억으로 채워진 스즈를 카레로 이어준다. 만약 이 장면이 소설이었다면 한 페이지나 두 페이지에 걸쳐 장황하게 두 사람의 감정과 상황을 서술했을 것이다.

치카는 스즈의 말을 듣는 순간 새롭게 가족이 된, 자신과는 어울리지 못할 것만 같았던 스즈가 비로소 동생이라는 생각에 가슴이 아프게 다가온다. 치카에게 구마모토에서 온 스즈는 어딘가 모르게 큰언니를 닮았고 너무 어른스러워서 쉽게 마음을 열지 못할 것만 같았다. 치카는 오뎅을 넣은 카레가 할머니의 맛이라 자주 해 먹었고 그것을 스즈에게 먹이고 싶었다. 스즈는 다행히 맛있어 했다. 스즈는 치카에게 고백을 하나 한다. 멸치 덮밥에 관한 이야기. 그리고 스즈에게 낚시에 대한 이야기를 듣는다. 치카는 아버지가 낚시를 좋아했다는 것을 알고 가족이란 설명할 수 없는 끈으로 연결된 것에 대해서 생각을 했을 것이다
.

일분도 안 되는 장면을 고 감독은 그렇게 이야기를 만들었다. 치카는 아버지를 대신해서 하마다 점장과 낚시를 할 것이다. 그렇게 식구는 가족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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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gkim 2018-07-19 21: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여름이 가기 전에 볼 수 있을까?

교관 2018-07-21 10:48   좋아요 0 | URL
보실 영화가 많으신가 봐요. 여름에 못 보시면 겨울이 가기전에 보세요
 

 

 

옛날에 한 소녀가 살았는데
7년간 엄마와 떨어져 살았어요

소녀는 쇠 옷을 입은 채

늘 이런 말을 들었더랬죠

옷이 다 닳으면
엄마를 보러
갈 수 있단다

소녀는 열심히 옷을 벽에 문질러
닳게 했어요

드디어 옷이 다 닳아서
우유와 빵
치즈와 버터를 조금 갖고

엄마가 있는 곳에 가던 소녀는

숲에서 늑대를 만났는데

뭘 갖고 있냐고 늑대가 물었죠

우유와 빵, 그리고 치즈와 버터 조금

하고 대답하자

늑대가 나눠줄래,라고 하자

엄마에게 줄 선물이에요, 하고
소녀는 거절했어요

늑대가 바늘길과 가시길 중
어디로 갈 건지 묻자

소녀는 ‘바늘길로 가요’라고 했고
늑대는 가시길로 서둘러 가서

엄마를 잡아먹어 버렸죠

드디어 소녀는 집에 도착했어요

엄마 문 열어요

문을 밀어보렴
잠겨있지 않단다,라고
늑대가 대답했어요

그래서 바늘길로 간 소녀는 어떻게 됐어?

문을 열어보렴 잠겨있지 않단다

하고 늑대가 대답했지요

결국 문이 열리지 않자 소녀는
구멍을 통해 집으로 들어갔죠

엄마, 배고파요

찬장에 고기가 있으니 먹으렴

그건 늑대가 죽인 엄마의 살이었죠

찬장 위에 큰 고양이가 와서 이렇게 말했죠

네가 먹고 있는 건 네 엄마 살이란다

엄마, 찬장 위의 고양이가 내가 먹는 게 엄마 살 이래요

거짓말이야
그런 고양이에겐 신발을 던져버려라

고기를 먹고 나니 목이 말랐어요

엄마, 목이 말라요

냄비 안의 포도주를 마시렴

그러자 작은 새가 날아와 굴뚝에 앉아 말했어요

네가 마시는 건 엄마 피란다
엄마 피를 마시는 거야

엄마, 굴뚝에 작은 새가 앉아서 내가 엄마 피를 마시는 거래요

그런 새에겐 두건을 던져버려라


고기를 먹고 포도주를 마신 소녀는 엄마에게 말했어요

엄마, 왠지 아주 졸려요

여기 와서 좀 자거라

소녀가 옷을 벗고 침대에 다가가 보니
엄마는 두건을 얼굴까지 내려쓰고
이상한 모습으로 자고 있었죠

엄마, 왜 귀가 이렇게 커요?

