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주에 대하여
김화진 지음 / 문학동네 / 202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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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화진 작가님의 마음 탐구생활. 어긋나는 마음, 감춰진 마음, 들켜버린 마음, 사라지는 마음, 다가오는 마음들. 여러 마음들에 대한 세심한 관찰과 섬세한 묘사를 즐길 수 있는 8편의 단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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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에 다닐 때까지는 가까워진 아이들끼리 주로 불행 배틀을 했던 것 같은데. 누가 더 불행한가를 겨루려는 게 아니어도 조금만 가까워지면, 조금만 더 개인적인 이야기를 할라치면 우리는 모두 가족 카드를 꺼냈다. 가능하면 불행한 쪽으로, 과잉되었던 면도 취해 있던 면도 있었을 것이다. 우리 집이 IMF 때 망해서, 이런 - P231

인트로는 흔했다. 아빠 씨발놈이 술만 처마시면 패서, 하고 시작하는 이야기도 간혹 있었다. 사실 우리 엄마 아빠 별거중이거든, 하고 조심스럽게 내미는 카드도 있었다. 밝고 단순하고 귀엽던 수영도 우리 부모님 이혼했거든, 난 엄마랑 살고, 하는 얘기를 할 때면 항상 조금씩 긴장하는 얼굴이 되곤 했다. 그때의 나는, 우리는그게 중요했다. 자신이 지닌 불행들, 억울하고 슬프고 답답한 일들이 이제 그런 이야기는 거의 듣지 못하게 되었다. 나는 그런 곳에 있다. - P232

선배 저는요…… 사실 사람들이 좋아요. 제가 좋아하는 사람들이, 그리고 그 사람들이 저를 좋아한다는 게 좋아요. 이런 걸 좋아한다는 사실이 너무 촌스럽고 의존적이고 속이 빈 것 같다는 걸알면서도 그래서 그 사실을 들키지 않으려고 애쓰면서도 가끔 이렇게 털어놓고 싶어져요. 저는 누군가를 좋아하고 누군가가 저를좋아하는 일이, 몹시 중요해요. 한없이 그쪽으로 몰두하면 좋지않을 걸 알아서 계속 경계하고 그 외의 것들로 균형을 잡으려고노력해도………… 제가 하는 그 모든 일의 밑바닥에는 끈질기게 그생각이 들러붙어 있어요. 본령처럼요. - P240

그렇게 말하며 현정은 내 어깨에 머리를 기대왔다. 자세가 불편했지만 꾹 참았다. 이렇게 삼삼오오 집으로 돌아가고 있는 이들중 어디선가 또, 비슷하게, 이런 식으로 숨겼던 마음들을 서로서로 이야기하고 있을 거라고 생각하니 어쩐지 기분이 이상했다. 표면과 내면이 같고 싶은데, 그건 정말 잘 안 되는 거구나. 취한 듯 물기어린 현정의 말에 나도 그래, 라고 말하지 못했다. 네가 좋아, 라고도. - P242

저 레즈비언이에요.
어?
뭘 그렇게 놀라요?
아니 나는.....…
현정이 느리게 눈을 깜빡였다.
......샤넬 든 레즈비언은 처음 봐서.
망했다. 망했다고 생각했다. 그 말 한마디로 현정이 나에게 지니고 있던 손톱만큼의 호감, 어쩌면 동료의식, 어쩌면 호기심, 친해지고 싶다는 마음 따위는 한 줌 재가 되었겠지…..

- 쉬운 마음 - P245

모르는 사람에게 새가 예뻐요! 하고 말을 건 것이다. 남자는 기쁜 웃음으로 답했다.
감사해요! 많이들 잘 못 보시던데…
못 본다고요? 그렇게 잘 보이게 얹고 다니면서? 뭐 독특한 모자 정도로 생각할 수도 있긴 하겠네요…… 그런 웅얼거림은 속으로 삼켰다. 속마음을 모두 소리내어 얘기하는 무례한 사람이고 수지 않았다. 남자는 그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이 어깨를 들썩이며 말했다. 남자가 어깨를 들썩이면 남자의 머리에 앉은 새도덩달아 조금 푸드덕 했지만 남자의 머리에 박아넣은 발이 절대로떨어지지 않았다. 남자는 묘기를 부리며 읊는 대사처럼 나에게 말을 건넸다.
자기만의 동물을 가진 사람들은 많잖아요.
나는 그 말에 또 한번, 나답지 않게 질문을 해버렸다.
자기만 보이는 동물을 가진 사람들은요?
있겠죠. 소수여도, 모두 같은 걸 보는 건 아니니까요. - P256

