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진 편집자님 아니 작가님 첫 소설집 도서관 희망도서 신청해서 받았다. <나주에 대하여>는 작년 신춘문예 당선시 기사로 읽었고 또 읽는다. 민음사 TV 말줄임표 애청했는데 요즘 뜸했네..
나는 완성되지 않는 이야기들이 좋았다. 어떻게든 완성이 되는 형태여야 하겠지만, 완성처럼 보이는 미완성이어야 하겠지만. 이어지지 않는 이야기들이 좋았다. 이어지지 않은 것들은 끊어지지도 않으니까. 완성보다 미완성이 더 오래 지속되는 일일지도 모른다고 믿었다. 종결되지 않은 것들이 내 주변을 행성처럼 돌고 있는 편이 더 행복하다고. 하루의 끝에 이불을 덮고 누워 오늘은 어떤 이름이 붙은 미완의 행성을 떠올려볼까…… 그런 고민을 하고 누운 자리에서 하염없이 하염없이 과거의 사람들을 곱씹고 지금은 어떻게 되었을까 어디에 살까 상상하는 일이 좋았다. 여러 생을 사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그러다가 만화를 그리게 되었다. 사는 생활과 그리는 만화는 비슷했다. 나는 짝사랑이 좋았고 완성하지 않은 여러 짝사랑들을 가지고 있었으며 짝사랑하는 만화를 그렸다. 매듭지어지지 않는 사랑 키스하지 않는 주인공. 댓글은 아우성이었으나 나는 연재한 지 일 년쯤 지나서는 댓글도 잘 보지 않았다. - P12
그런 것들은 너무 많다. 이를테면 천희는 언제나 조금 느렸고 세상물정에 서툴러서 해맑다는 느낌을 주었는데 그 서툶이라는 것이 편의점 신상품을 오래오래 신기해한다든지 그런 걸 꼭 들어올려 360도로 돌려가며 구경하다 꼭 하나씩 떨어뜨려 주변의 걱정을 사곤 하는 것, 우유에 꽂을 빨대 대신 나무젓가락을 챙겨온다든지 커피 하나를 사면서 터무니없이 큰돈을 내거나 거스름돈을 잘못 챙겨도 모르는 수준의 서툶이었다.
- 새 이야기 - P31
그러나 규희는 내내 착각하고 있었다. 말투가 조심스럽다고 파괴력을 지니지 않은 건 아니다. 너만큼 모든 걸 이해하려고 하는 사람이 하필 자신의 애인을 향해 약간, 이해가 안 돼, 라고 말한다는건・・・・ 그리고 내가 그 말뜻을 모를 거라고 생각하는 건, 나에 대한 기만이다. 너를 사랑하고 너를 관찰해온 나에 대한 어처구니없는 기만. - P54
나는 네가 뒤라스의 『연인』은 리스트에 넣고 나보코프의 『롤리타』는 넣지 않아서 너를 좋아했다. 나는 너의 취향을 대부분 신뢰했다. 종종 너무 선하고 아름다운 것들만으로 일상을 구성하고 편집하고자 하는 욕망, 그리고 (의도하는 의도하지 않았든) 스스로의 약한 면에 대해 자주 이야기하고 상처받는 일에 익숙해지지 않는 스스로를 전시하는 것 같다는 느낌을 받을 때도 있었지만 네가 가진 다른 부분에서 느낀 호감이 그 작은 부분들을 상쇄시켰다. - P58
나는 생애 전반에 걸쳐 그런 사람들을 부러워하며 원망했다. 내가 가지지 못한 성향을 가진, 내향 인간들을 항상 좋아하면서도 서운했다. 나는 매번 제안하는 쪽이었기 때문에. 사람을 천천히알아가고 조심스럽게 가까워지고 싶다는 사람들의 팔을 붙들고 같이 시간을 보내자고 흔드는 쪽은 백이면 백 나였다. 그런 나도 좀 병적인가. 어느 모임에서나 그런 유의 사람들을 좋아해 서촌으로 커피 마시러 갈래요? 광화문으로 생선구이 먹으러 갈래요? 하고 물으면 그들은 언제나 사려 깊은 표정으로 아, 네, 좋아요, 언제든 단이씨 편하신 시간에…… 라고 대답해왔다. 거절이 아닌것만으로 마음이 놓였지만 한편으로는 늘 속이 꼬였다. 너희들은 좋겠다. 우아하게 컨펌할 수 있어서 좋겠어. 누군가가 물어보면 음・・・・・・ 하고 고민하고 마침내 네, 라고 대답할 수 있어서 좋겠다. 나도 그런 역할 좀 맡아보고 싶네. - P63
나는 머쓱하다는 표정을 지어내며 너의 말을 듣는다. 기분은 좋았지만 한편으론 무슨 소린가 싶기도 하다. 나도 너처럼 우아하게 가만히 있어도 괜찮고 싶거든. 괜히 아무도 부추기지 않았는데 혼자 침묵에 불안해져 까불지 않고. 나도 누가 웃겨주면 웃고만 있고 싶다고. 내향 인간을 마주하고 속이 꼬인 사람처럼 또 그렇게 혼자 속으로 툴툴거렸다.
- 나주에 대하여 - P65
수언은 늘 솔지의 목소리가 복잡하다고 느꼈다. 고민을 털어놓고 이런저런 의견이나 감상을 말할 때의 목소리에 레이어가 있다고, 곁이 있었다. 수언이 생각하기에 그것은 솔지를 풍부해 보이도록 하는 매력적인 곁이 아니라 쓸데없는 겹이었다. 굳이 분류하자면 스스로 처세를 잘한다고 믿는 사람에게서 느껴지는, 다른 사람이 자신을 어떻게 볼지를 부자연스러울 정도로 의식하는 (그렇지만 자신은 매우 자연스럽다고 믿는) 자의식이 도드라지는 사람의 겹이었다.
- 꿈과 요리 - P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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