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모든 것을 흡수해버릴 정도로 사랑하는 것도 즐겁기만 할 수는 없다. 행복으로 충만했던 나의 모든 것과 나는 커 갈수록 고통을 알게 되고, 상처를 받고, 그 상처는 흉터가 되어 영원히 나의 마음 어느 구석에 남아 있다는 것 또한 알지 못했다.

부모는 이혼하고, 여자 친구는 떠나고, 여동생들은 엄마를 따라 가버리고, 아버지는 초췌한 모습으로 일에만 몰두하고 나는 공황장애를 겪으며 그런 아버지 옆에 남아서 나의 모든 것인 영화에서도 멀어져 버렸다.

처음 영화를 보고 온 마음을 다 빼앗겨 버렸을 때의 나는 지금 없어지고, 그때의 나를 데리고 극장에 왔던 사랑하는 엄마는 아빠의 친구에게로 가버렸다.

구원이라고는 요만큼도 없는 절망 끝에 가니 희망이라는 빛이 쪼그리고 앉아 나에게 손을 내밀었다. 그럼에도 영화는 만들어져야 하고, 사람들은 나의 영화를 봐야 한다.

나는 낙관을 보았다. 배고프지 않았다면 시간이 흐르는 줄도 몰랐을 것이다. 특별함은 특별하지 않는 평범한 것에서 나온다. 캄캄한 어둠 속에서 조심스럽게 꺼내는 영사기 속의 나의 밝은 고백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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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15회까지 봤다. 1회 남았다. 2004년부터 뚜벅뚜벅 15회까지 왔다. 연진아 존나, 재밌어. 사라 욕하는 거 들었지. 자는 사람도 벌떡벌떡 일으키게 할 만큼 찰지고 쫙쫙 달라붙는 게.

내내 아름답던 벽도 없이 드디어 폐허에 섰네 박연진,

황량할끄야, 캄캄할끄야, 웰컴해 연진아.

나 아직 1화 남았다. 스포로 나를 채찍질하지 마라. 주위에서 나에게 마지막 회 말하고 싶어서 죽으려고 하는 몇몇 벌레들아 입 다물어.

근데 글로리에 나오는 주인공들 몸들은 왜 그렇게 다 좋은 거야. 이 녀석들 운동하는 모습이 1도 안 나오는데 하루 종일 운동하는 짐종국이나 윤성빈만큼은 아니지만 너무 몸이 좋다.

전재준도 몸 멋지고, 그저 깡 말랐을것만 같은 손명호는 뭔데, 풍만하게만 보였던 최혜정은 또 뭐고. 하도영은 건설회사 대푠데 권투 하는 거 봤지. 물병 내미는 문동은 안아주는 주여정은 달콤 달콤하고.

학폭이 일어났을 때 피해자는 상처받고 폭력이라 하는데 가해자는 즐거움이라 한다. 니체가 신은 죽었다,라고 했는데 왜 그런 말을 했을까. 인간에게는 원래 좋다 와 싫다의 개념만 있었다. 애초에 옳고 그름이 없었다. 내가 좋으면 좋은 것, 싫으면 싫은 것이었다. 내가 좋아하는 것이 타인에 옳은 것인가 그른 것인가 하는 의식 자체가 없었다.

그런데 노예제도가 생기면서 노예의 입장에서는 좋다 싫다가 아니라 주인이 하는 행동이나 말, 의식이 옳고 그름으로 보였다. 니체는 이런 관념이 왜 생겨났을까 의문을 가졌다. 그랬더니 이 모든 것들이 기독교가 생겨나서 옳고 그름이 인간이 판단하게 된 거라고 생각했다. 인간은 옳고 그름을 나눠서는 안 되는 것이다. 왜냐하면 내가 옳은 것이 너에게는 그른 것이 될 수 있으니까.