나는 사자의 큰 앞발과 큰 혀를 보고 웃었다. 그루밍이지. 몸을씻는 거지. 다 안다. 사자는 흐흥 하고 나를 따라 웃고는 너도 해줄까? 말하는 듯한 표정과 몸짓을 지어 보였다. 카펫만한 혀가 가까이 와서 나는 으악 아니아니, 하고 몸을 밀어 뒤로 물러났다. 삐치려는 사자를 달래며 나는 말했다.
내가 할게.
그러고는 손으로 (혀로는 아무래도 무리니까) 그루밍하듯 머리끝부터 쓸어내리기 시작했다. 머리를, 어깨를 팔을, 가슴을, 두허벅지와 다리를 먼지 털듯 탁탁 치며 쓸어내고 꾹꾹 눌러 쓰다듬었다. 보이지 않는 것들을 닦아내는 것 같기도 했다. 물 없이 세수하는 모양새로 얼굴도 손으로 만져보았다. 진짜 고양이세수네.
진짜 기분 좋아지네.
한결 낫다. 고맙다.
나의 인사에 사자는 갈기를 한번 부르르 털었다. 아주 풍성하고따뜻한 향이 나는 갈기였다. 나 이제 안 와 나는 어쩐지 사자가그렇게 말할 것을 알고 있었고, 괜찮아, 했다.

- 침묵의 사자 - P287

나주에 대하여』에서 우리가 만난 인물들이 앞서 소개한 연구에 참여했다면 모두 이십 퍼센트에 속하는 사람들이었을 것이다. 그들은 상상할 수 있는 타인의 마음 상태가 다른 사람들보다 많다. 하지만 더 많은 마음을 상상할 수 있다는 것이 더 쉽게 마음을 읽을 수 있다는 뜻은 아니다. 오히려 더 많이 볼 수 있는 사람은 많은 것들을 보기 때문에 더 넓은 상처에 노출된다. 나주에 대하여』에 수록된 여덟 편의 소설은 타인의 마음을 잘 읽는 사람들이자신 앞에 놓인 마음들을 읽기 위해 끊임없이 마음과 마음 사이를오가며 만든 발길의 흔적들로 빼곡하다. 목적지는 점점 많아지고길은 정해져 있지 않으며 시간은 제한되어 있으니 방황은 필연적이다. 방향에 최단 거리는 없다.

해설, 마음 이론 - P294

못생긴 마음들을 쓸 때 나는 이상하게 행복하다. 그것을 솔직하게 쓸 수 있어서, 회피하지 않을 수 있어서 좋다. 나는 대체로 확신과 용기가 없는 채로 살아가는데, 소설을 쓸 때만은 용기가 생긴다. 이런 마음을 써도 돼. 확신도 생긴다. 이렇게 쓸 거야. 소설은 나에게 그런 것을 준다. 지레 포기했던 것들을 가능하게 한다. 나는 언제나 상황에 따라 변하는 나의 무른 질감이 싫었는데, 소설을 쓸 때의 나는 그보다는 조금 단단해지는 것 같다. 나는 소설이 나에게 가져다준 이 단단함을 사랑한다.

- 작가의 말 - P3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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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슨 수술을 해요?
빨리도 물어보네.
그렇게 말하며 영은은 눈을 흘겼다. 퍽 가까워진 기분이 들었다. 그렇지만.… 우리는 왜 서로의 아픈 곳을 보여야만 가까워질 수 있을까? 문득 그런 질문이 떠올랐고 그건 희재의 목소리였다. 이런 거였구나, 희재, 영은은 속으로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저 고막에 종양이 있어요. 수술해서 상한 부위를 다 도려내야 하는데 잘돼도 청력이 반 정도만 돌아오고 잘 안 되면 계속 염증이 두개골을 갉아먹는대요.
…… - P178

누구요?
사진집 낸 사람.
아, 로런 캐머런.