네 소릴 잘 듣기 위해서란다

엄마, 왜 눈이 이렇게 커요?

너를 잘 보기 위해서란다

엄마 왜 손톱이 이렇게 커요?

널 잘 움켜쥐기 위해서란다

엄마, 왜 이가 이렇게 커요?

소녀가 옷을 벗고 침대에 다가와 보니
엄마는 두건을 얼굴까지 내려쓰고
이상한 모습으로 자고 있었죠

늑대는 빨간 두건을 잡아먹었다

 

 

인랑을 흐르고 있는
최적화된 작화와 대사
신비하고 잔혹한 여운
마지막을 놓지 못하게 만드는 음악
늑대의 텅 빈 고뇌를
영화로는 어떻게 표현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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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버비콘은 조지 클루니가 감독을 했다. 조니 클루니는 배트맨부터 오션스 시리즈까지 멋진 모습은 다했다. 왜인지 포장된 게 아닌가 했지만 영화 디센던트를 보면서 조지 클루니의 진짜 매력에 빠질 수 있었다. 변호사로 잘 나가던 멧(조지 클루니)은 아내가 보트 사고로 혼수상태에 빠지고, 그의 딸들에게 엄마의 상태를 전하러 가면서, 딸들과 함께 중년의 남자에게 심각한 고뇌가 들이닥치는데 디센던트에서의 배 나온 중년 맷을 연기한 조지 클루니는 진정 배우였다. 어쩐지 조지 클루니는 변호사로 분하면 영화에서 해내는 것 같다. 마치 송광호는 영화 속에서 아내가 없어야 하는 배우처럼 말이다. 디센던트에서 큰 딸은 우리나라의 누군가를 떠 올리게 만드는 쉐일린 우들리가 나온다. 아직 얼굴이 어린 모습을 가지고 있지만 이후 주조연을 꿰차며 점점 섹시해져간다

.

 

서버비콘에서는 당연하지만 줄리안 무어를 봐야 한다. 그녀의 연기. 캐리에서 종교에 접합한 여자의 연기, 눈먼 자들의 도시에서는 눈먼 자들 속에서 홀로 시야를 확보한 여자의 연기, 킹스맨에서의 액션 연기 등. 줄리안 무어는 다큐영화 ‘감독 알트만’에도 나온다. 알트만 감독과의 인연은 아주 오래전 영화 ‘숏컷’에 정말 마르고 어린 줄리안 무어가 나온다

.

 

영화 ‘숏컷’에는 잘 나가는 미국 배우들이 대거 나온다. 아이언맨인 다웃 주니어의 아주 젊은 모습도, 앤디 맥도웰도 팀 로빈슨도 매들린 스토우도, 쓰리 빌보드의 프란시스 맥도맨드의 젊은 모습이 마구, 온통 나온다. 숏컷은 레이먼드 카버의 소설을 이어붙여 만든 로버트 알트만의 영화로, 영화의 주 골자는 ‘별것 아니지만, 도움이 되는’이 흐르고 있고 레이먼드 카버의 여러 단편 소설이 골자의 주위 곁가지에 붙어서 나온다. 그러면서 소설을 헤치지 않고 영화에 빠져들게 알트만은 알트만식으로 영화를 만들었다. 레이먼드 카버의 소설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3시간이 지루하지 않을 것이다

.

 

엔디 맥도웰이 빵집에서 아들이 죽었다고 말하는데 배를 채우라며 빵을 준다. 그리고 별것 아니지만 도움이 된다는 이 말은 많은 영화에서 한 것 같다. 밥은 먹고 다니냐,부터 독전에서도 밥들은 먹었냐까지. 영화 숏컷에서 줄리안 무어는 무척 젊은 모습인데 다 보여준다. 싹 다 보여준다

.