이 옳고 그름이 기독교 때문에, 하느님이라는 매개를 통해 옳고 그름을 임의로 나누는 것이다. 당하는 쪽은 그른 것이라 여기지만 행하는 쪽은 옳은 것이라 여긴다. 주인은 노예들이 더럽다고 하지만 노예는 소박하다 여겼다. 그래서 니체는 신이 죽으면 이 모든 것이 원점으로 돌아간다고 여겼다.

인간이 인간을 옳고 그르다고 판단해서는 안 되기 때문에. 아무튼 나 아직 1회 남았다. 그나저나 학폭 복수극 감독도 학폭에 연루되어 있다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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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첫 심부름은 일본의 관찰 예능으로 2008년인가, 그때부터 지금까지 해 오고 있는, 보고 있으면 내 마음속에 미미하게 아이로 남아 있으려는 마음을 건드리는 게 느껴진다. 2세에서 5세 정도의 아이에게 생애 첫 심부름을 시키고 잘 하는지 그걸 보는 프로그램이다. 한 편당 짧은 분량은 7분짜리부터 길면 20분 정도 된다.

우리는, 현대인들은 방송과 유튜브 영상으로 너무 자극적인 일들에 노출되어 있고 중독되어 있다. 그리고 점점 더 강한 자극을 원한다. 아, 나 좀 벗어나고 싶은데, 그럴 때 ‘나의 첫 심부름’을 보라.

고작 3세 정도 아이가 심부름을 제대로 하기가 어렵다. 우리나라에도 이런 프로그램이 잠깐 있었는데 우리와 다른 점은 우리나라의 아이들은 이미 방송과 카메라에 적응이 되었고 아빠를 따라 많이 노출이 된 아이들이고, 일본의 아이들은 정말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에 심부름을 하게 되는 일이다. 신밧드의 모험인 것이다.

엄마가 아이에게 심부름을 시키며 이제 엄마랑 같이 갈 수 없다는 말에 이미 울기 시작하는 아이부터, 또 엄마 마다 달래주는 방식도 각각 다르다. 이제 너는 3살이야, 애가 아니잖아, 너는 2살이 아니고 3살이야. 그러면 아이가 그걸 받아들이고 눈빛이 달라지기도 한다. 그래! 할 수 있어!

아이들은 실패를 통해 세상을 알아 간다. 아이들은 심부름을 하다가 길거리에 핀 꽃이 있으면 주저앉아서 꽃을 보기도 하고, 온갖 방법으로 똑바로 가기를 본능적으로 피해 간다. 옆길로 샌다. 어떤 아이는 아빠의 심부름으로 물고기를 들고 오다가 다 쏟기도 하고, 자판기에 동전까지는 넣었는데 버튼을 누르지 못해서 20분 정도를 고민만 하고 있다.

눈에 보이는 모든 것에 호기심을 갖고, 보고 느끼고 반응한다. 그리고 즐거워하기도 하고 무서워하기도 하는데 너무나 사랑스럽다. 그래서 매회 기대감과 함께 또 이번 아이는 어떤 기상천외하고 천진난만함으로 우리를 웃고 울릴까 하게 된다.

10분짜리 2화에서는 엄마 심부름하다가 하지 않고 놀다가 전화로 엄마에게 거짓말하다 걸리기도 하고, 11분짜리 3화에서는 심부름으로 양배추와 양파를 가져오는데 밭에서 뽑아오기도 하는 등 정말 대견한 모습도 있다.

이런 아이들의 관찰 예능이 가능한 것은 이웃 어른들이 전부 이 아이들의 역사를 다 알고 있다는 것이다. 태어났을 때부터 커가는 모습을 알기에 심부름을 오면 아니, 이 귀여운 아이가 벌써 이렇게 심부름을 왔나, 하며 이웃 어른들 모두가 아이들을 바라보고 지켜준다.