- 척출기 - P181

눈을 동그랗게 만든 나에게 은주는 덧붙였다.
천마총이요. 들어가면 잠깐 경이로운데…돌아나오면 별거 아닌 것처럼 느껴지거든요. 과거를 아껴두려는 현재의 손길이 덕지덕지, 결국 현재만 남아 있어서. 저는 그게 참 위로가 되더라고요. 결국 지금이라는 것이. 그 얄팍한 게.

- 정체기 - P2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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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이별도 마찬가지였다. 전 남자친구가 된 남자친구를 카페에 남겨놓은 채 나와 걸으며 이별의 순간을 꼼꼼히 느껴보았다. 뒤통수가 당기지만 뒤를 돌아보지 않는 마음으로 드라마에서는 이럴 때 꼭 뒤에서 누군가 쫓아와 붙들지만, 그 오랜 학습 때문에 한 번쯤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을까 상상하게 되지만 절대 그럴 일은 없다는 걸 잘 아는 마음으로 단단히 팔짱을 끼고 옷깃을 여미고 바람이 사나운 겨울의 골목을 걸었다. 등이 굽지 않도록 허리를 계속 곧추세우며, 이제 더는 따라올 사람이 없다는 걸 알아가는 마음. 원래도 없었고 정말로 없다고 인정하고 앞을 보고 걷는 마음. 그건 슬픔에 잠겼다가 빠져나오는 일이기도 했고 그런감정에 취해 있으면 으레 조금 행복하기도 했다. 어느 순간마다 자신의 마음을 들여다보는 일은 ‘해본 것‘ 리스트를 적는 일만큼 - P128

재인에게 중요했다. 그리고 그 둘은 떼려야 뗄 수가 없었다. 모르는 마음으로 모르는 것을 선택할 수는 없으므로. - P129

모르겠는 것은 마음이 아니라 몸이었다. 1회 체험권으로 난생 처음 필라테스 수업을 받으며 재인은 선생님의 말을 잘 알아들을 수 없어 당황했다. 지시를 받아도 제대로 수행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이를테면 이런 말들. 척추를 더 뽑으세요, 갈비뼈는 닫아요, 골반을 더 찍어내려요, 옆구리를 구부리지 말고 펴서 늘려요, 아랫배와 허벅지 사이에 근육을 당겨올리세요. 겨드랑이 뒤쪽 옆으로 만져지는 곳에 근육이 있다는 것도 재인은 처음 알았다. 이후 본격적으로 시작된 수업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선생님이 말을 뱉으면 재인이 그 말을 머릿속에서 해석하기 위해 일이 초 정도가 필요했다. 최대한 선생님의 표현 그대로 몸을 움직여보려고 애썼다. 어디 있는지 모를 근육을 머릿속으로 더듬었다. - P129

필라테스 수업을 하면서 은영이 수강생들에게 가장 자주 하는 말은 배에 힘을 주면 다리를 들 수 있어요, 였다. 배에 힘을 준 채 다리를 들라고 하면 수강생들 열이면 여덟이 무릎 관절에 힘을 꽉주었다. 그 힘을 빼라고 하며 은영은 항상 말했다. 배의 힘으로 드는 거예요. 다리에는 힘을 주지 마시고. 그러면 수강생 열의 일곱이 그게 뭔데요? 하는 표정이 되어 있었다. 다리를 다리로 드는 게 아니라 배로 드는 거라고. 그렇게 말하는 스스로가 가끔 우습기도 했다. 자신도 근육이 어떻게 사용되는지 모르던 시절이 있었다. - P130

그때 자신도 똑같은 표정을 지었을 것이었다. 그런 광경을 상상하고 있으면 회사에는 너무 마음 붙이지 말고 대충 다니는 거예요, 라는 말을 들었을 때의 자신이 떠올랐다. 그게 뭔데요? 하고 울상을 지었던 스물여섯의 신은영이. - P131

은영은 애써 평온하려고 노력했다. 그리고 노력하지 말기를 노력했다. 사람을 붙들려는 노력을 하지 말기로 언제나 붙드는 역할은 그만하기로 계속 나오시나요? 하고 묻지 않기 위해 묵묵히 데스크 뒤로 들어가 분주한 척을 했다. 계속 나올 거냐고 물어도 상술처럼 보일 거야. 오해받을 거야. 한 달 동안 수강생들의 수업일정을 정리해놓은 일정표를 의미 없이 훑으며 그런 주문을 걸고 있었다. 일정표에서 고개를 들었을 때 재인은 탈의실에 들어가고 없었다.