 

영화 서버비콘은 서버비콘이라는 살기 좋은 곳이라 광고하는 마을에서 일어나는 해프닝인데 자매인 두 명의 줄리안 무어 중 한 명의 줄리안 무어가 사고로 죽는데, 사건으로 번지면서 이야기가 시작된다. 경찰서에서 범인을 확인하는데 어린 아들이 범인의 얼굴을 보면서 일이 점점 틀어지기 시작한다. 생각지도 않는 곳에서 엉뚱하게 사고가 터지고 그 사고가 또 다른 기이한 사고를 낳는데, 이런 모습은 김지운 감독의 처녀작인 ‘조용한 가족’과 흡사하다. 조용한 가족 역시 봐도 봐도 재미있는 영화로 상황이 상황을 낳고 그 상황이 더 한 상황으로 빠지면서 절대 조용할 수 없는 가족의 이야기를 보여준다.

 

오쿠다 히데오의 소설도 상황이 상황으로 연결되며 이야기를 끌어가는 경우가 많다. 첫 소설이 존 레넌에 대한 이야기였던 거 같은데 내용은 전혀 기억이 나지 않지만 그 소설에 반해버린 기억은 있다. 이후 오쿠다 히데오의 여러 소설을 읽었는데 부산을 좋아해서 부산에 자주 와서 냉면이나 밀면을 먹고 가기도 한 그는 자신의 소설에 무라카미 하루키도 등장시킨다. 은근히 질투하며 존경하는 것 같다.

 

조지 클루니는 감독으로 영리하다고 느껴졌다. 레이먼드 카버의 소설에서도 그 당시의 미국의 중산층에 대한 이야기를 썼다. 평범하고 그저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미국인들이 그 당시에 중산층에 도달하기 위해, 그리고 중산층에 도달해서 그것을 지키려고 하는 것들에 관한 이야기. 미국은 중산층이 이끌어간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데 중산층이 무너지면 미국은 무너진다. 아직 컴퓨터가 보급되지 않은 시대로, 살기 좋은 마을 서버비콘에서도 인종차별은 심한 미국의 모습을 조지 클루니는 잘 만들어냈다. 살찐 맷 데이먼의 연기도 볼 수 있고, 조지 클루니가 감독을 했고 줄리안 무어가 나오잖아. 그럼 됐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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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동안 버닝을 여러 번 봤다. 해미와 종수는 언어습관이 억울하고 비굴한 일이 많은지 곧 울음을 터트릴 것처럼 말을 한다. 바늘로 툭 건드리면 마치 눈물이 탁 터져버릴 것 같다. 그 울음이 분에 차서 나오는 울음인지 환희에 차올라 나오는 눈물인지는 모른다. 그에 비해 벤은 유쾌하고 망설임이 없다. 이창동의 세계에서 보면 이전 영화에서도 서민의 얼굴은 늘, 어쩐지, 지극히 그러했다.

이창동의 버닝을 보고 있으면 당연하지만 윌리엄 포크너의 ‘헛간 타오르다’와 하루키의 ‘헛간을 태우다’가 동시적으로 드러난다. 스스로 눈을 감는 것과 어떤 무엇인가에 의해 눈이 감기는 것에 대한 고찰 같은 것들이 영화 속 여기저기에 몸을 웅크리고 도사리고 있다. 그걸 손으로 쑥 끄집어 내는 재미가 있다.

윌리엄 포크너의 세계와 무라카미 하루키의 세계를 그동안 죽 겪어봤다면 이창동식 버닝에 몸과 마음이 활활 타오를 수 있다고 생각한다. 해미의 대사에도 나오지만 죽는 건 무섭지만 노을처럼 활활 타서 사라지고 싶은 것이 인간의 마음일지도 모른다. 이 세상은 결락을 지닌 존재와 좀 더 깊은 결락을 지닌 존재가 있는 곳이니까. 하루키는 전체는 있지만 일부는 사라져버린 현대사회에 대해서 많은 이야기를 그간 소설에서 한 것 같다. 내가 쓰고 있는 단편소설의 주인공이었던 문예부 기철이 녀석 역시 그 시절에 윌리엄 포크너에 늘 빠져 있었다.