도쿄 같은 대도시가 아닌 시골마을이라 가능하다. 어른들은 아이들의 심부름을 적극적으로 대신해 주지는 않는다. 위에서 자판기에 동전을 넣는 것 까지는 성공하지만 손이 닿지 않아 고민하는 아이에게 이웃 어른이 다가가서 직접 버튼을 누르지 않고 아이가 버튼을 누를 수 있게 도움을 준다. 그렇게 이웃 어른들이 아이의 성장을 지켜봐 준다.

아이는 부모만이 키우는 게 아니라 한 사회가 같이 키운다는 말을 아주 잘 알 수 있는 방송이다. 우리 어른들이 해야 하는 일은 아이들을 따뜻하게 지켜봐 주고 아이들의 성장을 재촉하지 않고 기다려주는 것이다. 그 속에는 아이의 실패가 실력으로 변해가는 모습이 있기 때문이다.

이 프로그램을 보면 아이는 어른들의 스승이다,라는 말을 실감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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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국의 고마코



야스나리의 소설 설국을 영상으로 옮긴 여러 버전 중 가장 최근의 2022년 버전이다. 시마무라로 타카하시 잇세이가 나오며, 여리여리 눈 같은 기생에는 나오가 나온다.


눈으로 시작하여 불로 끝나는 이 소설은 너무나 유명한 문장 ‘국경의 긴 터널을 빠져나오자, 눈의 고장이었다’로 시작한다. 영화도 그렇게 시작한다. 그러나 이 문장 보다 이 문장 바로 뒤에 오는 ‘밤의 밑바닥이 하얘졌다’라는 문장에 온 마음을 다 빼앗겨 버릴 것만 같다.


이 소설을 읽어 본 사람은 알겠지만 소설인지 에세인지 넋두린지 플롯이 애매애매하다. 어쩌면 시에 가깝고 그 시를 이어 붙여 아주 긴 산문시 같은 느낌도 있다. 그래서 영화(는 아니지만)도 야스나리의 시적 내레이션이 아주 많이 나온다.


유리창이 거울이 되어 건너편의 여자를 비추고 있었다.

그녀 얼굴 가운데에 등불이 타올랐다.

슬프도록 아름다운 목소리였다.

손가락으로 기억하는 여자와 눈에 등불이 켜진 여자.

믿기 어려울 만큼 깨끗한 인상이었다.


시마무라는 고마코를 보며 이렇게 표현했다. 소설의 내용은 다 알겠지만 세 번 눈의 고장에 있는 여관을 찾아가는 내용으로 고마코와 그녀가 데리고 있는 요코와 시마무라 세 사람이 설국의 중심에 있는 이야기다.


소설은 머릿속으로 설국을 상상하며 읽는 재미가 있고 영화는 운통 눈으로 덮인 설국에서도 눈에 띄게 하얗고 맑은 고마코를 보는 재미가 있다. 고마코는 예전 흑백 영화의 고마코가 더 예쁘다.


야스나리는 자살했는데 아끼는 제자 미시마 유키오가 자살을 한 다음 해에 자살했다. 금각사로 유명한 미시마 유키오는 인간실격의 다자이 오사무를 찾아가서 막 욕을 한 적이 있었다. 당신의 소설은 죽음을 쓴 연약한 소설에 불가할 뿐이야! 라며 다자이 오사무를 폄훼했다. 그때 오사무는 어허 너도 나를 찾아온 걸 보니 나의 글이 좋아서 온 것이다,라며 응수했다.


야스나리는 34년 우리나라 무용가 최승희(당시는 북한의 무용가로 숙명여고를 나와 고전 무용을 현대적으로 표현한 최초의 인물이었는데 57세에 숙청당했다)가 일본 데뷔를 하는데 그때 그녀의 무용을 본 야스나리는 일본 내에서도 신진 여류 무용가 중에서 제 일인자로 꼽았다. 소설 무희에서 최승희에 대해서 다루었다.