- 근육의 모양 - P148

그날도 희재와 샌드위치와 수프를 먹으며 마치 한강이 가로놓여 건널 수 없는 이쪽과 저쪽처럼 다른 서로의 일상을 얘기하고있었다. 여러 이야기가 흘러가다가 좋아하는 일을 열심히 하는 것도 조금 지친다고, 내가 선택한 일이어도, 하고 말할 때 희재는 슬며시 지친 낯빛을 띄워 보였다. 내내 그랬던 것은 아니고 대체로 유머러스하고 활기차다가 그런 이야기를 할 때에 잠깐 지친 기색이 엿보이는 정도였다. 영은은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당연하지, 내가 선택한 일이어도 싫어지고 지치지 근데 뭐가? 요즘은 뭐가 제일 지쳐? 그렇게 물었을 때 희재는 곰곰이 생각하다가 대답했다. - P161

영은은 그런 희재를 두고 저렇게 자기 말을 자기가 반박하고 의심하고 수정하는 것도 희재의 세계에선 흔한 일일까, 하고 생각했다. 사람은 누구나 자그마한 자기의 세계 안에서 살고 서로 다른 분위기와 풍습과 규칙을 지녔지, 하고 생각하기도 했는데 친구를 표본 삼아 그런 문장으로 정리한 것이 사회문화 과목 선생님이 된것 같은 기분이어서 재밌었다. - P1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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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진 편집자님 아니 작가님 첫 소설집 도서관 희망도서 신청해서 받았다. <나주에 대하여>는 작년 신춘문예 당선시 기사로 읽었고 또 읽는다. 민음사 TV 말줄임표 애청했는데 요즘 뜸했네..

나는 완성되지 않는 이야기들이 좋았다. 어떻게든 완성이 되는 형태여야 하겠지만, 완성처럼 보이는 미완성이어야 하겠지만. 이어지지 않는 이야기들이 좋았다. 이어지지 않은 것들은 끊어지지도 않으니까. 완성보다 미완성이 더 오래 지속되는 일일지도 모른다고 믿었다. 종결되지 않은 것들이 내 주변을 행성처럼 돌고 있는 편이 더 행복하다고. 하루의 끝에 이불을 덮고 누워 오늘은 어떤 이름이 붙은 미완의 행성을 떠올려볼까…… 그런 고민을 하고 누운 자리에서 하염없이 하염없이 과거의 사람들을 곱씹고 지금은 어떻게 되었을까 어디에 살까 상상하는 일이 좋았다. 여러 생을 사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그러다가 만화를 그리게 되었다. 사는 생활과 그리는 만화는 비슷했다. 나는 짝사랑이 좋았고 완성하지 않은 여러 짝사랑들을 가지고 있었으며 짝사랑하는 만화를 그렸다. 매듭지어지지 않는 사랑 키스하지 않는 주인공. 댓글은 아우성이었으나 나는 연재한 지 일 년쯤 지나서는 댓글도 잘 보지 않았다. - P12

그런 것들은 너무 많다. 이를테면 천희는 언제나 조금 느렸고 세상물정에 서툴러서 해맑다는 느낌을 주었는데 그 서툶이라는 것이 편의점 신상품을 오래오래 신기해한다든지 그런 걸 꼭 들어올려 360도로 돌려가며 구경하다 꼭 하나씩 떨어뜨려 주변의 걱정을 사곤 하는 것, 우유에 꽂을 빨대 대신 나무젓가락을 챙겨온다든지 커피 하나를 사면서 터무니없이 큰돈을 내거나 거스름돈을 잘못 챙겨도 모르는 수준의 서툶이었다.