헛간 타오르다는 보면 아주 고집불통의 완고한 아버지가 나온다. 주인공 ‘나’는 분노조절이 되지 않아 지주의 헛간에 불을 지르는 아들로 완고한 아버지를 닮았지만 또 평화로운 삶을 바란다. 아버지의 완고함은 가부장적이 아니더라도, 그 반대적인 친밀한 아버지의 모습일지라도 어찌 보면 완고한 모습을 가지게 된다. 이 완고함이 가정을 이루고 그 벽이 깨지지 않게 지탱하는 모태가 되기도 한다. 학창시절에 꼴보기 싫었던 아버지의 모습도 막상 나 자신이 아버지가 되고 나면 스펀지에 물이 스며들듯 그런 모습을 하고 있다.

팬터마임, 고양이, 우물, 춤을 추는 무희가 해미를 나타내는 기호들이다. 이런 수식어를 이창동은 하루키에게서 잘 떠왔다. 망가지지 않게 그릇에 잘 담아와서 그것을 화면에 골고루 펼쳐서 해미를 만들어냈다. 해미는 하루키의 헛간을 태우다에 나오는 그녀로서, 여러 사람을 나타내기도 한다. 그것이 영화 속에서 말하는 동시 존재이기도 하다. 나 자신을 지칭할 때 저는 이런 사람, 또는 이건 싫어요, 이건 좋아요, 이 맛은 꽤, 이건 별로,라고 할 때 그것이 정말 나 자신인지 확신을 가질 수 없다. 상대방에 따라 내가 싫어도 상대방이 좋아하면 따라가는 경우가 있고, 나를 가장한 내 속의 또 다른 추한 마음의 내가 있다는 것도 안다. 내 속에도 여러 명이 동시 존재하고 있다.

해미는 마치 상실의 시대의 미도리의 모습처럼 보인다. 메타포가 뭐지? 하면서도 종수에게 자신도 모르게 꽤 많은 메타포를 안겨준다. 종수는 그 메타포의 끈을 잡고 해미를 찾으려고 한다. 그런 모습은 양을 쫓는 모험에서도, 댄스댄스댄스에서도 심지어는 15살 소년 카프카에서도 잘 나타난다.

벤의 모습은 이 사회의 중심이 되는 하나의 구심축 같은 존재다. 어느 시대에나, 어느 나라에나, 어느 시점에도 존재하는 축. 물질로 이루어져 사람들을 돌아가게 만들고 사람들이 그 축을 따라 움직이며 서로 공격하기도 하고 사랑하기도 하는 거대한 사회의 중심이 되는 축. 굳건한 진실 같은 것이다. 절대 무너지지 않고 단단한 물질로 이루어져 시대가 아무리 흘러도 구성원만 바뀔 뿐 근간을 이루는 물질은 변하지 않는다. 그 축은 동시에 우물 같은, 무서운 것이기도 하다. 세계의 곳곳에 있는 우물에 한 번 빠지면 어둠에 갇혀 위를 보며 언제 빠져나갈지 모르는 공포에 갇혀 시간을 보낸다. 그 속에서 흔들리는 가능성 하나만 믿고 누군가를 기다리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진실과 마주한 현실이 무섭기만 하다.

마지막으로 해미는 남자에게 휘둘리지 않는다. 벤에게도 종수에게도 해미는 자신의 주관대로 움직이고 행동한다. 이창동 감독은 해미를 비추는 빛, 조명을 결핍되게, 모자라게 해미를 표현함으로 해미는 일반적인 사람과는 다름을 말하지만 자연의 빛을 받은 해미는 그야말로 자연의 아름다움이 된다. 해미는 혼자 스스로 노을이 되어 타올랐는지, 아니면 어떤 무엇에 의해서 타버렸는지 모른다. 하지만 해미는 이 세상은 결락을 지닌 존재와 좀 더 깊은 결락을 지닌 존재가 같이 살아가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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