유튜브에서 snow country 2022라고 치면 전편을 다 볼 수 있다. 배우 나오의 얼굴은 아오이 유우와 쿠로키 하루를 섞어 놓은 듯한 얼굴이다. 그런 계보를 잇는 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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견자단의 격투가 아닌 견자단의 무공을 보는 것만으로도 좋아할만하다. 김용의 활극의 엄청난 서사를 영상으로 뽑아냈다. 김용이 만들어 낸 수많은 무공을 좀 더 봤더라면 좋았을 법했다.

주성치의 쿵푸허슬은 할리우드에서 촬영팀도 부르고 컴퓨터 그래픽으로 중무장을 해서 엄청난 자본이 들어갔는데 그 많은 자본 중에 반 이상이 영화 속에서 사용하는 무공의 저작권에 들어갔다. 바로 김용이 만들어 낸 무공이었기 때문이다. 주성치는 얼마가 들어가더라도 돼지촌에서 일어나는 캐릭터의 무공을 전부 김용의 무공으로 사용했다.

천룡팔부에서 교봉이 사용하는 휘이이익 황룡십팔장 같은 무공이 더 많이 나와야 좀 더 김용 무협스러웠을 텐데 아쉬웠다. 이제부터 아쉬운 걸 말하자면 영화가 2시간이 넘는데 1시간 정도는, 그래 이렇게 우리가 만나고 헤어지고 그건 오해야 그러니까 아니라고, 같은 내용을 말하기 위해 지루하게 흘러간다.

그러다가 1시간이 지나면서 무협 액션 활극 장면이 나온다. 판타지 액션 활극치고는 타격감이 좋다. 예전 풍운(망했지만 재미있었음 개인적으로)은 타격감은 별로 없고 판타지 액션의 맛만 났다면 이번 교봉전은 견자단이 무술까지 감독을 해서인지 타격감이 좋다. 그러나 수십 명이 화살을 몇 백 개씩 쏘아대는데 몸통만 맞는다. 눈이나 얼굴도 맞아야 하는데 얼굴만 빼고 몸통만 화살을 맞는다 뷁.

천룡팔부는 영화 마지막에서 다음 편을 예고하면서 끝났다. 마지막 장면에서 뭐야? 견자단이 모용박보다 왜 늙어 보이지? 했는데 2편은 교봉의 전 세대, 아버지 세대의 갈등을 예고하는 것이다. 마지막 장면은 견자단이 1인 2역을 했다.

옛 향수를 자극하며 견자단이 한국까지 와서 열심히 홍보를 하며 극장 상영을 감행했지만 상영관 안에 사람은 거의 없거나 별로다. 중국 내에서는 극장 상영을 하지 않고 오티티 서비스로만 하는 걸로 안다. 극장에서 영화를 보는 게 예전만큼 만만찮다. 4디 상영관에서 두 명이서 영화를 보고 팝콘이나 음료를 마시면 5만 원 돈이 날아간다. 그렇기에 영화를 고르는 관객 입장은 신중할 수밖에 없다.

천룡팔부 같은 판타지 무협 영화는 일단 여자들은 썩 좋아하지 않는다. 여자친구가 나는 싫어, 하면 다른 영화를 봐야 한다. 예전의 무협 향수를 가지고 보는 사람이라면 나이가 있는 남자들인데 요즘 나이가 든 남자들은 물가의 고공행진으로 여가에 쓸 돈과 시간은 너무나 중요한 선택사항이다. 나머지가 젊은 남자들인데, 이 계층의 남자들 중 견자단의 진정한 팬이 아니라면 애매하다.

무엇보다 2시간이 너무 길고 1시간이 내용을 설명하기에 힘들다. 시간을 좀 줄이고 액션에 더 과감하게, 그러니까 김용의 원작을 그대로 영상화 시켰으니 김용의 무공이 많이 나오는 액션 활극이라면 오티티로 풀려도 사람들이 더 좋아하지 않을까 싶다. 만고 나의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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