- 새 이야기 - P31

그러나 규희는 내내 착각하고 있었다. 말투가 조심스럽다고 파괴력을 지니지 않은 건 아니다. 너만큼 모든 걸 이해하려고 하는 사람이 하필 자신의 애인을 향해 약간, 이해가 안 돼, 라고 말한다는건・・・・ 그리고 내가 그 말뜻을 모를 거라고 생각하는 건, 나에 대한 기만이다. 너를 사랑하고 너를 관찰해온 나에 대한 어처구니없는 기만. - P54

나는 네가 뒤라스의 『연인』은 리스트에 넣고 나보코프의 『롤리타』는 넣지 않아서 너를 좋아했다. 나는 너의 취향을 대부분 신뢰했다. 종종 너무 선하고 아름다운 것들만으로 일상을 구성하고 편집하고자 하는 욕망, 그리고 (의도하는 의도하지 않았든) 스스로의 약한 면에 대해 자주 이야기하고 상처받는 일에 익숙해지지 않는 스스로를 전시하는 것 같다는 느낌을 받을 때도 있었지만 네가 가진 다른 부분에서 느낀 호감이 그 작은 부분들을 상쇄시켰다. - P58

나는 생애 전반에 걸쳐 그런 사람들을 부러워하며 원망했다. 내가 가지지 못한 성향을 가진, 내향 인간들을 항상 좋아하면서도 서운했다. 나는 매번 제안하는 쪽이었기 때문에. 사람을 천천히알아가고 조심스럽게 가까워지고 싶다는 사람들의 팔을 붙들고 같이 시간을 보내자고 흔드는 쪽은 백이면 백 나였다. 그런 나도 좀 병적인가. 어느 모임에서나 그런 유의 사람들을 좋아해 서촌으로 커피 마시러 갈래요? 광화문으로 생선구이 먹으러 갈래요? 하고 물으면 그들은 언제나 사려 깊은 표정으로 아, 네, 좋아요, 언제든 단이씨 편하신 시간에…… 라고 대답해왔다. 거절이 아닌것만으로 마음이 놓였지만 한편으로는 늘 속이 꼬였다. 너희들은 좋겠다. 우아하게 컨펌할 수 있어서 좋겠어. 누군가가 물어보면 음・・・・・・ 하고 고민하고 마침내 네, 라고 대답할 수 있어서 좋겠다. 나도 그런 역할 좀 맡아보고 싶네. - P63

나는 머쓱하다는 표정을 지어내며 너의 말을 듣는다. 기분은 좋았지만 한편으론 무슨 소린가 싶기도 하다. 나도 너처럼 우아하게 가만히 있어도 괜찮고 싶거든. 괜히 아무도 부추기지 않았는데 혼자 침묵에 불안해져 까불지 않고. 나도 누가 웃겨주면 웃고만 있고 싶다고. 내향 인간을 마주하고 속이 꼬인 사람처럼 또 그렇게 혼자 속으로 툴툴거렸다.

- 나주에 대하여 - P65

수언은 늘 솔지의 목소리가 복잡하다고 느꼈다. 고민을 털어놓고 이런저런 의견이나 감상을 말할 때의 목소리에 레이어가 있다고, 곁이 있었다. 수언이 생각하기에 그것은 솔지를 풍부해 보이도록 하는 매력적인 곁이 아니라 쓸데없는 겹이었다. 굳이 분류하자면 스스로 처세를 잘한다고 믿는 사람에게서 느껴지는, 다른 사람이 자신을 어떻게 볼지를 부자연스러울 정도로 의식하는 (그렇지만 자신은 매우 자연스럽다고 믿는) 자의식이 도드라지는 사람의 겹이었다.

- 꿈과 요리 - P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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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곡 2022-12-07 13:3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도 등단작 기사로 읽고 민음사유투브에서 본 작가님인데 글맛이 있더라고요~

햇살과함께 2022-12-08 08:57   좋아요 1 | URL
겉으로 말하지 못하는 내밀한 생각, 갈등을 묘사하는 글이 좋네요~
주말엔 민음사 TV도 다시 찾아봐야겠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